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인 평오준철에게 답함 答族人平吾準喆 乙亥 을해년 (1935) 보내온 편지를 받들어 읽고 그 시종을 살펴보았더니, "선사에게 인의(認意)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변론을 하지 않더라도 무함한 것임이 이미 드러났기 때문에 성토하는 글을 나오기 전에 이미 먼저 마땅히 배척해야 한다고 말했었다. 다만 공정한 마음으로 공론을 지키며 치우치지 않은 자가 누구인지 몰랐기 때문에 감히 경솔하게 동조하지 못하고 자중하면서 자신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라고 하였습니다. 고명(高明)이 의리에 입각하여 판단한 것은 훌륭하였습니다. 《좌전》에 이르기를 "군주와 부모에게 무례를 범한 자를 보게 되면 마치 새매가 참새를 쫓는 것처럼 한다."93)고 하였습니다. 대저 스승과 군주와 부모는 하나입니다. 원수에게 인가받으려는 뜻이 있었다고 선사를 무함한 것은 무례한 것에 비할 뿐만이 아닙니다. 고명은 일찌감치 마땅히 배척해야 함을 알고 있으면서 먼저 곧바로 성토하지 않았던 것은 이미 새매가 참새를 쫓는 것과 같은 뜻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남이 성토하는 것에 대해서도 오히려 그 마음이 공정하지 않고 의론에 치우친 점이 있다고 의심하여 그들과 일을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관중(管仲)이 제(齊)나라 군주를 도와 초(楚)나라를 정벌해서 주(周)나라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공을 세웠는데, 공자는 그가 인의(仁義)를 빌려서 공을 이룬 사실을 몰랐던 것이 아니었지만 "누가 그의 인만 하겠으며 누가 그의 인만 하겠는가,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그 은혜를 힘입고 있다."94)는 찬사가 있었습니다. 만약 공자가 당시 열국의 군주가 되었다면 어찌 제나라의 군주와 재상이 공정한 마음이 아니었다고 해서 소릉(召陵)에서 주나라를 높이는 동맹95)에 참여하지 않았을 수 있었겠습니까? 천리와 인욕은 행위는 같으나 실정이 다릅니다. 비록 함께 일을 하더라도 그는 본디 사적인 것을 위하고 나는 본디 공적인 것을 위하니 두 가지가 서로 방해되지 않습니다. 대체로 주나라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것은 대의(大義)이고, 선사를 위해 무함을 변론하는 것도 대의입니다. 진실로 대의와 관계되고 똑같이 왕의 신하이고, 똑같이 문하의 제자라고 한다면 너는 사적이고 나는 공적임을 따지고 비교하여 차이를 두고서 "나는 자중하여 자신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고 말해서는 안 됨이 분명합니다. 제나라 군주가 시해를 당하고 삼환(三桓)이 참람하게 권력을 훔친 것에 대해 만약 진항(陳恒)을 토벌하고96) 삼도(三都)를 허물려는97) 청이 먼저 다른 사람의 사사로운 목적에서 나왔다고 한다면, 공자는 이러한 이유로 자중하지 못해 자신을 속이게 될까 염려하여 토벌하고 무너뜨리는 일에 참여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이것도 오히려 방증하고 차용한 것입니다. 맹자가 사설(師說)을 물리친 것과 같은 경우는 심지어 사람들이 모두 [양주와 묵적의 설을]막아야 된다고 말할 것98)을 바라기까지 하였지만, 어찌 모든 사람들이 공정한 마음과 치우치지 않은 의론을 갖추겠으며, 또한 어찌 자중하여 스스로를 속이고 싶지 않아서 더불어 일을 함께 하기를 바란 것이겠습니까? 우옹(尤翁 송시열)이 박화숙(朴和叔 박순(朴淳))을 꾸짖어 말하기를 "만약 반드시 지언(知言)과 양기(養氣)가 맹자의 경지와 같아진 뒤에야 이단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한다면, 반드시 사사(士師)가 된 뒤에야 군주를 시해한 역적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 인류가 어찌 모두 이단이 되는데 이르지 않겠는가."99)라고 하였습니다. 대저 이미 지언과 양기를 할 수 없다면 용심(用心)과 지론(持論)이 어찌 모두 공정하고 치우치지 않는 곳에서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우옹은 더불어 일을 함께 하기를 청하였으니, 어찌 자중하여 스스로를 속이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택당(澤堂) 이문정공(李文靖公 이식(李植))은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일을 논하여 말하기를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만이 학문을 이어 받았고, 그 나머지는 당파에 휩쓸렸다."100)고 하였습니다. 지나치게 생각하여 도모하지 못함이 애석합니다. 아, 지난날의 일에 죽을힘을 내서 심력을 완전히 소진하고 큰 재앙을 만나 거의 죽을 뻔한 자로는 그 누가 나와 같은 자가 있었습니까? 내가 공적이었느냐 사적이었느냐, 치우쳤는냐, 공정했느냐는 지금과 후대의 평가를 공손히 기다려야 하고 저가 스스로 밝힐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고명이 의론한 바로 헤아려 보면, 마음이 공정하지 않고 지론이 치우친 것은 또한 저만 같은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고명은 옛 사람처럼 함께 동거했던 친족이면서 벗으로서 함께 모여서 학문을 강습한 우의가 성기지 않았는데, 10여 년 동안 한 마디도 경계하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생각건대 저의 자만하는 소리와 성낸 낯빛이 사람들이 다가설 수 없게 하였음에도 미혹되어 스스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인가 싶습니다. 이것은 바로 스스로 반성하고 돌이켜 구해야 할 점입니다. 저는 이미 은혜로운 경계의 말을 들어보지 못했고 아울러 성대한 이러한 문자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단지 피차간에 견해가 똑같은 줄로만 믿고서 일찍이 헤아리고 의심도 하지 않은 채 지난번 솔직한 한 통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지금으로 살펴보건대, 이는 어찌 안색을 보지 않고 말한 장님[瞽]101)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이미 말을 꺼냈으니, 청컨대 고설(瞽說)을 다하여 솔직히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오진영이 선사를 무함한 것에 대해 그대는 이미 마땅히 배척해야 할 죄라고 말했으니 굳이 다시 제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호남과 영남에서 서로 간행을 한 것은 함께 목욕을 하면서 상대가 벌거벗은 것을 비웃는 것이다."라고 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대저 문고(文稿)를 인쇄하여 간행하는 것을 그가 알고서 금하지 않았으니, 그의 입장에서 말하면 비록 묵허(黙許)했다고 하겠지만 나의 입장에서 말하면 마땅히 내가 내 일을 했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옳다 하여 이기기를 구하는 것을 습관적으로 하다가 성격으로 굳어진 오진영도 오히려 "천하에 어찌 침묵을 기뻐하지 않으면서 인허를 기뻐하는 것처럼 인지상정을 벗어나는 경우가 있겠는가."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마침내 이 두 가지를 가지고 견주어 동일한 것으로 여긴다면, 그대의 인정에 또한 어긋나지 않겠습니까? 선사의 "[청원하여 간행 반포하는 것은] 결단코 스스로 욕되게 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작은 차마하지 못하는 것으로 여기고, 간행하지 않고 보관해두는 것을 크게 차마하지 못하는 것으로 여긴다면, 이는 이미 천리와 인심에 편안한 바가 아닙니다. 또 간행하는 것만 전해지고 보관해둔 것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고문상서(古文尙書)》 이하는 모두 오늘날에 전해질 수 없었을 것이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또 "피차간에 상호 공과 죄가 있어서 서로 가릴 수가 없다."고 하였는데, 감히 묻건대 오진영에게 어떤 공이 있고 호남에 어떤 죄가 있습니까? 원고를 간행한 것이 오진영의 공이라고 말한다면 그가 선사의 글을 고쳐 어지럽힌 것은 그대도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현동(玄洞)에서 간행한 것을 호남의 죄라고 말한다면 침묵을 기뻐하고 인허를 기뻐하지 않은 것은 오진영도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공과 그 죄가 서로 가릴 수 없는 것이 어찌 있겠습니까? 무함을 변론하면서 선사의 누가 됨을 생각지 않고 이기는 것만 힘쓴다면, 거짓을 일러 바르다고 하는 것이 마치 위에서 논한 마음이 공정하지 않은 경우와 같을 것입니다. 비록 그렇지만 사람이 또한 능히 무함을 변론할 수 있으면 무함을 변론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 심술이 은미하여 진실로 타인이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과연 이기는데 힘쓰는 사심에서 나온 것이라면, 시비(是非)를 결정하고 사정(邪正)을 정하는 날에 다만 마땅히 공자가 "그 행하는 바를 살핀다."고 하고 주자가 "선을 행한 자는 군자가 되고 악을 행한 자는 소인이 된다."라고 한 가르침102)에 의거하여 따르거나 따르지 않음을 결정해야 할 뿐입니다. 연유한 바를 관찰하고 편안히 여기는 것을 살펴서 사람으로 하여금 감히 그 실정을 숨길 수 없도록 하는 것은 절로 다른 날에 별도로 논의해야 할 것입니다. 대저 고명은 선사를 무함한 것에 대해 그다지 통탄하지 않았기 때문에 견해가 이와 같은 것이니, 스승의 원통함을 지어낸 것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것을 변론한 것이 선사의 누가 됨을 두려워한 것에서 살펴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양주와 묵적이 주장한 위아(爲我)와 겸애(兼愛)도 오히려 그 폐단이 임금과 부모의 존재를 무시하는 데로 흘러갔습니다. 오진영이 인가와 관련하여 선사를 무함하고 선사의 원고를 고친 것은 바로 당일에 선사를 무시했던 것이 되니, 그 경중이 또한 서로 현격할 뿐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고명은 이내 비유가 적절하지 않다고 의심하니, 저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감히 묻건대, 저 무리의 이른바 정재(靜齋)의 유서(遺書)라는 것에 대해 감히 가리켜서 석농(石農)에게 선사가 홀로 명한 것이 있었다고 하지도 못하고, 감히 가리켜서 유서가 없다고 하지도 못하였으니, 그렇다면 하늘에서 떨어지고 땅에서 솟아난 것입니까? 이는 대단히 의심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여자 종이 석개(石介)의 글씨를 몰래 익힌 것이다.'103)라는 등의 설을 꺼리고 실로 유서를 독실하게 믿으면서 '잘 헤아려서 하라.'고 하거나 '불언지교(不言之敎)'라고 한 등의 설을 옳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오진영의 이른바 "말은 구별이 부족하고 문장은 표현이 허술하였다.[語欠區別, 命辭疎忽]"라고 한 것은 과연 자신을 숨기고 사람들을 현혹하는 계책이 아니고 명백하게 무함을 자복하는 설이 되겠습니까? 그 무리가 무함을 믿고 그 수괴가 불복함이 진실로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고명은 마침내 "양주와 묵적처럼 스스로 옳다고 하지 않았고, 양주와 묵적처럼 많은 사람을 미혹함이 없었다."라고 하고, 결론을 맺기를 "믿을 만한 것이 못 되니, 누가 감히 다른 날에 불 꺼진 재에 입김을 불어서 불을 일으키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른 날은 논할 것이 없고 본디 많은 사람을 현혹시켰으니 활활 들판을 태우는 것처럼 그 기세가 두려워할 만한 것이 바로 오늘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전에 신헌(愼軒)의 편지에 "영남의 당은 수백 인이고 호남의 당은 수십 인이다. 설령 호남이 많고 영남이 적더라도 건장한 오룡(五龍)이 날뛰는 한 마리 파리한 돼지를 이길 수 없는데104), 하물며 영남이 호남보다 열배는 많으니 더욱 말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고명은 오히려 "맹자가 양주와 묵적에 대해 변론한 것처럼 반드시 힘써 변론할 필요가 없다."고 하고, 또 "이미 들어가 초제(招提)를 따랐다."105)는 기롱을 하였습니다. 감히 묻건대 "오진영과 그 당이 이미 우리에 들어갔다."고 한 것은 무엇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까? 만약 자복한 문자가 있다면 어찌 적어서 보여주지 않습니까? "말은 구별이 부족하고 문장은 표현이 허술하였다.[語欠區別, 命辭疎忽]"는 여덟 글자를 가리켜 우리로 들어온 증거로 삼는다면 이것은 자신을 숨긴 계책을 다스린 것이지 자복하는 말이 아닙니다. 저의 말만 그러할 뿐이 아닙니다. 당초에 고명은 마땅히 배척해야 한다고 말하였고 성토하여 배척한 자가 공이 있다고 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는 모두 매우 의심스러운 말입니다.제가 듣기로, 고명의 이 편지는 나재장(懶齋丈)이 헤아려 수정하고 윤색하였으며, 연심장(鍊心丈)이 그 아들에게 "평오(平吾)의 편지는 말이 공평하다."고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그 용심(用心)이 공평한 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며 지론(持論)이 치우치지 않은 것도 다른 편지가 아님을 알겠습니다. 부북(扶北 부안)의 여러분이 많은 부정한 무리와 뒤섞여 있는 이런 시기에 이것으로써 한 지역의 정론(定論)을 삼았기 때문에 이런 마음 가득한 많은 의심을 낱낱이 들어 우러러 질문하여 공정한 의론을 더욱 들었으면 합니다. 바라건대 여러분들과 함께 살피고 같이 의론하여 일일이 밝게 가르쳐 주고 한쪽으로 치우친 사사로운 견해라고 단정하여 물리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편지의 말미에 "오랑캐의 재앙이 아침저녁 사이에 임박하여 있으니 동실(同室) 내에서 싸워서는 안 된다."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양주와 묵적도 똑같이 요순(堯舜)을 옳게 여겼고, 흑수(黑水)106)도 똑같이 공맹(孔孟)을 존숭하였으니, 애당초 동실이 아닌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맹자와 우암이 전국시대의 환란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넘쳐나며 청나라 오랑캐가 위협하여 상하가 위태롭게 떨던 때에 급급하게 변론하여 배척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바로 외부의 재앙을 근절하고자 하면 마땅히 먼저 내부를 깨끗하게 만들어야했기 때문입니다. 외부의 오랑캐의 재앙은 화를 당하는 것이 신명(身命)이고, 내부의 사문(斯文)의 재앙은 화를 당하게 되는 것은 심술(心術)입니다. 마음과 몸은 이미 내외의 구분이 있으니, 마땅히 우려해야 하는 것에 어찌 완급의 차이가 없겠습니까? 고명은 또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奉讀來敎,察其始終,則以爲"謂師有認意,不待辨而誣已明,故討章未出之前,已先言其當斥也。但以不知以公正之心持論不偏者爲誰,故不敢輕易左袒,而欲自重而不自欺也"。異哉, 高明之裁義也! 《傳》曰: "見無禮於君親者,若鷹鸇之逐鳥雀。" 夫師與君親一也。誣師以有意讐認,非無禮之比而已。高明早已知其當斥,而不先卽討斥,旣少鷹鸇之志矣。至於人之討之也,猶疑其心不公論有偏而不與之同事。試思之。管仲相齊君伐椘國,立尊周攘夷之功,孔子非不知其假借仁義而有"如其仁,如其仁,民到于今賴之"之贊。如使孔子爲當時列國之君,則豈可以齊之君相非公心之故不參於召陵尊周之同盟哉? 天理人欲,同行異情。雖與之同事,彼自爲私,我自爲公,兩不相妨。蓋尊周攘夷,大義也; 爲師辨誣,亦大義也。苟係大義,同爲王臣,同爲門弟之地,其不可計較於爾私我公之間而異之曰"我欲自重而不自欺也",明矣。齊君見弑,三桓僭竊,若使討陳恒、墮三都之請,先出於他人有爲之私,則孔子以此而恐其不自重而自欺也,不與於討墮之役歟? 然此猶是旁證借據。若乃孟子之闢邪說也,則至有望於人人之言距,豈以人人者皆有公正之心、不偏之論,亦豈不欲自重而不自欺也而望與之同事哉? 尢翁之責朴和叔曰: "若必知言養氣如孟子而後,乃能攘斥異端,則是必士師然後乃治弑君之賊,人類幾何其不盡哉?" 夫旣不能知言養氣,則用心持論,安得盡出於公正不偏? 然而尢翁請與之同事,豈不欲自重而不自欺也而然哉? 澤堂李文靖公論東西人事,而曰: "沙溪學也,其餘黨也。" 惜乎其過慮而不之圖也。噫! 向者之役,出死力而竭盡心膂,遭大禍而幾殞性命者,孰有如鄙人? 吾之是公是私是偏是正,恭俟今與後評定,而非吾之所可自明者。但以高明所論者律之,心不公正,持論偏仄,宜亦莫如鄙人。而以高明僅過古人同居之親,加以麗澤之有誼,盍簪之不疎,十餘年間,曾不聞一言之箴規。意者鄙人訑訑之聲,悻悻之面,有足以拒人者,而迷不自覺歟? 此正內訟反求處也。鄙人則旣未聞惠箴之及,并不見盛作此等文字,故只信彼此之同見,不曾揣度疑難,而向呈率直一書矣。以今觀之,其何免未見顔色之瞽者也? 雖然,旣發端矣,請得以罄盡瞽說而質之。震之誣師,賢雖不討,旣謂當斥之罪,則不須更提。至於所謂"湖嶺互刊,同浴而譏裸"者,何也? 夫印行文稿,而彼知而不禁,則自彼言之,雖曰默許,自我言之,當曰吾爲吾事。故雖以震之自是求勝習與成性者,猶謂天下安有不快默而快認許之乖常人情哉? 今乃將此二者,比而同之,賢之人情,不亦乖乎? 以先師之"決是自辱"爲小不忍,以不刊而藏之爲大不忍,則旣非天理人心之所安。且刊行者獨傳,而藏之者不傳,則自?古文尙書?以下,皆不得傳至于今,豈有是理? 又謂之"彼此互有功罪而不相掩",則敢問震有何功,而湖有何罪也? 謂刊稿爲震功,則改幻師文,賢亦云然; 謂玄刊爲湖罪,則快默而不快認,震亦云然。其功其罪,安有不相掩者乎? 辨誣而不以師累爲念,而涉於務勝,則僞也之喩正,如右所論心不公正者。雖然,人也能辨誣,則辨誣已矣。其心術隱微,固非他人之所易知。果使出於務勝之私,當決是非定邪正之日,只當據孔子"視其所以"、朱子"爲善者爲君子,爲惡者爲小人"之訓,以從違之矣。觀所由,察所安,而使人不敢廋其情,自當別論於他日者也。大抵高明不甚痛迫於師誣,故持見如此,觀於不認做師寃而反恐辨之者爲師累,可見矣。楊墨之爲我兼愛,猶爲流獘之無君父; 震泳之誣認改稿,卽爲無師於當日,其輕重又不啻相萬也。高明乃以擬比不類疑之,吾不知其何說也。敢問其徒所謂靜齋遺書,不敢指以爲有石農獨命,不敢指以爲無遺書,從天降從地出? 可疑之大者。何憚爲女奴石書習等說,果是篤信遺書,而不以"料量爲之"、"不言之敎"之云爲是者乎?當人所謂"語欠區別,命辭疎忽",果是非逃遁眩人之計而爲明白服誣之說乎? 其徒之信誣,其魁之不服,固若是也。高明乃以爲"不自爲是如楊墨,無迷惑者衆如楊墨", 終之謂"不足取信,孰敢吹燼起火於他日乎?" 吾則以爲未論他日,自是惑衆,燄燄燎原,其勢之可畏者,正在今日。日前愼軒書有云: "領黨數百人,湖黨數十人。正使湖多而領少,五龍矯矯不能勝一羸豕之蹢躅,而况領多於湖十倍者乎?" 而高明猶有"不必力辨如孟子之於楊墨"之說焉,又加以"旣入從招"之譏焉。敢問"震及其黨旣入其苙"者,指何而言? 若有自服文字,何不錄而示之? 如指"語欠區別, 命辭疎忽"八字,爲入苙之證,則此治逃遁之計而非自服之說。不惟如吾言。當初高明之言其當斥, 而謂討斥者有功,何也? 此皆甚可疑也。竊聞高明此書,懶齋丈商訂修潤之,鍊心丈對家兒言平吾之書說得公平。然則吾知其用心公平者果非他人,持論不偏者亦非他書。而當此扶北僉座混同衆陰之秋,以此爲一方之定論,故凡此滿腹羣疑,枚擧仰質,欲以益聞公正之論。願與僉座同看共議,一一明敎之,不宜槩以偏私之見而揮之也。書末喩以"夷狄之禍,迫在朝暮,不可爲同室之鬪"。然楊墨同是堯舜,黑水同尊孔孟,未始非同室也,而孟子、尢庵汲汲辨斥於戰國禍亂殺人盈野,淸虜威嚇上下懍懍之日者,何也? 正以欲絶外禍,宜先淸內故也。外而夷狄之禍,所禍者身命也; 內而斯文之禍,所禍者心術也。心身旣有內外,則所當憂者,豈不有緩急乎? 未知高明又以爲如何。 군주와……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공(文公) 18년 기사에 "군주에게 예가 없는 자는 주살하되 매가 새를 뒤쫓아 낚아채듯이 하라[無禮於其君者, 誅之, 如鷹鸇之逐鳥雀也]"라고 하였다. 누가……있다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보인다. 공자는 "환공이 제후들을 규합하되 무력을 쓰지 않은 것은 관중의 힘이었으니 누가 그만큼 어질겠는가. 누가 그만큼 어질겠는가.[桓公九合諸侯, 不以兵車, 管仲之力也. 如其仁! 如其仁!]"라고 하였고, 또 "관중이 환공을 도와 제후의 패자가 되게 하여 한 번 천하를 바로잡아 백성들이 지금까지 그 혜택을 받고 있으니, 관중이 없었다면 우리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管仲相桓公覇諸侯, 一匡天下, 民到于今受其賜, 微管仲, 吾其被髮左衽矣. 豈若匹夫匹婦之爲諒也自經於溝瀆而莫之知也.]"라고 하였다. 소릉(召陵)에서……동맹 소릉의 맹약은, 제 환공이 초나라를 공격하여 초나라의 사자 굴완(屈完)과 소릉에서 맹약을 매었는데, 이때 환공은 초나라가 주나라 왕실에 공물(貢物)을 바치지 않고 남쪽으로 정벌을 계속하는 죄를 물었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희공(僖公) 4년 진항(陳恒)을 토벌하고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진성자(陳成子)가 자신의 임금인 간공(簡公)을 시해하자, 공자가 목욕을 하고 조정에 나아가 애공(哀公)에게 고하기를 "진항이 자기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토벌하소서."라고 하였다. 삼도(三都)를 허물려는 노나라 삼가(三家 계손씨(季孫氏), 맹손씨(孟孫氏),숙손씨(叔孫氏))의 읍(邑)을 강등시킨 일을 말한다. 노 정공(魯定公) 13년에 공자가 삼가(三家)가 너무 참람하다 하여 숙손씨의 후읍(郈邑)과 계손씨의 비읍(費邑)과 맹손씨의 성읍(城邑)을 허물려고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사기(史記)》 卷47 〈공자세가孔子世家〉 맹자가……것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맹자는 "능히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막을 것을 말하는 자는 성인의 문도이다.[能言距楊墨者。聖人之徒也]"라고 하였는데, 주자의 주(註)에 "《춘추》의 법도에 따른다면 난신적자는 사람마다 다 토벌할 수 있으니, 꼭 사사(士師)여야 할 필요는 없다.[如春秋之法 亂臣賊子 人人得而討之 不必士師也]"라고 하였다. 만약……않겠는가 《송자대전(宋子大全)》 권67 〈답박화숙(答朴和叔)〉에 보인다. 사계(沙溪)만이……휩쓸렸다 《송자대전(宋子大全)》 권203 〈택장이공시장(澤堂李公諡狀)〉에 "오늘날 율곡을 높이는 사람은 사계만이 그 학문을 이어받았고, 그 나머지는 당파에 휩쓸렸다.[今之尊栗谷者。沙溪學也, 其餘黨也]"라는 택당의 말을 원용하고 있다. 안색을……장님 《논어(論語)》 〈계씨(季氏)〉 에, 공자는 "군자를 모실 때 세 가지 허물이 있다. 말을 해서는 안 될 때 하면 조급함이고, 말을 해야 할 때에 하지 않으면 숨기는 것이고, 안색을 보지 않고 말하는 것을 장님이라 한다.[侍於君子有三愆, 言未及之而言, 謂之躁, 言及之而不言, 謂之隐, 未見顔色而言 謂之瞽]"라고 하였다. 공자가……가르침 《논어(論語)》 〈위정(爲政)〉에, 공자가 말하기를 "그 행하는 바를 보며 그 연유하는 바를 관찰하며 그 편안히 여기는 바를 살피면 사람이 어찌 숨기겠으며 사람이 어찌 숨기겠는가.[視其所以, 觀其所由, 察其所安, 人焉廋哉, 人焉廋哉"라고 하였다. 주자는 "그 행하는 바를 본다.[視其所以]"는 구에 대해 주(註)하기를 "선을 행하는 자는 군자가 되고 악을 행하는 자는 소인이 된다.[爲善者爲君子, 爲惡者爲小人]"라고 하였다. 여자 종이……것이다 송(宋)나라의 간신 하송(夏竦)이 여자 종으로 하여금 습자(習字)를 하도록 하여 석개(石介)를 무함하게 한 일을 가리킨다. 《송사(宋史)》 권432 〈석개열전(石介列傳)〉 건장한……없는데 《주역(周易)》 구괘(姤卦) 초육(初六)에 "아무리 파리한 돼지라도 언제든 날뛰려는 심보를 갖고 있다.[羸豕孚蹢躅]"라는 말이 나온다. 오룡(五龍)은 다섯 용이라는 말인데, 이 괘가 초효(初爻) 외에는 다섯 개의 효가 모두 양(陽)이기 때문에 다섯 군자라는 뜻으로 오룡이라고 한 것이다. 이미……따랐다 초제(招提)는 절 또는 승려의 이칭이다. 두보의 유용문봉선사(遊龍門奉先寺)에 "이미 초제를 따라 노닐었고 다시 초제의 경내에 유숙한다.[已從招提遊 更宿招提境]"라고 하였다. 흑수(黑水) 윤휴(尹鑴)가 여주(驪州) 여강(驪江)에서 살았으므로 그를 배척해서 일컫는 말이다. 즉, 여(驪)는 검다[黑]는 뜻이 있으므로 흑(黑)으로 바꾸어 소인(小人)임을 암시한 것이고 강(江)은 물[水]이므로 이를 합하여 흑수라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