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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柳甥【壬辰】 向聞微攝。近復如何。萱闈康寧。渾室無它否。濟學正似漢拏山駒不受羈靮者。盖其本習也。近復稍稍近人馴致然也。可以見敎術不可不愼矣。今見歸後。動靜凡節。與曩時何如耶。翁衰相益甚。家間憂故不離。悶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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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趙月皐【性家◎乙酉】 秋稍竊聞御者。與諸名勝入蓬萊。妄擬歷路紆顧。欽遲旬浹。竟失所圖。乃知自家誠薄。不能盡禮於左右。致此遐乘也。自愧自訟。月初草枝。獲拜惠存。始知賤陋不全見斥於左右也。未及開緘。慰感交集。書後月再盈朒。伏惟道體對時益腴。德庇俱慶。遠溯種種。朝晡靡懈。但來喩過情。此豈相愛提撕之道。終未免遐外於左右。令人咄咄。弟去益離索。而年力又非前日之比。何足奉溷。明春枉顧。雖不敢必。而翹仰則切。令族能錫氏。間或得其聲息耶。安否何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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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金仲心【在沃◎丙戌 】 省體言喪慽何家無之。同氣之痛。誰人不遭。豈有如尊門疊遭於時月之間耶。慘矣慘矣。況以尊因心之友。友愛加隆。如割之痛。尤當一倍常情矣。何辭仰慰。從今以後。門戶之責惟在尊。則十分寬譬以庇諸孤。巨細詳審。無墜家聲。如何如何。毅揆以情禮。卽當匍匐。而亦未之遂。是罪是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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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익에게 보냄 與吳士益 丁丑 정축년(1937) 봄 사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장맛비에 군색한 형편이 되었다고 듣고서 늦었지만 주인으로서 만류하지 않은 것이 매우 송구하였고, 저 또한 이날 출발하여 그런 군색함을 만났습니다. 아, 우리들이 좋지 않은 세상에 태어나 빈궁에 군색하여 한평생을 마치는데 고달픈 것이 어찌 다만 하루의 장맛비뿐이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이것은 모두 때마침 공교롭게 닥친 것이고 내가 불러들인 것이 아니니, 또한 어찌 말할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오직 마음이 객기(客氣)와 사의(私意)에 군색하게 되는 것이 내가 스스로 지은 죄로서 그 일신을 망치는 것이기에 두려울 따름입니다. 우리 형은 현재 무슨 책을 보고 현재 무슨 의리를 궁구하여 훗날 의지하여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저는 노쇠에 빈궁도 심해져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학문은 거칠고 허물은 쌓여서 선사가 평일에 기대한 것에 부응하지 못하고 황천에서 뵐까 매우 두렵습니다. 저 현광(玄狂)의 인생을 보면 참으로 짧은 일생이었습니다. 그가 임종에 임하여 어떤 사람에게 준 편지에 말하기를 "선사의 무함을 씻어내지 못했으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이 너무도 비통하여 차마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날 음성의 기세가 날마다 더욱 사납게 떨치고 있습니다. 저는 평소에 수립한 것이 없고 노쇠하고 궁핍함이 이와 같아서 혼자 힘으로 시원하게 씻어낼 수가 없고, 또한 더욱 여러 입은 쇠를 녹이고 쌓인 비난은 뼈를 녹일 지경이니, 어떻게 죽지 않겠습니까? 현광이 임종할 때의 말은 바로 저의 일인데, 다만 그가 조금 앞서 죽었을 뿐이니 어찌 개탄스럽지 않겠습니까? 형이 의론을 달리 한 뒤부터 두 차례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형이 미처 답장을 하기 전에 저의 집에 왕림하였습니다. 수계(修契)하던 밤에 한강(寒江) 이형(李兄) 및 형의 재종(再從) 노봉(露峰)과 함께 말을 나누다가 오진영의 일에 미치자 형은 대략 의론을 달리한 이유를 말하였고, 제가 변론을 하는 것을 보고서는 또한 다시 근거가 있다는 뜻을 보였습니다. 한강은 "오진영의 무함이 이미 밝혀졌는데 사람들이 당을 지어 보호하는 것은 무슨 마음인지 알지 못하겠다."라고 하였고, 노봉은 "인교(認敎)의 설이 있고부터 세상에서 간옹(艮翁)을 의심하는 자들이 많아졌으니, 참으로 매우 불행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옆에서 그것을 들었고, 형은 묵묵히 생각하는 것이 있는 것 같았는데, 더는 아마 말도 없이 자리를 파하였습니다. 저는 형의 명철함으로 지금 돌이켜 깨우쳐서 옛날의 견해를 회복할 수 있으면 마땅히 돌아간 뒤에 한 통의 답장 편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쓸쓸히 들리는 것이 없으니, 마음이 의아하고 답답하여 스스로 달랠 길이 없습니다. 대저 "선사를 무함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 말에서 의론이 완전히 확정되었고, 10년이 경과하였으니 매우 오래도록 지킨 것이었습니다. 형이 만약 이러한 확정된 의론을 10년 뒤에 버리고 오진영이 선사를 무함하지 않았다고 말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청원하여 발간 배포하는 것은 결단코 스스로 욕되게 하는 것이다."라는 훈계와 상반된 '인교'와 관련한 명확한 근거가 되는 선사의 문자를 발견해야만 마음을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지 않습니다. 그 근거를 물었더니, 바로 오진영의 의서(擬書) 한 장뿐이었습니다. 그 편지 중의 명확하게 근거로 삼을 만한 것으로 형의 이른바 피차간에 유무를 다툴 것이 아니며 선사가 친히 지은 글이라고 한 것을 물었더니, 인용했던 [선사가] 이유흥(李裕興)에게 답한 편지에 《병암집(炳庵集)》을 인쇄하도록 권하였다는 26자만 가리키는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이 편지 중에는 원래 반점의 인의[認意]도 없는데 어떻게 명확한 근거로 삼을 수 있느냐고 물으면 "이때에는 인가를 받지 못하면 인쇄하지 못한다[此時非認不印]"는 6자로 해명한 것에 불과하였습니다. 오진영이 날조하여 무함하고 형이 속임을 당하여 증거로 삼은 것에 대해서는 제가 이전 편지에서 매우 분명하게 변론을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형은 또한 밤에 대화할 때에 제가 변론한 일단을 들어서 한강과 노봉에게 말해주고 다시 이의를 달지 않았습니다. 형이 만약 마음으로 저의 변론이 옳다는 것을 알고 옛날의 견해를 회복한다면 저 또한 형의 뜻이 있는 곳을 절로 짐작할 수 있으니, 어찌 반드시 편지로 답장하여 표현을 해야만 서로 잘 알 수 있겠습니까? 다만 형은 이전의 편지에서 말하기를, "석농(石農 오진영)이 앞서 지령(志令)을 서로 따른 사람에 대해 '선사를 배반하고 연원을 저버렸다,'고 배척하였는데, 뒤에 어떤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서 도리어 스스로 말하기를 '평소를 헤아려보건대 절교를 당할 죄라고 말할 정도에는 이르지 않았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지령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누차 다른 사람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이 세상에 양기(陽氣)가 없음을 통탄하고, 우리 당이 더욱 고립됨을 상심한다. ……"라고 하였습니다. 과연 현광이 논한 바와 같다면, 이는 남과 내가 차이가 있고 앞과 뒤가 모순됨이 있음을 면치 못하는 것이니, 의심스러워할 만하고 괴이하게 여길 만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전(田)과 오(吳) 두 편지 사이에서 의심하며 괴이하게 여긴 것이 일반적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피차의 문자를 보았던 날에 이르러서는 마땅히 최종적인 단안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난번에 저의 집에서 오진영이 김성장(金聖章)에게 답한 편지에서 한 말이 과연 현광이 논한 바와 한 글자도 차이가 없다는 것을 보고서는 이내 입을 다물고는 그의 '남과 내가 차이가 있고 앞과 뒤가 모순됨이 있는' 증오할 만한 심술을 벌주어야 한다는 한 마디 말씀도 없었습니다. 이는 실로 형에게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저는 그 사람의 심술이 본래 이와 같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공업(功業)을 중시하고 도의(道義)를 헤아리지 않는 행동[功業爲重而不計道義]'을 하기 위해서는 【이 아홉 글자는 선사가 일찍이 오진영을 배척한 말이다】 선사의 함자를 거짓으로 기록하여 헤아릴 수 없는 곳에 던져버리는 짓을 꺼리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입을 막아서 자신의 죄를 벗어나기 위하여서는 '인교(認敎)'로 선사를 무함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이 자신의 죄를 성토한 유감을 갚기 위하여서는 완산 검찰에 동문을 고소하여 재앙에 빠뜨리는 짓을 꺼리지 않았고, 선사의 원고를 간행하여 자신의 공을 이루기 위하여서는 진주 경찰서에 선사의 손자를 가두는 짓을 꺼리지 않았으며, 앞서는 사람을 밀쳐냈다가 뒤에는 그 사람에게 아첨하기 위해서는 '선사를 배반하고 연원을 저버렸다.'고 그 사람을 비난했다가 다시 절교를 당할 만큼의 죄에는 이르지 않았다고 동정을 구걸하였습니다. 또 이와 같은 편지가 있다면 형은 이것을 보고서도 오히려 증오할 줄 모를 것입니다. 《과암가어(果庵家語)》와 원고를 고침에 미쳐서는 "이것 또한 스승을 위한 마음에서 나와 자의적으로 고친 것이다. 이와 같이 해야만 최선을 된다."라고 하여 반대로 대답하였습니다. 능력을 자랑하고 견식이 많음을 과시하여 그 무리들에게 견식과 문장이 스승보다 뛰어나다는 명예를 구하였기 때문에 고치고 보탠 것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제가 원고를 고친 죄를 벌주지 않은 것을 논하니, 이 때문에 그 마음이 선사를 위한 것이었다고 밝힌 것은 또한 무슨 뜻입니까? 저는 형의 의견이 한결같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모르겠습니다. 현광에게 들었는데, 제가 〈정절사전〉을 논한 것에 대해 오진영이 절의를 배척한 것이라고 한 것에 대해 형이 '이것이 어찌 말이 되는가?'라고 말했다고 하니, 이것은 그의 심술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 이와 같으니, 앞서 의심이 없을 수 없었던 것이 이에 더욱 의혹이 불어나게 되었습니다. 오직 의혹스러운 것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앞에서 말씀한 것까지 아울러 헤아려서 비록 저의 편지에서 변론할 수는 없었지만 오히려 크게 따르지 못할 점이 있었습니다. 일찍이 학문의 도는 '명(明)'과 '성(誠)' 두 글자일 뿐이라고 들었습니다. 성현이 후학에게 가르친 것도 이것으로 하였고, 선사가 문인들에게 바란 것도 이것으로 하였으며, 우리 유자가 서로 권면하는 것도 이것으로 해야 합니다. 이것을 버리면 이른바 학문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만약 선사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단지 "이때에는 인가받지 못하면 인쇄하지 못한다."는 것만 안다면, 이것은 밝지 못한 것입니다. 그 불가함을 알고도 불복한다면 이것은 성실하지 못한 것입니다. 저는 형이 그 중의 하나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체로 이 사안에 있어서, 내가 만약 터럭만큼도 사람을 왜곡하려는 마음에서 나왔다만 이는 객기에 군색하게 된 것이고, 형이 만약 터럭만큼도 사람을 엄호하는 마음에서 나왔다면 이는 사심에 군색하게 된 것이니, 모두가 위에서 말한 두려울 것이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해보건대, 평생의 학문에 깊이 터득한 것은 없지만 오직 이 일에 대해서는 천지를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군색한 것도 없습니다. 형도 오늘의 변동에 대해 터럭만큼도 군색함이 없다고 자신하여 끝내 하루아침에 속임을 당하여 가지게 된 견해를 버리고 10년간 오래도록 지킨 의론을 회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한번 분명하게 보여주기 바랍니다.기억하건데, 지난 봄에 현광과 함께 문하에 갔을 때 형은 권순명(權純命) 또한 '불언지교(不言之敎)'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권순명은 오진영의 혈당(血黨)인데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지금 형은 갑자기 10년간 유지해온 정견(定見)을 버리고 그를 따른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는 반드시 그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형이 만약 그 마음을 치우치게 써서 스스로 자신의 견해를 옳다고 여기기를 일종의 사람처럼 한다면 제가 또한 어찌 반드시 이와 같이 하겠습니까. 마음을 특히 마침내 공평하고 어질게 하여 다소 헤아리고 다소 절제하여 공정한데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형 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는 선사의 원고에 실려 있는 조경헌(趙景憲)에게 보낸 편지의 "천하가 모두 변하는 날[天下皆變之日]"47)이라고 한 것이 음성이 지은 〈정절사전〉의 "천하가 즉시 오랑캐가 된다.[天下卽夷也]"는 말과 같지 않아서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저의 의론을 형이 마침내 따라 준 것에서 하나의 단서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런 점이 제가 형을 그리워하며 잊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오늘처럼 동문이 모두 음성의 당이 된 날에 무슨 한 사람의 많고 적음을 다투어 형이 저들을 돕지 않고 나를 돕기를 바라겠습니까? 이처럼 누누이 말하는 것은 모두 형을 위한 것이고 저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형의 이전 편지에 "선사의 어쩔 수 없는 말계(末計)이니, 어찌 평탄하게 마땅히 행해야 하는 것으로서 후세의 큰 가르침이 될 수 있겠는가"라고 한 것처럼, 오진영을 위해 변명하는 허다한 설을 전파하고 인쇄를 하여 《병암집(炳庵集))》48)을 만든다면, 후세 사람들이 장차 선사를 어떤 사람이라고 이를 것이며, 이 문집은 어떤 글이냐고 이를 것입니다. 형은 우선 시험 삼아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지난 가을, 현광이 병들어 세상을 떠날 형에게 보낸 편지를 형이 저번에 비록 한 번 보긴 하였지만, 최후의 절필(絶筆)임을 생각하면 다만 여기에만 남겨 두고 형의 책상에는 없게 할 수 없으므로 그 원고에 올린 저본을 취하여 적어 보내니 읽어 보면 평소의 편지보다 훨씬 느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편지 말단에 형을 권면하는 말에 "만약 고쳐 도모하지 않는다면 나는 훗날에 변고가 반드시 다시 말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기까지 하였습니다. 저는 옆에서 그것을 보고 지나친 염려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편지를 쓰고 뒤로 죽기 전 한 달 만에 형이 선사의 무함과 관련한 정론을 갑자기 버리고 '인교(認敎)'의 명확한 증거라는 편지를 믿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른바 말하기 어려운 일은 바로 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직 죽은 친구가 염려한 지극한 뜻을 깊이 생각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문성(文成)은 참으로 성인이었다."49)라는 한탄을 오늘날에 자아내게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옛날에 우암(尤庵) 송선생(宋先生)이 상소하기를, "삼가 듣건대, 근래 헌신(憲臣 홍수주(洪受疇))가 상소하여 이이(李珥)가 머리를 깎았다는 설50)을 제기하면서 김장생(金長生)을 끌어다 입증했다고 합니다. 신도 고(故) 문충공(文忠公) 장유(張維)의 문집을 보니, 고 지중추부사 조위한(趙緯韓)의 말을 기록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 말에 과연 신의 스승이 운운했다고 하였으나, 신은 이에 대해 늘 의아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장유는 바로 김장생의 고제(高第)인데, 조위한의 말을 듣고 어찌 김장생을 위하여 그것이 무함임을 통렬히 변론하지 않고서 단지 이이만을 위해서 변론했겠습니까? 장유가 이이를 위해서 변론했다는 말도 명쾌하지 못하니, 신은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서 이이의 실적을 진달하겠습니다. 그러면 김장생이 받은 무함은 변론하지 않아도 절로 밝혀질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문성공 이이는 타고난 자질이 지극히 고명합니다. …… 머리를 깎았다는 설은 무망(誣罔)하기 짝이 없는 말입니다. 과연 이런 일이 있었다면 이이의 문집에 노숙(老宿, 중의 존칭)과의 문답을 서술하고 있는데, 노숙이 무엇 때문에 '조대(措大, 선비)는 속유(俗儒)가 아니다.'라고 하였겠습니까? 임억령(林億齡)의 시집(詩集)에도 무엇 때문에 '이이와 산을 유람했다.'라고 하였겠습니까? 설령 이이가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김장생은 입증하지 않았을 터인데, 더구나 전혀 이런 일이 없는 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옛날 섭공(葉公)이, "우리 고장에 몸가짐을 정직하게 하는 사람이 있는데,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아들이 증인을 섰습니다."라고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우리 고장의 정직한 사람은 그와 달라서 아비는 자식을 위해 숨겨 주고 자식은 아비를 위해 숨겨 주니, 정직이 그 속에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51) 가령 김장생이 과연 그런 말을 했다면 아비가 양을 훔친 것을 증명한 자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런데도 헌신(憲臣)이 말하기를 '김장생은 학식이 고명하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성립되는 말이며 성립되는 의리입니까? 조위한(趙緯韓)이 말을 한 것은 김장생을 무함하기 위해서 한 말이 아니었고 수작할 때 잘못 듣고서 잘못 말한 데 불과하였습니다. …… 또 장유(張維)가 이른바 '엄해서 감히 묻지 못했다.'라고 한 말도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신이 고(故) 참찬(參贊) 송준길(宋浚吉)과 같이 김장생의 말을 들었는데, '일찍이 변형(變形, 머리 깎는 것)의 여부에 대해 은미하게 율곡(栗谷)에게 여쭈어 보았더니, 〈비록 변형은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마음이 빠진 데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하였다." 했습니다. 율곡은 바로 이이의 별호(別號)입니다. 비록 절절히 해명하지 않았으나 머리 깎지 않은 실상은 절로 드러났으니, 참으로 이이의 기상입니다. 또 헌신이 장유의 설을 인용하여, '머리를 깎은 것은 조적(粗迹 불확실한 증거)이라서 변론할 가치조차 없는 말이므로 김장생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했으니, 만약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또 '제신(諸臣)은 머리 깎지 않은 실상(實狀)을 갖추 진달했습니다."라고 한단 말입니까? 제신들은 머리 깎지 않은 실상을 갖추 진달했는데도 김장생만이 그렇게 말했다고 한 것은 또한 유독 무슨 마음에서입니까? 신은 삼가 김장생을 위해서 원통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고명한 제자로서 그것을 증명했다면 이이가 머리 깎았다는 것을 끝내 변명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니, 이이가 당한 무함이 어찌 그리 심하단 말입니까. 또 조적(粗跡)이라 해서 말하기를 어렵게 여기지 않는다면, 적이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옛날 주자(朱子)가 젊어서 중 도겸(道謙)을 스승으로 삼았었지만 자신의 친구 가운데 머리 깎으려는 사람이 있으면 매우 엄하게 질책한 것은 물론, 그것을 금하지 않은 친구까지 아울러 배척하였습니다. 과연 김장생의 고명함으로 오히려 그렇게 했다면, 이는 주자의 죄인이니, 어찌 적전(嫡傳)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 대저 말을 듣는 방법은 오직 그 의리가 어떤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 지금 장유는 갑자기 조위한에게 한 마디 말을 듣고서는 문자에 기록하여 오늘날의 구실거리를 만들었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상소는 여기까지이다.】 대저 율곡이 머리를 깎았다는 설은 당시에도 오히려 조적(粗跡)이어서 변론할 것이 없다고 말한 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옹(尤翁)은 큰 일로 보고 그 무함을 통렬하게 변론하였습니다. 이른바 사옹(沙翁)이 운운한 바가 있다는 것은 또한 조 지사(趙知事)가 잘못 듣고 잘못 말한 것에 불과했지만 단지 《계곡집》을 본 자는 오히려 실제 증거가 될까 두려워하여 심지어 "모(某 이이)가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또한 모(某 김장생)는 입증하지 않았을 터인데, 더구나 전혀 이런 일이 없는 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하고 공자가 논한 아버지가 양을 훔친 것을 증명한 일을 인용하여 변명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고명한 제자로서 그것을 증명했다면 모(某)가 머리 깎았다는 것을 끝내 변명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니, 모가 당한 무함이 어찌 그리 심하단 말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또 사옹이 선사를 무함한 것으로 귀결되는 것을 통탄하여, 동춘과 함께 사옹이 진술한 율옹의 말을 인용하여, 조위한의 설과 장유의 문집이 믿을 수 없음을 밝히었습니다. 우옹은 이처럼 부지런히 하면서도 위로 존엄한 임금께 고하는 일을 번거롭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오늘날 우리 사문(師門)의 변고를 우옹이 처한 처지와 비교해보면, 선사가 인가를 받아서 문집을 인쇄하게 했다는 것은 그 긴요한 관건이 되는 것이 머리를 깎은 것이 오히려 조적으로 논할 수 있다는 것과 큰 차이가 있으니 더욱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선사는 절대로 이런 일은 없었는데, 지금 음성 오진영은 문인이 된 자로서 그것을 증명하였으니, 어찌 아버지가 양을 훔치지도 않았는데 그 자식이 거짓으로 증명한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오진영은] 스스로 "반드시 깊게 구애될 필요는 없다.", "헤아려서 하라.", "원래 불언지교(不言之敎)를 따랐다." 등의 설로 편지에 쓰고 원고로 전하였고, 또 심지어 죽어도 말을 바꾸지 않겠다는 맹세까지 있었으니, 그 실증이 됨이 어찌 다만 다른 사람이 잘못 듣고 잘못 말한 것에서 나와서 다른 사람의 문집에 보이게 된 것과 같을 뿐이겠습니까? 이미 적전으로 자처하고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많이 믿고 있으니, 어찌 '고명한 제자로서 그것을 증명했다면 끝내 변명할 수 없게 된 것이니 선사가 무함을 당한 것이 어찌 그리 심하단 말인가.'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청원하여 발간 배포하는 것은 결단코 스스로 욕되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한 유서(遺書)는 그 명백하고 통쾌함이 또한 어찌 "비록 변형은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마음이 빠진 데에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라고 한 것이 그다지 변명을 하지 않았음에도 실상이 절로 드러난 것과 같을 뿐이겠습니까? 그 경중의 심함 여부가 서로 차이 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오늘날 우옹을 배운다고 말하는 자들은 그렇지 않아서 보잘 것 없는 작은 일로 보고 있습니다. 유서에 근거하여 힘을 다해 변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한 두 명의 변론하여 배척해서 사우들에게 고하여 밝히면서 수고로움을 마다않는 자들에 대해 지나치게 행동하여 일을 일으킨다고 하니, 어찌 괴이하지 않겠습니까?백수(白水) 양응수(楊應秀)는 도암(陶庵) 이재(李縡)의 고제입니다. 그 《사례편람(四禮便覽)》〈개장조보설변의(改葬條補說辨疑)〉에【〈개장조보설〉 본문에서 이르기를 "만약 피부가 이미 모두 삭아 없어지고 단지 해골만 남아 있다면 칠성판(七星板) 사방 옆에 관 모양의 얇은 판자를 부치고 진한 황토를 체로 쳐서 채워서 해골의 최고 높이와 같게 한다. 손으로 사방 옆 판자와 가까운 곳을 미세하게 다 채워 넣은 이후에 사방 옆에 있는 판자를 제거하고 의금(衣衾)을 염하고 결교(結絞)하기를 대렴(大斂)의 의식과 같게 한다." 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만약 관을 바꾸지 않고 해골만 남긴다면 먼저 관의 중간에서 체로 황토를 쳐서 해골을 모두 덮은 뒤에 면지(綿紙)를 펴서 빈곳을 채운다."라고 하였다.】에 이르기를, "맹자가 관곽(棺槨)을 논하여 말하기를 '흙이 살갗에 닿지 않게 한다면 사람의 마음에 유독 만족스럽지 않겠는가.'52)라고 했는데, 오늘날의 군자는 황토로써 그 선조의 살갗과 육신을 대신하여 그 해골을 보합(補合)하니, 이것이 정말로 사람의 도리인가. 이와 같은 불인하고 지혜롭지 못한 설을 《사례편람》에 삽입하고는 선사의 말이라고 했으니, 선사를 무함한 것이 어떠하겠는가. 아, 어찌 선사가 돌아가신 지 10년도 되지 못했는데 의리가 어두워져 막힘이 마침내 이런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라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박형(朴兄)은 이 조목이 여러 번 선생의 눈을 거쳤기 때문에 하나도 의심스럽고 괴이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나는 모르겠거니와 박형은 어떻게 여러 번 선생의 눈을 거쳤는지 알았던 것인가? 이것은 사함(士涵 한경양(韓敬養))이 변명한 말을 보고 그렇다고 말한 것에 불과할 뿐이었다. …… 만약 사함이 선생에게 나아갔을 때 '황토를 체로 쳐서 염(斂)을 채우고 관을 채운다.'는 말을 모두 기록하였고 선생이 그 자세히 갖춘 것을 칭찬하여 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면, 어떻게 우리 선생이 될 수 있겠는가. 이미 선생이 명한 것도 아니고 선생이 보신 것도 아닌데, 사사로이 보충하여 집어넣어 선생에게 크게 누를 끼쳤으니, 이것이 무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런 사설(辭說)은 서로 쟁송하는 것 같지만, 스승의 무함을 변론하는 것을 어찌 불성실하게 할 수 있겠는가. 대저 해골을 염하고 관을 채우는데 선지(線紙)로 하지 않고 반드시 황토를 쓰는 것이 불가함은 비록 삼척동자라도 또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박형은 마침내 여러 번 선생의 눈을 거쳐서 하나도 의심스럽고 괴이할 것이 없으므로 경솔히 삭제하기 어렵다고 하니, 어찌 선생을 알지 못함이 이처럼 심한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라고 하였습니다.【도암의 설은 여기까지이다.】 황토로 해골을 보합한다는 설은 비록 매우 온당하지 않더라도 결국 예설(禮說)의 오류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백수는 큰일로 여기고 절실하게 스승을 위하여 이런 도리가 없다고 변론하고, 심지어 이런 설을 하는 자는 선사를 무함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선생이 눈으로 보고서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문인의 증언가 있었지만 또한 믿지 않고, "선생이 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면 어떻게 우리 선생이 될 수 있겠는가."라고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선사의 무함을 변론하는 것은 불성실하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여, 쟁송의 혐의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사례편람》 중에 이 설을 삭제하게 된 것은 백수의 공로입니다. 만약 끝내 삭제하지 않게 되었으면 또한 크게 분명하게 변론하였을 것이고, 심지어 계속해서 글을 지어서 나라 안의 사우(士友)들에게 두루 고하여 반드시 결정을 보았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문의 변고는 백수 때와 비교해 보면, 인간(認刊)과 관련한 무함이 도의를 무너뜨린 것은 전체가 달린 큰 관건이니, 어찌 예설에 있어 온당치 못한 한 가지 관건과 같을 뿐이겠습니까. 이른바 "홀로 앉아계실 때에 명을 받았다."는 것의 증거 없음은 문인과 함께 증명을 했음에도 오히려 만한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은 또한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 경중의 심함 여부가 서로 차이 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이 선사를 존숭하는 것은 이와는 달라서 아무 탈이 없다고 여겨서 이미 변론하여 밝히지도 않았고, 혹 한 두 명의 성실하게 변론하는 자가 있으면 또한 다투고 이기기 좋아하는 마음으로 돌려버리니, 또한 유독 무슨 마음이란 말입니까? 春間返旆之路,聞爲陰雨之窘,追切主人不挽之悚,而弟亦以是日出行而遇此窘矣。噫! 吾輩生丁不辰,窘於貧窮終一生,而頷頷者豈但一日之陰雨哉? 雖然,此皆適然而至,非由我致之者,亦何足說? 惟是心君之見窘於客氣私意,爲由我之罪而誤了其身者,爲可懼耳。未知吾兄見理何書,見究何義,有他日可以籍手而歸者否? 弟衰加窮甚, 死亡無日,而學荒咎積,深恐無以副先師平日之望而見於泉下也。視彼玄狂人生,眞朝暮耳。其臨終與人書曰: "先誣未雪,死不瞑目。" 其言絶悲不忍聞。顧今陰勢,日益鴟張。以弟素無樹立,衰窮若此,不能獨力廓淸,又加以衆口鑠金,積毁銷骨,則其何以不死也? 玄狂臨死之言,卽吾之事,特彼差先耳,寧不慨然? 蓋自兄異論之後,有再度往復,而兄未及更答,枉存弊廬。修契之夜,與寒江李兄及令再從露峰,語及震事,兄畧言異論之由,及見弟辨,亦復有據之意。寒江言: "震誣旣明,人之黨護,未知何心。" 露峰言: "自有認敎之說,世之疑艮翁者多,誠甚不幸。" 弟則在傍聽之,兄則黙然若有所思,更無所言而罷。弟意以兄之明,今可回悟而復舊,則宜有歸後一書之報矣。迨玆寥寥焉無聞,心之訝菀,莫以自解。夫"不可不謂之誣師",論之大定也,經過十年,守之甚久也。兄如欲棄此定論於十年之後,而謂震不誣也,則必得先師文字認敎之大的據相反於"請願刊布決是自辱"之訓者,然後可以生心。今也則不然。問其所據,則乃震之擬書一紙也; 問其書中端的可據如兄所謂非彼此有無之所爭而爲先師親作之文,則不過單指所引答李裕興勸印《炳庵集》書二十六字也。問此書中元無半點認意,何以爲的據,則不過以"此時非認不印"六字解之也。其爲震之揑合成誣,兄之見欺作證,弟之前書辨之頗明矣。以故兄亦於夜話時,擧誦鄙辨一段於寒、露而不復貳之者,此也。兄若心知鄙辨之是而復舊見,則弟亦自有可以揣兄意者存,豈必以筆書形言之報而後相悉哉? 但兄於前書有言: "石農旣斥人之相從志令以背先師負淵源,後與人書反自謂自諒平日似不至謂見絶之罪,故聞志令之喪,屢與人書曰: '痛斯世之無陽,傷吾黨之益孤云云。' 果如玄狂所論,則此不免人己二致,前後矛盾,可疑且可怪。"其致疑信驚怪於田、吳二書之間者,可謂不尋常矣。至見彼此文字之日,宜有到底之斷案,而向於弊廬見吳答金聖章書所言,果與玄狂所論,無一字差誤,則乃黙黙無一言以誅其人己二致、前後矛盾可惡之心術,此實不能無疑於兄也。弟則以爲其人之心術,本來如此,故爲其"功業爲重而不計道義"【此九字,先師嘗斥震泳語】也,則不憚冒錄師銜,投諸不測之地; 爲其防人口而脫己罪也,則不憚誣先師以認敎; 爲其報人討罪之憾也,則不憚禍同門於完檢; 爲其刊師稿而成己功也,則不憚囚師孫於晉署; 爲其先擠人而後媚人也,則不憚旣斥其人以背師負源而更乞憐以不至爲見絶之罪。又有如此書者,兄見此而猶不知惡焉。及至果庵家語及改稿,則曰"是亦出於爲師之心而自意改之,如此然後爲盡善",以反對。夫爲其衒能誇多,以邀其徒,見識文章優於先師之譽也,故改之添之,至不勝數之。鄙論夫不誅改稿之罪,而爲之明其心之爲師者,是又何義? 吾未知兄之意見,一何至此。蓋聞諸玄狂,兄於震之以我論鄭傳爲排節義者,有"是豈成說"之云,則是非不知其心術之不好,而今焉如是,旣不能無疑者,於是乎又滋惑焉。惟其有可惑如此,故幷意其向,雖不能置辨於鄙書,而猶有不深服者在也。竊嘗聞學問之道,"明"、"誠"二字是已。聖賢之所訓於後學者以此,先師之所望於門人者以此,吾儒之所相勉者亦以此,舍此無所謂學問者也。蓋若不知先師之心,而但知"此時非認不印",則是不明也; 知其不可然且不服,則是不誠也。吾恐兄之居一於是也。大抵此事,我若出於一毫枉人,是爲客氣所窘,兄若出於一毫護人,是爲私意所窘,而俱有如向之所懼者爾。自惟平生爲學,無有得力,惟於此事,可以俯仰無怍而無所窘矣。兄亦於今之變動,自信其無一毫之窘,而終不舍一朝受欺之見而復十年久守之論也否? 幸一明示之。記得昨春,同玄狂造門時,兄不云權純命亦以不言之敎爲不成說乎? 權以震之血黨,猶如此,今兄之忽棄十年定見而從彼者,何也? 此必有其故也。兄若偏用其心,自是其見,如一種人之流,則弟亦何必若是?若心特以終是平明慈諒,有多少商度,多少裁制,欲歸乎公正,無如兄者,以近日卒從鄙論師稿所載趙書"天下皆變之日"之云與陰傳"天下卽夷也"之語不同而不足爲其所據者,可見一端也。此吾所以眷眷不忘於兄者也。不然,如今同門盡化陰黨之日,何所爭於一人之多寡而冀兄之不助彼而助我乎? 凡此縷縷,皆爲兄也,非爲我也。如兄前書所云"先師不得已之末計,豈是坦然當行爲後世法底大敎",許多爲震分疏之說,傳之印之,爲《炳庵集》,則後世其將謂先師何等人? 謂此集爲何等文字? 兄且試一思之。昨秋,玄狂扶病去時與兄書,兄向雖一見,念是最後絶筆,則不容但留在此而無存於貴案,故取其登稿本以呈去,想覽之一倍有感於平日書也。此書末段勖兄之辭,至有"若不改圖,吾知他日之變,必更有難言之事"之語,區區從傍見之,以爲過慮矣。孰知其此友作書後,觀化前一月,兄忽有棄誣師定論,而信認敎明證之書乎? 所謂難言之事者,無乃指此歟? 惟願深思亡友見慮之至意,母使人發文成眞聖之歎於今日也。昔尤庵宋先生上疏曰: "竊聞比者憲臣投疏,提起李珥落髮之說,而引長生爲證。臣亦嘗見故文忠公臣張維文集,有記故知事臣趙緯韓之言矣,其言果以臣師爲有所云云也。臣於是常不勝其疑訝也。維乃長生之高弟也,其聞緯韓之言,何不爲長生痛辨其誣而只爲珥分疏耶? 其爲珥分疏之說,亦不明快,臣請從源頭先陳珥之實跡,則長生之誣不待辨而自明矣。竊惟文成公臣李珥,天資極高云云,至於落髮之說,極其誣罔。果若有是,則珥之文集敍其與老宿問答,而老宿何以曰'措大非俗儒'乎? 林億齡詩集又何以曰'與李生珥遊山'云乎? 設使珥眞有此事,亦不當自長生證之,況萬萬無此乎? 昔葉公曰: '吾黨有直躬者,其父攘羊,其子證之。' 孔子曰: '吾黨之直,異於是,父爲子隱,子爲父隱,直在其中。' 使長生果爲此,則與證父攘羊者何異? 而憲臣乃曰: '長生學識高明。' 此果成說話乎? 果成義理乎? 緯韓之爲此言,非所以誣長生,不過酬酢之際誤聽而誤說也云云。且維之所謂嚴不敢問者,亦有所不然者。臣與故參贊臣宋浚吉同聞長生之言,則曰: '嘗以變形與否,微稟于栗谷,則答曰 「雖不變形,何益於其心之陷溺哉?」' 所謂栗谷,卽珥之別號也。雖不切切分疏,而其不爲落髮之實狀,自然形見,眞是珥之氣象也。且憲臣引張維說,以爲'落髮是粗迹而不足辨,故長生亦言之若然',則何以又曰'諸臣備陳不落髮之實狀也'? 諸臣備陳不落髮之實狀,而獨長生言之云者,亦獨何心也? 臣竊爲長生寃痛也。以高明之弟子而證之,則珥之落髮,終不可辨明,珥之所遭,何其甚也? 且以粗跡而言之不難,則竊有所不然者。昔朱子雖少師道謙,而其知舊有欲剃髮者,則責之甚嚴,而竝斥其所親之不禁者。果以長生之高明而猶且爲是,則朱門之罪人也,烏得謂之適傳哉云云。夫聽言之道,惟觀義理之如何也云云。今維遽聞緯韓一言,而著之於文字,以爲今日藉口之資,豈不惜哉?"【止此】 夫栗谷落髮之說,當時尙有謂之粗迹而不足辨者,乃尢翁則視以爲大事而痛辨其誣。所謂沙翁之有所云云,亦不過趙知事之誤聽誤說,而只見《谿谷集》者,猶恐其爲實證,至曰"使某眞有此事,亦不當自某證之,况萬萬無此乎?" 而引孔子所論證父攘羊而明之。又曰"以高明之弟子證之,則某之落髮,不可辨明,某之所遭,何其甚也?" 又痛沙翁之歸於誣師,引與同春同聞沙翁所述栗翁之言,以明趙說、張集之不足信。如此其勤,而不憚煩於上告尊嚴之地。而况以今日吾門之變,視諸尢翁之所處,謂先師敎認印稿,其爲緊關之與落髮之尙可以粗迹論者何如乎? 先師之萬萬無此,而今自陰震之爲門人者證之,豈不爲父不攘羊而其子僞證乎? 自以"不必深拘"、"料量爲之"、"原從不言之敎"等說,筆之書,傳之稿, 而又至有臨死不易辭之誓,則其爲實證,豈但如出自他人之誤聽誤說而見於他人集者乎? 旣自處以適傳,而世多信之,則豈不是以高明之弟子證之,則終不可辨明,而先師所遭,何其甚也乎? "請願刊布,決是自辱"之遺書,其爲明白痛快,又奚啻如"雖不變形,何益陷溺"之不甚分疏而實狀自見乎? 其輕重甚否之相萬也如此。今之號爲學尢翁者,則不然,而視爲薄物細故,不惟不據遺書而盡力辨明,反以一二辨斥告明於士友間而不憚勤勞者爲過擧生事,豈不異哉?白水楊公,【應秀】 陶庵李先生之高弟也。其《四禮便覽‧改葬條補說辨疑》【《改葬條補說》本文曰: "若肌膚銷爛己盡,只餘骸骨,則於七星板四旁,粘薄板如棺狀,用眞黃土篩下塡之,與骸之最高處等。以手微鎭其四旁近板處,然後去四旁板,乃斂衣衾結絞,如大斂之儀。" 又曰: "若不改棺而只餘骸骨,則先就棺中篩下至掩骸,然後鋪綿補空。"】曰: "孟子之論棺槨曰: '毋使土親膚,於人心獨無恔乎?' 而今之君子,乃以黃土代其祖先之肌肉,以補合其骸, 是果爲人道乎? 以如此不仁不智之說,揷入於《便覽》,而謂是先師之言,則其誣陷先師爲如何哉? 嗚呼! 孰謂先師之沒未及十年,而義理之晦塞,乃至於此耶?" 又曰: "朴兄謂此條,累經先生之眼,一無疑怪。愚未知朴兄何以知其累經先生之眼耶? 此不過見士涵分疏之言而云然也云云。若使士涵就丈席之時,幷錄篩黃土實斂實棺之語,而先生稱其詳備,不以爲驚怪,則何以爲我先生也? 夫旣非先生所命,又不經覽於先生,而私自補入,以大貽累於先生,則此非誣陷而何? 此等辭說,有同爭訟,然辨師誣,安得不誠實爲之乎? 大抵斂骸實棺,不以線紙,而必用黃土之不可,雖三尺童子,亦可知之,而朴兄乃以爲累經先師之眼,一無疑怪,有難輕易刪去,何其不知先生至此之甚也?"【止此】 夫黃土補骸之說,雖甚未安,竟不過禮說之誤也。白水視以爲大事,切切然爲師辨其無是,至謂爲此說者誣陷先師。雖有門人經覽先生無怪之證,而亦不信之,至有曰: "先生不以爲怪,則何以爲我先生也?" 終謂"辨師誣不得不誠實爲之",而不避爭訟之嫌。今《便覽》中刪去此說,白水之功也。若使終不刪去,則又大肆明辨,至於聯篇累章,通告國中士友而定之也必矣。今以吾門之變,視白水之時,認誣之壞却道義,全體之大關,奚啻禮說未安之一關? 所謂獨坐承命之無據,與門人有證之,猶有可信者,又何如也? 其輕重甚否之相萬也如此。然而今人之尊師也異於是,視以爲無事而旣不辨明,或有一二誠實辨之者,則又歸之於爭心勝氣,亦獨何心? 천하가……날 간재는 조경헌에게 보내는 편지에 "세상 사람이 모두 변해도 군자가 변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변함이 없는 것이다. 온 세강이 변하지 않아도 군자가 변하는 것은 천하가 모두 변하는 날이다[世人皆變而君子不變, 是猶無變也. 擧世不變而君子變, 是天下皆變之日]"라고 하였다. 《간재집 (艮齋集)前編)》 권5 〈답조경헌(答趙景憲)〉 병암집(炳庵集) 원문은 '斗南集'으로 되어 있다. 문맥을 살펴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문성(文成)은……성인이었다 유성룡(柳成龍)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10만의 병사를 길러 전쟁에 대비하자는 이이의 의견을 반대하였다가 왜란이 일어난 뒤 "지금 생각해 보니 이 문성은 참으로 성인이었다."라고 탄식하였다고 한다. 《율곡전서(栗谷全書)》 권35 〈행장(行狀)〉 이이(李珥)가……설 이이는 어머니인 심사임당이 죽고 나서 20살 때까지 금강산에 있는 절에 들어가 있었다. 이 사실을 두고 남인은 이이가 불교에 귀의했다고 하여 계속해서 공격을 하였다. 옛날……하였습니다 《논어(論語)》 〈자로(子路)〉에 보인다. 흙이……않겠는가 《맹자(孟子)》 〈공손추 하(公孫丑下)〉에, 맹자는 "법제에 할 수 있고 재물도 있으면 옛사람도 모두 좋은 관곽을 썼으니 내 어찌하여 홀로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죽은 이를 위해 흙이 살갗에 닿지 않게 한다면 사람의 마음에 유독 만족스럽지 않겠는가?[得之爲有財, 古之人皆用之, 吾何爲獨不然, 且比化者無使土親膚, 於人心獨無恔乎]"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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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柳悅卿【志普◎戊子】 謹拜覆甘澍微灑。惠函適至。深慰渴望。況審炎敲兄體動止。以閑御劇。諸度歸仁。可認吾兄方寸靜定。尤賀尤賀。弟欲言身狀。則不過一張病錄甚係。張不敢說。又不欲說。官家來汝之敎。去益惶悚。奈何奈何。社壇祝辭。此曾前所未見習者。而況今病昏中所可議到耶。齋中必有前例文字。以此行之似好。而若未則與金兄裁用。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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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익에게 보냄 與吳士益 乙亥 을해년(1935) 음성 사람이 형에게 〈정절사전(鄭節士傳)〉을 주었다 들었습니다. 그 가운데 "천하가 중화 세계인데 유자(儒者)가 중화인이 될 수 없다면, 천하가 즉시 오랑캐가 된다."라는 한 구절이 있는데, 형의 고견은 어떠합니까? 저는 크게 세도(世道)에 해롭다고 여깁니다. 지난번에 현광(玄狂 전일중(田鎰中)을 만났는데 그도 그렇다고 여겨서 마침내 .드디어 각각 하나의 변론이 있었습니다. 이에 적어서 바치니 만약 온당하지 않은 부분이 있으면 꺼리지 말고 정정하여 보내주기 바랍니다. 이것은 공공(公共)의 의리이니, 진실로 음성에게서 나왔다는 이유로 꾸며서 꾸짖어서도 안 되고, 또한 음성에게서 나왔다는 이유로 혐의를 피하기 위해 침묵해서도 안 됩니다. 요컨대 다만 반드시 '공명(公明)' 두 글자에 입각하여 이 안건을 단정해야 합니다. 어떠합니까? 聞陰人投兄以《鄭節士傳》。其中"天下華而儒不能華,則天下即夷也"一語,高見見得如何? 鄙則以爲大爲世道之害。向見玄狂,亦以爲然,遂各有一度辨論。茲錄呈,如有未當,不憚訂示。此是公共義理,固不可以出於陰而工加訶責,亦不可以出於陰而避嫌含黙。要之只消道公明二箇字,斷得此案,如何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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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익에게 답함 答吳士益 丙子 병자년(1936) 문을 닫고 한 해가 다하는데 서로 위문하는 사람도 없어서 거의 귀양 가서 사는 것 같아서 내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습니다. 이런 즈음에 반가운 편지를 받으니 얼굴에 먼저 화색이 돌았습니다. 더구나 편지 첫머리에서 "설산에서 밤에 등불을 켜고 독서하고 궁구하니 저도 모르게 춤을 춘다."라고 했으니, 생각만 해도 부럽습니다. 이것은 형이 몸소 장차 돌아온다는 좋은 소식이지만 사랑하나 도울 길 없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천지가 뒤집어져 우리 당이 더욱 더 고립된 것에 대해 마음 아파하면서 저에게 기대를 걸고 격려하여 천 길의 절벽처럼 우뚝 서고 퇴폐한 시류에서 지주(砥柱)5)가 되어주기를 바랐습니다. 저는 진실로 은덕을 알고 감격하여 사양하고 싶지 않거니와 또한 형도 스스로 사양하지 않고 같은 마음을 가져주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해 "젊은 날을 헛되이 보내고 늦은 나이에 스스로 후회스럽다."고 하였는데, 비록 스스로 혐의하는 말이지만 또한 이런 후회하는 마음이 없어서는 안 되니, 후회하는 마음이 싹트는 것은 바로 길상(吉祥)의 조짐이기 때문입니다."매번 일과 마음이 서로 어긋나서 괴롭다."고 하였는데, 이는 마땅히 매우 잘 이해하여 혹시라도 그대로 지나쳐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형 한 사람의 근심이 아니고 저도 항상 하는 근심하는 바이며 또한 고금의 사람들이 똑같이 근심하는 것입니다. 천고 이래로 도가 밝혀지지 않은 것은 진실로 이 한 마디 말을 구분하여 처리하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함으로써 그렇게 된 것이니, 훌륭한 질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형이 만약 마음과 일이 서로 어긋나는 괴로움이 없다면 반드시 강하를 터 내린 것 같아 그 성대한 기세를 막을 수 없는 것6)이 반드시 순임금보다 크게 못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순임금이 깊은 산중에 있었을 때에 야인들과 또한 어떠했습니까? 또한 오늘날 형과 같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순임금은 일찍이 일과 마음이 서로 어긋난 것에 대해 이처럼 스스로 괴로워하지 않고 반드시 함양하여 기다리고 여유롭게 터득하였기 때문에 통달할 수가 있었습니다.또한 천지 사이에서 만물은 모든 측면에서 다 완벽하기 어려우니 각각 서로 가감을 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이제 모든 측면에서 다 완벽하고자 하니, 이것은 우리들의 공통된 근심입니다. 예컨대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은 천승(千乘)의 나라도 양보할 수 있습니다. 진실로 명예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천승의 나라를 양보하는 것도 애당초 그 마음과 어긋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천승의 나라를 양보해야만 비로소 명예를 취하는 바탕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동시에 취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좋은 명예를 취하는 것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울러 천승의 나라를 취하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니, 두 가지 모두 반드시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이른바 '일과 마음이 서로 어긋난다.'는 것은 바로 이를 통해 마음을 터득하는 바탕임이 분명하지 않겠습니까?삼가 살피건대, 우리 선사는 평소에 일을 만나면 곧바로 행하여서 조금도 머뭇거리거나 구차한 모습이 없이 곧바로 실천하고 회피하는 바가 없었는데, 능히 시원하면서도 항상 여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방도를 썼기 때문이었습니다. 형의 한 가지 질문이 나로 하여금 이를 힘쓰게 했으니 감사하는 마음 그지없으며, 형도 이를 힘쓰기 바랍니다. 편지 끝에 형이 스스로 말씀하기를 "한 터럭의 사사로운 뜻도 이 사이에 보탠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저 또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바라는 것은 다시 위로 더 나아가 반드시 이치에 맞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사사로운 뜻이 없더라도 또한 끝내 옳지 못한 것에 빠짐이 있을 것입니다. 형은 또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유자(儒者), 중화(中華), 오랑캐[夷]를 각각 하나씩 거론하면 유자에는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이 있고, 중화에는 내외(內外)와 명실(名實)이 있고, 오랑캐에는 반전(半全)과 진가(眞假)가 있어서 각각 묶어서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를 상대적으로 거론하면 유자는 유자이고, 중화는 중화이고, 오랑캐는 오랑캐입니다. 명목이 한 번 세워지면 터럭만큼도 그 경계를 넘어서는 안 되니, 한 번이라도 혹 서로 경계를 넘게 되면 이에 명분이 이미 혼란해지고, 실제 또한 그것을 뒤따르게 됩니다. 예컨대 아버지와 자식의 명분이 서로 경계를 넘게 되면 장차 아버지가 자식이 되고, 자식이 아버지 되는 일이 없겠습니까? 이와 같다면 형은 장차 명분이 서로 경계를 넘는 것을 허용하여 또한 활간(活看)7)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 오진영(吳震泳)이 지은 〈정절사전(鄭節士傳)〉에 "유자가 중화인이 될 수 없다면 중화인 즉시 오랑캐가 된다."라고 했습니다. 유자와 오랑캐를 상대지어 "유자가 중화인이 될 수 없다."고 했으니, 이는 유자와 오랑캐에 무슨 구별이 있습니까? 중화와 오랑캐를 상대지어 "중화인이 즉시 오랑캐가 된다."고 했으니, 이는 중화와 오랑캐에 무슨 구별이 있습니까? 유자와 오랑캐가 서로 뒤섞이면 오랑캐일 뿐이고, 중화와 오랑캐가 서로 뒤섞이면 오랑캐일 뿐입니다. 이것으로 입언하여 세상에 공포해서 이를 통해 천하를 바꾸려고 생각을 하니 한번 전해지고 재차 전해지면 그 효과는 장차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이 즉시 변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입니다. 조경헌(趙景憲)의 편지에는 "군자는 단독으로 거론하여도 유덕(有德)과 무덕(無德)을 통틀어 말할 수 있다. 설령 변하는 것이 있더라도 명분을 넘거나 실지를 잃게 되는 우려가 없고, 이로써 스스로 힘쓰면 또한 절로 유덕의 지경에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병통이 없게 되는 방법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고견을 듣기를 절실히 바랍니다."활간(活看)"이라는 말은 자세히 음미해보면 문자(文字) 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사위(事爲) 상에도 있는 것 같으니, 더 헤아려야할 것 같습니다. 단지 문자로만 말한다면, 만약 모든 경우 이 방법만 쓴다면 잃어버리는 것은 한 글자를 밝히지 못한 것에 불과하지만 또한 장차 죽어 넘어진 시체가 백만이 되게 하고 후세에 재앙을 끼치는데 이르게 됩니다. 하물며 사위의 경우는 죽어 넘어져 죽은 시체가 백만이고 후세에 재앙을 끼치는 정도일 뿐만이 아닐 것이니 더욱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반드시 천지가 뒤집어지고 부자가 자리를 바꾼 이후에 끝날 것입니다. "활간"을 어찌 감히 쉽게 말할 수 있습니까? 옛 성현의 용심(用心)을 상고해 보면, 예컨대 '유정유일(惟精惟一)'8), 문리밀찰9), 호찰통언10), 명변지11), 상설지12)' 같은 것은, 어느 말이던 모두 감히 활간의 뜻을 쉽게 여기지 않아서 마침내 태평의 실지를 이룬 것입니다. 종래 활간을 형처럼 쉽게 말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지금 이미 나타난 효과로써 말을 한다면, "중화인이 즉시 오랑캐가 된다."는 말은 조금도 문리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니, 누군들 이와 같은 것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형은 마침내 스스로 미혹되어 있으니, 이것이 어찌 깜짝 놀라 깨달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담장이 무너지면 도적에게 편한 길을 내주는 것이니, 밤을 틈타서 침입하는 자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간사한 덕이 있지 않다면 어찌 아첨을 묻는 일이 있겠습니까?13) 형을 위해 깊은 우려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기에 언급하였습니다. 門掩歲窮,無人相問,殆同謫居,莫慰我心,際承華翰,顔先回色。況其書首有曰"雪山夜燈,看硏舞蹈",想以爲羨。此其兄以身將至之好消息,已不勝莫助之愛矣。又有以天地翻覆吾黨益孤爲心痛,而推弟負望用勵,壁立千仞,砥柱頹流。弟固知感而不欲辭,亦欲兄之不自辭而知感也。至其自謂"虛過少壯,晩自悔恨",雖是自嫌之辭,亦是不可無此悔心,悔心之萌,吉祥之兆故也。"每苦事心相違"之云,此宜大煞理會,不或有放過者。此非但兄一人之所爲患,亦弟之所常爲患者,亦古今人之所同爲患者。千古以來,道之不明,亶爲坐此一言不得區處之方而致也,可謂大哉問也。使兄若無事違之苦,其必能若決江河,沛然莫之能禦,不必多讓於大舜矣。然則舜之在深山之中,其與野人者又如何? 亦不過如兄今日之日矣。而想未嘗以事心相違,恁地自苦而己,必涵泳而待之,優遊而得之,是以達也。且夫天地之間,物難兩全,各相乘除而成。今也欲兩全之,此爲吾人之通患。如好名之人能讓千乘之國,苟知名之爲可取,則讓千乘之國,初非違於其心,何也? 讓千乘之國,方爲取名之資故也。今欲幷取,是非但不知取好名,幷與不知取千乘之國者,二者皆必無成矣。然則凡厥吾儕所謂事心相違者,正是資以得心之地者,不其明乎? 竊伏見我先師平日遇事輒行,靡或少有依違苟且之態,一直做去,無所回護,所以能致沛然而常覺裕如者,用是道也。兄之一問,能使我勉此及之,感不自戢,亦欲兄之勉此也。書末兄之自謂"無一毫私意加於其間"云者,弟亦謂然,但欲更進上頭,必於當理,否則雖能無私,而亦有卒陷不韙者矣。兄又以爲如何?儒、華、夷各自單擧,則儒有君子小人,華有內外名實,夷有半全眞假,皆各得統而言之矣。若以之相對,儒則儒也,華則華也,夷則夷也。名目一立,不可毫髮踰其界,至一或相踰,是名已亂而實亦隨之。如父子之名相踰,而其將不有以父爲子以子爲父者乎? 如此則兄將許其名之相踰,而亦可活看得耶? 今吳傳曰: "儒不能華,華卽夷也。" 儒與夷相對而曰"儒不能華",是儒與夷庸有別乎? 華與夷相對而曰"華卽夷",是華與夷庸有別乎? 儒夷相混則是夷而己矣,華夷相混則是夷而己矣。以此立言而公諸世,思以易天下,一傳再傳,則其效將成如何? 此其所以不得不立辨者然也。趙景憲書,則其君子是單擧而可通有無德而言者,設有變者,元無踰名失實之慮,以之自勉,則亦可自進於有德,斯其所以爲無病耳。切願更聞高論。"活看"之云,細味之,非徒在文字上,亦似在事爲上,恐更商量。只以文字言之,若一切用此法,所失不過一字不明,而亦將至於伏屍百萬,流禍後世,況在事爲奚啻伏屍禍世而己哉? 必至於天地翻覆,父子易位而後已。活看豈敢易言乎哉? 稽古聖賢用心,如"惟精惟一"、"文理密察"、"好察邇言"、"明辨之"、"詳說之"者,何莫非不敢容易活看之意而遂致太平之實者? 從未有易言活看如兄者也。今以其已效者言之,"華卽夷"之爲不可稍解文理者,孰不知其如此? 而兄乃自迷,此豈非憬然可悟者耶?墻垣之壞,賊人之便也,恐有乘夜而侵入者。不有邪德,安有問佞? 不勝爲兄深長之慮,是以及之。 지주(砥柱) 중국의 황하(黄河) 거센 물살 가운데 우뚝이 서 있는 바위산으로, 혼탁한 세속에 휩쓸리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절조를 지키는 군자에 곧잘 비유된다. 강하를……것 맹자가 이르기를 "순 임금이 깊은 산중에 거처하실 적에는 나무, 돌과 함께 거처하시며, 사슴, 멧돼지와 함께 노시니, 깊은 산중의 야인과 다른 점이 드물었는데, 한 선언을 듣고 한 선행을 봄에 미쳐서는 마치 강하를 터 내린 것 같아 그 성대한 기세를 막을 수가 없으셨다.[舜之居深山之中, 與木石居, 與鹿豕遊, 其所以異於深山之野人者幾希. 及其聞一善言, 見一善行, 若決江河, 沛然莫之能禦也]"라고 하였다.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 활간(活看) 글을 볼 때에 글자나 글귀에 얽매이지 않고 전체의 뜻을 널리 보아 본의를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유정유일(惟精惟一)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미세하니, 오직 정밀하고 일관되게 하여 진실로 그 중을 잡아야 한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고 하였다. 문리밀찰(文理密察) 《중용장구(中庸章句)》 제31장에 보이는 구절로, 문(文)은 문장, 이(理)는 조리, 밀(密)은 상세(詳細), 찰(察)은 명변(明辯)을 뜻한다고 한다. 호찰이언(好察邇言) 《중용장구(中庸章句)》 제6장에 공자가 순 임금의 덕을 일컬어 "순 임금은 묻기를 좋아하고 천근한 말을 살피기를 좋아하고, 남의 악을 감춰 주고 선한 일은 드러냈다.[舜好問而好察邇言, 隱惡而揚善]"라고 하였다. 명변지(明辨之)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2장에 "널리 배우고, 상세히 따져 묻고, 신중히 사색하고, 명백히 가리고, 독실히 행하라.[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 라고 하였다. 상설지(詳說之) 《맹자(孟子)》 〈이루하(離婁 下)〉에 "널리 배우고 상세히 말한다.[博學而詳說之]"라고 하였는데, 박학에 힘쓴다는 의미이다. 간사한……있겠습니까 《진서(晉書)》 〈안함전(顔含傳)〉에, 안함이 말하기를 "나는 듣건대, '남의 나라를 칠 때에 어진 사람에게는 묻지 않는다.' 하는데, 전번에 풍조사(馮祖思)는 나에게 아첨하는 일을 물었으니, 내게 간사한 덕이 있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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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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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오사익에게 보냄 與吳士益 丙子 병자년(1936) 저는 근래 《주자대전》을 공부하고 있는데, 읽다가 "의리는 미루어 찾기가 어렵고 공부는 중간에 끊어지기 쉬운데, 세월은 물처럼 흘러가니 매우 걱정되고 두렵다."14)라는 가르침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놀라서 경계하고 반성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대체로 세월은 하늘에 달려있고 의리는 사물에 달려 있으니, 그 쉽게 흘러가고 찾기 어려운 것은 우리의 지력으로 그 본래 모습을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오직 공부는 나에게 달려 있으니, 진실로 중간에 끊어지지 않고 성취하여 그 밝음이 일월과 같게 되고 그 이름이 우주에 드리우게 되면, 의리는 쉽게 찾을 수 있고 세월은 영원히 길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중간에 끊어지지 않는 것' 이 한 가지 일은 어찌 우리들이 마땅히 힘써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일찍이 생각해보았는데, 우리들과 성현이 천지처럼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것은 사실은 공부가 중간에 끊어졌는가, 끊어지지 않았는가의 어떠함에 관계된 것이니, 어찌 다만 기질을 청탁(淸濁) 때문일 뿐이겠습니까? 이제 성현의 지난 자취를 가지고 구해보면, "오히려 촌음을 아꼈다."15)는 것은 대우(大禹)의 끊어지지 않음이고, "도를 보고서도 보지 못한 것처럼 하였다."16)16) 도를 하였다 :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 "문왕은 백성을 볼 때 혹시라도 다칠까 염려하였고, 도를 보고서도 보지 못한 것처럼 여겼다.[文王視民如傷, 望道而如未之見]"라고 하였다.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는 것은 문왕(文王)의 끊어지지 않음이며, "밤으로써 날을 이었다."17)는 것은 주공이 끊어지지 않음입니다. 공자(孔子)가 먹는 것을 잃어버리고 민첩하게 진리를 구한 것18)도 끊어지지 않음이고, 안자(顔子)가 선을 가슴에 깊이 새긴 것19)도 끊어지지 않음입니다. 부지런히 두려워하며 스스로 힘써 그치지 않는 공부가 모두 이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현재 상황은, 밖으로는 몸가짐을 삼가지 못하고 말을 함에 법도가 없으며, 안으로는 격물치지(格物致知)가 정밀하지 못하고 존심양성(存心養性)이 치밀하지 못하니, 이는 진실로 모두 중간에게 끊어짐으로 인해 생긴 결과입니다. 그리고 송독(誦讀)에 과정이 없고 강론(講論)이 부지런하지 못하며20) 왕복(往復)에 기일을 넘기는 것도 모두 중간에 끊어진 것입니다. 끝내 어떻게 공을 세우고 이름을 드리우며 찾기 어려운 이치를 보아서 흐르는 세월과 함께 영구할 수가 있겠습니까? 제가 두려워하며 편안하지 못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형은 근래에 날마다 더욱더 정성스럽고 부지런하여 절로 기뻐할 운치가 있고 이처럼 두려워하는 마음은 없으십니까?이로 인하여 오늘날 세상을 생각을 해보니, 성학(聖學)은 사라지고 의리(義理)는 막혀서 학자라고 불리는 자도 공자의 이른바 "학문이 강습되지 못함을 근심한다."21)는 것과 정자의 이른바 "학문은 반드시 강습을 한 뒤에 밝아진다."22)는 것에 대해서 아득히 무슨 일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간혹 알아서 종사하는 자들도 그 사이에 편견과 시기심이 뒤섞여서 밝히고자 하는 것이 끝내 도리어 어두워지지, 어찌 한탄스럽지 않겠습니까? 오직 형은 그렇지 않습니다. 밝음은 충분히 사리(事理)를 밝힐 수가 있고, 공명함은 충분히 물아(物我)를 공평하게 할 수 있어서, 다만 옳음을 구하고자 하면서 그 중도를 잃을까 두려워할 뿐입니다. 그러니 온 세상을 둘러보아도 더불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형이 아니면 누구이겠습니까? 이것이 제가 함께 하기를 좋아하며 벗이 된 이유입니다.지난번 논했던 오진영의 《정절사전》 가운데 중화와 오랑캐의 구분이 없는 것은 가장 큰 관건입니다. 형은 그것을 가져다 근거로 삼으면서 해가 없다고 하였고, 저는 즉시 변론하여 근거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논한 지가 이미 한 달이 지났는데 아직도 다시 긍정하는지 부정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 없으니, 아마도 이미 평소의 견해에 분명하여 더는 번거롭게 일삼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까. 만약 그렇지 않은데도 오히려 이와 같다면, 우리들은 모두 이미 노쇠하였고 또 세상이 어지럽고 길도 다하여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단지 이 하나의 의심나는 뜻도 오히려 또한 의견을 주고받는데 게을러서 달을 넘기고 해를 지나도록 결론을 내지 못한다면 의심스럽고 강론해야 할 수천수만의 무궁한 의리에 대해 또한 모두 장차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발돋움하고 바라는 나머지 우연히 주자의 가르침에 감개한 바가 있어서 저도 모르게 누누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형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弟之近課在《朱子大全》,而讀至"義理難推尋,工夫易間斷,而歲月如流,甚可憂懼"之訓,未嘗不惕然而警省也。蓋歲月在天,義理在事物,其易逝難尋,非吾智力之所能反其本相。惟工夫在我,苟不間斷而成之,其明如日月,其名垂宇宙,則義理可易尋,歲月可永長。然則不間斷一事,豈非吾輩之所當勉者乎?竊嘗惟之,吾輩之與聖賢,天淵之相縣,實係工夫不間斷與否之如何爾,豈獨以氣質之淸濁哉? 今以聖賢之往跡求之,"猶惜寸陰",大禹之不間斷也; "望道如未之見",文王之不間斷也; "夜以繼日",周公之不間斷也。孔子之忘食敏求也,是不間斷; 顔子之拳拳服膺也,是不間斷。其乾乾惕厲,自强不息之功,旣皆如此矣。至於吾輩之現狀,則外而持身之不謹、出言之無章,內而窮格之不精、存省之不密,固皆是間斷所致,以至誦讀之無程、講論之不勤謹、往復之踰時,亦無一而非間斷也。終何以成工垂名明見難尋之義理而永久如流之歲月哉? 弟之所瞿瞿然不寧者,此也。未知兄近日日間,益復慥慥,自有喜悅之趣,而無此瞿然之情否?仍念此世,聖學湮亡,義理晦塞,號爲學者,於孔子所謂"學之不講是憂"、程子所謂"學必講而後明"者,茫不知何事。其或知焉而從事者,又雜以偏見忮心於其間,其所欲明之者,究竟反以晦之,寧不可歎哉? 惟兄則不然,明足以燭事理,公足以平物我,只欲求是而恐失其中。顧瞻幷世可與語者,舍兄而誰? 此弟之所以樂與之友也。向論吳傳中華夷無分,係是大關,而兄之援據而謂其無害,弟之立辨而謂非其據者,已經一朔,而尙無復然否之盛敎,豈已犂然於雅見而無所事乎更煩而然耶? 如其不然而猶爾者,吾儕俱己衰矣,且世亂途窮,死亡無日,只此一款疑義,猶且緩稽往復,閱月經年而未決,則其於千頭萬緖無窮義理之可疑可講者,又皆將如之何哉? 仰企之餘,偶有感於朱子之訓,不覺縷縷至此,未知吾兄以爲如何? 의리는……두렵다 《주자대전(朱子大全)》 권33 〈답여백공(答呂伯恭)〉에 "공부는 중간에 끊어지기 쉽고, 의리는 미루어 찾기 어려운데, 세월은 물처럼 흘러가니 매우 걱정되고 두렵다.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功夫易間斷 義理難推尋 而歲月如流 甚可憂懼 奈何奈何]"라고 하였다. 오히려……아꼈다 진(晉)나라 도간(陶侃)은 "대우는 성인인데도 오히려 촌음을 아꼈으니, 중인들은 의당 분음을 아껴야 한다[大禹聖者, 乃惜寸陰, 至於衆人, 當惜分陰]"라고 하였다. 《진서(晉書)》 권66 《도간열전(陶侃列傳)》 밤으로써……이었다 《맹자(孟子)》 〈이루 하(離婁下)〉에 "주공은 삼왕을 겸하여 네 가지 일을 시행할 것을 생각하되, 부합하지 않는 것이 있으면 우러러 생각하여 밤으로써 날을 이어서, 다행히 터득하면 그대로 앉아서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周公思兼三王, 以施四事, 其有不合者, 仰而思之, 夜以繼日, 幸而得之, 坐以待旦]"라고 하였다. 공자가……것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공자는 "분발하여 밥 먹는 것도 잊고, 학문을 즐기며 근심을 잊으며, 늙어 가는 것도 알지 못한다[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라고 하였고, "나는 선천적으로 아는 사람이 아니라 옛것을 좋아하여 민첩하게 구하는 사람이다.[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라고 하였다. 선을……것 《중용장구(中庸章句)》 제8장에, 공자가 말하기를 "안회(顔回)의 사람됨은 중용의 길을 택하여 행하면서, 어떤 한 가지 선을 얻으면 가슴에 깊이 새기고 잃어버리는 일이 없었다[回之爲人也, 擇乎中庸, 得一善, 則拳拳服膺而不失之矣]"라고 하였다. 강론(講論)이 부지런하지 못하며 원문은 '講論之不謹'인데, 문맥을 살펴 '謹'을 '勤'으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학문이……근심한다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공자가 말하기를 "덕이 닦아지지 못함과 학문이 강습되지 못함과 의를 듣고 옮겨가지 못하며 불선을 고치지 못하는 것이 바로 나의 근심이다[德之不修、學之不講、聞義不能徙、不善不能改, 是吾憂也]"라고 하였다. 학문은……밝아진다 《논어집주(論語集註)》에 의거하면, 이 구절은 위의 공자가 "덕이 닦여지지 못하고 학문이 강습되지 못한다."는 구절에 대한 윤씨(尹氏)의 해석으로 되어 있다. 번역에서는 원문대로 우선 번역했음을 밝혀둔다. 윤씨는 "덕은 반드시 닦여진 이후에 이루어지고, 학문은 반드시 강습된 이후에 밝아지며, 선을 보고 능히 실천하고 잘못을 고치는데 인색해서는 안 된다. 이 네 가지는 일신의 요체이다. 진실로 능히 하지 못하면 성인도 오히려 근심하는데 하물며 학자이겠는가.[德必修而後成, 學必講而後明, 見善能徙, 改過不吝. 此四者日新之要也. 苟未能之, 聖人猶憂, 況學者乎?]"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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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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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오사익에게 답함 答吳士益 丙子 병자년(1936) 답장을 받들어 읽으니, 제 편지에 거론한 '중간에 끊어짐이 없음[無間斷]' 세 글자에 대해 반복해서 추론하고 연구하여 천인합심(天人合心)의 묘함에 이르러 극치에 도달하였습니다. 이것은 '나는 단초를 열었고 그대는 극치를 다했다.'라는 경우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진실로 문답이 이와 같다면 서로 도와주는 것이 비록 옛날의 이른바 연주를 듣고 그 마음이 바다에 있고 산에 있다는 것을 알았던 지음(知音)23)이라고 하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이를 미루어 나가서 그 나머지를 다 안다면 장차 아무리 미세해도 들어가지 못할 것이 없고 아무리 단단하여도 깨뜨리지 못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천하의 의리가 아무리 정미(精微)하다고 하더라도 어찌 끝내 규명하지 못할 이치가 있겠으며, 천하가 의회(疑賄 의심스럽고 불분명함)가 비록 변론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어찌 끝내 해결하지 못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저는 이에 고마움이 깊고 깨우친 것이 많았습니다.다만 제 편지 중에 '기심편견(忮心偏見 시기심과 편견)' 네 글자로 온 세상의 사류(士流)를 병통으로 여긴 것을 논한 다음, 인하여 우리 문하가 분열된 이유를 말하고, 마지막으로 저를 책망하여 반성하는 것으로 귀결을 지었습니다. 비록 군자가 고식적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24)에 감사하지만 그것을 위에서 말한 것처럼 서로 돕는 지음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습니다. 장차 어떻게 함께 천하의 의회를 변론하고 천하의 의리를 규명하여 중간의 끊김이 없이 천인합심의 묘한 경지를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으로 하여금 멍하게 어찌 할 바를 모르게 만드니 어떻게 마음을 먹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아, 저는 이미 타고난 바탕이 아름답지 못하고 사욕도 극복하지 못하였으니, 평소에 안으로 보존하고 밖으로 표출하는 것이 시기심과 편견에서 나오는 것이 많음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선사를 위하여 무함을 변론하는 한 가지 일에 있어서만큼은 감히 그것이 공심(公心)과 정견(正見)에서 나왔다고 자신하며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으며 저승에서 선사에게 절하고 떳떳이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형은 저와 30년을 함께한 오랜 벗이고 저는 이에 또한 13년간 한결같은 성심으로 대하였으니, 말미암을 바를 관찰하고 편안히 여기는 바를 살펴서25) 거의 이 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었을 터인데, 형의 헤아리지 못함이 어찌 이런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저는 바야흐로 형을 시기하지 않고 치우치지 않아서 더불어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형은 내가 시기심이 있고 편견이 있다하여 더불어 말 할 수 없다고 여기니, 이른바 '친구는 그대를 아는데 그대는 친구를 모른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사람이 서로 아는 것은 서로 마음을 아는 것이 귀중합니다. 마음이 이미 어두이니, 비록 의론의 일치가 있다고 한들 어찌 귀중하겠습니까? 또한 형이 지나쳤습니다.이미 "대체(大體)의 시비(是非)는 진실로 정해져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착함과 악함의 큰 가름은 어찌 향초와 악초가 한 그릇에 있을 수 없고 얼음과 숯이 서로 용납할 수 없는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저는 이미 연전에 "선사를 무함한 글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 사람은 석농(石農)26)이라고 호칭해서는 안 된다."는 말로써 음석(陰城)을 배척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마침내 양쪽의 사람을 화합시키고자 하니, 이것은 향초와 악초가 한 그릇에 있고 얼음과 숯이 서로 용납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대저 성현의 학문은 '명변(明辨)' 공부가 많은 부분을 차지고 또 역할이 큽니다. 그러므로 공자가 학문하는 다섯 가지 일로 애공(哀公)에게 고할 때에 '독행(篤行)' 한 가지 일 외에는 모두 '명변' 공부였습니다.27) 오직 그 실재의 뜻이 이와 같기 때문에 행업(行業)에 드러난 것도 그러합니다. 《춘추》의 '선한 자를 포상하고 악한 자를 주벌하는 것'도 원래 '명변'의 일입니다. 이후의 현인도 그렇게 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맹자가 양주(楊朱)와 묵적(墨翟)를 변론하고, 주자가 소식(蘇軾)과 육구연(陸九淵)을 변론하고, 우암(尤庵)이 흑수(黑水)28)를 변론 한 것이 모두 이런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선사 간옹선생(艮翁先生)은 심성이기(心性理氣)의 변론은 진실로 큰일이었지만 사문(師門)과 관계된 일로는 가평(嘉平)의 김평묵(金平黙) 문장을 배척하여 물리쳐서 전옹(全翁 임헌회)의 무함을 변론하는 것이 진실로 평생의 사업이었습니다.29) 때문에 숨을 거두시기 전 며칠 사이에 쓴 문자는 이 의리가 아닌 것이 없었으니, 이것은 우리들이 함께 직접 눈으로 보았던 것입니다.지금 형은 이를 본받지 않고 양쪽을 화합시키려고 하니 그 또한 성현의 뜻과 다릅니다. 이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시기와 편견에 지나치게 징계하려다가 의식적으로 공정하게 하는 사심을 면치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공정이지 않은 사심은 진실로 사심이거니와 의식적으로 공정하게 하는 사심 또한 사심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이와 같기 때문에 음성의 《정절사전》에 운운한 것에 대해 비록 음성을 엄호하는 전순형(田舜衡)도 오히려 말이 되지 않는다 하였고, 음성과 당을 함께 하는 권순명이(權純命)도 오히려 의심스럽다고 하는데, 오히려 그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또한 다시 어찌 하겠습니까?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또 "반드시 설왕설래 할 필요가 없으니 한갓 붓과 혀를 낭비할 뿐이다."라고 한 것은 더욱 괴이합니다. 우리들의 강론은 이로움을 위해서가 아니고 명예를 위해서도 아닙니다. 마음을 비우고 서로 질문하여 오직 옳은 것을 취할 뿐입니다. 제 설이 고견에 탐탁하지 않다면 상대의 설을 따를 수 없고 나의 견해를 버릴 수 없다면 무엇 때문에 따를 수가 없고 무엇 때문에 버릴 수 없는지를 마땅히 분명히 말해서 그 곡절과 핵심을 명백하고 시원하게 해서 자신의 심사를 다른 사람이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실된 마음으로 서로 도와주는 방법입니다.또 도리는 무궁한 반면 사람의 식견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곡(栗谷)과 우계(牛溪) 두 현인의 현명함으로도 이기를 논함에 무려 9차례의 왕복 편지가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식견으로 모든 의난(疑難)에 결단코 한 두 차례의 의논으로 명확하게 결론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형이 알지 못함이 아닌데도 오히려 견고하게 벽을 세우고 자신의 견해를 묵수하여 의견을 주고받으려고 않으니, 이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것이 내가 시기심이 있고 편견이 있어서 더불어 말할 수 없다고 인식한데서 나온 단안(斷案)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아, 이미 형이 저의 마음을 알아주지도 않고 또 형과 더불어 말할 수 없으니, 지난번에 온 시대를 돌아보면서 오로지 우리 형만 바라보았던 뜻이 혼자만의 소리였음이 절로 부끄럽습니다. 형이 이미 이와 같다면 세상에 누가 다시 나의 마음을 알아주며 나와 더불어 말할 자가 있겠습니까? 지금부터는 붓을 태우고 벼루를 깨뜨려서 다시는 다른 사람에게 한 글자도 쓰지 않겠습니다. 비록 대단히 무료할 지라도 일을 줄이고 정신을 아끼는 것에 나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득히 남쪽을 바라보며 편지를 씀에 슬플 뿐입니다. 奉讀惠覆,其於鄙書所擧"無間斷"三字,反覆推究,以至於天人合心之妙而極焉。是可謂我發其端,爾窮其致。苟問答之若此,其相長雖古所謂海山知音,何以加此? 推此以盡其餘,則將無微之不入,無堅之不破。天下義理雖曰精微,豈有終不可究? 天下疑晦,雖曰難辨,豈有終不可決之理哉? 區區於此感荷者深,警發者多矣。但其論鄙書中"忮心偏見"四字所病幷世士流者,而因言吾門分裂之由,終歸結於責弟以反省,雖感君子不以姑息之愛,然謂之相長知音如上所云,則未也。將何以與之辨天下之疑晦,究天下之義理,以致無間斷合天人之妙也哉? 使人憮然失圖,不知所以爲心。噫,弟旣質之不美,私之未克,平日所存所發,宜其出於忮心偏見多矣。至於爲師辨誣一事,敢自信其出於公心正見,而仰對蒼天而不愧,歸拜先師而有所藉手也。兄於弟三十年久要,弟於此亦十三年一誠,觀由察安,庶可以洞悉此心,而兄之不諒,胡至於此? 弟方謂兄爲不忮不偏可與語者,而兄則認我爲有忮有偏不可與語,所謂"故人知君,君不知故人"者此也。人之相知,貴相知心,心旣昧矣,雖有議論之合,亦奚足貴哉? 且兄過矣。旣云"大體之是非,固有在焉",則淑慝之大判,豈不若薰蕕之不同器、永炭之不相容乎? 故已於年前,以"不可不謂之誣師之書, 此人不當呼以石農"之言斥陰矣。今乃又欲兩邊之人與之和融,是欲薰蕕同器、永炭相容者也。夫聖賢之學,明辨之功,爲多且大,故孔子以爲學五事告哀公也,篤行一事外,皆是明辨工夫。惟其實旨之若此,故著之行業者亦然。《春秋》之褒善誅惡, 元是明辨之事。後此之賢蓋莫不然,孟子楊墨之辨,朱子蘇陸之辨,尢菴黑水之辨,皆是也。至我先師艮翁先生心性理氣之辨固爲大事,而事有關於師門者,則斥退嘉金之文以辨全翁之誣者,實爲生平事業。故以至屬纊前數日所著文字,亡非此義,此吾輩之所共親睹者也。今兄不此之法,而槩欲兩邊之合,其亦異乎聖賢之旨矣。此曷故焉? 殆過懲於別人之忮偏,而不免於有意爲公之私也。不公之私固私,有意爲公之私亦私也,可不畏哉? 惟其如是,故於陰撰鄭傳云云,雖以田舜衡之護陰,猶謂之不成說,權純命之黨陰,猶謂之可疑者,猶不覺其爲非,亦復如之何哉? 不寧惟是。又謂之"不須說往說來,徒費筆舌",則尢可怪也。吾人講論,非爲利也,非爲名也。虛心相質,惟是是取。鄙說有不槩於高見,則當明言爾說之不可從,我見之不可舍,如何而爲不可從,如何而爲不可舍,使曲折肯綮,明白通暢,吾之心事,人皆見之。是爲實心相與之道。且道理無窮,人見有限。故雖以栗、牛兩賢之明,其論理氣,至有九度之往復。今以吾輩之見,凡於疑難,決非一二次商確而所能了案者。兄非不知而猶堅壁墨守,不欲復論者,非有他焉,吾知其現出認我爲有忮有偏不可與語之斷案也。嗚呼! 旣不得知心於兄,又不得與語於兄,向者環顧幷世,單望吾兄之意,自慙孤掌之嗚也。兄旣如此,則世間誰復有知我心、與我語者? 從今以往,焚筆碎硯,不復作一字書於人已矣。雖甚無聊,覺得省事嗇神,爲不妨者耶? 悠然南望,臨紙冲悵。 연주를……지음(知音) 옛날에 백아(伯牙)가 고산(高山)에 뜻을 두고 연주하면 그의 지음(知音)인 종자기가 "좋구나, 아아(峨峨)하여 태산(泰山)과 같도다." 하였고, 유수(流水)에 뜻을 두고 연주하면 "좋구나, 양양(洋洋)하여 강하(江河)와 같도다."라고 하였다. 《열자(列子)》〈탕문(湯問)〉 군자가……것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군자는 도덕에 입각해서 사람을 사랑하는 반면, 소인은 그저 고식적으로만 사람을 사랑한다[君子之愛人也以德, 細人之愛人也以姑息]"라는 말이 보인다. 말미암은……살펴서 《논어(論語)》 〈위정(爲政)〉에 공자는 "그 행하는 바를 보며, 그 말미암을 바를 관찰하며 그 편안히 여기는 바를 살펴보면, 사람이 어찌 숨기겠는가.[視其所以, 觀其所由, 察其所安, 人焉廋哉]"라고 하였다. 석농(石農) 오진영의 호이다. 김택술은 오진영의 호를 부르지 않고 '오(吳)', '음성(陰城)', '음인(陰人)' 등으로 폄하하여 부르고 있다. 음성은 오진영이 말년에 기거한 곳이다. 공자가……공부였습니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0장에 "널리 배우며 자세히 물으며 신중히 생각하며 밝게 분변하며 독실하게 행해야 한다[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라고 하였다. 흑수(黑水) 윤휴(尹鑴)가 여주(驪州) 여강(驪江)에서 살았으므로 그를 배척해서 일컫는 말이다. 즉, 여(驪)는 검다[黑]는 뜻이 있으므로 흑(黑)으로 바꾸어 소인(小人)임을 암시한 것이고 강(江)은 물[水]이므로 이를 합하여 흑수라 한 것이다. 우리……사업이었습니다 김평묵이 임헌회의 제문을 지었는데, 임헌회를 호안국(胡安國)과 사마광(司馬光)에게 비유했다 해서 전우와 임헌회의 아들 임진재(任震宰)가 편지를 보내어 절교를 선언하고 제문을 돌려보낸 일을 말한다. 《간재집(艮齋集)前篇》 권2 〈답유치정(答柳穉程)〉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오사익에게 보냄 與吳士益 丙子 병자년(1936) 한갓 붓과 혀를 낭비할 뿐이라는 형의 편지를 받은 뒤부터 저는 감히 다시 이전 일을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현광(玄狂 전일중(田鎰中)이 형과 나누었던 말을 들었는데, 현광이 형과 내가 편지를 멈춘 연고를 물었더니 형이 제 편지 중에서 '극언운운(極言云云)' 하는 내용을 가지고 말을 해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현광이 그 본문을 찾아서 그 상하의 대거(對擧)한 내용을 상세히 말하였는데, 애당초 오진영을 압박하기 위하여 말한 것은 아님을 형이 들어서 알고 있다고 하였다 했습니다. 대저 '극언' 두 글자는 원래 오진영의 편지에 있는 것에 의거하여 설명한 것입니다. '극언'의 귀속처가 이와 같을 따름이고, 오진영이 마음을 먹고 이처럼 극언을 했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책자에 쓰여 있는 것이니, 제가 아무리 교묘하게 말을 놀리고 설을 꾸며서 오진영이 한 것처럼 만들어 형을 속인다고 하더라도 가능하겠습니까? 형이 이미 현광의 설을 들어 알고 있다면 저는 형에게 무죄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다행입니다. 그리고 형은 또 현광의 편지가 있기 전에는 살피지 못한 것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또한 현광의 다행이 될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현광은 모두 변고가 다 있는 사람을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또 조경헌(趙景憲)의 편지에 "천하가 모두 변하는 날이다."라는 것에 대해 현광은 '모두 변한다.'는 것과 '곧바로 오랑캐가 된다'는 것은 차이가 있다고 하였고 형도 그렇다고 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이와 같다면 소견이 모두 똑같아서 지난날의 허다한 사설(辭說)을 일소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의 다행은, 형의 큰 다행이 될 뿐만 아니라 오늘과 훗날을 통틀어 모두에게 커다란 다행이니, 어찌 제가 다시 한 마디 말을 하여 서로 축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로 인해 다른 사람의 문자를 볼 때 큰 안목과 큰 가슴으로 정밀하게 살피고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면 영서연설(郢書燕說)30)를 초래하여 우리들에게 큰 해가 되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을 알았습니다.혹자는 이처럼 터럭 같은 견해와 사소한 문자는 설령 피차간에 완전히 명료하지 못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반드시 부지런히 변론을 일삼아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는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유자(儒者)가 반드시 변론을 하고자 하는 것은 천리의 먼 것에 있지 않고 단지 터럭 끝 사이에 있으며, 거대한 일에 있지 않고 단지 근사한 글이나 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개 미약할 때 방지하고 점점 자라는 것을 두절하는 것은 여기에 있고 저기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이미 터럭 같다고 하고 사소하다고 하면서 여기에도 도리어 명료할 수 없는데, 오히려 어찌 천리 멀리서 머리를 돌리고 천자의 지위도 헌신짝 버리듯 하는 일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또한 천하의 이치는 원래 크고 작음, 멀고 가까움의 구별이 없으니, 모두 안배를 하지 않더라도 천연적으로 그렇게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여기에서 공공의 도리를 구하여 보지 않는다면 다시 어느 곳에서 착수를 하겠습니까? 또한 마땅히 가깝고 미세한 것이라고 해서 어지럽고 거친 대로 방치하여 마침내 천리의 오류를 불러와 스스로 마음을 어지럽히는 데에 빠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는 형처럼 고명하면 마땅히 통달하지 아니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종종 저의 언어와 문자에 대해서 그렇게 않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사람이 자신을 알지 못함이 고금의 공통된 근심입니다. 그러나 저는 사실 스스로 돌아볼 때 졸렬하고 나약하여 사람들이 쳐다보고서 배울 사람이 못 되며, 성질 또한 편협하여 사람을 받아들일 큰 아량도 없습니다. 이 때문에 번번이 말을 하게 되면 그 말의 옳고 그름을 따지지도 않고 사람들이 저를 보기를 마치 썩은 풀처럼 여깁니다. 예부터 사람이 미천하면 말이 가볍다는 설이 있게 된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가지고 그 말까지 폐하지 않는 것이 바로 현명한 사람의 일입니다. 그러나 형은 지금 대체적 견해가 저하고 거의 모두 서로 합치하니, 일시의 어긋남을 또한 어찌 해될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내 마음의 광명에 조금의 가리는 것이 없는 것이 귀중합니다.매번 변론에 소홀하고 배척에 느린 자를 보면 마땅히 변론하고 마땅히 배척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소홀하고 느린 것은 소홀하고 느린 부정한 마음이 그 당연한 것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또 한 걸음 더 나아가 편이함을 차지하고 기쁘게 하는 것을 도모하며 들추어내는 것을 두려워하는 등 여러 가지 안배가 있게 되니, 더욱 말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마침내 대부분 명교(名敎)의 죄인이 되니, 허다한 안배에 끝내 하나라도 실질적 효과는 얻지 못하고 이리 저리 계산만 할 뿐입니다. 오직 곧바로 실천하는 자만이 살아서는 부끄러움이 없고 죽어서는 유감이 없습니다.예부터 간사한 무리는 일찍이 스스로 간사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에 대해서 일찍이 보호하지 않음이 없으면서 또한 그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심한 경우에는 추종자를 이용하여 그 간사함을 이루고 도리어 잔인하게 죽이는 것을 차마 실행하기도 하였는데, 조조(曹操)가 잠자는 사이에 좌우에 있는 사람을 죽이고, 사마소(司馬昭)가 일이 끝난 뒤에 성제(成濟)를 죽인 일31) 등이 이런 경우입니다. 간사함의 가증스럽고 두려움이 또한 이와 같은데, 이 어찌 천리의 어긋남이 있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터럭 끝 사이에서 이미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 군자가 독실하게 논하고 구차하지 않았던 것은 이 때문이었으니, 어찌 포용하고 충후함이 오늘날의 군자보다 못해서 그렇게 했겠습니까? 단술을 마련해 놓지 않은 날에 이미 목에 칼을 씌우고 저자에서 도리를 돌리는 변괴를 보았던 것입니다.32) 아, 기미에 밝은 것이 어찌 다른 기술이 있겠습니까? 다만 털끝 같은 조짐을 잘 살피는 것이 있을 따름입니다.언어문자의 실수는 비록 대략 고칠 수 있으면 고치면 그만이다. 그렇지 않으면 천하 후세 사람을 다 죽이게 되는 재앙이【전인(前人)이 "학술로 천하후세 사람을 모두 죽이지 말라."는 말이 있었다.】 일찍이 여기에 기초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양주(楊朱), 묵적(墨翟), 육구연(陸九淵), 왕수인(王守仁)는 어찌 모두 수(數)가 있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언어문자의 잘못으로 마침내 사문(斯文)과 세상을 함께 할 수 없는 원수가 되었습니다. 형이 이런 곳에 대해서는 연구하지 못한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자세히 살피는 공부를 더욱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형이 감히 자평하여 강학(講學)에 막히는 곳이 없고 사통팔달한 것이 원재(遠齋 이희진(李喜璡)이 성리학의 견해에 대하여 말한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까? 비록 선사의 밝은 식견과 풍부함으로도 매번 불초한 문인들에게 하문하신 일이 많았습니다. 형이 이와 같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고 도리어 의견을 주고받을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 있었으니, 이는 참으로 의아스럽습니다. 한 번 말하여 가르쳐 주기 바랍니다.사마광(司馬光)이 위(魏)나라를 황제로 칭한 것은 본디 구사(舊史)를 따라 그대로 보존한 것에 불과했을 뿐인데, 주자는 "그 세상에 살았다면 반드시 조조(曹操)를 섬겼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33) 이것은 또한 언어문자의 잘못이 아니고 단지 한 때 살피지 못한 소치일 뿐이었지만 마침내 만세토록 고칠 수 없는 죄인이 되었습니다. 이 억울함을 어느 곳에 호소해야 하겠습니까? 형은 장차 주자가 너무 심했다고 여기지는 않겠습니까?문성보(文聖甫)는 "'불언지교(不言之敎)'는 [석농(石農)이] 마땅히 쓰지 않아야 했는데 썼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끝까지 규명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땅히 해야 하는가,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단지 편지에 썼느냐 쓰지 않았느냐의 사이에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 쓴 것은 마땅하지 않은 것이고, 만약 쓰지 않았다면 마땅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애당초 '불언지교'가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니니, 그 말은 쓴 것과 무슨 구별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반드시 저들 무리들이 서로 전하는 이야깃거리이니, 근심스러운 것이 또 한 층 더 깊어진 것입니다.저는 근래에 자못 일이 많다고 느껴집니다. 글을 씀에 있어서 친분이 조금 소원하면 마땅히 써야 될 글도 문득 손놀림이 더디게 되는데, 이것은 일의 형세 때문이지 고의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음에 비추어보아도 부끄러울 게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곧 많은 일에 마음이 치우쳐서 일을 행함에 손이 더디게 된 것이지, 어찌 많은 일 때문에 마땅히 해야 할 것에 더딜 이치가 있겠습니까? 도간(陶侃)은 집 바깥의 수천수만의 일이 어찌 우리들이 근래 작은 일에 분망함과 같았겠습니까? 그러나 반드시 원근의 편지에 손수 답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34) 우리들이 일을 행함에 합당하지 못하고 공평하지 못하면서 스스로 마음에 부끄럼이 없다고 하면서 점점 더욱 추락하여 더는 깨닫지를 못하고 또 다른 사람의 말도 듣지 않으려는 것도 대부분 이런 부류입니다. 이는 마땅히 맹렬하고 활발하게 그 덕을 새롭게 하기를 도모하여 그만두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다른 사람의 언어문자의 잘못에 대해 본래의 정신과 면목을 구하지 않고 단지 좋게 보게 하려고만 하는데, 이것은 큰 악에 빠지는 근본이고 공평하지 않고 인자하지 않은 것이 이것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무엇 말인가 하면, 한 사람의 견해로 천하후세를 다 가리고자 하여, 마치 졸졸 흐르는 샘물과 조금씩 타기 시작한 불꽃을 막지도 않고 끄지도 않아서 결국 언덕을 태우고 강물로 흐르게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 이로 인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만약 '좋게 보게 하는 것'을 말할 것 같으면, 묵씨(墨氏)의 겸애(兼愛)와 양씨(楊氏)의 위아(爲我)와 불씨(佛氏)의 견성(見性)과 육씨(陸氏)의 돈오(頓悟)와 왕씨(王氏)의 양지(良知) 같은 것이 없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거의 병폐가 없는 것 같은데 예부터 성현들이 모두 좋게 보지 않게 한 것은 무엇 때이겠습니까? '좋게 보게 한다.'는 말을 제창하는 자에 대해, 나는 그 뜻이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압니다. 아, 마침내 또한 그 가련함을 볼 따름입니다.좋게 보게 하는 것은 일찍이 또한 나쁘게 보지 않게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언어문자 사이에서 여러 번 다른 사람에게 미움을 받았는데, 심지어 무얼 하지 않는 것을 가지고 드러내놓고 배척한 자도 있었고, 또한 몰래 비방하면서 서로 문답을 끊은 자도 있었습니다. 이는 모두 한쪽 사람의 문자를 좋게 보게 하려는 것입니다. 대개 좋게 보게 하려는 마음은 바로 나쁘게 보게 하려는 마음입니다. 일관된 형세는 반드시 목적하는 바가 있을 것이나, 다만 좋고 나쁨을 베푸는 것에 피차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自得兄徒費筆舌之喩,弟不敢復以前事提起。今聞玄狂與兄酬酢語,玄狂問所以兄我停書之故,兄以弟書中有以極言云云者爲言。玄狂覓其本文而詳說其上下對擧說話,而初非勒吳而出者,兄謂知聽云云。夫'極言'二字,元是依吳書中所有而爲說明,其極言所歸,如此云耳,非謂吳有心如此極言者也。寫在冊子上者,弟雖巧爲游辭飾說,如吳之所爲以欺兄,其可得乎? 兄旣知聽玄狂說,則弟得無罪於兄矣,此已萬幸。而兄又言玄狂書前有未察者云,此又爲玄狂之幸也。若非然者,玄狂豈得免無變不有之人乎? 又言趙景憲書"是天下皆變之日",玄狂謂皆變卽夷之有異,兄亦謂然。如此則可謂所見盡同,而一洗往日許多辭說矣。卽此一幸,非但爲兄之大幸,乃公共今與後之甚幸,安得不使弟復發一言而相賀也? 因知看人文字,非大眼目大心胸精察而詳說之,鮮有不致郢書燕說而爲吾大害者。因此悟彼如有未盡者,皆可以竹破也。或謂此等毫釐之見鮮、些小之文字,設有彼此之未盡瀅澈者,何必勤事分疏而不憚煩乎? 弟謂儒者之必欲分疏者,不在於千里之遠而只在於毫釐之際,不在於巨大之事而只在於近似之文辭,蓋防微社漸在此而不在於彼故也。且旣曰毫釐、些小,而於此却不能瀅澈,則尙安能可望於千里之回頭、巨大之棄屣乎? 且天下之理,元無巨細遠近,皆有不待安排而天然自在者。若不於此而求觀其公共道理,則更於甚處下手? 又不當以近細容其胡亂粗率,終以致千里之繆,而反自陷於昧心之科也。吾以爲如兄高明宜無不達,而種種於弟言語文字有不然者,何也? 人若不自知,古今之通患。然弟實自顧劣弱,不足以爲人觀瞻慕效; 性又偏狹,無容物大雅。以此而輒有出言,勿問其言之當否,而人之視之,如同腐芥。自古有人微言輕之說,爲是之故也。是以不以人廢言,乃爲明者事耳。然兄今大體所見,與弟略皆相合,其一時之參差,庸亦何傷哉? 只貴吾胸中光明無纖翳其間而己。每見忽於論辨、緩於攻斥者,非不知其當辨當斥,而忽於緩於者,是忽緩之邪心蔽其當然者也。况又有進一步占便宜、圖容悅、惧發摘等許多安排者,更不可言也。此等人畢竟多陷於名敎之罪人而己,其於許多安排,究無一得之實效,算來算去。惟有直而行之者,爲生無愧而死無憾耳。自古奸邪之徒,未嘗不自知奸邪,於其從己未嘗不加護,而亦未嘗不竊笑其痴。是以甚則至於因而濟其奸邪,而反以忍其殘殺,如曹操之睡中殺左右、司馬昭之事後戮成濟等是也。奸邪之可惡而可畏又如此,此何待千里之繆然後可知者哉? 毫釐之際,己有見矣。古之君子所以篤論而不苟者以此,豈包容忠厚不及今之君子而然哉? 醴酒不設之日,已見箝市之變。嗚呼! 明炳幾先,豈有他術哉? 只有精察其毫釐之兆而己。言語文字之失,雖若可略改之則己矣,否則殺盡天下後世之禍,【前人有"無以學術殺天下後世"之語 】 未嘗不基於此。楊、墨、陸、王,豈皆非有數之人? 只以言語文字之失,遂爲斯文不共世之讐。竊兄於此等處有未及究者,然不可不更加審察之功也。兄敢自謂講學上無所滯礙,四通八達,如遠齋之於性理之見所云乎? 雖以先師之明識富有,每多下問不肖之門人之事,而不聞兄之有此,反有"不須說往說來"之喩,此誠可疑也。願賜一言之敎。司馬公之帝魏,本不過因舊史而仍存耳。朱子謂: "生其世,必事曹操。" 此則又無言語文字之失,而只因一時不審之致,遂爲萬世莫改之罪人。只此寃恨可於何處訴屈也? 兄將不以朱子爲己甚耶?文聖甫謂: "不言之敎,不當書而書。" 此到底究勘不可但已者也。是當不當,只在書不書之間也。然則以其書也不當耳,若不書則無不當者。然則初非無不言之敎云者也,其言庸有別於書之者乎? 此必渠輩相傳話柄,其可憂也又一層矣。弟於近日頗覺多事。其於鉛槧,情親稍疎,至其當爲文字,轉成手遲,此由事勢,非故如此。求之本心,可以無愧。然此便是用心偏於多事,行事邪於手遲者,豈有以多事之故遲於當爲之理也乎? 陶侃之閫外千緖萬端,豈若吾輩之日間小小紛忙者乎? 然必遠近書疎,莫不手答。凡吾輩行事不合不公,而自以爲無愧本心,轉轉落下,不復知悟,亦不肯聽人說話者,多此類也。此宜猛著精彩,圖維新厥德,不可但已者也。如何如何?於人言語文字之失,不求本來精神面目,只要使好看,此便是陷於大惡之根子,而不公不仁莫此爲甚。何也? 欲以一人之見,蔽盡天下後世,而使其涓涓燄燄,不止不滅,燎原江河,卽此而成故也.若曰使好看,則應無如墨氏之兼愛、楊氏之爲我、佛氏之見性、陸氏之頓悟、王氏之良知,皆幾於無病,從古聖賢,皆不使好看,何也? 唱爲"使好看"三字者,吾知其志別有所在。嗚呼! 終亦見其可憐而己矣.使好看者,亦未嘗不使惡看。故弟於言語文字之間,得屢憎於人,至於以無爲而有顯斥之者,亦有潛非而絶相問答者,皆其欲使好看一邊人文字者也。蓋使好看之心,卽使惡看之心也。一串貫來,勢有必至者也,但好惡之施有彼此之異焉耳. 영성연설(郢書燕說) 원래의 뜻을 잘못 이해하여 와전(訛傳)하는 것을 가리킨다. 옛날 중국의 영(郢) 지방 사람으로 연(燕)나라 상국(相國)에게 편지를 쓴 자가 있었는데, 등불이 어둡자 옆 사람에게 촛불을 들라고 말하고는 자기도 모르게 편지에 '촛불을 들라'고 써 버렸다. 그런데 연나라 재상이 그 편지를 받아 보고는 기뻐하기를, "촛불을 들라는 것은 현자를 천거하여 쓰라는 말일 것이다." 하고는 곧 임금에게 아뢰어 그대로 실천하니, 연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 나라가 잘 다스려진 것은 좋았으나 원래 편지에서 뜻한 바는 아니었던 것이다. 《한비자(韓非子)》 〈외저설좌상(外儲說左上)〉 사마소(司馬昭)가……일 위(魏)나라 말 사마소가 황위를 찬탈할 마음을 품자 위제(魏帝)가 토벌하려 하였다. 이때 사마소의 부하인 가충(賈充)이 맞아 싸웠는데 그의 설득에 따라 태자사인인 성제(成濟)가 위제(魏帝)를 칼로 찔러 죽였다. 대역무도했다는 죄명으로 사마소가 도리어 성제 일족을 주살했다. 《삼국지(三國志)》 권4 〈위서(魏書)〉 단술을……것입니다 신공(申公)과 백생(白生)과 목생(穆生)이 동시에 전한(前漢)의 초 원왕(楚元王)을 섬겼는데, 목생이 술을 좋아하지 않는 것을 원왕이 알고는 주연을 베풀 때마다 그를 위해 항상 감주[醴]를 내놓았다. 그런데 뒤에 원왕의 손자인 왕무(王戊)가 사위(嗣位)하여 주연을 베풀 적에 어느 날 깜박 잊고서 감주를 한번 내놓지 않자, 목생이 "이제 떠나가야겠다. 감주를 내놓지 않은 것은 왕의 뜻이 태만해진 것이니, 떠나지 않는다면 초나라 사람들이 장차 내 목에 칼을 씌워 저잣거리에서 조리를 돌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서(漢書)》 권36 〈초원왕전(楚元王傳)〉 사마광이……말했습니다 《삼국지(三國志)》는 진(晉)나라 학자 진수(陳壽, 233~297)가 편찬한 역사서로 위서(魏書) 30권, 촉서(蜀書) 15권, 오서(吳書) 20권, 합계 65권으로 되어 있다. 위나라를 정통 왕조로 보고 위서에만〈제기(帝紀)〉를 세우고, 촉서와 오서는〈열전(列傳)〉의 체재를 취했으므로 후세에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통감(通鑑)》은 북송(北宋)의 사마광(司馬光)이 저술한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약칭으로 총 2백 94권의 편년체 역사서이다. 사마광 또한 《자치통감》을 편찬하면서 위나라를 삼국 시대의 정통으로 삼았다. 나중에 주희(朱熹)는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편찬하면서 삼국 시대의 정통을 촉한(蜀漢)으로 바꾸는 등 춘추필법(春秋筆法)에 따라 의리와 명분에 입각하여 역사를 재편성하였다. 도간(陶侃)은……없었습니다 《소학(小學)》 〈선행(善行)〉에 진(晉)나라 도간은 "바깥의 일이 수없이 많았지만 누락한 것이 없었으며, 원근의 편지에 손수 써서 회답하지 않음이 없었다[閫外多事, 千緖萬端, 罔有遺漏, 遠近書疏, 莫不手答]"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오사익에게 답함 答吳士益 丙子 병자년(1936) 답장을 받고서 제가 '극언운운(極言云云)'이라고 논한 것에 대해 해가 될 것이 없다고 하였고, 조헌경(趙景憲) 편지의 '모두가 변하는 날이다.[皆變之日]'라고 한 것은 '곧바로 오랑캐가 된다.[卽夷]'는 것과 같지 않은 것은 모두 현광(玄狂)이 말한 것과 같다고 했다는 것을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제가 형에게 죄를 얻지 않게 됨을 다행이라고 여겼고, 또한 형이 그에게 속임을 당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여겼습니다. 강론을 끝마침에 마침내 더욱 사람 중에 이와 같은 자가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형이 '의견을 주고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씀한 것이 일시적으로 생각하지 못하여 그렇게 말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렇지만 만약 형의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르는 성대함이 아니라면 또한 어찌 여기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제가 전일에 편견과 시기심이 없는 것으로 형을 인정하고 즐겁게 함께 논한 이유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제가 비록 용렬하고 비루할 지라도 또한 어떻게 형에게 구하면서 억지로 떠들며 그치지 않겠습니까? 대개 음성(陰城)의 〈정절사전(鄭節士傳)〉이 믿고서 근거로 삼은 것은 오직 조헌경의의 편지인데, '모두 변하는 날'은 이미 '즉시 오랑캐가 된다 '는 차기가 있어 근거가 될 수 없으니, 그 시비득실은 여기에서 철저하게 판명이 나서 덧붙여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형은 마침내 또 '대설(帶說)'이란 말로 곡진히 비호하여 그것에 큰 장애가 없음을 찾았으니, 버린 것이 다 버리지 못하고 따른 것이 다 따르지 못해서 확연히 크게 공정하여 사물이 오면 순응하는35) 사체에 해가 있음을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매우 괴이합니다. 무릇 '대설'이라고 하는 것은, 예컨대 '해(害)'를 말하는데 '이해(利害)'라고 하고 '급(急)'을 말하는데 '완급(緩急)'이라고 하는 것으로서 그 뜻은 갑에 있는데 을을 겸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음성이 지은 〈정절사전〉의 주의는 실로 단지 상구의 "천하가 오랑캐가 되어도 유자는 오랑캐가 되지 않을 수 있다.[天下夷而儒能不夷]"고 운운한 데 있고 하구의 "천하가 중화가 되어도 유자는 중화가 될 수 없다.[天下華而儒不能華]"고 운운한 데 있지 않은데, 형은 중점에 상구에 있고 하구는 '대설'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저의 견해로 논하면, 상구에 "천하가 오히려 중화가 되었다.[天下猶華]"고 하고,하구에 "천하가 곧바로 오랑캐가 되었다.[天下卽夷]"라고 하였는데, 상구는 오히려 느슨하고 하구는 가장 긴급하니, '유(猶)' 자와 '즉(卽)' 자로 살펴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중점이 하구에 있고 상구는 '대설'한 것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런 것에 대해 저는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만두시기 바랍니다.옛날에 자로(子路)가 "들으면 실행하여야 합니까?" 하고 묻자, 공자가 "부형(父兄)이 계시니, 어찌 들으면 실행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염유(冉有)가 "들으면 실행하여야 합니까?" 하고 묻자, 공자가 "들으면 실행하여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36) 만약 형에게 단지 진덕자수(進德自修)만을 권하고 선사의 무함을 변론하고 부정한 의론을 배척하도록 권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자로에게 "들으면 실행해야 한다."고 권하고 염유에게 "부형이 계신다."고 경계하는 것과 같으니, 어떻게 일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무함을 변론하고 부정한 의론을 배척하는 것으로 형에게 권하고 진덕자수로 권하지 않는 것은 곧 공자가 염유에게 "들으면 실행해야 한다."고 권하고 "부형이 계시다."고 권하지 않았던 뜻입니다. 제가 비록 한심하지만 또한 오히려 옛 도를 행하고 있습니다. 형이 이내 선을 권하는데 선후와 경중의 순서를 잃은 것으로 병통을 삼는다면 이것은 아마도 말한 사람의 뜻을 알지 못한 것이고 아울러 스스로 살피는 도를 잃은 것입니다. 그리고 "편의를 차지한다.[占便宜]"에서 "허다한 안배가 있다.[許多安排]"까지는 오늘날 선비들에 대해 일반적으로 논한 것이니, '매견(每見)' 두 글자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37) 그런데 형은 기어코 암암리에 자신을 비난한 것으로 간주하여 세 가지 모두를 범한 것으로 잘라 말하니, 실색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형은 자수(自修)함에 있어서는 허물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노력하는 바탕이 되는데 방애되지 않을 것이니, 어찌 반드시 이와 같겠습니까? 또한 만약 그만두지 않고 굳이 형에게 말할 것을 찾아본다면 이른바 "편의를 차지한다."는 것은 아마도 조금 제거하지 못한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여기시지 않습니까?대개 이 음성의 〈정절사전(鄭節士傳)〉에 의론은 이미 대체적으로 같아졌으니, 사소한 완전히 합치하지 않은 것에 대해 저는 깊이 우려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어찌 전혀 뜻밖에도 형은 마침내 이른바 '불언지교(不言之敎)'에 대해서 "스승을 무함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라고 단정을 했다가 갑자기 음성이 변론한 편지를 보고서 10년간 유지해온 정견(定見) 속히 바꾸고 "증거가 매우 분명하고 명백하여 꾸며서 지은 것은 아니다."고 하여 저도 모르게 간사한 자와 당을 같이하고 스승을 무함하는 죄과에 빠졌습니다. 이 무슨 변괴란 말입니까? 너무도 괴이합니다. 형은 또 시험 삼아 오진영이가 서모(徐某)에게 준 편지 첫머리의 "문집 발간의 세 가지가 불가함을 말씀해 주었는데, 그 첫 번째는 진실로 그러한 점이 있기 때문에 제가 바다를 건너가려고 하다가 할 수가 없었습니다. 보내온 편지에 비록 제가 발의하여 처음 시작을 했다고 하였지만 그 앞서 여러 벗들이 의정(議定)하였으며, 사실은 원래 선사의 '불언지교(不言之敎)'을 따랐습니다."고 한 글을 쭉 한 번 읽어보기 바랍니다. "세 가지가 불가한 것 가운데 그 첫 번째 진실로 그러한 점이 있다."고 한 것은 진실로 인간(認刊)을 청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바다를 건너가려고 하였다."는 것은 내가 인간할 뜻이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앞서 여러 벗들이 의정하였다."는 것은 여러 벗들이 먼저 인간하는 의론을 정했다고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원래 선사의 불언지교(不言之敎)를 따랐다."는 것은 선사가 원래 인교(認敎)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종합해서 말을 하면, '나는 처음부터 인간을 청할 뜻이 없어서 심지어 바다를 건너가서 분명히 하려고 했는데 다만 여러 벗들이 먼저 인간의 뜻이 있어 인간의 의론을 정했기 때문에 나도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따랐다. 그러나 사실은 여러 벗들도 반드시 인간하려는 뜻이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선사가 원래 인의와 인교가 있었기 때문에 여러 벗들도 어쩔 수 없이 따른 것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어세(語勢)와 문의(文義)가 어찌 이와 같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대체로 그 정신과 계교는 조금도 허술함이 없는데 한절이 한절보다 긴요하여 차차로 미루어 나아가 선사의 신상에 이르러서는 더는 갈 곳이 없어서 빠져 나올 수가 없게 하였습니다. 그는 이를 통하여 '나는 원래 분명하고 여러 벗도 그러한 뜻이 아니었으며 실은 선사가 원래 이 가르침이 있었으므로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는 천하 후세에 보였습니다. 그러니 천하 후세의 이 문장을 보는 자는 그 누가 선사에게 인의(認意)와 인교(認敎)가 있지 않았다고 하겠습니까? 그의 수필(手筆)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공론(公論)을 지키는 자는 모두 선사를 무함한 것으로 단언하였고, 형도 또한 "선사를 무함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형은 어찌 이전에는 곧았다가 뒤에는 더럽혀지고 이전에는 병이 나았는데 뒤에는 병이 도져서, 당일의 원래 편지가 본디 그 자신의 마음에서 나왔다는 것을 망각하고 단지 후에 그의 말을 꾸며서 죄를 회피한 의서(擬書)만을 믿고서 이런저런 말을 한단 말입니까? 이것은 반드시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또 형이 "증거가 명백하여 꾸며서 지은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선사가 명백하게 가르침이 있었다는 것이 됩니다. 선사가 가르침이 있고 제자가 받들어 행하는 것은 본디 광명한 사업이고 진실한 도리인데, 또 "스스로 담당한 것이 부족하였다."고 한 것은 또한 무슨 말씀입니까? 부족하다고 한 것은 과연 어떤 일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듣고 싶습니다. 또 형이 "증거가 명백하여 꾸며서 것이 아니다."고 한 것은 이른바 의서(擬書)가 나온 것으로 말한 것에 불과했으니, 의서를 보기 전에 선사를 무함한 것으로 단죄한 것은 진실로 자연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후 몇 년 동안 긍정과 의심을 결정하지 못하고 매번 스스로 생각하고 헤아렸다."고 한 것은 또한 무슨 일 때문이었습니까? 또한 듣고 싶습니다. 또한 형은 이미 무함한 것으로 죄를 정한 지 10년이 된 일에 대해 오진영의 편지 한 통을 보자마자 "증거가 매우 분명하고 명백하여 꾸며서 지은 것이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오진영이 원재(遠齋)에게 답한 편지에 "'개(改)' 한 글자는 내가 알 바가 아니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또한 증거가 매우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선사의 원고를 고치지 않았다고 믿으십니까? 또한 듣고 싶습니다.이미 편지를 쓰고 보내려고 하다가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 천리는 더욱 어두워지고 인심은 더욱 사악해져서 십 년 전의 시절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이전에는 무함을 변론하는 의리에 해처럼 밝고 서리처럼 엄했던 사람들이 지금은 네모진 것을 깎아서 둥글게 만들고 혼자를 두려워하여 무리에게 달려가 도도하게 날마다 음성의 소굴로 귀의하여 얼굴을 바꾸는 것을 꺼리지 않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서는 도리어 큰 소리로 말하기를 "지금은 음성과 화합을 해야지 배척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고, 심지어 "따름의 많고 적음으로 사리의 가부를 점쳐야 한다,"고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는 마치 송나라 조정에서 화친 여부를 전후하여 의견이 달랐던 것과 같았습니다. 이것이 주자가 일찍이 지금과 옛날의 인륜과 인심의 밝고 바름의 여부를 가지고 반복해서 탄식했던 것입니다. 아, 오늘날의 일이 어찌 이와 다르겠습니까? 형은 비록 이상의 일반 사람이 한 것과는 차이가 있었지만 또한 의론이 나뉜 것은 있었고 운운한 것도 문성보(文聖甫)와 비교하면 심하였습니다. 또 "나는 반드시 놀라고 화를 낼 것이나 미리 두려워 숨을 죽였다."고 했으니, 그 자기의 견해를 자신하여 확고하게 바뀔 수 없는 뜻이 말 밖으로 넘쳤습니다. 시세(時勢)를 굽어 살펴보고 성의(盛意)를 우러러 살펴보면 제가 어찌 "의견을 주고받을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 있었는데 지금 다시 제 입으로 꺼낼 수가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편지를 놓아두고 보내지 않은 것이 한 해가 지났습니다. 다만 생각해보면, 형은 저에게 평범한 교분이 아니고 바로 친척이 아닌 형제입니다. 지금 이렇게 논쟁하는 것은 또한 평범한 의리가 아니고 바로 스승과 제자 사이의 큰 윤리입니다. 제가 형이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구하지 않는 것은 제가 본분을 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형을 구하는데도 따르지 않은 뒤에야 저는 유감이 없을 수 있습니다. 기억하건대 옛날에 김사긍(金士兢)은 제가 거듭 형을 깨우쳐서 마침내 "선사를 무함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정견을 갖게 한 것에 대해 벗의 도리에 성분(性分)을 다한 것이라고 일컬으며 크게 흠복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대체로 형이 스스로 한 것이지 제가 힘을 써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벗의 도리에 성분을 다한 것은 그랬다고 자평합니다. 그때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였는데, 지금 형이 갑자기 이전의 생각을 뒤집고 선사를 무함한 당에 귀의한 큰일이 이전에 시비가 정해지지 않았을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을 보고서 완전히 무관심하게 구해내지 않는다면, 이른바 전날의 벗의 도리에 성분을 다한 것이 지금 어디에 있겠습니까? 충심을 끝까지 바치지 못한 것을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것은 이미 말할 겨를이 없거니와 또한 어찌 김사긍의 비웃음을 당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마침내 다시 편지를 보내어 밝게 살펴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니, 우리 형은 헤아려주기 바랍니다. 承惠覆,仰悉以鄙論"極言云云"爲無傷,趙書"皆變之日"與"卽夷"不同,果皆如玄狂所道者,旣以自幸弟之不得罪於兄,亦以奉幸兄之不見欺於彼也。講論之畢,竟益人有如此者,益知兄"不須說往說來"之云爲一時之未思也。雖然,如非兄舍己從人之盛,亦安得以致此哉? 此弟前日所以以無偏忮許兄而樂與之論者也。否者,弟雖庸陋,亦何所求於兄而强聒不舍哉? 蓋陰傳之所恃而爲據者,惟趙書也,而"皆變之日",旣與"卽夷"有異而不足爲據,則其是非得失,卽此可以到底判明而無俟乎添足也。兄乃又以"帶說"之云曲護之,求其無大礙,無乃所舍者未盡舍,所從者未盡從,而不免有害於廓然大公物來順應之體耶? 甚可異也。夫"帶說"云者,如言害而曰利害,言急而曰緩急,意在甲而帶乙說之類是也。今此陰傳主意,果但在於上句"天下夷而儒能不夷"云云,不在下句"天下華而儒不能華"云云,而如兄所重在上句,下句是帶去說之云者乎? 論以弟見,上句云"天下猶華",下句云"天下卽夷",上句尙虛緩,下句最緊急,觀以"猶"字"卽"字可知,寧可曰所重在下句,上句是帶去說,則宜矣。此等,弟敢曰直是不成說,已之已之。昔者子路問: "聞斯行諸?" 子曰: "有父兄在,如之何其聞斯行之?" 冉有問: "聞斯行諸?" 子曰: "聞斯行之。" 若勸兄但以進德自修,而不以辨師誣斥邪論,則是猶勸子路以"聞斯行之",而戒冉有以"父兄在"也,焉能濟事? 其必以辨誣斥邪勸兄,而不以進德自修,卽孔子勉冉有以"聞斯行之"而不以"有父兄在"之意也。弟雖無似,亦猶行古之道也。兄乃病以責善失先後輕重之序,此恐不知言者之意,幷失自察之道矣。至於"占便宜"以下"許多安排"之云,則是泛論今士者,於"每見"二字可見。兄必看做暗斥自家,而質之以均犯三者,無得脫色耶? 極爲悚悚。然在兄自修,則不妨爲有改無勉之資矣,何必乃爾? 且若無已而索言於兄,則所謂占便宜者,恐有些未祛。未知以爲然否?蓋此陰傳之論,旣得大體之同,則小小之未盡合,吾不須深慮。夫何千萬料外,兄乃於所謂"不言之敎",旣斷以"不可不謂誣師"者,忽見陰辨之書,亟改十年之定見,謂"證據甚明而非白撰",不覺終陷於黨邪誣師之科,此何變也? 此何變也? 絶可怪也。兄且試將震與徐初書劈頭"垂喩刊集事三不可,其第一則誠有然矣。故鄙欲越海而不得矣。來喩雖謂賤子發論創始,其先諸友議定矣,其實原從先師不言之敎也"之文,一口氣讀下來。其曰"三不可,其第一誠有然"者,非誠以請認爲不可之云乎? 其曰"鄙欲越海"者,非我無認意之云乎? 其曰"其先諸友議定"者,非諸友先定認議之云乎? 其曰"原從先師不言之敎"者,非先師原有認敎之云乎? 總而言之,則我則初無認意,至欲越海淸楚,而但諸友先有認意而定認議,故我不得己而從之也,然其實諸友亦非必有認意,先師原有認意認敎,故諸友亦不得不從也。語勢文義,豈不分明如此乎? 蓋其精神機關,少無虛疎,一節緊一節,次次推駈,到先師身上,更無去處,使之脫出不得,以示我原淸楚,諸友亦非其意,實以先師原有是敎,而不得不從之意於天下後世,天下後世之觀此文者,其孰不以先師有認意、認敎乎? 惟其渠之手筆如此,故凡持公論者,莫不斷然以爲誣師,雖兄亦謂"不可不謂誣師"者,此也。兄何先貞而後黷,先瘳而後病,忘勘當日原書之本出自心者,只信後來擬書之飾辭逃罪者而有所云云也? 是必有其故也。且如兄所云"證據明而非白撰",則是先師明有是敎也。先師有敎而弟子奉行,自是光明事業眞實道理,而又云"欠其不自擔"者,又何說也? 蓋其所欠者,果指何事? 願聞之。且兄之云"證據明而非白撰"者,不過以所謂擬書出也,不見擬書之前,斷以誣罪者,宜固自若也。而其云"伊來幾年,然疑未定,每自思量"者,又緣何事? 亦願聞之。且兄於旣定誣罪十年之久者,才見震之一書,證據甚明而非白撰。然則震答遠齋書云"改之一字,非吾所知",此亦可謂證據甚明而信其不改師稿歟? 亦願聞之。旣作書將發,更思之,今天理益晦,人心益邪,非復十年前時節。前日之日昭霜嚴於辨誣之義者,今焉削方爲圓,畏獨趍衆,而滔滔日歸於陰窟,不憚改頭換面而爲二截人, 反大言之曰"今日則陰可和而不可斥",至謂"以從違之多寡卜事理之可否"者,有若宋朝和否前後異議。此朱子所嘗以今昔之人倫人心明正與否,反覆歎息者也。嗚呼! 今日之事,何以異此? 若兄者雖與以上一般人所爲有異,然亦不免貳論則有,而所云云視文聖甫有加。又謂"我必驚怒而預切悚息",則其自信己見確乎不拔之意,溢於言外。俯觀時勢,仰察盛意,吾何能有爲"不須說往說來"之說,今可還發於我口也? 以是置不發書者,歲已改矣。但念兄之於我,非尋常交分,乃非親之昆季也。今此所爭,又非尋常義理,乃師生之大倫也。我意兄之不從而不救,是我不盡分,我救兄而不見從,然後我可以無憾矣。記昔金士兢謂我再三喩兄,終致其"不可不謂誣師"之定見,稱之以性於朋友,而大加欽服。此蓋兄之自致,非吾有力。然其盡性分於友道,則自謂然。而伊時尙如此,今見兄之忽翻前案而歸誣黨之大事,非前日是非未定之比而己者,乃恝然不爲之救出,則所謂前日之性於朋友者而今安在? 自慙獻忠不卒,已不暇言,亦豈不爲士兢所笑乎? 是以卒復發書,冀垂明察,幸吾兄諒之。 확연히……순응하는 정호(程顥)의 《정성서(定性書)》에 "군자의 학문은 확연히 크게 공정하여 사물이 오면 순응하는 것보다 더 좋음이 없다[君子之學은, 莫若廓然而大公, 物來而順應]"라고 하였다. 옛날에……하였습니다 《논어(論語)》 〈선진(先進)〉에 보인다. 그리고……있습니다 앞서 보낸 편지에 "매번 변론에 소홀하고 배척에 느린 자를 보면 마땅히 변론하고 마땅히 배척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소홀하고 느린 것은 소홀하고 느린 부정한 마음이 그 당연한 것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또 한 걸음 더 나아가 편이함을 차지하고 기쁘게 하는 것을 도모하며 들추어내는 것을 두려워하는 등 여러 가지 안배가 있게 되니, 더욱 말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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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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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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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오사익에게 답함 答吳士益 丁丑 정축년(1937) '불언지교(不言之敎)'는 형이 처음 서모(徐某)의 편지를 보자마자 즉시 저에게 편지를 써서 말하기를, "옹서(甕書)를 보고 더욱 분명하게 깨달았으니 선사를 무함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형의 뜻은 분명히 옹서의 편지만 봤을 때 이미 선사를 무함했다고 말할 수 있었고 이에 이르러 더욱 분명히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의론이 정해진 것이 이미 십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훈(田壎)의 대인설(代認說)38)을 들어 운운하였습니다. 저들이 서모의 편지가 나오기 3년 전에 대인설을 크게 써서 널리 알린 것은 형도 눈으로 익숙히 보고 귀로 넘치게 들은 것인데, "그 뒤로 몇 년 동안 의심과 긍정이 정해지지 않았다."라고 하여 마치 대인설을 의론이 정해진 뒤에 처음 들은 것처럼 하였습니다. 그러나 천하에 비록 다른 사람의 뜻을 잘 체득하는 자가 있어서 그로 하여금 보고 믿으라 하여도 어려울 것입니다. 저는 일찍이 편견과 시기심이 없다는 것으로 형을 인정했습니다만, 지금의 모습으로 살펴보면 형도 조금 편견이 있음을 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또한 형이 그에게 사사로이 치우친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는 명성과 문장이 사람들로 하여금 바람에 쏠리듯 하게 하여 그 언행을 물을 겨를도 없이 먼 곳에서 서로 바라보매 단지 사모할 만한 것을 보았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더할 나위 없이 졸렬하여 문장은 볼 만한 것이 없고 명성도 들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다만 거처가 매우 가까워서 그의 과오를 자세히 알고 있어서 단지 미워할 점만 보고 사랑스러운 점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으로 '아무개가 어찌 참으로 선사를 무함할 이치가 있겠는가. 아무개가 어찌 스승의 무함을 변론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저도 모르게 저쪽이 옳고 이쪽이 그르다는 뜻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앞뒤가 모순되고 시종이 어긋나는 것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미 이와 같다면 저는 스스로 슬퍼하고 스스로 한스러워할 겨를도 없는데 어찌 감히 다시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형과 제가 이와 같은 큰 시비(大是非)와 큰 분합(分合)의 날을 당하여 30년 된 오랜 친구의 정의로써 편지 한 통을 써서 충심을 바쳤으나 효과는 보지 못하면 곧장 '더불어 말할 수 없다.'39)는 부류로 돌리는 것은 더욱 감히 할 수 없습니다.보내온 편지에 '불언지교'의 명백한 근거라고 한 것은 단지 선사가 이유흥(李裕興)에게 보낸 임술년(1922) 편지를 가지고 마치 굳게 산을 등진 것처럼 한 것에 불과합니다. 형이 시험 삼아 자세히 살펴보면, 이 편지의 28자 중에 어떤 글자가 인가를 받아내려는 뜻이 있어서 이런 근거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기꺼이 시류를 쫓아가는 음성 사람도 오히려 인가받는 것을 불쾌해 하여 바다를 건너 선사의 문집을 인쇄하려고 했다고 사람들에게 과장하였는데, 선사의 도의(道義)로 문인의 원고를 인간(認刊)하고자 했다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형은 기필코 깨끗하고 깨끗하여 본디 한 점의 흠결도 없는 선사의 편지에 음성도 불괘하게 여기는 '인(認)' 자를 더해서 감히 '불언지교'를 만들어 그가 자신의 혐의는 벗고 선사에게 전가하는 죄악을 돕고서야 마음이 기쁘겠습니까? 형이 반드시 이와 같이 하려는 이유는 한갓 이때에 인가받지 않으면 인쇄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 뒤 시법(時法)이 더욱 엄해진 날에는 바다를 건넌다는 말을 않고 본국 내에서도 인가받지 않은 인쇄가 많았다고 하는데, 제가 아는 바로는 《곤암집(困庵集)》 한 책뿐입니다. 그리고 금년 봄에 있어서는 선사의 편지를 받은 사람인 이유흥의 《성암고(誠庵稿)》의 인쇄도 인가받지 않았으니, 선사가 그때에 인가를 받고자 했다는 말이 어찌 근거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음이 슬플 뿐입니다. 음성 사람의 이른바 서모에게 주려던 편지에서 전훈의 대인설 운운한 것은 최원(崔愿)의 읍고문(泣告文)을 말한 것이고, "문집 인쇄를 범론한 것이다."고 한 것은 김세기(金世基)의 읍고문(泣告文)을 말한 것이고, "병오년(1907)과 정미년(1908) 사이에 업자가 대신 인가받는 것을 범론한 것이다."고 한 것은 우형근(禹炯根)의 〈답현통(答玄通)〉을 말한 것입니다. 옛 성인의 책으로 《시경》, 《서경(書經), 《논어(論語)》, 《맹자》 같은 책은 오늘날 간행하여도 옛 성인에게 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제목과 연호를 바꾸고서 전훈의 대인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단 말입니까? 《병암집》을 의논하여 간행하기 위해서 이런 가르침이 있었다고 하였는데,【음성이 이자승(李子乘)에게 답한 편지에 처음으로 전훈의 대인설을 언급하였지만 《병암집》을 의논하여 간행한다는 말은 없었습니다. 정재(靜齋)에게 답한 편지에는 출판업자가 스스로 인가받아 책을 간행한다고 하였지만 또한 《병암집》을 언급한 것은 없었습니다.】 선사가 이유흥에게 보낸 임술년의 편지를 교묘하게 끌어대어 그 설을 이었으니, 교묘하기는 교묘하였습니다. 그러나 고서의 간행이 어찌 《병암집》이 될 수 있겠으며, 병자년과 정축년 사이가 어찌 임술년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대체로 그는 일시적으로 사람을 현혹시키는 계책을 만들고자 하여, 전에 했던 말을 돌아보지 않고 뻔뻔스러운 얼굴로 억지로 말을 하면서, 우매한 자가 속임을 당한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아는 자가 간사함을 발견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형은 그를 믿고 의심하지 않고 근거로 삼아 실제로 여기었으니, 제가 매우 답답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가 몰래 비웃을까 두렵습니다. 형은 또 시험 삼아 생각해보십시오. 성인 문하의 학문은 단지 인(仁)을 구하는 데 있는데, 인을 구하는 방법은 '서(恕)' 자가 큰 것입니다.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않는 것[己所不欲,勿施於人]"40)이 '서'를 행하는 일이고 군자의 용심(用心)입니다. 비록 길을 가는 사람이라도 모두 요순(堯舜)의 도로 들어가기를 바라고 불의(不義)에 들어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선사가 "결단코 스스로 욕되게 하는 것"41)으로 여겨서 자신의 원고에 매우 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을 뜻을 같이 하고 도를 같이 하여 심법을 서로 전하는 문인의 원고에 시행했다고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만약 음성과 형의 설이 후세에 전하여 믿게 된다면 선사는 어떤 사람이 되겠습니까? 통탄하고 통탄합니다.송약재(宋約齋)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의심과 믿음을 분별함에 정증(正證 정확한 증거)가 없어야만 비로소 방증(舫證)을 찾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찌하여 "청원하여 발간 배포하는 것은 결단코 스스로 욕되게 하는 것이다."고 말씀한 유서(遺書)의 정증을 버리고 묘적(墓籍)을 논한 것을 취하여 방증을 삼고자 한단 말입니까? 대저 묘에 문적이 없으면 심지어 무덤을 파고 시체를 태우게 되는 우려가 있으니, '아픔을 참고 훈계를 버리고서 어쩔 수 없이 쓴다.'는 것이 이런 경우입니다. 그러나 원고를 인쇄하지 않는다면 누가 다시 그것을 상자에서 꺼내어 불에 태울 자가 있겠습니까? 유례(類例)가 같지 않으니 이것은 또한 방증이 될 수 없는 것인데, 마침내 이것으로 확대하고 미루어서 심지어 원고의 인간(認刊)과 관련한 '불언지교'까지 만들어낸 뒤에야 그쳤습니다. 그는 진실로 수완이 그러하지만, 형의 명철함으로 또한 감히 그렇게 한단 말입니까? 아, 이것은 또한 하늘이 시킨 일이지 사람이 한 것이 아닙니다.선사가 시대에 구애되고 형세에 압박을 받아 말계(末計)를 했다고 운운하는 것은 더욱 말이 되지 않습니다. 선사는 평소에 스스로를 대하고 남을 가르침에 반드시 제 1등의 도리로 표준을 삼았고 제 2등도 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니, 어찌 다시 말계를 논할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대개 중(中)은 일정한 체(體)가 없고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만약 실제의 구애와 실제의 압박이 묘를 파내고 시체를 불태우는 변괴를 만난 것과 같다고 한다면, 아픔을 참으며 묘지의 문적을 만듭니다. 이것이 중이 있는 곳이 되고 곧 제1등의 도리가 되기 때문에 선사가 허락했던 것입니다. 이미 제1등의 도리가 될 수 있다면 상계(上計)라고 말할 수 있어도 말계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실제의 구애와 실제의 압박이 없어서 만약 원고가 상자 속에 그대로 있어 아무 탈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급하게 인간을 청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이렇게 한다면 이것은 결단코 스스로 욕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사가 일찌감치 유서를 두어 금지했던 것입니다. 이미 스스로 욕된 것이라고 하였으니, 계책도 올바른 계책이 아니고 말계도 될 수 없습니다. 지금 허락하여 중을 얻어 상계가 된 것은 폄하하고, 금지하여 스스로를 욕되게 한다고 하고 계책도 올바른 계책이 아닌 것은 저지하여, 똑같이 선사의 말계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허실(虛實)이 서로 뒤섞였을 뿐만 아니라 경권(經權)의 표준도 없어서 전혀 이치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선사의 평생 학문에 대해 반드시 제 1등의 의리로 표준을 삼은 것이 아니라고 인식하여 선사가 만년에 자신의 굽혀서 말계로 나아감을 면치 못하였으니, 사람을 두렵게 하여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형이 스스로 담당하지 못한 것이 음성의 흠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형은 이미 "선사의 말계이다."라고 하였고 또 "어찌 평탄하게 마땅히 행해야 하는 것으로서 후세의 큰 가르침이 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흠으로 여기는 것은 마침내 선사에게 있고, 음성은 다만 스스로 담당하지 않고 피하지 않은 과실만 있을 따름입니다. 선사가 이미 험난하여 마땅히 행하지 않아야 할 것으로서 후세의 법이 될 수 없는 말계로 사람을 가르쳤다면 본원이 이미 바르지 않은 것입니다. 제자가 스스로 담당하지 않고 피하는 것은 곧 떳떳한 일이니, 어찌 말류(末流)에게 꾸짖을 것이 있겠습니까? 이에 이르러 오늘의 시비는 남김없이 판명되어 더는 말할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교롭게 일을 살피지 못하여 만에 하나라도 이와 같지 않게 되었을 때에는 형은 장차 그 몸을 둘 곳이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서모의 편지가 나오자 그가 고치도록 권하지 않고 곧장 선사를 무함했다는 것으로 큰 철퇴로 쳐야 한다고 운운했던 것은 무슨 말입니까. 이 편지가 나오기 전에는 애당초 행하설(杏下說)42)이 있었습니다. 부풍(扶風 부안)의 여러 사람이 누차 편지를 보내 고치기를 권했지만 끝내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최후에는 광천(狂泉)을 여럿이 마셨다거나 내시의 불알이니 중의 상투니 하는 말로 편지 한 장을 던져서 조소하고 업신여겼으니, 이것이 어찌 권하여 고칠 수 있는 자이겠습니까? 또 행하설 외에 계화도(繼華島)에서 있었던 말로, 정재(靜齋)는 "선사가 일찍이 경성(京城) 탑동(塔洞)에서 인쇄하는 것을 인의(認意)가 있었다."라고 하고 송병진(宋秉眞)은 "우리 선사가 일찍이 인교(認敎)가 있었다."라고 하여, 자연스럽게 면재(勉齋)와 송재(松齋) 두 문인의 과실을 전파하였고, 현암(玄岩)은 심지어 "선사가 만약 이런 뜻이 없었다면 문인들이 어찌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신헌(愼軒)은 이를 두려워하여 의론을 제창하여 변론하고 성토하면서 형을 동지로 여겨서 몇 사람의 처음 통문(通文)에 이름을 올렸는데, 후에 형이 하고 싶지 않다고 하여 59명의 통문 명단에서 이름을 빼냈습니다. 이때에 의론이 이미 이루어졌고 문장 또한 갖추어졌음에도 오히려 곧장 성토를 하지 않고 그가 스스로 고치기를 바랐습니다. 저와 정제도 편지를 보냈으나 효과가 없었고, 대상(大祥)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죄를 인정하지 않고 떠났습니다. 최원(崔愿)과 김세기(金世基) 무리가 또 도로와 역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제창하여 "우리 선사는 원래 인교(認敎)가 있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음성(陰城)과 진천(鎭川) 사이에 거주하는 음성을 편드는 무리는 "선사가 분명히 인교(認敎)가 있었는데 마치 다반사와 같았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떠들고 날뛰어 천지에 가득 차게 되었으니, 이런 날에 이르러서 비록 변론하여 성토하고 싶지 않더라도 가능하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맹자가 "부득이해서 그런 것이다."43)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무릇 이런 일은 실재로 형이 계화도와 현암을 오고 가는 날에 역력하게 자세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서모의 편지는, 성토를 한 뒤 3년이 지난 병인년(1926)의 겨울에 근소재(近小齋) 또한 음성이 선사를 무함했다는 것을 명백히 알고 이전에 음성을 편든 것을 후회하여 비로소 이 편지를 내놓아 사람들로 하여금 '불언지교'를 자세히 살펴보게 하였는데, 이에 더욱 행하설의 "헤아려서 하라."는 것이 인가하는 말로 선사를 무함한 것임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형이 이 편지를 보고, "옹서(甕書)를 보고 더욱 분명하게 깨달았다.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선사를 무함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라고 하였습니다. 옹서는 바로 행하설입니다. 근소재의 이 편지가 나와자 그 효과를 먼저 형에게서 나타났다는데, 지금 갑자기 의론을 달리하니 매우 괴이합니다.】이 편지가 나왔으니 마땅히 다시 공개적으로 성토하여 [음성의] "말은 구별이 부족하고 문장은 표현이 허술하였다."고 한 것을 깨뜨려야 했는데, 편지의 주인을 성토하지 않고 다만 '대초(代草)' 등의 설만을 성토하였고, 고소(告訴)를 당하자마자 모두가 기운을 잃어서 힘을 함께 할 사람이 없고 윤고문(輪告文)도 상자 속에 있게 되었을 뿐입니다. 이 문장이 지어진 것은 정묘년(1927)이었고, 갑술년(1934) 겨울에는 현광(玄狂)이 저의 초소에 있었는데, [현광이] "이 윤고문은 끝내 그만둘 수 없는 것이지만 글에 미진한 부분이 있으니 이를 수정하고 윤색하여 여러분의 이름을 연명하여 발의하자."라고 하였고, 정재장(靜齋丈)도 동의했지만 끝내 발의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글이 어떻게 그가 보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형도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그에게 고치라고 권한 것은 이미 행하설 속에 있었는데 고치게 할 수 없었고, 이른바 큰 망치로 때린다는 것은 서모의 편지가 나오기 전에 먼저 있었으니, 형이 어찌 참으로 잊어버렸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고의로 이런 태도를 취하여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여 그 단서를 헤아릴 수 없게 한 것입니까?오호라, 저는 이 일에 대해 생각하면 마음이 썩고 말을 하면 이빨이 시리니, 진실로 또한 괴롭습니다. 당초에 만약 노성하고 중망이 있어서 이 일을 몸소 맡아서 분명하게 변론하고 엄하게 성토하여 무함을 시원하게 씻을 몇 사람이 있었다면 저처럼 나이가 어리고 사람이 미천하며 문장이 졸렬하고 언어가 가벼운 자는 어찌 그 사이에서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마침내 그렇지 아니하여 온 사문(師門)을 돌아보아도 전혀 없었고, 겨우 황소심(黃小心) 한 사람이 있었지만 또한 피차간 사실에 관련된 문자에 대해 또한 자세히 알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비록 한심하지만 이미 선사의 제자가 된 자로서 어찌 감히 스스로 편의만을 취하여 그 책임을 사양하겠습니까. 아, 높은 갓을 쓰고 큰 허리띠를 두르고서 변론이 씩씩하고 문장은 걸출한 자가 숲 풀처럼 많지만 끝내 저처럼 자질이 졸렬하고 식견이 비루하여 가장 못난 자로 하여금 이 일을 맡게 하였으니, 오늘날 선비의 기풍을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선사는 그대 혼자만의 스승이 아닌데 그대는 어찌 홀로 수고를 하고 무함을 밝히기도 전에 원한을 보복한다는 의심을 실컷 받는가?"라고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나는 그에게 원래 원한이 없고 그도 또한 내가 혐의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닌데 고의로 이런 설을 가지고 사람들의 귀를 혼란하게 하는 것일 따름이다. 진짜로 원망할 만한 것이 있어서 내가 만약 원한을 보복한다는 의심을 피하려고 선사의 일에 마음을 다하지 않는다면, 사사로움만 생각하고 공적인 것을 잃어버리는 죄가 또한 어찌 무겁고 크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형은 이를 듣고 그렇다고 여기겠습니까?선사를 무함한 것을 보고도 오히려 화합한다면 죄는 처음 합한 데 있으니 기다리지 않아도 마침내 나눠질 것이고, 선사를 무함한 것을 보고 이에 나눠졌다면 의리는 마침내 나눠지는데 있으니 처음에 합한 것은 타당하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날을 논할 때에 선사를 무함한 것의 조만 및 분합의 선후를 따지지 않고 처음에는 합했다가 나중에 나눠진 것으로 죄를 준다면 이것이 어찌 일을 논하는 일정한 표준이겠습니까? 또 저의 일곱 자 몸뚱이는 저들에게 맡겨 어육이 된 지 오래됐으니, 어찌 양쪽의 문자가 한 번씩 주고받을 때마다 더욱 심해진 이후에 원수가 되는 것을 기다리겠습니까? 지난번 음성의 고소를 당하여 혹독함을 두루 겪고 죽음을 맹세할 때에는 진실로 다시 우리 형과 왕복하며 토론하는 오늘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뒤미처 생각해보니 온 몸이 다 써늘해집니다.선사 학문의 대략은 '명변(明辯)' 두 글자뿐입니다.【《중용》의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분변하는 것은 모두 명변 공부이며, 독행도 명변한 것을 행하는 것에 불과합니다.44)】 심성이기(心性理氣)의 변론 이외에 선사의 행사에서 찾아보면, 스승의 무함을 변론하는 것으로 제일의 의리를 삼아서 김평묵(金平黙)의 뇌문(誄文)을 여러 사람의 의론이 통일되지 않았을 때에 배척하였고45) 이(李), 신(申), 정(鄭)을 동문으로서 함께 배운 반열에서 분리시켰으며, 임종에 이르렀을 때에도 부지런히 일삼은 것은 오직 이것이었습니다. 또한 일찍이 훈계하기를 "부사(父師)의 무함을 눈으로 보고도 변론하여 성토할 줄 모르는 자는 그 몸을 칼로 자르더라도 고통을 모르는 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선사에게 배운 것이었고, 선사가 우리들에게 희망했던 것입니다. 지금 형은 여기에서 배우고 바란 것을 구하지 않고 마침내 다른 곳으로 가서 구하니, 저는 그것이 무슨 설인지 모르겠습니다.음성이 지령(志令)을 끊지 않은 자를 배척하여 '선사를 배반하고 연원을 저버린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윽고 또 자신이 직접 범하였습니다. [이런 자에 대해] 형이 "과연 현광이 논한 바와 같다면 의심스럽고 괴이하다."라고 하였으니, 아마도 혹 여기에 대해 모두 믿지 못한 것이 있었던 것입니까? 음성이 김성장(金聖章)에게 답한 편지와 음성이 김성구(金聖九)에게 보낸 편지의 원본이 여기에 있으니 다시 볼 수가 있습니다. 다시 보고서 정말로 그렇다면, 김세기(金世基)가 선사를 무함하고 훈계를 저버렸다고 성토한 자는 전(田), 최(崔), 송(宋)이 아니고 바로 오진영이이며, 낙현(洛賢)을 망국(亡國)으로 배척하고 매옹(梅翁)을 위학(僞學)으로 배척한 사람46)을 노비가 되어 상전으로 섬긴 자는 김(金)이 아니고 바로 오진영입니다. 그러니 오진영은 어찌 김세기를 마땅히 전, 최, 송, 김을 공격하는 깃발과 창을 뒤돌려서 공격해야 할 자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이미 그렇다면, 오진영이 말을 놀리고 설을 꾸며서 이미 선사를 무함하였고, 반복하여 말을 바꾸어 또 무함을 성토한 사람을 저지했던 것을 모두 알 수 있습니다.무엇보다도 전훈의 대인설 운운한 것에 대해 전에는 고서를 인쇄한 것이라고 한 것이 지금은 《병암집》이 되었고, 전에는 병자년과 정축년이라고 말했는데 지금은 임술년이 되었는데, 형이 믿고서 증거로 삼은 것은 바로 이것과 한 종류입니다. 비록 그렇지만 형은 바야흐로 음성을 선사보다 더 믿으니, 내 말이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김의 편지를 다시 볼 날을 기다려서 정할 수 있겠습니까?형은 오히려 현광이 논한 것으로 헤아려서, 그의 의론에 남과 내가 차이가 있고 앞과 뒤가 모순됨이 있다고 가설하여 비평하였습니다. 이것이 제가 끝내 형을 버리지 못한 이유입니다. 저번에 이런 의론을 가지고 동문 한 사람에게 보여주었더니 그 사람이 다 본 후에 말아서 한 쪽에 치워두고 더는 어떠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 사람의 마음이 모두 재가 되고 피부 속에 피가 없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는 누구와 더불어 말을 합니까? 푸른 하늘을 우러러 길이 탄식할 따름입니다.김세기가 제게 뒤집어씌운 죄는 지령(志令)을 종처럼 섬긴 것이 첫머리의 대제목이 되는데, 저는 혐의를 벗었고 그가 실제로 범한 것은 이미 위에서 논한 바와 같으니, 그 밖의 나머지 허다한 흉악한 무함은 파죽지세처럼 변론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해소될 것입니다. 옛날에 직불의(直不疑)가 형수를 도적질 했다고 무함한 자가 있었는데 직불의는 이를 변론하지 않고 다만 "나는 본래 형이 없다."라고만 하였습니다. 아, 남이 형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자가 어찌 형수를 도적질한 여부를 알 수 있겠습니까? 남이 아비를 여의고 어미를 여읜 것도 모르는 자가 어떻게 예의가 있는지는 여부를 알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진실로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입니다. "不言之敎",兄見徐書之初,卽書於弟曰: "視甕書,更覺分明,不可不謂之誣師。" 兄意明是但看甕書時已可謂誣師,而到此更覺分明也。論定旣如是者十年矣,今乃擧田壎代認說云云。彼輩大書布揚於徐書出三年前,兄亦熟眼而盈耳者,謂"以此而伊來幾年,然疑未定",有若代認說始聞於論定之後者。然天下雖有善體人意者,使之見信難矣。弟嘗以不偏忮許兄矣。以今觀之,恐兄亦不免偏些在也。不然,安得有此事? 雖然,亦非兄有心偏私於彼也。但以彼則聲名文華,使人風靡,不暇問其言行,而遠地相望,只見其可慕而己。弟則孱劣無比,文無足觀,名無足聞。居且密邇,詳悉其過惡,只見可惡而不見可愛。故語于心曰: "某也豈眞有誣師之理? 某也渠何能辨師誣?" 不覺是彼非此之意,日滋月長,以至於前後矛盾、始終叅差之至此也。旣然矣,則弟將自悲自恨之不暇,何敢復有言也? 第念兄與我,當此大是非大分合之日,以三十年久要之誼,一書獻忠而不見效,則輒歸之於"不可與言"之科者,尢有所不敢也。來書所謂不言之敎之明據者,不過單將先師與李裕興壬戌書,若負嵎之固然。兄試詳之,此書二十六字中,何字有出認底意思而可作此據者也? 夫以陰人之樂於趨時者,尙謂認不快,以欲越海印師稿,誇張於人,曾謂以先師之道義,欲認印門人之稿乎? 兄必將潔潔淨淨本無些點底師書,加之以陰亦不快之認字意思,敢作"不言之敎",而助彼脫己嫁師之惡,然後快於心歟? 兄之所以必欲如此者,徒以此時非認不印而然。然其後時法愈嚴之日,舍曰越海,本國內亦多非認之印,以吾所知,《困庵集》一也。至於今春,卽此所受師書人李裕興?誠庵稿?之印,亦且非認,則其謂先師以其時而欲其認者,豈足以爲據哉? 哀哉嗤哉! 陰人所謂擬與徐氏書也,"田壎代認說"云云,崔愿【泣告文】之謂; "泛論印書",金世基【泣告文】之謂; "在丙丁間泛論業者代認",禹炯根【答玄通】之謂。古聖人書如《詩》、《書》、《語》、《孟》,今世刊行而古聖人不爲累者,忽然換題易年而曰不曰田壎說乎? 爲?炳庵集?議印而有是敎也。【陰答李子乘書,始有曰田壎代認說,而無《炳庵集》議印之云。答靜齋書謂冊商自認印書,而亦無《炳庵集》之云。】 巧引先師與李裕興壬戌書而承之,巧則巧矣。然古書之印安得爲?炳集?,丙丁之年安得爲壬戌乎? 只見其情狀之露也。蓋渠則欲爲一時眩人之計,不顧前言,靦顔强說,幸昧者之見瞞,恐知者之發奸。兄則信之無疑,據以爲實,非惟弟之深悶,亦恐彼之竊笑也。兄且試思。聖門之學,只在求仁,求仁之方,恕字爲大。"己所不欲,勿施於人",行恕之事也,君子之用心也。雖行途之人,皆欲其入於堯舜之道,而不欲其入於不義也。曾謂先師視爲"決是自辱"而深所不欲於己稿者,以之施於同志同道心法相傳門人之稿乎? 使陰與兄之說傳後而信之,先師爲何如人? 痛矣痛矣。至於答宋約齋書,凡辨疑信者無正證,然後始覔旁證。今何若舍"請願刊布,決是自辱"之遺書正證,而欲取論墓籍者而作旁證也? 夫墓不籍,則至有掘塜燒尸之慮,含忍遺訣,不得已用之者,此也。稿不印,則誰復有發之篋而焚之火者乎? 類例不同,此又旁證之不得爲者,而乃以此輾轉因推,至作認稿不言之敎而後已。彼固伎倆則然,以兄之明亦敢爾乎? 嗚呼! 是亦天而非人歟?先師時拘勢迫,末計之云,尢不成說。先師平日自待與敎人,必以第一等道理爲準,第二等且不屑爲,豈復有末計之可論? 蓋中無定體,隨時而在。如有實拘實迫,若墓之遭掘燒之變,則含忍而籍之,是爲中之所在,卽爲第一等道理,故先師許之。旣得爲第一等道理,則可謂之上計,而不可謂之末計也。無實拘實迫,若稿之自在篋笥而無恙,則何所急而請認也? 然且爲之,則是"決是自辱",故先師早有遺書而禁之。旣云"自辱",則計非其計,而末亦不得爲矣。今於所許之得中而爲上計者貶之,所禁之自辱而計非其計者抗之,同謂先師之末計,非惟虛實相蒙,經權無準,全不成理。認先師平生學問,爲未必準以第一等義,不免晩年之俯就末計,使人恐懼,不知所言。兄雖以不自擔爲陰之欠,然兄旣云"先師之末計",又云"豈是坦然當行爲後世底大敎乎"? 然則是所欠者竟在先師,陰則只有不自擔不爲諱之過而己也。師旣以崎嶇不當行不可爲法後世底末計敎人,則本源己不正矣。弟子不爲之自擔而諱之者,乃其常事,何足責之於末流乎? 到此而今日之是非,可謂判明無餘而無復可言。好不省事,萬之一不如此時,兄將無所措其躳也。柰何柰何?徐書之出,不勸其改之,直以誣師,大椎擧而擊之云云,是何說也? 前乎此書之出,而始有杏下之說也。扶風諸公累書勸改而終不答,最後以狂泉衆飮、宦僧睾髻之說,投一紙而嘲侮之,是豈可勸而改之者耶? 且杏下說之外,華島之語,靜齋以先師曾有認意京城塔洞之語,宋秉眞以吾師曾有認敎之說,自然播傳勉、松兩門人之過,玄岩至有言先師若無此意,門人豈敢有此語者? 愼軒爲是之懼,倡議辨討,認兄爲同志,錄名於數人之初通,後以兄之不欲而拔於五十九人之通矣。是時,議旣成矣,文且備矣,猶不遽討,而望其庶改。弟與靜齋又書而無效,至於祥事,竟不服罪而去。崔愿、金世基輩又公唱於道路驛場之間曰: "吾師元有認敎。"【至今則陰徒之在陰城、鎭川間者,言先師分明有認敎,有同茶飯云。】則萬口喧騰,漲天溢地,到此之日,雖欲不辨討得乎? 此正孟子所謂不得已者也。凡此事,實兄往來華島、玄巖之日,歷歷詳悉矣。若乃徐書,則聲討後三年丙寅冬,近小亦明知陰之誣師,而悔前右陰,始出此書,使人觀此"不言之敎",則益知杏下說"料量爲之"之爲認誣也。【兄見此書,謂"視甕書,更覺分明,到此地頭,不可不謂之誣師"云云。甕書卽杏下說也。近小此書之出,其效先發於兄矣,今忽異論,可怪可怪。】 此書之出也,宜其再行公討,以破"語欠區別,命辭疎忽", 不討書主,但討代草等說 而才經訴禍,擧皆喪氣,無人同力,輪告文徒在篋笥矣。是文之作在丁卯,而甲戌冬玄狂之在弟所也,謂"此告終有不可已者,而文有未盡,爲之加修潤,欲聯僉名而發之",靜丈意亦然,而竟未發矣。未知此文何自入彼眼也。此則兄所未詳矣。蓋所謂勸其改之者,已在杏下說而不得,所謂大椎擊之者,先在徐書之出,兄豈眞忘之? 抑故作此態,令人恍惚,莫測端倪?嗟呼! 吾於此事,思之心腐,言之齒酸,良亦苦矣。當初如有老成重望身任此事明辨嚴討快雪誣者數三公,如弟之年少人微文拙言輕者, 何足有無於其間? 顧乃不然,環視一門,絶無焉,而僅有黃小心一人,亦於彼此事實文字有未詳盡者。吾雖無似,旣爲人弟,何敢自占便宜而辭其責乎? 噫! 峨冠博帶,雄辯傑文,林立如也,而竟使孱質陋識最出人下如我者任此事,今世士風亦可知也。或謂余曰: "先師非獨爲子之師,子何獨賢勞,誣未及白,而飽受報嫌之疑?" 余曰: "我於彼元自無嫌,彼亦非不知我之無嫌,而故將此說以亂人聽爾。使眞有可嫌者,我若避報嫌之疑而不盡心於師事,則其念私忘公之罪,豈不重且大乎?" 兄其聞此,以爲然否?見誣師而猶合,則罪在始合而不待終分; 見誣師而乃分,則義在終分而始合不當。論今也,不問誣師之早晩、分合之先後,槩以始合終分罪之,是豈論事之定準? 且吾七尺之軀,任彼輩作魚肉久矣,豈待兩邊文字一書甚一書而後成仇哉? 曩遭陰訴備毒誓死之時,實不圖復與吾兄往復講論之有今日也。追思,渾身盡靑。先師之學問大致,"明辯"二字是已。【《中庸》學、問、思、辨,總是明辯工夫,至於篤行,亦不過行其所明辯者爾。】 心性理氣之辨以外,求之行事,則辨師誣爲第一義,斥逐金誄文於衆議未一之日,分異李、申、鄭於同門共學之列,以至屬纊之時,孜孜焉所事者惟是。又曾有訓曰: "目見父師被誣而不知辨討者,是刀截其身而不知痛者也。" 此正吾輩之所學於先師,先師之所望於吾輩者也。今兄則不求所學所望於此,而乃之他而求之,吾不知其何說也。陰之斥不絶志令者爲背先師負淵源,旣又身親犯之者。兄謂"果如玄狂所論,則可疑且可怪",豈或於此有未盡信者耶? 陰答金聖章書、陰送聖九之原本在此,可覆視也。覆視而果然者,金世基所討誣師背訓者,非田、崔、宋也,乃震也; 奴事爲上典於斥洛賢亡國梅翁僞學之人者,非金也,乃震也。震豈非世基之所當回倒攻田、崔、宋、金之旗戈而攻之者乎? 此旣然矣,則凡震之游辭飾說,旣以誣師,反覆變舌,又抗討誣人者,皆可知也。最是田壎代認說云云,前謂古書之印者,今爲《炳集》; 前謂丙丁之年而今爲壬戌,而爲兄所信據者,正與此一類矣。雖然,兄方信陰過於信師,吾言何能有力? 尙可待覆視金書之日而定之歟?兄猶以玄狂所論入思量, 議論有人己二致,前後予盾,假設評辭。此吾所以終不舍兄也。向以此論,示同門一人,其人看畢,卷置一邊,更無如何之言。噫! 人心都灰,皮裡無血如此,此世吾誰與語? 仰蒼長吁而己。世基所勒此漢之罪者,奴事志令爲劈頭大題目,而此之脫空,彼之實犯,旣如右所論,則餘外許多凶誣,勢如破竹,不辨自解矣。昔有誣直不疑以盜嫂者,不疑不之辨,但曰"我本無兄"。噫! 不知人之有兄無兄者,何以知其盜嫂與否? 不知人之喪父喪母者,何以知其有禮無禮? 此眞今古一轍。 대인설(代認說) 《간재집》 간행을 대신 인가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불어……없다 공자는 "더불어 말할 만한데 더불어 말하지 않는다면 사람을 잃고, 더불어 말할 만하지 않은데 더불어 말한다면 말을 잃는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람도 잃지 않고 말도 잃지 않는다[可與言而不與之言, 失人, 不可與言而與之言, 失言. 知者不失人亦不失言]"라고 하였다.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 자신이……것 자공(子貢)이 종신토록 명심할 한마디 말을 청했을 때, 공자가 "그것은 '서'라는 글자일 것이다.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베풀지 말아야 한다[其恕乎, 己所不欲勿施於人]"라고 하였다.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 결단코……것 간재는 자손 및 제군에 고하는 글에서 "다른 날 시변이 조금 안정되기 전에 만약 저쪽에 청원하여 발간 배포할 계획을 하는 것은 결단코 스스로 욕되게 하는 것이다. 여러 사람이 비록 혹 강권하더라도 너희는 아비와 할애비의 마지막 명을 맹세코 지켜서 조심하여 애써 따르지 말라[異時時變稍定之前, 若請願於彼, 以爲刊布之計, 決是自辱. 諸人雖或強之, 汝等誓守父祖末命, 愼勿勉從也]"라고 하였다. 《간재집(艮齋集)後編》 권5 〈고제자손겸시제군(告諸子孫兼示諸君)〉 행하설(杏下說) 간재집의 간행과 관련하여, 간재가 은행나무 아래에 홀로 앉아있을 때에 오진영에게 "힘을 헤아려 하라."고 명하였다고 말한 것을 가리킨다. 부득이해서……것이다 맹자 당시의 사람들이 모두 맹자가 변론을 좋아한다고 일컬었는데, 맹자는 이에 대하여 답하기를 "내가 어찌 변론을 좋아하는 것이겠는가. 내가 부득이해서 그런 것이다[予豈好辯哉? 予不得已也.]"라고 하였다.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 중용의……불과합니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0장에 "널리 배우며 자세히 물으며 신중히 생각하며 밝게 분변하며 독실하게 행해야 한다[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라고 하였다. 저 김평묵(金平黙)이……변론하셨는데 김평묵이 임헌회의 제문을 지었는데, 임헌회를 호안국(胡安國)과 사마광(司馬光)에게 비유했다 해서 간재선생과 임헌회의 아들 임진재(任震宰)가 편지를 보내어 절교를 선언하고 제문을 돌려보낸 사건을 말한다. 낙현(洛賢)을……사람 낙헌과 관계된 내용은 《간재집(艮齋集)後編)》 권6 〈논인수무분(論人獸無分)〉에 보이고, 매옹과 관계된 내용은 《간재집(艮齋集)後編)》 권4 〈여정헌풍(與鄭憲豐)〉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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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奇上舍【麒鎭◎丙戌】 謹拜覆便來。伏承惠翰。憑審萱闈諸節大都安善。何慰如之。漸役尙能課董。幾至斷手矍鑠哉。但峽路矄犯。殊非老人謹疾之道。千萬愼旃。惠葛一襲。足見古人縞紵之義。寄意鄭重。感戢無喩。但坐此涼臺。不覺山外熱鬧時節。所以姑不堪祛舊着新耳。弟入山以來。日喫三合飯。而一向眠。此可謂衰年事業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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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자정에게 답함 答趙子貞 辛巳 신사년(1941) 《의례》에는 "처가 죽은 경우 3년이 지난 뒤에 장가를 드는 것은 자식의 정을 소통시키기 위해서이다."74)고 하였고, 국전(國典)에는 "나이가 40이 지났는데도 자식이 없는 자는 1년이 지난 이후에는 다시 장가드는 것을 허락한다."고 하였습니다. 근세에 예법이 해이해져서 3년이 지난 뒤에 다시 장가드는 자를 전혀 볼 수가 없습니다. 예를 지킨다고 일컬어지는 선비의 경우도 겨우 1년이 지나면 다시 장가를 들고 있으며, 나이가 젊고 자식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합니다. 이것은 이미 예와 국전에 어긋난 것입니다. 그러나 상복의 기일이 다하기를 기다린 것이라면 맞는 것입니다만, 만약 이것까지 아울러 법도를 넘는다면 또한 이른바 "더불어 말하기 어렵다."75)는 자가 될 것입니다. 매산 선생(梅山先生 홍직필(洪直弼))은 이를 논하여 말하기를 "어찌 상복을 벗지도 않았는데 재혼을 하여서 한 몸에 애락(哀樂)을 모으고 한 방안에 길흉(吉凶)을 뒤섞는단 말인가?"라 하였는데, 깊고 절실하여 경계할 만한 말씀입이다. 상복을 벗기 전에 첩을 얻는 것은 비록 재혼과는 예를 갖추는 여부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애락을 모으고 길흉을 뒤섞는 점에서는 똑같으니, 선비로서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스스로 돌아볼 때 천리와 인정에 편안치 못하고, 또한 요새 사람이 핑계거리를 삼고 선비는 더욱 기탄이 없게 되는 폐단을 열어주는 것이니,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禮》云: "妻亡者,三年而娶,所以達子之情。" 國典: "年過四十而無子者,許期年後改娶。" 近世禮法解弛,絕不見三年而改娶者。其稱士子之謹禮者,僅得朞年而娶,而年少有子者亦然。此已違於禮典。然其爲待服盡,則得矣。若并此而踰閑,則又所謂難與言者。梅山先生論此云: "曷可服未除而絃已續,萃哀樂於一身,混吉凶於一室乎?" 是爲深切可警。除服前卜姓,雖與續絃有備禮與否之異,其爲萃哀樂混吉凶則均矣,士子而可爲乎? 旣是自顧而未安於天理人情,又啟時人藉口士子益無忌憚之弊,絕不可爲也。 처가……위해서이다 《의례》 〈상복(喪服)〉에 "부친은 반드시 3년이 지난 뒤에야 아내를 들이니 자식의 뜻을 소통시키기 위해서이다.[父必三年然後娶, 達子之志也]"라고 하였다. 더불어……어렵다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호향(互鄕) 사람은 더불어 말할 수가 없다.[互鄕難與言]"고 하였는데, 주자 집주(集註)에 "그 사람의 습성이 착하지 못하여 예를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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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율노용에게 답함 答宋景栗鲁容 ○乙卯 을묘년(1915) 상중(喪中)에 경복(輕服)을 벗을 때 착용하는 복장은, 저의 생각에는 포건(布巾)과 직령(直領) 이외에는 아마 다른 방법이 없을 듯합니다. 형도 이미 그렇게 여겼으면서 또한 어찌하여 상중에 선조를 제사지내는 복장으로만 국한하여 의심하는 것입니까? 선조를 제사 지낼 때에는 최질(衰絰)을 착용할 수 없기 때문에 포건과 직령을 착용하는 것이니, 경복을 벗을 때 잠시 최질을 벗을 수 있다면 포건과 직령 차림이 어찌 통용하는데 편치 않은 점이 있겠습니까? 확대하여 말하면, 출행(出行)을 할 때에 최질을 착용하면 속인을 놀라게 할 수 있기 때문에 포건과 직령을 착용하는데, 이것 또한 선조를 제사지내는 복장에 국한하고 또한 그 때가 아니라 하여 의심할 수가 있겠습니까?【다만 선조를 제사지낼 때에는 포건 위에 평량자(平涼子)를 가하고, 출행할 때에는 포건 위에 방립(方笠)을 씁니다.】 길복(吉服)에는 옥색(玉色)을 쓴다는 등의 설은 비록 근거가 있다 하더라도 따르기는 어려울 듯합니다.《중용》 16장의 '성(誠)' 자는 '이(理)'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듯합니다.77) 그런데 선사가 《혹문(或問)》의 주자가 후씨(矦氏)의 설을 변론한 것78)을 인용하여 이(理)를 직접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의심하셨으니, 감히 질언(質言)하지 못하겠습니다. 喪中除輕服時所著服,弟意布巾直領外,恐無他道。兄旣然之,又何以喪中祭先之服局定而疑之耶? 祭先時,不可著衰絰, 故布巾直領; 除輕服時,可暫脫衰絰,則布巾直領, 有何不安於通用耶? 廣而言之,則出行時,衰絰駭俗, 故布巾直領,此亦可局定於祭先之服而亦非其時疑之耶?【但祭先,則布巾上加平涼子; 出行,則布巾上加方笠。】吉服玉色等說,雖云有據,恐難從也。《中庸》十六章"誠"字,似當以"理"看。而先師引《或問》辨矦氏說而疑非直指爲理, 未敢質言。 중용……듯합니다 《중용(中庸)》 16장의 "성은 진실하고 망령됨이 없음을 이른다. 음양의 합하고 흩어짐이 진실 아님이 없다. 그러므로 그 발현되어 가릴 수 없음이 이와 같다.[誠者, 眞實無妄之謂. 陰陽合散無非實者, 故其發見之不可揜如此]"라고 한 구절의 '성' 자를 가리킨다. 주자가……것 《중용혹문(中庸或問)》을 참조하면, 후씨는 "귀신은 형이하자이니 성이 아니다. 귀신의 덕은 성이다.[鬼神形以下者, 非誠也; 鬼神之德則誠也]"라고 하였는데, 주자는 이에 대해 "귀신의 덕이 성대한 까닭은 그 성 때문이고, 성이 스스로 하나의 물이 되고 별도로 귀신의 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 후씨는 귀신과 그 덕을 나누어 두 개의 물로 만들고 형이상과 형이하로 말하고 있다.[鬼神誌德所以盛者, 蓋以其誠耳, 非以誠自爲一物而別爲鬼神之德也. 今侯氏乃析鬼神與其其德爲二物, 而以形以上下言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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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悟 萬事皆從心上求。一毫莫向物中謀。心是我心求則得。物皆外物放而流。常能安靜朝朝樂。謾使紛紜夜夜憂。此路古今成敗地。精神好着雨岐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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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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肅字韻 箕疇五事肅爲宗。入德工夫在貌恭。存養事天常畏愼。明誠凝道自從容。凜然氣像千軍壘。特立精神萬仞峯。這裏常觀盥不薦。中心有孚威如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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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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親元與諸益共賦 大塊無端勞我行。光陰遽見半平生。十年林下云何事。百尺竿頭更別情。臘雪殘消山意古。春氷解釋水心淸。向裏工夫依本分。肯隨流俗較虛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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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沈致敎 一日之程。十年之別。人事落漠。蓋此類也。過境不須追提。而是日淸和。靜養氣力輕健。尊從氏水村丈體候崇安。各宅濟濟康泰。遠外恒切仰溯。情下生慈候。早春以後。長在待變中度日。今尙奄奄。私悶私悶。內憂身病。鱗次積疊。淡泊生涯。辛酸世味。久矣哉。大塊之勞我也。歲月欺余。鬢霜漸白。日暮程遠。歸宿無地。但於未死之前。順受蒼蒼者處分。令德令儀。何日忘之。坐作蹩躄。出門一步。難於千里。神往則勤。而恨兩腋之不翰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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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沈致敎 昨年俯賜慰問。兼垂賻惠。伏蒙下恤。無任下誠。迄未報謝。罪也罪也。伏惟頤養氣體候。連亨萬康。尊執事平生恨膝下無肖子矣。近以至情愷悌人。以爲立后云。今知君子有后。爲之伏賀區區。令從令咸僉兄喪變。德門禍厄。一何至此。在知舊慘怛若此。其在期功之地。何以爲慰也。然舊日童子。次第成就。今皆爲頎頎丈夫。是可爲慰也。情下生去三月。奄過先考禫祀。今雖吉冠吉股。風樹之感。去益罔涯。而身勢長在夢境中。積懷雖更。僕不能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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