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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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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37년 진종휘(陳宗輝)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丁酉式 行府使 通德郞 陳宗輝 丁酉式 河東都護府 陳宗輝 行府使[着押] 1顆(7.2×7.0), 周挾無改印, 河東 고흥 무열사 고흥 무열사 HIKS_OD_F1030-01-200038 1837년(헌종 3)에 하동도호부(河東都護府)에서 발급한 진종휘(陳宗輝)의 준호구(準戶口). 1837년(헌종 3)에 하동도호부(河東都護府)에서 발급한 통덕랑(通德郞) 진종휘(陳宗輝)의 준호구(準戶口)이다. 진종휘는 하동도호부 마전면(馬田面) 전도촌(錢島村)에 거주하였고, 나이는 64세 갑오생이며, 본관은 여양(驪陽)이다. 처(妻) 윤씨(尹氏)는 본관이 파평(坡平)이고 나이는 63세이다. 진종휘와 처의 부(父)·조(祖)·증조(曾祖)·외조(外祖) 4조의 직역과 이름을 기재하였으며, 진종휘의 경우 생부(生父) 진방석(陳邦碩)도 기재하였다. 그 밖의 가족 사항으로 솔자(率子)는 진천록(陳天錄)이다. 이외에 노비의 명단 '천구질(賤口秩)'이 기재되었다. 이 문서에는 하동부사의 인장과 주협무개인(周挾無改引)이 찍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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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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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령류

1789년 진방일(陳邦一) 고신(告身) 3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乾隆五十四年月日 陳邦一 乾隆五十四年月日 正祖 陳邦一 施命之寶(10.2×10.0) 고흥 무열사 고흥 무열사 HIKS_OD_F1030-01-200003 1789년에 정조가 진방일(陳邦一)을 선략장군(宣略將軍) 행(行) 충무위부사용(忠武衛副司勇)으로 임명한 고신(告身). 1789년(정조 13)에 정조(正祖)가 진방일(陳邦一)을 선략장군(宣略將軍) 행(行) 충무위부사용(忠武衛副司勇)으로 임명한 문서이다. 연호의 우측에 '武兼仍資'란 방서가 있다. 잉자(仍資)는 유임을 의미한다. 국왕의 시명지보(施命之寶)가 안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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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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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령류

1789년 진방일(陳邦一) 고신(告身) 4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乾隆五十四年六月日 陳邦一 乾隆五十四年六月日 正祖 陳邦一 施命之寶(10.3×9.5) 고흥 무열사 고흥 무열사 HIKS_OD_F1030-01-200003 1789년에 정조가 진방일(陳邦一)을 선략장군(宣略將軍) 행(行) 충무위부사맹(忠武衛副司猛)으로 임명한 고신(告身). 1789년(정조 13) 6월에 정조(正祖)가 진방일(陳邦一)을 선략장군(宣略將軍) 행(行) 충무위부사맹(忠武衛副司猛)으로 임명한 문서이다. 연호의 우측에 '武兼仍資'란 방서가 있다. 잉자(仍資)는 유임을 의미한다. 국왕의 시명지보(施命之寶)가 안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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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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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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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이원호에게 답함 答李元浩 乙卯 기묘년(1939) 망운시(望雲詩)를 보내주시니, 멀리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깊이 감사합니다. 이보다 앞서 진실로 형이 문단의 거벽이라는 것은 알았는데, 웅장하게 주제를 구성하고 정밀하게 다듬으며 빛나게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데에 이처럼 구비되어 있음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은 장차 위축되어 물러나 피할 겨를이 없는데 다시 뛰어난 작품으로 한발(旱魃, 가뭄의 귀신)을 꾸짖고 비를 내릴 신룡(神龍)을 감동시켜 한 번 하토(下土)에 비를 뿌려주기를 바랐으니 이것이 어찌 시 제목에 맞는 말이겠습니까? 또한 생각해볼 때, 옛날에 영웅호걸로 진나라 황제가 달을 꾸짖고108) 노양(魯陽)이 해를 휘둘러 되돌아가게 했다109)는 일들은 원래 이치를 벗어난 세속의 이야기에 속합니다. 오직 문공 한유의 정치하고 진실한 문장만이 형산의 구름을 몰아내고110) 조주의 악어를 길들였으니111) 이것은 믿을 만하지만, 이를 본받고자 한다면 적합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만두지 말라고 한다면, 하늘을 공경한 시인의 뜻을 체득하여 온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두려워하고 반성하여 하늘을 감동시켜 재앙을 내린 것을 후회하도록 하는 것이 역시 하나의 일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학인(學人)이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그 공경함을 쓰는 도리이니, 애오라지 이런 뜻을 받들어 화답합니다. 그러나 어찌 시라고 하겠습니까. 진실로 못난 사람의 평범한 말이니, 부디 비웃지 않으시겠지요? 望雲詩見惠, 深感不遐。 前此固知兄之爲詞林巨擘, 而不圖意匠之雄, 鍊工之精, 出色之燁, 若是其備也。 如弟者, 將畏縮退避之不暇, 乃復以雄篇傑作, 呵旱魃動神龍而一霑下土望之, 是豈著題語哉? 且念古之雄傑, 如秦帝之喝月ㆍ魯陽之揮日, 元屬理外野說, 惟韓文公精誠文章, 開衡山之雲, 馴潮州之鳄, 此則可信, 而欲效嚬, 則非其人焉。 無已則體詩人敬天之意, 欲與擧世之人, 恐懼修省, 以冀感天悔禍, 亦一事也。 此爲學人無時無處不用其敬之道, 聊將此意奉和, 然豈詩乎哉? 眞陋生常談, 幸不見哂否? 진나라……꾸짖고 당나라 때 시인 이하(李賀, 790~816)의 시 〈진왕음주(秦王飮酒)〉에서는 "술에 거나하게 취해 달을 꾸짖어 거꾸로 가게 하는구나, 은빛 구름 촘촘히 덮힌 궁궐은 환하기만 하구나〔酒酣喝月使倒行, 銀雲櫛櫛瑤殿明〕"라 했다. 노양(魯陽)……했다 전국 시대 초(楚)나라 노양공(魯陽公)이 한(韓)나라 군대와 한창 전투하던 중에 해가 서쪽으로 기울자, 창을 휘둘러서 태양을 90리나 뒤로 물러나게 했다는 전설이 있다. 《회남자(淮南子)》 〈남명훈(覽冥訓)〉 형산의……몰아내고 한유의 시에 "내가 찾아온 것은 마침 가을비 내리는 계절이라, 음기가 어둑하건마는 씻어낼 맑은 바람도 없네.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없이 기도를 올리니 뭔가 반응이 있는 듯도, 신명이 어찌 정직한 자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겠는가. 조금 있자 운무가 개며 드러나는 뭇 봉우리, 쳐다보니 우뚝하게 창공을 버티고 서 있구나.〔我來正逢秋雨節, 陰氣晦昧無淸風. 潛心默禱若有應, 豈非正直能感通. 須臾靜掃衆峯出, 仰見突兀撑靑空〕" 하였다. 《한창려집(韓昌黎集)》 권3 〈알형악묘수숙악사제문루(謁衡嶽廟遂宿嶽寺題門樓)〉 소식(蘇軾)의 〈조주한문공묘비(潮州韓文公廟碑)〉에 "공의 정성이 형산의 구름을 걷히게 할 수는 있었지만, 헌종의 미혹을 돌릴 수는 없었다. 〔公之精誠 能開衡山之雲, 而不能回憲宗之惑〕" 하였다. 조주의……길들였으니 당 헌종(唐憲宗) 때 이부 시랑(吏部侍郞) 한유(韓愈)가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폄척되어 나갔는데, 그곳 악계(惡溪)에 사는 악어(鰐魚)가 백성들의 가축을 마구 잡아먹어서 백성들이 몹시 고통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이에 한유가 마침내 직접 가서 〈악어문(鰐魚文)〉을 지어 악계에 던졌더니, 바로 그날 저녁에 시내에서 폭풍과 천둥벼락이 일어나고, 며칠 후에는 물이 다 말라서 악어들이 마침내 그곳을 떠나 60리 밖으로 옮겨가 더 이상 조주에는 악어의 폐해가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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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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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호에게 답함 答李元浩 辛巳 신사년(1941) 근래에 받은 정중서(鄭重書)의 시는 의리를 명확하게 보고 의론을 공평하게 가졌으니, 진실로 제가 평소에 소망한 것과 부합되는 것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또한 나를 아는 것이 깊고,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 원대하며, 나를 경계하는 것이 간절하고 나를 가르치는 것이 지극하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이것은 십 몇 년 동안 뜻을 같이 한 사람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처음 얻은 것으로, 덕을 사랑함으로써 충고하여 이끌어주는 데에 본래 법도가 있음을 비로소 알았으니, 제가 덕 있는 사람을 친애하여 부족한 점을 닦아 인을 보충하는 이익을 얻기 바라는 것이 헛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비록 못났을지라도 어찌 감격하여 부합되도록 도모할 줄 모르겠습니까? 다만 이른바 도를 믿고 덕을 넓히며 의리를 정밀히 하여 우뚝 태산 같이 높은 산이 된다고 한 것은 수준이 너무 높아서 결단코 저같이 못난 사람이 희망하여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이것은 장차 어떻게 해야 합니까?'믿는 것은 여기에 있고 저기에 있지 않다'고 하신 말씀은 실질적 이치로는 그렇다 하지만 기세에 막힌 경우에는 또한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주자가 어찌 도를 믿고 덕을 넓히고 의리를 정밀히 하여 태산 같이 높은 산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육씨(육구연) 한명이 있어서 그와 대립하여 오늘날까지도 시비가 정해지지 않은 까닭에 의심과 믿음이 반반인데 하물며 오늘날 후생(後生)에 있어서는 말해 뭐하겠습니까. 이것은 또한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마땅히 나의 재주와 지위를 상관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믿음 여부를 따지지 않은 채 의리를 밝게 분별함에 마음을 다하여 제자의 직분을 닦음으로써 굽어보고 우러름에 부끄럼이 없기를 구할 따름입니다. 잘 모르겠으나, 어떻습니까?최근에 《남당집(南塘集)》을 읽어 보니 '마음에 우열이 있다'고 논하면서 "성인의 마음은 청기가 모여 허령하고 중인의 마음은 탁기가 모여 허령하다"112)라고 말했으니, 이것이 우열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마다 똑같이 청기를 얻어서 마음이 된다면 어찌 성인과 바보의 구별이 있습니까? 또한 고려 때 신씨와 왕씨의 구분을 논하면서 "옛날부터 황제와 군주가 나라를 다스리는 기간의 길고 짧은 것은 모두 나라를 취득한 방법이 바른가 바르지 않은가로부터 비롯된다. 왕씨가 신씨에게 멸망을 당하고, 우리 조선이 신씨에게서 나라를 취득하였기 때문에 나라를 바르게 얻어서 국운이 신령스럽고 오래가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잘 모르겠으나, 이 설은 어떻습니까?제가 생각할 때, 마음에 과연 우열이 있다면 《대학》의 '명명덕(明明德)'장의 주에 "사람이 하늘에서 얻어 허령불매하고, 마음이 발한 것에 따라 마침내 밝혀 그 처음을 회복한다"113)는 설은 어떻게 조처합니까? 국조(國祚)의 장단이 과연 나라를 바르게 얻었냐의 여부와 관계가 있고, 심지어 이것을 가지고 왕씨냐 신씨냐를 변론한다면 나라를 순정(純正)하게 얻은 명나라가 오히려 나라를 바르게 얻지 못한 당나라와 송나라의 국운의 길이에 미치지 못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고견으로 꺼리지 말고 분석하여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 頃所拜承鄭重書詩, 有以見見義之明ㆍ持論之公, 固副平日之所望者。 又以見知我者深, 期我者遠, 而戒我者切, 教我者至。 是則初得於十數年來同人往復中者, 始知以德之愛忠告之導, 自有法門。 而區區所以親近有德, 望其獲攻闕輔仁之益者, 不爲虛矣, 顧雖無似, 豈不知感而欲圖副也? 但所謂信道弘德精義, 而屹然爲泰山喬嶽者, 地位甚高, 决非如我無似者之所可企及, 此將奈何?至於信仰在此, 不在彼之云, 實理則然, 而氣勢所障, 亦有不盡然者。 朱子豈不是信道弘德精義之泰山喬嶽, 乃有一陸氏者與之角立, 而至于今是非未定, 而疑信相半, 况於今後生乎? 此又無如之何矣。 只當不關吾材地, 不問人信否, 盡其心於明辨義理, 而修弟子之職, 以求俯仰無愧而已, 未知如何? 比觀《南塘集》, 有論心有優劣, 而曰"聖人之心, 清氣聚而虛靈; 衆人之心, 濁氣聚而虛靈," 此其有優劣也。 若人人同得清氣以爲心, 則何以有聖愚之別? 又論麗朝辛王之辨, 而曰"自古帝王享國長短, 皆由於得國之正不正。 王氏滅於辛氏, 而我朝取之於辛氏, 故得之正而國祚靈長。" 未知此說何如? 鄙意心果有優劣, 則《大學》明德註, 人得乎天, 虛靈不昧, 因發遂明, 以復其初之說, 何以區處? 國祚長短, 果係於得國正否, 而至以是辨其爲辛爲王, 則得之純正之明, 反不及得之不正之唐宋者何也? 幸以高見勿憚剖示焉。 성인의……허령하다 한원진은 "성인의 마음은 청기가 모여 허령하므로 항상 리를 자각하고, 중인의 마음은 탁기가 모여 허령하므로 항상 사욕을 자각한다〔聖人之心, 淸氣聚而虛靈, 故常覺於理, 衆人之心, 濁氣聚而虛靈〕"라고 말하였다. 《남당집(南塘集)》 권15 〈여참신부(與沈信夫)〉. 사람이……회복한다 《대학장구(大學章句)》경 1장에 "대학의 도는 명덕을 밝힘에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함에 있으며 지선에 그침에 있다.〔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라고 하였는데, 주희의 주에 "명덕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것으로 허령하고 어둡지 않아서 중리(衆理)를 갖추고 만사(萬事)에 응하는 것이다. 다만 기품(氣稟)에 구애되고 인욕(人慾)에 가려지면 때로 어두울 경우가 있으나, 그 본체의 밝음은 일찍이 그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가 마땅히 그 발하는 바를 인하여 마침내 밝혀서 그 처음을 회복하여야 한다.〔明德者, 人之所得乎天, 而虛靈不昧, 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 但爲氣稟所拘, 人欲所蔽, 則有時而昏, 然其本體之明, 則有未嘗息者. 故學者當因其所發而遂明之, 以復其初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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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환병형에게 답함 答尹德煥炳馨 ○乙卯 을묘년(1915) 제가 처음에 족하를 만났을 때 앙연한 표정과 따뜻한 용모를 보고 사랑과 존경을 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있다가 심중에 대해 여쭤보니 깊은 지식과 표연한 사상은 시류배에 비할바 아님을 알았습니다. 옥류동과 계화도 사이에 주선하면서 흡연한 정과 유연한 즐거움은 일찍이 오랜 친구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사정이 바뀌어 영남의 구름과 호남의 달이 가고 머무름이 무상하니, 암연한 혼백과 유연한 감회는 또한 인정이 진실로 그러한 것인데, 고의(高義)와 중도(中道)를 삼가 낮추고서 편지를 홀연히 보내주시어 협연한 은혜와 충실한 감정을 마음끼리 서로 비춰주니, 이별하여 헤어진 고통을 느낄 수 없게 합니다. 이별한지 한 달이 지났으니 우러러 생각할 때 신의 도움으로 객수의 오랜 고달픔은 물에 씻은 듯하고, 대인의 여유로움을 살펴보건대 구도의 간절함은 또한 이전과 크게 다를 것이라 생각됩니다. 도가 세상에 오랜 시간 동안 길이 보존되어 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터득하는 것이 매우 드무니 무엇 때문입니까? 옛날부터 지금까지 뜻이 있는 사람은 적고 뜻이 없는 사람은 많아서 천하의 공통된 근심이 됨으로서 함께 공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것은 진실로 말할 꺼리도 안 됩니다. 저 간혹 그 뜻이 없지는 않은데 기질이 아름답지 못하여 변화의 효과를 보지 못한 자도 있고, 혹은 뜻도 있고 재주도 있는데 질병이 점점 깊어져서 연찬(硏鑽)의 공을 들일 겨를이 없는 자도 있으며, 이 세 가지를 모두 구비하고 있는데 가난하고 궁핍하여 홀로 떨어져 살아 고루하다는 한탄을 면하지 못하는 자도 있습니다. 이 몇 가지와 연좌된 자는 고금인물에 모두 존재하였지만 초목과 함께 썩어버렸으니 진실로 한탄할 만합니다. 이제 족하는 약관의 나이에 발원하여 천리의 먼 곳에 있는 사람까지 방문을 했으니 그 뜻은 돈독하지 않다 말할 수 없습니다. 견해는 민첩하고 총명하니 곤란에 빠진 뒤에 분발할 필요도 없고, 움직일 때마다 승척에 의지할 필요도 없으니, 재주는 아름답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강장한 몸은 무거운 책임을 감당할 수 있고, 선대가 물려준 귀중한 유업은 유학을 도울 수 있으니, 가난과 질병에 대한 근심은 고려한 가치도 없습니다. 족하는 무량한 상복(上福)을 만났다고 말할 수 있으니 이와 같은 사다리를 얻고도 오히려 용맹하게 나아가 극치에 이르러 이른바 도라는 것을 터득하지 못한다면 정말로 상천(上天)이 베푼 지극한 은혜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족하는 두려워하며 생각하기 바랍니다. 제가 들었는데 군자가 도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취향이 올바른 것이라 하니, 취향이 바르면 언행과 사업은 하나도 바름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어서 끝내는 성현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취향이 바르지 않으면 비록 잘 꾸며서 말마다 이치에 가깝고 미봉하여 일마다 사람을 기쁘게 할지라도 끝내는 도학의 진체와는 멀리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영표(嶺表)는 추노(鄒魯)의 고향이라 예부터 일컬었는데101), 근래에 와서 현인의 은택과 점점 멀어지고 도술이 점점 어두워져서 '심이 곧 리이다'는 설에 한 번 오염되자 전성(全省)에 두루 퍼졌습니다. 리라는 것은 지존지수하고 순선하여 악이 없는 것이고, 심이라는 것은 신령스럽고 지각이 있어서 공적인 것도 할 수 있고 사적인 것도 할 수 있습니다.102) 만약 공적이면서도 사적인 심을 잡고서 순선하여 악이 없는 리라 부른다면, 심을 스승삼아 멋대로 쓰고 미친 듯이 멋대로 하는 것에 이르지 않는 자는 거의 드뭅니다.103) 족하의 현명함으로는 응당 취향(趣向)의 사정(邪正)에 대하여 훤히 알 것이니 제 말을 기다릴 것도 없이 어떻게 취사할 것을 알 것입니다. 풍기(風氣)에 휩싸이지 않는 것은 옛날부터 어려웠습니다. 저 하늘에 넘칠 듯한 풍조가 70개 주에 흘러넘치고 있으니, 노를 젓는 사공이 비록 잘 건너갈 수 있다 하더라도 언덕 위에 있는 사람이 본다면 어찌 근심하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족하는 또한 성존덕성(聖尊德性)의 가르침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오늘날의 급선무로 삼는다면 훗날에 맹자처럼 말을 잘 하여 이적을 물리친 공을 세우는 것은 참으로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두터이 돌봐주심에 감격하여 속마음을 쏟아내어 이에 이르렀고,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끌게 되었으니 간곡히 이해해주시고 비밀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僕之始遇足下也, 見其昂然之表溫然之容, 令人愛敬。 已而, 叩其中, 則淵然之識飄然之思, 知其非流輩比也。 得與周旋乎玉流繼華之閒, 而浹然之情逌然之樂, 曾不遜於舊要矣。 及其時移事嬗, 嶺雲湖月, 去留無常, 則黯然之魂悠然之懷, 亦人情之固然, 而枉屈高義中道, 赫蹏颺風來墜, 浹然之惠充然之感, 心心相照, 殊不覺分張之苦也。 啟旆踰月, 仰想神佑, 利稅宿憊如洗, 觀感大人之餘, 求道之切, 亦應大異前日也。 夫道之於世, 亘古長存, 而人之得之者, 甚鮮何也? 從前以來, 有志者少, 無志者多, 所以爲天下之通患, 而不可與共學者也。 如此者, 固無足道矣。 厥或有不無其志而氣質不美, 未見變化之效者, 厥或有志且才矣, 而疾病侵尋, 不暇研鑽之功者, 厥或有三者俱得, 而貧竆索居, 不免固陋之歎者。 坐此數者, 汨盡古今人物 而同腐草木, 良可歡也。 今足下發願於弱冠之餘, 訪道於千里之遠, 志不可謂不篤矣。 見解敏妙, 不待困衡趍步, 不茍動依繩尺, 才不可謂不美矣。 強壯之身足以勝重任, 青氊之業足以資遊學, 則貪病之憂, 又不足恤也。 足下所遇, 可謂無量上福, 得如此之梯, 而猶不勇進造極, 以得所謂一箇道者, 則真是靠負上天鐘愛之至恩也。 惟足下惕念焉。 竊聞君子所貴乎道者, 趍向是已, 趍向既正, 則言行事業, 無一不出於正, 而終可入聖賢之域。 趍向不正, 則雖粧撰, 得言言近理, 彌缝得事事悅人, 竟與道學真諦相去遠矣。 嶺之表, 古稱鄒魯之鄉, 而挽近以來, 賢澤漸遠, 道術浸晦, 心理一派, 殆遍全省。 盖理者至尊至粹純善而無惡者也, 心者能靈能覺, 可爲公可爲私者也。 若把或公或私之心, 呌做純善無惡之理, 則其不至於師心自用猖狂自恣者, 幾希矣。 以足下之明, 應已瞭然於趍向之邪正, 不待僕言而知所取舍矣。 不囿風氣, 從古爲難。 彼滔天風潮 震盪於七十之州, 副手梢工, 雖能利涉, 自岸上人觀之, 豈不爲慮? 請足下且將思聖尊德性之訓, 爲今日之急務, 則異時立孟氏能言距之功, 正自不難也。 感於厚眷, 傾蘊至此, 不覺觸人眼目, 幸曲諒而密秘也。 영표(嶺表)……일컫었는데 영남을 가리킨다. 영남은 원래 중국의 남쪽 지방인 대유령(大庾嶺) 등 오령(五嶺)의 남쪽에 있어서 붙인 명칭인데, 우리나라도 경상도가 조령(鳥嶺)ㆍ죽령(竹嶺)ㆍ추풍령(秋風嶺)ㆍ육십령(六十嶺) 등의 밖에 있다 하여 영남이라 칭한 것이다. 심이라는……있습니다 전우는 "심은 영각지물(靈覺之物)에 불과하므로 그것을 믿어 大本으로 삼을 수는 없고, 반드시 성명에 근원하여 도심이 되어야 비로소 한 몸의 주재가 될 수 있다.〔心者, 不過是靈覺之物, 不可信之爲大本, 故必以原於性命者, 爲道心而始得爲一身之主矣〕"고 말하였다. 《간재집(艮齋集)後篇》 권2 〈답최자경(答崔佐卿)〉. 심을……드뭅니다 전우는 "'심'이 저절로 '리'됨을 알고 임의대로 행하면, 이것이 실제의 행동으로 '기'를 주재하고 거짓으로 '주리의 학'을 이름붙인 것이다〔心自認爲理, 而任意行之, 此爲實行主氣, 而假名主理之學也〕"라고 하였다. 《간재집(艮齋集)前篇》 권3 〈답전상무(答田相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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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재문제창에게 보냄 與羅在文濟昌 ○丙寅 병인년(1926) 상주가 선조고의 장례식 때 신주를 세울 수 없었던 것은 본래 저들이 압력을 가하여 서둘러 하관을 하느라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니, 혹시라도 오늘날 세상에 예가 폐지되어 초래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제가 듣기에 나중에 신주를 만들 것을 계획했다고 하던데 아직까지 만들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예의 의미를 따져보면, 사람이 처음 죽었을 때 혼기가 흩어져버리기 때문에 죽은 사람의 옷을 가지고 혼을 부르고, 속백(束帛)104)으로 죽은 사람을 받들어 그 형체를 돌이켜 광중 안으로 돌아오게 하는데, 신혼(神魂)이 더욱 표탕하여 일정함이 없으면 속백은 오래 보존하여 길이 의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무로 만든 신주를 세워 대신하고, 우제를 지냄으로써 안정시킵니다. 만약 장례 지낼 때 나무 신주를 세우지 않은 채 혼백(魂帛)을 받든다면 삼년 동안 혼백을 묻은 뒤에는 신이 어디에 의지하겠습니까? 하늘로 올라가고 땅으로 내려가서 구름처럼 떠돌고 바람처럼 떠다닐 것입니다. 자손들이 이점까지 생각한다면 어찌 가슴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예가(禮家)들은 장사를 지낼 때에 나무로 만든 신주를 받들지 않는다면 장례를 마치지 않았다고 여깁니다. 장례에 나무로 만든 신주를 세우지 않았으면 아뢰는 글도 또한 감히 짓지 않았으니, 신과 인간 사이의 정과 예의와 관련된 중요성이 도대체 어떠합니까.일단 갑오동란 때에 집집마다 신주를 묻은 뒤로부터는 이미 신주를 다시 받들 수 없고, 또 새로 만들 생각도 하지 못하여 하관하는 날에 이르러 새로 신주를 세운 사람은 천 명에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만약 한두 명이라도 예를 중시하고 풍속을 불쌍히 여기는 선비가 큰 절차를 빠뜨릴 수 없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면 이를 듣고서 마치 나무를 엮고105) 끈을 묶는106) 일처럼 케케묵은 설을 늘어놓으니, 단지 채택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진부하고 우활하다 이릅니다. 이것이 수십 년 동안 짐승 같은 무리가 가득하고 예의가 사라져서 온갖 죄악이 하늘에 가득한 풍조 때문이니 갈대 하나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저는 한 번도 이런 것을 가지고 강하게 말하지는 않았으니, 사람들에게 한갓 비웃음만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취향이 이쪽으로 가까이 오는 친구에 대해서만 더불어 말하여 간혹 따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상주인 당신이 바야흐로 성현의 실학으로 자식들을 힘쓰게 하고 학교를 세우고 경적(經籍)을 쌓아 장차 타인의 이목을 집중시킬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어두운 시절의 한 점 빛과 같으니, 어찌 다만 이쪽을 향할 따름이겠습니까? 이것이 즐거이 그 일에 대해 고하여 그 아름다움을 빨리 이루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아마 역시 헤아려주시고, 기꺼이 들어주실 것입니다. 哀侍之不能立主於先祖考襄禮者, 固緣彼壓渴窆之未遑, 而或無爲今世禮廢之致也歟。 竊聞以追造爲料, 而尚未之及者, 何也? 盖原禮意, 人之始死, 魂氣離散, 故復之以衣, 奉之以束帛, 反其形歸窀穸, 神魂尢飄蕩無定, 而束帛不足以久存永依。 故立主生而代之, 行虞以安之。 若葬不立主, 而仍奉魂帛, 則三年埋帛之後, 神何所憑依? 上天下地, 其將雲遊風颺矣, 爲人子孫念到于此, 豈不痛傷? 故禮家以葬而不奉主者, 爲不成葬。 葬不立主, 告辭又不敢剏製, 其爲神人情禮之關重, 顧何如哉? 一自甲午東亂, 人家埋主之後, 既不能還奉, 又不思改造, 至於窀穸日, 新立者又千無一焉。 如有一二重禮悶俗之士, 爲言大節之不可闕, 則聽之爲蒼古之說, 有若構木結繩之事, 不惟不見採, 反謂之腐迂。 此盖數十年來, 蹄跡充斥, 禮義淪喪, 滔天之風潮, 非一葦之可抗也。 故弟則未嘗以此強喻, 夫夫徒取其譏。 惟於朋知, 趣味近向此邊者, 說與而或見從矣。 哀侍方勉子以聖賢實學, 齋黌之峙, 經籍之積, 將聳觀聽也, 則此黑窣地一点光, 豈但此邊之向而已哉? 此所以樂爲之告, 而亟成其美者也。 想亦見諒而樂聞也。 속백(束帛) 묶어서 한 묶음으로 만든 5필(匹)의 비단을 이른다. 옛날에 빙문(聘問)이나 궤증(饋贈)에 사용한 예물(禮物)이다. 《주례(周禮)》 〈대종백(大宗伯)〉에 "소사(少師), 소부(少傅), 소보(少保)는 피백(皮帛)을 손에 든다."라고 하였는데, 한(漢)나라 정현(鄭玄)의 주에 "피백(皮帛)란 것은 비단을 묶은 다음에 가죽으로 싼 것이다."라고 하였다. 가공언(賈公彦)의 소(疏)에 "속(束)이라는 것은 10단(端)이다. 매단(每端)의 길이가 1장(丈) 8척(尺)인데, 모두 두 끝을 합하여 말면 총 5필(匹)이 되기 때문에 속백(束帛)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나무를 엮고 나무를 엮어 새집을 만들어 산다는 뜻이다. 《한비자(韓非子)》 〈오두(五蠹)〉에 "상고 시대에는 사람들이 적고 금수는 많아서, 사람들이 금수와 충사의 피해를 감당하지 못했다. 이에 성인이 나와 나무를 엮어 둥지를 만들어서 피해를 면하게 하니, 사람들이 기뻐하며 그를 천하에 왕이 되게 하고는 유소씨라고 불렀다.〔上古之世, 人民少而禽獸衆, 人民不勝禽獸蟲蛇. 有聖人作, 構木爲巢, 以避群害, 而民悅之, 使王天下, 號曰有巢氏〕"라는 말이 나온다. 끈을 묶는 문자가 없던 태고 시대에 노끈으로 매듭을 맺어 부호를 삼아서 행했던 소박한 정치 형태를 말한다. 신농씨(神農氏)가 이 결승의 정사를 행하다가, 복희씨(伏羲氏) 때에 이르러 팔괘를 긋고 나무에 새긴 최초의 문자를 만들어서 서계(書契)의 정사를 행했다는 기록이 《주역(周易)》 〈계사전 하(繫辭傳下)〉와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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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호에게 답함 答李元浩 丙戊 병술년(1946) 물으신 '연제(練祭) 후에 부판(負版), 벽령(辟領), 최(哀)를 제거하지 않는 것'은 간옹(전우)뿐만이 아니라 전옹 임원회부터 이미 그러했습니다. 전옹은 "소상(小祥)에 부판, 벽령, 최를 제거한다는 것은 《상례비요》와 《사례편람》이 《가례》를 따른 것이다. 내가 일찍이 《가례》를 따랐다가 최근에 다시 생각해보니 《의례》를 따라 제거하지 않는 것이 더욱 좋겠다."라고 말했고, 간옹은 "주자가 말년에 《서의(書儀)》에서 대공 이하의 부판, 벽령, 최를 제거한 것은 속례(俗禮)로서 옳지 않다고 하셨으니【군신복의에 보임】 《가례》의 연복의 제도는 마땅히 아직 확정되지 않은 논의라고 해야 한다.【여기까지이다】"라고 말했습니다.벽령은 바로 '적(適)'이라는 것입니다. 《의례》 〈상복〉편 기문의 가공언(賈公彦) 소(疏)에서는 "'적'이라고 명명한 것은 애척(哀戚)의 감정이 오로지 돌아가신 부모 때문에 기인하여 나머지 일을 아울러 생각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114)라고 말하였습니다. 《의절(儀節)》에서는 "'최(衰)'라는 것은 꺾는다[摧]는 뜻이니, 효자가 슬퍼서 마음이 꺾이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부판에 대해서는 미처 고증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역시 효자가 부친을 여읜 것을 죄를 지은 것이라고 여긴 듯합니다. 이런 것으로 논해보면, 만약 연제를 지내고 이 세 가지 물건을 제거한다면, 이것은 오로지 부모의 상에 기인했다는 뜻, 슬퍼하며 죄를 지었다는 뜻이 처음에는 있었지만, 끝날 쯤엔 없는 것이 되니, 삼년을 마치도록 제거하지 않는 것이 분명합니다. 대공복 이하의 상복을 입는 대상은 부모의 상을 당한 효자에게 비교할 것이 아니니, 《서의》와 《가례》에서 '세 물건인 부판ㆍ벽령ㆍ최를 갖추지 않는다'는 내용이 예의에 맞는 것 같은데, 주자가 말년에 무엇 때문에 속례라 비난했습니까? 당초에 《의례》의 오복(五服)에서는 모두 세 물건을 갖추고 있는데, 무엇 때문입니까? 기년복(朞年服)을 입는 대상은 또한 친상(親喪)에 비할 바 아니니, 《서의》와 《가례》에서 대공으로부터 그 이하는 사용하지 않고, 기년복의 경우에 세 물건을 둔 것은 또한 무엇 때문입니까? 성인이 예를 만든 뜻은 세 물건을 오로지 효자를 위해서만 설치한 것이 아니니, 위의 '오로지 부모에게 기인했다'는 등의 설과 같은 경우는 다만 이것으로 오복의 슬픈 정을 나타내는 것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마땅히 친상의 연제 이후에 제거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기년복, 대공복, 소공복, 시마복에서도 모두 마땅히 써야 한다는 것이 또한 분명합니다. 어떠합니까? 자세히 고증하여 답장해 주시기 바랍니다.편지의 말미에 운운한 것은 저의 뜻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저들[일본]을 축출한 것은 대부분 열강의 힘이긴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 말한다면 헤이그에서의 뜨거운 피와 하얼빈에서의 우레 같은 폭탄은 일본을 축출하는 뿌리이고, 워싱턴에서의 외교와 중경에서의 임시정부는 일본을 축출하는 줄기이며, 상해에서의 열 명의 장교를 오살시킨 것과 일본 동경에서 부거(副車)를 잘못 맞힌 것은 일본을 축출하는 줄기이고, 갑신년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한 것은 일본을 축출한 열매이니, 어찌 일본을 축출하는 것이 우리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들이 이미 쫓겨났다면 나라는 진실로 저절로 존재하게 되거늘 또한 어찌 나라를 세우는 것이 오히려 늦었다고 말하겠습니까? 다만 오히려 국정을 주도하는 사람이 늦었을 뿐이니, 우리들이 자중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진실로 맞고도 맞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은 비록 일찍이 정치에 종사했다 하더라도 오히려 마땅히 이를 그만두고 돌아와야 하니, 이제 어찌 본디 포부도 없는 사람이 문밖에 나서서 일이 아직 안정되기 전인 정당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所詢練後不去負版ㆍ辟領ㆍ衰, 非惟艮翁, 自全翁已然。 全翁曰: "小祥去負版ㆍ辟領ㆍ哀衰, 備要ㆍ便覽從家禮也, 愚嘗從家禮, 近更思之, 從儀禮不去尢好。" 艮翁曰: "朱子晚年以書儀大功以下之去負版ㆍ辟領ㆍ衰, 爲俗禮而非是者【見君臣服議】, 則家禮練服之制, 當爲未定論矣【止此】。" 盖辟領即適也。〈喪服〉記疏曰: "適者哀戚之情, 適緣於父母, 不兼念餘事。"《儀節》曰: "衰者摧也, 以孝子有哀摧之志。" 負版未及考。 然亦似以孝子喪親爲負罪也。 以此論之, 若練而去此三物, 是適緣父母哀摧負罪之意, 有始無終也。 其終三年不去, 明矣。 大功以下, 非孝子之比, 則《書儀》《家禮》之不備三物者, 似得禮意, 而朱子晚年何以俗禮非之? 當初《儀禮》之五服, 皆備三物者, 何也? 朞服亦非親喪之比, 而《書儀》《家禮》之只從大功以下不用, 朞服則存之, 又何也? 抑聖人制禮之意, 三物非專爲孝子設, 如上適緣父母等說, 但以此表五服之哀情歟. 然則今當非惟不去於親喪練後, 於朞功緦皆當用之, 又明矣, 如何如何? 幸細考而囬示焉。書末云云, 鄙意不盡然。 彼之逐去, 大都是列強之力, 以在我者言之, 海牙之熱血, 哈爾之轟雷, 逐日之植根也, 華蝢之外交, 重慶之臨政, 逐日之抽幹也, 上海之鏖斃十將, 日京之誤中副車, 逐日之逹枝也, 甲申之正式宣戰布告, 逐日之結實也, 豈可槩謂逐不自我? 彼既逐去, 則國固自在矣, 又何云建國猶遲? 但猶遲主國政之人爾, 吾流自重之云, 極是極是。 如弟者, 雖使曾已從政, 猶當致事而歸, 今豈可以素無抱負之人, 出門外, 參事未定前政黨中耶? 勿慮勿慮。 '적'이라고……의미이다 가공언(賈公彦)의 소(疏) '云適者 以哀戚之情指適緣於父母不兼念餘事'에 대하여 《구사당선생속집(九思堂先生續集)》 권3 〈최부판벽령설(衰負版辟領說)〉의 송희준 번역은 "적(適)은 슬픈 마음을 지적(指適)함이니, 부모로 인해 다른 일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適者, 指適, 緣於父母, 不念餘事〕" 하였다. 《상변통고(常變通攷)》 권9 〈상복제도총론(喪服制度總論)〉의 벽령(辟領) 부분의 한국고전의례연구회 번역은 "적(適)은 슬퍼하는 마음이 부모에게로 향하여 감으로 인하여 다른 일을 겸하여 생각하지 못함이다.〔適者, 以哀戚之情, 指適緣於父母, 不兼念餘事〕" 하였고, 대공이하무부판벽령최(大功以下無負版辟領衰) 부분의 번역은 "적은 부모에게 향하여 가는 마음 때문에 다른 일을 생각하지 않음이다.〔適者, 指適緣於父母, 不念餘事〕"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DB> 그런데 송(宋)나라 섭숭의(聶崇義)가 편찬한 《삼례도집주(三禮圖集注)》 권15의 '左右辟領, 謂之適者, 以哀戚之情, 當有指適, 緣於父母, 不兼念餘事, 以示四處皆有悲痛'이라는 구절을 참고하면, '지적(指適)'은 '귀결', '쏠림', '지향'의 뜻인 듯하다. 그러면 가공언의 소는 "적(適)이라고 명명한 것은 슬퍼하는 마음이 한곳으로 귀결되기 되기 때문이니, 부모로 인하여 다른 일을 아울러 생각하지 못한다."라고 이해해야 할 듯하다. 김택술은 '적(適)'을 '오로지', '단지'라고 이해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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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선덕의에게 답함 答洪文善德義 ○戊辰 무진년(1928) 저는 거칠고 졸렬하여 사람들이 함께 하려 하지 않는데 좌하가 잘못 들음으로 인하여 자식을 보내 학문을 묻게 하고, 이어서 사랑하는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칭찬이 지나쳐서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함께 생기니 감사함을 느낄 겨를도 없습니다. 제가 일찍이 들으니, 그 아버지가 땔나무를 쪼개면 그 자식은 메고 온다115)고 했고, 훌륭하게 활을 만드는 집안의 자식은 반드시 키를 만드는 것을 배운다116) 했습니다. 좌하께서 땔나무를 쪼개고 활을 만든 것을 좌하의 자식이 본보기로 삼는 근본으로 사용하기를 대단히 바라니, 이것이 이른바 부친이 창업함에 자식이 계승한다117)는 것인데, 누추한 제가 어찌 이런 일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인물이 묘연한 시대에 세도의 책임이 훌륭한 후배에게 있지 않다면 누구에게 있겠습니까? 저는 훌륭한 당신의 자식에게서 바라는 바가 깊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편지를 주고받는 초기이지만 이런 진실된 속마음을 터놓고 말씀을 드려서 의로운 가르침을 돕는 하나의 단서가 되기를 바라니, 혹시라도 간곡히 헤아려 꾸짖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僕粗朴迂拙, 人所不齒, 乃被座下誤聽, 遣子問學, 繼賜寵牘, 稱詡過當, 慙懼并作, 不遑知感。 竊嘗聞其父析薪, 其子負荷, 良弓之子, 必學爲箕。 深願座下之析薪爲弓, 用資令胤柯則之本, 是則所謂父作子述, 淺陋者何與之有? 當此人物眇然之時, 世道之責, 不於後來之秀而誰哉? 鄙於令胤望之也深。 故雖於往復之初, 進此心肝之語, 冀助義教之一端, 或可曲諒不讁否? 그……온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昭公) 7년의 "아비가 장작을 쪼개 놓았는데, 아들이 등에 지지 못한다.〔其父析薪, 其子弗克負荷〕"라는 말을 원용한 것이다. 훌륭하게……배운다 세업(世業)을 계승한다는 뜻이다.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훌륭한 대장장이의 아들은 반드시 갖옷 만드는 것을 배우고, 훌륭한 활 만드는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키 만드는 것을 배운다.〔良冶之子, 必學爲裘; 良弓之子, 必學爲箕."〕하였다. 부친이……계승한다 공자(孔子)가 문왕(文王)에 대해 "근심이 없었던 분은 문왕뿐일 것이다. 왕계를 아버지로 삼고 무왕을 아들로 삼았으니, 아버지가 시작하자 아들이 계승하였다.〔無憂者, 其惟文王乎. 以王季爲父, 以武王爲子, 父作之, 子述之〕"라고 하였다. 《중용장구(中庸章句)》 1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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戲次月皐松沙次柳河東八十韻 防微戒石火。懷大匿瑜瑕。守黙宜鞱晦。侈言謾詑誇。興來占水石。閒處說桑麻。才遜愚千慮。學疏書百家。詩多訓雅頌。禮或講賓嘉。悔作蓬間鷃。虛消日裏鴉。學須要切近。辭貴遠詖邪。詩句和徵士。琴心許伯牙。盍觀經旨奧。勿聽異言譁。鋤菜迎春雨。步溪帶夕赮。瓢空顔氏樂。門索董生嗟。術詭呪符水。道虛炊飯沙。春深茅屋煖。煙細竹扉斜。蕙帳伴棲鶴。葦園分獵麚。悔尤君子恥。離索故人遐。邦運道希泰。邊虞梁罷溠。天花誕佛雨。地籟活莊洼。隴鵝能爭鳳。竈狸反笑驊。耕歸徐子墅。飮共曼鄕崖。粗解飾籩豆。未聞衽鎧鍜。詩空添五恨。年已邁三加。豈得忘蹄免。無勞畵足蛇。精工看琢玉。稱德宜笄珈。質勝還嫌野。禮過難免奢。靑山宅復近。黃卷眼長遮。長往煙霞癖。窮居峽路賖。何曾辨菽麥。但願多稌。學語恐咻楚。和歌嗤帶巴。丹頭養氣浩。白髮惜年華。洞僻稀迎客。春寒晩見花。喜爲風月主。恨乏酒錢貰。活計緯陶絇。拙工補愈苴。考槃隨澗陸。放曠遠朝衙。龍臥豊城劍。官遲句漏沙。分三開舊逕。播百八新畬。利欲羞鑽李。芳名愛寫芭。山輝藏蘊玉。民朴飮樽汚。圓鑿難投柄。崖田不用杷。俗殊童子鬌。禮變婦人髽。跬步分南北。毫釐有正衺。知音和白雪。招隱詠蒼葭。修漯刮塵垢。寬平去岸涯。推心分檃括。齊物正牙叉。蘭社宜觴詠。菊潭愈癖瘕。讀書還鹵莽。析理奈糊塗。學願烏頭服。癢思仙爪爬。斑毛羞管見。布鼓恥雷撾。慮事從閑地。謹身防少。家貧原豈病。世溷屈猶姱。信道終無惑。知言元不差。聲多梁楚得。交厚蘭廉。學種門前柳。耽看園裏葩。峯頭環湊合。谷口張谽谺。深愧續貂狗。何論執鼠犘。溪巖路屈曲。嶺樹影枒杈。夢飽忘飢餒。病寒思火煆。詩談傳谷鳥。鼓吹聽林蛙。思入庭交草。心隨路賣瓜。風淸王子竹。香掬濂翁蕸。綴句曾嫌拙。團辭豈務夸。文疏揚海帆。意闊窮河槎。囊貯懷英朮。冠危蘇子椰。比肩憐駏蟨。掎角笑蠻蝸。毫末成圍木。籬邊戒近笆。探驪寧取介。相馬誤看蝦。工細詩瘳瘧。醫難酒病皻。公輸還拙鵲。原氏反迷豭。夫孰辨眞贗。始吾聞擊鷨。井中投子轄。花外過誰車。性辣同薑桂。味殊反梨樝。魚鮭兼野蔌。龍鳳煮溪茶。胸乏道人鏡。心排釋氏裟。隨陰來看竹。待雨去鋤茄。抽卷迎殘燭。扶筇入晩霞。存心加省察。窒慾斥紛拏。世事看翻局。人情咨薄紗。羡魚當結網。伺免獃投罝。道諭耽飛鳥。士歸式怒蟆。書兒傳美句。樵客送淸笳。奇語山中樂。何須結彯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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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庵奉別李丈【鳳燮】 匹驢遠客過江沙。暮入觀庵路正斜。明朝復向瀛州去。鷲嶺煙霞不足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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送李慶運【啓徵】歸耽羅。 逢君晩契亦云奇。臨別無言況復詩。殷勤持贈平安字。鰲島鯨波到幾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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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자정에게 답함 答趙子貞 戊寅 무인년(1938) 지난번 위재(危齋)가 지은 귀보(貴譜)의 발문(跋文)에 미진한 점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빌려서 뒤미처 윤색을 하려고 한다고 논했는데, 적이 불가하다고 생각됩니다. 정자(程子)〈역전서(易傳序)〉의 '연(沿)' 자는 문리로 따져보면 비록 분명히 '소(遡)' 자의 잘못이라고 말해도 되었지만 주자(朱子)는 고쳐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남헌(南軒)에게 보낸 편지에 자세하면서도 엄하게 말씀하였습니다.61) 다만 이것이 오늘의 일을 단정할 수 있습니다.금석문자는 그 소중함이 자별합니다. 다른 사람이나 대등한 자 이하의 생존한 자에게 글을 받아도 오히려 감히 사사로이 고쳐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위재장은 선배이고 또한 이미 작고를 했으니, 어찌 후인이 감히 경솔하게 손을 댈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글이 의리를 이루지 못하고 내용도 말이 되지 않는다면 당일에 반드시 고치지 않을 이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당시에 그러함을 알지 못하고 오늘에야 비로소 알았다고 한다면 차라리 그 글을 사용하지 않고 본가로 돌려보내고 그 연유를 말해주면 될 것입니다.또한 지난번 그대가 외운 위재가 쓴 발문의 내용을 들었더니, 또한 절로 의리를 이루었고 내용도 인가의 금석문이 되기에 해롭지 않았습니다. 지금 그대가 완전히 좋지는 않다고 말하는 것은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이런 습속은 길러서는 안 되며 이런 풍속은 매우 두려워 할 만합니다. 습속이 자라나고 기풍이 행해져서 한층 진일보하게 되면 멋대로 선사의 글을 고친 음성의 오진영 같은 자가 또한 어찌 없겠습니까? 그러므로 주자는 남헌에게 보낸 편지는 진실로 후인들이 경솔하고 멋대로 행동하는 것을 열어주는 폐단을 우려한 것이었습니다. 昨論危齋所作貴譜跋語有未盡者,故欲借人追加修潤者,竊以爲不可也。程子《易傳序》"沿"字, 以文理求之,雖謂明是"遡"字之誤可矣, 而朱子謂不當改, 與書南軒不啻詳且嚴矣。只此可以斷今日事也。金石文字所重自別, 受文於人於敵以下之生存者,猶不敢私改,況於危丈先進而亦已作故之地,何許後人敢爾下手耶? 若文不成義理不成說辭,則當日必無不改之理; 若云當時不知其然,而今始知之,則寧不用其文,還送本家而語其故可也。且昨聞貴所誦危跋語云云,則亦自成義理, 說辭不害爲人家金石文。今之爲貴言未盡善者,吾不知其何義也。此習不可長,此風甚可畏。習之所長,風之所行,其進一層,而擅改師文如陰震者,亦豈無之? 故朱子與南軒書固以啟後人輕肆之獘爲憂矣。 정자……말씀하였습니다 〈역전서(易傳序)〉의 '흐름을 따라 올라가서 근원을 찾는다.[沿流而求源]'라는 구절의 '沿' 자에 대해 남헌(南軒) 장식(張栻)은 '연(沿)' 자를 '소(泝)' 자로 고치는 것이 그다지 문제될 게 없다고 했는데, 주자는 '연(沿)' 자를 그대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여 "연(沿) 자는 뜻이 자못 관서(寬舒)하고 소(泝) 자는 기상이 박급(迫急)하다"고 하였다. 《朱子大全(주자대전)》 권30 〈여장흠부론정집개자(與張欽夫論程集改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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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자정에게 답함 答趙子貞 戊寅 무인년(1938) 어떤 사람이 시(詩)는 반드시 괴롭게 생각한 연후에 아름다운 시구를 얻을 수 있다고 하고, 황모(黃某)의 옷을 깨물며 스스로 뼈를 녹이는 일을 인용하여 말을 하는 자가 있었는데 매우 우스운 일입니다. 무릇 시란 뜻을 말하는 것으로 밖에서 구하여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뜻이 바르면 시 또한 바르고, 뜻이 사특하면 시 또한 사특합니다. 옛날의 삼백편(三百篇) 《시경》은 훌륭합니다. 후세에는 비록 시법(詩法)을 진술하였지만 사특함과 바름을 폐하고 논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만 이미 드러난 볼 만한 것을 가지고 말해보겠습니다. 두공부(杜工部 두보(杜甫))의 충의를 숭상하는 뜻이 있어야만 가을빛과 높음을 다투는 시가 있을 수 있으며, 이청련(李靑蓮 이백(李白))의 활달한 뜻이 있어야만 문을 열면 산을 보게 되는 시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뜻이 없는데 시가 있는 자를 나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억지로 힘써 찾으며 괴롭게 옷을 깨물고 뼈를 녹임에 이르러야 아름다운 시구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가? 또 시는 음악과 가까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칙(內則)》에는 음악을 배우고 시를 읊조리는 것으로 한 때의 일로 삼았고,62) 공자는 시에서 흥기하고 음악에서 완성하는 것으로 시작과 끝을 삼았습니다.63) 음악은 화락을 위주로 합니다. 그렇다면 시 또한 그 심기가 평화로워 곧바로 자기의 뜻을 표현한 뒤에야 혼연히 저절로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시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아무개의 말처럼 반드시 괴롭게 생각하여 옷이 물어뜯기고 뼈가 녹듯이 해야만 한다면 이는 성인이 시교(詩教)를 베푼 것이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을 수고롭게 하여 생명을 해치게 하는 것이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그 말은 이치가 없는 것으로 우스울 뿐만 아니라 이치를 해치는 것으로 배척해야 하는 것입니다. 某人之謂詩必苦思然後乃得佳句,而引黃某齧衣自家銷骨事以爲說者,甚可笑也。夫詩言志,而非外求而得者也, 故志正則詩亦正,志邪則詩亦邪。古之三百篇尚矣,後世雖陳詩法, 廢邪正不論。然但以已著之可見者言之,有杜工部忠義之志然後有秋色爭高之詩,有李青蓮豁達之志然後有開門見山之句,無其志而有其詩者,吾未之見也。豈強探力索之苦至於齧衣銷骨而可得佳句乎哉? 且詩近於樂者, 故《內則》以學樂誦詩爲一時事, 孔子以興詩成樂爲始終事。樂是以和爲主者,則詩亦可知其心平氣和,直寫已志而後, 可以得渾然天成之佳句也審矣。如必苦思衣齧骨銷而得之,若某人之言,則是聖人之設詩教也,乃所以使人勞心而戕生也,豈有是理哉? 其言也,非直無理之可笑,亦爲害理之可斥者也。 내칙(內則)에는……삼았고 《예기(禮記)》 〈내칙(內則)〉에 "13세가 되면 음악을 배우고 시가를 읊으며 작무를 배운다.[十有三年, 學樂誦詩舞勺]"라고 하였다. 공자는……삼았습니다 《논어(論語)》 〈태백(泰伯)〉에 "시에서 흥기하고, 예에서 세우고, 음악에서 완성한다.[興於詩, 立於禮, 成於樂]"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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答金在璿【基衡◎庚寅】 山扃無人。潦倒病枕。贊姪之來。兼獲惠音。何慰如之。況審比來省餘節宣衛重。旋切仰祝。令胤令始上學。可謂晩矣。然惟在敎誨之如何。何患不成。昔邵堯夫年四十五。始得生男伯溫。卒爲名儒。今兄較少三二年矣。居家滋味。從此津津。仰賀仰賀。毅病與衰謀。日甚一日。殆難支吾。自顧自憐。古人云不學老便衰。眞不我欺也。來月枉喩。預切欣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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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보에게 보냄 與文聖甫 丁丑 정축년(1925) 〈순전(舜典)〉에 사람의 범죄를 논함에 생재(眚灾)와 호종(怙終)의 구분이 있었습니다.123) 생재란 알지 못하고 과오로 범한 것이고, 호종(怙終)은 알고도 일부러 범한 것입니다. 저의 생각에는 재판관이 사람의 죄를 판단하여 내보내거나 집어넣을 때에 법에 근거하지 않고 죄를 판단하는 경우에도 생재와 호종을 구분의 있습니다. 유죄임을 알지 못하고 잘못 내보내거나 혹은 무죄임을 알지 못하고 잘못 집어넣는 것은 생재입니다. 반면에 유죄임을 알고서도 고의로 내보내거나 혹 무죄임을 알고서 고의로 집어넣는 것은 호종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간행을 인가한 뜻으로 선사를 무함하는 것이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깊어지고 있는데, 알지 못하고 잘못 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좌하가 이미 선사는 분명히 인의(認意)가 없었다고 말했으니, 또한 그가 선사를 무함한 것을 깊이 죄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변론하여 성토하지 않고, 또한 극히 존중하였으니, 좌하는 알지 못하고 잘못 내보낸 것이라고 해야겠습니까, 아니면 알고서 고의로 내보낸 것이라고 해야겠습니까? 스스로 알고 있는 밝은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舜典》論人之犯罪,有眚灾、怙終之分。眚灾者, 不知而誤犯; 怙終者,知之而故犯也。僕謂士師之出入人罪不以法而以至於罪者,亦有眚灾、怙終之分。不知其有罪而誤出,或不知其無罪而誤入者,眚灾也; 知其有罪而故出,或知其無罪而故入者,怙終也。今人之誣師以認意,愈往愈深,則非不知而誤犯者。座下旣謂先師分明無認意,則亦深罪其誣師矣。然而不辨討之,又極尊之,未知謂座下不知而誤出可乎? 知之而故犯可乎? 願聞自知之明鑑。 순전(舜典)에……있었습니다 《서경(書經)》 〈순전(舜典)〉에 "생재(과오와 불행으로 지은 죄)란 풀어 놓아주고, 호종(믿고 끝까지 재범하는 자)이란 죽이는 형벌을 하였다.[眚灾肆赦, 怙終賊刑]"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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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순인구에게 답함 答李敬循仁矩 ○丙寅 병인년(1926) 선사가 훈계하여 인가받는 것을 금한 것은 가장 중요한 의리이니, 문인이 선사의 훈계를 지키는 것은 또한 원고를 발간하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모르겠습니다만 과연 원고를 발간하는 것과 유훈을 지키는 것을 병행하여 서로 어긋나지 않는 방도를 얻었습니까? 아니면 형세에 구속되고 공을 이루고자 해서 훈계를 지키지 못할 바가 있습니까? 저는 단지 훈계를 지키다가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만을 알고 있을 뿐인데, 오히려 또한 이러쿵저러쿵 하는 말도 혐의로 삼지 않으니 집사의 일을 알 수가 있었으며, 전에 '내가 차라리 알지 못할지언정 인가한 원고를 읽지 않겠다.'는 말을 들었으니 집사의 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어찌 감히 지나치게 염려하겠습니까?다만 호대(浩大)한 일은 진실로 은밀히 도모하기 어렵고, 끝나가는 일은 또한 갑자기 중지하기 어려우니, 끝내 선사를 훈계를 저버리는 것은 일의 기미와 정세로 볼 때 반드시 없으리라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제가 집사를 위하여 삼가 염려하고 감히 의론하는 말석에 참여하여 들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先師之垂訓禁認,義之最重者,門人之守師訓,又有重於刊稿者。未知果得刊稿守訓并行不悖之道乎? 抑勢之所拘,功之求成,訓有所不得守乎? 鄙但知守訓至死靡悔者,而猶且不嫌議及,則可以知執事之事矣; 前承"吾寧無識,不讀認稿"之語,則可以知執事之心矣。吾何敢過慮? 但浩大之事,誠難密圖,垂畢之役,又難遽輟,終不免犯訓,則事機情勢之未保必無者。此區區所以爲執事奉慮而不敢參聽於議末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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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익에게 답함 答吳士益 乙亥 을해년(1935) 제가 천하가 중화세계인데 유자가 능히 중화인이 될 수 없다면 천하가 즉시 오랑캐가 된다는 말로 세도(世道)에 해가 된다고 여긴 것은 감히 가혹하다 할 수 없으니 그 말의 실수를 취한 것에 불과하여 마치 죄를 판단하는 사람이 그 말을 듣고 그 죄를 살피는 것과 같습니다. 형은 말의 병통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식견의 병통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여겼는데, 형은 시험 삼아 생각을 해 보십시오. 말이라는 것은 마음의 소리이니, 말이 이미 병통이 있다면 심술(心術)의 병통이라 말한다 해도 또한 불가하지는 않습니다. 하물며 식견의 병통이라고 말할 수 없겠습니까. 형은 이른바 유자는 중화되지 않은 이전에 얻은 호칭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 중화되지 않은 이후에 이 칭호를 얻어야 할 자를 아울러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니, 그렇지 않다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중화되지 않았을 뿐 유자는 아니니 가볍고 천하게 될 여지가 너무 심합니다. 얼마나 소중하기에 위 문장에서 오랑캐가 될 수 없는 유자와 똑같이 천하에 중요한 관건이 되게 하여 천하의 중화인을 다 모아서 모두 오랑캐라고 하는 것입니까. 오랑캐가 될 수 없는 자를 중화인이 될 수 없는 자와 똑같이 유자라고 이를 수 있다면, 이것은 또한 중화인도 될 수 있고 오랑캐도 될 수 있어서 유자의 본 모습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중화인이 곧 오랑캐인이라는 것이 위 문장의 '천하가 오히려 중화이다'라는 것에 해가 될 뿐만이 아니니, 또한 어찌 병통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송나라 말기에 허형(許衡)이라는 유자의 명성이 얼마나 성대했습니까. 만약에 허형으로 하여금 빠르게는 북송의 전성시기에 태어나게 하고 늦게는 명나라 황제가 나라를 건국한 때 태어나게 하여 홀로 오랑캐 제도를 행하게 했다면, 그가 평일에 유자의 이름이 있었던 까닭으로 송나라와 명나라 천하를 즉시 오랑캐 세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중화와 오랑캐를 섞어서 유자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또한 형이 대신하여 해명한 음성 오진영의 설을 가지고 말을 해보면, 중화인도 되고 오랑캐도 된다는 것은 단지 유자에게 달려있고 천하에 달려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유자가 유자가 될 수 있는 까닭은 그가 중화인이기 때문이니 다만 중화인이 되는 것은 유자에 달려있다고 말한다면 충분할 것입니다. 어찌 반드시 다시 오랑캐가 되는 것이 유자의 손에 달려있고, 어찌 반드시 다시 천하에 달려있지 않다고 말합니까.【천하에는 중화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유자가 중망(重望)을 받는 것은 다만 중화인이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오랑캐 사람이 되는 것에도 있으니, 오랑캐가 되었는데도 귀중하게 여길 수 있다면 이것은 중화인도 되고 오랑캐도 되고 유자도 될 수 있다는 설이 아닙니까. 어찌 다만 제가 중화도 될 수 있고 오랑캐도 될 수 있고 유자도 될 수 있다는 것으로 사람들을 몸을 두지 못할 곳으로 내몰아낸다고 합니까. 끝내 음성 오진영의 설을 어찌할 수 없는 것이 본래 이와 같기 때문에 형도 또한 스스로 어쩔 수 없이 이와 같이 하였고 이를 통하여 스스로 반성한다면 저의 의론이 가혹하지 않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또한 형은 세도에 해롭다는 네 글자를 듣고서 매우 놀랐으나 어찌 생각이 이런 점에는 미치지 않았습니까. 양묵(楊墨)의 폐해가 부모도 없고 군주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주자는 "그 본심을 베푸는게 어찌 사악함이 있겠는가. 다만 약간의 실수가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중화와 오랑캐를 뒤섞어서 유자의 설을 하는 것이 어찌 다만 약간의 실수가 있었다는 것과 비교할 따름 있겠습니까. 이것이 만약에 평상시의 편지와 글자에서 나왔다고 한다면 오히려 일시의 말의 병통으로 돌려서 반드시 깊이 논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문장은 입언하여 전해진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그 일은 절개를 우뚝 세웠고 그 작업은 심력을 다하여 한 것입니다. 그 무리들이 추존하여 식견이 선사보다 뛰어나다고 하니 그 말의 실수가 이와 같으니 그 해로움이 어찌 다함이 있겠습니까. 이 점이 어쩔 수 없이 깊이 논해야 하는 까닭입니다. 다만 형 또한 이미 자세히 보고 의심스럽게 여기고 말의 병통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끝내는 훤하게 깨달을 날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날을 기다릴 뿐입니다. 弟之以"天下華而儒不能華,則天下即夷"之語,爲世道之害者,非敢爲苛刻,不過就言論失,如斷獄者之聽其辭,而勘其罪也。兄乃以爲可謂語病,而不可謂識見之病,兄試思之。言者心聲也,言既有病,則謂之心術之病,亦無不可。而況不可謂識見之病乎? 兄謂其所謂儒指不華前,所得稱號而言,非謂并指不華後,當得是稱也者,非曰不然。然則不華已矣,非儒已矣,其可輕賊甚矣。有何所重,而與上文能不夷之儒,同一關重於天下,而蓋盡天下之華而并夷之乎? 能不夷者,旣可與不能華者,同謂之儒,則是亦可華可夷者,而非復儒者本面矣。然則,非但此華即夷之爲有害,上文天下猶華,亦安得而無病乎? 夫許衡儒名,何等盛也? 如使衡早生北宋全盛之世,晚生明帝建國之際,而獨行胡制,則以其平日儒名之故,謂宋明天下即夷可乎? 是非混華夷爲儒而何? 且以兄所代解陰吳說者言之,有曰 '爲華爲夷,只在乎儒,不在乎天下',夫儒之所以爲儒者,以其爲華也,但曰'爲華在乎儒',足矣。何必復曰'爲夷在乎儒',何必復曰'不在乎天下也' 【天下之中有華在】 然則,儒之負有重望,不只在於爲華,而亦在乎爲夷,爲夷而可且重之,則是非可華可夷可儒者之說乎? 何獨以弟之斥以可華可夷可儒者,謂歸人於不容身之地也? 蓋以終無柰陰說本自如此,故兄亦自不得不如此,因此而自反,則可以知弟論之非苛刻也。且兄以'世道之害'四字,聞甚瞿然,何不思之至此? 夫楊墨之害,至於無父無君,然朱子謂: '設其本心,豈有邪哉? 特微有差失.' 今此混華夷爲儒之說,豈但微有差失之比而已? 此若出於尋常書詞之間,則猶可歸之一時語病,而不必深論也。今也則不然。其文則立言之傳久也。其事則立節之卓爾也,其作則專致之心力也。其從之推尊,則見識優於先師者也,而其言之差失乃如此,其害庸有極乎? 此所以不得不深論也。但兄亦既謂細看可疑,又謂之語病,則終有了悟之日矣。惟是之俟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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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讀書諸兒 香炷淨窓照夜長。何似古人借壁光。勤把聖經要上口。無端閒說起雌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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謹次蘆沙先生回甲除夕韻 章甫爭趨洙泗風。壽星耀極道無窮。舊懷感處逢新日。來學開時繼往功。終慕劬勞體髮變。更將衰晩淵氷同。微誠十載門屛下。恐是光陰焂忽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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