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심 전장희순에게 보냄 與鍊心田丈熙舜 ○乙亥 을해년(1935) 삼가 며칠간 살펴보니, 사견(士狷)189)을 거친 충고를 받아들일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돌아와 밝은 창가에 앉아서 다시 정밀히 생각해 보니 의리상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이미 견고하니, 어른이 말씀하신 사견의 말에 이치가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견고하다는 어른의 말은 어른이 전한 말이다.】 이 일의 시비는 처음에 알기 어려우니, 다만 약간의 사심에 가리어서, 나재(懶齋) 어른이 스승을 폄하한 자들을 용서한다는 것으로 저를 꾸짖는 편지를 보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꾸지람을 당한 이후로부터 황공스러웠으니, 생각해보건대 이것은 부북첨좌(扶北僉座)가 한결같이 말한 공적인 성토입니다. 저번 편지에 당신께서 나재 어른의 편지가 비정한 꾸짖음이라 했고, 신재(愼齋) 어른도 그렇게 여긴다고 했습니다. 이에 스스로 완전히 명교의 죄인이 되지 않음을 다행이라 여기고, 감격하여 계속 눈물을 흘렸습니다. 다만 크게 한스러운 것이 있으니, 당초에 음성을 성토하는 일은 신재 어른이 창의(倡義)하고 이 몸은 조수로서, 속임을 분별하고 원고를 고증하여 적을 목 베고 무리를 다스리는데 한 문장 한 의리도 그와 함께 하여 서로 상의하여 합치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맹세하기를 '살아서는 의리를 함께 하고 죽어서는 열전을 함께 한다.'190) 했습니다. 오늘날 영구(嬰臼)191)처럼 의론이 잘 맞던 우리(신재와 후창선생)들이 의론이 다르게 되었고, 순원(巡遠)192)처럼 의기투합하던 우리들이 화합을 잃어서, 의견이 달라지고 정의(情誼)193)가 이렇게 벌어져서 이 지경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우연히 옛날 글상자를 열어서 신재 어른이 당시에 주었던 시 두편을 얻었습니다. 시에서 말하기를. "그대 오문(吾門)에 명성이 자자한데, 그리워하여 초강(楚江)194)길로 내방하였네. 속임을 변론하고 가르침을 밝혀 스승의 도를 신장시키고, 예를 익히고 경서를 논하여 후생을 창도했네. 춘추대의로 엄격함을 드러내었건만, 사악한 많은 말은 공평하지 않았네. 부끄럽게도 나는 한 일 없이 머리만 세었는데, 사귀는 정이 자상하여 상정에 지나치도록 경계하였네."라고 하였고, 또 시에 이르기를 "갑자기 스승이 돌아가시어 애통하며 통곡하니, 어찌 제자들이 다른 길을 걸었겠는가. 원수를 받아들여 원고를 발간하니 인심이 죽고, 인가를 성토하는 편지가 오니 사기가 살아났네. 자기가 벗어나기 위해 스승을 핑계 대니 음성의 죄가 크고, 사악함을 물리치고 바름을 부추기니 사람들의 의론은 공평하네. 시비는 절로 정해지니 한탄할 필요 없겠지만, 다만 나의 행실이 실정에 부합할까 두렵네."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그때에 당을 다스리는 여부에 대한 의견이 같지 않음이 오늘날 본 바와 같았다면, 추중(推重)하는 말과 서로 믿는 정이 시편에 나타남이 어찌 이와 같았겠습니까? 대체로 제가 본 바로는 오늘날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종전에도 이와 같았습니다. 나만 홀로 이와 같았을 뿐만 아니라 신재 어른도 똑같이 공공의 문자를 만듦에 또한 그러하였습니다. 같이 문자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시에서 말한바 "어찌 제자들이 길을 달리할 것인가."라는 말은 음성의 당을 가리킨 것이 아닙니까? 《시경》에서 말한 "아 슬프도다, 권여(權輿)195)를 잇지 못함이여"196)라는 말은 지금을 이르는 것입니다. 펼쳐서 서너 번 읽음에 큰 탄식을 이기지 못하고, 그 시에 차운하여 쓰기를 "그때에 우리 어른은 의로운 소리를 제창했으니, 눈앞에는 단지 다른 길이 없었네. 《춘추》197)로 무리를 다스리는 것이 어찌 심하다 하리오, 《서경·우전(虞典)》에는 완악한 사람도 썼으니 함께 살고 싶어서였네. 무릇 인을 행함에 끝까지 하기는 드무니, 언제나 공평하게 하기를 생각했기 때문이네. 벗에게 선을 권하는 은근한 말은, 속히 회복하여 옛정을 되살려 보자는 것이었네."라고 하였습니다. 또 시를 지어 말하기를, "공을 그리다 만나지 못한 채 가을이 되어서, 북쪽을 바라봄에 멀고멀어 삼십 리 길이네. 비록 주장하는 것은 오늘과 다르지만, 공론이 후생에게 있을까 두렵네. 곤란한 말로 항상 괴로워하니 다른 사람이 믿지 않고, 허물이 이와 같음을 보니 뜻이 평안하지 않네. 끝내는 깊은 속임을 씻어내기 어려울까 두려우니, 푸르고 푸른 미륵봉은 정이 있는 듯하네.'라고 했다. 오호라, 이를 보니 이놈의 정이란 게 또한 슬픕니다. 우리 어른은 매번 내가 고집스러운 것으로 독부(獨夫)198)가 될까 불쌍히 여겼고, 동문들 사이에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불쌍히 여겨주시는 뜻은 감동할 만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큰 재앙에 붙어있기보다는 의리상 독립하여 두려울 것이 없을 뿐입니다. 아, 내가 어찌 다른 사람과 절교하기를 좋아하며, 또 다른 사람 이기기를 좋아하겠습니까? 그 속에는 반드시 심히 그만두지 못할 것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만약 동시대에 나의 마음을 알아줄 종자기(鍾子期)가 없다면 마땅히 훗날 나의 글을 알아줄 양자운(揚子雲)이 있을 것입니다. 맹자가 말했습니다. "왕께서 고치시기를 내가 날마다 고대하고 있다."199)라고 했고, 또 말하기를, "열통의 편지는 한 번 만나는 것만 못하다."라고 했으니, 거의 신재 어른과 한번 말을 다하여, 유감이 없도록 하려 했는데, 한번 이견(異見)이 있은 뒤로부터는 말과 소의 거마 소리가 서로 미침이 없을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생각해보건대 스승을 폄하한 자를 용서해줬다는 죄목을 얻어서 진실로 사우간을 추종하기 어렵게 되어, 읍에서 바람이나 쐬고 있으니, 감정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竊覸日者, 自經士狷忠告, 似有採納之意未知。 歸坐明牕, 更加精思, 知義理之不容已如堅, 丈所道, 狷言有理之悟否【堅丈語之所傳】。 蓋此事是非, 初不難知, 只爲些私所蔽。 以至有懶丈, 斥我以恕貶師之書矣。 自遭此斥, 惶惶恐恐, 意謂此是扶北僉座, 一辭公討者矣。 昨承, 吾丈以懶書爲非情之斥, 愼丈亦以爲然云。 於是乎, 自幸不全爲名敎罪人, 感之而繼泣也。 但有大可恨者, 當初討陰之役, 愼丈倡議, 此漢助手, 辨誣考稿 誅賊治黨, 一文一義, 無不與之, 互商合。 決誓'以生同義而死同傳'矣。 孰知今日, 嬰臼異論 巡遠失和, 意見之殊, 情誼之豁, 乃至於此乎? 偶閱舊篋得, 愼丈當日贈詩二首。 詩曰: "有子吾門籍籍聲, 相思來訪楚江程。 辨誣昭訓伸師道, 講禮論經倡後生。 大義春秋揭嚴截, 衆言邪詖不公平。 愧余無得空頭白, 交情偲偲戒過情。" 又曰: "遽見山頹痛失聲, 奈何諸子異蹊程? 納讐稿出人心死, 討認書來士氣生。 脫己諉師陰罪大, 斥邪扶正物論平。 是非自定未須嘆, 只恐我行孚實情。" 若於其時治黨與否之不同, 如今日所見者, 推重之辭, 交孚之情, 安得見於詩篇, 有如此者耶? 蓋此漢所見, 匪今斯今, 從前如茲。 非惟我獨如此, 愼丈同製公共文字亦然。 非惟同製文字, 此詩所云, "奈何諸子異蹊程"者, 非指陰黨乎? 詩云, "吁嗟乎不承權輿" 今之謂也。 披閱三四, 不勝太息, 而次其詩曰: "當日吾公倡義聲, 眼前只此無他程, 麟經治黨豈云甚, 虞典書頑欲幷生, 大抵爲仁鮮究竟, 總緣有意作公平, 偲偲籍籍殷勤語, 遄復耑希見舊情。" 又曰: "思公不見感秋聲, 北望迢迢一舍程, 縰然所主殊今日, 可畏公論在後生, 困言常苦人無信, 觀咎其如志未平, 終恐深誣難洗得, 蒼蒼彌峀若爲情。" 鳴呼 觀於此, 此漢之情, 其亦戚矣。 吾丈每以我之固執, 憫其爲獨夫而懼其不容於同門, 見憐之意可感。 然竊自附於大過之時, 義獨立而無所懼耳。 噫, 吾豈好絶人, 亦豈好勝人者哉? 其中必有甚不得已者存焉, 如無幷世之子期, 當有後世之子雲矣。 雖然孟子有云, "庶幾改之, 予日望之"諺。 又云, "十書不如一面。" 尙欲與愼丈一番盡言, 俾無餘憾, 而一自異見之後, 非惟馬牛之風不相及。 念此得恕貶師之目者, 誠難追從於士友間, 臨風於邑, 情不知裁。 사견(士狷) 《유재집(裕齋集)》 〈전사견(田士狷) 일중(鎰中)에게 답함〉 참고. 생사동전(生死同傳) 사마광(司馬光)이 범진(范鎭)과 의기투합하여, "나와 너는 살아서는 뜻을 같이하고 죽어서는 같이 열전에 오를 것이다.(吾與子生同志死當同傳)"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송명신언행록(宋名臣言行錄)》 권5 영구(嬰臼) 영구(嬰臼)는 춘추 시대 진(晉)나라 조삭(趙朔)의 문객(門客)인 공손저구(公孫杵臼)와 조삭의 친구 정영(程嬰)을 말한다. 진나라 대부(大夫) 도안가(屠岸賈)가 조삭의 일족(一族)을 살해하자 공손저구는 정영과 함께 조삭의 고아를 세울 일을 논의하였다. 그래서 정영에게는 조삭의 아들을 안고 산중으로 피하여 화를 면하게 하고, 자신은 다른 사람의 영아(嬰兒)를 데리고 달아나 산중에 숨어 있으면서, 정영에게 자신을 도안가에게 밀고하게 하였다. 결국 공손저구는 가짜 아이와 함께 도안가에게 살해되고, 조삭의 아들은 정영에 의해 목숨을 보전하게 되었다. 《사기(史記)》 권43 〈조세가(趙世家)〉 쓰러뜨리려 해도 넘어지지 않을 듯이 꼿꼿한 그림 속의 나무를 공손저구와 정영의 절개에 비유한 것이다. 순원(巡遠) 당나라의 명신(名臣)인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의 병칭이다. 강회(江淮)의 보장(保障)이라고 일컬어지는 수양성(睢陽城)에서 두 사람이 서로 협력하여 안녹산의 군대에 항거하다가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구당서(舊唐書)》 권187 〈충의열전(忠義列傳) 장순(張巡)〉 정의(情誼) 서로 사귀어 친해진 정(情)을 말한다. 초강(楚江) 초나라의 충신 굴원(屈原)이 투신자살한 소상강(瀟湘江)을 가리킨다. 시국을 걱정하며 자결한 굴원의 충혼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김택술의 처지를 굴원에 빗대서 한 말이다. 권여(權輿) 사물 또는 일의 시작이나 시초를 뜻하는 말로, 저울을 만들 때는 저울대〔權〕를 먼저 만들고 수레를 만들 때는 수레의 판자〔輿〕부터 먼저 만드는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아 슬프도다 권여를 잇지 못함이여 《시경(詩經)》 〈진풍(秦風) 에 보인다. 인경(麟經) 《춘추(春秋)》의 별칭이다. 《춘추(春秋)》가 애공(哀公) 14년의 "서쪽 들판으로 사냥을 나가서 기린을 붙잡았다.〔西狩獲麟〕"라는 경문(經文)으로 끝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독부(獨夫) 독부(獨夫)는 하늘도 버리고 백성도 버려 외롭게 된 통치자라는 뜻인데, 《서경(書經)》 〈태서 하(泰誓下)〉에 폭군 주(紂)를 독부로 명명하고 그의 죄악상을 나열한 내용이 나온다. 왕께서……있다 《맹자(孟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