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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 이경순이 방문해주다 李友敬循見訪 언제 처음 만났다고365) 지금 백발이 되었는가 傾蓋何時今白頭오십 년 세월이 빨리 흘러 그친 적이 없구나 歲馳五十不曾休한양에서 뽕밭이 바다로 바뀐 것을 깊이 통한하고 痛深桑變漢陽日계화도에서 태산이 무너진 것366)에 눈물을 뿌렸다오 揮淚山頹桂島秋세상은 원수 내쫓고 나라 회복한 운수를 만나고 世際驅讐復國運생각은 성인 높이고 이단 배척하는 계책을 함께했네 思同尊聖斥邪籌분분히 모였다가 곧 헤어짐을 슬퍼할 것 없으니 紛悤旋別未須悵우리 사림의 무궁한 수치를 깨끗이 씻어야 하리 要洗吾林不盡羞 傾蓋何時今白頭? 歲馳五十不曾休.痛深桑變漢陽日, 揮淚山頹桂島秋.世際驅讐復國運, 思同尊聖斥邪籌.紛悤旋別未須悵, 要洗吾林不盡羞. 처음 만났다고 원문의 경개(傾蓋)는 길가에서 서로 만나 수레 덮개를 기울이고 잠깐 이야기한다는 뜻으로, 두 사람이 서로 처음 만난 때를 말한다. 《사기(史記)》 권83 〈추양열전(鄒陽列傳)〉에 "흰머리가 되도록 오래 사귀었어도 처음 본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고, 수레 덮개를 기울이고 잠깐 이야기해도 오랜 벗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有白頭如新, 傾蓋如故.]"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태산(泰山)이 무너진 것 공자(孔子)가 어느 날 노래하기를 "태산이 무너지겠구나. 대들보가 쓰러지겠구나. 철인이 시들겠구나.[泰山其頹乎! 梁木其壞乎! 哲人其萎乎!]"라고 하였는데, 그로부터 병이 나서 7일 만에 별세한 고사에서 온 말이다. 《禮記 檀弓上》 태산이 무너졌다는 것은 선사(先師)의 죽음에 대한 비유로 쓴 말로, 여기서는 후창의 스승인 전우(田愚)의 죽음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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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1930년 파평윤씨(坡平尹氏) 대종약소(大宗約所) 성금지원서(誠金志願書) 서식(書式) 고문서-치부기록류-근현대문서 사회-조직/운영-서식 庚午 月 日 坡平尹氏大宗約所 庚午 月 日 坡平尹氏大宗約所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1930년에 선조의 위토와 임야를 공동 등기하기 하는 사업에 필요한 성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파평, 남원, 함안 등지의 파평윤씨 대종약소에서 작성한 성금지원서 서식. 1930년에 선조(先祖)의 위토(位土)와 임야(林野)를 공동 등기(共同登記)하는 사업에 필요한 성금(誠金)을 마련하기 위하여 파평(坡平), 남원(南原), 함안(咸安) 등지의 파평윤씨(坡平尹氏) 대종약소(大宗約所)에서 작성한 성금지원서(誠金志願書) 서식(書式)이다. 같은 해 4월 5일에 경성부(京城府) 장사동(長沙洞)에 있는 파평윤씨 대종약소는 경주(慶州)에 있는 선조의 위토와 임야를 공동 등기하는 일과 관련하여 성금을 보내달라며 각 문중에 통문을 보냈다. 이에 따라 파평과 남원, 함안에 있는 파평윤씨 대종약소에서는 문중의 족원들로부터 성금을 거두기 위하여 이러한 성금지원서 서식을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문서에는 '大約所'라고 인쇄되어 있는데, 이는 '大宗約所'의 오기(誤記)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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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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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부안김씨(扶安金氏) 김채상(金彩相) 등 팔고조도(八高祖圖) 고문서-치부기록류-보첩류 사회-가족/친족-족보 扶安金氏 門中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부안에 살고 있었던 부안김씨 김채상 등 6인의 8고조도. 부안(扶安)에 살고 있었던 부안김씨(扶安金氏) 김채상(金彩相), 김병헌(金炳憲), 김낙진(金洛震), 김면술(金冕述), 김경술(金鏡述), 김술(金述) 등 6인의 8고조(八高祖)를 각각 기록한 문서이다. 흔히 팔고조도(八高祖圖)라고 한다. 팔고조도는 한 개인의 선대를 부계와 모계 똑같이 고조대까지 거슬러올라가 계통적으로 배열한 가계도로, 그 가계도상에 나타나는 고조가 모두 8명이어서 이와 같은 이름이 생겼다. 이러한 팔고조도의 존재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생각하는 친족의 범주가 오늘날에 비하여 훨씬 넓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이 팔고조도에 실린 이름 가운데, 김채상, 김병헌, 김낙진 등은 이 집안의 문서에 작성자로도 자주 나오는데, 이 문서를 통하여 김낙진의 조부가 김채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김병헌이 김채상 및 김낙진과 가까운 친족이라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정확한 혈연관계는 알 수 없다. 이 문서는 각기 3장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 필체로 보아 동일한 인물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보이며 원본의 일부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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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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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95년 송진택(宋鎭澤)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乙未三月日 宋鎭澤 泰仁官 乙未三月日 宋鎭澤 泰仁縣監 전라북도 태인군 泰仁官[着押] 1개(적색, 정방형) 전주 송진택가 전주역사박물관 박병호, 『韓國法制史攷 : 近世의 法과 社會』, 법문사, 1974. 최승희,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1989. 박병호 외, 『호남지방 고문서 기초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1999. HIKS_Z041_01_A00022_001 1895년(고종 32) 3월에 송진택(宋鎭澤)이 태인현감(泰仁縣監)에게 올린 소지(所志) 1895년(고종 32) 3월에 전주에 사는 송진택(宋鎭澤)이 태인현감(泰仁縣監)에게 올린 소지(所志)이다. 문서의 앞 부분이 훼손되어 소지를 올린 사람의 이름을 알 수 없지만, 소장처와 그 내용으로 미루어 송진택으로 추정하였다. 송진택의 친산(親山)이 태인현 남면(南面) 반룡촌(盤龍村)에 있는데 고부에 사는 한성호(韓性浩)가 범장(犯葬)을 하여 전(前) 현감이 있을 때 여러 번 대질하여 금년 2월 안에 굴거(掘去)하겠다는 한성호의 수기(手記)를 받았다. 그러나 지금 3월이 다 지나가도록 굴거하지 않고 있으니 차사(差使)를 보내 잡아 가두고 독굴(督掘)해 달라고 송진택은 관에 호소하였다. 제사가 적힌 부분이 훼손되어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독굴하기 위해서 한성호를 잡아오라는 내용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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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장에게 부쳐 드리다 寄呈悅丈 고운 얼굴에 백발로 우뚝 서니 韶顔華髮立亭亭속세를 초탈한 난곡이 멈춘 듯147) 超脫塵埃鸞鵠停팔십일 세인데도 학문에 힘쓰고 八十一年猶勉學백천만 일에 이미 형체를 잊었네148) 百千萬事已忘形마음 의탁한 겨울 뒤의 기약 믿으나 託心縱信期寒後해가 지나도록 문안 못해 늘 탄식했네 修候常歎阻歲經하늘 가득한 병화에 흉년이 들었으니 兵火漲天年不熟정토산 멋진 모임을 어찌 다시 이루랴 淨山勝會那重成 韶顔華髮立亭亭, 超脫塵埃鸞鵠停.八十一年猶勉學, 百千萬事已忘形.託心縱信期寒後, 修候常歎阻歲經.兵火漲天年不熟, 淨山勝會那重成? 난곡(鸞鵠)이 멈춘 듯 사람의 위의(威儀)와 태도가 단정하고 엄숙(嚴肅)함을 형용하는 말이다. 당(唐)나라 한유(韓愈)의 〈전중소감마군묘명(殿中少監馬君墓銘)〉에 "물러나와 소부를 보건대 푸른 대와 벽오동에 난새와 고니가 우뚝 서 있는 듯하였으니, 가업을 제대로 지킬 만한 분이었다.〔退見少傅, 翠竹碧梧, 鸞鵠停峙, 能守其業者也.〕"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韓昌黎集 卷33》 형체 잊었네 원문의 '망형(忘形)'으로, 물아(物我)를 초탈한다는 뜻이다. 《장자(莊子)》 〈양왕(讓王)〉에 "정신을 보양하는 자는 형체를 잊고, 형체를 기르는 자는 이욕을 잊으며, 도를 터득한 자는 마음을 잊는다.〔養志者忘形, 養形者忘利, 致道者忘心矣.〕"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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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가 된 쌍수 산성4)을 보고 觀雙樹山城廢址 금강 가의 옛 성 황폐해졌으니 古城荒落錦江頭나그네는 상심하고 물은 절로 흐르네 客自傷心水自流예전에 동학교도를 소탕한 날이요5) 如昨掃平東匪日일찍이 한양을 회복한 해였다오6) 曾經興復漢陽秋남쪽 진압할 계책 없이 공연히 누각만 남았으니 鎭南無策空留閣임금 향한 마음으로 누가 홀로 누각에 오르랴 控北何人獨上樓저물녘 서풍에 기대 두어 곡조 노래하니 晩倚西風歌數疊물속 고기 우는 새와 근심이 일반이라네 潛魚啼鳥一般愁 古城荒落錦江頭, 客自傷心水自流.如昨掃平東匪日, 曾經興復漢陽秋.鎭南無策空留閣, 控北何人獨上樓?晩倚西風歌數疊, 潛魚啼鳥一般愁. 쌍수 산성(雙樹山城) 충청남도 공주(公州)에 위치한 산성으로, 옛 이름은 공산성(公山城)이다. 1624년(인조2)에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키자 인조가 난을 피해 이 성안의 두 그루 나무 아래에 머물렀다. 그로 인해 이곳을 쌍수 산성이라고 이름하게 되었다. 《萬機要覽 軍政編4 關防》 예전에……날이요 우금치 전투를 말한다. 1894년(고종31) 11월 겨울에 동학농민군이 공주의 우금치에서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과 싸워 전멸당하였다. 일찍이……해였다오 1624년(인조2) 이괄(李适)의 난으로 인조는 공주(公州)로 피난을 갔다가 이해 2월 15일에 이괄이 죽게 되어 난이 평정되자, 2월 22일에 환도(還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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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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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진의 산수정 시에 차운하다 次鄭國振山水亭韻 정자가 초연하게 산수에 있으니 亭子超然山水間맑은 정취는 진세에서 보기 더욱 어려운 것이네 更難淸致見塵寰심기(心機)가 활발발하니 물고기 노닐며 뛰고397) 活機潑潑游魚躍즐거운 마음 연결되니 새가 노래하며 돌아오네398) 樂意關關啼鳥還봄빛이 사방을 둘러싸니 그림인 듯 곱고 春色四環姸似畵달빛이 막 비추니 그 모습 활처럼 굽었네 月光初照曲如彎지인399)의 귀결처를 그대는 알고 있으리니 智仁歸趣君應識등림하여 부질없이 한가히 보내는 것 아니라네 不是登臨謾作閒 亭子超然山水間, 更難淸致見塵寰.活機潑潑游魚躍, 樂意關關啼鳥還.春色四環姸似畵, 月光初照曲如彎.智仁歸趣君應識, 不是登臨謾作閒. 심기(心機)가……뛰고 《중용장구》 제12장에서 "솔개가 날아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가 연못에서 뛰논다.[鳶飛戾天, 魚躍于淵.]"라는 《시경》의 시를 인용한 것에 대해, 정호(程顥)가 "자사가 긴요하게 사람을 위한 곳으로, 활발발한 곳이다.[子思喫緊爲人處, 活潑潑地.]"라고 하였다. 활발발은 생기(生氣)가 충만한 뜻이다. 즐거운……돌아오네 송(宋)나라 석연년(石延年)의 시에 "즐거운 마음 연결되니 새는 마주보고 노래하고, 싱그런 향내 끊이지 않으니 나무에 꽃이 어우러지네.[樂意相關禽對語, 生香不斷樹交花.]"라고 하였는데, 정자(程子)는 "호연지기를 볼 수 있다.[可以見得浩然之氣.]"라고 평하였다. 지인(智仁) 산수(山水)를 좋아하는 지혜롭고 어진 덕을 이른다. 《論語 雍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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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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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71년 송진택(宋鎭澤) 소지(所志) 1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辛未五月日 宋鎭澤 泰仁官 辛未五月日 宋鎭澤 泰仁縣監 전라북도 태인군 泰仁官[着押] 2개(적색, 정방형) 전주 송진택가 전주역사박물관 박병호, 『韓國法制史攷 : 近世의 法과 社會』, 법문사, 1974. 최승희,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1989. 박병호 외, 『호남지방 고문서 기초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1999. HIKS_Z041_01_A00022_001 1871년(고종 8) 5월에 송진택(宋鎭澤)이 태인현감(泰仁縣監)에게 올린 소지(所志). 1871년(고종 8) 5월에 송진택(宋鎭澤)이 태인현감(泰仁縣監)에게 올린 소지이다. 송진택의 어머니 산소가 태인현 남면(南面) 반룡촌(盤龍村)에 있는데 중간에 투총(偸塚)이 발생하여 이를 굴거(掘去)하였다. 기사년(1869)에 다시 투장(偸葬)을 당해 즉각 독굴(督掘)했는데 이번에는 그 자리에 김제 만경에 사는 이가(李哥)가 다시 투장을 했으니 잡아 가두고 독굴해 달라고 송진택은 관에 탄원하였다. 이에 관에서는 농사일이 한창 바쁘고 빗물이 불어나니 비록 정상은 절박하나 이앙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정소하면 단연코 잡아 가두고 독굴하겠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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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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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갑오년 최공진(崔拱辰)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甲午三月 崔贊斗 城主 甲午三月 崔贊斗 扶安縣監 전라북도 부안군 官[着押] 3개(적색, 정방형) 김제 정당 최재신가 전북대학교박물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HIKS_Z039_01_A00001_001 갑오년 3월에 최공진(崔拱辰)이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소지로, 이정순(李正淳)의 논을 빌려 경작할 수 있도록 시작권(時作權)을 보장해 달라는 내용이다. 갑오년 3월에 상서면 다회리(上西面 多會里)에 사는 화민 최공진(崔拱辰)이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소지이다. 최공진은 논이 없어서 멀리 태인(泰仁)에 사는 이정순(李正淳)에게 논 5마지기를 빌려 경작하고 약속한 도조를 성실히 납부해 왔다고 한다. 그런데 올해 바야흐로 농사를 시작하려는 찰나에 주인이 갑자기 경작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땅을 다듬고 모를 기르는 등 애써 준비한 농사를 못하게 됐으니 관에서 이치를 따져 경작을 허락해 줄 것을 청한 것이다. 부안현감은 최공진이 그 동안 시작인(時作人, 소작인)으로써 성실히 도조를 납부하였고, 또 바야흐로 막 농사를 시작하려는 시점에서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하는 것은 부당한 처사라고 판단하고 주인으로 하여금 시작인을 바꾸지 말도록 지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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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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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98년 최영대(崔永大)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武二年戊戌正月 幼學宋柱埰 崔永大 光武二年戊戌正月 宋柱埰 崔永大 전라북도 태인군 [着名]3개 전주 송진택가 전주역사박물관 박병호, 『韓國法制史攷 : 近世의 法과 社會』, 법문사, 1974. 최승희,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1989. 박병호 외, 『호남지방 고문서 기초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1999. HIKS_Z041_01_A00012_001 1898년(광무 2) 1월에 최영대(崔永大)가 송주채(宋柱埰)로부터 산지를 매입하면서 받은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98년(광무 2) 1월에 최영대(崔永大)가 송주채(宋柱埰)로부터 산지를 매입하면서 건네받은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송주채와 송주상(宋柱祥) 형제는 태인 남촌면 고당산(姑當山) 동쪽 반룡촌(盤龍村)에 있는 증조비(曾祖妣)의 묘를 1월 30일 내에 이장하기로 하고, 산지의 경계를 정해 최영대에게 이를 1,300냥에 방매하였다. 문서의 아래에 부기(附記)한 내용은 관련문서 '1903년 최영대(崔永大) 소지(所志)'를 보면, 이때 매득한 곳에 투장이 발생하자 정소(呈訴) 과정에서 투장자인 흥덕(興德) 칠성동(七星洞)에 사는 이병덕(李柄德)의 신상을 적어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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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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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63년 김요흠(金堯欽) 수표(手標) 고문서-증빙류-수표 경제-회계/금융-수표 癸亥十一月十九日 金堯欽 宋鎭澤 癸亥十一月十九日 金堯欽 宋鎭澤 전라북도 태인군 [着名] 1개 전주 송진택가 전주역사박물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HIKS_Z041_01_A00003_001 1863년(철종 14) 11월 19일에 상인(喪人) 김요흠(金堯欽)이 송진택(宋鎭澤)에게 작성해 준 수표(手標)로 송진택 친산 근처에 쓴 무덤을 내년 정월 그믐날까지 이장하겠다는 내용. 1863년(철종 14) 11월 19일에 상인(喪人) 김요흠(金堯欽)이 송진택(宋鎭澤)에게 작성해 준 수표(手標)이다. 김요흠은 송진택의 친산(親山) 단백호(單白虎) 가까운 곳에 무덤을 썼다가 지난 10월에 송진택으로부터 소송을 받게 되었다. 사리를 따져 본 후에 김요흥은 10월 그믐날까지 이장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지키지 못했다. 이에 송진택은 다시 관에 정소하였고, 관에서는 김요흠을 잡아오라는 처분을 내렸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결국 김요흠은 내년 정월 그믐날까지 무덤을 옮기겠다는 뜻으로 이 수표를 작성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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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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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58년 권기서(權琦瑞)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戊午八月 權琦瑞 官 戊午八月 權琦瑞 泰仁縣監 전라북도 고창군 官[着押] 1개(적색, 정방형) 전주 송진택가 전주역사박물관 박병호, 『韓國法制史攷 : 近世의 法과 社會』, 법문사, 1974. 최승희,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1989. 박병호 외, 『호남지방 고문서 기초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1999. HIKS_Z041_01_A00022_001 1858년(철종 9) 8월에 권기서(權琦瑞)가 태인현감(泰仁縣監)에게 올린 소지(所志). 1858년(철종 9) 8월에 권기서(權琦瑞)가 태인현감(泰仁縣監)에게 올린 소지(所志)이다. 고부 답내동(古阜畓內面)에 사는 권기서는 세금 납부가 급하여 태인현 남촌 반룡촌 고당산(高堂山)에 있는 산소의 소나무를 뽑아 팔려고 하였는데, 같은 산 윗쪽에 산소를 둔 전주 사는 송반(宋班)이 그냥 놔둘 요량으로 15냥에 사기를 원하였다. 나중에 권기서의 것이라고 할 염려가 있으니 송반에게 방매했다는 사실을 입지(立旨)로 성급해 뒷날 증빙으로 삼게 해달라고 하였다. 태인현감은 공문을 만들어 주라고 지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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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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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73년 송진택(宋鎭澤) 소지(所志) 2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癸酉十二月日 宋鎭澤 泰仁官 癸酉十二月日 宋鎭澤 泰仁縣監 전라북도 태인군 泰仁官[着押] 5개(적색, 정방형) 전주 송진택가 전주역사박물관 박병호, 『韓國法制史攷 : 近世의 法과 社會』, 법문사, 1974. 최승희,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1989. 박병호 외, 『호남지방 고문서 기초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1999. HIKS_Z041_01_A00022_001 1873년(고종 10) 12월에 송진택(宋鎭澤)이 태인현감(泰仁縣監)에게 올린 소지(所志). 1873년(고종 10) 12월에 전주에 사는 송진택(宋鎭澤)이 태인현감(泰仁縣監)에게 올린 소지이다. 이태한(李太漢) 부자가 관령과 국법을 무시하므로 여러 차례 지엄한 감영의 제음을 받았으며, 10일에는 부자가 스스로 다짐문서(侤音)도 바쳤다. 무덤을 굴이(掘移)하기 위해 차사(差使)를 보냈더니 그 부자와 동생이 모두 도망을 갔다. 그래서 송진택은 빠른 시일 내에 독굴(督掘)해 달라고 재차 관에 정소(呈訴)하였다. 이에 관에서는 이태한의 소행이 비록 매우 통탄스러우나 노비가 대신 파내는 것은 법 밖이라 허가할 수 없으나, 투총(偸塚)의 굴개(掘漑)는 총주(塚主)를 찾는 것이 예사이니 즉시 굴개하라고 하였다. 위에서 차사는 죄인을 잡아 오도록 파견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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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당 형이 내가 올해 회갑이라 하여 앞 운 그대로 시를 부쳐왔기에 또 차운하여 드리다 2수 晩棠兄以余今年回甲 仍前韻寄詩 又次呈上【二首】 우리 집안 장수의 길은 어찌 그리 곤궁한가 吾家壽道一何窮누대토록 회갑 맞은 사람을 찾기 어렵다오 周甲難尋累世中덕행은 실지를 실천하지 않은 적 없었는데 德行非無曾踏實하는 일은 모두 허사가 되었으니 어이하랴 事爲其柰總成空재랑 선조230) 뒤로 유독 나 뿐이니 齋郞祖後偏歸我조화옹 앞에서 공평하지 못함을 원망하네 造化翁前怨不公오늘 아침에 마음으로 축원하는 글 삼가 읽는데 奉讀今朝心祝語사례할 말이 없으니 어리석은 사람 같구나 無言可謝呆人同나이 많음을 귀히 여김은 이치 궁구할 수 있어서인데 所貴年高理可窮내 나이 육순인데 진세에 매몰됨을 어찌하리오 柰吾乾沒六旬中행실은 잘못이 많으니 결국 망령되었고 行多舛錯終歸妄견식은 정밀함 부족하니 끝내 아무것도 없네 見欠精明竟落空세도를 도운 아주 작은 공도 없고 絲髮功無裨世道구릉처럼 허물만 쌓여 선친께 누가 되었네 山丘咎積累先公참된 공부라고 칭찬 넘쳐나니 외려 부끄러운데 眞工溢獎猶堪愧하물며 옛사람과 지금 사람이 같지 않다 하는가 矧謂古今人莫同 吾家壽道一何窮? 周甲難尋累世中.德行非無曾踏實, 事爲其柰總成空.齋郞祖後偏歸我, 造化翁前怨不公.奉讀今朝心祝語, 無言可謝呆人同.所貴年高理可窮, 柰吾乾沒六旬中?行多舛錯終歸妄, 見欠精明竟落空.絲髮功無裨世道, 山丘咎積累先公.眞工溢獎猶堪愧, 矧謂古今人莫同? 재랑(齋郞) 선조 김택술의 11대조인 죽계(竹溪) 김횡(金鋐)을 가리킨다. 학행으로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에 천거되었다. 《後滄集 卷26 慶基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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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김재상(金載相) 시장문기(柴場文記) 고문서-명문문기류-명문 경제-매매/교역-시장문기 嘉慶二十年乙亥九月初七日 幼學朴乃伯 幼學金載相 嘉慶二十年乙亥九月初七日 朴乃伯 金載相 전라북도 부안군 [着名] 1개, [喪人] 2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1815년(순조 15)에 박내백이 송자 진황지에 있는 시장을 김재상에게 팔면서 작성한 시장문기. 1815년(순조 15) 9월 초7일에 박내백(朴乃伯)이 송자(悚字) 진황지(陳荒地)에 있는 시장(柴塲)을 김재상(金載相)에게 팔면서 작성한 시장문기이다. 김재상이 부친의 장례를 치르기 위하여 시장을 매매하기를 원하자 박내상은 선대로부터 자신이 물려받은 시장을 한계를 정해서 팔기로 하였다고 매매사유를 밝히고 있다. 거래된 시장은 송자 진황지에 있는데, 거래가격은 13냥이다. 거래 당시 신문기 1장을 작성하여 건네주며 차후 자손들의 분란에 증거로 삼으라고 하였다. 거래된 시장의 한계(限界)는 동쪽으로는 박성량(朴成良)의 밭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박춘흥(朴春興)의 논, 서쪽으로는 박용인(朴龍仁)의 밭, 북쪽으로는 조가(趙哥)의 총(墳墓)에 이르도록 하였다. 이 거래에는 시장주(柴塲主)인 박내백(朴乃伯)과 증인(訂人) 동성조카(同姓侄) 진여(辰汝), 필(筆) 동성조카(同姓侄) 광여(光汝) 등 3인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때 두 조카는 상중(喪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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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1869년 안익(安榏)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己巳八月二十二日 安榏 金碩士 己巳八月二十二日 安榏 金碩士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1869년(고종 6) 8월 22일에 안익이 김석사에게 보낸 서간. 1869년(고종 6) 8월 22일에 안익(安榏)이 김석사(金碩士)에게 보낸 서간이다. 조부의 상을 당한 김석사를 위로하면서, 노년에 부친상을 당한 춘부장의 건강이 염려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김석사가 지난번에 보낸 편지도 잘 받았다고 하였다. 안익은 자신의 집안에 일어났던 불행한 사건도 전하고 있다. 안익은 이 달 초 당시 유행하던 천연두(天然痘)로 인하여 이제 겨우 여섯 살 난 딸과 두 살 박이 사내아이를 잃어버렸다. 그는 아무런 할 말이 없다면서 자신의 불행한 신수를 한탄해 하였다. 그리고 그 전에 김석사가 지시한 일은 다 마무리하였으며, 조만간 도사(道査)가 내려 갈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의 도사는 관찰사가 사람을 보내 특정한 사안을 조사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일을 주선(周旋)하는 결과를 보고 나중에 영문(營門)에 이를 알리겠다고 하였다. 또한 김석사가 보낸 붓 10 자루를 잘 받았으며 고맙다고 하였다. 끝으로 백부가 동협(東峽)에 가셔서 아직 돌아 오지 않았기 때문에 김석사가 보낸 편지를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고 하였다. 동협은 충청도 단양 지역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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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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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문기류

1834년 김재상(金載相) 시장문기(柴場文記) 고문서-명문문기류-명문 경제-매매/교역-시장문기 道光十四年甲午四月初十日 朴基俊 幼學金載相 道光十四年甲午四月初十日 朴基俊 金載相 전라북도 부안군 [喪人], [着名] 3개 부안 서외 김채상 후손가 부안 서외리 김채상 후손가 1834년(순조 34)에 박기준이 전해 내려온 송자에 있는 시장을 김재상에게 팔면서 작성한 시장문기. 1834년(순조 34) 4월 초10일에 박기준(朴基俊)이 전해 내려온 송자(悚字)에 있는 시장(柴塲)을 김재상(金載相)에게 팔면서 작성한 시장문기이다. 박기준은 이 시장을 장례 때 진 빚과 세미(稅米)를 납부할 길이 없어서 팔게 되었다고 매매사유를 밝히고 있다. 거래된 시장은 진황지(陳荒地)에 있는 시장으로, 가격은 7냥이다. 시장의 길이와 넓이는 한계를 정해서 매매하기로 하였다. 본문기(本文記)는 중간에 잃어버렸기 때문에 매입자에게 넘겨주지 못하였다. 뒷날 자손이나 족속들이 다투면 이 신문기를 증거로 하라고 하였다. 거래에는 시장주(柴塲主)인 박기준(朴基俊)과 증인(證 人) 박창길(朴昌吉), 필(筆) 조흥규, 증참(證叅) 동성 5촌 박진덕(朴震德) 등 4인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한편 문서 말미에 매매할 시장의 한계는 후록(後錄)으로 범표(犯標)를 작성하여 표시하였다. 즉, 길이는 남쪽에 있는 박흥업(朴興業)의 밭을 지나서 북쪽의 김영집(金英集)의 시장에 이르는 98척(尺)이며, 넓이는 동쪽에 있는 박진덕(朴震德)의 밭을 지나서 서쪽의 박춘엽(朴春葉)의 시장에 이르는 60척(尺)으로 한계를 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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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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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신해년 최공진(崔拱辰)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辛亥四月 崔拱辰 城主 辛亥四月 崔拱辰 扶安縣監 전라북도 부안군 官[着押] 1개(적색, 정방형) 김제 정당 최재신가 전북대학교박물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HIKS_Z039_01_A00001_001 신해년 4월에 최공진(崔拱辰)이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소지로, 사촌 동생 내집(乃集)이 빚진 경채(京債)를 모두 갚았으니 이에 사실을 증빙하는 입지를 성급해 달라는 내용이다. 신해년 4월에 상서면 다회리(上西面 多會里)에 사는 화민 최공진(崔拱辰)이 부안현감(扶安縣監)에게 올린 소장이다. 최공진은 자신의 사촌동생 내집(乃集)이 빚진 경채(京債)를 이번에 간신히 마련하여 갚았다고 한다. 그러나 장차 어떤 후환이 있을지 알 수 없으므로, 앞으로 혹여 이와 같은 일이 생긴다면 상납전의 경우 상납전을 건 낸 담당색리에게 추급할 것이며, 경채 또한 경채를 건 낸 경저리(京邸吏)에게 징급하고, 자신에게 횡징하지 못할 뜻으로 입지를 성급해 달라고 청한 것이다. 소장을 접한 부안현감은 위의 내용으로 입지를 성급해 주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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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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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소심재179) 어른의 세 아들을 방문하다 訪小心齋丈三子 십년 만에 목산 동쪽을 재차 방문하니 十年再訪鶩山東세 옥수180)가 우뚝 솟아 부친의 풍모를 볼 수 있네 三樹亭亭見父風간특함을 어찌 유학의 세계에 용납하리오 奸慝寧容儒學界춘추 의리는 본디 성인의 경서 속에 있다네 春秋自在聖經中천 가닥 흰 귀밑머리를 함께 가련히 여기고 共憐鬢髮千莖白한 조각 붉은 마음181)만을 오직 믿을 뿐이라오 只信靈臺一片紅이별의 눈물 흩뿌려 흐르는 강물을 더하는데 別淚揮添江水去변함없는 경색은 옛날 그대로의 모습이구나 依然景色舊時同 十年再訪鶩山東, 三樹亭亭見父風.奸慝寧容儒學界, 春秋自在聖經中.共憐鬢髮千莖白, 只信靈臺一片紅.別淚揮溙江水去, 依然景色舊時同. 소심재(小心齋) 황종복(黃鐘復, 1858~1935)으로, 소심재는 그의 호이다. 충청도 출신으로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세 옥수(玉樹) 황종복의 세 아들을 가리킨다. 옥수는 남의 집의 훌륭한 자제를 비유하는 말로, 진(晉)나라 때 사안(謝安)이 자질(子姪)들에게 "어찌하여 사람들은 자기 자제가 출중하기를 바라는가?"라고 묻자, 조카 사현(謝玄)이 "비유하자면 마치 지란과 옥수가 자기 집 뜰에 자라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譬如芝蘭玉樹, 欲使其生於階庭耳.]"라고 대답한 데서 유래하였다. 《晉書 卷79 謝安列傳》 마음 원문의 영대(靈臺)를 번역한 것이다. 《장자(莊子)》 〈경상초(庚桑楚)〉에 "영대 속에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된다.[不可內於靈臺]"라고 하였는데, 곽상(郭象)이 주(註)에서 "영대는 마음이다."라고 풀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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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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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조군 정호 찬문 의 〈선고 묘소의 석물〉 시에 차운하다 次趙君正豪【燦文】先考墓石儀韻 소나무 가 무덤 풀이 여덟 번 새로 났는데 松儂墓草八番新돌 깎아 석물 만드니 사방에서 흠모하누나 伐石成儀歆四隣후손에게 복을 끼칠430) 훌륭한 계책은 세속의 모범 되었고 裕後嘉謨曾範俗선친을 계술하는431) 어진 아들은 또한 진세를 벗어났도다 述先賢子亦超塵산은 길지를 고르니 유택을 마련하고 山惟吉地占幽宅때는 좋은 시절이니 중춘에 해당하네 時適良辰屬仲春평소 교칠처럼 굳었던432) 우의를 추억하니 追憶平生膠漆誼이날 지은 시를 보고 자주 감탄한다오 題詩此日感歎頻 松儂墓草八番新, 伐石成儀歆四隣.裕後嘉謨曾範俗, 述先賢子亦超塵.山惟吉地占幽宅, 時適良辰屬仲春.追憶平生膠漆誼, 題詩此日感歎頻. 후손에게 복을 끼칠 원문의 유후(裕後)는 《서경》 〈중훼지고(仲虺之誥)〉에 "의로써 일을 제재하고 예로써 마음을 제재해야 후손들에게 넉넉함을 드리울 것이다.[以義制事, 以禮制心, 垂裕後昆.]"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선친을 계술(繼述)하는 《중용장구》 제19장에 "무릇 효란 부모의 뜻을 잘 계승하며 부모의 일을 잘 조술하는 것이다.[武王周公, 其達孝矣乎. 夫孝者, 善繼人之志, 善述人之事者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교칠(膠漆)처럼 굳으며 후한(後漢) 때 뇌의(雷義)와 진중(陳重)은 젊어서부터 우의가 매우 두터웠는데, 그 향리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교와 옻칠이 견고하다고 하지만, 뇌의와 진중의 사이만은 못하리라.[膠漆自謂堅, 不如陳與雷.]"라고 한 고사에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81 陳重雷義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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