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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狀 公諱毅坤。字士弘。東塢號也。曺氏系昌城。昌城。諱繼龍。尙新羅眞平王公主。封昌城。因籍昌寧。後奕甚。有八平章五小監。直學士諱庶。名揚上國。詩選箕雅。歷三世而諱琛遯于牟陽。子孫家焉。參奉諱仁俊。護軍諱憲。贈樂正諱汝欽。贈參議諱沆。入牟後四世。參議生諱漢明贈參判無子。子同樞彦徵。季漢翊生也。號三吾。蓋曰昆季三人。卽吾一身也。於公五世。高祖諱守亮。曾祖諱永華。祖諱啓聖考諱炫瑋。皆篤厚克家。妣竹山安氏。光暎其考。有閨範以純祖壬辰五月壬子。生公于儉巖第。端潔淸粹。衆中遊嬉。長老相謂曰。羣兒石也。石也玉也。石公小字。幼有至性。親側怡愉。便身畢給。飯進突燃。不委於人。嘗天寒風猛。突燃不入。公引被先臥。傍人怪問之。公曰。衾褥欲其身溫之。十歲內外。孝奉已如此。十四五文識優長。治功令有藝聲。旣冠。贄謁于吾先子。始至。鞍馬衣冠頗侈。及見先生。衣僅蔽體。廳事前不能旋馬。凝塵滿室。坐如泥塑。欿然自失曰用心於內。故如此。歸則舍馬。服儉而至。凝定近裏。大非前日人。起居畢。退入弟子列。灑掃謹。晨昏起居。一如事親。先子晩年。多居蕭寺靜僻。公常從之。有公在傍。則家人不以離違爲難也。先生亦曰。士弘孝於親。故事我如此。以厲家少後生。客至將命。客退講質。晨夕孜孜。不得不措。故聞諸子所未聞。先生訓誨談古。凡看書會心語句。皆有箚記曰。聰明不如鈍筆。積成卷帙。宇萬嘗刪去繁冗。以遺其家巾衍。公見義之精深。析理之分明。淸淡攻苦。博雅微密。皆載此卷。而其剛毅正大。諄謹和厚之體。亦得以傍覰矣。親癠憂形於色。行不能正履。藥餌煎粥。厠牏澣濯。必躬親之。或至四五朔。不交睫。丁憂。哀毁幾絶。水漿不入口。宇萬以糜粥進曰。君子毁不滅性。公曰。余過矣。始數嚥焉。三年不脫絰帶。不御酒肉。嘗偕公宿峽店。食有魚而蔬菜於公。余奇其事。聞其故。答曰。見其欒欒。知其不肉矣。哀慕積中。孚于人有如此者。服闋。望朔必上冢。忌日齋素。如見所爲齋。庶弟二。喫着與同。盡其友道。推以至於族戚鄕黨。內外婢僕。恩誼備洽。疎遠輸款。强暴致恭。所居峽俗。幾幾乎化醇矣。丙子冬。侍先生于澹對軒。夜間先生起歌夢詞。公曰。厭世之意。發於宵歌。先生殆將病矣。趨而入。先生曰。子來何遲。疇昔之夜。夢得歌謠。此吾命詞。足成一闋。子其識之。公出而悲痛曰。哲人其萎。吾將安放。己卯先生易簀。公若喪父。殯殮葬祭。誠信兩摯。著詞述哀。操文述行。心喪三年。治任而歸。卜築東岡。不求聞達。簞瓢自樂。同門推先進。後生學者欲聞先生之道者。求之於公。庠舍不能容。而公推明先生之道。庸能使西河之民不疑於夫子。雖在草野。不忘憂國。所著止盜論。槪見其施措。嘗邪說大熾。公以扶正爲己任。言議所及。及公門者。皆潔淨自守。而公居舊宅。獨超然於風埃。非公所存之正大。烏能使匪類知戢乎身後也。家淸貧。菲衣惡食。人所不堪。而不以屑意。凡日用什物。取其完樸曰。此吾雅好。才涉奇玩。不經於目。見人好學。親愛之無己。其疎外者。必鄕里之不恒子弟也。以故門無雜賓。所往訪皆同門宿德。同志友生。相與諷詠於山深林密之間風淸月白之辰。不知老之將至。而世間芬華爵祿。不入於心。故鄕人每以公應剡薦。致書尼之。邑宰聞公名相邀。引疾不見。此其志行大槪。歲壬辰。是公回甲。往參先生忌祀。因與同門友生。守歲於先生古宅。因寢疾數日。病已不可爲矣。公怡然執余手曰。吾死於先生之宅幸矣。精神冞厲。扶坐談古昔無遺忘。沈昏譫讏。不越乎經傳史家。時或呼余曰。吾心神炯若燈火。凡少時所得。老而忘失者。目前若貫珠然。少日有此成就。定不如今落下。子錫休。孫悳承。得病報而至。堅請舁還。公曰。以吾則死此無傷。以汝輩則理宜舁還。任汝也。旣歸疾益篤。婦人出成公志也。諸生請賜言。公曰。吾何言。堯舜之道。孝悌而已。夫子之道。忠恕而已。命錫休曰。斂用時服。有無稱家。無以重吾累也。進藥不飮曰。死生有命。藥不能延吾生。命悳承正枕而臥。從容而逝。乃癸巳正月二十二日也。嗚呼。先子及門先進。零落將盡。後輩之仰於公者。巋然如靈光。而遽棄後學。痛惜無及。及門加麻。亦若而人。以是年三月十五日。克葬于長城北一面金良洞先塋負壬原。配光山金氏考文珣。後公一年均。一男卽錫休。一女適高興柳允錫。錫休一男卽悳承。三女長適河東鄭淳榮。次幼。柳壻男濟學。餘幼。嗚呼。公早得依歸。門路得正。以淸明雅粹之質。加勤敏精實之工。不爲富貴所移。不爲貧賤所撓。篤學力行。淸修苦節。先師許公爲君子。後進推公爲長德。看書不務乎涉獵。而必求爲實得。爲文不尙乎華藻。而僅足於辭達。竟日端拱。未嘗見歌側。待朝疾書。亦不忘妙契。几案整勅。以至果木成列。堂室灑掃。亦須微塵不起。夙興夜寐。雅言以厲。後生妻孥混處。據禮以戒少輩。常曰。入於出處。未得其當。則雖有細行。不足論也。士於毁譽以動其心。則雖有操守。不能堅也。是以鄕人有言曰。入公之室。接公之言。承公之顔。則放逸之心。偸惰之氣。自不敢萌。可見公色辭之感於人也。公自及吾先子門。於吾伯仲莫逆。宇萬以故人稚弟。忘年而從逐焉。公言行細微。罔有不知。而以不得安且成三字受托。今二載而未及筆焉。顧不可以苟簡塞責。而時事罔極。妄進丐章。嶺海斧鉞。在分儻來。恐不得自力於狀行。以負幽明。姑擧其梗槪。以竢知公者增刪焉。歲丙申三陽月。幸州奇宇萬謹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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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感 吾嘗觀古老。老大不勝悲。白首而今日。靑陽已幾時。死生無足惜。志事重違期。嗟我少年子。莫云歲月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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偶吟 至哉天地化。萬古無停止。一氣常推移。四時自代起。太和縱可觀。神妙莫之揣。聲臭俱泯然。孰爲主張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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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次荷谷韻 吾看荷谷老。農圃又兼士。處世優遊爲。棲心淡泊以。卷舒一院林。領略百家史。晩節收來奇。自餘無所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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偶吟 天地妙凝化。物中首出人。旣生一箇人。天地備吾身。笑亦天之笑。嚬亦天之嚬。動靜與進退。自然利屈伸。上下同流行。爲徒於鬼神。卓爾千仞壁。坱然萬物春。道固本如是。勉哉此理循。鑿智良可哀。自絶作頑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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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李心齋 伏承下誨。提喩尤切。啓發益深。益蒙愛人無己之仁。不知攸達。伏惟日者。體道起居候。神明攸衛。一向康健。伏溯鑽仰。無任下忱。小生之牽引疾病。粧點雕飾。不覺其退托。而實歸於退托。苟非先生丁寧反復開示之切。幾枉過了此一生矣。大抵爲學。只是分別一箇是非。是則從之。非則去之。當日下工而已。質之美否。病之有無。事之難易。時之夷險。初不當論也。若或歸咎於此等處。是乃退托。而不肯用力者也。程子曰。善學者臨死生。而色不變。疾病慘慽。而心不動。張子曰。貧賤憂戚。庸玉汝於成也。小生之今日。正是用工好處。而反不堪其憂。則其用工之膚淺。操術之不正。爲何如哉。此小生之所以口不絶向學之言。足不到進學之地也。曾聖之易簀而終。失子之正冠而卒。一息尙存。不敢少懈。志乎得正而已。何嘗有一毫憂患病之心哉。伏讀下喩。不勝翻然驚悚。陽氣所到。金石亦透。誠意所孚。頑陋感發。伏幸孰大焉。小生雖不敏。請不敢復自托於疾病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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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경채환에게 보냄 與朴受卿彩煥 ○癸卯 계묘년(1903) 배우는 자가 스승에게 전수받아 용처로 삼는 것은 많은 것에 있지 않고 다만 스스로 떠맡아서 한두 글자를 얻어 자신의 밑천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이 때문에 원성(元城 유안세((劉安世))은 온공(溫恭 사마광(司馬光))에게 '성(誠)' 한 글자를 받아서 종신토록 행하였고15), 중거(仲車 서적(徐積))는 안정(安定 호원(胡瑗))에게 '직(直)' 한 글자를 받아서 평생토록 사용하였습니다.16) 아우는 형이 간옹에게 전수받은 '용(勇)' 자도 이와 같다고 여깁니다.대저 더디고 유약한 것은 배우는 자의 병통이니, 다만 '용(勇)' 한 글자야말로 귀신이 전수한 한 알의 영단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용(勇)과 불용(不勇)은 이 학문의 성패를 가를 기틀입니다. "스스로 힘써서 쉬지 않는다."17)는 것도 다만 용이며, "죽은 이후에 그친다."18)도 다만 용입니다. 그리고 안자(顔子)가 "순(舜)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19)라고 하고, 자로(子路)가 "듣고서 행하지 못함이 있으면 다시 들을 것을 두려워했다."20)라고 한 것도 모두 능히 용을 실천하여 성인도 되고 현인도 된 것입니다. "한 삼태기가 부족하여 산을 이루지 못하고 그치었다."21)는 것과 "싹은 났으나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꽃은 피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한 경우도 있다."22)는 것은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염구(冉求)의 자획(自畫)23)과 재여(宰予)의 주침(晝寢)24)도 결국에는 또한 용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에 불과합니다. 간옹이 형에게 '용'을 말씀해 주신 것은 그 뜻이 어찌 얕은 것이겠습니까. 천만 스스로 힘을 써서 종신토록 수용하여 쓴다면 또한 원성(元城)과 중거(仲車)와 같게 될 것입니다. 형이 스스로 용기가 없다고 말씀한 것은 비록 겸양에서 나온 것이지만 제가 보기에 한 가지 일에 근사한 점이 있는 것 같아서 외람되게 번거로이 떠들었습니다. 형은 유념해 주기 바랍니다.대저 사람이 상지(上知)가 아니면 스승의 가르침을 기다리지 않고 이룬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만법의 근원입니다. 천하에 지극히 귀한 것은 도이며 지극히 높은 것은 덕인데, 스승의 강수(講授)로 말미암아 귀하고도 높은 것을 얻으니 은혜와 의리가 깊고도 무거움은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옛날부터 성현마다 이 일을 조기에 정하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안자(顔子)가 공자를 따라 배운 것도 그 나이가 14세였고, 자하(子夏)가 진(陳)나라와 채(蔡)나라 사이에서 공자를 따른 것도 그 나이가 18세였으며, 이천(伊川)은 15세에 염계(濂溪)에게 배웠고, 회옹(晦翁)은 24세에 연평(延平)을 뵈었습니다. 이제 형이 간옹을 뵌 것은 이상의 여러 성현과 비교해 볼 때 조금 늦다고 말할 수 있는데도, 오히려 굳은 마음으로 스승과 제자의 분수를 정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용기가 없는 것과 근사한 점이 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근래에 제가 스승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박모(朴某)는 순실하여 함께 할만하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말은 참으로 듣기가 쉽지 않고 그 뜻 또한 의미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현의 시대와 멀고 인물도 없어서 학술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습니다. 사장(詞章)을 추구하는 속학(俗學)의 무리야 진실로 물을 것이 없으나, 도학(道學)을 한다 말하면서 서로 전수한 종지를 위반하고 별도로 자신의 법문을 세워서 의관의 제도를 무너뜨리고 심성의 나뉨을 혼란시키는 자들이 또한 많으니, 온 나라를 둘러보아도 어디에 발길을 두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길이 한번 어긋나면 비록 허다한 심력을 모두 쏟고 수많은 말로 꾸민다 하더라도, 끝내는 성학의 참뜻과는 향기로운 풀과 누린내 풀처럼 서로 반대됩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마땅히 신중히 살펴서 추향을 결정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받들어 언급하였습니다. 잘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學者之所受於師而爲用者,不在於多,只在自家擔夯,得一兩字做家計。是以元城受一誠字於溫公,爲終身之行; 仲車受一直字於安定,作一生之用。弟竊以爲兄之所受於艮翁之勇字,亦猶是也。夫遲回懦弱,學者之通病,而只是一箇勇字,可謂神傳鬼授之一粒靈丹也。故勇與不勇,此學成敗之機。"自強不息",亦只是勇; "死而後已",亦只是勇。至於顏子之"舜何人,余何人",子路之"有聞未行,唯恐有聞",亦皆能其勇而爲聖爲賢也。若乃"未成一簣而止"者與"苗而不秀,秀而不實"者,勇不足故也。冉求之"自畫",宰予之"畫寢",究亦不過無勇之致。艮翁之語兄以勇,其意豈淺淺也哉? 千萬自力,做畢生受用之需,亦如元城、仲車也。兄自謂無勇,雖出於撝謙,然以弟觀之,似有一事近似者,猥此煩聒,願兄留心焉。夫人非上知,未有不待師教而成者。故師生者,萬法之源也。天下至貴者道,至尊者德,乃由其講授,得其貴且尊者有之,其恩義深重,顧何如哉? 故從古聖賢,未有不早定此事者。顏子之從孔子學也,時年十四; 子夏之從孔子於陳、蔡也,時年十八; 伊川十五而學濂溪; 晦翁二十四而見延平。今兄之見艮翁,視以上諸聖賢,可謂差晚,而猶不決意以定師生之分。故曰有一事近似於無勇也。頃承師教云: '朴某醇實,可與有爲。' 誠不易得此,其志亦有在也。世遠人亡,學術多岐。俗學詞章之輩,固無足問,號爲道學,而繆戾相傳宗旨,別立自家法門,顚倒衣冠之儀,乖亂心性之分者亦多,顧瞻宇內,罔知投蹤。路陌一差,雖費盡得許多心力,粧撰得許多辭說,終與聖學眞趣,若薫蕕之相反矣。此吾儕所當審愼而趨向者,故奉及焉,幸有以諒之. 원성(元城)은……행하였고 유안세가 사마광에게 '마음을 다하고 몸을 닦는 요체로서 죽을 때까지 행할 만한 것'이 무엇인지 묻자, 사마광이 대답하기를 "그것은 성(誠)일 것이다." 하였다. 이에 다시 유안세가 "그것을 행하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합니까?"라고 물으니, 사마광이 대답하기를,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하였다. 《소학집주(小學集註) 권6 〈선행(善行)〉 유안세는 강직한 성품으로 직간을 하여, 전상호(殿上虎)라는 별명을 얻었다. 중거(仲車)는……사용하셨습니다 서적이 스승인 호원(胡瑗)을 뵙고 나올 때에 머리의 모양이 조금 기울었는데, 호원이 갑자기 큰소리로 "머리를 곧게 세워라.[頭容直]"라고 하였다. 서적은 이 말을 듣고 머리를 곧게 세워야 할 뿐만이 아니라 마음도 곧아야 한다고 스스로 깨닫고, 이후로 부정한 마음을 갖지 않았다고 한다. 《소학집주(小學集註) 권6 〈선행(善行)〉 스스로……않는다 《주역》 건괘(乾卦) 상전(象傳)에 "하늘의 운행이 강건하니 군자가 이를 보고서 스스로 힘쓰며 쉬지 않는다.[天行健 君子以 自彊不息]"라고 하였다. 죽은……그친다 《논어(論語)》 〈태백(泰伯)〉에 보이는데,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선비는 도량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되니 책임이 무겁고 길이 멀기 때문이다. 인(仁)으로 자기의 책임을 삼으니 또한 막중하지 않은가. 죽은 뒤에야 끝나는 것이니 또한 멀지 않은가.[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라고 하였다. 순(舜)은……사람인가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보이는데, 안연(顔淵)이 말하기를 "순 임금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순 임금이 되려고 노력하는 자는 또한 순 임금같이 될 것이다.(舜何人也 予何人也 有爲者亦若是)"라고 하였다. 자로(子路)는……두려워했다 이 구절은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에 보인다. 본래는 "자로는 가르침을 듣고 그 가르침을 미처 실천하지 못했으면 유독 다른 가르침을 듣기 두려워했다.[子路有聞, 未之能行, 唯恐有聞]"이다. 한 삼태기가……그치었다 《논어(論語)》 〈자한(子罕)〉에 보이는데, "비유하면 산을 만드는 데에 한 삼태기를 더하지 않고서 그치는 것도 내가 그치는 것과 같으며, 비유하면 평지에 한 삼태기를 붓더라도 나아감은 내가 나아가는 것과 같다.[譬如爲山, 未成一簣, 止, 吾止也; 譬如平地, 雖覆一簣, 進, 吾往也]"라고 하였다. 싹은……있다 《논어(論語)》 〈자한(子罕)〉에 보이는데, "싹이 났으나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꽃은 피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苗而不秀者, 有矣夫; 秀而不實者, 有矣夫.]"라고 하였다. 이는 원래 학문을 하면서 완성에 이르지 못함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의미를 전용하여 사용하였다. 염구(冉求)의 자획(自畫) 《논어(論語)》 〈옹야장(雍也)〉에 보인다. 염구가 "선생님의 도를 좋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힘이 부족합니다.[非不悅子之道, 力不足也.]"라고 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힘이 부족한 자는 중도에 그만둔다. 지금 너는 스스로 한계를 그은 것이다.[力不足者, 中道而廢, 今女畫]"라고 하였다. 재여(宰予)의 주침(晝寢)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에 보인다. 재여가 낮잠을 자자, 공자가 말하기를 '썩은 나무는 아로새길 수 없고 분토의 담장은 손질할 수 없다.[朽木不可雕也, 糞土之墻不可杇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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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명래명석에게 답함 答全明來明錫 ○癸卯 계묘년(1903) "'학(學)' 자는 지(知)의 측면이 많고, '습(習)' 자는 행(行)의 측면이 많다."고 하셨는데, 제 생각에는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논어집주(論語集註)》30)에 '학(學)' 자를 해석하기를 "선을 밝혀서 그 처음을 회복한다."고 했습니다. "선을 밝힌다."는 것은 실로 치지(致知)의 공부이며, "처음을 회복한다."는 것은 역행(力行)을 통해 이르는 것이니, '지'와 '행' 두 뜻이 '학' 한 글자에 갖추어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습(習)' 자를 해석하기를 "배우기를 그치지 않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습' 또한 '학'의 일이며 더하여 그치지 않는 뜻이 있으니, 이것 또한 지와 행이 모두 갖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學知邊多,習行邊多,鄙意恐不然。《集註》釋"學"字曰: "明善而復其初。" 明善固致知工夫,復初是力行之所至也,豈非知行二義均備於學之一字乎? 又釋"習"字曰: "學之不已。" 則習亦學之事,而加有不已之義,此又非知行均備者乎? 논어집주(論語集註) 〈학이(學而)〉편 제 1장의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않겠는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는 대목의 집주(集註)를 가리킨는데, "배운다는 말은 본받는 것이다. 사람의 본성이 모두 착하되 깨달음이 먼저하고 뒤에 함이 있으니, 뒤에 깨달은 사람은 반드시 먼저 깨달은 사람의 하였던 바를 본받아야만 선을 밝혀서 그 처음을 회복할 수가 있다. 습은 새가 자주 낢이니, 배우기를 그만두지 아니함을 새가 자주 날듯이 하는 것이다.[學之爲言. 效也. 人性皆善, 而覺有先後, 後覺者必效先覺之所爲, 乃可以明善而復其初也. 習, 鳥數飛也, 學之不已, 如鳥數飛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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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복삼규원에게 보냄 與邊復三圭源 ○乙丑 을축년(1925) 제가 힘을 헤아리지 않고 스승을 무함한 적을 성토하는데 참여했다가 큰 재앙을 만나 생사를 예측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형이 쇠한 몸을 이끌고 먼 길을 두 번이나 찾아와 돌보아주셨으니, 뜻과 의리가 오늘날 서로 같지 않았다면 어찌 이처럼 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호라! 십시(十侍)4)와 백마(白馬)5)의 화(禍)는 포악하긴 포악하였지만 환관은 조신(朝臣)과 다른 부류이고, 유자광(柳子光)과 이극돈(李克墩)6), 남곤(南袞)과 심정(沈貞)7)의 해독은 참혹하긴 참혹하였지만 오히려 본조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고금 천하에 어찌 오진영(吳震泳)과 같이 바깥 오랑캐 왜인의 손을 빌려 동문을 죽인 경우가 있었겠습니까. 이번에 저는 또한 무사하였으나 통문에 참가한 여러 사람들은 형세 상 여러 번 왜경에게 불려가 심문을 당한 뒤에나 그칠 것이니, 형 또한 어찌 반드시 홀로 면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면할 수 없다면 장황하게 얘기하지 마시고, "나는 오진영이 선사를 무함하고 가르침을 어긴 것을 성토하였다. 사문의 난적이라 한 것은 오진영을 가리킨 것이지 강태걸(姜泰杰)을 가리킨 것이 아니니 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는다. 또 우리 선사의 유서에 인가를 받아 간행하는 것을 금한 원고는 처음부터 다른 사람에 의해 경영될 물건이 아니었으니 업무방해에 해당하지 않는다."라고 강력하게 말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일이 사실에 부합하고 의리가 꺾이지 않을 것입니다. 弟不自量力,參討誣師之賊,遭罹大禍,死生莫測。乃兄遠程曳衰,再度見顧,非志義今日之同,烏能如此? 鳴呼! 十侍、白馬之禍,烈則烈矣,閹宦之於朝士異類也; 光、墩、袞、貞之毒,慘則慘矣,猶爲起事於本朝也。古今天下,安有假手外夷戕殺同門如震賊者乎? 今番弟行,亦且無事。然參通諸人,勢將累呼究問而後已,兄亦安能必其獨免? 如不得免,則除却支辭蔓語,但力言"吾討吳震泳誣師違訓。師門悖賊。是指吳非指姜,名譽損害非所當。且吾先師遺書禁認之稿,初不當爲人營業物,則業務妨害,亦不當也"云,則事得實而義不屈矣。 십시(十侍) 십상시(十常侍)의 약어이다. 후한 영제(後漢靈帝) 때 권세를 부리며 부귀영화를 누렸던 장양(張讓)ㆍ조충(趙忠) 등 12인의 환관을 말하는데, 그 명단과 실상이 《후한서(後漢書)》 권78 〈환자열전(宦者列傳) 장양(張讓)〉에 자세히 나온다. 백마(白馬) 당(唐)나라 천우 2년(905), 마지막 황제인 소선제(昭宣帝) 때 권신(權臣) 주온(朱溫)이 배추(裵樞) 등 조정의 선비 30여 명을 백마역에 모아서 하루 저녁에 다 죽이고 그 시체를 황하(黃河)에 던져 넣은 사건을 말한다.《당서(唐書)》권240〈배추열전(裵樞列傳)〉단, 문맥으로 볼 때 이는 백마역 사건이 아니고, 동한(東漢) 말 당고지화(黨錮之禍)를 가리킨 듯한데, 우선 원문대로 번역했음을 밝혀둔다. 참고로 당고지화는 환제(桓帝), 영제(靈帝) 때 환관들이 정권을 장악하여 국사를 마음대로 하자 사대부인 이응(李膺), 진번(陳蕃) 등이 태학생들과 연대하여 환관들을 맹렬히 탄핵하였는데, 이로 인해 환관들이 도리어 이들을 종신 금고(禁錮)에 처하여 벼슬길을 막아 버린 사건이다. 《후한서(後漢書)》 권67 〈당고열전(黨錮列傳)〉 유자광(柳子光)과 이극돈(李克墩) 연산군(燕山君) 때의 훈구파 수장들이다. 신진 사림파와 반목하여 김일손(金馹孫) 등을 탄핵해서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켰다. 남곤(南袞)과 심정(沈貞) 이들은 중종(中宗) 때의 훈구 재상(勳舊宰相)으로 신진 사류(新進士類)인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등을 일망타진한 장본인들로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주동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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卷之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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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族人羽瑞【尹承◎丙戌】 居人不謹橋梁。致使左右屐齒蹉失。狼貝可想。得無所觸傷耶。是罪是罪。然君之存此橋者。每過此。常自提撕警策。不害爲末路竿頭之資。一朝見撤。可嘆可呵。況此橋可撤。而其奈世間許多獨木何。雖尋常行路。莫不逢坦而弛。遇險而戒。常情固然。可不懼哉。惟願左右常使一條梁。掛存肚裏。逢坦不忘險。則眼前許多獨木。可作平坦地。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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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宗人都事【斗煥◎庚寅】 京鄕涯角。每恨鱗羽之不相及。料襮承惠狀。旣感且榮。況奉閱續牒。源流瞭然。足以講百世誼。何慰如之。書後月七改歲一易。更請花煦侍中仕學。對時寗謐。遠外至祝。寅晡靡懈。就譜事。今而後可謂竣役。吾宗之光。若非尊宗誠力所到。豈能了此鉅事也。但寒門凋殘。無以補涓埃。殊甚可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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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柳甥【允錫◎壬午】 向見時。審非完人樣。意謂病柢尙未祛耶。抑亦居常不能謹疾而然耶。送後馳慮。無所不到。日前愼疋來思。聞省奉安衛。且與伯明。於蜂山書室同處過冬云。何慰如之。今則可謂得友。其講磨切磋之益。豈可量乎。甚善甚善。然至於立心之眞僞。用工之虛實。皆自得之。有非傍人所可依賴提飭。奈何。吾亦以虛僞二字。誤了一生。宜其所得之淺略自取。誰尤。所以以已之所經歷者及之。君以我爲前車之鑑。立心用工。必從眞實地做去。母或浪費光陰也。翁又作月松行。似費三兩月。奉面無由。書此以寄。惟期還後刮目。不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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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金莘湖【祿休◎丙戌】 前月淨窓夜話。歸後尙覺心下淸凉。何啻讀十年書。更伏問辰下。道體益腴。德庇咸休。旣溯倂祝。形家禍福之說。愚於平日覰得其一斑矣。然擧世滔滔。上自高明之士。下至至愚至賤。無人不惑於此。則雖聖賢復起。家諭而戶說。亦未保其信得及。所以含口結舌。不敢對人說道者。已十數年所。豈料今日賤見。偶與尊意謬會。脫然如大寐之得醒。可謂德隣。而又有一惑焉。世之才識意見。明達穎悟。皆百勝於我者。終不能回頭於此。則我之所謂破惑者。亦安知非大惑大愚耶。噫。先師嘗謂天理存然後地理在。又曰。禍福之說。吾未知也。且或對人語。未嘗不到此邊。而但論風水環合。山勢向背而已。何嘗於禍福邊說到。而近日形家者流。妄相忖度。以爲先師亦惑於此。豈勝嘆惜也。從今以後。所謂性命係於珮鐵者之手段。而非天之所命也。可哀也已。臨楮信筆。率爾寫情。幸勿過人眼。徒取譏笑。而嘿然復守吾太玄。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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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奇松沙【宇萬◎乙亥】 前月緣他歸屐。悤悤不能更留一二日。叩得其緖餘。至今惘然。如有所失者。有非他時比。且念左右於毅。久不相見。則輒悵然。旣見輒復叩余以善言。提余以忠告。其喜聞也深矣。甚盛甚盛。然自顧倥侗。終無以一辭貢愚。愧恧復何如哉。今强以洗瘢吹毫。願欲取捨於左右。恐未知如何。每思尊兄平日。冠不去塵。巾不對鏡。衣垢而不濯。榻蕪而不帚。處身極質朴。奉身務儉約。吾愛之重之。欲效之不能。盖餘十有年。其與習俗浮靡。專尙藻飾者。相去亦霄壤矣。然自聖人以下。處身律已之道。非但存養於內。而檢束於外者。亦有所兼致。而不可廢一也。故朱文公所訓。正其衣冠。尊其瞻視。又云冠巾衣服。常令潔淨整齊等語。豈欺我哉。此後學之所以可法可戒。而所不可廢也。擧槪論之。則儉也飾也。趣向雖不同。善惡固有間。其不得於中行則一也。是以古之君子。內而德修。外而整齊。故其威儀可嚴。氣象可度。而但無所事於雕飾冶容而已。且名敎內。自有樂地。何必塵其冠而蓬其首。衣裳垢而坐榻蕪然後。可以爲實地上做工夫耶。冠塵則彈。衣垢則澣。正如渴飮飢食。夏葛冬裘。聖賢之所不廢。而日用之所當行者也。況尊兄法家士。四方於尊兄乎。觀禮。盖爲愼諸。幸勿以芻蕘爲陋。更加留意焉。則受賜多矣。伏惟春日紓暢。丈席氣體。燕申康旺。重侍經履。無或愆損。旣慕且祝。孟度從行。俱得安健。課業亦能程工而不渝耶。其氣狀往往在心目間可呵。弟月初來客于此。書室如僧舍。卷帙溢眼。此所謂貧兒暴富。但淟涊才薄。貪饕意生。恐終無有切已之得也。楸行在那間耶。每日氣淸佳。企待之情。不能無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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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재 소장에게 답함 答悅齋蘇丈 丁丑 정축년(1937) 일전에 나아가 찾아뵌 것은 2년의 계획 끝에 나온 것인데, 마침 밖으로 외출을 하셔서 가르침을 받들지 못하였으므로 매우 서운하였습니다. 그래도 아드님을 만났는데, 대접이 정성스럽고 응대가 명쾌하여 사람 마음을 대단히 흔쾌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어른과 닮은 사람을 보았다고 말할 만하여 이로써 위로를 삼았습니다. 이전에 얼핏 아드님께서 변형57)을 면하지 못했다는 소문을 듣고, 가정의 엄격한 교훈으로 이에는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오늘날 젊은 사람 중에는 간혹 그런 경우가 있기 때문에 마음으로는 비록 믿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와전임을 통렬히 변론하지는 못했는데, 오늘 이후에야 전통을 지닌 오래된 집안의 의방(義方)이 자연 다른 바가 있다는 것을 더욱 알았습니다. 약관의 나이에 뜻이 고상한 것도 쉽게 얻을 수 없으니, 더욱 위로가 되었습니다.돌아와서 얼마 안 되어 보내주신 편지를 받고, 만남이 어긋나서 매우 슬프고 한스러워 하셨다는 것을 자세히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간의 자세한 동정을 물으시고 아울러 더욱 편안히 왕래하라는 뜻을 보여주셨으니, 아, 저를 깊이 사랑하는 것이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젊은 사람이 미처 겨를을 내지 못했는데 높으신 분이 먼저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감격하는 마음은 비록 깊으나 송구한 마음 또한 지극합니다.시생은 몸에는 누더기 옷을 입고 밖으로는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지경58)이니, 이러한 때에 이러한 모습은 족히 받들어 아뢸 것이 없습니다. 오직 이 몸과 네 명의 아들, 세 명의 동생, 한 명의 조카인 아홉 식구가 옛 의관을 현재도 보존하여 바꾸지 않고 있으니, 나라 안을 두루 돌아보더라도 아마 우리와 짝할 사람은 적을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이러한 모양 또한 특이한 일이니, 이것이 영광이 될지 욕이 될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또 논자들이 어떻게 보느냐를 막론하고 다만 앞으로는 잘 끝맺기가 어려운 것을 근심할 뿐입니다.가만히 생각건대, 우리 어른은 올해 나이가 팔순에 다가섰습니다. 사람은 말년에 큰일을 하기 마련이고 또한 세상의 혼란함이 이러할 때에는 젊은이가 죽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시생과 우리 어른은 살아서는 의리를 함께 하고 죽어서는 함께 열전에 오르는 처지59)라고 말할 만한데, 한 번 만나서 문후를 하고는 걸핏하면 몇 년이 지나니, 지난날을 통해서 장래를 추론하건대 앞날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다소의 문자 의리를 모두 강론하여 정하지 못했는데 이에 대해 어찌 영원한 후세에 다소의 유감이 없겠습니까? 삼가 우리 어른께서도 때때로 생각이 이것에 미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날 나아가 은혜를 받은 것도 사실은 이것에 있었는데 이미 이루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하교(下教)하신 대로 가을 사이에 정산에서 찾아뵈었어야 했으나 이 또한 그러지를 못하였습니다. 이에 어쩔 수 없이 다시 찾아뵐 계획을 도모할 뿐입니다.지난번에 아드님이 근래에 그린 존영(尊影)을 보여 주었는데, 아주 비슷한 것을 보니 단지 칠푼[七分]60)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초상을 정립한 모습으로도 단좌한 모습으로도 그리지 않고, 의자에 걸터앉은 모습으로 그린 것은 아마도 온당치 않은 것 같습니다. 중세에 중국 사람들은 앉을 때 반드시 의자를 사용하였으니, 이미 의자에 앉은 이상 어쩔 수 없이 걸터앉게 됩니다. 그러나 주자가 의자를 사용하는 송나라 때에 살면서도 그 초상은 오히려 의자도 쓰지 않고 걸터앉지도 않았습니다. 하물며 우리나라는 본디 의자를 사용하지 않아서 의자의 사용이 근래의 사람들에게나 있는 데이겠습니까. 의자에 앉는 것은 우리나라 풍속에 없는 것이고, 걸터앉는 것은 또한 유자들이 잠시 동안도 불안해하던 것입니다. 이제 엄정한 유자의 복장으로 의자에 걸터앉은 초상을 후세에 전한다면 어찌 사실과 어긋나서 누를 끼침이 되지 않겠습니까? 또 영정 끝에 그린 사람을 기록한 것이 성명으로 하지 않고 별호로 했으니, 이것이 어찌 젊은 사람이 어른을 공경하는 도리겠습니까? 일찍이 선사의 영정에 채용신(蔡龍臣)이 석지(石芝)라는 호를 사용한 것을 보고 늘 마음에 흔쾌하지 않았는데, 이제 또 이것을 보니, 아마도 또한 한 때 화가의 풍습인가 봅니다. 제 견해로는 마땅히 모두 고쳐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日前造拜, 出於兩年經營, 而適值駕外, 未承誨喩, 殊甚缺然。 然得見賢哥, 待遇款洽, 酬酢明爽, 大快人意, 眞可謂見其所似者, 以是爲慰。 前此似聞賢哥不免變形, 想以庭訓之嚴, 不至於此。 然在今日年少, 亦容有之, 故心雖不信, 亦不能痛辨其訛。 今而後益知故家義方, 自有所異。 弱冠志尙, 亦不易得, 尤以爲慰。歸後來幾, 獲拜下狀, 審悉具道交違悵恨之極, 問訊此間動靜之詳, 並示駕益往還之安, 噫, 非愛我之深, 烏能致此? 然少者未遑, 尊者先施, 感雖深矣, 悚亦至矣。侍生, 鶉結於身, 虎食於外, 此時此狀, 無足奉稟者。 惟是身及四子三弟一姪九箇, 舊冠現保無變, 環顧域中, 想少其儔。 此世此樣, 亦是異事, 未知此爲自榮耶自辱耶。 且無論論之者如何, 秪以前頭克終之難爲憂耳。竊念吾丈今年迫八旬, 夫人之晩年, 大有事在, 且世亂如許, 少者之死亡, 亦無日矣。 侍生之於吾丈, 可謂生同義死同傳之地, 而一番靣候, 動輒數歲, 因往推來, 前頭可知。 多少文字義理之未盡講定者, 其何以不有多少遺憾於無竆也乎? 伏想吾丈, 亦時一念, 至於此也。 前日之進惠, 實在此, 而旣不得遂, 則當依下敎, 以秋間拜會凈山, 又不能。 然則不容不更圖進謁計耳。頃得賢哥出示近寫尊影, 見其酷似, 不但七分而已。 但像不以正立, 不以端坐, 以踞坐椅上者, 恐未穩。 中古中國人, 坐必用椅, 旣坐椅, 則不得不踞然。 朱子當有宋用椅之時, 而其像猶不椅不踞。 况於我國之本不用椅, 而椅之用, 乃在近時人乎。 蓋坐椅, 國俗之所無, 踞坐, 又儒者之所斯須不安者。 今以儼然儒服, 踞坐椅上, 傳之後世, 豈不爲爽實而貽累乎? 且幀末之記寫者, 不以姓名而以別號者, 是豈少者敬長之道乎? 曾於先師影幀, 見蔡龍臣用石芝之號, 尋常不快於心, 今又見此, 豈亦一世畵家之風習歟? 淺見恐當并行改正, 未知如何。 변형(變形) 단발령에 의해서 상투를 잘린 모양을 '변형'이라고 한 듯하다.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지경 원문의 '호식(虎食)'은 《장자(莊子)》 〈달생(達生)〉에 나오는 말로, 노나라의 단표(單豹)라는 사람이 은거하여 깨끗하게 살면서 속세의 이끗을 다투지 않았으나 불행히도 굶주린 호랑이를 만나 잡아먹힌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이는 안으로 정신만 수양하고 밖으로 몸의 단련을 소홀히 한 것을 말한다. 살아서는……처지 송나라 때 명신인 범진(范鎭)은 사마광(司馬光)과 우의가 두터웠는데, 사마광에게 "그대와는 살아서 뜻을 함께하고 죽어서 전을 함께할 것이다.〔與子生同志死同傳〕"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치의집전(緇衣集傳)》 권3 〈일류장(壹類章)〉 중국의 기전체(紀傳體) 역사서에서는 성향이 같은 인물을 한 열전(列傳)에 모아 엮기 때문에 한 말로, 이 말은 뜻을 같이 하였다는 의미이다. 칠푼[七分] 초상으로 그 사람의 모습을 잘 표현하였음을 말한다. 정이(程頤)가 《역전(易傳)》을 짓고서 문인들에게 주며 "단지 7분만 말한 것이니, 배우는 사람들은 반드시 다시 스스로 살피고 궁구해야 한다.〔只說得七分 學者更須自體究〕"라고 하였는데, 문인인 장역(張繹)이 그에 대한 제문을 지으면서 그의 말을 인용하여 "선생의 말씀으로 문자에 드러난 것은 7분의 마음이 있고, 단청으로 그려진 것은 7분의 용모가 있다.〔先生有言見於文字者 有七分之心 繪於丹靑者 有七分之儀〕"라고 하였다. 《二程全書 附錄 祭文》 글이나 그림으로는 그 사람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 7분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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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백순준에게 보냄 與崔伯舜 濬 ○甲戌 갑술년(1934) 봄 사이 왕림하여 안부를 물어주신 것은 참으로 저를 멀리하지 않는 성대한 뜻에서 나왔으니 감격스러워 무어라 말씀드려야 할 지를 몰랐습니다. 다만 길이 바빠서 차분히 토론하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작별을 고하게 되었는데, 지금도 한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렇지만 도가 만약 같으면 천 년 전의 사람도 오히려 벗을 삼아 서로 멀다 여기지 않는 반면, 도가 진실로 같지 않으면 아침저녁으로 만난다 하더라도 서로 도모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마땅히 진실한 마음으로 서로 더불어서 도의 같음을 구하는데 급급해야지 이합과 원근에 구질구질할 필요가 없음이 분명합니다. 도의 같음을 구하려면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분변함의 사이에서 강론하여 연마하여 서로 진보시켜야 함이 분명합니다. 우러러 청하건대 그대는 최근에 무슨 책을 읽으며 무슨 의리를 강구하십니까? 널리 묻고 정밀히 살피며 신중히 생각하고 분명히 밝혀서 이른바 도를 구하는 것에 있어서 그만두지 않는 공부와 밝아지고 굳세지는 효과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8) 제가 흠송한 나머지 또 감히 얕고 비루한 소견으로 받들어 묻고 가르침을 청하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최근에 선사의 유고를 읽다가 그 해와 별처럼 밝은 논리와 못을 끊고 쇠를 자를 것 같은 굳건한 의리를 보았는데, 어찌 이리도 분명하면서도 엄격하단 말입니까. 저 김평묵(金平黙)이 제문에 전옹(全翁 임헌회(任憲晦))을 비난하고 폄하하자 선사가 홀로 맞부딪쳐서 그 문장을 배척하고 그 무함함을 변론하셨는데,9) 송골매가 떨치고 일어나서 참새를 쫓듯이 하였고 운무를 헤치고 하늘의 해를 바라듯이 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독 괴이한 것은 당시에 전옹 문하의 여러 제자 중에서 두세 명만을 제외하고는 그를 도와 힘을 보태는 자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내 또 불만을 갖고서 말하는 자도 있었으며 심한 자는 기꺼이 저쪽의 앞잡이가 되어 오히려 이쪽을 헐뜯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겉으로는 스승을 따라 도를 배운다고 하지만 의리에 얻음이 없기 때문에 사사로운 마음이 틈을 타고 일어나, 작게는 혐의를 피하고 크게는 권세를 두려워하여 자기도 모르게 스승을 잊고 적을 도운 것입니다. 그때 만약 선사께서 일만 번 죽을힘을 내어서 물리치지 않았다면 전옹의 도가 어찌 오늘에 전해질 수 있었겠습니까? 적이 이것을 가지고 오늘날 우리 문하의 일을 미루어 살펴보면 이른바 "은나라의 거울이 멀리 있지 않다"10)라는 것입니다.아, 자신의 원고를 인가받아 간행토록 했다는 것의 의리가 없음은 본성을 감추고 세상에 아첨하는 것보다 심하니, '힘을 헤아려 하라.'고 했다거나 '불언지교(不言之敎'라고 한 것은 암암리에 기롱하고 폄하한 것만이 아닙니다.11) 스승을 무함한 죄는 또한 벗을 무함한 죄보다 더욱 중합니다. 그렇다면 오진영의 스승을 무함한 흉악함은 김평묵이 지은 제문의 변고보다도 큰일이고, 또 1500명은 전옹을 따르던 자들보다 많으니, 마땅히 그 죄를 명확하게 정하여 한 명의 적을 일제히 성토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세도가 더욱 낮아지고 의리가 더욱 어두워져, 앞잡이가 되어 도리어 헐뜯는 이씨와 정씨 같은 자가 줄지어 나오고, 마음을 같이하여 서로 돕는 윤씨와 서씨 같은 자는 거의 없으며, 그 일을 주관하는 자도 도학의 명망과 지위가 있는 자가 아니니, 어찌 하겠습니까. 선사께서 당일에 도적을 소탕하고 사문을 안정시킨 일 같음도 진실로 기필할 수 없었거니와 그 패망하여 사멸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 하겠습니다.그런데 이러한 때에 그를 위해서 말을 하는 자가 "그가 비록 죄가 있지만 참으로 스승을 존중하여 한 것이니 용서해야 마땅하고 성토하는 것은 지나치다."라고 하니, 한 사람이 제창함에 백 사람이 화답하여 스스로 공론이라 자처하며 거리낌 없이 저쪽의 세력을 돕고 이쪽의 힘을 어렵게 하니, 아, 너무도 잔인한 마음입니다. 이는 곧 주자가 '도적도 용서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바로 도적 편의 사람이다.'12)라고 한 격이니, 위에서 말한 불만을 갖고서 말을 하는 자에 비할 뿐만이 아닙니다. 이쪽도 저쪽도 아니고 가함도 없고 불가함도 없는 이와 같은 사람들은 또 무엇을 하는 자들입니까? 만약 그가 무함한 것임을 알지 못했다면 이는 밝지 못한 것이고, 그가 무함한 것임을 알았는데도 오히려 침묵했다면 이는 어질지 못한 것입니다. 밝지 못한 잘못은 작으니, 이는 오히려 그가 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니 그래도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어질지 못한 죄는 크니, 이는 오히려 그가 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잡지 않은 것이니 더욱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밝지 못한 자와 어질지 못한 자는 모두 위에서 말한 힘을 내어 돕지 않은 경우이지만, 저 어질지 못한 자는 또한 도적 쪽의 사람일 뿐입니다.대저 전옹 문하에서 이미 그랬던 행적으로 우리 문하에서 의리를 지키는 모습을 헤아려 보면 그 시비와 득실이 어찌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선사께서는 비록 한때에 혐노(嫌怒)를 실컷 받았지만 끝내 대의(大義)를 영원히 펴서 그 광화(光華)가 차서 넘치고 사방에서 전송하고 있습니다. 반면 저 침묵하고 배반하여 스승을 잊고 적을 도운 자들은 비록 한때에 편안함을 차지했지만 더러운 행적이 환히 알려져 영원히 바꿀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먼 훗날에 오늘을 살펴본다면 그 영광과 욕됨이 또한 오늘날에 옛날을 살피는 것과 같을 것임은 더욱 명백하니,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가만히 살펴보니 그대는 성품과 도량이 뛰어나서 진실로 사악한 마음을 가지고 적을 보고도 붙잡지 않는 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문식 또한 뛰어나니 이치를 보는 것이 분명하지 못하여 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자는 아니니, 마땅히 밝게 분변하고 엄하게 성토하여 지금과 후세에 할 말이 있어야 하는데, 아직까지도 조용하여 들리는 말이 없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저 의리가 더욱더 어두워져서 더불어 말할 자가 없기 때문에 저계야(褚季野)의 피리(皮裏)13)를 본받으려 하는 것입니까? 아마도 할 말이 있을 것인데 그 화변이 더욱 심해질 것이라고 하여 할 말을 숨겨서 이전 사람이 했던 것처럼 후세 사람을 기다리는 것입니까? 이 두 가지에 대해서는 모두 할 말이 있습니다. 만약 보통의 시비일 뿐이라면 모두 안 될 것이 없지만 지극히 큰일과 관계되어 죽은 스승을 무함하고 잔약한 명맥을 끊어 끊어버린 것이니, 마땅히 맹자가 말한 불공대천의 원수로 간주하여 끝까지 성토하여 남김 없게 해야 하고 다른 것은 고려할 것도 없습니다.그대는 진실로 선사의 밝은 이치를 강론할 수 있고 선사의 굳건한 의리를 지녀서, 오진영의 무함을 분별하여 물리치기를 선사가 김평묵의 뇌문(誄文)을 배척한 것처럼 할 수 있다면, 그와 같은 평소의 밝은 안목과 뛰어난 학식으로 반드시 조마경(照魔鏡)이 번개처럼 빛나고 파음부(破陰斧)가 우레처럼 울리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선사의 해처럼 찬란하고 옥처럼 고결함이 온전히 드러나고, 우리 군대의 의로운 명성과 올바른 기상이 배로 신장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신중히 생각하고 밝게 분변하여 이른바 도가 같은 자를 구하는 것에 있어서 어찌 가장 크고도 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대는 이를 도모하시기 바랍니다.선사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눈으로 부친과 스승이 무함을 당한 것을 보고도 분변하여 성토할 줄 모르는 자는 칼로 손가락을 잘라도 고통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라고 했고, 또 말씀하시기를 "문인제자로서 다른 사람과 친화를 잃게 되는 작은 혐의를 피하려 하다가 스승을 위해 무함을 변론하는 대의를 잊는다면 스승과 제자의 윤리가 폐해질 것이고, 스승과 제자의 윤리가 폐해지면 삼강(三綱)과 구법(九法)14)이 또한 의지하여 설 곳이 없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교훈을 세 번씩 반복할 때마다 심목(心目)이 송연해지는데 저 스승을 무함하고 스승을 잊은 무리들은 또한 무슨 마음이란 말입니까. 내가 비록 보잘 것 없는 사람이지만 그대의 현명함은 실로 능히 면할 수 있음을 잘 압니다. 모두 헤아려 주시길 바랍니다. 春間枉存,寔出不遐之盛,其爲感荷無容云喻。而行李恖恖,未克穩討,旋卽賦別,至今以爲悵。雖然道若相同,千載尚友未爲遠; 道茍不同,雖朝暮遇不相爲謀矣。然則吾人只當實心相與,汲汲求道之所同,不必屑屑於離合遠近之間明矣。欲求道之所同,不可不講磨相長於學問思辨之間也亦明矣。仰請執事近日所讀者何書、所究者何義? 其於博審愼明以求所謂道者,想有不措之功、明強之效矣。區區欽誦之餘,亦敢以淺陋之見奉質而請教,幸垂察焉。近讀先師遺稿,見其日昭星晳之理、釘斬鐵截之義,何若是明且嚴也! 方嘉金祭文之譏貶全翁也,先師獨當其衝,斥其文而辨其誣,若奮鷹鸇而逐鳥雀,披雲霧而睹天日矣。獨怪夫當時全門諸人,除二三子外,不惟不助之出力,乃復不滿而有言,甚者甘作彼倀而反噬之也。夫如此者何也? 名爲從師學道,而無得於義理,故私邪闖發,小則避嫌 大則畏勢,自不覺忘師而助賊矣。向使先師不出萬死之力以排闢之,全翁之道豈得傳至于今耶? 竊嘗以此推觀於今日吾門之事,所謂殷鑑不遠者也。噫! 認刊己稿之無義,甚於儉德媚世,料量爲之、不言之教之云,非暗譏隱貶,誣師之罪,又重於誣友。然則震誣之凶大於金誄之變,且千五百人多於全翁之從,宜其明定其罪,齊討一賊,易易如也。奈之何世級愈降,義理愈晦,作倀反噬之李、鄭,比肩而接踵,同心協力之尹、徐,絕無而僅有,而主其事者又非有道學名位。如先師當日掃盪寇盜,奠安斯文,固未可必,而其免敗亡滅死者,亦云幸矣。乃於此時,有爲之說者曰: "彼雖有罪,實因尊師而作,宜在所恕,聲討則過。" 一唱百和,自居公論,不憚助彼之勢而艱此之力,鳴乎! 其忍心甚矣。此卽朱子所謂"道賊可恕,便是賊邊人",不啻向者所謂不滿有言者比也。若乃不彼不此,無可無否,這一般人又何爲者也?如不知其爲誣也,則是不明也; 知其爲誣,猶且含黙,則是不仁也。不明之過小,是猶不知其爲賊,猶可說也。不仁之罪大,是猶知其爲賊而故不捉也,更不可說。不明不仁,俱是向者所謂不助之出力者,而其不仁者則是亦賊邊已矣。蓋以全門已然之跡,揆吾門之處義,其是非得失,豈不較然明著乎? 先師雖則飽受嫌怒於一時,終伸大義於百世,光華盈溢,四方傳誦。彼諸人之噤黙違反忘師助賊者,雖則自占便宜於一時,穢辱彰聞,百世莫改。由後視今,其可榮可辱,亦當如今之視昔也更明矣,可不畏哉?竊觀執事性度傑然,固非挾私邪而見賊不捉者,文識亦優,又非見理不明而不知其爲賊者,宜有明辨嚴討 有辭於今與後者,而尚寥寥無聞何也? 以其義理愈晦無可與語者,故欲效褚季野之皮裏歟? 蓋有之矣,而以其禍變益奇 祕之以待後世如前人之爲歟? 此二者俱有說焉。如尋常是非而已,則皆無不可者,關係至大,䧟死師剝殘脉者,則當如孟子不共戴天之讐,討之不遺餘力,其他非所恤也。執事誠能講先師昭晳之理,持先師斬截之義,辨斥震誣,若先師之於金誄,則以若平日之明眼巨擘,必見照魔之鏡燁然如電,破陰之斧轟然如雷,先師之日光玉潔,全軆呈露,吾軍之義聲直氣一倍用張矣。此於吾人愽審眞明以求所謂道之所同者,豈非最大且急者乎? 惟執事圖之。先師嘗有言曰: "目見父師被誣而不知辨討者,刀截而不知痛者。" 又曰: "門人弟子避與人失和之小嫌,而忘爲師辨誣之大義,則師生之倫廢矣; 師生之倫廢,則三網九法亦無所頼而立矣。" 每三復此訓,竦然心目,彼䧟師忘師者流,亦何心哉? 吾雖無似,自謂知足以知執事之賢果能免矣。統希究裁. 널리……생각합니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0장에 "널리 배우며, 자세히 물으며, 신중히 생각하며, 밝게 분변하며, 독실히 행하여야 한다. 배우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배울진댄 능하지 못하거든 놓지 말며, 묻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물을진댄 알지 못하거든 놓지 말며, 생각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생각할진댄 알지 못하거든 놓지 말며, 분변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분변할진댄 분명하지 못하거든 놓지 말며, 행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행할진댄 독실하지 못하거든 놓지 말아야 한다. …… 과연 이 도에 능하면 비록 어리석으나 반드시 밝아지며, 비록 유약하나 반드시 강해진다.[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有弗學, 學之, 弗能弗措也; 有弗問, 問之, 弗知弗措也; 有弗思, 思之, 弗得弗措也, 有弗辨, 辨之, 弗明弗措也; 有弗行, 行之, 弗篤弗措也。…… 果能此道矣, 雖愚必明, 雖柔必强.]"라고 하였다. 저 김평묵(金平黙)이……변론하셨는데 김평묵이 임헌회의 제문을 지었는데, 임헌회를 호안국(胡安國)과 사마광(司馬光)에게 비유했다 해서 전우와 임헌회의 아들 임진재(任震宰)가 편지를 보내어 절교를 선언하고 제문을 돌려보낸 일을 말한다. 《간재집(艮齋集)前篇》권2〈답유치정(答柳穉程)〉 은나라의……않다 《시경(詩經)》 〈탕(湯)〉에 "은나라의 거울이 멀리 있지 않으니, 하후의 세대에 있다.[殷鑑不遠 在夏后之世]"라고 하였는데, 이는 문왕(文王)이 은나라 주(紂)의 실정을 경계한 말로, 은 왕조의 운명은 하(夏) 왕조를 멸망시킨 걸(桀)에서 교훈을 삼을 수 있다는 뜻이다. 자신의……아닙니다 전우가 오진영을 불러서 '문집 인간(印刊)의 일은 자네가 알아서 행하라'라고 했다는 것을 말하는데, 평소 간재 전우가 이런 말을 했을 리가 없다는 뜻이다. 도적도……사람이다 주자가 이르기를 "어떤 사람이 도적을 보고도 잡지 않는다면 그는 곧 도적의 무리이니, 도적은 사람들의 마음에 마땅히 싫어하는 것이다. 만약 '도적을 잡아 주벌해야 마땅하다'고 한다면 이는 주인 편의 사람이고, 만약 '도적은 잡을 수도 있고 용서할 수도 있다'고 한다면 이는 도적 편의 사람이다.[有人見了自不與捉, 這便喚做是賊之黨, 賊是人情之所當惡. 若說道賊當捉當誅, 這便是主人邊人, 若說道賊也可捉可恕, 這只喚做賊邊人.]"라고 하였다. 《주자어류(朱子語類)》 권55 〈맹자孟子55조〉 저계야(褚季野)의 피리(皮裏) 진(晉) 나라 환이(桓彛)가 저계야(褚季野)를 평하기를, "계야는 껍질 속에 춘추(春秋)가 있어 비록 말하지 않아도 사시(四時)의 기운이 갖추어 있다." 하였다. 그것은 겉으로 말을 잘하지 않으면서도 속에는 시비가 분명하다는 뜻이다. 구법(九法) 《주례(周禮)》 하관(夏官) 대사마(大司馬)에, "방국(邦國)에 구법(九法)을 세워 왕을 보좌하고 나라를 편안하게 하였으니, 경기(京畿)를 제정하고 나라를 봉하여 방국을 바로잡으며, 의례(儀禮)의 직위(職位)를 설정하여 나라의 등급을 정하며, 현인(賢人)을 올리고 공을 이루어 나라를 건설하고, 감(監), 목(牧)을 세워서 나라의 벼리를 정하고 군제(軍制)와 금고(禁錮)를 만들어 나라를 바로잡고, 공물(貢物)을 베풀고 직분을 나누어 나라 일에 임하고, 향민(鄕民)을 뽑아 나라 일에 쓰고, 고루 법을 지키어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작은 나라로 큰 나라를 섬겨 나라를 평화롭게 한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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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答李日瑞【升煥◎丙戌】 前月家弟歷拜。獲承惠緘一度次韻二首。且讀且詠。自不覺醒而牙香。久玩不能釋手也。但坐無便。謝復差遲。是罪是罪。書後月又盈朒。體度對時益茂。第一是漳濱。而隣里疹沴。尙未快霽。日事憂慮。伸眉頭不得。眞苦海本色耶。年前所敎原韻檃括。時入思念。終不犯手扣推。而設欲扣推。其柰汗顔血指何。然盛意亦不可全負。故妄以效嚬一首仰付。非敢自夸也。要爲塞責耳。省行在那間耶。每日氣向煖。不能無企待之情。此便亦有去無來。可鬱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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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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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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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오사익에게 답함 答吳士益 丁丑 정축년(1937) 답장을 받아보고 늦더위에 부친의 병환이 오래도록 낫질 않는 것을 근심하여 심지어 몸에 죄악이 쌓여 신명에게 죄를 얻어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우러러 염려를 하면서 이어 마음속에 감탄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옛날 자하(子夏)는 이치에 어긋나는 참변53)을 당하였으나 오히려 스스로 죄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형은 나이 많은 노인의 일반적인 병도 우려하여 이런 말을 하기까지 하였으니, 효도하고 사랑하는 간절함을 우러러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을 반성하고 학문을 돈독히 하는 뜻도 옛사람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화락하고 평이한 군자는 신이 돕는 바이다."54)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로써 형은 효성이 몸에 쌓여 있으니 신명의 도움을 받아서 부친의 병환이 빨리 회복되는 날이 있을 것을 알겠습니다. 미리 크게 축하를 드립니다. 인하여 생각건대, 효도는 백행의 근본이니 이를 미루어 나가면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 없는데, 하물며 스승과 부친은 그 은혜가 똑같으니 더욱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부친에 대해서는 생전에 불러들이지 않았는데 이른 것이 있자 오히려 자기 죄라고 자책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사가 돌아가신 뒤에 큰 무함을 받아서 도의를 상실하였는데도 내가 그것을 변론하지 않고 도리어 도왔으니, 이는 손상이 없어서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어찌 깊이 생각하고 분명하게 헤아려 되돌아서 보아야 할 곳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어찌 더욱 치밀하게 자신을 반성하고 학문을 돈독히 해야 할 곳이 아니겠습니까? 사랑이 깊어서 못할 말이 없었습니다만, 오히려 그 망령됨을 용서하고 한 번 생각해 보지 않겠습니까?"이미 10년 전에 의론한 것도 아니고 또 이전의 편지에서 말한 것이 아니며 별도로 하나의 의론을 만든 것이다."고 의론한 것은, 내가 웃지 않더라도 형이 또한 스스로 그 구차함을 웃을 것입니다. 이런 구차한 여러 설에 대해 하나하나 변론하여 바로잡고자 한다면, 비록 형의 큰 아량으로도 듣는 것을 기뻐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에 모조리 치워두고 다만 형이 받은 병통 중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곳을 취하여 단칼로 둘로 쪼개듯 하여 형이 맹렬히 반성하여 홀연히 깨닫기를 바랍니다. 여기에서도 효과가 없다면 아무리 많이 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가 우선 그만두겠습니다. 보내온 편지 중에 "생각할 만한 하나의 단서"와 "의리가 무궁하다"는 것은 결국 무슨 생각이며 결국 무슨 의리입니까? 어찌 이른바 '대신 인가받았다.[代認]'라는 한 가지 일이 아니겠습니까? 대저 '대신 인가받았다.'라고 한 것은 원래 말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대신했다는 것은 끝내 누구를 대신했다는 것입니까? 선사를 대신했다는 것입니까? 자손을 대신했다는 것입니까? 문인을 대신했다는 것입니까? 선사의 '인가받지 말라.'는 유서55)에 이미 '다른 날[異時]'라고 하였으니, 이는 죽은 뒤를 말한 것입니다. 선사가 스스로 인가받은 것도 아닌데 오히려 "스스로 욕되게 한다.[自辱]"고 말한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글이란 마음이 보존되어 있는 것이고, 마음은 몸을 주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글이 제재를 받고 조사를 당하는 것은 곧 몸이 욕됨을 당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 글과 이 때로 한다면, 자손이 인가를 받았더라도 이는 선사의 스스로 욕되게 한다는 것이고, 문인이 인가를 받았더라도 이는 선사의 스스로 욕되게 한다는 것이며, 출판업자가 인가를 받았더라도 이는 선사의 스스로 욕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대신 인가받은 것은 자손과 문인이 인가받은 것과 무슨 구별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선사의 주된 뜻입니다. 말하자면 청원한 자가 어떠한 사람이던 막론하고, 이 글과 이 때로 청원한다면 선사의 스스로 욕되게 한다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대신 인가받는 것도 어찌 선사가 손상되는 것이 없다고 보아 하고자 한 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형이 또한 생각해보면 이것은 그렇지 않겠습니까? 대저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말라."56)고 하는 것은 군자가 인을 행하는 마음입니다. 병암(炳庵 김준영(金駿榮))은 선사의 마음을 전한 수제자입니다. 선사의 인은 결코 이와 같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선사가 《병암집》을 대신 인가받도록 허락했다는 것은 과연 조금이라도 이치에 맞는 것이겠습니까? 그런데 다시 제자로 인하여 선사를 언급하여 심지어 《병암집》을 대신 인가받도록 허락한 것은 대고(大稿 간재집)에 대한 '불언지교(不言之敎)'이다고 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형이 속임을 당한 것도 이미 매우 가소롭지만, 저 무함한 자의 죄는 이루 다 죄줄 수가 있겠습니까? 통탄스럽고 통탄스럽습니다."10년이 지난 뒤에 심술을 폭로하고 죄목을 낱낱이 따지는 것은 보루를 맞대고 서로 싸우는 것 같음이 있다."고 한 경계는, 뜻은 고맙지만 저를 안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무함과 욕됨이 극에 달하여 차마 똑바로 볼 수 없었던 김세기(金世基)의 흉악한 글에 대해서도 함재장(涵齋丈)이 자제와 문하생으로 하여금 통문을 돌려 대변(對辨)하게 한 일을 힘껏 저지하였습니다. 제가 비록 보잘것없지만 어찌 저들 무리와 보루를 맞대고 서로 싸울 자이겠습니까? 다만 형이 이미 오진영이 김세기에게 답한 편지를 보고서도 오히려 사람을 밀치고 시세를 추종하는 그의 심술을 미워하지 않은 것은, 자신은 죄에서 빠져나오고 선사에게 죄를 떠넘기는 그의 심술이 처벌해야 하는 것인 줄을 결단코 모른 것이었기 때문에 인하여 그가 그동안 행했던 마음의 죄가 모두 이 편지와 같았음을 말했던 것입니다. 대체로 모두 선사와 관계된 것이고 원고 일과 관련이 된 것으로 스스로 과오를 저지른 것과 원고 일 전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면, 어찌 10 여년이 지난 뒤에 폭로하여 낱낱이 따지는 것을 했겠습니까? 이미 선사의 무함을 변론하는 것으로 주를 삼았으니, 어쩔 수 없이 모두 원고의 일과 관련된 죄를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파리장서의 일은 그 앞에 있었으니 반드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다만 근래에 의발을 전수받았다는 설을 변론하여 격파함으로 인하여 비로소 이것에 대해 언급했던 것이니, 이것은 어쩔 수 없었던 것입니다. 대저 형은 제가 그를 공격하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고 여겼기 때문에 말하는 것과 일삼은 것을 모두 너무 심하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인교(認敎)'가 선사를 무함한 것임을 알았다면 변론을 하지 않을 수 없고, 변론을 하면 분명하게 변론하지 않을 수 없으며, 분명하지 않으면 끝까지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성인의 가르침이고 학자가 힘써야 할 것으로서 애당초 지나친 것이 아님을 자못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 형은 선사의 마음에 대해서도 오히려 알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어찌 감히 저를 아는 것을 바라겠습니까? 그럼에도 부지런하여 그만두지 못하는 것은 옛 친구의 정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형은 "천하의 의리가 무궁하다."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사람이 이치를 봄이 극처에 이르지 않았을 때로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미 극처에 이르렀다면 다시 무궁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 때에 다시 극처를 찾는다면 어쩔 수 없이 반대로 퇴보하여 좌우로 넘어지고 쓰러져서 끝내 구덩이로 떨어짐을 면하지 못합니다. "청원하여 간행·반포하는 것은 결단코 스스로 욕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한 것은 선사의 견해가 이미 의리의 극처에 이르러서 마치 해가 중천에 떠있는 것처럼 천하에 밝게 게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훗날의 사람은 마침내 다시 의리가 무궁하다고 말하고 근거도 없는 대인설(代認說)을 다시 찾아내서 선사가 이치를 본 극처로 만들고, "결단코 스스로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한 말씀을 도리어 도가 이루지지 않았을 때의 소견으로 만들어 아무렇지도 않게 천 길의 구덩이로 빠뜨렸습니다. 어찌 괴이하지 않겠으며,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습니까. 연전에 서명옥(徐明玉)이 말하기를 "선사가 분명히 인가를 받을 뜻이 있었는데 우리 선생이 원고를 인가받는 것을 금지한 것 같다고 말한다면 이는 보잘것없는 작은 절개이니 어찌 군자의 대도가 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유경조(柳景肇)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큰소리로 꺾어버리고 그 입을 다물도록 하였습니다. 지금은 지난번에 꺾어버린 자가 반대로 꺾임을 받은 자의 무덤이 되어 버렸습니다. 형은 이 일을 듣고 또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卽拜惠覆,恭審老炎以大碩人患節彌留爲憂,至謂積惡在躬,獲罪神明致然,旣爲仰慮, 繼有所感歎于中者。昔子夏氏遭逆理之慘變,而猶自謂無罪。今吾兄憂隆老之例祟而至有此言,非惟仰見孝愛之切至,其反躬篤學之意,亦可謂過於古人矣。詩云: "愷悌君子,神所勞矣。" 吾以是知兄積孝在躬,獲助神明,而堂憂遄復之有日也。預爲獻賀萬萬。因念孝爲行源,推此而無所不達,而况師親一也。親有生前莫致而至者,猶自訟己罪,師受身後大誣,滅喪道義,而我不辨之,反涉助之,則此可無傷而不爲罪乎? 此豈非深念明商却顧回見處乎? 亦豈非反躬篤學加密處乎? 愛之之深,言無所不至,倘蒙恕其妄,而試思之否?所論"旣非十年前論,又非前書中說,而別爲一論",不待我笑而兄亦自笑其苟且矣。凡此苟且諸說,欲一一辨正,則雖以兄之宏度,似不喜聞,故一幷閣置,只就兄所受病擺脫不得處,一刀兩劈,以冀兄之猛省頓悟。於此而無效,則雖多,亦奚以爲? 我且已之。 蓋來喩"可思之一端"及"義理無窮",竟是何思,竟是何義? 豈非所謂代認一事乎? 夫"代認"之云,元不成說,所謂代者,竟是代誰? 代先師乎? 代子孫乎? 代門人乎? 先師於勿認之遺書,旣云"異時",則是以身後言者也。非當身之自認,而猶云"自辱"者,何也? 文者,心之所存; 心者,身之所主,故文之受制見勘,卽無異於身之見辱也。以此文以此時,則子孫認之也,是先師自辱; 門人認之也,是先師自辱; 業者認之也,是先師自辱。代認之與子孫、門人之認,何所別乎? 是則先師主意,謂勿論請願者爲如何人,以此文以此時而請願,則爲先師之自辱也。是則代認亦豈得爲先師之視爲無傷而所欲者乎? 兄且思之,此不然否? 夫"己所不欲,勿施於人",君子爲仁之心也。炳庵,先師傳心之首弟也,先師之仁,決不如是也。是則先師許代認於《炳集》之云,果得爲一分近理者乎? 而復謂之因弟而言師,至云炳庵代認之許是大稿不言之敎。兄之見欺,已甚可笑,而彼誣者之罪,可勝誅哉? 痛矣痛矣。"十數年後,暴揚心術,歷數罪目,有若對壘相薄"之戒,意則可感,知我則未也。夫以金世基之凶文,極其誣辱,不忍正視者,吾乃力止涵齋丈令子弟、門生發通對辨之擧。吾雖劣劣,豈與彼輩對壘相薄者哉? 但以兄旣見吳答金書,而猶不惡其擠人趨勢之心術,則是幷不知其脫罪嫁師之心術爲可誅,故因之以言其前後所爲之心之罪皆有如此書者。蓋皆關於先師,涉於稿事,非自作過惡及在稿事前者也,何以爲暴揚歷數於十數年後哉? 夫旣以辨誣爲主,則不得不幷言關於稿事之罪。惟巴書事在其前,似不必言,而近因辨破傳鉢之說而始及於此,此不得己也。大抵兄認我爲攻彼太過,故見得言言事事皆爲已甚。然殊不知旣知認敎之爲誣師則不得不辨,辨之則不得不明辨之,而不明則終不得而措之者,是爲聖人所訓、學者所勉而初不爲過也。噫! 兄於先師之心,尙有不知者,則豈敢以知我望之? 所以眷眷而不舍者,故舊之情然爾。兄言天下之義理無窮,此以人之見理未到極處時言。若旣到極處,則更不當言無窮。於此時而更尋極處,則不得不反作退步,左顚右倒,究不免墮坑落塹矣。"請願刊布,決是自辱",先師之見,已到義理極處,而昭揭天下,如日中天。後之人乃復言義理無窮,而更尋無據之代認說,作先師見理極處,以"決是自辱",反作道未及成時所見,而不恤陷之於千仞坑塹,豈不怪哉? 豈不痛哉? 年前徐明玉言: "先師明有認意,而曰吾先生若禁認稿,則是區區之小節,烏得爲君子之大道哉?" 被柳景肇大言折之於衆中而噤其口矣。今也則向之折之者,反爲被折者之墓也。兄聞此事,又以爲如何? 자하(子夏)는……말하였습니다 이치에 어긋나는 참변은, 아들이 아비보다 먼저 죽는 슬픔을 말한다. 자하가 그 아들을 잃고 시력을 잃자, 증자(曾子)가 조문할 때에 말하기를 "내 들으니, 붕우가 시력을 잃으면 그를 위해 곡한다."라고 하고는 증자가 곡을 하자, 자하도 곡하면서 말하기를 "하늘이여! 나는 죄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禮記(예기)》〈단궁(檀弓〉 화락하고……바이다 《시경(詩經)》 〈한록(旱麓)〉에 "화락하고 평이한 군자는 신이 돕는 바이다.[豈弟君子, 神所勞矣]"라고 하였다. 선사의……유서 간재는 자손 및 제군에 고하는 글에서 "다른 날 시변이 조금 안정되기 전에 만약 저쪽에 청원하여 발간 배포할 계획을 하는 것은 결단코 스스로 욕되게 하는 것이다. 여러 사람이 비록 혹 강권하더라도 너희는 아비와 할애비의 마지막 명을 맹세코 지켜서 조심하여 애써 따르지 말라.[異時時變稍定之前, 若請願於彼, 以爲刊布之計, 決是自辱. 諸人雖或強之, 汝等誓守父祖末命, 愼勿勉從也]"라고 하였다. 《간재집(艮齋集)後編》 권5 〈고제자손겸시제군(告諸子孫兼示諸君)〉 자기가……말라 중궁(仲弓)이 인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하기를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도 베풀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라고 하였다. 《논어(論語)》 〈안연(顔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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