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기관별 검색

검색 범위 지정 후 검색어를 넣지 않고 검색버튼을 클릭하면 분류 내 전체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전체 으로 검색된 결과 56403건입니다.

정렬갯수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864년 진달우(陳達佑)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甲子式 行府使 幼學 陳達佑 甲子式 河東都護府 陳達佑 行府使[着押] 1顆(7.3×7.7), 周挾無改印, 河東 고흥 무열사 고흥 무열사 HIKS_OD_F1030-01-200038 1864년에 하동도호부(河東都護府)에서 발급한 진달우(陳達佑)의 준호구(準戶口). 1864년(고종 1)에 하동도호부(河東都護府)에서 발급한 유학(幼學) 진달우(陳達佑)의 준호구(準戶口)이다. 진달우는 하동도호부 마전면(馬田面) 전도촌(錢島村)에 거주하였고, 나이는 60세 을축생이며, 본관은 여양(驪陽)이다. 처(妻) 김씨(金氏)는 본관이 김해(金海)이고 나이는 60세이다. 진달우와 처의 부(父)·조(祖)·증조(曾祖)·외조(外祖) 4조의 직역과 이름을 기재하였다. 그 밖의 가족사항으로 솔자(率子) 진두성(陳斗星)이 있다. 이외에 노비의 명단 '천구질(賤口秩)'이 기재되었다. 이 문서에는 하동부사의 인장과 주협무개인(周挾無改引)이 찍혔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교령류

1742년 진만동(陳萬東) 고신(告身)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乾隆七年十二月日 陳萬東 乾隆七年十二月日 英祖 陳萬東 施命之寶(10.2×10.0) 고흥 무열사 고흥 무열사 HIKS_OD_F1030-01-200003 1742년에 영조가 진만동(陳萬東)을 선략장군(宣略將軍) 행(行)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로 임명한 고신(告身). 1742년(영조 18) 12월에 영조(英祖)가 진만동(陳萬東)을 선략장군(宣略將軍) 행(行)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로 임명한 문서이다. 연호의 우측에 '守門將仕滿例授'란 방서가 있다. 이는 진만동이 수군장 임기를 채웠기에 용양위부사과에 예수(例授)한다는 뜻이다. 문서 배면에 고신을 작성한 병조서리 이시양(李時兩)의 이름이 기재되었다. 국왕의 시명지보(施命之寶)가 안보되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교령류

1743년 진만동(陳萬東) 고신(告身)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乾隆八年正月日 陳萬東 乾隆八年正月日 英祖 陳萬東 施命之寶(10.0×9.7) 고흥 무열사 고흥 무열사 HIKS_OD_F1030-01-200003 1743년에 영조가 진만동(陳萬東)을 어모장군(禦侮將軍) 행(行) 충무위부사용(忠武衛副司勇)으로 임명한 고신(告身). 1743년(영조 19) 정월에 영조(英祖)가 진만동(陳萬東)을 어모장군(禦侮將軍) 행(行) 충무위부사용(忠武衛副司勇)으로 임명한 문서이다. 연호의 우측에 '守門將仍資'란 방서가 있다. 잉자(仍資)는 유임을 의미한다. 국왕의 시명지보(施命之寶)가 안보되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819년 진종휘(陳宗輝)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己卯式 行使 通德郞 陳宗輝 己卯式 河東都護府 陳宗輝 行使[着押] 1顆(7.0×7.0), 周挾無改印, 河東 고흥 무열사 고흥 무열사 HIKS_OD_F1030-01-200038 1819년(순조 19)에 하동도호부(河東都護府)에서 발급한 진종휘(陳宗輝)의 준호구(準戶口). 1819년(순조 19)에 하동도호부(河東都護府)에서 발급한 통덕랑(通德郞) 진종휘(陳宗輝)의 준호구(準戶口)이다. 진종휘는 하동도호부 마전면(馬田面) 전도촌(錢島村)에 거주하였고, 나이는 46세 갑오생이며, 본관은 여양(驪陽)이다. 처(妻) 윤씨(尹氏)는 본관이 파평(坡平)이고 나이는 45세이다. 진종휘와 처의 부(父)·조(祖)·증조(曾祖)·외조(外祖) 4조의 직역과 이름을 기재하였으며, 진종휘의 경우 생부(生父) 진방석(陳邦碩)도 기재하였다. 그 밖의 가족 사항으로 솔자(率子)는 진천록(陳天錄)이다. 이외에 노비의 명단 '천구질(賤口秩)'이 기재되었다. 이 문서에는 하동부사의 인장과 주협무개인(周挾無改引)이 찍혀 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900년 진행조(陳幸祚) 호적표(戶籍表)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적표 光武四年二月日 慶尙南道 河東郡 陳幸祚 光武四年二月日 河東郡 陳幸祚 河東郡守之印(2.6×2.6), 河東郡印 略1/2顆(4.5×1.8) 고흥 무열사 고흥 무열사 HIKS_OD_F1030-01-200038 1900년(광무 4)에 하동군(河東郡)에서 발급한 진행조(陳幸祚)의 호적표(戶籍表). 1900년(광무 4) 2월에 경상남도(慶尙南道) 하동군(河東郡)에서 발급한 진행조(陳幸祚)의 호적표(戶籍表)이다. 진행조는 경상남도 하동군 마전면(馬田面) 전도동(錢島洞) 제16통 제2호에 거주하였고, 나이는 40세이며, 본관은 여양(驪陽), 직업은 농업이다. 진행조의 부(父)·조(祖)·증조(曾祖)·외조(外祖) 4조의 직역과 이름을 기재하였다. 동거친속(同居親屬)으로 어머니 서씨(徐氏)와 처(妻) 박씨(朴氏)가 기재되었다. 이외에 가택 현황도 기입되었는데, 3칸 초가집에 거주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908년 진상조(陳尙祚) 호적표(戶籍表)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적표 隆熙二年一月日 慶尙南道 昆陽郡 陳尙祚 隆熙二年一月日 昆陽郡 陳尙祚 河東郡守之印(2.5×2.5), 河東郡印 略1/2顆(4.1×2.5) 고흥 무열사 고흥 무열사 HIKS_OD_F1030-01-200038 1908년(융희 2)에 곤양군(昆陽郡)에서 발급한 진상조(陳尙祚)의 호적표(戶籍表). 1908년(융희 2) 1월에 경상남도(慶尙南道) 곤양군(昆陽郡)에서 발급한 진상조(陳尙祚)의 호적표(戶籍表)이다. 진상조는 경상남도 곤양군 남면(南面) 서면리(西面里) 영천동(永川洞)에 거주하였고, 나이는 45세이며, 본관은 여양(驪陽), 직업은 농업이다. 진상조의 부(父)·조(祖)·증조(曾祖)·외조(外祖) 4조의 이름을 기재하였다. 동거친속(同居親屬)으로 시모(侍母) 서씨(徐氏)와 처(妻) 민씨(閔氏), 아들 진연홍(陳連洪), 진모득(陳模得), 진갑록(陳甲祿) 등이 기재되었다. 고용된 사람으로 여 1명이 있으며, 이외에 가택 현황도 기입되었는데 4칸 초가집에 거주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807년 진방석(陳邦碩) 입후성문(立後成文) 고문서-증빙류-입후성문 사회-가족/친족-양자문서 丁卯三月十五日 再從弟 邦碩 再從兄 邦一氏 丁卯三月十五日 陳邦碩 陳邦一 邦復[着名], 邦權[着名],邦秀[着名] 고흥 무열사 고흥 무열사 HIKS_OD_F1030-01-200068 1807년(순조 7)에 진방석(陳邦碩)이 진방일(陳邦一)에게 아들을 양자로 보내기 위해 작성한 문서. 1807년(순조 7)에 재종제(再從弟) 진방석(陳邦碩)이 재종형(再從兄) 진방일(陳邦一) 아들을 양자로 보내기 위해 작성한 문서이다. 영국공신(寧國功臣)의 후손이자 재종형인 진방일에게 아들이 없으니 종중회의를 통해 진방석의 둘째 아들을 양자로 보내 후계문제를 해결하도록 보낸 증빙문서이다. 이 문서를 작성할 때 증인으로 동성 재종형(同姓再從兄) 진방복(陳邦復)과 재종제 진방권(陳邦權)이 참여하였고, 삼종제(三從弟) 진방수(陳邦秀)가 문서를 작성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671년 진후평(陳後平) 삼형제(三兄弟) 분재기(分財記) 고문서-명문문기류-분재기 경제-상속/증여-분재기 康熙拾年辛亥十二月貳拾肆日 長兄 前行訓鍊院判官 後平 等 3人 康熙拾年辛亥十二月貳拾肆日 陳後平 後平[着名], 後寔[着名], 後蕃[着名], 朴璘[着名], 田興業[着名], 朴東植[着名] 고흥 무열사 고흥 무열사 HIKS_OD_F1030-01-200068 1671년(현종 12)에 진후평(陳後平)과 그 형제들이 재산분할을 위해 작성한 화회문기(和會文記). 1671년(현종 12) 11월 24일에 진후평(陳後平)과 그 형제들이 재산분할을 위해 작성한 문서이다. 재산을 나누는 대상은 큰형 전 행훈련원판관(行訓鍊院判官) 진후평과 동생 진후식(陳後寔), 막내동생 진후번(陳後蕃)이다. 문서의 오른쪽에는 재산을 분할하게 된 내용이 기재되어있고, 왼쪽에는 승중위(承重位)부터 분할한 재산의 몫을 정리하였다. 하지만 문서가 큰형에 대한 기록까지 남은 것으로 보아 문서의 일부가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이 문서를 작성할 당시 유학(幼學) 박인(朴璘)이 증보(證保)로 참여하였고, 사과(司果) 전흥업(田興業)은 증인, 유학 박동식(朴東植)은 필집(筆執)으로 참여했다. 이 문서는 배접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김주사영구에게 답함 答金主事榮九 ○乙亥 을해년(1935) 궁벽한 곳에 칩거해 있으면서 삼가 어르신은 도를 추구하고 옛 문화를 좋아하는 마음과 태도가 돈독하여 퇴폐한 풍속에 모범이 될 만한 분이라는 말을 들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곤궁한 처지의 인간사로 인하여 한 번도 안석 아래에서 덕스러운 모습을 바라볼 길이 없었으니, 덕을 좋아하는 마음이 지극하지 못함을 자책하고 있었습니다.그러던 차에 외람되게도 어른께서 일부러 손자를 보내어 고도(古道)의 편지를 내려주시고 증손의 관례를 치르는 날에 빈(賓)이 되라고 명하셨지만, 스스로 보잘 것 없는 저를 돌아보건대 어찌 따를 수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할 때 어른의 뜻이 혹시 후생을 이끌어 예학의 도를 가르치고자 한 것에서 나온 것이라면 불안감에 이어 감개가 이어집니다. 그러니 어찌 감히 지극한 뜻을 우러러 체득하여 받들어 부응할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다만 지금의 상태로는 권하(眷下)12)에게 경계할 일이 있어서 뜻을 이룰 수 없으니, 명을 받들 수 없는 것이 두려울 뿐만이 아니라, 성대한 예식을 볼 인연이 없는 것이 매우 한스럽습니다. 삼가 헤아려 용서하시고 죄를 주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蟄伏僻陋, 窃聞老丈向道好古之篤, 有足以範頹俗者, 爲日久矣。 而窮途人事, 未由一瞻德儀於几下, 自訟好德之未至。猥蒙尊慈專遣令孫, 賜以古道之書, 命以爲賓於令曾孫冠日, 自願顧淺眛, 何以得比? 窃念尊意, 或出於引進後生, 教以禮學之一道, 則不安之餘, 繼之以感, 豈敢不仰體至意, 思所以奉副也?但以現狀, 眷下有警, 未得遂意, 非惟惟命之不能是悚, 深恨觀光盛禮之無緣。 伏望恕究不罪。 권하(眷下) 존귀한 사람에게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일인칭 대명사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오학근에게 보냄 與吳學根 ○乙亥 을해년(1935) 삼가 들으니 어른께서 편찬한 《호남지(湖南誌)》에 저의 이름이 〈학행편(學行篇)〉에 수록되어 이미 인쇄되었는데 당초에 최익구(崔益求) 어른이 단자를 갖추어 넣기를 청했다고 합니다. 이 내용은 저의 종족 연두(煉斗)가 어른으로부터 직접 듣고 전해준 것인데, 이 사람은 믿을만하고 성실한 사람이기 때문에 응당 잘못 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학행〉이라는 제목이 얼마나 중대한데 제가 어떤 사람이라고 그 사이에 끼어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최씨 어른의 뜻이 무슨 의도에서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저처럼 형편없는 사람으로서는 결코 감히 함부로 이 '학행'이라는 명칭에 이름을 넣어 저의 마음을 속이고 다른 사람의 웃음거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이에 저의 아들을 특별히 보내어 사실대로 아뢰니 이전에 인쇄된 저의 이름이 실려 있는 조목을 즉시 도려내어 보냄으로써 저의 분수를 편안하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맹자는 "자신의 악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14)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저에게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와 크게 관계되는 바입니다. 아울러 저의 심정을 살펴주시고 답장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窃聞丈所編《湖南誌》中, 生之姓名入於〈學行〉篇, 已經印出。 而當初崔丈益求氏具單請入云。 鄙宗煉斗親聞於丈而傳之者也, 此人信實, 應非誤傳。 大抵〈學行〉題目何等重大, 而生以何人厠入其間乎? 崔丈之意, 未知出於何意, 而以生無狀決不敢冒當此名, 欺吾靈臺而取人笑囮矣。茲以專遣家兒, 具實仰稟, 切乞前印生之姓名載錄條, 即爲割送, 俾安賤分。 孟子曰 : "無羞惡之心, 非人也。" 此係生之羞惡有無之大關。 并望下諒, 更懇回示。 자신의……아니다 맹자는 "측은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수오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시비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無惻隱之心, 非人也, 無羞惡之心, 非人也, 無辭讓之心, 非人也, 無是非之心, 非人也〕"라고 하였다. 《맹자(孟子)》 〈공손추 상(公孫丑上)〉.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소지천상규에게 답함 答蘇芝泉尚奎 ○壬午 임오년(1942) 편지에서 말씀하신 뜻은 잘 알았습니다. 선척(先戚)의 도리와 장유(長幼)의 분수로 헤아려 보면 감히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생각해보면, 저의 부친과 조부 이상 여러 대가 장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지극한 원통함이 마음을 사로잡고 있어 다른 사람의 회갑과 회근(回巹)15)의 잔치에 스스로 나아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축하하는 시와 문장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음속으로 스스로 생각을 운용하여 구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후 30년 동안 항상 줄곧 이런 법을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일은 치우치고 고루하게 되며 감정은 두루 미치지 못한다고 스스로 여기니, 스스로 이렇게 하는 것이 과연 중도를 얻었는지의 여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후에 스승의 원고를 읽었는데,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로 부친의 수연(晬宴)을 마련하지 못하고, 이어서 부친이 세상을 떠나 미처 효도하지 못한 것을 탄식하신 뒤로는 돌아가실 때까지 슬픔을 간직하고서 절대로 다른 사람의 수연에 대해 시나 서문을 짓지 않았다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그런 후에 비로소 스승께서 먼저 저와 같은 마음을 터득하셨음을 알고는 저의 견해가 스승의 태도와 암암리에 부합함을 스스로 다행스럽게 여겼습니다. 이제 와서 또한 감히 계율을 깨고 명에 부응할 수 없으니 혹시라도 가련하게 여겨 주시고 심하게 책망하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示意謹悉。 揆以先戚之誼ㆍ長少之分, 敢不惟命? 但念父祖以上累世無壽, 至冤貫心, 凡於人家周甲回?之宴, 非惟足自不能進步, 至於祝詩賀章, 心自不能運思。 故孤露後三十年來, 純用一切法。 然猶自以事涉偏固, 情闕周偏, 不自知此果得中與否。後讀師稿, 有以丙寅洋亂不得爲大人設晬宴, 而因哭風樹, 終身含恤, 絕不作人晬壽詩序之語。 然後始知先師之先獲我心, 而自幸淺見之亦與暗合也。 今亦未敢破戒副命, 或可哀矜而不深罪否? 회근(回巹) 회근례(回巹禮)로 혼인을 한지 60주년이 되는 것을 기념하는 예식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김성구에게 답함 答金聖九 戊寅 무인년(1938) 두 달이나 답장을 늦게 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감히 못할 일인데, 하물며 제가 존경하는 그대야 더욱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섣달 그믐날 편지가 온 이후 아프지 않은 날이 없었던 관계로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대체로 가난이 오래 되면 병이 되고 병이 오래되면 더욱 가난해져서 마침내 구제할 길이 없게 됩니다. 저 같은 사람은 말할 것도 못되지만, 그대의 인품과 문벌로도 쌀과 소금을 마련하는 것이 어려워서 이 도시에서 거주하게 되었으니, 세상풍조의 야박함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편지를 읽고 매우 슬프니 무슨 말로 위로하겠습니까. 하늘이 사민(四民)을 낳음에 각각 그 맡은 직책이 있습니다. 그러나 전적으로 말하면 사는 농·공·상을 포함할 수 있습니다. 비록 농·공·상이라도 모두 마땅히 선비의 마음과 선비의 행실이 있어야 하고, 비록 선비일지라도 또한 농·공·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대순(大舜)은 질그릇도 빚고 농사도 지었으며, 부열(傅說)은 판자로 성벽을 쌓았고, 교격(膠鬲)은 물고기를 잡고 소금을 팔았으며, 태공(太公)은 백정의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우리나라 풍속은 그렇지 않습니다. 말에게 꼴을 먹이는 것을 물어보면 청렴한 관리가 되는 것이 막히고, 기장 밭의 참새를 쫓으면 은일로 천거 받는 것이 저지되니, 말을 하매 우습습니다. 이런 폐단이 유행하기 때문에 비록 넓은 학문과 고상한 행실이 있더라도 가난을 없애려고 생계를 경영하기만 하면 대번에 손가락질하며 가혹하게 비평하고, 점점 기금(箕錦)74)이 되며, 마침내 선비의 반열에 끼워주지 않고서야 그치니, 매우 어질지 않고 대단히 지혜롭지 않은 것입니다.【최근에 음성의 무리인 정운한(鄭雲翰)과 김세기(金世基) 등이 내가 신해년(1911) 겨울에 황금을 가지고 있다가 도둑이 두려워 베를 사서 돌아온 일을 가지고 장사치라고 손가락질을 하였습니다. 또 더 나아가 상중(喪中)의 일을 억지로 만들어 '거상에 무례하다.'고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배척하는 악의에서 나온 것으로 비록 말할 거리도 못되지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또한 말에게 꼴을 먹이는 사람을 막고 참새를 쫓는 사람을 저지하는 의론에서 따오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저가 삼가 생각건대, 오늘날 선비로서 법도를 바꾸어 생계를 경영하는 자는 단지 마땅히 선비의 마음과 선비의 행실을 잃지 않아서 스스로 부끄럽지 않고자 해야 하고, 그것을 보는 사람도 마땅히 그가 선비의 마음과 선비의 행실이 있는 것으로 그 이름과 실제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되면 도시와 산림을 어찌 구별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비록 그렇지만 이것은 평범한 사람의 입장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대는 평소 수양이 이미 두터운지라, 저는 그대가 마음을 격동시키고 성질을 인내하여 능하지 못했던 것을 잘하게 되고75), 더 나아가 대순과 부열 이하의 성현의 덕업을 완성하기를 희망합니다. 그대가 도모하기를 바랍니다. 兩朔稽覆, 他猶不敢, 况座下僕所敬乎? 臘晦報至, 無日不痛, 以至於此。蓋貧久爲病, 病久益貧, 竟不可救。如僕者不足言。以座下人地, 亦縁米盐之艱, 而有此城市之住, 世風薄惡, 即此可見。奉簡戚戚, 何辭而慰? 天生四民, 各有其職。然專言則士可以包農、工、商, 雖農、工、商, 皆當有士心士行; 雖士亦可爲農、工、商也。是故大舜陶稼, 傅說版築, 膠鬲魚盐, 太公皷刀。 特東俗不然。問秣馬而清官枳, 揮黍雀而逸薦沮, 言之可笑。此獘之行, 雖有博學高行, 才涉救竆營生, 輒指摘苛評, 轉成箕錦, 至不齒於衣冠之列而後已, 其爲不仁不知也甚矣。【近日陰黨鄭雲翰ㆍ金世基輩, 以此漢辛亥冬, 帶金畏盜, 買布歸放事, 指爲行商。又輾轉勒作喪中事, 號曰居喪無禮。此則出於擠人惡意, 雖不足道, 其所以有此口者, 亦未嘗不藉於枳問馬、沮揮雀之論也。】 僕竊謂今日士子之變規營生者, 只當不失士心士行, 求不自愧, 人之觀者亦當以其有士心士行而許其名實, 則城市雲林, 何足別也? 雖然, 此以常調者言。若座下則素養既厚, 吾以動心忍性, 增益不能, 進而成舜、傅以下聖賢之德業望之, 惟座下圖之。 기금(箕錦) 작은 허물을 부풀려서 다른 사람을 참소하는 것을 말한다. 《시경(詩經)》 〈항백(巷伯)〉에 이르기를, "조금 문채가 있는 것으로, 이 자개 무늬 비단을 이루었도다.〔萋兮斐兮, 成是貝錦〕" 하고, 또 "조금 벌어진 것으로, 남쪽의 기성을 이루는도다.〔哆兮侈兮, 成是南箕〕" 한 데서 온 말이다. 마음을……되고 《맹자(孟子)》 〈고자 하(告子下)〉에 "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큰 사명을 내리려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과 뜻을 고통스럽게 하고, 그의 힘줄과 뼈를 수고롭게 하고, 그의 육체를 굶주리게 하고, 그의 몸을 궁핍하게 하여, 그가 행하는 일마다 어긋나서 이루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그의 마음을 격동시키고 그의 성내는 것을 굳게 참고 버티도록 하여, 그가 잘하지 못했던 일을 더욱 잘할 수 있게 해 주기 위함이다.〔天將降大任於是人也 必先苦其心志 勞其筋骨 餓其體膚 空乏其身 行拂亂其所爲 所以動心忍性 增益其所不能〕"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김성구에게 답함 答金聖九 戊寅 무인년(1938) 병과 싸우느라 피로하고 학도를 가르치느라 힘들기 때문에 보내온 편지의 답장이 다시 한 달이 지체되었습니다. 한 번 늦게 하는 것도 송구스러운 일인데 하물며 두 번이나 늦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용서 여부는 논할 것도 없이, 이런 기량으로 어찌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겠습니까. 부끄럽고 한심합니다. 염량세태(炎凉世態)에 대한 한탄은 진실로 옳고도 옳습니다. 어찌 유독 오늘만 그렇겠습니까. 예로부터 그렇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신하가 군주를 배반하여 적에게 항복하고 선비들이 정도를 등지고 사도에 들러붙는 일도 모두 염량세태이니, 다른 일은 오히려 어찌 말하겠습니까? "기구(耆舊 연세가 높고 덕망이 큰 분)들이 세상을 떠나면 후생들은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가."라고 한탄하신 것도 또한 그렇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살아 있는 사람들이 유독 장래의 기구(耆舊)가 될 수 없겠습니까? 온 나라를 돌아보아도 재주로나 뜻으로나 인품으로나 지위로나 후생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그대가 아니면 누구겠습니까? 백절불굴하며 아홉 번 죽어도 후회하지 말고 지조를 더욱 연마하고 조예를 더욱 정밀히 하여 우뚝 유문(儒門)의 금성탕지(金城湯池)가 되어서 찬란히 우리 당의 빛나는 인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지극한 옹망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疲於敵病, 困於授徒, 惠書之覆, 又稽一朔, 一之猶悚, 矧再之乎? 舍曰恕否, 以此伎倆, 何能有爲? 可愧可恨。炎涼之嘆, 誠然誠然。奚獨今日? 自古莫不皆然。如臣子之叛君降賊, 士流之背正附邪, 都是炎涼, 他尚何說? "耆舊凋零, 後生誰依"之嘆, 亦然。然無如之何矣。今之見在者, 獨不可爲將來耆舊乎? 環顧全邦, 以才以志以人以地, 可恃而爲後生依者, 非座下而誰? 惟願百折不回, 九死靡悔, 節操彌厲, 造詣益精, 屹然爲儒門金湯, 炳然作吾黨耿光, 區區不勝顒望之至。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김성구에게 답함 答金聖九 庚辰 경진년(1940) 오궁(五竆)76)과 병마가 함께 도모하고 합세하여 온갖 근심을 끌어다가 이 몸을 공격하여 답답한 심정은 감옥에 들어간 듯하고 숨이 끊어져서 황천에 있는 것 같아 살아있는 모습이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더구나 세상의 변란이 더욱 심하여 날마다 들리는 얘기는 차마 듣지 못할 것들이니, 원컨대 빨리 죽는 게 낮을 듯합니다. 뜻밖에 이때에 욕되게도 생사를 묻는 편지를 받으니, 그 즐거움은 마치 칠흑 같은 방안에 앉아 있다가 한줄기 서광을 보는듯합니다. 근래에 좋은 일 중에 어떤 것이 이보다 나은 것이 있겠습니까. 하물며 다시 책을 읽으며 옛날에 배운 것을 보충한다는 등의 말이 있어 또 그 날마다 독실하게 힘쓰는 낙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 혼탁한 퇴조 속에서 또한 크게 경발됩니다. 근래에 벽촌으로 옮겨 가서 고요하게 익히고 한가로이 수양하며 부모와 처자식이 모두 편안하여 마을의 택한 때와 의를 얻었다는 것을 알았으니, 어찌 이루 다 흠앙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또한 작년 봄부터 소나무 숲속에 흙집을 짓고 황량한 밭 사이에 마를 심어 먹으려 했는데, 하필이면 큰 가뭄을 만나 먹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다만 송진을 먹고 물을 마시면서 세월을 보내고 서실 속에 숨고 책속에 몸을 숨겨서 집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고 있었는데, 우연히 그대가 벽촌을 점쳐 사는 의리와 부합되어서 다행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물으신 옛사람은 생사와 우환에 대해 두 마음을 가지지 않고 수양의 꺼리로 삼는 다는 것이 어찌 크게 헤아릴 만큼 별도의 공부가 있겠습니까. 단지 두 마음을 먹지 않을 뿐이니, 두 마음을 먹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단지 이것만 있는 것을 알고 다른 것이 있는 것을 모른다는 것을 말합니다. 요임금과 부열의 재주로도 만약 조금만 그 도를 굽혔다면, 어찌 그들이 밭도랑과 판자로 성을 쌓는데서 곤란을 겪었겠습니까. 오직 그들은 도리를 보았고 이해는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끝내 그 덕을 수양하여 완성을 했습니다.즉 밭도랑에서 김을 매고 판자로 성을 쌓아도 편안하게 여겨 장차 몸을 마칠 듯하고 조금도 도를 굽혀 이익을 구하는 마음이 없는 것, 이런 것이 바로 공부라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저의 용렬하고 비루함으로 혼란이 극에 달해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때를 당했으니, 비록 굶어 죽어 그 시체가 골짜기에 나뒹굴더라도 큰 다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수양하여 덕을 이루는 것은 비록 감히 바라지는 못할지라도 혹여 차라리 옥이 되려다 깨질지언정 온전한 기왓장이 되지 않는 방법을 얻었기 때문에 이 방법만 보고 이것만 힘쓰고 있는데 마침 굽어 물어주신 편지를 받아서 질문을 올리니, 잘 모르겠으나, 고견은 어떠합니까? 五竆二竪, 同謀合勢, 請援百憂, 攻此一身, 鬱鬱如入獄中, 奄奄若在泉下, 絕無生。況加以世變益甚, 日聞所不忍聞, 惟願速死之爲幸。乃以此時, 辱崇牘問死生, 其爲欣慰, 如坐漆室, 得一線曙光。近來佳況, 孰加於此? 矧復有佔畢簡編, 補綴舊聞等語, 則又知其有日有所事, 胡不慥慥之樂? 其於昏頹警發, 亦大以審。近已移占僻村, 習靜養閒, 奉率俱安。尢得擇里之時義, 豈勝欽仰? 賤子亦自昨春, 築土室於萬松裏, 荒田間種薯爲食, 適值大旱, 無薯可食。獨餐松飲水以度日, 藏書室中, 藏身書中, 不出戶外一步, 自幸偶與賢座占僻之義, 相合也。所詢古人之不貳心於死生憂患, 用作玉成之資者, 豈有別項工夫如盛料哉? 亦只是不貳心, 不貳者何? 只知有此, 而不知有他之謂也。夫以大舜傅說之才, 若少屈其道, 則豈其困於畎畒版築乎? 惟其所視者道理, 而不見利害, 故卒至於玉成其德。即此安於畎築, 而若將終身, 少無屈道求利之心者, 乃是工夫也。況以吾之庸陋, 當亂極無前之時, 雖眞至於餓死而填溝壑, 可謂優幸, 玉成之德, 雖不敢望, 或得爲寧爲玉碎, 不爲瓦全之道, 故見此方, 以此自勉, 而適承俯問, 舉而奉質, 未知高見云何? 오궁(五窮) 사람을 궁하게 만드는 지궁(智窮), 학궁(學窮), 문궁(文窮), 명궁(命窮), 교궁(交窮) 등 다섯 종류의 궁귀(窮鬼)로, 당(唐)나라 한유(韓愈)의 〈송궁문(送窮文)〉에 보인다.《창려집(昌黎集)》 권36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김성구에게 답함 答金聖九 丁亥 정해년(1947) 지난 그믐에 전보를 받으니 셋째 아들 형관을 초청하셨는데, 형관은 마침 수종다리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막 전보로 답장을 드릴 즈음에 이달 초하루에 보내신 편지를 받아 읽고서 9월 22일 모임에 당신의 뜻으로 제 이름을 윤시문(輪示文)에 썼다는 것을 알았는데, 뜻밖의 일이라서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여름에 만났을 때 그대와 나는 모두 단지 제 아들 형관만 말하고 늙은 사람은 참여하지 않기로 했는데 지금 갑자기 제 이름을 드러낸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물며 큰 병을 앓은 이후로 정신이 희미하고 멍하여 인형처럼 말이 어눌하다가 마침내 반벙어리가 되었습니다. 이런 추한 모습으로 창발하는 첫머리에 이름을 적는다면 다른 사람에게 의지처가 되어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단지 다른 사람에게 모욕을 받기에 족합니다. 또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오늘의 이 일은 진실로 삼강오륜을 부지(扶持)하고 성현을 존중하여 경전을 강론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아 실효를 거둔다면 국가와 천하의 많은 일들은 모두 그 속에 포함되게 됩니다. 다만 이런 뜻으로 입장문을 작성하고, 몇 해 전에 이른바 유교부식회처럼 '유교(儒敎)'·'유회(儒會)'라 이름 짓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찌 굳이 좌우를 망라하여 '대동(大同)'이라 이름 짓고 먼저 자주독립의 기초라 큰소리를 치며 뚜렷하게 정당으로 자처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주목을 받아 혹시라도 실패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제 견해는 이와 같은데 잘 모르겠으나, 고견은 어떻습니까? 去晦承電報, 請觀兒, 觀適以瘇毒見苦。方以此電答之際, 拜讀今初一書, 知有九月卄二之會, 以尊意書賤名於輪示文, 事出料外, 莫省所喩。夏間之晤, 尊與我皆只以觀兒言, 老者無與, 而今忽露賤名, 何也? 矧自大病以後, 精遁而呆, 若偶人語鈍, 而遂成半啞。以此醜狀, 書名倡發之首, 非所以藉重於人, 適足以受侮於人也。抑有所仰告者, 今此之舉, 亶在於扶綱常ㆍ尊聖賢ㆍ講經傳, 於此三者從事者衆, 而實效之得, 則家國天下許多事業皆在其中。只以此意立文, 名之以儒敎儒會, 若年前所謂扶植會之類, 可也, 何必欲網羅左右, 名以大同, 先自大言自主獨立之基, 而顯然以政黨自居, 受人注目, 而或至取敗乎? 陋見如此, 未知高見以爲如何?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황일성·이영규·전용욱에게 답함 答黃佾性·李永珪·田溶彧 한번 병이 들어 삼년이 되었으니 다스릴 힘도 없습니다. 문에는 참새그물을 칠 정도로 손님이 없고 집은 저승과 같습니다. 어디선가 한바탕 청풍이 불어와 편지를 날려 보냄으로써 저에게 한 줄기 서광을 비쳐주어 오늘은 인간세상의 사람이라 할 수 있으니, 이보다 큰 다행스러움은 없습니다. 보내신 편지에서〈지산선생연보〉 발간을 도모하여 시일이 좀 되었음을 말했는데, 이 일은 저 또한 6년 전에 행해(김노동)선생이 저를 손님으로 초청했을 때 교정하느라 힘을 좀 썼습니다. 행해선생이 오래도록 인쇄하려 했지만 겨를이 없었는데 오늘에야 착수했다고 하니, 사림 모두의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행해선생의 소식을 이로 인해 아울러 들을 수 있었으니, 저에게는 큰 다행입니다. 편지 한 장을 동봉하여 올리니 전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一病三年, 無力可治。門垂雀羅, 室若冥府。何來清風, 颺送華翰, 照我以一點曙光, 今日可謂陽界人, 幸莫大焉。承喩以謀刊《志山先生年譜》之役有日, 是役也, 鄙亦六年前, 因杏海請殯, 費校寫之力。杏海積營剞劂, 而未遑者, 今焉就緒, 又士林公共之幸也。杏海聲光, 因可獲聽, 在我尢幸。一紙胎呈, 傳致仰懇。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840년 진달인(陳達寅)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道光二十年庚子式 行府使 幼學 陳達寅 道光二十年庚子式 河東都護府 陳達寅 行府使[着押] 1顆(6.8×7.0), 周挾無改印, 河東 고흥 무열사 고흥 무열사 HIKS_OD_F1030-01-200038 1840년(헌종 6)에 하동도호부(河東都護府)에서 발급한 진달인(陳達寅)의 준호구(準戶口). 1840년(헌종 6)에 하동도호부(河東都護府)에서 발급한 유학(幼學) 진달인(陳達寅)의 준호구(準戶口)이다. 진달인은 하동도호부 마전면(馬田面) 대덕촌(大德村)에 거주하였고, 나이는 31세 경오생이며, 본관은 여양(驪陽)이다. 처(妻) 송씨(宋氏)는 본관이 문경(聞慶)이고 나이는 29세이다. 진달인과 처의 부(父)·조(祖)·증조(曾祖)·외조(外祖) 4조의 직역과 이름을 기재하였다. 이외에 노비의 명단 '천구질(賤口秩)'이 기재되었다. 이 문서에는 하동부사의 인장과 주협무개인(周挾無改引)이 찍혔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870년 이현승(李鉉升)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同治九年庚午式 行郡守 幼學 鰥 李馨弼 改名 鉉升 同治九年庚午式 靈光郡 李鉉升 전라남도 영광군 行郡守[着押] 1顆(7.4×7.6), 靈光郡戶口(흑색, 12.3×3.5) 영광 광주이씨 퇴암공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1031-01-100013 1870년(고종 7)에 영광군(靈光郡)에서 발급한 이현승(李鉉升)의 준호구(準戶口). 1870년(고종 7)에 영광군(靈光郡)에서 발급한 유학(幼學) 이현승(李鉉升)의 준호구(準戶口)이다. 이현승은 영광군 묘량면(畝長面) 제17 창동리(昌洞里) 제1통 제1호에 거주하였고, 나이는 71세 경신생이며,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이현승은 이형필(李馨弼)이 개명한 이름이다. 현재 부인은 없으며, 부(父)·조(祖)·증조(曾祖)·외조(外祖) 4조의 직역과 이름을 기재하였다. 가족 사항으로 솔자(率子)는 이규순(李圭淳)이고, 며느리[婦]는 진산강씨(晋山姜氏)이며, 손자는 이민술(李民述), 손자며느리는 안정나씨(安定羅氏)이다. 가족들의 인적사항 다음에 아들의 외조인 고만구(高萬九)의 직역과 이름이 작성되었다. 이외에 노비의 명단 '천구질(賤口秩)'이 기재되었다. 이 문서에는 [영광군수지인(靈光郡守之印)]과 [영광군호구(靈光郡戶口)]가 찍혔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소차계장류

병인년 정동유(鄭東維)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丙寅十月日 幼學鄭東維 等 29人 城主閤下 丙寅十月日 1770년대 후반 鄭東維 靈光郡守 전라남도 영광군 官[着押] 3顆(6.8×6.8) 영광 광주이씨 퇴암공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병인년에 유학(幼學) 정동유(鄭東維) 등이 영광군수(靈光郡守)에게 올린 상서(上書). 병인년 10월에 유학(幼學) 정동유(鄭東維) 등 29인이 영광군수(靈光郡守)에게 정려(旌閭)를 청원하기 위해 올린 상서(上書)이다. 영광군에 성균진사(成均進士) 이택(李澤)이란 사람이 있는데, 그는 대대로 충의와 절의가 있는 집안 출신으로, 부모에게 공경하고 형제와의 우애가 깊으며 학문에 정진하기를 힘쓰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를 위한 정려를 세우기를 청원한 것이다. 이에 영광군수는 동월 23일에 행의(行誼)가 매우 가탄(嘉歎)할만 하니 더 많은 실적(實蹟)을 찾아 전보(轉報)한다면 헤아리겠다고 제사(題辭)를 내렸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873년 이현승(李鉉升)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同治十二年癸酉式 行郡守 幼學鰥李馨弼改名鉉升 同治十二年癸酉式 靈光郡 李鉉升 전라남도 영광군 行郡守[着押] 靈光郡守之印(7.3×7.3), 靈光郡戶口(흑색, 12.3×3.5) 영광 광주이씨 퇴암공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1031-01-100013 1873년(고종 10)에 영광군(靈光郡)에서 발급한 이현승(李鉉升)의 준호구(準戶口). 1873년(고종 10)에 영광군(靈光郡)에서 발급한 유학(幼學) 이현승(李鉉升)의 준호구(準戶口)이다. 이현승은 영광군 마촌면(馬村面) 수침리(水砧里) 제1통 제1호에 거주하였고, 나이는 74세 경신생이며,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이현승은 이형필(李馨弼)이 개명한 이름이다. 현재 부인은 없으며, 부(父)·조(祖)·증조(曾祖)·외조(外祖) 4조의 직역과 이름을 기재하였다. 가족 사항으로 솔자(率子)는 이규순(李圭淳)이고, 며느리[婦]는 진산강씨(晋山姜氏)이며, 손자는 이민술(李民述), 손자며느리는 안정나씨(安定羅氏)이다. 가족들의 인적사항 다음에 아들의 외조인 고만구(高萬九)의 직역과 이름이 작성되었다. 이외에 노비의 명단 '천구질(賤口秩)'이 기재되었다. 이 문서에는 [영광군수지인(靈光郡守之印)]과 [영광군호구(靈光郡戶口)]가 찍혔다.

상세정보
56403건입니다.
/2821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