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8년 황사효(黃事孝) 시장(諡狀) 고문서-첩관통보류-이문 정치/행정-명령-이문 戊寅七月 日 禮曹 奉常寺 戊寅七月 日 禮曹 奉常寺 서울특별시 종로구 堂上[着押],郎廳[着押] 1개(적색, 정방형) 남원 대곡 장수황씨가 남원 무민공황진기념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황진 장군 가문의 고문서』, 흐름, 2016. 1518년(중종 13) 7월에 통정대부(通政大夫) 행영월도호부사(行寧越大都護府使) 이의철(李宜哲)이 지은 황사효(黃事孝)의 시장(諡狀). 1518년(중종 13) 7월에 통정대부(通政大夫) 행영월도호부사(行寧越大都護府使) 이의철(李宜哲)이 지은 황사효(黃事孝)의 시장(諡狀)이다. 황사효의 자는 백원(百源)이며,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황희(黃喜)의 증손으로, 1477년(성종 8)의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사헌부 지평과 장령, 집의 등을 역임하고 1492년 진주목사가 되었다. 이어 의주목사로 전임되었으나 군사(軍事)에 미숙하고 팔순에 가까운 늙은 어머니를 두고 부임하기 어려움을 상소하여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승정원부승지·우부승지·좌부승지를 역임하였다. 1494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는데, 위수병(衛戍兵)의 노고를 덜어줄 것을 상주하였다. 이듬해 동지중추부사에 이어 대사헌이 되었으며, 1495년(연산군 즉위년) 선위사(宣慰使)로 있을 때 황주에서 죽었다. 『은대조례(銀臺條例)』의 예고(禮攷) 조신 시호(朝臣諡號) 항목에 따르면, 시장(諡狀)은 시호를 청할 때에 그가 살아 있을 때의 행적을 적은 글로, 본가(本家)에서 대제학이나 관각 당상 등에게 시장을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본가에서 시장을 예조에 바치면 예조(禮曹)에서 검토한 뒤에 봉상시(奉常寺)로 보내고, 봉상시에서 검토한 뒤에 홍문관으로 보내면 홍문관에서 3개의 시호 후보를 정한 뒤 하나는 승정원으로 보내 임금의 재가를 받기 위해 들여보내고 또 하나는 봉상시로 보냈다. 위의 황사효의 시장은, 예조에서 봉상시로 보내라고 당상과 낭청이 재가한 문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