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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심 전장에게 보냄 與鍊心田丈 乙亥 을해년(1935) 요새 들으니, 상중에 있는 박현암(朴玄岩)이 김용승(金容承)을 초치하여 자기 조고의 묘갈문을 받는다고 하니 사문의 일이 날마다 그릇되어 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안 북쪽의 여러 공들이 이미 음성의 적도 골수당과 화합하고, 이 박현암이 또 스승을 배반한 사람에게 묘갈문을 받으니, 의리(義理)와 시비(是非)가 혼란하여 뒤집힌 것이 하나같이 이 지경에 이른단 말입니까? 일전에 사견(士狷)과 함께 백천재(百千齋)에 며칠간 머무를 때, 편지를 써서 박현암에게 이 일을 그만두라고 하였습니다. 창암(蒼岩) 어른이 선사에게 열복(悅服)200)하여 성심으로 섬긴 것은 실로 문인들이 미치지 못하는데, 이처럼 스승을 존경한 덕이 있는 분의 행적을 스승을 배반한 자로 하여금 쓰게 한다면 어찌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성이 믿음을 받지 못하고 말이 쓰이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비록 그러할지라도 이 일은 반드시 부안 북쪽의 여러 공들이 열어준 것이라 아니할 수 없으니,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여러 공들이 앞에서는 무함을 성토하고 뒤에서는 일을 같이 하니, 사람들이 이를 보고, 어찌 여러 공들이 어제는 그르나 오늘은 옳다고 여겨 간옹이 조금은 그럴 뜻이 있었나 의심하고 이것이 김용승이 물러나와 스스로를 결백하게 한 것이라고 여겨서가 아니겠습니까? 옛날에 박현암이 우리 어른과 변론할 때, 옆에서 자세히 들었는데, 이런 뜻이 있는 듯했습니다. 일이 만약 이렇게 나간다면 창암 어른이 죽은 뒤의 일만 낭패일 뿐만 아니라, 선사를 위해 무함을 변론하는 것도 어찌 가일층 어려워지지 않겠습니까? 애통하고 애통합니다. 今聞玄岩朴哀, 延致金容承, 受其祖考墓文云, 師門之事, 可謂日益非矣。 扶北諸公, 旣和同陰賊之骨黨, 此哀又謁文於陪師之人, 義理是非之混倒, 一至於此乎? 日前, 與士狷留百千齋數日, 爲喩此哀, 止此事爾。 蓋蒼岩丈之悅服先師而誠事之, 實門人之不及, 以若尊師之德, 令倍師者狀之, 則豈不誤乎? 而誠不見孚, 言不見用, 以至於此, 夫何言哉? 雖然此事未必非扶北諸公啟之也, 何也? 諸公前討誣而後同事, 人之見此, 豈不以諸公爲昨非今是, 而疑艮翁之不免些意, 是容承之退出自潔也乎? 向此哀與吾丈辨論時, 從傍細聽, 似有此意矣。 事若出此, 非但蒼丈身後事之狼狽, 爲先師辨誣者, 豈不一層加難矣乎? 痛矣痛矣。 창암(蒼岩)이 선사에게 열복(悅服)하여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칠십 명의 제자가 공자에게 열복(悅服)하였다.〔七十子之服孔子也〕"라는 말이 나오고, 또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공자가 시서예악을 교재로 가르쳤는데, 제자가 대개 삼천 명에 이르렀으며, 그중에서 육예를 몸으로 통달한 사람이 72인이었다.〔孔子以詩書禮樂敎 弟子蓋三千焉 身通六藝者七十有二人〕"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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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 전장에게 답함 答靜齋田丈 乙亥元月 을해년(1935) 정월 편지를 보내 오진영을 끊는 것을 이미 행하여 엄하게 끊으셨다는 것은 공경히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만약 오진영의 혈당까지 아울러 모두 다스리지 않는다면, 인가를 지시하셨다는 무함을 배척하고 원고를 고친 것을 변척하는 실제에 도움 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다만 올봄 서원에서 제향을 드릴 때 우리 어른이 의론을 어떻게 조처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이 눈을 비비면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우리 어른은 신중히 하시기 바랍니다. 敬悉投書絶震, 旣已行之, 非不嚴截。 若不幷與震之血黨而治之, 無所益於斥認誣辨改稿之實也。 此則只在今春院享時, 吾丈議論擧措之如何爾。 人將拭目而俟之, 惟吾丈愼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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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奇松沙 春間惠復中。西行在隔。諸益鰜筇。庚午年間事。宛在目中。不覺吾心亦凉。況念場屋事。數十年做老娘。宜無不解倒繃了。孩兒固知精銳之兵所向。無前屈指。而傾耳者久矣。竟失所圖。朋友之鈌望亦多。然擧子見屈。自是常理。何足追算。但其間闕幾卷書。枉費脚力於道路上。勞逸得失。較不侔矣。以此推之。旣往小得失。而大得失在前頭。如其返旆之日。更加激勵。以收桑楡。則此吾兄玉成之秋。安知向日之缺望。不爲今日之大可賀也。抑或以蹭蹬沮喪。不爲已患。而患人之莫知。不能自咎。而咎有司之不明。則又安知疇昔之所望。不爲他日之大可失耶。然尊兄想已黙契。復何贅哉。惟望加意勉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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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奇松沙【甲申】 客臘一書。獲拜於南溪金棘人便。雙手奉閱。乃搬移後所發也。慰豁無喩。但路左便稽。謝復差遲。因作兩年之阻。負負何言。謹問春元。兄體新寓迎新。德業與時俱新耶。旣溯且祝。朝晡靡懈。示喩山水之勝。頗有夸張之意。其新寓之樂。可知古人所謂吾心亦涼。先獲我心矣。弟歲去年來。衰頹日甚。眼翳尤甚。若干尋數。猶不能隨意。甘作一陳人。自顧自憐。長田李庠兄。奄聞不淑。而其後又遭回祥。至於几筵犯燼。且驚且愕。第有令甲兩賢躋廡。無邑不然。而平昔不曾講求。素昧儀節。奈何。吾兄想有宿講者矣。幸以所聞示及耶。令季氏二祥奄過。悲鬱之情。益復難抑。爲之抑念。語失先後。欠敬欠敬。把筆臨楮。神思昏塞。不能言。所欲言者。只增忡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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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奇松沙【丙戌】 省禮言。前月安襄。殊極可慰。今日縷紲。聞甚駭然。大抵此事顚末。何如至此之境耶。不勝憤鬱。凡橫逆之來。雖聖賢所不免。而但當順受而已。外此何術。況復因此。動心忍性。德日益進。業日益修。安知不爲他日之福也。千萬勉旃。坦懷寬胸。勿生過慮。如何如何。弟今方發去。而再明似當抵完。諒下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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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승에게 답함 答金允升 甲子 갑자년(1924) 천하의 이치는 하나이듯 천하의 마음과 천하의 문장도 하나로 똑같습니다. 이 마음으로 이 문장을 보고 이 이치를 궁구하여 똑같이 극치로 돌아간다면 마침내 서로 합치하지 못할 이치가 어찌 있겠습니까? 오직 이와 같을 뿐이기 때문에 "청원하여 발간 배포하는 것은 스스로 욕되게 하는 것이다."라는 것은 "힘을 헤아려 하라", "구애받지 말라"는 것과 형세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의 서찰 중에서 가장 긴요한 대목이며, 음성(陰城)의 죄를 감단한 것이 못을 끊고 쇠를 자르듯 하여 끝까지 남김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그런데 지금 답장에 "누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는가."라고 답해주셨습니다. "누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는가."라는 것은 천 명이 그렇게 여기고 만 명이 그렇게 여기어 그렇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진영(吳震泳)을 두터이 엄호하는 형의 입장으로는 당연히 "반드시 그렇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라고 하거나, 설령 조금 평가를 바꾼다 해도 또한 마땅히 "아마 혹 그럴 것 같다."고 말해야 했는데, 그 명쾌하게 결단함이 한결같이 이런 수준에 이르러 이전 편지에 "선사를 무함한 죄를 억지로 자복하게 할 수는 없다."라고 한 것과는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 같지 않을 줄은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이에 천하의 이치와 문장이 동일하고 시비의 공평함이 사람들 마음속의 똑같이 옳다고 여기는 것에서 벗어나지 아니하여 이와 같지 않으면 절로 안 된다는 것을 더욱 믿게 되었습니다. 말이 사리에 맞는 것이 이미 이와 같았으니 여기서 그칠 수 있었는데, 마침내 다시 "그 마음에 다른 뜻이 없음을 보장한다.", "선사를 무함한 것으로 굴레를 씌울 수 없다."는 등의 설로 화사첨족(畫蛇添足)하신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여기서 또한 편사(偏私)를 극복하기 어려움과 앞서의 소견을 버리기 어려움이 이와 같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음성을 엄호한다.'는 '호음(護陰)' 두 글자가 우리 형의 평생 고질병이 되어 곳곳에서 기회를 타고 일어남을 적이 한탄하는 바입니다.대저 말은 심성(心聲)이고, 글씨는 심획(心畫)입니다. 그러므로 고금 사람들의 성광(聖狂)과 선악(善惡)을 보고자 할 때는 오직 말과 글씨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만약 말과 글씨가 이와 같지만 마음은 이와 같지 않다고 한다면, "그 말을 들어보면 사람이 어떻게 숨기리오."35)라는 가르침이 그릇된 것이고, "사람의 마음은 책에서 나타나고 조물주의 솜씨는 만물에 나타난다."는 설은 망령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가 있는 것은 음성(陰城)의 글이고 다른 것은 없습니다. 음성의 마음은 이미 궁구하여 말할 수 없으니, 우선 비록 마음을 따져서 죄를 용서하자고 말하더라도 혹 무의식인 잘못이었다고 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음성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로 정재(靜齋 이석용(李錫庸))에게 말하기를 "선사가 일찍이 인의(認意)가 있었다." 하였고, 두 번째로 송병진(宋秉眞)에게 말하기를 "우리 선사가 일찍이 인의가 있었다."라고 하였고, 세 번째로 함재(涵齋 김낙두(金洛斗))에게 답하기를 "선사가 혼자 앉아계실 때 내게 명하여 힘을 헤아려 하라고 하였다."라고 하였고, 네 번째로 자승(子乘 이병은(李炳殷))에게 답하기를 "선사가 일찍이 깊이 구애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매우 간절히 바른 말로 꾸짖고 정성으로 회유하여 그로 하여금 빨리 잘못을 고쳐 속히 돌아오도록 네 번이나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도 끝내 오만하게 높은 자세로 앉아서 혹은 듣지 못한 척하며 한 해가 다하도록 답을 하지 않았고, 혹은 경쟁하는 습관이 있다고 꾸짖었으며, 혹은 내시의 불알이니 중의 상투니 하는 말로 조소하였고, 혹은 광천(狂泉)36)을 여럿이 마셨다고 욕을 해대었습니다. 선사를 무함한 설을 거듭 반복하고 자신이 옳다는 것에 더욱 힘을 썼으니, 천하의 고의적인 일이 끝내 이보다 심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데도 음성을 죄주어야 한다고 한 것에 대해 억지로 죄를 자복하게 한 것이라고 한다면, 음성을 엄호하는 고질병이 될 뿐만 아니라 혹 선사를 잊어버리는 큰일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심지어 "은행나무 아래에 홀로 앉아계실 때 명했다."고 한 것에 대해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 없다."고 하고, "왜의 달력을 함부로 비웃지 말라."고 한 것에 대해 "발언을 너무 명쾌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형의 식견과 언론이 한때의 잘못이 아니라 육체와 정신을 갉아 먹힌 것이 그 유래가 매우 깊이니, 또한 괴이하게 여깁니다.근래에 조충현(趙忠顯)37)이 글을 지어 뭇사람들에게 호소하기를 "석농(石農)의 '선사가 혼자 앉아계실 때 명했다.'고 하는 것은 가리켜서 감히 없다고 할 수 없고, 정재(靜齋)의 '유서(遺書)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가리켜서 감히 있다고 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바야흐로 여론의 분통과 공의(公議)의 성토를 받고 있습니다. 형의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 없다."는 것과 조충현의 "감히 없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은 비록 의심과 결론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멋대로 지어낸 것으로 성토하는 중론에 반대된다는 점에서는 똑같은 것입니다. 만약 불행히도 형의 편지가 먼저 나왔고 조충현의 글이 뒤에 나왔다면, 혼자 앉아있었을 때에 명했다는 것은 진실이고 유서는 거짓이라는 흉악한 설을 우리 형의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 없다."는 말이 계도하지 않았다고 말하더라도 사람들은 장차 믿지 않을 것입니다. 생각이 이에 이르매 이미 두렵습니다. "발언이 너무 명쾌하다."고 한 것은, 말은 이치에 어긋나지 않지만 말투 속에 억양이 너무 지나친 것을 말함이 아니겠습니까? 오랑캐의 정삭(正朔)을 사용한 김수홍(金壽弘)38)에 대해 꾸짖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친족의 정을 끊게 한 것은 우암(尤菴)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김수홍이 우암을 기롱하여 "남이 오랑캐의 정삭을 쓰는 것에 대해 조심하여 함부로 경멸하지 말라."고 했는데, 김수홍을 용서해야 한다고 하는 자가 "발언이 너무 명쾌하다."고 한다면, 과연 말이 되겠습니까? 말이 이에 이르매 또한 놀라게 됩니다.대체로 보내준 편지의 전말을 모두 들어서 반복해 살펴보면, "누가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는가."라는 한 구절 이외에는 모두 영남을 돕고 음성을 엄호한 것으로서 점점 자신도 모르게 의리를 상실하고 무함을 사실화하였습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육체와 정신을 갉아 먹힌 장본이 있을 것입니다. 편지에 "당인(黨人)을 논함에 있어서는 먼저 그 우두머리가 어떠하고 쟁단의 일어나게 된 이유가 어떠한가를 말해야 한다."는 것과 "음성은 치우쳐서 주장한 바가 없었고, 순재(舜在 성기운(成璣運))는 일의 기미를 두루 움켜쥐었고, 경존(敬存 최병심(崔秉心))은 암암리에 그의 사적인 이익을 취하였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호남과 영남의 시비를 우선 놔두고서 다만 무함 여부만 논했던 것은 문도와 관련된 것이냐 선사와 관련된 것이냐는 차이가 있고, 그만둘 수 있느냐 그만둘 수 없느냐는 같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형이 호남은 그르고 영남은 옳다 하여 무함한 죄까지 아울러 묻지 않는 것을 보았는데, 어찌 감히 대략 사실을 진술하여 고명(高明)의 취사를 기다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대저 처음에 인가를 논의하는 자리에 참가하지 않았고, 두 번째는 청간(清刊)하는 곳에서 인가를 힐난하였고, 세 번째는 음성을 성토하는 일에 의리를 제창했으니, 그 의리가 맑고 맑으며 말이 정당하고 정당한 자는 함재(涵齋) 김장(金丈)이니 진실로 호남 의론의 우두머리가 됩니다.. 경존(敬存)과 같은 자는 호남의 침묵으로 인하여 멀리 가지 않고 되돌아온 자에 불과하니, 진실로 문망(文望)의 우열을 가지고 그 수석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쟁단이 일어나게 된 이유 같은 것은 무슨 일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음성이 저에게 답한 편지에 상빈(傷貧)의 마음이 첫째이고, 뇌비(賂碑)의 유감이 둘째라고 하였는데, 형이 지적한 것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그러나 책을 간행하는 곳은 돈이 생겨나는 숲이 아니고, 정재(靜齋)도 평소 탐욕하다고 칭해지는 자가 아니니, 부자가 되고 싶어서 간행 장소를 다퉜다고 하는 것은 삼척동자도 믿지 않을 것이니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경존(敬存)이 뇌물을 주어 비문을 얻었다고 말한다면, 뇌물을 받고서 비문을 지은 자는 누구입니까? 앞서 제창한 자가 있자 다시 이에 화답한 자가 있어 말하기를 "이 글은 마땅히 삭제하고 다만 비(碑)를 강등하여 갈(碣)을 하면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를 통해 최경존을 성토한 것이 아니라 실로 백대 뒤에도 우리 선사의 씻기 어려운 허물을 증명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어찌 문하의 제자가 감히 할 것이겠습니까? 스승의 문장을 돌아가신 뒤에 고치는 것은 변괴 중에 큰 것인데, 고칠 수 있고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국법에 그 증거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국법을 미처 보지 못하였지만 아무렇지 않게 멋대로 고쳤으니, 이것이 어찌 조금이라도 선사를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또한 문하의 제자라면 감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뇌비와 관련한 두 번째 유감은 최경존 한 사람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똑같이 그렇게 여기는 것입니다. 유감을 갖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선사에게 허물을 끼치고 선사를 경시했기 때문입니다. 경존의 잘못은 갈(碣)로 고치는 것을 경솔하게 허락한 날에 있었고, 예전의 비(碑)로 회복하고자 한 날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현동(玄洞)에서 발간한 것에 대해 "그의 사적인 이익을 취하려고 시행한 것이었다."라고 하였습니다. 호남의 침묵은 경존의 수중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고, 현동에서 발간하는 일도 경존이 혼자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완청(完廳)의 해각(亥角)39)과 온 도의 동문들이 어찌 모두 경존이 사적인 이익을 암암리에 취하도록 해주었겠습니까? 만약 경존이 사적인 이익을 취하고 쟁단을 일으키는 혐의를 피하였다면, 외부의 방애가 없는 현동에서 발간하는 것과 똑같은 마음으로 인가를 구걸한 영남의 일은 스승을 의리로 섬기며 허물을 고치는데 기탄이 없는 도리가 결단코 아니었으니, 큰 죄가 되지 않겠습니까?쟁단의 뿌리를 암암리에 양성한 것은 원래 영남에 있었습니다. 3000원짜리 집을 주겠다는 감언에 원고가 갑자기 영남으로 넘어갔고, 600원 발간 비용을 마련한 의록(義錄)은 그 재물을 관장할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에 일곱 성인은 모두 길을 잃었고40) 일만 대중은 눈이 없어서 스스로 여기기를 '병졸이 사적인 이익을 싫어하지 않는 것은 장수의 원대한 계책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원고를 출판하도록 유혹했다는 힐난이 전사인(田士仁)의 영남 편지에서 나왔고, 장재(掌財)를 가짜로 꾸몄다는 것이 탄로 나서 김정호(金楨鎬)가 그 액(厄)을 대신하였습니다. 처음에 쟁단의 뿌리를 암암리에 양성하였기 때문에 결국에는 다툼의 보루가 선명하게 솟아오른 것이니, 형세로 볼 때 반드시 닥치게 될 일이었습니다.완청(完廳)의 해각(亥角)은 "우리 인본(印本)만 유독 없겠는가. 인본이 없다면 경성에는 어찌 끝내 없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분명히 침묵한 것이다."라는 것은 오진영의 글에서 확고하게 말하였고, "하공(荷公 민영휘(閔泳徽))이 침묵하였다."는 것은 성기운(成璣運)의 편지에서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러나 끝내 어쩌지 못하고 꼭두각시의 본모습이 가리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침묵해서 허락할 수 없었다."고 송병휘(宋秉徽)의 편지에서 드러나자 "분명히 침묵한 것이다."는 말은 깨짐을 면치 못하였고, "민장은 말이 없었다."고 조충현(趙忠顯)의 글이 나오자 "하공은 침묵하였다."는 것은 날조한 것으로 귀결되었습니다.우리 형께서 "석농(石農)의 마음은 치우쳐서 주장한 바가 없었다.'고 한 것은 과연 맑은 하늘의 백일과 같은 것이었으며, "순재(舜在)는 일의 기미를 두루 움켜쥐었다."고 한 것은 과연 빽빽한 그물을 사방에 둘러친 것이었으니, 정확한 말씀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형이 이에 대해 오히려 다시 말하기를 "다툼의 실마리는 호남에 있으니 선사를 무함했다고 성토하는 것은 결단코 옳지 않다."라고 했으니 또한 무슨 까닭입니까? "나는 우선 할 말이 없네만 인가와 침묵은 오십보백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도 그렇지 않습니다. '인허(認許)'에 대해 '묵허(黙許)'라고 한 것은 저쪽에서 지어낸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 일을 하는데 저들은 알고서도 금지하지 않았으니, 나의 입장에서 말할 것 같으면 다만 침묵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진실로 인가와 침묵을 동일하게 허락한 것이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또 신청의 유무와 왜(倭)의 달력을 썼는지 여부는 똑같이 놓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찌 오십보백보로 개괄할 수 있겠습니까?당일에 허물의 있고 없음은 알 수가 없습니다만 저는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선사의 장례를 지낼 때에 그의 성모(誠慕)와 우리의 청초(淸楚)함에 대해서는 이미 들을 만한 말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원고를 인쇄하는 것은 곧 전날의 장례를 치르는 것이고, 지금의 도지사(道知事)는 곧 전날의 성모했던 해각(亥角)입니다. 그러니 장례를 지낼 때 방애가 없는 것과 함께 똑같이 일례로 삼아서 일찍이 의심하지 않았던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또한 임술년(1922) 겨울에 몸소 완청에 질문했던 자는 영백씨가 아니었습니까? 과연 하자가 있었습니까? 그렇다면 영백씨가 먼저 알았을 것인데, 어찌하여 금지하여 당일에 쓰지 말라고 한 마디 말도 없었으며, 형이 마침내 오늘에 뒤미처 비판을 한단 말입니까? 또한 하나의 의아스러운 일입니다. 우리 형의 형제는 세상에서 원방(元方)과 계방(季方)41)처럼 우열을 다투기 어렵다고 칭송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스스로 힘써서 첫 번째 의리로 삼는 것은, 정성을 다하여 형에게 고하지 않은 것을 아우가 반드시 감히 하지 않을 것이고, 자신의 뜻을 강행하여 어진 아우가 정성을 다해 한 말을 듣지 않는 것을 형이 또한 하지 않을 것입니다.대저 선사를 무함한 것과 김용승(金容承)을 당(黨)으로 여긴 것은 그 죄에 경중이 있습니다. 만약 함장(涵丈)에게 진실로 김용승을 당으로 여긴 자취가 있다면 의당 무거운 것을 버리고 가벼운 것을 살펴서는 안 되며, 하물며 김용승을 따라서 사우(師友)간으로 선사를 대하던 것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때였으니 더욱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김용승과 절교한 것은 7월 4일 대상(大喪)을 지낸 이후입니다. 날짜가 분명하고 마음의 자취도 선명한데, 영백씨는 어찌하여 선사를 무함한 음성 사람을 모두가 곡진하고 맹렬히 성토할 때 마음을 허여한단 말입니까? 김용승과 절교한 함재가 머리가 새하얗게 센 백수(白首)의 나이로 30살이나 아래인 정운한(鄭雲翰)의 부장(副將)이 되는 것을 꺼리지 않았으니, 형이 영백씨게 고한 것에 정성을 다함이 있지 않아서입니까? 성토한 김모(金某) 무리의 중제(中弟)도 또한 그 중의 하나입니다. 비록 스스로 말한 혐의가 있지만 의견을 다 펴서 말하지 않으면 도가 드러나지 않는 자리인지라 또한 감히 침묵하면서 도외시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한 번 언급했을 뿐입니다. 天下之理一也,天下之心,天下之文,亦一同也。以此心見此文究此理,通歸于極致也,豈有終不相合之理乎? 惟其如是也,故請願自辱、料量不拘之勢不兩立,惡札中最緊節眼,而所以勘斷陰罪者,可謂斬釘截鐵,到頭無餘。而今承盛教,乃以"夫誰曰不然"答之。"夫誰曰不然"者,豈非千人然之,萬人然之,無人不然之謂乎? 以兄護震之厚,宜其曰"未知其必然",雖使稍改品藻,且應曰"似或然矣"。孰圖其明快斷決,一至於此,與前教"不可強服誣師之罪"者,若不出一人之口哉? 於是益信天下之理與文之一同,是非之公不外乎人心之所同然,而不如此自不得也。言之中倫,旣已若此,則斯可以止矣。乃復以"其心保無他意"、"不可勒以誣師"等說,添畫蛇之足,何哉? 於是又以知偏私之難克,已見之難舍,有如是矣。竊歎夫護陰二字,爲吾兄平生貞祟,而隨處闖發也。夫言者心聲也,筆者心畫也。故欲觀古今人之聖狂善惡,惟言與書是準。茍曰言書之如此,而心之不如此,"聽其言也,人焉廋哉"之訓謬矣,"人心著書,化工著物"之說妄矣。然則有罪者陰書而無他者,陰心旣是究說不得,且雖曰原心而恕罪,其或出於眚災也則哿矣。陰也則不然,一之而對靜齋言: "先師曾有認意。" 再之而對宋氏秉眞言: "吾師曾有認意。" 三之而答涵齋曰: "先師獨命料量爲之。" 四之而答子乘曰: "先師嘗教不必深拘。" 及夫正責誠喻,恳恳切切,俾改之速遄復者,累牘之四至也。則終是傲然高坐,或如不聞而終歲不答,或喝之以兢爭之習,或嘲之以宦睾僧髻,或罵之以狂泉衆飲。據其誣說之重複,自是之愈力,天下之怙,終未有加於此者。如此而謂罪陰者謂勒,則非獨爲護陰之貞祟,無或近於忘師之大故乎? 至以杏下之獨命,謂有無之未可知; 愼勿妄罵倭朔,謂勿發得太快。又怪夫兄之見識言論,非一時之差,其狐惑蠱食,所由來者深矣。近日趙忠顯爲文,呼於衆曰: "石農之獨命,不敢指以爲無; 靜齋之遺書者,不敢指以爲有。" 方被輿情之駭痛,公議之討駁矣。兄之不知有無,趙之不敢謂無,雖有疑決之有間,其爲反對乎討以撰造之衆論,則一也。若使不幸而兄書先而趙文後,眞獨命僞遺書之凶說,謂非吾兄不知有無之語有以啟之,人將不信。念之到此,旣爲之凜然。"發得太快"者,豈非言不悖理,而詞氣之間,抑揚太過之謂乎? 用虜朔之金壽弘,不但罵之,而教人滅親者,尤翁也。使壽弘而譏尤翁曰"愼勿妄滅人之虜朔",而恕壽弘者謂之"發得太快",則其果成說乎? 言之至此,又爲之駭然。蓋統舉來書首末而反覆之,"夫誰曰不然"一句外,無非右嶺護陰,而駸駸不覺喪義而實誣,此必有狐惑蠱食之本也。盛喻所謂"論黨人,先言其爲首者如何,爭端之所由起如何"及"陰城無所偏主,舜在周羅事機,敬存陰濟其私"者,果非此耶? 弟之姑閣湖嶺是非,但論其誣不誣者,以關門從關先師之有異,可已不可已之不同也。今見兄之非湖是嶺,而并與誣罪而不問,則安敢不略與陳質而俟明者之采棄乎?夫初不參於認議之席,再詰認於清刊之所,三倡義於討陰之役,其義之清乎清,其辭之正乎正者,涵齋金丈是已,實爲湖論之首也。如敬存者,不過因湖黙而不遠復者也,固不可以文望之優劣而易其首席。若爭端之所由起,則未知其何事。然陰城答鄙人書,傷貧之心一也,賂碑之憾二也,兄之所指,想亦不外乎此也。然刊所非生金之藪,靜丈非素號貪饕者,則欲求富而爭刊所,尺童之非可信,更不須說。至於謂敬存爲納賂而得文,則其受賂而作文者,誰也? 旣有唱之者,復有和之者,乃曰: "此文當拔,而但降碑爲碣。" 此非以討崔,實所以證成先師難洗之累於百世也。是豈門弟之敢爲乎? 改師文於身後,變之大者,可改而不爲罪者,爲其證於國典也。國典未及目覩,而擅改無難,是豈有一分尊畏之心乎? 此又門弟之所不敢也。賂碑二憾,非獨崔之一人,乃千百人之所同然者,憾者何爲? 其累師輕師也。敬存之失,在於輕許改碣之日,不在欲復碑舊之日也。乃以玄刊,謂陰濟其私而設,湖之黙非出敬存之掌中,玄之刊非敬存之所獨也。完廳之亥角,一省之同門,豈皆陰濟敬存之私者歟? 若使敬存避濟私起爭之嫌,自外無礙之玄刊,同心乞認之嶺役,決非事師以義、改過勿憚之道也,有不爲罪之大者乎? 乃若潛釀爭端之根,元在乎嶺。三千圓家庄之甘言,稿忽踰嶺; 六百圓刊費之義錄,掌財有人。于斯時也,七聖皆迷,萬衆無目,自以爲兵不厭私將家之長算也。孰料其居無何,誑誘出稿之詰,出於田士仁之嶺書,假粧掌財之綻露,金楨鎬代其厄? 惟其始之潛釀爭根,故終之顯峙爭壘,勢所必至爾。完之亥角我印獨無! 印則未有,京豈終無? "分明是黙",據確於吳筆: "荷公(閔泳徽)擔黙",光增於成書。終無奈傀儡之本狀難掩。黙許不得,著於宋秉徽之書,而"分明是黙"不免見破; 閔丈無言,出於趙忠顯之筆,而"荷公擔默"歸於白撰。信乎吾兄所云"石農之心無偏主",果青天之白日也; "舜在之周羅事機",果密網之四匝也。吾兄於此尚復云"爭端之在湖,并不韙其討誣." 則亦復何哉? "我且忘言, 認與黙, 百步五十步之間",此又未然。對認許而曰黙許,自彼之所命名也。吾爲吾事而彼知之不禁,則自我言之,但可謂之黙,固不可謂認與黙同一許也。且申請之有無,彼朔之書否,不可同日而語也。烏得以百步五十步槩之哉? 若其當日瑕累之有無,雖不可知,然弟則以爲襄禮之時,彼之誠慕, 吾之清楚,旣有言足聽聞者。則今日之印稿,即前日之襄奉也; 今日之知事,即前日誠慕之亥角也。宜其與襄奉之無礙,同爲一例,而曾不致疑矣。且壬冬之躳質完廳者,非令伯氏乎? 果有瑕累乎? 則令伯氏當先知之,胡無一言禁止,使勿用於當日,而兄乃追譏於今日乎? 亦一可訝也。吾兄兄弟,世所稱元季方之難爲者。所自勉以爲第一義者,不以盡誠告其兄, 弟必不敢也; 硬行已志, 不聽賢弟盡誠之言,兄亦不爲也。夫誣師與黨金,罪有輕重,使涵丈實有黨金之跡,固不當舍重而察輕,况其從金師友處師未著之日也。絕金, 七月四日行祥之後也。月日斑斑,心跡昭昭,柰之何令伯氏之許心於誣師之陰人爾我相繾綣猛討? 夫絕金之涵齋, 以皓然白首, 不憚爲三十年少鄭雲翰之副將,無乃兄之所以告之者有未盡誠者歟? 所討金某輩中弟亦其一也。雖有自鳴之嫌, 不直不見之地,亦不敢隱黙而自外, 故此一及耳。 그 말을……숨기리오 《맹자(孟子)》 〈이루 상(離婁 上)〉에 "상대방의 말을 들어 보고 눈동자를 살펴본다면 그들이 어떻게 자신을 숨기겠는가.[聽其言也, 觀其眸子, 人焉廋哉]"라고 하였다. 광천(狂泉) 옛날 어느 나라에 광천(狂泉)이 있어 그 물을 마시는 사람은 미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남사(南史)》 조충현(趙忠顯) 자는 경서(景恕), 고종 병인년(1866)에 태어났다. 본관은 평양으로 주사를 지냈으며 평간공의 조견의 후손이며 청양에 거주하였다. 김수홍(金壽弘) 조선 시대의 문신(1601~1681). 자의 대비(慈懿大妃) 복상 문제와 청나라와 명나라 연호 사용 문제로 송시열과 반목하였다. 해각(亥角) 일본인 해각중장(亥角仲藏)으로, 1921년 8월 5일 ~ 1925년 8월 11일까지 2대 전라북도 도지사를 지냈다. 일곱……잃었고 《장자(莊子)》 〈서무귀(徐无鬼)〉의 "양성의 들판에 이르자 황제(黃帝)를 모시는 일곱 성인이 모두 길을 잃었다.[至於襄城之野, 七聖皆迷]"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길을 잃어 갈 곳을 모르는 것을 뜻한다. 원방(元方)과 계방(季方) 진원방(陳元方)과 진계방(陳季方)은 형제인데, 둘 다 재주가 뛰어났다. 그래서 "원방은 형 노릇 하기가 어렵고, 계방도 동생 노릇 하기에 어렵다.[元方難爲兄, 季方難爲弟]"라는 말이 나왔다. 이때부터 난형난제(難兄難弟)는 누가 더 낫고 못함을 구별할 수 없는 경우를 이르게 되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김윤승에게 답함 答金允升 甲子 갑자년(1924) 대저 음성(陰城)을 엄호하는 여러 사람들은 "언어와 문자로 사람을 죄주는 것은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제 이후 저들은 눈으로 유서(遺書)를 보고도 조금도 개의치 않고서 강태걸(姜泰杰)이 인가를 받아 출간하는 것에 급급하여 인의(認意)와 인교(認敎)의 실제 근거를 만들었으니, 이와 같은데도 오히려 마음을 헤아려야 하겠습니까? 진천(鎭川) 경찰서에 선사의 무함을 성토한 사람을 고소하여 창암(蒼巖)과 신헌(慎軒)이 다시 조사를 당하게 되어 재앙의 기미를 예측할 수 없으니, 이와 같은데도 오히려 마음을 헤아려야 하겠습니까? 만약 그 인가와 그 고소가 음성(陰城)의 저 강태걸이 작성한 고소장 중의 오선생(吳先生)이 허락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는 처음에 오씨의 허락을 받았다고 했다가 마지막에는 아무에게도 허락을 받지 않았다고 한 것이니, 어떻게 처리해야겠습니까? 비록 네가 아니라고 말하나 이미 너의 노래를 지었다42)고 하겠습니다.함재장(涵齋丈 김낙두金洛斗)이 인가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지극히 맑고 지극히 바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능히 스스로 자립하여 별도로 하나의 의론을 만들지 못하고 도리어 경존(敬存 최병심(崔秉心))에게 의지하여 석농(石農 오진영(吳震泳))을 위협하고 강제하여 선사를 무함하게 하였습니다.영백씨(令伯氏)가 완청(完廳)에 가서 질문했음에도 침묵한 것의 잘못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오진영과 성기운(成璣運)이 보루를 만들어 경존(敬存)을 기다린 것으로 또한 그 잘못을 잡아낼 수가 없었지만, 장소를 옮겨 간행하자는 의론을 먼저 제창한 것에 대해. 함재장이 어떻게 잘못을 억지로 지적하며 배척하여 쓰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음성의 죄가 위협의 여부라면 음성의 편지가 그대로 있으니 나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경존이 그 문도(門徒)을 시켜 침묵하게 만들어 문제를 일으켰고 사람들이 모두 그가 그랬다는 알고 있기 때문에 호당(湖黨)의 수죄(首罪)를 말할 경우에는 반드시 경존이라 말한다. 지금 우리 형이 경존을 엄호하고자 하여 그 사실을 바른대로 말하지 않고 도리어 함재장을 수석이라 하고, 경존은 처음부터 침묵을 도모했는지 알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형이 비록 이와 같이 말하더라도 사람들이 믿겠습니까.호남 사람들의 주장은 '인가를 구걸하지 않고 선사의 무함을 변론한다.[不乞認辨師誣]'는 여섯 글자일 뿐입니다. 함재장이 이 여섯 글자에 약간의 흠결이 있어서 수석이 될 수 없는 것입니까? 경존이 죄가 없다는 것은 내가 영백씨에게 증명하여 알 것입니다. 비록 이를 면하지 못하여 경존이 스스로 죄를 인정한다고 해도 어찌 뒤집어씌워 호당의 수죄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우리 형이 반드시 침묵을 도모한 계획에서 경존을 빼내려고 하는 것은 경존을 보호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경존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를 빼낸다면 경존을 대신하여 들어갈 자를 어느 자리에 놓고자 하는 것입니까? 형은 옛 친구에게 돈독히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독 종장(宗丈)을 생각지 않고 모두가 미워하는 자리에 빠뜨리고자 한단 말입니까?함재장이 보여준 그동안의 한결같은 절의는 순수하여 하자가 없었으니, 원래부터 절로 호남 사람의 수석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대개 형은 경존의 문망(文望)이 오래도록 전 호남에 드러났다는 것으로 호남의 수석이라고 잘못 인식하였고, 또 침묵을 도모한 것이 경존의 중죄라고 여겼기 때문에 함재장이 경존을 대신하여 들어갔다고 말하였고, 모두가 미워하는 자리에 그를 빠뜨렸다고 말하였습니다. 원래 수석이었던 함재장에 대해 침묵을 도모한 경존을 대신하여 들어갔다고 억지로 말하고 그가 모두가 미워하는 자리에 빠진 것을 우려하였으니, 그렇다면 영백씨가 실로 추종하여 침묵을 도모한 뒤에 몸소 완청에 질문하고서 다른 말이 없었던 것은 어찌 더욱 모두가 미워하는 자리에 빠뜨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함재장에 대해 간절히 근심하면서 영백씨에 대해서는 무심하단 말입니까?우리 형은 오늘의 전쟁을 천하의 의전(義戰)라 여기십니까? 그렇다면 그 수석이 된 자는 천추의 영광이라 말할 수 있으니, 반드시 종장으로 그 수석을 바꾸고자 한다면 이것은 옛 친구는 박대하고 종장에게는 은혜를 파는 것이 됩니다. 옛 친구가 유독 유감이 없겠습니까?원수의 인간(認刊)을 배척하고 선사의 무함을 변론하는 것이 의전이 아니겠습니까? 수석이란 이름은 사실에 근거하여 정해지는 것이니, 무슨 은혜와 유감이 있겠습니까?선사는 애당초 이와 같은 것을 알지 못하고 정재장(靜齋丈)과 경존의 간절한 청을 고달프게 받아서 다만 경존이 스스로 지은 글에 잠시 착함(着銜)을 하였을 뿐이었습니다. 선사에게 또한 무엇을 손상될 것이 있겠습니까?선사의 글에는 본디 《춘추》가 의리가 담겨 있습니다. 지금 '정재와 경존의 간청을 괴롭게 받아서 허락했다.'고 말한다면, 자신의 《춘추》의리에 따르지 않고 다만 자손과 문인의 안면과 인정을 보고서 허락한 것이 될 뿐이니, 흡사 그 일을 알고 있었던 것 같지 않겠습니까? 위태롭고 위태롭습니다. 형의 말은 선사를 핍박하여 손상한다고 하겠습니다.영남 사람이 설령 이런 잘못이 있었다고 해도, 만약 경존이 중간에서 문제를 만들지 않았다면 일이 이런 지극한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것입니다.단지 인간(認刊)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여겨서 문제를 일으킨 것에 대해 통렬히 문죄하는 것은 또한 우리가 선사를 존경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지금은 음성의 강태걸이 인가를 받아 출간하는 일이 장차 이루어지게 되었으니, 깊이 유감으로 여기지 말기 바랍니다.절절하게 인가를 받을 때를 살펴서 비루하게 그 실정을 슬피 호소하여 곤욕스럽게 경우 허락을 받았습니다.영백씨가 완청에 가서 질문한 뒤에 만약 절절하고 비루하고 곤욕스러운 상황을 말했다면 함재 등 여러 어른의 맑고도 바른 의리로 어찌 기꺼이 침묵했겠습니까? 또 당시에 만약 절절하고 비루하고 곤욕스러운 실상이 있었다면 영백씨가 어찌 가리고 숨겨서 말하지 않았을 이치가 있었겠습니까? 이 말이 영백씨가 완청에 가서 질문한 날에 나오지 않았다가 마침내 오늘 잘못을 찾은 이후에 있었으니, 또한 괴이합니다.침묵이 잘못이 없다고 말하려고 감히 선사의 장례 일로 비겨 의론을 하였는데, 이것은 하자가 없는 일이 또한 하자가 있는 일이 된 것이니 옳겠습니까? 공자가 말씀한 '말재주 있는 사람[佞人]'43)이 바로 이런 부류인데, 우리 형이 마침내 이런 것을 배웠단 말입니까?음성 사람들은 얽매임에서 벗어나는 방도가 있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이미 김경부(金敬父)를 시켜 완산을 한번 가라고 한 것과 영백씨가 당일에 말하지 않았던 비루하고 곤욕스러운 말 등에 대해 지금 우리 형은 잘못이 있다고 여기었습니다. 그렇다면 일찍이 잘못이 있는 것을 잘못이 없는 것으로 만든 것은 음성 사람과 영백씨였고, 일찍이 말재주를 배운 자도 음성 사람과 영백씨였습니다. 어찌 이것을 가지고 먼저 배척하지 않으십니까? 【후에 음성 사람이 서모(徐某)에게 답한 편지를 보니, "선사의 성대한 덕은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기 때문에 얽매임에서 벗어나는 도가 있으니, 장례를 지낼 때에 잘못이 없었던 것과 같다. ……"고 하였다. 〇정묘년(1927) 6월에 추가로 기록한다.】함재장은 선사의 대상(大喪) 이후에 김용승(金容承)과 절교했는지를 모르겠습니다.저의 편지를 우선 놔두고 영백씨가 급히 음성에 편지를 보냈던 망령된 것이었습니까? 오히려 다시 함재장이 김용승과 절교했는지 여부를 모르겠다고 말씀하십니까? 함재장도 믿을 만 못하고 저도 믿을 만 못하고 영백씨도 믿을 만하지 못합니까? 夫護陰諸人之言,不曰"以言語文字罪人, 非所以原心"乎? 今焉以後,彼目見遺書,而曾不爲意,汲汲乎姜認之刊,結成認意、認教之實據,如此而尚可以原心乎? 訴討誣人於鎭川署,蒼巖、愼軒再當調査 禍機不測,如此而尚可以原心乎? 如曰其認其訴,非陰伊姜告文中吳先生諾之,何以區處始之受吳諾,終之承誰諾? 雖曰非汝, 旣作爾歌。涵齋丈之不欲認, 可謂至清至正。然不能自立別爲一論, 反倚敬存而脅勒石農以誣師。令伯氏之探質完廳而不言黙之疵累也,故雖以吳、成之設壘以待敬存者,亦不得執其疵累,而先倡移刊之議,涵丈何得以強摘疵累而斥之不用哉? 陰罪之脅勒與否,自有陰書在,吾不須言。敬存使其門徒圖黙以生梗,人莫不知其然,故語湖黨之首罪者,必以敬存爲言。今吾兄欲護敬存而不正言其實, 反以涵齋丈爲首席,以敬存爲初不知圖黙者。兄雖如此言之,人其信諸?湖人主義,"不乞認辨師誣"六字是已。涵丈於此六字,有些子欠點,而不得爲首席乎? 敬存之無罪,吾證於令伯氏而知之,雖或不免是,敬存自罪,烏得以冒作湖黨之首罪乎?吾兄必欲拔敬存於圖黙之計者,以其欲護敬存也。然護敬存而拔之,則代敬存而入者,欲置之何地? 兄可謂篤厚於故舊,然獨不念宗丈而欲陷於衆惡之地哉?涵丈之前後一節,粹然無瑕,元來自在之湖人首席也。蓋兄以敬存之文望久著全湖 錯認爲湖人首席,而又以圖黙爲敬存之重罪,故謂涵丈代敬存而入,而謂陷之於衆惡之地。夫以元來首席之涵丈,強謂代圖黙之敬存而入,而憂其陷於衆惡之地,然則令伯氏之實從圖黙之後而躳質於完廳而無異辭者,豈不尤陷於衆惡之地乎? 何其憂切於涵丈,而恝然於令伯氏也?吾兄以爲今日之戰,天下之義戰歟? 則其爲首席者,可謂千秋之榮光,必欲以宗丈易其首席,則是薄於故舊 而市恩於宗丈也,其爲故舊者獨無憾乎?斥讐認辨師誣,非義戰乎? 首席之名, 依實而定, 恩憾何有?先師則初不知其如此,而苦被靜丈與敬存之懇請,只假銜於敬存自撰之文也。先師乎亦何傷?先師秉筆,自有《春秋》。今曰苦被靜敬之懇而許之,夫不由自家《春秋》,只看子孫門人顏情而許之者,無乃疑若知其事者乎? 殆而殆而。兄言之逼傷先師乎?嶺人設有此失,若無敬存之中道生梗,則事不至此極。只恨認刊之不順就而痛罪生梗,亦異乎吾尊師也。今則陰之姜認刊將成,願勿深恨也。切切然瞷其納約之時,卑卑焉哀鳴其情,戛戛乎僅得其許。令伯氏探質完廳之後,若言切切卑卑戛戛之狀,如涵齋諸丈清正之義,豈肯用其黙? 且當時若有切切卑卑戛戛之實,令伯氏豈有掩諱不言之理? 此言不出於令伯氏探質之日,乃在今日覔疵之後,亦可異也。欲言黙之無累,敢將襄奉以擬議,是無瑕之事亦爲有瑕之事也, 其可乎? 夫子所謂侫人即此類, 而吾兄乃學此耶?陰人之謂有脫絆之道,故已令金敬父完山一行,令伯氏之所不言卑卑戛戛等說於當日者,今兄以爲有瑕。然則早已把有瑕作無瑕者,陰人與令伯氏也; 早已學侫人者,陰人與令伯氏也。何不以此而先斥之也?【後見陰人答徐某書曰: "先師盛德,人所共尊,故有脫絆之道,如葵時無累云云。"○丁卯六月追識。】涵齋丈自祥以後,未知其絕金與否。鄙書姑置,令伯氏之馳書陰城,亦是妄歟? 尚復曰未知涵丈絕金與否乎? 涵丈不足信,此漢不足信,令伯氏亦不足信歟? 비록……지었다 《시경(詩經)》 〈상유(桑柔)〉의 "비록 내가 아니라고 말하나 이미 너의 노래를 지었도다.[雖曰匪予, 旣作爾歌]"라는 구절을 원용한 것인데, 비록 스스로 잘못을 꾸며대며 말하지만 이미 사실을 밝혀 말하였다는 뜻이다. 말재주 있는 사람 《논어(論語)》 〈선진(先進)〉에 보인다. 자로가 자를 비읍의 수령을 삼자, 공자가 "남의 아들을 해치는구나!" 하였다. 이에 자로가 "백성이 있고 사직이 있으니, 하필 글을 읽은 뒤에야 학문을 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니, 공자가 "그러므로 말재주 있는 자를 미워하는 것이다." 하였다.[子路使子羔爲費宰. 子曰賊夫人之子. 子路曰有民人焉, 有社禝焉, 何必讀書, 然後爲學. 子曰是故惡夫佞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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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승에게 답함 與金允升 丁卯 정묘년(1927) 앞서 존형의 편지에 음성 사람이 선사를 무함한 죄를 잘못 뒤집어썼다고 여기고 안타까워하며 공개적인 성토가 억압이라고 말했는데, 지금까지도 결론이 나지 않은 안건입니다. 대체로 이른바 "은행나무 아래에 홀로 앉아계실 때 명하였다."는 것이 무함한 말임은 원래 명백하였는데, 다만 그가 "단지 지속을 논하였을 뿐이고 인가 여부를 미처 말하지 못하였다.[但論遅速, 不及認否]", "말은 구별이 부족하고 문장은 표현이 허술하였다.[語欠區別, 命辭踈忽]" 등의 말로 장황하게 덮고 꾸며냈기 때문에 비록 존형의 밝은 식견으로도 현혹됨을 면치 못하고 미처 간파하지 못했던 것입니다..지난겨울에 또 그가 서모(徐某)에게 답한 편지를 얻어 보았는데, 첫머리에 "바다를 건너갈 수 없었다."는 것으로 자신의 명백한 뜻을 밝히고, 끝에서는 "사실은 원래 선사의 불언지교를 따랐다.[其實原從先師不言之敎]."고 하였습니다. '불언지교' 네 글자는 비록 음성을 엄호하는데 공교한 자로 하여금 변명하게 하여도 인가한 뜻으로 보지 않기가 어려울 듯하며, '기실(其實)'이라고 하고 '원종(原從)'이라고 하였으니 또한 부족하거나 소홀한 뜻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이런 극도의 지경에 이르렀으니, 비록 음성의 입으로 방자하게 변명하더라도 아마도 더는 장황하게 꾸밀 수는 없을 것입니다."갑은 말은 저와 같고 을은 이와 같으니, 함께 한 길로 돌아감은 어느 때나 있을까.[甲言如彼乙如斯, 同歸一轍在何時?]" 이는 왕년의 존형이 지은 것이 아니었습니까? "구름 흩어지고 산이 솟아나야 진면목이 드러나니, 갑과 을이 같이 합치는 것 바로 이때일세.[雲歸山立呈眞面, 甲乙同符在此時]" 이는 또한 저의 화답이 아니었습니까? 제가 헤아려 보건대, 진면목이 들러나서 갑과 을이 같이 합치는 것은 이제 그 때를 정해야 합니다. 존형의 견해는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답장에서는 확실하게 의심이 제거되어, 더는 번거롭게 피차간에 주고받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그리고 방자하게 선사의 원고를 고친 것은 또한 이미 들어 알고 있습니까? 아니면 듣기는 하였지만 또한 혹 그가 죄를 잘못 뒤집어썼다고 불쌍히 여기는 것이 지난날의 인가와 관련하여 선사를 무함한 것과 같습니까? 이것은 수정본(手定本)이 본디 있으니 많이 따질 것도 없습니다. 다만 왕년에 영백씨(令伯氏)가 초록하여 보관한 회재(晦齋), 퇴계(退溪), 율곡(栗谷) 세 선생의 설을 가지고 의심난 것을 질문하고 진본(晉本)을 대조해 보면 그 나머지는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前承尊喻,以陰人誤蒙誣師之罪見憫,而謂公討爲抑勒,至今爲未決之案矣。蓋其所謂杏下獨命之爲誣說,原自明白,但被渠以"但論遲速,不及認否"、"語欠區別,命辭疎忽"等說,張皇掩飾。故雖以尊見之明,不免眩惑,而未及勘破也。昨冬又得見渠答徐某書,首以"越海不得"明已清楚之意,終之曰: "其實原從先師不言之教。" "不言之教"四字,雖使工於護陰者置辨,恐難不以認意看,而其曰"其實"、曰"原從",又無半點欠缺、疎忽之意。到此之極,雖以陰口肆辯,似不能復飾張皇矣。"甲言如彼乙如斯,同歸一轍在何時?" 非昔年盛作乎? "雲歸山立呈眞面,甲乙同符在此時。" 又非拙和乎? 以弟料之. 眞面呈露,甲乙同符,今定其時,未知尊見云何? 幸以回教仰想,脫然祛疑,不復煩彼此往復也。至於恣改師稿,亦已聞知否? 抑雖聞之,而亦或憫其誤蒙,如前日認誣耶? 此則手定本自在,不須多辨。但將曾年令伯氏鈔藏晦退栗三先生說質疑,對照晉本,則可推其餘矣。并惟諒察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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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朴元淑【升陽】 仰際獲承惠存。滿紙覶縷。足見不知老將至之氣象。不覺柏悅。但自貶太過。稱人過情。謙謙雖是君子之德。而其於諒直。得無少遜乎。奉呵奉呵。毅體半不仁。動作凡節。不能隨意。良苦良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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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朴元淑 間稍阻闊。每勞神往。赫蹄覶縷。足亞一晤。況審覃思朱書。俛焉孶孶。朋友之望。孰逾於此。甚善甚善。毅本質淟涊。而近困於澇熱。日日昏倒。不能對丌。可愧可愧。那當一奉。逐得此睡魔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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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진에게 답함 答鄭國振 丁丑 정축년(1925) 편지에 "마귀가 물러나는 날을 조금 얻어서 기필코 심중(心中)의 일을 도모하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마귀는 무엇입니까? 내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변괴가 밖으로부터 온 것으로서 마치 귀신이 시기하는 것 같으면서도 또한 내가 능히 물리칠 수 없는 것을 말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질병(疾病), 화환(禍患), 수화(水火), 도적(盜賊) 이외에 마땅히 이른바 마귀란 것은 없습니다. 형의 지금 분란한 것에 대해 응해야 하므로 응하는 경우는 이는 내 일을 도모하는 조건이니, 진실로 마귀라 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응해서는 안 되는데 태만하게 우선 응하는 경우 이것을 마귀라 말한다면 결국 스스로 마귀를 만드는 것이고 진짜 마귀가 아닙니다. 이를 물리치는 방도는 또한 내가 스스로 그것을 물리치는 것뿐이니, 진실로 물리치고자 한다면 손을 한 번 뒤집는 사이에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선 행하지 않고 앉아서 마귀가 물러가기를 기다린다면, 끝내 그런 날은 없을 것이고, 심중의 일도 영원히 도모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선자(禪子)의 게송에 "해를 차갑게 할 수 있고 달을 뜨겁게 할 수 있어도, 뭇 마귀는 감히 진결을 파괴시킬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저 사도(邪道)가 진짜 마귀에 대해서도 오히려 이렇게 하는데, 하물며 우리의 정학(定學)으로 스스로 만든 마귀에 대하여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형은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來狀喻以稍得魔退之日,期圖心中之事。夫魔者, 何也? 非謂不自我致而變自外來,有若鬼神猜之而又非吾之所能退者乎? 然則疾病、禍患、水火、盜賊以外,宜無所謂魔者也。若兄之目下紛擾,其當應而應之者, 旣此是圖吾事之條件也,固不可謂魔。其不當應而謾且應之者,以是謂魔,則究是自魔,非眞魔也。退之之方,亦在我自退之而已,茍欲退之,在一反手之間耳。然且不爲而坐待魔退,則是終無其日,而心中之事,永不可圖矣。禪子之偈曰: "日可冷,月可熱,衆魔不敢壞眞訣。" 彼邪道之於眞魔猶然,況以吾正學,其於自魔也何有? 惟兄諒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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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別李友日瑞【升煥】 惜別行人去復停。興陽村外雨冥冥。慇懃明月元宵約。留待君家梅樹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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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鄭翁八狂詩 走狂者未見狂。狂莫余如。日鄭翁示以八狂詩。且道其自狂。小狂見大狂。惘然自失。噤不敢言。有頃得一說焉。走之狂以他道。余固狂也。翁之狂以翁道。翁自道也。非眞狂。狂固在余。而翁不得以有之。狂無余爭也。翁逌逌然笑曰。子狂而子不知。子之狂愚。余狂而余自知。余之狂智。狂而愚。則狂也非狂也。非狂也非非狂也。冥行而已。狂也行非。狂也不居。惟智者能之。狂亦不可以不用智也。走喔喔然笑曰。狂雖聖人之所願見。亦非所深取也。翁與走無所爭。惟狂是爭。其爭也狂夫。湖狂可謂古之狂。夫子嘗稱吾黨狂。歌鳳千年歸楚狂。詠春三月問曾狂。嘐嘐踽踽始眞狂。屑屑營營難與狂。雖曰翁狂猶病狂。如今恐是不狂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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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姜斯文馨秀 一夜淸譚勝讀經。琴心相對意難停。欲知是道由平坦。恐向別岐涉逕庭。憎殺星星吾髮白。喜夫闊闊子襟靑。須從實地安閒做。學問本非求窅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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挽柳丈桐庵【志驥】 去年哭蓮里。今春又桐翁。出門無可往。從此老山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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挽姜丈春坡【寅會】 琦瑰琬琰盡函筵。當世群賢莫或先。俯仰吾生嗟失所。去年哭寢又今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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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 황장에게 올림 上小心黃丈 丙寅七月 병인년(1926) 7월 오진영의 일은 죄가 극치에 달하여 이미 할 말이 없고, 용동(龍洞)에서의 발간20)도 스승의 유훈을 저버림을 면치 못하였으니, 사도의 재앙이 한결같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바야흐로 동지들과 맹세코 유훈을 지킬 것을 종신의 계책으로 세울 뿐이니, 더욱 우리 어르신의 이전 편지에서, "문집 발간을 차라리 아예 먼 후대로 늦추는 것이 낫다." 하신 논의가 질정하여 의심할 것이 없음을 깨닫습니다.진주에서의 발간을 알린 첫 통문에 음성 오진영 무리의 핵심인물들은 쥐가 머리를 감추고 여우가 꼬리를 숨기듯이 자취를 감춰서 이편도 저편도 아닌 중립자들의 이름을 빌리거나 속여서 기록하여【죽은 지 3년 된 이석승의 이름이 그 속에 들어있다.】 마치 공론에서 나온 것처럼 사람들을 현혹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인구가 발간한다는 통문이 갑자기 나오자 그 일이 와해될 것을 두려워하여 머리를 드러내고 꼬리를 흔들어대더니, 권순명, 유영선, 김종희, 최원, 김세기 등 12인의 두 번째 통문이 있어 말하기를, "이 일은 석농 오진영이 실제로 주선했다."라고 하고, 사람들에게 용맹한 장수와 사나운 병사들이 적을 만나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뜻을 비치며, 그 맡은 일이 반드시 성공해서 호응함이 있기를 기대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간사하며 가소로운 일인데, 스승의 손자를 고소하여 구속시킨 일21)에 있어서는 또한 다른 사람을 핑계대어 말하기를, "오진영이 한 것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오진영이 이미 인쇄할 곳을 주선하였으니, 스승의 손자를 고소하여 구속시킨 것은 인쇄하는 곳에서의 큰일인데, 어찌 주선한 자가 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어린 아이도 속일 수 없는 만큼 그들의 간사한 속내가 함께 노출됨을 더욱 잘 볼 수 있습니다. 오진영이 일찍이 말하기를, "강태걸의 고소는 내가 시킨 것이 아니다." 하였으나 이렇게 된 후에도 오히려 감히 입을 열어 스스로 변론할 수 있겠습니까?옛날에 우암 선생이 광남(光南)22)을 구한 일 때문에 당시에 비난을 많이 받자 이내 말하기를, "설사 광남이 정말로 큰 죄가 있고 내가 앞장서 말하여 그를 구제했더라도 무슨 큰 죄가 되겠는가?"23) 하였으니, 우암이 스승의 손자를 중히 여긴 것이 이와 같습니다. 오진영은 매번 우옹으로 자처하며 무함을 변론한 사람을 군주를 비하하고 종통을 둘로 나누었다24)고 주장한 윤휴(尹鑴)로 취급하더니, 지금 전사인에 대해서는 어찌하여 잠시도 먼저 우옹을 어줍잖게라도 흉내 내지 않고, 마치 왕망(王莽)이 유자(孺子)를 끼고서 해치기에 급급했던 것25)처럼 하여 드러내놓고 고소하는 화란을 더하기를 이처럼 급히 한단 말입니까?전사인이 이미 오진영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마땅히 미혹당하여 죄를 지었다는 것을 사묘(祠廟)26)에 고하고, 아울러 사우들에게 사과한 다음 유서를 받들고 근거하여 진주에서 간행하는 것을 곧바로 성토했어야 합니다. 이것이 고치고 보충하여 뒷날을 좋게 하는 방도인데, 계책이 여기에서 나오지 않고 급급하게 인가를 받아 간행하기를 힘써서 선사의 가르침을 버린 똑같은 자취로 함께 돌아가니, 얼마나 잘못되었습니까? 혹자는 "인가를 받은 것은 마찬가지인데, 진주를 성토하고 용동을 성토하지 않는 것은 진주를 박대하고 용동을 후대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의심하지만, 이는 생각 없이 하는 말입니다. 인가를 받은 것은 마찬가지이나 용동은 스스로 그 죄를 담당하였고 또 선사께서 손수 편정한 각각의 원고를 썼으니, 스승을 무함하고 원고를 어지럽힌 오진영의 간행과는 같은 죄가 될 수 없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震泳事, 罪至極頭, 已無可言。 至於龍刊, 又不免棄訓, 師道之厄, 一何至此? 方與同志立誓, 抱遺訓, 終身計而已, 益覺吾丈前書, 刊事, 寧可遅緩百年之論, 爲建質無疑也。晉印之初通也, 陰黨骨子, 藏鼠頭, 隱狐尾, 或借或冒中立者名而錄之【沒已三年之李錫升入名其中】, 眩人以若出公議。 然及李仁矩刊通忽出, 則恐其事瓦觧, 乃露頭搖尾。 有權純命·柳永善·金鐘熙·崔愿·金世基輩十二人之再通, 而曰: "此事, 吳石農實周章之。" 示人以猛將悍卒, 遇敵必勝之意, 冀其知事之必成而有應之者。 此已極奸好笑, 而至於訴拘師孫之事, 則又諉之他人, 而曰: "非震所爲。" 夫震旣周章印所矣。 訴拘師孫, 乃印所中大事, 焉有周章者, 不爲之理乎? 尺童之瞞不得, 而益見奸膓之迸露矣。 震嘗言: "杰訴, 非吾所使。" 此後亦尙敢開口自辨耶。昔尤庵先生, 以救光南之故, 厚受時誚, 而乃曰: "設使光南, 眞有大罪, 而愚倡言救之, 亦何足爲大罪哉?" 蓋尤翁之重師孫也如此, 震每以尤翁自處, 處辨誣人於尹鑴卑主貳統之說, 而今於士仁也, 何不暫先效嚬於尤翁, 若王莽之攝孺子而急於戕害, 顯加訴禍之此急乎?士仁旣悟見欺於震也, 則當告其迷惑獲罪於祠廟, 并以謝之於士友, 奉據遺書, 正討晉印。 是爲改補善後之道, 而計不出此, 乃汲汲然認刊之是務, 同歸於棄訓之一轍, 何其誤也? 或疑認則一也, 討晉而不討龍, 無乃薄晉而厚龍, 此不思之言也。 認雖一也, 龍則自擔其罪, 而又用手定各稿, 非可與誣師亂稿之震印同科。 未知如何。 용동(龍洞)에서의 발간 전우의 손서(孫壻)인 이인구(李仁矩)와 장손인 전일효(田鎰孝)가 1925년 겨울에 논산(論山) 용동(龍洞)의 봉양정사(鳳陽精舍)에 간소(刊所)를 설치하여 문집 간행을 착수한 것을 말한다. 1927년경에 목판으로 간행하였는데, 이것을 용동본(龍洞本)이라고 한다. 스승의……일 스승의 손자는 간재의 장손인 전일효를 말한다. 전일효의 자는 사인(士仁)으로, 오진영에게 문집 원고를 넘겨주었다가 돌려받는 문제로 서로 고소한 일이 있다. 광남(光南) 김장생(金長生)의 손자인 김익훈(金益勳)의 호이다. 설사……되겠는가? 《송자대전(宋子大全)》 권77 〈답류우구(答柳悠久)〉에 보인다. 《송자대전》에는 "설사 광남에게 참으로 큰 죄가 있는데 내가 감히 구출했다 하더라도 내가 어떻게 세상에 용납되지 못하는 데까지야 이르겠는가〔設使光南眞有大罪而愚敢救之, 亦何至難容於世哉〕"라고 되어있다. 군주를……나누었다 기해년(1659, 효종10년)에 예론(禮論)이 발생했을 때, 송시열은 효종이 적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자의대비의 복상 기간을 기년으로 정했는데, 이에 대해 윤휴가 "임금을 비하(卑下)하고 종통(宗統)을 둘로 하는 것이다."라고 비판한 말을 가리킨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13년. 왕망이……급급했던 것 평제(平帝)를 독살하고, 광척후(廣戚侯) 유현(劉顕)의 아들 유영(劉嬰)을 황태자로 세워서 스스로는 가황제(假皇帝)ㆍ섭황제(攝皇帝)로서 섭정을 한 것을 말한다. 사묘(祠廟) 선조 혹은 선현의 신주(神主)나 영정(影幀)을 모셔 두고 제사 지내는 건축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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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 황장에게 올림 上小心黃丈 丁卯 정묘년(1927) 삼가 생각해보니, 스승께서 돌아가신 후 동문 중에서 식견이 고명하고 의론이 정확한 분은 오직 우리 황소심 선생 한 분이 있을 뿐인데, 책 상자를 짊어지고 도를 묻는 것은 형세상 이미 행할 길이 없고 시절에 문안하는 편지는 번번이 해를 넘기니, 어찌 이리도 현인을 좋아하는 정성이 엷단 말입니까. 자신을 돌아보며 스스로 자책하다보니 싱숭생숭 즐겁지가 않습니다.삼가 생각건대, 겨울 추위에 도를 즐기며 지내시는 기거가 안회(顔回)처럼 한 표주박의 물을 마시고29) 원안(袁安)처럼 눈 덮인 속에 고고히 누워서30) 다른 사람의 좋은 음식과 의복을 원하지 않으시리니, 비록 군자가 본성으로 여기는 것이 이에 있고 저 외물에 있지는 않으나 인자하고 현명한 사람의 곤액이 한결같이 이렇게 한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세상의 운수입니다. 시생 같은 자야 어찌 말할 거리가 되겠습니까? 죽어 시신이 골짜기에 나뒹구는 것이 분수이니 지사(志士)인 냥 잊지 않을 필요도 없으나31) 구구한 저의 일념은 그래도 경서를 껴안고 끝까지 선사를 저버리지 않는 것입니다.그렇지만 이 음성의 해괴한 도적이 스승께서 떠나시자 더욱 거리낌 없이 '인가 받으라고 지시했다〔認敎〕'고 스승을 무함하여 스승의 백옥과도 같은 깨끗한 고결함을 더럽히고, 또 멋대로 원고를 고쳐서 금저울〔金秤〕과도 같은 정확한 의리를 어지럽는 것을 어찌한단 말입니까. 하늘까지 넘치는 사나운 물결은 결단코 거룻배 하나로 상대하여 건널 수 없으니, 온종일 근심하고 두려워하지만 계책이 나올 곳이 없습니다.그들이 스승을 무함한 것은, 다만 그가 이른바 "은행나무 밑에서 독대했다." 운운한 말만 보더라도 원래 명백한데, "말에 정확히 구별함이 부족하였다."32)느니 "성토하는 글의 초안을 주관하지 않았다."느니 하는 등의 말로써 백방으로 벗어나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지난겨울에 또한 그가 임술년(1922) 가을에 혼자 이름으로 서근소(徐近小)에게 답한 편지를 얻었는데, 곧장 "사실은 원래 선사의 '말씀하지 않은 지시〔不言之敎〕'를 따른 것이다." 하였으니, 말씀하지 않은 지시라는 것이 인가를 받을 뜻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가 "사실은"이라고 하고 "원래 따른 것이다."라고 한 것에서 다시금 무함하고 모독한 것이 매우 혹독함을 깨달았습니다. 竊念山頹後, 同門中識見高明, 議論精確, 惟吾黃小心先生一人在, 而負笈問道, 勢已末由, 時節侯書, 動輒經歲, 是何好賢之誠薄? 撫躳自訟, 忽忽靡樂。伏惟冬寒, 起居樂道, 飲顏氏水, 卧袁安雪, 而不願人梁繡也, 雖君子所性在此不在彼, 仁賢之厄, 一至於此寒心者, 世運也。 如侍生者, 何足道哉? 溝壑是分, 不待不忘也。 然區區一念, 猶欲抱經而終不負先師也。柰此陰怪之賊, 師去益無憚, 旣誣認敎, 汙了白璧之潔, 又擅改稿, 亂了金秤之義? 滔天虐浪, 決非一葦之抗, 夙夜憂惧, 計無所出。蓋其誣師, 但觀渠所謂杏下云云說, 原自明白, 而欲以語欠區別, 舍主討草等說, 百方圖脫, 而不得者也。 昨冬又得渠壬戌秋, 單名答徐近小書, 直以為其實原從先師不言之敎, 不言之敎, 非認意而何? 其曰其實, 曰原從者, 更覺誣衊之孔酷也。 안회(顔回)처럼……마시고 안회가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추한 시골에서 지내는 것을 딴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하지만, 안회만은 그 즐거움을 변치 않았다는 고사이다. 《논어(論語)》 〈옹야(雍也)〉 원안(袁安)처럼……누워서 원안은 후한(後漢)의 현사(賢士)이다. 낙양(洛陽)에 폭설이 내려 다른 사람들은 눈을 치우고 밖으로 나와 먹을 것을 구하였으나 원안은 "큰 눈이 내려 사람들이 모두 굶고 있는 판에,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大雪人皆餓 不宜干人〕" 하며 혼자 집에 누워 있었던 고사이다. 《후한서(後漢書)》 권45 〈원안열전(袁安列傳)〉 죽어……없으나 제 경공(齊景公)이 우인(虞人)을 우인에게 쓰는 피관(皮冠)으로 부르지 않고 대부에게 쓰는 정(旌)으로 부르자 우인이 죽음을 무릅쓰고 가지 않았는데, 이를 두고 공자가 "지사는 죽어서 시신이 도랑이나 골짜기에 있을 것을 잊지 않고, 용사는 싸우다 머리를 잃을 것을 잊지 않는다.〔志士不忘在溝壑 勇士不忘喪其元〕"라고 하여 우인의 지조를 칭송한 데서 나온 말이다.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 말에 정확히 구별함이 부족하였다 이 말은 오진영이, 간재가 인가를 지시했다고 한 자신의 말이 공격을 받자 이를 해명하기 위해 한 말로, 〈답김용승서(答金容承書)〉에, "은행나무 아래에서 독대할 때에는 문집 간행의 지속만을 논했고 애초에 인가를 받을지 말지는 언급이 없었는데, 스승과 제자간의 대화를 나중에 기억하다보니 말에 정확히 구별함이 부족하였으니, 이것은 말을 전달함에 소홀했던 나의 과실이다.〔杏下竹床時 單論刊稿遲速 初無認否之及 追記師生酬酌 而語欠區別 此吾命辭疎忽之過也〕"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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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 황장에게 답함 答小心黃丈 庚午 경오년(1930) 용동본은 선사의 수본(手本)과 고증하여 분별해보지는 않았으나 그 내용을 들어보니, 전고는 원고에 따라 출판했다고 할 수 있으나 후고는 따져보지 않고 첨가하여 넣기도 하고 진주본의 혼란함을 따르기도 하여 크게 진면목을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용동 사람들의 소행은 스승을 무함한 한 가지 사항을 제외하더라도 유훈을 어기고 원고를 어지럽힌 등의 일이 진주 사람들과 동일하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동래 여조겸이 중립(中立)의 간악함을 논했는데, 마치 요즈음 우리 문하의 가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준비한 말인 것 같습니다. 지금 기록하여 보여주신 것은 아무개, 아무개 등 여러 사람에게 들려주어 그들의 간담을 깨뜨릴 만하고, 보여주신 오진영의 일은 날마다 들어보지 못한 것을 들었는데, 어느 일이나 있지 않은 경우가 없습니다. 지산(志山) 김공의 아들 성구(聖九)가 말하기를, "오진영은 일생 학문을 하여 사림을 음해하고 헐뜯는 것으로 끝을 맺었으니, 좋고도 좋은 마무리라 할 수 있다." 했는데, 이제 또 평장(平葬)33)을 하여 조모의 유해를 잃어버렸는데도 편안하게 보통 사람과 똑같이 지내고 있습니다. 이 역시 좋은 마무리에 해당하는 한 가지 일이니, 안이나 밖이나 공으로나 사로나 모두 갖추어져 흠결이 없다고 말할 만합니다. 龍本, 未及考辨於手本, 然聞其內容, 則前稿可謂依原稿刊出, 後稿則無難添入, 或從晉亂, 大失本面云。 蓋龍人所爲, 除誣師一欵以外, 其違訓亂稿等事, 與晉一也, 復何言哉? 東莱論中立之奸, 似爲近日吾門依違者, 準備語也。 今蒙錄示, 可使之聞於某某諸人, 破其奸膽也, 吳事之示, 日聞其不聞, 無事不有者也。 志山金公之子聖九言: "震泳一生學問, 以構訴士林成終, 可謂好好結局。" 今又平葬而失祖母骸, 晏然同平人, 此亦好結局一事, 可謂內外公私具備無欠也。 평장(平葬) 봉분을 만들지 않고 평평하게 매장하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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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재 소장학규에게 답함 答悅齋蘇丈學奎 ○甲子 갑자년(1924) 지난 달 찾아뵌 것은 사실 몇 년간 벼르던 끝에 나온 것인데, 인연이 사람과 어긋나 공교롭게도 출타를 하시어 그리운 마음에 한없이 방황하였습니다. 그래도 오히려 운곡(雲谷)34)의 풍물이 옛날의 경관 그대로이고 명덕정(明德亭)35) 위의 상쾌한 기운이 사람 품을 파고드는 것을 보고 고인의 빼어난 운치를 손을 내밀면 바로 움켜쥘 수 있을 듯하였으니, 이것이 이미 사람의 뜻을 조금은 강하게 해주었습니다. 얼마 후에 아드님 형제의 안내를 받아 서실로 들어갔는데, 첫째 아드님은 정성스러워 사람을 흡족하게 하고 둘째 아드님은 명민하여 기뻐할 만하였으니, 군자의 전형과 고가(故家)36)의 훌륭한 집안 교육이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하고 흠모케 하여 마침 높으신 가르침을 입지 못한 것 때문에 크게 탄식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더구나 이렇게 편지와 아름다운 시37)를 당일로 오롯이 보내주셨으니, 정의가 중하고 의리가 바르며 풍격이 아름답고 뜻이 깊어서 깜짝 놀라고 감탄하였습니다. 이에 외람된 생각으로 지난번에 만약 하룻밤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이런 귀중한38) 글을 얻어 영원히 산속의 보물로 만들 수 있었겠습니까? 이어 생각하니, 시생과 우리 어른은 선대에 가까운 친척이었고 선친과는 연세가 같았습니다. 부친을 여읜 뒤로는 친소와 귀천을 구분하지 않고 선친과 연세가 같은 분이 있다는 것을 들으면 번번이 서글퍼지며 부모를 끝까지 봉양하지 못한 슬픔39)이 흘러나왔습니다. 하물며 우리 어른과 같은 위치에 계신 분이겠습니까? 매번 우리 어른께서 술이 반쯤 취해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의리와 이익을 담론하고 고금을 논평하시는 것을 볼 적마다 풍치와 언론의 풍부함이 선친과 거의 엇비슷하다고 가만히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우리 부친이 살아계시면 아직도 이 어른처럼 건강하시고 아직도 이 어른과 함께 선비들 사이에서 주선할 수 있으셨을텐데." 하였으니, 저도 모르게 줄줄 눈물이 흐르려 했습니다. 말이 여기까지 이르고 보니 우리 두 집안의 친분과 정의는 평상시에 실제로 상상하던 것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또 제가 다행히 우리 어른과 함께 구산옹40)의 문하에 출입했고, 또 다행히 시비가 뒤섞인 날을 당하여 잡아 지키는 것이 우리 어른과 같았으니, 마침내 선대의 친밀한 정의가 이에 더욱 친밀해짐을 알았고, 또한 본 바가 서로 부합하는 것이 선대의 우의로 맺어진 두 집안의 행복임을 이로써 알았습니다. 이런 점에 나아가 노소간에 간극이 없는 믿음과 피차 서로 격려하는 도를 구한다면 또한 그것이 실제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연히 《맹자》의 "문왕은 기주에서 태어나 필영에서 죽었으니, 서이 사람이다.〔文王 生於岐周 卒於畢郢 西夷之人也〕"41)라고 한 부분을 읽었는데, 제가 여기에 보충하여 "간옹은 완산에서 태어나 부안에서 죽었으니, 호남사람이다."라고 하겠습니다. 호남은 진실로 간옹의 도학이 처음 시작하여 끝을 맺은 땅입니다. 그러므로 돌아가신 후에 이런 망극한 무함을 당하신 것에 대해 완주에는 우리 어른과 여러 분들이 계시고 부안에는 창암과 함재 및 여러 분들이 계시는 만큼 한 조각 마음을 단단히 먹어 일생토록 부처님 같은 은혜를 갚고 큰 붓으로 훤히 밝혀 백세토록 사설(邪說)을 막아서 간옹의 도로 하여금 언제라도 의지할 것이 있게 해야 하니, 하늘의 뜻이 어찌 우연히 그리되겠습니까. 삼가 강성한 힘을 더욱 떨쳐 백번 부러져도 회피하지 않고 아홉 번 죽어도 후회하지 않아서, 맹세코 호남 한 지역이 영원히 후세에 할 말이 있도록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신다면 못난 시생도 마땅히 하풍(下風)에 달려가 함께하여 영광이 있도록 하겠습니다. 客月拜門, 實出於累年經擬之餘, 而緣與人違, 巧值駕外, 徊徨眷戀。 猶見雲谷風物, 不改舊觀, 明德亭上, 爽氣襲人, 高人逸韻, 若可挹取, 此已稍強人意。 旣而令似兄弟, 延入書室, 一哥誠欵洽人, 二哥明敏可喜, 君子典型, 故家詩禮, 又令人欽豔, 不須以適違尊誨, 大致於邑。 矧茲赫蹏瓊什, 卽日耑賜, 情重而義正, 格佳而意深, 驚喜感幸。 私竊以爲向使不失一宵之陪話, 安能獲此百朋之手筆, 永作山中之寶哉? 仍念侍生之於吾丈, 先世切戚也, 先人同庚也。 一自失怙以來, 不分親踈貴踐, 聞有與先人同庚者, 輒惕惕動蓼莪悲, 况如吾丈地哉? 每見吾丈酒半酣揮白鬚, 談說義利, 揚扢古今, 暗想風致言論恰恰, 與先人或相上下, 自語於心曰: '吾親而在者, 尙能如此丈之康健, 尙能與此丈周旋於章掖間。' 不覺泫然乎欲淚興。 言到此兩家契誼之, 非比平常, 實際可想。 且澤述幸而與吾丈同出臼門, 又幸而當此是非混淆之日, 所執與吾丈同, 乃知先戚之誼, 於是乎益密。 又以知所見之相符, 兩家先誼之幸福也。 卽此而求之, 老少無間之孚, 彼此相勉之道, 又可知其實際也。 偶誦孟子之言, 曰: "文王生於岐周, 卒於畢郢, 西夷之人也。" 澤述足之, 曰: "艮翁生於完山, 卒於扶風, 湖南之人也。" 湖南, 固艮翁道學, 成始成終之地。 故旣沒而遭此罔極之誣, 在完而有吾丈諸公, 在扶而有鬯涵諸公, 寸心斷斷, 報佛恩於一生, 大筆晳晳, 距邪說於百世, 俾艮翁之道, 始終之有賴, 天意豈偶然哉? 伏願益奮大壯之力, 百折不回, 九死靡悔, 誓使湖南一區, 永有辭於來許, 則侍生之無似, 亦當奔趍下風, 而與有榮矣。 운곡(雲谷) 열재 소학규가 거주했던 완주군 용진면 상운리 운곡을 가리킨다. 명덕정(明德亭) 위치는 미상이다. '명덕(明德)'은 대학의 "명명덕(明明德)"에서 그 의미를 취한 것이다. 고가(故家) 여러 대에 걸쳐 벼슬하며 살아온 집안을 말한다. 편지와 아름다운 시 원문의 '혁제(赫蹄)'는 옛날에 글씨를 쓰는 데 썼던 폭이 좁은 비단을 뜻하는 말인데 종이의 이칭으로 쓰이기도 하고 여기서는 상대방의 편지를 뜻하며, 경십(瓊什)은 상대방이 지은 시나 문장을 높여서 일컫는 말이다. 귀중한 원문의 '백붕(百朋)'은 많은 재물을 뜻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소학규가 지어서 보낸 시를 칭송하여 말한 것이다. 붕(朋)은 화폐의 단위이다. 《시경(詩經)》 〈청청자아(菁菁者莪)〉에 "이미 군자를 만나 보니, 나에게 백붕을 주신 듯하네.〔旣見君子 錫我百朋〕" 하였다. 부모를……슬픔 원문의 '육아(蓼莪)'는 《시경(詩經)》 소아(小雅) 편명인데,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 살아생전에 효도하지 못한 자식의 슬픈 심경을 읊은 시이다. 구산옹(臼山翁) 구산은 간재 전우의 호 가운데 하나이다. 문왕은……사람이다 《맹자(孟子)》 〈이루하(離婁下)〉에서는 "순임금은 제풍에서 태어나 부하로 옮겼다가 명조에서 죽었으니, 동이의 사람이다. 문왕은 기주에서 태어나서 필영에서 죽으니 서이의 사람이다.〔孟子曰, "舜生於諸馮, 遷於負夏, 卒於鳴條, 東夷之人也. 文王生於岐周, 卒於畢郢, 西夷之人也〕"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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