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익에게 보냄 與吳士益 丁丑 정축년(1937) 봄 사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장맛비에 군색한 형편이 되었다고 듣고서 늦었지만 주인으로서 만류하지 않은 것이 매우 송구하였고, 저 또한 이날 출발하여 그런 군색함을 만났습니다. 아, 우리들이 좋지 않은 세상에 태어나 빈궁에 군색하여 한평생을 마치는데 고달픈 것이 어찌 다만 하루의 장맛비뿐이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이것은 모두 때마침 공교롭게 닥친 것이고 내가 불러들인 것이 아니니, 또한 어찌 말할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오직 마음이 객기(客氣)와 사의(私意)에 군색하게 되는 것이 내가 스스로 지은 죄로서 그 일신을 망치는 것이기에 두려울 따름입니다. 우리 형은 현재 무슨 책을 보고 현재 무슨 의리를 궁구하여 훗날 의지하여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저는 노쇠에 빈궁도 심해져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학문은 거칠고 허물은 쌓여서 선사가 평일에 기대한 것에 부응하지 못하고 황천에서 뵐까 매우 두렵습니다. 저 현광(玄狂)의 인생을 보면 참으로 짧은 일생이었습니다. 그가 임종에 임하여 어떤 사람에게 준 편지에 말하기를 "선사의 무함을 씻어내지 못했으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이 너무도 비통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날 음성의 기세가 날마다 더욱 사납게 떨치고 있습니다. 저는 평소에 수립한 것이 없고 노쇠하고 궁핍함이 이와 같아서 혼자 힘으로 시원하게 씻어낼 수가 없고, 또한 더욱 여러 입은 쇠를 녹이고 쌓인 비난은 뼈를 녹일 지경이니, 어떻게 죽지 않겠습니까? 현광이 임종할 때의 말은 바로 저의 일인데, 다만 그가 조금 앞서 죽었을 뿐이니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습니까? 형이 의론을 달리 한 뒤부터 두 차례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형이 미처 답장을 하기 전에 저의 집에 왕림하였습니다. 수계(修契)하던 밤에 한강(寒江) 이형(李兄) 및 형의 재종(再從) 노봉(露峰)과 함께 말을 나누다가 오진영의 일에 미치자 형은 대략 의론을 달리한 이유를 말하였고, 제가 변론을 하는 것을 보고서는 또한 다시 근거가 있다는 뜻을 보였습니다. 한강은 "오진영의 무함이 이미 밝혀졌는데 사람들이 당을 지어 보호하는 것은 무슨 마음인지 알지 못하겠다."라고 하였고, 노봉은 "인교(認敎)의 설이 있고부터 세상에서 간옹(艮翁)을 의심하는 자들이 많아졌으니, 참으로 매우 불행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옆에서 그것을 들었고, 형은 묵묵히 생각하는 것이 있는 것 같았는데, 더는 아마 말도 없이 자리를 파하였습니다. 저는 형의 명철함으로 지금 돌이켜 깨우쳐서 옛날의 견해를 회복할 수 있으면 마땅히 돌아간 뒤에 한 통의 답장 편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쓸쓸히 들리는 것이 없으니, 마음이 의아하고 답답하여 스스로 달랠 길이 없습니다. 대저 "선사를 무함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 말에서 의론이 완전히 확정되었고, 10년이 경과하였으니 매우 오래도록 지킨 것이었습니다. 형이 만약 이러한 확정된 의론을 10년 뒤에 버리고 오진영이 선사를 무함하지 않았다고 말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청원하여 발간 배포하는 것은 결단코 스스로 욕되게 하는 것이다."라는 훈계와 상반된 '인교'와 관련한 명확한 근거가 되는 선사의 문자를 발견해야만 마음을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지 않습니다. 그 근거를 물었더니, 바로 오진영의 의서(擬書) 한 장뿐이었습니다. 그 편지 중의 명확하게 근거로 삼을 만한 것으로 형의 이른바 피차간에 유무를 다툴 것이 아니며 선사가 친히 지은 글이라고 한 것을 물었더니, 인용했던 [선사가] 이유흥(李裕興)에게 답한 편지에 《병암집(炳庵集)》을 인쇄하도록 권하였다는 26자만 가리키는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이 편지 중에는 원래 반점의 인의[認意]도 없는데 어떻게 명확한 근거로 삼을 수 있느냐고 물으면 "이때에는 인가를 받지 못하면 인쇄하지 못한다[此時非認不印]"는 6자로 해명한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오진영이 날조하여 무함하고 형이 속임을 당하여 증거로 삼은 것에 대해서는 제가 이전 편지에서 매우 분명하게 변론을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형은 또한 밤에 대화할 때에 제가 변론한 일단을 들어서 한강과 노봉에게 말해주고 다시 이의를 달지 않았습니다. 형이 만약 마음으로 저의 변론이 옳다는 것을 알고 옛날의 견해를 회복한다면 저 또한 형의 뜻이 있는 곳을 절로 짐작할 수 있으니, 어찌 반드시 편지로 답장하여 표현을 해야만 서로 잘 알 수 있겠습니까? 다만 형은 이전의 편지에서 말하기를, "석농(石農 오진영)이 앞서 지령(志令)을 서로 따른 사람에 대해 '선사를 배반하고 연원을 저버렸다,'고 배척하였는데, 뒤에 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서 도리어 스스로 말하기를 '평소를 헤아려보건대 절교를 당할 죄라고 말할 정도에는 이르지 않았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지령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누차 다른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이 세상에 양기(陽氣)가 없음을 통탄하고, 우리 당이 더욱 고립됨을 상심한다. ……"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현광이 논한 바와 같다면, 이는 남과 내가 차이가 있고 앞과 뒤가 모순됨이 있음을 면치 못하는 것이니, 의심스러워할 만하고 괴이하게 여길 만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전(田)과 오(吳) 두 편지 사이에서 의심하며 괴이하게 여긴 것이 일반적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피차의 문자를 보았던 날에 이르러서는 마땅히 최종적인 단안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난번에 저의 집에서 오진영이 김성장(金聖章)에게 답한 편지에서 한 말이 과연 현광이 논한 바와 한 글자도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고서는 이내 입을 다물고는 그의 '남과 내가 차이가 있고 앞과 뒤가 모순됨이 있는' 증오할 만한 심술을 벌주어야 한다는 한 마디 말씀도 없었습니다. 이는 실로 형에게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저는 그 사람의 심술이 본래 이와 같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공업(功業)을 중시하고 도의(道義)를 헤아리지 않는 행동[功業爲重而不計道義]'을 하기 위해서는 【이 아홉 글자는 선사가 일찍이 오진영을 배척한 말이다】 선사의 함자를 거짓으로 기록하여 헤아릴 수 없는 곳에 던져버리는 짓을 꺼리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입을 막아서 자신의 죄를 벗어나기 위하여서는 '인교(認敎)'로 선사를 무함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이 자신의 죄를 성토한 유감을 갚기 위하여서는 완산 검찰에 동문을 고소하여 재앙에 빠뜨리는 짓을 꺼리지 않았고, 선사의 원고를 간행하여 자신의 공을 이루기 위하여서는 진주 경찰서에 선사의 손자를 가두는 짓을 꺼리지 않았으며, 앞서는 사람을 밀쳐냈다가 뒤에는 그 사람에게 아첨하기 위해서는 '선사를 배반하고 연원을 저버렸다.'고 그 사람을 비난했다가 다시 절교를 당할 만큼의 죄에는 이르지 않았다고 동정을 구걸하였습니다. 또 이와 같은 편지가 있다면 형은 이것을 보고서도 오히려 증오할 줄 모를 것입니다. 《과암가어(果庵家語)》와 원고를 고침에 미쳐서는 "이것 또한 스승을 위한 마음에서 나와 자의적으로 고친 것이다. 이와 같이 해야만 최선을 된다."라고 하여 반대로 대답하였습니다. 능력을 자랑하고 견식이 많음을 과시하여 그 무리들에게 견식과 문장이 스승보다 뛰어나다는 명예를 구하였기 때문에 고치고 보탠 것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제가 원고를 고친 죄를 벌주지 않은 것을 논하니, 이 때문에 그 마음이 선사를 위한 것이었다고 밝힌 것은 또한 무슨 뜻입니까? 저는 형의 의견이 한결같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모르겠습니다. 현광에게 들었는데, 제가 〈정절사전〉을 논한 것에 대해 오진영이 절의를 배척한 것이라고 한 것에 대해 형이 '이것이 어찌 말이 되는가?'라고 말했다고 하니, 이것은 그의 심술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 이와 같으니, 앞서 의심이 없을 수 없었던 것이 이에 더욱 의혹이 불어나게 되었습니다. 오직 의혹스러운 것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앞에서 말씀한 것까지 아울러 헤아려서 비록 저의 편지에서 변론할 수는 없었지만 오히려 크게 따르지 못할 점이 있었습니다. 일찍이 학문의 도는 '명(明)'과 '성(誠)' 두 글자일 뿐이라고 들었습니다. 성현이 후학에게 가르친 것도 이것으로 하였고, 선사가 문인들에게 바란 것도 이것으로 하였으며, 우리 유자가 서로 권면하는 것도 이것으로 해야 합니다. 이것을 버리면 이른바 학문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만약 선사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단지 "이때에는 인가받지 못하면 인쇄하지 못한다."는 것만 안다면, 이것은 밝지 못한 것입니다. 그 불가함을 알고도 불복한다면 이것은 성실하지 못한 것입니다. 저는 형이 그 중의 하나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체로 이 사안에 있어서, 내가 만약 터럭만큼도 사람을 왜곡하려는 마음에서 나왔다만 이는 객기에 군색하게 된 것이고, 형이 만약 터럭만큼도 사람을 엄호하는 마음에서 나왔다면 이는 사심에 군색하게 된 것이니, 모두가 위에서 말한 두려울 것이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해보건대, 평생의 학문에 깊이 터득한 것은 없지만 오직 이 일에 대해서는 천지를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군색한 것도 없습니다. 형도 오늘의 변동에 대해 터럭만큼도 군색함이 없다고 자신하여 끝내 하루아침에 속임을 당하여 가지게 된 견해를 버리고 10년간 오래도록 지킨 의론을 회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한번 분명하게 보여주기 바랍니다.기억하건데, 지난 봄에 현광과 함께 문하에 갔을 때 형은 권순명(權純命) 또한 '불언지교(不言之敎)'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권순명은 오진영의 혈당(血黨)인데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지금 형은 갑자기 10년간 유지해온 정견(定見)을 버리고 그를 따른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는 반드시 그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형이 만약 그 마음을 치우치게 써서 스스로 자신의 견해를 옳다고 여기기를 일종의 사람처럼 한다면 제가 또한 어찌 반드시 이와 같이 하겠습니까. 마음을 특히 마침내 공평하고 어질게 하여 다소 헤아리고 다소 절제하여 공정한데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형 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는 선사의 원고에 실려 있는 조경헌(趙景憲)에게 보낸 편지의 "천하가 모두 변하는 날[天下皆變之日]"47)이라고 한 것이 음성이 지은 〈정절사전〉의 "천하가 즉시 오랑캐가 된다.[天下卽夷也]"는 말과 같지 않아서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저의 의론을 형이 마침내 따라 준 것에서 하나의 단서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점이 제가 형을 그리워하며 잊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오늘처럼 동문이 모두 음성의 당이 된 날에 무슨 한 사람의 많고 적음을 다투어 형이 저들을 돕지 않고 나를 돕기를 바라겠습니까? 이처럼 누누이 말하는 것은 모두 형을 위한 것이고 저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형의 이전 편지에 "선사의 어쩔 수 없는 말계(末計)이니, 어찌 평탄하게 마땅히 행해야 하는 것으로서 후세의 큰 가르침이 될 수 있겠는가"라고 한 것처럼, 오진영을 위해 변명하는 허다한 설을 전파하고 인쇄를 하여 《병암집(炳庵集))》48)을 만든다면, 후세 사람들이 장차 선사를 어떤 사람이라고 이를 것이며, 이 문집은 어떤 글이냐고 이를 것입니다. 형은 우선 시험 삼아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지난 가을, 현광이 병들어 세상을 떠날 형에게 보낸 편지를 형이 저번에 비록 한 번 보긴 하였지만, 최후의 절필(絶筆)임을 생각하면 다만 여기에만 남겨 두고 형의 책상에는 없게 할 수 없으므로 그 원고에 올린 저본을 취하여 적어 보내니 읽어 보면 평소의 편지보다 훨씬 느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편지 말단에 형을 권면하는 말에 "만약 고쳐 도모하지 않는다면 나는 훗날에 변고가 반드시 다시 말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기까지 하였습니다. 저는 옆에서 그것을 보고 지나친 염려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편지를 쓰고 뒤로 죽기 전 한 달 만에 형이 선사의 무함과 관련한 정론을 갑자기 버리고 '인교(認敎)'의 명확한 증거라는 편지를 믿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른바 말하기 어려운 일은 바로 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직 죽은 친구가 염려한 지극한 뜻을 깊이 생각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문성(文成)은 참으로 성인이었다."49)라는 한탄을 오늘날에 자아내게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옛날에 우암(尤庵) 송선생(宋先生)이 상소하기를, "삼가 듣건대, 근래 헌신(憲臣 홍수주(洪受疇))가 상소하여 이이(李珥)가 머리를 깎았다는 설50)을 제기하면서 김장생(金長生)을 끌어다 입증했다고 합니다. 신도 고(故) 문충공(文忠公) 장유(張維)의 문집을 보니, 고 지중추부사 조위한(趙緯韓)의 말을 기록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 말에 과연 신의 스승이 운운했다고 하였으나, 신은 이에 대해 늘 의아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장유는 바로 김장생의 고제(高第)인데, 조위한의 말을 듣고 어찌 김장생을 위하여 그것이 무함임을 통렬히 변론하지 않고서 단지 이이만을 위해서 변론했겠습니까? 장유가 이이를 위해서 변론했다는 말도 명쾌하지 못하니, 신은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서 이이의 실적을 진달하겠습니다. 그러면 김장생이 받은 무함은 변론하지 않아도 절로 밝혀질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문성공 이이는 타고난 자질이 지극히 고명합니다. …… 머리를 깎았다는 설은 무망(誣罔)하기 짝이 없는 말입니다. 과연 이런 일이 있었다면 이이의 문집에 노숙(老宿, 중의 존칭)과의 문답을 서술하고 있는데, 노숙이 무엇 때문에 '조대(措大, 선비)는 속유(俗儒)가 아니다.'라고 하였겠습니까? 임억령(林億齡)의 시집(詩集)에도 무엇 때문에 '이이와 산을 유람했다.'라고 하였겠습니까? 설령 이이가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김장생은 입증하지 않았을 터인데, 더구나 전혀 이런 일이 없는 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옛날 섭공(葉公)이, "우리 고장에 몸가짐을 정직하게 하는 사람이 있는데,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아들이 증인을 섰습니다."라고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우리 고장의 정직한 사람은 그와 달라서 아비는 자식을 위해 숨겨 주고 자식은 아비를 위해 숨겨 주니, 정직이 그 속에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51) 가령 김장생이 과연 그런 말을 했다면 아비가 양을 훔친 것을 증명한 자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런데도 헌신(憲臣)이 말하기를 '김장생은 학식이 고명하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성립되는 말이며 성립되는 의리입니까? 조위한(趙緯韓)이 말을 한 것은 김장생을 무함하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니었고 수작할 때 잘못 듣고서 잘못 말한 데 불과하였습니다. …… 또 장유(張維)가 이른바 '엄해서 감히 묻지 못했다.'라고 한 말도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신이 고(故) 참찬(參贊) 송준길(宋浚吉)과 같이 김장생의 말을 들었는데, '일찍이 변형(變形, 머리 깎는 것)의 여부에 대해 은미하게 율곡(栗谷)에게 여쭈어 보았더니, 〈비록 변형은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마음이 빠진 데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하였다." 했습니다. 율곡은 바로 이이의 별호(別號)입니다. 비록 절절히 해명하지 않았으나 머리 깎지 않은 실상은 절로 드러났으니, 참으로 이이의 기상입니다. 또 헌신이 장유의 설을 인용하여, '머리를 깎은 것은 조적(粗迹 불확실한 증거)이라서 변론할 가치조차 없는 말이므로 김장생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했으니, 만약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또 '제신(諸臣)은 머리 깎지 않은 실상(實狀)을 갖추 진달했습니다."라고 한단 말입니까? 제신들은 머리 깎지 않은 실상을 갖추 진달했는데도 김장생만이 그렇게 말했다고 한 것은 또한 유독 무슨 마음에서입니까? 신은 삼가 김장생을 위해서 원통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고명한 제자로서 그것을 증명했다면 이이가 머리 깎았다는 것을 끝내 변명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니, 이이가 당한 무함이 어찌 그리 심하단 말입니까. 또 조적(粗跡)이라 해서 말하기를 어렵게 여기지 않는다면, 적이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옛날 주자(朱子)가 젊어서 중 도겸(道謙)을 스승으로 삼았었지만 자신의 친구 가운데 머리 깎으려는 사람이 있으면 매우 엄하게 질책한 것은 물론, 그것을 금하지 않은 친구까지 아울러 배척하였습니다. 과연 김장생의 고명함으로 오히려 그렇게 했다면, 이는 주자의 죄인이니, 어찌 적전(嫡傳)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 대저 말을 듣는 방법은 오직 그 의리가 어떤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 지금 장유는 갑자기 조위한에게 한 마디 말을 듣고서는 문자에 기록하여 오늘날의 구실거리를 만들었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상소는 여기까지이다.】 대저 율곡이 머리를 깎았다는 설은 당시에도 오히려 조적(粗跡)이어서 변론할 것이 없다고 말한 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옹(尤翁)은 큰 일로 보고 그 무함을 통렬하게 변론하였습니다. 이른바 사옹(沙翁)이 운운한 바가 있다는 것은 또한 조 지사(趙知事)가 잘못 듣고 잘못 말한 것에 불과했지만 단지 《계곡집》을 본 자는 오히려 실제 증거가 될까 두려워하여 심지어 "모(某 이이)가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또한 모(某 김장생)는 입증하지 않았을 터인데, 더구나 전혀 이런 일이 없는 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하고 공자가 논한 아버지가 양을 훔친 것을 증명한 일을 인용하여 변명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고명한 제자로서 그것을 증명했다면 모(某)가 머리 깎았다는 것을 끝내 변명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니, 모가 당한 무함이 어찌 그리 심하단 말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또 사옹이 선사를 무함한 것으로 귀결되는 것을 통탄하여, 동춘과 함께 사옹이 진술한 율옹의 말을 인용하여, 조위한의 설과 장유의 문집이 믿을 수 없음을 밝히었습니다. 우옹은 이처럼 부지런히 하면서도 위로 존엄한 임금께 고하는 일을 번거롭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오늘날 우리 사문(師門)의 변고를 우옹이 처한 처지와 비교해보면, 선사가 인가를 받아서 문집을 인쇄하게 했다는 것은 그 긴요한 관건이 되는 것이 머리를 깎은 것이 오히려 조적으로 논할 수 있다는 것과 큰 차이가 있으니 더욱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선사는 절대로 이런 일은 없었는데, 지금 음성 오진영은 문인이 된 자로서 그것을 증명하였으니, 어찌 아버지가 양을 훔치지도 않았는데 그 자식이 거짓으로 증명한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오진영은] 스스로 "반드시 깊게 구애될 필요는 없다.", "헤아려서 하라.", "원래 불언지교(不言之敎)를 따랐다." 등의 설로 편지에 쓰고 원고로 전하였고, 또 심지어 죽어도 말을 바꾸지 않겠다는 맹세까지 있었으니, 그 실증이 됨이 어찌 다만 다른 사람이 잘못 듣고 잘못 말한 것에서 나와서 다른 사람의 문집에 보이게 된 것과 같을 뿐이겠습니까? 이미 적전으로 자처하고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많이 믿고 있으니, 어찌 '고명한 제자로서 그것을 증명했다면 끝내 변명할 수 없게 된 것이니 선사가 무함을 당한 것이 어찌 그리 심하단 말인가.'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청원하여 발간 배포하는 것은 결단코 스스로 욕되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한 유서(遺書)는 그 명백하고 통쾌함이 또한 어찌 "비록 변형은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마음이 빠진 데에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라고 한 것이 그다지 변명을 하지 않았음에도 실상이 절로 드러난 것과 같을 뿐이겠습니까? 그 경중의 심함 여부가 서로 차이 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오늘날 우옹을 배운다고 말하는 자들은 그렇지 않아서 보잘 것 없는 작은 일로 보고 있습니다. 유서에 근거하여 힘을 다해 변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한 두 명의 변론하여 배척해서 사우들에게 고하여 밝히면서 수고로움을 마다않는 자들에 대해 지나치게 행동하여 일을 일으킨다고 하니, 어찌 괴이하지 않겠습니까?백수(白水) 양응수(楊應秀)는 도암(陶庵) 이재(李縡)의 고제입니다. 그 《사례편람(四禮便覽)》〈개장조보설변의(改葬條補說辨疑)〉에【〈개장조보설〉 본문에서 이르기를 "만약 피부가 이미 모두 삭아 없어지고 단지 해골만 남아 있다면 칠성판(七星板) 사방 옆에 관 모양의 얇은 판자를 부치고 진한 황토를 체로 쳐서 채워서 해골의 최고 높이와 같게 한다. 손으로 사방 옆 판자와 가까운 곳을 미세하게 다 채워 넣은 이후에 사방 옆에 있는 판자를 제거하고 의금(衣衾)을 염하고 결교(結絞)하기를 대렴(大斂)의 의식과 같게 한다." 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만약 관을 바꾸지 않고 해골만 남긴다면 먼저 관의 중간에서 체로 황토를 쳐서 해골을 모두 덮은 뒤에 면지(綿紙)를 펴서 빈곳을 채운다."라고 하였다.】에 이르기를, "맹자가 관곽(棺槨)을 논하여 말하기를 '흙이 살갗에 닿지 않게 한다면 사람의 마음에 유독 만족스럽지 않겠는가.'52)라고 했는데, 오늘날의 군자는 황토로써 그 선조의 살갗과 육신을 대신하여 그 해골을 보합(補合)하니, 이것이 정말로 사람의 도리인가. 이와 같은 불인하고 지혜롭지 못한 설을 《사례편람》에 삽입하고는 선사의 말이라고 했으니, 선사를 무함한 것이 어떠하겠는가. 아, 어찌 선사가 돌아가신 지 10년도 되지 못했는데 의리가 어두워져 막힘이 마침내 이런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라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박형(朴兄)은 이 조목이 여러 번 선생의 눈을 거쳤기 때문에 하나도 의심스럽고 괴이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나는 모르겠거니와 박형은 어떻게 여러 번 선생의 눈을 거쳤는지 알았던 것인가? 이것은 사함(士涵 한경양(韓敬養))이 변명한 말을 보고 그렇다고 말한 것에 불과할 뿐이었다. …… 만약 사함이 선생에게 나아갔을 때 '황토를 체로 쳐서 염(斂)을 채우고 관을 채운다.'는 말을 모두 기록하였고 선생이 그 자세히 갖춘 것을 칭찬하여 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면, 어떻게 우리 선생이 될 수 있겠는가. 이미 선생이 명한 것도 아니고 선생이 보신 것도 아닌데, 사사로이 보충하여 집어넣어 선생에게 크게 누를 끼쳤으니, 이것이 무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런 사설(辭說)은 서로 쟁송하는 것 같지만, 스승의 무함을 변론하는 것을 어찌 불성실하게 할 수 있겠는가. 대저 해골을 염하고 관을 채우는데 선지(線紙)로 하지 않고 반드시 황토를 쓰는 것이 불가함은 비록 삼척동자라도 또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박형은 마침내 여러 번 선생의 눈을 거쳐서 하나도 의심스럽고 괴이할 것이 없으므로 경솔히 삭제하기 어렵다고 하니, 어찌 선생을 알지 못함이 이처럼 심한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라고 하였습니다.【도암의 설은 여기까지이다.】 황토로 해골을 보합한다는 설은 비록 매우 온당하지 않더라도 결국 예설(禮說)의 오류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백수는 큰일로 여기고 절실하게 스승을 위하여 이런 도리가 없다고 변론하고, 심지어 이런 설을 하는 자는 선사를 무함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선생이 눈으로 보고서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문인의 증언가 있었지만 또한 믿지 않고, "선생이 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면 어떻게 우리 선생이 될 수 있겠는가."라고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선사의 무함을 변론하는 것은 불성실하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여, 쟁송의 혐의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사례편람》 중에 이 설을 삭제하게 된 것은 백수의 공로입니다. 만약 끝내 삭제하지 않게 되었으면 또한 크게 분명하게 변론하였을 것이고, 심지어 계속해서 글을 지어서 나라 안의 사우(士友)들에게 두루 고하여 반드시 결정을 보았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문의 변고는 백수 때와 비교해 보면, 인간(認刊)과 관련한 무함이 도의를 무너뜨린 것은 전체가 달린 큰 관건이니, 어찌 예설에 있어 온당치 못한 한 가지 관건과 같을 뿐이겠습니까. 이른바 "홀로 앉아계실 때에 명을 받았다."는 것의 증거 없음은 문인과 함께 증명을 했음에도 오히려 만한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은 또한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 경중의 심함 여부가 서로 차이 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이 선사를 존숭하는 것은 이와는 달라서 아무 탈이 없다고 여겨서 이미 변론하여 밝히지도 않았고, 혹 한 두 명의 성실하게 변론하는 자가 있으면 또한 다투고 이기기 좋아하는 마음으로 돌려버리니, 또한 유독 무슨 마음이란 말입니까? 春間返旆之路,聞爲陰雨之窘,追切主人不挽之悚,而弟亦以是日出行而遇此窘矣。噫! 吾輩生丁不辰,窘於貧窮終一生,而頷頷者豈但一日之陰雨哉? 雖然,此皆適然而至,非由我致之者,亦何足說? 惟是心君之見窘於客氣私意,爲由我之罪而誤了其身者,爲可懼耳。未知吾兄見理何書,見究何義,有他日可以籍手而歸者否? 弟衰加窮甚, 死亡無日,而學荒咎積,深恐無以副先師平日之望而見於泉下也。視彼玄狂人生,眞朝暮耳。其臨終與人書曰: "先誣未雪,死不瞑目。" 其言絶悲不忍聞。顧今陰勢,日益鴟張。以弟素無樹立,衰窮若此,不能獨力廓淸,又加以衆口鑠金,積毁銷骨,則其何以不死也? 玄狂臨死之言,卽吾之事,特彼差先耳,寧不慨然? 蓋自兄異論之後,有再度往復,而兄未及更答,枉存弊廬。修契之夜,與寒江李兄及令再從露峰,語及震事,兄畧言異論之由,及見弟辨,亦復有據之意。寒江言: "震誣旣明,人之黨護,未知何心。" 露峰言: "自有認敎之說,世之疑艮翁者多,誠甚不幸。" 弟則在傍聽之,兄則黙然若有所思,更無所言而罷。弟意以兄之明,今可回悟而復舊,則宜有歸後一書之報矣。迨玆寥寥焉無聞,心之訝菀,莫以自解。夫"不可不謂之誣師",論之大定也,經過十年,守之甚久也。兄如欲棄此定論於十年之後,而謂震不誣也,則必得先師文字認敎之大的據相反於"請願刊布決是自辱"之訓者,然後可以生心。今也則不然。問其所據,則乃震之擬書一紙也; 問其書中端的可據如兄所謂非彼此有無之所爭而爲先師親作之文,則不過單指所引答李裕興勸印《炳庵集》書二十六字也。問此書中元無半點認意,何以爲的據,則不過以"此時非認不印"六字解之也。其爲震之揑合成誣,兄之見欺作證,弟之前書辨之頗明矣。以故兄亦於夜話時,擧誦鄙辨一段於寒、露而不復貳之者,此也。兄若心知鄙辨之是而復舊見,則弟亦自有可以揣兄意者存,豈必以筆書形言之報而後相悉哉? 但兄於前書有言: "石農旣斥人之相從志令以背先師負淵源,後與人書反自謂自諒平日似不至謂見絶之罪,故聞志令之喪,屢與人書曰: '痛斯世之無陽,傷吾黨之益孤云云。' 果如玄狂所論,則此不免人己二致,前後矛盾,可疑且可怪。"其致疑信驚怪於田、吳二書之間者,可謂不尋常矣。至見彼此文字之日,宜有到底之斷案,而向於弊廬見吳答金聖章書所言,果與玄狂所論,無一字差誤,則乃黙黙無一言以誅其人己二致、前後矛盾可惡之心術,此實不能無疑於兄也。弟則以爲其人之心術,本來如此,故爲其"功業爲重而不計道義"【此九字,先師嘗斥震泳語】也,則不憚冒錄師銜,投諸不測之地; 爲其防人口而脫己罪也,則不憚誣先師以認敎; 爲其報人討罪之憾也,則不憚禍同門於完檢; 爲其刊師稿而成己功也,則不憚囚師孫於晉署; 爲其先擠人而後媚人也,則不憚旣斥其人以背師負源而更乞憐以不至爲見絶之罪。又有如此書者,兄見此而猶不知惡焉。及至果庵家語及改稿,則曰"是亦出於爲師之心而自意改之,如此然後爲盡善",以反對。夫爲其衒能誇多,以邀其徒,見識文章優於先師之譽也,故改之添之,至不勝數之。鄙論夫不誅改稿之罪,而爲之明其心之爲師者,是又何義? 吾未知兄之意見,一何至此。蓋聞諸玄狂,兄於震之以我論鄭傳爲排節義者,有"是豈成說"之云,則是非不知其心術之不好,而今焉如是,旣不能無疑者,於是乎又滋惑焉。惟其有可惑如此,故幷意其向,雖不能置辨於鄙書,而猶有不深服者在也。竊嘗聞學問之道,"明"、"誠"二字是已。聖賢之所訓於後學者以此,先師之所望於門人者以此,吾儒之所相勉者亦以此,舍此無所謂學問者也。蓋若不知先師之心,而但知"此時非認不印",則是不明也; 知其不可然且不服,則是不誠也。吾恐兄之居一於是也。大抵此事,我若出於一毫枉人,是爲客氣所窘,兄若出於一毫護人,是爲私意所窘,而俱有如向之所懼者爾。自惟平生爲學,無有得力,惟於此事,可以俯仰無怍而無所窘矣。兄亦於今之變動,自信其無一毫之窘,而終不舍一朝受欺之見而復十年久守之論也否? 幸一明示之。記得昨春,同玄狂造門時,兄不云權純命亦以不言之敎爲不成說乎? 權以震之血黨,猶如此,今兄之忽棄十年定見而從彼者,何也? 此必有其故也。兄若偏用其心,自是其見,如一種人之流,則弟亦何必若是?若心特以終是平明慈諒,有多少商度,多少裁制,欲歸乎公正,無如兄者,以近日卒從鄙論師稿所載趙書"天下皆變之日"之云與陰傳"天下卽夷也"之語不同而不足爲其所據者,可見一端也。此吾所以眷眷不忘於兄者也。不然,如今同門盡化陰黨之日,何所爭於一人之多寡而冀兄之不助彼而助我乎? 凡此縷縷,皆爲兄也,非爲我也。如兄前書所云"先師不得已之末計,豈是坦然當行爲後世法底大敎",許多爲震分疏之說,傳之印之,爲《炳庵集》,則後世其將謂先師何等人? 謂此集爲何等文字? 兄且試一思之。昨秋,玄狂扶病去時與兄書,兄向雖一見,念是最後絶筆,則不容但留在此而無存於貴案,故取其登稿本以呈去,想覽之一倍有感於平日書也。此書末段勖兄之辭,至有"若不改圖,吾知他日之變,必更有難言之事"之語,區區從傍見之,以爲過慮矣。孰知其此友作書後,觀化前一月,兄忽有棄誣師定論,而信認敎明證之書乎? 所謂難言之事者,無乃指此歟? 惟願深思亡友見慮之至意,母使人發文成眞聖之歎於今日也。昔尤庵宋先生上疏曰: "竊聞比者憲臣投疏,提起李珥落髮之說,而引長生爲證。臣亦嘗見故文忠公臣張維文集,有記故知事臣趙緯韓之言矣,其言果以臣師爲有所云云也。臣於是常不勝其疑訝也。維乃長生之高弟也,其聞緯韓之言,何不爲長生痛辨其誣而只爲珥分疏耶? 其爲珥分疏之說,亦不明快,臣請從源頭先陳珥之實跡,則長生之誣不待辨而自明矣。竊惟文成公臣李珥,天資極高云云,至於落髮之說,極其誣罔。果若有是,則珥之文集敍其與老宿問答,而老宿何以曰'措大非俗儒'乎? 林億齡詩集又何以曰'與李生珥遊山'云乎? 設使珥眞有此事,亦不當自長生證之,況萬萬無此乎? 昔葉公曰: '吾黨有直躬者,其父攘羊,其子證之。' 孔子曰: '吾黨之直,異於是,父爲子隱,子爲父隱,直在其中。' 使長生果爲此,則與證父攘羊者何異? 而憲臣乃曰: '長生學識高明。' 此果成說話乎? 果成義理乎? 緯韓之爲此言,非所以誣長生,不過酬酢之際誤聽而誤說也云云。且維之所謂嚴不敢問者,亦有所不然者。臣與故參贊臣宋浚吉同聞長生之言,則曰: '嘗以變形與否,微稟于栗谷,則答曰 「雖不變形,何益於其心之陷溺哉?」' 所謂栗谷,卽珥之別號也。雖不切切分疏,而其不爲落髮之實狀,自然形見,眞是珥之氣象也。且憲臣引張維說,以爲'落髮是粗迹而不足辨,故長生亦言之若然',則何以又曰'諸臣備陳不落髮之實狀也'? 諸臣備陳不落髮之實狀,而獨長生言之云者,亦獨何心也? 臣竊爲長生寃痛也。以高明之弟子而證之,則珥之落髮,終不可辨明,珥之所遭,何其甚也? 且以粗跡而言之不難,則竊有所不然者。昔朱子雖少師道謙,而其知舊有欲剃髮者,則責之甚嚴,而竝斥其所親之不禁者。果以長生之高明而猶且爲是,則朱門之罪人也,烏得謂之適傳哉云云。夫聽言之道,惟觀義理之如何也云云。今維遽聞緯韓一言,而著之於文字,以爲今日藉口之資,豈不惜哉?"【止此】 夫栗谷落髮之說,當時尙有謂之粗迹而不足辨者,乃尢翁則視以爲大事而痛辨其誣。所謂沙翁之有所云云,亦不過趙知事之誤聽誤說,而只見《谿谷集》者,猶恐其爲實證,至曰"使某眞有此事,亦不當自某證之,况萬萬無此乎?" 而引孔子所論證父攘羊而明之。又曰"以高明之弟子證之,則某之落髮,不可辨明,某之所遭,何其甚也?" 又痛沙翁之歸於誣師,引與同春同聞沙翁所述栗翁之言,以明趙說、張集之不足信。如此其勤,而不憚煩於上告尊嚴之地。而况以今日吾門之變,視諸尢翁之所處,謂先師敎認印稿,其爲緊關之與落髮之尙可以粗迹論者何如乎? 先師之萬萬無此,而今自陰震之爲門人者證之,豈不爲父不攘羊而其子僞證乎? 自以"不必深拘"、"料量爲之"、"原從不言之敎"等說,筆之書,傳之稿, 而又至有臨死不易辭之誓,則其爲實證,豈但如出自他人之誤聽誤說而見於他人集者乎? 旣自處以適傳,而世多信之,則豈不是以高明之弟子證之,則終不可辨明,而先師所遭,何其甚也乎? "請願刊布,決是自辱"之遺書,其爲明白痛快,又奚啻如"雖不變形,何益陷溺"之不甚分疏而實狀自見乎? 其輕重甚否之相萬也如此。今之號爲學尢翁者,則不然,而視爲薄物細故,不惟不據遺書而盡力辨明,反以一二辨斥告明於士友間而不憚勤勞者爲過擧生事,豈不異哉?白水楊公,【應秀】 陶庵李先生之高弟也。其《四禮便覽‧改葬條補說辨疑》【《改葬條補說》本文曰: "若肌膚銷爛己盡,只餘骸骨,則於七星板四旁,粘薄板如棺狀,用眞黃土篩下塡之,與骸之最高處等。以手微鎭其四旁近板處,然後去四旁板,乃斂衣衾結絞,如大斂之儀。" 又曰: "若不改棺而只餘骸骨,則先就棺中篩下至掩骸,然後鋪綿補空。"】曰: "孟子之論棺槨曰: '毋使土親膚,於人心獨無恔乎?' 而今之君子,乃以黃土代其祖先之肌肉,以補合其骸, 是果爲人道乎? 以如此不仁不智之說,揷入於《便覽》,而謂是先師之言,則其誣陷先師爲如何哉? 嗚呼! 孰謂先師之沒未及十年,而義理之晦塞,乃至於此耶?" 又曰: "朴兄謂此條,累經先生之眼,一無疑怪。愚未知朴兄何以知其累經先生之眼耶? 此不過見士涵分疏之言而云然也云云。若使士涵就丈席之時,幷錄篩黃土實斂實棺之語,而先生稱其詳備,不以爲驚怪,則何以爲我先生也? 夫旣非先生所命,又不經覽於先生,而私自補入,以大貽累於先生,則此非誣陷而何? 此等辭說,有同爭訟,然辨師誣,安得不誠實爲之乎? 大抵斂骸實棺,不以線紙,而必用黃土之不可,雖三尺童子,亦可知之,而朴兄乃以爲累經先師之眼,一無疑怪,有難輕易刪去,何其不知先生至此之甚也?"【止此】 夫黃土補骸之說,雖甚未安,竟不過禮說之誤也。白水視以爲大事,切切然爲師辨其無是,至謂爲此說者誣陷先師。雖有門人經覽先生無怪之證,而亦不信之,至有曰: "先生不以爲怪,則何以爲我先生也?" 終謂"辨師誣不得不誠實爲之",而不避爭訟之嫌。今《便覽》中刪去此說,白水之功也。若使終不刪去,則又大肆明辨,至於聯篇累章,通告國中士友而定之也必矣。今以吾門之變,視白水之時,認誣之壞却道義,全體之大關,奚啻禮說未安之一關? 所謂獨坐承命之無據,與門人有證之,猶有可信者,又何如也? 其輕重甚否之相萬也如此。然而今人之尊師也異於是,視以爲無事而旣不辨明,或有一二誠實辨之者,則又歸之於爭心勝氣,亦獨何心? 천하가……날 간재는 조경헌에게 보내는 편지에 "세상 사람이 모두 변해도 군자가 변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변함이 없는 것이다. 온 세강이 변하지 않아도 군자가 변하는 것은 천하가 모두 변하는 날이다[世人皆變而君子不變, 是猶無變也. 擧世不變而君子變, 是天下皆變之日]"라고 하였다. 《간재집 (艮齋集)前編)》 권5 〈답조경헌(答趙景憲)〉 병암집(炳庵集) 원문은 '斗南集'으로 되어 있다. 문맥을 살펴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문성(文成)은……성인이었다 유성룡(柳成龍)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10만의 병사를 길러 전쟁에 대비하자는 이이의 의견을 반대하였다가 왜란이 일어난 뒤 "지금 생각해 보니 이 문성은 참으로 성인이었다."라고 탄식하였다고 한다. 《율곡전서(栗谷全書)》 권35 〈행장(行狀)〉 이이(李珥)가……설 이이는 어머니인 심사임당이 죽고 나서 20살 때까지 금강산에 있는 절에 들어가 있었다. 이 사실을 두고 남인은 이이가 불교에 귀의했다고 하여 계속해서 공격을 하였다. 옛날……하였습니다 《논어(論語)》 〈자로(子路)〉에 보인다. 흙이……않겠는가 《맹자(孟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맹자는 "법제에 할 수 있고 재물도 있으면 옛사람도 모두 좋은 관곽을 썼으니 내 어찌하여 홀로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죽은 이를 위해 흙이 살갗에 닿지 않게 한다면 사람의 마음에 유독 만족스럽지 않겠는가?[得之爲有財, 古之人皆用之, 吾何爲獨不然, 且比化者無使土親膚, 於人心獨無恔乎]"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