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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夏山華閥擅吾東詩禮風聲奕世長司馬宅中能繼武幽蘭谷裏自留香修文一夜丹祲壑化島千年海變桑苽葛情深淸範隔春山寂寂月蒼蒼査生 <지명>完山</지명>后▣ ▣<인명>在植</인명> 謹再拜哭輓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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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창(崔圭昌)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崔圭昌 李殷弼 崔圭昌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최규창(崔圭昌)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최규창(崔圭昌)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고시체의 장문시이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 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인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최규창은 유학자로, 임영(臨瀛)의 후인이며 출신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그는 스스로를 시하생(侍下生)이라고 적고 있는데, 시하생이란 당신을 모시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죽은 사람이 본인의 어버이 나이 정도가 될 때 스스로를 시하생이라고 칭하였다.○ 원문 텍스트 天降仁賢惜太遲如何世道轉遷移家閥南溟分派系名 聲東邑擅文詞未信康寜斯日遽重嗟老宿幾人送鯫生不 勝幽明成立馬松門倍似思 侍下生 臨瀛崔圭昌 謹再拜奉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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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기(金俊起)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金俊起 李殷弼 金俊起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김준기(金俊起)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김준기(金俊起)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고시체의 장문시이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인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김준기는 유학자로, 명주(溟州)의 후인이다.○ 원문 텍스트 忽接訃音孰不驚百年人事夢中成家傳蓮一情親載庭 秀蘭三哭弟兄烟月平生帝刀玉樓此日籍仙名堪憐以 會頻頻席誨語丁寜我耳明 溟州后契生 金俊起 謹再拜哭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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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光緖貳年丙子</연도>十一月二十五日 前明文右明文事段要用所致伏在<지명>宅上洞</지명>前坪玄字畓四斗落只所耕八負二束㐣價折錢文一百兩依數捧上是遣並以旧文五丈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他說以此文記憑考爲乎乙事畓主自筆幼學<인명>金炳斗</인명>[着名]證人幼學 <인명>田仁鴻</인명>[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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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계약서

土地賣買契約書右契約事自己土地在於<지명>扶安下西面老谷坪</지명>日字四八0六畓四㽝十一斗落結三十負五束庫果同坪月字四八五0畓一㽝三升落結六束庫果同坪孟字四九二八畓四㽝三斗落結九負㐣代金肆佰陸拾円依數領受고以新文一張永永放賣거온日後若有他說以此文記憑考事<연도>大正二年</연도>陰五月十日<지명>扶安郡下西面衣服洞</지명>一統四戶賣渡人 <인명>鄭公仁</인명>[印]證人 <인명>金化西</인명>[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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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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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정읍(井邑) 여산송씨(礪山宋氏)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 2 고문서-치부기록류-택기 종교/풍속-민간신앙-택기 전북 정읍시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정읍 영원 여산송씨가 정읍(井邑)의 여산송씨(礪山宋氏) 가문(家門)에서 작성한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 정읍(井邑)의 여산송씨(礪山宋氏) 가문(家門)에서 작성한 장사택일지(葬事擇日紙)의 하나이다. 장례를 치루기 위하여 지관(地官)이 장례 날짜와 시간을 선택하고 이를 문서로 작성하여 망자의 가족에게 건네준 것이다. 장사택일지에는 묏자리의 형국과 방향을 비롯해 취토(取土), 개토(開土), 혈심(穴深), 하관(下棺) 등의 시간과 방위를 기록하였다. 문서의 앞쪽에 "정읍군(井邑郡) 이평면(梨坪面) 창동(倉洞) 후록(後麓)"으로 매장하게 될 선산(先山)을 표시하여 놓았다. 그리고 중간에 "坤化命 丁巳"로 기록하고 있어서 망자가 여자이며 정사생(丁巳生)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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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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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심인규(沈仁圭)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沈仁圭 李殷弼 沈仁圭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심인규(沈仁圭)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심인규(沈仁圭)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고시체의 장문의 시였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인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심인규는 유학자로, 이은필에 대하여 이 세상의 벗이라고 칭하였다.○ 원문 텍스트 古云七十世皆稀公是九旬仙化歸吉地回龍衝海起上天 駕窩向雲飛苓年荊棣雖有感後日芝蘭正報輝問 구新元無恙過奎然何祟與吾違 陽界友 吉珠沈仁圭 謹拜哭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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輓金願受【基性】 先哲遺風去愈篤 惟公斯世率眞人 積而能散誠懷義 壽則彌高可驗仁 永傳螟嗣謨惟舊 親抱麟孫訓亦新 勤款容儀無復覩 强題哀感輓傷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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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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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에서 짓다【신해년(1671, 48세) 봄 남쪽 지역에 장역(瘴疫)65)이 돌아 사망자가 줄을 이었다. 우리 집안 또한 이러한 질환에 걸려 늙은 처를 데리고 촌려(村閭)로 나가 지냈으니, 스스로 풀과 나무를 베는 수고로움을 면치 못하였으며 친지 및 이웃 마을과 왕래하지 않은 지 몇 개월이었다. 3월 10일 밤 꿈에서 문득 절구 한 수를 읊었으므로 깨어난 뒤에 이를 기록하였다. 나는 반평생 병에 시달려 세상일을 마음에 두지 않은 것이 50년이나 되었으며 또 늙었으니, 기구(起句)의 뜻은 자연히 감회가 일어서 그런 것이다. '문장' 두 글자는 어떤 본에는 '공명(功名)'으로 되어 있다. 병서.】 夢作【辛亥春。瘴疫遍于南中。死亡者相繼。余家亦罹此患。挈老妻出寓村閭。未免躬自樵蘇之勞。親屬隣里不肯相過數月。暮春初十日夜夢。忽吟一絶。覺罷記之。余半生病癃。世事之不入心者五十年且老矣。起句之意。自然相感耶? 文章二字。或作功名。幷序。】 문장【어떤 본에는 '공명(功名)'으로 되어 있다】으로 세상을 뒤덮는 것은 한갓 누가 될 뿐이요부귀가 하늘을 찌르는 것 또한 절로 수고롭네어찌 같으랴, 흰 구름과 밝은 달 속에서백 년 토록 일 없이 강가 언덕에 누워 있는 것과두 번째【기유년(1669, 46세) 11월 18일 꿈에 내가 대나무 울타리 아래를 따라 돌아왔는데 그대로 몸을 솟구쳐 높이 날았으니, 상쾌하여 마치 하늘에 오른 듯하였다. 이에 이 절구를 읊어 잠에서 깬 뒤 기록하였다.】강촌에 해 떨어져 참으로 어슴푸레하니대나무 아래로 돌아오자 이슬이 옷을 적시네높이 나는 기러기 한번 울고 산에는 달 뜨니시원스레 날아 해동(海東)의 경계를 건너네 文章【一作功名】盖世徒爲累富貴薰天亦自勞何似白雲明月裏百年無事臥江臯其二【己酉十一月十八日夢。余從竹籬下歸來。仍聳身高飛。快似登天然。乃詠此絶。覺後記之。】江村日落正依微竹下歸來露滴衣高鴈一聲山月出廓然飛度海東圻 장역(瘴疫) 무덥고 습기 많은 지역에서 병독(病毒)으로 인해 발생하는 유행성 열병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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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 상인(惠上人)에게 주다【병서. 혜사(惠師)의 스승인 성사(性師)가 목우자(牧牛子)200)를 위하여 누대 하나를 세우고 '강학(降鶴)'이라 편액하였다. 지금 혜사가 멀리서 찾아와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는데 나는 사양하면서 지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혜사가 다시 절구 한 수를 얻어 이 걸음에 대한 증거로 삼기를 청하였다. 이때는 가을 맑고 기운 깨끗하여 산을 마주한 사람이 산수의 흥취를 금할 수 없어 붓 가는대로 써서 주고, 이어 오언절구를 강학루에 부쳐 제하였다. 기유년(1669, 46세) 가을 백봉산옹(白鳳山翁).】 贈惠上人【幷序。惠師之師性師。爲牧牛子起一樓。扁降鶴。今惠師遠來請記文于余。余辭不就。師又請得一絶以證此行。是時也。秋晴氣凈。對山人不禁山水之興。信筆書贈。仍以五言絶寄題降鶴樓云。己酉秋。白鳳山翁。】 도인(道人)은 원래 산에 들어간 사람이니구름 속에 산이 많아 전혀 가난하지 않네무슨 일로 산에서 나와 나를 찾아왔는가나의 마음 물과 같아 거울처럼 티끌 없네 道人元自入山人雲裏羣山摠不貧何事出山來見我我心如水鏡無塵 목우자(牧牛子) 고려 후기의 선승인 지눌(知訥, 1158~1210)을 가리킨다. 목우자는 그의 호. 고려 후기에 조계종을 중흥하여 '조계종의 개조(開祖)'라 불린다.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조직해 불교의 개혁을 추진했으며,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하여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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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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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리기설 原理氣說 천지(天地)에는 리(理)가 있고 기(氣)가 있고 형질(形質)이 있는데 리와 기를 합하여 총언(總言)하여 '도(道)'라고 한다. 지수(至粹)한 것을 '리(理)'라고 하고 변동(變動)을 일러 '기(氣)'라고 하고 유행(流行)을 일러 '도'라고 한다. 리는 기에 깃들고 기는 형질에 깃드니 이 때문에 기가 모여서 천(天)의 형(形)이 되고 기가 그 가운데에 깃들게 된다. 기가 결합하여 지(地)의 질(質)이 되고 기가 그 가운데에 통(通)하게 되니 이 기는 천지의 가운데에 오르내려 운행이 쉬지 않는데 쉬지 않는 오묘한 이것을 일러 '리(理)'라고 한다. 리는 지정(至靜)하고 기는 지동(至動)하니 동은 스스로 동할 수 없으니 리에서 말미암고, 정은 스스로 발할 수 없으니 기에 타게 되는데 이 때문에 지정무잡(至精無雜)한 것은 리이고, 정(正)이 있고 사(邪)가 있고 통(通)이 있고 색(塞)이 있는 것은 기이다.오기(五氣)가 순포(順布)하여 사시(四時)가 정(正)을 얻고 생장(生長)을 이루니 만 가지 품물의 순성(順成)은 바름에서 기가 발하고 리가 그 바름을 탄다. 그 혹 사시(四時)·오기(五氣)가 그 상(常)을 얻지 못하고 한서(寒暑)·풍우(風雨)가 어그러져서 절기를 잃는 것은 기가 사(邪)에서 발하여 리가 사(邪)에 가려진 것이다. 사람의 생은 천지의 기이니 이 기가 응결하여 형질(形質)이 되고 기가 형질의 가운데에 깃든다. 천지의 리가 부여하여 성(性)이 되고 성이 기에 깃든다. 성이 기와 합하여 날마다 쓰임에서 유행(流行)하니 또 그것을 일러 '도(道)'라고 한다. 그 기는 구각(軀殼)의 가운데에 통행(通行)하니 발하여 한번 호흡하고 한번 내쉬니, 또 천지의 기와 더불어 상통하여 불식(不息)하니 불식의 묘리는 이것을 일러 '리(理)'라고 한다. 무릇 지각(知覺)·운동(運動)하는 것은 기이고 지각·운동의 묘리는 리이다. 이 때문에 리는 지정(至靜)하고 기는 지동(至動)하고 리는 선·악이 없고 기는 선이 있고 악이 있다.사단이 발하여 칠정(七情)이 중절(中節)을 얻은 것은 기가 선에서 발하여 리가 선에 타게 된다. 사단(四端)·칠정(七情)이 그 바름을 얻지 못하여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는 것이 모두 사(邪)에서 나온 것은 기가 악에서 발하여 리가 악에 가려진 것이다. 대저 사람은 하나의 천지이고 천지는 하나의 큰 사람이기 때문에 짝하여 말하면 '삼재(三才)'1)라고 하니 오직 성인이 그 기가 바르고 그 리에 합당하여 천지가 제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잘 생육되는 데에 달하니2) 사시(四時)·오기(五氣)·한서(寒暑)·풍우(風雨)로 하여 그 차례를 따르고 그 바름을 얻지 않음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주역》에서 말하기를 "천지의 도를 지나침 없이 이루고 천지의 일을 모자람 없이 돕는다."3)라고 하였으니 크도다! 성인의 이 지극함이여. 天地有理有氣有形質。 合理與氣總言之曰'道'。 至粹之謂'理'。 變動之謂'氣'。 流行之謂'道'。 理寓於氣。 氣寓於形質。 是以氣積而爲天之形而氣寓於其中。 氣結而爲地之質而氣通於其中。 是氣也。 升降於天地之中。 運行不息。 不息之妙。 斯謂之理。 理至靜氣至動。 動不能自動。 由於理。 靜不能自發。 乘於氣。 是以至精無雜者理也。 有正有邪有通有塞者氣也。 五氣順布。 四時得正。 生長遂成。 萬品順成者。 氣發於正而理乘其正者也。 其或四時五氣不得其常。 寒暑風雨乖戾失節者。 氣發於邪而理蔽於邪也。 人之生也。 得天地之氣。 是氣凝結爲形質。 而氣寓於形質之中。 天地之理。 賦而爲性。 而性寓於氣。 性與氣合而流行於日用。 又謂之道。 其氣也通行於軀殼之中。 發而爲一呼一吸。 又與天地之氣。 相通而不息。 不息之妙。 是謂之理。 凡知覺運動者氣也。 知覺運動之妙者理也。 是以理至靜氣至動。 理有善無惡。 氣有善有惡。 四端發而七情得中其節者。 氣發於善而理乘其善也。 四端七情。 不得其正。 視聽言動。 皆出於邪者。 氣發於惡而理蔽於惡也。 夫人一天地也。 天地一大人也。 故配而言之曰'三才'。 惟聖人正其氣而合其理。 以達於天地位萬物育。 使四時五氣寒暑風雨。 莫不順其序得其正焉。 故易曰: "財成天地之道。 輔相天地之宜。" 大哉! 聖也。 斯其至矣。 삼재(三才) 삼재는 세 가지 기본이라는 뜻으로, 천(天)·지(地)·인(人)을 말한다. 《주역》 〈설괘전(說卦傳)〉에 "옛날에 성인이 《주역》을 지은 뜻은 장차 성명(性命)의 이치를 순히 하기 위해서였으니, 그러므로 하늘의 도를 세운 것은 음과 양이요, 땅의 도를 세운 것은 유와 강이요, 사람의 도를 세운 것은 인과 의이니, 삼재를 겸하여 둘로 하였기 때문에 역이 여섯 번 그어서 괘를 이루고, 음으로 나누고 양으로 나누며, 유와 강을 갈음하여 쓰기 때문에 역이 여섯 자리로 문장을 이룬 것이다.[昔者聖人之作易也, 將以順性命之理, 是以立天之道曰'陰與陽', 立地之道曰'柔與剛', 立人之道曰'仁與義', 兼三才而兩之, 故易六畫而成卦, 分陰分陽, 迭用柔剛, 故易六位而成章.]"라고 하였다. 천지가 …… 달하니 《중용장구》 제1장에 "희로애락의 정이 발하지 않은 것을 '중'이라 이르고,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 이르니, 중이란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요, 화란 것은 천하의 공통된 도이다. 중과 화를 지극히 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편안히 하고, 만물이 잘 생육될 것이다.[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라는 말이 나온다. 천지의 …… 돕는다 《주역》 태괘(泰卦) 상(象)에 "하늘과 땅의 기운이 서로 통하는 것이 태괘이다. 제왕은 이로써 천지의 도를 지나침 없이 이루고 천지의 일을 모자람 없이 도와서 백성을 보호하고 인도한다.[天地交泰, 后以財成天地之道, 輔相天地之宜, 以左右民.]"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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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물편【선생의 나이 스물두 세 살에 독서할 때 쓴 일기이다.】 玩物篇【先生年二十二三。 讀書時日記。】 내가 일찍이 《일두정선생실록(一蠹80)鄭先生實錄)》을 읽어보니 "《주자중용 장구(朱子中庸章句)》에 나온 기(氣)로써 형(形)을 이루면 리(理) 또한 그곳에 품부가 된다.'라는 말을 취하지 않았다."라고 하는 말이 있다. "어찌 기 뒤에 리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나는 '일두(一蠹)는 리기(理氣)는 알았는데 주자의 본의를 알지 못했다.'라고 생각했다. 주자가 말하기를 "본원(本原)을 논한다면 리(理)가 있고 난 뒤에 기가 있게 되지만 품부(稟賦)를 논한다면 이 기가 있고 난 후에 리가 따라서 갖추어진다."81)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주자의 본의이다. 일두의 견해는 아마도 일변에 치우친 것 같으니 학자가 알지 않으면 안 된다.또 말하기를 "비유하면 리(理)는 물과 같고 기(氣)는 기(器)와 같으니 이 기가 없으면 이 리가 붙을 곳이 없어진다."라고 하였다. 만약 이 기(器)가 없다면 이 물은 흩어져서 있지 않을 것이므로 주자가 먼저 기를 말한 이후에 리를 말했다.혹 미발(未發)과 기발(旣發)82)을 의심하여 말하기를 "성낼 때를 당하여는 기쁨의 리(理)가 미발(未發)하고 슬플 때를 당하여는 즐거움의 리가 미발하니 칠정(七情)이 서로 교대로 삼가 발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꼭 이처럼 말할 필요는 없다. 사려(思慮)가 아직 발하지 않은 곳은 미발이 되고 이미 발한 곳은 기발이 되니 이 마음이 잠깐 발동한 것이 있으면 곧 미발이 아니다. 그 가운데에 4개의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상호 발동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嘗讀一蠹鄭先生實錄。 有曰: "不取朱子中庸章句氣以成形理亦賦焉。" 曰: "安有後氣之理乎云云?" 余謂'一蠹知理氣而不知朱子本意也。' 朱子曰: "若論本原則有理然後有氣。 若論稟賦則有是氣而後理隨而具。" 此朱子本意也。 一蠹之見。 恐偏於一邊耳。 學者不可不知。 又曰: "理譬如水。 氣譬如器。 無是氣則是理無着在處。" 如無是器則是水散解而無有矣。 故朱子先言氣而後言理。或疑未發旣發曰: "當怒之時。 喜之理未發。 哀之時。 樂之理未發。 七情互相伏發否?" 余曰: "不須如此說。 思慮未動處爲未發。 旣動處爲旣發。 此心乍有發動處。 便不是未發。 非有四箇心在於其中。 互相發動。" 일두(一蠹) 일두는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호이다. 정여창은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勗), 시호는 문헌이다.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에게 수학하였다. 저술로는 7권의 《일두집》이 있다. 리(理)가 …… 갖추어진다 이선기후(理先氣後)의 문제를 말하고 있다. 《주자어류(朱子語類)》 권1 〈이기 상(理氣上) 태극천지 상(太極天地上)〉에서 "이와 기는 본래 선후로 표현할 수 없다. 다만 논리적으로 추론할 때 이가 먼저이고 기가 나중인 것처럼 보일 뿐이다.[理與氣本無先後之可言, 但推上去時, 却如理在先, 氣在後相似.]"라고 하였다. 미발(未發)과 기발(旣發) 모든 행위를 미발(未發)의 체(體)와 이발(已發)의 용(用)으로 규정한 주희(朱熹)의 학설로, '미발의 성[未發之性]'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정이 아직 발하지 않은 것을 가리키고, '이발의 정[已發之情]'은 희로애락이 발한 것을 가리킨다. 《중용장구》 제1장에 "희로애락이 발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이르고,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이른다.[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희의 주에 "희로애락은 정(情)이고 아직 발하지 않은 것은 성(性)이니 편벽되고 치우친 바가 없으므로 중이라 이르며, 발함에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은 정의 올바름이니 어그러지는 바가 없으므로 화라 이른다.[喜怒哀樂, 情也, 其未發, 則性也, 無所偏倚, 故謂之中, 發皆中節, 情之正也. 無所乖戾, 故謂之和.]"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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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언고시) 詩(五言古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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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암129)에 대한 제문 祭李惺菴文 유세차 신축년(1661, 현종2) 8월 정미삭(丁未朔) 정사(丁巳)에 후학 김만영은 삼가 집안 조카 문봉의(文鳳儀)를 보내 맑은 술과 과일의 제물을 받들어 성암(惺菴) 이 선생(李先生) 영좌 앞에 공경히 제사를 올립니다.아! 세상에 학문으로 이름난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문파가 각기 다르고 학맥도 다양한데 호중(湖中)에서 정학(正學)을 마음에 두고 정주(程朱)의 학통에 가까운 사람은 천년 이래 한 분 존옹(存翁) 뿐입니다. 적막했던 백 년 동안 더는 창도한 자가 없었는데 선생이 나온 것이 다행히도 이 때를 맞았습니다. 선생은 깨끗하고 조용한 자질과 자상하고 온화한 기품으로 세상의 번잡한 일들을 일찍 사절하고 사학(斯學, 유학)에만 뜻을 기울였습니다. 모든 일이 반드시 마음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아서 존심(存心)130)을 요체로 삼았고, 심체(心體)가 반드시 고요한 데에 편안함을 알아서 직내(直內)131)를 뿌리로 삼았습니다. 이 때문에 《주역》을 배워서 먼저 만수일본(萬殊一本)132)의 영역을 연구하고 【▣】 보존하여 사씨(謝氏)의 '경(敬)'을 논한 뜻133)에 가장 밝았습니다. 아! 선생의 학문은 근본이 있다 하겠습니다.간책에 이름을 올리고 과거에 급제하여 청요직(淸要職)을 거치고는 은혜로운 윤음(綸音)이 누차 내려오고 간절한 소명(召命)이 답지(畓至)했으나 한 번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벼슬하지 않는 것은 의리가 없는 것이다.134)'라는 가르침에 대해서 미리 듣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으나, '나는 아직 벼슬할 자신이 없다.'라는 도리에 대해서 독실하게 믿는 바가 있었습니다.135) 그러므로 홀로 성현이 남긴 경전을 안고서 반평생 깊은 골짜기에서 그대로 평생을 마칠 것처럼 하여136) 영달(榮達)에 대한 생각을 끊었던 것입니다. 아! 선생의 뜻은 독실하다 하겠습니다.비록 그렇지만 양묘(兩廟, 인조와 효종)가 승하한 날을 당해서는 병든 몸으로 수레를 타고 천리를 달려가 길가에서 곡(哭)을 하였고, 굶어죽은 시체가 길을 메운 때를 만나서는 자기 일처럼 근심하여 소장을 올려 사정을 진언하였습니다. 아! 선생은 세상에 대해 장차 큰 뜻이 있었다 하겠습니다.통탄스러운 것은 바야흐로 학문이 완성되고 공부가 성숙해 질 즈음에 거경궁리(居敬竆理)와 성기성물(成己成物)137)의 학문에 더욱 크게 힘을 쓸 수 있었다면, 학문의 조예가 지극해지고 실제의 덕이 완성됨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하늘이 재주를 주어 처음에는 큰일을 할 수 있을 것처럼 하였다가 끝내는 이처럼 빠르게 빼앗아 갔단 말입니까?아! 선생은 독실하게 도를 믿으며 견고하게 뜻을 지키고 절실하게 시국을 근심하면서 궁벽한 시골에서 검약(儉約)을 지켰으나, 뜻을 아직 크게 이루지는 못하여 미처 자세히 아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어138) 이 만학(晩學)은 의지할 곳을 잃었으니, 어찌 저로 하여금 뼈에 사무치고 넋이 슬퍼하여 계속 대성통곡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아! 연전에 뵈었을 때 밝은 가르침이 간곡했고 계속 편지로 깨우치고 이끌어 주셨기에 약아(約我)139)의 희망이 바야흐로 커졌는데 어찌 안앙(安仰)140)의 통곡을 갑자기 하게 되었습니까? 지금 체백이 무덤에 영원히 묻히게 되었다는 부음을 듣고도 천한 병이 몸을 휘감은지라, 상여끈도 잡지 못하고 멀리 남쪽 구름만 쳐다보며 정신만 날아서 가고, 사람을 대신 보내 술을 올려 감히 애사(哀辭)을 고합니다. 어둡지 않은 영혼이 계시다면 부디 작은 정성에 임하시어 흠향하소서. 維歲次辛丑八月丁未朔丁巳。 後學金萬英。 謹遣家甥文鳳儀。 奉淸酌草果之奠。 敬祭于惺菴李先生靈座前。 嗚呼! 世之以學爲名者多矣。 然門庭各殊。 路脉多歧。 在湖中以正學爲心。 庶幾於程朱家法者。 千載之下。 一存翁而已。 寥寥百年間。 更無能倡之者。 先生之出。 幸當此時。 先生以潔素恬靜之姿。 安詳溫粹之氣。 早謝世宂。 專意斯學。 知庶事之必本於心則以存心爲要。 知心軆之必安於靜則以直內爲本。 是以學易而先究乎萬殊一本之域。【缺】存而最明於謝氏論敬之旨。 嗚呼! 先生之學。 可謂有本矣。 策名登第。 官歷淸要。 恩綸累降。 懇命畓至而一不出。 不仕無義之訓。 非不預聞。 而吾斯未信之道。 有所篤信。 故獨抱遺經。 半世竆谷。 若將終身。 念絶榮進。 嗚呼先生之志。 可謂篤實矣。 雖然當兩廟賓天之日。 輿疾千里。 奔哭路左。 値餓殍盈塗之時。 憂惶若己。 拜章言事。 嗚呼! 先生之於世。 可謂將有志矣。 所可痛者。 方學成功熟之際。 益將大肆力於居敬益將大肆力於居敬理成己成物之學。 則其造詣之至。 實德之成。 何可量哉? 而奈何天之稟賦。 始若可有爲者。 而終奪之速如此哉? 嗚呼! 以先生信道之篤守志之堅憂時之切。 而守約而守約巷。 志未大就。 人未有及詳知者。 而華簀遽易。 晩學失依。 則曷爲不使我骨怵而魂悲。 係之以長慟也? 嗚呼! 年前之拜。 明訓丁寧。 繼以牘。 警發提撕。 約我之望方篤。 安仰之痛遽作。 今聞體魄永斂窀穸。 而賤疾纏躬。 挽紼斯違。 瞻望南雲。 精爽蜚越。 替人奉酌。 敢告哀辭。 不昧者存。 庶假卑誠。 尙饗。 이성암(李惺菴) 이수인(李壽仁, 1601~1661)을 가리킨다. 성암(惺菴)은 그의 호.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유안(幼安)이다. 1633년 과거에 급제하여 전적, 병조좌랑, 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642년 재차 전적에 제수되었으나 사은한 뒤 바로 전리(田里)로 내려갔으며, 이후로도 여러 차례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존심(存心) '존심양성(存心養性)'의 준말로, 본래의 마음을 보존하고 본연의 성을 기른다는 뜻인데, 성리학에 있어 심성 수양론을 대표하는 말이다.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에, "마음을 다하는 자는 그 성(性)을 아니, 그 성을 알면 하늘을 알게 된다. 그 마음을 보존하여 그 성을 기름은 하늘을 섬기는 것이다.[盡其心者, 知其性也, 知其性, 則知天矣. 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 하였다. 직내(直內) 내면을 경(敬)으로 곧게 하는 것으로 유가의 수양법이다.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군자는 경하여 내면을 곧게 하고 의로워 외면을 바르게 한다. 경과 의가 확립되면 덕이 외롭지 않다.[君子敬以直內, 義以方外. 敬義立而德不孤.]" 하였다. 만수일본(萬殊一本) 만물이 서로 다르지만 근본 원리는 하나라는 뜻이다. 사씨(謝氏)의……뜻 사씨(謝氏)는 북송(北宋)의 학자인 사양좌(謝良佐)로, '경(敬)'에 대해 "경이란 항상 마음을 깨어있게 하는 법이다.[敬是常惺惺法]" 하였다. 《心經附註》 벼슬하지……것이다 자로(子路)가 세상을 버리고 은거하는 노인 하조장인(荷蓧丈人)에 대해서 "벼슬하지 않는 것은 의리가 아니니 장유의 예절을 폐할 수 없거늘 군신의 의리를 어떻게 폐할 수 있겠는가. 자기 일신을 깨끗이 하고자 큰 인륜을 없애는 짓이다.[子路曰, 不仕無義, 長幼之節, 不可廢也, 君臣之義, 如之何其廢之. 欲潔其身而亂大倫.]" 하였다. 《論語 微子》 나는……있었습니다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공자가 칠조개에게 벼슬하도록 권하자, 그가 대답하기를 '저는 벼슬하는 것에 대해 아직 자신할 수 없습니다.' 하니, 공자가 기뻐하였다.[子使漆雕開仕. 對曰, 吾斯之未能信. 子說.]" 하였다. 여기서는 벼슬에 급급하지 않고, 학문과 도(道)에 둔 뜻이 독실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대로……하여 부귀빈천에 마음이 동요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순 임금이 마른 밥을 먹고 채소를 먹을 때에는 그대로 평생을 마칠 듯이 하더니, 천자가 되어서는 진의를 입고 거문고를 타며, 두 여자가 모시는 것을 본래 있었던 것처럼 여겼다.[舜之飯糗茹草也, 若將終身焉, 及其爲天子也, 被袗衣鼓琴, 二女果, 若固有之.]" 하였다. 거경궁리(居敬窮理)와 성기성물(成己成物) 정주학(程朱學)에서 말하는 학문을 하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거경(居敬)은 내적(內的) 수양 방법을 말하는데, 이는 마음을 성찰하여 성실하게 기거동작(起居動作)을 절제하는 것을 말한다. 궁리(窮理)는 외적 수양 방법으로 널리 사물의 이치를 궁구(窮究)해서 정확한 지식을 획득하는 것을 말한다. '성기성물(成己成物)'은 자기의 덕을 완성하고 그 덕으로 남을 교화시킴을 뜻한다. 세상을 떠나시어 '화책(華簀)'은 화려하게 만든 자리인데, 화책을 바꾼다는 것은 죽음을 비유한다. 증자(曾子)가 임종 직전에, 깔고 누운 대자리가 너무 화려하여 예(禮)에 맞지 않음을 알고, 바꾸게 하였다는 역책(易簀)의 고사가 전한다. 《禮記 檀弓上》 약아(約我) 스승이 잘 이끌어 준 것을 비유한 것이다. 《논어》 〈자한(子罕)〉에 "부자께서 차근차근히 사람을 잘 이끄시어 문으로써 나의 지식을 넓혀 주시고 예로써 나의 행실을 요약하게 해 주셨다.[夫子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 하였다. 안앙(安仰) '안앙(安仰)'은 스승이나 훌륭한 인물의 죽음을 비유한다. 공자(孔子)가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에 "태산이 무너지려 하는구나. 들보가 쓰러지려 하는구나. 철인이 시들려 하는구나."라고 읊조렸는데, 자공(子貢)이 이 소식을 듣고는 "태산이 무너지면 우리는 장차 누구를 우러르며, 들보가 쓰러지고 철인이 시들면 우리는 장차 누구를 의지하겠는가?[泰山其頹, 則吾將安仰, 梁木其壞, 哲人其萎, 則吾將安放?]" 하였다. 《禮記 檀弓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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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 선생전【병서】 梅先生傳【並序】 매(梅) 선생은 나의 허물없는 벗이다. 그 이름은 옥화(玉和)인데 세칭 정백공(貞白公)이라고 한다. 나는 알봉(閼逢)50)의 해에 상제로부터 명을 받고 대지에 내려와서 동방의 바다 근처에서 산다. 장려(瘴癘)51)가 핍박하고 구름과 노을이 습하며 누런 갈대와 참 대를 아침저녁으로 맞는다. 함께 얼굴을 펴고 마음을 토로할 자가 없었는데 우연히 선생을 대 울타리 아래에서 만나 흔연히 세상을 초월한 교분을 맺었다.그 자질과 품성이 특출하고 탁월하며 순수하고 온윤하다. 맑은 향이 사람을 감싸고 온화로운 기운이 만물을 생동하게 한다. 옥병에서 얼음이 생기고 섬궁(蟾宮)52)에서 눈이 빛나는 듯 투명하고 맑아서 형산(荊山) 박옥(璞玉)53)의 실질과 담담한 아취를 지니고 있다. 그윽하고 깊은 곳에서 만나니 향기에는 지란(芝蘭)의 빼어남과 정결(貞潔)한 자태가 있었다.그 실행(實行)에 있어서는 바깥은 둥글고 안은 어질며 몸은 작으나 뜻은 원대하다. 맵고 신 기운과 맛은 사람의 이를 시리게 하니 세속의 사람들과 속된 선비들은 모두 침을 흘리며 말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부귀한54) 대인들이 들어다가 솥에 넣어서 오미(五味)를 각각 바르게 하고 태갱(大羹)55)을 조화롭게 하여 교묘(郊廟)에 올리고 조야(朝野)에 베푼다면 진실로 적합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선생은 꽃과 열매 둘 다를 갖춘 것이다.아! 세상에서 맛있는 고기56)를 실컷 먹는 자들은 한갓 고량진미만을 일삼아서 선생을 쓸쓸히 황량한 초야에 서 있게 하고 나무꾼과 목동도 모두 쉽게 여기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그러나 선생이 어찌 오랫동안 울타리 아래에 머물겠는가? 반드시 황금 화분에 올리는 자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교분을 맺고 그의 전(傳)을 대략 서술하여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드러내는 바이다.태사공은 말한다."선생의 선조는 상(商)나라 고종조(高宗朝)에 원기(元氣)를 조화하는 임무에 쓰였다.57) 그 후세에는 높여 쓴 자가 없다가 송(宋)나라 임화정58)이 벗으로 삼고 믿어 주었다. 그러나 한갓 그 유한(幽閑)한 아취만 섬겼을 뿐이요 대미(大味)59)를 조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비록 그렇지만 임화정의 뒤에는 그 유한한 아취마저도 아울러 버렸으니 슬프도다! 그렇다면 능히 선생을 벗으로 삼아 나와 함께 할 자는 몇이나 될 것인가!"【임진년(1652, 효종3) 5월 단오일 밤에 꿈을 꾸었다. 내가 열천(洌泉) 가에서 노닐고 있는데 어떤 흰 옷을 입은 사자(使者)가 나에게 읍을 하며60) 말하기를 "상제로부터 명을 받고 족하(足下)에게 글을 구합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른 바 글이라는 것은 어떤 글을 말합니까?" 하였다. 그가 답하기를 "매 선생전(梅先生傳)입니다." 하였다. 내가 살펴 짓다가 홀연 깨어나니 바로 한 바탕 꿈이었다. 이에 괴이하게 여겨서 바로 그 전을 짓고 아울러 그 일을 아래에 썼는데 기이한 일을 기록한 것이지 감히 속인 것은 아니다.】 梅先生。 余之爾汝友也。 其名曰玉和。 世稱謂貞白公。 余以閼逢之歲。 受命于帝。 降來大塊。 住近東海。 瘴癘所逼。 雲霞所濕。 黃蘆苦竹。 朝暮延接。 無與開顔寫意。 偶逢先生於竹籬之下。 欣然作世外交。 盖其質品挺特不羣。 純粹溫潤。 淸香襲人。 和氣動物。 冰生玉壺。 雪暎蟾宮。 精瑩秀澈。 有荊璞之實。 而淡然之趣。 遇之幽邃。 薰芳有芝蘭之秀而潔貞之態焉。 若其實行則外圓而內仁。 體小而意遠。 辛酸氣味。 使人寒齒。 塵人俗士無不沫出而結舌。 然若使鍾鼎大人擧而措之鼎鼐之間。 能令五味各正。 大羹調和。 薦之郊廟。 施之朝野。 莫不允偕。 此先生華實兩全者也。 噫! 世之大嚼芻豢者。 徒事珍膏。 而使先生踽踽焉植立於荒草之野。 而樵牧者皆得而慢易之。 豈不悲哉? 然先生豈久住籬落下哉? 必有薦之金盤者矣。 故余定交而略叙其傳。 以見其事實云。 太史公曰: "先生之先。 在商高宗朝。 見用於調和元氣之任。 其後世無尊而用之者。 及宋林和靖友而信之。 然徒事其幽閑之趣。 而及其調和大味則蔑乎無聞矣。 雖然和靖之後。 幷其幽閑之趣而棄之。 悲夫! 然則能友先生。 同余者幾人!" 【壬辰五月端午夜夢。 余遊於洌泉之邊。 有白衣使者楫余而言曰: "受命于上帝。 求文于足下。" 余曰: "所謂文者甚文字歟?" 答曰: "梅先生傳矣。" 余診製而忽覺。 乃一夢也。 仍怪而乃作其傳。 幷書其事于下云。 盖記異也。 非敢誕也。】 알봉(閼逢) '알봉'은 고갑자(古甲子)로 '갑(甲)'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김만영 자신이 태어난 갑자년(1624)을 말한다. 장려(瘴癘) 산천의 나쁜 기운인 장기(瘴氣)로 인해 생기는 병이다. 섬궁(蟾宮) 두꺼비가 살고 있다는 달을 의미한다. 형산(荊山) 박옥(璞玉) 원문의 '형박(荊璞)'은 전국시대 초나라 형산(荊山)에서 나온 박옥(璞玉)으로, 천하의 보물인 화씨벽(和氏璧)이다. 《韓非子 和氏》 부귀한 원문의 '종정(鍾鼎)'은 종명정식(鐘鳴鼎食)으로, 사람이 많아서 식사 때가 되면 종을 쳐서 여러 사람들에게 식사 시간을 알리고 솥을 벌여 놓고 먹는다는 뜻이다.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에 "마을에 들어찬 집들은 종을 치고 솥을 늘어놓고 먹는 집들이다.[閭閻撲地, 鍾鳴鼎食之家.]"라고 하였다. 태갱(大羹) 본래는 조미료를 첨가하지 않은 육즙(肉汁)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음식을 가리킨다. 《예기》 〈악기(樂記)〉에 "성대한 제향의 예에서는 현주를 높이 치고, 제기에 생선을 바치며, 태갱은 조미를 하지 않으니, 다하지 않은 맛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大饗之禮, 尙玄酒而俎腥魚, 大羹不和, 有遺味者矣.]"라고 하였다. 맛있는 고기 원문의 '추환(芻豢)'으로, 가축 가운데 풀을 먹고 자라는 소와 양 같은 가축을 '추(芻)'라 하고, 곡식을 먹고 자라는 개와 돼지 같은 가축을 '환(豢)'이라 한다. 《孟子 告子上》 선생의……쓰였다 《서경》 〈열명 하(說命下)〉에, 상나라 고종(高宗)이 재상 부열(傅說)에게 "만약 간을 맞춘 국을 만들거든, 네가 소금과 매실이 되어야 한다.[若作和羹, 爾惟鹽梅.]"라고 부탁한 말이 나온다. 임화정(林和靖) 화정은 송나라 임포(林逋)의 시호(諡號)이다. 명리(名利)를 구하지 않고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은거해 살면서 매화나무를 심고 학을 기르면서 지냈다. 《宋史 隱逸列傳 林逋》 대미(大味) 지순(至純)한 맛을 말한다. 나에게 읍을 하며 원문의 '楫余'는 '揖余'의 잘못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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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기해년(1659, 36세)에 대기근이 들어 구걸하는 백성들이 길에 가득하니, 느낀 바 있어 짓다 己亥大饑。丐民盈路。感而有作。 찢어진 전대와 헤진 옷으로 마을 문에 서 있으니얼굴 온통 시커멓고 입에선 말이 없네만 권의 책을 읽은들 무슨 소용 있으리오이 백성들을 배부르고 따뜻하게 해 줄 수 없는걸 破橐鶉衣立巷門滿顔黎黑口無言讀書萬卷知何用未使斯民躋飽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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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873년 최석형(崔錫衡)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寶城郡守 崔錫衡 行郡守<押> 寶城郡守之印(6.5x6.5), 周挾改印 광주 민종기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4006-01-230972 1873년에 보성군(寶城郡)에서 최석형(崔錫衡, 46세)에게 발급한 준호구(準戶口). *주소: 龍門面 第 里斗谷村第 統第 戶 *가족사항: 妻 耽津崔氏(45세), 弟 鍚嵂(43세), 嫂 金氏(43세), 弟 應龍(18세), 弟 應權(8세), 子 敬淳(20세), 貴出(18세), 善出(15세), 侄 富出(18세), 甲出(9세) *소유노비: 奴婢 5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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