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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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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772년 정석량(鄭錫亮) 등 등장(等狀)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壬辰十二月日 奉山面 化民 鄭錫亮 等 6人 城主 壬辰十二月日 鄭錫亮 靈光郡守 전라남도 영광군 官[着押] 3顆 영광 동래정씨 죽창공(정홍연)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772년 11월에 정석량(鄭錫亮) 등이 영광군수(靈光郡守)에게 올린 등장(等狀) 1772년 11월에 정석량(鄭錫亮) 등이 영광군수(靈光郡守)에게 선영(先塋) 근처에 투장(偸葬) 한 무덤을 관에서 굴이(掘移)해 달라고 청한 등장이다. 선조인 죽창공(竹窓公) 정홍연(鄭弘衍)의 묘소 국내(局內)에 투장을 한 자가 있으니 군수께서 사정을 잘 헤아려서 파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했다. 이에 영광군수가 판결하기를 '누대에 이어져 온 선영에 타인이 묘를 함부로 매장해서는 안 되니, 이달 내로 매장 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즉시 파내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여 소청을 허락했다. 문서의 결락이 심히 투장자 등 자세한 내용 파악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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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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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관통보류

1845년 봉산면(奉山面) 풍헌(風憲) 서목(書目) 고문서-첩관통보류-서목 정치/행정-보고-서목 乙巳九月十二日 奉山面 風憲 姜 乙巳九月十二日 風憲 姜 靈光郡守 전라남도 영광군 官[着押] 3顆 영광 동래정씨 죽창공(정홍연)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45년(헌종 11) 봉산면(奉山面) 풍헌(風憲) 강씨(姜氏)가 영광군수에게 올린 서목(書目) 1845년(헌종 11) 9월 12일에 봉산면(奉山面) 풍헌(風憲)이 영광군수에게 올린 서목이다. 본면(本面) 김달선(金達先)이 수영(水營)에 올린 의송(議送)에 근거하여 정반(鄭班)이 작송(斫松)한 곳을 적간(摘奸)해 보니, 소나무가 무더기로 자려 크기를 헤아릴 수 없다고 보고하였다. 영광군수는 9월 12일에 이미 말한 소나무 무더기는 필시 예초할 때 잘못 베었을 것인데, 김달선이 이로써 수영에 올린 것은 매우 무엄하니, 엄하게 다스릴 수 있도록 잡아오라는 제사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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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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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09년 상주목(尙州牧) 완문(完文) 고문서-증빙류-완문 정치/행정-명령-완문 己巳三月日 己巳三月日 尙州牧 東萊鄭氏宗中 전라남도 영광군 使[着押] 3顆 영광 동래정씨 죽창공(정홍연)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09년 상주목사(尙州牧使)가 동래정씨(東萊鄭氏) 중중(宗中)에 발급한 완문(完文) 1809년 3월에 상주목사(尙州牧使)가 동래정씨(東萊鄭氏) 종중에 산지기의 면역을 허락하면서 발급한 완문이다. 동래정씨 부정공(副正公) 정광정(鄭光廷)의 묘소가 상주 화서면 재궁동에 있는데 그곳을 수호하고 있는 산지기 2명에게 연호잡역(烟戶雜役)을 모조리 부과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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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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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1847년 영광군(靈光郡) 완문(完文) 고문서-증빙류-완문 정치/행정-명령-완문 丁未四月日 官 芝山祠 丁未四月日 靈光郡守 芝山祠 전라남도 영광군 行官[着押] 5顆 영광 동래정씨 죽창공(정홍연)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47년(헌종 13) 영광군수(靈光郡守)가 봉산면(奉山面) 지산사(芝山祠)에 발급한 완문(完文) 1847년(헌종 13) 4월일에 영광군수(靈光郡守)가 향중다사(鄕中多士)가 올린 품고(稟告)에 따라 지산사(芝山祠)에 봉산면(奉山面) 5호(戶)의 면역(面役)을 영구히 감급(减給)한다고 발급한 완문(完文)이다. 지산사는 감역(减役)한 호가 없어 매번 춘추향사(春秋享事) 때 거행하는 절차가 모호하였다. 이에 본읍(本邑)의 규례(規例)에 따라 지산사가 춘추향사 때 제반(諸般) 의양(儀樣)을 갖출 수 있도록 봉산면 5호(戶)의 면역(面役), 즉 주인역가(主人役價)와 면임지가(面任紙價), 제반운역(諸般運役)과 제반면징(諸般面徵)을 영구히 감급(减給)한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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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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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부기록류

임오년 동래정씨문안(東萊鄭氏門案) 고문서-치부기록류-문중기록 사회-가족/친족-종중/문중자료 壬午八月二十二日 壬午八月二十二日 1882 東萊鄭氏門中 전라남도 영광군 영광 동래정씨 죽창공(정홍연)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임오년 8월 22일에 영광 동래정씨문중에서 작성한 동래정씨문안(東萊鄭氏門案) 임오년 8월 22일에 영광 동래정씨문중에서 작성한 동래정씨문안(東萊鄭氏門案)이다. 성책문서로, 총9면이다. 표지명은 '東萊鄭氏門案'으로 되어 있으며, 표지 오른쪽에 '壬午八月日'이라고 작성연대가 쓰여 있다. 임오년은 1882년으로 추정된다. 문안에는 정동열(鄭東烈) 등 총43명이 기재되어 있으며, 이름 아래에 생년과 자가 쓰여 있다. 고인(故人)이 된 경우 이름 위에 선(仙)자를 썼는데, 총 43명중 38명이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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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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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65년 정진용(鄭振容) 등 등장(等狀)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乙丑五月日 奉山面芝山化民 鄭振容 等 4人 兼城主 乙丑五月日 鄭振容 靈光郡守 전라남도 영광군 兼官[着押] 3顆 영광 동래정씨 죽창공(정홍연)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65년에 鄭振容 等 4人이 靈光郡守에게 올린 等狀. 竹窓公 祠宇가 있는 지산에 偸葬한 자가 있어 관에 정소하여 제사를 받았으나 족인 중 한 사람이 犯葬에 대한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파보니 虛棺虛葬이었음.구 면임 金啓哲과 面有司 金俱吉이 옆에서 보고 모두 간여하였는데 유독 당시 面任 池斗九만 겁을 먹고 달아나고 또 文報를 올리지 않는 것은 필시 虛葬한 자와 관련이 있을 것이니 지두구를 잡아다가 엄히 조사하여 뒷날의 폐단을 막도록 해 달라고 요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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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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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92년 정규용(鄭圭容)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壬辰二月日 奉山面芝山化民 鄭圭容 等 12人 城主 壬辰二月日 鄭圭容 靈光郡守 전라남도 영광군 行官[着押] 3顆 영광 동래정씨 죽창공(정홍연)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92년(고종 29)에 영광(靈光) 봉산면(奉山面) 지산(芝山) 유생(儒生) 정규용(鄭圭容) 등이 영광군수(靈光郡守)에게 올린 상서(上書) 1892년(고종 29) 2월에 영광(靈光) 봉산면(奉山面) 지산(芝山) 유생(儒生) 정규용(鄭圭容) 등이 영광군수(靈光郡守)에게 묘지기〔墓直〕의 호역(戶役)을 전례(前例)대로 견감(蠲減)해달라고 요청하는 상서(上書)이다. 정규용 등은 8대조 죽창공(竹窓公) 사당에서 무진년(戊辰年) 후부터 제사를 지내지 못하여 실로 한스럽다며, 묘지기의 호역을 견감해주는 것은 본디 수백 년 된 규례라고 했다. 또 경내 16원(院)의 묘지기에 대한 읍감(邑減), 면감(面減)이 이미 조약으로 되어 있음에도, 올봄 본면(本面) 조양촌(朝陽村) 공원(公員)이 호역을 침책(侵責)하여 묘지기를 출송(出送)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도정(都正)과 조양촌 공원에게 영칙(令飭)하여 묘지기의 호역을 전례대로 견감해 줄 것을 요청했다. 영광군수는 2월 23일 제사(題辭)에서 묘각(墓閣)이 있는 곳에 따라 그 호역을 덜어주라고 창도색(倉都色) 도정(都正)에게 분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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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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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1894년 정기옥(鄭基玉) 등 상서(上書) 초본(草本)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甲午二月日 奉山面芝山化民 鄭基玉 等 7人 城主 甲午二月日 鄭基玉 靈光郡守 전라남도 영광군 영광 동래정씨 죽창공(정홍연)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94년(고종 31)에 봉산면(奉山面) 지산(芝山) 화민(化民) 정기옥(鄭基玉) 등이 영광군수(靈光郡守)에게 올리기 위한 상서(上書) 초(草) 1894년(고종 31) 2월일에 영광군수에게 작년 가을 본면(本面)의 호유사(戶有司)가 2합호(二合戶)를 묘직(墓直)으로 집총(執摠)하여 지금 묘직(墓直)을 출송(出送)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해당 도정(都正)에게 영칙(令飭)하여 전례대로 견감(蠲減)하도록 처분해 달라고 요청하기 위한 상서의 초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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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2005년 임종혁 영수증(領收證) 봉투 고문서-증빙류-영수증 경제-회계/금융-영수증 성균관 임종혁 成均館 임종혁 나주 풍천임씨 명고(임전)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성균관에서 임종혁에게 발행한 영수증을 담은 봉투 *연결문서: 2005년 임종혁 영수증 *소장처: 임종혁가(작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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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근현대문서
유형분류 :
인사관계

1987년 임주빈(任周彬) 위촉장(委囑狀) 고문서-첩관통보류-임명장 정치/행정-임면-임명장 孔紀貳阡五百參拾八年丁卯六月一日 南平鄕校典校洪俊憙 任周彬 孔紀貳阡五百參拾八年丁卯六月一日 典校洪俊憙 任周彬 南平鄕校 1顆(정방형, 적색) / 羅州郡南平鄕校典校 1과(정방형, 적색) 나주 풍천임씨 명고(임전)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87년 6월 1일에 南平鄕校에서 任周彬을 鄕校掌議로 위촉한다는 委囑狀 *소장처: 임종혁가(작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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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65년 포충사중수사업발기취지문(褒忠祠重修事業發起趣旨文) 고문서-서간통고류-격문 사회-조직/운영-격문 高霽峰先生殉節后三百七十四年乙巳二月日 發起人奇近燮등114人 高霽峰先生殉節后三百七十四年乙巳二月日 發起人奇近燮 나주 풍천임씨 명고(임전)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65년 2월에 작성한 褒忠祠重修事業發起趣旨文 *연결문서: 갑진년(甲辰年) 광주포충사(光州褒忠祠) 통문(通文) *인쇄: 金南社(광주시 大義洞14班 申外科病院옆) *소장처: 임종혁가(작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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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71년 풍천임씨부제학공 윤신종중(豊川任氏副提學公 允臣宗中) 규약(規約) 고문서-서간통고류-격문 사회-조직/운영-격문 檀紀四三0四年十月十四日 豊川任氏副提學公 允臣宗中 檀紀四三0四年十月十四日 豊川任氏副提學公 允臣宗中 印 1顆(정방형, 적색) 나주 풍천임씨 명고(임전)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71년 10월 14일에 豊川任氏副提學公 允臣宗中에서 발행한 規約 *연결문서: 복본 1점 *소장처: 임종혁가(작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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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71년 풍천임씨부제학공 윤신종중(豊川任氏副提學公 允臣宗中) 규약(規約) 복본( 複本) 고문서-서간통고류-격문 사회-조직/운영-격문 豊川任氏副提學公 允臣宗中 豊川任氏副提學公 允臣宗中 나주 풍천임씨 명고(임전)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71년 10월 14일에 豊川任氏副提學公 允臣宗中에서 발행한 規約 복본 *소장처: 임종혁가(작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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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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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

1970년 임활연(任活然) 석제품매매계약서(石製品賣買契約書) 고문서-명문문기류-계약서 경제-매매/교역-계약서 一九七0年陰九月三日 大成石工場 主韓在鍮 任活然 一九七0年陰九月三日 韓在鍮 任活然 韓在鍮印 2顆(원형, 정방형) / 任活然 2과(원형, 정방형) 나주 풍천임씨 명고(임전)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970년 음 9월 3일에 大成石工場 韓在鍮가 任活然에게 발급한 石製品賣買契約書 *매매대금: 貳萬仟五百원(계약금 五仟) *1970년 음 10월 10일에 대금잔액을 지불함 *연결문서: 봉투 1점 *소장처: 서울 임인혁가(종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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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오윤일에게 답함 答吳允一 辛巳 신사년(1941) 사람이 학문하지 않아서 흑백을 분별할 수 없다는 것으로 근심을 삼고, 마땅히 학문에 힘써서 기질을 변화시키고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표준으로 삼고, 자기 견해를 스스로 옳다 여겨서 좌정관천을 면하지 못한 것을 경계로 삼으며, 책을 읽어 분발하여 훌륭한 사람에게 올바름을 취하는 것으로 힘씀을 삼고, 몸이 시세에 얽매인 까닭으로 제 집에 놀러오지 못한 것을 근심으로 삼는다는 편지 내용을 받아보았습니다. 이 대목에서 학문은 기회를 놓칠 것처럼 생각하여 서둘러함으로써 날마다 정심함에 나아간다는 뜻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저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잘못입니다. 세간에 고명한 사람들은 적지 않으니 나에게 진실로 터득한 것 있다면 어찌 나아가 질정(質正)할 곳이 없음을 근심하겠습니까. 진실로 질정할 만한 사람이 있다면 천 리가 떨어져 있어도 종이 한 장의 편지로 지척에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 하는 것처럼 할 수 있으니, 또한 어찌 몸이 얽매임을 근심하겠습니까. 저는 비록 그런 사람은 아닐지라도 그만둘 수 없다면 지금부터라도 편지를 주고받는 것을 당신의 편지에서 말한 것처럼 하는 것은 제가 원하는 것입니다. 그윽이 당신의 자질을 살펴볼 때, 겉모습은 약하고 둔한 듯하나 내면은 실로 밝고 강하니, 어찌 감히 본 것이 없어서 구차스럽게 말을 많이 하겠습니까. 제가 더불어 사귀는 것을 좋아하는 까닭입니다. 공자가 학문하는 큰 방법인 다섯 가지 놓지 않는 법을 자세히 논하였는데, '명강(明剛)' 두 글자로 끝을 맺었습니다. 이것이 도학의 철두철미한 곳이니, 원컨대 격물·치지·성의·정심에 더욱 노력하여 만리를 모두 통달하고 백행을 다 선하게 하여 지대한 명강의 경지에 나가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말씀하신 음성의 오진영이 스승의 의리를 속여 배반하고 사문의 큰 변란을 일으킨 죄는 사람들이 모두 비난할 수 있는 것인데, 하물며 만약 용암선생(김시묵)이 살아계셨다면 반드시 의리를 들어 성토할 것이라는 말은 대단히 옳습니다. 이제 용암선생의 문집을 음성의 오진영에게 교정과 서문을 부탁했다하니, 어찌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마는 다만 문장의 기교를 취하고 성세를 좇아가서 그리 한 것입니다. 이는 도도한 속된 작태로서 어찌 말거리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현자의 도로는 한 번 바르게 말하지 않을 수 없으니, 편지로 주인에게 깨우쳐주었는데 듣지 않았다고 하여 그만둘 수 있겠습니다. 구해서 볼 수 있는 여부는 당신이 이미 마음에 편안치 않다 했으니 맹자가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바를 바라지 않는다고 한 뜻에 해당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으니, 어찌 다시 다른 사람에게 묻겠습니까. 承以人不學問, 無別黑白爲懼, 當勉學問, 變氣反本爲準, 自是己見, 不免坐井爲戒, 讀書憤悱, 就正高明爲務, 終之以身縻勢故, 未遊弊廬爲憂。即此可見學如不及, 日造精深之意。然必以鄙人爲說, 則誤矣。世間高明自不乏人, 我茍有所得, 何患就正無所? 茍有可正, 千里一紙, 咫尺面談, 又何憂身縻哉? 鄙人雖非其人, 無已, 則自茲以往, 書尺往復, 如惠書所云, 亦吾之願。竊覵貴座資質, 外似柔鈍, 內實明剛, 豈敢無所見, 而茍然謾說乎? 吾之所以樂與之交者也。蓋孔子備論爲學大方, 五不措之法, 而終之以明剛二字。是爲道學築底處, 願益加努力於格致誠正之功, 使萬理皆通, 百行盡善, 以進於明剛之大且至焉者如何? 所喩陰吳誣背師義, 作師門大變之罪, 人皆可斥, 況使勇菴而在者, 必舉義聲討, 極是極是。今以勇集託陰校弁, 豈不知其不是哉? 特以取文技, 趨聲勢而然。此滔滔俗態, 何足道哉? 然在賢之道, 不可不一番正言, 書喩於主人, 不見聽, 則亦可已矣。購見與否, 賢既云於心不親帖, 則孟子所謂無欲其所不欲者。此可以斷之, 何復問於別人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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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840년 진천록(陳天錄)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庚子式 行府使 通德郞 陳宗輝 故代子 幼學 天錄 庚子式 河東都護府 陳天錄 行府使[着押] 1顆(7.5×7.3), 周挾無改印, 河東 고흥 무열사 고흥 무열사 HIKS_OD_F1030-01-200038 1840년(헌종 6)에 하동도호부(河東都護府)에서 발급한 진천록(陳天錄)의 준호구(準戶口). 1840년(헌종 6)에 하동도호부(河東都護府)에서 발급한 유학(幼學) 진천록(陳天錄)의 준호구(準戶口)이다. 진천록은 아버지인 통덕랑(通德郞) 진종휘(陳宗輝)가 사망하여 대신 호주로 등록하였다. 진천록은 하동도호부 마전면(馬田面) 전도촌(錢島村)에 거주하였고, 나이는 36세 을축생이며, 본관은 여양(驪陽)이다. 처(妻) 김씨(金氏)는 본관이 김해(金海)이고 나이는 36세이다. 진천록과 처의 부(父)·조(祖)·증조(曾祖)·외조(外祖) 4조의 직역과 이름을 기재하였다. 그 밖의 가족 사항으로 봉모(奉母) 윤씨(尹氏)가 있다. 이외에 노비의 명단 '천구질(賤口秩)'이 기재되었다. 이 문서에는 하동부사의 인장과 주협무개인(周挾無改引)이 찍혔다. 진천록은 1843년에 진달우(陳達佑)로 개명하여 준호구를 발급받았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교령류

1790년 진방일(陳邦一) 고신(告身) 2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乾隆五十五年六月日 陳邦一 乾隆五十五年六月日 正祖 陳邦一 施命之寶(10.4×10.0) 고흥 무열사 고흥 무열사 HIKS_OD_F1030-01-200003 1790년에 정조가 진방일(陳邦一)을 선략장군(宣略將軍) 행(行) 충무위부사맹(忠武衛副司猛)으로 임명한 고신(告身). 1790년(정조 14) 6월에 정조(正祖)가 진방일(陳邦一)을 선략장군(宣略將軍) 행(行) 충무위부사맹(忠武衛副司猛)으로 임명한 문서이다. 연호의 우측에 '武兼仍資'란 방서가 있다. 잉자(仍資)는 유임을 의미한다. 국왕의 시명지보(施命之寶)가 안보되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843년 진달우(陳達佑)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癸卯式 幼學 陳天錄 改名 達佑 癸卯式 河東都護府 陳達佑 [着押] 1顆(7.0×7.1), 周挾無改印, 河東 고흥 무열사 고흥 무열사 HIKS_OD_F1030-01-200038 1843년(헌종 9)에 하동도호부(河東都護府)에서 발급한 진달우(陳達佑)의 준호구(準戶口). 1843년(헌종 9)에 하동도호부(河東都護府)에서 발급한 유학(幼學) 진달우(陳達佑)의 준호구(準戶口)이다. 진달우는 진천록(陳天錄)이 개명한 이름이다. 진달우는 하동도호부 마전면(馬田面) 전도촌(錢島村)에 거주하였고, 나이는 39세 을축생이며, 본관은 여양(驪陽)이다. 처(妻) 김씨(金氏)는 본관이 김해(金海)이고 나이는 39세이다. 진달우와 처의 부(父)·조(祖)·증조(曾祖)·외조(外祖) 4조의 직역과 이름을 기재하였다. 그 밖의 가족 사항으로 봉모(奉母) 윤씨(尹氏)가 있다. 이외에 노비의 명단 '천구질(賤口秩)'이 기재되었다. 이 문서에는 하동부사의 인장과 주협무개인(周挾無改引)이 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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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교령류

1792년 진방일(陳邦一) 고신(告身) 고문서-교령류-고신 정치/행정-임면-고신 乾隆五十七年正月日 陳邦一 乾隆五十七年正月日 正祖 陳邦一 施命之寶(10.0×10.0) 고흥 무열사 고흥 무열사 HIKS_OD_F1030-01-200003 1792년에 정조가 진방일(陳邦一)을 선략장군(宣略將軍) 행(行) 훈련원주부(訓鍊院主簿)로 임명한 고신(告身). 1792년(정조 16) 정월에 정조(正祖)가 진방일(陳邦一)을 선략장군(宣略將軍) 행(行) 훈련원주부(訓鍊院主簿)로 임명한 문서이다. 국왕의 시명지보(施命之寶)가 안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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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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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김인진에게 답함 答金寅鎮 ○戊子 무자년(1948) 제가 처음으로 좌하를 만나서 덕기(德氣)가 흘러넘치고 언사가 안정된 것을 보고 금세의 평범한 벼슬아치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말씀을 접하고 사랑을 받음에 미쳐서 좌하가 밀암선생(密庵先生)의 6세손임을 알았으니, 늦게 태어나서 전철(前哲)을 만나 뵙지 못했으나 오히려 그 후손을 본 것을 다행이라 여겼습니다. 또 다행스럽게도 말년에 한 명의 좋은 벗을 얻었다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좌하에게 있어서 저는 본디 인척간의 친의도 없었고 지란의 세교도 없었는데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천리 멀리 편지를 보내어 죽을까 염려하고 살아난 것을 축하하면서 주밀하고 진지한 정을 다했으니 또한 무슨 까닭입니까? 《시경》 〈연연(燕燕)〉에서 말하지 않았습니까? "선군(先君)을 생각하라는 말로써 과인을 권면하도다."했으니, 이처럼 학문이 끊어진 시대를 만나 존선조(尊先祖) 밀옹에 대한 그리움이 좌하에게 있어 어찌 간절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저같이 지극히 누추한 자일지라도 좌하께서 "저 사람은 학문에 대하여 늙어 장차 죽더라도 다른 뜻을 가지지 않을 것이니, 혹여 선배의 풍서(風緒)를 조금이라도 이어서 7개월에 회복하는 씨앗118)이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깊이 사랑하고 지극히 격려해주셨습니다. 오직 깊이 사랑하고 지극히 격려해준 까닭으로 기대와 격려가 너무나 공정하지 못했고, 기대와 희망이 분수를 넘어서는 것을 깨닫지 못하셨습니다. 이제 만약 그런 일들을 일일이 들어서 사양하고 회피한다면 도리어 외부사람들이 들을까 두렵기 때문에 우선 멈추었습니다. 미처 잘라내지 않아 남겨진 풀뿌리와 같은 것은 빨리 없애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비록 그러할지라도 좌하의 뜻이 있는 곳을 어찌 감히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제 질병이 갑자기 이와 같이 되었으니, 사랑하고 격려해줌에 보답할 날이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밀옹집》의 교감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오자를 교정하는 것은 감히 사양할 수 없는 일이니, 이를 통해 문집 전체를 통독하여 사법(師法)을 얻는다면 진실로 또한 좌하가 은혜를 끝까지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僕始遇座下, 見其德氣流露, 言辭安定, 意其非今世常調人。 及接辭承欵, 知其爲密庵先生之六世孫, 則既以生晚未及前哲, 而猶及見後人爲幸。 又以幸獲一良朋於暮年也。 至於座下之於僕, 素無瓜葛之親誼, 亦非芝蘭之世交, 而纔聞病報, 千里走書, 慮死祝生, 極其周摯, 亦何以故?《詩》不云乎? "先君之思, 以勗寡人", 當此絕學之時, 尊先祖密翁之思, 在座下豈其不切? 雖如僕之至陋者, 尊意以爲彼之於學, 老將死而不他, 則或可少續先輩風緒, 而作七日種子歟? 故愛之深而勗之至也。 惟其愛勗之深至, 故不覺期獎之太沒稱停, 待望之過點分數。 今若枚舉而謝避, 則還恐外人之聽聞, 故且已之。 如留草本之未及綯削者, 亟滅之如何? 雖然, 尊意攸在, 豈敢不念? 顧賤疾遽如此, 未知圖報愛勗之有日否也。《密翁集》校勘, 何敢當? 但帝虎之辨, 所不敢辭, 而因以通讀全部, 得有師法, 則實亦座下之卒惠也。 7개월에……씨앗 《주역(周易)》 〈복괘(復卦)〉 괘사(卦辭)에 "칠일 만에 되돌아오니, 갈 데가 있는 것이 이롭다.〔七日來復, 利有攸往〕" 했는데, 7일(日)의 일(日)은 월(月)의 뜻으로서 7개월 만에 음양이 서로 왕래 소장하다가 동짓달에 하나의 양(陽)이 발생하는 것을 이른다. 이는 양도(陽道)가 회복되는 시초로, 암울한 시대가 가고 문명의 시대가 오거나 소인의 득세가 끝나고 군자의 시대가 오는 것을 상징한다. 전우(田愚)가 "이 아이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실로 7개월 만에 회복될 씨앗입니다. 제가 본래 사도(師道)를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역시 어찌 후배를 권면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此雖年少, 實七日復之種子. 愚固非有師道, 亦豈無奬勸後進之心〕" 하였다. 《간재집(艮齋集)후편》 권2 〈답신백삼(答愼伯三) 원성(元晟) ○갑인(甲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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