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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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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67년 진달우(陳達佑)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丁卯式 行府使 幼學 陳達佑 丁卯式 河東都護府 陳達佑 行府使[着押] 1顆(7.0×7.2), 周挾無改印, 河東 고흥 무열사 고흥 무열사 HIKS_OD_F1030-01-200038 1867년(고종 4)에 하동도호부(河東都護府)에서 발급한 진달우(陳達佑)의 준호구(準戶口). 1867년(고종 4)에 하동도호부(河東都護府)에서 발급한 유학(幼學) 진달우(陳達佑)의 준호구(準戶口)이다. 진달우는 하동도호부 마전면(馬田面) 전도촌(錢島村)에 거주하였고, 나이는 63세 을축생이며, 본관은 여양(驪陽)이다. 처(妻) 김씨(金氏)는 본관이 김해(金海)이고 나이는 63세이다. 진달우와 처의 부(父)·조(祖)·증조(曾祖)·외조(外祖) 4조의 직역과 이름을 기재하였다. 그 밖의 가족사항으로 솔자(率子)는 진두성(陳斗星), 며느리는 경주이씨(慶州李氏)이다. 이외에 노비의 명단 '천구질(賤口秩)'이 기재되었다. 이 문서에는 하동부사의 인장과 주협무개인(周挾無改引)이 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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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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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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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령류

1746년 진만동(陳萬東) 고신(告身)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乾隆十一年九月日 陳萬東 乾隆十一年九月日 英祖 陳萬東 施命之寶(10.0×9.5) 고흥 무열사 고흥 무열사 HIKS_OD_F1030-01-200003 1746년에 영조가 진만동(陳萬東)을 어모장군(禦侮將軍) 행(行) 충무위부사용(忠武衛副司勇)으로 임명한 고신(告身). 1746년(영조 22) 9월에 영조(英祖)가 진만동(陳萬東)을 어모장군(禦侮將軍) 행(行) 충무위부사용(忠武衛副司勇)으로 임명한 문서이다. 연호의 우측에 '守門將仍資'란 방서가 있다. 잉자(仍資)는 유임을 의미한다. 국왕의 시명지보(施命之寶)가 안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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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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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22년 진종휘(陳宗輝)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壬午式 行使 通德郞 陳宗輝 壬午式 河東都護府 陳宗輝 行使[着押] 1顆(7.2×7.2), 周挾無改印, 河東 고흥 무열사 고흥 무열사 HIKS_OD_F1030-01-200038 1822년(순조 22)에 하동도호부(河東都護府)에서 발급한 진종휘(陳宗輝)의 준호구(準戶口). 1822년(순조 22)에 하동도호부(河東都護府)에서 발급한 통덕랑(通德郞) 진종휘(陳宗輝)의 준호구(準戶口)이다. 진종휘는 하동도호부 마전면(馬田面) 전도촌(錢島村)에 거주하였고, 나이는 49세 갑오생이며, 본관은 여양(驪陽)이다. 처(妻) 윤씨(尹氏)는 본관이 파평(坡平)이고 나이는 48세이다. 진종휘와 처의 부(父)·조(祖)·증조(曾祖)·외조(外祖) 4조의 직역과 이름을 기재하였으며, 진종휘의 경우 생부(生父) 진방석(陳邦碩)도 기재하였다. 그 밖의 가족 사항으로 솔자(率子)는 진천록(陳天錄)이다. 이외에 노비의 명단 '천구질(賤口秩)'이 기재되었다. 이 문서에는 하동부사의 인장과 주협무개인(周挾無改引)이 찍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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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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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령류

1745년 진만동(陳萬東) 고신(告身)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乾隆十年十二月日 陳萬東 乾隆十年十二月日 英祖 陳萬東 施命之寶(9.7×9.2) 고흥 무열사 고흥 무열사 HIKS_OD_F1030-01-200003 1745년에 영조가 진만동(陳萬東)을 어모장군(禦侮將軍) 행(行) 충무위부사용(忠武衛副司勇)으로 임명한 고신(告身). 1745년(영조 21) 12월에 영조(英祖)가 진만동(陳萬東)을 어모장군(禦侮將軍) 행(行) 충무위부사용(忠武衛副司勇)으로 임명한 문서이다. 연호의 우측에 '守門將仍資'란 방서가 있다. 잉자(仍資)는 유임을 의미한다. 국왕의 시명지보(施命之寶)가 안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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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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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79년 진두성(陳斗星)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己卯式 行府使 幼學 陳斗星 己卯式 河東都護府 陳斗星 行府使[着押] 1顆(7.2×7.3), 周挾無改印, 河東 고흥 무열사 고흥 무열사 HIKS_OD_F1030-01-200038 1879년에 하동도호부(河東都護府)에서 발급한 진두성(陳斗星)의 준호구(準戶口). 1879년(고종 16)에 하동도호부(河東都護府)에서 발급한 유학(幼學) 진두성(陳斗星)의 준호구(準戶口)이다. 진두성은 하동도호부 마전면(馬田面) 전도촌(錢島村)에 거주하였고, 나이는 47세 계사생이며, 본관은 여양(驪陽)이다. 처(妻) 서씨(徐氏)는 본관이 달성(達城)이고 나이는 45세이다. 진두성과 처의 부(父)·조(祖)·증조(曾祖)·외조(外祖) 4조의 직역과 이름을 기재하였다. 이외에 노비의 명단 '천구질(賤口秩)'이 기재되었다. 이 문서에는 하동부사의 인장과 주협무개인(周挾無改引)이 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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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경신년 진후번(陳後蕃) 혼서(婚書) 고문서-서간통고류-혼서 종교/풍속-관혼상제-혼서 庚申二月十一日 陳後蕃 庚申二月十一日 陳後蕃 고흥 무열사 고흥 무열사 경신년에 진후번(陳後蕃)이 아들의 혼사로 사돈댁에 보낸 혼서(婚書). 경신년 2월 11일에 진후번(陳後蕃)이 첫째 아들인 진상한(陳相漢)의 혼인을 위해 사돈댁에 보낸 혼서(婚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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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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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정해년 신의원(申義源) 등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사회-조직/운영-통문 丁亥五月初四日 發文 順天 幼學 申義源 興陽鄕校 丁亥五月初四日 申義源 興陽鄕校 고흥 무열사 고흥 무열사 정해년에 신의원(申義源) 등 15인이 흥양향교(興陽鄕校)에 보낸 통문(通文). 정해년 5월 4일에 순천(順天) 유학(幼學) 신의원(申義源), 류문환(柳文煥), 허련(許璉) 등 15인이 흥양향교(興陽鄕校)에 보낸 통문이다. 이 문서는 배접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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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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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통고류

정창선(鄭昌善) 등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사회-조직/운영-통문 新塘書院 鄭昌善 ▣(鄕)校 鄭昌善 ▣(鄕)校 고흥 무열사 고흥 무열사 정창선(鄭昌善) 등 5인이 향교(鄕校)에 보낸 통문(通文) 정창선(鄭昌善), 양규오(梁圭五) 등 5인이 향교(鄕校)에 보낸 통문이다. 송계(松溪) 진무성(陳武晟)의 충절과 업적 등을 널리 기리기 위한 내용이다. 이 문서는 소지류와 함께 보존되어 있었으며, 상단부 대부분과 하단부 일부가 훼손되어 보존상태가 좋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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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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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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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85년 진두성(陳斗星)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乙酉式 行府使 幼學 陳斗星 乙酉式 河東都護府 陳斗星 行府使[着押] 1顆(7.5×7.2), 周挾無改印, 河東 고흥 무열사 고흥 무열사 HIKS_OD_F1030-01-200038 1885년에 하동도호부(河東都護府)에서 발급한 진두성(陳斗星)의 준호구(準戶口). 1885년(고종 22)에 하동도호부(河東都護府)에서 발급한 유학(幼學) 진두성(陳斗星)의 준호구(準戶口)이다. 진두성은 하동도호부 마전면(馬田面) 전도촌(錢島村)에 거주하였고, 나이는 53세 계사생이며, 본관은 여양(驪陽)이다. 처(妻) 서씨(徐氏)는 본관이 달성(達城)이고 나이는 51세이다. 진두성과 처의 부(父)·조(祖)·증조(曾祖)·외조(外祖) 4조의 직역과 이름을 기재하였다. 그 밖의 가족사항으로 아들 진행조(陳幸祚)가 있다. 이외에 노비의 명단 '천구질(賤口秩)'이 기재되었다. 이 문서에는 하동부사의 인장과 주협무개인(周挾無改引)이 찍혔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680년 진후평(陳後平) 처(妻) 정씨(鄭氏) 분재기(分財記) 고문서-명문문기류-분재기 경제-상속/증여-분재기 康熙拾玖年庚申二月十三日 元財主 故 禦侮將軍 行訓鍊院判官 陳後平 妻 鄭氏 子女 等 康熙拾玖年庚申二月十三日 鄭氏 子女 等 後寔[着名], 後蕃[着名], 宋時亨[着名] 1顆(4.4×4.2) 고흥 무열사 고흥 무열사 HIKS_OD_F1030-01-200068 1680년(숙종 6)에 진후평(陳後平) 처(妻) 정씨(鄭氏)가 자녀들에게 재산을 상속하기 위해 작성한 분재기(分財記). 1680년(숙종 6) 2월 13일에 진후평(陳後平) 처(妻) 정씨(鄭氏)가 자녀들에게 재산을 상속하기 위해 작성한 문서이다. 정씨는 자신이 연로하여 병을 얻어 죽을 수 있으니 노비와 전답을 자녀들에게 균등하게 나누겠다고 재산 상속의 사유를 기재하였다. 이 문서는 족자에 배접 된 상태이다. 이 문서를 작성할 당시 가옹(家翁)인 동생 유학(幼學) 진후식(陳後寔)과 진후번(陳後蕃)이 증인으로 참여하였고, 송시형(宋時亨)이 필집(筆執)으로 참여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신묘년 류환두(柳煥斗) 등 통문(通文) 1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사회-조직/운영-통문 辛卯二月十三日 雲院 發文 柳煥斗 ▣院 辛卯二月十三日 柳煥斗 ▣院 고흥 무열사 고흥 무열사 신묘년에 류환두(柳煥斗) 등 11인이 발송한 통문(通文). 신묘년 2월 13일에 운원(雲院) 류환두(柳煥斗), 정효도(丁孝道), 이진기(李鎭璣) 등 11인이 성원(星院)에 보낸 통문(通文)이다. 이 문서는 배접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위치명혁기에게 답함 答魏致明赫基 ○癸酉 계유년(1933) 춘추시대는 고대 성인의 시대와 멀지 않아서 성인의 은택이 아직 다 민멸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공자께서는 "뜻있는 선비는 구렁 속에 시신이 뒹굴게 될 것을 항상 잊지 않는다."16)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오늘날이 어떤 시대인데 선비들이 구렁 속에 시신이 뒹굴 근심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저는 "선비가 오늘날에 살면서 구렁 속에 시신이 뒹굴 것을 근심하지 않는 자는 참된 선비가 아니다"라고 말하겠습니다.아! 우리들은 이미 나라가 없으니 임금을 성군으로 만들고 백성에게 은택을 베풀 수 있겠습니까? 또한 지위와 재주가 없으니 천하를 깨끗이 청소할 수 있겠습니까? 아울러 재력과 힘이 없으니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만물을 이롭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들은 모두 하늘에서 얻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으로부터 좋은 칭송을 구하려고 한다면 어느 것에서도 시작할 수 없습니다. 오직 도를 실현할 뜻을 지니고 자신의 힘으로 먹고 살며 죽어서 구렁 속으로 돌아가는 것을 편안히 여기면서 의롭지 않은 것이 털끝만큼이라도 몸을 더럽히지 않고, 저 상제가 부여해준 티 없이 맑고 깨끗한 성(性), 신령스럽고 밝은 심(心)17), 바르고 빼어난 형체를 완벽하고 깨끗하게18) 받들어 돌려줄 것을 기약하는 것, 이것이 바로 평생의 더할 나위 없는 좋은 모습일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春秋之時, 去古未遠, 聖澤不泯, 孔子尚云: "志士不忘在溝壑。" 而况今日何日, 而士子可無溝壑憂乎? 吾故曰: "士居今日, 而無憂乎溝壑者, 非真士也。"噫! 吾輩既無國家, 可以致君澤民? 又無位才, 可以掃清天下? 并無財力, 可以惠人利物? 此皆不得於天者。 故求善狀於此類, 則其道無由。 惟有求志食力, 安歸溝壑, 不以一毫非義汙身, 期以完完潔潔奉還他上帝所賦純粹之性ㆍ靈明之心ㆍ正秀之形, 是爲生平之無上善狀。 如何如何? 뜻있는……않는다 맹자가 말하기를 "옛날에 제(齊)나라 경공(景公)이 사냥할 적에 대부(大夫)를 부를 때 쓰는 정(旌)이라는 깃발로 사냥터를 관리하는 우인(虞人)을 불렀으나 오지 않자, 그를 죽이려고 한 일이 있었다. 공자께서 우인을 칭찬하시기를 '지사(志士)는 자신의 시신(屍身)이 도랑에 버려지더라도 한하지 않을 것을 항상 생각하고, 용사(勇士)는 전투를 하다가 자기 머리를 돌아보이 않을 항상 생각한다' 하셨으니 공자께서는 그의 어떤 점을 높이 사신 것인가? 자기 신분에 맞는 부름이 아니면 불러도 가지 않은 점을 높이 사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올바름 부름을 기다리지 않고 갈 수 있겠는가?〔孟子曰, 昔齊景公, 招虞人以旌不至, 將殺之, 志士不忘在溝壑, 勇士不忘喪其元, 孔子奚取焉. 取非其招不往也. 如不待其招而往, 何哉〕라고 하였다. 《맹자(孟子)》 〈등문공 하(滕文公下)〉 티없이……심(心) 전우는 "대개 리는 것은 순수한 성이기 때문에 태극은 상대가 없는 진재(眞宰)가 되고, 심은 정영한 기이기 때문에 리와 더불어 간격이 없는 묘용(妙用)이 된다.〔蓋理者純粹之性, 所以爲太極無對之眞宰也, 心者, 精英之氣, 所以爲與理無閒之妙用也〕"라고 하였다. 《간재집(艮齋集)前篇》 권10 〈답양기소(答梁基韶)〉 바르고 빼어난 형체를 완벽하고 깨끗하게 전우는 "천지는 이미 나에게 굳세고 바른 형기를 부여하였다〔天地旣賦我以強壯正秀之形氣〕"라고 말하였다. 《간재집(艮齋集)前篇》 권15 〈성산서사시제군(惺山書社示諸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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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이대식(李大植) 보험료가영수증(保險料假領收證) 고문서-증빙류-영수증 경제-회계/금융-영수증 昭和0九年二月十八日 朝鮮簡易生命保險 李大植 昭和0九年二月十八日 朝鮮簡易生命保險 李大植 朴東辰 1顆(원형, 적색) 나주 풍천임씨 명고(임전)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朝鮮簡易生命保險에서 李大植에게 발행한 保險料假領收證 *금액: 貳拾貳圓 *소장처: 서울 임인혁가(종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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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소차계장류

1772년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壬辰十一月日 城主 壬辰十一月日 [鄭錫亮 等] 靈光郡守 전라남도 영광군 官[着押] 3顆 영광 동래정씨 죽창공(정홍연)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772년에 11월에 영광군수에게 올린 소지 先山에 偸葬한 무덤을 掘去하도록 해주기를 요청하는 내용. *판결: 累代 先塋에 다른 사람이 偸葬하는 것은 아니되는 일로 今月內에 매장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즉시 파내는 것이 마땅하다고 명함. *상태 : 문서의 결락이 심해 내용 파악이 어려움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간재선생에게 올림 上艮齋先生 庚申 경신년(1920) 추성(鄒聖, 맹자)의 큰 공을 기록한 한 편3)의 선생의 작품이 지령(知令)에게 의혹을 받았기에 일전에 질문을 드렸는데 그만 다급히 서두르다가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돌아와 보니 마침 지령에게서 편지가 왔기에 그에 대해 답장을 하면서 저의 좁은 소견으로 헤아려 본 것을 대략 기술하여 보냈습니다. 다만 선생의 이 작품을 지난해에 한번 훑어보았기 때문에 까마득하여 문맥을 기억하지 못하니 어쩌면 좋겠습니까.다만 《맹자》의 '풍년 든 해에는 젊은이들이 대부분 게으르다.[富歲子弟多賴]'는 장(章)4)의 '성인은 먼저 우리 마음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먼저 깨쳤다.'는 한 구절을 들어 마음이 착하다[心善]는 제목을 달아서 맹자의 공이 다만 성이 선하다는 가르침에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마음이 착하다고 논한 것에도 있다는 선생의 의도를 밝혔습니다. 그러나 거칠고 소략하여 맹자의 본지와 선생의 의도를 잃어버렸습니다. 얼마 지나 우연히 《맹자》의 그 장5)을 꺼내어 반복해서 읽어보니, 다섯 번째 절(節) 대문의 "그 본성이 사람과 다르다."는 구와 세 번 째 절(節)의 《집주》에 "그 본성이 선한 것은 같지 않음이 없다."6)는 말 등은 분명 성이 선한 것을 주로 말하였으니, 지령(知令)이 심선(心善)이라 한 선생의 의도를 의심할 만합니다.다만 사람마다 입은 좋아하는 바가 똑같고 귀는 좋은 소리를 듣는 바가 똑같으며 눈은 아름다운 색을 좋아하는 바가 똑같고 마음도 똑같다는 것을 열거한 뒤에 이어서 또 "성인은 먼저 우리 마음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먼저 깨쳤다."라 하였으니, 어찌 내 마음이 성인의 마음과 같음을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음이 이미 성인과 같다면 어찌 심선(心善)을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찌 대문과 《집주》에 심선(心善)이라는 두 글자가 없다는 이유로 다만 성선(性善)은 말할 수 있고 심선(心善)은 금하여 말할 수 없단 말입니까.제가 이 장의 본지(本旨)를 자세히 살펴보니, 사람의 마음이 의리에 대하여 기뻐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근거로 인성이 모두 선하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이는 마치 사단(四端)을 보고서 사성(四性)이 있는 것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성이 선한 것은 체(體)가 되어 마음에 갖춰져 있고, 마음이 선한 것은 용(用)이 되어서 성을 발현하니, 하나는 체가 되고 하나는 용이 되어 결과적으로는 둘 다 선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개 성은 형상도 없고 작위도 없기[無形無爲] 때문에 사람이 만사(萬事)의 변화에 대응하는 것은 모두 마음[心]에 달려 있습니다. 학자가 만약 성이 선할 뿐만 아니라 마음 또한 선하다는 것을 안다면, 그 마음을 중하게 여겨서 물욕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하지 않겠습니까. 이 때문에 심선(心善)의 학설이 후대에 큰 공이 있게 되는 까닭입니다.대개 맹자가 성선을 논한 것은 하늘에 떠 있는 해와 같아서 그 큰 공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또한 이 장에 이르러 심선(心善)이라 말한 것도 또한 큰 공이 되는데, 이에 대해 말하는 자가 없기에 이처럼 말하였으니 참으로 그것을 드러내어 밝히고자 하는 것입니다. 선생의 의도가 어찌 이에 있지 않겠습니까. 다만 제가 지산(志山)에게 준 편지에서 맹자의 본지를 살피지 못하고 성선과 심선이란 두 가지로 개괄하여 설명하였으니, 자못 빈주(賓主)의 구분을 잃었습니다. 언설의 거칠고 소략함이 참으로 이전에 염려했던 것과 같게 되었으니, 이것이 후회스러운 일입니다.○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맹자가 심선(心善)을 말한 큰 공을 지령(志令)이 의심하였는데, 다만 얕은 나의 견해에 근거하여 말을 한다면 의리는 진실로 리로서 모든 사람들이 모두 그렇다고 긍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심은 리가 아니다. 리는 선한 것인데 심 또한 그렇다면, 어찌 선한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이 심은 물욕에 한 번 빠지면 때때로 리를 가리켜 불선하다고 생각하고, 리가 아닌 것을 선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리는 '순선(純善)하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심은 다만 '본래 선하다.[本善]'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순(純)과 본(本)의 차이에 따라 리와 기를 분별한다. 성과 심을 합하여 말할 때는 성선(性善)이 주인이 되고, 심선(心善)은 손님이 된다. 만약 각각 따로 나누어 두 개의 선함을 논한다면, 빈주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 정자(程子)의 편지에서 심선을 말했고, 《대학》 전7장7)과《대학혹문》,8) 《주자대전》 〈답정정사서(答程正思書)〉9)에서 모두 심의 바름[正]을 분명하게 말하였다. 불가에서는 심선을 말하면서 본말을 구분하지 않고 이를 뭉뚱그려 지선(至善)이라고 말하니 다만 이는 성은 제쳐두고 마음만을 믿는 것이다. 육씨(육구연)가 양경중(楊敬仲)을 대했을 때 '나는 단지 이 마음을 믿는다.'라 하였는데, 이것이야말로 큰 잘못이다." 尊稿記鄒聖大功一篇, 爲志令所疑, 向既提稟而卒卒未及承誨而歸。 歸則適自志令有書, 因其修謝, 畧寫揣測于管見者送去。 但尊稿此記, 年前一覽, 而茫不記語脈, 如何? 只據孟子富歲子弟多賴章'聖人先得我心之所同然'一段, 爲心善之題目, 以明孟子之功, 不但在性善之訓, 而亦在心善之論之意。 然恐其鹵莽踈綻, 有失孟子之旨先生之意。 俄者, 偶出孟子本章, 反覆之, 則第五節大文, "其性與人殊"之句, 第三節《集註》"其性之善無不同也"之語, 果皆主性善說, 而有如志令之所疑者。 但其歴舉口之同嗜, 耳之同聽, 目之同美, 心之同然, 而繼之又曰, "聖人先得我心之所同", 則豈非我心同於聖人心之謂乎? 心即與聖人同, 則豈非心善之謂乎? 烏可以大文與《集註》無心善二字, 只得言性善而禁不言心善乎? 竊詳此章本旨, 蓋以人心之無不悅理義, 以證人性之皆善, 如見四端而知有其四性也。 性之善爲體而具乎心, 心之善爲用而發乎性, 一體一用, 究非二善也? 蓋性者無形無爲, 人之酬酢萬變, 皆在於心。 學者若知不但性之爲善而心之亦善, 則豈敢不自重其心, 而不欲陷溺於物欲乎? 此之謂心善之說大有功於後世也。 夫孟子之論性善, 如日中天, 其爲大功, 固不須言。 至於此章, 心善說之, 亦爲大功, 無有道之者。 故此記云云, 正欲表而出之也。 先生之意, 豈不在此乎? 但小子與志山書, 有不察於孟子本旨, 槩以性善心善兩下說去, 殊失賓主之分。 其爲鹵疎, 果有如向之所虞者, 是可悔也。○ 先生答書曰 : "孟子言心善大功, 志令疑之, 但據淺見言之, 理義固是理也, 其人人之同以爲然者。 却是心, 不是理也。 夫理是善底, 而心以爲然, 亦豈非善底? 但此心一經陷溺之後, 又往往指理爲不善, 非理爲善, 故理可曰'純善', 心但可曰'本善'。 只純與本之間, 理與氣之分也。 性心之合言時, 性之善固爲主, 心之善固爲賓。 若各論二者之善, 又不須分賓主。 程書言心善,《大學》傳七章,《或問》《大全》〈答程正思書〉, 皆明言心之正。 若乃釋氏之言心善, 不分本末, 槩謂之至善, 惟此心之是信。 陸氏之對楊敬仲言, '某只是信箇心,' 此却大誤也。 추성의……한 편 《간재집(艮齋集)전편》 권15 잡저의 〈기추성대공(記鄒聖大功)〉을 가리킨다. 풍년……장 《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 7장을 말한다. 맹자는 "풍년에는 자제들이 의뢰함이 많고, 흉년에는 자제들이 포악함이 많으니, 하늘이 재주를 내림이 이와 같이 다른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빠뜨리는 것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 모맥을 파종하고 씨앗을 덮되 그 땅이 똑같으며 심는 시기가 똑같으면, 발연히 싹이 나와서 일지의 때에 이르러 모두 익으니, 비록 똑같이 않음이 있지만 이것은 땅에 비옥함과 척박함의 차이가 있으며, 우로의 배양과 사람이 경작하는 일에 똑같지 않은 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류인 것은 대부분 서로 같으니, 어찌 홀로 사람에 이르러서만 의심하겠는가? 성인도 나와 동류이다. 그러므로 용자는 발을 알지 못하고 신을 만들더라도 내가 그 삼태기를 만들지 않을 줄은 안다고 하였으니, 신이 서로 비슷함은 천하의 발이 같기 때문이다. 입이 맛에 있어서 즐김을 똑같이 함이 있으니, 역아는 먼저 우리 입이 즐기는 것을 안 자이다. 가령 입이 맛에 있어서 그 성이 남과 다름이 마치 개와 말이 우리와 동류가 아닌 것처럼 다르다면, 천하가 어찌 맛을 즐기기를 모두 역아가 조리한 맛을 따르듯이 하겠는가? 맛에 이르러서는 천하가 역아가 되기를 기약하니, 이것은 천하의 입이 서로 같기 때문이다. 귀에 있어서도 그러하니, 소리에 있어서는 천하가 사광이 되기를 기약하니, 이것은 천하의 귀가 서로 같기 때문이다. 눈에 있어서도 그러하니, 자도에 있어서 천하가 그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는 이가 없으니, 자도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는 자는 눈이 없는 자이다. 그러므로 입이 맛에 있어서 똑같이 즐김이 있고, 귀가 소리에 있어서 똑같이 들음이 있으며, 눈이 색에 있어서 똑같이 아름답게 여김이 있다고 하는 것이니, 마음에 이르러서만 홀로 똑같이 옳게 여기는 것이 없겠는가? 마음에 똑같이 옮게 여기는 것은 어떤 것인가? 리이며 의이다. 성인은 우리 마음이 똑같이 옳게 여기는 것을 먼저 아셨다. 그러므로 리와 의가 우리 마음에 기쁨은 추환이 우리 입에 좋은 것과 같다.〔孟子曰, "富歲, 子弟多賴, 凶歲, 子弟多暴, 非天之降才爾殊也, 其所以陷溺其心者然也. 今夫麰麥, 播種而耰之, 其地同, 樹之時又同, 浡然而生, 至於日至之時, 皆熟矣. 雖有不同, 則地有肥磽, 雨露之養·人事之不齊也. 故凡同類者, 擧相似也, 何獨至於人而疑之? 聖人, 與我同類者. 故龍子曰, '不知足而爲屨, 我知其不爲簣也.' 屨之相似, 天下之足同也. 口之於味, 有同耆也, 易牙先得我口之所耆者也. 如使口之於味也, 其性與人殊, 若犬馬之與我不同類也, 則天下何耆皆從易牙之於味也. 至於味, 天下期於易牙, 是天下之口相似也. 惟耳亦然. 至於聲, 天下期於師曠, 是天下之耳相似也. 惟目亦然. 至於子都, 天下莫不知其姣也. 不知子都之姣者, 無目者也. 故曰, 口之於味也, 有同耆焉, 耳之於聲也, 有同聽焉, 目之於色也, 有同美焉. 至於心, 獨無所同然乎? 心之所同然者何也? 謂理也, 義也. 聖人先得我心之所同然耳. 故理義之悅我心, 猶芻豢之悅我口.〕"라 했다. 《맹자(孟子)》의 그 장 앞에 거론한 장을 뜻한다. 그……없다 《맹자(孟子)》 〈고자상(告子上)〉의 "성인도 나와 동류이다.〔聖人, 與我同類者.〕"에 대해 《집주》에서는 "성인 또한 사람이니, 그 성의 선함이 같지 않음이 없다.〔聖人亦人耳, 其性之善, 無不同也.〕"를 가리킨다. 《대학(大學)》 전7장 《대학(大學)》 전7장에서는 "이른바 몸을 닦음이 그 마음을 바룸에 있다는 것은 마음에 분치(忿懥)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공구(恐懼)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좋아하고 즐기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하며, 우환(憂患)하는 바가 있으면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으며,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이것을 일러 '몸을 닦음이 그 마음을 바룸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所謂修身在正其心者, 身有所忿懥, 則不得其正. 有所恐懼, 則不得其正. 有所好樂, 則不得其正. 有所憂患, 則不得其正. 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此謂修身在正其心."라 했다. 《대학혹문(大學或問)》 혹자가 "사람이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본래 이로써 사물에 응하는 것인데, 이 장의 전문에서는 기쁨·성냄·근심·두려운 바가 있으면 곧 그 바름을 얻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마음이라는 것은 분명 고목처럼 다시 살아날 수 없고 꺼진 재처럼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처럼 된 뒤에야 그 바름을 얻었다고 하는 것입니까?〔或問: "人之有心, 本以應物, 而此章之傳以爲有所喜怒憂懼, 便爲不得其正, 然則其爲心也. 必如槁木之不復生, 死灰之不復然, 乃爲得其正耶?〕"라 하자 주자는 "사람의 마음이 거울이 비어 있는 것과 같고 저울대가 평평한 것과 같이 맑고 허명(虛明)하여 몸의 주인이 되는 것은 참으로 진체(眞體)의 본연이지만, 희로우구(喜怒憂懼)가 감촉에 따라 응하고 미추(美醜)와 부앙(俯仰)이 사물에 따라 형체를 부여받는 것은 또한 그 작용에 있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응하지 않았을 때에는 그 본체가 거울이 비어 있고 저울대가 평평한 것처럼 지극히 허(虛)하고 지극히 정(靜)한 상태이기에 비록 귀신이라도 그때를 엿보지 못함이 있다. 그리고 사물에 감응할 때에 감응하는 것이 또 모두 절도에 맞으면 거울이 비어 있고 저울대가 평평한 것과 같은 작용이 막힘없이 유행하여 광명정대(光明正大)하다. 이것이 바로 천하의 공통된 도가 된 이유이니 또한 어찌 바름을 얻지 못함이 있겠는가? 다만 사물이 왔을 때에 제대로 살피지 못함이 있으면 응함에 있어 혹 잘못이 없을 수 없다. 또 함께 가지 않을 수 없다면 희로우구가 반드시 마음속에서 동하게 되어, 이 마음의 작용이 비로소 바름을 얻지 못함이 있게 된다.〔人之一心, 湛然虛明, 如鑑之空, 如衡之平, 以爲一身之主者, 固其眞體之本然, 而喜怒憂懼, 隨感而應, 姸蚩俯仰, 因物賦形者, 亦其用之所不能無者也. 故其未感之時, 至虛至靜, 所謂鑑空衡平之體, 雖鬼神有不得窺其際者, 固無得失之可議; 及其感物之際, 而所應者, 又皆中節, 則其鑑空衡平之用, 流行不滯, 正大光明, 是乃所以爲天下之達道, 亦何不得其正之法哉? 唯其事物之來, 有所不察, 應之旣或不能無失, 且又不能不與俱往, 則其喜怒憂懼, 必有動乎中者, 而此心之用, 始有不得其正者耳.〕"라 했다. 《주자대전(朱子大全)》 〈답정정사서(答程正思書)〉 정사가가 "마음에 대해 나가고 들어오는 것에 때가 없고 그 향하는 바를 알 수 없다(出入無時, 莫知其鄕處.)"라 하자 주자는 "마음을 논한 것은 이것은 마음의 본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진실로 이와 같다면 이 본체 외에 별도로 하나의 부차적으로 일을 하는 정해지지 않은 마음이 있어서, 공자와 맹자가 사람들에게 그 본체를 버리고 이것이 지시하는 것에 나아가 공부를 하도록 한 것이 되는데 어찌 그러하겠습니까? 이것은 해석의 잘못이 아니라 본원처를 분명하게 보지 못하고 함영·존양의 바탕이 없으므로 이와 같게 되 것이니, 다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但論心處以爲此非心之本體, 若果如此, 則是本體之外別有一副走作不定之心, 而孔孟敎人却舍其本體而就此指示, 令做工夫, 何耶? 此等處非解釋之誤, 乃是本原處見得未明, 無箇涵泳存養田地, 所以如此, 更願察之也.〕"라 했다. 《주자대전(朱子大全)》 〈답정정사(答程正思)〉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간재선생에게 올림 上艮齋先生 庚申 경신년(1920) 보내주신 편지를 가을에 받아보았는데, 심과 성의 선함을 따로 논한다면 손님과 주인으로 나눌 필요가 없다고 하신 것은 삼가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다만 《맹자》의 '풍년 든 해에는 젊은이들이 대부분 게으르다.[富歲子弟多賴]'는 장10)을 근거로 보면, 본지(本旨)는 성선(性善)을 주로 논하고 그것을 심선(心善)으로 증명하고자 한 것인데, 거기에서 '심이 선하다.'고 말한 것은 성선(性善)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어떻게 그러함을 알 수 있을까요. 즉 제3절의《맹자집주》에 나오는 "사람의 성(性)이 선한 것은 성인과 같다."11)는 한 구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맹자》 〈고자편(告子篇)〉의 '기류단수(杞柳湍水)'로부터 이 장(章)에 이르기까지 모두 성선(性善)을 주로 말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이 장에서 논하지 않고, 심과 성의 선함을 따로 떼어 논한다면 참으로 손님과 주인으로 나누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만일 또 이 장에서 성선(性善)을 위주로 논한 것을 근거로 마음이 선하다 하여 후대에 끼친 맹자의 큰 공효를 말하지 못하게 한다면 이 또한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일찍이 공자의 초상화를 보니, 그 원본은 대부분 서로 달랐습니다. 이것이 진짜이면 저것은 반드시 진짜가 아니고 저것이 진짜면 이것은 반드시 진짜가 아닌데도, 모두 똑같이 공경을 표하고 있으니 아마 마음이 편치 않을 것입니다. 그것들을 가려서 취사선택하려 한다면, 2천 년 전 성인의 모습을 무엇을 근거로 알 수 있겠습니까? 공자의 초상만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요순과 기자로부터 안자, 증자, 자사, 맹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남아있는 초상화가 있지만, 그 그림이 하나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순수하고 질박한 상고(上古) 시대에는 이처럼 꾸며서 그린 일은 없었을 것이고, 하ㆍ은ㆍ주 이전의 경전(經傳)과 사책(史策)에서도 일찍이 후세의 화상찬(畵像賛)ㆍ사조명(寫照銘)과 같은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가령 참 모습을 그리는 풍속이 옛날부터 있었다고 하더라도 화가마다 취향이 같지 않고 장단점이 또한 달라 묘사할 것을 묘사하지 않거나 묘사하고 싶어도 그럴 겨를이 없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며, 혹은 후대에 그림에 헤아릴 수 없는 변고가 발생하여 이미 참 모습을 그렸다고 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지켜 보호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진영(眞影)을 그리는 풍속이 우리나라에서도 성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퇴계(이황), 율곡(이이), 사계(김장생), 우암(송시열)과 기타 제현들의 초상이 혹은 있기도 하고 혹은 없기도 하며 전해지기도 하고 유실되기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요순 이하의 여러 성현들은 화가의 취향이나 장단점에 따라 다르게 그린 초상이 한 점도 없고 아울러 후대에 초상에 사고도 나지 않고서 수천 년의 오랜 세월 뒤에도 그 초상을 보존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저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상고 성현의 초상은 대부분이 후대의 호사가의 손에서 나왔으며 당시의 진짜 초상은 아니라고 여깁니다. 만약에 참 모습의 초상이 아닌데 공경을 표한다면 성현을 업신여기는 결과가 되지 않겠습니까. 秋聞下誨, 各論心性之善, 不須分賓主, 謹聞命矣。 但據《孟子》富歲子弟多賴章, 本旨是主論性善, 而證之以心善。 其言心善者, 乃所以明性善也。 何以知其然也? 觀於第三節《集註》"人性之善, 與聖人同一"句, 已可知矣。 又以《孟子》此篇自杞柳湍水以至此章, 皆主言性善故也。 若不就論於此章, 而各論心性之善, 則固當不分賓主矣。 若又必以此章之主性善, 禁不言孟子心善大功, 則大不然矣。 嘗見孔聖畵像, 其本多各異。 此眞則必彼非, 彼眞則必此非, 而均爲致敬, 恐爲未安。 欲揀別取舍, 則二千年前聖人狀貌, 何從而知之? 非惟孔聖之像爲然, 自堯舜箕子, 以及顏曾思孟, 皆有遺像, 而亦各非一本。 蓋上古淳質之時, 未必其有此等彌飾之事, 且於三代前經傳史策, 未見有如後世畵像賛寫照銘之類矣。 借令寫眞之俗, 從古有之, 或人之趣味不同, 修短亦異, 可寫而不寫, 欲寫而未暇者有之, 或事故莫測, 已寫而未克保守者有之。 故摹影之俗, 在我東不爲不盛, 而如退栗沙尤其他諸賢之肖像, 或有或無, 或傳或佚, 夫何堯舜以下諸聖賢, 一無趣味修短之不同, 幷無後世之事故, 而保其遺像於數千載之久乎? 故妄意以爲上古聖賢之像, 多出於後世好事者之手, 而非當日之眞像也。 如果致敬於非眞之像, 則不幾乎慢聖賢之歸乎? 《맹자(孟子)》……장 《맹자(孟子)》 〈고자상(告子上)〉 7장을 말한다. 맹자는 "풍년에는 자제들이 의뢰함이 많고, 흉년에는 자제들이 포악함이 많으니, 하늘이 재주를 내림이 이와 같이 다른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빠뜨리는 것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 모맥을 파종하고 씨앗을 덮되 그 땅이 똑같으며 심는 시기가 똑같으면, 발연히 싹이 나와서 일지의 때에 이르러 모두 익으니, 비록 똑같이 않음이 있지만 이것은 땅에 비옥함과 척박함의 차이가 있으며, 우로의 배양과 사람이 경작하는 일에 똑같지 않은 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류인 것은 대부분 서로 같으니, 어찌 홀로 사람에 이르러서만 의심하겠는가? 성인도 나와 동류이다. 그러므로 용자는 발을 알지 못하고 신을 만들더라도 내가 그 삼태기를 만들지 않을 줄은 안다고 하였으니, 신이 서로 비슷함은 천하의 발이 같기 때문이다. 입이 맛에 있어서 즐김을 똑같이 함이 있으니, 역아는 먼저 우리 입이 즐기는 것을 안 자이다. 가령 입이 맛에 있어서 그 성이 남과 다름이 마치 개와 말이 우리와 동류가 아닌 것처럼 다르다면, 천하가 어찌 맛을 즐기기를 모두 역아가 조리한 맛을 따르듯이 하겠는가? 맛에 이르러서는 천하가 역아가 되기를 기약하니, 이것은 천하의 입이 서로 같기 때문이다. 귀에 있어서도 그러하니, 소리에 있어서는 천하가 사광이 되기를 기약하니, 이것은 천하의 귀가 서로 같기 때문이다. 눈에 있어서도 그러하니, 자도에 있어서 천하가 그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는 이가 없으니, 자도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는 자는 눈이 없는 자이다. 그러므로 입이 맛에 있어서 똑같이 즐김이 있고, 귀가 소리에 있어서 똑같이 들음이 있으며, 눈이 색에 있어서 똑같이 아름답게 여김이 있다고 하는 것이니, 마음에 이르러서만 홀로 똑같이 옳게 여기는 것이 없겠는가? 마음에 똑같이 옮게 여기는 것은 어떤 것인가? 리이며 의이다. 성인은 우리 마음이 똑같이 옳게 여기는 것을 먼저 아셨다. 그러므로 리와 의가 우리 마음에 기쁨은 추환이 우리 입에 좋은 것과 같다.〔孟子曰, "富歲, 子弟多賴, 凶歲, 子弟多暴, 非天之降才爾殊也, 其所以陷溺其心者然也. 今夫麰麥, 播種而耰之, 其地同, 樹之時又同, 浡然而生, 至於日至之時, 皆熟矣. 雖有不同, 則地有肥磽, 雨露之養·人事之不齊也. 故凡同類者, 擧相似也, 何獨至於人而疑之? 聖人, 與我同類者. 故龍子曰, '不知足而爲屨, 我知其不爲簣也.' 屨之相似, 天下之足同也. 口之於味, 有同耆也, 易牙先得我口之所耆者也. 如使口之於味也, 其性與人殊, 若犬馬之與我不同類也, 則天下何耆皆從易牙之於味也. 至於味, 天下期於易牙, 是天下之口相似也. 惟耳亦然. 至於聲, 天下期於師曠, 是天下之耳相似也. 惟目亦然. 至於子都, 天下莫不知其姣也. 不知子都之姣者, 無目者也. 故曰, 口之於味也, 有同耆焉, 耳之於聲也, 有同聽焉, 目之於色也, 有同美焉. 至於心, 獨無所同然乎? 心之所同然者何也? 謂理也, 義也. 聖人先得我心之所同然耳. 故理義之悅我心, 猶芻豢之悅我口.〕"라 했다. 사람의……같다 《맹자(孟子)》 〈고자상(告子上)〉의 "성인도 나와 동류이다.〔聖人, 與我同類者.〕"에 대해 《맹자집주(孟子集註)》에서 "성인 또한 사람이니, 그 성의 선함이 같지 않음이 없다.〔聖人亦人耳, 其性之善, 無不同也.〕"라고 한 말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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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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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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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간재선생에게 올림 上艮齋先生 庚申 경신년(1920) 노사(蘆沙)가 명덕(明德)을 논하면서 본심으로 그 이름을 정하고, 물을 담는 소반과 음식을 담는 그릇을 비유12)로 삼고서 "기의 정상(精爽)이다."라 말했고, "분명 이것은 기로서 말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명덕을 기의 범주(氣分)에 소속시킨 것은 너무나도 명백한데, (노사는) 명덕은 기이므로 기를 밝히는 학문이라고 배척한 것은 어째서입니까?13) 이는 아마도 단기지설(單氣之說)을 비난한 것입니다. 그러나 단기지설 역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호흡의 출입과 기혈의 승강을 명덕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감로(甘露)가 보리(來牟-來麰)이다'14)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비난을 당하는 것이 진실로 마땅합니다. 만약 주장하는 바의 명덕의 명목을 다만 심의 기에 소속시킬 수 있어도 성의 리에 소속시킬 수 없다고 하는 자에 대해 단기(單氣)의 죄를 억지로 가하여 배척한다면, 노사는 반드시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이제 《노사연보(蘆沙年譜)》를 보니 "박영수에게 답한 편지에서 '명덕을 단기로 보는 설을 반박한다.'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그 본래 편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배척한 것은 저곳에 있지 이곳에 있지 않습니다. 다만 명덕을 곧바로 리라고 하거나 리기의 합이라 하여, 심에 나아가 성을 가리키는 것에 대해서 노사도 심히 배척한 것이지만, 또 다른 한쪽에서는 헐뜯은 것입니다. 노사가 세상의 도를 걱정한 것은 오로지 저기에만 있고 여기에는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점은 《연보》중에서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거늘 선사(先師)의 공정한 혜안으로도 끝내 편견을 지닌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러나 《연보》의 실수가 다만 하나는 들고 하나는 버린 것이니 오히려 크게 해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 묘지명에 이르러서 기의 정묘함과 거침(精粗)을 구분하지 않고, 곧바로 '명덕은 기이다'라고 생각한 것은 쇠를 은이라 부르는 것처럼 잘못된 것입니다. 그 《전집》중에 "기의 정상은 분명히 기이다" 등의 구절은 어떻게 구분하여 처리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 문인과 자손들의 마음을 진실로 알 수 없습니다. 蘆沙之論明德, 以本心定其名, 以儲水之盤載食之鉢取譬, 而曰"氣之精爽," 曰"分明是以氣言者。" 其屬明德於氣分也, 不啻明白, 而其斥明德是氣, 爲明氣之學者, 何也? 此則蓋斥單氣之說也。 然單氣之說, 亦有兩般。 其以噓吸之出入榮衛之升降爲明德, 如甘露來牟之說者, 其見斥也, 固宜矣。 若以其所主之名目, 但可屬心之氣, 而不宜幷屬性之理者, 勒加單氣之罪而斥之, 蘆沙之所必不爲也。 今見〈蘆沙年譜〉, 云答朴瑩壽書, "驳明德單氣之說。" 此則按其本書而可知。 其所斥者在彼而不在此也。 但以明德爲直是理爲理氣合, 卽心指性, 亦蘆沙之所深斥, 而一邊之所喙喙者也。 蘆沙之爲世道憂不獨在彼而不在此。 此則年譜中, 一不槩及, 使其先師之公眼, 終歸於偏見, 何也? 然年譜之失, 但在於一舉而一遺, 猶爲無傷也。 至其墓銘, 則不分氣之精粗, 直以爲明德是氣, 喚鐵作銀。 未知其《全集》中, "氣之精爽分明是氣"等句, 將何以區處耶。 其門人子孫之心, 誠莫之知也。 물을……비유 기정진은 "'명덕은 단지 기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겠는가?' 말하였다. '기물(器物)로서 비유하면 기(氣) 자는 단지 그릇만을 가리키는 것이고, 명덕은 물이 담겨 있는 그릇을 가리키는 것이다.'〔明德單屬氣分乎? 曰 : '以器物譬之,則氣字單指盤盂,明德指儲水之盤盂.'〕"ㆍ"생각건대 본심은 이름하면 명덕이니, 이것에는 반드시 그 까닭이 있다. 내가 일찍이 밥그릇으로 비유하였는데, 둥근 주발에 쌀밥이 가득 담긴 것이 명덕이다.〔惟人之本心,乃名明德,是必有其故矣. 愚嘗譬之食器,一圓鉢盂滿載玉食者,是明德也.〕" 《답문류편(答問類編)》 권6 대학삼지이(大學三之二)〉 명덕은……어째서입니까? 기정진은 "명덕은 오직 기를 가리킨다'는 설이 요즘 세상에 파다하지만 내 귀에는 거슬리는 말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내 견해로 배척하면서 "명덕이 기라면 명명덕은 기를 밝히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明德單氣"之說,近日頗行於世,而礙於淺者之耳,卽嘗妄闢之曰:"明德是氣,則明明德是明氣也.〕"라고 하였다. 《노사집(蘆沙集)》 권6 〈답박형수(答朴瑩壽)〉 호흡의 보리이다 기정진은 "이제 한 가지 비근한 일로 비유해 보겠습니다. 감로는 술에서 생기지 않습니까? 술은 누룩에서 생기지 않습니까? 누룩은 보리에서 생기지 않습니까? 이제 어떤 사람이 '감로가 보리이다'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반드시 말이 되지 않는다고 여길 것입니다. '명덕이 기이다'라는 설이 어찌 이것과 다르겠습니까.〔今請以一淺事喩之. 甘露不生於酒耶?酒不生於麴糱耶?麴糱不生於來麰耶?今有言者曰:"甘露來麰也",則人必以爲不成說話. "明德是氣"之說,何以異此?〕"라고 하였다. 《노사집(蘆沙集)》 권6 〈답박형수(答朴瑩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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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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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구에게 답함 答金聖九 乙丑 을축년(1925) 호서는, 청주(淸州)의 소심(小心) 황종복(黃鍾復) 어른이 지론이 엄정하여 사람의 뜻을 매우 복돋우고, 회덕(懷德)의 송연구(宋淵求) 어른도 그러합니다. 부고를 물리치고 죄를 성토한 것은 황장은 음성(陰城) 가까이 살고 송장은 전사인(田士仁)의 외숙이기 때문입니다.춘계(春溪)가 근래에 또 신해년(1911) 유서(遺書)의 등본을 꺼냈는데, 그 하단에 선사가 친필로 쓰기를 "공주(公州), 부여(扶餘), 진천(鎮川)에서 서산(瑞山), 태안(泰安), 청주(清州), 청안(清安) 등의 군까지 전달하라. 이것은 합당한 도리이니, 반드시 행해야 한다."고 하였고, 겉봉투에는 '구산(臼山)이 호서의 제 동지에게 받들어 부친다.'고 했습니다. 선사가 문인들로 하여금 돌려가면서 서로 경계하도록 한 것이 이처럼 간곡하였는데, 몇 년 동안 숨겨두고 있다가 기꺼이 오진영의 인가설에 붙은 뒤에 비로소 이 가르침을 내놓았으니, 그 죄는 과연 어떠하겠습니까?오진영은 정재(靜齋)가 유서를 늦게 내놓았다고 매번 성토했는데, 이제 송춘계가 숨긴 것은 다시 일 년 반이 지났는데도 한 마디도 꾸짖는 말이 없이 머리를 나란히 하고 무릎을 맞대고서 너와 나라고 하면서 사이좋게 지낸 것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의 당에 있기 때문입니다. 또 늦게 내놓았다고 성토한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늦게 내놓았기 때문에 '내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인가의 죄를 범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어찌 아니겠습니까? 그러고는 또 감히 방자하게 일부러 유서가 세 번 나온 이후에 인가의 죄를 범한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전에는 자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때렸는데, 지금은 자기만 생각하고 스승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아, 그는 이미 사람의 도리로 책망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니, 이와 같이 말하는 것도 내 입만 더럽히는 것이니, 차라리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湖西則清州黃小心丈鐘復, 持論嚴正, 甚強人意, 懷德宋丈淵求亦然, 而退訃討罪, 黃居陰近, 宋是田士仁內舅也。春溪近又出辛亥遗書謄本, 其下先師親筆書之曰"自公州·扶餘·鎮川, 轉致瑞山·泰安·清州·清安等郡。是合當道理, 必要行之", 皮封"臼山奉寄湖西諸同志"。先師之使門人轉相告戒, 申複如此, 而乃掩置多年, 甘附震認而後, 始出此訓, 其罪果何如耶?震每討靜之晚出遺書, 今宋之掩匿, 更過一年半之久, 而無一言相訾嗷, 駢首促膝, 爾我繾綣者何也? 爲其在渠黨故也。且其討晚出者何意? 豈非曰爲晚出故也, 故我犯認罪於不知中耶? 而乃又敢肆然故犯於遺書三出之後者, 何也? 前爲護己而打人, 今爲有己而無師也。噫, 彼既非可以人理責之者, 則如此云云, 徒汙我口, 寧欲無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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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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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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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년 진무성(陳武晟) 호구단자(戶口單子)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崇禎球年肆月日 ▣…▣陳武晟 崇禎球年肆月日 陳武晟 陳[着名] 고흥 무열사 고흥 무열사 HIKS_OD_F1030-01-200038 1636년(인조 14)에 진무성(陳武晟)이 제출한 호구단자(戶口單子). 1636년(인조 14)에 진무성(陳武晟)이 제출한 호구단자(戶口單子)이다. 문서의 오른쪽이 과상되어 당시 진무성이 거주한 주소를 알 수 없다. 또한 문서 하단 일부가 훼손되어 보존상태가 좋지 못하다. 당시 문서를 제출한 진무성의 나이는 71세 병인생이며, 본관은 여양(驪陽)이다. 처(妻) 박씨(朴氏)는 본관이 의창(義昌)이고, 51세이다. 문서에는 진무성과 처 박씨의 부(父)·조(祖)·증조(曾祖)·외조(外祖) 4조의 직역과 이름을 함께 기재하였다. 그 밖의 가족 사항으로 솔자(率子)가 있다. 이외에 노비의 명단 '천구질(賤口秩)'이 기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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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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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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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9년 이이곤(李以坤)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道光二十九年己酉式 行郡守 幼學 鰥 李以坤 道光二十九年己酉式 靈光郡 李以坤 전라남도 영광군 行郡守[着押] 靈光郡守之印(7.3×7.2), 靈光郡戶口(흑색, 12.4×3.3) 영광 광주이씨 퇴암공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1031-01-100013 1849년(헌종 15)에 영광군(靈光郡)에서 발급한 이이곤(李以坤)의 준호구(準戶口). 1849년(헌종 15)에 영광군(靈光郡)에서 발급한 유학(幼學) 이이곤(李以坤)의 준호구(準戶口)이다. 이이곤은 영광군 변산면(卞山面) 제12 신촌리(新村里) 제1통 제1호에 거주하였고, 나이는 70세 경자생이며,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현재 부인은 없으며, 부(父)·조(祖)·증조(曾祖)·외조(外祖) 4조, 생부(生父) 이대영(李大榮)의 직역과 이름을 기재하였다. 가족 사항으로 솔자(率子)는 이형필(李馨弼)에서 개명한 이승필(李升弼)과 이현필(李鉉弼), 손자는 이지순(李贄淳), 이정순(李正淳)이다. 아들들의 인적사항 다음에 작성된 외조는 이이곤의 빙부(聘父)이고, 손자들의 인적사항 다음에 작성된 외조는 장자 이승필의 빙부이다. 이외에 노비의 명단 '천구질(賤口秩)'이 기재되었다. 이 문서에는 영광군수의 인장과 [영광군호구(靈光郡戶口)]가 찍혔다. 이이곤은 1825년과 1828년 준호구에 이곤(李坤)으로 기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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