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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文 外甥柳允錫 嗚呼先生。天姿挺然。爰自弱齡。便學聖賢。屈首蘆門。造詣益深。遵道不措。是溫是燖。謙謙若虛。德性自尊。斷斷率眞。孝友愈惇。專修在我。不成乎名。如鑑如衡。庶物則明。與時背馳。斂蹤閟光。晩點泉石。聊寄徜徉。藜藿不繼。常有好顔。紛紜儻來。一毫莫間。至誠動人。强梁致恭。以善及人。衆皆信從。遠近來學。苟不拒追。各充厥量。階級不差。允矣先生。孰不悅服。猗歟先生。孰不矜式。至如小子。早入甥館。十載薰德。親承几案。立心之要。用功之方。諄諄不倦。眷眷無忘。得於觀感。宜不淺尠。漳濱餘喘。一是淟涊。末由從之。竟歸?惘。淵淵境界。詎敢度量。嗚乎先生。天胡不遺。棟樑奄摧。將焉仰庇。于時小子。倉卒扶擧。遺誨丁寧。少無齟齬。飭躬斅子。不出于斯。受恩珍重。曷云忘之。啓手啓足。歸之以全。在吾先生。復何憾焉。誰規我過。誰發我蒙。如失怙恃。罔諭我恫。承瞻容儀。今焉已矣。學未傳心。言徒在耳。居諸不留。祥期奄臻。罔涯之痛。愈久愈新。玆具菲薄。敢告哀憶。惟靈不昧。尙鑑衷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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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權子厚【基德】 奉拜以後。未嘗不嚮望。及至獲書。倍蓰景仰。顧愚陋之反有惑於來書者。連篇累牘。句句無非過當語。恐有累於執事之高明也。西子之美。不可加於無鹽。而强以西子之美稱之。彼無鹽者。隱不得自家本色。捧心一嚬。則富人閉戶。貧人遠走。到此時節。不惟無鹽狼狽。曲爲稱美者。亦豈無所悔也耶。自念愚生。內而魂魄虛弱。外而世故纏縛。志氣委靡。工夫滅裂。枉過一生。虛負初心。自分放廢。撫躬悼歎而已。不意左右高明。互相投書。喩以遠大。祈福於木居士有靈驗之可效耶。可愧而還可笑也。別紙所錄。可謂議五音於聾者之前。初不辨其淸濁。況何論其宮商。然不可以不知二字。仰塞盛意。故妄語隨之。答云乎哉。願更與明眼訂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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祭文 族孫洪承 嗚呼哀哉。先生之生。受天之德。率性溫純。稟質淸淑。早自弱齡。有志于學。門路得正。卓然先覺。從師蘆沙。親炙效則。之道之宗。實見實得。不倦不忘。已百已千。於斯從事。三十餘年。晩築東岡。簞瓢自樂。遯世無悶。婆娑林壑。早謝名利。不求聞達。守其志節。不移不奪。爽然氣宇。豁然心胸。氷壺秋月。座上春風。一造門下。輒祛舊習。聞者靡然。頑廉懦立。猗歟先生。躬行實卓。文章餘事。窮理是樂。敬義直方。有事涵養。深造精析。寔符前往。於乎先生。雖在田疇。憂國之忱。經世之謀。斷斷誠意。發於辭色。來士悅服。莫不矜式。嗚呼先生。永享淸福。仁靜遐壽。私心切祝。天胡不弔。奄至斯極。吾道將喪。罔不痛衋。山頹梁摧。誰依誰仰。嗚呼痛哉。其徒焉往。生策死悲。恒人同情。小子則尤。倀倀迷程。粤自蒙養。久患遲疑。將命累年。實被恩施。提撕誘掖。惟以義方。自顧頑蒙。若面于墻。爲學之方。咡詔面命。以進分寸。夙夜提警。今焉已矣。音容永閟。中塗失依。莫究余志。緬惟先生。不倦敎誨。于墻于羹。如承謦欬。日月不留。祥期奄至。控訴微忱。百不一二。大聲長號。淚似泉傾。維靈不昧。克鑑厥誠。嗚呼哀哉。尙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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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헌에게 답함 이신헌에게 답함 答李愼軒 癸酉 계유년(1933) 계화도 영당(影堂)에 대한 말씀은 우리들이 어찌 이루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른이 먼저 말해주시니 매우 다행입니다. 다만 이른바 호남과 영남에 모두 통지한다는 것은 어른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들이 한창 선사의 본원 중에서도 큰 것을 들어 무함하고 멸시하고 있는데, 우리가 마침내 유적(遺蹟) 가운데 작은 것을 드러내 현양하는 일을 저들과 함께 한다면 어찌 경중(輕重)을 구분하는 것에 어긋나지 않겠습니까? 바라건대 마음을 깨끗이 하여 생각해 주기 바랍니다. 華島影堂之喩, 吾儕孰不欲成之, 而丈先發之, 甚幸。 但所謂湖嶺皆通者, 未審尊意所在。 彼方擧先師本源之大者, 而誣衊之, 而吾乃以表顯遺蹟之小者, 與之同事, 豈不舛於輕重之分歟? 願澄心思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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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헌에게 답함 答李愼軒 辛未 신미년(1931) 학술의 오류는 그 지극한 폐단을 말하면 맹자가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에 대해 아버지도 없고 임금도 없다12)고 말하기까지 하였으니, 허무와 선학은 그 궁극에 어느 곳인들 이르지 않겠습니까? 어른의 편지에서 이른바 "다만 대의와 관계된 바가 아닌가?" 하신 것은 참으로 지당하니, 다만 그 실마리가 처음부터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근세 리학(理學)의 근원처럼 견해 차이일 뿐 일반적으로 행패를 부리고 폐를 끼치는 등의 미워할 만한 점이 없다면 어찌 미리 그 사람을 대의로 판단하여 배척할 수 있겠습니까? 양주와 묵적의 오류를 정자가 오히려 보통사람을 뛰어넘는 행위라고 했습니다. 하물며 노자의 청수(淸修)와 육상산의 독실함은 현인을 업신여긴 자와 같은 사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이 비교적 분명함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어른이 자신하는 데에 독실하여 현인을 업신여긴 자도 공경할 만하다고 말함에 이르렀으니, 지나칩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성인을 비난하는 자는 법도가 없다."13)했습니다. 현인은 성인의 형체를 미세하게 갖추고 있으니, 현인을 업신여기는 것은 또한 어찌 법도가 없는 것의 다음을 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가지고 헤아려보면 공경할 만하다는 의론은 진실로 바꿀 수 없는 정론이 되지 못하고, 일반적인 예를 지나치게 따르는 것도 또한 베푸는 것이 타당한지 모르겠습니다. 學術差繆, 言其極獘, 則孟子至謂楊墨爲無父無君, 虛無禪學, 其究也, 亦何所不至? 尊喩所謂"獨非大義所關乎"者, 誠爲至當, 但其端之始異也。 只如近世理學源頭之差見而已, 未見有一般行悖貽獘之可惡也, 則惡得以預斷其人以大義而斥之乎? 楊墨之差, 程子尚謂過人之行, 況於老氏之清修, 象山之篤實也, 其不可與侮賢者同科也, 較明矣, 而丈篤於自信, 至發侮賢者亦可敬之言, 則過矣。 孔子曰: "非聖者, 無法。" 賢者, 聖之體微也, 侮賢者, 亦豈不得爲無法之次犯乎? 執此而揆之, 可敬之論, 固未爲不可易者, 而過從常禮, 亦未知施得其當也。 맹자가……없다 《맹자(孟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양씨(楊氏)는 자신만을 위하니 이는 군주가 없는 것이요, 묵씨(墨氏)는 똑같이 사랑하니 이는 아버지가 없는 것이니, 아버지가 없고 군주가 없으면 이는 금수(禽獸)이다.[楊氏爲我, 是無君也, 墨氏兼愛, 是無父也. 無父無君是禽獸也]"라고 하였다. 성인을……없다 《효경(孝經)》 〈오형장(五刑章)〉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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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익에게 보냄 與吳士益 戊寅 무인년(1938) 얼마 전에 여막에 가서 형과 40여 년간 오랜 사귄 친구로서 의례적으로 조문하고 위로를 했지만 심정을 다하지 못한 점이 있었으니, 졸곡(卒哭) 후에 한 번 방문하는 것은 그리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저는 금년부터 온갖 병이 교대로 들어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작년에 편지를 주고받으며 마치지 못했던 안건을 미처 하나로 귀결하지 못하고 죽는다면 진실로 천추의 한이 될 것입니다. 열 번의 편지가 한번 만나는 것만 못하고, 형도 여막을 삼년 동안 지키면서 또한 "긴 세월에 아우가 직접 찾아오지 않으면 어찌 대면하여 규명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때문에 병든 몸을 이끌고 더위를 무릅쓰며 어렵게 걸어가서 하루 밤낮을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혀가 닳고 입이 마르도록 이야기하여 "선사를 무함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했던 정견(定見)을 회복하기를 바랄 수 있었습니다. 영재종(令再從) 오익부(吳翼夫)가 곁에 있으며 또한 말하기를 "만일 간옹(艮翁)이 인교(認敎)가 있었다고 말한다면 크게 절의가 손상시키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형은 끝내 시원하게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돌아올 때에는 가까운 시일 내에 편지로 뜻을 보여주기를 청하였습니다. 또 형이 과연 속히 도모할지는 모르겠지만 빠른 세월은 사람을 위해 머물지 않으니 병든 몸으로 창가에 홀로 앉아서 마음을 다스릴 길이 없으므로 이에 편지로 질문함을 면치 못합니다. 스스로 조급한 것이 남에게 증오스럽다는 것을 알지만 제가 죽은 뒤에는 또한 형을 위하여 저처럼 구제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작년에 형이 마지막 편지에 "이미 '선사를 무함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10년 전에 의론도 아니고, 또 '증거가 명백하여 꾸며서 지어낸 것도 아니다.'라는 저번 편지 중에 말한 것도 아니다. 저쪽을 따른 것도 아니고 또한 이쪽을 따른 것도 아니며 별도로 하나의 의론을 만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선사를 무함한 의론이 아니라면 이는 선사가 '인교'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고, 증거가 명백하여 꾸며서 지어낸 설이 아니라면 이는 꾸며서 지어낸 것을 증명할 것도 없고 '인교'도 없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교가 있다는 것은 선사를 무함한 것이며, 인교가 없다는 것은 선사를 무함한 것이 아닙니다. 인교가 있다는 것과 인교가 없다는 것, 선사를 무함했다고 것과 선사를 무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 사이에 하나의 터럭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무릇 천하의 시비는, 이것을 따르면 저것을 위배하게 되고 저것을 따르면 이것을 위배하게 됩니다. 이제 "저쪽을 따른 것도 아니고 또한 이쪽을 따른 것도 아니며 별도로 하나의 의론을 만든 것이었다."고 하였으니, 선사를 무함한 것도 아니고 선사를 무함하지 않은 것도 아니니,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사이에 무슨 하나의 별도의 의론이 있다는 것입니까? 만일 있다고 말한다면 기발할 것이니, 한번 들어보고 싶습니다. 그 때 고상한 의론을 듣지를 못했고 먼저 변론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의(盛意)가 과연 여기에 있는지를 일전에 서로 만났을 때 형도 분명하게 말하지 않아서 마음이 심히 답답했습니다. 요컨대, 이 별도의 의론을 듣고서 서로 함께 설파(說破)해야만 비로소 일이 끝날 것입니다. 어찌하여 명백하게 보여주지 않고 다만 "천하의 의리가 무궁하다"는 말로 활시위만 당겨놓고 쏘지는 않는단 말입니까? 만약 형도 인교에 대해 분명하게 입장을 표명하여 오진영이 형에게 답한 편지의 말이 화반탁출(和盤托出)57)한 것과 같다면, 저 또한 마땅히 함구하고 붓을 놓아 다시는 이 문제로 형에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어찌 반드시 이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시간과 편지 글을 낭비하며 완료하지 못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의리(義利)의 구분을 정밀하게 규명하고 선사의 마음을 깊이 인식하여 충고하는 뜻을 잘 헤아려 분명하게 회답하여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 선사를 무함하는 것은 큰 죄이고 사람을 무함하는 것도 죄입니다. 저는 형이 머뭇거리다가 똑같이 선사를 무함한 것으로 귀결될까 염려합니다. 형은 제가 너무 심하여 혹여 다른 사람을 무함하는 것으로 귀결될까 염려합니다. 둘이 서로 염려하는 것이 모두 다 생각이 있는 것이니, 깊은 교분이 아니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형은 갑자년(1924)에 화도(華島)에서 "유서(遺書)가 나왔으니 음성의 죄가 더욱 무겁게 되었다.[遺書出而陰罪益重]"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정묘년(1927)에는 '불언지교(不言之敎)'를 가지고 저에게 편지를 보내어 "옹서를 보고 더욱 분명하게 깨달았다.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선사를 무함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視甕書,更覺分明,到此地頭,不可不謂之誣師]"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익중(益重)'의 '익(益)' 자와 '갱각(更覺)'의 '갱(更)' 자를 보면 유서 및 불언지교를 보기 전에 이미 그가 선사를 무함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형이 오진영이 선사를 무함했다고 말한 정견(定見)이 단지 10년 전 정묘년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변고가 출현한 시초인 계해년(1923)에 있었다는 것이 됩니다. 이때에는 제가 진실로 형을 위해 염려할 필요가 없었고 형 또한 너무 심하다고 저를 염려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병자년(1936) 겨울에 오진영이 증거로 삼은 선사가 묘적(墓籍)을 허락했다는 것과 이유흥(李裕興)의 편지를 얻고서, "증거가 분명하여 꾸며서 지은 것이 아니다."고 말하고 14년 동안 지켜왔던 정견과 제가 묘적과 원고는 똑같은 사례가 아니라고 한 것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유흥의 편지에는 인가를 받으라는 뜻이 전혀 없었고, 이때에는 또 인가를 받아 인쇄하도록 한 적이 없었다는 의론이 많아서 끝내 이치에 맞는 말에 어쩔 수 없이 복종할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또 "증거가 명백하여 꾸며서 지은 것이 아니다."는 설을 버리고 마침내 "10년 전의 의론이 아니며 또 이전 편지 중의 설도 아니다. 저쪽을 따르지도 않고 이쪽을 따르지도 않고 별도로 하나의 의론을 만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별도로 하나의 의론을 만들었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론인지 모르겠습니다. 우암 선생(尤庵先生)은 일찍이 "양쪽의 사이에서 이랬다저랬다 하는 자는 끝내 반드시 음(陰)과 이(利)와 흑(黑)으로 들어간다.'58)라고 훈계하였습니다. 제가 형을 염려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고, 형이 저를 염려하는 것도 의와 이, 음과 양, 흑과 백을 구별하는 것이 너무 심한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두 다 말하는 가운데에 또한 다른 것이 있습니다. 대저 형이 이처럼 하는 것에 대해 그 마음의 소재를 저는 실로 알지 못합니다. 이전의 견해는 거친 것이 있었지만 만년에는 더욱 정밀해졌다고 말한다면, 형은 젊었을 때에 고명함으로 세상에서 칭송하였으니 사람들이 믿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전에는 분명한 증거가 없었는데 이후에 이를 보았다고 한다면, 제가 변론한 것과 형이 승복한 것이 또한 이와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오히려 시원하게 정견을 회복하지 못하고 스스로 "본디 별도의 의론이 있다."라고 하니, 그 마음의 소재를 저는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비록 그렇지만 40년의 오랜 교분으로도 그 마음을 알지 못한다면 인륜의 변고이니 내가 어찌 감히 형을 의심하겠습니까. 다만 사실에 근거하고 자취를 따르다보니 의혹이 불어남을 면하지 못한 점은 있으니, 나의 밝지 못함을 스스로 한탄할 뿐입니다. 아, 나의 덕이 믿음을 주지 못하여 사람들의 구설이 아직도 여전합니다. 매번 의리와 관계된 것으로 친밀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고하면 말은 믿음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노여움을 사서 끝내 해를 당하니, 근래에 현암(玄岩)의 일 같은 것이 또한 한 가지 사례입니다. 이른바 "임금이 덕을 닦지 않으면 배안의 사람들이 모두 다 적국의 사람이 된다."59)라는 것이 이런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바야흐로 또한 후회하고 함구하여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러나 끝내 측은과 수오의 마음을 천성적으로 타고 난 것을 어찌 할 수가 없어서 다른 사람이 함정에 빠지는 것을 보고 차마 구하지 않을 수 없고 다른 사람의 패악과 망령됨을 보면 미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침에 그러한 행동을 후회했다가 저녁이면 또다시 그러하다."60)라고 경계한 율옹(栗翁)의 말에는 비록 부끄럽지만, "허물을 보면 그 사람의 인(仁)을 알 수 있다."61)라고 한 공자(孔子)의 가르침은 또한 생각해볼 만합니다. 또 형은 본바탕이 자애롭고 어질며 마음 씀씀이가 공평하고 용서를 잘합니다. 말을 하면 믿음을 받는 것은 비록 기필할 수는 없을지라도 노여움을 당하고 해를 받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이 점이 바로 형이 내 마음을 알아주는 벗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감히 마음을 놓고 말하는 것입니다.선사의 원고를 고치는 것은 또한 어떠한 대죄입니까. 다만 인가받았다고 무함함으로써 선사의 전체를 무너뜨리는 죄는 더욱 큰 것이기 때문에 항상 뒤가 되었을 뿐입니다. 일전에 형이 진주본(晉州本)이 수정본(手定本)을 고쳐서 선사의 예의(禮意)와 사실(事實)을 어지럽힌 것을 눈으로 보고 비로소 그 원고를 고친 죄를 알았습니다. 이미 그 죄를 알았다면 성토하고 변론해야 했고, 변론하고 성토할 수 없으면 또한 그만두어야 했는데, 마침내 한 장의 종이에 별도로 쓰기를 "장차 권순명(權純命)에게 묻겠다."라고 하였습니다. 권순명과 오진영이 만약 "이리 고쳐야만 완벽하다."고 한다면 형도 장차 그렇게 여기겠습니까? 저는 형의 마음 씀이 이와 같은 부분에 대해 심히 복종하지 못하겠습니다. 또 만약 본문을 완벽하다고 여긴다면 선사의 문장을 고칠 이치가 천하에 어디 있겠습니까? 원래 이런 이치가 없기 때문에 일전에 형과 제가 선장(先丈)의 시고(詩稿)를 받들어 읽고 그 온당하지 못한 글자가 있더라도 끝내 감히 손을 대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오진영이가 선사의 원고를 고친 것에 대해 변론하고 성토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고 그에게 물어서 그 설을 듣고자 하니, 이것은 진실로 무슨 뜻입니까? 형이 제가 오진영을 변론하는데 힘쓰는 것과 관련하여 다른 사람에게 "이런 정력을 공부에 옮겨 쓴다면 어찌 좋지 않겠는가?"라고 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있었다면 형은 우선 말씀해 주기 바랍니다. 시비(是非)를 밝히고 사정(邪正)을 분별하여 격물치지를 기르는 것과 사문(師門)의 도리를 보호하고 제자(弟子)의 직분을 닦아서 윤리를 다하는 것이 공부가 아니겠습니까? 만약 이것 외에 공부로서 학문을 하는데 해롭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한번 듣고 싶습니다.오진영이 지산(志山)을 대한 것에 대해서는 내가 꼭 말할 필요가 없고, 다만 갑자기 관계를 끊었다가 갑자기 달라붙기도 하면서 이를 통해 혹은 사람을 빠뜨리는 함정을 만들기도 하고 혹은 사람을 유혹하려는 계제로 만들기도 하였는데, 이것이 가증스러울 뿐입니다. 심술(心術)의 교활하고 험악함이 이와 같고 보면, 그가 인설(認說)에 대해 이미 불가하다고 여겨 자기 죄에서 빠져나갔다가 곧이어 가르침을 따른 것이라고 하면서 선사에게 죄를 씌운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대체로 근본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언행이 있었던 것입니다.근래 북도(北道)의 동문 천하운(千河運)이 나를 찾아왔습니다. 나와 천하운이 말을 나누다가 오진영의 편지에 인가를 받는 것은 진실로 불가하다고 하였다가 또 "원래 선사의 불언지교를 따랐다."고 운운한 대목에 이르자, 천하운이 말하기를 "이런 이유로 나 또한 자기 발등을 찍는 일이라고 비판을 하였다."고 운운하였습니다. 그가 '자기 발등을 찍는 일이다.'고 한 것은 바로 내가 "그의 말로 인해서 그의 죄를 정하였다.'고 말한 뜻입니다. 저 먼 고장에서도 오히려 이와 같은 공론이 있었습니다. 형은 호남에 살면서 이 중의 의리를 익히 들었고 그의 정상을 깊이 알고 있는데도 오히려 저의 변론이 비정하다고 하니, 진실로 무슨 소견인지 모르겠습니다.사문(斯文) 이기완(李起完)은 자(字)가 원호(元浩)이고 임실군(任實郡)의 명망있는 선비입니다.【지금 재종제(再從弟) 오해준(吳海準)의 처종형(妻從兄)이다.】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남원(南原) 월곡(月谷)의 정모(丁某)는 나의 종질(從姪)의 사위입니다. 정모가 '오석농(吳石農)이 나를 보고 〈선사가 원래 원고를 인가받으려는 뜻이 있었다.〉 하였다.'고 운운하였습니다. 내가 듣고서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정모에게 말하기를 '나도 일찍이 간옹을 모시며 덕을 보고 말씀을 들어서 그 마음을 알고 있었다. 간옹이 어찌 이런 말을 했겠는가.'라고 운운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기완은 문인이 아닌데도 오히려 간옹의 마음을 알아서 분함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형은 문인으로서 음성의 무함을 미워할 줄도 모릅니다. 아, 사람의 견해가 같지 않음이 이와 같단 말입니까?작년에 오진영이 송병진(宋秉眞)에게 "선사가 평소에도 원고를 인가받으려는 뜻이 있었다."고 하면서 아무개의 말과 모종의 일을 인용하여 증명을 하자, 송병진이 말하기를 "만약 이와 같다면 간옹도 파쇄당할 것이다."라고 하니, 오진영이 감히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는 성산(惺山) 임종두(林鍾斗)가 송병진에게 듣고 변문(辨文)에 올린 내용입니다. 오진영의 무리는 "송병진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라고 하면서 가리고 숨겼습니다. 지금 그가 정모와 나누었던 말을 들으니, 이는 그가 다반사처럼 말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송병진에게 한 말도 숨길 수 없었으니, 만약 성토하는 군인을 지금 풀어 놓는다면 정모와 나눈 말도 감히 드러내지 못하고 숨기려 들 것입니다. 변론하고 성토하는 공로가 이와 같은 자가 있는데도 알고 있는 자가 매우 적으니, 진실로 개탄스럽습니다.형은 매번 '강태걸(姜泰杰)이 기소한 일은 어찌 음성(陰城)이 시켜서 한 것이겠는가. 자취를 살펴보고 실상에 의거해보면 아무래도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형의 말씀과 같다면, 정재장(靜齋丈)이 오진영에게 보낸 편지가 어찌 검국(檢局)에 들어가서 강태걸을 증명하는 편지가 되었겠습니까? 오진영과 가장 친밀하다는 권순명(權純命)은 어찌 검국(檢局)에 들어가서 강태걸(杰)을 증명하는 사람이 되었겠습니까? 하물며 강태걸은 오진영의 문인으로서 "오진영의 명을 받들어 인쇄한다."고 했던 말이 강태걸의 광고문(廣告文) 중에 있으니 더욱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형은 늘 이와 같은 곳에서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하고 의도적으로 공평하게 하려고 힘을 씁니다. 이것이 저가 따를 수 없는 곳입니다."선장(先丈)의 문자 일은 앞뒤의 의론이 서로 다름을 면치 못한 것은 혹 효사(孝思)에 유감이 될까 해서 편지 서두에 '송(悚)' 자를 썼던 것입니다. 보내온 편지에 …… 소견을 고치고 이치를 따르는데 조금도 인색하지 않는 것에 모두 탄식하고 우러르니, 매우 성대하고 매우 성대합니다." 이는 연전에 오진영이 저에게 답장한 편지 내용입니다. 내가 만약 전표(傳表)를 희롱하여 그에게 수정을 당한 것이 지금 그가 이 편지 중에 "앞뒤의 의론이 서로 다름이 송구하다."라고 말한 것처럼 한다면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내가 만약 전표의 혐의 때문에 의리를 빌려서 보복하기를 지금 그가 이 편지 중에 "많은 사람들이 모두 탄식하고 우러른다."라고 말한 것처럼 한다면 또한 그가 무어라 말하겠습니까? 이는 또한 마땅히 그의 앞선 편지 중의 말로 지금 사람을 무함한 죄를 다스려야 할 뿐입니다. 日者造廬,以哀兄四十年舊交,隨例吊慰,情有未盡,卒哭後一問,在所不已。亦以弟自今年,百病交侵,死亡無日,昨歲往復未了之案,不及歸一而逝,則誠爲千古之恨。十書不如一面,而哀兄守廬三霜,亦云"長歲月,非弟親造,何以面究?" 所以扶病冒熟,顚倒間關,得以一晝夜盡心輸誠,弊舌渴口,冀復"不可不謂誣師"之定見。令再從翼夫在傍,亦言"若言艮翁有認敎,則大損節義",而兄終不快答。歸時,請從近以書見意。又未知兄果能亟圖,而遽遽歲月,不爲人留,病牕獨坐,懷不知裁,玆不免以書質之。自知躁急,爲人可憎,然我死之後,亦無爲兄救拔如我者矣。昨年,兄之最後書云: "旣非十年前不可不謂誣師之論,又非前書中證據明非白撰之說。旣不從彼,又不從此,而別爲一論。" 蓋非誣師之論,則是謂師有認敎也; 非證據明非白撰之說,則是謂無證白撰而無認敎也。有認敎者,誣師也; 無認敎者,非誣師也。有認敎無認敎,誣師非誣師之間,間不容髮。凡天下是非,從此則違彼,從彼則違此。今曰"旣不從彼,又不從此,而別爲一論",則未知非誣師,非非誣師,非此非彼之間,有何別般一論耶? 如曰有之,厥亦可奇,願一聞之。那時未及聞高論,而先有所辨。然未知盛意果在於此,日者相晤,兄亦不明言,心甚爲菀。要之聞此別論而相與說破,然後始得了事矣。何不明白示及,而但以"天下義理無窮"之語引而不發乎? 若兄亦明言認敎,如震答兄書中語之和盤托出,則弟當緘口閣筆,不復以此爲兄告矣。何必如此支離,費得時日書詞而莫之了耶? 惟願精究義利之分,深識先師之心,善諒忠告之意,明以回示也。嗚呼,誣師大罪也,誣人亦罪也。吾則慮兄之依違而同歸於誣師。兄則慮弟之已甚,而或歸於誣人。兩相爲慮,俱皆有思,非深交,烏能至此? 然兄於甲子華島,不曰"遺書出而陰罪益重"乎? 丁卯,以"不言之敎"與弟書,不曰"視甕書,更覺分明,到此地頭,不可不謂之誣師"乎? 觀"益重"之"益"字,"更覺"之"更"字,則見遺書及"不言之敎"前,已知其爲誣師矣。是則哀兄謂震誣師之定見,非但在十年前丁卯而己,在變出之初癸亥矣。是時,吾固不須爲兄慮,而兄亦不以已甚慮弟矣。乃於丙子冬,得震所證先師墓籍之許及李裕興書,謂"證據明非白撰",而棄十四年所守之見及其被弟墓與稿之非一例。李書之絶無認意,是時亦多無認印之辨,而終無柰難不服於理到之言,則又棄"證據明非白撰"之說,而乃曰"旣非十年前論,又非前書中說,旣不從彼又不從此,而別爲一論"。吾未知"別爲一論"者,究竟何論,而尢庵先生嘗有"依違兩間者,終必入於陰與利與黑"之訓。我之慮兄,正在於此,兄之慮我,亦在於別白義利、陰陽、黑白之已甚。然則俱皆有辭之中亦有可異者存焉。大抵兄之所以如此者,其心所在,我實不知。謂前見粗在而晩覺更精也,則兄之早年高明,世所稱道,使人見信難矣; 謂前無明證,而後乃見之也,則弟之所辨,兄之所服,又如此矣。而猶不快復定見,而云"自有別論",其心所在,我實不知。雖然,以四十年舊交,而不知其心,則人倫之變,吾豈敢疑兄? 但據實因跡而不免滋惑則有之,自恨吾之不明而己。嗟呼,吾德未孚,人口舌是尙,每以義理之關,告於親密之地,則言不見信,反見其怒,而終之受害,如近日玄岩事亦一也。所謂"君不修德,舟中之人,皆敵國者",非此耶? 方且噬臍咋舌,誓不復然。然終無柰惻隱羞惡得之於天,見人陷溺而不忍不救,見人悖妄而不能不惡。"朝悔其行,暮己復然",栗翁之言,雖可慙; "觀過 斯知仁",孔子之訓,亦可思。且若哀兄者,慈諒成質,平恕爲心,言之見信,雖不能必,見怒受害,決無有是此。則自信爲兄知心之友,故敢放心言之耳。改師稿,亦何等大罪? 特以認誣壞却先師全體之罪,有尢大者,故常爲後焉耳。日前兄目見晉本之改手本而變亂先師禮意事實者,始知其改稿之罪。旣知其罪則討之辨之,不能辨討則亦己焉矣,乃別錄于一紙曰: "將以問諸權純命。" 權、吳若曰"以此改之然後盡善"云,則兄將以爲然乎? 吾於兄之用心如此等處,深所不服。且若果盡善於本文,則天下有可改師文之理乎? 惟其元無此理,故日前兄與弟奉閱先丈詩稿,其有未稳字,終不敢犯手者,此爾。今於震之改師稿也,非惟不辨之討之,乃欲問諸彼而聞其說,此誠何意? 如聞哀兄以弟之力於辨震語人曰: "以此精力移用於工夫,則豈不善乎?" 有諸? 有之,兄且道! 明是非、分邪正以長格致,閑師道、修弟職以盡倫理,非工夫乎? 如有外此而可謂工夫不害爲學問者, 願一聞之。震之所以處志山者,吾不必言,特以其乍絶乍附,或以爲陷人之穽,或以作誘人之機者,爲可惡耳。心術之巧險如此,則其於認說,旣以爲不可而脫己罪,旋以爲從敎而加先師者,益以明矣。蓋有是本源,故有是言行也。近見北道同門千河運來訪。余與千語及震書旣以認爲誠有不可,又曰"原從先師不言之敎"云云。千曰: "所以吾此亦有自斧自削之評云云。" 其云"自斧自削"者,卽吾所謂"因渠言定渠罪"之意也。逖矣此方尙有公論如此,兄居湖南習聞此中義理,深知彼之情狀,而猶以吾辨爲非情,誠不知何所見也。李斯文起完,字元浩,任實郡望士也,【今再從弟海準妻從兄】對弟言: "南原月谷丁某,吾之從姪女壻。丁言: '吳石農見我言先師原有認稿之意云云。' 吾聞之,不勝憤氣,謂丁曰: '吾亦嘗侍艮翁,觀德聽言而知其心矣。艮翁而豈有是耶云云。" 李非門人,猶知艮翁之心而不勝憤氣。兄乃以門人而不知惡於陰誣,嗟呼! 人見之不同乃如是乎?震昔年對宋氏秉眞言"先師平日有認稿之意",引某言某事證之。宋曰: "若如此則艮齋破碎矣。" 震不敢復言。此惺山林丈【鍾斗】聞於宋而登諸辨文者也。震徒云"宋不知何許人"而掩諱之矣。今聞其所與丁某言者,則可知是渠茶飯語。而對宋之言掩諱不得,如使聲討之軍,至今用張,則與丁之言亦不敢露出矣。辨討之功有如此者,而識者甚少,良可歎也。哀兄每言: "杰之起訴,豈陰所使然? 因跡據實,終有不然者。" 若如兄言,靜丈與震書,胡爲入檢局而作杰證書乎? 震所最親密之權純命,胡爲入檢局而作杰證人乎? 而况杰是震之門人而"承吳先生命而印之"之語在杰廣告文中乎? 兄每於此等去處,不能物各付物,而費力於有意爲公,此吾所不服處。"先丈文字事,未免前後貳論,或得致憾孝思,書首所以下得悚字。來書云云衆咸歎仰於不少吝於改見從理,甚盛甚盛。" 此年前震之答弟書也。我若幻弄傳表,被渠釐正,如今渠說此書中"前後貳論爲悚"之云,何以區處? 我若爲傳表之嫌,而假義報復,如今渠說此書中"衆咸歎仰,甚盛甚盛"之云,又何以出於渠口也? 此亦當以渠前書中語治今誣人之罪己矣。 화반탁출(和盤托出) 음식물을 소반에 차려서 들고 나온다는 뜻으로, 일체 남기지 않고 드러냄을 이른다. 양쪽의……들어간다 우암 송시열은 " 대개 인정이 이를 편안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음과 양이 있고, 일에는 의와 이가 있으며, 물건에는 백과 흑 이 있는데, 이는 일상생활 속에 늘 서로 접하는 것이니, 너희들은 경계하라."라고 하였다. 《송자대전(宋子大全)》 권134 〈시제자손질손등(示諸子孫姪孫等)〉 임금이……된다 전국 시대 위(魏)나라 무후(武侯)가 배를 타고 서하(西河)의 중류(中流)를 내려가다가 오기(吳起)를 돌아보고는 산천이 험고한 것이야말로 위나라의 보배라고 자랑하자, 오기가 "사람의 덕에 달려 있지, 산천의 험고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통치자가 덕을 닦지 않으면 이 배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적국의 사람이 될 것이다.[在德不在險, 若君不修德, 舟中之人盡爲敵國也]"라고 대답한 고사가 전한다. 《사기(史記)》 권65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 아침에……그러하다 《격몽요결(擊蒙要訣)》 〈혁구습장(革舊習章)〉에 보인다. 허물을……있다 공자는 "사람의 허물은 각각 그 무리에서 나오는 것이니, 허물을 보면 인을 알 수 있느니라.[人之過也, 各於其黨, 觀過, 斯知仁矣]"라고 하였다. 《논어(論語)》 〈이인(里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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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익에게 답함 答吳士益 戊寅 무인년(1938) 이달 초에 고창(高敞), 무장(茂長) 등지로 조문을 갔다가 10여 일 만에 돌아왔더니, 보내주신 편지가 먼지가 덮인 책상에 놓여 있었습니다. 손을 바삐 놀려 열어서 읽어 보니, 바로 3년 동안 끝나지 않은 안건이 하루아침에 정해지고, 여러 차례의 편지로도 해결되지 않았던 의혹이 한 마디로 결정되었습니다. 일이 중대하여 그대로 그만둘 수 없던 것이 오늘 이후로는 같은 의견으로 귀결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이고 얼마나 기쁩니까. 아, 이 기쁨은 공적인 것이기도 하고 사적이기도 한 만큼 이러한 때의 이러한 기쁨은 선사의 영령께서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또 형을 알기 전이었기 때문에 마음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어서 감히 억지로 따르지 못한 것이지 애초에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의심이 풀려 형을 따르게 되었으니 형을 아는 것이 틀림없이 더욱 견고해져서 10년 전에 논정했을 때와 같을 뿐만이 아닙니다. 가부를 살피지 않고도 한결같이 견해가 같은 것을 보게 된 만큼 그 기쁨이 오히려 다시 더해졌습니다. 이것은 대개 형의 본 바탕이 매우 높아서 범공(范公)의 이른바 "그 중하게 여긴 것이 여기에 있다."라는 것62)과 퇴계(退溪)의 이른바 "뜻이 도를 밝히는 데 있어 사사로운 뜻이 없다."63)라고 한 것과 같은 태도를 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잘것없는 제가 그 사이에서 힘을 쓴 것은 아니고 바로 벗 사이에 강마(講磨)한 힘은 속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보잘 것 없는 편지를 보냈는데 훌륭한 편지로 답장해주신64) 성대한 은혜를 감히 감당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있었는데 너그럽고 부드럽게 잡아주시면서 연연해 한 바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병에 따라 약을 주신 것이라서 마음속으로 감격하고 있으니 어찌 입으로만 감사드릴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제가 선사의 무함을 변론하는데 힘을 쓴 것에 대해 "그의 공격에 보복하고 자신을 위해 도모하는 마음에서 나왔다."고 하고, 마침내 "한 번 주먹으로 치고 한 번 발로 차다가 죽게 되더라도 저버리지 않겠다는 마음은 절대 사군자의 도는 아니다."라고 경계하였습니다. 아! 저의 병통을 깊이 아시는 안목으로 오히려 저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우옹(尤翁)이 박화숙(朴和叔)에 대해서, 선사가 신앙여(申仰汝)에 대해서 매번 '스스로 편의(便宜)를 차지하고 사설(邪說)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책망했습니다. 내가 만약 자신을 위해 도모하는 마음에서 나왔다면 어찌 일찍 박화숙과 신앙여가 스스로 편의를 차지한 태도를 배우지 않고 애써 이렇게 하면서 생사를 돌아보지 않았겠습니까. 다만 스승이 있다는 것만 알고 내 몸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선사와 직접 관계되지 않고 내 몸과 관계된 것은 일체 일삼지 않았습니다. 비록 차마 똑바로 볼 수 없었던 김세기(金世基)의 흉악한 무함에 대해서도 저는 함재장(涵齋丈)이 사람을 시켜 통문을 돌려 대변(對辨)하도록 한 가르침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형이 근래에 알고 있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제가 주먹질하고 발길질하며 저버리지 않으려 한다고 하십니까? 月初出吊於高、茂等地,凡旬有餘日而返,則惠疎留在塵案。忙手開讀,乃三年未了之案,一朝而定; 累書未解之惑,一言而決。事係重大而不容但己者,今焉而後同歸一轍,何幸如之! 何喜如之! 噫,此喜者爲公乎? 爲私乎? 此時此喜,先師之靈亦應喜之。抑以知兄之前,有所疑於心,而不敢强焉而從之,初非有他意也,則今之疑鮮而見從也,知之必益堅固,不但如十年前論定時而己。視不相可否而一例同見者,其喜反復勝焉。此蓋兄本質懇高,范公所謂"所重在此"、退溪所謂"志在明道而無私意"之致。然非區區有力於其間,乃謂朋友講磨之力不可誣也。 旣是愧不敢當承得瓜報琚之盛惠,見規以寬裕和平,無所係緣,此眞對病之藥石,中心感之,何用口謝? 但以弟之力於辨誣,爲報彼之攻擊而出於爲身謀之心,卒戒以一拳一踢抵死不負之心,殊非士君子之道。噫! 以兄深知弟病之眼,尙淺知弟心者,何也? 尢翁之於朴和叔,先師之於申仰汝,每以"自占便宜不攻邪說"見責。我若出於爲身謀之心,何不早學朴、申之自占便宜,苦苦爲此而不顧死生耶? 惟其但知有師而不知有身,故凡不直係先師而關於吾身者,一切無事。雖以世基凶誣不忍正視者,不從涵丈令人發通對辨之喩。此兄近日所知,何以謂拳踢不負也? 범공(范公)의……것 범공(范公)은 범조우(范祖禹)를 가리킨다. 주희가 범조우에 대해 논한 내용 가운데 "일이 일어난 당시에 판별하지 못하고 몇 해 뒤에야 밝혔으니, 이는 강단이 부족하여 정이(程頤)와 소동파(蘇東坡) 양쪽 모두를 따르려는 사심을 면치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중하게 여긴 것이 여기에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의리의 공변됨을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不能辨之於當時, 而發之於數年之後, 此則剛强不足, 不免乎兩徇之私者. 而其所重在此, 故卒不能其義理之公也]"라고 한 내용이 있는데 이것을 인용한 것이다. 《朱子大全(주자대전)》 권35 〈답여백공(答呂伯恭)〉 뜻이……없다 이황의 〈답기명언(答奇明彦)〉에 "뜻이 도를 밝히는 데 있어 피차에 사사로운 의도가 없다면 반드시 하나로 일치할 날이 있는 것이니(志在明道, 而兩無私意者, 必有同歸之日.)"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 부분을 원용한 것으로 보인다. 《퇴계집(退溪集)》 〈답기명언(答奇明彦)〉 보잘 것……답장해주신 원문은 '得瓜報琚'이다. 《시경(詩經)》 〈목과(木瓜)〉에 "나에게 목과를 주거늘 경거로써 갚는다.[投我以木瓜 報之以瓊琚]"는 내용이 있는데, 여기에서 '경거(瓊琚)'는 상대방의 시문을 뜻하고 '목과(木瓜)'는 자신의 시문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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挽卞丈【文華】 古來稀七十。隆耋已昃嗟。孝者原百行。鄕里亦稱嘉。生順沒而寧。在公何憾有。顧念平昔時。視我忘年友。年年省墳路。扶老過獘廬。較年邁一甲。筋力百勝余。每歎稟氣厚。意謂耋與期。遽聞音不淑。命矣胡至斯。佳城啓有日。白馬愧未追。聊托短篇寫。潸然不禁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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卷之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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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蘆沙先生書【庚午】 拜退月改。此歲將除。休未審氣體候得無過損否。復陽已動。泰運將回。伏慕之餘。且祝嘏不任。門下生奉老歲迫。百感交集。而況過此一年。年當四十矣。今而後始知先聖不足畏之訓。爲切已之責也。然此指其不足畏之已成者而言。若推其漸。則何必待四十五十。然後爲不足畏也。已自基本於二十三十前時節矣。曾讀魯論。至此語。泛若爲人發者。安知今日乃我之謂也。深愧深懼。有非尋常過歲時比也。東塢記云云。常知有己。爲己由己之謂。舍己從人。遷善從善之謂。而免矣。免其不能斯二者之謂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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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李南坡【僖錫】書【戊子】 客于福林山亭。三箇月于玆。俗節情遠。恰似入定僧一般。日與數三童子爲得友。而恒切離索之苦。謂外賢或。迤邐抵此。乃得奉袂。始聞先生寢食起居之詳。於是始知三箇月之不虛過也。仰而賀俯而慰。無以爲喩。更伏問臘寒殿酷。隆耋氣力。無或添損。遠外伏慕。朝晡靡懈。生素以蒲柳孱質。妙齡旣失勤篤工夫。無所依據。一自先師棄去。去益滅裂苟簡。今則年力又非前日之比。小人之歸決矣。自顧虛名托籍。玩愒至此。其辜負於先師門者。尤不淺尟。極涉汗悚。況几杖遠隔十舍。步武不相接。旣乏策驢之誠。徒切羈羽之歎。古人所謂疑誰之質。過誰之規。眞不我欺也。奈之何奈之何。去年春。始謀諸士友。縛得數間屋於溪上小塢。畢生藏修之計。於斯足矣。年侵又魔。不能長守。伏歎何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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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李太守【東奭】書【癸酉】 毅坤稽顙再拜言。毅坤罪逆深重。禍延先妣冤痛割裂。不能自存。日月如駛。奄經襄事。音容永隔。痛苦終天。伏蒙尊慈䫍賜慰問。兼貺新蓂。拜領號絶。哀感不任。況伏審千里脩程。五馬利旋。視篆氣力。間以宿祟愆損。伏慰旋慮。不啻千萬。陽泰初復。只冀隨序康復。不備疏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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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李太守【載哲】書【己丑】 蘭焚玉碎。聞之者孰不歎惜。竊伏念閤下白首螟嗣撫靡之煦嫗之。親愛未艾。遽失之於眼下。人理之痛毒。情景之慘酷。殆非恒人所値之可比者。當以何辭仰慰。然此皆人情邊語。非達理語也。凡物有生之初。氣稟不齊脩短自定。而人苦不自知耳。是以以孔朱大聖大賢。猶不得免焉。況其他哉。惟冀百道寬譬。十分理遣。無以無益之悲。被傷天和。是所區區。更伏問卽辰視篆。氣體候無至添損。伏慕且祝。有倍平品。毅坤聞此以後。卽當齎刺趨慰。而長時漳濱。不能振刷。尙未之遂。是罪是罪。安敢望善恕也。不備。伏惟下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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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潭陽田氏刊所【庚寅】 地步不相接。後屬稍遠。問聞不相及者。已幾世矣。謂外惠寄二冊。而奉審則乃是田先生三隱合稿也。光榮何如。俯而讀仰而思。先世淵源遺蹟。瞭然如昨日事。旋覺愴感。今而後。三隱先生卓節至行。可與日月竝明於鰈域。何幸何幸。然此豈但尊門之幸也。實是斯文之幸也。拱賀萬千。伏惟寒令。僉體動止鄭重。遠溯且祝。生一是碌碌。何足奉塵。但從今以後。源源合講世誼。尤慰尤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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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梁子克【疇黙◎丁亥】 嚮於春駕委枉。略聞搬移整頓。重堂定省一安。何慰如之。卽又獲承手畵。仰審大都諸節。與往時無損。實協宿禱。尤以聳賀。但來書稱題過格。擬人非倫。令人慚汗。無以爲顔。來頭往復。切勿用此等規。如何如何。毅日事漳濱。頓無好況。良苦良苦。紙東翔貫之物。致此遠惠耶。來月惠顧。豫切欣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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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자정에게 답함 與趙子貞 庚辰 경진년(1940) 일전에 보여준 선사 어록(語錄) 3책에서 현제(賢弟)가 당일에 선사를 믿고 학문에 힘쓴 뜻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만약에 잘 윤색하여 후세에 전한다면 또한 배우는 자들에게 공이 있을 것입니다. 다만 선사의 말씀을 귀로 들은 지가 오래 되었으니 추후에 윤색을 하다보면 본래의 뜻을 잃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하물며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릴 수가 있겠습니까? 요컨대 담당하는 사람이 스스로 해야 하고, 문자를 고칠 즈음에는 반드시 당일의 어순과 문맥을 신중히 생각하여 털끝만큼도 틀리지 않게 해야만 될 것입니다. 무릇 강학(講學)과 아언(雅言)에 관계된 것도 오히려 그렇게 해야 하는데, 하물며 인사의 득실과 실제를 논한 것이야 더욱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예컨대 어록 중에 음성의 오진영이 파리장서(巴里長書)를 염치없이 받든 일을 논한 것 같은 것은, 본문에는 "장서가 전달되지 않아서 다행히 큰 화가 없었다.[書之未傳,幸無大禍]"로 되어 있는데, 지금 모인(某人)은 '미전(未傳)'을 '미발(未發)'로 고쳤으니, 이것은 글자 한 자의 차이로 천 리나 어긋나게 된 것입니다. '미전'이란 글이 비록 발송됐다 하더라도 아직 전달되지는 않았다는 것이고, '미발'이란 글이 비록 완성되었지만 미처 발송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곳은 관계된 바가 가볍지 않으니, 더욱 다른 사람이 그 사이에 손을 쓰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본문에 의거하여 '미전'으로 해야만 지극히 옳고 지극히 옳습니다.군주를 시해하는 것은 최상의 큰 죄악입니다. 곽광(霍光)의 처가 허후(許后)를 독살하였는데,70) 곽광이 그 죄를 숨기고 발설하지 않았으니, 곽광의 죄도 또한 컸습니다. 그러나 《한서(漢書)》를 지은 자는 이것 때문에 곽광의 전(傳)을 세우지 않은 것은 아니었고, 사람들은 그가 국가에 크게 공이 있다고 일컫게 되어서는 또한 이윤(伊尹)과 병칭71)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어떤 사람이 일컬을만한 일이 있음에도 처의 죄에 연좌되어 전을 세우지 않는 것이 되겠습니까? 더구나 부인이 죄가 있는지 없는지 본디 애매하여 외부 사람들이 자세히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남편도 알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더욱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의당 처로 인하여 그 사람을 배척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처의 죄와 아울러서 풍문으로 전하는 말을 깊이 믿어서는 안 됩니다.김성구(金聖九)가 평상시 선사를 지극히 존경하고 사모하였는데, 둥글게 상투를 틀고 치포관을 쓰며 항상 넓은 소매의 옷을 입어 한결같이 선사의 법도를 따랐습니다. 또한 성리(性理)의 근원에 대해서 가정(家庭)의 호론(湖論)을 지키지 않고 선사의 낙론(洛論)을 따랐으니, 비록 친문인(親門人)이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이미 가마(加麻)72)의 복(服)을 행하고 하관(下棺)하는 자리에도 참여했으니 문인과 똑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후에 또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근래에 문인의 예로써 유림동(流林洞)에 있는 간옹의 사당을 배알하였는데, 특별히 음성 사람이 간옹을 무함한 것을 배척했다는 이유로 그에게 미움을 받아서 내침을 당했습니다."고 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비록 현제가 친하게 지내는 아무개 같은 자도 한쪽의 말을 익숙히 듣고서 의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현동(玄洞)의 선사 묘소에 전배(展拜)할 때에 샘솟듯 눈물을 흘리고 실성할 정도로 곡을 하였으니, 참으로 이와 같은 경우처럼 사람이 따르는 바를 신중히 하고 그 보는 것을 공평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대가 또 말하기를 "친문인 가운데 3년 후에 샘솟듯 눈물을 흘리고 실성을 하는 자가 또한 몇 사람이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김성구는 인의의 성품을 발휘하는 것이 다른 사람보다 배나 되므로 비록 친문인은 아니더라도 능히 이와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 선사의 고도대절(高道大節)로도 천고에 없던 무함을 받았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김성구가 현인을 사랑하는 어짊과 무함을 통분한 의리에서 발로되어 샘솟듯 눈물을 흘리고 실성을 한 까닭입니다. 그대가 생각해봐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日前所示先師語錄三冊,可見賢弟當日信師勉學之意,若善加修潤而傳後,亦可有功於學者。但聽言日遠,追後潤色,恐失本旨,況可借他人乎? 要之當人自爲,而改竄之際,須愼思當日語脈,不爽毫髪, 然後乃可耳。凡係講學雅言猶然,況其論人事得失實際者乎? 如錄中所論陰震巴里冒銜之事,本文以"書之未傳,幸無大禍", 今某人改"未傳"爲"未發",則是一字之異,千里之繆。"未傳"者, 書雖發而未及傳逹也; "未發"者, 書雖成而未及發送也。如此等處,所係不輕,尤不容他人之容手於其間也。自當依本文爲"未傳",至可至可。弒君, 無上大惡也。霍光之妻,毒弒許后, 光匿其罪而不發, 光罪亦大矣。然而作《漢書》者,不以此不立霍光傳,而人稱大有功於國家,則又不與伊尹并稱乎? 然則今有人有可稱之事,而連坐妻罪,不爲之立傳,可乎? 況婦人之有罪無罪,自屬曖昧,而非惟外人之所不可詳,亦有其夫之所不可知者乎? 然則非惟不當因妻而斥其人,并與其妻罪,而不當深信於風說也。金聖九平日於先師極其尊慕,而其圓髻緇撮,常著廣袖,旣一遵先師規模, 又於性理源頭,不守家庭之湖論,而從先師之洛論,雖親門人,何以加此? 旣行加麻之服而參會下,同於門人矣。後又抵余書云: "近日一門人禮,往謁艮翁祠廟於流林洞,而特以排斥陰人誣之, 故爲其所惡而外之。" 是故雖以賢弟所親如某也,亦不免習聞一邊說而至疑。其展拜玄阡日, 淚湧如泉, 哭之失聲。信矣哉! 人之不可不愼其所從而公其所見,有如是也。賢弟且道: "親門人之淚泉失聲於三年後者,還有幾人?" 惟聖九發得仁義之性,有加於人, 故雖非親門人,能如是矣。鳴呼! 以先師高道大節,蒙誣千古,豈不悲哉? 此聖九之哭之淚泉失聲,所以出於愛賢之仁、痛誣之義者也。賢弟思之,不其然否? 곽광(霍光)의……독살하였는데 곽광(霍光)은 한(漢)나라 무제(武帝)·소제(昭帝)·선제(宣帝) 때 사람으로 자는 자맹(子孟), 시호는 선성(宣成)이다. 무제(武帝)의 유조(遺詔)를 받아 소제(昭帝)를 보필하였고, 또 소제가 죽은 뒤에 창읍왕(昌邑王)을 영립(迎立)하였다가 폐위시키고 선제(宣帝)를 영립하여 국권을 장악하였다. 그의 아내는 곽현(霍顯)이다. 그녀는 자기 딸을 귀인(貴人)으로 만들기 위하여 허후(許后)가 출산할 때, 유의(乳醫)를 시켜 독살하였다. 《한서(漢書)》 권68 〈곽광김일제전(霍光金日磾傳)〉 이윤(伊尹)과 병칭 '이곽(伊霍)'으로 일컬어지는 것을 가리킨다. 이윤(伊尹)은 은(殷)나라의 재상으로서 태갑(太甲)을 동궁(桐宮)에 내쳐 악행을 바로잡은 일화가 있고, 곽광은 창읍왕(昌邑王)을 폐하고 선제(宣帝)를 세웠는데, 이 둘은 무도한 임금을 내친 대표적인 인물로 칭송되었다. 이미 가마(加麻)의 복(服)을 행하고 문인(門人)이 스승의 상(喪)에 심상(心喪)을 입는 표시로 겉옷에 삼베 조각을 붙이는 것이다. 《국역 농암집》 제36권 〈부록(附錄) 연보 하(年譜下)〉에 "〈김창협의〉부음이 전해지자 조정과 초야에서 모두들 서로 조상(弔喪)하였고, 원근의 선비들이 달려와 슬픔을 다해 곡하였으며, 문인들 중에 가마(加麻)하는 이가 6, 7십 명이나 되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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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자정에게 답함 與趙子貞 甲申 갑신년(1944) 영자부(令子婦)의 묘문(墓文) 중에 '하종(下從)' 두 글자는 마땅히 고쳐야 하니, 근간에 과연 고쳐 새겼는지 모르겠습니다. 대개 '하종'이라는 문자가 어느 책에서 시작되었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남편의 죽음에 따라 죽는다는 명칭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사람들 간에 이견이 없습니다. 남편이 죽은 부인에게는 열행(烈行)이 큰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은 한갓 하종의 열행만 알고 수절(守節)의 열행은 알지 못합니다. 원래 하종의 열행이 수절하는 것만 못하고 시부모를 봉양하고 후사를 세우는 것이 최선의 열행이 되는 것은 알지 못합니다. 또한 주자(朱子)가 《소학(小學)》을 편찬한 때에 제일 앞에 진 효부(陳孝婦)76)를 기재하면서 하종에 대해서는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만은(晩隱) 황전(黃㙻)의 말이 훌륭한데, "세상에 열부(烈婦)로 이름이 난 자는 많다. 그러나 그 중에 남편이 비명에 죽었거나 혹은 적에게 겁탈을 당해 의리가 아니어서 이 때문에 죽는다면 우뚝한 일이다. 만약 부부의 정을 참지 못하고 한갓 하종만 하고 다시 아비 잃은 아이를 돌보고 후사를 세워서 남편 제사를 전하도록 하지 못한다면, 이는 다만 그 남편이 아내만 좋아했다는 것을 드러낼 따름이니, 또한 어찌 무슨 아름다움이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주자의 뜻도 마땅히 또한 이런 것이었습니다.대저 금석(金石)의 문자는 마땅히 사실을 써야 합니다. 영자부가 어찌 아프지도 않았는데 남편이 죽은 지 20일 만에 죽었겠습니까? 비록 하종의 열행이 지극한 것이더라도 진실로 감히 사실과 어긋나게 그 내용을 부풀려서는 안 됩니다. 하물며 지극하지 않은 경우에야 더욱 말할 것이 있겠으며, 하물며 영자부가 병석에서 "제가 비록 박명이나 병이 나아서 뱃속의 아이를 순산하여 지아비의 후사를 있기를 바랍니다."라는 말이 있었으니 더욱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묘에 비(碑)를 세우는 것은 선행을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장점은 가리고 그 단점을 거짓으로 썼으니, 혼령이 알게 된다면 어찌 지하에서 한스럽지 않겠습니까? 글을 지은 사람이 이처럼 호도(糊塗)할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대개 남편이 죽고 오래지 않아서 죽은 것을 하종이라 하는 것도 또한 속견(俗見)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지극하지 않은 것을 지극하다고 하여 이것을 가지고 망자를 뒤미처 찬미하는 것은, 비록 사실을 아니더라도 후중한 쪽을 따르는 데에는 방해가 되지 않는다 말하지만, 오히려 망자를 도리어 해치는 것임을 알지 못한 듯합니다. 이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다만 고명(高明)한 분이 묘문을 짓는 사람을 깊이 믿고서 죽은 며느리에게 해가 되는 줄을 깨닫지 못하고, 서둘러 개정하지 않는 것은 매우 답답합니다. 令子婦墓文中"下從"二字,在所當改,未知間果改刻否? 蓋"下從"之文,雖不詳始出何書,而認爲夫亡從死之名,則人無異辭矣。婦人喪夫者,烈行爲大。今之人徒知下從之烈,不知守節之烈。而元不知下從之烈不如守節, 而養舅姑立嗣承爲盡善之烈。并不知朱子編《小學》之日,首載陳孝婦而一不及於下從者也。是善乎晩隱黃公之言, 曰: "世以烈婦名者多矣。然其中夫死非命,或賊劫非義,于是死則卓哉。如不忍伉儷之情,徒以下從,不復以撫孤立嗣,使夫祀有傳,則只彰其夫好內耳, 亦何懿之有!"【止此】朱子之意,宜亦以是也。夫金石文字,當以其實。令子婦豈不病終於夫亡二旬乎? 雖使下從之烈爲至者,固不敢爽其實而溢其辭,況於未至者乎? 況於令子婦席有"我雖薄命, 願得病愈,順生腹中兒,以承夫後"之言乎? 銘于墓, 所以彰善行。今乃掩其所長,誣書其短,靈而有知,豈不恨於冥冥乎? 不料作文人之若是糊塗。槩以夫亡未久而死爲下從也,抑亦不免俗見。以未至者爲至者,而以此推贊亡者,謂雖非其實,無妨從厚,而却不知反損亡者歟? 是不可知矣。但高明之篤信其人,不覺損害亡婦,而不汲汲於改正者,深可憫憫也。 진 효부(陳孝婦) 전한(前漢) 문제(文帝) 때의 사람이다. 변방(邊方) 수비군(守備軍)으로 떠난 남편이 죽자, 친정 부모는 자식도 없이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딸을 가엾게 여겨 개가시키려 하였으나, 진 효부는 남편이 떠날 때 노모(老母)를 잘 모시겠다고 승락한 약속을 저버릴 수 없다고 하여 듣지 않고 끝까지 시어머니를 잘 모셨다. 《소학(小學)》 〈선행(善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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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경한규에게 답함 答趙受卿瀚奎 ○丁丑 정축년(1937) 근래에 일이 있어서 형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 세 차례입니다. 《예기(禮記)》에서는 "예(禮)는 왕래하는 것을 숭상하니, 오기만 하고 가지 않으면 비례이고 가기만 하고 오지 않는 것 또한 비례이다"79)고 했습니다. 선사가 만년에 사방에서 편지로 질문하니 걸핏하면 글상자가 넘쳐서 뚜껑을 덮기도 어려웠습니다. 답장편지를 보낼 때면 크게 한숨을 쉬었지만 오히려 힘써서 대략 빠르게 답장하니 젊은 사람들도 고마워했습니다. 제가 형에게 세 번이나 편지를 보냈는데도 한 번도 답장을 받지 못했습니다. 생각건대 영남에서는 일반적인 학규(學規)가 다른 것이 있습니까? 선성(先聖)이 '예는 왕래를 숭상하고' 선사도 질문을 하면 반드시 답장했었던 도를 다시 바라지는 못하겠네요.올 여름 초에 어쩌다 온 답장은 때가 지난 이후에 희망이 끊어진 나머지에서 나온 것이니, 그 놀라고 감격스러움은 옴에 따라 답장하는 일반적인 예에 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전에 있었던80) 치변(薙變)81)으로 인하여 몸을 숨기고 교제를 멈추어서 답장이 지체됨을 알았으니, 지난번 줄곧 망령되게 잘못 헤아려서 불공하게 생각한 것이 매우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런 변란에 대처하는 것이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멀리 옛사람을 예로 들 것도 없이 단지 요즘 세상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본디 수립한 것이 있어서 편안히 앉아서 초연히 면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우리 동문 같은 경우에 최경존(崔敬存)은 참으로 최상이었으니, 난리에 임하여 굽히지 않고 목숨을 버려 의를 취했고,82) 담양의 이복일(李復一)【이름은 광우(廣雨)이다. 내가 이절사전(李節士傳)을 썼다】과 진천(鎭川)의 정덕여(鄭德汝)【이름은 승원(升源)이다. 음성의 오진영이 정절사전(鄭節士傳)을 썼다. 내가 그 후론(後論) 중의 '말에 의를 해치는 것이 있다'고 논하여 음성 오진영에게 절의를 배척한 것이라 지목 당하였다】는 또한 씩씩했으니, 목을 찔러 거의 죽음으로서, 저들이 두려워하며 복종하게 하였습니다. 우리 고향의 안윤성(安允成)【이름은 재욱(在旭)이다. 내가 안의사시(安義士詩)를 썼다】은 더욱 기특합니다. 그간 숨어서 피하는 한 가지 일은 다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며 지나치게 염려하여 거의 여러 해 동안 편지도 끊고 왕래도 않고야 마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선사가 절애고도에 숨는 것보다 깊숙한 것은 없으나, 어찌 일찍이 이와 같이 하였겠습니까? 이설(異說)이 시끄럽게 날뛰는 것을 염려하고, 유학이 쇠락하는 것을 한탄함에 이르러 또한 홀로 선을 지키는 것83) 외에 세도를 근심한 것이 심원했음을 알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인자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제가 식견이 밝고 행실이 고망84)한 형을 위하여 깊이 생각하여 묘한 생각으로 구할 만한 것이 있다면, 다른 사람을 헤아림에 도리에 어긋나는 실수를 하지 말고, 또한 즐겁지 않을까 두려워 화를 내지 않으며, 잘 안다고 하면서 말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또 두세 번 한두 개 문구의 타당치 못한 점을 개정하라는 것에 대하여 말단의 일이라 여기는데 실망했다고 하시니 제가 들은 것과는 다릅니다. 치평(治平)의 근본은 성의(誠意)에 있고, 성의의 방법은 스스로 부족한 것을 구하는데 있습니다. 작은 한 생각과 작은 한 이치와 용렬한 한마디 말에 대해서도 오히려 스스로 부족한 점을 구하는데, 하물며 문장이란 마음을 드러내고 이치를 나타내며 말의 정밀한 것이어서 더욱 구차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임에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천하에 심리(心理), 언문(言文), 자수(自修)의 공에 대해 실수가 있으면서도 세도(世道)를 붙잡은 자는 없습니다. 형께서 깊이 헤아려 비록 그 사람이 아니라 하고, 타당하지 않은 문장을 바르게 고치는 것을 말단의 일이라 여기며 그것을 실망했다고 말한다면, 또한 어찌 이치에 맞는 말이 되겠습니까? 형은 이 점에 대하여 만약 타당함과 타당하지 못함의 시비, 고침과 고치지 않음의 맞음과 그릇됨을 논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강론의 한 실마리가 되리니, 저는 마땅히 마음을 비우고 덮어놓고 따를지 어길지를 깊이 생각하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근본을 고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겠습니다. 또 이미 대략적으로 판단하여 말하기를, "이때를 당하여 어찌 한가롭게 평상의 문구를 논함에 그치리오?" 라고 하였습니다. 논문은 제가 지난번 보낸 편지이고 제 평생의 뜻은 아닙니다. 오호라! '심상(尋常)'이라는 두 글자를 추론하여 말한다면 그 폐단은 이루다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선비가 의리를 엄하게 밝히고,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교훈을 긴요하게 여겨도, '심상'이란 문구로 간주하여 수용한 것이 없음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눈앞에서 천지가 뒤집어지고, 부모와 스승을 적으로 여기는 문자에 이르러서도 또한 심상한 문구로 간주하여 변란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오늘의 나쁜 습관으로 이른바 유술을 떨쳐 일으키고 동문을 보합85)하려 한다면 결단코 이루어질 이치는 없을 것입니다. 비유컨대 종기를 치료함에 있어서 피고름과 썩은 살을 씻어버린 후에야 살이 생겨나서 피부가 온전히 붙을 수 있습니다. 만약 심상한 일로 보아서 다 제거하지 않고 간혹 나의 피와 살이라 여겨 감싸고 안타까워한다면, 살이 돋고 피부가 완전히 붙는 날도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도 거의 드물 것입니다. 형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頃因有事,致書于兄者,凡三度矣。禮曰: "禮尚往來,來而不往,非禮,往而不來,亦非禮." 先師晚年,四方書問,動輒溢篋,以艱於覆 答有時發書太息,猶必力疾略 謝及於少輩,而弟於兄三施,而一不見報,則意嶠之南 自有一般學規,有異乎? 先聖禮尚往來,先師有問,必答之道者,不復有望矣。今夏之初,何來巍覆,出於過時之後,斷望之餘,則其爲驚感,已非隨往隨復恒例之可比。又以知間緣薙變,隱身息交,以致稽報,則深悚夫向來妄揣繆度之爲不恭也。然吾儕之處此變也,何至如是? 不待遠據古人,只以并世言之,素有樹立,安坐超免。若吾同門之崔敬存,則固太上也,臨難不屈舍生取義,若潭陽之李復一【廣雨 ○弟爲作李節士傳】,鎮川之鄭德汝【升源。○陰作鄭節士傳。弟論其後論中,語有害義者,被排節一之目於陰.】亦可壯也,刺頸幾殊,使彼畏服,若鄙鄉之安允成【在旭○弟爲作安義士詩】,更可奇也。其間隱避一事,又可爲也。然不宜惴惴過慮,幾多年斷書闕禮而後已也。夫隱莫深於先師之絕島,而何嘗如是乎? 至於慮異說之喧騰,歎儒學之衰獘,則又以見自守獨善之外,爲世道憂者深遠,此正仁者之心也。然而以弟爲識明行高望,其有深慮妙算之可救者,則非惟爲擬人不倫之失,亦恐有不恱者之移怒,而不得爲智者之言也。但又以再三改正於一二文句之未穩,爲末事,而謂之失望,則異乎吾所聞。夫治平之本,在於誠意,誠意之方,在求自慊,一念之微,一理之細,一言之庸,猶求自慊。而況文者心之著,理之顯,言之精,而尤不可茍焉者乎。天下未有失於心理言文自修之功,而能扶世道者,則高明深妙,雖非其人,其以改正未穩之文爲末事,而謂之失望者,亦豈爲理到之言? 兄於此,若論穩與未穩之是非,改與不改之當否,則是固爲講論之一端,弟當虛心愼思以覆從違今也。不然,旣以改本爲善,而又槪斷之曰: "當此之時,何暇論尋常文句而止哉?" 論文固弟向日之書,而非弟平生之志也。鳴呼! '尋常'二字若推而言之,其獘有不可勝言者。今之士子,於嚴明義理,喫緊愛人之訓,旣不免看做尋常文句,而無所受用。至於目下有翻天地,賊父師之文字,亦且看做尋常文句,而不以爲變,由今之弊習,以求所謂振起儒術保合同門,則決無有成之理。譬如治瘇然,膿血朽肉消洗棄之,然後肌可生起,皮可完合。若視爲尋常,而不盡去,或認爲吾血肉,而護惜之,則不惟生起完合之無日,其不傷人也者 幾希矣,兄以爲如何? 예(禮)……비례이다 《예기(禮記)》 〈곡례상(曲禮上)〉편의 기록이다. 간연(間緣) 불교철학에서 사람과 사물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연(緣)이라 하여, 인연(因緣), 등무간연(等無間緣), 소연연(所緣緣), 증상연(增上緣)으로 분류하였다. 등무간연은 직전의 원인으로, 불교의 찰나생멸(刹那生滅) 법칙에 의하면, 앞선 순간의 심적 활동은 그 다음 순간의 심적 활동이 일어나는 원인이 된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편지에 답장하기 이전의 상황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치변(薙變) 1895년 을미년에 시행된 단발령을 말한다. 난리에 임하여 목숨을 버려 의를 취했고 1917년 왜정(倭政)이 전주에 잠업소(蠶業所)를 설치한다는 명목으로 대대로 전수해 온 대지를 매도하라고 요청했으나, 일제에 토지를 내줄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하자, 일제는 토지 수용령을 발동시켜 가옥을 모두 소각하였다. 최병심은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결사적인 단식 투쟁으로 이겨냈다. 만동묘(萬東廟) 철폐로 인한 정향(丁享) 문제로 항거하다가 왜경들에 의해 괴산경찰서에 10여 일 간 구속되기도 하였다. 한말 독립투사들의 비사(秘史)를 엮은 조희제(趙熙濟)의 《염재야록(念齋野錄)》에 춘추대의적(春秋大義的)인 민족자존의 의지를 밝힌 서문을 쓴 일로 조희제와 함께 임실경찰서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독선(獨善)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에 "곤궁해지면 자기의 몸 하나만이라도 선하게 하고, 뜻을 펴게 되면 온 천하 사람들과 그 선을 함께 나눈다.[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 하였다. 고망(高望) 위고망중(位高望重)의 줄임말, 지위가 높고 명망이 크다는 뜻이다. 보합(保合) 《주역(周易)》 건괘(乾卦) 단사(彖辭)의 "하늘의 도가 변화함에 각각 성명을 바르게 하여 큰 화기를 보전케 해 준다.[乾道變化, 各正性命, 保合大和]"라는 말을 압축하여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는 동문의 성명을 바르게 하여 크게 화합하게 됨을 이르는 말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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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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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최성무장열에게 보냄 與崔性武長烈 ○丙午 병오년(1906) 경초(勁草)88)와 한송(寒松)89)은 예로부터 만나기 드뭅니다. 오늘날 글을 읽는 선비들은 모욕하고 공갈하는 풍조에 쓰러지고, 포승과 총칼에 넘어짐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간혹 이미 유문(儒門)에 종사하고서 숨기고 꺼리면서 다시 움직이지 않거나 떨고 두려워하면서 후회하는 자가 있으며, 유문에 종사하고 싶지만 주저하면서 감히 나오지 못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고명(高明)은 이런 상황에서 비록 머리 위에 철륜(鐵輪)90)이 내리친다고 하더라도 장차 떨치고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전진하여 나아갈 수 있습니까?이천 선생(伊川先生)이 조정에서 사학(邪學)으로 공격을 받았을 때 마신(馬伸)이 정문(程門)에 의탁하여 배우고자 하였습니다. 이천이 말하기를 "시론이 바야흐로 달려져 그대에게 누를 끼칠까 두렵다."라고 하니, 마신이 대답하기를 "제가 도를 들을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91) 그 뜻이 얼마나 정성스럽고 돈독합니까.제가 고명(高明)이 마신의 뜻으로 뜻을 삼고 전적으로 간옹(艮翁)의 문하에 의탁하여 배우길 바라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공자가 말하기를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는 정직함이니, 정직하지 않으면서 생존하는 것은 요행으로 죽음을 면하는 것일 뿐이다."92)라고 하였습니다. 윤리를 말미암고 공맹의 가르침을 따라는 것이 정직함이고,. 오륜을 폐하고 공맹을 배반하는 것이 정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정직하지 않으면서 사는 것은 비록 산다고 해도 오히려 죽은 것이며, 정직한 삶을 살다가 죽는 것은 비록 죽는다 하더라도 오히려 산 것입니다. 이것으로 나아갈 바를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정직하게 산다고 해서 반드시 죽는 것이 아니며 정직하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사는 것이 아니니 더욱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ㄸ한 한 번 다스려지는 운수가 돌아와서 도가 밝혀지고 교화가 행해져서 한 세상의 태평이 유자(儒者)의 손에서 나와서 저 패도(悖道)와 이유(異教)가 모두 갑자기 사라지지 않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고명께서는 천만 속히 도모하기 바랍니다. 勁草寒松,邃古罕覯。今讀書之士類,未免侮嚇恐喝之風所偃,縲絏刀銃之威所推,或有已從儒門而隱諱不復動者,惴惧以爲悔者,欲從儒門而趑趄不敢進者。不識高明於此,雖轉鐡輪於頂上,將奮不顧慮,而直前做去也否? 伊川先生被朝廷之攻以邪學也,馬公伸欲依程門學,伊川曰: "時論方異,恐貽子累。" 對曰: "使伸得聞道死無憾。" 此其志何等誠篤!鄙欲令高明以馬公之志爲志,專依艮翁之門而學焉,夫何故? 吾夫子曰: "人之生也直,罔之生也,幸而免。" 倫常之道,鄒魯之教,是直也; 倫常是斁,鄒魯是背,是不直也。不直而生,雖生猶死; 爲直而死,雖死猶生。此可以知所往矣, 況爲直而未必死,不直而未必生乎? 不惟是也, 又安知不一治運回,道明教行,一世昇平出於儒者之手,而彼悖道異教, 皆條爾消滅也耶? 惟高明千萬亟圖之。 경초(勁草) 당 태종(唐太宗)이 소우(蕭瑀)를 칭찬하면서 하사한 시에 "질풍 속에서 굳게 버티는 초목을 알고, 난리 속에서 충성스러운 신하를 안다.[疾風知勁草 板蕩識誠臣]"라고 하였다. 《구당서(舊唐書)》권63〈소우열전(蕭瑀列傳)〉 한송(寒松) 사혼은 그의 조카 사영운(謝靈運)과 이름을 나란히 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사혼의 풍운은 하늘의 해를 바라보는 해바라기 같고, 엄숙함은 차가운 바람을 맞서는 소나무를 같다.[混風韻爲高日望葵, 蕭如寒風振松]"라고 하였다. 《예문유취(藝文類聚)》권88 철륜(鐵輪) 쇠로 만든 수레바퀴로, 불교에서 지옥의 악귀(惡鬼)를 제압하는 무서운 형구(形具)이다. 또는 철륜발(鐵輪拔)의 준말로 수미(首尾)에 칼날이 달린 병기로 말 위에서 적을 쳐 죽이는 데 쓰인다. 이천선생(伊川先生)이……하였습니다 정자(程子)의 학파가 위학당(僞學黨)으로 몰려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을 때에 마신은 자신과 연루될까 염려한 정이천(程伊川)과 정명도(程明道)의 고사(固辭)에도 불구하고 십여 차례 반복하여 가르침을 받기를 청하면서 "저가 도를 듣게 된다면 죽은들 무슨 유감이 있겠습니까. 하물며 죽음에 이르지 않는 경우이겠습니까." 하였다. 《송명신언행록宋名臣言行錄》 권9 사람이……뿐이다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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