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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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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교령류

1682년 진상한(陳相漢) 고신(告身) 1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康熙二十一年三月日 陳相漢 康熙二十一年三月日 肅宗 陳相漢 施命之寶(10.2×10.2) 고흥 무열사 고흥 무열사 HIKS_OD_F1030-01-200003 1682년에 숙종이 진상한(陳相漢)을 보공장군(保功將軍) 수문장(守門將)으로 임명한 고신(告身). 1682년(숙종 8) 3월에 숙종(肅宗)이 진상한(陳相漢)을 보공장군(保功將軍) 수문장(守門將)으로 임명한 문서이다. 연호의 우측에 '壬三別加'란 방서가 있다. 이는 임술년(壬戌年, 1682) 3월에 받은 별가(別加)라는 뜻이다. 문서 배면에 고신을 작성한 병조서리[兵政吏] 김대준(金大俊)의 이름이 기재되었다. 국왕의 시명지보(施命之寶)가 안보되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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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간재선생에게 올림 上艮齋先生 辛酉 신유년(1921) 《손우집(遜愚集)》19) 중에 후사를 세우는 설은 율곡(이이)의 주장과 같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래 반편(半篇)이 비록 황찬규(黃瓚奎)에 의한 삭제를 면하지 못했지만, 저의 짧은 생각으로는 이에 대해 논의할 것이 없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이 설이 만약 친자를 적자로 삼고 계자(繼子)를 중자(衆子)로 삼는다는 것을 말한 것이라면 이는 진실로 따를 수 없지만, 친자가 제사를 받들고 계자(繼子)는 파양되어 본종(本宗)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 것이라면 이것이 어찌 의리에 어긋나겠습니까? 다만 이미 인종 때에 계자가 적자가 된다는 정해진 제도가 있었으니, 또한 감히 멋대로 행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리에 비춰 규명해보고 인정을 참조해보면 논의할만한 것이 있을 것입니다.대개 남의 자식을 빼앗아서 자기 뒤를 잇게 하는 것이 어찌 부득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중대한 종사를 위하여 한 것일지라도 그 마음에는 응당 조금이나마 편안하기 어려운 점이 있을 것입니다. 자기 부친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아버지로 삼는 것은 자식으로서 큰 변고입니다. 비록 임금의 명령을 중시하여 그것을 허락한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이 어찌 잠깐이라도 편하겠습니까? 만약 양자를 입적한 아버지가 다행히 아들을 두게 되면, 종사에 부탁은 바로 그 아들에 있습니다. 자기 마음의 편하기 어려움을 미루어 남의 자식의 편하지 못함을 체득한 뒤에 그로 하여금 원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게 하면 그 아버지는 아마도 마땅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왕에게는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도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이 정해준 인간관계를 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옮겨 관계를 정해주는 것도 멋대로 하더라도, 임금이 양자를 들인 뒤에 친 아들을 본다면 사람이 정한 인간관계를 버리고 다시 천속(天屬)의 친함을 회복시켜 주는 것에 대해 어찌 꺼려서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계축년에 하교를 받은 것에는 진실로 잘못된 것이 있고, 인종이 정한 제도 또한 만세의 법전으로는 흠결이 있습니다. 만약 나라에 계자(繼子)로 후사를 세운 이후에 자식을 낳으면 계자를 돌려보낸다는 제도가 있다면, 이런 경우를 당한 자는 자초지종을 갖춰 임금에게 고하고 파양시켜 돌아가게 한다면 마음에 편안하지 않음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본 문장에는 이에 관한 한 구절의 말이 없으니 명확하지도 않고 갖추어지지도 않은 것20)이 될 뿐입니다. 이것은 윤리의 큰 핵심이니 끝까지 강론해야 하며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람되게 이렇게 의심나는 것을 질의하니 삼가 바라건대 살펴주시기 바랍니다.잠깐 《문헌비고》를 보다가 철종 기유년의 예의조(禮儀條)를 보니, 매산(홍직필)의 전후 두 개 상소를 다 실었고, 또 좌상 김흥근과 우상 박영원 등 여러 공들의 의론과 후소(後疏)를 기록하였으며, 태묘에 부묘하는 것을 모두 바르게 고쳤습니다. 이 일은 바로 선생께서 말씀하신 이른바 "멀지 않아 회복된다"21)는 것입니다. 저는 비평가22)들이 종신(終身)의 허물을 많이 지은 것을 괴상하게 여겼는데, 이제 이 책에서 기록한 것을 보고 당시에 개정한 실상을 알게 되었으니 구름을 헤치고 푸른 하늘을 본 것처럼 상쾌하고, 또 조정의 문헌이 자못 공체(公體)를 잃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종신토록 허물을 많이 지은 많은 사람들이 어찌 퇴옹(이황)이 잘못을 했다가 다시 고친 것을 듣지 못했겠는가?" 《遜愚集》中, 立後說, 與栗谷議不同。 故下半篇, 雖不免黃瓚奎刪籖, 然淺見不無商量者存。 此說若謂以親子爲嫡, 繼子爲衆, 則固不可從, 乃謂以親子奉祀, 繼子則罷歸本宗也, 是何嘗悖義乎? 但既有仁廟繼子爲嫡之定制, 則又有不敢擅行者也。 然究之天理, 參之人情, 終有可議者。 蓋奪人子而繼己後, 豈非不得已之事乎? 雖則爲宗事之重而爲之, 其心應有些難安者矣。 捨其父而父他人, 人之子大變。 雖則重君命而聽之, 其心何嘗須臾寧乎? 使其所後父, 幸而有子, 則宗事之託, 在是矣。 推己心之難安, 體人子之不寧, 使之歸父, 其父恐爲得當也。 至於王者, 則有代天理物之道。 故割天定之倫, 移定他人, 亦且任爲, 則其於罷人定之倫, 而復續天屬之親, 何憚而不爲乎? 然則癸丑受教, 誠有所失, 而仁廟定制, 亦欠萬世之典也。 若使國家有立後後生子, 還歸繼子之定制, 則遭其事者, 具由告君而罷遣, 似無未安。 而本文中, 少此一節, 是爲不明不備處耳。 此係倫紀大綱, 恐宜講到極致, 而不容放過者。 故猥此質疑, 伏乞垂察。俄閱文獻備考, 見哲宗已酉禮儀條, 備載梅山前後二疏, 又錄左相金興根右相朴永元諸公議與後疏, 同改正於祔太廟時, 蓋先生此事正所謂不遠而復者。 竊怪夫月朝家之多作終身之累也, 今見此書所錄, 益知當日改正之實, 既喜披雲覩青之快。 又以見朝家文獻之自不失公軆也○ 先生答書曰 : "諸家多作終身之累者, 豈不聞退翁既誤又改之蹟歟?" 《손우집(遜愚集)》 조선 후기 홍석(洪錫, 1604~1680)의 시문집이다. 홍석의 자는 공서(公敍)이고, 호는 만오(晩悟)·손우(遜愚)이며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부친은 홍경소(洪敬昭)이고 모친은 한완(韓浣)의 딸 청주한씨(淸州韓氏)이다. 김상헌(金尙憲)의 문인이다. 이 문집은 3책 8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홍석의 아들 홍사효(洪思孝)가 편집하여 1933년에 간행하였다. 명확하지도……않은 것 정자가 "성만을 논하고 기를 논하지 않으면 갖추어지지 않고, 기만을 논하고 성을 논하지 않으면 분명하지가 않다. 이것을 둘로 하면 옳지 않다〔程子曰: "論性不論氣, 不備, 論氣不論性, 不明, 二之則不是.〕"고 한 말에서 기인한 말이다. 《왕문성전서(王文成全書)》 권2 〈전습록 중(傳習錄中)〉 멀지 않아 회복된다 《주역(周易)》 〈복괘(復卦)〉에서는 "초구는 멀리 가지 않고 돌아와 후회에 이름이 없으니 크게 길하다〔初九, 不遠復, 无祗悔, 元吉.〕"라 했다. "멀지 않아 회복된다〔不遠而復〕."는 말은 여기에서 비롯된 말이며, 인종 때의 잘못된 일을 철종 때 바로잡았음을 의미한다. 비평가 월조가는 월단평(月旦評)을 잘하는 사람으로, 곧 인물을 잘 품평하는 사람을 이른다. 월단(月旦)은 매월 초하루로, 후한(後漢) 때 여남(汝南) 사람인 허소(許劭)는 그의 형 정(靖)과 함께 당시에 명사로 이름이 났는데, 그 지방의 인물을 품평하기를 좋아하여 매월 초하루마다 품제(品題)를 바꾸었기에 여남 풍속에 월단평(月旦評)이 있게 되었다. 월단(月旦)을 월조(月朝)로 바꾼 것은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이름이 단(旦)이므로 이를 휘(諱)하여 단(旦)을 조(早) 또는 조(朝)로 바꾸어 쓴 것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간재선생에게 올림 上艮齋先生 辛丑 신유년(1921) 부친이 살아계실 때 처의 상을 당하면 지팡이를 잡는 기년상(杖期)23)으로 해야 할지, 지팡이를 잡지 않는 기년상으로 해야 할 지에 대해서는 이전에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보내주신 편지로 말미암아 대략 고증하고, 거기다가 저의 의견을 첨가하여 질문을 하지만 어찌 감히 스승의 뜻을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대개 《의례(儀禮)》의 〈장기장(杖期章)〉에서 '처를 위한다'24)는 것은 처복(妻服)의 상례(常例)를 말한 것이고, 〈불장기장〉에서 '대부(大夫)의 적자가 처를 위한다'25)는 것은 처복의 변례(變例)를 말한 것인데, 이는 무엇을 말한 것일까요. 아버지가 죽은 뒤에 처가 죽은 것은 일반적인 세대의 순서[世序]이지만, 처가 아버지보다 먼저 죽은 것은 세서의 변고입니다. 일반적인 경우의 장기(杖期)는 처를 위한 것이라 범범하게 말한다면, 진실로 의심할 것도 없이 귀천과 상하를 통괄하여 말한 것입니다. 변례의 부장기(不杖期)는 다만 대부의 적자만 말했으니, 사(士)와 백성은 여기에 들어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남편이 처를 위하는데도 감히 지팡이를 짚지 않는 것은 아버지가 상주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맏며느리상[適婦喪]을 주관함에 있어 어찌 일찍이 대부와 사(士)·백성의 구별이 있었겠습니까?그런데 이곳에서 유독 대부만을 말한 것은 대부를 강복(降服)26)하는 시작으로 삼은 것으로, 그 맏며느리[適婦]에 대하여 강복하여 그 아들 또한 그 처에 대해 강복할 것을 혐의했기 때문에 특별히 거론하여 밝힌 것입니다. 대부이면서도 강복하지 않으면, 천자와 제후는 그 지위가 높을지라도 강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사(士)와 백성은 애초부터 강복의 혐의가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귀천과 상하를 불문하고 아버지가 죽으면 처를 위해서 장기하고 아버지가 계시면 불장기를 하는 것은 실로《예경(禮經)》의 본뜻인데, 오직 주희의 《가례》에서는 이에 대하여 구별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장기라고 정한 것은 참으로 어기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양신재(양복)는 선생의 문인인데,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지팡이를 짚지 않는다'27)는 한 구절을 부주(附註)에 첨가하였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아마 그가 직접 배울 때 들은 것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사계의 《비요안설(備要按說)》에는 '아버지가 상을 주관하면 처의 남편은 지팡이를 짚지 않고, 아버지가 상을 주관하지 않으면 남편은 지팡이를 짚는데 대부만 그렇게 할 뿐만 아니라 사(士)와 백성도 같다.'28)는 설이 있으니, 후인들은 이에 어느 것을 따라야 할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구분하여 처리하기 어려운 것은 《가례편람》에서 인용한 우암(송시열)의 연장상담(練杖祥禫)에 관한 일련의 설입니다. 단지 지팡이를 짚지 않는다면 정말로 담제29)를 할 수 없고, 담제를 하지 않는다면 정말로 삼년상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꼭 정해져 바꿀 수 없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삼가 깨우쳐주시길 바랍니다.《예경》에서는 비록 적자에 대해서만 말하였으니, 〈분상(奔喪)〉에서 또한 "범상(凡喪)에선 아버지가 살아계시면 아버지가 주관한다."30)라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 중자(衆子)가 처상을 당한 자라면 아버지가 어쩔 수 없이 주관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경우에는 비록 중자일지라도 그 처를 위해서 지팡이를 짚을 수 없습니다. 이를 아울러 선생님께 여쭙니다. 父在妻喪, 杖期不杖期, 前此未曾致思。 今因下示, 畧畧考據, 參以淺見而質之, 安敢望有槩乎尊意也? 蓋儀禮杖期章爲妻, 是言妻服之常例也, 不杖期章, 大夫之嫡子爲妻, 是言妻服之變例也, 何以言之? 父殁而後妻死, 世序之常也, 妻之先父而歿, 世序之變也。 常例之杖期, 既泛言爲妻, 則固無疑乎通貴賤上下而言。 變例之不杖期, 獨言大夫之嫡子者, 疑若士庶之不與焉。 然此有不然者。 夫爲妻而不敢杖者, 以父爲主之故也。 父主適婦之喪, 何嘗有大夫士庶之別。 而此獨言大夫者, 蓋以大夫爲降服之始, 嫌於降其適婦, 而其子亦降其妻也, 故特舉而明之。 大夫而不降, 則天子諸侯, 雖尊不降, 可推而知也。 至於士庶, 初無降服之嫌者, 則又無待乎言矣。 然則無論貴賤上下, 父沒則爲妻杖期, 父在則不杖期, 實禮經之本意, 而惟朱先生家禮無所區別。 但定杖期者, 誠所難違也。 然楊信齊以先生門人, 既添父在不杖一節於附註, 則意其或有所聞於親炙之際者。 沙溪《備要按說》 亦有父主喪則夫不杖, 父不主喪則夫杖, 不惟大夫爲然, 士庶人亦同之說, 則後人於此, 可以知所從矣。 第難區處者, 便覽所引尤菴練杖祥禫一串之說也。 但未知不杖, 則果不得禫, 不禫則果不得爲三年之禮, 定定不易者乎? 伏乞開誨。《經》雖但以適子言, 奔喪又言'凡喪父在父爲主,' 今有衆子與父同居而有妻喪者, 其父不得不爲主矣。 若此者雖衆子, 恐亦不得爲其妻杖也。 幷此仰質。 장기(杖期) 상례(喪禮)에서 상장(喪杖)을 짚고 자최(齊衰)를 1년 동안 입는 거상(居喪)을 말한다. 처를 위한다 《의례(儀禮)》 〈상복(喪服)〉편의 자최장기(齊衰杖期)에서는 "처를 위해 착용한다(妻)."라 되어 있고, "전에서 말하길, 처를 위해 왜 기년으로 복을 하는가? 처는 지극히 가까운 자이기 때문이다〔傳曰, 爲妻何以期也? 妻至親也.〕"라 하였다. 대부의 적작 처를 위한다 《의례(儀禮)》 〈상복(喪服)〉편의 자최부장기(齊衰不杖期)에서는 "대부의 적자가 처를 위해 착용한다(大夫之適子爲妻.)"라 했고, "전에서 말하길, 왜 기년으로 복을 하는가? 부친이 강복하지 않는 대상에 대해서 자식도 감히 강복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 지팡이를 짚지 않는가? 부친이 생존해 계시면 처를 위해 상복을 착용할 때 지팡이를 짚지 못하기 때문이다〔傳曰, 何以期也? 父之所不降, 子亦不敢降也. 何以不杖也? 父在則爲妻不杖.〕"라고 하였다. 강복(降服) '강복'은 상(喪)의 수위를 본래의 등급보다 한 등급 낮추는 일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자식은 부모에 대해 삼년상을 치러야 하지만, 다른 집의 양자로 간 경우라면 자신의 친부모에 대해 삼년상을 치르지 않고, 한 등급 낮춰서 1년만 치르게 된다. 이것은 상(喪)의 기간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상복(喪服) 및 상(喪)을 치르며 부수적으로 갖추게 되는 기물(器物)들에도 적용된다. 아버지가……않는다 《의례(儀禮)》 〈상복(喪服)〉편의 자최부장기(齊衰不杖期)에서 "왜 지팡이를 짚지 않는가? 부친이 생존해 계시면 처를 위해 상복을 착용할 때 지팡이를 짚지 못하기 때문이다(何以不杖也? 父在則爲妻不杖.)"라 한 말을 가리킨다. 아버지가……같다 《사례비요(四禮備要)》 〈보복(補服)〉에서는 "《의례(儀禮)》 〈상복(喪服)〉편의 소에서 '천자 이하로 사와 서인에 이르기까지 아버지가 모두 서자의 처를 위해 상주(喪主)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남편이 모두 처를 위해 지팡이를 짚는 것은 슬픔을 다해야 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는데, 이것에 근거한다면 아버지가 상주면 지팡이를 짚지 않고, 아버지가 상주가 아니라면 남편이 지팡이를 짚는다. 대부가 그러할 뿐만 아니라 사와 서인도 마찬가지이다.〔疏 '天子以下至士庶人, 父皆不爲庶子之妻爲主喪, 故夫皆爲妻杖, 得伸也.' 據此, 父主喪, 則不杖, 父不主喪, 則夫杖. 不惟大夫爲然, 士庶人亦同.〕"라고 했다. 담제(禫祭) 담(禫)은 담담하니 편안하다는 뜻인데, 초상으로부터 27개월째 되는 달 사당에서 지내는 제사이며, 상제들이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과정이다. 범상(凡喪)……주관한다 《예기(禮記)》 〈분상(奔喪)〉편에서는 "상이 발생했을 때, 부친이 생존해 계시다면 부친이 주관한다. 부친이 돌아가셨고 형제가 같은 집에 거주한다면, 형제들은 각각 자신에게 발생한 상을 주관한다. 부모가 같을 경우, 부모의 상을 치를 때에는 장자가 주관한다. 부모가 다르고 그 상을 주관할 자식이 없다면, 죽은 자와 관계가 가까운 자가 주관한다〔凡喪, 父在, 父爲主. 父沒, 兄弟同居, 各主其喪. 親同, 長者主之; 不同, 親者主之.〕"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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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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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간재선생에게 올림 上艮齋先生 辛酉 신유년(1921) 기비(箕碑)와 임갈(林碣)의 변고에 대해서는 비록 일찍이 들었지만, 그 일이 어찌 선생을 이처럼 극도로 침범할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문자로 말미암은 경계(警戒)를 일으켜서 앞으로 행할 일에 조심한다고 하시니 제가 감히 종신토록 가슴에 담아두지 않겠습니까. 제가 이전에 차분히 생각해보니 사람을 위한 글을 마땅히 지어야 한다고 여긴다면, (그 대상의 행적에) 거짓이 구름처럼 많고 속임이 산처럼 쌓여 살아서는 도척처럼 행동했는데 죽어서는 순임금처럼 만들어 바꾸려고 하는 자의 요구에 어떻게 응할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지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위로는 대인(大人)의 순덕(純德)과 위업(偉業), 아래로는 필부의 기행과 고절(奇行苦節)에 대하여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면 (후세 사람들이 그 사람들의 일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의 생각으로는 많은 사람들에게 문장을 지어주면서 허실을 따지지 않고 묘에 아부하거나 글을 부탁한 사람에게 아첨하면서 금과 비단을 요구하는 자에 대해서는 말할 가치도 없거니와 혹 이를 징계하여 일절 물리쳐서 훌륭한 실적(實蹟)마저 아울러 사라지게 한다면 또한 정도(正道)에 지나칠 듯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글을 짓지 말아야 할 대상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물리쳐야 하는데, 이는 마땅히 율곡선생이 김노천(김식)31)에게 한 것처럼 해야 하고, 지을만한 대상의 문장에 대해서는 반드시 사양할 필요 없이 사리에 맞게 칭찬해야 하는데, 이는 마땅히 채옹(蔡邕)이 곽유도(郭有道)에게 한 것처럼 한다면 될 것입니다.32)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시호(諡號)에는 아름다운 시호가 있고 추악한 시호가 있습니다. 군자와 소인에 대해 같은 날에 시호를 의논하는 것이 군자에게는 꺼려야 할 것은 없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꺼려야 하는 것은 선악을 구분하지 않고 좋은 시호를 함께 뒤섞어 베푸는 것이니, 공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의론이 공정하지 않은 까닭은 악인이 나쁜 시호를 면하는 것이지 군자가 좋은 시호를 받는데 있지 않습니다. 저쪽에서는 진실로 불공정하다지만, 이쪽에서는 공정함을 해치지 않으니 무슨 꺼릴만한 것이 있겠습니까?만약 시호에 대한 의론이 스스로 적배(賊輩)들에게 아부하는 것으로 말을 하였다면, 이에 대해서는 분명히 따져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진실로 저 의론이 공정함을 얻었기 때문에 한나라 헌제와 명나라 의종의 시호가 조조란 도둑놈과 청나라 오랑캐에 의해서 이루어졌지만, 후세에 그것을 싫어한다는 말을 아직까지 듣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도적에게 아부하더라도 오히려 우리나라 신하'라고 말하니, 그 의론의 판단이 깊은 진심에서 나와 결정된 것이겠습니까? 그것에 대해 더 이상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만약 정미년(丁未年)의 일33)을 모 어른처럼 선위(禪位)가 아니라고 한다면 구설(口舌)로 다투기 어렵습니다. 다만 전옹(임헌회)은 성덕(盛德)을 갖추고 있으니 어찌 시호가 있고 없음 때문에 덕에 증감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단지 그 자손이 공도(公道)가 없을 때 구차하게 시호를 청하니, 다른 사람들이 이에 대하여 불만을 가질 뿐입니다.맹자는 "이곳에 해자를 파고, 이곳에 성을 쌓아서 백성들과 지키다가 죽더라도 떠나지 말라."34)고 말하였고, 또한 "진실로 선을 한다면 후세자손에 반드시 왕자가 나올 것이다."35)라 하였습니다. 저는 우리 유자들이 지금 시대에 의로움을 행할 때 마땅히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굳건히 뜻과 절개를 세우는 것으로 성을 쌓고 의리를 깊게 만드는 것으로 해자를 삼으며 선성(先聖)의 도를 받드는 것으로 사직을 삼아 이 시대의 동지들과 함께 힘을 다해 지키다가 죽은 이후에 그만두어야 합니다. 만약 이러한 맥(脈)이 전해지게 되면 후세에 성인이 반드시 일어나지 않는다고 누가 확신하겠습니까? 이와 같은 것 외에는 결코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장성(長城)에 사는 김 모씨의 처는 정씨인데, 송강(정철)의 후손입니다. 그녀는 남편이 밖에 나가 삭발했다는 말을 듣고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하녀로 하여금 삭발여부를 살펴보게 하니, 하녀가 돌아와 "삭발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정씨는 이를 믿지 않고 남편이 외당으로 들어가는 것을 기다렸다가 다시 다른 하녀에게 가서 보게 하니 정말로 삭발하지 않았다. 이에 반찬과 밥을 성대하게 준비하여 남편이 내실로 들어오기를 청하여 친히 밥상을 들고 앞으로 나아가니 남편이 "어찌하여 이처럼 반찬이 성대하오."라고 물었다. 이에 정씨가 "우선 식사를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밥을 다 먹은 이후에 (정씨가) 앞으로 나아가면서 "금방 전 성대한 음식을 드린 것은 저를 살려준 은혜에 감사드린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남편이 "무슨 말이오."라고 하니 정씨가 종이로 싼 물건을 남편에게 보여주며 "이것은 독약입니다. 당신이 정말로 삭발하는 것을 면하지 못했다면, 저는 차마 삭발한 남편을 섬길 수 없으니 이것을 먹고 죽으려 했습니다. 이제 다행히 삭발하지 않았으니 이는 저를 살린 것입니다. 감히 은혜에 감사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남편이 이 말을 듣고 감복하였다고 한다.을미사변 때에 삭발한 자의 처가 간혹 자결했다고 들었지만, 수십 년 이래로 삭발하는 풍속이 이미 성대해져 부녀들이 삭발한 남편이나 스님 같은 사내를 익숙히 듣고 보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현부에게 이런 고견(高見)이 있어 자처한 의리가 바르고 다른 사람을 더욱 깊이 감동시키니 어찌 무성한 풀 속에 홀로 향기를 풍기며 많은 닭 속에서 한 마리 학 같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매우 기이하고 훌륭하기에 감히 알려드립니다. 箕碑林碣之變, 曾雖聞之, 豈意其侵及先生而極也。 枉作文字之戒, 懲諸身歴, 出自心愛, 敢不服膺而終身? 竊嘗思之, 人家文字, 以爲當作, 則虛僞雲興, 溢誣山積, 生爲蹠行, 而死欲舜賛者, 其何以應之? 以爲不當作, 則上而大人之純德偉業, 下而匹夫之奇行苦節, 不有以記之, 孰得以知之? 故妄意以爲廣開文路, 不問虛實, 謏墓媚人, 討金索縑者, 固不足道, 其或懲此而一切辭絕, 并與實蹟之善而沒焉, 則恐亦過中也。 然則惡乎而可? 其不可作者, 則却之之嚴, 當如栗谷之於金老泉, 可作之文, 則不必終辭, 稱揚停當, 當如蔡邕之於郭有道, 則斯可矣。 未審先生以爲如何。謚有美謚惡謚。 君子與小人, 同日議謚, 固無嫌於君子, 而所可嫌者, 不分善惡, 而混施美謚者, 爲不公之論也。 然其論之所以不公者, 在乎惡人之免惡謚, 不在乎君子之受美謚也。 在彼固爲不公, 在此自不害爲公, 又何嫌之有? 如以謚議之出, 自附賊輩爲說, 則又有可解者。 苟其議之得公, 以漢獻明毅之出自曹賊清盧, 後世未聞有嫌之者。 而况雖曰附賊尚是韓臣, 而其議之取裁, 自睿衷而決定者乎? 其不容有說於其閒也, 審矣。 若以丁未之事, 謂非禪位, 如某丈之言, 則有難以口舌爭也。 但在全翁盛德, 豈以節惠有無爲增損。 其子孫之區區請求於無公道之時, 正不滿人意耳。孟子曰 : "鑿斯池也, 築斯城也, 與民守之效死而勿去。" 又曰 : "茍爲善, 後世子孫, 必有王者矣。" 竊以為吾儒今日處義, 亦當如此也。 堅立志節以爲城, 深造義理以爲池, 奉先聖之道以為社稷, 與并世同志者, 盡力而守之, 斃而後已。 茍一脈之有傳, 安知後世聖人之必不作耶? 如此之外, 了無可爲者耳。長城金某妻鄭氏, 松江後。 聞其夫出外削髪, 俟其回, 使婢出觀其削否, 婢奔告曰 : "不削"。 鄭氏未信, 俟入外堂, 又使他婢往見, 果不削。 乃盛饌備飯, 請夫入內, 親舉案進前。 夫曰 : "胡爲饌盛若是。" 鄭氏曰 : "第飯之。" 飯后乃進而言曰 : "俄供盛餅謝活我恩也。" 夫曰 : "何謂?" 鄭氏以紙裹一物示夫, 曰 : "此毒藥也。 夫子果不免削髪, 則吾不忍事削髪之夫, 將服而死矣。 今幸不削, 是活我也, 敢不謝恩。" 其夫聞之感服云。 在昔乙未之變, 聞遭剃者之妻, 或有自死者矣。 數十年來 剃風已盛, 人家婦女習聞慣見髠夫僧郎, 曾不爲恥, 何幸賢婦有此高見, 自處之義既貞, 感人之術尤妙, 豈不是衆蕪孤芳羣鷄一鶴事? 甚奇絕, 敢以上聞。 김식(金湜, 1482~1520) 조선 중기 때의 학자이다. 자는 노천(老泉)이고, 호는 동천(東泉)·사서(沙西)·정우당(淨友堂)이다.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부친은 김숙필(金叔弼)이고 모친은 사천목씨(泗川目氏)이다. 채옹……것입니다 후한(後漢)때의 채옹(蔡邕)이 곽유도(郭有道)의 비문을 짓고 나서 노식(盧植)에게 "내가 비명을 많이 지었지만, 그때마다 모두 그 덕에 부끄러움이 있었으나 곽유도에 대해서만은 부끄러울 것이 없다.〔吾爲碑銘多矣, 皆有慙德, 唯郭有道無愧色耳.〕"라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 권68 〈곽태열전(郭太列傳)〉 정미년(丁未年)의 일 1727년(영조 3년), 정쟁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당색이 온건한 인물로 인사를 개편한 정국으로 영조(英祖)는 당파심이 매우 강한 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탕평책(蕩平策)을 추진한다. 이를 계기로, 서인에서 분파한 소론(少論)은 실각하지만, 또 다른 서인인 노론(老論)은 계속 집권하게 되었다. 이 각주가 아니라 고종이 순종에게 선위한 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간재가 살았던 정미년의 일을 찾아볼 것. 아마도 순종 이후에 시호가 내려졌는데, 순종이 선위를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호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하는 모 어른일 것이며..여기에서 시호 문제는 전제의 시호 문제인 듯. 이곳에……말라 맹자는 "이 계책은 내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기어이 말하라고 하신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으니, 못을 깊이 파며 성을 높이 쌓아 백성과 더불어 지켜서 백성들이 목숨을 바치고 떠나가지 않는다면 이것은 해볼 만한 일입니다〔是謀非吾所能及也. 無已, 則有一焉, 鑿斯池也, 築斯城也, 與民守之, 效死而民弗去, 則是可爲也.〕"라고 하였다. 《맹자(孟子)》 〈양혜왕 하(梁惠王下)〉 진실로……것이다 맹자는 "만일 선행을 하면 후세의 자손 중에 반드시 왕노릇 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군자는 기업을 창건하고 전통을 드리워서 계속할 수 있게 할뿐입니다. 성공으로 말하면 천운이니, 군주께서 저들에게 어찌하시겠습니까? 선행을 하기를 힘쓸 뿐입니다〔苟爲善, 後世子孫必有王者矣. 君子創業垂統, 爲可繼也. 若夫成功, 則天也. 君如彼何哉? 强爲善而已矣.〕"라고 하였다. 《맹자(孟子)》 〈양혜왕 하(梁惠王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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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 上艮齋先生 壬戌 임술년(1922) 관례(冠禮)를 할 때 부친 및 조부의 장자 그리고 지자(支子)46)의 장자가 있는데, 예가(禮家)들 중에는 간혹 적자는 있지만 적손은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또 지가(支家)는 전중할 것이 없다고 여겨서 모두 중자(衆子)로 보아 조계(阼階)47)에서 관례를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러나 저는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에서는 단지 '장자(長子)'라고만 했고 '적손(適孫)'이라고는 하지 않았으며, 단지 '장자(長子)'라고만 말하고 '종자(宗子)48)의 장자(宗子之長子)'라고는 말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조부가 있거나 없음 또 종가와 지가를 막론하고 장자들은 모두 '장자(長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관의(冠義)〉에서는 "조계에서 관례를 치러서 이를 통해 대를 계승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49)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아들이 이미 그 부친을 대신하여 조계를 주관하는 자라면 전중하는 것을 기다린 이후에 장자가 되어 마치 복상제도에서 삼년상을 치르게 되는 것처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에 종자와 함께 사는 지자의 장자라고 한다면, 아마 마땅히 조계에서 관례를 치르지 않아야 할 것 같은데 이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이 조계는 관례를 하는 지자의 장자가 장래에 주관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삼가 대답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선생이 답서에서 말씀하셨다."장자가 조계에서 관례를 치르는 것은 종자나 지자나 할 것 없이 모두 그렇다는 말은 아마도 맞는 것 같다." 冠時, 有父及祖之長子, 及支子之長子, 禮家或以爲有適子無適孫。 又以爲支家無所傳重, 皆作衆子看, 而不冠於阼階, 然小子竊以為未必然。《禮》但曰'長子'而不曰'適孫', 但曰'長子'而不曰'宗子之長子', 則是不論祖在不在宗家支家, 凡長子皆可曰長子也。 冠義曰 : "冠於阼以著代也。" 此子既是將代其父主阼階者, 則不必待有所傳重而後, 得爲長子, 若制服三年者也。 若與宗子同居支子之長子, 則恐當不冠於阼, 何也? 以此阼階, 非此子將來之所主故也。 伏乞下批。○ 先生答書曰 : "長子冠於阼階, 不問宗支皆然之喻, 恐得之。" 지자(支子) 서자의 의미도 있지만, 적장자를 제외한 나머지를 지자라고 칭하기도 한다. 조계(阼階) 관혼상제를 치를 때 주인이 손님을 맞이하는 동쪽섬돌이다. 종자(宗子) 종가의 맏아들이다. 조계……나타낸다 《예기(禮記)》 〈관의(冠義)〉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적자의 경우에는 동쪽 계단 쪽에서 관례(冠禮)를 치러서, 이를 통해서 대를 계승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빈객의 위치에서 초(醮)를 하고, 세 차례 관(冠)을 씌워주어, 점진적으로 존귀하게 되니, 이처럼 세 차례 관(冠)을 더해주는 것에는 성인(成人)이 되어, 더욱 공경스럽게 대한다는 뜻이 포함된 것이다. 관례를 치른 뒤에는 그에게 자(字)를 지어주니, 성인의 도리에 해당한다.〔故冠於阼, 以著代也. 醮於客位, 三加彌尊, 加有成也. 已冠而字之, 成人之道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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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암 김장에게 올림 上炳菴金丈 乙巳 을사년(1905) 저는 일찍이 '군자의 도는 어려서는 배우는 것이니, 자라서는 그것을 행하는 것이다.'75)고 들었습니다. 만일 그저 공자ㆍ맹자ㆍ정자ㆍ주자의 책만을 읽고 임금을 요순으로 만들고 백성을 요순의 백성으로 만들려는 의지가 없다면 아마도 군자라고 부르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근래에《율곡전서》를 읽어보니 그가 나라를 다스리고(經國) 세상을 구제하는(濟世)의 방책에 대하여 큰 일로 삼지 않은 적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저는 궁리와 수신은 경국(經國)과 제세(濟世)의 근본이고, 법령에 관한 문장은 경국과 제세의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근본이 튼튼하면 가지가 번성하는 것은 필연의 이치입니다. 학자는 마땅히 성현이 저술한 책을 잘 완미하여 천지의 큼, 인물에 대한 분별, 윤상(倫常)의 중요함 등에 대해 힘써 그 극치를 궁구하며, 성현의 행적을 표준으로 삼아 뜻의 진실함과 거짓, 마음의 사악함과 바름, 몸의 닦음과 닦지 못함에 대해 잘못된 점을 제거하고 옳은 것을 이룬다면 치국평천하의 일은 들어다 놓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그러나 백성이 태어난 이래로 인재의 성취는 치우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맹공작(孟公綽)이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등나라와 설나라의 대부는 될 수 없었고,76) 자로(子路)는 인(仁)하지는 못하였지만 천승의 나라에 그 군(軍)을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77) 율곡이 회재 이언적과 퇴계 이황 두 선생을 논함에 있어 "성리를 논한 책에 대해서는 조예가 깊고 정밀하다"고 말하였고, "오묘한 생각과 정미한 연구는 유현(幽玄)을 꿰뚫어 보았다"고 말했지만, 오히려 "세상을 구제하는 일에서는 큰 재주는 없다"고 하였고, 또 "스스로 헤아려보건대 재주는 부족했다"고 말했으니,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점을 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그러나 이것 또한 궁리 안의 일이고, 궁리를 벗어나서 별도로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선비들은 태극(太極)과 성명(性命)의 깊은 이치에 대해서는 애써 탐구해서 종신의 사업으로 삼지 않음이 없으나 경국과 제세의 방도에 관해서는 '족히 할 만한 것이 못된다'고 생각하니, 이것 또한 통유(通儒)가 되기에는 부족한 것입니다. 만약 세상에 현명한 군주가 있어서 사림을 선발하여 등용하고 태평에 이르기를 바란다면, 오늘날 선비 중에 경국과 제세의 방책을 익히지 않은 자가 전부(田賦)를 다스리고 예악을 바르게 하며, 법령을 정하고 권량(權量)을 알맞게 하는 절차에 대하여 장차 어떻게 조처하겠습니까? 옛날에는《소학》에서 육례를 가르쳤고, 공자는 "예에서 도야한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비록 경제가 쇠잔하고 교육이 느슨해져서 절목의 자세함에 대해서는 다시 볼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남은 제도가 다행히 보존되어 사라지지 않은 것과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하게 하는 방책에 대하여 책을 읽고 일에 응대하는 여가에 별도로 연구하고 강구하면서 다른 날에 재주를 펼칠 수단으로 삼는다면 괜찮을 것입니다. 어른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竊聞君子之道, 幼而學之, 欲壯而行之。 若徒能讀孔孟程朱子書, 而無堯舜君民之志, 則恐不足以謂君子也。 近讀《栗谷全書》其於經國濟世之方, 未嘗不把作一件大事。 竊疑窮理修身, 經濟之本也, 章程文爲, 經濟之支也。 本固則支達, 必然之理也。 學者固當玩繹乎聖賢之書, 天地之大, 人物之分, 倫常之重, 務要窮極其致, 準的乎聖賢之行, 意之誠僞, 心之邪正, 身之修否, 務要去彼就此, 則治國平天下之事, 特舉而措之耳。 然自生民以來, 人才之成就, 不能無偏。 是故公綽之不欲, 未可爲滕薛之大夫, 子路之未仁, 能治千乘之賦。 至於栗翁之論晦陶兩先生, 既稱之曰"性理之書深造精微", 曰"妙思精研, 洞見幽玄," 而却曰"無經濟大才," 曰"自度才不足," 自非全體備具者, 終不能免於此也。 然此亦窮理中事, 非外窮理而別爲一事也。 見今之士, 於太極性命之蘊, 無不費力探究, 做終身事業, 而至於經國濟世之術, 則視以爲不足爲, 亦不得爲通儒也。 如使世有賢君選用士林, 期臻太平, 則今之士之不習經濟者, 其於制田賦正禮樂定律令嘉權量之節, 將何以措之? 古者小學教之以六藝之文, 孔子曰"遊於藝," 今雖經殘教弛, 節目之詳, 不可復見, 然其遺制之幸存而未泯者, 及治國安民之策, 於讀書應事之暇, 另加講究, 以爲他日應用之需, 可也。 未知尊意以為如何。 군자의……것이다 맹자는 "사람이 어려서 배우는 것은 장성해서 그것을 행하고자 함이다.(夫人幼而學之, 壯而欲行之)"라고 하였다. 《맹자(孟子)》 〈양혜왕 하(梁惠王下)〉 맹공작(孟公綽)은……없었고 공자가 말하기를 "맹공작(孟公綽)은 조씨(趙氏)와 위씨(魏氏)의 가로(家老)가 되는 것은 충분하지만 등(滕)나라와 설(薛)나라의 대부(大夫)가 되어서는 안 된다.〔孟公綽爲趙魏老則優, 不可以爲滕薛大夫.〕"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주희(朱熹)의 주에 "공작(公綽)은 아마도 청렴하고 욕심이 적으나, 재능이 부족한 자인 듯하다."라고 평하였다. 《논어(論語)》 〈헌문(憲問)〉 자로가……있었습니다 맹무백(孟武伯)이 자로(子路)에 대해 묻자, 공자가 "유는 천승의 나라에 그 군을 다스리게 할 수는 있지만 그가 인한지는 모르겠다〔由也, 千乘之國, 可使治其賦也, 不知其仁也〕"라고 하였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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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 김장에게 올림 上志山金丈 庚申 경신년(1920) 저는 호남의 비루한 유생입니다. 한 번 만나주시는 은혜를 입은 것으로도 이미 용문(龍門)에 오른 것처럼 영광스러운데 다시 사랑의 편지까지 내려주셨으니, 이는 상례를 벗어난 특별한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구부러진 재목이 큰 장인의 먹줄을 따르고 완고한 철이 훌륭한 대장장이의 용광로에 들어간 것과 같으니, 저에게는 참으로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만 이 때문에 말거리를 삼는 자들이 저를 지나치게 후하게 대접하는 실수를 범했다고 문하를 의심하게 하여 누를 끼쳤으니, 저 또한 죄가 있습니다.옛날에 공자와 맹자가 사람을 가르칠 때 무언지교(無言之教)8), 불설지회(不屑之誨)9)와 같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말씀하신 것 이외에는 혹시라도 말을 그만두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 이른바 간곡하게 잘 타이르면서 이끈다는 것과 의문 나는 점을 서로 문답한다는 것이 이에 해당할 뿐입니다. 삼가 근세에 대인(大人)과 큰 덕을 지닌 사람을 살펴보니, 혹은 엄숙하게 우뚝 서있기도 하고 혹은 깊은 생각으로 묵좌하기도 하니, 방문하여 무엇을 청하려는 자가 머뭇거리며 감히 나아가지 못하고, 의문 나는 점이 있어 질문하려는 자가 말을 머뭇거리다가 스스로 그만두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평소에 발원(發願)한, 지팡이 짚고 천리길을 나서려던 뜻이 자리 앞에서 잠깐 사이에 시들시들 꺾이기도 하니, 아마도 그들을 진작시키고 고무시키는 방법은 아닌 듯합니다.문하께서 사람을 대하는 것은 이들과 다릅니다. 온화한 말투는 마치 지초와 난초가 향기를 풍기는 것과 같고, 넘치는 화기(和氣)는 순한 막걸리에 취한 듯합니다. 그리고 충성스런 지조와 굳센 절개는 어떻습니까. 서리와 눈 속에서도 꿋꿋한 대나무ㆍ잣나무와 같은 지조를 지닌데다가 또 봄날의 따뜻한 햇볕과 같은 덕으로 보완하셨으니, 두터운 인(仁)과 애(愛)가 이처럼 겸비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국내의 선비들이 기꺼이 문하께 달려와 마음속으로 기뻐하고 성심으로 복종하는 이유이니, 제가 어리석더라도 역시 인의를 채우게 되어 지난날 인사드리고 물러나왔던 때에 갑자기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감격스럽고 다행스러움은 참으로 세도(世道)와 관계가 되니 저의 사사로운 이익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보내주신 편지에서 맹자의 큰 공은 성선(性善)에 있고 심선(心善)에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옛날 스승께 여쭈었을 때 마침 바삐 물러나오느라 끝까지 논의하여 결정된 답을 듣지 못했습니다만, 계발을 받고 대략 스승의 뜻을 짐작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먼저 제 뜻을 펴서 아뢰고 가르침을 구합니다.맹자의 큰 공이 성선에 있다고 하신 것은 실로 천고에 이미 정해진 공론이니 말해주길 기다리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성선의 의론이 큰 공인 줄만 알고 심선의 의론 또한 큰 공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모르므로, 마침 드러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고자 합니다. 맹자의 심선 의론이 어찌 〈부세자제다뢰(富歲子弟多賴)〉장에서의 "성인은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똑같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먼저 알았다"10)는 말에 있을 뿐이겠습니까. 천하 사람의 마음이 성인의 마음과 다르지 않은 마음을 얻어서 리의(理義)를 즐길 수 있다면 이것이 어찌 사람의 마음이 모두 선하다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왜 심선의 의론에 공이 있다고 말했겠습니까? 사람이 물욕에 이끌려 용렬하고 악한 데로 돌아가려는 까닭은 자신의 심성이 선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일반사람들은 성인 보기를 마치 연못과 하늘의 차이와 같아 스스로 그 경지에 미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일반사람과 성인은 그 성이 원래 같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만약 어떤 사람이 '너의 성은 요순처럼 선하다'고 알려준다면 어찌 기뻐 날뛰면서 그 욕심을 다스려 선을 회복하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일반사람들은 성인을 보면, 또 성이 비록 (성인들처럼) 선하다할지라도 성은 능동적으로 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심에 있기 때문에 성인과 보통사람의 마음은 본래부터 같지 않으니 내가 어떻게 성인에게 미치겠는가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내 마음의 선도 성인과 같다'고 알려주면 어찌 크게 기뻐 날뛰면서 더욱 저 악을 다스려 선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일러 맹자의 공이 또한 심선을 논함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비록 그러할지라도 성선과 심선은 둘로 나누어 구별할 할 수 없으니, 이는 무엇 때문입니까? 심이 비록 선하다고 할지라도 선하게 되는 까닭은 지선한 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이 만약 이 성에 근원하지 않는다면 어디로부터 선을 얻겠습니까? 이것으로써 성선은 심선의 근본이고, 심선은 성선이 증험되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선과 심선은 또 나란히 하여 똑같다고 할 수는 없으니, 이는 무엇 때문입니까? 심이 이 성을 갖추고 있으므로 그 근본은 선하지만, 무엇을 하는 것은 기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말단의 경우 간혹 악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심이 본래 선하다고 하는 것은 괜찮지만, 심이 순선(純善)하다고 한다면 이는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맹자 또한 이미 '리와 의는 마음을 기쁘게 한다'고 했으니, 마음이 곧바로 이 리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요컨대 노주(老洲) 오희상(吳熙常)이 말한 '성은 순선하고 마음은 본래 선하다'는 것은 리(理)와 기(氣)의 구분을 한 마디로 요약하여 완벽하게 표현한 것이니, 스승의 본뜻은 삼가 아마 이와 같을 뿐일 것입니다. 잘 모르겠지만, 어른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澤述, 湖南鄙生也。 一被容接, 已榮登龍, 重之以耑垂寵牘, 出於拔例殊愛, 曲材之從大匠繩, 頑鐵之入良冶爐, 固澤述之幸也。 但因此而俾談者疑其有失厚之, 累於門下, 則澤述亦有罪焉。昔孔孟之教人, 自無言之教ㆍ不屑之誨, 有爲而發以外, 未嘗見言語之或舍也。 所謂諄諄善誘ㆍ難疑答問者是已。 窃觀近世大人長德, 或嚴嚴凝立, 或淵淵黙坐, 進請者趑趄而不敢, 質疑者囁嚅而自止, 使其平生發願千里杖策之志, 薾然沮喪於席間片餉之頃, 恐非所以振起皷舞之道也。至門下之接人則異於是。 藹然之辭若芝蘭之其香, 盎然之和如醇醪之是醉, 何其忠烈勁節? 霜竹雪柏之中, 又濟之以陽春光輝之德, 厚仁愛若是兼且備也。 此所以邦內士類樂趍門墙, 心悅而誠服, 澤述之蒙騃, 亦知飽仁充義, 而不欲遽離於曩日拜退之日也。 其爲感幸, 實關世道, 非直爲己私也。下喻鄒聖大功在於性善而不在於心善。 向稟於師席, 而時值忽忽辭退, 未承究論定案。 但於竅啟, 有所畧揣師意者, 故敢先布白求教。夫孟子大功之在性善, 固千古已定之公言也, 有不待言而知者。 但以人皆徒知性善之論之爲大功 而不知心善之論之亦爲大功。 故正欲表而出之, 使人知之也。 孟子心善之論, 惡乎在〈富歲子弟多賴〉章所謂聖人先得我心之所同然者是已? 天下之心, 既得與聖人之心無不同悅理義, 則此豈非人心皆善之謂乎? 胡爲而云, 心善之論有功? 夫人之所以甘徇物欲而歸於庸惡者, 由不知己心性之善故也。 凡人之視聖人, 若淵之於天, 自以爲不可及, 而曰'凡之於聖, 其性固自不同。' 如有告之者曰'爾性之善, 與堯舜同,' 豈不歡欣踊躍, 思欲制其欲, 而復其善乎? 凡之視聖, 又以爲性雖善矣, 性則無爲, 有爲之能, 都在於心, 而聖凡之心, 應自不同, 我何以及聖人乎? 如又有告之者曰'爾心之善, 亦與聖人同,' 豈不大歡欣大踊躍, 尢欲治其惡, 而反其善乎? 夫是之謂孟子之功, 亦在於心善之論也。雖然性善心善, 不可分而二之也, 何也? 心雖曰善, 其所以善者, 爲其具至善之性也。 心若不原於此性, 何自而有善乎? 是知性善也者, 心善之所本也; 心善也者, 性善之所驗也。 性善心善, 又不可比而同之也, 何也? 心具此性也, 故其本則善, 有爲而屬氣也, 故末或有惡。 是故謂心爲本善則可也, 謂心爲純善則大害也。 孟子亦既曰, 理義悅心, 則心之非直是理, 斷可知已。 要之老洲所謂'性純善而心本善', 理與氣之分, 一語約而盡之矣。 師席本意, 窃恐如是而已。 未知尊意以爲如何? 무언지교(無言之教) 공자가 "나는 말을 하지 않으려 한다.〔予欲無言〕"라고 하자, 자공(子貢)이 "말씀을 하지 않으시면 저희가 어떻게 도를 전하겠습니까"라고 하니, 공자가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시는 운행하고 만물은 자라난다.〔天何言哉 四時行焉 百物生焉〕"라고 대답한다. 《논어(論語)》 〈양화(陽貨)〉 불설지회(不屑之誨) 상대방을 탐탁지 않게 여겨 멀리함으로써 그의 마음을 경각(警覺)시키는 가르침을 말한다. 맹자(孟子)는 "사람을 가르치는 데도 방도가 많으니, 내가 탐탁지 않게 여기는 가르침도 이 또한 가르침일 뿐이다〔敎亦多術矣, 予不屑之敎誨也者, 是亦敎誨而已矣〕"라고 하였다. 《맹자(孟子)》 〈고자 하(告子下)〉 성인은……알았다 맹자는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똑같이 옳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리이고 의이다. 성인은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똑같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먼저 알았다. 때문에 리와 의가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은 마치 맛있는 고기 음식이 우리의 입을 즐겁게 하는 것과 같다〔心之所同然者, 何也? 謂理也義也. 聖人先得我心之所同然耳. 故理義之悅我心, 猶芻豢之悅我口〕"라고 하였다. 《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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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명에게 답함 答魏致明 癸酉 계유년(1933)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의 〈거병서(去病書)〉19)를 먼 곳까지 부쳐주셨는데 마디마디가 적절하고 타당하며 하나하나가 약석(藥石)같은 말입니다. 그 문장에서 말한 '병을 제거하는 방법'은 가장 잘 형용하였으니, 손을 씻고 경건하게 읽자니 반성하고 깨우친 점이 많습니다.사람들은 "이 늙은이(위백규를 가리킴)가 추수(推數)를 전공하여 참위설(讖緯說)을 지어 전하기까지 했다"고 말하면서 일찍이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 선생 문하에 출입한 것을 의심하였습니다. 연원이 단정한데 어찌 한쪽으로 치우쳐 나아감을 면하지 못하고 이렇게 되는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사람들의 말은 믿을 수 없습니다. 이제 이 글을 읽어 보니, 평상시의 언행에서 벗어나지 않는, 그의 평정하고 적실(的實)함에는 참으로 이와 같은 점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그대 선친20)을 위해 〈다암처사묘갈(茶嵒處士墓碣)〉을 쓰는 것은 얼마나 큰일입니까? 그런데도 저에게 그 일을 부탁한 것은 사람들의 이른바 '택술에게 시키면 약간의 문사(文辭)가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람이 미천하고 말이 경박하며 존귀하지 않고 미덥지 않습니다. 게다가 문사마저도 없으니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저를 깊이 아꼈기 때문에 생각이 한번 잘못됨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만두십시오. 그만두십시오. 存齋〈去病書〉, 荷此遠寄, 而言言切當, 箇箇藥石。 其云"去病", 最善名狀, 盥讀, 反省警發多矣。人言"斯翁專於推數, 至作讖緯而傳之", 嘗疑其出自渼門。 淵源端正, 豈至於不免偏就乃爾? 人言有不可信。 今讀此書, 乃知其平正的實, 不出乎日用言行之間, 果有如此者也。尊先公〈茶嵒處士墓碣〉, 何等大事? 而託之於澤述者, 不省所謂使澤述而稍有文辭, 人微言輕, 不尊不信。 而况并與文辭而無有乎? 此殆相愛之深, 而不覺一念之誤也。 已之已之。 거병서(去病書) '거병'은 이경(李㯳)의 어렸을 때의 자(字)로, 문언능(文彦能)에게 출가한,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의 큰누이의 외손자이다. 이 글은 위백규가 63세였던 1789년(정조13) 가을에 지은 것인데, 몸의 질병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마음의 병을 제거하는 방법에 대해 옛 경전을 인용하여 훈계하였다. 이경은 생후 몇 달 만에 어미를 잃어 위백규의 집에서 양육되었는데, 위백규가 거병이라고 부른 것은 오래 건강하게 자라기를 기원했기 때문이다. 《존재집(存齋集)》 권24 〈연보(年譜)〉 선친 위영복(魏榮馥, 1832~1884)을 말한다. 자는 방서(芳瑞)이고 호는 다암(茶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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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명에게 답함 答魏致明 丙子 병자년(1936) 세상의 풍파가 날로 급하고 심해져서 우리들의 목숨과 머리카락을 보호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이러한 때에 마음속에 간절하게 생각나는 것은 세상을 같이 살고 있는 동지들뿐입니다. 그러나 이 동지들이 역시 도대체 몇 명입니까? 그대처럼 곤궁함 속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지키면서 선대의 규범을 실추시키지 않고, 창연하게 홀로 참된 본색을 보존한 자는 참으로 얻기 어려우니, 머리를 들고 남쪽 하늘을 바라보면서 매번 관산(冠山)이 멀리 있어 오를 수 없음을 한스러워하였습니다.이러한 때에 그대로부터 과분한 은혜를 입어 갑자기 적막한 물가에 1폭 10행의 편지를 받아보니, 저를 뜻에 맞는 사람이라 허여하고 또 오래도록 만나지 못한 것을 탄식하셨습니다. 그대는 저와 비교하면 덕으로나 나이로나 진실로 크게 높고 매우 많으니, 어찌 그대가 저를 생각하는 것이 역시 제가 그대를 사모하는 것과 같겠습니까? 또 먼저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감사하고 위로받은 나머지 부끄러운 마음 또한 심합니다. 이어서 때를 잘못 타고났다는 것과 일생동안 알려지지 못한 것을 슬퍼하셨는데, 때를 만나지 못했다는 탄식은 참으로 동병상련의 일이지만, 알려짐이 없다는 말은 어찌 그대에게 해당되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틀림없이 이 고루한 저를 일깨워주기 위하여 비유적으로 말한 것일 뿐일 것입니다.편지를 받들어 두세 번 읽으면서 반성되고 계발되는 점이 많았습니다. 삼가 일찍이 본말과 시종을 궁구하여 공평하고 정직하게 논해보건대, 사람들의 이른바 '알려짐이 있다'는 것은 도를 기준으로 하지 사업을 기준으로 하지 않으며, 실상을 기준으로 하지 이름을 기준으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부귀하다 하여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빈천하다 하여 감춰지는 것도 아니며, 살아있다 하여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죽었다 하여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 저절로 빈궁과 영달의 밖에 홀로 서서 길이 천지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옛날 사람으로 명예와 실상을 모두 갖춘 사람은 훌륭하여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지만, 실상이 비록 존재한다 하더라도 이름이 인멸되어 전해오지 않는 자도 또한 어찌 한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날의 유자는 세상이 혼란하고 길이 막혀 나아가지 못하는 때를 당하였으니, 오랑캐로 변하여 불의한 것을 먹지 않고, 분수를 지키고 도를 익히면서 성현을 따르는 것은 이미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또한 알려진 실상이 있다는 것에 가깝다고 해야지 이름이 없다고 해서 가볍게 여겨서는 옳지 않습니다. 하물며 그대처럼 노성(老成)하여 알려진 명성이 뭇사람과 다름이 있는 분은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이제 치발(薙髮)의 재앙은 관계되는 바가 매우 큽니다. 참으로 기미를 보아 떠나고21) 낯을 보아 날아올라22) 도리와 형체를 모두 온전히 하며, 웅장(熊掌)과 물고기를 일찍 판별하여 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취한다면23) 소유하고 있는 명성의 실상이 이것보다 큰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보내준 편지에서 장독(瘴毒)이 사방에서 닥치는 고통과 초목처럼 죽어간다는 한탄은 말할 거리가 못됩니다. 우리들이 목전에 힘써야 할 것은 단지 이와 같은 것뿐입니다. 설사 마을이 잇닿아 있어 아침저녁으로 만난다 하더라도 이 밖에 어찌 더 이상 다른 할 말이 있겠습니까. 삼가 이런 뜻을 토대로 하여 보여주신 옛사람의 시에 차운하여 다음과 같이 읊어봅니다.고금의 사람조차도 벗이 될 수 있으니,남북을 어찌 다시 나누겠는가.마음과 마음이 똑같이 비추는 곳에는,편지가 없더라도 또한 소식을 들을 수 있네.아마 그대의 뜻도 역시 이와 같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風潮日急, 吾儕之命與髪保, 知有歲日。 此日此懷, 只切念及於并世同志而已。 然此同志, 亦復幾人? 固窮守道, 不墜先範, 蒼然獨葆真色如尊執事者, 誠所難得, 則矯首南天, 每恨冠山之遠莫可攀。乃以此時, 過蒙尊惠, 一幅十行, 忽墜寂寞之濱, 既許以可意之人, 又歎以積阻顏面。 尊之於生, 以德以齒, 高固相萬也, 何尊之念生, 亦如生之慕尊? 而又先施之也, 感慰之餘, 愧亦深矣。 亦繼以遭遇之不辰ㆍ一生之無聞爲悲, 不辰之歎, 固所同病; 無聞之云, 尊豈有是? 是必警此孤陋, 而比譬言之耳。奉讀再三, 區區省發多矣。 盖窃嘗究本末始終, 而平正論之, 人之所謂有聞者, 以道不以事業, 以實不以名譽。 不爲富貴而顯, 不爲貧賤而晦, 不爲生而存, 不爲死而亾, 自有獨立窮達之外, 長在天地之間者矣。古人之名實俱存者, 尚矣勿言, 實雖存而名淹沒無傳者, 亦復何限? 今之儒者, 當世亂途窮無前之日, 不化於夷而食不義, 安分講道與聖賢爲從者, 已是難事, 而亦謂近於有聞之實, 不宜以無名而易之也, 况如尊之老成, 所得自有異衆者乎?且今薙禍, 所關甚大。 誠能見幾色擧, 理形兩全, 早判熊魚, 舍生取義, 則其爲有聞之實也, 莫大於是。 而來喻瘴毒四至之苦ㆍ草亾木卒之歎, 皆不足言也。 吾儕當下所勉, 只此而已。 縱使接鄉井而唔朝暮, 此外豈復有他哉? 謹將此意, 次所示古人詩曰 :今昔尙爲友朔南那更分心心同照處無信亦相聞想尊意亦以為然也。 기미를……떠나고 공자가 "기미를 앎이 그 신묘할 것이다. 군자는 위로 사귀되 아첨하지 않고 아래로 사귀되 모독하지 않으니, 기미를 아는 것이다. 기(幾)는 동함의 은미함으로 길(吉)·흉(凶)이 먼저 나타난 것이니, 군자는 기미를 보고 일어나서 하루가 마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知幾其神乎! 君子上交不諂, 下交不瀆, 其知幾乎! 幾者, 動之微, 吉之先見者也, 君子見幾而作, 不俟終日.]〕" 하였다. 《주역(周易)》 〈계사전 하(繫辭傳下)〉 낯을……날아올라 새가 사람의 나쁜 표정을 보면 날아올라 피한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사람이 기미를 잘 살펴야 한다는 뜻이다. 《논어(論語)》 〈향당(鄕黨)〉에 "새는 사람의 나쁜 표정을 보면 날아서 빙빙 돌며 관찰한 다음에 내려앉는다.〔色斯擧矣, 翔而後集〕" 하였다. 웅장과……취한다면 《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에 "생선도 먹고 싶고 곰발바닥도 먹고 싶은데, 이 두 가지를 모두 얻을 수 없다면 곰발바닥을 먹겠다. 삶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의리도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이 두 가지를 모두 얻을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겠다. 〔魚, 我所欲也; 熊掌, 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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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윤성재욱에게 보냄 與安允成在旭 丁丑 정축년(1937) 옛날 사람들에게는 서로 들려줄 도의와 서로 도움을 줄 학술을 지녔는데, 길이 멀고 처한 형편이 달라서 만날 길이 없다면 간혹 때때로 편지로 서로의 뜻을 전달하면서 학문을 강론하여 서로를 증진시켰습니다. 그러므로 후세에도 이를 따라서 만나지 못할 경우에는 편지를 써서 고도(古道)를 실행했습니다. 그렇다면 고도의 역할을 하는 편지는 오로지 받을만한 자가 받고 보낼만한 자가 보내는 것이니, 그 밖의 사람이 감히 갑자기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삼가 들으니, 그대가 요즘 늑삭(勒削)24)의 변고에서 수립한 것은 절개가 높고 기개가 웅장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기운이 산처럼 용솟음치게 하고 기뻐서 잠 못 들게 한다고 합니다. 그 뜻은 웅장(熊掌)을 취하고,25) 믿음은 돼지와 물고기에까지 미쳐서26), 나의 인을 이루자 저들이 저절로 범하지 못한 것은 몸을 희생하여 인을 이룬 것보다 더욱 귀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비록 지역이 천리나 떨어져 있다 할지라도 오히려 가서 축하하고, 이런 일이 옛날에 있었더라도 역시 마땅히 광세지감(曠世之感)27)을 느낄 것인데, 하물며 같은 시대에 살면서 같은 군에 거처하고 있는데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가난과 질병 때문에 지체되어 아직까지 달려가 그대에게 인사드리지 못하고, 우선 이른바 고도의 역할을 하는 편지로써 우러러 그대에게 알리기는 하지만, 스스로 생각할 때 불초한 제가 참으로 감히 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다만 그대가 받는 것이 옳기 때문에 편지를 보낸 것이고, 또한 혹시라도 실상을 은폐한 채 편지를 보내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에 사실을 기술한 것입니다. 이것을 믿기 때문에 부끄러움이 없을 따름입니다.인하여 삼가 충언을 올립니다. 옛사람이 "절의는 도학의 울타리이고, 도학은 절의의 집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또 "기개와 절개는 학문에서 나오는데, 학문만 보이고 기개와 절개는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였습니다. 또 "작은 성취에 안주하여 도의 극치로 나아가는 것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들은 모두 도학이 지극히 존귀함을 말한 것입니다. 다만 그대는 이미 성취한 것에 스스로 만족하지 말고 더욱더 이르지 못한 부분에 힘써서 온전한 덕을 갖춘 군자가 되고자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의 절조에만 뛰어난 선비가 될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우러러 기대하는 지극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일찍이 자정(子貞)의 운에 차운하여 그대의 의리를 칭송한 시를 지은 것이 있으니, 이에 써서 올립니다. 古之人有道義可以相聞, 學術可以相資者, 而道遠勢殊, 無由相見, 則或有時而以書相通, 講學以取相長。 故後世因以不見, 而書爲古道。 然則古道之書, 惟可當者當之, 可致者致之, 非餘外夫人之所敢輒行者也。窃聞執事近日所樹立於勒削之變者, 節高氣壯, 令人氣湧如山, 喜而不寐, 其志取熊掌, 而信及豚魚, 既成我仁, 而彼自不犯者, 尢可貴於殺身而致之也。 雖地在千里, 猶將往賀; 事在前古, 亦當曠感, 而况生并世, 而居同郡乎? 然而貧病見掣, 尚未趍拜於座下, 先以所謂古道書者, 仰凂尊聽, 自惟無狀固所不敢。 然但以執事當之者爲可, 而亦或掩蓋致之者不可也耶? 恃是而無愧焉爾。因此而窃有所獻忠者。 古人云: "節義, 道學之籓籬; 道學, 節義之堂室。" 又云: "氣節從學問中出, 但見學問, 不見氣節。" 又云: "不可安於小成, 而不求造道之極致。" 此皆言道學之至貴也。 惟執事勿以已成者自足, 加勉其所未至者, 求爲全德之君子, 不但爲一節之傑士。 不勝顒望之至。 曾有所次子貞韵, 以壯執事義者, 茲寫呈。 늑삭(勒削) 억지로 머리를 깎는 것으로, 단발령을 의미한다. 웅장(熊掌)을 취하고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생선 요리도 내가 먹고 싶은 것이요, 곰 발바닥 요리도 내가 먹고 싶은 것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지 못할 바엔 생선을 그만두고 곰 발바닥을 취하리라.〔魚我所欲也 熊掌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한 데서 온 말이다. 《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 이곳에서는 아마 취웅장이 사생취의를 가리키는 것 같다. 믿음은 돼지와 물고기에까지 미쳐서 사람의 신의가 진실되면 무지한 돼지와 물고기도 감동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모두…하는 이 구절은 《서경(書經)》 〈함유일덕(咸有一德)〉에 보인다. 신의가 매우 무지한 돼지와 물고기에도 이른다는 의미이다. 광세지감(曠世之感) 동시대에 태어나지 못해 서로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한 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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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사천광엽에게 보냄 與宋士千光燁 乙丑 을축년(1925) 옛사람은 "저 사람이 나를 한번 스승으로 삼으면, 그 평생의 성패와 영욕을 모두 내가 책임진다"28)고 하였습니다. 저는 "다만 스승이 제자를 이와 같이 생각할 뿐만 아니라, 자식을 남에게 맡긴 경우에도 그 평생의 성패와 영욕을 역시 마땅히 그 자식으로 하여금 스승과 함께 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형님 같은 사람은 그런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지난번에 형님의 아들이 저를 완산(完山)에서 만났을 때, 어린 나이에 먼 길을 오느라 병을 앓은 나머지 감기까지 걸렸습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그 근심을 감당하지 못하였을 것인데, 형님은 조금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아들이 홀로 떠나게 맡겨두고는 "스승에게 달려가는 것은 어려운 의리이고, 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려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그러한 아버지에 그러한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미 형님의 부자가 이와 같이 후하게 성패와 영욕을 나와 함께 하였으니, 내가 원래 성패와 영욕을 형의 아들과 같이 하려던 마음을 어찌 감히 더욱 힘쓰지 않겠습니까? 이에 저의 마음을 열어 보여드리니 살펴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昔人云: "彼一師我, 其平生成敗榮辱, 俱我任之。" 余謂: "非但師之視弟如此, 託子於人者, 其平生成敗榮辱, 亦當令其子共之。" 若兄者 可謂其人也。向日令子見余完山也, 穉齡遠程, 病餘觸寒。 人不堪其憂, 兄乃少不動念, 任其隻行曰: "赴師難義也, 死生有命。" 乃知有是父有是子也。 既荷兄家父子之同我成敗榮辱, 若是其厚, 則我之元來同令子成敗榮辱之心, 尢豈敢不勉乎? 茲以披赤, 幸照亮。 옛사람은……책임진다 이 구절은 김택술이 《간재집(艮齋集)前篇》 권4 〈시김동훈(示金東勳)〉에 나와 있는 글을 보고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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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명상구에게 보냄 與朴善明塽九 戊辰 무진년(1928) 3일 전 돌아가시는 길에 날이 급박하게 저물어 어찌 어려움이 없었겠습니까. 날씨가 갈수록 추워지는 요즘, 생활하시는 데에 신명의 가호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럭저럭 지내지만 가족의 근심이 계속 이어져 끝이 없습니다. 학사에는 학생들이 흩어져 떠나가서 당우(堂宇)가 온통 비어 쓸쓸히 홀로 앉아 있노라면 몹시 무료합니다. 세모에 슬픔을 느끼고 쇠약해지는 것은 인정상 그렇지 않음이 없거늘, 하물며 저처럼 실의에 빠져 50년을 살아오면서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나온 날들을 되돌아 생각해보니 아득히 옛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어렸을 때 운명을 점치는 사람이 17세에 일찍 과거에 급제할 것이고, 또 재성(才性)은 적지만 과거공부는 그다지 어렵지 않을 듯 하니 자색 청색 인끈은 지푸라기 줍는 것 같이 쉽게 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인 일로 갑오년에 변란이 일어나 국가의 제도가 바뀜으로써 과거에 합격할 길도 없어지고 원대한 포부도 허사로 돌아가니 운명을 점친 자의 말을 증험하지 못했습니다.소사(蕭寺, 사찰)에서 스승 구산옹(臼山翁, 전우)을 배알하고《좌씨전》을 강론한 인연으로, 구산옹께서 곽림종(郭林宗, 郭泰)이 모용(茅容)을 방문한 고사29)를 인용하여 몸소 저희 집까지 오시니, 선친이 저에게 "'대인(大人)을 보는 것이 이롭다'30)는 말은 덕으로써 말을 한 것이지 전적으로 지위로 말한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영광이 어찌 과거에 합격한 것만 못하겠는가? 네가 마침 17세가 되었으니 역시 운명을 점치는 사람이 헛되이 남의 밥을 먹지 않는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저로 하여금 오로지 학문에 뜻을 두게 하였으니, 덕을 세우고 도를 이루며, 선현을 잇고 후학을 인도하는 것은 설사 (그 성과를) 기약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경서에 힘쓰고 몸을 훌륭하게 하며, 인을 구하고 의를 따르는 것은 크게 뒤쳐지고 싶지 않았습니다.부친이 돌아가시고31) 26세에 가장의 책임을 지게 되니, 훌륭한 가업이 모두 사라지고 백발이 성성한 모친께서 당(堂)에 계시어 봉양하느라 7년 동안 몸소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경서를 읽는 날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우환과 곤고함이 좌우에서 볶아대어 옛날에 익힌 것도 수시로 잊어버렸으니, 새로운 지식을 어찌 논하겠습니까? 사람들이 "학문의 성취 여부는 운수가 있다"라고 한 말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거듭 상환(喪患)을 만나서 3년 동안 여막살이를 하고 돌아오니, 가세가 더욱 기울어져 동서로 떠돌며 어느 곳에 이르러 정착해야 할지 계책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맛있는 음식을 제공할 땅이 없으니 부지런히 농사짓는 일과 어찌 친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다시 글을 읽으며 연구에 힘쓴 지가 1년여가 되었고, 이전에 했던 학문을 다시 다스려 점차적으로 옛것을 회복하였으며, 다시 정진하여 정미한 곳으로 나아가니 간혹 새롭게 얻은 부분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바야흐로 또 분비(憤悱)32)가 계속 이어져 기필코 터득하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았습니다.용사(龍蛇)33)가 재앙을 고하여 스승께서 갑자기 돌아가시자 맹인이 도와주는 사람을 잃은 것 같았으니34), 갈팡질팡 어디로 가겠습니까? 학업을 마칠 길이 없음을 한탄하면서 어떻게 마음을 가누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게다가 사문(師門)에 일이 많고 스승의 의리를 파괴하는 변란이 있음에 이르렀는데도 세상에는 믿을 만한, 훌륭한 문장이나 억센 주먹이 없었습니다. 저같이 졸렬한 사람도 차마 앉아서 보고 있을 수 없어서 함부로 제대로 말을 해야 하는 일에 참여하였지만, 저들을 복종시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저들에게 노여움을 당하여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하고 모멸을 수없이 당하였습니다. 이에 나를 돌이켜보고서 나에게서 허물을 구하니, 내 몸에 축적하고 있는 것이 부족하여 다른 사람에게서 허물을 구하고 비난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다시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운명과 사변이 반복무상하여 뜻과 학업을 성취하지도 못했는데 머리가 먼저 세어버렸으니 한탄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근년 이래로 조용한 곳에서 자신을 수양하며 만년을 마칠 계획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방에서 학생들이 책상자를 짊어지고 이곳에 이르니, 다른 사람에게 베푼 선(善)은 없다 하더라도 독서한다는 명분은 오늘날 세상에 보기 드물기 때문에 그들을 허락했습니다. 그랬더니 대부분 지레 겁을 먹고(風聲鶴唳)35) 떼 지어 나오고 떼 지어 들어가며, 아침에는 유생의 규율을 배우고 저녁에는 세속의 습속을 답습하니, 불행히도 율곡의 이른바 '보탬은 없고 기롱만 산다'36)는 것에 가깝습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교학상장(敎學相長)37)의 이익을 취하고자 해서이고, 또 7개월에 회복하는 씨앗38)이 있기를 바라서입니다. 만약 끝내 이와 같은 데서 그친다면 일찍이 그만두는 것이 더 나은 것만 못합니다.또 학업을 전수하고 질문에 대답함에 밤낮으로 끝이 없어 틈을 낼 여유가 없으니 그 우열을 가려서 그들 중에서 서로 가르치게 하고 싶지만, 평등하게 대해야 하는 그들에게 후대하고 박대하는 혐의가 없지 않으니 고민만 할 뿐 끝내 좋은 계책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의 분수에 있어서 이치를 연구하고 마음을 기르는 공에도 진실로 큰 해로움이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을 해봐도 이 세상에 살면서 달리 잘하는 일은 없고, 오직 책상 위의 많은 경전을 읽고 천하의 많은 의리를 궁구하면서 마음속에 많이 응축한 것을 써내어 평생의 뜻과 바람에 응하려 하지만 진실로 이처럼 부질없이 사라질까 두렵고, 실로 이 생애를 잘못 보낼까 슬픕니다. 삼가 이후로는 채서산(채원정)이 손님을 거절한 법문(法門)39)으로 자신의 수양만 관리하고 다른 사람이 와서 배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야겠습니다. 그러나 간혹 간절하게 요구하며 그만두지 않는 자는 승척(繩尺)40)을 가지고서 규율하기를 마치 관씨(管氏)의 제자직(弟子職)과 진씨(眞氏)의 교자첩(教子帖) 및 석담(石潭)의 혁구습장(革舊習章) 등의 책처럼 하게 하여 하나씩 따라 실천하게 해야겠습니다. 그리하면 잘하는 자는 훗날에 우뚝한 성취를 바랄 수 있고, 잘하지 못하는 자는 스스로 오래되지 않아 물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 방법은 거의 약간의 수고로움과 비난을 덜 수가 있고, 약간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 같습니다.궁한 처지에 한 해가 바뀌어서 온갖 생각이 재처럼 식었는데, 오직 이 한 가지 일만은 그 근심을 다스리기가 어렵습니다. 우리 형님의 빼어난 견해는 제가 미칠 바가 아니니, 감히 이렇게 질문을 드립니다. 잘 모르겠지만, 어떻게 가르쳐주시겠습니까? 三昨歸程, 得無迫曛見惱? 天寒比劇, 起居有相。 弟狀且過, 而眷憂相續, 了無涯岸。 社生散去, 堂宇一空, 悄然獨坐, 殊甚無聊。 歲暮感悵向衰, 人情盖莫不然, 矧如弟之佗傺半百, 一無所成者乎? 追思曾經, 蒼蒼然若說古史。幼時談命者謂年十七當捷巍科, 且薄有才性, 於功令之業, 若不甚難, 紫拕青紆, 擬將拾芥。 夫何變生青馬, 國制更張, 龍點無路, 鵬圖歸虛, 談命者說不驗矣。夤緣蕭寺拜臼山翁而講《左氏傳》, 臼山翁引郭林宗訪茅容故事, 躳駕弊廬, 先人謂不肖曰: '利見大人, 有以德言者, 不專言位也。 今日光榮, 何下捷科? 汝適丁十七, 亦信談命者之不虛喫人飯。' 於是使之專意學問, 立德成道, 繼往開來, 縱不敢期, 劬經淑身, 求仁由義, 不欲多讓。風樹不待, 卄六當室, 青氊掃地, 白首在堂, 七載躳耕, 溫經無日。 加以憂患困衡, 左煎右熬, 舊得隨失, 新知奚論? 人之言曰"學之成否, 有數存焉", 信矣。 逮夫荐遭喪禍, 三載守墓而歸, 則家益剝落, 東漂西泊, 何所止届, 無計可爲。 然甘旨之供無地, 稼穑之勤奚親? 乃復尋數窮研之是務者爲有年, 申理前業, 漸次復舊, 進而向精微去處 或不無一斑新得矣。 方且憤悱相尋, 期期不得不措也。龍蛇告厄, 泰山奄頹, 瞽者失相, 倀倀何之? 慨卒業之無所, 不知何以爲心。 重以門墻多事, 至有破敗師義之變, 而世無大筆ㆍ麁拳之可恃者, 則如吾之孱劣, 不忍坐視, 妄與能言之役, 不惟彼之不服, 反遭其怒。 幾殞性命, 飽喫汙衊。 反以求之, 以所藏乎身者未足, 以求人非人故也。 復誰怨尢? 運命事變, 反覆無常, 志業未就, 髪先星星, 可勝歎哉?比年以來, 欲靜處自修, 爲收之桑榆之計, 忽有四面負笈之沓至, 顧無及人之善, 以讀書之名, 今世罕聞也, 故許之。 則率多風聲鶴唳, 旅進旅退, 朝受儒規, 暮蹈俗習, 栗翁所謂無補貽譏者, 不幸近之。 夫所貴乎教學者, 欲其取相長之益, 且望其卓然有七日種子者, 若終如此而止, 不如早已之爲得。且傳課酬問, 匝晝連夜, 無片隙可乘, 欲揀其優劣, 使自中相教, 則一視之下, 不無厚薄之嫌, 只得忍煩耐惱, 終無善策。 於自己分上, 研理養心之功, 實有大害。 自料生乎斯世, 無他能事, 惟欲讀了案上多少經傳, 究了天下多少義理, 寫了齊中多少蘊抱, 用酬生平志願, 誠恐若此乾沒, 實悲枉過此生。 窃欲從茲以往, 用蔡西山拒客法門, 只管自家進修, 不許別人來學。 其或懇求不已者, 純用繩尺而律之, 如管氏弟子職, 真氏教子帖, 石潭革舊習章等書, 使之一一循蹈。 其能者可望他日之卓然, 不能者自應不久而退。 此法庶可以省得幾分勞攘, 取得幾分效益矣。竆途換歲, 萬念灰冷, 惟此一事, 耿耿難裁。 吾兄超詣之見, 非弟所及, 茲敢質之。 未知何以見教? 곽림종이 모용을 방문한 고사 곽태가 모용의 집에 유숙한 다음 날 아침에 모용이 닭을 잡자 곽태는 자기를 대접하기 위한 것인 줄 알았다. 이윽고 모용이 그것을 모친에게 올린 뒤에 자신은 객과 함께 허술하게 식사를 하자, 곽태가 일어나서 절하며 "경은 훌륭하다〔卿賢乎哉〕"라고 칭찬하고는 그에게 학문을 권하여 마침내 덕을 이루게 했다. 《후한서(後漢書) 卷68 〈곽태열전(郭泰列傳)〉 그런데 《후한기(後漢紀)》 권23 〈효령황제기(孝靈皇帝紀)〉에는 "'경이 이와 같으니 바로 나의 벗이다(卿如此, 乃我友也)'라고 하고는 일어나서 마주 대하고 읍(揖)한 뒤에 학문을 권하였다"라고 되어 있다.《후한기(後漢紀)》는 진(晉)나라 원굉(袁宏)이 각종 자료들을 종합하여 정리한 사서(史書)로 모두 30권인데, 가정이 이 책을 많이 참고하며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대인(大人)을……이롭다 《주역(主役)》 〈건괘(乾卦)〉 구오(九五) 효사(爻辭)에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만나는 것이 이롭다.〔飛龍在天, 利見大人〕" 하였다. 부친이 돌아가시고 원문의 풍수(風樹)는 풍목(風木)과 갗은 말로 생전에 어버이께 효성을 다하지 못해 사후에 슬퍼하는 마음을 말한다. 춘추 시대 때 공자(孔子)가 길을 가는데 고어(皐魚)라는 사람이 길에서 칼을 안고 슬피 울고 있기에 까닭을 물었더니,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여도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고 싶어도 어버이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라고 하고는, 서서 울다가 말라 죽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한시외전(韓詩外傳)》 권9 분비(憤悱) 분발(奮發)과 같음. 《논어(論語) 〈술이(述而)〉의 "마음속으로 깨달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계도해 주지 않고, 표현할 길이 없어 애태우지 않으면 계도해 주지 않으며, 한 귀퉁이를 알려주었는데, (그것을 가지고) 나머지 세 귀퉁이를 반증하지 못하면 다시 알려 주지 않는다.〔不憤不啓, 不悱不發,擧一隅不以三隅反, 則不復也〕"에서 유래한 말이다. 용사(龍蛇) 용사세(龍蛇歲)는 십이지(十二支)의 진년(辰年)과 사년(巳年)으로, 사람이 죽는 액운이 든 해를 말한다. 후한(後漢)의 정현(鄭玄)이 병으로 관직을 그만두고 집에 돌아와서 지내는데, 하루는 꿈에 공자가 나타나서 "일어나라, 일어나라. 올해는 진년이고 내년은 사년이다.〔起起, 今年歲在辰, 來年歲在巳〕"라고 하였다. 꿈에서 깨어 참술(讖術)로 맞추어 보고 자신의 목숨이 다할 줄 알았더니, 실제로 그해 6월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후한서(後漢書)》 권65 〈정현열전(鄭玄列傳)〉여기에서는 스승인 전우의 죽음을 의미한다. 임진왜란을 용사(龍蛇)의 변(變)이라고도 하였다. 맹인이...같았으니 《예기(禮記)》 〈중니연거(仲尼燕居)〉에 "예법이 없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마치 소경이 아무 도움 없이 길을 가는 것과 같으니, 갈팡질팡하여 과연 어디로 가겠는가.〔治國而無禮, 譬猶瞽者之無相, 倀倀乎其何之?〕"라는 구절을 줄여서 인용한 표현이다. 풍성학려(風聲鶴唳) 겁을 집어먹은 사람이 당치 아니한 사물에도 놀라는 것을 의미함. 중국 동진(東晉) 때 진왕(秦王) 부견(符堅)이 비수(淝水)에서 대패하고 바람의 소리와 학(鶴)의 소리를 듣고도 진(晉)나라의 추병(追兵)이 아닌가 하고 놀랐다는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이다. 보탬은 없고 기롱만 산다 이이는 《격몽요결(擊蒙要訣)》 〈서(序)〉에서 "내가 스승이 될 만한 게 없음을 부끄럽게 여기면서도 처음 학문하는 사람들이 방향을 모르고, 굳은 의지도 없으면서 그냥 배우겠다고 한다면 피차에 도움 될 것이 없고 도리어 남의 조롱만 사게 될까 걱정스러웠다. 〔余慙無以爲師, 而且恐初學不知向方, 且無堅固之志, 而泛泛請益, 則彼此無補, 反貽人譏〕라고 하였다. 교학상장(敎學相長)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학문을 해 본 다음에야 자기의 재주가 부족함을 알게 되고, 가르쳐 본 다음에야 어려움을 알게 되나니, 부족한 줄을 안 다음에야 스스로 반성하는 것이며, 어려움을 안 다음에야 스스로 열심히 노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이 서로 증진한다.' 한 것이다.〔學然後知不足, 敎然後知困, 知不足然後能自反也, 知困然後能自强也. 故曰:敎學相長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7개월에……씨앗 《주역(周易)》 〈복괘(復卦)〉괘사(卦辭)에 "칠일 만에 되돌아오니, 갈 데가 있는 것이 이롭다.〔七日來復, 利有攸往〕" 했는데, 7일(日)의 일(日)은 월(月)의 뜻으로서 7개월 만에 음양이 서로 왕래 소장하다가 동짓달에 하나의 양(陽)이 발생하는 것을 이른다. 이는 양도(陽道)가 회복되는 시초로, 암울한 시대가 가고 문명의 시대가 오거나 소인의 득세가 끝나고 군자의 시대가 오는 것을 상징한다. 전우(田愚)가 "이 아이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실로 7개월 만에 회복될 씨앗입니다. 제가 본래 사도(師道)를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역시 어찌 후배를 권면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此雖年少, 實七日復之種子. 愚固非有師道, 亦豈無奬勸後進之心〕"하였다. 《간재집(艮齋集)後篇》 권2 〈답신백삼(答愼伯三) 원성(元晟) ○갑인(甲寅)〉 채서산……법문 채원정이 서산에 머물 때 주자가 찾아가 만나보려고 했으나 채원정이 한결 같이 손님을 심하게 거절해서 만나보지 못했던 일을 가리킨다. 《朱子大全(주자대전)》 〈答蔡季通(답채계통)〉 승척(繩尺) 표준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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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명에게 보냄 與朴善明 已卯 기묘년(1939) 일전에 저를 찾아주셨는데 제가 아픈 와중에 심수(尋數)41)를 일삼는 것을 보고 "사업을 완성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지만 어찌 몸을 보호할 것을 생각지 않는가?"라고 깨우쳐주셨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저를 아끼는 마음은 깊지만 저를 깊이 알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업(事業)'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마땅히 행해야 할 도에 나아가는 것을 '사(事)'라 하고, 고유한 덕을 완성하는 것을 '업(業)'이라고 하니, 이것은 우리 유자(儒者)의 사업입니다. 드러낼 만한 공명을 '사(事)'라 하고, 칭송받을 만한 이익과 은혜를 '업(業)'이라고 하니, 이것은 세속의 사업입니다. 우리 유자의 학문을 통하여 사업을 이룬다면, 비록 천지에 높이 내걸만한 공리(功利)가 있다고 할지라도 단지 그것이 도덕이 된다는 측면만을 보기 때문에 굳이 사업이라고 일컬을 필요는 없습니다. 세속적인 견해에 기반하여 사업을 이룬다면, 비록 무리에서 뛰어나고 세상에 높은 도덕이 있다고 칭송받더라도 결국은 공리적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사업 역시 훌륭하다고 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그러므로 도덕으로 마음을 삼는 사람은 사업이 그 속에 있고, 사업으로 마음을 삼는 사람은 도덕과 멀리 떨어지게 되니, 처음에는 단지 한 생각의 차이이지만 끝내는 천리나 멀어지게 됩니다.저는 비록 무능한 사람이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저의 마음은 도덕에 있지 사업에 있지 않습니다. 지금 형님께서는 제가 몇 권의 문장을 짓는 것을 사업으로 삼는다고 생각하고, 또 사업을 중시하고 성명(性命)을 경시하는 자인 듯하다고 생각하면서 저를 걱정하고 일깨워주시는데, 천하에 어찌 도에 뜻을 두면서도 책을 써서 이름을 전하기 위하여 부친의 유지를 생각하지도 않고 불효를 범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제가 이 때문에 "저를 깊이 사랑하지만 저를 깊이 알지 못하시는 것 같다"고 말한 것입니다.또한 옛날부터 충효로 큰 절개를 드러내고, 영웅으로 큰 이름을 날려 그 사업이 당세에 빛난 자가 어찌 한정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랜 세월 지나면 침체되어 쉽게 사라지니, 문장은 또 작은 것이라 더욱 전해지기 어렵고 사라지기 쉽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육일거사(六一居士) 구양수(歐陽脩)가 이미 언급했으니,42) 제가 비록 어리석지만 역시 이런 일은 하지 않습니다.또 극대화하여 말한다면, 성현의 위대한 사업이라고 할지라도 후천세계에서는 당연히 그 이름을 알지 못할 것이니,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업으로 이름을 전하려고 하는 것은 모두 망령된 짓입니다. 비록 그러하지만 성현이 사업으로 자신을 위하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까닭은, 전해지는 것이 있다 하여 그것을 하는 것도 아니고, 전해지는 것이 없다 하여 그것을 그만두는 것도 아닙니다. 역시 단지 "마땅히 해야 할 도에 나아가는 것을 사(事)라고 하고, 고유한 덕을 완성하는 것을 업(業)이다."라고 하여, 오직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는 성(性)을 따르고 자신이 마땅히 가야할 길을 따를 뿐이므로 비록 버리고 떠나고 싶더라도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빈부와 귀천, 병건(病健)43)과 우락(憂樂)44)을 막론하고 모두 마땅히 사업을 행할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여 대성(大成)하면 성인이 되고, 그 다음으로는 현인이 되고, 작게 이루면 사(士)가 됩니다.지금 제가 비록 가난하고 병이 들었지만 감히 게을리 하거나 중단하지 않고, 여전히 연구하여 기록하는 노력을 일삼는 것은 조금이라도 도에 대한 견해를 진척시켜 대략이나마 죽기 전에 도에 나아가고 덕을 이루는 사업을 축적하여 끝내 삼가고 조심하는 선비가 되는 것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일 뿐입니다. 저 구구하게 문자로 이름을 전하는 것이 무슨 사업이 될 만한 것이 있다고 병중에 이 일로 정력을 다 써서 목숨을 보존하지 못할 지경에까지 이르겠습니까? 다만 예로부터 붕우 간에 지기(知己)가 되는 일은 참으로 드문 일이고, 세상이 또 사업의 진위에 대해 어두운 것도 오래되었으니, 형님께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아, 슬픕니다! 저는 비록 마음이 사업에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우리 유자가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사업 같은 경우에는 어찌 끝내 마음이 없겠습니까?앞으로 붓 하나로 천성(千聖)이 도통을 서로 전한 뜻45)을 밝히고, 천고에 시비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안건을 결정하며, 올바름을 해친 이단(異端)과 잡류(雜流)의 해친 글들을 분별하고, 패제(悖弟)와 적자(賊子)들이 윤리를 상실한 죄를 성토할 것입니다. 아울러 예의를 숭상하고 재화를 뒤로 하며 외교관계를 닦고 전쟁을 종식하는 논설로 옛것을 끌어다 지금을 증명하고, 이치를 따지고 지난 자취를 증험하여, 그것을 입언하고 책으로 지어 일세를 깨우치고 천하에 배포한다면, 아마 조금은 이미 어두워진 도를 밝히고 이미 망가진 윤리를 부지하며 이미 혼란스러워진 세상을 구원하고 이미 곤궁해진 백성의 고통을 완화해 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선비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바로 오늘날 저의 뜻입니다. 그러나 헐벗은 가난은 그 형세가 갖가지로 괴롭히고 필력도 없으며, 또 도와서 함께 이루어줄 동지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망망한 천지에서 배회하며 홀로 서서 긴 한숨만 쉴 뿐입니다. 심기가 촉발되어 감정이 일어나 말을 함부로 하여 형님의 눈을 더럽혔습니다. 부디 죄라고 여기지 않으시겠습니까? 日前委顧, 見弟病中有事尋數, 喻"以成事業則然矣, 獨不念保身乎?" 窃以爲愛我則深, 而知我則淺也。 夫事業有兩般, 進當行之道之謂事, 成固有之德之謂業, 此吾儒之事業也。 功名可著之謂事, 利惠可稱之謂業, 此世俗之事業也。 由吾儒之學而成事業, 則雖有掀天揭地之功利, 但見其爲道德, 而不必稱以事業也。 由世俗之見而成事業, 則雖稱有出類高世之道德, 究不出功利之念, 而事業亦不足壯矣。 故以道德爲心者, 事業在其中; 以事業爲心者, 去道德遠, 而只此一念之間, 終至千里其遙矣。弟雖無似, 乃若其心則在於道德, 不在事業。 今兄認我爲著得幾卷文字作事業, 而又重事業而輕性命者然, 悶慮而戒喻之, 天下安有欲著書傳名, 而不念親遺, 用犯不孝之志道者乎? 吾故曰: "愛我則深, 而知我則淺也。"且自古忠孝大節ㆍ英雄大名, 其事業足以耀當世者何限? 然久則寢寢以易泯, 文章又其小者, 尢傳難而泯易也。 六一翁已言之, 弟雖癡呆, 亦不為是。又極而言之, 雖聖賢之大事業, 在後天地, 亦應不知其名。 夫人之於世, 欲以事業傳名者, 皆妄也。 雖然, 聖賢之所以以事業自爲與教人也, 則不爲其有傳而作之, 爲其無傳而輟之, 亦惟曰: "進其當行之道之謂事, 成其固有之德之謂業。" 惟其率自家固有之性, 而循自家當行之路, 故雖欲舍去而不得也。" 是以不問貧富貴賤ㆍ病健憂樂, 皆當有行事作業之地。 如此而大成則聖, 其次則賢, 小成則士。今弟雖貧病之中, 不敢怠忽間斷, 隨分有事於竆研記劄之功者, 欲以少進一斑之見, 畧資進道成德之事業於未死之前, 終不失爲謹飭之士爾。 彼區區文字傳名, 何足爲事業, 而以此弊精疲力於病中, 至於不保身命乎? 但從古以來, 朋友間知己, 固已鮮矣, 世又昧於事業之真假也久矣, 宜乎, 兄之有此言也。 嗟呼! 悲夫! 弟雖非心在事業者, 若吾儒自在之事業, 則豈終無心?盖將以一筆, 明千聖道統相傳之旨, 決千古是非未定之案, 辨異端雜流害正之書, 討悖弟賊子喪倫之罪, 并以尚禮儀後貨財修交好息戰爭之說, 援古證今, 質理驗跡, 立之言而著之書, 喻一世而布天下, 庶少得以闡已晦之道, 扶已斁之倫, 救已亂之世, 紓已困之民, 此正今日士子當行之事, 正今日弟之志也。 而赤立之貧, 其勢百掣, 筆亦無之, 並無同志助成者。 茫茫天地徘徊獨立, 只有喟然長吁而已。 觸機生感, 漫說瀆覽, 幸不以爲罪否? 심수(尋數) 심행수묵(尋行數墨)의 준말로, 책을 보는 일을 말한다. 육일거사(六一居士)……언급했으니 구양수는 "삼대와 진한으로부터 책을 저술한 사람이 많은 이는 백여 편에 이르렀고 적은 이도 삼사십편에 되었다. 이런 사람들을 이루 헤아릴 수가 없지만 흩어지고 사라지며 닳아 없어져서 백에 한둘도 보존되지 못했다. …… 결국에는 초목·금수·중인과 함께 똑같이 사라지는 데로 귀결되니, 말에 의지할 수 없음이 대체로 이와 같다.〔自三代秦漢以來, 著書之士, 多者至百餘篇, 少者猶三四十篇. 其人 不可勝數, 而散亡磨滅, 百不一二存焉. …… 而卒與三者, 同歸於泯滅, 夫言之不可恃也〕"라고 하였다. 〈송서무당남귀서(送徐無黨南歸序)〉 병건(病健) 병든 것과 건강한 것을 말한다. 우락(憂樂) 근심하는 것과 즐거운 것을 말한다. 천성(千聖)이 도통을 서로 전한 뜻 순(舜) 임금이 우(禹) 임금에게 제위(帝位)를 물려주면서 말한 '유정유일 윤집궐중(惟精惟一允執厥中)'을 줄인 말로,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정하게 하고 한결같이 하여야 진실로 그 중도(中道)를 잡을 것이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하였다. 주자(朱子)는 유정(惟精)은 지(知) 공부, 유일(惟一)은 행(行) 공부에 소속시키고, 이 16자(字)를 '천성상전지법(千聖相傳之法)'이라 하여 도통(道統)의 원조로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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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명에게 답함 答朴善明 庚辰 경진년(1940)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형님을 방문하고 싶은데, 형님이 저하고 서로 친하여 의리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감히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합니다.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매우 가소롭습니다. 맹자는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똑같이 옳다고 여기는 것은 리와 의이다."46)라고 했으니, 천하에 어찌 같지 않은 의리가 있겠습니까?"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똑같이 옳다고 여기는 것"으로 기준을 삼는다면, 이쪽이 옳으면 반드시 저쪽이 그르고 저쪽이 그르면 반드시 이쪽이 옳으니 만약 다른 사람이 옳고 내가 그르다면 나는 마땅히 견해를 바꾸어 그의 견해를 따라야 할 것이고, 만약 내가 옳고 다른 사람이 그릇되어 일깨워주었는데도 고치지 않는 경우에는 관련된 것이 크니 마땅히 분별하여 물리쳐야 합니다. 그가 의리는 서로 같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그가 인식하는 의리는 한 개인의 사적인 견해일 뿐 모든 사람들이 마음으로 똑같이 여기는 의리가 아닙니다. 오직 그는 자신의 견해만을 의리라고 여기고 자신의 신념을 옳다고 하기 때문에 역시 '누구나 똑같이 여기는 마음'에서 나온 타인의 견해에 대하여 불복할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의리가 아니어서 옳지 않다고 하며 배척하니, 이런 경우를 일러 의리를 알지 못한다 합니다. 비록 그러할지라도 이미 이와 같다면 역시 그만입니다. 그런데 지금 옳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과 친한 사람을 방문하고 싶어 하면서, 그 사람에 대하여 약간의 사모하는 뜻을 보이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은 또 무슨 경우입니까? 양화(陽貨)가 공자(孔子)에게 한 것47)처럼 잠깐 수단을 써서 형님으로 하여금 먼저 와서 자신을 만나게 하려는 게 아닙니까? 만약 그렇다면 더욱 가소롭습니다.이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형님이 스스로 나는 간재의 문도가 아니라고 말한 것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또한 타당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 사람이 이미 음성의 오진영과 당여가 되어 스승을 무함했다면, 의리는 천하에 누구나 인정하는 공변된 것이고, 선비는 공정한 의론이 있는 곳이니, 어찌 유독 간재의 문도에만 그 일이 해당되고, 다른 선비는 관련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부친을 소를 훔쳤다고 무함하는 자가 있는데, 이웃집 사람이 형님에게 '나와 그 집은 친족이 아니니 무슨 관련이 있다고 그 자식의 죄를 논하겠는가.'라고 말한다면 형님은 장차 그 말이 이치에 맞다고 인정하시겠습니까? 이 일이 어찌 이것과 다르겠습니까? 이점에 대해서도 또 생각해볼 일입니다.우연히 생각이 이에 미쳐서 대강 들어 삼가 서술하니 한강(寒江)형과 함께 보면서 그 정묘한 곳까지 살펴주시고, 불필요한 일을 한다고 비웃지 마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것은 참으로 격물치지의 한 가지 일일 따름입니다. 某人之語人以欲訪兄, 而以與弟相親, 義理不同, 故不敢云云。 歸而思之, 甚可笑也。 孟子曰: "人之所同然者, 理也義也。" 天下豈有不同之義理乎?準之以人心之同然, 而此是則必彼非, 彼是則必此非, 茍人是而我非, 則當改見而從之, 若我是人非, 喻之不改, 而所係者大, 則當辨斥之。 渠以義理爲不同之物, 則是所認以爲義理者, 乃一己之私見, 非人心之同然也。 惟其以己見爲義, 而自信為是, 故亦於人見之出於同然者, 非惟不服, 反以爲非義不是, 而斥之, 此之謂不知義理也。 雖然, 既如此則亦已矣。 今乃欲訪與所不是者相親人, 而畧示景仰之意, 以語夫人者, 又何也? 無乃乍用手段, 使其先來見己, 如陽貨之於孔子也耶? 若然則尢可笑也。此則既然矣, 至於兄所自言我非艮徒, 何關之有? 亦恐未安。 渠既黨陰而誣師, 則義者天下之公, 士者公論之所在, 豈獨艮徒有事, 而他士可無關乎? 人有誣其父盜牛者, 而其隣人復於兄曰: "我與其家非族親, 何關而論其子之罪乎云爾,' 則兄將許其言之合義乎? 何以異於是? 此又可思者也。偶念及此, 聊舉仰陳, 幸與寒江兄同看, 而究其極致, 勿以爲多事而笑之, 如何? 此實竆格之一事故耳。 사람들이……의이다 맹자는 "입이 맛에 있어서 똑같이 즐김이 있고, 귀가 소리에 있어서 똑같이 들음이 있으며, 눈이 색에 있어서 똑같이 아름답게 여김이 있다고 하는 것이니, 마음에 이르러서만 홀로 똑같이 옳게 여기는 것이 없겠는가? 마음에 똑같이 옮게 여기는 것은 어떤 것인가? 리이며 의이다.〔口之於味也, 有同耆焉, 耳之於聲也, 有同聽焉, 目之於色也, 有同美焉. 至於心, 獨無所同然乎? 心之所同然者何也? 謂理也, 義也〕"라 했다. 《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 양화(陽貨)가 공자(孔子)에게 한 것 양화가 공자를 만나려 하였으나 공자가 만나주지 않자 먼저 돼지를 선물로 보낸다. 이에 공자는 양화가 없는 틈을 타서 찾아가 사례하고 돌아오는 길에 공교롭게 양화를 만나게 된다. 그리하여 양화는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이 일은 《논어(論語) 〈양화陽貨〉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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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계일건익에게 답함 答黃啟一 鍵翼○乙酉 을유년(1945) 경술국치에 나라가 없어진 이후로부터 심장이 무너지고 창자가 뒤틀어져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찌할 수는 없었으니, 다만 삼려대부 굴원처럼 오래 살아서 세상을 벗어나 신선이 되려는 소원79)을 지녔으니 상황이 어떻게 결말이 나는지를 보고 싶었습니다. 천추의 밝은 하늘이 회복되어 한 조각 동토의 땅이 독립을 하니, 온 백성이 춤을 추고 사방에서 환호하였습니다. 진실로 함께 모두 축하할 일이지만, 고통을 참으며 구차하게 산 세월이 36년입니다. 늙어 머리가 세어졌을 때 다시 독립의 오늘을 보게 되니, 비로소 삼려대부의 소원을 이룬 것을 스스로 다행으로 여깁니다. 매우 기쁘고 대단히 통쾌한 것이 홀로 만난 경사인 듯한 느낌이 있습니다. 생각과 꿈이 서로 위로하고 몸뚱이와 그림자가 번갈아 축하하니, 어떻게 마음을 먹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때에 특별히 은혜로운 편지를 주셔서 국가와 집에서의 공적이고 사적인 기쁨과 다행함을 자세히 진술한 후, 마지막에 '공의 일생이 근심스럽고 울분에 차 있다가 늙어서 이런 경사를 보았다'고 말씀하시니 역시 저 혼자 만난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를 알아주고 저를 사랑하는 것이 깊지 않으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러할지라도 저에 대해 도가 완성되고 식견이 풍부하여 장차 조정의 원로가 될 것이라는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생각해볼 때, 산야에서 누추하게 살아서 늙을수록 더욱 황폐해져 처음부터 수기치인의 방법을 터득한 것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매우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설사 한두 가지 취할만한 천박한 견해가 있다 하더라도 쇠하여 병이 더욱 심해지고 나이는 옛사람이 벼슬을 그만둘 때에 가까워졌으니, 어떻게 조정 일에 참여하여 들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당국의 여러 영특하고 용감한 사람들의 부흥에 대한 대책과 박학하고 명철한 사람들의 경제정책에 의지하여 앉아서 태평을 누리면서 일생을 마칠 수 있을 뿐입니다. 고명한 그대의 재주와 식견은 이미 집안을 다스리는 데에서 확인되었으니, 이를 나라에 미룬다면 어디든지 도달하지 못하겠습니까. 나이도 중년에 훨씬 미치지 못했으니 세상에 나가 벼슬하는 것은 바로 이때라 할 수 있습니다. 바라건대 스스로 작게 여기지 말고 더욱 떨쳐 힘을 쓰고, 더욱더 경사(經史)에 공을 들이고 널리 석학들과 교유하여 눈앞에서 실학을 이루고 미래에 위대한 공업을 세우십시오. 저는 큰 기대를 이길 길이 없습니다. 粵自庚戌無國以來, 崩心摧腸, 如不欲生。然亦無如之何, 只有屈三閭長年度世之願, 欲觀其出場。千秋之皓天來復, 一片之青邱獨立, 萬姓鼓舞, 八方歡呼。固所同慶, 而顧此忍痛茍活三十六年, 至老白首, 而復覩今日, 自幸始遂三閭之願, 而深喜大快, 有若獨當之慶, 思與夢相慰, 形與影迭賀, 不知所以爲懷。乃以此時, 特賜惠訊, 既以備陳在國在家公私之喜幸, 終以賤子生平憂憤, 老見此慶喩之, 亦有若一人獨當者。然非相知相愛之深, 烏能及此? 雖然, 謂賤子道成識富, 行將蓍龜乎朝著, 則誤矣。念山野陋生, 老益荒蕪, 初無得乎修己治人之術, 自知甚明。設有一二淺見之可取者, 衰病轉甚, 年近乎古人致事之時者, 何能與聞乎朝著事乎? 只得賴當局諸位英武興復之策ㆍ博哲經濟之政, 坐享太平而終身已矣。至於高明才識, 已驗於理家, 推之邦國, 何所不達? 年齡遠不及中身, 出世強仕, 此正其時。幸勿自小, 亟加奮勵, 益用功於經史, 廣從遊於鴻碩, 成實學於當下, 建偉業於前頭, 區區不勝祈望焉。 삼려대부……소원 48쪽 주)8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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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에게 보냄 與金 己卯 기묘년(1939) 당신 조부의 유고는 아마 간행하여 배포한지가 이미 오래되었을 것인데 저는 아직까지 받아 읽어 보지 못했습니다. 잘 모르겠으나, 무슨 곡절이 있습니까? 아니면 다른 연고가 있어서 아직까지 간행의 일을 마치지 못한 것입니까? 소식을 듣고 싶습니다. 또한 받들어 고할 일이 있습니다. 간옹선사(전우)가 선생에게 적통을 전한 직접적 근거는 편찬한 행장과 제문에는 보이지 않고, 오직 노인오(노동원)에게 답한 편지와〈눈 내리는 군산에서 김덕경을 추억하다[羣山雪中憶金德卿]〉의 시에서만 보이는데, 그 시는 원고에 들어가 있지 않고 편지는 진주본에서 삭제를 당했습니다. 비록 화도수정본과 용동본 두 책에 실려 있다고 하더라도 이제 이미 진주본이 성행하고 있으니, 사람 중에 진주본만 본 자는 어떻게 선생에게 적통이 전해진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제가 생각할 때, 간행된 원고에는 반드시〈부록〉·〈행장〉·〈제문〉·〈만사〉 등이 있어야 합니다. 선생을 위해 지은 것으로 쓸 수 있는 모든 것은 마땅히 모두 다 기록해야 하고, 간옹이 노인오에게 답한 편지와〈군산설중억김덕경〉시도 함께 써서 사람들로 하여금 선생에게 적통이 전해졌다는 것을 명확히 알도록 해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尊王考遺稿, 想刊布已久, 而鄙人則尚未奉讀, 未知何委? 抑有他故, 猶未訖役? 願聞願聞。又有所奉告者, 艮翁先師傳統先生之直據, 不見於所撰《行狀》·《祭文》, 惟見於答盧仁吾書, 及《羣山雪中》詩, 而詩則不入稿, 書又刪於晉本。雖其載於華龍二本, 今既晉本盛行, 則人之但見晉本者, 何以知得傳統於先生乎? 故鄙意以爲刊稿必有《附錄》·《行狀》·《祭文》·《挽詞》。凡爲先生作而可書者, 宜皆備錄, 而艮翁答盧書ㆍ《羣山》詩, 幷書之, 使人明知傳統於先生, 如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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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3년 진달인(陳達寅)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癸卯式 幼學 陳達寅 癸卯式 河東都護府 陳達寅 [着押] 1顆(7.0×7.0), 周挾無改印, 河東 고흥 무열사 고흥 무열사 HIKS_OD_F1030-01-200038 1843년(헌종 9)에 하동도호부(河東都護府)에서 발급한 진달인(陳達寅)의 준호구(準戶口). 1843년(헌종 9)에 하동도호부(河東都護府)에서 발급한 유학(幼學) 진달인(陳達寅)의 준호구(準戶口)이다. 진달인은 하동도호부 마전면(馬田面) 대덕촌(大德村)에 거주하였고, 나이는 34세 경오생이며, 본관은 여양(驪陽)이다. 처(妻) 송씨(宋氏)는 본관이 문경(聞慶)이고 나이는 32세이다. 진달인과 처의 부(父)·조(祖)·증조(曾祖)·외조(外祖) 4조의 직역과 이름을 기재하였다. 이외에 노비의 명단 '천구질(賤口秩)'이 기재되었다. 이 문서에는 하동부사의 인장과 주협무개인(周挾無改引)이 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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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교령류

1747년 진만동(陳萬東) 고신(告身)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乾隆十二年年五月日 陳萬東 乾隆十二年年五月日 英祖 陳萬東 施命之寶(10.0×9.8) 고흥 무열사 고흥 무열사 HIKS_OD_F1030-01-200003 1747년에 영조가 진만동(陳萬東)을 어모장군(禦侮將軍) 행(行) 훈련원주부(訓鍊院主簿)로 임명한 고신(告身). 1747년(영조 23) 5월에 영조(英祖)가 진만동(陳萬東)을 어모장군(禦侮將軍) 행(行) 훈련원주부(訓鍊院主簿)로 임명한 문서이다. 국왕의 시명지보(施命之寶)가 안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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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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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령류

1748년 진만동(陳萬東) 고신(告身)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乾隆十三年四月十八日 陳萬東 乾隆十三年四月十八日 英祖 陳萬東 施命之寶(10.2×9.8) 고흥 무열사 고흥 무열사 HIKS_OD_F1030-01-200003 1748년에 영조가 진만동(陳萬東)을 어모장군(禦侮將軍) 행(行) 훈련원판관(訓鍊院判官)으로 임명한 고신(告身). 1748년(영조 24) 4월 18일에 영조(英祖)가 진만동(陳萬東)을 어모장군(禦侮將軍) 행(行) 훈련원판관(訓鍊院判官)으로 임명한 문서이다. 문서 배면에 고신을 작성한 병조서리[兵政吏] 서○○(徐▣▣)의 이름이 기재되었다. 문서는 배접된 상태이며, 원 문서와 배접된 종이 사이에 병조서리의 기록이 있다. 국왕의 시명지보(施命之寶)가 안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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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25년 진종휘(陳宗輝)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乙酉式 行府使 通德郞 陳宗輝 乙酉式 河東都護府 陳宗輝 行府使[着押] 1顆(6.8×7.2), 周挾無改印, 河東 고흥 무열사 고흥 무열사 HIKS_OD_F1030-01-200038 1825년(순조 25)에 하동도호부(河東都護府)에서 발급한 진종휘(陳宗輝)의 준호구(準戶口). 1825년(순조 25)에 하동도호부(河東都護府)에서 발급한 통덕랑(通德郞) 진종휘(陳宗輝)의 준호구(準戶口)이다. 진종휘는 하동도호부 마전면(馬田面) 전도촌(錢島村)에 거주하였고, 나이는 52세 갑오생이며, 본관은 여양(驪陽)이다. 처(妻) 윤씨(尹氏)는 본관이 파평(坡平)이고 나이는 51세이다. 진종휘와 처의 부(父)·조(祖)·증조(曾祖)·외조(外祖) 4조의 직역과 이름을 기재하였으며, 진종휘의 경우 생부(生父) 진방석(陳邦碩)도 기재하였다. 그 밖의 가족 사항으로 솔자(率子)는 진천록(陳天錄)이다. 이외에 노비의 명단 '천구질(賤口秩)'이 기재되었다. 이 문서에는 하동부사의 인장과 주협무개인(周挾無改引)이 찍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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