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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琴書零落屬誰家鷗鷺依然下晩沙北海樽空車馬㪚故園春色自殘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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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藝歌曉發故園春星月依然吐淸晨厭世歸眞殊不怨何須惟悴苦酸辛 右四首府使李頥嶷然才氣更無雙早抱經綸末施邦龍城政似陶彭澤鏡浦還如孟漢江軒羲日月耕南畒堯舜乾坤臥北牕欲將累筆銘清莭自愧吟詩乏巨杠 古權尚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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階菊【黃蘂蕊重陽對酒堪摘】 叢菊繞階墀秋深黃色滋持觴看不厭愛此傲霜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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園竹【翦草爲園綠竹如簀】 手種園中竹年來已作林此君生正直玉色爽人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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醉贈海客【睦公長欽】茶仙【睦公大欽】 爲吏塵中過一年欲從何處問崔仙今宵幸遇故人飮涼露下池秋滿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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博山【梅山右百步內小山之名也山形嫵媚如畫】 人道茲山好橫空一抹穠朝來看爽氣綠翠似芙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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窓梅【每到花時淸香滿堂】 窓外早梅發黃昏疏影愁淸香如可拾先寄鳳凰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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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대가 어찌 조대보다 높으랴149) 雲臺爭似釣臺高 한나라의 스물여덟 장군150)세상을 뒤덮은 명성 준걸이라 칭해졌네동강 오두막의 일개 낚시하는 늙은이151)맑은 풍모 오랫동안 도도히 흐르네당시 만승의 천자를 한 번 굴복시켰으니탁월한 행적 운대보다 훨씬 높았도다선생은 일찍부터 유문숙152)을 알았으니반평생 속진 속에서 함께 노닐었지천지가 갑자기 진인153)의 손에 들어갔는데선생 집의 좋은 물건은 오직 작은 배 뿐이었네양 갖옷 처사의 몸에서 벗기지 못했고154)곤룡 무늬 천자의 옷에 새롭게 더해졌네같은 침상에서 비록 하룻밤 기쁨 나누었으나155)안개 낀 강 백구와 맺은 약속 이미 굳건했네156)차라리 기산 영수에서 소보와 허유를 배울 지언정157)어찌 조정에서 이윤과 고요158) 같은 신하 되랴돌아와 부춘산에 한가로이 누워새장 떠나버린 신선의 학처럼 지냈네중흥의 장수들이 또한 일시에운수에 응하여 다행히도 풍운과 만났도다159)용 붙잡고 봉황에 붙어 그 기세 당할 수 없었으니160)한나라를 보좌한 공 소하와 조참161)보다 높았네땅을 나누어 제후에 봉하는 것일 관심 없으니태상162)과 홍종으로 어찌 기릴 것 있으랴스물여덟 장군 초상 별자리에 따라 배열하니엄연히 영웅호걸의 진짜 모습 그려냈네오직 나머지 객성163)은 모사할 수 없었으니어찌 화공의 솜씨로 붓 휘두를 것 있으랴걸출한 모습 우뚝하여 지주164)와 같으니깎아지른듯 우뚝 서서 큰 파도와 다투네남궁 운대의 장군들 다 한 수 아래이니예전에 전장을 누비며 부질없이 수고했네몸소 수많은 전쟁 겪은들 끝내 무슨 보탬이랴한 가닥 낚시줄로도 오히려 금도를 부지할 수 있거늘165)동도의 절의166)는 이백 년 동안 이어졌는데업하에서 늙어 죽은 이는 누런 수염의 조조라167)누가 은자에게 공업이 없다 말하랴구정이 약해지면 기러기 털보다도 가볍다오아, 나는 문무(文武) 모두 이루지 못하고평생토록 부질없이 용호도168)만 읽었네지금 기린각에 걸릴 사람 따로 있으니육오169)가 떠받친 바다로 돌아가 낚시질하련다 漢家二十八將軍蓋世之名稱俊髦桐廬一介垂釣翁淸風千古江滔滔當年一屈萬乘主卓軌逈出雲臺高先生早識劉文叔塵埃半世同遊遨乾坤忽入眞人手自家長物惟輕舠羊裘不脫處士身龍袞新加天子袍同床雖做一宵懽白鷗烟波盟已牢寧從箕穎學巢由肯向廊廟爲伊臯歸來高臥富春山有如仙鶴辭籠絛中興諸將亦一時應運幸與風雲遭攀龍附鳳勢莫當佐漢功高蕭與曺分茅裂土等閒事太常洪鍾安足褒圖形四七應列宿儼然幻出眞英豪唯餘客星模不得豈容畵手煩揮毫高標落落砥柱同截然屹立爭洪濤南宮介冑盡下風汗馬從前徒自勞身經百戰竟何補一絲猶可扶金刀東都節義二百年鄴下老死黃鬚操誰言隱者無功業九鼎微爾輕鴻毛嗟余書釰兩無成平生浪讀龍虎鞱今代麒麟別有人歸釣滄溟連六鰲 운대가……높으랴 송나라 범중엄(范仲淹)의 〈조대시(釣臺詩)〉에 나오는 구절로, 공을 세우는 것보다 은거하여 한가로이 지내는 것이 낫다는 의미이다. 운대는 후한(後漢) 때의 공신각(功臣閣) 이름이고, 조대(釣臺)는 후한의 은사 엄광(嚴光)이 낚시하던 곳이다. 한나라의 스물여덟 장군 광무제(光武帝) 때 공을 세운 등우(鄧禹), 오한(吳漢) 등 28명의 공신을 말한다. 후한 명제(後漢明帝) 때 이들의 초상화를 그려, 남궁(南宮)의 운대에 28수(宿)의 순서대로 걸어 놓았다. 《後漢書 馬援列傳》 동강……늙은이 엄광을 가리키는 것으로, 엄광은 광무제의 출사 요청을 뿌리치고 부춘산(富春山)에서 은거하고 동려현(桐廬縣) 칠리탄(七里灘)에서 낚시를 즐기며 일생을 마쳤다. 유문숙(劉文叔) 문숙은 광무제 유수(劉秀)의 자이다. 엄광과 광무제는 어린 시절 함께 공부한 친구 사이였다. 진인(眞人) 진인은 천명을 받아 천하를 통일한 황제를 이르는 말이다. 《사기》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진 시황이 '나는 진인을 사모한다.'라고 하며, 자신을 진인이라 하고 짐이라고 하지 않았다.[始皇曰, 吾慕眞人, 自謂眞人, 不稱朕.]"라는 하였다. 여기서는 왕망(王莽)에게 찬탈당한 한나라를 재건한 광무제를 가리킨다. 양……못했고 광무제가 엄광을 벼슬에 나오게 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광무제가 제위(帝位)에 오른 뒤 엄광은 이름을 바꾸고 숨어 살았는데, 광무제가 엄광을 찾기 위해 온 나라에 명을 내리자 제국(齊國)에서 "어떤 사람이 양 갖옷[羊裘]을 입고 못에서 낚시질합니다."라는 제보가 올라왔다. 《後漢書 嚴光列傳》 같은……나누었으나 광무제가 숨어 사는 엄광을 찾아내어 겨우 만나게 되었는데, 엄광이 광무제와 함께 잠을 자던 중에 광무제의 배에 다리를 올렸다. 그 다음날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객성(客星)이 어좌(御座)를 범하였습니다."라고 하니, 광무제가 웃으면서 "짐이 옛 친구인 엄자릉과 함께 잤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後漢書 嚴光列傳》 안개……굳건했네 백구와 벗하며 강호에서 은거하기로 결심했다는 의미이다. 송나라 육유(陸游)의 시 〈숙흥(夙興)〉 시에 "학의 원망은 누굴 의지해 풀거나, 백구와의 맹세 이미 식었을까 염려되네.[鶴怨憑誰解 鷗盟恐已寒]" 하였다. 기산……지언정 소보(巢父)와 허유(許由)는 요(堯) 임금 때의 고사(高士)로, 기산(箕山)에 들어가 숨어 살았다. 요 임금이 허유를 불러 구주(九州)의 장(長)으로 삼으려고 하자, 허유가 더러운 말을 들었다고 하면서 영수(潁水)의 물에다가 귀를 씻었다. 소보가 영수에 소를 끌고 와서 물을 먹이려고 하다가 허유가 귀를 씻은 이유를 듣고는, 소에게 이 물을 먹이면 소의 입이 더럽혀진다고 하면서 소를 상류로 끌고 올라가 물을 먹였다. 《高士傳 許由》 이윤(伊尹)과 고요(皐陶) 탕(湯)임금의 신하 이윤과 순(舜)임금의 신하 고요의 병칭으로, 재상을 뜻하는 말이다. 풍운과 만났도다 호걸이 훌륭한 임금을 만나 의기투합했다는 의미이다.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의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좇는다.[雲從龍, 風從虎.]"라고 하였다. 용……없었으니 당나라 두보(杜甫)의 〈세마행(洗兵行)〉 시에 나오는 구절로, 제왕을 도와 공업을 이루는 것을 비유한다. 소하와 조참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은 한나라 건국 초기의 명재상이다. 태상(太常) 태상은 해와 달을 그린 왕의 정기(旌旗)로서, 거기에 공신(功臣)의 이름을 새겨 공을 기렸다. 《周禮 夏官司馬 司勳》 객성 엄광을 말한다. 지주 중국 삼협(三峽)의 지주산(砥柱山)을 말한다. 산의 형상이 황하의 세찬 물결에도 굽히지 않고 버티고 서 있으므로, 세상 풍파를 견디며 굳센 지조를 지키는 선비를 비유하는 표현으로 흔히 쓰이다. 한……있거늘 금도(金刀)는 한나라 왕실의 성인 '유(劉)' 자를 파자한 것으로, 엄광이 광무제의 부름을 거절하고 지조를 지킴으로써 한나라 선비들의 기개를 높여 나라를 지탱했다는 의미이다. 세상에서 엄광을 칭송하며 "동강의 한 가닥 낚싯줄이 한나라의 국통을 부지하였다.[桐江一絲, 扶漢九鼎.]"라고 하였다. 《古今源流至論後集 卷6 氣節》 동도의 절의 동도(東都)는 후한(後漢)의 도읍인 낙양(洛陽)이다. 후한 때에는 엄광(嚴光)을 비롯하여, 광무제 때의 주당(周黨), 환제(桓帝) 때의 진번(陳蕃)과 이응(李膺) 등 절의를 지킨 선비들이 있었다. 《後漢書 卷8 孝靈帝紀》 업하에서……조조라 업하(鄴下)는 위(魏)나라의 도읍이다. 누런 수염[黃鬚]은 성품이 강용(剛勇)함을 비유하는 말로, 조조(曹操)의 아들인 조창(曹彰)이 '황수아(黃鬚兒)'라 일컬어진 데서 유래하는데, 여기서는 조조를 일컫는 말로 쓰였다. 《三國志 魏志 任城威王彰傳》 용호도(龍虎鞱) 병법서를 말한다. 주나라 여상(呂尙)이 지은 병서 《육도(六韜)》에 〈용도(龍韜)〉과 〈호도(虎韜)〉라는 편명이 있다. 육오 육오(六鰲)는 바다에 삼신산을 머리로 이고 있다는 여섯 마리의 자라이다. 예로부터 섬이 바다에 떠 있는 것을 큰 자라가 아래에서 떠받치고 있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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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언절구 五言絶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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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호에 대한 의망 額號擬望 창렬, 표충, 정렬.수망(首望)으로 정한다는 비답을 내렸다. 彰烈, 表忠, 旌烈。【以首擬批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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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를 청한 소장 증손 전 주부 정삼(鄭杉) 지음 請諡疏【曾孫前主簿杉】 신이 삼가 아룁니다. 공적을 보답하고 충성을 드러내는 것은 세상을 격려하는 큰 방도이고, 선을 한 가지로 드러내고 이름을 바꾸는 것32)은 죽은 이를 높이는 성대한 은전입니다. 진실로 탁월한 업적을 세워 명성과 공훈이 크게 드러난 자가 있으면 유사(有司)의 의론은 통례에 한정하지 않고 자손의 청은 친족이라는 혐의에 구애되지 않은 것이 또한 고금의 통의입니다.신의 증조부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정문부(鄭文孚)는 일찍이 문예로써 이름을 날렸으며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올랐습니다. 선조 임진년 나라가 어지러울 때를 만나 북평사(北評事)로서 창의하여 군사를 일으켜 토적 국세필(鞠世弼) 등을 죽이고 왜장 정청(淸正)의 군사를 격파하여 관북(關北)을 평정하였는데, 관찰사가 그 공을 가려 공적에 그에 대한 상이 걸맞지 않았으며, 후에 다시 혼조(昏朝, 광해군)를 만나 지방으로 쫓겨났습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곧바로 전주 부윤(全州府尹)에 제수되었으니, 당시 여론은 큰 벼슬에 임용하여야 한다고 했는데 불행히 옥사에 잘못 연루되어 마침내 시안(詩案)으로 곤장을 맞아 죽었으니 이것이 신의 증조부의 대략적인 본말입니다. 그러나 신이 감히 같은 집안사람의 사사로운 말로써 찬양하지 못하고, 대중이 존숭하여 믿을만한 근대 명신(名臣)과 선배들의 말을 대략 들어 그 한두 가지를 증명하기를 청합니다.관북의 적을 토벌한 일은 고 판서(判書) 이식(李植)이 일찍이 북막(北幕)의 평사가 되어 채록한 것이 많았는데 이것이 가장 자세합니다. 그 내용에 "임진년 6월 왜장 청정(淸正)이 승승장구하여 북방을 노략질하니 병마사(兵馬使)의 군대는 궤멸되어 달아났다. 적이 드디어 길주(吉州), 명천(明川), 경성(鏡城), 부령(富寧) 등의 지역에 들어갔으며, 회령에 들어가 왕자를 사로잡아 경성 진보(鎭堡)에 돌아오니 반란의 병사들이 앞 다퉈 수령과 장수를 결박했으므로 온 성이 적을 따랐다. 그러나 평사(評事) 정문부 혼자 탈출하여 유생 두서너 명과 함께 근처의 뭇 사람을 불러 모았는데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현룡(鄭見龍) 등이 다 와서 모여들었다. 여러 사람들이 정문부를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아 역적 국세필(鞠世弼) 등 13명의 목을 베어 여러 진에 조리 돌리고, 명천과 길주 지역으로 진격하는데 계속하여 적을 만나 장덕(長德)에서 크게 짓밟았고 재차 쌍포(雙浦)에서 이겼으며 길주성과 영동책(嶺東柵)을 여러 차례 포위하였고 고개를 넘어 단천군(端川郡)을 구원하였다. 청정(淸正)과 더불어 백탑교(白塔郊)에서 싸워서 앞뒤로 1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고, 북으로 육진(六鎭)을 다니면서 변방 오랑캐를 복종시켰으며 반란한 무리를 찾아 토벌하니, 관북이 마침 평정을 이루게 되었는데 이것은 대개 모두 그의 힘이었다."라고 하였습니다.고 상신(相臣) 민정중(閔鼎重)이 북쪽 지방을 안찰할 때 포상과 추증, 사당을 세워 줄 것을 계청(啓請)하였습니다. 그 내용에 "당시 왜적과 북쪽 오랑캐가 번갈아 난을 일으켜 앞뒤에서 적의 침입을 받았으며 반역하는 주민들도 그 가운데서 일어나 이윽고 역적이 되었다. 왜적은 비록 물러갔으나 역적들은 북쪽 오랑캐를 붙따랐는데, 두세 유생이 일개 종사관(從事官)을 추천하여 적은 군사로 많은 역적을 격파하고 마침내 큰 공을 세워 예전 왕의 선조들이 살던 강토를 오랑캐에게 함락되지 않게 하였다. 그 의열이 이와 같았으나 마침 관찰사가 그 공이 자기에게서 나오지 않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거짓으로 장계를 올려 공을 숨겼으므로 세상에 드러나 정상(旌賞)을 얻지 못하였으니, 지금까지 사람들이 분개하고 원통해 하면서 왕사(王事)가 제대로 완성되지 못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그가 시안으로 억울하게 죽은 일은 선왕조(先王朝) 을사년에 유신(儒臣) 이단하(李端夏)의 상소에서 그 원통함을 변석하였습니다. 그 내용에 "정문부의 충절은 본래 나라가 위태로운 난리에 드러났으며, 광해군 때에 있어서 조금도 더러움에 물든 일이 없었습니다. 반정 뒤에 원수(元帥)로 추천되어 장차 크게 쓰려고 하였는데 박래장(朴來章)의 옥사에 무고를 입고 끌려 들어가서 대질 심문에서 해명하여 무죄가 밝혀졌습니다. 석방하려 할 때에 마침 시안(詩案)을 가지고 깊이 논의하는 대간이 있었습니다. 정문부가 창원 부사(昌原府使)로 있을 때에 지은 〈영사십절(詠史十絶)〉이라는 시를 말하는데, 그 가운데 한 수는 바로 초회왕(楚懷王)의 일을 읊었으니, 그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초 비록 세 집만 남더라도 진을 멸망시키리라 楚雖三戶亦秦亡예언한 남공의 말33) 맞는 것 아니었네. 未必南公說得當무관에 들어가자34) 백성 희망 끊겼는데 一入武關民望絶여린 손자 어이 또 회왕이 됐다더냐.35) 孱孫何事又懷王이는 본래 혼조(昏朝, 광해군) 때에 지은 것으로 마침 이때에 발견되었을 뿐입니다. 게다가 그 시를 반복해 읽어보아도 의심스러운 점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가 원통하게 죽은 것을 나라 사람들이 다 슬퍼하였습니다. 청컨대 신원하시고 벼슬을 추증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그 당시 대신(大臣) 정태화(鄭太和) 등이 입대할 적에 같은 말로 극력 진달하여 신의 조부가 공이 있고 죄가 없으며 억울하게 죽은 곡절을 밝혔고, 또 고 상신(故相臣) 조익(趙翼)이 그 당시 문사낭청(問事郞廳)이 되어 항상 그 원통한 정상을 말한 것을 인용하니, 이에 선왕이 품계를 뛰어 넘어 관작을 추증하고 자손을 녹용(錄用)하도록 명하였습니다. 이보다 앞서 북방의 사람들이 신의 조부를 위하여 의병을 일으킨 지역에 사당을 세워 함께 거의한 사람들을 배향하여 제사를 지냈습니다. 또 사간(司諫) 여성제(呂聖齊)의 계청으로 인하여 특별히 사액하고 치제(致祭)하였습니다.아! 국가에서 신의 조부에게 보답하여 주는 것이 어찌도 이같이 잘 갖추어 주십니까! 이미 원통하게 죽은 정상을 씻어주었으며 작질(爵秩)을 더하였고 그 자손을 녹용하였으며, 이어 그 사당을 정포(旌褒)하여 길이 교화를 세웠습니다. 사방에서 보고 듣는 이들이 모두들 고무되었으니, 조부가 황천에서 이를 안다면 반드시 감읍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시호를 하사하는 한 가지 일만은 아직까지 청을 올리지 않았으니, 이것이 비록 후손들이 잔미한 소치라 할지라도 어찌 성조(聖朝)의 한 가지 미흡한 일이 아니겠습니까?신이 들으니 국조 고사에 실직(實職) 정 2품 이상이라야 시호를 얻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취할 만한 것이 있어서 시호를 내리는 경우는 이 한계에 관계치 않습니다. 도학이 있으면 시호를 내리는데 예를 들면 참봉(參奉) 신 서경덕(徐敬德)의 시호가 '문강(文康)'인 것이 그것이며, 절의가 있으면 시호를 내리는데 예를 들면 제독(提督) 조헌(趙憲)의 시호가 '문렬(文烈)', 초토사(招討使) 고경명(高敬命)의 시호가 '충렬(忠烈)'인 것도 그것입니다. 그리고 최진립(崔震立)36) 같은 경우에는 힘껏 싸우다가 죽었으므로 수사(水使)인데도 시호를 내렸고, 정온(鄭蘊)37)과 김권(金權)38)은 강직하여 감히 간언하고 높은 절조로 윤리를 수립하였으므로 다 참판(參判)인데도 시호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선대 조종(祖宗)께서 선(善)을 포상하는 법이 애초부터 작질의 고하에 구애받지 않은 것입니다.지금 신의 조부가 국가에서 은전으로 시호를 주는 벼슬에서 한 등급이 부족하며 유현을 숭상하고 권장하는 체제에 견주면 비록 차이는 있더라도 국가를 위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창의하여 난리에 항거하였으니, 그 충성과 공훈을 어찌 앞의 두어 사람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세상에서는 간혹 순직하는 것을 중히 여기는데, 예부터 나라를 위하여 죽을 신하가 혹 죽기도 하고 간혹 죽지 않는 것은 다만 한 때의 행과 불행에 관계될 뿐이며, 본래 그 마음은 하나입니다. 만 번 죽을 각오로 한 번 살아나는 것을 돌아보지 않는 생각이 이미 그 처음에 결정이 되었으면 필경 일의 성패와 자신의 존망을 가지고서 그 충성의 경중을 논할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 성명(聖明)께서 신의 조부의 공을 가상히 여기고 신의 조부의 원통함을 불쌍히 여겨 누대 조정에서 포상하는 뜻을 따라 맡은 부서에 급히 명하여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의론하게 하신다면 후진들을 밝게 권장하고 무너진 풍속을 격동시킬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다만 지하에 계신 조부의 영광이 되고 자손의 다행만 되겠습니까?신은 미천한 정성으로 우러러 임금의 위엄을 더럽혔으니 광망하고 참람한 죄는 실상 피할 곳이 없습니다. 신은 황공하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금하지 못하여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비답하기를 "소장을 살펴보고 내용을 다 알았으니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臣伏以酬功顯忠, 勵世之大方, 節惠易名, 崇終之盛典。苟有樹立卓異, 聲烈表著者, 則有司之議, 不限於常格, 子孫之請, 毋拘於親嫌者, 亦古今之通誼也。臣之曾祖父贈左贊成臣文孚, 早以文藝著名, 擢第登仕, 當宣廟壬辰板蕩之際, 以北評事, 倡義起兵, 誅土賊鞠世弼等, 破倭將淸正兵, 關北以定, 而被臬司掩蔽, 功賞未稱, 復値昏亂, 屛斥於外。反正之後, 卽拜全州府尹, 時議大用, 而不幸橫罹獄援, 卒以詩案, 枉死於桁楊, 此臣祖本末大致也。然而臣不敢輒以一家私言, 有所揄揚, 請略擧近代名臣先輩衆所崇信之說, 以證其一二焉。其關北討賊事, 則故判書臣李植, 曾爲評事於北幕, 多所採訪, 最得其詳。有曰: "壬辰六月, 倭將淸正, 長驅寇北, 兵馬使軍潰而走, 賊遂入吉明鏡富等境, 入會寧擄王子, 還趨鏡城鎭堡, 叛兵爭縛守將, 擧城附賊, 而評事鄭文孚獨脫免, 與儒生數輩, 號召近境, 鍾城府使鄭見龍等, 皆來會。衆推文孚爲大將, 斬叛賊鞠世弼等十三人, 以徇諸鎭, 進兵明吉界, 連與賊遌, 大蹂于長德, 再捷于雙浦, 屢圍吉州城及嶺東柵。踰嶺, 捄端川郡, 與淸正戰白塔郊, 前後斬千餘級, 北行六鎭, 招服藩胡, 搜討叛黨, 關北卒就平定, 大抵皆其力也。" 故相臣閔鼎重, 按察北路時, 啓請褒贈立祠。有曰: "當時倭胡交亂, 腹背受敵, 逆民中起, 旣爲叛賊, 倭雖退, 其勢當附於胡, 而數三儒生, 能知推擧一介從事, 以小擊衆, 卒就大功, 使邠岐舊疆, 免淪於左袵, 其義烈如此, 而適被按道之臣, 恥其功不出己, 誣啓掩功, 未獲顯被旌賞, 至今人心憤惋, 以爲王事不可成。" 其詩案枉死事, 則先王朝乙巳年, 儒臣李端夏疏, 卞其冤。有曰: "文孚忠節, 素著於危亂之際, 其在昏朝, 少無染汚之事。反正後被元帥薦, 將大用, 而朴來章之獄, 適被誣引, 置對辨明, 將見釋, 而適又臺諫有以詩案深論者。文孚曾爲昌原府使時, 有〈咏史十絶〉, 其一卽楚懷王事, 而其詩曰: '楚雖三戶亦秦亡, 未必南公說得當。一入武關民望絶, 孱孫何事又懷王。' 此本昏朝時所作, 而適發於是時耳。又況反復其詩意, 未見其有可疑者。其死之冤, 國人莫不傷之, 請伸冤贈爵。" 其時, 大臣鄭太和等, 因登對, 同辭極陳以明臣祖有功無罪枉死委折, 且引故相臣趙翼, 爲其時問事郞廳, 常言其冤狀, 先王命超品贈職, 錄用子孫。先是北人, 爲臣祖立祠於起義之地, 而配以同事之人, 相與俎豆之。又因司諫呂聖齊啓請, 特令賜額致祭。嗚呼, 國家之於臣祖, 所以酬報之者, 何其備歟。旣已雪其冤枉矣, 加其爵秩矣, 錄其子孫矣, 又從而旌其祠而永樹風聲矣。四方觀聽, 莫不聳動, 九原有知, 其必感泣, 而惟是贈諡一事, 迄未上請, 此雖後嗣殘微之致, 而亦豈非聖朝之一闕事也。臣聞國朝故事, 實職正二品以上, 乃得諡。然有所取而諡之者, 亦不係此限, 有道學則諡, 若參奉臣徐敬德之諡文康, 是也。有節義則諡, 若提督臣趙憲之諡文烈, 招討使臣高敬命之諡忠烈, 是也。至如崔震立之力戰死事, 則以水使而諡焉, 鄭蘊金權之勁直敢言, 抗節扶倫, 則皆以參判而諡焉。然則祖宗彰善之規, 初不拘於爵秩之高下也。今臣祖於國典例諡之秩, 未準一階, 視儒賢崇奬之體, 雖或差異, 而乃若爲國忘身, 倡義抗難, 則其精忠勳烈, 豈必多讓於前數人哉。世或以死事爲重, 而自古徇國之臣, 或死或不死者, 特係一時之幸與不幸耳, 其心則一也。夫萬死不顧一生之計, 已決於其初, 則畢竟事之成敗, 身之存亡, 蓋有不必論其輕重矣。倘蒙聖明嘉臣祖之功, 愍臣祖之冤, 追累朝奬餙之意, 亟命所司, 議易名之典, 則足以昭勸方來, 激勵頹俗, 豈獨泉塗之榮耀, 子孫之私幸而已哉。臣以螻蟻微懇, 仰瀆宸嚴, 狂僭之罪, 實無所逃。臣不勝惶隕感激, 涕泣祈懇之至, 謹昧死以聞。答曰: "省疏具悉疏辭, 令該曹稟處。" 선을……것 '절혜(節惠)'는 《예기》 〈표기(表記)〉에 "선왕이 시호로써 이름을 높여 주고 사적을 절취(節取)하여 그 선(善)을 전일하게 한다.[先王諡以尊名 節以壹惠]"라고 하였으니, 시호를 뜻한다. '역명(易名)'은 이름을 바꿔 시호를 내린다는 뜻으로, 춘추 시대 위(衛)나라 대부(大夫)인 공숙문자(公叔文子)가 졸(卒)하자 그의 아들이 임금에게 시호를 청하기를 "세월이 흘러 장사 지낼 때가 되었으니 이름을 바꿀 것을 청합니다.[日月有時 將葬矣 請所以易名者]"라고 하였다. 예언한 남공의 말 남공(南公)은 초나라의 도사(道士)로 음양에 밝은 자였다고 한다. 삼호(三戶)에 대해서는 세 가구[戶]라는 설, 지명(地名)이라는 설, 초나라의 삼대성(三大姓)이라는 세 가지의 설이 있는데, 번역은 세 가구라는 설에 따랐다. 남공이 예언한 말은 《사기(史記)》 권7에 "초수삼호 망진필초야[楚雖三戶 亡秦必楚也]"라 하였다. 무관에 들어가자 전국 시대 초 회왕(楚懷王)의 고사. 초 회왕은 위왕(威王)의 아들로 이름은 웅괴(熊槐). 진 소왕(秦昭王)이 혼인을 약속하고 만나기를 희망하자 굴원(屈原)의 간언을 듣지 않고 무관에 들어갔는데, 진나라 군대에 의해 강제로 진나라로 끌려갔다 끝내 진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죽었다. 《사기(史記)》 권40. 여린……됐다더냐 전국 시대 초 회왕의 손자인 심(心)을 말한다. 진말(秦末)에 범증(范增)이 초나라의 후손을 세워야 민심을 얻을 수 있다고 항양(項梁)을 설득하자 초 회왕의 손자인 심을 찾아 회왕으로 세웠다. 후에 항적(項籍)에게 피살되었다. 《사기(史記)》 권7. 최진립 1568~1636.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건(士建), 호는 잠와(潛窩),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우고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서생포에 침입한 왜적을 무찌르고 도산 싸움에서 전공을 세웠다. 병자호란 때 용인에서 싸우다 전사했다. 정온 1569~1641.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고고자(鼓鼓子),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614년 부사직(副司直)으로 재임하던 중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죽음이 부당함을 상소하였고, 가해자인 강화부사 정항(鄭沆)의 참수(斬首)를 주장하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 제주도 대정(大靜)에서 10년간 위리안치 유배생활을 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이조참판으로서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 결국 청나라에 굴복하는 화의가 이루어지자 칼로 자신의 배를 찌르며 자결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모든 관직을 사직하고 향촌으로 낙향하였다. 김권 1549~1622.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이중(而中), 호는 졸탄(拙灘),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1617년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강계 ·무안 등지에 유배, 인목대비의 서궁(西宮) 유폐설을 듣고 식음을 전폐 ·자결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예조의 회계 禮曹回啓 전 주부(主簿) 정삼(鄭杉)의 상소를 계목(啓目)에 의거하여 증거 서류를 덧붙여 계하(啓下)하였습니다. 전 주부 정삼의 이 상소 내용을 보면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신의 증조부 정문부(鄭文孚)가 일찍이 문예로써 이름을 날렸으며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올랐습니다. 선조 임진년 나라가 어지러울 때를 만나 북평사(北評事)로서 창의하여 군사를 일으켜 토적 국세필(鞠世弼) 등을 죽이고 왜장 정청(淸正)의 군사를 격파하여 관북(關北)을 평정하였는데, 관찰사가 그 공을 가려 공적에 그에 대한 포상이 걸맞지 않았습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곧바로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제수되었으니, 당시 여론은 큰 벼슬에 임용하여야 한다고 했는데 불행히 옥사에 끌려 들여가 마침내 시안(詩案)으로 곤장을 맞아 억울하게 죽었으니 이것이 신의 증조부 본말의 대략입니다. 그 후에 판서(判書) 신 이식(李植)이 일찍이 북막(北幕)의 평사가 되어 채록한 것이 많았으며, 고 상신(相臣) 민정중(閔鼎重)이 북쪽 지방을 안찰할 때 장려하여 벼슬을 추증하고 사당을 세워 줄 것을 계청(啓請)하였습니다. 을사년 이르러 유신(儒臣) 이단하(李端夏)의 상소에서 그 원통함을 변석하였습니다. 그 내용에 '정문부의 충절은 본래 나라가 위태로운 난리에 드러났습니다.'라고 하니, 선왕이 품계를 뛰어 넘어 관작을 추증하고 자손을 녹용(錄用)하도록 명하였습니다. 또 사간(司諫) 여성제(呂聖齊)의 계청으로 인하여 특별히 사액하고 치제(致祭)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만 시호를 하사하는 한 가지 일만은 아직까지 청하여 올리지 않았으니,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빨리 해당 관청에 명하시여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의논케 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정문부의 충절에 대해 그 자손이 찬양하는 말은 비록 믿을 수 없더라도 선배 명신들이 혹은 그 의열을 아뢰고 혹은 그 억울하게 죽은 것을 따졌으며, 혹은 증직을 주고 그 자손을 채용할 것을 청하였으며 또한 사원을 세워 사액하고 치제하도록 하였으니 그 공렬과 절의는 다시 논할 것이 없습니다. 나라의 고사에 실직(實職) 정 2품 이상이라야 이에 시호를 얻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러나 취할 만한 것이 있어서 시호를 내리는 자에게는 이 한계에 구애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절의가 있으면 시호를 내렸으니, 제독(提督) 신 조헌(趙憲)과 초토사(招討使) 신 고경명(高敬命)의 시호가 '문렬(文烈)', '충렬(忠烈)'인 것이 그것입니다.세상에서는 간혹 순직 여부를 중히 여기는데, 예부터 나라를 위하여 죽을 신하가 혹 죽기도 하고 간혹 죽지 않는 것은 다만 한 때의 행과 불행에 관계될 뿐이며, 본래 그 마음은 하나입니다. 마땅히 소장의 내용에 의하여 특별히 아름다운 시호를 내려 어지러운 풍속을 격려하게 하소서. 이 일은 은전(恩典)에 관계되는 것이기에 신의 예조에서 감히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으니, 성상께서 재가하여 주심이 어떻습니까?계하(啓下)하기를 "회계(回啓)한대로 시행하라"라고 하였다.계미년 10월 7일. 前主簿鄭杉上疏, 據啓目粘連啓下是白有亦。觀此前主簿鄭杉疏辭, 則以爲"臣之曾祖父贈左贊成文孚, 早以文藝著名, 擢第登仕。當宣廟壬辰板蕩之際, 以北評事倡義起兵, 誅土賊鞠世弼等, 破倭將淸正兵, 關北以定, 被臬司掩蔽, 功賞未稱。逮仁廟反正之後, 卽拜全州府尹, 時議大用, 而不幸橫罹獄援, 卒以詩案冤死於桁楊, 此臣祖本末大致也。在後判書臣李植, 曾爲評事於北幕, 多所採訪, 故相臣閔鼎重, 按察北路時, 啓請褒贈立祠。及至乙巳年, 儒臣李端夏疏, 卞其冤。有曰: '文孚忠節, 素著於危亂之際,' 先王命超品贈職, 錄用其子孫。又因司諫呂聖齊啓請, 特令贈額致祭, 而惟是贈諡一事, 迄未上請, 伏願聖明亟命所司, 議易名之典亦爲白有臥乎所。" 文孚忠節, 以其子孫揄揚之言, 雖不可取信, 而前輩名臣, 或陳其義烈, 或訟其枉死, 或請贈秩錄其子孫, 又令立祠而贈額致祭, 其功烈節義, 無復可議者矣。國家故事, 實職正二品以上, 乃合得諡, 然有所取而諡之者, 亦不拘此限, 有節義則諡, 若提督臣趙憲·招討使臣高敬命之諡文烈忠烈, 是也。世或以死事爲重, 而自古徇國之士, 或死或不死者, 特係一時之幸與不幸, 其心則一也。所當依疏辭, 特贈嘉諡, 以激頹波是白乎矣。事係恩典, 臣曹不敢擅便, 上裁何如。啓依回啓施行。癸未十月初七日。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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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부조39)의 은전을 청하는 소장 5대손 정근이 짓다. 請不祧典疏 五代孫瑾 삼가 아룁니다. 신이 삼가 생각하건대,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는 예전(禮典)은 그 한계가 정해져 있어서 봉사 대수가 다하면 마땅히 조천(祧遷)40)해야 합니다. 그러나 진실로 도덕이 있는 사람과 공렬이 있는 신하는 백 대라도 반드시 제사를 지내니, 혹 임금의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혹 문묘의 성무(聖廡)에 올라 제사를 받고 혹은 사원에서 높이 받들면서 또한 그 자손으로 하여금 영세토록 신주를 옮기지 않게 합니다. 이것이 전형이 되어 국가의 법전에 기록되어 있으니 신이 다만 이에 대해 감회가 없지 않기에 외람되고 주제 넘는다는 비난을 피하지 않고 만 번 죽을 것을 무릅쓰고서 전하 앞에서 우러러 호소하오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신의 5대조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충의공(忠毅公) 정문부(鄭文孚)의 정충(貞忠)과 대절(大節), 장렬(壯烈)과 높은 공로는 문렬공(文烈公) 조헌(趙憲)과 충렬공 고경명(高敬命)과 더불어 백중(伯仲)이 되어 조금도 다름이 없는데, 더구나 신의 조상에게는 더욱 위대한 면이 있습니다. 선조 때 불행하게 국가에 난리가 많았는데, 관북 지방이 더욱 독한 화를 입었습니다. 토적(土賊)이 왜적을 안내하여 두 왕자 및 두서너 대신을 사로잡아 보내어 왜적에게 아첨을 하였습니다. 이때 북쪽 오랑캐들이 또 이어 유린하니 철령 이북은 국가의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신의 조상이 한낱 평사(評事)로서 군사 6천 명을 모집하여 먼저 역적을 죽이고 힘을 합쳐 여러 곳에서 싸워 오랑캐를 추격하여 내쫓았으며 그 위엄으로 말갈을 항복시켰으니, 열흘에서 한 달 사이에 22개 고을을 항복받았습니다. 이것은 실로 만력 이래 선무 제장(宣武諸將)들이 하지 못한 바입니다.예를 들면, 장평(長坪)에서 승리할 때 싸우며 흘린 피가 강을 벌겋게 물들였고 쌍포(雙浦)에서 승리할 때 흉갑(兇甲)들이 별처럼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그리고 길주성(吉州城)을 겹겹으로 포위하였을 때와 단천(端川)에서 크게 쳐부수었을 때는 시체가 길에 가득하고 왜적의 우두머리가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놀랐습니다. 백탑교(白塔郊)에서 크게 무찌를 때에는 화살을 비 오듯 쏘아대어 한 척의 수레도 돌아가지 못하였으니, 비록 용맹한 청정(淸正)이라도 아침밥을 해먹고 겨를도 없이 시체를 태우고 갑옷을 끌며 밤을 틈타 멀리 달아났는데, 앞뒤로 머리를 베어 바친 것이 수천 급(級)에 가까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왜적의 침입을 받은 이래로 이것이 제일 큰 승리'라고 칭송하였습니다.그의 정충(貞忠)과 장렬(壯烈)이 저같이 탁월하며, 국사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사람의 귀와 눈에 분명합니다. 또한 선배들의 공론으로 살펴보건대, 고 대제학(大提學) 이식(李植)의 〈북관지(北關誌)〉에 이르기를 "국세필(鞠世弼) 등 반란을 일으킨 괴수 세 역적을 통쾌하게 죽였으며, 청정(淸正)을 크게 토벌하여 다섯 차례에 걸쳐 크게 승리하여 다섯 차례 승리하여 예전 왕의 선조들이 살던 강토를 오랑캐에게 함락되지 않게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고 상신(相臣) 민정중(閔鼎重)이 북관을 안찰할 때에 계(啓)를 올리기를 "왜적과 북쪽 오랑캐가 함께 난을 일으켜 앞뒤에서 적의 침입을 받았는데, 매번 싸우면 반드시 승리해서 강토를 수복하였으니 마땅히 백 대에 제향을 받아야 마땅합니다."라고 하니, 드디어 그 사당에 사액을 내리게 되었습니다.고 상신(相臣) 이단하(李端夏)가 말하기를 "북관은 윤관(尹瓘)이 처음으로 구성(九城)을 둔 이후로 3백 년 뒤에 몽고부에 편입되었습니다. 김종서(金宗瑞)가 그 땅을 회복하여 드디어 육진을 설치한 뒤로 160여 년 만에 또다시 왜적의 손에 들어갔는데 정문부가 크게 일어나 깨끗이 쓸어버려 그 땅을 회복하였으니, 이 세 사람의 공이 같습니다."라고 하고서, 인하여 윤관의 사당에 함께 제향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고 상신(相臣) 정태화(鄭太和)가 말하기를 "먼저 역적 국세필을 참수하여 목을 내 건 다음에 조리돌렸으며 왜장 청정(淸正)을 토벌하고 그 군현을 회복하였습니다."라고 하면서 품계를 뛰어 넘어 증직을 청하니 이상(貳相)의 증직이 내려지게 되었습니다.고 판서(判書) 민진후(閔鎭厚)가 그의 시장(諡狀)을 지으면서 "적을 요리하기를 신처럼 하니 사람들이 그에게 쓰이기를 즐거워하였다. 수천 명의 고립된 군사로써 백 만의 강한 왜적을 물리쳤으니 비록 옛 명장들이라도 어찌 이보다 더 뛰어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선정신(先正臣)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사원을 세워야 되는지의 여부를 묻는 하문(下問)에 힘써지어야 한다고 찬성하면서 "일찍이 임진년 격문을 읽고 그의 사람됨을 상상하였는데, 옛날에 '큰 난을 항쟁한 자는 제사를 지낸다.'41)는 문장이 있으니, 의병을 처음 일으킨 땅에서 그를 제사지내는 것을 누가 불가하다고 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또 《선묘보감(宣廟寶鑑)》에서 북관의 난을 평정한 일에 대해 대강(大綱)을 세우고 조목(條目)을 펴니 논설이 매우 자세합니다. 그 가운데 이르기를 "대개 관북을 평정한 것은 다 정문부의 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숙종 계사년(1713년, 숙종 39)에 특지로서 시호의 은전을 내렸는데 시호를 '충의(忠毅)'라 하였으니, 이것은 온 나라의 공론이며 또한 조정에서 신의 조상이 세상에 드문 공렬을 세운 것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미 선무 일등 녹권에 들어갔고 또한 창렬사(彰烈祀)에서 백 대에 제향을 받으니, 조정에서 그 공에 융숭하게 보답한 뜻이 지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삼가 생각해보건대, 신하 가운데 국가에 큰 공로가 있는 자는 반드시 제사지내되 영세토록 조천(祧遷)하지 않는 것은 실로 교화를 수립하고 후대를 권장하는 방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헌, 고경명 같은 충렬은 국가에서 그 봉사 대수가 다하여도 조천하지 않도록 특별히 허락하였으니 즉 신의 조부에게도 반드시 아끼지 않았을 것인데, 다만 후손이 불초한 탓으로 조정에 알리지 못한 까닭입니다. 지난 갑진년 무민공(武愍公) 황진(黃璡)42)은 그 자손이 글월을 올린 것을 인하여 훈신이 예로서 특별히 명하여 조천하지 않도록 명을 받았으니, 이것은 성명(聖明)께서 이미 시행한 최근의 예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천지 부모인 전하께서는 신의 조부 정문부의 공렬이 저처럼 성대하니, 조헌 · 고경명 · 황진의 예에 의거하여 봉사 대수가 다하여도 조천하지 말 것을 특별히 명하여 주십시오. 삼가 천은을 입어 이처럼 아룁니다.전교하기를 "해조로 하여금 회계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伏以臣竊伏念國家祀典, 厥有定限, 親盡當祧, 而苟有道德之人, 勳烈之臣, 百世必祀, 則或配享於廟庭, 或躋侑於聖廡, 或崇奉於祠院, 而亦使其後子孫, 永世不祧。此爲勻石, 載垂邦典, 臣獨不無區區所懷, 玆不避猥越之誅, 冒萬死, 仰籲於法駕之前, 以冀垂察焉。 臣之五代祖贈左贊成忠毅公臣文孚之貞忠大節, 壯烈巍勳, 與文烈公臣趙憲忠烈公臣高敬命, 相爲伯仲, 小無異同, 而況且臣祖則尤有大焉。粵在宣廟朝, 不幸國家多難, 關北一方, 偏被毒禍, 土賊嚮導, 擄送兩王子及二三大臣, 以媚于賊。于時藩胡, 又從而蹂躙, 鐵嶺以北, 非國家之有, 而臣祖以一介評事, 募兵六千, 先斬叛民, 戮力轉戰, 擊逐卉服, 威伏靺鞨, 旬月之間, 盡服卄二州, 此實萬曆以來, 宣武諸將之所未有也。若其長坪之捷, 戰血川赤, 雙浦之勝, 兇甲星遁, 吉城之重圍, 端川之大鏖, 僵尸載路, 賊酋破膽。至於白塔郊之大衂, 射矢如雨, 隻輪不返, 雖以淸正之驍雄, 亦不暇朝炊, 焚尸曳甲, 乘夜遠遁, 前後獻馘, 殆近數千級, 世皆稱'被倭以來, 此爲第一勝着。' 其貞忠壯烈, 如彼卓越, 昭載國乘, 照人耳目。又以先輩公議觀之, 故大提學臣李植〈北關誌〉曰: "快斬鞠世弼叛魁三賊, 大討淸正, 五次快捷, 使邠岐舊疆, 免淪於左袵。" 故相臣閔鼎重按北關也, 啓曰: "倭胡交亂, 腹背受賊, 每戰必捷, 收復舊土, 宜受百世之享。" 遂致宣額於其祠。故相臣李端夏曰: "北關, 自尹瓘始置九城, 而三百年後, 入於蒙古部。金宗瑞復其地, 遂置六鎭, 百有六十餘年, 又入於倭奴, 鄭文孚大擧廓淸, 又復其地, 三人之功, 一也。" 仍請幷享於尹瓘之廟。故相臣鄭太和曰: "先斬鞠賊, 梟首以徇, 聲討淸酋, 復其郡縣。" 亦請超品贈職, 而至贈貳相。故判書臣閔鎭厚, 作其諡狀曰: "料敵如神, 人樂爲用, 以數千孤軍, 却百萬强寇, 雖古名將, 何以過此。" 先正臣文正公宋時烈, 仍立祠當否之問, 力贊以成, 謂以'嘗讀壬辰檄文, 想像其爲人, 古有抗大難則祀之之文, 俎豆於首事之地, 夫孰曰不可。' 又於宣廟寶鑑, 以北關靖亂事, 立綱敍目, 論說甚詳, 而亦曰: "大抵平定關北, 皆鄭文孚之力也。" 肅廟朝癸巳, 以特旨降易名之典而諡曰: '忠毅', 此皆擧國之公論, 而亦有朝家之表章臣祖有此不世之功烈, 旣入於宣武一等之券, 又享於彰烈百世之祀, 則朝家崇報之意, 可謂至矣。第伏念人臣之有大勳勞於國家者, 必祀之不祧永世者, 實出於樹風聲勸來世之方。故如趙憲高敬命之忠烈, 特許其親盡不祧, 則亦於臣祖, 不必靳持, 而只緣後孫之不肖, 未及登聞於朝家之故也。向於甲辰, 武愍公臣黃璡, 因其子孫之上言, 以勳臣例, 特命不祧, 此則聖明已行之近例也。伏乞天地父母, 特命臣祖文孚之勳烈, 如彼其盛, 一依趙憲高敬命黃璡之例, 特命親盡不祧事。伏蒙天恩謹啓。傳曰: "令該曹回啓事。" 부조 묘제(廟制)에 있어서 일정한 대수(代數)가 지나면 조(祧)라고 하여 그 신주(神主)를 묘(廟)로 옮기는 것인데, 공덕이 특출한 인물의 신주는 이를 특별히 취급하여 대수가 지나도 천조하지 않는다. 이를 부조 또는 불천(不遷)이라고 한다. 조천 묘(家廟)에서 제사를 받드는 대수(代數)가 다한 신주(神主)를 살아 있는 자손 중의 장방(長房)으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 큰……지낸다 《예기》 〈제법(祭法)〉에 보이는 말이다. 황진 1542~1606. 본관은 창원(昌原)이고 자는 경미(景美), 호는 서담(西潭)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목사(義州牧使)로 있으면서 몽진(蒙塵)한 선조를 잘 보필하여 그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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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조의 회계 禮曹回啓 진주 유학 정근(鄭瑾)이 올린 글을 보니, 그의 오대조 충의공(忠毅公) 정문부(鄭文孚)가 봉사(奉祀) 대수가 다하여도 조천(祧薦)하지 말아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정문부는 임진란을 당하여 평사(評事)로서 병사를 모집하여 힘을 다해 역적을 베고 왜적과 북쪽 오랑캐를 섬멸하니, 관북(關北) 지역이 그의 공에 의해 평정되었습니다. 그 높은 공과 장렬은 조헌(趙憲), 고경명(高敬命), 황진(黃璡), 이복남(李福男)43)과 마찬가지인데 이 네 사람은 이미 조천하자 않는 성대한 은전을 입었으니, 이제 그의 자손들이 이를 인용하여 청을 하니 반드시 지나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천조하지 않는 것은 사체(事體)가 중대하여 신의 예조에서 감히 마음대로 처리할 바가 아니니 대신과 의론하여 품처(稟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전교하기를 "윤허한다."라고 하였다.예조에서 아뢰기를 "진주 유학 정근이 글월을 올린 것으로 인하여 회계(回啓)하였는데, 충의공 정문부의 조천하지 않는 일을 대신과 논의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국가에서 훈신에게 맹세를 거듭하여 영화스럽게 하고 조천하지 않고 제향하게 하는 것은 나라의 은전입니다. 임진년 섬나라 오랑캐의 전란에 반민(叛民)들이 안에서 응하여 변방의 진(鎭)이 모두 함락되었는데, 충의공 정문부가 이때 평사(評事)로서 창의하여 군사를 모집한 후 여러 적을 베어 죽였습니다. 그의 공에 힘입어 관북이 평정되어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이를 말하니, 그의 공로가 진실로 큽니다. 다만 생각해보면, 조천하지 않는 것과 훈봉(勳封)하는 것은 그가 죽은 뒤의 일입니다. 비록 그의 사후에 장려와 추증이 여러 차례 더해졌더라 하더라도 공신의 집안은 영원히 지키겠다는 약속44)을 당시에 언급하지 않았으니, 지금 요행의 문이 점차 열리고 전장(典章)이 날로 실추되는 때를 당하여 상법(常法) 밖의 사항을 경솔하게 허락하는 것은 아마 신중하지 않은 듯하니, 삼가 전하께서 재결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좌의정 이성원(李性源)이 말하기를 "예전 임진왜란에 충의공 정문부가 일개 평사로서 창의하여 토적을 섬멸하고 왜구를 격파하여 관북 지역으로 하여금 평안하게 보존케 하였으니, 충성은 진실로 숭상할 만하며 공로도 또한 견주기 드뭅니다. 생전에 훈봉(勳封)이 미치지 않은 것은 비록 무슨 연유인지 알 수 없으나, 그의 충정과 공훈은 마땅히 특별하게 보답을 받아야 합니다. 전례를 끌어대어 조천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청한 것은 지나치지 않은 것 같으니, 삼가 전하께서 재결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우의정 채제공(蔡濟恭)이 말하기를 "조천하지 않는 것은 공로가 있는 신하를 대접하는 것입니다. 임진란을 당하여 충의공 정문부가 토적을 쳐서 없애고 왜적과 북쪽 오랑캐를 짓밟아 북관의 강토를 보전하였으니, 이보다 큰 공이 없습니다. 조천하지 않는 것을 비록 자손이 호소한다고 하여 쉽게 허락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충의공처럼 생전에 훈봉하지 않았는데 아울러 조천하지 않는 은전마저 아낀다면 아마도 큰 공을 보답하는 의리가 아닙니다. 삼가 전하께서 재결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영중추부사 정존겸(鄭存謙), 판부사 서명선(徐命善), 영돈녕 홍낙성(洪樂性), 판부사 김욱(金煜), 판부사 이존협(李存協) 등은 병이 나서 의견을 모으지 못하였는데, 대신이 의론이 이와 같으니 주상께서 재결하여 주심이 어떻겠습니까.전교하기를 "다수의 의론을 따라서 행하도록 판하(判下)한다. 계하안의 내용을 받들어 살펴 조천하지 않도록 하는 뜻을 본가에 알려서 시행하게 하고, 관문(關文)의 내용을 베껴 보내어 정근(鄭瑾)의 집에 전해 주어 그들로 하여금 관문의 내용에 의거하여 시행하도록 전해 주고, 일의 진행상황을 곧바로 급히 달려가서 알리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觀此晉州幼學鄭瑾上言, 則以其五代祖忠毅公文孚, 親盡不祧爲請矣。文孚當壬辰之亂, 以評事募兵, 戮力斬叛賊, 殲倭胡, 關北一路, 賴以平定。其巍勳壯烈, 與趙憲·高敬命·黃璡·李福男一般, 而四人旣蒙不祧之盛典, 則今其子孫, 援此爲請, 不必爲濫, 而不祧體重, 非臣曹所敢擅便, 議大臣稟處何如。傳曰: "允。" 曹啓曰: "因晉州幼學鄭瑾上言回啓, 以忠毅公鄭文孚不祧事, 議大臣。" 領議政臣金致仁, 以爲'國家之於勳臣, 申盟而榮之, 不祧而享之, 國典也。壬辰島夷之亂, 叛民內應, 邊鎭俱陷, 而忠毅公鄭文孚, 時以評事, 倡義募兵, 剪殲諸賊, 關北賴平, 人到于今言之, 其績固大矣。第念不祧勳封, 後事也。雖其褒贈累加於身後, 帶礪不及於當時, 則當此倖門漸開, 典章日墜之時, 法外輕許, 恐合難愼, 伏惟上裁云云。' 左議政李性源, 以爲'昔壬辰亂, 忠毅公鄭文孚, 以一評事倡義, 殲土賊破倭寇, 使關北一路, 晏然獲全, 忠固可尙, 功亦罕比。生前勳封之不及, 雖未知何故, 而以忠以功, 宜蒙殊異之報, 援例不祧之請, 似不至踰濫, 伏惟上裁云云。' 右議政臣蔡濟恭, 以爲'不祧, 所以待勳臣也。當壬辰亂, 忠毅公鄭文孚之勦滅土賊, 蹴踏倭胡, 保有北關疆土, 功莫大焉。不祧, 雖不可以子孫呼籲而容易許之, 若忠毅公以其生不勳封, 幷與不祧之典而靳之, 則恐非酬報大勳之義, 伏惟上裁云云。' 領中樞府事臣鄭存謙·判府事徐命善·領敦令洪樂性·判府事金煜·判府事李存恊, 病不收議, 大臣之議如此, 上裁何如。傳曰: "從多議施行事判下。啓下內辭意奉審不祧之意, 本家知委施行事, 以關辭謄送, 傳給於鄭瑾之家, 使之依關辭施行傳給, 形止卽爲馳報宜當者。" 이복남 ?~1597. 본관은 우계(羽溪)로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1597년(선조 30)에 전라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재임 시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남원성에서 일본군과 싸우던 중 김경로(金敬老), 신호(申浩)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영원히 지키겠다는 약속 '대려(帶礪)'는 황하가 허리띠처럼 좁아지고 태산이 숫돌처럼 작게 되도록 공신의 집안을 영원히 보호해 주겠다는 맹세로서 산려하대(山礪河帶)의 준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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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사의 사액을 청하는 계사 순찰사 이시원45) 靑巖祠請額啓辭 巡察使李是遠 임진왜란 때 충성과 지략이 있는 선비들이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와 더불어 거의하여 난을 평정하였으니 그들의 공이 매우 위대하였으니, 모두 사당을 세워 사액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함흥(咸興) 13의사, 경성(鏡城) 7의사, 회령(會寧) 4의사 같은 이들을 모두 사당의 배향을 허락하였으나, 유독 부령(富寧)의 9의사에게만은 비록 의병을 일으킨 청암(靑巖)에 두어 칸 사우를 세웠으되, 사액의 은전이 누락되어 부령 선비들이 천여 리를 발을 싸매고 신의 영(營)에 달려와 호소하니 자못 해마다 의례적인 일이 되었습니다.그러므로 고 상신(相臣) 문충공(文忠公) 이단하(李端夏)가 편찬한 《경성창렬사지(鏡城彰烈祠誌)》를 상고하여 보니, 의사들의 창의한 사적이 그 안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고 중신(重臣) 이식(李植)으로부터 고 상신(相臣) 문충공(文忠公) 민정중(閔鼎重)에 이르기까지 명현들이 충절을 아뢰고 포상하기 위해 조정에 아뢰었던 사적까지 캐물어서 조금도 빠트린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의사들에게 추증되고 배향되는 은전은 일시에 모두 거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앞뒤로 수백 년 동안 차례로 포상하고 추증하였는데, 아직까지도 청암사만 은전을 베푸는 문장에서 빠져 있으니 참으로 조정의 은전에 흠이 됩니다.이 지역은 왕의 교화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나 이 일은 충의를 격려하는 데 관계되는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묘당에 하문하여 함흥, 경성, 회령 등에 이미 시행한 예에 한결같이 의거하여 한꺼번에 포상하고 장려하는 것이 성조의 교화를 수립하는 정사에 합당할 것입니다.임금이 말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기미 정월 초7일 비국 당상(備局堂上)이 입시하였을 때에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이 아뢰기를 "임진년 왜적의 우두머리가 북방에 들어올 때 평사 정문부의 공이 진실로 위대합니다. 그와 함께 맨 먼저 거사하여 능히 적을 쳐서 섬멸한 공을 이룬 자는 함흥에 13의사, 경성에 7의사, 회령에 4의사인데, 모두 공훈으로 배향하는 은전을 받았으나 오직 부령 9의사만 누락되었습니다. 고 상신(相臣) 이단하(李端夏)가 지은 《경성창렬사지》 중에 그 일의 기록이 매우 자세하며, 고 상신(相臣) 민정중(閔鼎重)이 본도를 순시하며 교화를 펼 때 조정에 올려 알렸으나, 지금까지 은전을 베풀 겨를이 없어서 북쪽 사람들이 억울하게 여긴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연전 도신의 장계(狀啓)와 어사의 단자(單子)에서 또다시 그 근거를 많이 대었으니, 부령에 소재한 청암사에 특별히 사액을 베풀어 주고 의사 중에 그 생전의 직명이 있고 없음에 따라 포상하고 추증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재결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주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하라."라고 하였다. 壬辰倭變時, 忠智之士, 與鄭評事文孚, 出義靖亂, 其功甚偉, 俱蒙建祠賜額之恩。如咸興十三義士, 鏡城七義士, 會寧四義士, 幷許俎豆之享, 而獨富寧九義士, 雖有數間祠宇於靑巖擧義之所, 而見漏於宣額, 富寧士人, 千里裹足, 來訴臣營, 殆成歲課。故取考故相臣文忠公李端夏所編《鏡城彰烈祠誌》, 則義士倡義事蹟, 昭載於其中。始自故重臣文靖公李植, 至於故相臣文忠公閔鼎重, 名賢所以啓忠褒節, 採詢以登聞者, 殆無餘蘊。而許多義士, 賜贈腏享之典, 非一時所可倂擧, 則首尾數百年, 次第褒贈, 而尙有靑巖闕文, 誠爲欠典。地是王化之遐遠, 事係忠義之激勸, 伏乞下詢廟堂, 一依咸興鏡城會寧已行之例, 一體褒獎, 恐合於聖朝樹風之政。上曰: "令廟堂稟處事。" 己未正月初七日, 備局堂上入侍時, 領議政金左根啓曰: "壬辰倭酋之入北也, 評事鄭文孚之功, 誠奇偉。與同首事, 克成勦殲之功者, 咸興十三義士, 鏡城之七義士, 會寧之四義士, 擧蒙勳腏之典, 而惟富寧九義士, 獨見漏焉。故相臣李端夏所撰鏡城彰烈祠誌中, 載其事甚詳。故相臣閔鼎重, 旬宣本道時, 至有登聞, 而迨今未遑, 爲北士齎鬱久矣。年前道啓繡單, 又甚根據, 富寧所在靑巖祠, 特宣恩額, 義士中隨其生前職名有無, 以爲獎贈之地, 恐好矣。伏惟上裁。" 上曰: "依爲之。" 이시원 1790~1866. 본관은 전주, 자는 사직(子直), 호는 사기(沙磯),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이건창(李建昌)의 조부이다. 철종 때 함경도 관찰사를 지냈다. 향리인 강화도에서 지내던 중 1866년 프랑스군이 침입하자(병인양요) 관원들은 모두 달아나고 대적할 방도가 없으므로, 울분을 참지 못해 아우 지원(止遠)과 함께 음독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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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5 卷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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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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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급을 더하는 교서 加資敎書 北道儒生, 陳疏頌功, 遂命加資。知製敎徐渻。 북도의 유생이 소장을 올려 공을 칭송하니, 마침내 자급을 더하라고 명하였다. 지제교 서성1)이 짓다.왕은 다음과 같이 말하노라.홀로 삭방의 공을 맡아오랫동안 적개의 절개를 나타내었네.특별히 아경의 녹질을 올려후한 상의 은전을 베푸노라.이 어찌 개인적인 영광이랴실로 공공의 의론이라네.오직 경은 쇠를 씹을 강건함에다칼날을 밟을 수 있는 용맹을 지녔어라.오경을 읽어 뱃속에 간직하고백보 밖에서 활을 맞출 재주 지녔으니2)문무를 아울러 갖춘 재주로다.육척의 몸이지만만 사내 중에 으뜸이니3)술자리에서 적을 물리칠 지략이라네.4)일찍이 서기로 선발되었으며예전에 종사관의 옷을 입었어라.젊어서는 막부에서어찌 다만 말에 기대어 격문만 지었으랴.5)군중의 한 범중엄으로적의 간담 서늘하게 만든 위엄6)을 다퉈 자랑하였네.동토가 큰 어려움이 닥칠 때북쪽 지방이 더욱 참담하였네.사졸들의 시체 풀밭에 나뒹굴어혹 벌레가 되거나 모래가 되었어라.백성들은 파도처럼 달아나서오랑캐에 투항하지 않으면 왜적에게 투항했네.조정의 위엄 있는 명령이 오래 끊기고풍패7)의 성읍이 이미 쇠잔해졌네.비록 지혜로운 자라도 또한 어찌할 수 없으니계책이 장차 어디에서 나올까.오직 충신은 어지러운 세상에 알 수 있으니경만 홀로 분연이 일어나의병을 일으켜 통솔하여먼저 반란의 역적을 죽였네.위태로워 망설이는 즈음에 군사들과 맹세하니모두 지극한 충정 품었으며모든 것이 불타버린 뒤에 군대를 편성하니믿는 바는 다만 의리라네.한 번 북 울리니 흉도들이 패주하고세 번 싸우니 강한 왜구도 달아났어라.어찌 다만 한 지역 사민만이오랑캐 됨을 면하였으리.나라를 중흥한 업적에실로 너의 공이 많구나.한결같은 절개 위험할 때 이미 밝게 드러났으니빼어난 공적은 종정에 새길 수 있어라.8)한나라 기린각에 초상을 그릴 만한데도리어 순국한 사람을 빠트렸구나.진나라 궁문에 글을 매달으니9)마땅히 허물을 기록한 객이 있으리.상을 내림이 참으로 상전에 부족하니공훈을 생각하매 실로 마음에 부끄럽도다.공훈은 이미 지난 날에 마쳤으니이미 어찌할 수 없는데사실이 비로소 오늘날에 드러났으니무엇으로 내릴 것인가.이에 경에게 가선대부를 더하는데관직은 전과 같게 하노라.오호라! 큰 공이 유생에서 나왔으니옛날 사람과 아름다움을 나란히 할 것이라.얽은 뿌리 자르는 날카로운 검으로10)처음부터 끝까지 충성을 다하였어라.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노니마땅히 내 뜻을 잘 알리라. 王若曰獨任朔方功久著敵愾之節特陞亞卿秩庸施懋賞之恩斯豈私榮實惟公議惟卿嚼鐵之剛蹈刃其勇五經腹百步技文武備具之才六尺身萬夫雄尊俎折衝之略早應書記之選昔着從事之衫幕府少年豈但倚馬之檄軍中一范爭誇破膽之威逮東土之大艱惟北路爲尤慘士卒塗草或爲蟲而爲沙衆庶奔波不投胡則投賊朝廷之威令久斷豐沛之城邑已殘雖智者亦無如何計將安出惟忱臣可識板蕩卿獨奮然倡率義徒先誅亂賊誓師於危疑之際咸懷至誠成軍於灰燼之餘所恃惟義一鼓而兇徒敗折三戰而勁寇遁逃豈徒一路士民免爲左袵其於中興功業實多爾勞一節已昭於險夷殊勳可銘於鍾鼎圖形漢閣反遺殉國之人懸書晉門宜有志過之客行賞誠歉於常典念功實慚於中心勳旣勘於往時已無及矣事始著於今日何以與之兹加卿嘉善大夫職如故於戲大功出儒生可幷美於古昔盤根別利器庶輸忠於始終故兹敎示想宜知悉 서성 1558~1631.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현기(玄紀), 호는 약봉(藥峯),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1592년 병조좌랑(兵曹佐郞)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扈從), 호소사(號召使) 황정욱(黃廷彧)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함북(咸北)에 이르러 두 왕자와 황정욱 등이 포로가 되자 혼자 탈출했다. 왕명에 따라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러 병조정랑(兵曹正郞), 직강(直講)이 되고 명장(明將) 유정(劉綎)을 접대했다. 1613년(광해군 5) 계축화옥(癸丑禍獄)에 연루, 11년간 유배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형조판서에 복직,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과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는 각각 왕을 호종했다. 백보……지녔으니 《사기(史記)》 권4 〈주본기(周本紀)〉에 "초(楚)나라에 사는 양유기(養由基)라는 사람은 활을 잘 쏘는 사람이다. 백 보(步) 떨어진 곳에 있는 버들잎에 화살을 쏘면 백 번 발사에 백 번을 맞힌다."라고 하였다. 육척의……으뜸이니 이백(李白)이 〈여한형주서(與韓荊州書)〉에서 자신을 소개하여 "비록 신장은 7척이 채 못 되지만 마음은 만 사내에 으뜸입니다.[雖長不滿七尺 而心雄萬夫]"라고 하였다 술자리에서……지략이었네 굳이 군대를 동원하여 전쟁터에서 싸우지 않고 외교상의 담판으로 상대방을 꺾어 승리를 취한다는 뜻이다. '尊俎'는 술과 도마의 사이라는 뜻으로 연회석을 가리키며, '折衝'은 적군의 전차를 물리쳐 전투에서 승리한다는 의미로, 衝은 전투용 수레의 일종이다. 제(齊)나라의 명상인 안영(晏嬰)이 진(晉)나라에서 정탐하러 온 사신의 의도적인 결례를 연회석상에서 지적하며 결연한 모습을 보이자, 사신은 진나라로 돌아가 제나라를 공격할 수 없다고 보고하였다. 공자(孔子)는 이 말을 듣고 "잔치 자리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천 리 밖의 일을 안다는 것은 晏子(晏嬰)를 이른 것이다. 절충했다고 이를 만하다.[夫不出于尊俎之間而知千里之外 其晏子之謂也 可謂折衝矣]"라고 하였다. 《晏子春秋 권5 雜上 第5》 말에……지었으랴 《세설신어(世說新語)》 〈문학(文學)〉에 "환선무(桓宣武)가 북방을 정벌할 때 원호(袁虎)가 문책을 당하여 해임되었다. 그때 마침 격문(檄文)이 필요하여 원굉(袁宏)을 불러다가 말에 기대어 쓰도록 하니, 원굉이 손을 멈추지 않고 써 내려가 일곱 장을 썼는데, 매우 볼만하였다."라고 하였다. 군중의……위엄 북송(北宋) 시대의 명신(名臣) 범중엄(范仲淹)이 일찍이 지연주(知延州)로 자청하여 나가서 장수를 선발하고 군졸을 사열하여 밤낮으로 훈련시키고, 또 여러 장수들에게 군졸들을 정예(精銳)하게 잘 기르도록 엄격히 단속하였다. 이에 오랑캐인 하인(夏人)들이 그 소문을 듣고 서로 경계하여 말하기를 "연주는 마음에 두지 말아야 한다. 지금 소범 노자의 가슴속에는 절로 수만의 갑병이 들어 있어, 우리가 속일 수 있는 대범 노자에 비할 바가 아니다.[毋以延州爲意 今小范老子 胸中自有數萬甲兵 不比大范老子可欺也]"라고 했다. 풍패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처음 군사를 일으킨 곳으로서, 후대에 제왕(帝王)의 고향을 일컫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史記 卷8》 빼어난……있어라 종정은 상고 시대의 보기(寶器)로, 그 표면에 공신들의 이름이나 공적을 새겨 넣은 데서 조정에 올라 부귀를 누린다는 뜻을 지니게 되었다. 두보(杜甫)의 시 〈청명(淸明)〉에 "종정과 산림의 생활이 각기 천성이 있으니, 탁주와 거친 밥 먹으며 살아도 아랑곳하지 않노라.[鍾鼎山林各天性, 濁醪麤飯任吾年.]"라고 하였다. 진나라……매달으니 춘추 시대 때 개자추(介子推)가 진(晉)나라 문공(文公)을 따라 망명(亡命)하면서 공을 세우고서도 나중에 제대로 보답을 받지 못하자, 그를 따르던 사람이 이에 대해 원망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궁문에 걸어놓았다. 일명 〈사실지조가(士失志操歌)〉라고도 하는데, 즉 "용이 하늘에 오르려고 하매, 다섯 마리 뱀이 보필하였네. 용이 이미 구름을 타고 날매, 네 마리 뱀은 각각 그 집에 들어갔네. 한 마리 뱀만은 홀로 원망하나니, 끝내 머물러 있을 곳이 없구나.[龍欲上天 五蛇爲輔 龍已升雲 四蛇各入其宇 一蛇獨怨 終不見處所]"라고 하였다. 《史記 卷39 晉世家》 얽은……검으로 어려운 처지나 임무를 만나 처리하는 과정에서 뛰어난 재주가 발휘된다는 뜻이다. 《후한서(後漢書)》 권58 〈우후열전(虞詡列傳)〉에 "쉬운 것을 구하지 않고 어려운 일을 피하지 않는 것이 신하의 직분이니, 이리저리 감긴 뿌리가 뒤엉킨 곳을 만나지 않으면 어떻게 예리한 기구를 구별하겠는가.[志不求易 事不避難 臣之職也 不遇盤根錯節 何以別利器]"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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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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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창렬사 사액 치제문 彰烈祠賜額致祭文 知製敎李 지제교 이갑이 짓다유세차 정미년 초하루가 임신인 10월 6일 정축일에 국왕은 신 함경도 도사(咸鏡道都事) 정화재(鄭華齊)를 보내어 졸(卒)한 증좌찬성(左贊成) 정문부(鄭文孚)의 영전에 유제11)한다.생각건대 영령은충성을 다하여 적을 막아내니신하의 절조에 마땅한 바로다.의를 포상하고 어짊을 드러냄은왕의 교화 이룰 기틀이라.역대로 서로 따랐으니법으로 삼아 본받아야 하네.나라의 운이 예전 막혔을 때병들어 난리가 일어났네.오랑캐12)들이 날뛰어전쟁이 북방에 연달았어라.삼령의 요새를 잃으니큰 길 들어오듯 쉬었네.흉도의 칼날이 닿는 곳에흙이 무너지듯 지탱하기 어려웠어라.전투에 대적할 보루가 없었고방비에 올라갈 성가퀴도 없었네.반민들이 난을 틈 타역적을 따르니 인륜이 무너졌어라.수령을 포박하고성과 해자를 점령하였네.왜적과 결탁하여 원군이 되니형세는 암컷, 수컷 같아라.왕자를 포로로 잡아적에게 주어 인질로 삼았네.두려움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니백성들은 서로 불안에 떨었어라.십 수 일 성을 포위하니남아는 한 사람도 없네.새와 쥐처럼 숨어 목숨을 아끼니의를 취한 자13)가 누구인가.경은 당시 좌막으로서죽어 편안하기로 마음먹었네.몸을 탈출하여 걸식하다가비분강개하다가 계책을 내었어라.문무의 재략을 갖췄으니많은 사람의 추대를 받았네.이에 네 선비가 있어협심하여 서로 따랐네.모두 먼 변방 사람이나준걸의 자태 지녔어라.한 번 소리치니 호응하여드디어 의병의 기치 올렸네.원근이 메아리처럼 응하여감격하여 눈물을 흘렸어라.단에 올라 피를 마시고하늘을 가리켜 맹세하였네.먼저 역적 놈을 토벌하였는데외로운 군대가 위험에 처하였어라.기회를 엿보아 대응하고창졸간에 기이한 꾀를 내었네.괴수의 머리를 베니심복과 부하들이 패하여 달아났어라.군대의 명성이 마침내 떨쳐지니사기가 꺾이지 않았네.기세를 타 용맹을 떨쳐눈앞에 걸리적거리는 왜놈이 없어라.크게 무찔러 전승을 거두고서도또 싸우고 또 추격하였네.장평과 쌍포에적의 시체가 겹쳐 쌓였으니이때부터 관북을왜적이 다시는 넘보지 않았어라.우리 임금이 일어난 땅을 수복하고우리 변방을 온전히 지켰네.승첩을 행궁에 알리니한편 기쁘고 한편 슬프도다.공이 높으나 시기를 당하여관찰사에게 밉보였네.장계에 사실대로 기록하지 않으니임금이 이에 기만을 당하였어라.상이 공로에 걸맞지 않아지위가 오히려 낮았네.스스로 자랑하기를 부끄러워하여안색이나 말로 드러내지 않았어라.중도에 혼탁한 조정을 만났지만옥에 허물이 없었네.말년에 형벌에 걸려드니운명이로다, 시 때문이 아니어라.원통한 기운 사라지지 않았으니검을 파낼 것14)을 기약할 수 있었네.충혼이 울결한 채로세월이 얼마나 흘렀는가.사명을 받은 신하15)가채록한 것을 아뢰니그 공이 처음으로 드러나서내가 이에 알게 되었도다.그 충성을 매우 아름답게 여겨정려와 포상이 어찌 지체되겠는가.아! 위대한 업적이라도그 드러나고 감춰짐은 시대와 관계되네.세운 공적이 뛰어나니마땅히 보답을 받아야 하네.그 억울함을 풀어주어높은 벼슬로써 추증하노라.함께 거의한 이들에게도 미쳐서성대한 은전을 빠트리지 말라.의병을 일으킨 곳에영령을 모시는 사원이 있으니참여하여 도운 이들을 아울러 제향하며예를 어그러트리지 말라.한 당에 의인과 열사아름다운 이름을 함께 드리웠어라.희생과 단술을 올리고화려한 편액을 문미에 내걸었네.일이 먼 변방에 빛나리니백 대에 의식을 거행할 것이라.밝은 영령이 있다면부디 와서 흠향하기를. 惟靈竭忠悍賊臣節攸宜褒義象賢王化所基歷代相因可鑑可師邦運昔否瘼矣亂離卉服陸梁兵連北陲三嶺失險入若康逵凶鋒所觸土崩難支戰無對壘守無登陴叛民乘亂從逆滅彝縛執長吏據有城池結賊爲援勢成雄雌俘獲王子與賊爲貲有恇有餌民胥危疑環城十數無一男兒鳥竄偸生取熊者誰卿時佐幕志在死綏脫身行乞慷慨猷爲文武之略爲衆所推爰有四士協心相隨俱是遐荒俊髦之姿同聲一呼遂擧義旗遠近響應感奮涕洟登壇揷血指天爲辭先討逆竪孤軍冒危相機周旋倉卒出奇巨魁授首腹敗枝披軍聲遂振士氣不衰乘勢賈勇目無島夷大鏖全勝且戰且追長坪雙浦枕藉賊屍從玆關北賊不復窺復我邠岐全我藩維捷聞行宮載喜載悲功高見猜忤于臬司狀不以實天聽是欺賞不稱勞名位猶卑恥自矜伐不見色辭中遭昏濁玉絶瑕疵末罹栫棘命也非詩冤氛未銷掘釰可期忠魂鬱結歲月幾移原隰之臣奏厥詢諮厥功始彰予乃得知篤嘉其忠旌賞詎遲嗟哉偉績顯晦關時所樹卓異宜受報施伸其幽枉贈以崇資推及同事盛典靡遺倡義之地妥靈有祠參佐幷享禮秩無虧一堂義烈芳名共垂牲醴是奠華扁揭楣事光荒裔百世攸儀不昧者存庶幾格思 유제 국왕이 신하가 죽었을 때 사람을 보내 지내게 하는 제사이다. 오랑캐 '훼복(卉服)'은 풀옷을 입는다는 뜻으로, 미개인 특히 섬 오랑캐를 가리킨다. 《한서(漢書)》 지리지 상(地理志上)에 "도이훼복(島夷卉服)"이라 하였다. 의를 취한 자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어물도 내가 원하는 바요 곰 발바닥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을진댄 어물을 버리고 곰 발바닥을 취하겠다. 삶도 내가 원하는 바요 의(義)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을진댄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魚我所欲也, 熊掌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라고 하였다. 곰발바닥은 의를 비유하였다. 검을 파낼 것 《진서(晉書)》 권36 〈장화열전(張華列傳)〉에 "천문(天文)의 오(吳)나라 지역에 해당하는 두성(斗星)과 우성(牛星) 사이에 자기(紫氣)가 항상 있었으므로 장화가 천문에 밝은 뇌환(雷煥)에게 그 까닭을 물으니, 뇌환이 말하기를, '보검의 정기가 하늘에 닿은 것입니다.' 하였다. 그곳이 어디냐고 물으니, 풍성(豐城)이라고 하였다. 이에 장화가 뇌환을 풍성 영(豐城令)으로 삼아서 비밀리에 그 보검을 찾게 하였다. 뇌환이 풍성에 도착하여 옥사(獄舍)의 바닥을 파니 그곳에 빛이 서린 상자 하나가 나왔고 그 상자 속에 쌍검(雙劍)이 들어 있었는데 하나는 용천(龍泉), 하나는 태아(太阿)라 쓰여 있었다. 그 뒤로 두성과 우성 사이에 비치는 자색 기운이 없어졌다."라고 하였다. 땅에 묻힌 검을 파낸 것처럼 후대에 그의 명성이 드러날 것이라는 말이다. 사명을 받은 신하 '원습(原隰)'은 사신을 가는 신하의 노정(路程)을 가리키는데, 《시경》 〈황황자화(皇皇者華)〉에 "반짝반짝 빛나는 꽃들이여, 저 언덕이랑 진펄에 피었네. 부지런히 달리는 사신 행차는, 행여 못 미칠까 염려하도다. 내가 탄 말은 망아지인데, 여섯 가닥 고삐가 매끈하도다. 이리저리 채찍질하여 달려서, 두루 찾아서 자문을 하도다.[皇皇者華, 于彼原隰. 駪駪征夫, 每懷靡及. 我馬維駒, 六轡如濡. 載馳載驅, 周爰咨諏.]"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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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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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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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현충사 사액 치제문 顯忠祠賜額致祭文【乙酉】 을유년에 회령 유생들이 사원을 세워 공에게 제사지냈다. 이 고을에 의병을 일으킨 사람은 첨지 신세준, 주부 오윤적, 최언영, 허관, 봉사 정여경, 수문장 이희백, 봉사 윤립, 수문장 오준례 등이다. 이들을 배향하고 인하여 도신이 조정에 글을 올려 사액을 청하니 정해년에 사액하고 치제문을 내렸다. 지제교 윤홍리가 짓다.지난 임진년에왜적이 독을 뿜어 침략하니호서를 휩쓸며 경기를 차지하고서고개 넘어 북으로 진격하였네.백성들을 도륙하고서관북에 소굴을 만들었어라.간사한 백성이 왜구에 아첨하여그 틈을 이용하여 일어났네.이에 재상을 얽어 잡고드디어 왕자까지 붙잡았어라.잔학함을 도와 재앙을 빚어내어왜적이 더욱 방자하게 되었네.경은 이때 의병을 일으켜막부에서 일어났어라.소문을 듣고 메아리처럼 응하여원근에서 잇달아 찾아왔네.네 사람이 먼저 의기 떨치니여덟 선비가 이어서 일어났네.담력을 펼치고 용기를 떨쳐손에 침을 뱉고 죽기로 싸웠어라.반역의 흉도를 찢어 죽여차례대로 섬멸하였네.많은 군사를 고무시켜도 적을 두려워하는데신인이 분격하며 돌진하였네.잿더미 속에서도 영토 보존함은실로 너희들 때문이로다.〈북관지(北關志)〉와 《채순록(採詢錄)》에 모두 기록되어 있으니사적이 대단히 분명하여라.경성(鏡城)에 사원을 건립하였지만다 봉향하지 못하고 빠트린 사람 있누나.한 당에 배향한 이가네 사람이고 여덟 사람은 빠졌네.영령을 모실 장소가 없으니오래도록 뒤미처 보답하지 못하였어라.많은 사람이 억울해 하니사적이 사라질까 두려워하였네.힘을 합쳐 사당을 지어부에 나아가 별도로 지었어라.일이 조정에 알려지지 않아유독 훌륭함을 정려함이 없었네.사신이 경연에서 아뢰고변방의 상소가 또한 이르렀어라.혁혁한 무공과 위대한 행적은사람들의 이목에 환하게 빛나네.한 사람이라도 오히려 나라를 빛내거늘더구나 너희들 무리로 나옴에랴.충성과 용맹을 고무시킨 것은참으로 일을 앞장선 사람으로 말미암았지만한마음으로 목숨을 바친 것은실로 여러 선비들에 힘입어서라네.그 공을 균등하게 포상해야 하며예도 마땅히 함께 배향하여야 하리.어찌 교화를 세워서백성들의 이목을 고용(高聳)시키지 않으랴.이에 성대한 은전을 미뤄서아름다운 편액을 내리고특별히 예관을 보내어맑은 술로 제사를 올리니밝은 영혼이 있다면부디 와서 흠향하기를. 會寧儒生立祠祀公. 以本府起義人僉知申世俊·主簿吳允迪·崔彥英·許灌·奉事鄭汝慶·守門將李希白·奉事尹岦·守門將吳遵禮等, 配享, 因道臣上聞請額, 丁亥賜額致祭文. 知製敎尹弘离。粤在壬辰島夷逞毒彌湖滿畿踰嶺而北血肉生靈巢穴幽關奸民媚寇闖發其間爰拘國宰遂及王子助虐養禍俾賊益肆卿時倡義起自幕府聞風響應遠近接武四人先奮八士繼起張膽賈勇唾手爭死磔裂叛凶次第殲盡鼓衆惴敵神人快憤得保餘燼實賴爾曹誌錄俱存事蹟孔昭惟鏡刱祠闕不咸秩一堂配食齒四遺八妥靈無所久欠追報羣情壹鬱湮沒是懼合謀經營就府別構事未聞朝獨無旌美使臣筵白藩奏且至烈武偉躅炳赫耳目一猶光國矧爾輩出激礪忠勇亶由首事同心效死實藉衆士功可均褒禮宜同享盍樹風聲丕聳瞻聽肆推盛典寵錫華額特遣禮官酹以洞酌不昧者存庶幾歆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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