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이교성(李敎成) 간찰(簡札) 1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庚申五月六日 李敎成 父主 庚申五月六日 李敎成 李冕容 정읍 성주이씨 이유원 후손가 성주이씨 이정순 HIKS_Z037_01_A00802_001 1920년 5월 6일에 이교성이 상경 노정과 비석에 관한 일, 형재공 산소 국내의 소나무와 가래나무 매매 등의 일로 부친에게 보낸 간찰 1920년 5월 6일에 이교성(李敎成)이 부친에게 보낸 간찰이다. 먼저 안부를 묻고 자신의 상경 노정을 설명하고 있다. 평안 진사와 점심밥을 먹고 저물녘에 광주(光州) 교항점(橋項店)에서 묵었으며, 3일 오시(午時)에 송정(松汀)에서 차를 타고 강경역(江景驛)에 내려 신흥리(新興里)에 이르렀고, 4일 뒤에 차에 올라 대전(大田)에 이르러서 점심밥을 먹은 뒤에 땅거미 질녘에 용산역(龍山驛)에 내려 걸어서 남대문 안의 최명순(崔明順) 집에 이르러 유숙하였다고 하였다. 비석에 관한 일은 지금까지 봐오건대 불안하거나 의(義)에 해롭거나 분명하지 않은 점이 한 가지가 아니다. 조목에 따라 대략 들었지만, 이는 한갓 한 집안의 문제가 아니니 속히 삼파(三派)의 종중에서 정대하게 논의하길 바란다고 하였다. 불안하다고 말한 점은 글자를 새기는 것을 일본사람에게 정하여 맡기는 것이 비석이 서대문감옥에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이는 일본사람이 빠르게 새겨 이로움을 보려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감옥 안에서 사람이 새긴 자획은 깊은지 깊지 않은지 정밀한지 정밀하지 않은지 볼 수 없으니 우리 선령(先靈)이 편안하겠는가 하고 개탄을 금치 않았다. 또 의에 해롭다고 한 점과 분명하지 않은 점 등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또 서산(西山)에서 온 종인의 말을 들은 경중의 종인 몇 명이 형재공(亨齋公) 산소 국내(局內)의 소나무와 가래나무를 팔아 넘겨 200원을 먼저 걸고 100원을 예약금으로 받았다고 묘지기가 말한 것을 들었다고 하는데, 묘답(墓畓)이 모두 참판 종율(鍾律)의 명위(名位)에 있는데 참판이 이미 사망하여 어쩔 수 없이 이전(移轉)하는 이전비용이라고 하니 곧 실정을 찾아야 한다고 하였다. 파전(派錢)은 부친 지 오래라고 하였다. 추신이 있는데, 어제 서찰을 부치지 못하였고 김승지(金承旨)가 문자 및 비석의 양식을 다시 수정하였다는 등의 내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