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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6년 진상한(陳相漢) 홍패(紅牌) 고문서-교령류-홍패 정치/행정-과거-홍패 康熙十五年三月二十一日 閑良 陳相漢 康熙十五年三月二十一日 肅宗 陳相漢 고흥 무열사 고흥 무열사 HIKS_OD_F1030-01-200001 1676년(숙종 2) 에 진상한(陳相漢)이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받은 홍패(紅牌). 1676년(숙종 2) 3월 21일에 한량(閑良) 진상한(陳相漢)이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고 받은 홍패(紅牌)이다. 진상한은 무과 병과(丙科) 제11,326인으로 급제했다. 문서 배면에 '閑良 陳相漢 武科 丙科 第一萬一千三百二十六人'이라 적은 첨지가 붙여져 있다. 이 문서는 배접된 상태로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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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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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령류

1723년 진만동(陳萬東) 홍패(紅牌) 고문서-교령류-홍패 정치/행정-과거-홍패 雍正元年四月初四日 閑良 陳萬東 雍正元年四月初四日 景宗 陳萬東 科擧之寶(9.7×9.7) 고흥 무열사 고흥 무열사 HIKS_OD_F1030-01-200001 1723년에 진만동(陳萬東)이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받은 홍패(紅牌). 1723년(경종 3) 4월 4일에 한량(閑良) 진만동(陳萬東)이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고 받은 홍패(紅牌)이다. 진만동은 무과 병과(丙科) 제429인으로 급제했다. 과거지보(科擧之寶)가 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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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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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무진년 진채룡(陳采龍) 등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戊辰二月日 豆原面 居 化民 陳采龍 ▣… 城主 戊辰二月日 陳采龍 等 興陽縣監 官[着押] 3顆(6.7×6.5) 고흥 무열사 고흥 무열사 무진년에 진채룡(陳采龍) 등이 흥양현감(興陽縣監)에게 올린 소지(所志). 무진년 2월에 두원면(豆原面)에 사는 진채룡(陳采龍) 등이 흥양현감(興陽縣監)에게 올린 소지(所志)이다. 새로운 족보에 종형제가 누락되는 등의 문제로 전 족보에 기록되었음을 증빙하는 입지를 발급해달라고 청원하였다. 이에 동월 23일에 흥양현감이 '입지를 발급할 일'이라 제사(題辭)를 내렸다. 이 문서는 오른쪽 일부가 훼손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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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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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임자년 진성래(陳聖來)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壬子十二月日 豆原面 ▣…▣ 陳聖來 城主 壬子十二月日 陳聖來 興陽縣監 官[着押] 1顆(6.7×6.5) 고흥 무열사 고흥 무열사 임자년에 진성래(陳聖來)가 흥양현감(興陽縣監)에게 올린 소지(所志). 임자년 12월에 두원면(豆原面)에 사는 진성래(陳聖來)가 흥양현감(興陽縣監)에게 올린 소지(所志)이다. 지난번 집터[家基] 거래 문제로 문기를 남겼는데, 이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임인석(林仁石)을 잡아 집터 값의 남은 돈 11냥을 추급(推給)하도록 하고, 환미(還米) 2석을 무납(貿納)하도록 청원하는 내용이다. 이에 동월 초1일에 흥양현감이 제사(題辭)를 내렸다. 이 문서는 오른쪽 일부가 훼손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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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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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근소 서장병갑에게 답함 答近小徐丈柄甲 ○癸亥七月 계해년(1923) 7월 이전에 받은 편지에서 최병심(崔秉心)의 비문(碑文)94)에 대해 악을 편든다고 의심하셨는데, 일이 사실과 어긋나니, 군자가 한 마디 말로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 됨95)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지난번 계화도에서 뵙고 대략 의리와 사실을 들어 아뢰었으니, 잘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쯤은 이미 훤히 알아 마치 구름을 젖히고 푸른 하늘을 보는 것 같겠지요? 아니면 아직도 반신반의하는 중에 있으십니까? 제가 어른에 대해 비록 노소(老少)의 다름은 있으나 삼가 도의로써 서로 기대하고자 합니다. 이제 심술(心術)과 크게 관련이 있는 일에 대해서 어찌 서로를 알지 못함이 이 지경에 이르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우러러 받들어 질정하니, 대략 더불어 설파해 주셔서 답답함을 풀어주기를 지극히 바랍니다. 前承下狀, 疑以黨惡於崔碑。 事涉爽實, 不免'君子一言之不知。' 故頃於華拜, 略擧義理事實, 以稟白矣。 未審今已快悟, 若披雲覩青? 抑尙在信疑之間耶? 澤述於丈, 雖有老少之異, 竊欲以道義相期。 今於心術大關, 豈容不相悉之至此乎? 茲以仰質, 略與下破, 開鬱至望。 최병심(崔秉心)의 비문(碑文) 최병심이 간재를 대신하여 지은 〈율헌최공신도비문(栗軒崔公神道碑文)〉을 말한다. 율헌은 최병심의 선조 최득지(崔得之, 1379~1455)의 호이다. 오진영이 이 비문에 대해 〈편질동문제공(徧質同門諸公)〉에서 신도비문이 격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라의 법도를 어겼고 식자들의 시비를 범했다."라고 비난하여 양측의 갈등이 심해졌다. 군자가……됨 이 말은 《논어(論語)》 〈자장(子張)〉에 나온다. 자공(子貢)이 말하기를, "군자는 한 마디 말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도 하고 한 마디 말로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 되기도 하니, 말을 삼가지 않을 수 없다.〔君子一言以為知, 一言以為不知, 言不可不愼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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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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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근소 서장에게 보냄 與近小徐丈 丁卯元月 정묘년(1927) 1월 제가 몇 년 전에 호남에서 인가 없이 문집을 간행하게 되어 현동(玄洞)에서 일을 보고 있었는데, 최병심의 비문에 대해 악을 편든다고 어른에게 의심을 받았습니다. 이에 대략 의리와 사실을 들어서 의리를 봄이 명확하지 못하고 남을 꾸짖음이 실정이 아니라는 말로 고하였으나, 어른께서 잘 이해하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얼마 있다가 호남에서 스승을 무함한 일로 오진영을 성토할 때에, 어른께서 "석농(石農 오진영)이 우암(尤菴 송시열)과 매우 흡사하다."라고 하셨다는 말을 듣고 또한 가만히 한탄하며 "깨닫지 못한 것은 그래도 말할 수 있으나 의리를 봄이 명확하지 못한 것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른단 말인가?" 하였습니다.근래에는 어른께서 마침내 오진영의 편지를 보여주면서 "그가 사실은 원래 선사께서 말씀으로 하지 않으신 지시를 따른 것이다." 하셨으니, 이것은 사람들에게 인가를 받으라고 지시했다는 무함의 실상이 있음을 알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실제적인 근거를 어찌하여 여러 해 동안 감추어서 그의 죄를 숨긴단 말입니까? 이리하여 어른께서는 스스로 오진영에 대해 그 악을 편들고 스승을 잊었으니, 한갓 의리를 봄이 명확하지 못할 뿐만이 아닙니다. 비록 그러나 그의 죄는 이미 사실이고 끝내 달아날 수 없기 때문에 하늘이 어른의 충심을 유인하여 그 편지를 내놓게 하였으니, 어른에게 있어서도 끝까지 감추는 것보다는 나으니 저들의 죄를 알고 자신의 실수를 후회할 기회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나간 일은 간해야 소용없지만 앞으로의 일은 바로잡을 수 있으니,96) 어른의 자처하는 도리에 있어 오직 속히 전날에 어둡고 어긋났던 사실과 지금 후회하고 깨달은 사실을 가지고 위로 현동에 있는 스승의 묘에 고하고 아래로 사우(士友)들에게 사죄하는 길이 있을 뿐입니다. 澤述於年前, 以湖無認, 而有事玄洞也, 以黨惡崔碑, 見疑於丈。 畧擧義理事實, 告以見義不明, 責人非情, 而未知丈之鮮悟與否。 旣而湖之討吳以誣師也, 聞丈有石農, 酷似尤翁之語。 又竊歎以爲不悟, 猶可說見義不明, 一至於此乎矣。 近日則丈乃出示吳書所云, 其實原從先師不言之敎, 於人俾知有認誣之實, 如此實據。 胡爲掩藏多年, 而匿其罪乎? 於是乎, 丈自是黨惡於吳而忘師, 不徒見義不明已矣。 雖然彼罪旣實, 終不可逃。 故天誘丈衷而出其書也, 在丈, 亦賢乎終於掩匿, 而足以見知彼罪而悔己失矣。 往不可諫, 來猶可追, 在丈自處之道, 惟有亟將前日昧錯, 今者悔悟之實, 上告玄阡, 下謝士友而已。 지나간……있으니 《논어(論語)》 〈미자(微子〉에 나오는 말이다. 초(楚)나라의 은자(隱者)인 접여(接輿)가 공자에게 더 이상 정치에 간여하지 말라고 충고한 말로, '래유가추(來猶可追)'가 논어에서는 지금이라도 은거할 수 있다는 의미로 쓰였으나 여기서는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의미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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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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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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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간재선생에게 올림 上艮齋先生 乙巳 十月 을사년(1905) 10월 삼가 제가 오늘날의 형세를 살펴보니, 서리를 밟아 이르는 얼음이 이미 단단해졌고1) 새가 기미를 보고 날아오를 때는 이제 못 잡게 되어버렸습니다.2) 치발(薙髮)3)은 뒷날에 닥쳐올 일이지만 검은 양복은 이미 눈앞에 와 있습니다. 저는 이 두 가지 일이 보통 사람의 눈에는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춘추(春秋)》의 의리에 있어 실로 경중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시경》의 〈정시(鄭詩)ㆍ치의(緇衣)〉4) 편을 인용하여 의리에는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을 더러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만약 옛사람의 일을 근거로 말을 한다면, 치의(緇衣)5)는 오래되었는지라 굳이 말할 것이 없거니와, 머리를 자르는 일6)로 말하자면 성탕이 비 내리기를 기도하고7) 태백이 나라를 양보한 일8) 같은 경우는 역시 혹 부득이한 상황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검은 양복을 입는 까닭은 우리가 옛사람을 따르고자 해서가 아니라 저들이 조약을 따르도록 협박한 데서 나왔으니 어찌 이 고사들을 끌어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두 마디 말로 이런 상황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공자께서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일을 가지고 머리를 풀어 헤치는 일과 병칭하셨으니, 검은 양복과 치발이 경중의 차이가 없다는 것은 이미 굳이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맹자가 오십 보를 도망간 자와 백 보를 도망간 자가 다를 바 없다9)고 하셨으니, 비록 둥근 소매 옷에 큰 띠를 두르는 우리 복장에 검은 저고리 하나만 착용한다고 하더라도 오랑캐를 따르는 것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〇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였다. "검은 양복을 입는 것과 머리를 자르는 것이 오랑캐의 제도인 것은 똑같다. 어떤 이들이 (이 둘을 놓고) 경중과 시비를 나누지만, 그대가 그렇지 않다고 여긴 견해가 맞다. 근래에 내가 지은 〈종중시중변(從衆時中辨)〉한 편이 바로 이와 같은 주장을 비판하여 깨뜨린 것인데, 지금 겨를이 없어 적어 보내지 못한다." 竊觀今日之勢, 履霜之氷已堅矣, 色斯之擧無及矣。 薙髮將在於後, 而黑裝卽當於前。 竊謂此二者, 若有等殺於凡夫之眼, 而實無輕重於春秋之義也。 或見人引鄭詩之緇衣謂無害於義。 若以古人之事言之, 則緇衣尙矣, 不須說, 至於斷髪, 如成湯之禱雨, 泰伯之讓國, 亦或出於不得巳之地。 今也則所以黑裝者, 不在於我之欲從古人, 而出於彼之脅從條約, 烏可援此而爲說哉? 今有兩言可以斷之者, 孔子以左袵幷稱於被髪, 則黑裝薙髮之無輕重, 已不待辨說而明矣。 孟子謂五十步無異於百步, 則雖圓袂大帶而只著一箇黑襦, 卽不免從夷亦可知矣。〇 先生答書曰: "黑裝薙髮, 其爲夷制, 一也。 或者之分輕重非是, 而左右之不以爲然者是矣。 頃有〈從衆時中辨〉一篇, 正闢破此說, 今未暇寫往。" 서리를……단단해졌고 《주역(周易)》 〈곡괘ㆍ초육(坤卦ㆍ初六)〉에서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이 이른다(履霜堅冰至)"고 하였다. 《정전(程傳)》에서는 "음(陰)이 처음 아래에서 생겨나니, 지극히 미약하지만 성인은 음이 처음 생겨날 때, 음이 장차 자라날 것을 경계하였다. 음이 처음 응결하여 서리가 되는데, 서리를 밟으면 음이 점점 성하여 단단한 얼음에 이를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소인이 처음에는 비록 매우 미약하지만 자라나게 해서는 안 되니, 자라나면 성함에 이르는 것과 같다〔陰始生於下, 至微也, 聖人於陰之始生, 以其將長, 則爲之戒. 陰之始凝而爲霜, 履霜則當知陰漸盛而至堅冰矣. 猶小人始雖甚微, 不可使長, 長則至於盛也〕"라 했다. 즉 이 말은 음이 왕성한 시기에 이른 것은 아니지만 그 기미가 나타났다는 뜻으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매우 위급함을 나타낸다. 새가……되어버렸습니다 《논어(論語)》 〈향당(鄕黨)〉, "새가 사람의 기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면 날아올라 빙빙 돌며 살펴보고 나서 내려앉는다〔色斯擧矣 翔而後集〕"고 하였다. 이는 사람이 어떤 기미를 보고서 신속하게 행동을 취해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을 말한다. 치발(薙髮) 변발(辮髮)ㆍ편발(編髮)ㆍ승발(繩髮)ㆍ삭두(索頭)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앞머리 부분은 깎고 후두부 머리를 길게 늘어뜨려 묶는 것을 말한다. 여진족과 몽고족이 이러한 형태를 취하였고, 한족은 속발(束髮)의 형태를 취하였다. 이곳에서 치발은 일본의 압제 하에 발령된 단발령을 의미한다. 〈정시(鄭詩)ㆍ치의(緇衣)〉 치의(緇衣)는 검은 옷이라는 뜻이다. 모시(毛詩)에서는 경사(卿士)들이 입조할 때 입는 정복(正服)이라고 하였다. 이 시는 《시경(詩經)》 〈정풍(鄭風)〉의 첫 번째 시로 검은 옷을 입은 현사(賢士)를 예우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예기(禮記)》 〈치의(緇衣)〉에 "현인을 좋아하기를 〈치의(緇衣)〉 시처럼 하고, 악인을 미워하기를 〈항백(巷伯)〉 시처럼 하면, 벼슬살이를 번거롭게 하지 않고도 백성들이 조심할 줄 알게 될 것이며, 형벌을 시험하지 않고도 백성들이 모두 복종할 것이다〔好賢如緇衣, 惡惡如巷伯, 則爵不瀆而民作愿, 刑不試而民咸服〕"라는 공자의 말이 실려 있다. 치의(緇衣) 단발령을 시행하기 전에 조선 조정에서는 대신들에게 서양의 양복을 입을 것을 권고하였다. 때문에 앞에서 "치발은 뒷날에 닥쳐올 일이지만 검은 옷 복장은 이미 눈앞에 와 있다"라고 한 것이다. 이곳에서 치의는 서양의 검은색 양복을 의미한다. 오랑캐의 복장이라는 것이다. 머리를 자르는 일 단발령은 1884년에 내려졌다. 그러나 1896년 2월에 친일내각이 물러나자 고종은 조서를 내려 '머리를 깎는 것은 각자 편한 대로 할 것이다'라는 조서를 내려 단발령을 강조하지 않았다. 그리고 1897년에 단발령은 정식으로 폐지된다. 그러나 1905년에 고종은 일본인의 위협에 각 군의 군수와 주사에게 단발할 것을 명령하였고, 1910년 한일합병 이후 단발과 편복은 전면적으로 시행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조치와 일본의 압박에 대하여 간재는 〈작경세문(作警世文)〉에서 단발령을 혹독하게 비판한다. 단발령을 따르는 사람 중에는 무식하여 영화에 욕심이 나서 그렇게 한 사람도 있고, 절조가 없어 죽음이 두려웠기 때문에 그렇게 한 사람도 있을 것이며, 가난하고 배고픔에 몰려 그렇게 한 사람도 있을 것이지만, 본래의 마음을 잃어버리고서 머리를 깎으면 그 사람은 곧 우리와 다른 사람이라고 비판한다. 성탕(成湯)이 비 내리기를 기도하고 殷(商)왕조의 개국 군주이다. 일반적으로 탕왕(湯王)으로 불리지만, 무탕(武湯)ㆍ은탕(殷湯)ㆍ천을(天乙)ㆍ성탕(成湯)ㆍ성당(成唐)으로 불리기도 하며, 갑골문에는 성(成)ㆍ당(唐)ㆍ태을(太乙)ㆍ고조을(高祖乙)로 기재되어 있다. 탕임금이 즉위한 후 7년 뒤에 가뭄을 당해 상림(桑林)의 들에서 하늘에 기도한 것을 뜻한다. 《십팔사략(十八史略)》 권1 〈은왕성탕(殷王成湯)〉에서는 "7년 동안 큰 가뭄이 드니, 태사가 점을 쳐 '사람으로 제물을 바치고 기도해야 합니다.'라고 하자, 탕 임금은 '내가 기우제를 지냄은 백성을 위함인데, 만약 사람으로 제물을 삼는다면 내가 스스로 감당하리라.'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목욕재계하고 손톱을 깎고 머리를 자르고 흰 띠풀로 몸을 묶어 자신을 희생으로 삼아, 상림의 들판에서 기도를 올리며 여섯 가지 일로 자신을 책망하기를, '정사가 절도를 잃었습니까, 백성이 직업을 잃었습니까. 궁궐이 너무 컸습니까. 여인의 청탁이 성행했습니까. 뇌물이 횡행했습니까. 참소하는 자가 많았습니까.'라고 하자,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큰 비가 내려 수천 리를 적셨다.〔大旱七年, 太史占之曰, 當以人禱, 湯曰, 吾所爲請者民也. 若必以人禱, 吾請自當, 遂齋戒, 剪爪斷髮, 身嬰白茅, 以身爲犧牲, 禱于桑林之野, 以六事自責曰, 政不節歟, 民失職歟, 宮室崇歟, 女謁盛歟, 苞苴行歟, 讒夫昌歟, 言未已, 大雨方數千里〕"라고 하였다. 태백(泰伯)이 나라를 양보한 일 주나라 태왕(太王)의 장자(長子)이다. 태왕이 그의 아우 계력(季歷)의 아들인 문왕(文王)에게 성덕(聖德)이 있음을 알고는 왕위를 계력에게 전하려 하자, 왕위를 아우 계력에게 양보하고서 형월(荊越)지방으로 피하여 은둔하였다. 《사기(史記)》 권31〈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에서는 "고공에게는 장자가 있었으니 태백이라 하고, 둘째가 있었으니 우중이라 한다. 태강이 막내 계력을 낳았고, 계력은 태임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모두 현명한 부인이었으며, 태임은 창을 낳았는데, 성스러운 조짐이 보였다. 고공은 '나의 대에 흥할 사람이 있을 것이니 그것은 창에게 있을 것이다.'라 했다. 그러나 장자인 태백과 차자 우중은 고공이 계력을 세워 창에게 전수하려는 뜻임을 알았고, 마침내 두 사람은 형만으로 달아나서 문신을 하고 단발을 하여 계력에게 지위를 양보했다〔古公有長子曰太伯, 次曰虞仲. 太姜生少子季歷, 季歷娶太任, 皆賢婦人, 生昌, 有聖瑞. 古公曰: "我世當有興者, 其在昌乎?" 長子太伯·虞仲知古公欲立季歷以傳昌, 乃二人亡如荊蠻, 文身斷髮, 以讓季歷〕"라 하였다. 맹자가……없다 《맹자(孟子)》 〈양혜왕 상(梁惠王上)〉에서 "갑옷을 버리고 병기를 끌고 패주하되 혹은 백 보를 도망한 뒤에 멈추며 혹은 오십 보를 도망한 뒤에 멈추고서 자신은 오십 보를 도망갔다 하여 백 보를 도망간 자를 비웃으면 어떻습니까?〔棄甲曳兵而走, 或百步而後止, 或五十步而後止, 以五十步, 笑百步, 則何如?〕"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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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 上艮齋先生 己酉 기유년(1909) 삼가 제가 생각해 보니, 공자께서 바다에 떠 가고 싶다고 하신 것이 비록 한때의 탄식하시는 말씀이었지만, 당시의 혼란이 만약 오늘과 같았다면 그 말씀을 반드시 실천했을 것입니다. 장자(張子 장재(張載))는《논어》에 기록된 노(魯)나라 태사(太師) 이하의 사람들이 하수(河水)를 넘고 바다를 건너 난리를 피한 것을 성인(聖人)의 잠깐 사이의 교화라고 하였는데,20) (이렇게 이해하면) 공자의 뜻은 더욱 매우 분명합니다. 속된 선비들이 (간재) 선생이 바다를 건너 계화도로 온 것을 함부로 헐뜯는 것은 (그들이) 참으로 사정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대한(大韓)의 역법(曆法)이 폐기되고 나서 일본의 역법이 이미 유행하니 애통할 뿐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어떤 이는 새 역법이 비록 일본 사람에게서 나왔을지라도 이미 대한의 연호(年號)를 기재하고 있으니 그 달력을 보고 날짜를 아는 것이 의리(義理)에 있어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하기도 하는데, 이는 대한의 연호를 기재한 것이 곧 소금 배를 숨기려고 그 위에 건어물을 올려두는 계책21)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것입니다. 진실로 대한 사람의 마음이 있는 자라면 결코 보아서는 안 됩니다. 저의 얕은 견해로는 단지 천세력(千歲曆)이나 백중력(百中曆) 등의 달력을 보고서 사계절의 기후(氣候)를 대략 기억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논의한 내용이 맞다. 정동계(鄭桐溪 정온(鄭蘊))와 조정문(曹靖聞) 두 사람의 고사를 지금에 수용하여 쓸 수 있다.【조일주(曹一周)는 우암(尤庵)의 문인인데 죽을 때까지 오랑캐 역법을 보지 않았다.】"○ 동계(桐溪)의 시에 "숭정 연호가 여기에서 멈추었으니, 명년에는 어떻게 다른 역서를 펼쳐 보겠는가. 이제부터 나 산옹은 더욱 일을 줄이고, 다만 꽃잎이나 보면서 세월 가는 것을 알리라[崇靖年號止於斯 明歲那堪異曆披 從此山翁尢省事 只看花葉驗時移]"고 하였다.○ 진함(陳咸)은 하무포선(何武飽宣)이 죽은 것을 보고 벼슬을 그만두고 떠나갔는데 왕망(王莽)이 제위(帝位)를 찬탈한 뒤에도 여전히 한나라 달력을 쓰자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진함이 말하였다. "나의 선인(先人)이 어찌 왕씨의 달력을 알 수 있겠는가?"지난겨울에 일과를 정하여 《역경(易經)》을 읽었는데, 소장(消長)의 이치와 상수(象數)의 변화에 대해서는 흐리멍덩한 채 터득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삼가 저는 오늘날 《역경》에서 수용하여 쓸 수 있는 것은 이를테면 곤괘(坤卦)의 "천지가 폐색(閉塞)하면 현인이 은둔한다"와 대과괘(大過卦)의 "홀로 서서 두려워하지 않으며 세상을 피해 숨어도 걱정하지 않는다" 및 곤괘(困卦)의 "목숨을 바쳐 뜻을 이룬다"는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혹여라도 시세(時勢)를 헤아리지 않고서 함부로 큰일을 하려고 하고 남들이 나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마음에 원망과 후회를 품으며, 대절(大節)에 임하여 구차하게 면하려고 생각한다면, 이는 오늘날 《역경》을 쓰는 방도가 아닙니다. 저 신학문(新學問)을 주장하는 자들은 걸핏하면 정자(程子)의 '수시변역(隨時變易)'이라는 말을 인용하여 선왕(先王)의 전례(典禮)가 모두 변한[變易] 뒤에 나라가 다스려질 수 있고, 백성이 편안하게 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정자가 말한 변역(變易)이라고 하는 것은 삼대(三代)의 손익(損益)22)과 우직(禹稷)의 출처(出處)23) 같은 것뿐이고, 천서(天叙)의 강상(綱常)과 인이(人彛)의 예의(禮義)를 말한 것이 아님을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감히 선현(先賢)의 학설을 인용하여 오랑캐로써 중화를 바꾸는 도구로 삼아 기탄없이 천하 사람들을 이끌어 《역경》에 재앙을 끼치는 것은 반드시 저 신학일 것입니다. 삼가 저는 이 때문에 그지없이 통탄(痛歎)합니다.○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정자는 '수시변역'하여 도를 따른다 했는데, 지금 사람들은 '수시변역'하여 욕심을 따르니, 이 말은 내가 일찍이 운창(芸牕) 박장(朴丈 박성양(朴性陽))에게 들은 것이다." 竊念孔聖之浮海, 雖一時歎傷之詞, 然當時之亂若如今日, 則其踐言也必矣。 張子以《論語》所記魯太師以下逾河蹈海以去亂, 爲聖人俄頃之化, 則孔子之志, 又較然明矣。 俗士之妄詆先生浮海, 眞不知類者也韓曆旣廢, 日曆已行, 痛矣何言? 或者謂新曆之法, 雖出自日人, 旣載大韓年號, 則觀知旬朔, 無害於義, 殊不知其載韓年號者, 乃鹽船加鯗之計也。 苟有韓人心者, 決不可看。 淺見只看千歲百中等曆略記四時氣候可也。○ 先生答書曰: "所論得之。 鄭桐溪ㆍ曹靖聞二公故事, 今可受用。【曹公一周, 尤門人, 終身不看胡曆。】"○ 桐溪詩"崇靖年號止於斯, 明歲那堪異曆披? 從此山翁尤省事, 只看花葉驗時移。"○ 陳咸見何武飽宣死, 旣乞骸骨去, 莽篡位猶用漢臘, 人問其故, 咸曰: "我先人豈知王氏臘乎?"昨冬課讀在於易經, 而於消長之理ㆍ象數之變, 茫然無得。 然竊謂今日之所當受用於易者, 如坤之'天地閉賢人隱', 大過之'獨立不懼遯世無憫', 困之'致命遂志'是也。 如或不度時勢, 而妄欲有爲, 人莫與我, 而心存怨悔, 臨大節而思欲苟免, 則非今日用易之道也。 彼主張新學者, 輒引程子'隨時變易'之語, 謂先王典禮一切變易而後, 國可以致治, 民可以致安, 殊不知程子所謂變易者, 如三代之損益, 禹稷之出處而已, 非謂天叙之綱常ㆍ人彛之禮義也。 彼敢援引先賢之說, 爲以夷易華之具, 而無所忌憚, 率天下之人而禍易經者, 其必新學也。 竊爲之痛歎不已。○ 先生答書曰: "程子隨時變易以從道也, 今人隨時變易以從欲, 此語余嘗聞於芸牕朴丈矣。" 노(魯)나라……하였는데 《논어(論語)》 〈미자(微子)〉에서 "태사 지는 제나라로 가고, 아반간은 초나라고 갔으며, 삼반료는 채나라고 갔고, 사반결은 진나라로 갔으며, 북을 치는 방숙은 하내로 갔고, 소고를 흔드는 무는 한중으로 들어갔으며, 소사양과 경쇠를 치는 양은 해도로 들어갔다.〔大師摯適齊, 亞飯干適楚, 三飯繚適蔡, 四飯缺適秦, 鼓方叔入於河, 播鼗武入於漢, 小師陽, 擊磬襄入於海〕"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소금……계책 《주자어류(朱子語類)》 〈권124〉에서는 육자정(陸子靜)의 학문은 논하면서 "소금을 파는 자가 소금 위에 여러 마리의 건어물을 올려놓아 소금을 가리고서 관문이나 나루터를 지나치면서 사람들이 그 안에 소금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도록 하는 것과 같다〔此正如販鹽者, 上面須得數片鯗魚遮蓋, 方過得關津, 不被人捉了耳〕"고 평한 것에서 나온 말이다. 삼대(三代)의 손익(損益) 《논어(論語)》 〈위정(爲政)〉에 "은(殷)나라는 하(夏)나라의 예를 인습(因襲)하였으니 손익한 것을 알 수 있으며, 주(周)나라는 은나라의 예를 인습하였으니 손익한 것을 알 수 있다.〔殷因於夏禮, 所損益, 可知也, 周因於殷禮, 所損益, 可知也〕"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정사를 함에 전 왕조의 풍습이나 제도에 너무 지나친 것이 있으면 덜어내고 부족한 것은 더 보충하는 것으로, 예컨대 하나라는 충을 숭상하여 너무 순박하므로 은나라에서는 질을 숭상하여 이를 보충하였고, 은나라는 질을 숭상하여 문식이 부족하므로 주나라에서는 문을 숭상하여 보충한 것과 같은 따위를 말한다. 우직(禹稷) 禹는 순임금 치세에서 황하의 治水를 맡아 홍수 조절에 성공했다. 후에 순임금의 선양을 받아 천자가 되고 夏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稷은 舜 임금 때 농사를 맡은 后稷으로, 周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사기(史記)》 권2 〈하본기(夏本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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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 上艮齋先生 己酉 기유년(1909) 저번에 선친(先親)에 관한 글을 써 주시기를 간청하였는데, (선생님께서) 거절하지 않아 주셨으니 감읍(感泣)할 뿐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다만 행장(行狀)의 초본(草本)이 천루(淺陋)한지라 선친의 실덕(實德)을 잘 밝히지 못하였기에 헤아려 선택하실 수 있는 자료가 되지 못하니 이 점이 부끄럽습니다. 제가 삼가 생각해 보니, 선친께서는 일찍이 빼어난 자질을 타고나서 도(道)가 있는 이에게 나아가 질정(質正)하였을 뿐 과거 공부에 마음을 쓰지 않았습니다. 말년에는 선생을 배알하고서 성현(聖賢)의 학문에 뜻을 두었지만 사고(事故)가 몸을 얽어매어 날마다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곡례(曲禮)의 세세한 절차, 심성(心性)의 담론 등 정세한 부분에 있어서는 비록 힘을 쏟을 수 없었지만 훌륭한 덕행과 고상한 절조는 족히 퇴폐한 풍속을 바로잡아 후세의 사표가 될 만한 것이 있었습니다. 큰 것을 들어 말한다면, 성심(誠心)으로 부모를 섬기고, 의로움으로 자식을 가르치며, 옛 성현의 학문을 배울 뿐 오늘날의 신학을 끊고,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며,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친 것 등입니다. 이 다섯 가지는 옛 사람에 비교해 보더라도 부끄러움이 없을 듯하다고 삼가 생각합니다. 이것은 자식으로서 사적인 감정으로 아부하는 말이 아니니, 신령에게 질정하여도 의혹이 없을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선생께서는 이를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만약 맞다고 생각하신다면 이 다섯 가지를 지을 글의 대지(大旨)로 삼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묘표(墓表)와 전(傳)이 오래도록 전해지는 것은 동일하지만 단지 문자로만 전해지기보다는 차라리 묘도(墓道)에 비석을 세워 새기는 것이 더욱 낫다고 생각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선생께서 다시 한 번 생각하여 묘표로 써 주신다면 더욱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向懇先人文字, 旣蒙不却, 感泣何言? 但狀草淺陋, 不能發實德而爲裁擇之資, 是爲可愧。 竊伏念先人夙負卓姿而就正, 無所費心於功令之業。 晚拜先生, 立志於聖賢之學, 而事故纒身, 日不暇給, 於曲禮細節談性說心精細去處, 雖不能致力, 然其懿德高節, 有足以厲頹俗而師來世者。 若擧其大者而言之, 則事親以誠, 敎子以義, 學古絶今, 好善惡惡, 尊華攘夷是也。 此五者, 竊以爲擬諸古人, 似無愧也。 此非人子阿私之言, 可質神明而不惑也。 未知先生以爲然乎? 如以爲然, 則以此五者, 爲下筆之大旨, 如何? 表與傳, 傳久則一也, 與其只傳諸文字, 孰若顯刻墓道之爲尤著也? 伏乞先生再思以墓表下筆, 則尤爲千萬幸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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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 上艮齋先生 庚戌 경술년(1910) 조국이 망했으니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기억하건대, 옛날 단발령(斷髮令)의 재앙이 있었을 때 선친이 선생께 편지를 보내 죽음으로 맹세하고서 태도를 바꾸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선친이 오늘날 살아계신다면 무슨 마음을 지니실까 더욱 모르겠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풍수지탄(風樹之歎)27)의 고통과 〈하천(下泉)〉28)의 생각이 마음속에 절절히 교차하여 저도 모르게 목이 메고 눈물이 흘러나옵니다. 찾아뵐 기약은 아득하여 정해진 것이 없으니 편지를 마주함에 매우 슬픕니다.○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조국은 이미 기울어졌고, 그대 선친은 볼 수 없으니 어찌하겠는가? 울지 마시게. 내 몸은 노환이 날로 더 심해져서 곧 죽을 것 같네. 아마도 다시는 우리 종현(鐘賢 김택술(金澤述))을 보지 못하고 죽을 듯하네. 죽기 전에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서로 마주할 수가 없으니 몹시 슬프고 한스럽네." 宗國旣亡, 不忍言不忍言。 憶昔薙髪之禍, 先人致書先生以死自誓而不變。 若使先人今日而在者, 又未知見作何懷也? 言念及此, 風樹之痛, 下泉之思, 交切于中, 不覺哽塞而淚迸也。 進謁之期茫無所定, 臨紙悵菀。○ 先生答書曰: "宗國已傾, 先丈又不可見, 如之何? 勿泣。 賤身癃疾, 日以盆深, 行將逝矣。 恐不復見吾鐘賢而死。 死前所欲奉託者在, 而莫可相對, 殊庸悵恨。" 풍수지탄(風樹之嘆) 부모를 잃은 자식의 아픔을 의미한다. 《한시외전(韓詩外傳)》에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여도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봉양하고 싶어도 어버이가 기다려 주지 않는다〔夫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는 말에서 유래한 말이다. 하천(下泉) 《시경(詩經)》의 편명(篇名)이다. 내용은 현인이 국가의 쇠망을 걱정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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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 上艮齋先生 癸丑 계축년(1913) 고모와 자매 및 질녀 중에서 개가(改嫁)한 자의 상복(喪服)에 대해서는 애초에 강복(降服)한다거나 강복하지 않는다는 글이 없습니다만, 저의 얕은 견해로는 비록 낳아준 어머니라고 할지라도 개가하였을 경우에 강복하는 것은 그 대의(大義)가 본종(本宗)에서는 끊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만약 고모와 자매 및 질녀가 이미 출가(出嫁)한 경우라면 비록 개가하였을지라도 본종에서 끊을 만한 의리가 없어 그 혈족의 은정(恩情)은 진실로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강복한다는 글이 없는 까닭입니다. 만약 음란하고 무도하여 풍속을 손상시킨 사람이라면 마땅히 상복을 입지 않아야 할 듯합니다.○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맞다." 姑姊妹姪改適者服, 初無降不降之文。 而淺見以爲雖所生母改適而降者, 以其大義之絶于本宗也。 若姑姊妹姪旣已出嫁, 則雖改適, 於本宗無可絶之義, 而其血屬之恩固自在也。 此所以無降服之文也。 若其淫亂無度有傷風化者, 則恐當不服之矣。○ 先生答書曰: "得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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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성부제봉에게 답함 答羅性夫濟奉 ○乙丑 을축년(1925) 지난번에 외람되이 방문해주시고, 이윽고 또 정성스럽게 편지를 보내주셨는데 바빠서 답장을 올릴 겨를이 없었습니다. 바야흐로 저의 허물을 추궁하고 있었는데, 어찌 넓은 도량으로 더욱 정성스럽게 재차 편지를 보내올 줄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는 이미 남의 허물을 따지지 않는 하나의 일100)로서 안자(顔子)의 경지를 추구하는 것에 절반은 넘었다고 할 것이니, 대단히 흠복하는 바입니다. 그대의 종질 익부(益夫)가 크게 진보한 것은 본래 그의 타고난 자질이 훌륭하고 부지런히 공부했기 때문이니, 졸렬한 제가 무슨 관여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뜻밖의 칭찬을 받으니 더욱 부끄러워 땀이 납니다. '더욱 자세히 가르쳐달라.'는 말씀은, 제가 비록 합당한 사람은 아니더라도 어찌 감히 다른 생각을 하겠습니까. 다만 자신에게 덕이 있어 따르는 이웃이 있게 되는 것101)과 서로 상대의 장점을 보면서 선하게 되는 것102)은 강학(講學)하는 사람의 큰 복입니다. 그대와 익부는 친척 중의 금란지교이고 한 집안 내의 정신적 교유 관계입니다. 이웃 중에 누가 이보다 가깝겠으며, 서로 관찰하는데 누가 이보다 친밀하겠습니까. 서로 도움을 주고 서로 권면하여 아름다움이 서로 나란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나씨 집안의 두 현명한 사람을 칭찬하고 부러워하게 하십시오. 이와 같다면 집을 나가지 않더라도 충분한 스승이 있을 것이니, 어찌 굳이 제가 익부를 도와주는 것을 기다리겠습니까? 근래에 들으니, 서패(書旆)를 스스로 부여잡고 노력하여 더욱 착실하게 도움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옛날의 이른바 "널리 배워 일정한 곳이 없다."103)는 것입니다. 대붕(大鵬)의 날개가 바람을 쳐 일으켜 하늘에 이르는 격이니, 어찌 부럽고 축하하는 마음을 이루 다 말하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우리들의 관계가 비록 소원하고 새로 교유했다고 하더라도 진실로 과도하게 높이고 절절하게 사양하여 고인의 덕으로 사랑하는 기풍에 어긋나면 안 되는데, 하물며 저와 그대는 가까운 마을에 살고 있으니 더욱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선대 인척의 정의(情誼)가 간절했으니 한 번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고 겉만 꾸미는 일을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일찍이 선생 장자(先生長者)에게서 학문의 대강을 들었는데, '자신에게 덕을 축적하고 싶으면 원대한 뜻을 세우고 바르고 정확한 길을 달려서 윤상(倫常)의 도를 강구하여 밝히고 성경(誠敬)의 공효를 체험하여 인의(仁義)의 집에 귀숙해야 한다. 사리(事理)를 발명하고자 한다면 성명(性命)의 근원을 궁구하여 꿰뚫고 경전의 깊은 뜻을 융합하여 이해하고 예절의 상변(常變)을 종합하고 분석하며 지난 역사의 득실을 저울질하여 문장으로 총괄하여 드러내야 한다. 세상일에 응대하고자 한다면 정학(正學)을 숭상하여 사설(邪說)을 물리치며 군자를 나오게 하고 소인을 물러가게 하며 왕도(王道)를 숭상하고 패공(覇功)을 쫓아내며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쳐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비록 한심하지만 뜻한 바는 이것뿐이고 힘쓰는 바도 이것뿐인데, 자질이 이미 아름답지 못하고 실천 또한 힘이 없이 어느덧 40세에 이르렀습니다. 가슴속을 들여다보면 텅텅 비어 하나도 얻은 것이 없으니, 어찌 감히 말하고 응대하는 것이 장래에 소문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돌아보매 스스로 서글퍼져 한밤중에도 서성이게 됩니다. 그대는 순후하고 훌륭한 자질로 젊은 나이에 시작하여 날마다 소문이 나니, 제가 고한 말들은 틀림없이 이미 보았던 소릉(昭陵)104)일 것입니다. 그대는 하루에 천리를 가는 천리마이니 다시 어찌 많은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지극한 도는 깨우치기 어려운데 세월은 쉬이 흘러가 버리니, 이는 옛 사람들이 탄식했던 바입니다. 저의 오늘날 모습은 흡사 퇴락한 곤궁한 집모양이지만 옛날 젊었을 때의 장렬한 뜻을 간직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앞에서 수레를 전복시킨 자가 뒤따르는 수레가 잘 몬다는 이유로 길이 험하고 좁은 상황을 알려주지 않지는 않습니다. 제가 그대에 대해서도 이와 같습니다. 대낮의 등불이라고 치부하여 버리지 않기를 바라니,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또 생각건대, 오늘날 상황은 금수의 발자국105)이 사람을 핍박하고 오랑캐 소리106)가 요란하여, 윤리를 초개처럼 여기고 경전을 독처럼 여기며 예의를 거름처럼 여기니, 공자를 외우며 본받는 자가 구덩이 속의 귀신이 되지 않는 것만도 다행입니다. 그러므로 배포가 연약하고 다리에 힘이 없어 풍조(風潮)에 흔들려 심지어 선비의 의관을 찢어버리고 달려가는 자가 도도히 흘러넘쳐서 서로 빠져들고 있으니, 이것은 무슨 광경입니까. 아, 태산이 그 앞에서 압도하고 맹호가 그 뒤에서 이를 갈며, 큰 칼이 그 머리를 자르고 긴 창이 그 가슴을 후비더라도 그 눈을 부릅뜬 채 꿈쩍하지 않으며, 정신이 흔들리지 않은 채 더욱 굳센 자는 어떠한 기백이며 어떠한 절개입니까. 죽음에 이르러도 변하지 않는 강자(强者)와 위무(威武)에 굴복하지 않는 대장부가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또한 이것을 그대에게 깊이 바라니, 용기야말로 진실로 사학(斯學)을 제대로 이루는 요소이기 때문이고, 더욱 오늘날의 시의(時義)가 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심신을 다 바쳐 장차 끊어지려는 한 가닥 줄을 붙든다면 훗날에 저승에서 우리 공자를 배알할 때 그대가 어찌 다른 사람보다 크게 뒤지겠습니까. 前垂左顧, 既又致書懇摯, 忽卒未暇詳報。方且追咎, 何圖洪量再書愈款? 卽此已是不校之一事, 而其於希顏也, 思過半矣, 欽服滿萬。令從姪益夫長進, 自是渠稟質之美, 工程之勤, 拙者何與焉? 而承此不虞之譽, 尢切郝汗。益加諄誨之喩, 顧雖非人, 豈敢有他? 但德隣之有從, 相觀之有善, 講學家洪福, 而高明之於益夫, 乃花樹中金蘭, 一室內神交, 隣孰近焉? 觀孰親焉? 交修胥勖, 匹美齊休, 使人稱願羅氏之二賢也。即是不出家, 而餘師在矣, 豈必待區區之益益夫也? 近聞書旆自扶而牟, 滋益慥慥, 此正古所謂博學無方者, 大鳥之翼, 其搏風而戾天, 豈勝艷且賀也? 第念吾人相與, 雖疏遠新交, 固不當尚詡詡而遜切切, 有乖古人德愛之風, 而況鄙人於高明鄉井之居邇也? 先姻之誼切也, 不一披陳肝膈, 而邊幅之是修, 吾則不能也。竊嘗聞學問之槩於先生長者。欲其畜德于己也, 則立遠大之志, 趨正的之路, 講明乎倫常之道, 體驗乎誠敬之功, 而歸宿乎仁義之府是已。欲其發明乎理事也, 則究貫性命之源, 融會經傳之奧, 綜櫛禮節之常變, 鑑衡往史之得失, 總著之以文章者是已。欲其酬酢乎世務也, 則崇正學而斥邪說, 進君子而退小人, 尚王道而黜伯功, 尊中華而攘夷狄者是已。顧雖無似, 所志者是已, 所勉者是已, 而質既不美, 行又不力, 居然輥到強年。而回顧胸中, 空空無一得, 安敢望所發所酬之足聞於將來也? 撫躳自悼, 中宵繞壁。高明以淳茂之質, 妙年發軔, 日有所聞, 其於陋拙所告, 應是已見之昭陵, 一日之千里, 更何多囑? 惟是至道難聞, 歲月易失, 古人之所慨歎者也, 而此漢今日之竆廬頹落, 未始非昔日之青春壯志也。夫覆車乎前者, 不以後車之善御而不告以險隘, 鄙於高明亦猶是也。幸勿以晝燈而棄之, 如何? 抑又念今之日, 獸蹄逼鴂舌咻, 土苴倫常, 鴆毒經籍, 糞壤禮義, 誦法孔子者, 其不爲坑中鬼幸矣。故弱腸軟腳, 被風潮所蕩, 至有毀冠裂裳而走之者, 浸浸滔滔, 載胥及溺, 此何景光? 噫, 泰山壓其前, 猛虎齧其後, 大劒長槍截其頭而穴其胷, 瞠其目而不瞬, 神不奪而愈厲者, 何等氣魄? 何等志節? 強者之至死不變, 丈夫之威武不屈, 非其人耶? 吾又以此深望於高明, 蓋以勇固爲斯學之成終, 而尢以目下時義然也。鞠躬盡瘁, 扶將絕之一線, 歸拜吾夫子於他日, 高明豈多讓乎哉? 남의……일 증자(曾子)가 "유능하면서도 무능한 사람에게 물으며, 학식이 많으면서도 적은 사람에게 물으며, 있어도 없는 듯이 하며, 가득차도 빈 듯이 하며, 자신에게 잘못을 범하는 자가 있어도 따지지 않는 것을, 예전에 내 친구[顔回]가 그렇게 했었다.〔以能問於不能, 以多問於寡, 有若無, 實若虛, 犯而不校, 昔者, 吾友嘗從事於斯矣〕" 하였다. 《논어(論語)》 〈태백(泰伯)〉 자신에게……것 《논어》 〈이인(里仁)〉에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德不孤 必有隣〕" 하였다 서로……것 《예기》 〈학기(學記)〉에 "절차를 뛰어넘지 않고 가르치는 것을 손이라 하고, 학자들끼리 서로 장점을 보고 배워 선해지게 하는 것을 마라 한다.〔不陵節而施之謂孫 相觀而善之謂摩〕" 하였다. 널리……없다 《예기》 〈내칙(內則)〉에 "널리 배워 일정한 곳이 없으며, 친구에게 공손히 하되 그의 뜻을 살핀다.〔博學無方, 孫友視志.〕"라고 한 것을 두고 말한다. 이미……소릉(昭陵) 진즉부터 알고 있다는 뜻이다. '소릉'은 당태종의 비 문덕황후(文德皇后)의 능이다. 태종은 황후를 장사 지낸 뒤에 황후가 그리워 후원에다 망루를 세우고 자주 올라가 바라보았다. 한번은 위징(魏徵)과 함께 올라가서 소릉을 가리키며 보라고 하였는데, 위징은 눈이 어두워 보이지 않는다고 시치미를 떼었다. 당 태종이 저기에 있지 않느냐고 말하자, 그제야 위징이 "신은 폐하께서 헌릉(獻陵, 태종 모친의 능)을 말씀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소릉은 신이 진작부터 보고 있었습니다." 하였다. 《구당서(舊唐書)》 권71 〈위징열전(魏徵列傳)〉 금수의 발자국 《맹자(孟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요 임금의 시대에 세상이 아직 평정되지가 않았는데, 홍수가 무질서하게 흘러 온 세상에 넘쳐흘렀다. 풀과 나무가 무성하고 짐승들이 번식하였으며 오곡이 자라지 않고 짐승들이 사람들을 핍박하였다. 길짐승 발자국과 새 발자국이 나라 안에 가득하였다.〔當堯之時 天下猶未平 洪水橫流 氾濫於天下 草木暢茂 禽獸繁殖 五穀不登 禽獸偪人 獸蹄鳥跡之道 交於中國〕"라고 하였다. 오랑캐 소리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지금 남만의 왜가리 혀를 놀리는 사람이 주장하는 것이 선왕의 도가 아니다.〔今也 南蠻鴃舌之人 非先王之道〕"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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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구에게 답함 答金聖九 壬午 임오년(1942) 저는 재주가 매우 졸렬하여 세상에서 화합하며 지내는 사람이 적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이 처음에는 나와 사귀다가도 좀 지나서는 나에게 취할 만한 점이 없다는 이유로, 혹은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버려버립니다. 그러나 유독 그대만이 견문이 넓고 교유가 넓음에도 불구하고 오래될수록 더욱 더 친하게 대해주시니, 무엇 때문입니까. 감격하면서도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지금 세상의 유문(儒門) 대가(大家)의 자손들을 살펴보면 선조의 학문을 제대로 계승한 사람으로는 오직 그대가 있으니 이는 진실로 후세에 할 말이 있는 것입니다. 급한 풍조가 뜨겁게 들끓는데도 오히려 주장을 고수하며 60년까지 끌고 온 사람도 드무니, 이 때문에 불쌍히 여기어 같은 심정을 느낀 것입니까. 비록 그렇더라도 저는 실로 늙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 70까지 사는 것은 예부터 드물었으니, 설사 그 나이에 이른다 하더라도 이제 여생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먹는 것이 줄고 살이 빠지며 정신이 나가고 생각이 막히는 것 등은 일일이 말할 겨를도 없습니다. 나이를 따져보고 힘을 헤아려보니 앞날에 가망이 없고, 허물을 반성하고 신세를 슬퍼하니 평소의 뜻은 허위가 되었습니다. 그대는 저보다 15세가 적고 겨우 40세를 넘겼으니 바로 발전하여 큰 성취를 이룰 수 있는 때입니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여 얼이 빠지고 의리를 구명하기 어려워서 부친과 선사를 저버릴까 두렵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저에게 도움을 구하니 무엇 때문입니까? 궁핍한 길을 만난 것으로 말하자면 누가 심하고 누가 심하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한쪽은 노인을 섬기고 아이를 기를 책임이 있고, 다른 한쪽은 부친이 죽고 자식이 장성했으니, 근심에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한쪽은 노인이 편안하며 아이가 즐겁고 다른 한쪽은 부인이 비난하고 자식이 어긋납니다. 이것은 또한 깊은 근심 속에 깊은 기쁨이 있는 것이고, 얕은 근심 속에 깊은 근심이 있는 것입니다. 대체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진실로 동병상련하는 심정이 있습니다. 이처럼 한갓 근심하고 한탄하며 범범하게 서로를 구하기보다는 곧바로 눈앞에 행해야 할 일에 대해 진실한 마음으로 강구하고 익혀서 잘못을 빚어내지 않는 것이 더욱 낫지 않겠습니까? 지금 저는 이미 집안의 생계를 잊어버리고 푸른 산속에 살며 문을 닫아걸고 있으니 인사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사는 곳이 오히려 마을과 가까워서 차마 듣거나 보지 못할 일과 편치 않은 의리와 관련한 일이 없지 않습니다. 간절하게 깊은 산이나 먼 바다로 높이 날아가고 멀리 떠나가서 사람들로 하여금 결국 어떻게 됐는지 알지 못하게 하고 싶습니다. 다만 신세가 종손이라서 여러 대의 조상 신위에 제사를 받드는 때에 몸소 참가하지 않는 것은 윤리를 무너뜨릴까 두렵기 때문에 가벼이 감행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정밀한 의리로 알려주기 바랍니다. 僕於才最劣, 于世寡合, 故人雖始與之交, 既而以其無可取, 或異見而棄之, 獨以足下聞見博而交遊廣, 久而愈親者, 何也? 不能以感焉而不致疑也。竊觀今世儒門大家子孫, 繼述先學者, 惟足下在, 此固有辭今後, 而急潮熱沸, 猶能撕捱, 而輥到六十者亦鮮, 故爲之矜憐而同情也歟? 雖然, 僕誠老矣。人生七十古來稀, 縱使及之, 今餘幾何? 食減肉敓, 精遁思窒, 不暇枚言。計年量力, 前頭無望; 訟諐悼躳, 素志歸虛。乃以足下少僕十五歲, 僅過強年, 正可進成之日。有"鼎敗神喪, 義理難究, 懼負父師"之語, 而求助於僕, 何哉? 至於竆途之遭, 未知孰甚孰否。而一則有老幼事育之責, 一則既親沒而子壯, 宜其憂之有淺深。然一則老安而幼樂, 一則室讁而庭違。是又深憂中有深喜, 而淺憂中有深憂也。蓋吾人于斯世也, 實同病而相憐也。與其如此徒爾憂歎, 泛泛相求, 曷若直以目下當行, 實心講習, 不至鑄錯之爲愈乎? 今僕既忘家累, 棲碧閉戶, 宜其與人事無關。然所棲尚近家里, 不無聞見之不忍、處義之難安, 切欲高飛遠走於竆山絕海之中, 令人不知所終。但念身爲宗孫, 累世祀板奉祭之時, 身不與祭, 恐乖倫理, 故不敢率爾, 未知如何則可乎? 幸以精義指示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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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성부에게 답함 答羅性夫 乙丑 을축년(1925) 답장을 받들어 읽으니 표현이 깔끔하고 논리가 정연하며 글씨체가 반듯하여 이전 편지와 비교해볼 때 마치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 같지 않으니, 3일 만에 괄목상대한다는 말이 헛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문필은 비록 군자가 숭상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문장은 마음의 소리에서 나온 것이고 필획은 마음의 결정에서 나온 것이니, 마음씀씀이의 경건함과 방자함, 사악함과 올바름을 볼 수 있습니다. 최근에 그대의 존양성찰이 더욱더 진보되었음을 여기에서 그 일단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난번 권면할 때에 애오라지 팔이 부러진다는 말107)을 진언한 것은 병이 나기 전에 예방하려 했던 것인데, 어찌 병은 큰데 약이 작은 것을 염려하여 강하(江河)나 장맛비와 같은 도움을 찾고 있을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사람을 부끄럽고 송구스럽게 합니다. 오늘날 천하가 부서지고 쇠퇴한 것을 돌아보건대, 어찌 다만 술잔이 새고 이삭이 말라빠진 상태이겠습니까. 저는 바야흐로 그대가 세도(世道)의 강하와 장맛비가 되기를 기대하니, 원컨대 그 덕을 깊게 하고 넓게 하여 미래에 그 은혜를 널리 베풀고, 한번 쏟아서 잠시 적셔주는 효과를 이루고 멈추고자 하지 마십시오. 부채를 내려주신 은혜는 진심에서 우러난 선물이라는 것을 아니, 문강(文强)108)처럼 부친의 베개를 시원하게 하는 용도로 사용할 뿐입니다. 제갈량처럼 부채로 삼군을 지휘할 능력은 없고, 또 이것은 용렬한 자가 사모할 수 있는 바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애오라지 부채로 먼지를 가려 스스로 깨끗하게 했던 왕도(王導)109)처럼만 하면 될 뿐이니, 어찌 굳이 백원(百原)110)이 부채질 하지 않은 것을 고상하다고 여길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로부터 거의 몸을 더럽히게 되지 않는 것은 당신의 선물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奉讀惠覆, 辭理潔整, 筆法楷正, 視前書若不出一人手者, 信乎三日刮目之非虛語也。文筆雖非君子之所尚, 文, 心聲; 筆, 心畫, 可以觀用心之敬肆邪正。近日高明存省之越進, 即此而見其一斑也。曩者奉勉, 聊進折肱之言, 欲其病前之防, 孰謂其以病大藥小爲慮, 而求江河霖雨之益哉? 令人慙悚。顧今天下之破残蕭索, 豈但漏巵枯苗而已哉? 吾方以高明期世道之江河霖雨, 願深廣其德, 而普厥施乎將來, 愼毋欲一注乍霑之奏效而止也。便面之惠, 認出心貺, 文強之凉枕已矣。無及武侯之指揮三軍, 又非庸碌者之所得慕想, 則聊以遮塵自潔, 若王導可爾, 何必以百原之不扇爲高哉? 從茲而庶不爲汶汶之歸者, 非高明賜耶? 多謝多謝。 팔이 부러진다는 말 《춘추좌전(春秋左傳)》 정공(定公) 13년에, 범씨(范氏)와 중항씨(中行氏)가 군주를 치려 하자, 제(齊)나라의 고강(高彊)이 "세 차례 팔뚝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하고 나서야 좋은 의사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三折肱, 知爲良醫.)〕"라고 했다. 문강(文强) 후한(後漢) 황향(黃香)으로 그의 자는 문강(文強)이고 강하(江夏) 안륙(安陸) 사람이다. 아홉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를 섬기는데 지극히 효성스러워 여름에는 베갯머리에서 부채를 부치고 겨울에는 몸으로써 이불을 따뜻하게 하였다. 《후한서(後漢書)》 권80 〈문원열전(文苑列傳)〉 왕도(王導) 동진(東晉) 때 사람인 유량(庾亮)은 자가 원규(元規)인데, 국구(國舅)의 신분으로 세 조정에서 잇달아 벼슬하여 권세가 막중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대부분 그를 붙좇았다. 그러자 왕도가 이를 불만스럽게 여기고 있던 차에 유량이 있는 서쪽에서 바람이 불어 티끌이 일자, 문득 부채를 들어 서풍을 막으면서 말하기를 "원규의 티끌이 사람을 더럽힌다.〔元規塵汚人〕" 하였다. 《진서(晉書)》 권65 〈왕도열전(王導列傳)〉 백원(百原) 백원산(百原山)인데, 여기서는 소옹(邵雍)을 이른다. 하남성(河南省) 휘현(輝縣) 서북에 있는 산으로, 송(宋)나라 소옹이 젊었을 때 은거하여 성정(性情)을 수양하고 학문을 닦았던 곳이다. 그는 백원산에서 《주역(周易)》을 읽고 정좌(靜坐)을 하곤 했는데 한겨울에도 화롯불을 쪼이지 않고 한여름에도 부채질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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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씨 첨좌에게 답함 答丁氏僉座 저는 매우 못났으니 언급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어찌 여러분들께서 먼저 훌륭한 편지를 보내고 여러분들의 선조 유헌선생(丁熿)의 전집을 보내실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감격스럽기도 하고 송구스럽기도 하여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선생께서는 충성이 완벽하고 의리가 정밀했으니, 마땅히 하서 김선생(金麟厚)과 더불어 을사사화 때 절개를 온전히 한 사람으로 평가되어야 합니다. 저의 평소 견해가 이와 같습니다. 맹자가 "그 시를 외고 그 책을 읽었는데도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면 말이 되겠는가."114)라고 했으니, 심지어 이미 그 사람을 아는데 그 시를 외고 그 책을 읽지 못한다면 더욱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이제 여러분들의 은혜로 인하여 이런 것을 면할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입니다. 또 생각하건대, 선생이 선생이 된 이유는 《춘추》라는 위대한 경전을 따랐기 때문이니 전집 중에서 첫 번째 의리도 이것일 따름입니다. 오늘의 세상은 《춘추》의 의리는 말할 수 있는 곳이 없고 유학자라 이름 한 자들도 또한 대부분 모르니 진실로 개탄스럽습니다. 그런데 이때에 이 책이 발간‧배포되어 사람들이 읽는 것을 보니 거듭 세교(世交)를 위해 다행입니다. 제가 비록 못났지만 감히 경건히 도모하지 않겠습니까. 은혜를 저버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澤述無似爲甚, 靡所齒數。豈意僉座先施巍牘, 惠以尊先祖游軒先生全集? 感與悚幷, 罔知攸謝。竊念先生忠盡義精, 當與河西金先生, 同爲乙巳完節, 區區平日所見如此。孟子曰: "誦其詩讀其書, 不知其人, 可乎?" 至於既知其人, 而不得誦其詩讀其書, 則尢當如何哉? 今因僉執事之惠, 得免於是者, 爲可幸也。又念先生之所以爲先生, 以用《春秋》大經》, 而全集中第一義蓋是已。見今之世,《春秋》之義, 無地可講, 而以儒爲名者, 亦多昧然, 誠用慨歎。乃於此時, 得見是書之刊布, 人得而讀之, 重爲世敎幸也。顧雖無似, 敢不虔圖? 期不負惠也。 그 시를……되겠는가 《맹자(孟子)》 〈만장(萬章)〉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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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에게 보냄【대신 지음】 與人【代作】 지난번에 옷을 남겨 이별을 하고115) 날마다 '화문'이라고 쓰여 있는 기를 바라보니, 아뢰면 들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근래엔 일을 도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간혹 외도에 종사한다 하니, 과연 그런 것입니까? 제가 들은 것이 진짜인가 잘못들은 것입니까? 잘못 들은 것이라면 진실로 다행인데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우리 현자가 일생의 좋은 몸뚱이를 그르치는 것이니, 어떻게 현친에게 달려가겠습니까? 오직 온 집안의 세의는 모두 골육의 휴척과 일체의 통양과 서로 관련되어 있는데, 마치 무관한 것처럼 보아서 일거리라고 여기지 않는다면 이것은 발이 차가운데 심장이 다친 것을 진휼하지 않고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저 인자하지 못하고 지혜롭지 못한 것으로 무엇이 이것보다 심하겠습니까? 그러므로 크게 소리치며 자신이 불에 타고 물에 빠진 것처럼 하여 빨리 구할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삼가 깊이 헤아려 들어주기 바랍니다. 도는 하나일 뿐입니다. 하나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인의 도는 이런 것일 뿐입니다. 지극한 효제는 신명에게 통하고 정성과 올바름의 극치에서 천하가 다스려져 화평하며 격물치지를 다하여 만리를 훤히 알게 되고, 인을 행하여 천수를 얻고 천명에 짝하여 복을 가져서 큰 덕을 이루어 하늘이 배양해주는 것을 획득하니, 이것이 이른바 성인의 도입니다. 편안하려고 하는 자는 이 도를 편안히 여길 것이고, 이익을 얻으려는 자는 이익 되게 여길 것이고, 힘쓰려 하는 자는 이것을 힘쓰려 할 것입니다. 이것을 벗어나 도를 하려 한다면 별도의 다른 도를 하는 것이니, 우리가 말하는 도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도는 하나일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천하가 생겨난 지 오래되어서 도 밖에 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 도를 배워서 오차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실제는 그르지만 옳은 것 같은 것이 있고, 비록 참됨을 혼란시키더라도 이치에 가까운 듯한 것은 그것이 옳은 것 같고 이치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도를 배우고 싶으나 방향이 헷갈리는 자들이 그것이 참된 것인가 의심하면서도 달려가니, 이것이 진실로 이단이 사람을 미혹시키는 방법입니다. 오늘날 이른바 태을교라는 것이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 중에 정말로 이치에 가까워 옳은 것 같은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방법으로 속이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문장은 열여섯 자의 주문이고 그들의 방법은 단지 7일간 암송하면 위로는 천문에 통하고 아래로는 지리를 살피며 중간으로는 인사를 다할 수가 있고 동시에 재앙들이 눈 녹듯 사라지고 봉록이 냇물처럼 모인다는 것입니다. 삼재를 관통하여 통달하고 재앙을 제거하여 경사를 맞이하는 것이 어찌 인정의 지극한 바람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이런 이치가 있다면 위로부터 성현이 어찌 고생하며 이처럼 지극히 간단하고 빨라서 쉽게 천하의 소원을 이룰 수 있는 것을 버리고, 반드시 연구하고 찾아서 밝음을 구하고 오래도록 축적하고 덕을 숭상하여 상서로움을 불러오고 경사를 맞이하는 일을 하겠습니까? 이것은 옳은 것과 비슷한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정말로 전혀 옳지 않습니다. 또 이치에 가깝지 않을 뿐 아니라 정말로 크게 이치를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이단은 그들과 짝할 수도 없으니, 요술 중에서도 가장 잡된 것일 뿐인데, 현자는 진실로 도에 뜻이 없는 자가 아니고, 식견의 밝음이 또 추향에 어두운 자가 아닌데, 어쩌면 그리도 도가 아닌 그물에 걸려 곤액을 당하면서도 깨닫지 못한단 말입니까. 참으로 괴이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크게 음특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 근거도 없이 인형을 만들어 놓고 이를 빙자하여 무리를 불러 재산을 편취하는 자루로 삼고 있는데도 세상의 몽매하고 어리석으며 몰지각한 사람들이 그 그물에 걸려들어 그들의 재물창고가 되고 있습니다. 바로 왕법에서 이른바 좌도를 끼고서 사람을 미혹시키는 자들이니 죽여서 용서하지 못할 자들입니다. 현명한 그대들은 법도가 있는 자제로서 어찌 차마 친히 그 당에 들어가겠습니까? 상제와 선령이 위에서 바라보고 있고 성훈과 왕법이 책에 밝게 펼쳐져 있으니, 우러러 보고 굽어 생각하여 어찌 두려워할 줄을 모릅니까? 《시경》에서 말하기를, "화락한 군자여, 복을 구하는 것이 삿되지지 않구나."116)라고 하였고, 《서경》에서는 "하늘이 내린 재앙은 오히려 피할 수 있어도 스스로 만든 재앙은 피할 수가 없다"117)라고 하였습니다. 옛 현인은 몸을 망치는 술책은 그 실마리가 하나는 아니지만 잡술을 좋아하는 자는 반드시 망한다고 했으니, 화복의 사이에서 취하고 버릴 것은 확연합니다. 무릇 이 변변찮은 말은 모두 폐간에서 나왔으니, 만약에 믿지 않는다면 날마다 달려가고 달마다 뛰어간다 하더라도 마이동풍으로 흘려 들어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며 강호의 고기처럼 서로 잊어버릴 것입니다. 신경을 쓰고 뜻을 세워서 답장의 편지를 보내주길 간절히 바랍니다. 自頃畱衣爲別, 日望華門書旆, 是啓似聞。比者, 不惟不是之圖, 反或從事於外道, 其果然乎? 否乎? 吾之所聞, 果眞耶? 誤耶? 誤也誠幸矣, 如其不誤, 誤吾賢一生好箇身子, 何走於賢親? 惟通家誼均, 骨肉休戚一體痛癢相關, 若秦瘠之視, 而不以爲事, 則是足寒而不恤心傷, 唇亡而不知齒冷。其爲不仁不智, 孰甚於此? 是以不免大聲疾呼, 若焚溺之在己, 而思捄拯之急也。幸深諒而敬聽之。夫道一而已矣。一者何? 聖人之道是已。孝弟之至, 通于神明, 誠正之極, 天下治平, 格致之盡, 萬理洞然, 行仁而得壽, 配命以膺福, 以致大德成, 而獲天栽培, 此所謂聖人之道也。安焉者, 安此者也, 利焉者, 利此者也, 勉焉者, 勉此者也。外此而爲道, 則乃別爲一端之道, 非吾所謂道也, 故曰道一而已。蓋自天下生久, 道外之道, 非曰無之, 皆因學道而差者也, 故雖實非而有似是者, 雖亂眞而有近理者, 以其似是而近理也, 故欲學道而迷方者, 疑其爲眞而趨之, 此固異端之惑人者然也。乃若近日所謂太乙敎者, 果何謂者耶? 其中果有近理而似是者乎? 則無怪其可欺以方, 今也則不然。其文則十六字呪咀, 其功則單七日誦讀, 便可以上通天文, 下察地理, 中盡人事, 幷災疹雪消福祿川臻。夫通貫三才, 除殃延慶, 豈不是人情之至願? 茍有此理, 從上聖賢何苦, 舍此至簡至捷, 易遂天下之願者, 必令研索而求明, 積累而崇德, 俾作降祥餘慶之地耶? 是則非惟無似是者而已, 直是萬不是矣。非惟不近理而已, 直是大悖理矣。異端非其倫, 乃妖術之最雜者耳, 賢固非無志於道者, 識解之明, 又非昧於趨向者何? 其困於非道之罔, 而不悟也, 絕可怪也, 此蓋一種大陰慝無狀人, 白地作俑藉此, 爲嘯黨騙財之柄, 而世間太蒙騃, 沒覺人被其籠罩, 而爲之作財庫爾。正王法所謂挾左道而惑人者, 殺無赦者。賢以法拂子弟, 胡忍親入其黨? 上帝先靈, 臨之在上, 聖訓王法, 昭布方冊, 仰瞻俯思, 寧不知懼?《詩》云: "愷悌君子 求福不回"《書》曰: "天作孽猶可違, 自作孽不可逭。" 昔賢有言, 亡身之術, 不一其端, 好雜術者必亡, 禍福之間, 取舍之塗判矣。凡此蕘言, 出自肺肝, 如不見信我, 日斯邁而月斯征, 馬牛之風, 不相及矣, 江湖之魚, 將相忘矣。留神是企, 回音重懇。 옷을 남겨……이별하고 당(唐)나라 한유(韓愈)가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있을 적에 친하게 지냈던 노승 태전(太顚)과 작별하면서 자신의 의복을 남겨 주었다(留衣服爲別)는 이야기가 그의 〈여맹간상서서(與孟簡尙書書)〉에 실려 있다. 화락한……않구나 《시경(詩經)》 〈한록(旱麓)〉에 나온다. 하늘이……없다 《서경(書經)》 〈태갑(太甲)〉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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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에게 답함【간재선생을 대신하여 지음】 答人【代艮齋先生作】 ○庚申 경신년(1920)보여주신 여러 편을 우러러 읽었습니다. 성인을 존중하는 정성과 역적을 토벌하는 의리가 행간 사이에 늠름하였고, "당우(唐虞)가 되느냐 이적(夷狄)이 되느냐는 사도(師道)의 흥망과 관계된다."는 말씀은 더욱 바꿀 수 없는 명언이니, 어찌 탄복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그 가운데 완전하게 갖출 것을 요구한 것은 혹 말씀한 것이 너무 매섭고 시행하는 것이 너무 가혹하니, 군자가 입언(立言)하는 체모를 잃은 듯합니다. 대저 군자가 입언할 때에는 정밀한 의리를 선택하여 그 중도를 얻어야 합니다. 선을 칭찬할 때는 그 실질에 부합해야 하고, 악을 주벌할 때는 그 실정을 얻어야 합니다. 세상 어느 곳에서도 준칙이 되고 백대에 드리워도 신뢰가 있게 됩니다. 터럭만큼이라도 착오가 있으면 지극한 공평함을 잃어서 천지에 세울 수도 없고 인심을 복종시킬 수도 없습니다. 대저 스승이란 만법의 근원이니 군주와 부모의 윤리가 의뢰하여 확립되는 것입니다. 따져서 말해 보면 공자를 능욕한 죄는 마땅히 군주를 시해한 난신적자보다도 무겁습니다. 그러나 성인은 이미 성인을 비방하고 법도를 무시하는 자에 대해 임금을 무시하고 부모를 무시한 자와 똑같은 죄로 여겼으니, 세 죄를 같은 안건으로 여겼음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또 선왕(先王)의 법은, 형은 사형에 그치고 벌은 친속에 미치지 않았습니다. 연해(臠醢), 포락(炮烙), 연좌(連坐), 이족(夷族) 같은 부류는 후세에 폭군들이 남용하여 만든 형벌입니다. 지금 비록 시역(弑逆)한 난적에게 그 형벌을 가중하고 싶더라도 어떻게 오형(五刑)118)의 제도 이상을 시행하며 처자식에게 연좌하지 않는 법을 위배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대의 편지에서 언급한 착전(鑿顚 정수를 뚫어 죽이는 형벌), 추협(抽脅갈빗대를 뽑아 죽이는 형벌) 이하의 모든 악형은 아마 일시의 분노에서 나온 것이고 만세에 통용되는 올바른 법은 아닙니다. 고성선(古成侁)이 사적으로 위고(韋高)를 칼로 죽이려고 했던 것119)은 이미 지극히 합당한 일이 아닌데 그것을 끌어와서 오늘날 사용하는 것은, 비록 군부를 죽인 원수는 하늘을 함께 할 수 없다는 의리에 정확히 맞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그 자의 죄가 죽일만하면 죽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직접 우리 군부를 시해한 것과는 사례가 이미 구별되고 형세도 역시 다르니, 절로 천하의 공론에 붙여 그 죄를 성토하여 죽여야 하고, 한 국가의 신하와 한 집안의 자식이 사적인 원수를 갚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을 이치로 인식하는 재앙은, 아직 그렇지는 않은 데에서 그 극단적 폐단을 말하면 진실로 이와 같은 경우가 있겠지만, 오늘날 이미 그러한 변괴를 지적하여 심리가(心理家)에서 나왔다고 한다면 통론(通論)이 아닙니다. 이런 변괴가 있은 이래로 온 나라 선비들이 학파의 다름과 당파의 다름을 막론하고 모두 마음 아파하고 주먹을 불끈 쥐면서 주벌할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마침내 이런 변괴의 출현에 대해 그 죄를 심리가에게 돌린다면 이것은 외부의 적을 미처 토벌하지도 않았는데 또 하나의 내부의 원수가 생겨나는 것이니, 시무를 이해하고 형세에 통달한 의론이 절대 아닙니다. 이 밖에 '지렁이가 크게 번성한다', '길 위의 벌레가 죽어 있다', '자신과 그 부조(父祖)를 스스로 죽인다' 등의 설은 또한 자못 가혹하고 교묘하다는 문제가 있으니, 아마도 도리어 일반 사람들이 싫어하여 각박한 처사라고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俯示諸篇, 仰悉。尊聖之誠, 討賊之義, 廪廪乎行墨間, 而至於"唐虞夷狄, 係乎師道之立潰", 尢爲不易之名言, 豈不欽服? 但就中責其全備, 則或者發之太厲, 施之太酷, 有失君子立言之體乎? 夫君子之立言也, 擇乎精義而得其中道, 褒善而當其實, 誅惡而得其情, 放乎四海而準, 垂之百世而信, 毫釐有差, 則失其至平, 而不足以建天地服人心也。夫師者, 萬法之原, 君父之倫所賴而立者, 究而言之, 則衊辱聖師之罪, 宜其重於弑逆之亂賊。然聖人既以非聖無法, 同科於無上無親者, 則三罪之幷案, 又可知也。且先王之法, 刑止于大辟, 罰不及嗣屬, 而若臠醢·炮烙·連坐·夷族之類, 後世暴君之濫刑也。今雖欲重其刑於弑逆之賊, 安得以加五刑之制而違不孥之法也? 然則盛喩鑿顚抽脅以下諸惡刑之云, 意其出於一時之憤忿, 而有非萬世之法程也。成侁之欲私刃韋高者, 已非至當之事, 而引之以用於今日者, 蓋雖準於君父讎不共天之義, 然彼罪可殺則可殺矣, 而與親害吾君父者, 類例既別, 體勢亦殊, 自當付之天下之公議, 聲其罪而誅之, 不當如一國一家臣子之報私讎已也。認心爲理之禍, 自其未然而語其極弊, 則誠有如此者; 指今日已然之變, 而謂出於心理家, 則非通論也。自有此變以來, 舉國士子, 無論門路之異、色目之殊, 莫不痛心扼腕, 思有以誅之。今乃以此變之出, 歸罪於心理家, 則是外賊未及討, 而又生出一內讎也, 絕非識務達勢之論也。外此蚯蚓大榮、路上僵蟲與自弑其身及父祖等說, 亦頗傷苛巧, 恐反爲常情之所厭, 而有涉失薄之嫌也。未知如何? 오형(五刑) 오형(五刑)은 이마에 먹물을 새겨 넣는 묵형(墨刑), 코를 베는 의형(劓刑), 발꿈치를 베는 월형(刖刑), 생식기를 제거하는 궁형(宮刑), 사형에 처하는 대벽(大辟)을 말한다. 고성선(古成詵)……하는 것은 고성선과 위고는 모두 후진 요흥 때 사람이다. 황문시랑(黃門侍郞) 고성선(古成詵)은 천하의 시비를 자기 책임으로 삼았다. 경조(京兆)의 위고(韋高)가 그 어머니 상중에 있을 때 거문고를 타고 술을 마셨는데, 고성선은 그 소식을 듣자 울면서 '나는 마땅히 내 칼로 그를 베어 풍교(風敎)를 높이리라.'하고, 드디어 칼을 들고 위고를 찾으니, 위고는 도망해 숨고, 종신토록 감히 나타나지 못했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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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구에게 보냄 與金聖九 辛巳 신사년(1941) 어느 가을인가 찾아뵙고 문안드린 후 17년 만에 처음으로 일 때문에 문으로 들어갔더니, 작은 집은 쓸쓸하여 청풍만 집에 가득하고 옛날에 대그릇에 밥을 받아먹었던 사람이 지금은 표주박의 물만 받아 마실 뿐이었으니,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걱정스럽게 하는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일찍이 최현위(崔玄暐)의 어머니 노씨(盧氏)가 신현어(辛玄馭)의 말을 인용하여 자식을 경계한 내용을 읽고 감개한 바가 있었습니다. 노씨가 "자식이 벼슬을 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가난하고 궁핍하여 살기가 어렵다.'고 말하면 이것은 좋은 소식이다. 만약 재화가 풍족하다면 이것은 나쁜 소식이다."77)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오늘날은 어떤 때가 되었으며, 선비는 또 어떤 사람이 되었습니까? 오늘날에 선비를 살펴보면, 좋은 소식을 만들려는 자가 또한 어찌 유독 이것으로 표준을 삼지 않겠습니까. 아, 그대는 지산옹(志山翁)의 뜻과 사업을 계승한 훌륭한 아들로서 어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않다면 또한 어찌 세상에서 김노동(金魯東)이라 일컫겠습니까. 나는 그러므로 축하드릴지언정 슬퍼하지는 않습니다. 그대는 어떻게 여기십니까? 秋間造拜, 十七年後, 初事入門, 則環堵蕭然, 清風滿室, 昔之供簞食者, 今焉瓢飲而已, 則宜若使觀者可悶。然鄙嘗讀崔玄暐母舉辛玄馭語以戒子者, 而有所感槩矣。不曰"兒子從宦者, 有人來云'貧乏不能存', 此好消息。若財貨充足, 此惡消息"乎? 今日何日? 士子又何人也? 觀士於今日, 而爲好消息者, 亦何獨不以此作準乎? 噫, 賢座以志山翁繼述之肖子, 安得不然? 不然, 亦何所稱金魯東於世間哉? 吾故曰可賀, 而不可吊也。未知識者以爲如何? 자식이……소식이다 《구당서(舊唐書)》 권91 〈최현위열전(崔玄暐列傳)〉에 보인다. 최현위(崔玄暐)의 이름은 엽(曄)이고, 박릉(博陵) 사람으로 나중에 벼슬이 재상에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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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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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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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58년 진달우(陳達佑)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戊午式 行府使 幼學 陳達佑 戊午式 河東都護府 陳達佑 行府使[着押] 1顆(7.4×7.0), 周挾無改印, 河東 고흥 무열사 고흥 무열사 HIKS_OD_F1030-01-200038 1858년에 하동도호부(河東都護府)에서 발급한 진달우(陳達佑)의 준호구(準戶口). 1858년(철종 9)에 하동도호부(河東都護府)에서 발급한 유학(幼學) 진달우(陳達佑)의 준호구(準戶口)이다. 진달우는 하동도호부 마전면(馬田面) 전도촌(錢島村)에 거주하였고, 나이는 54세 을축생이며, 본관은 여양(驪陽)이다. 처(妻) 김씨(金氏)는 본관이 김해(金海)이고 나이는 54세이다. 진달우와 처의 부(父)·조(祖)·증조(曾祖)·외조(外祖) 4조의 직역과 이름을 기재하였다. 그 밖의 가족사항으로 솔자(率子)는 진원공(陳元公), 진두성(陳斗星)이다. 어머니 윤씨(尹氏)는 사망하였다. 이외에 노비의 명단 '천구질(賤口秩)'이 기재되었다. 이 문서에는 하동부사의 인장과 주협무개인(周挾無改引)이 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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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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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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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령류

1681년 진상한(陳相漢) 고신(告身) 1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康熙二十年正月日 陳相漢 康熙二十年正月日 肅宗 陳相漢 施命之寶(10.2×10.0) 고흥 무열사 고흥 무열사 HIKS_OD_F1030-01-200003 1681년에 숙종이 진상한(陳相漢)을 선략장군(宣略將軍) 수문장(守門將)으로 임명한 고신(告身). 1681년(숙종 7) 정월에 숙종(肅宗)이 진상한(陳相漢)을 선략장군(宣略將軍) 수문장(守門將)으로 임명한 문서이다. 문서 배면에 고신을 작성한 병조서리[兵政吏] 안여수(安汝秀)의 이름이 기재되었다. 국왕의 시명지보(施命之寶)가 안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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