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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諭八道列邑校儒書 伏惟龍戰僉體不以道窮有損否區區願聞鄙等俱是鄕曲窮儒之最劣者也曾於僉尊雖無一日之雅而竊有至情所同大義所關凡今爲儒不敢不相告之事端故玆敢冒昧唐突不面而書幸勿以生疎微賤而外之張皇强聒而罪之察邇擇狂樂取與人卽卽施行次次馳傳俾域內各處得有相憐幷生之實效是惟深所顒祝也何謂至情之所同而大義之所關也道貫宇宙而能弘者人耳能明者儒耳背陰向陽撥亂反正尊夏攘夷貴人賤獸惓惓乎其扶此而抑彼寧或爲此而必死殊不忍爲彼而苟生自是吾人根天之性情而亦非吾儒閑聖之法義乎見今陰窮亂極夷降獸食六合同焚而一世泄泄四海胥溺而隻手莫援誠天地剖判後所未有之慘禍也凡我同情同義者將如之何而可也凡我同情同義者將如之何而好也人亦有言窮則反本極則思治邪慝之盈天下正惟君子反經之秋也如欲反經則必當胥告相勸在在講習汲汲乎內治修自治之活計而一自書院之毁撤後域內士子咸失屛幪觀法無所藏修無地通病之中寧不相憐而黑死之局何以幷生乎鳳在先祖忠穆公兪先生香山院墟圭容先祖文忠公李先生花山院墟【二院在京抱川】承膺先祖忠莊公李先生龍浦院墟【在黃海金川】不幸同遭穢骨之犯葬凶變而皆已掘去得復淨矣乃却卽設壇歲一私薦以寓愛禮存羊之義且復朔望焚香春秋講會以是瞻拜於是乎仰止行止於是乎能言能拒以爲暗祝一治苦待陽復之計庶可爲目今所謂反經君子萬一之助也仍竊伏念人各親其親然後不獨親其親今日域中何院不毁如欲逐處爲壇宜若不可勝設而但使人各親親凡於毁撤中表表忠賢之院不得不復設處各其繼述之子孫各其傍近之章甫一心宣力營之攻之則百千神壇可得不日成之而洋洋如在依歸有所矣復誰禁之人自不爲也當初毁院雖出朝令而亦只爲牲幣募軍之多費國財耳何嘗禁絃誦使不講師生大倫集山林使不保杖履之遺躅直如邪學禁亂賊物籍沒之爲乎朝令本意斷不如是則區區退保略略私伸分明是在所不禁也況我 聖上壬午綸音敎諭八道民人書有曰毁撤祠宇忠賢不祀是予之罪也大哉 言也一哉 心也王言一出億兆咸仰而山川鬼神亦且感泣則自下興行以待 處分尤不當有些次且也何乃十年而寥寥無聞殊非對揚將順丕應後志之道也鄙等之愚玆敢不揆僭率斷然經始而播告遠邇欲其一例克復咸與維新伏乞僉尊千萬惕念卽各依施蘊爲德行發爲事業以之鼓勤我士氣以之扶護我國脈則斯文幸甚夫己立立人己達達人仁者之事也鄙等之無似顧何敢㖨第念神州陸沈後數百餘來碩果不食底朝鮮乃亦一朝而剝盡爲坤無復舊容而天涯地角毛者羽者介者鱗者奇奇之形怪怪之種爭來橫行率食我人思以易之則腸裂肝燬直欲無聰而不可得也吾道之危急存亡不啻若一髮而如其終不得衛護保全於萬一則生不如死之久矣無論某事道如可衛萬死猶甘百身何惜吾人儒凡爲堯舜孔孟之道者目前大同之病皆便是死中求生而不容但已也方外窮賤且猶盡然況職任珍重責望非輕如僉尊者乎吾知僉尊之情必然一般矣情旣一般則義不敢不通告也且念撤院招盜恰似 崇禎末已事則前覆後戒之地如何不急急改圖乎古人不云乎昊天不復憂無疆也弟子勉學天不忘也卽今勉學回天底一條生路正在於此而莫此爲急故旣敢唐突張皇如右所陳而又謹商定數條通行之節目附錄于後尙其恕諒而採擇之無然泄泄各自慥慥如何伏惟鑑察恭承太學通諭八道列邑校儒書則惟我 聖上壬午綸音敎諭八道人民書有曰毁撤書院忠賢不祀是予之罪也大哉言也一哉心也 王言一出億兆咸仰山川鬼神亦且感泣則乃却設壇歲一私薦以寓愛禮存羊之義且復朔望焚香春秋講會以是瞻拜九地之下如聞天上之音也竊惟事勢隆師尙賢之禮右文興學之道莫善於此則孰不樂聞孰不樂從以之士氣咸聳以之正路漸開乃者列邑響應多士追從公議一發各所院墟或築壇或建祠縟禮將擧惟我本院勢孤力悴館通接見接聞已有年所而遷延未遑去庚子重陽就其舊址設壇具禮然猶未有圓滿士論更發今丙子復設祠宇八月仲丁奉安翌月九日永行俎豆之禮其儀維新洋洋如在有所依歸是豈非士林之一大幸子孫之一大慶耶先生之至行懿德俱載於舊誌故於此不必架疊覽者詳之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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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飮福禮 同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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卷之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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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學院答通 壬申十一月 日經學院大提學代理副提學朴箕陽司成 金完鎭長興郡長東面光平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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復設時有司分定【乙亥六月日】 建祠有司 李元根 金錫烈成造有司 安圭仁 金長浩 金京浩監役有司 朴丙炫 安淳恒 金宗浩伐木有司 宣永華 丁鍾九 金定浩垣墻有司 白亨琡 鄭漢俅 金柄晙燔瓦有司 鄭宋欽 魏振奎 金錫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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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海金氏松汀先生楊江祠復設之件 光州郡湖南誌儒會所朴鳳柱外二十九人對如別紙寫照復玆謄報參考爲要壬申十一月 日經學院大提學代理副提學朴箕陽光州郡湖南誌所朴鳳柱外二十九人 座前金海金氏松汀先生楊江祠復設之件本年十月日發貴辭接悉金海金氏松汀先生建祠設享之事尙德樹風裨化不少竊不勝攢頌萬萬謹玆仰復順頌文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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奉安時告由文 伏以道明德尊百世宗師楊江揭虔南士有依頃値撤毁壇設愛禮斯文未喪祠宇重奕蠲潔禋享自今復舊陟降洋洋永世是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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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2 卷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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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 회포를 읊어, 이백의 〈궁중행락사〉에 차운하다 4수 을미년(1595, 선조28) 3월에 영흥 부사에서 체차되어 돌아올 때에 짓다. 村居詠懷 次李白宮中行樂詞韻【四首 乙未三月, 遞還永興時作】 산성은 좁은 산길 곁에 있고강가 누각은 용궁을 굽어보네버들 찾아가니 맑은 경치 좋고꽃을 구경하니 저녁 바람 겁나라때때로 찾아온 손님 맞이하니감히 술통이 비었다고 말할 수 없네앞마을에서 술을 사오니기쁘게 모두 한바탕 웃는구나생각건대 옛날에 긴 검 차고서변방에서 씩씩하게 누볐지창칼이 변방 눈에 빛나고고각 소리 변방 누각에 진동했네떠도는 몸 여전히 강건한데머뭇거리는 그림자 부끄러워라공후는 본래 운명에 달렸으니갈고리처럼 굽힐 필요 없어라7)모옥에서 늦게서야 잠 깨니꽃바람이 들 향기 보내오네향기로운 풀에 호랑나비 날고따뜻한 강물에 원앙이 목욕하누나도 팽택처럼 세상을 벗어나고8)장자방처럼 신선을 따르네9)나는 옛사람의 자취를 더듬으니-원문 2자 결락- 물을 것 없네눈을 들어 보니 산하 다르고머리 돌려 보니 풍경 새로워라삼천 리 먼 곳에서 객살이 하니석 달의 봄날에 마음 아파라꿈속 넋은 고향을 헤매고꽃 눈물은 시름겨운 이 마음 흔드네10)다행히도 모래톱 갈매기와 짝 되었으니기심을 잊고 너와 친하게 지내리 山城依鳥道江檻俯蛟宮問柳宜晴景看花怯晩風有時迎客至不敢道尊空沽得前村酒欣然一笑同憶昔提長劍關河爲壯遊戈鋋明朔雪笳鼓動邊樓流落身猶健蹉跎影可羞公侯元有命不必曲如鉤睡起茅堂晩花風送野香草芳飛蛺蝶江暖浴䲶鴦遺世陶彭澤從仙張子房我尋古人躅不必問【二字缺】山河擧目異風景轉頭新作客三千里傷心九十春蝶魂迷故國花淚動愁人賴有沙鷗伴忘機與爾親 공후는……없어라 고관대작에 오르기 위해 뜻을 굽힐 필요 없다는 뜻이다. 후한 순제(後漢順帝) 말년에 경도(京都)에 "활줄처럼 곧으면 도로 가에서 죽고, 갈고리처럼 굽으면 거꾸로 제후에 봉해진다.[直如弦, 死道邊, 曲如鉤, 反封侯.]"라는 동요가 유행했다고 한다. 《後漢書 五行志1 謠》 도……벗어나고 도 팽택은 팽택 영(彭澤令)을 지낸 도연명(陶淵明)을 가리킨다. 도연명처럼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고자 한다는 뜻이다. 장자방처럼 신선을 따르네 장자방(張子房)은 한나라 고조 때의 충신 장량(張良)으로, 자방은 그의 자이다. 한 고조가 장량에게 제(齊) 땅을 주려했는데, 장량은 사양하고 물러나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신선이 되려고 하였다. 《史記 留侯世家》 꽃……흔드네 두견화의 눈물 흔적이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는 뜻이다. 촉나라 망제(望帝)가 죽어서 두견새가 되었는데, 봄철이면 밤낮으로 피눈물이 흐를 때까지 슬피 울며 '불여귀(不如歸)'라는 소리로 우는데, 눈물이 떨어진 곳에서 연분홍 진달래가 피어났다고 한다. 이에 진달래를 '두견화;라고도 한다. 《太平御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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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2수 無題【二首】 어제 춘성에 와서 술 마시고퇴청한 뒤에 까닭없이 앉았네푸른 바다임을 멀리서 알겠으니박망후의 뗏목24) 아울러 머무르네베개에 기대 조제할 약재 쓰고25)책을 펴고 오이 심는 것 보노라26)은은한 바람 때때로 한 번 지나가니섬돌 위에는 동백꽃 떨어져 있네그대는 신선 자태 지녔으니일찍이 자부27)의 관아로 달려갔었지옥경에서 조칙을 받들고서은하수에 뗏목 타고 내려왔네밭이 바다가 되었다 말할 수 있고28)이어 오이와 같은 대추를 나누어 주네29)멀리서 온 사람에게 무엇으로 보답하는가삼가 설낭 속의 차를 올리네 昨到春城飮無端坐放衙遙知滄海水幷駐博望槎倚枕題調藥開篇看種瓜微風時一過階上落山茶夫子神仙標曾趨紫府衙玉京啣鳳詔銀漢下星槎解道田爲海仍分棗似苽遠人何所報恭進雪囊茶 박망후 뗏목 사신 행렬을 의미한다. 박망후는 한(漢)나라 시대 서역(西域)을 개척했던 장건(張騫)을 지칭하며 박망(博望)은 봉호이다. 박망후가 한 무제(漢武帝) 때 명을 받들고서 서역으로 사행을 가던 황하의 근원을 계속 거슬러 올라갔다는 고사에 있는데, 이후 박망후의 뗏목은 사신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베개에……쓰고 한 무제(漢武帝)가 태산(太山) 기슭에서 180세된 노인에게 신침법(神枕法)을 전수 받은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신침법이란 장수하는 비법으로, 잣나무를 잘라 속을 파내고 그 안에 32종류의 약재를 넣은 다음, 뚜껑에 120군데의 구멍을 뚫어 그 냄새를 맡으며 베고 자면 앓던 병이 다 낫고 백발이 검어지며 빠진 이가 다시 난다고 한다. 《神仙傳 卷8 太山老父》 오이……보노라 진(秦)나라 소평(邵平)의 고사를 인용하여 은일의 정취를 형용한 것이다. 소평이 일찍이 동릉후(東陵侯)에 봉해졌는데, 진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스스로 평민의 신분이 되어 장안성(長安城)의 청문 밖에 오이를 심어 가꾸며 조용히 은거하였다. 《史記 蕭相國世家》 자부(紫府) 신선이 사는 곳을 일컫는 말로, 여기서는 명나라를 의미하는 듯하다. 밭이……있고 사행을 다녀온 것은 선계를 다녀온 것에 비유한 듯하다. 신선 마고(麻姑)가 신선 왕원(王遠)을 만나 "우리가 만난 이래로 동해가 세 번이나 뽕밭[桑田]으로 변한 것을 이미 보았는데, 저번에 봉래(蓬萊)에 가보니 물이 또 지난번에 보았을 때에 비해서 약 반으로 줄었으니, 어쩌면 다시 땅으로 변하려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라고 했다는 고사가 있다. 《神仙傳 卷7 麻姑》 오이와……나누어주네 사행을 다녀온 것은 선계를 다녀온 것에 비유한 듯하다. 전설에 동해(東海)의 봉래산(蓬萊山)에 안기생이라는 선인이 산다고 하는데, "안기생이 크기가 오이와 같은 대추를 먹었다.[安期生食巨棗大如瓜.]"라는 말이 전해진다. 《史記 封禪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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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언배율 七言排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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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그루 버들에 봄이 온 줄도 모르다343) 십운으로 월과이다. 不知五柳春 十韻月課 오류선생은 어떤 사람인가기노344)의 천지에서 진나라 유민으로 지냈네.세상의 그물에 걸려 형역을 힘들게 함을 부끄럽게 여기고서전원으로 돌아와 지내며 속진을 피했어라.세상에 중산왕345)이 없어 당시 지우를 받지 못하였고자는 제갈량을 따랐으나346) 뜻은 펼치지 못하였구나.생애는 무릎이나 들어갈 세 간의 집좋은 물건은 농 위의 일각건이라네.만년에 술과 벗을 맺고서여생은 오랫동안 취향과 이웃하였어라.옥산이 무너진 곳347)에 시간을 보낼 수 있고달이 뜬 은빛 바다에서 밤중에 문득 봄을 감상하누나.문득 술잔 속에 황국의 계절임을 알았는데어찌 문밖에 녹양의 때인 줄 알겠는가.노란 버들눈 터트리고 푸른 가지 늘어뜨려도 아무도 관심두지 않는데이슬 지니며 이내 머금고 절로 새롭구나.맘대로 날리는 버들솜 거센 바람에 떨어지건 말건교태로운 앵무새는 무슨 일로 자주 와서 우짖는가.날이 추워지면 따로 마음을 아는 곳이 있으리니-원문 6자 결락- 대. 五柳先生何許人寄奴天地晉遺民羞從世網勞形役歸臥田園避俗塵世乏中山時未遇字追諸葛志難伸生涯容膝三間屋長物籠頭一角巾末契且將歡伯友餘生長與醉鄕鄰玉山倒處堪消景銀海昏時便賞春但覺杯中黃菊節寧知門外綠楊辰拖黃拂翠無人管帶露含烟自在新狂絮任他飄落盡嬌鶯何事喚來頻歲寒別有知心處【六字缺】筠 다섯……모르다 이백(李白)의 〈희증정율양(戱贈鄭溧陽)〉 시에 "도령은 날마다 취하여, 다섯 그루 버들에 봄이 온 것도 몰랐네. 소박한 거문고는 본래 줄이 없었고, 술을 거르는 덴 갈건을 사용했네. 맑은 바람 불어오는 북창 아래서, 스스로 희황상인이라 일컬었지. 그 언제나 율리에 가서, 평생의 친구를 한번 만나 볼거나.[陶令日日醉, 不知五柳春. 素琴本無絃, 漉酒用葛巾. 淸風北窓下, 自謂羲皇人. 何時到栗里, 一見平生親.]"라고 하였다. 기노 진(晉)나라를 멸하고 남조 송(宋)나라를 세운 고조(高祖) 유유(劉裕)의 어릴 때 이름이다. 중산왕 유비는 중산왕 유승(劉勝)의 후손이다. 자는 제갈량을 따랐으나 도연명의 자는 원량(元亮)이다. 옥산이 무너진 곳 이백(李白)의 〈양양가(襄陽歌)〉에서도 진(晉)나라 산간(山簡)을 두고 읊기를 "맑은 바람 밝은 달은 한 푼 돈이라도 들여 살 것 없고, 옥산은 스스로 무너졌지 남이 민 게 아니로다.[淸風明月不用一錢買, 玉山自倒非人推.]"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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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호석316) 연경에 사신으로 갔을 때317) 지었다 射虎石 赴燕時作 원숭이 팔 장군318) 밤에 사냥 갔다 돌아올 때말 앞에 무엇인가 희미하게 보였어라.산의 동쪽 양들이 일어났는지319) 처음에 의심하였고흙다리 위에 다니는 사람인가320) 가까이 다가가 보니 곧 아니어라.범이 산모퉁이 등진 것 같으니 어찌 두려워 쫓으랴점차로 길을 막으니 손으로 비키라고 할 수 있으랴.만약 나귀를 보인다면 응당 재주를 다할 것이며321)곧 여우가 온다면 참으로 위세를 빌릴 듯.눈동자 놀람에 커져 다만 내 솜씨만 믿을 뿐담이 크니 어찌 심기를 잃으랴.금복고322)를 뽑아 유성처럼 번득이니오호궁323)을 당겨 쏘니 달빛도 떨어지네.천둥이 활시위에 응하여 골짜기를 울리고귀신이 화살촉 따라 숲을 쪼개누나.오묘하게 꿰뚫으니 어찌 맨손으로 잡는다고 자랑하랴큰 사냥은 합동으로 포위하는 것과는 무관하네.다만 털 짐승으로 보이는 바위에 화살을 꽂으니324)산골이 본래 자갈로 이뤄진 것을 어찌 알랴.세 겹의 갑옷도 뚫는 사람은 적고한 발에 암퇘지를 연달아 잡는 것325)은 옛날에도 드문 일이네.용맹함으로 맹수를 잡으니 생각건대 기상이 굳세며활을 쏴 금석을 뚫으니 그 이치 어디에 의거하였나.기의 감응은 사물이나 사람이나 원래 다르지 않으니집중으로 견고함을 꿰뚫은 것은 그 이치에 어긋나지 않네.창을 휘둘러 지는 햇빛을 되돌린 것326)을 모름지기 믿으며흐르는 피가 빈 옷을 적신 것을 의심하지 말라.어찌하면 단단한 바위에 정성이 남을까마침내 제후로 봉해질 것인데 운명이 박하였어라.327)오랑캐 변방 저절로 조용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고한나라 은총은 대단히 박하여 사관도 오히려 비난하였지.전속국 소랑은 숫양이 새끼를 낳지 못하였고328)오랑캐 금은 제후를 봉할 때 다만 말만 살지게 기르면 될 뿐.황제는 웅걸찬 재주 지녔지만 오히려 장수는 잃었으니바위는 신물이 아니지만 다만 기미를 알았네.천추 동안 안개에 숨어 유적으로 남았으니한 바위가 석양을 마주하고 있어라.지난 일 지금은 새가 지나간 듯한데행인은 옛날 조상하며 말을 멈추누나.어찌하면 연연산의 빗돌329)로 바꾸어당시 한나라 비장군의 행적 새겨 넣을까. 猿臂將軍夜獵歸馬前何物見依俙山東羊起初疑是圯上人行近却非乍似負嵎寧畏逐漸成當道可能揮若令驢見應輸技卽有狐來定假威目駭只憑吾手法膽麤那失此心機抽來金僕流星閃彎罷烏號落月輝霹靂應弦傳谷響鬼神隨鏑擺林霏妙穿何用誇徒搏大獵非關作合圍但道毛蟲能飮羽豈知山骨本成磯三重洞甲人猶鮮一發連豝古亦稀勇奪爪牙思卽壯射開金石理何依氣通物我元無間誠貫堅頑故不違須信揮戈回返景莫疑流血濺空衣如何介石精誠在畢竟分茅命道微胡塞自裁人共惜漢恩偏薄史猶譏蘇郞屬國非羝乳金虜封侯但馬肥帝有雄才猶失將石非神物獨知幾千秋霧隱留遺跡一片雲根對夕暉往事至今如過鳥行人弔古駐驂騑若爲化作燕然石銘記當年漢將飛 사호석 한나라 때의 명장 이광(李廣)이 우북평 태수(右北平太守)로 있을 때 사냥을 나갔다가 풀 속의 돌을 보고 호랑이라고 여겨 활을 쏘아 맞혔는데, 가서 보니 큰 바윗돌 속에 화살이 박혀 있었다. 《漢書 卷54 李廣傳》 연경에……때 1610년 46살 때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연경에 다녀왔다. 원숭이 팔 장군 이광이 원숭이처럼 팔이 길어 천성적으로 활을 잘 쏘았다고 한다. 이로 인해 후대에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을 표현할 때 '원숭이처럼 긴 팔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였다. 《史記 卷109 李將軍列傳》 산의……일어났는지 갈홍(葛洪)의 《신선전(神仙傳)》에서 "황초평이 15살 때 집에서 양을 키우게 하였다. 도사를 따라 금화산 석실에서 도를 닦았다. 40여 년이 지난 뒤에 형이 찾아와서 양이 어디 있냐고 물었다. 초평이 '워이! 양들아 일어나라.'라고 하니, 이에 흰돌이 모두 일어나 수만 마리의 양이 되었다."라고 했다. 흙다리……사람인가 선인(仙人) 황석공(黃石公)을 이른다. 진(秦) 나라 말기에, 다리 위[圯上]에서 한 노인이 장량(張良)에게 병서(兵書) 일편(一篇)을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을 읽으면 왕자(王者)의 스승이 될 것이다. 13년 후에 네가 나를 제북(濟北)에서 만날 것인데, 곡성산(穀城山) 아래 누런 돌이 바로 나일 것이니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55》 만약……것이며 검주(黔州)에는 본디 나귀가 없었는데, 어떤 사람이 나귀를 싣고 들어가 그곳 산 밑에 풀어 놓았더니, 호랑이가 처음에는 나귀의 큰 체구와 큰 울음소리로 인해 그를 대단히 무서워했으나, 그 후 나귀와 점차 가까워진 다음 나귀의 발길에 한 번 채여 보고 나서는, 나귀에게 그 밖의 다른 기능이 없음을 알아차리고 마침내 나귀를 물어 죽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柳河東集 卷19》 금복고 《춘추좌씨전》 장공(莊公) 11년 조에 "승구의 전쟁에서 장공이 금복고로 송나라 대부 남궁장만을 쏘아 맞혔다.[乘丘之役, 公以金僕姑射南宮長萬.]"라 하였는데, 그 주석에 "금복고는 화살 이름이다."라 하였다. 이후 좋은 화살을 가리켜 말할 때에 쓰인다. 오호궁 《회남자(淮南子)》 〈원도훈(原道訓)〉에서 "활을 쏘는 자는 오호궁(烏號弓)을 집어 들고 기위전(綦衛箭)을 먹여 쏜다."라고 하였다. 그 주에 "오호는 뽕나무인데, 재질이 탄력성이 강하다. 까마귀가 뽕나무 가지에 앉았다가 날아가려고 하면 그 가지가 아래로 휘어졌다가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므로 까마귀가 감히 날지 못하고 그 가지에서 운다. 사람들이 그 가지를 베어 활을 만들어 오호궁이라고 이름을 붙였다."라고 하였다. 화살을 꽂으니 초나라 웅거자(熊渠子)가 밤에 길을 가다가 바위를 범으로 오인하고는 활을 쏘았는데 바위에 워낙 깊이 박혀서 화살 끝의 깃털이 보이지 않을 정도[飮羽]였다는 일화가 《한시외전》 권6 24장에 보인다. 한……것 《시경》 〈소남(召南) 추우(騶虞)〉에서, "저 무성한 갈대밭에, 다섯 암퇘지를 한 발에 쏘아 잡네.[待茁者葭, 一發五豝.]"라고 하였다. 창을……것 옛날 노 양공(魯陽公)이 한(韓)나라와 한창 전투를 벌이고 있을 적에 해가 마침 서쪽으로 기울자, 창을 잡고 해를 향하여 휘두르니, 해가 90리나 되돌아왔다는 '휘과회일(揮戈回日)'고 한다. 《淮南子 覽冥訓》 마침내……박하였어라 이광은 대장군(大將軍)으로서 흉노(匈奴)와 70여 차례의 전쟁을 하여 매우 큰 공훈을 세웠다. 그러나 그의 부하 장수들 모두가 제후로 봉해졌는데도 정작 그만은 끝내 높은 관작에 봉해지지 못하였다. 전속국……소랑 소랑은 한 무제 때 전속국(典屬國)의 벼슬로 있다가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된 소무(蘇武)이다. 흉노의 선우가 항복하라고 위협했으나 끝까지 굽히지 않다 땅굴 속에 구금되어 담요의 털을 눈[雪]과 뭉쳐 먹으며 연명하였다. 북해(北海)로 옮겨 양(羊)을 기르게 하며 선우가 말하기를 "숫양[羝羊]의 젖이 나오면 돌려보내 주겠다."라고 했다. 그 뒤 갖은 고생을 하며 19년 동안 머물러 있다가 소제(昭帝) 때 흉노와 화친하면서 돌아오게 되었다. 《漢書 卷54 蘇建傳》 연연산의 빗돌 후한(後漢) 때 두헌(竇憲)이 흉노(匈奴)를 정벌하고 개선(凱旋)하여 연연산(燕然山)에 이르러 비(碑)를 세워서 그의 공업(功業)을 기술하였다. 그 글은 그를 수행했던 반고(班固)가 지었다. 《後漢書 竇憲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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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로 함께 밤에 숙직하다 문신 정시의 장원 작품 白首同夜直 文臣庭試壯元 회상해보니, 예전 남쪽으로 갔을 때 나와 공은계산을 지척에 두고 동과 서에 있었지.맑은 술동이 미주(美酒)로 흉금을 토로하고오래된 웅장한 검에 간담을 함께 의지했네.떠돌아다니느라 선실330)이 멀어져 오랫동안 탄식하였는데이름이 올라가 지금 다시 궁궐로 돌아왔어라.남쪽의 물고기 북쪽의 새처럼 중년에 이별하였다가상서성의 화로를 오늘밤 함께 하누나.담소하는 사이에 근심은 천리 밖으로 사라지고십년 전의 일은 꿈속 같구나.근심하니 이미 천 가닥 머리 희게 되었지만군주 사모하여 아직도 일편단심의 충정이로다.기이한 만남은 참으로 가로막은 안개를 열어젖힌 듯하고살아 돌아옴은 바로 임금 총명에 힘입음이라.흉금을 여니 완연히 황학루의 달을 대한 것 같고흥을 타니 더욱 적벽의 바람이 생각나누나.어촉의 빛을 나눠 주어 옥전에서 내려오고선호의 술을 하사하여 금궁에서 나오네.임금 은혜 갚으려 해도 방법이 없으니앉아서 남은 시간 헤아리며 부질없이 몸을 어루만지는구나. 憶昨南遷我與公溪山咫尺占西東襟期共付淸樽美肝膽同憑古釰雄浪跡久歎宣室遠策名今復紫宸通南鱗北羽中年別畵省香爐此夜同千里外愁談笑裏十年前事夢魂中憂時已白千莖髮戀主猶丹一片衷奇遇正如披霧隔生還自是荷天聰開襟宛對黃樓月乘興還思赤壁風御燭分光來玉殿仙壺賜醞出金宮皇恩欲報知無路坐數殘更浪撫躬 선실 한(漢)나라 미앙궁(未央宮)의 정전(正殿)이다. 가의가 좌천되어 장사왕의 태부로 있다가 1년 남짓 만에 소명(召命)을 받고 조정으로 돌아오니, 문제(文帝)가 선실에 있다가 그에게 귀신의 본원(本源)에 대해 물었다. 이에 가의가 귀신의 유래와 변화 등을 자세히 이야기하다가 한밤에 이르자 문제가 그 이야기에 빠져서 자기도 모르게 자리를 앞으로 당겨 가의 가까이로 다가왔다 한다. 《史記 卷84 賈生列傳》 여기서는 궁궐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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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에 제하다 題柱 금우89) 가는 길 옥루90) 동쪽에서 나오고진나라 변새는 만 겹 숲으로 멀리 이어졌네남아의 가슴 속에 한 자루 장검 지녔으니이제 떠나면 공명은 손바닥 가리키듯 분명히 취하리라다시 올 적에 의당 비단옷 입고 오리니내 그렇지 못하면 다리 기둥의 글귀처럼 하리라91)아미산의 빼어난 기운이 인재를 낳았으니사마상여의 문재(文才)에 누가 짝하랴글솜씨는 삼협의 물을 거꾸로 쏟아낸 듯하고92)필력은 천근의 쇠뇌를 당길 듯하였으니풍류 있는 운치에 녹기금을 하사받고93)양대의 한줄기 비를 훔쳤네94)집은 그저 사방 벽만 있고 숙상구95) 헤졌는데가슴 속 문자는 오히려 기세가 성대했네곤붕96) 장차 벽해에 올 것이요봉황이 어찌 단혈산에 숨으랴97)동쪽으로 장안 바라보자 험한 길 이어지니어찌 돌아가 성주에게 구하지 않으랴채색 구름 사이의 백제성98) 돌이켜 생각하니한 필 말로 가는 행장 어찌나 쓸쓸한지물결에 누운 용처럼 긴 다리 가로 놓여 있는데다리 밑 동쪽으로 흐르는 물은 예나 지금이나 같아라사람이 살아감에 어찌 흘러가 돌아오지 않는 물을 배우랴죽기 전에 돌아오는 것은 운수 있음을 알겠네지금 천자께서 현자를 급히 구하시니바람과 구름이 용, 범과 성대히 만났네99)하늘이 내게 주신 재주 필시 쓸 곳 있으리니어찌 울울하게 촉 땅에 있을 수 있으랴이번에 가면 마땅히 큰 금인 얻을 것이요100)허리춤에 한 장 두 자의 인끈 늘어뜨리리101)이 다리 곁에 수레가 나는 듯이 지나가면구경하는 자들이 담처럼 빙 둘러싸니고향 이웃은 옛 견자102)인줄 알아보고백성들은 지금의 수령 되었다 소리치리다시 찾아가면 응당 예전 자취 –원문 1자 결락- 있을 테니자획이 희미해도 발꿈치와 팔꿈치 분별하네103)아, 뜻을 두어 사업 끝내 이루었으니훗날 높은 수레 타고 물가에 왔네참으로 다리는 저버리지 않았는데 사람만 홀로 저버렸으니백발로 읊조리는 소리 참으로 괴롭구나 金牛路出玉壘東秦塞遙連萬重樹男兒肝膽一長釰此去功名指掌取重來當作衣錦人余所否者如橋柱峨嵋山秀鍾豪英司馬才華誰與伍詞源倒流三峽水筆力挽回千斤弩風情付與綠綺絃偸得陽臺一片雨家徒四壁鷫鸘弊文字胸中猶鬱怒鯤鵬將儀碧海鱗鳳凰寧藏丹穴羽長安東望鳥道通盍歸乎來干聖主翻思白帝彩雲間匹馬行裝何踽踽長橋橫作臥波龍橋下東流自今古人生肯學水不迴未死歸來知有數當今天子急賢良盛會風雲龍與虎天生我才必有用鬱鬱安能久西土玆遊當取印如斗腰下仍垂丈二組翩翩四蓋此橋邊會使觀者如墻堵鄕鄰識得舊犬子士女喚作今明府重尋應有往跡【缺】字畫依俙辨跟肘于嗟有志事竟成他日高車來水滸眞無負橋獨負人白頭之吟聲正苦 금우 촉(蜀) 지역의 금우협(金牛峽)을 말한다. 전국 시대 진 혜왕(秦惠王)이 촉을 정벌하고 싶었으나 길이 험해 정벌하지 못하자, 돌로 다섯 마리의 소를 만들어 촉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세우고 소의 항문 아래에 황금을 놓아두었다.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돌 소가 황금 똥을 눈다고 하자, 이 소문을 들은 촉왕은 천여 명의 군사와 다섯 명의 역사(力士)를 동원하여 성도(成都)로 운반해 갔다. 이 때문에 촉으로 들어가는 길이 뚫렸다. 《水經注 沔水》 옥루 촉나라 수도인 성도의 서북쪽에 있는 산 이름이다. 내……하리라 공명을 이루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뜻이다. 한나라 때 촉군 성도 사람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촉군을 떠나 장안(長安)으로 갈 적에 성도의 승선교(昇仙橋) 기둥에 "고거사마(高車駟馬)를 타지 않고는 다시 이 다리를 지나지 않겠다."라고 썼다. 《水經注 江水》 글솜씨는……듯하고 삼협에서 쏟아져 흐르는 물처럼 거침없고 웅장한 문장을 말한다. 삼협은 양자강(揚子江) 상류의 험난하기로 유명한 세 협곡으로, 구당협(瞿塘峽), 무협(巫峽), 서릉협(西陵峽)의 합칭이다. 당나라 두보(杜甫)의 〈취가행(醉歌行)〉 시에 "글 솜씨는 삼협의 물을 거꾸로 쏟아낸 듯하고, 필력은 천 명의 적군을 홀로 쓸어낼 기세로다.[詞源倒流三峽水, 筆陣獨掃千人軍.]"라고 하였다. 풍류……하사받고 사마상여가 〈옥여의부(玉如意賦)〉를 지어 양왕(梁王)에게 바치자, 양왕이 기뻐하여 사마상여에게 녹기금(綠綺琴)이라는 명금(名琴)을 하사했다. 《古琴疏》 양대의……훔쳤네 사마상여가 탁문군(卓文君)을 꾀어 부부가 된 일을 초 양왕(楚襄王)의 고사에 빗댄 것이다. 초 양왕이 고당(高唐)에서 놀다가 꿈속에서 무산(巫山)의 신녀를 만나 잠자리를 함께하였는데, 이별하는 즈음에 신녀가 "저는 무산의 양지쪽 언덕에 사는데, 아침이면 떠가는 구름이 되고 저녁이면 내리는 비가 되어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양대(陽臺)의 아래로 내려옵니다."라고 하였다. 《文選 卷19 高唐賦》 숙상구(鷫鸘裘) 숙상이란 새의 가죽으로 만든 갖옷으로, 사마상여가 몹시 가난할 때 입었던 옷이다. 사마상여가 일찍이 부인 탁문군(卓文君)과 함께 고향인 성도(成都)로 돌아갔을 적에 워낙 가난했던 탓에 자기가 입고 있던 숙상구를 전당 잡히고 술을 사서 탁문군과 함께 마시며 즐겼다는 고사가 있다. 《前漢書 司馬相如傳》 곤붕(鯤鵬) 북명(北溟)에 크기가 몇 천 리인지 알 수 없는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있는데, 그 물고기가 변하여 '붕(鵬)'이라는 새가 된다고 한다. 《莊子 逍遙遊》 봉황이……숨으랴 훌륭한 인재가 숨지 않을 것이란 의미이다. 단혈산(丹穴山)은 봉황이 산다고 하는 전설적인 산으로 단산(丹山)이라고도 한다. 《山海經 南山經》 백제성(白帝城) 사천성 봉절현(奉節縣) 동쪽 백제산에 있는 성으로, 매우 높고 가파른 모습이 두보(杜甫)의 시 〈백제성최고루(白帝城最高樓)〉에 잘 나타나 있다. 바람과……만났네 성군(聖君)과 어진 신하가 만났다는 의미이다.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의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좇는다.[雲從龍, 風從虎.]"라는 말에서 나왔다. 큰……것이요 높은 관직에 오를 것이라는 의미이다. 진(晉)나라 왕돈(王敦)이 반란을 일으켰을 적에 상서 좌복야(尙書左僕射) 주의(周顗)가 좌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금년에 도적놈들을 죽이기만 하면 말만큼 큰 금인을 팔뚝에 차리라.[今年殺諸賊奴, 取金印如斗大繫肘.]"라고 하였다. 《晉書 卷69 周顗列傳》 허리춤에……늘어뜨리리 지방관이 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한서》 〈엄조전(嚴助傳)〉에 "폐하는 사방 한 치의 도장과 한 장 두 자의 인끈[丈二之組]으로 외방을 다스리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견자(犬子) 사마상여의 아명(兒名)이다. 사마상여는 전국 시대 조(趙)나라 인상여(藺相如)를 사모하여 훗날 스스로 '상여'라고 개명하였다. 《史記 司馬相如列傳》 자획이……분별하네 글씨가 마멸되어 온전하지 않은 것을 비유한 말이다. 송나라 소식(蘇軾)의 〈석고가(石鼓歌)〉 시에 "흐릿하여 반은 이미 흉터나 굳은살 같고, 구불구불한데 그래도 발꿈치와 팔꿈치는 분별할 수 있네.[模糊半已似瘢胝, 詰曲猶能辨跟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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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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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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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상수가 무정하니 애도한들 어찌 알까104) 湘水無情弔 豈知 원수와 상수 초 땅을 감돌아 흐르니105)밤낮으로 도도히 흘러 멈추는 때 없네강남은 옛날에 쫓겨난 신하가 간 곳으로한 줄기 안개 낀 물결 천고에 슬프구나사람은 감회 일어 옛사람 조곡하나강은 본래 무정하니 어찌 알 수 있으랴삼려대부는 일찍이 초나라 대부였으니송백의 고결한 품성에 난봉 같은 자태 지녔지영로106)에서 고난 겪고 세월 저물었으니아, 미인은 중도에 어디로 갔는가저 멀리 어가는 진나라 변경에 들어가니연월 속 장화대107)에 왕기 쇠했도다-1구 결락-택반 거닐며 읊조린 이108)의 귀밑털 새었네-2구 결락-장사왕의 태부는 낙양 사람이니109)나이 어리고 재주 뛰어난 천하의 기재라당시 강후 관영과 같은 반열에 있음을 부끄러워했으니성군 만났다면 요순의 다스림 일으켰으리외로운 방초가 뭇 풀들의 능욕 견디지 못했으니계책을 아뢰었다 되려 남쪽 변방으로 귀양 갔네상심했으니 어찌 차마 멱라수를 지날꼬110)충신의 넋에 애도하고자 두 눈에 눈물 흘렸네좌천된 이 남쪽으로 가는 일 예나 지금이나 같으니흐르는 강물 동쪽으로 흘러가도111) 누가 알아려주려나동쪽으로 흘러 바다로 모여드니112) 또한 무슨 마음인가물고기가 시신 삼키도록 내버려 두었도다113)진나라 산은 육리의 부끄러움 씻어내지 못하고114)초나라 사람은 괜스레 천년의 그리움 부쳤네115)쏟아낼 수 없는 객수 같이 강물 깊고돌아올 기약 없는 성은처럼 강물 흘러가네강가에서 애도한들 끝내 무슨 보탬이 되랴주옥같은 시문 낭비한 것 애석하여라당시의 남은 자취 찾아보는 사이에고금에 길이 흘러가는 것 이와 같도다지금 사람이 또한 장사에 애도하려 하나강의 무정함 마찬가지니 애도해 무엇하랴애도할 만한 다정한 곳 따로 있으니북저의 반죽 가지에 눈물 흔적 있네116) 沅湘之水繞楚流日夜滔滔無歇時江南舊是竄臣路一帶烟波千古悲人生有感弔古人水自無情那得知三閭曾是楚大夫松栢孤標鸞鳳姿風霜郢路歲月暮美人中道嗟何之迢迢龍駕入秦關烟月章華王氣衰【一句缺】澤畔行吟生鬢絲【二句缺】長沙太傅洛陽人年少才華天下奇遭時羞與絳灌列得君庶興唐虞治孤芳不耐衆草凌策奏翻謫天南陲傷心忍過汨羅水欲弔忠魂雙淚垂遷人南去古猶今逝水東流知爲誰東流朝海亦何心一任魚腹藏人屍秦山未洗六里羞楚人空寄千年思深如客愁不可寫去似君恩無返期臨流一弔竟何益可惜浪費瓊琚詞當年遺跡俯仰間逝者今古長如斯今人亦欲弔長沙等是無情何弔爲別有多情相弔處北渚啼痕班竹枝 상수가……알까 당나라 유장경(劉長卿)의 시구로, 유장경의 〈장사에서 가의의 집을 지나가며[長沙過賈誼宅]〉 시에 "한 문제는 도는 있어도 은혜는 박했구나, 상수가 무정하니 애도한들 어찌 알까.[漢文有道恩猶薄, 湘水無情弔豈知?]"라고 하였다. 원수와……흐르니 초나라 굴원(屈原)이 초 회왕(楚懷王) 때 삼려대부(三閭大夫)가 되었다가, 소인들의 참소를 입어 조정에서 쫓겨나 초췌한 몰골로 원수(沅水)와 상수(湘水) 사이를 유랑하면서 〈이소(離騷)〉를 지었다. 영로(郢路) 초나라의 수도인 영(郢)의 길거리를 말한다. 장화대 초 영왕(楚靈王)이 사치를 좋아하여 높이가 30여 길이나 되는 '장화대(章華臺)'라는 별궁을 지었는데, 장화대에 오르려면 세 번 쉬어야 했다고 한다. 《新書 退讓》 택반을……이 조정에서 참소를 받아 쫓겨나 택반을 거닐었던 초 나라 굴원(屈原)을 가리킨다. 장사왕의……사람이니 한나라의 문신 가의(賈誼)는 낙양 사람으로, 스무 살의 어린 나이로 문제(文帝)의 깊은 신임을 얻어서 여러 개혁을 주장했다가, 강후(絳侯) 주발(周勃)과 영음후(潁陰侯) 관영(灌嬰)의 참소를 입어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좌천되었다. 《前漢書 賈誼傳》 상했으니……지날꼬 굴원이 초나라 경양왕(頃襄王) 때에 다시 참소를 받아 장사(長沙)로 좌천되자, 멱라수(汨羅水)에 빠져 죽었다. 가의도 참소를 맡고 장사왕 태부로 좌천되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흐르는……흘러가도 임금에 대한 충심을 비유하는 말이다. 《순자》 〈유좌(宥坐)〉에 "물이 만 번 꺾이어도 반드시 동으로 흐르는 것은 굳은 의지가 있는 것 같다.[其萬折也必東, 似志.]"라고 하였다. 동쪽으로……모여드니 신하가 천자를 알현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서경》 〈우공(禹貢)〉에 "온갖 물줄기가 바다로 모여든다.[江漢朝宗于海]"라고 하였다. 물고기가……두었도다 굴원이 강물에 투신하여 죽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굴원의 〈어부사(漁父辭)〉에 "차라리 소상강으로 달려가, 물고기의 배에 장사 지내리라[葬於江魚之腹中]."라고 한 구절이 있다. 진나라……못하고 초 회왕이 장의에게 속은 고사를 말한다. 진 혜왕(秦惠王)이 제나라와 초나라가 동맹하는 것을 근심하여 초 회왕에게 장의를 보내, 초나라가 제나라와 절교를 한다면 진나라 상오(商於)의 600리 땅을 주겠다고 하였다. 초 회왕이 이 말을 믿고 제나라의 동맹을 파기한 후 장의에게 사신을 보내자, 장의는 봉읍(奉邑) 6리를 주겠다고 조롱하였다. 《史記 張儀列傳》 초나라……부쳤네 초 회왕이 굴원의 간언을 듣지 않고 무관(武關)의 회맹에 참석했다가 진(秦)나라에 억류되어 3년만에 죽자, 초나라 사람들이 진나라를 원망했다. 《史記 項羽本紀》 북저의……있네 소상반죽(瀟湘斑竹)을 말한다. 순 임금이 별세하자, 순 임금의 두 비(妃)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소상강 가에서 통곡하다 죽었는데, 두 비가 흘린 눈물이 대나무에 묻어 얼룩이 졌다고 한다. 굴원의 〈상부인(湘夫人)〉에 "황제의 따님들이 북쪽 물가에 빠졌으니 그 아름다운 모습이 내 수심을 자아내네.[帝子降兮北渚, 目眇眇兮愁予.]"라고 하였다. 《楚辭 九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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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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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결을 세 번 들어 보이다117) 三擧玉玦 백만 군대에 이만 군사로 충분한 요새요118)바람 탄 범과 구름 몬 용이 교전하던 곳이라우레와 천둥 노한 듯이 몰아치던 사이에늠름한 위엄있는 얼굴로 연회 마주했네술통 앞 광경 다 의심할 만하니다시 옥결 들어 보인 이 어떤 사람인가포어 실은 수레 어젯밤 사구를 지나갔으니119)초나라 삼호에서 벌떼처럼 많이 일어났네120)장군이 손수 팔천 병사 지휘해 이끌고서강을 건너 서쪽으로 가니 누가 막을 수 있으랴121)신안 구덩이에 묻힌 자 반은 진나라 사람이니122)눈앞의 사슴 있지만 썩은 쥐와 같구나함곡관 이미 주머니 속 물건 되었으니먼저 들어가 종거123)를 취한 이 누구인가분기탱천하기로는 장수나 병졸이나 마찬가지였으니그 형세 금도124)를 압도하여 막기 어려웠네누가 파상에서 목숨 부지하고 있는 이로 하여금와서 홍문에서 주빈의 차례 짓게 하였나125)남아가 서로 만나 또 기쁘게 연회 즐기니만 마리 소고기 안주에 만 곡 술이로다천지가 암암리에 콧대 우뚝한 이에게 들어가니126)부월만 공연히 왕의 처소에 남아 있누나모신이 이때 간담이 찢어질 듯하였으니우리 군주의 대사 어긋남을 차마 볼 수 있었으랴힘이 없으니 목을 베어 피 뿌리지 못하고훌륭한 말 있어도 누가 말을 전하겠나허리춤에 옥결을 차고 있는 사람옥결 차고 군주 앞에서 기다리니정신은 눈에 있고 옥결은 손에 있어눈으로 신호를 보낼 적에 옥결도 들었네명칭을 통해 내포된 뜻 생각할 수 있고작은 사물이 예로부터 큰일을 깨우친다네임금의 마음 하루 안에 결정되길 어이 기다릴꼬이 기회는 하늘이 준 것임을 알아야 하거늘번거롭게도 내가 두 번 세 번 다시 들었건만어찌하여 장군은 나와 함께하지 않는가달콤한 말에 월나라 구천을 이미 믿었으니원대한 계책 세운 오자서를 누가 따르랴127)속내 감추고 나와 검무 추고도 베지 못했으니128)그 작은 인이 어찌 아녀자에게 부끄럽지 않으랴마침내 연회 끝나고 옥술잔 부서졌으니옥결 대로 결정하지 못하고 한갓 의심만 했네129)관옥이 재물로 이간질하여버림받아 팽성에서 근심 품게 하였네130)범증 같은 사람도 제대로 쓰이지 못하거늘하물며 너는 기물이니 누가 너를 보배로 여기랴어찌하여 면목 없이 강동으로 건너가리오오강 가에서 한 자루 칼로 용감히 자결했네131) 百萬軍容百二關風虎雲龍交會處雷驚霆怒叱咜間凜凜威顔對樽俎樽前物色儘堪猜更有擧玦人何許鮑車昨夜過沙丘蜂起多從三戶楚將軍手提八千兵渡江西來孰能禦新安一坑半秦人鹿在眼中如腐鼠函關已爲囊中物先入何人取鍾衝冠怒髮將士同勢壓金刀難自沮誰敎灞上假遊魂來作鴻門賓主序男兒相見且爲歡萬牛之肴萬斛醑乾坤暗入隆準袖斧鉞徒然在王所謀臣此時膽欲裂忍見吾君大事去無力難將頸血濺有言誰憑口耳語腰間寶玦之子佩佩向君前爲延佇神惟在目玦在手目送神時玦又擧因名可思有意存小物從來可喩巨君心何待日中決此機須知天所予煩吾再三擧復擧胡乃將軍不我與甘言已信越句踐遠圖誰從吳子胥藏來舞釰亦不斷小仁能無愧兒女終然宴罷玉斗碎玦不取決徒疑阻從敎冠玉用間金受玦彭城抱憂緖人如范增不能用況汝器也誰玉汝夫何無面渡江東一釰勇決烏江渚 옥결을……보이다 홍문(鴻門)의 연회에서 유방(劉邦)을 죽이자는 암시로, 범증(范增)이 항우에게 눈짓을 하며 옥결(玉玦)을 세 번 들어 보였으나, 항우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결국 유방은 번쾌(樊噲)의 도움으로 그곳을 탈출하였다. 《史記 項羽本紀》 백만……요새요 난공불락의 요새를 말한다. 《사기》 〈고조본기(高祖本紀)〉에 "진(秦)나라는 지세(地勢)가 뛰어난 나라로, 산하(山河)의 험고(險固)함을 띠고 천 리나 멀리 떨어져 있어, 창을 가진 백만 군대를 진나라는 그 100분의 2로 막을 수 있다.[持戟百萬, 秦得百二焉.]"라고 하였다. 포어……지나갔으니 진시황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이다. 진시황이 순행을 하던 도중 사구(沙丘)의 평대(平臺)에서 죽었는데, 정승 이사(李斯) 등이 진시황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시신을 싣고 갔는데, 시체에서 썩는 냄새가 나므로 수레에 포어(鮑魚)를 실어서 냄새를 감추었다. 《史記 秦始皇本紀》 초나라……일어났네 초나라 삼호는 초나라 유민(遺民)을 뜻하는 말로, 초 회왕(楚懷王)이 진(秦)나라에 억류되었다가 3년 만에 죽은 일로 인해 초나라 사람이 진나라를 몹시 원망하여 "초나라에 비록 세 집만 남아 있어도, 진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은 분명히 초나라 사람들일 것이다.[楚雖三戶, 亡秦必楚也.]"라는 말까지 나왔다. 《史記 項羽本紀》 진시황이 죽은 뒤에, 진승(陳勝)이 오광(吳廣)과 난을 일으켜 스스로 초나라 왕이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각처에서 봉기가 일어나 진나라는 결국 멸망했다. 《史記 陳涉世家》 장군이……있으랴 항우가 강동(江東)의 자제 8천 명을 이끌고 강을 건너 진(秦)나라 군사를 격파하고 서초 패왕(西楚覇王)이 되었다. 《史記 項羽本紀》 신안……사람이니 항우가 하북(河北)을 평정하고 진나라 관중(關中)에 들어가고자 하였는데, 진나라의 항복한 군사들이 원망하는 말을 많이 하였다. 항우는 밤에 이들을 공격하여 진나라 병졸 20여 만 명을 신안(新安)의 성 남쪽에 파묻어 죽였다. 《史記 項羽本紀》 종거 진나라 궁궐의 상징적인 기물이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천하의 병기를 거두어 함양(咸陽)에 모은 뒤 이를 녹여서 종거(鍾鐻)와 12개의 동인상(銅人象)을 만들어 궁전 안에 놓아 두었다. 《史記 秦始皇本紀》 금도(金刀) 한나라 유방을 가리킨다. '유(劉)'를 파자(破字)하면 '묘(卯), 금(金), 도(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금도'라 한 것이다. 누가……하였는가 항우와 유방이 함양(咸陽)을 두고 쟁탈할 당시, 유방이 먼저 함양을 점령한 뒤 파상(灞上)에서 10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주둔해 있었다. 항우는 유방이 함양을 함락했단 소식을 두고 격분한 나머지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홍문에 진주하여 유방을 공격하려 하였는데, 항우의 숙부인 항백(項伯)의 조정으로 서로 화해하기로 약속했다. 이에 유방이 직접 홍문으로 찾아가서 사과하니, 항우가 연회를 베풀어 유방을 접대했다. 《史記 項羽本紀》 천지가……들어가니 천지가 한 고조 유방의 손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콧대가 우뚝한 자는 유방을 가리킨다. 《사기》 〈고조본기(高祖本紀)〉에 "고조의 위인을 보면 콧대가 우뚝하고 용의 얼굴이었다.[高祖爲人 隆準而龍顔]"라고 하였다. 달콤한……따르랴 항우가 범증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부차가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은 일에 빗댄 것이다. 춘추 시대에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패배한 뒤 항복하고 오나라에서 노복으로 있을 적에, 구천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오나라의 태재(太宰) 백비(伯嚭)가 월나라와 화친할 것을 주장하였다. 오자서(伍子胥)는 부차에게 월왕 구천을 죽여야 한다고 간언했으나, 부차는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고 백비의 말을 들어 구천을 놓아주었으며, 훗날 백비의 참소를 듣고 오자서를 죽였다. 이 때문에 결국 오나라는 월나라에게 멸망을 당했다. 《史記 伍子胥列傳》 숨어……못했으니 홍문의 연회에서 범증이 항장(項莊)을 시켜 검무(劍舞)를 추다가 유방(劉邦)을 찔러 죽이라고 하였다. 이에 항장이 나와 검무를 추며 기회를 노렸다. 《史記 項羽本記》 마침내……했네 항우가 범증에게 옥술잔을 주었었는데, 홍문의 연회에서 항우가 유방을 죽이지 않자 범증이 노하여 옥술잔을 깨뜨렸다. 후에 유방의 반간계(反間計)로 인해 항우가 범증을 의심하자 범증은 화가 나서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중도에 화병으로 등창이 나서 팽성(彭城)에서 죽었다. 《史記 項羽本紀》 관옥이……하였네 관옥(冠玉)은 유방의 책사 진평(陳平)을 가리키는 말로, 용모가 수려하여 '관옥'이라 불렸다. 항우가 진평에게 황금 4만 근을 가지고 초나라로 들어가 항우와 신하들 사이를 이간질하게 하여, 결국 항우는 범증을 의심하게 되었다. 범증은 항우의 의심에 분노하여 고향으로 떠났는데, 팽성(彭城)에 이르러 등창이 나서 죽었다. 《史記 項羽本紀》 어찌하여……자결했네 항우가 해하(垓下)의 전투에서 패한 뒤 한나라 병사에게 쫓겨 오강(烏江)에 이르자, 정장(亭長)이 배를 대주며 강동으로 건너가 권토중래하라고 권유했는데, 항우는 "내가 강동의 자제 8천명을 데리고 강을 건너 서쪽으로 왔는데, 지금 한 명도 돌아가지 못하니, 비록 강동의 부들이 불쌍이 여겨 나를 왕으로 세우더라도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보겠는가?[籍與江東子弟八千人渡江而西, 今無一人還, 縱江東父兄憐而王我, 我何面目見之?]"라고 말하고, 정장에게 오추마(烏騅馬)를 주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史記 項羽本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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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중에서 사제와 유별하다132) 隆中留別舍弟 산사람이 옛 〈양보음〉 읊기를 그만두니133)한나라 해가 사립문 동쪽에 붉게 떠오르네풍도와 모략이 홀연 제주와 들어맞았으니134)더이상 예전의 시골 늙은이가 아니어라갑옷 두른 말을 따라서 산속 떠나가니전원에서 오직 자신의 몸 잘 보존했었지유가의 빛나는 업적 건안에 달려 있는데병권 통재하는 권력 간웅에게 돌아갔네135)산동의 큰 귀 우뚝한 콧대 지닌 후예136)가군막에 들어가 오랫동안 기공으로 있었으니천지 사이에서 떠돌아다니며풍진 속에서 세월을 보냈네못 안에서 오랫동안 운우의 형세 잃었으니137)적룡138)을 하늘에 날아오르게 할 이 누구인가융중은 본래 한나라 산하이니여기서 살아가는 건 나와 네가 마찬가지구나몸소 밭 갈며 신야 노인139)을 사모했으니산 밖의 시끄러운 속세 소리에 내 귀 닫았네한가로운 사람 그저 와룡이라 자호했는데명철한 임금 어찌하여 인재를 점쳤는가140)추운 날 빈한한 집에 바야흐로 눈보라 칠 제귀한 분이 누추한 집에 번거롭게도 왕림하였네충정에 쉬이 격발하여 감동의 눈물 흘리니몇 마디 말로 뜻이 맞아 도리어 융화되었어라임금 은혜가 칠 척 이 몸을 허여해 주셨으니가업은 작은 터전에 사는 그대에게 남기노라봄 언덕에서 밭 가니 손으로 쟁기 잡고안개 낀 언덕에서 소를 치니 집에 아이종 있누나산수의 그윽한 정취 나눠주기 좋으니최씨 마씨 좋은 이웃141)과 줄곧 지냈네언덕에서 척령이 헤어짐142)을 한스러워하지 말라이제 떠나면 마땅히 중흥의 공 세우리라은하수로 한번 씻어내어 천지 사방 맑아지리니143)염령에 기를 불어 넣어144) 다시 융성하길 기약하네남양의 아름다운 기운 옛 황제의 고향이요145)탕목읍의 은혜로운 물결146) 응당 다하지 않으리라공 이루면 마땅히 병 많던 자방처럼 사직하리니147)재산이 어찌 꼭 도주공148)처럼 부유할 것 있으랴이별에 임해 또 말하노니, 아, 우리 아우여삼가 본분을 지켜 가풍을 실추하지 말라 山人吟罷古梁甫漢日赤臨柴門東風期忽與帝冑親非復當年田舍翁身隨甲馬出山去好保田園惟爾躬劉家赤業屬建安太阿之柄歸奸雄山東大耳隆準孫入幕多年爲寄公飄零蹤跡宇宙間荏苒歲月風塵中池中久失雲雨勢赤龍誰使飛蒼穹隆中自是漢山河一區生涯吾爾同躬耕竊慕莘野叟山外塵喧吾耳聾閒人秪自號臥龍明主如何占匪熊天寒白屋正風雪玉武頗煩臨蓽蓬危忱易激感淚零片言契合還昭瀜君恩許我七尺身家業留君三畝宮畊田春壠手把犂牧牛烟郊家有童溪山幽趣好分付崔馬芳隣爲始終原頭莫恨鶺鴒分此去當樹中興功天河一洗六合淸噓氣炎靈期再隆南陽佳氣舊帝鄕湯沐恩波應不窮功成當謝子房病産業何必陶朱豐臨分且曰嗟余季愼勿分事墜家風 융중에서 사제와 유별하다 융중(隆中)은 양양(襄陽)에 있는 산의 이름으로, 제갈량(諸葛亮)이 유비(劉備)를 만나기 전에 은거하던 곳이다. 산사람이……그만두니 제갈량이 출사하기 전 남양(南陽)에서 농사를 짓고 있을 때 매일 새벽과 저녁에 무릎을 감싸 안은 채 〈양보음(梁甫吟)〉 길게 읊었다고 한다. 《三國志 蜀書 諸葛亮傳》 풍도와……들어맞았으니 제갈량이 제주(帝胄), 즉 한나라 왕실의 후예인 유비(劉備)에게 발탁된 것을 말한다. 당나라 이백(李白)의 〈양보음〉에서, 강태공이 10년 간 낚시질하며 지내다 문왕을 만난 고사를 읊어 "무려 삼천육백 번 낚시질하는 동안, 풍도가 은연중에 문왕과 들어맞았다오.[廣張三千六百釣, 風期暗與文王親.]"라고 한 것을 차용한 것이다. 유가의……돌아갔네 건안(建安)은 한나라 헌제(獻帝)의 연호로, 196년~220년까지이다. 간웅(奸雄)은 조조(曹操)를 가리킨다. 건안 연간에 한나라 황실이 쇠하여 전국이 혼란했는데, 황건적(黃巾賊)의 난을 토벌하며 세력을 얻은 조조가 헌제를 허도(許都)로 맞이하여 옹립하고, 승상(丞相)을 거쳐 위왕(魏王)이 되는 등 세력을 키워 가며 실권을 장악했다. 《三國志 光武帝紀》 《後漢書 獻帝紀》 산동의……후예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을 가리킨다. 못……잃었으니 유비가 오랫동안 재주를 펼칠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삼국 시대 오나라 주유(周瑜)가 유비를 경계해야 한다면서 "교룡이 운우를 얻으면, 끝내 못 속의 물건이 아니게 될까 두렵다.[恐蛟龍得雲雨, 終非池中物也.]"라고 하였다. 《三國志 吳書 周瑜傳》 적룡(赤龍) 적룡은 전설 속에 신선이 타고 다닌다는 용으로, 한 고조 유방은 적룡(赤龍)의 정감(精感)을 받아서 태어났다 하여 그를 적제자(赤帝子)라 칭했다. 여기서는 유방의 후예인 유비를 가리킨다. 신야 노인 은나라의 명신인 이윤(伊尹)을 가리킨다. 이윤이 유신(有莘)의 들에서 농사를 짓다가 탕왕(湯王)의 초빙을 받고 조정에 들어가 재상이 되어 왕업을 성취시켰다. 《孟子 萬章上》 명철한……점쳤는가 유비가 초야의 제갈량을 찾아온 일을 주나라 문왕(文王)이 강태공(姜太公)을 만난 일에 비유한 것이다. 문왕이 사냥을 나가기 전에 점을 쳤더니 "잡을 것은 범도 곰도 아니고[匪熊] 왕패(王霸)를 보좌할 인물이다."라는 괘(卦)가 나왔다. 그 뒤 문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위수(渭水)에서 강태공 여상(呂尙)을 만나 수레에 태우고 함께 돌아왔다. 《史記 齊太公世家》 최씨……이웃 한나라 최인(崔駰)과 사마상여(司馬相如)를 가리킨다. 남조 시대 양(梁)나라 유준(劉峻)의 〈변명론(辯命論)〉에 "그 치욕을 당한 것이 어찌 최씨 마씨의 부류이겠는가?[其爲詬恥, 豈崔馬之流乎?]"라고 하였다. 언덕에서 척령이 헤어짐 제갈량과 그 아우가 이별한다는 의미이다. 척령은 우애있는 형제를 뜻하는 말로, 《시경》 〈소아(小雅) 상체(常棣)〉에 "저 할미새 들판에서 호들갑 떨듯, 위급한 때에는 형제가 서로 돕는 법이라오. 항상 좋은 벗이 있다고 해도, 그저 길게 탄식만을 늘어놓을 뿐이라오.[鶺鴒在原, 兄弟急難. 每有良朋, 況也永歎.]"라고 하였다. 은하수로……맑아지리니 전쟁으로 혼란한 시대를 평정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당나라 두보(杜甫)의 〈세병행(洗兵行)〉 시에 "어찌하면 장사가 은하수를 끌어와서, 갑병을 깨끗이 씻어 영원히 쓰지 않게 할꼬.[安得壯士挽天河, 淨洗甲兵長不用.]"라고 하였다. 염령에……넣어 한나라를 부흥시킨다는 의미이다. 염령은 화덕(火德)으로 왕이 된 한(漢)나라를 가리킨다. 아름다운……고향이요 남양(南陽)은 후한 광무제(光武帝)의 가향(家鄕)이다. 술사(術士)인 소백아(蘇伯阿)가 남양 용릉(舂陵)의 지형을 살펴보고는 "상서로운 기운이 울창하고 성대하다.[佳氣哉! 鬱鬱葱葱然.]"라고 하였다. 《後漢書 光武帝紀》 탕목읍의 은혜로운 물결 한 고조의 고향은 패현(沛縣)의 풍읍(豐邑)인데, 고조가 황제 자리에 오른 뒤 고향에 갔을 때 풍읍을 탕목읍으로 삼아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史記 高祖本紀》 공……사직하리니 자방(子房)은 장량(張良)의 자이다. 장량은 체구가 작고 지병(持病)이 많았는데, 훗날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우는 데 공을 세웠다. 한나라의 건국 이후 장자방은 공훈을 대단한 것으로 보지 않고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노닐고자 은퇴하였다. 도주공 도주공(陶朱公)은 춘추 시대 월나라 대부 범려(笵蠡)의 별칭이다. 범려는 월왕 구천을 도와 오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벼슬을 버리고 도(陶) 땅으로 들어가 주공(朱公)으로 행세하며 거금을 벌었다. 《史記越王句踐世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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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누락 題缺 오류선생 본래 산에 살았는데우연이 객이 되어 세상에 나왔다가돌아가 날마다 술에 취해 깨지 않으니버들 다섯 그루가 봄빛을 다투는 줄 몰랐네170)천년의 동방에 -원문 3자 결락-불상 앞에서 손가락 꼬며 –원문 2자 결락-171)근래 수염이 삼천 길이나 자라 나니큰 아이 작은 아이 모두 아버지 불러대누나애써 사립문 밖에 버들 다섯 그루 심어172)옛사람과 높은 명성 나란히 하려 하네옛사람은 벼슬 버리고 강호에서 은일했는데지금 사람은 참선 피해173) –원문2자 결락- 전하네도끼 잡고 나무 베어 땔나무 만들고콩죽과 명아주국 끓여 먹는 것만 못하니그렇지 않으면 아내가 집을 떠날 적에긴 가지 꺾어 이별의 정 나타냈겠지 五柳先生本在山偶然爲客人間行歸來日日醉不醒不知五柳爭春榮千載東方【三字缺】佛前撚指堅【二字缺】邇來長髮三千丈大兒小兒呼爺聲强裁五柳柴門外欲與古人齊高名古人投簪逸海山今人逃禪傳【二字缺】不如操斧斫爲薪煮取豆粥與黎羹不然生妻去室時折得長條表離情 오류선생……몰랐네 진(晉)나라 도연명(陶淵明)이 팽택 영(彭澤令)으로 있다가 뜻이 맞지 않아 그만두고 전원으로 돌아와 집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어 놓고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 자칭하였다. 《古文眞寶 後集 卷2》 원문 2자 결락 '堅'은 원문의 문제로 번역하지 않았다. 심어 대본에는 '裁'로 되어 있는데, 문맥에 의거하여 '栽'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참선 피해 도선(逃禪)은 좌선(坐禪)을 도피한다는 뜻이다. 당 현종(唐玄宗) 때의 문신 소진(蘇晉)이 술을 매우 즐겨 마셨는데, 두보(杜甫)의 음중팔선가(飮中八仙歌)에 "소진은 수불 앞에서 장기간 재계를 했는데, 취중에는 가끔 좌선을 도피하기 좋아했다네.[蘇晉長齋繡佛前, 醉中往往愛逃禪.]"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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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액을 청하는 계사 請額啓辭 현종(顯宗) 병오년(1666년) 9월 11일에 대신 병조판서(兵曹判書) 소결청 당상(疏決廳堂上)을 인견할 때 사간(司諫) 여성제(呂聖齊)30)가 아뢰기를 "찬성에 추증된 정문부(鄭文孚)가 의병을 일으킨 사적은 이미 함경 감사(咸鏡監司) 민정중(閔鼎重)의 계문(啓聞) 및 전 평사(評事) 이단하(李端夏)의 상소 중에 다 기록되어 있으니 신이 다시 전하의 귀를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으니, 조정에서 이미 포상하는 법을 내렸고 특히 총장(寵章)을 베풀었으니 매우 성대한 일입니다. 이에 북방(北方) 선비들이 존모하고 받들어 의병을 일으킨 지역에 서당을 세우고 그 당시 함께 거의한 이붕수(李鵬壽) · 강문우(姜文佑) · 최배천(崔配天) · 지달원(池達源) 등을 배향(配享)하여 제사지낼 곳으로 삼고서 사액을 청하고자 하였으나 먼 지방 사람들이 임금에게 알릴 길이 없으므로 감히 이를 우러러 진달합니다. 성상께서 만약 특별히 사액을 하신다면 교화를 수립하고 인심을 굳게 뭉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주상께서 "해조에 말하여 품처하라."라고 전교를 내렸다.또 다시 아뢰기를31) "정 문부가 의병을 일으킨 공은 오래 되어도 사라지지 않아 70여 년이 지난 뒤에 이르러 비로소 조정에서 소급하여 포상하는 은전을 입었으니 북방 인심이 크게 고무되었습니다. 이에 사우를 세워 그때 함께 거의(擧義)한 여러 사람을 배향하면 더욱 존경하고 사모하는 정성을 볼 수 있을 것이니 특별히 사액을 내려주어 먼 지방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여 주면 참으로 격려와 권면하는 도리에 합당합니다. 그러나 이 일이 은전(恩典)에 관계되므로 아래에서 멋대로 결단할 수 없으니 성상께서 재가하여 주심이 어떻습니까?"라고 하니, 계하(啓下)하기를 아뢴 대로 시행하라고 하였다. 顯宗丙午九月十一日, 大臣兵曹判書疏決廳堂上, 引見時, 司諫呂聖齊所啓 '贈贊成鄭文孚倡義事蹟, 已悉於咸鏡監司閔鼎重啓聞及前評事李端夏陳疏中, 臣不必更瀆, 而朝廷旣下追褒之典, 特施寵章, 甚盛擧也。北方士子, 向慕尊奉, 營立祠宇於倡義之地, 以其時同事李鵬壽姜文佑崔配天池達源配享, 以爲香火之所, 欲爲請額, 而遠方之人, 無路上聞, 故敢此仰達。自上若特爲賜額, 則可以樹立風聲, 固結人心矣。' 上曰: "言于該曹稟處事," 傳敎矣。'鄭文孚倡義之功, 久而不泯, 至於七十餘年之後, 始蒙朝家追褒之典, 北方人心, 大有所聳動, 而立祠宇, 以其時同事諸人配享者, 尤可見尊慕之誠, 特賜恩額, 以副遠人之望, 誠合激勸之道, 而事係恩典, 自下不得擅便, 上裁何如,' 啓依所啓施行。 여성제(呂聖齊) 1625~1691.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희천(希天), 호는 운포(雲浦), 시호는 정혜(靖惠)이다. 1689년 다시 우의정이 되고 영의정에 이르러 사직, 행중추부판사(行中樞府判事)로 전임했다. 이때 남인(南人)들이 성혼(成渾) ·이이(李珥)를 무고하고 문묘(文廟)에서 출향(黜享)하려 하자 그 관계관으로서 스스로 청죄(請罪)한 뒤 낙향하였다가,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廢位)를 반대하는 상소를 위해 상경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 울분으로 발병, 고향에서 죽었다. 또 다시 아뢰기를 원문은 임금이 한 말처럼 주어가 구별되지 않았으나, 내용상 이 부분은 여성제가 다시 아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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