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 전장에게 보냄 與靜齋田丈 甲戌 갑술년(1934) 일전에 편지를 보내 음성의 오진영과 절교할 뜻을 표명하겠다 하신 말씀은 근래에 이미 실행하셨는지요? 오진영을 성토하는 일은 우리 어른이 실제 주도하셨으니 절교는 사실 오래 전에 한 것이라 다시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이전에 검사국에 소환되는 재앙이 있었을 때 한 번 편지가 있었고, 신도(新都)의 모임 때 한 번 만난 이후에 현동에서 밥 한 끼 대접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구실 삼아 말하기를, "정재가 나와 이미 화해했다." 하니, 이전의 편지와 만남은 진실로 크게 잘못된 것이고, 이후의 식사대접은 비록 갑자기 벌어진 일이나 법도가 엄격하지 못한 잘못은 있으니, 그래서 저쪽의 그럴 법한 말을 초래한 것입니다. 비록 우리 어른이 선친이 무함 당한 것에 대한 통분이 유명(幽明)을 관통하여 저쪽을 끊을 마음이 금석처럼 단단하겠지만 누가 기꺼이 그러한 자취를 버리고 그러한 마음을 헤아리려 하겠습니까? 만약 계화도 사원에서 처음 제사 지냈던 날에 제창하여 논하기를, "춘추의 법은 난적(亂賊)을 다스릴 때 먼저 그 무리를 다스리니, 무릇 오진영의 당이 되는 자들은 제사 지내는 뜰에 들이지 말라." 했다면 명분이 바르고 말이 이치에 맞아서 대의가 밝게 드러났을 것이니, 누가 감히 이론을 펼 수 있었겠습니까? 저들이 들으면 자연 간담이 서늘하여 다시는 감히 구실 삼아 말하지 못했을 것이고, 여러 사람들이 봄에 또한 이 무리를 모두 끊어낸 것을 알게 되어 자연 번거롭게 편지를 보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바람에 사원 사람들의 논의를 앞장세워 "오진영 한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 무리는 모두 함께 참여할 수 있으니, 이것은 괴수만 섬멸하고 협박을 못 이겨 따른 자들은 다스리지 말라는 의리가 된다." 하였습니다. 아, 이것은 무슨 견해입니까? 조조(曹操)가 그 괴수가 되니 목을 베고, 순욱(荀彧) 등의 무리는 협박을 못 이겨 위협에 따랐을 뿐이니 징벌하지 말라 한다면, 이것이 말이 됩니까? 인가를 지시하셨다는 무함을 도와 이루고 스승의 원고를 같이 고친 자들은 모두 오진영과 한 몸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만약 당사자만 제거하고 그와 한 몸인 사람을 인정한다면, 이것은 제거한 사람은 한 명의 오진영이고, 같이한 사람은 수많은 오진영이니, 오진영은 말 한 마디 낯빛 한 번 동요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국면을 온전히 할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논의를 한 사람은 실제로 의리에 어두워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의리가 아닌 줄 알면서도 나쁜 사심이 일어나는 것을 이기지 못한 것입니까? 뒤이어 음성의 괴수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어 한다는 말이 신이(愼李 신헌(愼軒) 이기환(李起煥))의 입에서 나와 우리 어른에게 의중을 물어보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또한 한 사람만 제거한다는 말이 처음부터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스승을 잊고 적에게 아부하는 말을 가지고 감히 일찍이 선사의 친아들을 시험하면서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던 것은, 어찌 오진영을 배척함이 엄하지 않은 것을 보고 그렇게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어른이 이것에 대해서는 정말로 스스로 돌이켜보아야 합니다. 이기환에 있어서는 이전에 성토를 제창했던 사람으로서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오진영에게 항복하려 하였으니, 그가 말한 "선사가 있으면 오진영이 없고 오진영이 있으면 선사가 없다."라는 수많은 엄정한 문자는 장차 어떻게 처리하려는 것일까요? 스스로 그 문자를 가지고 스스로 자기 죄를 감단(勘斷)한다면 자연 몸 둘 곳이 없을 것이니, 다만 우리 어른께서 기롱하신 것처럼 세 토막을 내야 할 사람이 될 뿐만이 아닙니다. 비록 그러할지라도 이제 만약 우리 어른이 빨리 편지를 보내 오진영과 절교한다고 표명한다면, 이기환이 감히 다시는 청하지 못할 것이니, 어버이를 섬기는 나의 효를 다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이기환이 악에 빠지는 것을 구하는 어짊도 행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日前投書, 表絶陰震之喩, 近已實行否? 蓋討震之役, 吾丈實主之, 絶固久矣, 更不須言。 但前有檢禍時一書, 新都會一面後, 有玄洞一飯之饋, 故彼得以藉言曰: "靜齋與吾已和。" 前之書面, 固爲鑄錯。 後之饋飯, 雖出倉卒, 失管不嚴則有之, 所以來彼近似之言也。 雖吾丈先誣之痛, 貫徹幽明, 絶彼之心, 堅如金石, 孰肯舍其跡而諒其情乎? 若於華院始祭之日, 倡論曰: "春秋之法, 治亂賊者, 先治其黨, 凡爲震黨者, 勿入祭庭。" 名正言順, 大義昭著, 孰敢異論乎? 使彼聞之, 自應膽落, 不復敢藉言, 衆人觀之, 亦知幷絶其黨, 而自不煩投書。 惜乎, 其未也! 創院人之論曰: "除震一人外, 其黨皆可與同, 是爲殱厥渠魁, 脅從罔治之義。" 噫, 此何見也? 謂曹操爲渠魁而誅之, 彧群輩爲脅從而罔治, 是果成說乎? 凡助成認誣, 同改師稿者, 皆與震一體人。 若但除當人, 而與其一體, 是所除一震, 而所同者衆震, 震則不動聲色, 而坐定全局矣。 未知爲此論者, 實昧義而然歟? 抑知其非義, 而不勝邪私之發歟? 從而至於欲致書陰魁之說, 出於愼李之口, 而詢及吾丈, 則又知除一人之云, 初非眞心。 夫以忘師附賊之言, 敢嘗試於先師親子, 而無忌憚者, 豈非以見其斥震之不嚴而乃爾乎? 吾丈於此, 正可以自反也。 在李則以前日倡討之人, 忽然改頭, 欲降于震, 則其所謂有先師則無震泳, 有震泳則無先師等, 許多嚴正文字, 將何以區處? 自以其文自勘其罪, 自不得容其身, 不但如吾丈所譏, 爲三截人而已也。 雖然今若吾丈亟投書而表絶震, 則李不敢復請。 非惟盡吾事親之孝, 亦爲捄李陷惡之仁, 如何如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