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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 전장에게 보냄 與靜齋田丈 甲子十一月 갑자년(1924) 11월 생각해보면, 자식이 아버지에 대해서와 문생이 스승에 대해서 모두 목숨을 바칠 의리가 있습니다. 우리 어른에게 있어서 부친을 존경하는 지극한 정성은 천륜에서 나왔으니 어찌 쇄소응대(灑掃應對)183)하는 제자들과 나란히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쉽게 늙는 것은 사람이고, 머무르게 할 수 없는 것은 시간입니다. 우리 어른의 나이가 거의 60에 가까우니, 선조와 선사를 높이는 중대한 일에 대해 미진한 것을 병들어 건강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물러나 천고의 한을 초래하지 않을 것을 여겨집니다.하물며 지금 오진영이 더욱더 방자하게 흉악한 독기를 부려 이쪽 사람들을 배일당(排日黨)이라는 죄목으로 얽어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상황이 현재 목전에 있습니다. 원컨대 우리 어른께서 우뚝 확고하게 스스로 담당하여 이해와 화복의 밖에 몸을 두고 광명정대한 위로 선친을 높여서 세도가 이에 힘입게 하고 사문이 다행스럽게 되도록 하시기를 바랍니다. 竊念子之於父, 生之於師, 俱有致死之義。 而在吾丈, 尊親之至誠, 出於天倫, 豈備列灑掃者比哉? 易老者人, 莫畱者辰。 吾丈春秋, 恰滿六旬, 凡關尊先先師大事未盡者, 想不以病健, 有所進退, 以致千古之恨。 况今震也, 益肆凶毒, 構此邊人以排日黨, 致死之地, 現在目前。 願吾丈挺然自擔, 置身於利害禍福之外, 尊親於光明正大之上, 使世道賴, 而斯文幸焉。 쇄소응대(灑掃應對) 땅바닥에 물을 뿌려 쓸고서 응하고 대답하는 것으로, 유학에서 교육하고 학습하는 기본 내용 중의 하나이다. 송(宋)나라 주희(朱熹)의 《대학장구서(大學章句序)》에 "사람이 태어나 8세가 되면 왕공(王公) 이하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학(小學)에 들어가 쇄소응대진퇴(灑掃應對進退)의 절차와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의 글을 배웠다."라고 하였으며, 〈소학제사〉에 "소학의 교육 방법은, 물 뿌리고 쓸며 응하고 대답하며 집에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손하여 행동이 혹시라도 여기에서 어긋남이 없게 하는 것이니, 이것을 행하고 여력이 있으면 시경을 외고 서경을 읽으며 읊고 노래하며 춤추고 뛰어서 생각이 혹시라도 여기에서 넘음이 없게 하는 것이다.〔小學之方, 灑掃應對, 入孝出恭, 動罔或悖, 行有餘力, 誦詩讀書, 詠歌舞蹈, 思罔或逾.〕"라는 내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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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 전장에게 보냄 與靜齋田丈 丁卯 정묘년(1927) 일전에 왕림하신 것은 진실로 후고(後稿)를 찾으러 온 것인데 받들어 부응하지 못하여 마음이 심히 송구하였습니다. 생각하건대 어른도 크게 마음이 불편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 시험 삼아 한번 생각해보지 않으십니까? 오진영이 이미 스승을 무함하고 진주에서 인가를 받아 간행하였으니, 사람들이 진실로 선사께서 진짜 '문집 간행을 요량해서 하라'는 말씀과 말로 하지 않은 인가에 대한 지시가 있었다고 의심합니다. 어른께서 친아들로써 또 용동에서 간행하기 위하여 인가를 받는 데에 참여해 유서를 무시하신다면 사람들이 장차 유서가 진짜가 아니라고 의심할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제가 무함을 변론하고 유훈을 지킬 것을 주장하는 사람으로, 또 원고를 꺼내어 어른에게 주어 그 일이 성사되도록 돕는다면 이것은 선사 문하의 온전한 하나의 의리가 다시는 세상에 영향을 미침이 없게 되어 세상 사람들의 의심을 해명할 길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런 지경에 이르면 선사는 어떤 사람이 되겠습니까? 어른께서 진실로 시험 삼아 한번 생각하여 자못 마음속에 불편함을 없애고 제가 가르침을 어긴 것을 죄주지 마십시오. 日前枉臨, 亶出索去後稿, 而未能奉副, 心甚悚息。 想丈亦大不平于中也。 然何不試一思之? 震旣誣師而認印于晉, 人固疑先師眞有料量不言之認敎。 丈以親子, 又參龍刊之認, 而不有遺書, 人將又疑遺書之非其眞。 于斯時也, 澤述以主辨誣守訓之人, 又出稿與丈, 助成其事, 則是先師門下, 一副義理, 無復影響, 而世人之疑, 無路可鮮。 到此地頭, 先師爲何如人? 丈誠能試一思之, 自無不平于中, 而不罪澤述之違敎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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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 전장에게 답함 答靜齋田丈 乙丑元月 을축년(1925) 1월 옛날에 주자는 적과 강화하는 것은 나라를 그르친다고 여겨 극언하며 매우 한탄했습니다. 나라와 유문(儒門)의 일에 토벌하여 회복하고 변론하여 성토하는 의리가 어찌 다름이 있겠습니까? 우리 어른께서 평소에 음성 오진영이 부친을 무함한 것을 엄하게 배척하신 것이 돌아보건대 어떠했습니까? 이 화합하자는 말이 갑자기 우리 어른의 입에서 나올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저 사람이 과연 위로 선사의 묘184)에 고하고 아래로 사우(士友)에게 사죄하여 흔쾌히 스승을 무함한 죄를 자복한다면 용납하여 받아들이는 것이 옳습니다. 이제 그가 자복하여 사죄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화해하여 만난다는 말이 있게 되면 이전에 선친을 위하여 무함을 변척한 의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듣건대 우리 어른께서 공론을 묻지 않고 먼저 배편으로 편지를 보내 저들과 만나는 것을 서두르셨다고 하니, 우리 어른의 마음이 이미 처음 먹은 마음을 바꾸면 인가를 지시하셨다는 무함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망연자실할 뿐입니다. 《주역》에 이르기를, "옛 덕을 간직하여 견고하게 지키면 길하다."185) 하였습니다. 원컨대 우리 어른께서 한가로운 생각을 버리고 옛 의리를 확고하게 지켜서 선친의 도의를 천추에 영원히 빛내주시기 바랍니다. 昔朱夫子以講和誤國, 蓋嘗極言而深歎。 國家儒門之事, 討復辨討之義, 何嘗有異? 吾丈平日斥陰誣親之嚴, 顧何如也? 不圖此言忽出於吾丈之口也。 彼果上告斧堂, 下謝士友, 快服誣罪, 則容而受之可也。 今不待彼之服謝, 而先有和會之說, 則前日爲親辨誣之義, 安在哉? 聞吾丈不詢公議, 先從船便, 急於會彼, 則吾丈之心, 已變初服, 而認誣之益深也。 念到于此惘然若失。 易曰: "食舊德, 貞吉", 願吾丈除却閒想, 確守舊義, 永光先人道義於千秋也。 선사의 묘 원문의 '부당(斧堂)'은 봉분(封墳)을 이르는 말이다. 《예기(禮記)》 〈단궁(檀弓)〉에, "봉분이 당같은 것도 보았고……도끼같은 것도 보았다.〔見封之若堂者矣……見若斧者矣〕"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옛 덕을……길하다 《주역(周易》 〈송괘(訟卦)〉 육삼효의 효사이다. '옛 덕을 간직한다〔食舊德〕'는 것은 전(傳)에 "자신의 본래 분수에 처함을 말한다.〔謂處其素分〕" 하였고, '정(貞)은 "견고하게 스스로 지키는 것을 말한다.〔謂堅固自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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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柳甥【戊子】 旅窓獲見手畵。甚豁幽鬱。況審慈省康吉。尤賀尤賀。女息所愼。甚是支離。所慮曷勝。然係是胎祟。解娩後可以見瘳。外此有何方文也。翁來此日久。而主庠適出他。坐處尙未整頓。還覺苦惱。示喩對冊二字。甚是醒眼。何慰如之。心神飛越。此不能專力於此。而外馳常多之致。先聖云。操則存。舍則亡。操之存之。只在吾方寸間耳。更加猛省。勿自隕穫。如何。餘不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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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奇松沙 謹拜覆前書。未能修謝。長幅繼至。此所謂以吾之懶於人。愧人之勤於我也。況遒辭勁畵。滿紙縷縷。無非警策人處。旣以心之所得者示之。申以物之喪志者戒之。其感何啻百朋之錫。重璧之拱。拜謝萬千。示喩近得靜字工夫。變化氣質。此是近來士友間罕聞語。甚善甚善。可認左右讀書涵養。做得此恰好田地。而安閑住脚跟也。諸葛武侯嘗有言。君子之行。靜以修身。非寧靜。無以致遠。又曰。夫學須靜也。非靜無以成學李延平先生曰。學問之道。不在多言。但嘿坐澄心。體認天理。要之修身之要。成學之本。亶在於是。先賢豈欺我哉。自此以往。左右涵養進德之工。指日可卜。尤喜尤喜。一日十卷。閱眼便却。果是讀書者之恒病。而左右能診之。此可謂對證之劑。不易之論。但損弟才質朽薄。學沒巴鼻。而復爲世慮所奪。平生不能通一經子書。年將五十。甘作無聞之客。日者幸遊此書庫。卷帙非不滿眼。居處非不安靜。自家心地。終未定貼。時或對卷。不過遮眼之計。奚暇貪得之務也。然則是言也。施之於讀書者則可。施之於損弟則左矣。此無異戒聾者以貪音。責盲者以好色。雖萬金良藥。與病不對。亦何補焉。呵呵。抑又思之。左右於不讀書之人。以讀書責之。於懶散者。以務得戒之。其言也善反。而其責也甚厚矣。左右之意。固知之。必也提撕它懶不讀書者。敎讀書。讀書而又敎它不貪前汲汲無敢惰。徐徐無欲速也。苟能一朝從事於斯。更進幾步。則豈非左右之賜也耶。始知朋友之責。其規不一。而左右之敎術。亦多門矣。感感謝謝。心昏筆澀。不能盡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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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奇松沙 長第獲書。單敍寒暄而止。其感當一倍他時。而況番番來書。無非傾湫倒海。抽關啓鍵。使人期欲入於爲己之地。尤覺友倫之重。而諒直之益也。深荷深荷。大抵向書中。以不讀書自處者。非敢諉辭自免。而拒人當責也。旣不能讀書。而妄自盜名。厭然擔當於左右之指目者。此便是掩耳盜鍾矣。實有愧於中。而發此語也。非欲故然也。其情可謂慘矣。左右若遐棄之則已。不爾則當恕之深而矜之加焉。導之以理。責之以正。何患無可。乃曰以不讀書自免。而以微辭拒之云云。此實非損弟之本意。而亦非所望於左右者。左右之於恕人之道。恐亦無少遜乎。且以遮眼之說。歸近於自足自大。何其得罪於左右若是之甚。尤非知我者之說來也。何則。嘗聞讀書之法。先要淸心寡慮。嚴立課程。而看此一處文義。令語意分明。趣味浹洽。不可使一毫雜念。亂了其間然後。可以責其效。而望其就也。其效可責。其就可望。則以讀書指目之。亦可也。自處之。猶可也。顧此鯫生。心地素褊澀。氣又淟濁。生平一事。無人堪比。況挽近以來。親年日老。生事益聊。落於負汲之暇。未嘗無靜坐時節。而亦坐無丌儲。或不能隨意開閱。故平日擬入四庫之藏。閱五車之載之意。不能置諸心。而一朝卒入于此。則平生之所願。可謂遂矣。在朋友之契。可以責其效望其就。而自處猶然之。安知距家愈遠。而思慮愈生。坐處雖靜。而心地反擾耶。此左右之所謂世慮之不自外至者。實獲我心也。是以間或對卷。而旣不能淸心寡慮。又不能嚴立課程。則眼到而心未嘗到。揜卷而書不曾讀。前日之責其效望其就者。可乎否乎。其不敢以讀書自托。而爲遮眼之計者此也。然則疇昔之可責可望之時。以讀書之要責之者。未嘗不是對證之劑。不易之論也。而以今視之。不幾近於良藥之不對病耶。孔明之學。董生之耕。豈易易言哉。盖亦欲學之者有年。而精神力量。終有不及者矣。每自訟于心曰。古人之精神力量。自有一種大稟受。而非後世末學之所可及也。推與別人。未之能學。則其慚愧於心者已久。而盛敎又及。兢恧尤深。時文與學文。雖或有相妨。而所謂時文。往時做得。而竟未見其肯綮。故性隨而懶。今則置之忘域久矣。復豈緣此。而不能專心於學文耶。大率自家心志不固。馴成渝惰之習。而安於自棄也。然若非左右誘掖提撕。不以憃愚見棄。則何以得此。所以損弟。雖有一日之長。而莫追十駕之勤矣。旣感且愧。皮封見學靜字。其意甚古。頗覺眼醒。認得昔日習靜之工有自來。而來頭處仁之擇。亦可算矣。預庸貢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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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배언신면에게 답함 答姜拜言信冕 ○丁亥 정해년(1947) 편지 내용 중에 의혹되는 것이 있어서 감히 묻겠습니다. 이미 지난 일이니 오히려 혹 스승을 무함한 것을 허물하지 말라 했는데, 유고를 어지럽힌 것도 허물하지 말아야 하겠습니까? 호남과 영남에서 오히려 혹 시비(是非)를 타파했다고 했는데, 사정(邪正)도 타파할 수 있겠습니까? 같은 길로 돌아간다면 즐거운 일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스승이 무함을 당하였고, 유고가 어지럽힘을 받았는데도 같은 길로 돌아가는 것이 또한 즐거운 일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깨우쳐 주시는 말씀을 내려 주길 바랍니다.10년 전에 문성보(文聖甫)가 와서 말하기를, "양쪽이 화해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전사견(田士狷)이 먼저 말하기를 "지금 화해의 말을 들으니 사람을 새파랗게 질리도록 만든다."라고 하니, 성보가 말문이 막혔습니다. 작년 봄에 전사순(田士順)과 전사유(田士裕)가 와서 말하기를, "양쪽이 화해를 한다면 참으로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호남에서는 스승의 무함을 변론하는 것으로 대의를 삼으니 감히 입을 열지 못하겠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당신의 뜻은 바로 예전 성보(聖甫)의 설과 같은데, 전사순과 전사유도 오히려 꺼린 것에 비교하여 더욱 심한 것입니다. 示意竊有惑焉。敢問旣往尚或勿咎誣師,亂稿亦可勿咎乎? 湖嶺尚或打破是非,邪正亦可打破乎? 歸於一轍,非不曰樂事。師蒙誣稿受亂,而然且歸一,亦可曰樂事乎? 幸下一轉語回示也。十年前,文聖甫來言: "兩邊和解。" 澤述未及對,士狷先曰: "今聞和說,使人身青。" 聖甫語塞。昨年春,田士順、士裕來言曰: "兩邊和鮮固好,然湖則以辨師誣爲大義,不敢開口云云。" 今之尊喻,卽年前聖甫之說,而視順、裕之猶有忌憚者,更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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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진에게 답함 答鄭國振 乙亥 을해년(1935) 삼가 생각건대, 유자(儒者)가 사설(邪說)을 물리치는 것과 왕자(王者)가 이적(夷狄)을 물리치는 것은 안으로 닦은 것이 굳건해서 의뢰하여 근본으로 삼을 만한 것이 있어야만 물리치는 것을 더욱 강력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맹자(孟子)가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물리침에 의(義)를 모아 기른 호연지기(浩然之氣)로 근본을 삼았고, 한유(韓愈)가 불교와 도교를 물리침에 경서(經書)를 통달한 것으로 근본을 삼았으며, 주자(朱子)가 소식(蘇軾)과 육구연(陸九淵)을 변론함에 시종 일관된 하나의 경(敬)으로 근본을 삼았습니다. 이들은 그 근본이 안에서 굳건함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밖으로 발로된 것이 저처럼 창대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오늘의 일에 분수를 다하고 힘을 다한 것은 거의 옛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다만 이른바 근본을 옛사람처럼 할 수 없으면 백세 이후에 어찌 우리의 말을 맹자, 한유, 주자처럼 믿어주겠습니까? 이것이 진실로 돌아보매 두려운 점입니다. 竊念儒者之闢邪說,王者之攘夷狄,有內修之固可藉而爲本地,然後闢之尤爲有力。故孟子之闢楊、墨,本之於集義養氣; 韓子之排佛、老,本之於曉通經書; 朱子之辨蘇、陸,本之於一敬終始。以其本固於內者如此,故發之於外者,如彼其張大也。吾輩今日之役之盡分竭力,庶不愧乎古人,但其所謂本者未得如古人,則百世之下,安可必信吾言如孟、韓、朱乎? 是誠却顧瞿然處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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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진에게 답함 與鄭國振 丙子 병자년(1936) 지난번 선장(仙庄 상대의 집)에 나아가 달을 감상하고 시를 읊었는데, 어느덧 시간이 흘러 벌써 얼음이 얼고 눈이 내리는 섣달이 되어 거의 일 년이 다 되었습니다. 풍조(風潮)가 더욱 심해져서 성학(聖學)이 장차 끊어지고, 인심이 더욱 변하여 대의(大義)를 밝히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와 그대들이 비록 밤낮으로 머리를 맞대고서 덕을 세우고 학문을 전하며 윤리를 바루고 의리를 돕는 방도를 강구해 밝히더라도 오히려 공을 이루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만나고 편지를 보내는 것도 모두 막혀 걸핏하면 한 해를 넘기니, 어떻게 우뚝한 지혜를 세우고 확연한 논리를 세워 조금이라도 쓰러져가는 풍속을 구하겠습니까? 바라보아도 다가갈 수 없어서 진실로 한심스러울 뿐입니다. 노형은 고명한 견해와 강직한 기운을 하늘로부터 타고나서 일반사람보다 뛰어납니다. 덕과 학문을 닦고 세상에 법도를 맑게 하는데 마땅히 스스로 이룸이 있어서 다른 사람을 기다릴 것도 없습니다. 다만 이치는 반드시 궁구한 이후에 더욱 밝아지고 기운은 반드시 함양한 이후에 더욱 굳세게 됩니다. 이치가 더욱 밝아져서 지극한 밝음에 이르고 기운이 더욱 굳세져서 지극한 굳셈에 이른 이후에 그쳐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고자 하는 자는 강학(講學)이 아니면 할 수가 없고, 강학을 하고자 한다면 붕우와 서로 도움을 주지 않으면 할 수가 없습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형은 방술이 갈래가 많고 응대하는 것이 매우 번잡합니다. 도는 비록 여기에서도 볼만한 것이 있으나 만약 이같이 한다면 혼란스럽게 세월만 보내며 그칠 때가 없으면, 아마도 이치를 궁구하고 기운을 함양하는 공부에 정밀함을 다하여 지극히 밝고 지극히 굳센 경지에 도달할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바라건대 형은 이 점에 유의하여 응대는 조금 줄이고 강학은 조금 늘려서 이것을 중시하고 저것을 경시하며 이것을 주인으로 삼고 저것을 손님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되면 정치하게 이치를 궁구하고 기운을 함양하는 방도에 있어서 이미 절반은 이루게 될 것입니다. 현광(玄狂)은 지난 섣달에 선장에서 함께 사람 중의 한 명이었는데, 어찌 갑자기 죽으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의 높은 재주와 바른 의론을 다시 어디에서 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오당(吾黨)의 불행이고 음당(陰黨)의 기뻐할 바이니, 옛사람의 이른바 "하늘도 이 무리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준다."라는 경우란 말입니까. 아. 슬픕니다. 曩造仙庄,賞月賦詩,居諸幾何,窮臘冰雪,恰滿一周矣。風潮益甚,聖學將絕; 人心益渝,大義難明。當此時也,吾儕若爾人,雖日夕聚首,講明立德傳學正倫扶義之方,猶懼不克奏功。乃者面書俱阻,動輒經歲,其何以立卓然之知,立確然之論,而少救靡然之俗乎? 瞻望靡及,良可於邑如。老兄者,高明之見,剛直之氣,得之天資,超乎凡輩。其於修德學而淑世程也,宜有以自成而不須乎人。但理必窮而後愈明,氣必養而後愈剛,愈明而至於至明,愈剛而至於至剛而後已。欲如此者,非講學不能; 欲講學,非朋友麗澤不能也。竊覸兄方術多門,酬應甚煩,道雖於此,亦有可觀,然若如此紛汨度日,無有已時,則吾恐其無以致精於窮理養氣之功而至至明至剛之域也。願兄加意於此,就酬應而減却分數,就講學而添却分數,要使此爲重而彼爲輕,此爲主而彼爲賓,則其於致精窮養之道,思過半矣。玄狂是客臘仙庄鼎坐中一人,豈意其遽爾觀化? 其高才正論,更於何而得見? 此吾黨之不幸而陰黨之所喜也,古人所謂天亦爲此曹報仇者耶? 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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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깎지 않는 이유에 대한 피인의 질문에 의답함 擬答彼人不薙髪理由之問 머리카락은 부모가 남겨주고 스승이 가르쳐주고 성인이 법으로 삼는 것으로서 몸의 문장(文章)입니다. 머리카락을 없애는 것은 부모를 무시하는 것이고, 부모를 무시하는 것은 스승을 무시하는 것이고, 스승을 무시하는 것은 성인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무시하고 스승을 무시하고 성인을 무시하여 몸의 문장을 없앤다면, 이것은 죽은 사람과 무슨 구별이 있겠습니까? 죽은 사람과 똑같다면, 나의 머리카락을 잘라 죽은 상태가 되는 것보다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아 내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러므로 머리카락을 지키며 변치 않으니,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믿는 종교를 빼앗지 않는 것도 오늘날 세상에서 공인하는 것인데, 어찌 굳이 우리 유자들에 대해서 의심을 한단 말입니까? 髪者, 親之遺, 師之敎, 聖之法, 而爲身之章者也。無髪是無親, 無親是無師, 無師是無聖也。無親無師無聖, 而去身之章, 是庸有別於死人矣乎? 同是死人, 則無戴吾髪而死, 得以無愧於吾心之爲愈。故守而不移者, 此其由也。不奪人之信敎, 亦今世之公認, 何必至於吾而疑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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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재 족숙에게 답함 答涵齋族叔 癸酉 계유년(1933) 저번에 김동봉(김시습)과 안중근의 우열을 물으셨는데 물러나 생각을 하니, 두 사람의 품류가 같지 않아서 수립한 것이 각자의 품류를 따랐으니 나란히 비교하여 우열을 논한 수는 없습니다. 동봉은 고아(高雅)한 선비이고 안 씨는 무용(武勇)이 있는 사람이니, 안 씨가 하는 것을 동봉이 반드시 할 수가 없고, 동봉이 하는 것을 안 씨 또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충의(忠義)라는 하나의 절개가 똑같이 지성(至誠)에서 나온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천성의 타고난 본성은 품류 때문에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평민이 의리를 지켜 천만 번 고초를 겪어도 후회하지 않고, 필부가 용기를 떨쳐서 큰 우두머리를 죽이고 치욕을 설욕한 것은 모두 탁월하고 빛나서 이전의 역사에서 찾아보아도 필적할 사람이 없고 후세에 전하더라도 할 말이 있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행적을 더듬어 중정(中正)의 도로 논한다면144), 동봉은 중이 되어 자식이 없으니 이미 지나친 데에 문제가 있고, 안 씨는 모습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신학문을 숭상했으니 또한 중도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안 씨가 처형될 때 《상서(尙書)》의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약하니 정밀하고 한결같아야 중도를 잡을 수 있다〔人道危微 精一執中〕'145)는 말을 외웠으며, 양복을 벗고 한복을 입어 바른 죽음의 의미를 얻었으니, 또한 신학문을 한 사람의 소행과는 같지 않거니와 오히려 몸으로는 유학을 통달하고도 끝내 중의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한 자보다 나으니, 또한 숭상할 만합니다. 어른의 견해는 다시 어떻게 여기실지 모르겠습니다. 向詢, 金東峰安重根優劣, 退而思之, 二人之品類不同, 其所樹立, 各從其類, 不可得以比並, 而論優劣也。 東峰儒雅人, 安氏武勇人, 安氏所爲, 金必不爲, 東峰所爲, 安亦不爲。 然其忠義一節, 同出於至誠者何也? 以其天性之秉彝, 不以品類而有間也。 蓋其布衣守義, 經千辛而不悔, 匹夫奮勇, 殪巨酋而雪恥, 俱卓然赫然, 求之前史而無匹, 傳之後世而有辭, 詎不偉然? 然迹其行而論以中正之道, 東峰之爲僧無子, 旣失之過, 安氏則非惟變形, 所尙乃新學, 亦不可以語中矣。 但安氏之受戮, 誦尙書人道危微精一執中語, 去洋服服韓衣, 而得正終之意, 則又不類新學人所爲。 而猶賢於身通儒學而終歸釋形者, 亦可尙也。 未審尊見復以爲如何。 그러나……논한다면 출처거취(出處去就)를 중정(中正)한 도리에 맞게 하여 은둔하는 것을 말한다. 《주역(周易)》 〈돈괘(遯卦) 구오(九五)〉에 "아름다운 은둔이니, 정하여 길하다.〔嘉遯貞吉〕"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전(傳)에서 "구오는 중정이니, 은둔하기를 아름답게 한 자이다. 처함이 중정의 도를 얻어서 때에 맞게 멈추고 행함이 이른바 아름다움이란 것이다. 그러므로 정정하여 길함이 된다.〔九五, 中正, 遯之嘉美者也, 處得中正之道, 時止時行, 乃所謂嘉美也, 故爲貞正而吉〕"라고 하였다. 인심은……있다 원문의 '인도위미 정일집중(人道危微精一執中)'은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서 순(舜) 임금이 우(禹)에게 "인심은 위태롭기만 하고 도심은 미약하기만 하니, 오직 정밀하게 살피면서 한결같이 행해야만 진실로 그 중도(中道)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고 당부한 16자(字)를 압축한 말인데, 정주학(程朱學)에서 이것을 유가(儒家)의 도통(道統)인 십육자 심전(十六字心傳)으로 강조하면서 개인의 수양과 나라를 다스리는 최고의 원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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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 전장에게 보냄 與靜齋田丈 甲戌 갑술년(1934) 일전에 편지를 보내 음성의 오진영과 절교할 뜻을 표명하겠다 하신 말씀은 근래에 이미 실행하셨는지요? 오진영을 성토하는 일은 우리 어른이 실제 주도하셨으니 절교는 사실 오래 전에 한 것이라 다시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이전에 검사국에 소환되는 재앙이 있었을 때 한 번 편지가 있었고, 신도(新都)의 모임 때 한 번 만난 이후에 현동에서 밥 한 끼 대접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구실 삼아 말하기를, "정재가 나와 이미 화해했다." 하니, 이전의 편지와 만남은 진실로 크게 잘못된 것이고, 이후의 식사대접은 비록 갑자기 벌어진 일이나 법도가 엄격하지 못한 잘못은 있으니, 그래서 저쪽의 그럴 법한 말을 초래한 것입니다. 비록 우리 어른이 선친이 무함 당한 것에 대한 통분이 유명(幽明)을 관통하여 저쪽을 끊을 마음이 금석처럼 단단하겠지만 누가 기꺼이 그러한 자취를 버리고 그러한 마음을 헤아리려 하겠습니까? 만약 계화도 사원에서 처음 제사 지냈던 날에 제창하여 논하기를, "춘추의 법은 난적(亂賊)을 다스릴 때 먼저 그 무리를 다스리니, 무릇 오진영의 당이 되는 자들은 제사 지내는 뜰에 들이지 말라." 했다면 명분이 바르고 말이 이치에 맞아서 대의가 밝게 드러났을 것이니, 누가 감히 이론을 펼 수 있었겠습니까? 저들이 들으면 자연 간담이 서늘하여 다시는 감히 구실 삼아 말하지 못했을 것이고, 여러 사람들이 봄에 또한 이 무리를 모두 끊어낸 것을 알게 되어 자연 번거롭게 편지를 보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바람에 사원 사람들의 논의를 앞장세워 "오진영 한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 무리는 모두 함께 참여할 수 있으니, 이것은 괴수만 섬멸하고 협박을 못 이겨 따른 자들은 다스리지 말라는 의리가 된다." 하였습니다. 아, 이것은 무슨 견해입니까? 조조(曹操)가 그 괴수가 되니 목을 베고, 순욱(荀彧) 등의 무리는 협박을 못 이겨 위협에 따랐을 뿐이니 징벌하지 말라 한다면, 이것이 말이 됩니까? 인가를 지시하셨다는 무함을 도와 이루고 스승의 원고를 같이 고친 자들은 모두 오진영과 한 몸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만약 당사자만 제거하고 그와 한 몸인 사람을 인정한다면, 이것은 제거한 사람은 한 명의 오진영이고, 같이한 사람은 수많은 오진영이니, 오진영은 말 한 마디 낯빛 한 번 동요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국면을 온전히 할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논의를 한 사람은 실제로 의리에 어두워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의리가 아닌 줄 알면서도 나쁜 사심이 일어나는 것을 이기지 못한 것입니까? 뒤이어 음성의 괴수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어 한다는 말이 신이(愼李 신헌(愼軒) 이기환(李起煥))의 입에서 나와 우리 어른에게 의중을 물어보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또한 한 사람만 제거한다는 말이 처음부터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스승을 잊고 적에게 아부하는 말을 가지고 감히 일찍이 선사의 친아들을 시험하면서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던 것은, 어찌 오진영을 배척함이 엄하지 않은 것을 보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어른이 이것에 대해서는 정말로 스스로 돌이켜보아야 합니다. 이기환에 있어서는 이전에 성토를 제창했던 사람으로서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오진영에게 항복하려 하였으니, 그가 말한 "선사가 있으면 오진영이 없고 오진영이 있으면 선사가 없다."라는 수많은 엄정한 문자는 장차 어떻게 처리하려는 것일까요? 스스로 그 문자를 가지고 스스로 자기 죄를 감단(勘斷)한다면 자연 몸 둘 곳이 없을 것이니, 다만 우리 어른께서 기롱하신 것처럼 세 토막을 내야 할 사람이 될 뿐만이 아닙니다. 비록 그러할지라도 이제 만약 우리 어른이 빨리 편지를 보내 오진영과 절교한다고 표명한다면, 이기환이 감히 다시는 청하지 못할 것이니, 어버이를 섬기는 나의 효를 다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이기환이 악에 빠지는 것을 구하는 어짊도 행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日前投書, 表絶陰震之喩, 近已實行否? 蓋討震之役, 吾丈實主之, 絶固久矣, 更不須言。 但前有檢禍時一書, 新都會一面後, 有玄洞一飯之饋, 故彼得以藉言曰: "靜齋與吾已和。" 前之書面, 固爲鑄錯。 後之饋飯, 雖出倉卒, 失管不嚴則有之, 所以來彼近似之言也。 雖吾丈先誣之痛, 貫徹幽明, 絶彼之心, 堅如金石, 孰肯舍其跡而諒其情乎? 若於華院始祭之日, 倡論曰: "春秋之法, 治亂賊者, 先治其黨, 凡爲震黨者, 勿入祭庭。" 名正言順, 大義昭著, 孰敢異論乎? 使彼聞之, 自應膽落, 不復敢藉言, 衆人觀之, 亦知幷絶其黨, 而自不煩投書。 惜乎, 其未也! 創院人之論曰: "除震一人外, 其黨皆可與同, 是爲殱厥渠魁, 脅從罔治之義。" 噫, 此何見也? 謂曹操爲渠魁而誅之, 彧群輩爲脅從而罔治, 是果成說乎? 凡助成認誣, 同改師稿者, 皆與震一體人。 若但除當人, 而與其一體, 是所除一震, 而所同者衆震, 震則不動聲色, 而坐定全局矣。 未知爲此論者, 實昧義而然歟? 抑知其非義, 而不勝邪私之發歟? 從而至於欲致書陰魁之說, 出於愼李之口, 而詢及吾丈, 則又知除一人之云, 初非眞心。 夫以忘師附賊之言, 敢嘗試於先師親子, 而無忌憚者, 豈非以見其斥震之不嚴而乃爾乎? 吾丈於此, 正可以自反也。 在李則以前日倡討之人, 忽然改頭, 欲降于震, 則其所謂有先師則無震泳, 有震泳則無先師等, 許多嚴正文字, 將何以區處? 自以其文自勘其罪, 自不得容其身, 不但如吾丈所譏, 爲三截人而已也。 雖然今若吾丈亟投書而表絶震, 則李不敢復請。 非惟盡吾事親之孝, 亦爲捄李陷惡之仁, 如何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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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 전장에게 답함 答靜齋田丈 癸酉 계유년(1933) 현동의 묘에 석물이 없다는 것은 진실로 편지에서 한탄한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삼백 원의 돈이 진실로 모으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모으기 어려운 것은 의론입니다. 이제 사인(士仁)이 이장하고자 하고 순형(舜衡)이 힘을 쓰고 있으니, 비록 정성과 힘이 있는 자라도 누가 이 일에 기꺼이 참여하여 돈만 쓰고 구설을 초래하려고 하겠습니까? 기이하도다! 한쪽 사람의 무함으로 선사의 평생 절의가 사라진 마당에 동문의 그 많은 재물로 고용한 사람들이 손을 댄 난본(亂本)을 간행하면서 유어비어와 이간하는 말로 스승 집안 형제들의 불화를 초래하는 바람에 장사지내는 날 즉시 갖출 수 있었던 석물을 십여 년이나 오래도록 까마득하게 하였으니, 그 마음이 잔인합니다. 용동에서 간행한 일에 이르러서는 또한 어찌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까? 우리 어른이 그 일에 참여한 것은 지금에 이르러 뒤늦은 후회가 있지 않으십니까? 시세와 의리로 헤아려 보건대, 이장은 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사인이 마음을 돌리기만 한다면 석물의 비용을 마련하고 운용하는 것은 사람이 없을까 근심할 것이 없습니다. 부디 정성을 들여 사인의 마음을 돌려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음성의 오진영이 한창 스승을 무함할 때에 사인이 그들 편이 되었던 것은 사실 한때 미혹된 것입니다. 몇 년 전에 함재 어른을 찾아가 전날의 잘못을 사죄하고, 제 동생을 찾아와 저에게 그러한 뜻을 전하고 갔습니다. 사람이 이미 잘못을 깨달으면 마땅히 이전의 허물을 추궁하지 말고 합심하여 뒷일을 도모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듣건대 올가을 선사의 기일에 임참봉(任參奉)이 우리 어른의 허물 때문에 제사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된 것은 진실로 자식의 도리가 편안하지 않기 때문이고, 또한 조카와 화합하지 못하는 뜻을 보였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율곡이 말하기를, "한 집안 사람이 불화하는 것은 다만 성의를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188) 했으니, 이 말을 생각해 볼만 합니다. 비록 그러나 제 견해로 헤아려 본다면 우리 어른이 선대의 일을 성취하지 못함을 한스러워 하는 것으로 석물보다 더 급한 게 있습니다. 가장(家狀)과 연보(年譜)가 이것이니, 왜입니까? 석물은 훗날에 정성과 힘이 있는 자가 있다면 가능하고, 가장과 연보는 우리 어른처럼 사실을 두루 알고 있는 자가 아니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의 완급을 결국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깊이 헤아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玄阡石儀之闕, 誠如下喩所歎。 然三百圓金, 實非難合。 所難合者, 議論也。 今士仁欲緬遷, 而舜衡宣力焉, 雖有誠力者, 孰肯與於是役, 費金而招口哉? 異哉! 一邊人之誣了, 先師生平節義銷了,同門幾多物力, 印出手分之亂本, 而以游辭間言, 致師家骨肉之不和。 使此葬日, 卽具之石儀, 茫然於十餘年之久, 其心忍矣。 至於龍刊之事, 又何爲而然者? 吾丈之與其役, 至今不有追悔乎? 大抵揆以時勢義理, 緬葬不可爲者。 如得士仁回意, 則石儀之運謀出力, 不患無人。 幸積誠而回之, 如何? 方陰之誣師也, 士仁之右彼, 實爲一時之惑。 年前來謁涵丈, 謝前日迷錯, 訪見舍弟, 傳意鄙生而去。 人旣覺悟, 不宜追咎, 而同心圖後事, 可也。 聞"今秋師忌, 任參奉以吾丈之累, 不參祀有言"云, 如此者, 固爲子道之不安, 亦不爲示不和令姪之意乎? 栗翁言"一家之人不和, 只爲誠意未盡。" 此可思也。 雖然料以淺見, 吾丈所痛先事未就, 有尤急於石儀者。 家狀年譜, 是也, 何也? 一則後日之有誠力者, 可能, 一則非吾丈之備知事實者, 不可能。 二者之緩急, 竟如何? 願有以深諒焉。 한 집안……때문이다 《율곡전서(栗谷全書)》 권40 〈자경문(自警文)〉에 보인다. 〈자경문〉에는 화(和)가 아닌 화(化)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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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 전장에게 답함 答靜齋田丈 甲戌 갑술년(1934) 연보(年譜) 후반을 저보고 기록하라 하니,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 연월과 사실이 충분히 갖추어졌으니, 우리 어른이 알지 못하는 부분을 감히 마음 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가장(家狀)을 대신 지으라는 것은 더욱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 어른의 문장으로 족히 이 일을 할 수 있으니, 비록 잘 쓰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대신 쓰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첨삭하고 윤문하는 것은 사우들과 함께 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年譜後半, 今鄙生記之, 豈敢當, 豈敢當? 但其年月事實, 足以備, 吾丈未悉者, 則敢不用心也? 家狀代撰, 尤非敢當。 吾丈之文, 自足爲此, 雖有善手, 不必使代。 添刪修潤, 則可與士友共之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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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 전장에게 보냄 與靜齋田丈 甲戌 갑술년(1934) 옛날 정미년(1907)에 임경소(林敬所) 어른이 내방하여 사문의 언행과 사실을 부탁했을 때 곁에 모시고 있어서 자세히 기억하는데, 돌아가신 뒤의 연보를 준비하시며 "이 이전의 것은 내가 기록해 놓은 것이 있다." 하셨습니다. 생각해보면 그 집안에 자연 편을 이룬 책자가 있을 듯합니다만 이 어른이 죽은 후로 가사가 완전히 쓰러졌다고 하니, 과연 보존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세히 찾아서 얻어두는 것이 매우 좋겠습니다. 昔丁未年間, 敬所林丈來訪, 託以師門言行事實, 侍側詳記, 用備身後年譜曰: "自此以前, 吾有所錄。" 想其家自有成編冊子, 而此丈沒後, 家事蕩然云。 未知果能保在, 詳探求得, 甚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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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인일효를 위로하는 별지 慰田士仁鎰孝別紙 ○丙子 병자년(1936) 위문하는 편지 외에는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상중(喪中)에 있을 때에는 단지 하나의 인심(仁心)이 있을 뿐입니다. 우암(尤菴)도 그렇게 말했으니, 이것을 통해 당신도 또한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대저 이 하나의 인심은 진실로 모든 일의 근본입니다. 하나의 인심이 물씬 생겨날 즈음에 평일에 했던 것으로서 뒤미처 생각하매 후회할 만한 것들이 반드시 이 하나의 후회에서 올라오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그 물씬 드러나는 것을 잃지 말아서 내 마음의 편안한 것으로 행할 수 있다면 인을 이루 다 쓸 수 없을 것입니다. 어찌 지난날의 일이 허다하게 후회할 것만 있겠습니까. 지난날의 후회할 일은 지금 오히려 잘 고칠 수 있습니다만, 만약 다시 훗날에 후회할 일이 있다면 후회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제가 부득불 염려하여 미리 말씀드리는 까닭입니다. 진심에서 하는 말이니 받아들여 주시기 바랍니다. 편지를 앞에 두고 눈물이 나서 할 말을 다하지 못합니다. 禮書之外,夫復何言? 方在哀疚之中,只有一圑仁心,尤菴云然,以此知哀執事之亦然。夫此一圑仁心,實爲萬事之本源。當其一心藹然之際,凡厥平日所爲追惟可悔者,必多從茲一悔上,能勿失其藹然而見者,行之以吾心之安,則仁不可勝用矣。夫安有往日事之許多可悔也? 往日之悔,亦有及今猶可善改者,若復有後日之悔,則悔將何及? 此澤述所以不得不貢慮而預告者也。言出肺肝,伏惟採納。臨紙悵涕,不盡所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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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승종섬에게 답함 答金允升鐘暹 ○甲子 갑자년(1924) 가르쳐 주신 뜻을 대략 한 번 살펴보았습니다. 형이 나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저 또한 형의 주된 뜻을 분명히 알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른바 이쪽은 어느 쪽을 가리키며 저쪽은 어느 쪽을 가리키는지요? 영남을 이쪽이라 말하고 호남을 저쪽이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제가 감히 알 바가 아닌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호남을 이쪽이라 말하고 영남을 저쪽이라 말한 것이라면 형은 이 편지에 일삼을 필요가 없이 곧 전편을 반복하여 읽어보면 피차간의 여탈(與奪)이 극히 선명하니 의심난 것을 질문하여 채택하여 살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영남이 호남의 인가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버리고 경성 사람에게 인가를 구걸한 것에 대해 일찍이 분명한 말로 배척했었습니다. 음성(陰城)의 인교서(認教書)가 나오자 이것은 대의(大義)가 관련된 것이라 말하고 절절히 근심하고 힘들게 변론하여 한쪽의 지목을 후하게 받았지만 후회하지 않았고, 영백씨(令伯氏)가 스승의 무함을 변론하지 않은 것과 관련하여 옛사람이 부들부들한 가죽을 차고 다니거나 활시위를 차고 다니면서 스스로를 경계한 고사31)를 끌어다가 직언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대한 가르침을 받듦에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 형의 몽매함이 진실로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김용승(金容承)은 이미 사문(師門)에서 스스로 물러난 자인데 그의 무죄를 변명했다는 것이 과연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다만 스스로 변명할 것은 있습니다. 내가 김용승을 따른 것이 그 죄를 알지 못했던 날에 있다고 했는데, 지난날에 이미 편지로 절교를 고하였는데 무슨 간섭할 것이 있었겠습니까. 음성은 그가 연전에 한농노(漢農老)라고 부른 죄를 알고 있었고, 그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선사를 무시하는 죄를 알고 있었음에도 오히려 그를 여러 해 동안 존경하고 믿어서 선사의 원고를 교정토록 청하였으니, 이것은 김용승을 당인(黨人)으로 삼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김용성이 음성에게 사과하면서 "사우간(師友間)으로 선사(先師)를 대하였다,"고 했는데, 사우간이란 말은 끝내 스승을 배반한 것입니다. 그러나 음성은 서로 절교했다고 말하지 않고, "내가 그대를 더는 성토하지 않을 것이다. 조용하게 잘못을 고치고 경향(京鄕)을 미치광이처럼 쏘다니지 말라."라고 했으니, 이것은 김용승을 당인으로 삼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일 풍파가 일어났을 때에 추후에 와서 보고 김용성에게 여관에 물러가서 기다리지 않고 곧장 들어왔다고 질책한 뒤에, 다시 여러 사람에게 말하기를, "그가 이미 상제(祥祭)에 천리 길을 달려 왔으니 반드시 사죄하러 온 것이다. 붙들어 내보낸 뒤에 그 고문(告文)을 보고서 진퇴를 결정해야지, 먼저 멋대로 영전(靈前)에서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김용승을 위하여 변명했다고 성토를 한다면 다만 받아들일 뿐이니 또한 다시 어찌하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저와 김용승은 모두 중년입니다. 절교 여부와 변명 여부는 앞날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니, 또한 다시 무슨 변명을 많이 하겠습니까? 教意略綽一覽,非惟兄之不能洞悉我情,弟亦難以明見兄之主意。所謂此邊指何邊,彼邊指何邊? 謂嶺爲此,而謂湖爲彼乎? 則有非吾之所敢知者。謂湖爲此,而謂嶺爲彼,則兄必無事乎此書,乃將全篇反覆,則彼此之與奪,十分躍如,可得以質疑而冀採察焉。弟於嶺之舍湖不認而乞京認也,蓋嘗顯言斥之矣。逮夫陰城認教書之出也,謂是大義攸關,切切然憂之,苦苦然辨之,厚被一邊指目而不悔,至以令伯氏之不辨師誣,獻佩弦佩韋之讜言矣。今承盛教乃如此,兄之昧實至於此乎?金容承旣是自退師門者,則分疏其無罪,果成說乎? 但自爲分疏者,則有之。蓋曰我之從金,在不知其罪之日,向旣以書告絕,則有何相涉乎? 陰城則知其年前呼漢農老之罪,知其心中久無先師之罪,猶與之多年敬信,至於請校師稿,此非黨金乎? 金謝過陰城,而曰"師友間處先師"云,則師友間終是倍師也。陰城不曰相絕,而曰"吾不復討君,其安靜改過,勿狂走京鄉",此非黨金乎云爾。當日風波之起也,追後來見,旣責金以不退舘俟之而直入,復言於衆中曰: "彼旣千里赴祥,則必其謝罪來者也。扶而出之,見其告文而進退之可也,先肆拳踢於靈前,則不可也。" 以此而爲爲金分疏聲討之,則只當受之而已,亦復何哉? 雖然弟與金俱是中年人,絕與不絕,分疏不分疏,觀前頭可知,又多何辨? 옛사람이……고사 강하고 사나운 자는 억제하여야 하고, 두려워서 위축된 자는 기운을 충분히 길러야 한다는 뜻이다. 《한비자(韓非子)》 〈관행(觀行)〉에 "서문표(西門豹)가 성격이 급하여 무두질한 가죽[韋]을 차고 다녔고, 동안우(董安于)는 성격이 느슨하여 활줄[弦]을 차고 다니며 스스로를 급하게 하였다.[西門豹之性急 故佩韋以自緩已 董安于之心緩 故佩弦以自急]"라는 내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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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승에게 답함 答金允升 甲子 갑자년(1924) 오늘날의 일은 다만 음성(陰城)의 무함 여부와 문죄(問罪)자의 강제 여부를 철저히 따져야 할 뿐입니다. "청원하여 발간하고 배포하는 것은 결단코 스스로 욕되게 하는 것이다."32)라는 가르침은 이 어떠한 의리입니까? "힘을 헤아려 하라."는 것과 "반드시 깊게 구애될 필요는 없다."는 설은 이 어떠한 뜻입니까? 음성을 성토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욕보이는 거시니 따르지 말라.'는 것은 '힘을 헤아려서 하라', '구애될 필요는 없다.'는 것과는 얼음과 숯이 서로 용납할 수 없는 것과 같다."라고 하는 반면, 음성을 편드는 자들은 "저것도 한 때이고 이것도 한 때이니 병행하더라도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또한 누가 옳고 누가 잘못입니까? 공평하게 듣고 아울러 살펴서 그 시비를 판단한 연후에 결론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형은 선사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음성의 주장을 감죄하면서 조금도 자세히 따지 않고 현고한 자에 대해 뒤늦게 문제를 삼았습니다. 당초에 피차가 동의하여 변명하였는데, 영남 사람들이 출판사에 투고하고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으며 가리고 막았습니다. 이것이 말이 더욱 많아질수록 끝내는 합치할 수 없었던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스승과 제자 사이의 큰 윤리이고 의리의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이니, 마땅히 신중히 생각하고 명확하게 분변하여 완전히 밝혀지지 않으면 그만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청컨대 그 설을 끝까지 다하고자 합니다.보내온 편지에 의전(義戰)이 없다는 것과 저쪽이 이쪽보다 낫다고 하는 것으로 편지의 첫머리를 삼고 호남과 영남의 단안(斷案)을 주장하였는데, 저는 완전히 타당하지 않은 제목을 붙였다고 생각합니다. 호남이 선사께서 인가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여 영남이 원고를 발간하려는 것을 배척했으니, 그 다툰 것은 '의(義)' 한 글자일 뿐이고 애당초 의전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으며, 더구나 선사가 무함을 당한 것을 보고 분변하여 성토하는 것은 의리의 가장 큰 것이니, 의전이 아니라고 한다면 더욱 타당하지 않았습니다. 호남이 주장한 전후의 의리가 이처럼 명쾌하고 정대하니, 호남이 영남보다 낫다고 해도 오히려 잘못이지만 영남이 호남보다 낫다고 한다면 더욱 큰 잘못이 됩니다.만약 아무개 일과 아무개 일을 대비하여 논하고, 개개인을 나란히 평가한다면 피차의 득실과 우열이 어찌 없을 수 있겠습니까? 애당초 말을 바르게 하여 이론을 세우지 못한 것은 또한 죄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호남이 거리낌이 없는 것을 보면, 인가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주장한 것은 호남입니다. 경신년(1920)의 유서(遺書)가 나온 이후에 더욱 조마조마하며 이전의 죄를 통렬하게 후회한 것은 호남 사람입니다. 애써 인가하지 않은 사실을 버리고 유서를 무시하며 앞으로의 계획을 누차 위반하여 투고를 약속하고 서울에 인가를 구걸한 것은 영남과 음성 사람이니, 또한 유독 무슨 마음이란 말입니까? 그러나 이것은 문인들이 스스로 만든 죄이니, 다만 선사에게 누를 끼쳤을 뿐이라고 해도 되고 대죄가 아니라고 말해도 됩니다. 그런데 심지어 "선사께서 인의(認意)와 인교(認教)가 있었다."고 말한 것은 도대체 어떤 곳에 선사를 놓아두고자 한 것입니까? 이는 선사를 무함한 대죄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처음 함재(涵齋 김낙두金洛斗)의 인가설을 성토하는 편지가 왔을 때에 만약 답하기를 "선사의 혼령이 반드시 불같이 나에게 화를 낼 것이지만 나는 다만 오래도록 전하고 싶어서 죄를 지으면서 이것을 했습니다."라고 했다면 일찌감치 아무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내 말하기를 "선사께서 홀로 앉아 있다가 진영(震泳)에게 명하기를 '세상의 앞날은 알 수가 없으니 문고(文稿)를 군이 모쪼록 잘 헤아려 하라.' 하였다."라고 하고, 또 스스로 《오현수언(五賢粹言)》의 간인을 인가한 설을 인용하였으니, 무엇 때문입니까? 자승(子乘)이 편지로써 인가한 뜻을 질문하였을 때, 만약 답하기를 "선사의 절의로써 어찌 이런 뜻이 있었겠습니까. 내가 비록 못났다 하더라도 또한 어찌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말을 전한 자가 망령된 것입니다. 절대로 다시는 말을 하지 마시오."라고 했다면 전혀 아무런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내 "선사께서 일찍이 소자에게 책을 쓴 사람은 무관하니 깊이 구애될 필요가 없다는 말로 가르치셨다."33)라고 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또 《오현수언》을 인가했다는 설은 일찍이 한 글자도 볼 수 없었던 것이니, 원고를 발간하는 날에 이 설로 증명한 것은 오얏나무 밑에서 갓끈을 고치지 말고 오이 밭에서 신발 끈을 매지 말라는 경계를 스스로 범한 것이니 감히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하물며 다시 큰 소리로 말하기를 "선사가 《오현수언》을 인가한 설은 천지가 만물을 낳고 성인이 표준을 세우는 마음이기 때문에 꺼리지 않고 공개적으로 말씀하였다."고 했으니, 무엇 때문입니까? 이미 그 글을 완성하여 아무런 어려움 없이 전파하여, 결국 온 땅에 넘치도록 의심과 비방을 일으키고 하늘 가득 기롱과 조소가 퍼지게 하여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하나같이 생각이 없음이 어찌 이리 심하단 말입니까?근래에 장성(長城) 송문인(松門人)34)으로부터 온 자가 말하기를 "선사가 만약 인가하도록 하지 않았다면 고제가 어찌 감히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라고 하고, 또 흥덕(興德) 면문인(勉門人)으로부터 온 자가 말하기를 "이런 선사가 있음에 이런 제자가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승욱(李承旭)이 〈전간재전(田艮齋傳)〉을 지어 각 신문에 게재하려고 하는데, 보고 들은 것이 이미 이와 같다면 나머지 모든 사람들이 놀라고 비웃으며 각각 차록(箚錄)을 만들어 배척하고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냉소하는 것이 장차 산과 바다처럼 헤아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선사가 평생토록 쌓은 고결하고도 빛나는 업적을 하루아침에 어둡고 흐릿하게 만드는 것은 누구 때문입니까? 형께서 공정하고 맑게 생각하시면 또한 저절로 정확히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청원하여 발간하여 배포하는 것은 결단코 스스로 욕되게 하는 것이다."라는 의리가 확립되면 "힘을 헤아려 하라."는 것'과 "반드시 깊이 구애될 필요가 없다,"라는 설은 무너질 것이고, "힘을 헤아려 하라."는 것'과 "반드시 깊이 구애될 필요가 없다,"라는 설이 행해지면 "청원하여 발간하여 배포하는 것은 결단코 스스로 욕되게 하는 것이다."라는 의리가 무너질 것입니다. 자손과 문인에게 보여준 수필(手筆)이 믿을 수 있다면 홀로 앉아 있을 때 오진영에게 명했다고 한 것은 근거가 없게 되고, 홀로 앉아계실 때 오진영에게 명했다고 하는 것이 근거가 될 만하면 자손과 문인에게 보여준 수필은 쓸데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두 가지의 형세가 양립할 수 없는 것은 마치 밤과 낮, 얼음과 숯의 관계처럼 매양 서로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혹자는 "신해년(1911)의 유서에 인가하지 말라는 것은 그때의 일이고, 임술년(1922)에 혼자 앉아계실 때 명하여 인가하도록 한 것은 이때의 일이다."라고 하였고, 또 "전에는 변통할 길이 없었지만 뒤에는 대인(代認)하는 사례도 있으니, 왕등(暀嶹)에서 '인가하지 말라.'고 쓴 수필(手筆)과 은행나무 아래에 홀로 앉아계실 때 '힘을 헤아려 하라.'고 했던 명은 병행될 수 있고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고 말한 자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음성을 믿는 것이 선사를 믿는 것보다 돈독하고 선사를 의심하기를 음성을 의심하는 것보다 쉽게 하는 자들입니다. 나는 이 때문에 "힘을 헤아려 하라"는 것과 "구애받지 말라"는 등의 설이 깨지지 않으면 선사가 전후로 두 마음을 가졌다는 의심을 받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선사는 광명정대한 군자이니, 음성은 선사를 무함한 것으로 귀착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깨우쳐 주시는 말씀을 내려주길 바랍니다. 今日之事,只當深究陰城之誣與不誣、問罪者之勒與不勒。"請願刊布,決是自辱"之訓,是何等義理? "料量爲之"、"不必深拘"等說,是何等意思? 討陰者,則曰"自辱勿從之,與料量、不拘,氷炭之不相容"; 袒陰者,則曰"彼一時此一時,并行而不相悖"。此又孰得孰失,而公聽并觀,斷其是非,然後乃可以出場。今兄於據師訓勘陰說,略無致詳,而見告者追提。當初彼此同議分疏,嶺人投稿,張皇而遮欄之,此所以言愈多而終不合也。然此係師生大倫,義理重關,要當愼思明辨,不得不措者。請得以畢其說。來書以無義戰、彼善此,作一書劈頭,主湖嶺斷案,弟則謂大失著題也。湖之主不認而斥嶺徇稿也,所爭者一義字,初不可謂非義戰,而況見師誣而辨討之,義之最大者,則謂非義戰,尤無當矣。湖之前後之義,旣明且大者如此,湖善於嶺,猶爲失也,嶺善於湖,則尤爲失也。若以某事某事,對待論之,箇人箇人比并評之,彼此得失優劣,安得以無也? 夫初不能正言立異者,亦不爲無罪,然見湖無礙,即以不認爲主者,湖也。庚申遺書出後,益加兢兢痛悔前罪者,湖人也。若乃苦舍不認,無視遺書,累違前進,約投稿乞京認者,嶺陰人也,亦獨何心? 然此門人之所自孽,只可曰累師,而謂非大罪可也。至於謂先師有認意、認教者,欲置先師於何地,不得不謂誣師之大罪也。始涵齋討認書至也,若答之曰"先師之靈,必赫然怒我,我但欲傳久,而負罪爲之",則早已無事矣。乃曰"先師獨坐命震泳曰'世不可知,文稿君須料量爲之",又自引《五粹》認說,何也? 子乘之以書質認意也,若答之曰: "以先師之節義,豈有是意? 吾雖無狀,亦豈有是言? 傳之者妄也。絕勿復道也." 則都無事矣。乃曰"先師嘗教小子,以著書者無關,不必深拘之說",何也? 且五粹認說,曾不見隻字者,則證此說於刊稿之日,自犯李下瓜田之戒,已所不敢。況復大言之曰"先師五粹認說,是天地生物聖人立極之心,故不諱而公言之",何也? 旣成其文,無難傳播,以致溢地疑謗,漲天譏嘲,而莫可收拾,一何不思之甚也?頃自長城松門人側來者言: "先師若不教認,高弟焉敢有此言?" 又自興德勉門人側來者言: "有是先師,有是弟子。" 李承旭作《田艮齋傳》,欲揭各新聞,聞見所及者旣若此,則餘外諸家之驚怪嗤排,各自箚錄而斥之,往復而騰笑者,將山海之不可量也。蓋使先師生平之皜皜炳炳,一朝歸於昧昧窣窣者,是誰之故? 兄其公清思之,亦自有輕重心衡也。"請願刊布,決是自辱"之義立,則"料量爲之"、"不必深拘"之說破矣; "料量爲之"、"不必深拘"之說行,則"請願刊布,決是自辱"之義壞矣。示子孫門人之手筆可信,則獨坐命震之云無據矣; 獨坐命震之云可據,則示子孫門人之手筆無所用矣。二者之勢不兩立,如畫夜氷炭之每每相反。或者謂辛亥遺書之勿認,彼一時也,壬戌獨命之教認,此一時也。又有謂前無變通之路,後有代認之例,暀嶹勿認之之手筆,杏下料量之獨命,可并行而不相悖也。此輩人信陰篤於信師,疑師易於疑陰者也。吾故曰"料量"、"不拘"等說不破,則先師受前後二心之疑。先師之爲光明正大君子也,陰城之不得不歸於誣師也。請下一轉語. 청원하여……것이다 전우는 자손 및 제군에 고하는 글에서 "다른 날 시변이 조금 안정되기 전에 만약 저쪽에 청원하여 발간 배포할 계획을 하는 것은 결단코 스스로 욕되게 하는 것이다. 여러 사람이 비록 혹 강권하더라도 너희는 아비와 할애비의 마지막 명을 맹세코 지켜서 조심하여 애써 따르지 말라.]異時時變稍定之前, 若請願於彼, 以爲刊布之計, 決是自辱。諸人雖或強之. 汝等誓守父祖末命, 愼勿勉從也]"라고 하였다. 《간재집(艮齋集)後編》 권5 〈고제자손겸시제군(告諸子孫兼示諸君)〉 선사께서……가르치셨다 오진영은 이병은에게 편지를 써서 말하기를 "선사가 일찍이 소자에게 말하기를 '인쇄업자가 스스로 총독부에게 출판 인가를 받으면 책을 쓴 사람은 그것과는 무관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으니 이와 같다면 반드시 책을 출판하는데 깊이 구애받을 것이 없겠다.' 하였다."라고 하였다. 《후창집속집(後滄集續集)》 4 〈연보(年譜)〉 송문인(松門人) 장성에 거주하였던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인을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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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題南庵石泉 枕下寒泉入夜鳴。筧頭滴滴作霖聲。激躍飛揚非本性。端知源發十分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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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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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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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塢原韻 飮我淸泉陟我岡。山中逸樂較誰長。童收落葉還籬外。客飽寒花宿月傍。千古良朋時對籍。十年活計晩栽桑。家人休說田無穫。秋熟園林果蓏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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