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극경에게 보냄 與吳極卿 乙卯 을묘년(1915) 지난달 초에 선장(仙庄)을 떠나서 모양(牟陽)과 오산(鰲山)을 지나 돌아오는데, 시절은 이미 가뭄이 오래되어 농가는 실의에 차있었고, 백리 길에 날씨가 뜨겁고 더위를 먹어 땀을 줄줄 흘리면서 고생고생 힘들게 집에 도착했습니다. 그 후에 가뭄이 더욱 심해지고 더위가 더욱 혹독해졌고 40여 일이 지나자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되려고 했습니다. 농사가 희망이 없으니 사람들이 어찌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겠습니까? 삼가 안부를 여쭈니, 이즈음 계절의 변화에 잘 대응하여 몸을 조리함에 손상이 없지는 않습니까? 바람 치는 창가에서 책을 읽고 도리를 투철히 깨달을 때 쇄락(灑落)하게 관통하는 기상63)이 또한 가슴속의 맑고 시원한 기운을 절로 생겨나게 하기에 충분합니까? 제 스스로 생각할 때, 앞으로 죽어 골짜기에 나뒹구는 것은 비록 풍년 든 해일지라도 면하기 어려울 것인데, 하물며 이처럼 크게 흉년 든 해에는 더 면하지 못할 것임을 스스로 이미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또 옛사람이 "배고픈 귀신이 되었는데, 또 다시 근심스런 귀신이 되면, 이 한 몸이 두 가지 일을 감당하기 어렵다."64)고 말했으니, 이 말은 일리가 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일찍이 사생(死生)을 근심으로 삼지 않고, 오직 죽기 전에 미처 보지 못한 책을 더 볼 수 없고 미처 듣지 못한 의리를 더 들을 수 없는 것을 근심으로 삼을 따름입니다. 제가 일찍이 듣건대, 우리나라 학문은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 진실로 실마리를 연 현인들이 있었는데, 도학의 강론에 대해 말하면, 퇴계 이황선생에 이르러서 비로소 구비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유집이 호남에서 발간된 것은 많지 않아서 전서를 받들어 읽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지만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가는 깊이 알고 있었습니다. 최근에 형이 은혜롭게도 빌려준 것을 읽어보고 그 규모를 알게 되었는데, 심법(心法)은 한결같이 주자를 모방했지만, 크기와 엄격함은 미치지 못했으니 이것이 이른바 "전체를 갖추었지만 미미하다."65)는 것입니다. 그가 평생에 주장한 것은 겸(謙)이라는 한 글자에 있으니, 이것은 바로 《서경》 〈열명(說命)〉의 "뜻을 겸손히 하여 어느 때고 배우면 수양이 이루어진다"66)는 것이고, 《주역》의 "몸을 낮추어 자신의 덕을 기른다"67)는 것입니다. 누구도 뛰어넘을 수 없는 존광(尊光)의 덕을 이루었으니, 그의 학문은 바르고 도는 높아서 사문의 종장이 된 것은 마땅한 것입니다. 어찌하여 오늘날의 선비들은 조금의 문예나 약간의 견문이 있으면 즉시 스스로를 대단히 여기고서 다른 사람을 경시하여 자신만이 홀로 존귀하다고 여긴단 말입니까? 이와 같은 무리들이 어찌 일찍이 꿈속에서라도 학문의 경지에 도달했겠습니까. 일생을 잘못 보내는 것이 애달플 뿐입니다. 제가 가만히 형의 포부와 성취를 살펴보건대, 누구만 못하다고 하여 스스로 불능하다고 생각하고서 아랫사람에게 부지런히 묻습니까? 오늘날 퇴옹(퇴계)을 잘 배운 사람으로는 다시 누가 있겠습니까? 형의 입장에서 저를 보게 되면 경솔함과 미천함이 드러난다고 여길 것이니, 역시 제가 논했던 오늘날 선비들에 대해서도 근접하지 못하면서도 자각하는가 못하는가 할 것입니다. 부디 단점이 드러나는 대로 그때마다 고쳐서 함께 선(善)에 이를 것이니, 이것이 제가 바라는 바입니다.오늘날 속인들은 대부분 삼취(三娶) 이후에는 합독(合櫝)68)해서는 안 되며, 첩으로 간주한다고 말합니다. 매번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번번이 근거가 없는 설이라고 배척했습니다. 이제 퇴계가 유희범에게 답한 편지를 보니, 후비(後妣)도 별도로 신주 독을 만들고 별도로 탁자를 만든다는 문장이 있고 본인도 친히 행했습니다.69) 더구나 재취에 대해서 그렇게 하고 삼취 이후의 경우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퇴계의 뜻은 비록 단지 형세 상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한다는 것일 뿐 예의 상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속인들이 이것을 가지고 선현이 그렇게 하였다고 핑계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선고(先考)ㆍ선비(先妣)ㆍ후비(後妣) 세 신위에 대해 신주 독과 탁자를 같이 하는 데에 어떤 심한 불편한 형세가 있었기에 퇴계가 이렇게 했던 것입니까?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예기》 〈제통(祭統)〉에서 "제사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부부가 친히 해야 하니, 이것은 내외의 관(官)을 갖추기 위해서이다."라고 했습니다. 만약 남편이 승중(承重)70)했는데 처가 따라서 상복을 입지 않는다면, 이는 상(喪)에 주부가 없는 것입니다. 상(喪)에 주부가 없으면, 그 우제, 졸곡, 부제, 연제, 상제, 담제에 대하여 〈제통〉에서 말한 '부부가 친히 한다'는 의미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퇴계는 정도가에게 답한 편지에서 "예에서 증손이 증조의 승중이 되면 그 조모나 어머니는 승중복(承重服)을 입고 처는 승중복을 입지 못한다."71)라고 말했는데 이렇게 말한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예에 근거한 것은 무슨 책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까? 만약 고찰하여 터득한 점이 있다면, 알려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정도가는 단지 '옛사람은 음식에 임했을 때 반드시 고수레를 했는데, 지금도 고수레를 하는 것이 어떠합니까?72)'라고만 물었을 뿐, 주객이 함께 밥 먹을 때에 고수레를 하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퇴계의 대답73)은 주객이 함께 밥 먹을 때, 어떤 경우에는 고수레를 하고 어떤 경우에는 고수레를 하지 않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과 고수레를 권하는 것이 괴상하다는 취급을 당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집에서 홀로 밥 먹을 때와 내가 좌중의 가장 연장자가 되었을 때 고수레를 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말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옛 것에 얽매여 세속을 놀라게 한다는 의미가 많기 때문에 혼자 밥 먹을 때나 가장 연장자일 때에 고수레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어찌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대답의 처음에 이미 '이는 또한 통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고 말했으니, 주객이 함께 밥 먹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고수레를 허용한 것입니까? 잘 모르겠으나, 평소의 견해로는 일찍이 어떻게 보셨습니까? 사람은 음식이 없으면 살 수 없으니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옛사람들은 먹을 때에 반드시 선대에 처음으로 농사를 지어 음식을 만든 사람에게 고수레를 하여 그 공에 보답하였습니다. 죽어서 귀신이 되어 제사를 흠향하는 자의 경우는 스스로 제사를 지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위해 대신 제사를 지내니, 하물며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고수레를 하지 않는 것을 용인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사람들은 선조에게 제사지낼 때, 오히려 조상신을 대신하여 술로 제사 지낼 줄 알면서 스스로 밥 먹을 때 스스로 고수레를 하는 것은 거행하지 않으니 매우 이상합니다. 일찍이 우리 선사를 보니 그렇지 않으셨으니, 매번 밥 먹을 때마다 반드시 고수레를 하셨습니다. 요컨대 이것이 마땅히 법이 되어야 하니, 잘 모르겠으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정도가는 남명(조식)이 포은(정몽주)의 출처가 의심스럽다고 논한 설을 인용하고, 다시 자신의 견해로써 논설하였습니다. 그가 말한 "포은의 한 번 죽음이 매우 가소롭다."74)라고 한 것 외에는 말한 내용이 옳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퇴계의 대답75)에 그런 일이 없었다고는 말하지 않고, 다만 "세상 사람들이 의론을 좋아하고 공격하기를 좋아하여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도와서 이루어주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으니 그대도 이런 병폐가 있구나."라고 하면서 말을 꺾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현자를 위하여 과실을 숨긴다76)는 도리의 측면에서는 제대로 된 것이지만, 만약 사안에 대하여 도리를 밝혀 질문한 사람의 마음을 설복시켰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또 정자께서 말씀하신 "사람은 마땅히 과실이 있는 속에서 과실이 없는 것을 찾아야 하니, 과실이 없는 속에서 과실이 있는 것을 찾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은 본디 다른 사람의 과실을 찾아내기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말한 것이지, 어떤 사람에게 비록 과실이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곡진하게 보호함으로써 과실이 없는 것처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퇴계선생이 굳이 이 정자의 말을 인용하여 정도가에게 답한 것은 아마 정도가가 평소에 약간 다른 사람의 과실 찾기를 좋아한 뜻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의론을 좋아하고 공격하기를 좋아한다는 말과 병폐가 있다는 말을 참고하면 퇴계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의 공과(功過)에 대해서는 가릴 수 없고, 시비에 대해서는 한쪽만 중시할 수 없으니, 이것은 것은 본래 정리(定理)입니다. 어찌 정충대절(精忠大節)이라는 네 글자로 개괄하고 일필로 단정하고는 막아서 입을 열지 못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다른 사람을 관찰하는 일일지라도 먼저 대절(大節)을 살펴봤다면, 그 나머지는 논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만약 한결같이 이와 같을 뿐이라면 학자가 다른 사람의 현부(賢否)와 득실을 논하여 격물치지의 공부를 돕는 것에 대하여 어찌 소홀히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까닭으로 계곡 장유가 "포은은 죽음으로써 나라에 몸을 바칠 수 있으셨던 분이다. 그런데 우왕(禑王)과 창왕(昌王)이 폐위되고 죽음을 당할 때에는 절의를 제대로 세운 일이 있지 않았고, 심지어는 아홉 공신의 반열에 끼이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은 의아하게 생각된다."77) 하였는데, 문충공(정몽주)이 문묘에 종사되면서부터 후학들이 감히 다시 그 잘잘못을 논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잘 모르겠으나 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논의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마 여기에 대하여 견해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일찍이 포은선생의 일에 대하여 마음을 가라앉히고 눈을 밝게 뜨고서 반복적으로 따져서 다음과 같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왕과 창왕이 폐위 당했을 때 절개를 세울 수 없었던 것은 허물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뜻은 우왕이 폐위될지라도 창왕은 우왕의 아들이고, 창왕이 비록 죽을지라도 요태자(공양왕)가 또한 종실로서 선왕의 혈손이니 진실로 군주가 될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힘이 부족하여 이러한 변고에 이미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없었다면 우선 마땅히 은인자중하고 변통하여 왕씨의 사직을 도모하여 보존하는 후공(後功)을 세웠어야 합니다. 그렇게 했다면 거의 맹자가 논한 '사직이 군주보다 중요하다78)'는 뜻을 해치지 않고, 성인이신 공자가 말한 '그 죽음을 아껴서 기다린다79)'는 뜻을 실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후공에 참여하려다 절망한 날에 한 번 죽음으로써 뜨겁게 나라를 위해 순국하고, 마침내 '정충대절'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잘 모르겠으나, 포은의 신령이 빙그레 웃으며 '네가 내 마음을 알았다'고 하겠습니까? 이른바 과실이 있는 중에서 과실이 없는 것을 찾는다는 것은 저의 말과 같아야 폐해가 없게 될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하여 형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비록 그러할지라도 최고의 도와 최고의 의리를 논한다면, 우왕을 폐할 때 절개를 세운 공이 있은 뒤에야 진실로 만세의 교훈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왕신민(汪信民)은 "사람이 풀뿌리를 캐먹을 수 있다면 모든 일을 할 수 있다."80)고 말했는데, 진실로 이 말과 같다면, 풀뿌리를 잘 씹어 먹는 사람 중에 저만한 사람이 없는데, 나이가 60이 되도록 한 가지 일도 할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아마 풀뿌리를 씹어 먹는 것을 입으로만 하고, 마음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음으로 하는 것과 입으로 하는 것에 차이가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재주로는 부귀를 성취할 수 있는데 의리를 생각하여 곤궁해도 편안한 것은 마음으로 풀뿌리를 씹어 먹은 경우이고, 마음으로는 부귀를 사모하는데 재주가 졸렬하여 빈한하게 먹고 사는 사람은 입으로 풀뿌리를 씹어 먹는 경우입니다. 만약 이런 구분을 하지 않는다면 만천하에 궁핍한 백성 가운데 누군들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겠으며, 또한 어찌 부귀하게 되어 왕신민이 일컬은 바가 되기에 충분하겠습니까. 이로써 스스로 반성해보면 저의 평생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저의 졸렬한 재주로 일찍 이미 풍파를 따라서 의식(衣食)을 좇았으나 어째서 당시의 뭇사람만 못해서 끝내 성취하지 못했습니까. 그러니 역시 입으로만 풀뿌리를 씹어 먹은 자라고 전적으로 말할 수도 없으니, 결국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일이 하나도 없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가소로울 따름입니다. 다만 지금 만난 형편이 풀뿌리를 씹어 먹고 싶지 않아도 역시 그리할 수 없으니, 우선 마음으로 씹어 먹든 입으로 씹어 먹든 막론하고 씹어 먹은 이후에 그만둘 것입니다. 저번에 부탁한 순무 종자는 보내주실 것이라 생각하는데 어떠합니까? 去月初離自仙庄, 歷牟陽鰲山而歸, 時已久旱, 田家望望, 沿途百里, 天氣蟲蟲, 吸暑涔涔, 間關抵家。 厥後旱愈甚暑愈酷, 經四十餘日, 夏將盡秋將至矣。 農既無望, 人豈堪居? 敬問此際有以對時, 節宣不瑕有損? 風牕翫書, 透道悟理, 灑落貫通之氣象, 亦足以自生胷膈之清涼者否? 弟則自念前頭溝壑, 雖在康年, 亦所難免, 矧茲大無, 既自知甚明矣。 且古人云"既爲餓鬼, 又爲愁鬼, 是一身而難堪兩役", 此言有理。 是以曾不以死生爲憂, 惟以未死前, 不能益見所未見之書, 益聞所未聞之義爲憂耳。 竊嘗聞我東學問, 在麗末韓初, 固有發端之賢, 至於講道論學, 則至退溪李先生而始備。 而以遺集之行於湖南者無多, 恨未得奉讀全書, 而深知其規模之所在矣。 比因吾兄惠借而讀之, 有以見其規模, 心法一倣朱子, 而但大與嚴則不及, 是所謂具體而微也。 至其生平所主, 則在謙之一字, 此卽說命"遜志時敏, 厥修來來"者, 而大易之"卑以自牧"。 致尊光不可踰之德也, 宜其學正道尊, 而爲斯文宗師也。 胡爲乎今之士, 有些小文藝ㆍ若干聞見, 便自大輕人, 惟我獨尊也乎? 如此輩人, 何嘗夢到學問境界? 可哀其枉過一生也。 竊覵兄之抱負樹立, 誰之不如而自以為不能, 而勤於下問? 今世之善學退翁者, 更復有誰? 以兄觀弟, 其輕淺發露, 亦無有近於弟所論今士者, 而不自覺也否。 幸隨見隨攻, 偕至於善, 是所望焉。今俗人多言三娶以後, 不當合櫝而視以副室。 每聞之, 輒斥以無稽之說矣。 今見退翁答柳希范書, 有後妣別櫝別卓之文, 而乃所親行者。 又況於再娶而非三娶以後者亦然, 則退翁之意, 雖只以勢當如此, 非以禮當如此, 然今俗之人, 安得不以此而籍口於先賢乎? 盖三位同櫝同卓, 有何甚不便之勢, 而退翁乃爾也? 竊所未曉。《禮記》曰"祭也者, 必夫婦親之," 所以備外內之官也。" 若夫承重而妻不從服, 則是喪無主婦矣。 喪無主婦, 則其虞卒祔練祥禫之祭, 烏在其夫婦親之乎? 然而退翁答鄭道可書曰"禮, 曾孫爲曾祖承重, 而其祖母或母而服重服, 妻不得承重," 未知所云, 據禮者指何書而言耶? 如有考得者, 示及爲幸。道可但問'古人臨食必祭, 今亦祭之, 何如?' 未嘗問主客同飯時祭不祭。 退翁之答, 主客同飯, 一祭一否之不可, 及見勸祭之取怪。 不言在家獨飯, 及我爲座中最長時可祭與否, 豈不當泥古駭俗之意居多, 故并不欲祭於獨飯ㆍ最長時耶? 抑上既云此亦有難通處, 則主客同飯以外, 皆許其祭耶? 未知雅見嘗如何看? 夫人無食, 無以爲生, 重莫重焉。 故古人臨食, 必祭先代始爲稼穡飲食之人, 以報其功。 至於死而爲神而享祭者, 不能自祭。 故爲之代祭, 況生人而可容不祭乎? 今之人於先祖享祀, 尚能代神而祭之酒, 至於自飯而自祭, 則不行, 甚可異也。 曾見鄙先師則不然, 每飯必祭之。 要之, 此當爲法, 未知如何?道可引南冥論圃隱出處可疑之說, 而更以自意有所論說。 其云'圃隱一死, 殊可笑'以外, 不可不謂言則是也。' 故退翁之答不言無是事, 而但言世人好議論喜攻發, 不樂成人美, 君亦有此病, 折之。 此於爲賢者諱之道, 則得之, 若謂之即事明理, 以服問者之心, 則未也。 且程子所云"人當於有過中求無過, 不當於無過中求有過"。 本爲好求人過者言, 非謂人雖有過, 必當曲護以求其無過也。 其必引此以答道可者, 豈以道可平日有些好求人過之意故歟。 更以好議喜攻ㆍ有病之語參之, 可知退翁之意。 不然, 人之功過不能相掩, 是非不可偏重, 自是定理, 烏得槩以精忠大節四字, 一筆句斷, 而禁不得開口乎? 雖曰觀人, 先觀大節, 則其餘不論, 可也。 然若一向如此而已, 則其於學者, 論人賢否得失以資格致之功, 豈不疎乎? 是故, 谿谷張公有言曰"圃隱能以死殉國, 而禑昌之廢戮, 不能有所樹立, 至列於九功臣, 此可疑也。" 自文忠從祀文廟, 後學不敢復議其得失, 未知千載尚論, 以爲如何也? 盖亦有見乎此也。 區區嘗於圃隱之事, 平著心明著眼, 反覆商量而得之。 當禑昌之廢, 而不能有所樹立者, 不可謂無過。 然乃其意, 則以爲禑雖廢, 昌是禑之子, 昌雖死, 瑤亦宗室, 先王血孫, 固自爲君也。 力之不足, 既不能有爲於此變, 則且當隱忍遷就, 以立圖存王氏社稷之後功, 庶不害孟子所論社稷爲重於君之義, 而以得孔聖所言愛其死以有待之意焉。 及其并與後功, 而絕望之日, 乃以一死烈烈焉殉國, 而終得爲貞忠大節者也。 未知圃隱之靈, 莞爾以爲爾得我心乎否? 而所謂有過中求無過者, 如吾之說然後, 乃爲無害矣。 高見於此, 以爲如何? 雖然, 論以極等之道ㆍ十分之義, 則廢禑之時, 有所樹立然後, 真可爲訓於萬世也。 又以爲如何?汪信民有言, "人能咬得菜根, 則百事可做。" 信斯言也, 善咬菜根者, 宜莫如弟, 而年垂六十, 不能做一事者, 何也? 意其咬菜之徒以口而不以心也。 夫其有以心以口之異者, 何也? 才足以致富貴 而思義固竆者, 咬菜以心也。 心慕富貴而才拙食貧者, 咬菜以口也。 若不就此區分, 則滿天下竆民 孰有不做得事者, 亦何足爲貴而爲汪氏所稱哉? 以此自反, 則吾之生平, 又無足恠。 然雖以吾之拙才, 早已隨風逐波, 奔走乎衣食, 何遽不若時輩, 而終不爲? 亦不可全謂咬菜之徒以口者。 而究無一做如前所云者, 竟何也? 可笑也已。 第今所遭之勢, 雖欲不咬菜, 而亦不可得, 則姑不問以心以口咬, 則咬之而後已。 向所託菁根種子, 另念惠寄如何? 쇄락(灑落)하게 관통하는 기상 《논어(論語)》 〈선진(先進)〉의 "늦봄에 봄옷이 다 만들어지면 어른 대여섯 명 동자 예닐곱 명과 함께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단(舞雩壇)에서 바람 쐬고 한 곡조 읊으면서 돌아오겠습니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는 증점(曾點)의 말에서 나온 말이다. 배고픈……어렵다 어떤 이가 "올해 그대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이 분명한데, 어찌 걱정하는 기색이 없는가?"라고 하니, 공이 웃으며 "나도 내가 죽으리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고, 죽으면 분명 아귀가 될 것이다. 만약 우수에 잠기게 된다면 분명 수귀가 될 것이다. 하나의 귀신이 두 역할을 담당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근심하지 않는 것이다."라 했다. 《소암집(疏菴集)》 〈소암선생언행록(疏菴先生言行錄)〉 전체를……미미하다 공손추는 "옛날에 제가 들으니, 자하·자유·자장은 모두 성인의 일부분만 가지고 있었고, 염우·민자·안연은 전체를 갖추고 있었지만 미약하다고 하였습니다. 감히 선생님께서 자체하시는 바를 묻겠습니다.〔昔者竊聞之, 子夏·子游·子張皆有聖人之一體, 冉牛·閔子·顔淵則具體而微, 敢問所安〕"라 했다.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 뜻을……이루어진다 《서경(書經)》 〈열명 하(說命下)〉에서 "배울 때는 뜻을 겸손하게 해야 한다. 힘써서 항상 민첩하게 하면 그 수양이 이루어지리니, 이를 마음 깊이 새겨 두면 도가 그 몸에 쌓일 것이다.〔惟學 遜志 務時敏 厥修乃來 允懷于玆 道積于厥躬〕"라고 하였다. 몸을 낮추어 자신의 덕을 기른다 《주역(周易)》 〈겸괘(謙卦)〉 초육(初六) 상(象)에 "겸손한 군자는 몸을 낮추어 자신의 덕을 기른다.〔謙謙君子 卑以自牧也〕"라는 말이 나온다. 합독(合櫝) 부부의 신주를 하나의 독[신주를 담아 두는 나무로 만든 상자] 안에 넣는 의식이다. 퇴계가……행했습니다 퇴계는 "사당의 신주는 두 비에 대해 하나의 감실에 함께 입사하는데, 선비에 대해서는 고위(考位)와 함께 하나의 독에 모시고, 후비는 별도의 독에 모시며 다른 상에 봉안한다. 신주를 꺼내 제사를 지낼 때에 이르면 선비에 대해서는 고위와 함께 하나의 탁자에 모시고 후비에 대해서는 별도의 다른 탁자에 모시되 자리를 나란히 하여 앉힌다.〔祠堂神主, 則兩妣同入一龕, 而先妣共一櫝, 後妣別櫝安別牀. 及出主行祭時, 先妣共一卓, 後妣別一卓, 聯席而坐〕"라 했다. 《퇴계집(退溪集)》 권37 〈답류희범(答柳希范)〉 승중(承重) 상제(喪祭)의 중함을 이어받는다는 뜻으로, 적장손(嫡長孫)이 부친과 조부를 대신해서 선조의 상제(喪祭)를 담당하는 것을 말하는데, 부친 대신 조부모의 상제를 담당할 경우에는 승중손(承重孫)이라 하고, 부친과 조부 대신 증조부모의 상제를 담당할 경우에는 승중증손(承重曾孫)이라고 한다. 《의례(儀禮)》 〈상복(喪服)〉 예에서……못한다 퇴계는 "예법에 따르면 증손이 증조를 위하여 승중이 되고 조모 혹은 모친이 생존해 계시다면 그의 조모 혹은 모친은 승중복을 착용하고 처는 승중복을 착용하지 못한다고 했다.〔禮, 曾孫爲曾祖承重, 而祖母或母在, 則其祖母或母服重服, 妻不得承重云〕"라 했다. 《퇴계선생문집(退溪集)》 권39 〈답정도가문목(答鄭道可問目)〉 정도가……어떠합니까 《퇴계집(退溪集)》 권39 〈답정도가문목(答鄭道可問目)〉에 보인다. 퇴계의 대답 퇴계는 "이 또한 통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내가 객이 되어 홀로 고수레를 지내는데 주인이 고수레를 하지 않고, 또는 내가 주인이 되어 홀로 고수레를 지내는데 객이 고수레를 하지 않는 것은 둘 모두 옳지 않다. 만약 이것이 불가하다면 객이 되어서는 도처에서 주인에게 권하여 함께 고수레를 하고, 주인이 되어서는 매번 빈객이 권유하여 함께 고수레를 하게 되는데, 어찌 세속에서 큰 괴이함을 사지 않겠는가?〔此亦有難通處. 我爲客而獨祭, 主人不祭; 或我爲主而獨祭, 客不祭, 二者無一可者也. 若爲是不可, 爲客而到處勸主人同祭, 爲主而每見客勸同祭, 豈不大取怪於俗耶?〕"라 했다. 《퇴계집(退溪集)》 권39 〈답정도가문목(答鄭道可問目)〉 포은의……가소롭다 "남명 조선생이 일찍이 정포은의 출처를 의심하였는데, 제 생각에도 정포은의 한번 죽음은 자못 웃을 만합니다. 공민왕 조정에서 30년이나 대신 노릇을 하였으니 도로써 섬기다가 불가하면 그만두어야 한다는 도리로 볼 때 이미 부끄러울 만하고, 또 신우(辛禑) 부자를 섬겼는데 신씨를 왕씨의 소생이라고 여긴 것이라면 후일 내쫓을 때 자신 또한 참여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10년을 왕으로 섬기다가 하루아침에 내쫓아 죽이니, 이것이 가하겠습니까. 만일 우왕(禑王)이 왕씨 소생이 아니라면, 진시황(秦始皇)이 즉위하여 진나라 영씨가 이미 망한 격인데 그 뒤에도 여전히 아무 탈 없이 또 따라서 그 녹을 먹었으니, 이와 같이 하고서 후일에 왕씨를 위해 죽는다는 것은 정말 이해하지 못할 일입니다.〔南冥曹先生嘗以鄭圃隱出處爲疑. 鄙意鄭圃隱一死, 頗可笑. 爲恭愍朝大臣三十年, 於不可則止之道, 已爲可愧. 又事辛禑父子, 謂以辛爲王出歟, 則他日放出, 己亦預焉. 何也? 十年服事, 一朝放殺, 是可乎? 如非王出, 則呂政之立, 嬴氏已亡, 而乃尙無恙. 又從而食其祿, 如是而有後日之死, 深所未曉〕" 《퇴계집(退溪集)》 권39 〈답정도가문목(答鄭道可問目)〉 퇴계의 대답 정자는 "사람은 마땅히 허물이 있는 가운데서 허물이 없는 것을 찾아야 하고, 허물이 없는 가운데서 허물이 있는 것을 찾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포은의 사심 없는 충정과 큰 절의는 천지의 경위(經緯)이고 우주의 동량(棟梁)이라고 이를 만한데, 세상에 비평하기 좋아하고 남의 잘못을 들추어 공격하기 좋아하는 자들이 시끄럽게 떠들어 대며 그치지 않는 것을 귀를 막고 듣지 않고자 하였더니, 그대도 이러한 병통이 있을 줄은 미처 생각지 못하였다.〔程子曰: "人當於有過中求無過, 不當於無過中求有過." 以圃隱之精忠大節, 可謂經緯天地, 棟梁宇宙, 而世之好議論喜攻發, 不樂成人之美者, 嘵嘵不已. 滉每欲掩耳而不聞, 不意君亦有此病也〕 《퇴계집(退溪集)》 권39 〈답정도가문목(答鄭道可問目)〉 현자를……숨긴다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 성공(成公) 9년 조에 "존자를 위해서는 부끄러운 일을 숨기고, 현자를 위해서는 과실을 숨기고, 친자를 위해서는 병을 숨겨 주었다.〔爲尊者諱恥, 爲賢者諱過, 爲親者諱疾〕" 하였다. 계곡……생각된다 《계곡집(谿谷集)》 권2 〈포은과 점필재는 모두 사문에 중한 명성을 지니고 있으나 모두 의아한 점이 있다〔圃隱佔畢齋皆有重名於斯文而皆有大可疑處〕〉에 보인다. 사직이……중요하다 맹자는 "백성이 가장 귀중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며, 군주는 가벼운 것이다.〔孟子曰, 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라 했다. 《맹자(孟子)》 〈진심 하(盡心下)〉 죽음을……기다린다 공자는 "유자는 거처함에 가지런함과 장엄함이 있습니다. 앉거나 일어남에는 공경스럽고, 말을 할 때에는 반드시 신의가 앞서며, 행동을 할 때에는 반드시 올바름에 맞고, 도로에서는 험하거나 평이한 이로움을 다투지 않으며, 겨울과 여름에는 따뜻하거나 시원한 곳을 다투지 않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소중히 여겨서 등용되기를 기다림이 있고, 자신을 잘 길러서 앞으로 시행할 것들을 갖춥니다. 유자는 미리 대비함에 이와 같은 점이 있는 자들입니다.〔儒有居處齊難. 其坐起恭敬, 言必先信, 行必中正, 道塗不爭險易之利, 冬夏不爭陰陽之和. 愛其死以有待也, 養其身以有爲也. 其備豫有如此者〕"라 했다. 《예기(禮記)》 〈유행(儒行)〉 사람이……있다 송(宋)나라 왕신민(汪信民)이 "사람이 항상 채소 뿌리만 먹으면서 곤궁한 생활을 견딜 수 있다면 모든 일을 다 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人常咬得菜根, 則百事可做〕" 하였는데, 호안국(胡安國)이 이 말을 전해 듣고는 무릎을 치면서 찬탄하였다. 《동래여자미사우잡지(東萊呂紫微師友雜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