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기관별 검색

검색 범위 지정 후 검색어를 넣지 않고 검색버튼을 클릭하면 분류 내 전체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전체 으로 검색된 결과 56403건입니다.

정렬갯수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오사익에게 보냄 與吳士益 丙寅 병인년(1926) 김태형(金台亨)에게 들으니, 음성 사람이 선사의 손자를 고소하여 가둔 뒤에 애시(哀侍)4)께서 여러 자질들에게 말하기를 "오늘 이후로는 다시는 석농(石農)의 호를 들어 부르지 말라."고 했다고 하였습니다. 고명한 제공(諸公)이 선사를 무함했을 때에 배척하지 않다가 선사의 손자가 갇히는 것을 기다렸다 비로소 폄하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러나 이미 깨달았으니 또한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선사의 원고를 바꾸고 첨삭을 하였으니, 이처럼 지극히 무엄한 것을 본다면 제공은 의당 호를 없애는 정도로 폄척할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聞諸金台亨,陰人訴押師孫之後,哀侍與群從語曰: "今而從不當復舉石農之號而呼之。" 以若諸公高明,不於誣先師而斥之,始待押師孫而貶之,何也? 然既已覺悟,亦云幸矣。今又改換添削師稿之罪,如是無嚴之極,諸公見之,應不但去號之貶而已也. 애시(哀侍) 서간문에서 흔히 쓰는 말로, 거상(居喪) 중에 있으면서 홀아버지나 홀어머니를 모시는 사람을 말한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挽李上舍【最善】 自首同門有幾人。如今半是北邙塵。愧余久蟄淸漳疾。宿草佳城又一春。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與月皐【趙性家】龍岡【奇弘衍】諸名勝留對月軒 共君來坐上禪西。羅列群峰入眼低。刮目何嫌三日別。安身猶足一枝棲。聞多幸賴登靈鷲。喫淡寧須具黍鷄。却喜山窓中夜雨。灑然飛瀑響前溪。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與月皐龍岡留鷲棲。旬浹還到東岡 此會何如九老香。衰顔禿髮共林堂。竺靈山水觀何壯。方丈煙霞意更長。浪吟還愧詩三軸。善謔無妨奕一場。峽路衣沾君莫惜。披巖剔藪也心凉。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自鷲棲抵東岡。信宿還別。 芒鞋踏盡鷲靈雲。憶昔觀庵會以文。五老之中猶眇我。八年以上最尊君。不圖賢輩忘勞至。還愧貧家少禮勤。前路那堪相別意。慇懃後約某山云。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鷲棲彦會 爲君理屐陟雲山。此世人生幾日閒。數夜奇緣同白髮。一樽淸話輒紅顔。幽軒聊可忘榮辱。近峽何妨任往還。最憐月出峯相望。杳藹蒼蒼遠莫攀。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조자정에게 답함 答趙子貞 己卯 기묘년(1939) 현제(賢弟)가 어제 말하기를 "홍모(洪某)가 음성의 오진영이 나를 평하여 '문자(文字)는 능하다.'고 했다는 설을 가지고 오진영이 참으로 공심(公心)이 있다."고 했는데, 참으로 가소롭습니다. 진실로 그 말과 같다면. 가평(嘉平)의 김평묵(金平黙)이 간옹(艮翁)을 평하여 "문장은 능하지만 학문은 어찌 능하겠는가."라고 말을 공심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시험 삼아 홍모로 하여금 다시 묻게 하기를 "그렇다면 김모의 학문은 어떠하냐?"고 하면, 오진영은 반드시 "학문은 어찌 능하겠는가."라고 하여, 또한 가평의 김평묵이 간옹을 배척한 것처럼 할 것입니다. 대개 홍모는 초학자이니 다만 문장이 능한 것이 최고의 대현인 줄만 알기 때문에 그가 오진영을 높이는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언뜻 오진영이 문장이 능한 것으로 나를 인정한 데에는 증오하는 뜻이 있다고 들었지만 그 선함이 공심이라고 알았습니다. 그러나 옛날에 "한 번 문인이라고 불리게 되면 나머지는 볼 것이 없게 된다."64)는 말이 있기 때문에 오진영이 문인(文人)으로 나를 지목하고 자신은 학인(學人)으로 자처한 것임을 전혀 알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賢弟昨說, 洪某以陰震謂吾"文字則能之"之說,信其有公心,殊可笑也。信如其言,嘉金謂艮翁"文章則能之,學則何能"之說,可謂公心乎? 試使洪再問曰: "然則金某學則如何?" 震必曰: "學則何能?" 亦如嘉金斥艮翁也。蓋洪是初學,徒知能文之爲無上太賢, 故其所以尊震者亦以此也,而乍聞震之以能文許吾,意其有憎,而知其善之公心。然殊不知古有"一號文人,餘無足觀"之語, 故震以文人目我,而自處以學人也。 한 번……된다 유지(劉摯, 1030~1098)는 북송 때의 학자인데, 자손들에게 행실이 먼저요 문예는 나중이라고 가르쳐 늘 경계하기를 "선비는 마땅히 기국(器局)과 식견을 급선무로 여겨야 할 것이니, 한번 문인으로 불리게 되면 볼 것이 없게 된다.[其敎子孫 先行實 後文藝 每曰 士當以噐識爲先 一號爲文人 無足觀矣]"라고 하였다. 《송사(宋史) 권340 〈유지열전(劉摯列傳)〉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조자정에게 답함 答趙子貞 辛巳 신사년(1941) 그대가 어제 전하길, 어떤 사람이 내가 연전에 막내며느리의 질병을 위해서 멀리까지 의원과 약을 구한 것을 조롱하며 "어찌 자식으로 하여금 그 처의 병을 구하게 하지 않고, 60세가 다 된 나이에 유의(儒衣)와 유관(儒冠)을 하고서 풍설을 피하지 않고 도로를 분주히 뛰어다니는가?" 하였다고 했습니다. 나는 이 사람이 일찍이 독서를 했는지 여부는 모르겠습니다. 비록 그렇지만 《논어》에도 "공자가 삼간 것은 재계와 전쟁과 질병이었다."73)고 하지 않았습니까. 질병은 사람의 생사가 달려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성인이 삼갔던 것입니다. 이제 나이어린 며느리가 괴이한 여러 증세로 죽지 않으면 폐인이 되는 큰 병에 걸렸는데, 시아비가 된 자가 아무 일도 모르는 약관의 어린 자식에게 맡겨서 병을 구하게 하고, 늙었다는 핑계를 대고 스스로 편안하게 집에 있다고 한다면, 성인도 삼가셨다는 가르침을 어겨서 유자가 되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어찌 일찍이 조금의 윤리가 있는 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유의와 유관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윤리를 밝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 사람이 윤리를 잊지 아니하고 며느리의 병을 구한 것에 대해 유의와 유관을 한 자의 허물을 삼고 있으니, 어찌 괴이하지 않겠습니까.옛날에 선사께 가르침을 받았는데, "자식인 된 자가 매번 부친이 병이 있을 때마다 스스로 마음에 두려워하면서 '내가 이번에 반드시 대고(大故)를 당할 것이다.'고 한다면, 의원과 약을 구함에 마음을 다하는 것이 절로 지극하지 않음이 없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천리(天理)와 인정(仁情)을 친절하고 정밀하게 말씀하신 것으로서 만세의 법이 될 만한 것입니다. 자식과 며느리의 아버지와 시아버지의 관계는 그 분수가 비록 낮고 가볍지만 그 윤리는 어찌 다름이 있겠습니까. 아! 하늘로부터 타고는 떳떳한 윤리는 천하가 똑같이 여기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만약 나의 처지를 당하게 한다면 나도 그 역시 전날에 사람을 조소했던 것을 잊고서 내가 했던 것처럼 할 것이라는 것을 장담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윤리가 없는 것이니, 내 알 바가 아닙니다. 나는 조소를 해명하여 스스로 선한 자리에 처하고 싶은 것이 나이라 다만 저 사람의 말이 세상에 행해져서 모두가 윤리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언급하는 것입니다. 賢弟昨傳: 有人嘲余年前爲末媳病遠求醫藥,而曰: "胡不使子救其妻病,而年將六旬儒衣儒冠,不避風雪,奔走道路爲?" 吾雖未知此人之曾讀書與否,然《論語》不云乎? "子之所愼, 齊、戰、疾。" 疾者,人之死生係焉,故聖人愼之。今於妙齡婦女祟怪證惡非死即廢之大病, 爲其舅者任諸弱冠昧事之子,使救其病,引老自逸晏然在家,則非惟違悖聖人所愼之教而不得爲儒者,豈可謂曾有一分倫理者乎? 所貴乎儒衣冠者,以其明倫理也。彼乃以不忘倫理而救婦之病,爲儒衣冠之累,豈不異哉?昔承先師之教,有曰: "爲人子者,每當親癠,自悚于心,曰'我今番必遭大故矣',則其所以盡心於醫藥者,自無所不至。" 此言說得天理人情親切精當,可以爲萬世法。子媳之於父舅,分雖卑輕,其倫理則豈有異乎? 噫! 倫理之秉彛,天下之所同。使彼若當我所遭,吾知其亦將忘前日嘲人,而行我所爲矣。如曰不然,則無倫理,非吾所知也。吾非欲鮮嘲而自處善地, 只恐彼說之行世,皆爲無倫之人, 故不得不言之。 공자가……질병이었다 《논어(論語)》 〈술이(述而)〉에 "공자께서 삼간 것은 재계와 전쟁과 질병이었다.[子之所愼, 齊戰疾]"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祭文 族子錫一 嗚呼哀哉。先生之生。天賦溫良。弱齡志學。遊有正方。蚤及蘆門。親炙效則。傳得其宗。實用其極。往在己卯。蘆翁易簀。治任而歸。家無擔石。簞瓢屢空。處之晏如。廊廬弊壞。自安其居。猗歟先生。旣自得師。志道誠篤。從事於斯。講明義理。縷析毫分。篤信聖賢。一心謹勤。志節堅確。不移不奪。胸襟灑落。無涯無遏。仁且孝友。家庭和樂。推而愛衆。隣里相托。晩築東岡。衡泌洋洋。汲我淸泉。理我高岡。養足於此。爰居爰處。樂亦在其。不求名譽。遯世無悶。藏修爲計。云胡不淑。奄忽以逝。嗚呼哀哉。族子錫一。至愚無似。供掃門屛。遽然四祀。諄諄敎導。眷眷誘掖。不倦不忘。無所不適。顧此小子。才朽學穢。兼以誠薄。未卒承誨。辜負先生。固不淺尠。貽累先生。烏可得免。嗚呼哀哉。去臘之窮。同門有期。鰲山是駕。稅于草枝。于時小子。寒疾爲祟。不可以風。不能往侍。後有庭命。作楚山行。歸裝且暮。暮抵縣城。舁病之報。中塗而聞。顚倒衣裳。我心如焚。卽入寢門。一宵擧扶。敎誨丁寧。坦若無虞。意謂先生。妄五應之。天胡不佑。而至於斯。嗚呼哀哉。啓手啓足。我幸侍傍。孝弟忠恕。聞戒則詳。今焉已矣。儀形永隔。莫承謦欬。只切痛衋。疑者誰質。過者誰規。墜緖茫茫。莫知我悲。大聲長號。淚血徹泉。玆具菲薄。敢陳厥誠。嗚呼哀哉。尙饗。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祭文 奇宇萬 東塢處士曺公。以今十五日就幽。世生奇宇萬始謂臨壙哭訣。以先子墓石經始有事。謹遣從子駿度。操文而哭于象生之筵曰。昔吾先子。倡道南服。公早有志。妙齡負笈。父視子視。積五十年。旣專且久。惟公爲然。趨向之正。造詣亦深。踐履之篤。休休其心。人技已有。人彦心好。謹勤持身。自少至老。早謝名利。以賁于身。身賁德尊。林下一人。德腴於內。身潤于外。謙牧自卑。聲色不大。克孝于親。父母安之。愉婉容色。志體養其。簞瓢屢空。處之晏如。枵腹忘飢滋味以書。書有何嗜。經經緯史。仰思俯讀。死而後已晩構一亭。終老爲計。與世抹摋。圓鑿方枘。溫故知新。迪後爲功。朋來爲樂。得之在躬。山椒水涯。微伊太寂。天乎不憖。胡年之嗇。來我無妄。十日擧扶。呻吟酬答。與古爲徒。笑語自若。公曰無歸。先師之宅。生死以依。聽孫扶舁。家僅二宿。怛化無累。屛婦而絶。公養在此。達死如生。今知免夫。啓足則明。公自浩然。後死之惻。來士孰牖。如昏失燭。而誰爲慟。若弟若兄。我哭我私。有淚如傾。自公之逝。東塢無人。豈無他人。洵公我仁。草堂夜空。几案有文。松嶺春暮。跫音莫聞。就幽日迫。始擬執紼。先墓有事。勢難違日。凄風一奠。替哭以姪。所可慰也。賢孫頭角。芳年文雅。乃祖足述。有從源源。先好之篤。公靈不昧。庶曰有後。曰不棄基。肯堂而構。幽堂一閉。音容永隔。隻雞單觴。庶幾歆格。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祭文 同門人巴山趙性宙。德陽奇宇根奇慶衍。蔚山金堯春。河東鄭鳳鉉。德陽奇宇蒙奇宰奇宇冕奇宇承。晉山姜天秀等。謹具雞絮之奠。操文而告于東塢處士曺公之靈曰。我老先生。倡道南服。公始登門。眇齡十六。徒步奔趨如趙于坡。晨夕薰炙。如呂于河。旣專且久。蒙誘弘多。得聞性道。如賜于洙。禮儀承講。如陳于朱。亟筵受獎。徒友見推。望實日隆。謙退自持。博極羣書。歸要洛閩。介潔自守望之溫仁庶乎屢空。手不書貧。芥視軒裳。婆娑邱林。有亭而顔于石之潯。鱗堆之書。雷閟之琴。我樂不告。優哉游哉。牖人有程。覿德爭來。事一服勤。至老彌篤。白首供掃。畢生逐逐鳳檟凝淚。無愧場築。一疾斯革。先師遺屋。生死依歸。惟公所獨。訃車遽至。我涕交頤。孰發我蒙。孰牖我知。凡自治任。惟公是恃。眼篦頂針。今焉已矣。悽風一酹。嗟未及時。今我來哭。匪悲伊怩。英靈不昧。庶鑑我辭。嗚呼哀哉。尙饗。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歲晏 歲晏道云遠。顧瞻我思悠。膏車駕駟馬。幾日到京周。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下沙春日與諸益共賦 竹牖淸開習日風。此時嘉興一般同。人坐羲皇千古上。物生太極一圖中。莫嫌萍水分開闊。賴有西南氣味通。遠遊吾輩無他事。但願從今各用工。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次權子厚贈別 入山能搏虎。探海可擒龍。莫道龍虎猛。馴致自從容。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送宗人豐五歸堤川【四首】 送君堤北去。風袂山陰程。逢別何忽遽。悠悠千里情。吾家天屬誼。百世如今朝。況是同門友。何嫌地相遙。愛子能穿石。愧吾空鏤氷。願須更努力。前路直如繩。離合是常事。人生非繫瓢。他日如相憶。請君歌此謠。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獨坐 夜深人獨坐。燈火自相親。晩來閑步出。明月滿空廬。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이신헌에게 답함 答李愼軒 辛未 신미년(1931) 인용하신 농옹(農翁 김창협)이 누원(樓院 박세당)을 방문한 일9)은 저도 항상 의심했던 것입니다. 이미 전현(前賢)을 업신여겼다 한다10)면 어찌 다만 '도가 같지 않다[道不同]'는 세 글자로 멀리할 뿐이겠습니까? 공자와 주자 두 부자(夫子)를 인용하여 근거로 삼은 것은 마땅히 다시 상량해 보아야 합니다. 노자와 육씨(陸氏 육상산)는 비록 허무와 선학의 수종(首宗)으로 그 깊은 학문과 높은 행위는 또한 당세 사람들의 추대와 인정을 받았지만 따질 만한 점도 있고 공경할 만한 점도 있는 것은 다만 그 견식과 언론이 처음에 잘못이 있었지만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아 끝내 수종이 되었기 때문일 뿐입니다. 만약 노자와 육씨가 요임금, 순임금, 공자, 맹자를 업신여겼다면 잘 모르겠습니다만 두 부자가 오히려 또한 예를 묻고 강론을 주도11)했겠습니까? 어른의 근래의 일은 아마도 농옹의 활달한 도량을 심복하기 어려울 듯합니다만 농옹을 사모하여 본받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所引農翁訪樓院事, 澤述所尋常蓄疑者。 旣云慢侮前賢, 則豈可但以道不同三字豁略之? 其所引孔朱二夫子爲據者, 正合更商也。 老子陸氏, 雖爲虛無禪學之首宗, 其邃學高行, 亦自爲當世推服, 而有可問可敬者。 特以其見識言論, 差於其始, 被人尊尚, 而作首宗於其終爾。 如使老子陸氏, 謾侮堯舜孔孟, 未知二夫子猶且問禮主講耶? 尊之近事, 恐難服農翁豁量, 而慕效之, 如何如何? 농옴……일 《농암집(農巖集)》 권11 〈상중구(上仲舅)〉에 "제 아우에게 보내신 편지에 제가 누원(樓院 박세당(朴世堂))에 대하여 노숙함을 존경하고 명망을 사모하여 30리를 달려가 찾아뵈어 존경하는 정성을 나타냈으며 조금도 배척하는 언사가 없다가 사원(士元 박태보(朴泰輔))의 문집이 출간된 이후로는 노여움을 품고 그 부친까지 미워하면서 이런 보복을 하였다고 하셨는데, 이는 더더욱 우습습니다……누원은 세상에 나오지 않고 물러나 곤궁한 처지를 굳게 지켰으니 이는 말세에 찾아보기 어려운 절조입니다. 저는 이 점을 진정 높이 받들었던 것이고 그분의 연세가 또 아버님과 동갑이셨으니 어찌 존경해서는 안 된단 말입니까. 다만 그분은 선현들을 업신여기고 함부로 이설(異說)을 주장하면서 인재를 못 쓰게 만들고 세상의 도를 해쳐서 그 폐단이 어디까지 이를지 알 수 없었으니, 저는 진정 그분의 학설이 매우 옳지 못하다고 여깁니다.[所與舍弟書, 謂姪於樓院, 尊其老慕其名, 委拜一舍之地, 以展尊仰之誠, 略無排斥之辭, 及士元文集出後, 有所慍怒, 而移及其父, 爲此報復, 尤極可笑.……樓院之恬退固窮, 誠末世之所難得. 姪於此固嘗推挹, 而其年又先人同甲也, 豈不可尊. 但其慢侮前賢, 敢爲異說, 壞人才害世道, 而流弊之所至, 莫知其極, 則姪誠深不韙焉]"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미 전현(前賢)을 업신여겼다 한다 김창협은 "다만 그분(박세당)은 선현들을 업신여기고 함부로 이설(異說)을 주장하면서 인재를 못 쓰게 만들고 세상의 도를 해쳐서 그 폐단이 어디까지 이를지 알 수 없었으니, 저는 진정 그분의 학설이 매우 옳지 못하다고 여깁니다.[但其慢侮前賢, 敢爲異說, 壞人才害世道, 而流弊之所至, 莫知其極, 則姪誠深不韙焉]라고 말하였다. 《농암집(農巖集)》 권11 〈상중구(上仲舅)〉 두 부자가……주도 공자가 노자에게 예를 묻고 주자가 육상산과 도에 대하여 강론한 일을 가리킨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이신헌기환에게 보냄 與李愼軒起煥 ○乙丑 을축년(1925) 저는 통문의 본래 초안이 제 손에서 나왔다는 것 때문에 저들의 원수가 되어서 첫째는 스승의 명을 속여서 묘표를 고쳤다는 모함을 당했고, 둘째로는 거상(居喪)에서 무례하다는 무함을 당했으니 한 번 두 번 당한 것은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시 세 번째로 말을 지어냈다는 모함을 당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출인(出認)과 물인(勿認) 두 가지를 헤아려야 한다는 것은 어른이 말한 것으로 갑자년 3월 13일에 모현재(慕賢齊)7)에서 강의가 끝난 이후에 권순명과 함께 잘 때에 들은 것이 아닙니까? 또한 어른이 여러 사람에게 말하여 공공연히 통문에 기록해 넣은 것이 아닙니까? 권순명이 자신들의 통문에는 본래 이런 말이 없는데 우리들에게 속았다고 하여 자정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첫째는 간사한 소인이고, 둘째는 하늘이 그 혼백을 빼앗은 것이고, 셋째는 슬퍼할 만한 따름이다." 하였다. 아! 하늘에는 거울이 있고 오장(吾丈)에게는 또 귀가 있으며, 이 사람에게는 입이 있고 저들에게는 또한 마음이 있으니, 그것이 어찌 사실이겠습니까? 저들이 어른에게 말하여 원수를 나로 삼은 것은 그들 마음이 이미 교묘한 것이고 5개월 동안에 일찍이 한 번도 질문이 없었는데 먼저 정운한 무리를 시켜 나라에 배포하게 하고 "권순명이 억울하게도 김택술에게 헤어짐을 당했다."라고 말하니 그 마음이 더욱 험악합니다. 저들에게서 나온 것이 저들에게 돌아간 꼴이 되었으니 옛말이 조금도 어긋남이 없습니다. 그들은 "제가 모함을 꾸밀 때 '마음에 내적으로 부끄러움이 없었는가?"라고 했으니, 부끄러운데도 썼다면 이것은 이른바 간악한 소인이고 부끄럼이 없이 썼다면 이것은 하늘이 그 혼을 빼앗아간 것입니다. 다만 널리 배포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멀게 하는 것은 알되 스스로 속이고 스스로 빠지는 것은 알지 못한 것은 슬픈 것일 뿐입니다.【'기위(其謂)' 이하는 도리어 권순명의 편지 가운데 말을 쓴 것이다.】 그들은 일찍이 함재 어른을 문서로 모함했으니 간사한 자들이고 자기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헤아려서 말을 지어냈다 의심하니 이것은 참으로 간사한 소인배의 모습이니 크게 괴상할 것은 없습니다. 이제 저들이 어른에게 분명히 말한 것을 감히 어른에게 묻지 않고 억지로 내가 조작한 말이라 하는 것은 절대로 인정에 가깝지 않으니 어찌 참으로 슬프지 않겠습니까? 내가 한번 두 번 받은 모함은 단지 내 일신과 관련되어 있어서 변론하든 변론하지 않던 깊이 규명할 필요가 없지만, 세 번째로 받은 모함은 나와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출인과 물인이라는 말은 크게 선사와도 관련이 돼있으니 어른이 친히 그들의 말을 들은 것에 대하여 증명하여 분별하지 않는다면 장차 어디에서 증명하여 분별하겠습니까? 이에 널리 배포해주기 바랍니다. 빨리 답장을 하여 그 증명을 확실히 하고 그 분별을 명확히 하여 저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사람들의 의혹을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澤述以通文本草之出自鄙手, 大爲彼之讐視, 一之而遭幻命改表之誣, 再之而遭居喪無禮之誣, 一遭再遭, 猶不可言, 而復三之而遭造言之誣乎? 出認勿認兩般看, 非丈所云, 甲子三月十三日, 慕賢齋講罷後, 與權純命, 同宿時所聞者乎? 而又非丈之言於衆中而公共記入通文者乎? 權乃謂渠本無此言, 而爲我所誣, 投書子貞曰: "一則奸譎小人, 二則天奪其魄, 三則可哀也已。" 鳴呼! 上天有鑑, 吾丈又有耳。 此漢有口, 彼亦有心, 其然, 豈其然乎? 彼之發言於丈, 而移讐於我者, 其心已巧, 五朔之間, 曾無一質, 而先使鄭雲翰輩, 布之國中曰: "權純命枉被金澤述之所手分。" 其心更可陰也。 出乎爾者, 反乎爾, 古語毫不爽矣。 其謂"金澤述構誣之時, 得無內愧於心乎?", 愧而書之, 是所謂奸譎小人, 無愧而書之, 是天奪其魄也。 徒知廣布之足以瞎人眼目, 而不知適所以自誣自陷, 可哀也已。【其謂以下, 反用權書中語。】彼曾是誣涵丈以文書, 作奸者, 以已己心度人心, 疑其造言, 此固奸細之情熊, 不足大怪。 而今以彼之明言於丈者, 不敢問之於丈, 而強謂此漢之造言者, 絶不近人情, 則豈不眞可哀也哉? 蓋此漢一遭再遭之誣, 只關吾之一身, 辨不辨, 不須深究, 至於三遭之誣, 非惟關於此漢, 其出認勿認之云, 有大關先師者, 不於丈之親聞彼言者證之辨之, 將於何而證辨之? 茲以仰怖幸乞。 亟賜回敎, 確其證明, 其辨有以落彼奸膽, 而鮮人眩惑也。 모현재(慕賢齊) 전라북도 정읍에 있는 사우(祠宇)이다. 임진왜란 때 전라관찰사를 지낸 이광(李洸)이 향풍을 바로잡고 학문을 권장하기 위하여 조직한 남산동백발회(南山洞白髮會)에서 유래한다. 그 뒤 이식(李植)이 종조부인 이광의 백발계를 다시 조직하여 향풍을 길러 향약을 실천하였는데, 한동안 기능이 약화되었으나, 1862년(철종 13) 옛날 백발회 유지에 모현재를 창건하고, 동계(洞契)를 다시 실시하여 학문을 권장하였다. 또한 항일투쟁을 벌여 일본의 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일생을 마친 구로회원(九老會員)이 있으며, 백발회비각과 구로회 비각이 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이신헌에게 보냄 與李愼軒 己巳 기사년(1929) 지난 20일 사이에 함재 어른이 와서 말하기를, "근래에 김처중이 김용승과 함께 산북에 있는 견암(堅菴 김태희(金泰熙))을 방문하여 견암이 이미 김용승과 옛날처럼 잘 지내기로 하고 자신이 절교를 고한 과실을 사과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나 또한 갑자기 먼저 절교한 미진함을 사과하고 저들로 하여금 묘에 가서 고하여 죄를 자복한 연후에 옛날처럼 잘 지내고자 한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견암 일이 잘못이라는 것과 함재 어른의 뜻이 구차하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장로(長老)는 후배들이 우러러 바라보아 법을 살피는 분인데 이제 의리를 보고 의리를 재단함이 이와 같으니, 세교(世敎)는 장차 무엇을 믿어야 하겠습니까? 김용승의 말에 "우리와의 절교를 주동하는 자는 김택술이고 나머지 늙고 귀 먹은 사람들은 그 바람에 취해 쓰러진 것이니 책망할 것도 못 된다." 했는데, 이 말은 이미 사실도 아니고 또한 제가 감당할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한두 분의 장로가 이미 이전의 견해를 바꾸어 나머지 사람들을 보전하기 어렵게 되었으니, 이 말이 불행히도 들어맞게 되었습니다. 또 겉으로는 김용승과 절교하고 안으로는 음성 오진영 쪽과 친한 것이 호남을 성토하는 한 자루의 이야깃거리입니다. 이제 만약 그들이 죄의 자복을 고하기를 기다리지 않고서 과실을 사과하고 우호를 청한다면 음성 쪽의 이런 성토를 어찌 피할 수 있겠습니까? 스승께서 살아계실 때에는 순전히 스승으로 섬기고 돌아가신 뒤에 사우(師友)로 대하니, 이미 배반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인가를 지시하셨다는 무함이 나오기 전에는 순전히 스승으로 섬기고 인가를 지시하셨다는 무함이 나온 뒤에 사우로 대한 것은 그 배반이 한층 더 깊어진 것입니다. 을축년(1925) 여름에 어른이 현암에서 김용승을 피해 오셔서 그가 회봉(晦峰 김봉환)과 한 말을 전해주신 것을 기억하고 있는데, 그 말에, "신해년 유서가 엄하기는 엄하나 경신년 유서의 '말하기 어려운 일은 감히 지묵 사이에 드러낼 수 없는 점이 있다.' 하신 유훈8)은 너무나 모호하고, 임술년에 홀로 앉아 계실 때 명을 받았다는 것은 의당 분명 있었다." 하였으니, 이 말은 선사를 깊이 의심한 것입니다. 말을 들어보고 사람을 살핌에 정황 눈앞에 훤히 보이는 것이 이와 같은데, 오히려 스승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먼저 스스로 과오를 사과하고 우호를 청한단 말입니까? 당일의 사실 같은 경우는 창암 어른(박민환)이 제창하여 말하기를, "김씨(김용승)와 절교하고 오씨(오진영)을 성토해야 한다." 하자, 여러 장로가 한 목소리로 동의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이보다 먼저 이미 마땅히 절교한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급기야 그들이 스승의 영령에 고하는 것을 보다가 주먹질과 발길질을 당했으며 그들에게 묘 앞에 가서 고할 것을 권하였으나 또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사우간'이라는 말을 발설하니, 다만 이전 편지의 의리만 쓸 뿐 다시 제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함께 앉아 있었다는 이유 때문에 연서의 끝에 이름이 들어갔습니다. 여러 장로들께서 이미 당시의 일을 주관하고 여러 장로들께서 먼저 당시의 의리를 무너뜨렸으니,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去念間, 涵丈來言: "近金處中同金容承, 過堅菴於山北也, 堅菴已與容承續舊好, 而謝其告絶之過。" 又言: "吾亦欲先謝遽絶之未盡, 而令彼告墓服罪, 然後續好如舊云。" 故鄙爲言堅事之誤錯涵意之苟且矣。 蓋長老者, 後輩之所仰望, 而觀法也。 今其見理裁義, 乃如此, 世敎將何恃哉? 金言"主絶我者, 金澤述也, 餘老聵者, 醉偃其風, 不足責", 此言旣非其實, 亦非鄙所敢當。 然自一二長老, 旣改前見, 而難保餘人, 則此言不幸而見中矣。 且外絶金, 而內親陰邊討湖之一柄話欛也。 今若不待其告服, 而謝過請好, 則陰邊此討, 安可逃乎? 蓋生前純師之, 死後師友之, 已不可不謂倍, 而認誣前純師之, 認誣後師友之者, 更深一層。 記昔乙丑夏, 丈自玄巖避金而來, 傳其與晦峰言者有曰: "辛亥遺書, 嚴則嚴矣。 庚申難言之訓, 已是模糊。 壬戌獨命, 宜其有之。" 此是深疑先師者。 聽言觀人, 情狀躍如如此, 而尚可謂非倍師, 而先自謝請乎? 若當日事實, 則鬯丈倡言曰: "可絶金而討吳", 諸長老同聲然之。 此漢則先是, 已投當絶之書, 及見其告靈, 而遭拳踢也, 勸其往告墓前, 又見其不聽, 而復發師友間之說, 則只當用前書之義, 而不必更提也。 但以在同座之故, 參於聯書之末矣。 自諸長老, 而旣主當日之事, 自諸長老, 而先壞當日之義, 竊所未曉也。 경신년……유훈 이 유서는 《사백록(俟百錄)》 권1 〈사무변명(師誣辨明)〉에 실려 있다. 원문의 '난언(難言)'은 의미가 다 드러나지 않아서 유서 내용의 "有難言之事 不敢形之於紙墨間者"를 참고로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이신헌에게 보냄 與李愼軒 辛未 신미년(1931) 근래에 존자께서 걸음하여 그사이 고창의 유영선을 방문했다고 들었는데 정말입니까? 그가 스스로 와서 거절을 못했거나 길에서 만나 말을 한 것은 그래도 괜찮지만 어찌하여 친히 몸을 굽혀 찾아가기까지 하신단 말입니까? 음성(陰城)의 오진영을 성토하는 일을 어른이 참으로 제창했고 "신헌이 또 일어남에 천백 명을 창도했다."는 말이 오진영의 편지가 아닙니까? 어른은 참으로 저쪽에서 뼈 속까지 호남 사람이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만약 말하기를, "뼈가 이미 단단하지 않으니 살은 장차 스스로 떨어져나갈 것이다." 한다면 저들이 이미 잘못 안 것이고 어른도 듣기 싫은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두운 마음으로 그 자취를 본다면 혹 그렇기도 할 것입니다. 당여를 먼저 다스리자는 성토문은 어른이 함께 지은 것이고, 음성 오진영의 골수 몇 사람을 제외하고 다 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어른이 평소에 한 말입니다. 유영선이 비록 최원(崔愿), 김세기(金世基), 정운한(鄭雲翰), 박제철(朴濟喆)과 같지 않고 권순명과 김용승과는 틈이 있다고 하나 그러나 그는 오진영이 스승을 무함한 것이 아니라고 여기고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큰소리로 말했으며, 오진영과 함께 스승의 원고를 고친 진주본 간행에 시종 일을 주선했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 사람이 음성 오진영의 골수 몇 사람 속에 들어가지 않는 자입니까? 삼가 어른께서 이것에 대해 자세하게 생각하지 못하신 듯합니다. 나는 유영선에게 오래된 원망도 없으며 어른에게 감히 하자를 찾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일이 대의(大義)와 관련되는데, 어른은 의리를 제창한 사람이고 유영선은 또한 저쪽의 명인이라 피차가 서로 함께할 즈음에 단지 어른 한 사람만 관계될 뿐만이 아닌 만큼 감히 경솔히 할 수 없는 점이 있다고 여겨서입니다. 比聞尊駕間訪敞柳, 信然否? 彼自來而不拒, 遇諸塗而與言, 猶可也, 何至於親屈耶? 夫討陰之役, 丈實倡之, 愼又起, 倡千百人, 非震書乎? 丈, 固彼邊所認爲骨湖者。 彼若曰: "骨已不硬, 肉將自脫", 則彼旣誤認, 丈又惡聞。 然昧心見迹, 似或然矣。 先治黨與之討文, 尊所共製也。 骨陰幾人外, 不當盡絶, 尊所雅言也。 柳雖與愿世翰喆不同, 又與權金有間, 然其謂震非誣師, 則衆中大言, 而與震終始周旋於改稿之晉印矣。 未知此人不入骨陰幾人中者耶? 竊恐丈於此不及細思也。 吾於柳非有舊怨, 於丈非敢索瑕, 特以事關大義, 而丈是倡義者, 柳亦彼邊名人, 彼此相與之際, 非但關尊一身, 而有不敢率爾者也。

상세정보
56403건입니다.
/2821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