창열사지 서문 지재 민진후 彰烈祠志序 【趾齋 閔鎭厚】 옛날 선조 임진년에 왜적들이 와서 노략질하고 우리나라를 짓밟았는데 관북(關北) 일대가 가장 많은 참상을 입었다. 행재소(行在所)는 멀리 막혀 있고 역적들이 안에서 호응하여 철령(鐵嶺) 밖의 땅이 장차 우리의 소유가 아닐 뻔하였다. 이때에 평사(評事) 농포(農圃) 정공이 두세 동지와 더불어 새처럼 피해 다니는 도중에 분연히 일어나 오합의 무리들 분격시켜 충성을 다하고 의리를 따르게 하며 기이한 꾀를 내어 승리하여 끝내 기세등등한 왜적을 크게 무찔러서 국토를 회복의 공적을 이루었으니, 그 얼마나 장한 일인가. 그러나 관찰사가 공을 시기하여 공적을 거짓으로 날조하였으나 변방이 아득히 멀어서 이를 밝혀 드러낸 자도 있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1백여 년 동안 조정에서 끝내 그 사실을 자세히 알지 못하였고 세상에서도 또한 시비의 진위를 캐는 사람이 없었다.나의 선친 문정공(文貞公)20)께서 효종조에 헌관(憲官)으로서 외직인 경성 통판(鏡城通判)에 보직되었다. 이윽고 경성에 이르러 나이 많은 노인들에게 묻고서 그 모습을 상상을 하고 감개에 젖었는데, 이(李) · 강(姜) · 최(崔) · 지(池) 네 공21)의 묘소가 경성 안에 있다는 것을 듣고 드디어 글을 짓고 찾아가 제사를 지냈다. 그 후에 돌아가신 작은 아버지 문충공(文忠公)22)께서 함경도에 관찰사가 되었는데, 외재(畏齋) 이 상공(相公)23)이 마침 북평사(北評事)로 있어서 그와 함께 상의하여 그 사실을 더 탐문하고서 조정에 뒤미처 포장(褒獎)을 베풀라고 청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 처음 의병을 일으켰던 곳에 사우를 세웠으며 또한 사원 밖에 서당을 세웠으니, 사원의 이름은 창렬(彰烈)이며 서당 이름은 촉룡(燭龍)으로 규모와 배치는 모두 외재가 정해 주었다.외재가 이미 이 일과 관계있는 공사(公私)간의 문자를 모아 한 책으로 편성하여 ≪창렬사지(彰烈祠志)≫라 명명하고서 경성의 제생에게 주었으니, 곧 선왕 병오년(1666년)이었다. 제생이 인하여 병오년 이후의 문자로 자잘한 것과 중요한 것을 빠뜨리지 않고 계속해서 가다듬고 모아서 인쇄하여 서당에 보관하였다. 이에 나에게 글을 보내 고하기를 "선부군 어른께서 제사를 올린 뒤부터 제공이 남긴 공렬이 비로소 세상에 크게 드러나 포상을 받았으며, 제향의 은전은 문충공(文忠公) 어른에 이르러 크게 갖춰졌습니다. 전에 공이 평사가 되었을 때에 일찍이 사우에 절을 올리고 서당을 배회하다가 돌아가서 또 농포(農圃) 및 지헌(持憲)의 후손들에게 벼슬을 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농포의 시호를 청한 글이 공의 손에서 나왔으니 이 사원의 자초지종은 자못 공의 가업과 같은데, 이 뜻이 이루어졌으니 공이 어찌 한 마디 말씀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라 하였다.이에 내가 벌떡 일어나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불초가 몸소 외람되게 선대의 아름다움을 빙자하여 이 일에 이름을 붙이니 참으로 지극한 영광이다. 모든 선비들이 명하는 것을 어찌 감히 글을 잘하지 못한다고 사양하리요."라고 하였다. 일찍이 들으니 소강절이 말하기를 '천하의 일에 죽기는 쉽고 천하의 일을 성취하기는 어렵다.'24)라 하였다. 대개 소강절이 어찌 살신성인을 작은 일이라 여겼겠는가. 대개 그 일을 성공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말하였을 뿐이다. 지금 농포(農圃)와 여러 공이 의로써 규합하고 협력하여 능히 큰 공을 세웠다. 그중에는 싸우다가 후퇴하지 않고서 죽어도 후회하지 않은 자들이 있는데 그들이 그렇게 죽은 것이 일을 성취한 근본이 되니, 이것은 참으로 소강절의 말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며 아니 나아가 그의 말보다 더한 점이 있다.아! 죽는 것과 일을 성공하는 것이 모두 일군(一軍)에 달려 있으니, 이것은 고금에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한 때만 용맹을 세우고 공을 세운 자와 더불어 비교하여 의론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평일 소양이 두텁지 않다면 결코 이 일을 성취할 수 없었을 것이니, 그 학력에 바탕을 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의론하는 자들이 이르기를 '무기를 사용하는 변방에는 문교(文敎)를 베풀 필요가 없다.'라 하면서 선비를 다 내쫓아 군대에 편입하려고 한다. 아! 만약 이러한 주장이 시행된다면 장차 다시 윗사람을 친애하고 수장(首長)을 위하여 죽는 의가 있음을 알지 못할 것이며, 오랑캐의 풍속으로 변하게 것이다. 이것이 과연 변방을 굳게 지키고 환란을 방지하는 도가 되겠는가? 매우 사려 깊지 못한 말이로다.내가 막관(幕官)이 되어 북방에 문화가 크게 시행되어 선비들이 학문에 흥기하니 현송(絃誦)25)의 풍속이 성대하여 볼 만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았는데, 근래에는 전일의 풍화에 비할 것이 아니라고 하니 이것이 어찌 성조(聖朝)에서 문교를 배양한 효과가 아니겠는가? 만일 걱정할 일이 발생하면 반드시 강개하고 격앙하여 나라를 위해 빛을 내어 앞 사람의 풍렬(風烈)을 계승할 자가 있을 것이니, 여러 선비들은 각자 힘써야 할 것이다." 昔在宣廟壬辰, 島夷來寇, 蹂躙我東, 而關北一路, 最被創殘。行朝隔絶, 妖孽內應, 鐵嶺之外, 將不爲我有矣。時則評事農圃鄭公, 與數三同志之士, 奮起鳥竄之中, 激勵烏合之衆, 竭忠仗義, 出奇制勝, 卒能大鏖方張之賊, 以成恢復之功, 何其壯也。然而藩臣忌嫉公, 肆誣捏, 而荒塞遐遠, 又莫有辨暴者, 爾來百餘年, 朝廷訖未詳其事實, 而世亦無是非之眞矣。我先君子文貞公, 當孝廟朝, 以憲官出補鏡城通判。旣至, 詢問故老, 想像感慨, 聞李·姜·崔·池四公之墓在鏡內, 遂操文而往祭之。厥後, 先仲父文忠公, 按節本道, 畏齋李相公適爲北評事, 與之合謀, 益加摭實狀, 請于朝追施褒獎, 仍立祠宇于當日始事之地, 且搆書堂於祠外, 祠曰彰烈, 堂曰燭龍, 規模制置, 皆畏齋之所指授也。畏齋旣又裒集公私文字之有關於此事者, 編成一冊, 名之以《彰烈祠志》, 付之鏡之諸生, 卽先王朝丙午也。諸生仍以丙午以後文字, 無遺細大, 不住修輯, 剞劂而藏之堂, 馳書告不侫曰: "自先大爺奠酹之後, 諸公遺烈, 始得闡明而褒尙, 祀享之典, 至于文忠大爺而大備焉。 向公之爲評事也, 亦嘗拜于祠而徘徊于堂, 歸又請官農圃及持憲之後孫。農圃節惠之狀, 又出於公手, 此祠始末, 殆同公之家業, 玆志之成, 公豈可無一言。" 不侫蹶然而起曰: "夫以不肖身猥藉先徽, 托名於斯役, 誠至榮也。況諸章甫所以命之者, 其安敢以不文辭。嘗聞邵子曰: '死天下事易, 成天下事難。' 夫邵子, 豈以殺身成仁者小之哉。蓋就其成事之難而言之耳。今農圃諸公協力糾義, 克樹大勳, 其中又有戰不旋踵而死無侮者, 而其所以死之者, 又爲成事之本, 是則眞無愧於邵子之言, 而抑有過焉者矣。噫, 死事與成事者, 幷萃於一軍, 此古今之所至難也。其可與一時之立慬立功者, 比論之哉。然非平日所養者厚, 則決不能成就得此事, 其有資於學力, 亦可知已。而今之議者, 乃謂'邊鄙用武之地, 不當施之以文敎', 至欲盡驅衿紳以編行伍。嗚呼, 若使此說得行, 其將不復知有親上死長之義, 而變爲左袵之俗矣。是果有益於固邊圉防患難之道哉。其亦不思之甚矣。 余爲幕官, 已知北方文化大行, 士多興起於學, 絃誦之風, 蔚然可觀, 近來又非前日之化云, 玆豈非聖朝培養之效乎。萬一有虞, 其必有慷慨激昻爲國之光, 以追繼前人之風烈者, 諸章甫, 其各勉之哉。 문정공(文貞公) 민유중(閔維重)을 가리킨다. 이……공 이는 이봉수(李鵬壽)를, 최는 최배천(崔配天), 지는 지달원(池達源), 강은 강문우(姜文佑)를 가리킨다. 이들 네 사람에 대해서는 권4 〈종의인별록(從義人別錄)〉에 자세히 나와 있다. 문충공(文忠公) 민정중(閔鼎重)을 가리킨다. 이 상공(相公) 택당 이식의 아들 이단하(李端夏)를 가리킨다. 천하의……어렵다 《성리대전(性理大全)》 권10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4 관물내편(觀物內篇)7〉에 나온다. 현송(絃誦) 북방의 작은 고을이지만 예악에 의한 교화로 다스려지는 것을 말한다. 현송(絃誦)은 현가와 같은 말이다. 《논어》 〈옹야(雍也)〉에 "자유(子游)가 무성(武城)의 읍재로 있었는데, 공자께서 무성에 가시어 현악에 맞추어 부르는 노랫소리를 들으셨다. 공자께서 빙그레 웃으시며 '닭을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느냐?'고 말씀하시니, 자유가 '예전에 제가 선생님께 듣자오니, 군자(벼슬아치)가 도(道)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고 소인(백성)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가 쉽다고 하셨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공자는 '제자들아, 자유의 말이 옳다. 방금 내가 한 말은 농담이다.' 하셨다.[子游爲武城宰 子之武城 聞絃歌之聲 夫子莞爾而笑曰 割雞焉用牛刀 子游對曰 昔者 偃也聞諸夫子 曰 君子學道則愛人 小人學道則易使也 子曰 二三子 偃之言 是也 前言 戱之耳]"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