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재 이장에게 보냄 與遠齋李丈 乙丑二月 을축년(1925) 2월 음성에서 속인 일이 있음으로부터 동문의 선비들이 편지를 보내어 책망하여 일깨우는 자가 있었습니다. 깨우쳐 줌에 듣지 않으니 계속 성토하는 자도 있었고, 망설이면서 중립하는 자도 있었고, 수수방관하며 침묵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또한 두둔하며 학대를 조장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만약에 책망하지 않고 성토도 하지 않으면서 다만 자신의 문자를 세워서 미래를 기다리기를 우리 어른이 하는 것처럼 하는 자를 사람들은 대부분 중도를 얻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의 천박한 견해로 보면 그렇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기억하건대 옛날에 선사가 유정석(柳正錫)의 일로 저에게 편지를 보내셨으니, 말하기를 "후진(後進)의 젊은 무리가 의심하고 헷갈린다는 염려가 없지 아니하니 이것은 현명한 선배들이 그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또 조숙재(趙肅齋)가 홍오곡(洪鰲谷)에게 보낸 편지에서 "유문(儒門)이 쇄락했는데도 한 번도 떨치고 일어날 뜻이 없어서 노주(老洲)선생이 경계한 것을 면하지 못했고, 숨이 끊어져 죽으려는 사람이 기력이 끝남에도 한마디 성토하는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하니, 만약에 이 일에 대해서 분노하여 격분할 줄 모른다면 칼과 톱이 몸을 찌르더라도 고통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스승을 위해 속인 일을 변론하는 것은 본래 큰 의리입니다. 군친(君親)에게 무례하게 구는 것을 보고서도 팔짱을 끼고 좌시하는 것은 주자가 엄히 배척하였으니, 제자들이 선생에 대해서 어찌 다름이 있겠습니까? 만약 조금 다르다면 부모와 임금과 스승을 섬기는 의리79)는 땅을 쓴 듯이 없어질 것입니다."【숙재의 말은 여기서 끝난다.】라고 했던 말을 인용하여, 이를 통해 거듭 힘썼는데, 만약에 성토가 중도를 지나친다면 숙재가 어찌 노주 말을 인용하여 간절히 탄식하고, 선사가 어찌 숙재의 말을 인용해서 힘썼겠습니까? 유정석의 옴과 같은 작은 질병과 등애 같은 작은 근심에도, 선사가 오히려 이와 같이 했습니다. 이제 오진영에 대한 마음 깊은 곳의 근심과 승냥이와 늑대가 길목을 막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선사가 무덤 속에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용납을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나의 성토가 중도를 얻었음을 더욱 믿고, 더욱더 우리 어른이 성토하지 않는 것이 중도를 잃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어른이 스스로 세운 문장은 맹자(孟子)가 양주(楊朱)를 물리친 변론80)과, 한유(韓愈)가 불교를 배척한 문장81)이 여력을 남겨두지 않았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본 바로 기억하건대 다만 간단하게 몇 편의 대충한 말로 첫머리에 나온 것을 깨트리면 끝내는 다시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어른은 동문의 노숙한 사람으로 중망을 받는 사람이니, 한번 말하고 한번 침묵을 함에 뭇사람의 따름과 따르지 않음이 달려 있습니다. 따르고 따르지 않는 사이에 시비가 따라서 갈리니, 우리 어른의 입론의 문장이 뒷날을 기다려서 공적인 통문에 들어가지 아니해도, 비록 자못 무사한 일을 한다고 여길지라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너무 심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단지 통문에서 빠진 것과 드러난 행실과 변론한 문장이 없음만을 봅니다. 그러므로 호남의 입장에서는 당신이 오진영을 애석히 여기고 선사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의심을 하고, 음당의 입장에서는 호남을 배반하고 음성을 향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편지를 써서 사람들에게 알려 말하기를, "원재(遠齋)가 일찍이 현암을 지지한 것에 대해서 맹세컨대 그 속에 참여하지 않았고 이왕의 일에 대해서 후회한다."하고 하며 끌어다가 현암을 성토한 여러 사람들 속에다 나열하니【권순명이 조자정에게 답한 편지도 이와 같다.】 이것은 무슨 말로 오늘날과 훗날에 스스로 해명하겠습니까? 선생님을 대신하여 답답함을 이길 길이 없습니다. 지난여름에 현암이 어찌 음성의 오진영을 분별하여 성토하지 않는 것을 받들어 질문함에 대하여, 어른이 답장하여 말하기를, "저들이 나의 성리설이 선사를 따르지 않았다는 것으로 바야흐로 죄목을 가하니 내가 어떻게 저들을 성토하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결단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리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식견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니, 절대로 겸손하지 않고 스스로 방자한 마음이 아니라면 애초에 죄가 될 것은 없습니다. 비록 마음이 편안하지 못한 점이 있다 하더라도 또한 스승을 속인 자들이 무리를 지어 감히 그 득실을 논한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오 씨가 속임을 성토한 혐의를 보복하고 싶어서 이를 들어서 이제야 죄를 추궁한다면, 보고 듣는 것이 미혹되지 아니하여 속마음을 다 드러내는 무리들이 나타날 것이니 무슨 이익이 되겠습니까? 또 군자의 마음 씀씀이는 스스로 돌이켜서 죄가 있다면 비록 수천 명이 나의 죄를 보상해 준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성토를 기다리지 않고 마땅히 스스로 성토할 것입니다. 내가 만약 죄가 없다면 비록 도끼가 앞에 있어서 몸이 살육을 당한다 할지라도 나는 부끄러움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본디 죄가 없거늘 미리 다른 사람이 나를 억압할 것을 염려해서 사람들이 스승 속이는 것을 보고도 성토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어찌 성심으로 스승을 위하는 도리겠습니까? 근래에 최원(崔愿)·김세기(金世基)·정운한(鄭雲翰) 무리들이 호남 사람들을 엮어서 속이고 있는데, 차마 그 비참함을 눈뜨고 볼 수 없으니 사람들이 다투어 말하기를 "당신이 만약에 현암의 통문에 들어가면 반드시 성리설이 스승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저들과 만날 것이라 하니 선견지명이 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오호라, 우리 어른의 마음이 어찌 정말로 이와 같겠습니까? 이를 말한 자는 우리 어른의 마음을 모르는데 한 번 돌이켜보면 이왕의 말들을 후회한다는 것이 될 것이니, 그들이 우리 어른의 현명함을 칭찬하는 것은 우리 어른의 마음을 어둡게 하기 위해서이니, 진실로 한탄스럽습니다. 그러나 그때 이래로 이런 말이 있는 것은 어찌 사람들이 다만 성토하지 않음과 편지로 책망하지 않는 것만 보고, 문자로 써진 것이 자못 몇 편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제가 이렇게 충심으로 고하는 것은 우리 어른이 같은 목소리로 성토하여 당원을 도우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 어른이 분명하지 않으면 놓지 않는다는 의리를 생각하여 널리 변론의 문장을 써서, 위로는 스승의 마음을 밝히고 다음으로는 저쪽에서 끌어대는 핑계를 끊을 수 있기를 바라서입니다. 自有陰誣事以來, 同門士有致書責喩者矣。 喩之不聽, 繼以聲討者矣, 有依違中立者矣, 袖手舍嘿者矣。 又有袒護助虐者矣。 若乃不責不討, 只立自家文字, 以後來世, 如吾丈之爲者, 人多謂之得中。 然以侍生淺見, 則殆以爲未也。 記昔先師, 以柳正錫事, 與澤述書, 有曰: "後進少輩, 不無疑眩之慮, 此則賢輩, 不可不任其責也。" 又引趙肅齊與洪鰲谷書, "儒門衰敗, 一無奮發底意, 而未免老洲先生所戒, 奄奄泉下人, 氣力而終, 未克出一口聲討, 若於此不知所以憤激, 則便是刀鋸在身, 而不知痛者也。 爲師辨誣, 自是大義理, 見無禮於君親, 而拱手坐視, 朱子之所嚴斥, 則弟子之於先生, 寧有異同乎? 如曰'小異則生三事一之義, 掃地盡矣。'"【肅齋說, 止此】之說, 以申勉之, 若其聲討之過中也, 肅齊何以引老洲語而切歎, 先師何以引肅齊語而勉之? 柳正錫癬疥之疾, 蛟蟲之憂, 先師猶如此。 今吳震泳心腹之患, 豺貇之當, 九原可作, 豈肯容之乎? 然則自信淺陋聲討之爲得中, 而益知吾丈不討之爲失中也。 且吾丈所自立之文, 未知有如孟子闢揚之辨, 韓氏斥佛之文之不遺餘力者乎? 以吾之所睹記, 只將簡單幾篇略綽說, 破初頭一出, 而終不復發矣。 蓋吾丈同門之老成重望, 一語一嘿, 衆之從違係焉。 從違之間, 是非隨分, 吾丈之立文俟後, 而不入公通, 雖自以爲行所無事, 不爲已甚。 然人但見其漏通而又無顯行辨文也。 故以湖, 則疑其惜吳而不忠師, 以陰黨, 則意其背湖而向陰也。 筆書而告諸人曰: "遠齋曾於主玄者, 誓言不參其中, 噬臍於已往", 引而并列於討玄者某某人中【權純命, 答趙子貞書, 如此】, 此則以何辭自鮮於今與後乎? 竊不勝代悶也。 昨夏, 於玄巖, 以何不辨討陰吳奉質, 則文答謂, "彼輩, 以吾性說之不遵先師 方加以罪目, 吾安以討彼輩哉?" 此有決不然者。 性說之未喩, 識見之不逮也, 絶非不遜自肆之心, 則元非所以爲罪者。 雖曰有所未安者, 亦非誣師者輩之所敢議其得失也。 若吳也欲報討誣之嫌, 擧此追罪於今日, 則視聽之, 未及眩, 而肺肝之徒呈露也, 奚益哉? 且君子之用心也, 自反而有罪, 則雖千人之褒賞我罪, 自若不待人討而當自討矣。 我若無罪則雖鈇銊之當前, 身則受戮, 而我無愧也。 若我本無罪, 而預慮人之勒我, 見人誣師而不之討, 是豈誠心爲師之道乎? 近日崔愿·金世基·鄭雲翰輩之構誣湖人, 惨不忍見, 人爭語曰: "遠齋, 若入玄通, 必遭性說違師之罪於彼輩矣, 可謂有先見之明也。" 鳴呼, 吾丈之心 豈眞若是乎哉? 爲此言者, 其不識吾丈之心, 而一轉則爲噬臍已往之說矣, 其所以贊吾丈之明者, 乃所以昧吾丈之心也, 良可歎也。 然邇來有此口者, 豈非以人之但見不聲討, 不書責, 而不見其所立文字之自有簡單幾篇者故耶? 侍生之爲此忠告, 非欲吾丈之同聲討, 助黨援。 但欲吾丈之思不明不措之義, 廣立辨文, 上以明先師之心, 次之絶彼邊援引之口也。 생삼사일(生三事一) 낳아준 세 사람, 즉 아버지와 스승과 임금을 섬기기를 똑같이 한다는 뜻으로, 《소학집주(小學集註)》 〈명륜(明倫)〉에 난공자(欒共子)가, "사람은 세 분의 은혜로 살아가기에 섬기기를 똑같이 하여야 한다. 아버지는 나를 낳아 주시고, 스승은 나를 가르쳐 주시고, 임금은 나를 먹여 주셨으니, 아버지가 아니면 태어나지 못하고 임금이 먹여 주지 않으면 자라지 못하고, 스승이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알지 못하니 낳아 주신 것과 똑같다.[民生於三, 事之如一. 父生之, 師敎之, 君食之, 非父不生, 非食不長, 非敎不知, 生之族也.]"라고 한 데에서 온 말이다. 맹자(孟子)가 양주(楊朱)를 물리친 변론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내가 이 때문에 두려워하여 선성의 도를 보호하여 양주와 묵적을 막으며 부정한 말을 추방하여 부정한 학설이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 마음에서 나와 그 일에 해를 끼치며, 일에서 나와 정사에 해를 끼치니, 성인이 다시 나오셔도 내 말을 바꾸지 않으실 것이다.〔吾爲此懼, 閑先聖之道, 距楊墨, 放淫辭, 邪說者不得作. 作於其心, 害於其事; 作於其事, 害於其政, 聖人復起, 不易吾言矣.〕"라고 하였다. 한유(韓愈)가 불교를 배척한 문장 당 헌종(唐憲宗)은 즉위한 뒤 유학을 장려하여 한 때 당나라의 중흥기를 맞았으나 태자가 19세에 요절하자 비통에 빠진 나머지 불교와 도교에 빠져갔다. 봉상(鳳翔)에 있던 법문사(法門寺)의 불사리를 장안으로 모셔다 공양하려 한 것에 당시 형부시랑(刑部侍郞)으로 있던 한유(韓愈)가 〈논불골표(論佛骨表)〉를 올려서 역대로 불교를 믿지 않았어도 임금들이 장수(長壽)한 예를 열거하고 불교의 폐단을 말한 다음 불골을 물이나 불속에 던져 버리라고 극간하였다. 이에 헌종이 대로하여 한유를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내보냈다. 《신당서(新唐書)》 권176〈한유열전(韓愈列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