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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선사의 문고를 읽고 느낌이 있어 표출하고 삼가 안설을 붙이다 【1938년】 讀先師文稿有感而表出之謹附按說 【戊寅】 학문의 폐단은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구차하게 편안함을 훔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흥분하여 다투는 것입니다. 흥분하여 다투는 사람은 가슴 속이 편안하지 못하고 모든 일에 자기의 주장을 요구하여 지난 시대 성현의 말씀과 행적이 어떠했는지를 묻지 않고 한결같이 자기의 소견에 따라 멋대로 외치고 함부로 행동할 뿐입니다. 구차하게 편안함을 훔치는 사 람은 도리어 단지 몸가짐을 삼가고 이름을 아껴서 눈으로 삿된 말과 그릇된 행동이 바른 도 를 깎아 먹는 것을 보고서도 감히 입을 열어 지적하거나 말하지 않습니다. 그 행한 곳도 또 한 볼 만한 것들이 많은데, 끝까지 구차스럽게 대강대강 할 생각만 있습니다.【〈김봉수(金鳳 峀)어른에게 보냄〉】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근래 오진영의 일을 가지고 논하면 멋대로 외치고 함부로 행동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심지어 문고를 인허 받는다는 것으로 선사의 절개를 무함하고, 자기의 의견으로 선사의 문고를 고치기까지 하였으니, 흥분하여 다투는 폐단이 끝내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이다. 선사를 무함하는 패륜적 행동이 바른 도를 깎아 먹고 있는 것을 눈으로 보고서도 감히 입을 열어 지적하고 말하지 않는 자로 말하면 선사의 도를 보호하지 못한 죄와 선사의 도를 해치는 죄는 서로의 거리가 멀지 않으니, 구차하게 편안함만을 훔치는 폐단이 끝내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이다. 선사께서 이 두 가지 폐단을 말씀하신 것은 아마도 먼 미래를 염려해서일 것이다.오로지 이익과 손해만을 살피는 폐단은 임금을 버리고 친부모를 뒤로 하며, 스승을 배반하 고 벗을 파는 데에 이를 것입니다.【〈이어당(李峿堂) 어른에게 답함〉 아래도 같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진영은 일의 공적에 대한 마음과 명예ㆍ이익에 대한 생각을 이기지 못하여 그 폐단이 임금을 잊고 원수를 받들며, 선사를 무함하고 벗에게 화를 끼치는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무릇 옛날 이래로 이단의 학문을 하는 선비는 후대의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진실로 문 밖에 있지만, 당시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방 안에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묵씨(墨氏)는 요(堯) 와 순(堯)을 종주로 삼았으니, 묵씨는 공자와 맹자의 방 안에 있는 것이고, 육씨(陸氏)는 추 (鄒)나라와 노(魯)나라를 높였으니, 육씨는 정자와 주자의 방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오직 이와 같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유자(儒者)가 분별하고 물리쳤다는 말을 직접 들었으면서도 오 히려 그것을 바른 학문으로 인식했던 것이고, 성현(聖賢)은 세상 사람들이 빠지는 것을 눈으 로 보고 죽기를 각오하고 복수하는 원수처럼 그들을 공격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에는 누가 옳고 그른지 알 수 없고, 후대에 도를 아는 선비가 나와서 바로잡은 뒤에야 비로소 방 안과 문 밖, 삿됨과 바름의 구분이 있게 되어 다시는 합쳐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음성(陰城)의 오진영을 변박하는 것을 기롱하여 말하기를, "그도 또한 선사를 높였는데, 어찌하여 방 안의 사람끼리 싸우는 것인가?" 하였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선사의 이 가르침을 본다면 어떻다고 말할 것인가?우리 유가들이 이단을 변박하는 것은 다만 도리에 당연한 일로 여겨서 할 뿐이지, 우리의 말이 행해질지 행해지지 않을지, 다른 사람이 따를 것인지 거스를 것인지, 저들의 세력이 강한지 약한지를 비교하여 나아가거나 물러나서는 안 됩니다. 맹자와 주자의 시대에 저들이 진실로 그들을 두려워 한 적이 없었으니, 비록 맹자나 주자라 할지라도 또한 감히 온 천하 에 우리의 말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곧바로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내가 음성의 오진영을 변박하는 것을 기롱하여 말하기를, "그의 사람은 많고 선생의 사람은 적으며, 그의 세력은 강하고 선생의 세력은 약하니, 선생이 비록 그를 변박할지라도 선생의 말이 행해질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선사의 이 가르침을 본다면 어떻다고 말할 것인가?그들의 이간질하는 말과 조장하는 말, 무함하는 언사, 악다구니 소리는 변박할수록 더욱 심 해져서 단지 자신만 답답하고 괴로울 뿐이니 망령된 말에 붙여두는 것만 못합니다. 오랜 시 간이 지나고 나면 옳음과 그름은 저절로 밝혀질 것이고, 비록 사람은 밝게 알지 못 한다 하 더라도 또한 모름지기 하늘이 있으니, 내 심군(心君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은 참으로 온당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근년에 받아들여 사용하고 있는 방법이니다.【〈안혼재(安渾齋)에게 답 합〉】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내가 오진영과 이승욱(李承旭) 및 그 일당의 무함하는 말과 악다구니 소리에 대해 또한 일찍이 선사의 이 가르침을 받아들여 사용함으로써 힘을 얻었다. 다만 그 일이 선사와 관계된 것은 끝까지 그만 둘 수 없을 뿐이다.우리 어른께서 이른바 "전자로 보면 강론에서의 작은 과실로 여겨 참아야 하고, 후자로 보 면 사문의 큰 변고로 여겨 힘껏 성토해야 한다. 다만 전모(田某 전우(田愚))가 진심으로 감 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옆에서 본 사람들이 그것을 사심의 작용에서 나온 것이고 당연한 의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여길까 염려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아픈 부분을 찔렀다고 이를 만합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진영은 김용승(金容承)이 선사를 무함했다고 자기를 성토한 뒤에 말하기를, "이 사람은 몇 해 전에 '놈'ㆍ'농사꾼 늙은이'라 불렀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이 사람은 마음속으로 선사를 무시한 지가 오래되었다." 하였다. '놈'ㆍ '농사꾼 늙은이', '선사를 무시함'은 얼마나 큰 죄인가? 그런데도 전자로 보면 작은 과실로 여겨 참을 뿐만이 아니었고, 게다가 여러 해 동안 그를 공경하고 믿으며, 아끼고 보호하였다. 심지어 선사의 문고를 교정할 유사(有司)로 정해 망첩(望帖)으로 그를 초빙까지 하였다. 자기를 성토한 뒤에 이르서야 비로소 그의 죄를 드러내 성토하였으니, 어찌 사심(私心)의 작용이 아니겠는가.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김용승은 결국 선사를 배반하였으니, 그가 당연히 진심으로 감복한 사람이 아니었고, 단지 오진영의 심술(心術)이 그러할 뿐이었다.김(金)이 처음 이런 괴이한 논의를 했을 적에 그 마음에 어찌 다시 꺼리는 것이 있었겠습니 까. 그런데 지금은 도리어 이렇게 감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애를 써서 물 리치려 했던 말이니, 그 공이 전혀 없었다고 이를 수 없을 것입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진영이 처음에 "헤아려서 하라."거나 "깊이 구애될 필요가 없다.", "말없는 가르침", "하늘은 만물을 낳고 성인은 법을 세우셨다.", "꺼리지 않으시고 공공연하게 말씀하셨다." 등의 말로 선사를 무함할 적에 그 마음이 어찌 다시 꺼리는 것이 있었겠는가. 뒤에는 도리어 "말에 구별이 부족했다."거나 "말을 가림에 소홀했다." 등의 말로 감출 생각을 하였다. 이것은 호남의 선비들이 애를 써서 물리치려 했던 말이니, 그 공이 전혀 없었다고 이를 수 없을 것이다.대체로 선생의 문집이 저 사람의 손 따라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은 절대로 선선생(先先 生)께서 동문과 문인에게 처리하신 뜻이 아닙니다. 저는 선선생의 눈이 지하에서 감기지 못 하실까 염려되니, 매우 통탄스러운 일입니다.【〈조참판(趙參判)에게 답함〉】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선사께서는 숙재(肅齋)에 대해 그 분이 선사의 동문이 됨에도 오히려 문집이 다른 사람의 손 따라 나타났다 사라졌다하는 것을 매우 비통하고 한탄스럽게 여기셨고, 심지어 선생의 눈이 지하에서 감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어찌하여 오늘날 군자들은 친한 스승의 문집이 다른 사람에 의해 무난하게 고쳐지고 삭제되는 것에 대해 편안하게 보면서 일찍이 통탄스럽게 여기는 뜻이 없는 것인가? 매우 괴이하다.차라리 시호(諡號)가 없을지언정 시장(諡狀)은 결코 그 사람이 짓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임경유(任景孺)에게 보냄〉 아래도 같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몇 해 전에 내가 전일효(田鎰孝)85)가 오진영에게 선사의 행장(行狀)을 짓게 했다는 말을 듣고, 또한 말하기를, "차라리 행장이 없을지언정 행장을 결단코 선사를 무함한 사람이 짓도록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일이 사문(師門)과 관계되니, 한 줌의 숨이 아직 끊어지기 전에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 는가.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내가 선사의 무함을 변론하고 문고의 어지러움을 바르게 하는 것에 대해 마음이 또한 이와 같을 뿐이다. 혹자는 일이 여러 해 오래 전에 있었기 때문에 이젠 그만두어도 된다고 하였다. 나에게 충고하는 사람이 선사의 이 말을 본다면 어떻다고 말할 것인가?일찍이 명나라 유학자 고경일(高景逸)86)의 말을 보니, "기개와 절의가 있으면서 학문을 하 지 않은 사람은 있지만 학문을 하고서 기개와 절의가 없는 사람은 있지 않다. 학문을 하고 도 기개와 절의가 없다면 이러한 종류의 사람은 세상의 교화에 해됨이 적지 않다."라고 하 였는데, 이 말이 아름답긴 하지만 미진한 점이 있다. 대체로 만약 기개와 절의가 없다면 원 래부터 학문을 했다고 이를 수 없으니, 그 '학문'이라 한 것은 단지 밖으로 보이는 화려한 명성일 뿐이다. 【〈왕사간(王司諫)에게 보냄〉】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가령 음성 오진영의 말처럼 선사께서 진실로 인허를 받으려고 생각하고 인허를 받도록 분부하셨다면 이는 이른바 "기개와 절의가 없다면 원래부터 학문을 했다고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니, 아아, 어찌 그렇겠는가. 어떤 사람은 음성의 오진영을 보호하고 본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심지어 "비록 인허를 받도록 분부하셨다 하더라도 선사에게 해가 되지는 않는다."고 말하고, 또 심지어 "인허를 받도록 분부한 뒤에 선사가 될 수 있으니, 만약 구구한 작은 신의와 절개에 얽매어 도를 후대에 전할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대군자라 할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아, 천리가 어두우지고 인심이 사악해짐이 이런 지경까지 이른 것인가?지금 저 사람의 망극한 무함에 대해 내 마음에 돌이켜 구해보건대, 만약 조금이라도 원망하 고 두려워하는 싹이 보인다면 이것이 장애가 될 것이니 얼마나 괴롭겠는가. 어찌 이른바 "어떤 상황에 처해서도 자득하지 않음이 없다."87)는 것이겠으며, 어찌 이른바 "마음이 평 탄하여 여유가 있다."88)는 것이겠는가. 내심 스스로 우리들이 바로 어려운 곳과 험한 곳에 서 묵묵히 도를 체득하는 공부를 해나가야지, 단지 문자로만 공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 네. 【〈벗 이명(李明)에게 답함〉】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는 음성 오진영의 망극한 무함에 대해 나의 마음에 돌이켜 구해보건대 비록 스스로 원한과 두려움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요컨대 어떤 상황에 처해서도 자득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과 "마음이 평탄하여 여유가 있다."는 경지에 이른 뒤에야 끝날 것이다. 바로 어려운 곳과 험한 곳에서 공부를 해나가야 한다는 선사의 가르침을 마치 오늘 얼굴을 대하고 명을 받드는 듯하다.한쪽 사람들이 내가 선비가 상(喪)을 치르는 동안에 의(義)를 주창하는 것은 중도에서 지나 친 것 같다고 말한 것이 절의를 배척함이 된다고 지적하며 꾸짖었습니다.【〈김광국(金光國) 에게 답함〉】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진영은 내가 그가 지은 〈정절사전((鄭節士傳)〉89) 뒷부분의 의논 가운데 중화와 오랑캐를 뒤섞어 말한 것에 대해 논변한 것으로 절의를 배척함이 된다고 지적하며 꾸짖었다. 선사께서 바로 의를 주창한 사람을 논변하신 것은 단지 그가 상을 치르는 사람이 중도에 맞는지 여부만을 논변하고 일의 옳고 그름을 논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니 꾸짖는 사람의 말이 오히려 부당하다. 하물며 나는 단지 그 글의 의논이 의를 해친 점이 있다는 것만 논변했고, 애초에 절사(節士)의 일은 거론하지도 않았으니, 꾸짖는 사람의 말이 어찌 더욱 부당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아, 내가 선사의 뒤를 따라 절의를 배척했다는 죄목을 얻은 것은 분수에 영광이나, 단지 그의 마음 씀이 험악함을 볼 뿐이다.이렇게 사문이 분열된 때에는 벗들이 비록 조그만 흠이 있다 하더라도 진실로 큰 변고가 아 니라면 또한 잘못을 포용함으로써 교유의 도를 온전히 할 수 있어야 하니, 이것은 사실 주 희와 송시열 두 선생의 뜻입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선사의 이 편지를 끌어와 오진영과 김용승(金容承)을 단절한 것이 온당하지 않다고 말한 사람이 있다. 아, 스승을 무함하고 스승을 배반하는 것이 큰 일이 아니고 작은 흠이란 말인가. 어찌하여 선사께서 정윤영(鄭胤永)ㆍ신계(申桂)ㆍ이승욱(李承旭) 세 사람을 단절한 일을 보지 않는 것인가?90) 여기에서 이른바 '작은 흠'이란 신이산(申梨山)이 가평 김평묵의 형편없음을 알면서도 단지 뚜렷하게 단절을 통고하지 않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일 뿐이다.신이산은 매번 제문을 배척해 물리친 것에 대해 악한 마음을 격동하여 이루게 하고 재앙의 조짐을 돋우어 일으켰다고 하는데, 내가 내심 생각하기에 이 일은 단지 옳은가 옳지 않은가 를 논변해야지 격동시키고 촉발시켰는가는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이해(利害)상의 말 인 듯합니다. 【〈정명신(答鄭命新)에게 답함〉. 아래도 같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우리 문인 중에 오진영과 김용승을 성토하고 단절한 것에 대해 악한 마음을 일으켜 이루게 하고 재앙의 조짐을 돋우어 일어나게 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이 가르침을 본다면 어떻다고 말하겠는가?다만 신이산이 조정의 의론을 둠으로써 이승욱의 헐뜯음이 더욱 방자해지고 김평묵의 세력 이 더욱 성대해지게 하였으니, 이 때문에 오늘날의 재앙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도리어 자신을 탓하지 않고 반대로 도를 곧게 하여 행한 사람에게 죄를 돌리니, 이것이 무 슨 식견이고 의론인지 모르겠습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우리 문하의 변고가 다만 중간에 선 자가 조정의 의론을 두었기 때문에 오진영의 무함이 더욱 방자해지고 김용승의 배반이 더욱 어그러져 큰 재앙을 이루게 한 것 또한 선사의 이 말씀과 같은 점이 있다.지난번에 한 벗이 나를 보고 "그대가 제문을 물리치고자 한 것은 어설픈 일이라 이를 만하 다. 저들의 기세를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에 임 해서 이치의 옳고 그름을 보고서 진퇴를 결정해서는 안 되고, 단지 사람의 강약을 보고서 진퇴를 결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학문이라 하겠습니까.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내가 처음 음성의 오진영을 성토하고, 그 뒤로 여러 차례 변론을 마지않자, 사람들 중에 진실로 저들의 형세를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만두도록 권면하는 자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단지 이치의 옳음과 그름을 보고 진퇴를 결정할 뿐, 사람의 강약을 보고 진퇴를 결정하지 않은 것고 또한 선사의 마음과 같았을 따름이다. 과연 전에는 고소의 재앙을, 뒤에는 무함의 치욕을 면치 못했으니, 지난날에 그만두도록 권면했던 자가 스스로 앞을 내다보는 명철함이 있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어찌 그 사이에서 한 터럭만큼의 원망이나 후회가 있겠는가.무릇 횡포와 패역이 오면 세상의 교화와 도술(道術)에 관계된 것을 제외하고는 또한 그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임석영(林奭榮)에게 답함〉】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내가 오진영 쪽의 횡포와 패역이 올 적에 선사를 무함하는 것과 문고를 어지럽히는 것에 관계된 것을 제외하고는 단지 일체 받아들였을 뿐, 변론하여 다스리지 않았다.자경(子敬 김용구(金容九))이 명도(明道)는 왕안석(王安石)과 절교하지 않았고, 이천(伊川) 은 소동파(蘇東坡)와 다투지 않았다91)고 했는데, 제가 생각하기에 명도의 덕과 도량이 넓 고 컸지만 만약 왕씨가 부모와 스승을 기롱하고 모욕했다면 그를 대우함이 반드시 달랐을 것입니다. 또한 저 김(金)과 유(柳)의 문인(門人)92)들이 소동파로 자처했다면 저 또한 그들 과 다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저들은 자신들을 공자ㆍ주자의 정통을 전수받았다 고 말하지만 성리(性理)의 의론과 출처(出處)ㆍ사행(事行)이 모두 성인의 가르침과 어긋나니, 유자(儒者)된 자로서 어찌 말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최종화(崔鍾和)에게 보냄〉】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호남 사람이 음성의 오진영과 절교한 것은 그가 선사를 무함했기 때문이다. 그가 만약 평소의 고제(高弟)가 아니고, 또 전발(傳鉢)93)로 자처하지 않았다면 호남 사람의 변론도 또한 굳이 이처럼 힘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가 전발의 고제로 자처하여 스승을 무함하였으니 사람들이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힘써 변론한 것이다.한쪽이 바르고 다른 한쪽이 치우치거나 한쪽이 공정하고 다른 한쪽이 사사로우면 반드시 다 툼이 있게 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옆에서 본 사람들이 모름지기 시비하는 방향을 정밀하게 살피고, 또 모름지기 이쪽저쪽의 언사의 온순함과 포악함, 기세의 평온함과 험악 함을 세밀하게 본 뒤에 좇을 것인지 등질 것인지 나의 길을 정하고, 도울 것인지 억누를 것 인지 나의 힘을 베푸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혹 양쪽을 옳게 여기거나 혹은 모 두를 그르게 여기는 것은 선현이 기롱한 "낙(洛)도 옳고 촉(蜀)도 옳으며, 원우(元祐)도 그르 고 희풍(熙豊)도 그르다.94)"라는 말일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천명(天命)의 이치겠으며, 성 인의 법이겠습니까. 【〈임장우(林章佑)에게 답함〉】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늘날 호남도 스승을 높였고, 영남도 스승을 높였으며, 영남도 일을 그르쳤고 호남도 일을 그르쳤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은 어찌하여 시비하는 방향을 살피지 않고, 또 언사의 온순함과 포악함, 기상의 평온함과 험악함을 보고서 좇음과 등짐, 도움과 억누름을 선사의 말씀처럼 하지 않는 것인가? 【정도현(鄭道鉉)이 김홍재(金弘梓)를 대하여 말하기를, "의론은 호남이 옳다." 하였으며, 전기진(田璣鋠)이 나를 대하여 말하기를, "영남과 호남의 싸움에서 호남이 승리했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호남이 영남에게 곤욕을 받아 고소의 화를 당하기까지 하였는데, 어찌하여 호남이 승리했다고 말하는 것인가?" 하자, 전기진이 말하기를, "'싸움의 의 승리'에서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치의 승리'에서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무슨 말인가?" 하니, 전기진이 말하기를, "호남의 문자는 주로 일을 의론하고, 영남의 문자는 주로 사람을 타격한다. 이것이 진실로 공론(公論)이다. 그래서 승리했다고 말한 것이다." 하였다. 정도현과 전기진은 함께 영남에 거처하여 영남을 편드는 사람들인데 그들의 말이 이와 같았으니, 시비의 방향 및 말의 온순함과 포악함, 기세의 평온함과 험악함에 대한 구분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끝내 좇음과 등짐, 도움과 억누름 사이에서 선택할 것을 알지 못하니, 이것이 한탄스럽다.】단지 전장(奠章)95)을 조목조목 밝혀서 스승의 마음에 다른 뜻이 없었음을 알리면 되는데, 끝내 유심(有心)과 무심(無心)의 사이에서 과실로 인한 잘못[眚]과 일부러 지은 죄[怙]의 구 별이 있는 것에 대해서는 어쩌지 못했다. 이에 분열된 까닭을 버려두고 주위를 둘러보다 다 른 곳으로 가서 의혹을 치장하고 꾸미는 것이 마치 흘러 떠도는 것들을 주어모아 내 몸을 더럽히고 후배를 현혹할 계책으로 삼은 듯하니, 마음을 쓰는 것이 구차하고 수고롭다는 것 을 볼 수 있다.【〈관서(關西)의 제생(諸生)에게 답함〉】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만약 음성 오진영의 말에 진실로 선사를 무함한 사실이 없었다면 그의 무리들이 단지 오진영의 본문(本文)에 나아가 선사를 무함한 것이 아님을 조목조목 밝히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도리어 주변을 둘러보아 다른 곳으로 가서 의혹을 치장하고 꾸미는 것이 마치 터무니없는 것을 억지로 뒤집어씌워 호남 사람을 더럽히고 한 시대를 현혹할 계책으로 삼은 듯하니, 마음을 쓰는 것이 구차하고 수고롭다는 것을 볼 수 있고, 더욱 스승을 무함한 죄가 유심(有心)의 일부러 지은 죄에서 나왔음을 볼 수 있다.만약 화서(華西)96)가 율옹(栗翁 이이(李珥))에 대해 진심으로 기뻐하고 성심으로 복종할 생 각이 참으로 있었다면 그의 뛰어난 제자가 어찌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이 치에서 벗어난 일이니, 조금의 싹도 없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만약 화서가 주자에 대해 독실하게 믿어 의심하지 않는 진실함이 참으로 있었다면 그의 뛰어난 제자가 어찌 감 히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이치에서 벗어난 일이니, 조금의 싹도 없었다고 말하 기는 어려울 듯하다.【〈화문이자론(華門二子論)〉】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늘날과 후대 사람 중에 오진영의 일을 논하는 자가 어찌 "만약 간재(艮齋 전우(田愚))가 참으로 인허를 받으려는 생각과 인허에 대한 분부가 없었다면 그의 뛰어난 제자가 어찌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이치에 벗어난 일이니, 조금의 싹도 없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하다."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내가 깊이 두려워하여 어쩔 수 없이 변론하는 이유이다. 어떤 사람은 내가 지나치게 염려한다고 지적하는데, 어쩌면 그렇게도 식견과 사려가 없단 말인가.윤철규(尹喆圭)가 거짓으로 칙령(勅令)을 전해서 빈사(賓師)를 유인해 쫓아낸 것97)에 대해 조정에서 비록 자세하게 조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장보(章甫 유생)들은 성토해야 한다.【〈쇄 묵(瑣墨)〉 아래도 같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퇴계의 이른바 "통문(通文)을 돌려 상소하는 것은 유생의 일이 아니다."는 것은 유생이 조정의 일에 간여한 것으로 말한 것이지, 사문(斯文) 중에 일이 있어도 서로 알리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지금 이 말을 인용하여 호남 사람이 통문으로 오진영을 성토하는 것을 비난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미 퇴계의 본래 취지를 잃은 것이다. 지금 또 선사의 말씀으로 보건대 장보들이 윤철규를 성토하는 것은 조정에서 그의 죄를 조사하지 않은 것으로 인해 행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조정의 일에 간여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음에도 또한 그것을 허여한 것이니, 통문으로 오진영을 성토하는 것이 유생의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식견이 없음을 더욱 볼 수 있다.유자(儒者)는 저서(著書) 수십 권에 곡필(曲筆)을 용납하여 고금(古今)의 한 사람도 원통하거 나 억울하게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살리기를 좋아하는 천지(天地)의 마음을 받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니, 후대에 응당 어진 자손을 얻을 것이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오늘날에 사 람을 논하면서 행적을 아울러 무함하는데 어찌 마음까지 논할 수 있겠는가. 이는 하늘의 형 벌과 귀신의 질책에 관계된 것이니, 신중해야 한다.98)" 하였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음성의 오진영과 그의 무리들은 선사에 대한 무함을 변론하는 것이 글의 혐의를 꾸미려는 데서 나온 것이라고 나를 무함한다. 내가 그에 대해 설사 진실로 혐의할 만한 행적이 있더라도 혐의를 피하여 무함을 변론하지 않는 것은 제자로서의 직분이 아니니, 진실로 이것으로 마음을 무함해서는 안 된다. 하물며 애초에 혐의할 만한 행적이 없는데, 도리어 거짓을 꾸미고 뒤집어씌워서 억지로 애매모호한 행적을 만든 것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가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마는 "행적까지 아울러 무함하는데 어찌 마음을 논할 수 있겠는가. 하늘의 형벌과 귀신의 질책에 관계된 것"이라는 가르침을 돌이켜볼 것이다.고금(古今)의 일을 낱낱이 헤아려보면 온갖 병폐는 그 근원이 어느 한 가지도 우리 유학자 들이 소문[聞]과 현달[達]의 변별99)을 밝히지 못하고, '진실[誠]'과 '거짓[僞]'의 기미를 살피 지 못하며, 일은 가능함을 구하고 공은 이룸을 구하는 것100)에 있어서는 최고의 완전한 도 리로 자신을 위하지 않고 남을 위한 데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고선사묘문(告先 師墓文)〉】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일은 가능함을 구하고 공적은 이룸을 구하는 것이 이미 온갖 병폐를 가져올 수 있는데, 하물며 선사께서 일찍이 음성의 오진영을 일과 공적을 중요하게 여기고 도의를 헤아리지 않는다는 것으로 배척하신 것은 단지 일은 가능함을 구하고 공적은 이룸을 구하는 것뿐만이 아니니, 훗날 "선사의 함자를 거짓으로 서명하여 먼 곳의 사람에게 던져 준 것"과 "선사를 무함하여 인허를 받도록 분부했다는 것", "선사의 문고를 고치고 어지럽힌 것", "일작(日雀)에게 돈을 구걸한 것", "동문을 일망타진한 것" "선사의 손자를 압송하여 가두는 것" 등 온갖 죄악을 빚어낸 것이 마땅하다 하겠다.저 역시 피와 살로 이루어진 몸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 자신을 사사롭게 여기는 이치가 없겠 습니까. 단지 스승을 높이고 도를 지키려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원망 과 비방이 세상에 넘쳐나는 것을 보면서도 감히 평소의 지조를 바꾸어서 따르지 못하고 있 으니, 그 정상이 또한 참으로 슬픕니다. 만약 집사처럼 인품과 지위를 가진 사람이 그 일을 했었다면 사문(斯文)에는 붙들어 세우는 도움이 있었을 것이고, 자신의 몸에는 주먹질과 발 길질이 가해지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집사께서는 스스로 편리한 곳을 차지하여 일을 맡을 마음은 없고 이렇게 외롭고 미천하며 비루하고 용렬한 사람에게 대신하게 하시 니, 이것이 어찌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겠습니까. 집사께서는 스스로 맡지 않았을 뿐만 아니 라 도리어 저들의 세력을 도와주시기까지 하시니, 더욱 옳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신 앙여(與申仰汝)에게 보냄〉 아래도 같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지금 음성 오진영의 무함과 어지럽힘에 대해 만약 인품과 지위가 있는 동문의 노성(老成)한 사람이 변론과 성토의 일을 맡았다면 저쪽의 방자함을 거두어 선사의 도의를 밝힐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모두 스스로 편리한 곳을 차지하고서 도리어 저들의 세력을 도와주면서 이렇게 나처럼 사람이 미천하고 말이 경솔한 자로 하여금 일을 맡게 함으로써 원망과 비방이 세상에 넘쳐나고 재앙과 근심이 몸에 가해지게 하는 것인가? 비록 스승을 높이고 도를 지키려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지만 정상이 또한 진실로 슬프다 하겠다. 아아, 옛적에 선사와 같은 인품과 지위로도 오히려 이러한 탄식이 있었는데, 하물며 지금의 소자(小子)처럼 인품과 지위가 낮고 미천한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한쪽 사람이 또 저의 제문(祭文)에 있는 음양(陰陽)과 같은 마음과 행적이라는 말이 있는 것 을 가지고 신(神)을 업신여긴 것이라 말하면서 이것을 큰 죄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음양(陰 陽)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이 상반되듯 마음과 행적이 모순된다는 말101)은 농옹(農翁 김창협 (金昌協))이 일찍이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에게 비기어 반드시 그렇지 않음을 밝힌 것입 니다. 부친에게 사용했던 말을 선사에게는 베풀 수 없다고 말하니, 저는 그것이 무슨 말인 지 모르겠습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음성의 오진영이 호남의 통문(通文) 중에 "선사께서 만약 그렇게 하셨다면 이는 두 마음을 품고 불충을 반복했다는 말이니, 이 때문에 선사께서 반드시 인허를 받으라는 분부를 하지 않으셨음을 깊이 밝히려는 것이다."라는 것을 가지고 위로 감히 말하지 못할 부분까지 언급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것을 큰 죄로 삼았는데, 어찌하여 선사의 이 가르침을 읽고서도 남에게 뒤집어씌운 죄를 자복하지 않는 것인가? 대체로 그의 심술이 선사의 이른바 "한쪽 사람"과 한 꿰미에 꿰어져 있는 것이 자못 같은 기운을 전해 받고 같은 탯줄에서 태어난 것과 같다.일찍이 배우지 않았다면 전혀 일이 없겠지만 지금 사우(士友)의 뒤를 따라 그 학설을 듣고 서도 이와 같이 따지지 못하고 겨우 에둘러 따진다면 이는 성현의 가르침을 저버리는 것입 니다. 맹자가 남과 변론하고 논쟁한 것은 단지 사람들이 성인이 옳고 이단의 말이 그르다는 것을 알기를 바란 것일 뿐입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지금 선사에 대한 무함을 변론할 때에 만약 화를 불러들일까 두려워하여 겨우 에둘러 따진다면 이는 성현의 가르침을 저버리는 것이다. 변론을 하는 것은 단지 사람들이 선사께서 이러한 사실이 없고 그의 말이 무함임을 알기를 바란 것일 뿐이다.제가 내심 엿보건대 집사의 뜻은 회니(懷尼)의 논쟁102)과 호락(湖洛)의 변론103)을 징창(懲 創)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무릇 인물(人物)의 삿됨과 바름의 사이나 강론의 같음과 다름 의 즈음에서 일체 화합을 주된 것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자못 삿됨과 바름을 분별하 고 같음과 다름을 나누어서 서로 뒤섞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로 자연의 화합이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단지 사의(私意)와 인욕(人欲)일 뿐이라는 것을 모르신 것입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근래에 나와 전일중(田鎰中)이 오진영과 화평할 것을 권면하는 사람들이 어찌 선사의 '사의와 인욕'이라는 가르침에 송연(竦然)하지 않겠는가.집사께서도 또한 그의 제문이 나쁘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 스스로 옳지 못하다 는 것으로 처신하고자 할 뿐입니다. 이것이 만약 자기의 일에 관계된 것이라면 괜찮을 것입 니다. 그러나 지금 부친과 스승이 모욕을 받았는데도 단지 한 구절의 냉정한 말로 끝내다니 요.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진영의 무함이 단지 자기의 일에 관계된 것이라면 진실로 그 스스로 옳지 못하다는 것으로 처신할 뿐이지만, 선사와 관계된 것이라면 감히 한 구절의 냉정한 말로 끝내어 선사의 심법(心法)을 어그러지지 못하게 할 것이다.집사가 형제처럼 처우한다고 하지만 자기와 관계된 것이면 노여워하고, 선사와 관계된 것이 면 편안하게 여기십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진영은 김용승(金容承)이 몇 해 전에 '놈'ㆍ'농사꾼 늙은이'라 부르고, 마음속으로 오래도록 선사를 무시했을 때에는 일이 선현과 선사에게 있었기에 편안하게 여기더니, 선사를 무함했다고 자기를 성토할 때에는 일이 자기에게 있게 되자 노여워하면서 비로소 그의 죄를 발설하고, 또 사람으로 하여금 선사의 영령 앞에서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게 하였다. 선사의 이 말씀은 마치 오진영의 심술을 먼저 내다보고 미리 말씀하신 듯하다.옛적에는 주자를 어지럽히는 사람이 주자의 문하 밖에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주자를 어지럽 히는 사람이 주자의 문하 안에 있습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옛적에는 스승을 무함하는 사람이 스승의 문하 밖에 있었는데, 오늘날에는 스승을 무함하는 사람이 스승의 문하 안에 있다. 스승의 문하 안에 있기 때문에 그 말에 쉽게 변론하지 못한다. 그 말을 변론하기가 쉽지 않은 점이 있기 때문에 변론에 힘쓰지 않을 수 없다.오백풍(吳伯豊)104)은 주자 문하의 안연(顔淵)이다. 경원(慶元 송 영종(宋寧宗) 연호) 연간에 수립한 것이 우뚝하여 사문의 칭찬을 자주 받았다. 우옹(尤翁 송시열)이 지은 창랑(滄浪)의 글에 이성보(李誠父)ㆍ오백풍 등의 말이 있었는데, 뒤에 대윤(大尹 윤선거(尹宣擧))의 청으로 그것을 삭제하였다.105) 우옹이 빗대어 견준 것과 대윤이 삭제를 요청한 것이 어찌 오백풍이 진실로 권세를 좇는 허물이 있었기 때문이겠는가. 단지 그에게 일찍이 한탁주(韓侂胄)에게 붙었다는 비방이 있었을 뿐이었다. 【〈수현재우기(守玄齋偶記)〉 아래도 같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사람들 중에 "오진영이 비록 선사를 무함했다 하더라도 선사가 진실로 이러한 사실이 없으니, 어느 누가 그것을 믿겠는가."라고 말하는 자가 있는 데, 이는 생각이 깊지 못한 것이다. 오백풍이 비록 권세를 좇는 허물이 없고 단지 그가 일찍이 한탁주에게 붙었다는 비방이 있었다 하더라도 글의 저작에서 삭제를 당하는 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선사께서 비록 실제적인 허물이 없다 하더라도 어찌 일찍이 인허를 받도록 분부했다는 무함이 있었다는 것 때문에 후세 사람들에게 오백풍처럼 글에서 삭제당하는 일을 받지 않을 줄 알겠는가? 내가 적이 이런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대체로 절교를 알리는 편지는 난만(爛漫)ㆍ참치(參差)의 말106)을 위주로 하였는데, 저쪽의 제문을 해명한 문자가 무려 수만 마디였지만 끝내 한 구절도 이것에 대해 분명하게 설파한 것은 없고, 단지 송조(宋朝)의 네 현인107)에 대해 교묘하게 사설(辭說)을 지어 장황하게 늘 어놓음으로써 한 세대를 현혹할 계책으로 삼았으니, 단지 이것으로 보건대 그 마음이 어디 에 있는지 알 수 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호남에서 음성의 오진영을 변박하고 성토한 글은 "인허를 받으려는 생각이 있으셨다."와 "인허를 받도록 분부하셨다."라는 말을 위주로 하였는데, 저쪽에서 해명한 말은 무려 수만 마디였지만 끝내 이것에 대해 분명하게 설파한 것은 없고, 단지 변박하고 성토한 사람의 신상에 나아가 교묘하게 사설을 지어 죄안(罪案)을 억지로 만들고 장황하게 늘어놓음으로써 한 세대를 현혹할 계책으로 삼았다. 단지 이것만 보더라도 그 마음을 알 수 있다. 선사께서 인허를 받도록 분부한 적이 없었다고 여기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꺼리는 것이 있어 감히 말을 함부로 하면서 있었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런데 오진영이 서병갑(徐柄甲)에게 답한 편지에서 "사실은 선사의 말없는 가르침을 살펴 따른 것"이라는 말이 나옴에 이르러서야 호남 사람들이 겨우 고소의 재앙에서 벗어나 고개를 떨어뜨리고 기운을 잃은 채 다시는 성토할 힘이 없게 되자 이에 오진영은 다시 서병갑에게 편지를 보내어 대담하게 분명히 말없는 가르침이 있었다고 큰소리치면서 꺼리는 바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문인과 자제들이 이와 같음을 보고서 다른 사람과 화합을 잃었다는 조그만 혐의를 피하면서 선사를 위해 무함을 변론하는 큰 의리를 잊는다면 스승과 제자의 인륜은 이로부터 폐지될 것이다. 스승과 제자의 인륜이 폐지되면 삼강(三綱)과 구법(九法)108)도 또한 의지하여 설 곳 이 없게 될 것이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진영과 화합을 잃었다는 조그만 혐의를 피하면서 선사에 대한 무함을 변론하지 않는 우리 문하의 여려 사람들이 이 가르침에 대해 마음속으로 송연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가르침을 보고서도 오히려 송연해할 줄 모르다면 성인의 이른바 "나도 어찌할 수 없다.109)"라는 사람일 것이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이러한데도 물리치지 않는다면 정자ㆍ주자ㆍ율곡ㆍ우암의 도는 머지않아 행해지지 않게 될 것이다. 선비 된 자로서 그런 상황을 보고서도 감히 한 마디 말을 꺼내어 도를 지킬 계책으 로 삼지 못한다면 성현께서 가르쳐 주신 은혜를 저버리고 말 것이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진영이 무함하는데도 물리치지 않는다면 간옹(艮翁 전우(田愚))의 도는 머지않아 행해지지 않게 될 것이다. 그의 제자로서 그런 상황을 보고서도 감히 한마디 말을 꺼내 도를 지킬 계책으로 삼지 못한다면 이는 간옹께서 가르쳐 주신 은혜를 저버리고 말 것이다.당세의 사람들에게 죄를 얻은 것은 바로 사문의 무함을 참지 못한 때문인데, 고상한 제문 (祭文)을 들추어낸 것이라 말하고 마침내 창칼의 위협을 가하며 쫓아내기를 바라는데 이르 렀습니다.【〈심치대(沈致大)에게 답함〉】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내가 한쪽 사람들에게 죄를 얻은 것은 사문의 무함을 참지 못함 때문인데, 억지로 문고를 압류한 것이라 말하고 마침내 검국(檢局)110)에 고소하여 큰 재앙을 더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 옛적 선사와 오늘날 소자가 만난 재앙이 똑같구나.근세 유자(儒者)들의 의론은 사람을 무함할 때에는 성인의 문하를 어지럽히는 적도와 왕가(王家)에 재앙을 끼치는 역도로 몰고, 사람을 칭찬할 때에는 고금에 유일한 사람이며 공 자나 주자와 같은 사람이라고 추켜세우니, 나는 그러한 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긴다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진영의 무리들은 사람을 무함할 때에는 부모를 파멸시킨 적자(賊子)와 천고(千古)의 소인(小人)으로 몰고, 오진영을 칭찬할 때에는 식견과 문장이 선사보다 뛰어나며, 또 우옹(尤翁 송시열)과 동등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추켜세우니, 이것은 미워할 만한 나쁜 습관이다. 그러나 사실은 사의(私意)와 객기(客氣)에 빠져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고 이렇게 분별없이 도리에 어긋난 짓을 한 것이니, 미워할 것이 아니라 안타깝게 여겨야 할 것이다.지난번에 인보(仁父)111)와 이견(而見 오진영)이 나에게 출사하여 나라의 보존을 도모할 것을 권면하였는데, 이것은 공업(功業)을 중시하고 도의를 꾀하지 않는 것으로, 가릉(嘉陵)의 여 러 사람들112)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화((華)와 경(敬) 두 아이에게 부침〉】지난번 이견이 처음 왔을 때에 맹사간(孟士幹)의 뜻을 전하며 "아무개 어르신이 한번 일어 나시면 나라 안의 선비들이 모두 메아리처럼 호응할 것입니다. 또 서울에는 아무개와 아무 개가 의지할 만하고, 대궐 내에는 모궁(某宮)이 통할 만합니다." 하기에, 내가 "사군자가 큰 일을 하면서 어찌 모궁을 좇아 일을 하겠는가?" 하였다. 이견이 다시 와서 "아무개 사람이 근래에 이미 머리를 깎았으니, 이는 진실로 뜻밖입니다." 하기에, 내가 "어진 무리들이 헤아 려서 의지할 만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이와 같으니, 진실로 가소롭다." 하였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여기에서 오진영【이견(而見)은 그의 자이다.】이 행한 것과 선사께서 물리친 것을 보면 그의 사람됨이 어떠한가? 이런 토대가 있었기 때문에 훗날 스승의 함자를 거짓으로 서명하여 멀리 있는 사람에게 투척하여113) 선사로 하여금 목멜 생각을 품고서 변고를 대비하시게 한 변고를 불러오게 한 것이다. 이 일 이전에는 선사께서 때로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뜻을 보내셨는데, 이 일 이후에는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으며, 또 그의 도당인 권순명(權純命)이 기록한 〈치명록(治命錄)〉 중에 "오이견이 끝내 일을 만들까 우려하셨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도 그의 도당은 또다시 오진영은 선사의 의발을 전수받은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그를 변박하고 성토하는 것은 선사께서 사람을 알아보는 명철함을 손상시키는 것이 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는 선사께서 사람을 알아보는 명철함이 일찍부터 이미 "도의를 꾀하지 않는다."고 배척하신 것과 "끝내 일을 만들 것이다."고 우려하신 것에 있음을 모르는 것이다.주자의 경우도 성리(性理)의 학문이 다르다는 까닭으로 마침내 임율(林栗)의 탄핵 상소를 만 났고114), 또 육구연(陸九淵)의 문인들이 원수처럼 보는 것을 당했는데115), 섭씨(葉氏)가 또 한 일찍이 편지로 사람들과 논쟁하는 것을 꾸짖었으나 주자는 오히려 말을 다하지 못한 것 을 스스로 한스럽게 여겼다. 그러한즉, 모름지기 저 사람이 남과 논쟁하는 것이 공공의 도 의를 논쟁하는 것인지 사사로운 생각을 논쟁하는 것인지를 보아야 하는데, 논쟁하는 이유는 묻지 않고, 오직 논쟁하는 것만을 그르게 여길 뿐이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국가의 정토(征 討) 및 성인군자가 스스로 정도를 지키려다 다른 사람의 헐뜯음을 받거나 다른 사람의 모함 에 빠지는 것과 혹 누군가 정도를 해치는 것을 보고든 조정의 반열에 있으면 탄핵하고 초야 에 있으면 배척 하려다 도리어 화를 만나는 것, 이러한 것은 마치 밭의 짐승을 잡아서 마른 고기를 씹다가 독을 만난 형상116)과 같은 것이니,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비록 천지조화의 기운으로도 또한 음기가 지극히 성대해고 심지어 양기와 다투다 둘 다 패하여 함께 손상되 는 이치가 있게 됨을 면치 못한다. 기수(氣數)의 융성과 쇠퇴가 이와 같다면 인사(人事)의 옳고 그름도 또한 어찌 유독 그렇지 않겠는가. 설사 공부자(孔夫子)께서 지금의 시대에 사 신다 하더라도 아마 면치 못하실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과 논쟁한다는 혐의를 피하고자 한 다면 군부(君父)에게 예의가 없고 성인(聖人)의 도에 화를 끼치는 것을 보고서도 공격하여 성토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굳이 공격하여 성토함으로써 그와 승부를 겨룰 필요가 없다는 말을 주창하는 자가 있게 될 것이니, 그것이 국가와 세도(世道)에 해가 됨이 어찌 다른 사 람과 논쟁하는 것보다 백배나 크지 않겠는가. 아, 애통할 따름이다.【〈쟁유공사설(爭有公私 說)〉】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청컨대 우리 동문의 여러 사람들은 시험 삼아 생각해보라. 오진영이 인허를 받도록 분부한 것으로 무함하여 선사의 도의를 잃게 만든 것이 어찌 다만 성리의 학문이 다른 까닭 정도일 뿐이겠는가. 그가 고소한 재앙이 비록 혹독하다 하더라도 문인 된 입장에서 어찌 이것을 두려워하면서 말을 다해 변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논쟁하는 것이 공(公)인지 사(私)인지 묻지 않고, 오직 논쟁만을 그르게 여겨서야 될 뿐이겠는가. 또 시험 삼아 생각해보라. 스승은 임금이나 부모와 같지 않은가? 어찌하여 사람과 논쟁한다는 혐의를 피하고자 하여 부모와 스승에게 예의가 없고 세도(世道)에 재앙을 끼치는 것을 보고서도 공격하여 성토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 굳이 공격하여 성토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주창하는 것인가? 여러 사람들이 선사의 글을 익숙히 읽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인데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매우 괴이한 일이다. 이른바 "글은 글이고, 나는 나다."라는 것이 아니겠는가.어찌 차마 오랑캐로 변절한 진상(陳相)을 본받아 추성(鄒聖 맹자(孟子))이 배척한 사람117)이 되겠습니까. 또 어찌 차마 부모와 스승에게 예의가 없음을 보고서도 팔짱을 낀 채 좌시하면 서 감히 쫓아내지 못하여 민옹(閩翁 주자(朱子))이 싫어한 것118)을 답습할 수 있겠습니까. 【〈제전재선생문(祭全齋先生文)〉 아래도 같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우리의 동문 천오백 사람 중에 오랑캐로 변절한 진상과 같은 사람은 진실로 말할 것이 없거니와 부모와 스승에게 무례함을 보고서도 팔짱을 낀 채 좌시하는 자들도 또 세상에 넘쳐나니 탄식을 금할 수가 있겠는가. 내가 감히 옛적부터 편안하지 못한 것은 단지 선사의 말씀처럼 민옹이 싫어한 것을 행하게 될까 두려워서이다.지금 그의 글을 보니, 곧바로 소자(小子 제자의 겸칭)를 편벽되고 방탕한 말을 하는 음란하 고 사악한 도당이라고 배척하였고, 또 쫒아내야 한다고 의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비록 그 렇긴 하지만 만약 선생의 가르침이 소자로 말미암아 땅에 떨어지지 않게 된다면 비록 구황 (九荒)119)에 쫓겨나 죽을지언정 마음은 진실로 달고 즐겁게 여겨 스스로 후회하지 않을 것 입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지금 오진영의 도당과 김세기(金世基) 무리들의 글을 보니, 곧바로 이 몸이 스승의 명을 무함하고 미혹시켜 남에게 억지로 죄를 씌우는 간흉(奸凶)이며, 상도(常道)를 어지럽히고 예의가 없는 패악한 무리라고 배척하였다. 또한 이미 검사국에 고소당하는 재앙까지 만나 거의 죽게 되었다가 겨우 살아났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만약 선사의 도가 소자로 말미암아 떨어지지 않게 된다면 비록 죽더라도 후회가 없을 것이니, 또한 선사께서 당시에 전옹(全翁 임헌회)에게 도리를 다한 마음과 같을 뿐이다.오늘날 선비들이 대부분 묘적(墓籍)의 등록120)을 인허 받는 것을 명예와 절개를 손상시키는 것으로 여겨 기꺼이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자기의 명예와 절개를 위해 부조(父祖)의 유해 (遺骸)를 돌아보지 않는 것이니, 인정과 천리에서 마땅히 나올 바가 아닌 듯합니다. 그들이 처음에는 우리 산 사람을 능멸해 죽일 것이고, 그래도 따르지 않으면 끝내는 반드시 묘를 파서 옮길 것입니다. 일단 묘가 파괴된다면 그 재앙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 전(大典)》에 "시체를 더럽히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과 죄가 같다."고 하였으니, 자손이 묘 적을 등록하지 않아 시체의 혼백으로 하여금 헤아릴 수 없는 변고를 당하게 한다면 이는 부 조가 죽음을 당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것을 어찌 차마 할 수 있겠습니까. "통분을 참 고 원한을 머금은 채 절박하여 마지못해 산다.121)"는 남긴 가르침을 마지못해 사용한 것입 니다.【〈송회연(宋晦淵)에게 답함〉】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진영이 매번 선사께서 묘적의 등록을 인허 받으신 것을 문고를 인허 받도록 한 가르침의 증거로 삼으니, 이것이 어찌 온당한 것이겠는가. 묘적을 등록하지 않는 재앙은 부조가 죽임을 당하는 것과 같은 지경에 이르게 됨은 당연한 것이지만, 문고는 간행하지 않고 필사하여 보관해두면 아무런 일이 없을 따름이니, 어찌 이른바 "부조가 죽임을 당하는 것과 같다."는 재앙이 있겠는가. 그가 억지로 끌어다 자신의 죄를 숨기는 것이 진실로 그의 정상인데, 사람 중에 그의 말에 현혹되어 분별할 줄 모르는 자들이 있으니 어찌 매우 가소롭지 않은가.질문하신 "제가 죽은 뒤에 누가 도를 전수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것은, 저 스스로도 소견이 없는데, 다른 것이야 다시 어찌 물을 것이 있겠습니까. 정문(程門)의 제자들에 대해 서 회옹(晦翁 주희(朱熹))은 그들이 스승을 배반하고 이단에 빠졌다고 말하였으니 도를 전수 하는 어려움이 심하다 하겠습니다. 병암(炳庵)122)이 병이 없었을 때에 저는 그의 학문이 깊 고 식견이 바르며, 지조가 굳고 덕이 두터워 위로 전옹(全翁 임헌회)의 실마리를 이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 벗이 불행하게도 갑자기 저세상으로 떠났습니다. 나머지 제자 들 중에는 아직 기대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 구구한 제가 선숙(禪宿)123)의 눈물을 감당할 수 없을 따름입니다.【〈노인오(盧仁吾)에게 답함〉】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여기에서 사람의 죽음을 애도함에 얼마나 말이 비통하고 슬픈가. 도를 전할 사람이 없음을 근심함에 얼마나 말이 심각하고 절실한가. 바로 공자가 안연(顔淵)을 잃고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124)"와 "아,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였다.125)"라는 탄식을 한 것과 천고토록 똑같은 심정일 것이다. 그런데 오진영은 어찌하여 차마 진본(晉本)126)에서 이것을 삭제해 없애버린 것인가. 아, 불인(不仁)함이 심하다. 일찍이 삼천(三千)의 제자들이 애공문(哀公問)과 안연사(顔淵死) 등의 장을 《노론(魯論)》127)에서 삭제해 없앴다고 하던데, 이런 이치가 있어서인가? 또한 큰 변고라 이를 만하다.선사께서 신장(愼狀)128)을 삭제하도록 명하신 뜻은 글이 사실과 어긋났다고 여겨서가 아니 라 단지 본가(本家)에서 글과 편지를 받고 답장이 없자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서 그 런 것인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네. 존선사(尊先師) 서(徐) 어른129)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는 우리 외가(外家)가 신원(伸寃)된 뒤 첫 유현(儒賢)의 글이기에 후대에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어찌 감히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만 외가(外家)가 가난이 심하여 예 물 없이 편지만으로 감사의 뜻을 나타내는 것을 어렵게 여겼기에 이 때문에 오래도록 답 장 을 보내지 못했던 것이네. 선사께서 세상에 살아 계셔서 이런 곡절을 아뢰었다면 어찌 허락 하지 않았겠는가. 이 때문에 눈물이 흐른다네."하셨네. 내가 그 분의 효심을 중시하여 속편 (續編)에 넣기로 논의하였는데, 서 어른께서 나로 하여금 원편(原編)에 넣을 것을 다시 생각 해보도록 하신 것이네.【〈임윤만(答任潤萬)에게 답함〉 아래도 같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신장은 전옹(全翁 임헌회)께서 임종하실 때에 삭제토록 명하신 것인데, 선사께서 《집촉록(執燭錄)》130)에 실어 놓으신 것은 오히려 부득이한 사정 때문이었고, 논의하여 속편(續編)에 넣으셨다가 뒤에 또 결국 원편(原編)에 넣으셨다. 그런데 음성의 오진영은 도리어 선사께서 손수 교정하신 신도비(神道碑)131)를 바꾸어 묘갈(墓碣)로 고쳐 일컬으면서 이는 국전(國典)에 있다고 하였지만 끝내 국전에서 보지 못했다. 여기에서 타고난 천성이 괴이하고, 일 처리가 망령된 것이 원래 보통 사람의 마음에서 나올 바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국전을 빌려 핑계를 대며 사람을 압도할 구실로 삼은 악한 마음을 볼 수 있다.유상준(柳相俊) 군이 영형(令兄) 동만(動萬)132)과 사사로이 상의하여 결정하고 마침내 초고 (草稿)를 사사로이 판각하여 덕이 높은 어른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게 했으니, 이것이 무슨 사체(事軆)인가? 비록 전에 정한 간행소의 공임(公任)과 장재(掌財)를 그대로 따랐다고 하지 만 일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몰래 간행한 것으로 귀결되지 않을 수 없네. 서 어른께서 그 소식을 듣고 전담 심부름꾼을 통해 편지를 보내어 중지하도록 하였으나 따르지 않자 어 쩔 수 없이 통문을 발송하여 성토한 것이었네.【편지를 보내 중지시켰으나, 따르지 않은 뒤 에야 성토하였으니, 또한 인의(仁義)가 함께 행해졌음을 볼 수 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선사께서는 전재(全齋) 문하의 여러 공들이 선사의 유고를 사사로이 간행하려 했던 유경당(柳敬堂 유상준)을 성토한 일에 대해 마지못해 한 것이라 하셨고, 다시 "편지를 보내 중지시켰으나, 따르지 않은 뒤에야 성토하였으니 인의(仁義)가 함께 행해졌음을 볼 수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이와 같다. 오진영이 선사의 절개를 무함한 경우는 선사의 유고를 사사로이 간행하는 것과 비교하면 그 죄가 백배가 될 뿐만이 아닌데, 또한 편지를 보내 고치도록 권면하자, 사양하고 따르지 않은 뒤에야 성토하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한쪽의 의론은 인의를 함께 행하였다고 칭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과중(過重)함이 너무 심하다고 말하기까지 하는 것인가? 매우 괴이하다.두 공으로서도 형편없는 사람이면 선사께서 뭇 사람 중에서 두 공을 가려 뽑아 그들을 고제 (高第)의 제자로 세운 것이 어찌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잘못을 하신 것이 되지 않겠는가.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진영의 도당들이 선사의 이 편지를 인용하여 오진영을 형편없는 사람으로 배척하는 것은 선사를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 사람으로 귀결시키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유사함을 모르는 것이다. 오진영은 이미 스스로 선사를 무함하고 문고를 고쳤으며, 사림에 화를 끼치고 선사의 손자를 압송하였으며, 누구의 집에나 비추는 해133)를 떠받드는 사람이 되었으니, 어찌 사람이 그를 배척하기를 기다린 뒤에야 형편없는 사람이 되겠는가. 설사 그들의 말처럼 선사께서 뭇 사람 중에서 가려 뽑았다 하더라도 제요(帝堯)는 숭곤(崇鯀)을 가려 뽑았고134), 주공(周公)은 관(管)ㆍ채(蔡)를 가려 뽑았지만135) 모두 사람을 알아보지 것에 귀결되지 않았는데, 하물며 선사께서 일찍이 도의를 헤아리지 않는다고 배척하신 적이 있고, 다시 말년에 그가 끝내 일을 만들까 우려하신 적이 있음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선배들은 다른 사람의 악(惡)을 말하고 다른 사람의 선(善)을 말하지 않는 것을 천지가 만물 을 생장시키는 마음과 서로 같지 않다고 여겼네. 우리들은 다른 사람을 구제할 만한 재물이 없으니, 우선 다른 사람의 선을 즐겨 말하고 다른 사람의 악을 드날리지 않는 것이 만물을 생장 시키는 천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도와주는 것이네. 지금 우리들은 다시는 더불어 성 리(性理)에 대해 말하지 말고, 망령되고 잘못된 심술과 언행은 털끝만큼도 입과 붓끝에 올려 서는 안 될 것이니, 이것이 심제(心弟)가 성사(性師)를 배우는 도이네. 나는 여기에서 이견 (而見) 그대가 식견이 있는지 식견이 없는지, 덕이 있는지 덕이 없는 지를 증험하려고 하니, 이견이여, 이견이여, 공경히 듣고 삼가 지키게나. 【나는 본성이 어리석고 어두워서 그대의 마음에 합당할 만한 것이 있지 않지만 이 한 마디 말은 이견 그대가 평생 스승으로 삼아도 무방할 것이네. 분수에 넘는 말을 했으니, 나의 죄를 잘 알고 있네. ○ 〈오진영(吳震泳)에게 보냄〉 아래도 같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이것은 선사께서 오진영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편지 끝과 소주(小註)의 말로 보건대 그를 염려하심이 깊고, 그를 경계하심이 절실하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기꺼이 살펴 들어 공경히 따르지 않고 끝내 훗날 무한한 변괴를 만들어낸 것인가? 또 진인(晉印)136) 중에 이견(而見)을 두 번 부른 것과 소주 여덟 글자를 삭제한 것에서도 또한 그가 기쁘게 듣지 않았던 마음을 볼 수 있다.내 스스로 정력을 헤아려보건대 세상에 오래있을 사람이 아니네. 평생 이룬 것들이 전부 변 변찮아서 일컬을 만한 것이 있지 않고, 오직 진심으로 소중히 여긴 것이 '성(性)' 한 글자에 있기에 감히 뭇사람을 따라 깎아내리지 않았다네. 이로 인해 당시 유림(儒林)에 죄를 얻음이 바로 수미산(須彌山)처럼 높았지만 또한 끝내 원망과 후회가 없음은 서로 따르는 여러 군들 이 들어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네. 내 마음을 전적으로 그대 이견에게 부탁하니, 힘 을 다해 주지(主持)하고, 매우 공경하고 삼가서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한다면 노부의 눈이 감길 수 있을 것이네. 기미년(1919) 3월 상순(上旬) 79세에 계화도에 은둔하며 지내는 병든 늙은이가 공경히 말하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진영은 이 편지 중에 이견에게 전적으로 의탁한다는 말씀이 있고, 또 문고에서 편지의 년월을 갖추어 쓴 것은 특별한 예에서 나오는 일이다 하여 의발을 전수한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이 또한 그를 경계한 말이고, 그를 인정한 말은 아니다. 또한 선사의 함자를 위조해 서명하여 선사로 하여금 목을 맬 생각을 하시게 했던 사건 전이었고, 그 뒤로 삼사 년의 오랜 세월에 이르도록 다시는 이 편지처럼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글이 없었으며, 게다가 이기환(李起煥)에게 보낸 편지에 "아무개가 일의 공적으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말씀하신 것과 권순명(權純命)의 〈치명록(治命錄)〉에 "이견이 끝내 일을 만들까 우려된다."는 말씀이 있으니, 이 편지를 근거로 삼을 수 없음이 분명하다. 【권순명은 그의 당인데도 오히려 이러한 기록을 두었으니, 더욱 분명하게 믿을 수 있다. 만약 이런 기록이 이쪽에서 나왔다면 그가 또 선사의 명을 무함하고 현혹했다고 말하지 않을 줄 어찌 알겠는가.】집안사람 중에 어버이를 죽인 사람이 있다면 어찌 다시 집안사람으로 그를 대우할 수 있겠 는가.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 또한 감히 말한다. "동문 중에 인허를 내라고 분부하셨다는 것으로 선사를 무함하여 대의(大義)를 더럽힌 사람이 있다면 어찌 다시 동문으로 그를 대우할 수 있겠는가."내가 신(申)과 절교한 것으로 신의 무리에게 무함을 받은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김의 형제는 귀가 막히고 정신이 혼미한 사람들이 아니면서 어찌하여 듣지 못한 것인가?【〈최병 심(崔秉心)에게 답함〉】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내가 이미 연서(聯書)로 김용승(金容承)과 절교하고, 또 그의 〈고현천문(告玄阡文)〉137)을 변론하였다. 또 박진호(朴震鎬)에게 말하여 그 조부(祖父)의 글을 받지 말게 하여 박진호의 의심과 노여움을 받고 김용승의 무리인 박인규(朴仁圭)에게 무함을 당하는데 이르렀다. 이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오진영의 무리는 도리어 나를 김용승과 일당이 되었다고 단죄하고, 연서로 절교한 것은 거짓이라고 말하니, 매우 가소롭다. 이것은 진실로 그의 무리들이 비록 사실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마치 듣지 못한 것처럼 하였으니, 오직 사람을 밀쳐내는 일생의 장기(長技)이다.김평묵(金平默)이 나의 제사문(祭師文)을 본 것이 병자년(1876, 고종13) 계동(季冬 12월)이 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문리(文理)에 통달하지 못해 그것이 신기(新奇)한 것을 만들어 내고 어려운 일을 구차하게 해내는 것인 줄 몰랐다가 정축년(1877)에 자신의 뇌문(誄文)이 물리 침을 당한 뒤에야 문리에 비로소 통달하여 그것이 세 정승과 여섯 현인을 배척한 것임을 활 연하게 깨달았던 것인가요? 그렇다면 나의 크나큰 죄는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를 공격한 때에 있지 않고, 김평묵의 제문을 받지 않은 날에 있습니다.【〈아무개에게 보내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내가 전(傳)ㆍ표(表)의 일로 오진영과 서로 관련된 것이 임술년(1922) 겨울이었다. 내가 만약 선사의 명을 현혹하려다 그의 다스림과 바로잡음을 받았다면 이 당시에 어찌하여 한 마디 하문(何問 힐문(詰問))은 없고, 반대로 앞뒤의 논설이 다르다 하여 스스로 송구스럽다는 편지가 있고, 이어 갑자년(1924) 가을에 그의 선사에 대한 무함을 성토한 뒤에야 비로소 명을 현혹시켰음을 깨닫고 그것을 단죄한 것인가? 그렇다면 나의 죄는 명을 현혹한 때에 있지 않고, 오진영을 성토한 날에 있는 것이다. 병자년(1936) 여름 김세기(金世基)의 흉문(凶文)에 이르러서는 명을 현혹한 것이 또 선사를 무함한 것으로 바뀌었으니, 아, 선사를 무함하여 다른 사람의 성토를 받은 사람이 도리어 자신을 성토한 자가 선사를 무함한 것이라고 말하니, 이는 도둑질해 놓았다가 주인이 찾아서 가지고 감을 당한 도둑이 도리어 주인이 도둑질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오늘날 선비들이 저 일본에게 청원하여 교궁(校宮 향교(鄕校))를 보존하고 오히려 스스로 성 현을 높인 공으로 자처하니, 매우 부끄러움이 없다고 이를 만하다.【〈화도만록(華島漫錄)〉】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교궁을 보존하는 것과 자기의 문고를 간행하는 것 중에 그 경중(輕重)과 대소(大小)가 과연 어떠한가? 선사께서 저 일본에게 청원하여 교궁을 보존하는 것을 오히려 매우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하물며 저 일본에게 청원하여 자기의 원고를 간행하여 매우 부끄러움이 없는 행위를 무릅쓰려고 하시겠는가. 흉악하고 흉악하도다. 무함하는 자의 말이여.주자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만약 고상하고 신묘한 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성인이 그 것을 숨긴다면 이는 성인이 대단히 형편없는 사람이니, 불충(不忠)과 불신(不信)을 성인이 제일 먼저 범한 것이다." 하였네.【〈정세구(鄭世求)에게 답함〉 아래도 같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주자의 이 말은 성인은 숨김이 없다는 것을 심하게 말한 것이다. 오진영은 자신을 성토하는 글 중에 선사께서 혼자 있을 때 명한 일이 없음을 심하게 말한 "만약 일을 비밀리에 해야 해서 몰래 한 사람에게 부탁하셨다고 한다면 이는 심술(心術)과 견식(見識)이 모두 매우 우매한 것이다."라는 것에 대해서는 선사를 논박(論迫)하는 패악한 말이라 단죄하였고, 선사께서 인허를 받으라는 분부가 없었음을 심하게 말한 "선사께서 만약 그렇게 하셨다면 이는 두 마음을 품고 불충(不忠)을 반복하신 것이다."라는 것에 대해서는 위로 감히 말하지 못하는 부분을 언급한 것이라 단죄하였다. 그렇다면 그는 또한 주자의 이 말에 대해 논박하는 패악한 말이 위로 성인에게 미쳤다고 할 것인가?한 가문을 일망타진하는 것은 아주 악랄한 소인이 아니라면 반드시 하지 않을 것이네. 오늘날과 후세 사람들이 이견을 소인이라 이른다면 그대는 의심할 것이 없는 군자이네. 그 렇지 않다면 그대가 어느 곳으로 가서 발을 붙이겠는가?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만약 선사께서 세상에 살아계셔서 오진영이 59명을 전주(全州) 검사국(檢事局)에 고소하고, 사손(嗣孫)을 진주서(晉州署)에 압송해 가둔 것을 눈으로 직접 보셨다면 반드시 이 말로 정세영(鄭世永)을 책망하지 않으셨을 것이다.융흥(隆興) 초에 화의(和議)138)가 결정된 뒤에 한무구(韓無咎 한원길(韓元吉))ㆍ이덕원(李德 遠)139)이 모두 지킬 바를 잃었는데, 오직 왕가수(王嘉叟) 등 여러 사람만이 오히려 정론(正 論)을 견지하였으니140), 선생이 위원리(魏元履)141)에게 보낸 편지에 보인다.【〈주자대전표의 (朱子大全標疑)〉】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한무구ㆍ이덕원은 모두 당시 명망을 지닌 사람임에도 또한 절개를 잃게 됨을 면치 못하고, 유독 왕가수 한 사람만이 있었으니, 나 택술은 오늘날 영남과 호남의 의론에서 진실로 느끼는 바가 있다. 아, 주자가 아니면 어느 누가 홀로 정론을 지키는 것이 귀중한 일인 줄 알겠는가.나라가 이미 망하고 임금이 이미 폐해졌으니, 신하가 장례를 치르면서 어찌 길흉을 논하겠 는가. 자손과 문하생들은 단지 다툼이 없는 땅을 구하여 매장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효도 이며 도의(道義)이다.【다른 사람과 묏자리로 송사를 벌여 저 일본에게 나아가 판결하는 것이 어찌 어버이와 스승에게 욕을 끼치는 죄가 아니겠는가. ○ 〈경구에 부치고 아울러 제생에게 보이다[寄敬九幷示諸生]〉】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선사께서는 이미 묏자리로 송사를 벌여 저 일본에게 나아가 판결하는 것을 어버이와 스승에게 욕을 끼치는 죄로 여기셨으니, 어찌 문고를 간행하기 위해 저 일본에게 나아가 청원하는 것을 치욕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인허를 낼 생각을 하시고 인허를 내는 분부를 하셨겠는가. 이것이 일찍이 문고의 간행을 청원하는 것은 결단코 스스로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는 유서(遺書)를 남기신 이유이다. 學問之弊有兩端, 一是苟偸, 一是熱閙. 熱閙者, 胸中不安貼, 凡事要自主張, 不問前言往行如 何, 一任自己所見, 胡叫妄作而已. 苟偸者, 又却只是謹身惜名, 目見邪說詖行剝蝕正道, 而不 敢開口指陳, 其行處亦多可觀, 終是苟簡底意思在. 【〈與鳳峀金丈〉】澤述謹按: 以近日吳震泳事論之, 胡叫妄作之不已, 而至於誣師節以認稿, 改師稿以己見, 熱閙之弊一至於此. 若其目見誣師悖行剝蝕正道, 而不敢開口指陳者, 不閑師道之罪與害師道之罪, 相去不遠, 苟偸之弊, 一至於此. 先師之言此兩弊, 其慮遠哉.專察利害之弊, 至於遺君後親倍師賣友.【〈答峿堂李丈〉 下同.】澤述謹按: 震泳不勝事功之心名利之念, 其弊至於忘君戴讐陷師禍友, 可不畏哉?凡古來異學之士, 由後人視之, 固是門外, 自當時觀之, 猶在室中. 且如墨氏宗堯舜, 是墨氏在 孔孟室中. 陸氏尊鄒魯, 是陸氏在程朱室中. 惟其如是, 故世人親聞儒者之辨闢, 而猶認爲正學. 聖賢目見世人之陷溺, 而攻之如血讐. 此在當時, 不知孰爲得失, 而後世知道之士, 出而正之, 然後始有中外邪正之分, 而不可以復合矣.澤述謹按: 人多譏澤述辨陰震者, 曰: "彼亦尊師, 胡爲乎室中之鬪?" 爲此言者, 視先師此訓, 謂如何哉?凡吾儒之辨異端者, 只認爲道理當然而爲之, 不可較吾說之行否它人之從違彼勢之强弱, 而爲之 前却也. 孟朱之時, 彼固未嘗畏之. 雖孟朱亦未敢便道擧天下無一人不從吾說者矣.澤述謹按: 人又有譏澤述辨陰震者, 曰: "彼衆子寡, 彼强子弱, 子雖辨之, 子說其能行諸?" 爲此言者, 視先師此訓, 謂何如哉?彼之間言長語誣辭惡聲, 愈辨而愈甚, 徒自憤懣耳, 不若付之忘言. 久則是非自明, 縱人未明得, 亦須有天在, 正不當煩惱我心君也. 此比年所受用.【〈答安渾齋〉】澤述謹按: 澤述於震承及其黨之誣辭惡聲, 亦曾受用先師此訓而得力矣. 但其事關先師者, 則不容終已耳.吾丈所謂"由前則以爲講論薄過而忍之, 由後則爲師門大變而力討之, 非但田某之不心服, 亦恐 傍觀者, 以爲出於私心之作用, 而非出於義理之當然"者, 可謂刺著他痛處.澤述謹按: 震泳之於金容承討己誣師之後, 曰: "此人年前呼漢農老." 又曰: "此人心中無先師久矣." 漢農老無先師, 何等大罪? 而由前則不惟以爲薄過而忍之. 且多年敬信愛護, 至定校正師稿有司望帖而聘之. 至於討己之後, 始乃發其罪而討之, 豈非私心作用哉? 雖然, 承則終於倍師, 非渠之所當不心服. 但震之心術則然耳.金之當初爲此怪論也, 其心豈復有忌憚? 而今乃爲此遮藏之計. 此則某苦死排闢之說, 不可謂全 無其功也.澤述謹按: 震泳之當初"料量爲之""不必深拘""不言之敎""天地生物, 聖人立極""不諱公言"之說而誣師也, 其心豈復有忌憚? 後乃以"語欠區別""命辭疏忽"等說爲遮藏之計. 此則湖南之士苦死排闢之說, 不可謂全無其功.大抵先集是彼之手分現化, 絶非先先生所以處於同門與門人之意. 吾恐先先生之目, 將不瞑於地 下, 甚可痛哉. 【〈答趙泰判〉】澤述謹按: 先師於肅齋, 以其爲先師之同門, 猶以文集之被人手分現化, 深致痛恨, 而至謂先生之目, 不暝於地下. 胡乃今之君子, 於親師文集之被人無難改削也, 恬視而曾無痛恨之意也? 絶可怪也.寧可無諡號, 諡狀決不可使其人作也. 【〈與任景孺〉 下同.】澤述謹按: 年前, 澤述聞田鎰孝使震泳作先師行狀之說, 亦曰: "寧可無行狀, 行狀決不可使誣師人作也.事係師門, 一息未絶之前, 豈容放過?澤述謹按: 澤述於辨師誣正稿亂, 其心亦如此而已. 或以事在年久, 迄可已矣. 規余者, 視先師此言, 謂如何哉?嘗見明儒高景逸之言, 曰: "氣節而不學問者有之, 未有學問而不氣節者. 若學問而不氣節, 這 一種人, 爲世敎之害不淺." 此言美矣, 然而未盡. 蓋若不氣節, 原不足謂之學問, 其曰"學問", 只是外面聲華而已.【〈與王司諫〉】澤述謹按: 使先師誠有認意認敎, 如陰震之說, 是所謂"不氣節, 原不足謂之學問"者. 嗚呼! 豈其然乎? 或者護法陰震之不已, 至有謂"雖有認敎, 不害爲先師"者, 又至有謂"有認敎, 然後爲先師, 若拘牽於區區之小諒細節, 而不思道之傳後, 不足謂大君子"者. 噫! 天理之晦, 人心之邪, 乃至於此乎?今於彼人罔極之誣, 反而求之吾心, 如見些子怨恨恐㥘底苗脈, 卽此是窒碍, 何等苦腦? 豈所謂 "無入而不自得"? 豈所謂"坦蕩蕩"? 竊自謂吾人正當於難處險處, 默默加體道之功, 不可只於 文字上做家計也.【〈答李友明〉】澤述謹按: 澤述於陰震罔極之誣, 反求吾心, 雖自謂無怨恨恐㥘, 然要之至於"無入而不自得""坦蕩蕩", 然後乃已, 先師正當於難險處加功之訓, 如承今日面命矣.一番人以某之言士子喪中倡義似過中云者, 指爲排節義而詬罵之.【〈答金光國〉】澤述謹按: 震泳以澤述論渠所作〈鄭節士傳〉後論中混華夷爲說者, 指爲排節義而詬罵之. 先師是直論倡義之人, 以其只論居喪者之中否, 而不論其事之是非. 罵者之言, 猶爲無當. 況澤述但論其文議論之有害義, 而初不論節士之事者, 則罵者之言, 豈非尤無當乎? 嗚呼! 澤述從先師後而得排節義之目, 於分榮矣, 只見彼用心之險也.當此斯文分裂之日, 朋友雖有小疵, 苟非大故, 亦可以含垢藏疾, 以全交道, 此實朱、宋兩先生 之意也.澤述謹按: 人有引先師此書, 謂吳震泳金容承不當絶. 噫! 誣師倍師非大故而是小疵乎? 豈不觀先師絶鄭申李三人之事乎? 此所謂"小疵", 指申梨山之知嘉金無狀而特不能顯然告絶而言耳.梨每以斥逐祭文, 爲激成惡心, 挑發禍機. 某竊謂此事, 只論是與不是, 不得說激觸, 此似是利 害上言論也.【〈答鄭命新〉 下同.】澤述謹按: 吾門之謂討絶吳金爲激成惡心挑發禍機者, 視此訓, 謂何如也?特以梨山有調停之論, 使李讒益肆, 金勢益盛, 所以成今日之禍. 今乃不以自咎, 反歸罪於直道 而行者, 不知此是何等見識議論也.澤述謹按: 吾門之變, 特以中立者有調停之論, 故使吳誣益肆, 金倍益悖, 以成大禍者, 亦有如先師此說也.向有一朋友, 見謂"君之欲退其文, 可謂疏矣.彼中氣勢, 何可當也?" 然則吾人臨事, 不當視理 之是非, 以爲進退, 只看人之强弱, 以爲前却矣, 此爲何等學問?澤述謹按: 澤述始討陰震也, 其後之累辨不已也, 人固有以彼勢不可當勸止者矣. 然吾只以當視理是非爲進退, 不看人强弱爲前却, 亦如先師之心已矣. 果不免訴禍於前, 誣辱於後. 向之勸止者 自謂有先見之明. 然我何有一毫怨悔於其間哉?凡橫逆之來, 除却關係世敎與道術者外, 且當容之.【〈答林奭榮〉】澤述謹按: 澤述於震邊橫逆之來也, 除却關係誣師亂稿者外, 只得一切受之, 而不辨理矣.子敬謂明道不絶王安石, 伊川不校蘇東坡. 鄙謂明道德量宏大, 然使王氏譏侮父師, 則其待之必 別矣. 且彼金柳門人以東坡自處. 則某亦不與之校矣. 今彼自謂孔朱正傳, 而性理議論, 出處事 行, 咸乖聖訓. 則爲儒者者, 安得無言?【〈與崔鍾和〉】澤述謹按: 湖人之與陰震絶者, 以其誣陷先師故爾. 且彼若非平日高弟, 而又不以傳鉢自處, 則湖人之辨, 亦不必如此之力矣. 惟其自處以傳鉢之高弟而誣師, 則人不能不信. 故辨之不得不力也.一正一偏, 一公一私, 必不免於有爭. 傍觀者, 須精察於所以是非之方, 又須細看彼此言辭之溫 暴氣像之平險, 而後以定吾向背之理, 施吾扶抑之力可也. 不然而或兩是之, 或幷非之, 先賢 所譏"洛也是, 蜀也是, 元祐也非, 熙豊也非"之說也. 是豈天命之理與聖人之法乎?【〈答林章 佑〉】澤述謹按: 今之爲湖亦尊師, 嶺亦尊師, 嶺亦誤事, 湖亦誤事之說者, 胡不察所以是非之方, 又看言辭溫暴 氣像平險, 而向背扶抑, 如先師之說也? 【鄭道鉉對金弘梓言: "議論則湖是." 田璣鋠對余言: "嶺湖之戰, 湖勝." 余曰: "湖受嶺困, 至遭訴禍, 何謂湖勝?" 田曰: "非謂戰勝之勝, 謂理勝之勝." 余曰: "何謂?" 田曰: "湖之文字主論事, 嶺之文字主打人, 是固公論也. 故謂之勝." 鄭與田, 俱居嶺而右嶺者, 其言如此. 則非不知所以是非之方及言辭溫暴氣像平險之分, 而終不能知所擇於向背扶抑之間, 是可歎也.】但就奠章, 條而晳之, 以白其師心之無它可也. 終無奈有心之於無心, 有眚怙之別. 於是舍其 所以分裂之故, 顧而之它, 裝飾其疑, 似掇拾其流傳, 以爲汙衊賤身疑眩後進之計. 可見用心 之苟且勞矣.【〈答關西諸生〉】澤述謹按: 使陰震之說, 苟無誣師之實, 爲其徒者, 但就震之本文, 條晳其不爲誣師, 可也. 乃顧而之他, 裝飾其疑, 似抑勒其無據, 以爲汙衊湖人疑眩一世之計. 可見其用心之苟勞, 而尤見其誣師之罪出於有心之怙也.使華西之於栗翁, 眞有心悅誠服之意. 則其高第弟子, 豈敢有此語? 此理外之事, 似難謂其無些 子苗脈矣. 使華西之於朱子, 眞有篤信不貳之實. 則其高第弟子, 豈敢有此語? 此理外之事, 似 難謂其無些子苗脈矣.【〈華門二子論〉】澤述謹按: 今與後人論震泳事者, 亦豈不曰"使艮齋眞無認意認敎, 則其高弟, 豈敢有此語? 此理外之事, 似難謂其無些子苗脈矣." 此余所以深懼而不得不辨者. 或者指余爲過慮, 何其無識慮也?尹喆圭之詐傳勅令而誘逐賓師也, 朝廷雖不勘核, 章甫却當聲討.【〈瑣墨〉 下同.】澤述謹按: 退溪所謂"通文上疏, 非儒者之事", 以儒者干預朝政而言, 非謂斯文中有事而不相告也. 今有引此以非湖南之通文以討震者, 已失退溪本旨矣. 今又以先師說觀之, 章甫之討尹喆圭, 因朝廷不勘其罪而行之, 則是不可謂非干預朝政者而亦許之, 尤可以見謂通文討震非儒者事者之無識也.儒者著書數十卷, 不可用曲筆, 寃枉古今一人, 可謂接承天地好生之心, 後世應得賢子孫. 昔人 言: "今之論人, 有幷跡而誣之, 那能論心? 此天譴鬼責所係, 愼之."澤述謹按: 陰震及其徒黨誣我以辨師誣出於文字之修嫌. 我之於渠, 使實有可嫌之跡, 避嫌而不辨誣, 非爲人弟子之職, 固不可以此而誣其心, 而況初無可嫌之跡, 乃構捏抑勒, 强成疑似之跡者乎? 渠何不懼? 然却顧於"幷跡誣之, 那能論心? 天譴鬼責所係"之訓也乎.歷數古今, 萬般弊病, 其源無一不出於吾儒之未晰乎聞達之辨, 不審乎誠僞之幾, 至於事求可功 求成, 而不以第一等十分道理自爲而爲人也.【〈告先師墓文〉】澤述謹按: 事求可功求成, 已足以致萬般弊病, 而況先師嘗斥陰震以事功爲重而不計道義者, 非但事求可功求成而已, 則宜其釀成後來"僞署師銜, 投諸遠人""誣師認敎""改亂師稿""乞錢日雀""網打同門""押囚師孫"萬般罪惡也.某亦有血肉之身, 豈無自私之理? 只爲見得尊師衛道, 不容不爾, 故目見仇謗溢世, 而不敢變素 守以徇之, 其情良亦戚矣. 苟得人地如執事者爲之, 則斯文有扶植之助, 而自身無拳踢之加. 乃 執事自占便宜, 而無任事之心, 使此孤賤陋劣者代之, 是豈君子公正之心乎? 執事不惟不自任, 乃或反助彼勢, 無乃尤不可乎?【〈與申仰汝〉 下同.】澤述謹按: 今於陰震之誣亂, 如得同門老成有人地者, 任辨討之事, 則可以戢彼邊之恣肆, 而明先師之道義. 胡乃皆自占便宜, 反助彼勢, 使此人微言輕如澤述者任之, 以致仇謗溢世, 禍患加身也? 雖以尊師衛道之不容不爾而然, 然其情良亦戚矣. 嗚呼! 以伊昔先師之人地, 猶有此歎, 況於如今小子之卑微乎?一番人又以某祭文有陰陽心迹之語, 謂之慢神, 以此爲大罪. 然陰陽離合心跡矛盾之說, 農翁嘗 以擬之於文谷, 以明其必不然也. 用之於父者, 謂不可施於師, 某不識其何說.澤述謹按: 陰震以湖南通文中"先師若爾, 則是懷二心反覆不忠之語, 所以深明先師必無認敎"者, 謂上及不敢言之地, 以此爲大罪. 何不讀先師此訓, 而自服勒人之罪乎? 蓋其心術與先師所謂"一番人"者, 一串貫來, 殆若一氣而傳, 同胎而生也.惟是未嘗爲學, 便都無事, 今旣從士友之後, 與聞其說, 便如此計較不得, 才涉計較回互, 便是 靠負聖賢之敎也. 且孟子所以與人辨爭, 只要人知聖人之爲是, 異端之說爲非爾.澤述謹按: 今之辨師誣也, 若恐其致禍, 才涉計較回互, 便是靠負先師之敎也. 其所以爲辨, 只要人知先師之無是, 而彼說之爲誣爾.愚竊覵執事之意, 似是懲創於懷尼之爭湖洛之辨. 故凡於人物邪正之間講論同異之際, 一切以和 同爲主, 殊不知分別邪正, 剖判同異, 令不相混淆, 乃是自然之和, 不然只是私意人欲而已矣.澤述謹按: 近日之勸澤述及田鎰中與吳震泳平和者, 豈不竦然於先師私意人欲之訓也乎?執事亦非不知彼文之可惡, 而惟欲以彼自不是處之. 此若只關己事則可, 今乃父師受侮, 而只以 此一句冷語了之.澤述謹按: 震泳之誣, 只關己事者, 則固以彼自不是處之已矣, 其關於先師者, 則不敢以一句冷語了之, 以戾於先師心法也.執事兄弟之處之也, 在自家則怒之, 在先師則安之.澤述謹按: 震泳於容承年前, 呼漢農老, 心中久無先師也, 事在先賢先師則安之, 及其討己之誣師也, 事在自家則怒之, 始發其罪, 又使人拳踢於先師靈前. 先師此言, 若先見震之心述而豫言之者矣.昔之亂朱子者, 在朱門之外, 今之亂朱子者, 在朱門之內.澤述謹按: 昔之誣師者, 在師門之外, 今之誣師者, 在師門之內. 在師門之內, 故其說有未易辨者, 其說有未易辨者, 故其辨之不得不力也.吳伯豊, 朱門之顔淵也, 慶元間, 樹立卓然, 屢被師門之稱奬矣. 尤翁之作滄浪文字, 有李誠父 吳伯豊等語, 後以大尹之言而削去之. 夫尤翁之比擬, 大尹之請刪, 豈以伯豊眞有趨勢之累? 只 爲其嘗有附韓之謗也.【〈守玄齋偶記〉 下同.】澤述謹按: 人有言"震泳雖誣師, 師實無是實, 則人誰信之?" 此不思之甚也. 吳伯豊雖無趨勢之累, 只爲其嘗有附韓之謗, 至削去於文字之作. 則先師雖無實地之累, 安知其不以嘗有認敎之誣, 受後人之刪於文字如吳伯豊耶? 區區竊有是懼焉.蓋其告絶之書, 以爛漫參差之說爲主, 而彼邊文字之分疏祭文者, 無慮累萬言, 而終無一句就此 分明道破者, 只須就宋朝四賢, 巧爲辭說而張皇之, 以爲眩惑一世之計. 只以此觀之, 其心所在, 可見矣.澤述謹按: 湖南辨討陰震之文, 以認意認敎之說爲主, 而彼邊分疏之言, 無慮累萬言, 而終無就此分明道破者, 只就辨討人身上, 巧爲辭說, 勒成罪案而張皇之, 以爲眩惑一世之計. 只以此觀之, 可見其心. 不以先師爲無認敎, 而猶有所忌憚, 而不敢放言謂有矣. 及至震答徐柄甲書"其實原從先師不言之敎"之說出, 而湖人僅脫訴禍, 垂頭喪氣, 無更討之力. 則於是震再與徐書, 放膽大言明有不言之敎, 至於無所忌憚矣.爲門人子弟者, 見其如此, 而避與人失和之小嫌, 而忘爲師辨誣之大義. 則師生之倫, 自此廢矣. 師生之倫廢, 則三綱九法, 亦無所賴而立矣.澤述謹按: 吾門諸人之避與震失和之小嫌而不辨師誣者, 能不竦然心目於此訓矣乎? 目見此訓, 而猶不知竦然, 此聖人所謂"吾未如之何也"者. 復何言哉?此而不闢, 程朱栗尤之道, 將不得行矣. 身爲士子, 目見其然, 而不敢出一語, 以爲衛道之計, 則靠負了聖賢敎育之恩也.澤述謹按: 震誣而不闢, 艮翁之道, 將不得行矣. 爲其弟子者, 目見其然, 而不敢出一語, 以爲衛道之計, 則是靠負了艮翁敎育之恩也.其所以得罪於當世, 正以不忍師門之誣, 而謂之抉摘高文, 遂至於戈㦸相加, 竄逐是擬.【〈答沈 致大〉】澤述謹按: 澤述所以得罪於一邊, 正以不忍師門之誣, 而謂之勒執其文, 遂至於訴之檢局, 加以大禍. 嗚呼! 昔之先師今之小子同一所遭.近世儒流議論誣人, 則驅之以聖門亂賊王家凶逆, 稱人, 則推之爲古今一人孔朱齊等, 余甚憫 之.澤述謹按: 震之徒黨誣人, 則驅之以滅父賊子千古小人, 稱震, 則推之以見識文章優於先師, 又至幷侔於尤翁. 此其可惡之惡習. 然其實困於私意客氣, 不自脫出, 爲是狂悖, 則非可惡也, 伊可憫也.頃者, 仁父而見以出而圖存見勸. 此是功業爲重, 不計道義者, 却與嘉陵諸人, 不甚遠也.【〈寄華 敬二兒〉】頃者而見之初來也, 傳孟士幹之意云: "某丈一起, 則國中士流皆響應. 又京中則有某某可仗, 闕內則有某宮可通." 余謂: "士君子有爲, 詎可從某宮做事?" 及而見再來却言: "某人比已剃 髮, 誠是意外." 余曰: "賢輩所擬以爲可仗者如此, 誠可笑也."澤述謹按: 觀此震泳【而見其字】之所爲先師之所斥, 則其爲人何如也? 爲其有此根子, 所以後來致得僞錄師銜, 投諸遠人, 使師懷繯待變之變也. 蓋此事以前, 先師時致愛重之意, 此事以後, 則不復然. 而更有渠黨權純命所記〈治命錄〉中"吳而見終有事爲之慮"之語矣. 然而渠徒方且謂震是先師傳鉢之人, 而指辨討者爲傷先師知人之明, 殊不知先師知人之明, 早已在"不計道義"之斥"終有事爲"之慮矣.至於朱子, 又以性理學問異同之故, 遂遭林栗之彈章, 又見陸門之仇視, 而葉氏亦嘗以書誚其與 人爭辨, 而朱子猶以未盡其言自恨矣. 然則須看他與人爭, 是爭箇公道, 爭箇私意, 不問其所以 爭, 惟以爭爲非而已. 則自古國家之征討及聖人君子之自守其正, 而被人詆訾, 被人擠陷, 或見 人害正, 而立朝則擧劾, 在野則擯斥, 而反遭其害, 此似獵取田禽而噬腊遇毒之象, 柰何避之? 雖以天地造化之氣, 亦未免有陰盛之極, 至與陽爭, 兩敗俱傷之理. 氣數盛衰, 旣如此, 則人事 是非, 亦何獨不然? 假使孔夫子居今之世, 恐也不免. 苟欲避與人爭競之嫌, 則將見無禮於君 父, 貽禍於聖道, 而不惟不能攻討, 而又有倡爲不必攻討以與彼角勝之說者. 其爲國家世道之 害, 豈不百倍於與人爭競者乎? 噫, 其可痛也已.【〈爭有公私說〉】澤述謹按: 請我同門諸人試思之. 震泳之誣以認敎, 亡師道義, 奚但性理學問異同之故乎? 彼之訴禍雖酷, 爲門人者, 豈可畏此, 而不盡言而辨之乎? 不問所爭之是公是私, 惟以爭爲非而已乎? 又試思之. 師不與君父等乎? 胡爲乎欲避與人爭競之嫌, 見無禮於父師, 貽禍於世道, 非惟不能攻討, 又倡爲不必攻討之說乎? 諸人非不熟讀先師之書, 猶然如此何哉? 怪事怪事. 無乃所謂"書自書, 我自我"者耶?豈忍效陳相之變於夷, 而爲鄒聖之所斥? 亦豈忍見無禮於父師, 拱手坐視而不敢逐, 以蹈閩翁之 所惡乎?【〈祭全齋先生文〉 下同.】澤述謹按: 吾同門千五百人中, 其爲變夷之陳相者, 固不足言, 其見無禮於父師而拱手坐視者, 又滔滔皆是, 可勝歎哉? 澤述之不敢自古便宜者, 只爲懼蹈閩翁之所惡如先師之言而已.今見其文字, 直斥小子爲詖淫之說淫邪之黨, 而又有行遣之論者矣. 雖然, 使先生之敎, 由小子 而不墜於地, 則雖竄死九荒, 其心誠甘樂之, 不自以爲悔也.澤述謹按: 今見震徒世基輩文字, 直斥此身爲誣幻師命, 抑勒人罪之奸凶, 亂常無禮之悖類. 亦已遭檢訴之禍而幾死僅生矣. 雖然, 使先師之道, 由小子而不墜, 雖死無悔, 亦如先師當日盡分於全翁之心而已.今之士多認墓籍爲損名節而不肯爲, 爲自己名節, 不顧父祖遺骸, 恐非人情天理之所宜出也. 彼 始也, 陵夷我人, 不從則終必掘移矣. 纔一破基, 其禍不可言. 《大典》: "汙穢尸軆, 與殺人同 罪." 則子孫不籍, 而至使軆魄, 遭罔測之變, 是與父祖被殺同, 此如何可忍? "忍痛含寃, 迫不 得已"之遺訣, 不得已而用之矣.【〈答宋晦淵〉】澤述謹按: 震每以先師許墓籍爲認稿敎之證, 此何所當也? 墓不籍之禍, 至於與父祖被殺同固也, 稿不刊而寫藏, 則斯無事已, 豈有所謂"與父祖被殺同"之禍者耶? 彼之强引掩罪, 固其情態, 人有眩於其說而不知辨者, 豈不可笑之甚哉?所詢"某身後, 誰可得其傳?"者, 某自無所見, 其它更何問也? 程門諸子, 晦翁且謂其倍師而淫 異, 甚矣, 傳道之難也. 炳庵無恙日, 某意其邃學正識, 堅操厚德, 可以上續全翁之緖. 此友不 幸遽九原矣. 自餘諸子, 未有可擬望者, 區區不勝禪宿之淚爾.【〈答盧仁吾〉】澤述謹按: 此於悼人云亡, 何等痛傷語? 憂道無傳, 何等深切語? 正與孔子失顔淵而發"未聞好學", "噫, 天喪予"之嘆, 千古同情, 震何忍刪沒於晉本乎? 噫, 其不仁之甚矣. 曾謂三千之徒, 刪却哀公問顔淵死等章於魯論者, 有是理也乎? 亦可謂變之大者.先師命削愼狀之意, 非謂文字爽實, 只因本家受文得書而無答, 則疑其不以爲重而然也. 尊先師 徐丈言: "此是吾外家伸寃後一初儒賢文字, 不容不傳後, 何敢不重之? 但外家貧甚無幣, 難於 空簡致謝, 所以久無答也. 先師在世, 而稟此曲折, 豈不見許? 因而泣下." 某重其孝思, 議入續 編, 而徐丈令某更思之.【〈答任潤萬〉下同】澤述謹按: 愼狀是全翁臨終時命削, 而先師至載於〈執燭錄〉者, 猶以不得已之故, 而議入續編, 後又終入原編. 陰震則乃變動先師所手定之神道碑, 改稱墓碣, 謂是有國典, 而竟未見國典. 於此可見賦性乖異, 處事妄錯, 元非常情所出, 亦見其籍託國典, 作壓倒人欛柄之惡心也.柳君相俊與令兄動萬私相議定, 遂將草稿暗地開板, 不令長德一人知之. 此何等事軆? 雖仍前定 刊所公任掌財, 然事至於此, 不得不歸於私印矣. 徐丈聞之, 專書令止之, 不從, 不得已發通聲 討.【書止, 不從, 然後聲討, 亦見仁義幷行.】澤述謹按: 先師於全門諸公聲討柳敬堂私印師稿之擧, 旣以爲不得已, 更謂"書止不從, 然後聲討, 見仁義幷行"者如此矣. 若震之誣陷師節, 比私印師稿, 其罪不啻百倍, 而亦書勸改, 謝不從, 然後聲討. 胡爲乎一邊議論, 非惟不以仁義幷行贊之, 至謂過重已甚乎? 絶可怪也.二公而爲無狀人, 則先師所以簡拔二公於衆人之中, 而立之爲高第弟子者, 豈不爲眼不識人之失 矣乎?擇述謹按: 震黨有引先師此書, 謂斥震爲無狀人, 歸先師於眼不識人, 此不知類也. 震也旣自爲誣師改稿, 禍士林押師孫, 戴誰日之人, 則豈待人斥之而後爲無狀? 假使先師簡拔衆中如彼之言, 帝堯簡拔崇鯀, 周公簡拔管蔡, 而幷不歸於眼不識人, 而況先師早有不計道義之斥, 更有末年終有事爲之慮者乎?前輩以稱人之惡, 不稱人之善, 爲與天地生物之心不相似. 我輩無財可以濟人, 且樂道人之善, 毋揚人之惡, 爲少助天地生物之心. 今我輩再勿與之言性理, 若其心術言行之妄錯, 一毫不可掛 於口頭筆尖, 是爲心弟學性師之道矣. 某於是將以驗而見之有見無見有德無德, 而見! 而見! 其 敬聽而謹守之哉.【某性癡昧, 未有可以當盛心者. 至此一言, 不妨作而見平生之師也. 僭越之 言, 知罪知罪. ○〈與吳震泳〉 下同.】澤述謹按: 此先師與吳震泳書也. 以書末及小註之語觀之, 其慮之也深, 戒之也切矣. 其柰不肯審聽敬循, 終致後來無限變怪何? 又就晉印中刪再呼而見及小註末八字, 亦可見其不喜聞之心矣.某自量精力, 非久於世者. 平生成就, 全然鹵莽, 未有可以稱述者. 惟赤心所重, 在一性字, 而 不敢隨衆貶降, 因以得罪於時儒, 直與須彌高, 而亦終無怨悔也. 相從諸君, 無不聞知, 鄙心全 託而見, 極力主持, 十分敬愼, 得而不墜於地, 則老夫之目, 可以瞑矣. 己未三月上旬, 七十九 歲, 華遯病叟敬言.澤述謹按: 震以此書中有全託而見語, 且備書年月於文稿, 事出特例, 作傳鉢之據. 然此亦戒之之辭, 非許之之辭. 亦在僞署師銜, 使師懷繯之前矣. 其後日月至於三四年之久, 而無復愛重文字如此書者, 更有與李起煥書言"某人以事功爲人所笑"權純命〈治命錄〉"而見終有事爲之慮"之語, 則其不可以此書爲據也明矣.【權是渠黨, 猶有此錄, 其爲可信益明. 如使此錄出於此中, 則安知渠又不以爲誣幻師命乎?】同室有弑父者, 豈復可以同室待之?澤述謹按: 澤述亦敢曰: "同門有誣師以認敎而汙衊大義者, 豈復可以同門待之?"余以絶申爲申黨所構誣, 無人不知, 金之兄弟, 非耳塞神昏者, 如何不聞?【〈答崔秉心〉】澤述謹按: 澤述旣聯書絶容承矣, 又辨其告玄阡文矣. 又言於朴震鎬, 勿受其祖文字, 而至遭震鎬之嫌怒, 承黨朴仁圭之構誣矣. 此無人不知, 震黨乃罪余以黨承, 而謂聯絶爲僞, 絶甚可笑也. 此固渠輩雖知之, 若不聞也, 而惟以擠人之一生長技也.金之見余祭師文, 在丙子季冬. 此時文理未達, 而不及知其爲創新苟難, 乃至丁丑自家誄文見却 之後, 文理始達, 而豁然覺其斥三相六賢者耶? 然則余之大罪, 不在於攻華西, 而在於不受金文 之日矣.【〈與某〉】澤述謹按: 澤述以傳表之事與震泳相關, 在壬戌冬. 我若幻師命, 而被渠釐正. 則此時何無一言之何問, 而反有以前後貳論自悚之書, 乃甲子秋, 討渠誣師之後, 始覺其爲幻命而罪之耶? 然則澤述之罪, 不在於幻命, 而在於討震之日矣. 至於丙子夏世基凶文, 則幻命又變爲誣師. 噫, 誣師而被人討者, 反謂討之者爲誣師, 是猶竊盜而被主人推去者, 反謂主人爲盜也.今之士, 請願於彼, 得存校宮, 尙自居以尊聖之功, 可謂無恥之甚者矣.【〈華島漫錄〉】澤述謹按: 存校宮之與刊己稿, 其輕重大小果何如也? 先師以請願於彼而存校宮者, 尙謂無恥之甚, 而況請願於彼, 以刊己稿, 而冒無恥之甚乎? 凶矣凶矣, 誣者之言也.朱子嘗言: "若有高妙底道理, 而聖人隱之, 是聖人大無狀, 不忠不信, 聖人首先犯著."【〈答鄭世 求〉 下同.】澤述謹按: 朱子此言, 甚言聖人之無隱也. 震泳以討文中"若謂事宜秘密, 暗託一人, 則是幷與心術見識而昧昧"之甚言先師無獨命者, 罪之以論迫先師之悖言, "先師若爾, 則是懷二心反覆不忠"之甚言先師無認敎者, 罪之以上及不敢言之地. 然則其亦將以朱子此言, 爲論迫悖言上及聖人也乎?網打一門, 非小人之甚者, 必不爲也. 今與後之人, 謂而見爲小人, 則子爲君子無疑, 不然, 子 向何處著脚?澤述謹按: 使先師在世, 而目見震泳之告訴五十九人於全檢, 押囚嗣孫於晉署, 則必不以此言責鄭世永矣.隆興初, 和議已決, 韓無咎李德遠, 皆失所守. 而獨王嘉叟諸人, 尙持1)正論, 見先生與魏元履 書.【〈朱子大全標疑〉】澤述謹按: 韓、李皆當時負望之人, 而亦未免失守, 獨有王嘉叟一人. 澤述今日湖嶺之論, 實有所感矣. 嗚呼, 非朱子, 孰知獨守正論之爲貴也哉?國已亡而君已廢矣, 臣子之葬, 何論吉凶? 子孫門生, 只求不爭之地而埋之, 是爲孝且義矣.【與 人訟山而就彼決之, 豈非貽辱父師之罪乎? ○〈寄敬九幷示諸生〉】澤述謹按: 先師旣以訟山而就彼決之爲貽辱父師之罪, 則豈有以刊稿而就彼請願, 不以爲辱, 而有其意有其敎乎? 此所以早有請願刊稿決是自辱之遺書也. 전일효(田鎰孝)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장손이다. 고경일(高景逸) 경일은 명(明) 나라 때의 학자요 정치가이며 동림당(東林黨)의 영수였던 고반룡(高攀龍 : 1562~1626)의 호이다. 어떤……없다 《중용장구》 제14장에 "군자는 현재 처한 위치에 알맞게 행동할 뿐이요, 그 이외의 것은 바라지 않는다. 현재 부귀하면 부귀한 처지에 알맞게 행동하고, 현재 빈천하면 빈천한 처지에 알맞게 행동하며, 현재 이적의 가운데에 있으면 그 상황에 알맞게 처신하고, 현재 환난의 가운데에 있으면 그 상황에 알맞게 처신한다. 따라서 군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없는 것이다.〔君子素其位而行, 不願乎其外. 素富貴, 行乎富貴, 素貧賤, 行乎貧賤, 素夷狄, 行乎夷狄, 素患難, 行乎患難. 君子無入而不自得焉.〕"라는 말의 일부분을 인용한 것이다. 마음이……있다 《논어》 〈술이(述而)〉에 "군자는 마음이 평탄하여 여유가 있고, 소인은 늘 걱정스러워한다.〔君子坦蕩蕩, 小人長戚戚.〕"라는 공자의 말의 일부분을 인용한 것이다. 정절사전(鄭節士傳) 정승원(鄭升源, 1868~1934)이 일제의 삭발에 항거하여 목을 매 순절한 것에 대한 전기이다. 정승원의 자는 덕여(德汝)이고, 본관은 영일(迎日)로, 일제가 강제로 머리를 자르려고 하자 1934년(67세) 10월에 "이 백의(白衣)와 백발(白髮)을 보존하여 지하로 돌아가 부모를 뵐 것이다.〔存此白衣白髮, 歸見父母地下.〕"라는 말과 절명시(絶命詩), 절명사(絶命詞)를 남겼다고 한다. 《石農集 卷31 鄭節士傳》 어찌하여……것인가? 정윤영이 윤봉래(尹鳳來)에게 비밀리에 보낸 편지에서 전우를 조조(曹操)와 사마의(司馬懿)에 비유하면서 그와 절교하지 않으면 순욱(荀彧)이나 가충(賈充) 같은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신계(申桂)와 이승욱(李承旭)의 말을 가져와 전우를 욕하고 꾸짖는 일이 있었는데, 윤봉래가 대의와 관계된 것으로 여겨 전우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전우가 어쩔 수 없이 동문들에게 알리고 여러 사람들과 연명으로 절교를 통고하는 세 편의 편지를 써서 정윤영과 신계, 이승욱에게 보냈다. 《艮齋先生文集後編續 卷2 答李活俊兼示北省諸賢》 명도(明道)는 …… 않았다 명도는 정호(程顥, 1032~1085)의 호이고, 이천은 정호의 동생인 정이(程頤, 1033~1107)의 호이며, 소동파는 소식(蘇軾, 1036~1101)을 가리킨다. 이들은 송 철종(宋哲宗) 원우(元祐) 연간에 왕안석(1021~1086))의 신법(新法)에 반대하며 구법(舊法)을 주창한 대표적 학자들로, 정이 형제는 낙당(洛黨)을 주도하고, 소식은 촉당(蜀黨)의 영수가 되어 학문에 기초한 치열한 논쟁을 벌임으로써 '낙촉지쟁(洛蜀之爭)'이라는 호를 얻기까지 하였다. 《小學紺珠 名臣類下》 김(金)과 …… 문인 김평묵(金平默, 1819~1891)에서 류중교(柳重敎, 1832~1893)로 이어지는 문인을 가리키는 듯하다. 유중교는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의 문인으로 이항로의 사후에 김평묵을 스승으로 섬겼다. 전발(傳鉢) 불가(佛家)에서 사용하는 전의발(傳衣鉢)의 줄임말로, 스승의 도학을 전수 받음을 비유한다. 낙(洛)도 …… 그르다 낙은 낙양(洛陽) 출신 정이(程頤)를 영수로 하는 낙당(洛黨)을 가리키고, 촉은 촉 출신인 소식(蘇軾)을 영수로 하는 촉당(蜀黨)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왕안석의 신법(新法)에 반대하고 구법(舊法)을 주장하면서 학문에 기초한 치열한 논쟁을 벌임으로써 '낙촉지쟁(洛蜀之爭)'이라는 호를 얻기까지 하였다. 원우는 철종(哲宗)의 연호인 원우 연간에 집권한 사마광(司馬光)의 구법당(舊法黨)을 가리키고, 희풍은 신종(神宗)의 연호인 희령(熙寧)ㆍ원풍(元豐) 연간에 득세한 왕안석(王安石)의 신법당(新法黨)을 가리키는데, 이들을 중심으로 송나라 신종(神宗) 때부터 철종 때인 원우 연간에 이르기까지는 당쟁이 극심하였다. 《小學紺珠 名臣類下》 전장(奠章) 김평묵이 임헌회에게 올린 제문(祭文)을 말하는 것으로, 제문 가운데 기롱(譏弄)하는 뜻이 있다는 이유로 전우에게 거부당했다. 《한국문집총간 간재집 해제》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의 호이다. 초명은 광로(光老)이고, 자는 이술(而述)이며, 본관은 벽진(碧珍)이다. 한성부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당시 과거시험에 환멸을 느끼고 과거를 포기한 채 향리에서 강학에 전념하여 최익현(崔益鉉)ㆍ김평묵(金平默)ㆍ유중교(柳重敎) 등을 길렀으며, 천거로 동부승지ㆍ공조참판ㆍ경연관 등을 지냈다. 호남의 기정진(奇正鎭), 영남의 이진상(李震相)과 함께 조선 말기 주리철학의 3대가로 꼽힌다. 존왕양이(尊王壤夷)의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강조함으로써,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 《화서집》, 《주자대전차의집보(朱子大全箚疑輯補)》 등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윤철규(尹喆圭)가……때 빈사(賓師)는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을 때에 송병선이 고종 황제에게 시정개혁과 일본에 대한 경계를 건의하여 동의를 받아내고 다시 대궐에서 상소하려고 하자, 경무사(警務使) 윤철규가 그를 속여 일본 헌병대로 넘겨 고향으로 이송시킨 일이 있었다. 고향으로 이송당한 후 송병선은 울분을 참지 못해 음독 자결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오늘날 …… 한다 명나라 여곤(呂坤, 1536~1618)이 지은 《신음어(呻吟語)》 3권 〈응무(應務)〉에 나오는 구절이다. 소문과 …… 변별 《논어》 〈안연(顔淵)〉에 "현달[達]이란 정직함을 바탕으로 삼고 의(義)를 좋아하며, 남의 말을 살피고 얼굴빛을 관찰하며, 잘 헤아려 몸을 낮추는 것이니, 이렇게 하면 나라에 있어도 반드시 달(達)하며 집안에 있어도 반드시 달(達)한다. 소문[聞]이란 얼굴빛은 인(仁)을 취하나 행실은 위배되며, 그대로 머물면서 의심하지 않는 것이니, 이렇게 하면 나라에 있어도 반드시 소문이 나며 집안에 있어도 반드시 소문이 난다.〔夫達也者, 質直而好義, 察言而觀色, 慮以下人. 在邦必達, 在家必達. 夫聞也者, 色取仁而行違, 居之不疑. 在邦必聞, 在家必聞.〕"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말이다. 일은 …… 구함 《맹자집주(孟子集註)》 〈양혜왕 장구 하(梁惠王章句下)〉 제15장 장하주(章下註)에 "일은 가능함을 구하고, 공은 이룸을 구하여 지혜와 도모의 말단에서 기필을 취하고 천리의 올바름을 따르지 않는 것은 성현의 도가 아니다.〔凡事求可功求成, 取必於智謀之末, 而不循天理之正者, 非聖賢之道也.〕"라는 내용이 보인다. 음양(陰陽)이 …… 말 《농암집(農巖集)》 11권 〈상중구(上仲舅)〉에 보인다. 회니(懷尼)의 논쟁 회덕(懷德)에 거주했던 송시열(宋時烈)과 이성(尼城)에 거주했던 윤증(尹拯) 사이에서 일어난 사제 간의 대립을 말한다. 송시열이 윤증의 부친인 윤선거(尹宣擧)의 묘갈명(墓碣銘)을 지으면서 병자호란 때 강화도(江華島)에서 윤선거의 처신을 언급하자 윤증이 그것을 삭제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송시열이 거절함으로써 두 사람의 사제 관계가 어긋나기 시작하여 훗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게 되었다. 호락(湖洛)의 논변 권상하(權尙夏)의 문인 한원진(韓元震)과 이간(李柬) 사이에서 시작한 논쟁을 말한다. 인물성상이론(人物性相異論)과 미발심체유선악론(未發心體有善惡論)을 주장한 한원진과 그에 동조했던 학자들이 대부분 호서(湖西) 출신이었기 때문에 호론(湖論)이라 하였고, 인물성구동론(人物性俱同論)과 미발심체본선론(未發心體本善論)을 주장한 이간과 그에 동조했던 학자들이 대부분 낙하(洛下 서울) 출신이었기 때문에 낙론(洛論)이라 하였다. 오백풍(吳伯豊) 오필대(吳必大, ?~1198)로, 백풍은 그의 자이다. 주희(朱熹) 문하의 고제(高弟)였으나 일찍 죽었으며, 저서로 《사해집(師海集)》이 있다. 간신 한탁주(韓侂胄)가 집권할 때에 오백풍이 벼슬에 임명되자 주희가 편지를 보내어 규경(規警)하였으며, 뒤에 주자의 학문을 위학(僞學)으로 규정하자 오백풍은 곧바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우옹이 …… 삭제했다 이성보는 연평(延平) 이동(李侗)의 아들인 이신보(李信甫)이다. 송나라 간신 용대연(龍大淵)ㆍ증적(曾覿)이 집권할 때에 간관(諫官)의 직에 임명되자, 주희(朱熹)가 편지를 보내어 규경(規警)하였다. 창랑은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아들이자 윤선거(尹宣擧)의 외삼촌인 성문준(成文濬)의 호이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이 성문준에게 편지를 보내어 정인홍(鄭仁弘)에 대한 처신이 분명하지 못함을 책망하자 성문준이 사과한 적이 있었는데, 송시열이 이 일을 주희에게 의심받던 이성보와 오백풍의 일에 비교하여 창랑의 묘갈(墓碣)에서 "이성보ㆍ오백풍도 일찍이 주문(朱門)에 의심받았으나 끝내 명인이 되었으니, 일시의 득실로 천하의 선비를 단정할 수 없다." 하였다. 이에 윤선거(尹宣擧)가 이 내용을 수정해 달라고 요청한 일을 말한다. 《宋子大全 卷36 答尹汝望吉甫, 卷174 成滄浪公墓碣銘》 난만(爛漫)ㆍ참치(參差)의 말 《간재선생문집 전편속(艮齋先生文集前編續)》 6권 〈독수재윤공행장(篤守齋尹公行狀)〉에 "감역(監役) 김평묵(金平默)이 선사(先師)에게 바친 뇌문(誄文)은 사문(師門)의 남은 도통과 출처어묵(出處語默)이 크고 작게 어긋났다는 것을 서두로 삼고, 종국에는 문인(門人)의 크고 작은 학설이 무성하여 진실로 사문(斯文)을 이었다는 것을 결어로 삼았으니, 선사를 유문(儒門) 밖으로 몰아낸 것이 분명하다. 나와 공이 서공(徐公) 및 여러 동문들과 함께 회의하여 그의 뇌문을 물리쳤다.〔金監役平默, 致誄先師, 以師門緖餘, 出處語默, 大小參差, 做頭, 終以門人小大爛漫, 允紹斯文, 爲結語, 其驅先師於儒門之外, 明矣. 愚與公與徐公及諸同門, 會議而逐之.〕"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김평묵(金平默)의 《제임전재문(祭任全齋文)》에 "사문의 남은 도통과 시사(時事)의 어묵이 …… 어찌 어긋남이 없겠는가. …… 크고 작은 학설이 무성하여 진실로 사문을 이었네.〔師門緖餘, 時事語默, …… 豈無參差? …… 小大爛漫, 允紹斯文.〕라는 구절을 가리키는 듯하다. 송조(宋朝)의 …… 현인 사마광(司馬光)ㆍ윤화정(尹和靖)ㆍ호안국(胡安國)ㆍ정이(程頤)을 말한다. 김평묵은 《제임전재문(祭任全齋文)》에서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를 이 네 현인에 견주어 "윤화정처럼 사설(師說)을 굳게 지키고, 부옹(涪翁 정이)을 법삼았네. 맑은 행실과 굳은 절개는 속수옹(涑水翁 사마광)과 같고, 한 겨울 송백(松柏) 같은 기상은 강후(康侯 호안국)의 기풍이 있었네.〔和靖緊守, 涪翁之則. 淸修苦節, 如涑水翁. 大冬松柏, 有康侯風.〕"라고 하였다. 삼강(三綱)과 구법(九法) 삼강은 유교 사회의 기본 덕목이 되는 세 가지 강령으로, 군신 간의 도리인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자간의 도리인 부위자강(父爲子綱), 부부간의 도리인 부위부강(夫爲婦綱)을 말한다. 구법은 몇 가지 설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서경(書經)》 〈주서(周書)〉의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말한다. 나도 …… 없다 《논어》 〈자한(子罕)〉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바른 소리로 깨우쳐 주는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말로 잘못을 고치는 것이 귀중하다. 완곡하게 이끌어 주는 말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말의 의미를 궁구하는 것이 귀중하다. 좋아하기만 하고 궁구하지 않거나 따르기만 하고 잘못을 고치지 않는다면 나도 그런 사람은 어찌할 수 없다.〔法語之言. 能無從乎? 改之爲貴. 巽與之言, 能無說乎? 繹之爲貴. 說而不繹. 從而不改, 吾末如之何也已矣.〕" 하였다. 검국(檢局) 일제 강점기 때 검사가 일을 보던 검사국(檢事局)을 가리킨다. 인보(仁父) 김사우(金思禹, 1857~1907)의 자이다. 호는 용암(勇庵)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石農集 권31 勇庵金公行狀》 가릉(嘉陵)의 …… 사람들 가릉은 지금의 경기도 가평으로, 이곳에 거주한 김평묵(金平默)과 그의 문인 유중교(柳重敎)를 말하는 듯하다. 훗날 …… 투척하여 1919년에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뒤에 유림들이 파리 강화회의에 연명으로 장문의 글을 지어 보낼 때, 오진영이 스승인 간재에게게 여기에 참여할 것을 권하였지만 간재가 참여하지 않자 오진영이 간재의 이름을 거짓으로 서명하여 보낸 일을 말한다. 주자의 …… 만났고 임률(林栗)은 남송(南宋)의 학자로, 시강에서 당시 병부 낭관(兵部郎官)으로 있던 주자와 《주역(周易)》과 〈서명(西銘)〉에 대하여 토론하다가 의견이 맞지 않자 상소하여 주자의 도학(道學)을 공격한 일을 말한다. 육구연(陸九淵) …… 당했는데 육구연의 제자였던 조건(曹建)이 주자의 문인이 되어 육구연의 학문을 버리고 주자의 학문에 전념하다 죽자, 주희가 그의 묘표(墓表)에 육구연과 관계된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인해 육구연의 문인들이 크게 노한 일을 말한다. 《宋元學案 卷18 滄洲諸儒學案》 마른 …… 형상 《주역》 〈서합괘(噬嗑卦) 육삼(六三)〉에 "마른 고기를 씹다가 독을 만났으니, 조금 부끄럽긴 하나 허물은 없다.〔噬腊肉, 遇毒, 小吝, 无咎.〕"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오랑캐로 …… 사람 유학자(儒學者)인 진량(陳良)을 스승으로 섬겼던 진상이 등(藤)나라에서 만이(蠻夷) 출신 농가자류(農家者流) 허행(許行)을 만나고서 스승의 도를 배반하고 허행의 제자가 되자, 맹자가 "나는 중화의 법을 써서 오랑캐의 도를 변화시켰다는 말은 들었지만, 오랑캐에게 변화되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吾聞用夏變夷者, 未聞變於夷者也.〕"라고 진상을 비난한 고사가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보인다. 부모와 …… 것 송(宋)나라 간신 채확(蔡確)이 거개정(車蓋亭)에서 노닐 때 〈하일유거개정(夏日遊車蓋亭)〉시 10수를 지은 일이 있었는데, 오처후(吳處厚)가 이 시는 선인황후(宣仁皇后)를 무방(誣謗)하는 뜻을 담고 있다고 공척(攻斥)하여 문언박(文彦博)이 채확을 영교(嶺嶠)로 내쫓으려 하자, 범순인(范純仁)이 문자를 들추어내는 것은 성대한 세상의 일이 아니라고 말리면서 너에게서 나온 것은 너에게로 돌아간다는 속담을 소홀히 하고, 받는 대로 돌려주기를 좋아한다는 경계를 위배하면 스스로 재앙과 실패를 불러들이게 될 것이라고 논한 것에 대해 주자가 "만약 후세에 군친(君親)에게 예의가 없음을 보고서도 팔짱을 낀 채 좌시하면서 쫓아내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이 말 때문일 것이다.〔使後世見無禮於君親者, 拱手坐視而不敢逐, 則必此言之爲也.〕"라고 비판한 내용을 가리킨다. 《朱子大全 卷37 答鄭景望》 구황(九荒) 천하를 상징하는 구주(九州)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으로, 세상 끝을 비유하는 말이다. 묘적(墓籍)의 등록 일제 강점기 때 묘지대장인 묘적계등본(墓籍屆謄本)에 올리는 것을 가리킨다. 분묘의 위치, 사망자의 씨명(氏名), 사망년월일, 제주(祭主)의 주소와 씨명, 참고사항 등 묘지에 관한 제반 사항이 기록되어 있고, 묘지 약도가 그려져 있다. 일제 통감부는 1912년에 식민지배와 경제적 수탈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토지 조사령(土地調査令)을 반포하면서 선조의 무덤에 대해서도 묘적을 등록하도록 강요했다. 통분을 …… 한다 주희(朱熹)의 〈여진시랑서(與陳侍郞書)〉에 나오는 말이다. 남송(南宋)이 금(金)나라의 침략에 굴복하여 화친을 구걸하고 복수할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에 대해 비판한 말이다. 《朱子大全 卷24 與陳侍郞書》 병암(炳庵) 김준영(金駿榮, 1842~1907)의 호이다. 자는 덕경(德卿)이고,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전우(田愚)의 문인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선숙(禪宿) 학식이 높은 노숙한 선승(禪僧)을 일컫는 말인데, 여기서는 편지의 수신자인 노인오(盧仁吾)를 가리킨다. 학문을 …… 못했다. 《논어》 〈옹야(雍也)〉 애공문(哀公問)장에 나오는 말이다. 애공(哀公)이 제자들 가운데 누가 학문을 좋아하는지 묻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안회라는 자가 학문을 좋아하여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으며, 같은 잘못을 두 번 되풀이 하지 않았는데, 불행히도 명이 짧아 죽었습니다. 지금은 없으니, 아직 학문을 좋아하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有顔回者, 好學, 不遷怒, 不貳過,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未聞好學者也.〕" 하였다. 아 …… 하였다 《논어》 〈선진(先進)〉 안연사(顔淵死)장에 나오는 말이다. 안연(顔淵)이 죽자, 공자가 말하기를, "아,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였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였다.〔噫, 天喪予, 天喪予.〕" 하였다. 진본(晉本) 1926년 10월에 오진영(吳震泳)과 김정호(金楨鎬) 등이 진주(晉州)에서 활자(活字)로 간행한 간재의 문집을 말한다. 《한국문집총간 간재집 해제》 노론(魯論) 《노논어(魯論語)》를 말한다. 이것 외에 《제논어(齊論語)》, 《고문논어(古文論語)》 등이 있는데, 현재 전해지는 《논어》는 《노논어》에 기초한 것이다. 신장(愼狀) 신의묵(愼宜默, 1768 ~ 1821)의 행장(行狀)인 〈석성현감신공행장(石城縣監愼公行狀)〉을 말하는 것으로, 《고산집(鼓山集)》에 실려 있다. 서(徐) 어른 서정순(徐政淳)을 말한다. 임헌회(任憲晦)의 문인으로, 신의묵의 외손자이고, 임헌회의 맏아들 임진재(任震宰)의 장인이며, 둘째 아들 임감재(任坎宰)의 스승이이다. 전우(田愚)와 함께 《고산집(鼓山集)》 간행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한국문집총간 고산집 해제》 집촉록(執燭錄) 《성전집촉록(星田執燭錄)》을 말한다. 1876년 임헌회가 죽기 직전에 자신이 죽은 뒤의 일에 대해 전우(田愚)에게 당부한 것을 기록한 글이다. 《한국문집총간 간재집 해제》 신도비(神道碑) 〈소윤최공신도비(少尹崔公神道碑)〉를 말한다. 동만(動萬) 임헌회의 맏아들 임진재(任震宰)의 호이다. 누구의 …… 해 '누구의 집에나 해와 달이 비추네.〔誰家日月照臨〕'의 줄임말로, 세상이 일본의 통치하에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후창집》 권14 〈독송자대전유감이표출지근부안설(讀宋子大全有感而表出之謹附按說)〉에 "오진영이 크게 쓰고 특별하게 써서 말하기를, '주머니 속의 화폐가 왕래하고, 차표와 편지에 도장이 찍히며, 누구의 집에나 해와 달이 비추네.'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일본을 떠받드는 것이 아니겠는가.〔震大書特書曰: '囊中紙貨往來, 車票書詞附印, 誰家日月照臨.' 此豈非戴日本者乎?〕"라는 구절이 보인다. 제요(帝堯)는……뽑았고 숭곤(崇鯀)은 숭백(崇伯)에 봉해진 곤으로, 요 임금의 신하이며, 우왕(禹王)의 아버지이다. 요 임금 때에 홍수(洪水)가 나자 그에게 다스리게 하였는데, 9년이 되어도 공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書經 堯典》 주공(周公)은……뽑았지만 관(管)ㆍ채(蔡)는 주 무왕(周武王)의 동생이자 성왕(成王)의 숙부인 관숙선(管叔鮮)과 채숙도(蔡叔度)를 말한다. 무왕이 죽고 어린 성왕(成王)이 즉위한 뒤에 주공이 섭정할 때에 그들을 관(管)과 채(蔡)에 봉하여 상(商)나라 주왕(紂王)의 아들 무경(武庚)을 감독케 하였는데, 관숙선과 채숙도는 '주공이 어린 왕에게 나쁜 일을 저지를 것이다.〔公將不利於孺子〕'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반란을 일으켰다. 《書經 周書ㆍ金縢》 《史記 卷35 管蔡世家》 진인(晉印) 1926년에 문인 오진영(吳震泳)과 김정호(金楨鎬) 등이 진주(晉州)에서 간재의 문집을 활자(活字)로 간행한 진주본(晉州本)을 말한다. 고현천문(告玄阡文) 김용승(金容承)이 간재 묘소에 올린 〈망고현천문(望告玄阡文)〉을 말한다. 융흥(隆興) …… 화의(和議) 융흥은 남송(南宋) 효종(孝宗)의 연호(1163~1164)이며, 화의는 금(金)나라의 요청에 응해 맺은 강화(講和)를 말한다. 이덕원(李德遠) 송(宋)나라 문신 이호(李浩, 1116~1176)로, 덕원은 그의 자이다. 건창(建昌) 사람으로, 소흥(紹興 고종(高宗) 연호) 12년(1142)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태상승(太常丞), 사농 소경(司農少卿), 이부 시랑(吏部侍郎), 태상시 주부(太常寺主簿) 등을 지냈다. 《宋史 卷388 李浩列傳》 오히려 …… 견지하였으니 저본에는 '尙指持正論'로 되어 있으나, 《간재선생문집 후편(艮齋先生文集後編)》 권21 〈주자대전표의제일(朱子大全標疑第一)〉에 근거하여 '指'를 '持'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위원리(魏元履) 송(宋)나라 문신 위섬지(魏掞之, 1116~1173)로, 원리는 그의 처음 자이다. 자는 자실(子實)이고, 호는 간재(艮齋)이다. 건양(建陽) 사람으로, 호헌(胡憲)에게 사사하였으며, 주희(朱熹)와 교유하였다. 《宋史 卷459 魏掞之列傳》 持 저본에는 '指'로 되어 있으나, 《간재선생문집 후편(艮齋先生文集後編)》 권21 〈주자대전표의제일(朱子大全標疑第一)〉에 근거하여 '持'로 교감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송자대전》을 읽고 느낌이 있어 표출하고 삼가 안설을 붙이다 【1938년】 讀《宋子大全》有感而表出之謹附按說 【戊寅】 하늘에는 음(陰)과 양(陽)이 있고, 땅에는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이 있으며, 사람은 군자와 소인이 있으니, 사방의 만물은 종류에 따라 모이고 무리에 따라 나누어집니다. 이와 같이 갈려 나누어진 뒤에는 이쪽 사람의 행위가 반드시 모두 옳은 것도 아니고, 저쪽 사람의 행 위가 반드시 모두 그른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옳은 것을 돕고 그른 것을 억제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엄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까닭에 원우(元祐)의 제현(諸賢)이 채확(蔡確)을 억제할 수 없을까 걱정하여 그의 시구(詩句)로 죄를 물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 심한 것 같지만 주자(朱子)가 그다지 그르게 여기지 않고 도리어 범충선(范忠宣)을 옳지 않다고 여겼 던 것은 어찌 선악의 큰 구분이 이미 정해진 까닭에 주선하는 도리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142)【〈안은봉(安隱峯)에게 올림〉】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음성 오진영은 선사를 무함하고 문고를 고쳐 사림에 재앙을 준 사람이고, 호남 사람은 무함을 변론하고 문고를 바로잡다 재앙을 입은 사람이니, 선악의 큰 구분이 이미 정해졌다. 그런데 설자(說者)들은 오히려 "호남이 반드시 다 옳은 것도 아니고, 영남이 반드시 다 그른 것도 아니다."고 하니, 대체로 우옹(尤翁)의 이 의리를 모르는 것이다.오늘날 의론하는 사람들이 "저거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감히 윤선거를 공격하는 것인 가?"라고 한다면 신도 또한 그에 대해 할 말이 있습니다. 주자가 말하기를, "사특한 말로 정도를 해치면 누구나 공격할 수 있으니, 반드시 성현일 필요는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렇다면 신의 행위도 또한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상소(上疏)〉 아래도 같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늘날 의논하는 사람들도 또한 말하기를, "김택술 그가 어떤 사람인데, 감히 노성(老成)하여 명망을 지닌 오진영을 공격하는 것인가?" 하였다. 대저 선사를 무함하고 문고를 고친 것이 어찌 사특한 말로 정도를 해친 것을 사람이면 누구나 공격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사문의 제자의 반열에 있는 사람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어찌하여 우옹의 말에 조금도 마음을 두지 않는 것인가.설사 신의 이런 뜻이 폄악(貶惡)을 감추고자 하는 말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또한 그렇지 않 은 점이 있습니다. 양호(陽虎)가 말하기를, "부자(富者)가 되려면 인(仁)을 행하지 못하고, 인을 행하면 부자가 되지 못한다.143)"고 했습니다. 양호의 의도가 진실로 부자가 되려는 마 음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그가 인을 행한다는 말은 진실로 천리(天理)입니다. 그런 까닭에 맹 자가 특별히 취하여 표장(表章)한 것입니다. 저 무리들이 과연 효묘(孝廟 효종)의 덕이 참으 로 세실(世室)144)로 삼기에 마땅하다고 여겼다면 어찌 감히 이런 의론이 신에게서 나왔다는 이유로 공공연하게 말하며 배척할 수 있겠습니까?145)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논자(論者)들이 또 말하기를, "모(某)가 오진영을 배척한 것은 혐의를 꾸미려는 사사로움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나는 오진영에 대해 본래 혐의할 만한 것이 없으니, 이는 진실로 전혀 온당하지 않는 것이다. 설사 그러한 것이 있었다 하더라도 선사를 위해 무함을 변론하는 것은 진실로 천리이다. 논자들이 과연 선사에 대해 인허를 낼 의향과 인허를 내라는 분부가 없다고 여겼다면 어찌 감히 이런 변론이 나에게서 나왔다는 이유로 그 말을 아울러 폐기할 수 있겠는가.삼가 듣건대 근래에 헌신(憲臣)이 소를 올려 이이(李珥)가 머리를 깎았다는 설을 제기하면서 김장생(金長生)을 끌어다 증거로 삼았다146)고 합니다. 신도 또한 일찍이 고(故) 문충공(文忠 公) 신(臣) 장유(張維)의 문집(文集)에 고(故) 지사(知事) 신(臣) 조위한(趙緯韓)의 말이 기록 되어 있는 것147)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말에 과연 신의 스승이 운운한 바가 있었다고 하 는데, 신은 이에 대해 항상 매우 의아하게 여기는 마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장유는 김장생 의 뛰어난 제자인데, 그가 조위한의 말을 듣고서 어찌하여 김장생을 위해 그것이 무함임을 통렬하게 변론하지 않고, 단지 이이만을 위해 조목조목 나누어 해명했겠습니까.설사 이이가 참으로 그런 일을 했다 하더라도 또한 김장생은 그것을 증언하지 않았을 것인 데, 하물며 전혀 그런 일이 없음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옛적에 섭공(葉公)이 말하기 를, "우리 무리에 몸가짐을 정직하게 하는 사람이 있는데,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아들이 그 것을 증언했다." 하니, 공자가 말하길, "우리 무리의 정직한 사람은 이와 다르다. 어버지는 자식을 위해 숨겨 주고, 자식은 아버지를 위해 숨겨 주니, 정직함은 그 가운데 있다." 하였 습니다.148) 가령 김장생이 그런 말을 했다면 아버지가 양을 훔친 것을 증언한 사람과 무엇 이 다르겠습니까.또 헌신(憲臣)이 장유의 설을 인용하여, "머리를 깎은 일은 행적이 확실하지 않아 변론할 것 도 못 된다. 그런 까닭에 김장생도 또한 그 일을 말한 것이다."고 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어찌하여 또 "여러 신하들이 머리를 깎지 않은 실상을 상세히 진달했다."고 말했겠습니까. 여러 신하들이 머리를 깎지 않은 실상을 상세히 진달했는데, 김장생만은 그 일을 말했다고 한 것은 또한 무슨 마음일까요? 신은 내심 김장생을 위해 원통하게 여깁니다. 고명(高明)한 제자로서 그 일을 증언했다면 이이가 머리를 깎았다는 것은 끝내 변론할 수 없게 될 것이 니, 이이가 당한 무함이 얼마나 심하겠습니까.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우암(尤庵)은 율곡(栗谷)이 머리를 깎았다는 무함과 사계(沙溪)가 스승이 머리를 깎았음을 증언했다는 무함에 대해 입이 고달프도록 변론하여 밝혔고, 심지어 이처럼 임금에게 아뢰는 글까지 있었다. 이것을 끌어와 오늘날 우리 문하의 일을 논한다면 변론을 기다릴 것도 없이 절로 분명하다. 설사 간옹(艮翁 전우(田愚))께서 참으로 인허를 내도록 분부하셨다 하더라도 오진영은 그것을 증언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하물며 전혀 그런 분부가 없음에 있어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오진영은 오히려 강력하게 그것을 증언하기를, "죽음에 이를지언정 말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하니, 이는 아버지가 양을 훔치지도 않았는데 그 자식이 훔쳤다고 증언하는 것이다. 그리고 머리를 깎는 일은 당시에 행적이 확실하지 않아 변론할 것이 못 된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었음에도 우옹은 오히려 이와 같이 말했는데, 하물며 인허를 내도록 분부하셨다는 말은 대의(大義)에 관계된 것임에랴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아, 오진영은 한쪽에서 일컫는 고명한 제자인데, 고명한 제자로서 증언했다면 간옹께서 인허를 내도록 분부하셨다는 것은 끝내 변론할 수 없게 될 것이니, 간옹께서 당한 무함이 얼마나 혹독하겠는가.옛적에 범조우(范祖禹)는 이천(伊川 정이(程頤))을 순전한 스승으로 섬긴 것은 아니었지만, 이천이 무함을 당했을 때에 범조우가 즉시 변론하여 바르게 하지 않자, 주자가 오히려 이를 꾸짖었습니다.149)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순전한 스승으로 섬긴 분이 아니었는데도 주자는 오히려 즉시 변론하여 바르게 하지 않았다 하여 꾸짖었다. 오늘날 간옹을 순전한 스승으로 섬기는 사람들은 도리어 해가 갈수록 스승의 무함이 더욱 깊어지는데도 끝내 변론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변론하여 바르게 하는데 종사하는 동문을 꾸짖으니, 주자에게 죄를 얻음이 도리어 어떠하겠는가.천지 사이에 음(陰과 양(陽) 두 사물은 서로 없을 수 없기 때문에 군자가 있으면 반드시 소 인이 있고, 바른 의론이 있으면 반드시 삿된 의론이 있으니, 그 강약(强弱)과 승부(勝負)의 형세는 서로 갈마들고 변화하여 군자와 바른 의론이 반드시 약해지고 지게 되며, 소인과 삿 된 의론이 반드시 강해지고 이기게 됩니다. 이것이 소자(邵子)의 시에서 이른바 "양은 하나 이고 음은 둘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는 이른바 "다하여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약해지고 졌던 것이 항상 펴지고, 강하고 이겼던 것은 반 대로 굽혀지게 되니, 이 또한 필연(必然)의 이치입니다, 대저 이른바 "다하여 없어지지 않는 다."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천리(天理)와 인심(人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도는 오르내림 이 있고, 운행하는 기운은 오르고 넘어짐이 있기 때문에 펴져야 할 것이 크게 펴지지 못하 고, 굽혀져야 할 것이 반드시 완전하게 굽혀지지 않으니, 이 또한 이치가 간혹 그러한 것입 니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이 도를 주장하는 사람이 진실로 옳음과 그름, 삿됨과 바름의 근 원을 밝혀 삿되거나 그른 것은 억누르고, 옳거나 바른 것은 높여서 군자를 위해 꾀하고 소 인을 위해 꾀하지 않는다면 천지를 본받아 치도(治道)를 닦아 이루는 것에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천하에 춘추(春秋)의 의리가 없고, 간옹(艮翁)이 춘추의 학문이 아니라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오늘날 영남과 호남의 일에 대해 누가 군자이고, 누가 소인이며, 어느 쪽이 바른 의론이고, 어느 쪽이 삿된 의론인지는 변론하지도 않아도 분명하니, 그 승부와 굴신(屈伸)도 또한 이를 미루어 알 수 있다. 다만 밝은 하늘은 돌아오지 않고, 강물은 맑아질 기약이 없으니, 이른바 "이 도(道)를 주장하는 사람이 옳고 그름의 근원을 밝혀서 그른 것은 억누르고 옳은 것은 높인다."는 것이 과연 어느 때나 나올지 모르겠다. 아아!음류(陰類 소인)와 양류(陽類 군자)는 하나의 큰 편론(偏論)이고, 삿됨과 바름은 하나의 큰 붕당(朋黨)이니, 편론을 좋아하여 굽은 것을 바로 잡으려다가 지나치게 곧게 하는 것은 진실 로 말할 것이 못 되지만 붕당을 싫어하여 모호하게 양쪽 다 옳다고 하는 것은 더욱 일을 해 치게 됩니다. 그러나 편론과 붕당 중에도 또한 크고 작음, 가볍고 무거움의 구분이 있으니, 작은 것은 하지 않아야 하지만 큰 것은 하지 않을 수 없으며, 가벼운 것은 생략해도 되지만 무거운 것은 생략해서는 안 됩니다.【〈백강(白江) 이상국(李相國)에 올린 편지〉】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우옹(尤翁)의 이 말을 기준으로 하면 편당(偏黨)은 본래 좋지 않은 제목은 아니다. 다만 편당한 것이 삿된지 바른지를 볼 뿐이다. 호남과 영남 사이에서 이른바 "중립(中立)"이란 것이 어찌 이른바 "붕당을 싫어하여 둘 다 옳다고 하는 것이 더욱 일을 해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크고 작음, 가볍고 무거움의 구분을 말한다면 선사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인허를 무함하고 문고를 고치는 것에 대한 변론은 하지 않을 수 없고 생략할 수도 없는 것이고, 문인과 관련된 부분 위에서 서로 잘잘못을 따지는 다툼은 하지 않아야 하고 생략해도 되는 것이다.그가 주자의 문하에 죄를 얻었으니, 바로 스스로 하늘의 벌을 받을 난적(亂賊)인데, 그의 무 리들이 끝내 창을 거꾸로 돌려 귀순할 줄을 모르고 있네.【〈유무중(與兪武仲)에게 보냄〉】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여휴(驪鑴 윤휴(尹鑴))가 주자를 업신여기고 거만스럽게 대하면서 《중용》을 고쳐 주를 달았기 때문에 우옹(尤翁 송시열)이 주자의 문하에 죄를 얻은 난적이라 한 것이다. 오늘날 음성의 오진영은 겉으로 간옹을 존숭하면서 이미 인허를 내도록 분부하셨다는 것으로 무함하고 게다가 대고(大稿)의 본문(本文)을 고쳤으니, 그의 업신여김과 거만스러움이 심하다. 이를 간옹의 문하에 죄를 얻은 난적이라고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의 무리들이 창을 거꾸로 돌려 귀순할 줄 모르니, 어쩌면 그렇게도 미혹된 것인가.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이 윤휴의 당이 된 것을 배척한 것에 대해 어느 누가 지나쳤다고 여기지 않겠는가. 그러나 스스로 그것이 지나친 줄 모르겠고 오히려 부족하다고 여기네. 【〈조사달(趙士達)에게 보냄〉】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내가 음성의 오진영 및 오진영의 당이 된 사람들을 배척한 것은 스스로 그것이 지나친 줄 모르는 것도 또한 우옹에게 받은 바가 있다.주자가 일찍이 당시의 재상(宰相)을 책망하여 말하기를, "충사(忠邪)의 구분을 살피는 것이 밝지 못하고, 소장(消長)의 경계를 믿는 것이 독실하지 못하며, 게다가 자기 한 몸의 이익과 손해의 사사로움으로 그 사이에서 뒤엉킨다면 오늘날 이른바 '공평함을 지킨다.'는 것이 도 리어 소인의 세력을 깊이 도와 군자의 병통을 만드는 것이니, 끝내 저쪽 당은 나날이 성대 해지고 이쪽 세력은 나날이 고립되어 천하의 일이 머지않아 행해질 수 없게 됨을 볼 것입니 다." 하였습니다. 오늘날 노형의 말은 어쩌면 그렇게도 주자의 말과 모든 것이 서로 반대가 되는 것인가요.【〈민태수(答閔台叟)에게 답함〉】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늘날 이른바 "중립(中立)"이란 사람들이 삿됨과 바름의 구분을 살피지 않고, 게다가 자기 한 몸의 사사로움으로 뒤엉킨다면 공평을 지킨다고 말하는 것이 도리어 저들을 돕는 것이다. 하물며 겉으로는 중립을 하면서 마음은 사실 저들을 돕는 데에 있는 그런 사람들도 또한 있음에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것이 영남의 당이 나날이 성대해지고 호남의 세력이 나날이 고립되는 이유이다.저쪽과 이쪽을 화합시키는 것은 오직 정명도(程明道)와 같은 덕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 고, 그 나머지 사람은 타니대수(拖泥帶水)150)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네. 이것이 바로 천리 (天理)와 인욕(人欲)이 서로 비슷하나 실제로는 다른 것이니, 주자의 말이 상세하네.【〈이계 주(李季周)에게 보냄〉 아래도 같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근래에 아무개와 아무개가 나와 오진영이 화합하기를 바라면서도 그 말하는 것이 명백하게 분별한 조건이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타니대수(拖泥帶水)를 면치 못하여 천리와 비슷하지만 인욕이다.151)"는 것이 아니겠는가.스스로 겸손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속삭이며 말하기를, "만약 이 놈이 없었다면 주자는 우 리 나라에서 아성(亞聖)이 되지 못했을 것이고, 여흉(驪兇 윤휴)은 참다운 유자(儒者)가 되었 을 것이며, 홍타시(洪打豕)152)는 천하의 정의로운 군주가 되었을 것이다." 하였네. 집사께서 이 말을 듣는다면 한바탕 크게 웃음을 터뜨리라 생각하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는 스스로 겸손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속삭이며 말하기를, "만약 이 놈이 없었다면 간옹은 참으로 인허를 내라는 분부가 있는 것처럼 되어 대현(大賢)이 될 수 없을 것이고, 음성의 오진영은 선사의 문고를 간행한 큰 공적이 있게 될 것이며, 일본(日本)은 천하에 정의로운 군주가 될 것이다." 하였다. 【오진영이 크게 쓰고 특별하게 써서 말하기를, "주머니 속의 화폐가 왕래하고, 차표와 편지에 도장이 찍히며, 누구의 집에나 해와 달이 비추네.153)"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일본을 떠받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는 이것을 장난삼아 한 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아래에 또 말하기를, "신중히 처신하여 다른 사람의 왜삭(倭朔)154)을 함부로 꾸짖지 말라."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말을 바로 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 유생의 갓을 쓰고 유생의 옷을 입은 사람으로서 유생의 갓을 쓰고 유생의 옷을 입은 동문의 사람을 일본의 관아에 나아가 고소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일본을 머리로 떠받들며 정의로운 군주로 여기는 것이 아니겠는가.】주자는 원우(元祐)155)의 인물을 논하면서 원성(元城)156)을 중도(中道)로 여겼습니다. 지금 살 펴보건대, 원성이 소인을 공격한 것이 너무나 강하여 만사(萬死)의 지역에 이르게 되었으 니,157) 너무 심했다고 이를 만하지만 주자는 중도로 허여하였으니, 어찌 당시에 처리한 것 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아 오늘날에는 단지 편의만 차지하고서 스스로 중도를 얻었다고 여기니, 이런 풍습이 한번 성대해질까 매우 걱정되고 두렵습니다. 【〈박화숙(朴和叔)에게 답함〉 아래도 같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주희(朱熹)와 송시열(宋時烈)의 의논이 이와 같은데도 오늘날 간옹의 문도들은 오히려 음성의 오진영을 변론하여 성토하는 데 죽을힘을 다하는 것을 중도에서 지나침이 너무 심한 것으로 여긴다. 내가 앞의 말을 고려하지 않는 이 사람들에 대해 어찌하겠는가. 한탄스러울 따름이다.맹자는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막을 것을 말하는 사람을 성인(聖人)의 무리라 하였고, 주부자(朱夫子 주희(朱熹))도 또한 임금을 시해한 역적은 반드시 사사(士師)158)가 아니더 라도 그들을 주벌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159) 하물며 오늘날 존형 같은 분은 얼마나 중요 한 자리에 있는데 도리어 지언(知言)과 양기(養氣)160)를 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물러나 핑 계 대며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만약 반드시 지언하고 양기하여 반드시 맹자와 같은 뒤에야 비로소 이단(異端)을 물리칠 수 있다면 이는 반드시 사사인 뒤에야 비로 소 임금을 시해한 역적을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니, 다 사라지지 않을 인류가 얼마나 되겠습니까.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늘날에 또 오진영이 선사를 무함했음을 분명하게 아는 사람들이 또 "그렇긴 하지만 나는 스스로 나의 학문을 닦아야하기 때문에 옳으니 그르니 하는 곳에 참여하지 못한다."라고 말하는데, 나는 옳고 그름을 밝히는 것 이외에 다시 무슨 학문이 있는지 모르겠다. 또 학문을 하고서 선사의 무함조차 변론하지 않는다면 학문을 어디에 쓰겠는가. 이는 지언과 양기를 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물러나 핑계 대는 것보다 더욱 심한 것이니, 천리(天理)와 인심(人心)이 어찌 어두워지고 이지러져 남아 있는 것이 없게 되지 않겠는가.이 사람이 주자를 공격해 배척했으니, 이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이며, 그의 당이 되어 도왔던 사람은 《춘추(春秋)》의 법으로 논한다면 먼저 죄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오진영이 선사를 무함하고 선사의 문고를 고쳐 어지럽혔으니, 이는 간옹 문하의 난적이며, 그의 당이 되어 도왔던 사람은 춘추의 법으로 논한다면 또한 먼저 죄를 받아야 할 것이다.집사께서 이해(利害)와 화복(禍福)의 기미에 밝아 머뭇거리고 관망하면서 기꺼이 몸소 맡으 려 하지 않고, 이 어리석고 망령된 사람으로 하여금 대신 이 일을 맡게 하시니, 이것이 어 찌 인자(仁者)의 대단히 공정한 마음이겠습니까. 집사께서는 단지 이 책임을 맡지 않았을 뿐 만 아니라 도리어 저들의 세력을 돕고 계시니, 한때의 영화와 명예는 기뻐할 만하지만 훗날 의 공의(公議)는 어찌하시겠습니까.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이 말은 선사께서 신앙여(申仰汝)에게 보내 편지 속의 말뜻이고 게다가 더욱 엄중하기까지 한다. 오늘날 호남과 영남 사이에서 중간적 입장을 지키며 머뭇거리는 사람들이 이 가르침을 읽는다면 마치 차가운 물을 등에 끼얹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양주(楊朱)는 의(義)를 행하는 것을 배운 자였으나 위아(爲我)에 치우쳤고, 묵적(墨翟)은 인 (仁)을 행하는 것을 배운 자였으나 겸애(兼愛)로 흘렀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쓰는 근본을 보면 어찌 삿됨이 있겠습니까. 모두 선한 마음으로 그렇게 행한 것이었습니다. 다만 근본적 인 부분에서 미세하게 털끝만큼의 차이가 있었을 뿐입니다. 이 때문에 맹자가 그 화를 미루 어 말하여 부모도 없고 군주도 없게 되어 짐승이 되는 데로 빠질 것이라고 하면서 말로 그 들을 물리치는 데 조금의 관용도 베풀지 않은 것입니다.161) 맹자가 어찌 그들의 본정을 살 피지 않고 이런 가혹한 의논을 했겠습니까.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설자(說者)는 "오진영도 또한 선사를 존숭한 사람이니, 그 마음 쓰는 것을 근본을 따져보면 어찌 삿됨이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근본적인 부분에서 공적(功績)을 기뻐하고 명예를 좋아하는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이 때문에 끝내 선사를 무함하여 다른 사람의 입을 막았고 문고를 고쳐 자기의 능력을 자랑하였으며, 동문에 화를 끼치고 선사의 손자를 일본의 관아에 구속시킴으로써 세력을 확장하여 스승도 없고 군주도 없는 지경에 귀결되는 데 이른 것이니, 또 그 화를 미루어 볼 것도 없이 자신이 직접 범한 것이다. 어찌 말로 물리치는 데 조금이라도 관용을 베풀 수 있겠으며, 또한 어찌 그의 본정을 살피지 않고 이런 가혹한 말을 했겠는가.들으니 집사께서 오늘날 의논은 차라리 모호하게 했으면 한다고 했다는데 내심 깜짝 놀라고 비통하게 탄식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대체로 집사께서 주자에 대한 믿음은 부족하 고 윤에 대한 믿음은 너무나 지나친 때문일 것입니다. 대저 혼연渾然)하여 모남이 없는 것 이 어찌 주자가 바라지 않는 바가 아니겠으며, 또한 할 수 없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다만 세상이 쇠퇴하고 도가 미약하여 피음사둔(詖淫邪遁)162)이 함께 일어나 서로 내달리면서 하 늘에 닿고 길을 막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 담언(談言)과 논설(論說)이 어쩔 수 없이 명백하고 통절하여 세상의 정도에 어둡고 사도에 빠진 자들을 깨우쳐 준 것입니다. 비록 이 로 인해 거짓된 학문이 되고 역도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을 거의 면치 못했지만 또한 후회하 지 않았던 것입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혼연渾然)하여 모남이 없는 것이 어찌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겠으며, 또한 어찌 할 수 없는 바가 아니겠는가. 다만 천리가 더욱 어두워지고 인심이 더욱 사특해져서 선사를 믿지 못하고 오진영을 너무나 지나치게 믿는 사람들 중에 심지어 "만약 유서(遺書)의 내용처럼 인허를 내는 것을 금지했다고 한다면 선사는 일절(一節)의 선비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석농(石農 오진영)의 말처럼 반드시 홀로 계실 때 인허를 내도록 분부함이 있는 뒤에야 비로소 도(道)가 크고 의(義)가 정밀한 참된 현인이 될 수 있다."라고 말하는 자가 있었는데,【자가 명옥(明玉)인 서진영(徐鎭英)이 많은 사람 가운데에서 크게 말한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휩쓸리듯 그 말을 따랐다. 이것이 피음사둔이 하늘에 닿고 길을 막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분명하게 논설하고 통렬하게 변론했던 것이고, 이것으로 노비가 되고 간교한 사람과 풍속을 무너뜨리는 사람이 되었으며, 또 거의 검사국(檢事局)의 옥에서 병들어 죽게 되는 것을 면치 못했으나 또한 후회하지 않았던 것이다.주자가 일찍이 순숙(荀淑)의 도가 매우 성대함을 논하였고163), 순상(荀爽)과 순욱(荀彧)이 역 적(逆賊)에게 붙은 것164)에 대해서는 또 그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가 논하여 말하기를, "당 시 부형(父兄)과 사우(師友) 사이에도 또한 자연히 일종의 의논을 두어 꾸미고 덮음으로써 갑작스럽게 그것을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이 그른 줄 깨닫지도 못하고 참으로 옳은 것 으로 여기게 하였으니, 삿된 말이 마구 유행하는 것이 이 때문에 홍수나 사나운 짐승의 해 보다 더 심한 것이다. 근래에 책을 읽다가 이 생각이 분명함을 깨닫게 되니 앉으나 서나 자연히 놓을 수 없었다. 비록 이것으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 끝내 곤궁하여 죽을 줄 알 지만 진실로 달게 여기며 스스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아, 오늘날 집사의 이 른바 "모호(糢糊)함"이 어쩌면 그렇게도 주자의 이른바 "덮어버림[蓋覆]"과 딱 맞는지요. 이 것이 아마 병통이 든 근원일 것입니다.나 택술은 삼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순상과 순욱이 역적에게 붙는 일로 인해서 거슬러 올라가 그의 부형과 사우에게 본래 일종의 삿된 논의가 있었을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그렇다면 문인이 인허를 낸 것으로 인해 사람들이 그의 스승이 혹 인허를 낼 생각이 있었다고 의심하는 것도 또한 염려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죄를 짊어지고 변론하였으니 선사의 마음을 밝힐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도리어 문인들의 입으로 크게 말하기를, "우리 선사께서 일찍이 인허를 내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 있었다." 하고, 또 인허를 내지 말라는 유서는 위조(僞造)라 하니, 사람들이 이것을 근거로 곧장 선사를 논하는 것이 어찌 다만 자손으로 인해 그 부조(父祖)까지 거슬러 올라가 논하는 것에 비할 뿐이겠는가. 天有陰陽, 地有華夷, 人有君子小人, 方以類聚, 物以群分. 如此剖判之後, 一番人所爲, 未必 盡善, 一種人所爲, 未必盡非. 然扶抑之道, 則不可不嚴. 故元祐諸人, 憂蔡確之不可制, 至按 以詩句. 雖似已甚, 然朱子不甚非, 而反以范忠宣爲不是者, 豈以淑慝之大分已定, 則左右之道, 有不得不然耶?【〈上安隱峯〉】澤述謹按: 陰震誣師改稿而禍士者也, 湖人辨誣正稿而被禍者也, 淑慝之大分已定矣. 說者猶謂"湖未必盡是, 嶺未必盡非." 蓋不知尤翁此義者也.今之論者若曰: "渠是何人, 而敢攻宣擧?"云爾. 則臣亦有說焉. 朱子曰: "邪說害正, 人人得而 攻之, 不必聖賢." 然則臣之所爲, 亦不爲全無所據矣.【〈上疏〉 下同.】澤述謹按: 今之論者亦有曰: "金澤述渠是何人, 敢攻老成負望之吳震泳也?" 夫誣師改稿, 豈非邪說害正, 人人得而攻之者乎? 況凡在師門弟子之列者乎? 爲此說者, 何不少致意於尤翁之言乎?設使以臣此意爲出於欲掩貶惡之云, 亦有所不然者. 陽虎曰: "爲富不仁, 爲仁不富." 陽虎之 意, 實出於爲富之意, 而其爲仁之言, 則實天理也. 故孟子特取而表章焉. 渠輩果以孝廟之德爲 果宜於世室, 則何敢以此議之出於臣, 而倡言排之哉澤述謹按: 論者又有謂"某之斥震, 出於修嫌之私." 我於震本無可嫌, 則此固萬萬不當. 設有然者, 其爲師辨誣, 實天理也. 論者果以先師爲無認意認敎, 則何敢以此辨之出於我, 幷與其言而廢之哉?竊聞比者, 憲臣投疏, 提起李珥落髮之說, 而引長生爲證. 臣亦嘗見故文忠公臣張維文集, 有記 故知事臣趙緯韓之言矣. 其言果以臣師有所云云也, 臣於是常不勝甚疑訝也. 維乃長生之高弟 也, 其聞緯韓之言, 何不爲長生痛辨其誣, 而只爲珥分疏耶?設使珥眞有此事, 亦不當自長生證之, 況萬萬無此乎? 昔葉公曰: "吾黨有直躬者, 其父攘羊, 而子證之." 孔子曰: "吾黨之直者, 異於是. 父爲子隱, 子爲父隱, 直在其中." 使長生果爲此, 則與證父攘羊者何異?且憲臣引張維說, 以爲"落髮是粗迹而不足辨, 故長生亦言之." 若然則何以又曰: "諸臣備陳不 落髮之實狀也." 諸臣備陳不落髮之實狀, 而獨長生言之云者, 亦獨何心也? 臣竊爲長生寃痛也. 以高明之弟子而證之, 則珥之落髮, 終不可辨明, 珥之所遭, 何其甚也?澤述謹按: 尤庵於栗谷落髮之誣、沙溪證師落髮之誣, 苦口辨明, 至有告君之文者如此. 引此以論今日吾門之事, 則不待辨而自明矣. 設使艮翁眞有認敎, 不當自震泳證之, 況萬萬無此乎? 然而震泳猶且强證之曰: "臨死不易辭." 是父不攘羊其子證之者也. 且落髮之事, 當時有以爲粗迹而不足辨者, 尤翁猶如此說. 況認敎之說, 爲大義之所關乎? 嗚呼! 震一邊之所稱高明, 以高明之弟子而證之, 則艮翁之認敎, 終不可辨, 艮翁之所遭, 何其酷也?昔范祖禹於伊川, 非純師也. 伊川之被誣也, 祖禹不卽辨理. 則朱子猶且譏之.澤述謹按: 於非純師之地, 朱子猶以不卽辨理譏之. 今之純師艮翁者, 乃經年閱歲, 師誣益深, 而不惟終不之辨, 反譏同門之從事辨理者, 其得罪於朱子者, 顧何如也?天地之間, 陰陽二物, 不能相無. 故有君子, 則必有小人, 有正論, 則必有邪議. 其强弱勝負之 勢, 迭相推盪, 而君子與正論, 必弱且負, 小人與邪論, 必强且勝. 此邵子詩所謂"陽一而陰二" 者也. 然於久遠之後, 則有所謂"不泯"者存. 故弱而負者常伸, 强而勝者反屈, 此亦必然之理也. 夫所謂"不泯"者, 何也? 天理人心也. 然世道有升降, 運氣有騰倒. 故當伸者, 不能大伸, 宜屈 者, 不必全屈, 此亦理之或然者也. 雖然, 主張此道之人, 苟明是非邪正之源, 抑彼而尊此, 爲 君子謀, 而不爲小人謀, 則所以範圍天地, 陶成治道也, 無難矣.澤述謹按: 天下無春秋之義, 艮翁非春秋之學則已. 不然, 今於湖嶺之事, 孰爲君子? 孰爲小人? 孰爲正論? 孰爲邪議? 不辨而明矣. 其勝負屈伸, 亦推此可知. 然但皓天不復, 河淸無期, 未知所謂"主張此道之人, 明是非之源, 而抑彼尊此"者, 果何時而出耶? 噫!陰陽一箇大偏論, 邪正一箇大朋黨, 喜偏論而矯枉過直者, 固不足道, 惡朋黨而含糊兩可者, 尤 害於事也. 然偏黨之中, 亦有大小輕重之分焉, 小者不當爲, 而大者不得不爲也, 輕者在所略, 而重者不可略也.【〈上白江李相國書〉】澤述謹按: 準以尤翁此說, 則偏黨本非不好題目, 但看所偏黨者, 是邪是正耳. 湖嶺之間, 所謂"中立"者, 豈非所謂"惡黨兩可之尤害事"者耶? 若言其大小輕重之分, 則關先師分上, 誣認改稿之辨, 不得不爲而不可略者也, 關門人分上, 互有得失之爭, 不當爲而在所略者也.彼得罪於朱門, 正是亂賊之自干天誅者. 而其徒終不知倒戈而歸順.【〈與兪武仲〉】澤述謹按: 驪鑴侮慢朱子, 改註中庸. 故尤翁謂得罪朱門之亂賊. 今陰震名尊艮翁, 而旣誣以認敎, 又改大稿本文, 則其爲侮慢甚矣. 此不可謂得罪艮門之亂賊乎? 而其徒終不知倒戈而歸順, 何其迷也?至於美村黨鑴之斥, 則人孰不以爲過? 然不自知其爲過, 而猶以爲不及.【〈與趙士達〉】澤述謹按: 澤述於陰震及黨震者之斥, 不自知其爲過者, 亦有所受於尤翁矣.朱子嘗責時宰曰: "忠邪之分, 察之有未明; 消長之誡, 信之有未篤, 而又以一身利害之私, 參錯 乎其間, 則今之所謂'持平'者, 乃所以深助小人之勢, 以爲君子之病. 終見彼黨日盛, 此勢日孤, 天下之事, 將有不可爲者." 今者老兄之言, 何其與朱子說一切相反耶?【〈答閔台叟〉】澤述謹按: 今之所謂"中立"者, 旣不察邪正之分, 又參以一身之私, 則其云持平者, 乃所以助彼, 而況名爲中立, 而心實在於助彼者, 亦有其人乎? 此所以嶺黨日盛, 而湖勢日孤.和合彼此, 惟有明道之德者能之, 其餘則未免拖泥帶水. 此正天理人欲相似而實異者, 朱子之言 詳矣.【〈與李季周〉 下同.】澤述謹按: 近日, 某某之欲我與震和合, 而其所以爲說者, 無條件別白, 此非所謂"未免拖泥帶水, 而似天理而非2)人欲"者歟?竊不自遜, 私語於心, 以爲"如無此漢, 則朱子於東方, 不得爲亞聖, 而驪凶爲眞儒, 洪打豕爲天 下義主矣." 執事聞之, 想發一大笑.澤述謹按: 澤述竊不自遜, 私語於心曰: "如無此漢, 則艮翁眞有認敎, 不得爲大賢, 陰震眞有刊師稿之大功, 日本爲天下之義主矣."【震大書特書曰: "囊中紙貨往來, 車票書詞附印, 誰家日月照臨." 此豈非戴日本者乎? 渠以此爲戱言, 然其下又言"愼勿妄罵人之倭朔" 則此豈非正言者乎? 且以冠儒服儒之人, 就訴冠儒服儒之同門人於日府, 則豈非頭戴以爲義主者乎?】朱子論元祐人物, 以元城爲中. 自今觀之, 元城攻小人太强, 以至萬死之域, 可謂已甚, 而朱子 許以中道, 豈非以當時所處理當如是耶? 今日只占便宜, 而自以爲得中, 此風一盛, 甚可憂懼. 【〈答朴和叔〉 下同.】澤述謹按: 朱宋之論如此, 而3)今爲艮翁門徒者, 猶以盡死力於辨討陰震, 爲過中已甚. 吾於此人之不恤前言何哉, 可嘆也已.孟子以能言距楊墨者爲聖人之徒. 而朱夫子亦以爲弑君之賊, 不必士師而誅之. 況今日如尊兄, 何等地位, 而乃以未能知言養氣, 退托而不爲之所耶? 若必知言養氣, 必如孟子而後, 乃能攘斥 異端, 則是必士師然後乃治弑君之賊, 人類幾何不盡哉?澤述謹按: 今又有明知震之誣師者, 又謂"然而吾則自修吾學, 故不參於是非之場." 吾未知明是非之外, 復有何學. 且學而不辨師誣, 焉用學爲哉? 此退托以未能知言養氣而加甚焉者, 天理人心, 其何不晦蝕而無餘哉此人攻斥朱子, 則是斯文亂賊也. 其黨助者, 論以《春秋》之法, 則當先受罪矣.澤述謹按: 震也誣陷先師, 改亂師稿, 則是艮門亂賊也. 其黨助者, 論以《春秋》之法, 則亦當先受罪矣.執事明於利害禍福之幾, 依違觀望, 不肯身任, 而使愚妄者, 代受此事, 此豈仁者大公之心乎? 執事不但不任此責, 乃反助彼勢, 一時榮名則可喜, 而柰後世之公議何?澤述謹按: 此卽先師與申仰汝書中語意, 而又加嚴焉. 今湖嶺之間, 間立依違者讀此訓, 得無如冷水澆背矣乎?楊朱學爲義者也, 而偏於爲我, 墨翟學爲仁者也, 而流於兼愛. 本其設心, 豈有邪哉? 皆以善而 爲之耳. 特於本源之際, 微有毫釐之差. 是以孟子推言其禍, 以爲無父無君而陷於禽獸, 辭闢之 不少假借. 孟子豈不原其情而爲是刻核之論哉?澤述謹按: 說者謂"震亦尊師者也, 本其設心, 豈有邪哉?" 此非曰"不然." 但於本源之際, 有喜功好名之差. 是以終而至於誣師而禦人之口, 改稿而衒己之能, 禍同門拘師孫於日府, 以張其勢, 歸無師無君之境, 則又不待推其禍而身親犯之. 豈得不辭而闢之不少假借乎? 亦豈不原其情而爲是刻核之論哉?聞執事以爲今日議論, 寧爲糢糊. 竊不勝愕然而駭, 衋然而嘆也. 此蓋執事以朱子信不及, 而信 尹太過之故也. 夫渾然無圭角, 豈非朱子之所不欲? 亦非所不能爲也? 只以世衰道微, 詖淫邪 遁, 幷起交馳, 以至於滔天而塞路, 故其談言論說, 不得不明白痛切, 以牖世之昏蔽陷溺者. 雖 以此爲僞學爲逆魁, 幾不免而亦不悔.澤述謹按: 渾然無圭角, 豈非我之所欲? 亦豈不能? 只以天理愈晦, 人心愈邪, 不信先師而信震太過者, 至有謂"若如遺書之禁認, 先師不過爲一節之士, 必有獨命之認敎, 如石農之言, 然後乃爲道大義精之眞賢者."【徐鎭英字明玉大言於衆中】, 而人皆靡然從之. 此非詖淫邪遁滔天塞路而何? 所以不得不明論痛辨, 而以此爲奴爲奸人敗俗人, 且幾不免於檢獄之瘐死, 而亦不悔矣.朱子嘗論荀淑之道甚盛, 而至於爽彧之附賊, 則又溯其源而論之曰: "當時父兄師友之間, 亦自 有一種議論, 文飾蓋覆. 使驟而聽之者, 不覺其爲非而眞以爲是. 邪說橫流, 所以甚於洪水猛獸 之害. 年來讀書, 只覺得此意思分明, 參前倚衡, 自不能舍, 雖知以是爲人所惡, 終窮而死, 誠 甘樂, 不自以爲悔也." 噫, 今日執事所謂"糢糊", 何其與朱子所謂"蓋覆"者符合耶? 此其受病 之源也.澤述謹按: 因爽彧之附賊, 而溯而疑其父兄師友之自有一種邪論. 則因門人之出認, 而人之疑其師之或有認意, 亦足可慮. 然我負其罪而爲之, 則足以明師之心. 今乃自門人之口而大言之曰: "吾師曾有認敎", 又以勿認之遺書爲僞造. 則人之據此而直論其師者, 豈但因子孫而溯論其父祖之比而已哉? 원우(元祐)의……아니겠습니까 원우는 송(宋)나라 철종(哲宗)의 연호로, 조모인 선인태후(宣仁太后)가 수렴청정을 했던 시기이다. 제현은 왕안석의 신법(新法)을 반대하고 사마광(司馬光)의 구법(舊法)을 지지했던 문인(文人)과 학자들을 말한다. 채확(蔡確)은 왕안석의 신법(新法)을 적극 지지했던 인물로, 일찍이 안륙현(安陸縣)에 있는 거개정(車蓋亭)에서 노닐 때에 "높도다 이름난 신하 학증산이여, 상원 연간에 말은 충직했고 지조는 곧았네〔矯矯名臣郝甑山, 忠言直節上元間.〕"라는 시구를 지어, 선인태후를 측천무후에 비하고, 자신을 측천무후(則天武后)를 세우도록 간하여 정권을 잡은 학처준(郝處俊) 증산(甑山)은 봉호임))에 가탁하였다. 이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범조우(范祖禹), 우정언(右正言) 유안세(劉安世) 등이 이 시구를 논박하여 그에게 죄를 물어 귀양 가게 했는데, 범순인(范純仁 충선(忠宣)은 시호임)이 귀양은 너무 지나친 일이라고 말하여 채확을 구원하려고 하자, 주희가 그를 비판하여 "훗날 자신을 온전히 보존하기 위한 계책이다."고 하였다. 《宋史 卷471》 《宋子大全隨箚 卷3》 부자(富者)가 …… 못한다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나오는 말로, 맹자가 등 문공(滕文公)에게 나라 다스리는 법을 설명하면서 인용한 말이다. 세실(世室) 공덕(功德)이 있는 임금의 신주를 영녕전(永寧殿)으로 옮기지 않고 대대로 종묘(宗廟)의 신실(神室)에 봉안하는 것을 말한다. 1683년(숙종9)에 당시 영중추부사였던 송시열은 명(明)나라에 대한 의리를 드러내고자 친진(親盡)에 이르지도 않은 효종의 신실(神室)을 세실로 삼도록 상소하여 숙종이 허락한 일이 《국역 숙종실록》 9년 2월 21일 기사에 보인다. 저 …… 있겠습니까 세실(世室)은 공덕(功德)이 있는 임금의 신주를 영녕전(永寧殿)으로 옮기지 않고 대대로 종묘(宗廟)의 신실(神室)에 봉안하는 것을 말한다. 1683년(숙종9)에 당시 영중추부사였던 송시열은 명(明)나라에 대한 의리를 드러내고자 친진(親盡)에 이르지도 않은 효종의 신실(神室)을 세실로 삼도록 상소하여 숙종이 허락한 일이 《국역 숙종실록》 9년 2월 21일 기사에 보인다. 헌신(憲臣)이 …… 삼았다 헌신은 홍수주(洪受疇: 1642~1704)를 가리킨다.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은 이이(李珥)와 송익필의 문인이며, 송시열과 송준길 등 서인과 노론계 인물들의 스승이다. 이 상소는 《숙종실록》 16권 11년 5월 26일 3번째 기사에 보인다. 고(故) …… 것 《국역 계곡만필》 제2권 〈세상에서 율곡이 머리를 깎았다고 하는 것은 거짓이다[世傳栗谷剃髮者妄也]〉에 "조 승지 지세(趙承旨持世 지세는 조위한(趙緯韓)의 자(字)임)가 나에게 말하기를,'율곡(栗谷)이 입산(入山)할 때에 머리를 깎았다고 말하는 이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하는 이도 있기에, 내가 일찍이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호임)에게 물어 봤더니, 사계는 머리를 깎은 것 같다고 대답하였다.' 하였다." 라는 내용이 보인다. 옛적에……하였습니다 《논어》 〈자로(子路)〉에 나오는 말이다. 옛적에……꾸짖었다 범조우(范祖禹, 1041~1098)는 북송(北宋) 때의 문신(文臣)으로 자는 순부(淳夫)·몽득(夢得)이며, 화양(華陽) 사람이다. 정호(程顥, 1032~1085)·정이(程頤, 1033~1107) 형제를 사사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의 문인으로 역사학에 뛰어나 사마광과 함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편수하였다. 주희(朱熹)가 여백공(呂伯恭)에게 답한 편지에서 범조우에 대해 논하기를, "일이 일어난 당시에 변론하지 못하고 몇 년 지난 뒤에 밝혔으니, 이는 강직함이 부족하여 정이(程頤)와 소동파(蘇東坡) 양쪽 모두를 따르려는 사심을 면치 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중하게 여긴 것이 정이에게 있었던 까닭에 끝내 의리를 공정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不能辨之於當時, 而發之於數年之後. 此則剛强不足, 不免乎兩徇之私者. 而其所重在此, 故卒不能其義理之公也.〕"라고 하였다. 《宋史 卷337 范鎭列傳》 《晦庵集 卷35 答呂伯恭》 타니대수(拖泥帶水) 진흙을 끌고 물을 띤다는 뜻으로, 질퍽거리는 진흙탕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우물쭈물 망설이기만 할 뿐 명확하게 결단을 내리지 못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찬리와 …… 인욕이다 저본에는 '似天理而非人欲'으로 되어 있으나, 앞뒤 문맥을 살펴볼 때 '非'는 연문(衍文)인 듯하여 번역하지 않았다. 홍타시(洪打豕) 금한(金汗)의 이름으로 청(淸) 나라 태종(太宗)을 말한다. 주머니 …… 비추네 화폐와 도장, 해와 달은 모두 일제의 통치를 상징하는 것으로, 일제의 세상에 살고 있음을 자각하고 일제의 통치에 순응해야 함을 나타낸 말이다. 왜삭(倭朔) 왜의 정삭(正朔 책력(冊曆)) 즉, 일본의 연호를 말한다. 원우(元祐) 북송(北宋) 철종(哲宗)의 전반기(1086~1093)의 연호로, 철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조모인 선인태후(宣仁太后)가 수렴청정하면서 왕안석(王安石)의 신법당(新法黨)을 물리치고 사마광(司馬光) 등을 등용하여 훌륭한 치적을 이루었던 시기이다. 《宋史 卷242 后妃列傳》 원성(元城) 송(宋)나라의 유안세(劉安世)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가 원성(元城)으로 좌천되어 원성 주부를 역임한 바 있기에 이렇게 칭하였다. 《宋史 卷345 劉安世列傳》 원성이 …… 되었으니 소인은 장돈(章惇)과 채경(蔡京) 등 간신들을 가리키고, 만사의 성은 원성처럼 한번 귀양 가면 살아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을 말하는 듯하다. 원성은 유안세(劉安世)로, '전상호(殿上虎)'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국사를 논함에 강직하였고, 장돈(章惇)이나 채경(蔡京) 등 간신들을 신랄하게 탄핵했다가 광동과 광서 등 영외(嶺外)로 일곱 번이나 귀양 갔으나 전혀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宋史 卷345 劉安世列傳》 사사(士師) 고대 중국에서 법령과 형벌, 옥사 등을 관장했던 관직의 이름이다. 맹자는 …… 하였습니다 《맹자》 〈등문공 하〉에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막을 것을 말하는 사람은 성인의 무리이다.〔能言距楊墨者, 聖人之徒也.〕"에 대한 주자의 주석에 "《춘추》의 법에 난신적자는 사람이면 누구나 토벌할 수 있으니, 꼭 사사(士師)일 필요는 없다는 것과 같다.〔如春秋之法, 亂臣賊子, 人人得而討之, 不必士師也.〕"라는 말이 나온다. 지언(知言)과 양기(養氣) 지언은 말이 도리에 맞는지를 파악하여 말의 이치와 마음의 병폐를 아는 것이고, 양기는 인의(仁義)를 쌓아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것을 말한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부동심(不動心)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공손추의 물음에 맹자가 "나는 말을 알며, 나의 호연지기를 잘 기른다.〔我知言, 我善養吾浩然之氣.〕"라고 대답한 데서 나온 말이다. 양주(楊朱)는 …… 것입니다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양씨(楊氏)는 자신만을 위하니 이는 군주가 없는 것이요, 묵씨(墨氏)는 똑같이 사랑하니 이는 아버지가 없는 것이다. 아버지가 없고 군주가 없으면 이는 금수(禽獸)이다.〔楊氏爲我, 是無君也, 墨氏兼愛, 是無父也. 無父無君, 是禽獸也.〕라고 하여 양주의 자기중심주의와 묵적의 겸애주의를 모두 비판하였다. 피음사둔(詖淫邪遁) 부정(不正)한 말의 네 가지 대표적 병폐로, 편벽된 말[詖辭]ㆍ방탕한 말[淫辭]ㆍ부정한 말[邪辟]ㆍ도피하는 말[遁辭]를 가리킨다. 말을 안다[知言]는 것에 대한 물음에 맹자(孟子)가 "편벽된 말에 그 가리운 바를 알며, 방탕한 말에 빠져 있는 바를 알며, 부정한 말에 괴리된 바를 알며, 도피하는 말에서 논리가 궁함을 알 수 있다.〔詖辭知其所蔽, 淫辭知其所陷, 邪辭知其所離, 遁辭知其所窮.〕"라고 대답한 데에서 나온 말이다. 《孟子 公孫丑上》 주자가……논하였고 순숙(83~149)은 순자(荀子)의 11세손으로, 자는 계화(季和)이고, 낭릉후상(朗陵侯相)에 봉해졌다. 그의 검(儉)ㆍ곤(緄)ㆍ정(靖)ㆍ도(燾)ㆍ왕(汪)ㆍ상(爽)ㆍ숙(肅)ㆍ부(敷) 등 여덟 아들이 모두 명망이 뛰어나 '순씨팔룡(荀氏八龍)'이라 일컬어졌다. 《後漢書 卷62 荀淑列傳》 주희(朱熹)는 순숙의 어짊을 지극히 칭찬하여 '추월한강(秋月寒江)'이라고 하였다. 《晦庵集 卷85 聚星亭畫屏賛》 순상(荀爽) …… 것 순상은 순숙의 여덟 아들 중에 한 명으로, 동탁(董卓)이 전횡하던 조정에 몸담았고, 순욱은 순숙의 손자로, 당형(唐衡)의 사위가 되고 조조(曹操)의 신하가 된 것을 말한다. 《後漢書 卷62 荀爽列傳》 《後漢書 卷70 荀彧列傳》 非 앞뒤 문맥을 살펴볼 때 연문(衍文)인 듯하다. 而 저본에는 '而而'로 되어 있는데, 중첩된 것으로 보아 '而'로 교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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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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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 여직187)에게 올리는 제문 祭叔弟汝直文 병술년(1946) 2월 6일은 나의 셋째 아우 여직(汝直)이 세상을 떠난 날이다. 큰형 후창(後滄) 노인은 슬픔을 이기지 못한 채 살고자 하는 뜻이 없는 듯하다가 그 후 139일이 지난 6월 27일 경자일(庚子日)에야 비로소 글을 짓고 곡하며 말한다.아아, 그대의 죽음은 하늘 때문인가 사람 때문인가? 사람들은 항상 말하기를 일을 계획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고, 일을 완성하는 것은 하늘에 있다고 한다. 나고 죽음은 사람의 일 가운데 큰 것인데, 지친(至親)을 잃음에 이르러서는 천명을 모르는 채 감정에 휩쓸려 지나치게 슬퍼하면, 이는 이치에 통달한 군자가 아니다. 노력을 다하지 않고서 천명이라 핑계대고 조금의 근심도 없으면, 이는 도리를 해치는 잔인한 사람이다.그대의 죽음은 과연 하늘 때문인가 사람 때문인가? 그리고 나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람인가, 하늘인가? 그대 같은 선량한 사람을 어이하여 하늘이 장수를 막았단 말인가? 하물며 이미 경술년(1910)에서 계축년(1913)까지 여러 해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이 가물가물 힘없이 죽어가던 재난의 강과, 계미년(1943)에 크게 번진 역병 음증(陰證)의 위태로운 바다를 건넜는데, 어떻게 올봄 육칠일 사이에 별 까닭이 없는 빌미를 끝내 이기지 못하였으니, 어찌된 일인가? 사람 때문이었을까?나는 늙고 혼미한 생각으로 전날에 효험을 보았던 방도를 이번에 다시 쓰고 있었네. 다만 그 때 온 집에 환자가 가득 차 있는 바람에 그대를 잘 돌보지 못하고 때를 놓쳐 잘못된 것일까? 대개 하늘의 도는 헤아리기 어렵고, 사람의 윤리는 다하기 어려우니, 하늘 때문인지 사람 때문인지 어찌 알 수 있으며 알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생각건대 그대가 평소 본디 허약하였고, 집안 선조들이 대대로 장수를 못 하셔서 반백년의 두 분 뒤에 아버님이 계셨다. 그래서 그대는 아들 셋에 두 며느리를 얻어 손자 하나를 슬하에 두었는데 그들에게는 조부와 증조부가 안 계셨다.188) 그대는 이 일에 서운해 말고, 하늘이 하는 일을 편안히 받아들이소. 나는 품행이 잘못되어 신명(神明)께 죄를 받았으니, 그대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막내딸(수원백씨 백만기(白萬基)의 처)이 세상을 떠났고, 둘째 형 여호(汝昊)189) 내외도 다 세상을 떠났다네. 이것은 모두 나에게 내린 벌인데 아우 내외와 딸에게까지 화가 미친 까닭이니, 내 어찌 감히 그대의 죽음을 사람 때문이 아니라며 스스로를 용서하겠는가?아아! 나의 이 모든 말을 그대는 알까 모를까? 나 또한 네 번의 상례로 넋이 달아나 죽을 날이 가까우니, 지하에서 만날 날이 멀지 않았네. 그런데 오늘은 중복(中伏)의 절기여서 성재(星齋)190) 종회(宗會)에서 전편(專便)의 사람을 보내 와 달라 청하네. 중제(重制)191)의 상복을 입은 몸으로 갈 수 없는데다, 또 전에 이날이면 매번 그대와 함께 가던 일이 생각나니, 이제 어떻게 차마 홀로 가겠는가? 어쩌다 그 때의 일을 떠올린 감회로 에이는 아픔이 갑절이네. 집에 새로 빚은 술이 있어 한 잔 붓고 궤연(几筵)에 고하지만 글이 내 마음을 다 하지 못하고, 곡해도 슬픔을 다 드러내지는 못하고 다만 간과 쓸개가 재가 될 뿐이요, 머리카락과 수염이 다 희어졌을 뿐이네. 영령은 여기 와서 이 형의 마음을 살펴주소! 維丙戌二月六日, 我叔弟汝直觀化之辰也。 伯兄後滄老夫悲不自勝, 如無欲生, 乃以厥後百三十有九日, 六月二十七日庚子, 始爲文而哭之, 曰: 嗚呼! 汝之死, 天耶, 人耶? 人有恒言, 謀事在人, 成事在天。 死生人事之大者, 凡於至親之喪, 不知命而任情過慟, 非達理之君子, 謀不盡而委命恝然, 是害理之忍人。 汝之死, 果天乎, 人乎? 而吾果爲何如? 人也, 天也? 以汝善良, 胡爲乎天遏其年, 且旣濟乎庚戌癸丑跨歲奄奄萬口無幸之津, 癸未大癘陰證末境之海, 而不得於今春六七日無何之祟者, 何也? 人也? 吾豈老悖不復用前日已效之謀於今日乎? 但時値患者盈室, 於汝則涉於緩不及者爲咎歟? 大抵天道難測, 人倫難盡, 其天其人何以知之, 知之亦何所益? 惟是汝素質虛弱, 家世無壽, 半百有二, 加於先子, 三子二婦一孫之在膝, 祖曾未有。 汝可無憾乎此, 而安其天。 吾則行已悖戾, 獲罪神明, 汝死未幾日, 季女化去, 昊弟內外幷沒, 此皆所以降罰於吾, 而禍及弟女, 豈敢以汝死之非人自恕乎? 嗚呼! 凡此所言, 汝其知乎, 否乎? 吾亦禠魄於四喪, 死亡無日, 地下相見, 不遠伊邇。 第今朝中伏俗節, 星齋宗會遣使專請, 身有重制, 旣不可往, 且念前此是日每與汝往, 今何忍獨行? 適感時事, 倍切痛割。 家有新釀, 酹告象生, 文不能盡意, 哭不能盡哀, 只有肝膽作灰, 須髮成雪而已。 靈庶來格, 諒乃兄心! 여직(汝直) 셋째 아우 김만술(金萬述)의 자이다. 앞 〈자사(字辭)〉의 주석 참조. 집안 선조……안 계셨다 김택술(金澤述, 1884~1954)과 셋째 아우 김만술(金萬述, 1895~1946)의 증조부 김석규(金錫圭, 1804~1835, 32세)와 조부 김경순(金景淳, 1825~1867, 43세)은 반백년(50세)을 못 누렸고, 부친 김낙진(金洛進, 1859~1909)도 겨우 반백을 넘겼다. 김만술은 세 아들 형수(炯洙, 1916~1975) 형락(炯洛, 1922~1959) 형방(炯坊, 1932~?, 출계(出系))과 첫째ㆍ둘째의 두 며느리, 그리고 여섯 살배기 손자 대중(垈重)을 두고 있었다. 여호(汝昊) 김택술 사형제의 둘째인 김봉술(金鳳述, 1887~1946.4.28.)의 자이며, 호는 송은(松隱)이며, 부인은 평택임씨(1885~1945.3.19.)이다. 성재(星齋) 최북(崔北, 1712~1786)이다. 본관은 무주(茂朱), 자는 성기(聖器)ㆍ유용(有用), 호는 성재(星齋)ㆍ기암(箕庵)ㆍ거기재(居其齋)ㆍ삼기재(三奇齋)ㆍ호생관(毫生館)등이다. 조선 영조(英祖) 연간의 화가로, 당대의 명류들과 교류하였다. 중제(重制) 9개월 이상을 입는 무거운 상복으로 대공복(大功服) 이내의 친인척 상례에 입는다. 대공친(大功親)에는 종형제자매와 장자부(長子婦) 이외의 자부ㆍ질부 등이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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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축문 告祝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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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조 매죽당 부군192)의 묘갈을 다시 세운 데 대해 고하는 글【임오년(1942)】 告十三世祖梅竹堂府君墓碣改竪文【壬午】 삼가 아룁니다 伏以비석에 새긴 글이 顯刻之文지난 숙묘조에 粤在肅廟외손193)인 撰自宅相이 충숙공194)에 의해 지어졌는데 李忠肅公세월이 멀어짐에 글자가 없어져서 歲遠字湮읽을 수가 없으므로 不可以讀오랫동안 다시 세울 것을 도모하였으나 久圖改竪힘이 모자라 이루지를 못하였습니다 力綿未成이제 여러 자손들이 今玆諸孫함께 의논하여 힘을 합쳐서 協議同力좋은 돌을 새로 장만해 新具美石옛 묘갈문(墓碣文)을 새기니 用刻舊文아름다운 행실과 높은 풍도가 懿行高風후세에 길이 전해질 것입니다 永傳來許삼가 술과 과일을 차려 놓고서 謹以酒果정성을 펴 경건히 고합니다 用伸虔告삼가 고합니다 謹告 伏以顯刻之文, 粤在 肅廟, 撰自宅相李忠肅公.歲遠字湮, 不可以讀, 久圖改竪, 力綿未成.今玆諸孫, 協議同力, 新具美石, 用刻舊文, 懿行高風, 永傳來許.謹以酒果, 用伸虔告.謹告. 매죽당(梅竹堂) 부군(府君) 김종(金宗, 1471~1538)을 가리킨다. 자는 사앙(士仰)이다. 외손(外孫) 원문은 '택상(宅相)'이다. 진(晉)나라 위서(魏舒)가 어려서 외가(外家)인 영씨(甯氏)에게 양육되었는데, 집터의 풍수를 보는 이[相宅人]가 "장차 귀한 외손이 나올 것이다.[當出貴甥.]"라고 예언하였다. 위서는 외조모를 위해 이 예언을 이루겠다고 다짐하였는데, 그 예언대로 후에 사도(司徒)의 지위에까지 올랐다고 한다. 《晉書 卷41 魏舒列傳》 '택상'은 이 고사에서 비롯되어 나중에는 '외손'이라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이 충숙공(李忠肅公) 이세화(李世華, 1630~1701)를 가리킨다. 본관은 부평(富平), 자는 군실(君實), 호는 쌍백당(雙柏堂), 또는 칠정(七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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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와 5대 조고비의 묘에 고하는 축문【정묘년(1927)】 告六世五世祖考妣墓祝文【丁卯】 삼가 아룁니다. 伏以선사를 체천195)하는 것은 先祀遞遷집안의 체통을 드러낸 것으로, 著之家體풍속에 따라 제도를 이루어서 因俗成制후대 사람들이 따른 것입니다. 後世式遵《송자대전》을 상고해보니 爰攷大全사손의 대까지 한정하는데 限嗣孫代진실로 정론인 것이요, 寔爲論定옛 경전에 근거한 것입니다. 據之古經체천하는 것은 마음에서 나온 것인데 遷出乎情옛 제도를 헤아려 보면 중요한 일로, 稽古體重그 극치를 궁구해 보니 究厥極致유래가 있음을 압니다. 知在攸從또한 후대의 어진 이들이 亦越後賢이미 취사함이 있습니다. 已有取舍생각하건대 조고비는 念祖考妣자손들이 번성하여196) 孫麗有綿제방에 천사한 경우가 遷祀諸房수십 년인지라, 于數十祀이에 모두 구차하게 되어 迨玆幷窶예를 행하기가 진실로 어렵습니다. 爲禮實難삼가 옮겨 장사 지낸 뒤에 謹移喪餘해마다 한 번씩 묘소에 제사를 받드니, 歲一薦墓마음은 비록 억제하지만 情雖有抑예를 따져보면 마땅한 일입니다. 禮則是宜형세상의 이유로 생긴 일이지만 事出勢緣도리어 귀결은 올바름을 얻었으니, 反歸得正일에 나아가는 처음에 卽事之始감히 그 사유를 아룁니다. 敢告厥由존령께서는 굽어 살피시어 尊靈鑑臨부디 재앙을 내리지 마소서. 庶不降戾부디 흠향하소서. 尙饗 伏以先祀遞遷, 著之家體, 因俗成制, 後世式遵.爰攷《大全》, 限嗣孫代, 寔爲論定, 據之古經.遷出乎情, 稽古體重, 究厥極致, 知在攸從, 亦越後賢, 已有取舍.念祖考妣, 孫麗有綿, 遷祀諸房, 于數十祀.迨玆幷窶, 爲禮實難.謹移喪餘, 歲一薦墓, 情雖有抑, 禮則是宜.事出勢緣, 反歸得正, 卽事之始, 敢告厥由.尊靈鑑臨, 庶不降戾.尙饗. 체천(遞遷) 종손(宗孫) 집 사당에서 봉사(奉祀)하는 대수(代數)가 다한 선조의 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 보통 최장방(最長房)의 집으로 옮기는데, 최장방은 4대 이내의 자손 가운데 항렬이 가장 높은 사람을 말한다. 번성하여 원문은 '유면(有綿)'이다. 《시경(詩經)》 〈대아(大雅) 면(緜)〉에 "번성한 큰 오이와 작은 오이여.[緜緜瓜瓞]"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오이 덩굴이 끝없이 뻗어나가 오이가 주렁주렁 열리는 것처럼 자손이 번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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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고(先考)와 선비(先妣)의 묘에 고하는 글 告先考先妣墓文 유세차(維歲次) 정사년(1917) 7월 임진삭(壬辰朔) 26일 정사일(丁巳日)에 효자 택술(澤述)은 감히 현고(顯考) 학생부군(學生府君)과 현비(顯妣) 유인(孺人) 최씨(崔氏)의 묘소에 다음과 같이 밝게 고합니다.삼가 생각하건대 선군(先君)께서 평소 저를 돈독히 가르쳐 주신 덕에197) 불초한 제가 그지없는 은혜를 받아 다행히 사람 옷을 입은 소나 말의 꼴198)은 면하였습니다. 다만 셋째와 넷째 두 아우는 가장 늦게 태어난 탓에 잘 인도해 주시는 가르침199)을 끝마치지 못하였으니, 이는 산 사람에게나 죽은 사람에게나 한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계제(季弟) 억술(億述)이 근래에 절실히 학문에 뜻을 두어 이미 간재(艮齋) 전선생(田先生 전우(田愚))의 문하를 귀의처로 정하였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아, 밝으신 존령께서는 지성(志誠)이 얼마나 진실한 지를 살피셨을 것입니다. 불초한 저는 맹세컨대 서로 권면하여 집안의 명성을 잇도록 하겠습니다. 바라건대 가만히 도와주시고 묵묵히 인도해 주시어 그 몸을 이룰 수 있게 해 주소서. 스승과 제자의 분수를 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인지라, 삼가 술과 과일을 차려 놓고서 공경히 그 사유(事由)를 고합니다. 維歲次丁巳七月壬辰朔二十六日丁巳, 孝子澤述, 敢昭告于顯考學生府君顯妣孺人崔氏之墓.竊惟先君平日, 篤於義方, 不肖受恩罔極, 幸免馬牛之裾.但叔季二弟, 其生最後, 未卒式穀之誨, 是爲幽明之恨.何幸季弟億述, 近切志學, 已定依歸於艮齋田先生之門.尊靈於昭, 應鑑志誠之虛實.不肖誓與交勖, 用繼家聲.尙冀冥佑默導, 俾成厥身.師生定分, 其事至重.謹以酒果, 祗告厥由. 저를……주신 덕에 원문은 '篤於義方'이다. '의방(義方)'은 올바른 도리로 자식을 가르치는 것을 의미한다. 춘추 시대 위(衛)나라 장공(莊公)의 아들 주우(州吁)가 오만 방자하게 굴자, 석작(石碏)이 장공에게 충간(忠諫)한 말 가운데 "아들을 사랑한다면 그에게 올바른 도리로 가도록 가르쳐서 잘못된 곳으로 빠져 들지 않게 해야 한다.[愛子, 敎之以義方, 弗納於邪.]"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春秋左氏傳 隱公3年》 사람……꼴 마우금거(馬牛襟裾)와 같은 말이다. 이는 말이나 소에 의복을 입힌다는 뜻으로, 주로 학식이 없거나 예의를 모르는 사람을 가리킨다. 한유(韓愈)의 〈부독서성남(符讀書城南)〉에 "사람이 고금의 일에 통하지 못하면, 말과 소에 옷 입혀 놓은 꼴이라네.[人不通古今, 馬牛而襟裾.]"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韓昌黎集 卷6》 잘……가르침 원문의 '식곡(式穀)'은 자식을 잘 인도하여 훌륭히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 《시경》 〈소아(小雅) 소완(小宛)〉에 "뽕나무 벌레 새끼를 나나니벌이 업고 가도다. 네 자식을 잘 가르쳐서, 착한 것을 닮게 하라.[螟蛉有子, 蜾蠃負之. 敎誨爾子, 式穀似之.]"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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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묘에 고하는 글 告先妣墓文 유세차 병인년(1926) 11월 무진삭(戊辰朔) 18일 을유일(乙酉日) 남지(南至 동지(冬至))에 효자 택술은 삼가 과일을 갖추어 놓고 현비 유인 최씨의 권조(權厝)200)한 묘소에 다음과 같이 곡하며 고합니다.오호라! 효경(孝敬)과 덕선(德善)을 지닌 우리 선비에 대해 하늘은 반드시 살펴보았을 것이고, 신께서는 응당 들어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생전에 한 평생 동안 마음에 괴롭고 생각에 걸리며201) 부지런히 애쓰도록 하였으니, 죽어서는 만세토록 유택(幽宅)에서 편안히 자리 잡고 계시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마침내 임시로 합부(合祔)하여 편안하지 못하게 하고 허둥지둥하다가 자리를 잘못 잡아 이미 매장한 것을 곧바로 옮기도록 하는 것입니까. 하늘은 기필할 수 없고 신도 믿기 어려운 것, 이것이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입니까. 오호라! 애통합니다. 하늘은 기필할 수 없는 것이 아니고 신도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바로 불초하고 효성스럽지 못한 제가 쌓은 악행이 위로 포개져 도달한 결과일 것입니다. 일이 예측하지 못한 데에서 나와 나아갈 수도 물러날 수도 없는지라,202) 자갈에 뒤덮이고 풍우도 가리지 못한 채로 둔 지가 이제 8개월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자는 것부터 거처하고 왕래하며 관례와 혼례를 행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인사(人事)를 여느 사람들과 똑같이 행세하고 있으니, 이다지도 불초한 저는 미련하고 모집니다. 다만 아주 조금의 아직 사라지지 않은 떳떳한 본성이 있어 오장(五臟)203)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타들어가고 두 다리는 묫자리를 찾느라 온 산을 미친 듯이 내달립니다. 그러나 완전히 미련하고 모진 사람이 약간의 양심(良心)이 있다한들 어찌 이룸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러나 하늘이 살펴보고 신이 들어주는 것은 그러할 이치가 없다면야 그만이지만, 만일 있다면 효경(孝敬)한 선비(先妣)를 살피지 않고 누구를 살피겠으며, 덕선(德善)한 선비에 대해 듣지 않고 누구에 대해 듣겠습니까. 그 정천(定天)과 정신(正神)이 저의 불초함과 불효함 때문에 끝내 선비를 돕지 않지는 않을 줄을 저는 압니다. 그러나 다만 아직 일을 이루기 전이기에 이 마음이 애타고 근심스러워 하루가 삼추(三秋)와도 같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처럼 천시(天時)가 바뀌고 일양(一陽)이 벌써 생겨나는 때가 되었는지라204) 세월이 나를 기다려 주지 않으니,205) 애통하고 사모함이 더욱 새로워 마음을 스스로 가눌 수가 없기에 삼가 저의 심정을 쏟아냅니다. 삼가 존령께서는 살펴 알아주시기를 바랍니다. 維歲次丙寅十一月戊辰朔十八日乙酉日南至, 孝子澤述, 謹具果物, 哭告于顯妣孺人崔氏權厝之墓.嗚呼! 我先妣之孝敬德善, 天必鑑, 只神應聽之.生而使之困衡勤苦於一世, 沒可使之安定幽宅於萬齡, 胡乃權祔未得安寧, 倉卒錯占, 旣厝旋移.天不可必, 神難諶斯者, 乃至於此乎.嗚呼痛哉.非天之不可必, 非神之不可諶, 乃不肖不孝之積惡, 上累而到之也.事出不意, 進退維谷.薄掩乎石田風市之中者, 于玆八朔.猶且飢打食困打眠, 以至居處往還, 冠昏祭祀, 凡干人事, 無不自同平人, 若是乎不肖之頑忍也.但其一點秉彛之未泯, 五內幾焚於一日, 雙脚亂走乎萬山.然十分頑忍, 一分良心, 奚足以有成.雖然天鑑神聽, 無其理則己 ; 苟有之, 不於先妣之孝敬而何鑑, 不於先妣之德善而何聽.吾知其定天正神, 不因不肖不孝而終不佑於先妣也.惟是未遂之前, 此心焦悶, 一日三秋.遽玆天時改移, 一陽已生, 歲不我與.痛慕益新, 情不自已, 謹寫厥衷.伏惟尊靈, 庶垂鑑諒. 권조(權厝) 좋은 묏자리를 구할 때까지 임시로 매장하는 것이다. 권폄(權窆), 또는 중폄(中窆)이라고도 한다. 마음에……걸리며 원문의 '곤횡(困衡)'은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마음에 괴롭고 생각에 걸린 뒤에 분발하며, 얼굴빛에 징험되고 음성에 나타난 뒤에 깨닫는다.[困於心, 衡於慮而後作, 徵於色, 發於聲而後喩.]"라고 한데서 온 말이다. 나아갈……없는지라 《시경(詩經)》 〈상유(桑柔)〉에 "붕우들이 이미 참소하여 서로 선하게 하지 않도다. 사람들이 또한 말하기를 나아갈 수도 물러날 수도 없다고 하는구나.[朋友已譖, 不胥以穀, 人亦有言, 進退維谷.]"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오장(五臟) 원문의 '오내(五內)'는 우리 몸의 다섯 가지 장기(臟器)인 오장을 이른다. 일양(一陽)이……되었는지라 동지(冬至)에 양기(陽氣)가 처음으로 발동하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그러므로 동지를 일양이라고도 한다. 《주역(周易)》 〈복괘(復卦)〉에 11월은 복괘(復卦)에 해당되어 일양이 맨 밑에서 생긴다고 하였다. 참고로, 그 소(疏)에 "동지에 일양이 생긴다.[冬至一陽生.]"라고 하였다. 세월이……않으니 《논어》 〈양화(陽貨)〉에 "해와 달이 쉬지 않고 흘러가는지라. 세월이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구나.[日月逝矣, 歲不我與.]"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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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선고와 선비의 묘에 고하는 글 告先考先妣墓文 유세차 을축년(1925) 7월 을해삭(乙亥朔) 27일 신축일(辛丑日)에 불초자(不肖子) 택술은 망극한 재앙을 만나 성명을 보전하지 못한 채 매우 애통해하며 삼가 머리를 조아리고 현고(顯考) 벽봉거사(碧峰居士) 부군(府君)과 현비(顯妣) 유인(孺人) 최씨(崔氏)의 묘소에 다음과 같이 곡하며 아룁니다.오호라! 우리 현고께서는 비범한 재주를 지니고 입신양명(立身揚名)의 뜻을 품어서 일찌감치 과장(科場)에서 영명(英名)을 드날리고 지푸라기를 줍듯이 공업을 쉽게 이루었습니다. 이른 나이에 고자(孤子)로서 집안 살림을 맡은206) 뒤에는 조부모님과 어머니에 대해 변변찮은 음식207)으로도 봉양하기가 어렵게 되자, 거업(擧業 과거 공부)을 그만두고 몸소 밭을 갈면서도 담박하여 외적인 것을 사모하지 않았습니다. 불초한 제가 조금 장성하여 글을 읽을 줄을 알게 되자, 평생 완수하지 못한 지업(志業)을 저에게 이루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엄하게 독책하고 권면하여 깨우쳐주며 격려하고 점차적으로 연마시키며 성취시키는 모든 방법을 매우 지극하게 하지 않음이 없으셨습니다. 글을 지으면 점찬(點竄)208)을 직접 해 주시어 완본을 이루도록 하고, 글을 외우면 살피고 점검하기를 부지런히 하시어 거질(巨帙)을 이어 다 외울 수 있도록 하셨으니, 대개 불초한 제가 오늘날 대강이나마 문자를 이해하게 된 것은 털끝만큼도 모두 부군께서 잘 인도해 주신 가르침209) 덕분입니다.이윽고 세도(世道)가 크게 변하여 다시는 가망이 없게 되자, 불초한 저를 불러다 고하시기를 "옛말에, '학문을 하고서 넉넉함이 있으면 벼슬을 한다.'210)라고 하였는데, 학문을 하고서 넉넉함이 있기란 진실로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이다지도 변하였으니, 학문을 함에 비록 여력이 있다고 한들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또 사학(斯學 유학(儒學))의 요점은 오로지 도를 밝히고 몸을 성실히 하여 하늘이 부여해 준 것을 온전히 하고 성인이 전수하신 것을 이어서 명성과 녹리(祿利)의 사이에 참여하지 않는 데에 있다. 지금 세상 학문의 종주(宗主)로는 간재(艮齋) 전 선생(田先生 전우(田愚))이 계시니, 너는 찾아가 뵙도록 하라." 하시고는, 마침내 짐을 꾸리고서 봉산(蓬山) 월명암(月明菴)의 여차(旅次)에서 절하고 모셔오도록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간옹(艮翁 간재)께서 곽임종(郭林宗)이 모용(茅容)의 집에 방문했던 옛 일211)을 인용하시는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수레가 임하여 하룻밤을 묵음에 수레를 탄 장자(長子)212)와 금패(襟珮)213)를 착용한 후영(後英)들이 구름처럼 많이들 모여드니, 부군의 얼굴에 기쁜 빛이 돌았습니다. 불초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현인(賢人)이 지나는 곳마다 산과 시내에는 생기가 돌고, 쑥대와 싸리에는 광채가 더해지는 법이다. 비록 가령 네가 과거에 급제한다 하더라도 어찌 오늘의 즐거움만 하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인하여 폐백을 갖추어 천안(天安)의 금화산(金華山) 안에서 사제간(師弟間)의 분수를 정하게 하고는, 장원을 팔아서 여비(旅費)를 마련하여214) 해마다 반드시 두 차례씩 찾아오셨습니다.오호라! 불초한 제가 귀의할 바를 얻고 대강이나마 도리를 아는 것은 털끝만큼도 모두 부군의 가르침215) 덕분입니다. 온 마음이 성(性)을 높이고 우러르며 일마다 성에서 법을 취하며 어진 이를 구하는 정성216)과 장창(臧倉)에 대한 변론217)에 이르러서는 종신토록 변치 않았고, 옛것을 좋아하라는 교훈과 본성을 높이라는 지결(旨訣)은 백발이 되어서도 더욱 돈독하였으니, 이는 또한 부군이 간옹에 대해 순수하게 스승으로 섬기지는 않은 스승으로 삼은 것입니다.오호라! 불초한 제가 간옹을 스승으로 삼고 부군을 아비로 삼았습니다. 대개 선사(先師)의 운위(云爲)는 어떤 것인들 오묘한 도리와 정밀한 뜻이 아닌 것이 없었으나, 오직 외딴 섬에서 자정(自靖)하여218) 군신(君臣)과 화이(華夷)의 경계를 엄하게 하고 본성을 높이며 옳은 것을 구하고 죽어도 변치 않은219) 지결, 이것만을 제일의(第一義)220)로 삼았습니다. 부군의 언행(言行)도 어떤 것인들 아름다운 가르침과 훌륭한 행적이 아닌 것이 없었으나, 그중 최고는 사정(邪正)의 구분과 의리(義利)의 분별을 분명히 판단하여 동난(東亂)221)을 만나 이웃에서 사귄 비적(匪賊)의 괴수(魁首)를 끊어버리고, 단발령이 내려지자222) 부자간에 똑같이 죽기로 맹세한 것이니, 이는 평생 지절의 일부분223)이니, 불초한 제가 감화되고 가슴에 새긴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공사(公私)와 시비(是非)의 길에서 전전긍긍하여 감히 대충 지나치지 않아서224) 비록 이해(利害)와 화복(禍福)과 사생(死生)이 앞에 닥쳐와도 맹세코 아비와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려서 아비와 스승의 덕에 누를 끼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오호라! 사문(斯文)이 곤액을 당하여 간옹의 문하에 오진영(吳震泳)225)이라는 자가 나와 간사하고 패악하며 거짓되고 기만하는 짓을 함이 끝이 없습니다. 일제에게 인허를 구하지 말라는 뜻을 저버리고서 경부(京府)에 원고를 보내어 스승의 덕을 더럽히고, '스스로 헤아려서 하라.'거나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고 하셨다는 등의 말226)을 지어내서 스승을 '인가하신 뜻이 있으셨다.'거나 '인가하신 가르침이 있으셨다.'고 무함하며, '청원하여 자신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내용의 남기신 편지227)를 버리고서 그 무리인 강태걸(姜泰杰)에게 인허를 받아 간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선사의 해처럼 빛나고 옥처럼 깨끗한 의리와 서릿발처럼 엄하고 절벽처럼 우뚝한 절조가 흐릿해지고 너덜너덜해져서 차마 듣지 못할 기롱과 비난이 하늘과 땅에 가득 차 넘치게 되었습니다. 불초한 저는 망극한 스승의 무함을 애통해하고 크게 손상된 세도(世道)를 근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삼가 스스로를 헤아리지 못하고 공론을 거두어 취해서 남기신 편지를 배포하여 선사의 뜻을 밝히고, 성토하는 글을 보내 오진영의 죄를 바로잡아 스스로 스승을 높이고 도를 호위하는 뜻을 붙였으니, 이는 시비(是非)를 구별하는 없어지지 않는 천성에서 나온 것이요, 아비와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고 높이는 것을 자신(自信)한 것입니다.아, 저 오진영은 마침내 인허를 받아 간행하는 일을 성사시키기 어렵고 판매가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성토하는 글이 방해했기 때문이라고 하여 강태걸을 시켜 진천 경찰서(鎭川警察署)에 고소한 다음, 재차 전주 검사국(全州檢事局)228)에 고소하도록 하고서 '명예손해(名譽損害)'와 '업무방해(業務妨害)'에 대한 두 가지 법률을 변무인(辨誣人)에게 추가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제가 이 때문에 통문을 지었는데, 이 때문에 더욱 저 사람이 복수하고자 하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지난 달 초 2일에 이미 검사국의 조사를 받았는데 힘써 항변하여 굽히지 않았고, 이번 달 25일에 또 재차 부름을 받았는데 나아가지 않았으니, 앞으로 닥쳐올 재앙을 어찌 끝낼 수 있겠습니까. 끝낼 수 없다면 의리상 부모가 남겨주신 당당한 칠 척(尺)의 몸이 오랑캐에게 치욕을 받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겠으니, 다만 마땅히 기러기 털보다 가볍게 여기고229) 웅장(熊掌)을 취하여230) 스스로 한결같이 섬기며231) 목숨을 바치는 의리를 다하면 될 뿐입니다.오호라! 불초한 제가 어려서부터 완악하고 몽매하여 자식으로서의 직분을 닦지 못하였는지라 죄역(罪逆)이 누적되어 스물여섯 살에 현고(顯考)께 화가 뻗쳤고, 그 8년 뒤에 또 현비(顯妣)를 잃었으니, 원통해하고 통곡하며 뒤늦게 뉘우쳐봐야 다시 뵐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선조를 잇고 후손을 넉넉히 하여 집안의 명성을 실추시키지 않은 것이 진실로 불초한 저의 계술(繼述)232)하는 책임입니다. 그러나 다만 부조(父祖) 두 대와 고비(考妣) 네 위(位)를 선영(先塋)에 임시로 매장한 것이 길이 평안하시기에 부족함이 있기에, 앞으로 경영하여 모두 받들어 면례(緬禮 이장(移葬))해서 불초한 저의 효도하지 못한 데 대한 한을 조금이나마 풀고 부군의 다하지 못한 정성을 뒤늦게나마 이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갑자기 큰 재앙을 당하였으니, 모두 불초한 저의 지식이 힘을 헤아리지 못하고 저의 학문이 몸을 보전하지 못하여 불러온 결과인지라, 불효 중에서도 더욱 심한 불효를 저질렀습니다.비록 그러나 부군께서 평소 불초한 저에게 바라시던 것은 다만 성현의 가르침을 받들고 춘추의 의리를 지켜 낳아주신 부모를 욕되게 하지 않고서 죽도록 하고자 한 것뿐이었으니, 오늘날의 의체(義諦)는 혹 훼손시키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어버이를 욕되게 하는 불효를 행하였습니다. 미처 실행하지 못한 선대의 일은 계제인 억술이 있으니, 거의 의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부군의 효학(孝學)ㆍ 절의(節義)와 선비의 효경(孝敬)ㆍ 덕범(德範)에 이르러서는 모두 간재 선사께서 천표(阡表)와 행장발(行狀跋)에 밝혀 찬미해주셨으니, 대명(大名)의 신필(信筆)인지라 충분히 백세토록 썩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초한 저의 불효 가운데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이 이미 여기에 있습니다. 선사께서는 또 불초한 저의 뜻과 학문에 대해 표문에서는 선고에 근본을 미루어주시고, 어버이의 이름을 드러내고 조상의 업적을 잇는 것233)으로 행장의 발에서 불초한 저를 기약해 주셨으니, 그렇다면 불초한 저의 평생 동안의 한 번 말하고 한 번 움직이는 동안의 선악이 부모의 영욕(榮辱)이 아님이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이 내몰리고 엎어지고 삶과 죽음이라는 큰일을 만남에 있어서이겠습니까.옛날에 주자(朱子 주희(朱熹)는 정자(程子)를 공격하여 참(斬)하기를 청한 때를 당하여 스스로 영광으로 여겼고, 우암(尤菴) 송 선생(宋先生 宋時烈)은 황고(皇考)의 묘에 고한 글234)234)에서 이를 인용하여 율곡(栗谷 이이(李珥))과 우계(牛溪 성혼(成渾)) 두 현인과 더불어 한가지로 파패(破敗)당한 것이 영광스러운 일임을 증명하였습니다. 불초한 저 또한 감히 스스로 선사께서 무함을 받은 날 선사를 무함한 적의 손에 죽는 것을 비록 감히 주자와 송 선생이 당한 일에 참람되게 비의할 수는 없겠지만, 거의 천년 뒤에는 불초한 저의 한 번의 죽음이 어버이에게 영광을 드린 것인지, 치욕을 끼친 것인지에 논하는 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오호라! 말은 이쯤에서 마치지만 마음은 다함이 없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존경께서는 이 심정을 밝게 살펴 주십시오. 삼가 고합니다. 維歲次乙丑七月乙亥朔二十七日辛丑, 不肖子澤述, 遭禍罔極, 性命不保.銜痛致哀, 謹稽首, 哭告于顯考碧峰居士府君顯妣孺人崔氏之墓.嗚呼! 惟我顯考.負超羣之材, 抱立揚之志, 早飛英於場屋, 擬功業之芥拾.夙孤當室之餘, 層堂篤老, 菽水爲難, 則廢擧躬耕, 泊然而不慕外也.及乎不肖稍長, 能知讀書, 則欲以生平未遂之志業, 責成於不肖.凡所以嚴督獎喩激厲漸磨成就之道, 靡極不至, 製課而點竄之是親, 完本成焉 ; 誦程而考飭之是勤, 巨帙聯焉.蓋不肖今日粗解文字者, 秋毫皆府君之式穀也.已而世道大變, 無復可望, 則召不肖而告之曰 : "古有云, '學而優則仕.' 學之優, 誠難矣.然世變如許, 學雖優, 將安用諸.且斯學之要, 亶在明道誠身, 全天賦紹聖傳, 無與乎名祿之間.今世學問宗主, 艮齋田先生在, 汝往謁之."遂治裝, 令拜于蓬山之月明菴旅次.得艮翁之引郭林宗訪茅容故事.駕臨一宿, 長者車轍, 後英襟珮, 林林如雲, 則府君喜形于色.謂不肖曰 : "賢人所過, 山川生色, 蓬蓽增彩.雖使汝占巍科, 豈如今日之樂." 因具贄, 使定分于天安金華山中, 鬻庄辦斧, 歲必再度.嗚呼! 不肖得所依歸, 粗識道理者, 秋毫皆府君之義方也.至於心心尊仰, 事事取法, 緇衣之誠, 臧倉之辨, 終身而不渝 ; 好古之規, 尊性之訣, 白首而彌篤, 此又府君之於艮翁, 不純師之師也.嗚呼! 不肖以艮翁爲師, 府君爲父, 蓋先師之云爲, 何莫非妙道精義, 惟是絶島獻靖, 嚴君臣華夷之防, 尊性求是至死不變之訣, 爲第一義也 ; 府君之言行, 亦莫非嘉訓懿蹟, 而最是判邪正之分義利之辨, 遭東亂而絶匪魁於隣交, 當薙變而誓父子之同死者, 爲平生志節之一斑也.不肖之所擩染服膺者如此.故凡於公私是非之塗, 兢兢然不敢放過, 雖利害禍福死生之當前, 誓不欲負父師敎而累父師德矣.嗚呼! 斯文窮厄, 艮翁之門.不幸有吳震泳者出, 奸悖誣罔, 罔有紀極.舍無認而投稿京府, 以累師德, 造料量不拘等說, 誣師以認意認敎, 棄請願自辱之遺書, 令其徒姜泰杰出認而印稿.於是先師日光玉潔之義, 霜嚴壁立之節, 昧昧破破, 而不忍聞之譏罵, 漲天溢地矣.不肖痛師誣之罔極, 憂世道之大害, 竊不自量.收取公論, 布遺書而明先師之義, 行討文而正震泳之罪, 自附於尊師衛道之義.蓋出於是非不泯之天, 而自信其奉遵父師之敎也.噫! 彼震泳.乃以認印之難成, 販賣之未售, 爲討文之沮害.使泰杰旣訴鎭川警察署, 再訴全州檢事局, 請加名譽損害業務妨害二律于辨誣人.而不肖則以製通也.故尢爲彼之所甘心.去月初二日, 已被檢局調訊, 力抗不屈.今月廾五日, 又被再呼不往.前頭之禍, 安得以已乎.無己則義不容以父母所遺之堂堂七尺, 受辱於閭夷, 只合輕鴻毛而取熊掌, 以自盡事一致死之義而已.嗚呼! 不肖幼少頑昧, 不修子職.罪逆積重, 弱冠有六, 禍延顯考.厥後八年, 又喪顯妣, 寃酷痛號, 追訟靡逮.承先裕後, 不墜家聲, 固不肖繼述之責.而惟是父祖兩世考妣四位, 權厝先塋有欠永安.方且經紀, 幷奉緬襄, 少洩不肖不孝之恨, 追繼府君未盡之誠.此事未遂, 遽當大禍, 莫非不肖知不能量力, 學不能保身而致之, 則不孝中尢不孝也.雖然, 府君平日所望於不肖者, 惟欲奉聖賢之敎, 守春秋之義, 無忝所生而死, 則今日義諦, 或得免虧, 行辱親之不孝.而先事之未遑, 有季弟億述在, 庶可以有恃也.至於府君之孝學節義, 先妣之孝敬德範, 俱蒙艮翁先師闡美於阡表狀跋, 大名信筆, 足以不朽於百世, 則不肖不孝中一幸, 旣在乎此.而先師又以不肖之志學, 推本先考於表文, 以顯親來許, 期不肖於狀跋.然則不肖生平一言一動之善惡, 莫非父母之榮辱.矧此顚沛之際死生之大者乎.昔朱子遭請斬於攻程之時, 自以爲光華.尢菴宋先生, 引此於告皇考墓文, 以證與栗、牛兩賢同其破敗之爲榮.不肖亦敢自以爲以先師被誣之日見死於誣師賊者, 雖不敢僣擬於朱宋之所遭.庶千載之下, 有論不肖一死之貽其親者, 是榮是辱矣.嗚呼! 言止此而意無窮.伏惟尊靈, 昭鑑此衷.謹告. 집안 살림을 맡은 원문은 '당실(當室)'이다. 이는 부친이나 형 대신 집안일을 주관하는 것을 말한다. 고대에는 대부분 적자(嫡子)가 당실을 했으므로 적자의 별칭으로도 쓰인다. 변변찮은 음식 원문의 '숙수(菽水)'는 콩과 물로 변변치 못한 음식을 뜻하는데, 곧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부모를 극진히 봉양하는 것을 의미한다. 공자(孔子)의 제자 자로(子路)가 집안이 가난해서 효도를 제대로 못한다고 탄식하자, 공자가 "콩죽을 끓여 먹고 물을 마시더라도 부모를 극진히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을 바로 효라 이른다.[啜菽飮水盡其歡, 斯之謂孝]"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禮記 檀弓下》 점찬(點竄) 시문(詩文)의 자구(字句)를 고치고 다듬는 일을 말한다. 당(唐)나라 왕발(王勃)이 비송(碑頌)을 지을 때마다 미리 몇 되의 먹을 갈아 놓고 한번 붓을 잡고서 써 내려가면 한 번도 점찬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에 복고(腹稿)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酉陽雜俎 語資》 잘……가르침 00쪽 주 00) 참조. 학문을……한다 《논어》 〈자장(子張)〉에 보인다. 곽임종(郭林宗)이……일 무슨 일을 가리킨 것인지는 상세하지 않으나, 현자를 알아보고 그를 정성스레 모셔가려고 했던 노력에 대한 내용을 말한 듯하다. 참고로, 《명현씨족언행유고(明賢氏族言行類稿)》 권24에 "옛날 모용은 농가의 아들이었다. 닭을 잡아서는 요리하여 그의 어머니께 대접해 드리고, 자신의 집을 찾아온 곽임종(郭林宗)에게는 채소반찬으로 접대하니, 곽임종이 일어나 그에게 절을 하고 나서 학문할 것을 권고한 끝에 그가 사해의 명사(名士)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수레를 탄 장자(長子) 《사기(史記)》 권56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에 "다 떨어진 거적으로 문을 매달아 놓은 집에 장자의 수레가 많이도 찾아왔다.[以弊席爲門, 然門外多有長者車轍.]"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금패(襟珮) 푸른 옷깃을 두르고 푸른 패옥(佩玉)을 찬 유생을 의미한다. 《시경(詩經)》 〈정풍(鄭風) 자금(子衿)〉에 "푸르고 푸른 그대의 옷깃, 길이 생각하는 내 마음이다. 내가 가지는 못하지만 그대는 왜 소식을 계속 전하지 않는가. 푸르고 푸른 그대의 패옥, 길이 생각하는 내 마음이다. 내가 비록 가지는 못하지만 그대는 어이하여 오지 않는고.[靑靑子衿, 悠悠我心. 縱我不往, 子寧不嗣音. 靑靑子佩, 悠悠我思. 縱我不往, 子寧不來.]"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여비(旅費) 마련하여 원문의 '판부(辦斧)'는 도끼를 마련한다는 말로, 도끼란 재화(財貨)와 기용(器用)을 이르는 말이다. 여기서는 여비를 의미한다. 이는 《주역(周易)》 손(巽)괘 상구(上九) 효사(爻辭)에 "물자와 도끼를 잃는다.[喪其資斧] "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가르침 원문은 '義方'이다. 자세한 내용은 00쪽 주 00) 참조. 어진……정성 원문의 '치의(緇衣)'는 《시경(詩經)》 〈정풍(鄭風) 치의〉에 "검은 옷이 잘도 어울리는 분, 해지면 내가 다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緇衣之宜兮, 敝予又改爲兮.]"라고 하였고, 또 《예기》 〈치의〉에 "어진 이를 좋아하기를 〈치의〉 편처럼 한다.[好賢如緇衣.]"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이는 어진 이를 좋아하여 구하려는 정성을 의미한다. 장창(臧倉)에 대한 변론 미상(未詳)이다. 외딴 섬에서 자정(自靖)하여 간재는 1910년 한일합병 이후에 제자들과 상의하여 "마침내 도(道)가 행해지지 않으면 뗏목을 타고 바다로 들어간다"는 공자의 뜻을 취해 해도로 들어간 바 있다. 지금의 부안 · 군산 등의 앞바다에 있는 작은 섬을 옮겨 다니면서 강학(講學)하여, 도학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다. 1912년 계화도(界火島)에 정착하여 섬 이름을 중화를 잇는다는 의미인 계화도(繼華島)라 부르면서 죽을 때까지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원문의 '헌정(獻靖)'은 《서경》 〈상서(商書) 미자(微子)〉에, 은(殷)나라 태사(太師)인 기자(箕子)가 주(紂)의 서형(庶兄)인 미자에게 "스스로 분의에 편안하여 각자 스스로 그 뜻이 선왕에게 전달되면 됩니다. 저는 떠나가 은둔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겠다.[自靖, 人自獻于先王, 我不顧行遯.]"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처한 상황에 알맞게 자신의 도리를 다하는 것을 이른다. 죽어도 변치 않은 《중용장구(中庸章句)》 제10장에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는 곤궁했을 때의 뜻을 변하지 않으니, 강하도다, 꿋꿋함이여!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는 죽음에 이르러도 지조를 변하지 않으니, 강하도다, 꿋꿋함이여![君子國有道, 不變塞焉, 强哉矯. 國無道, 至死不變, 强哉矯.]"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中庸章句 第10章》 제일의(第一義) 가장 중요한 일이나 급선무로 해야 할 것을 말한다. 또는 최상의 방법을 뜻하기도 한다. 동난(東亂) 1894년(고종31)에 있었던 갑오개혁(甲午改革)을 말한다.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들어왔던 일본 군대가 왕궁을 포위하고는 청일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원군을 앞세워 민씨 일파를 축출하였으며, 김홍집(金弘集)을 중심으로 하는 온건개화파의 친일 정부를 수립하여 국정 개혁을 단행하였다. 단발령이 내려지자 일부분 원문읜 '일반(一斑)'은 진(晉)나라 왕헌지(王獻之)가 소년 시절에 도박 놀음을 옆에서 지켜보다가 훈수를 하자,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이 아이도 역시 대롱으로 표범을 엿보면서 그 반점 하나만을 보는 식이다.[此郞亦管中窺豹, 時見一斑.]"라고 비웃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이는 대롱 구멍을 통해 표범의 얼룩무늬를 엿본다는 것으로, 전체의 모습을 조관하지 못하고 겨우 사물의 일부분만을 보는데 그치는 아주 협소한 안목이나 소견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世說新語 方正》 대충 지나치지 않아서 《주자대전(朱子大全)》 권49 〈답진부중(答陳膚仲) 4〉에 "근래에 벗들의 독서가 대부분 구차하고 간략하여 명확하게 이해하지도 못했는데도 곧장 이와 같이 대충대충 지나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近覺朋友讀書多是苟簡, 未曾曉會得, 便只如此打過.]"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의 '타과(打過)'에서 "그냥 지나치다는 말과 같다.[猶言放過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참고로, 주희(朱熹)가 진공석(陳孔碩)에게 답한 편지 가운데 "집안일이 산적하여 학문에 방해가 되는 것을 근심하고 있다는 편지를 받았으니, 이는 그야말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바로 공부를 하는 현장일 따름이니, 매사에 도리를 꿰뚫어 데면데면 지나치지 않게 하여야 한다.[承以家務叢委妨于學問爲憂, 此固無可奈何者. 然亦只此便是用功實地, 但每事看得道理, 不令容易放過.]"라고 한 데서도 보인다. 《朱子大全 卷49 答陳膚仲》 오진영(吳震泳) 1868~1944.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석농(石農)이다. 안성(安城) 경앙사(景仰祠)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 《석농집(石農集)》이 있다. 1925년에 오진영이 스승인 간재의 유지(遺旨)를 무시하고 총독의 허가를 얻어 문집을 발간할 때, 여러 동문의 선봉이 되어 그의 선생의 뜻을 저버린 죄를 성토한 바 있다. 이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김택술은 배일당(排日黨)으로 지목되어 전주 검사국에 여러 번 호출을 당했고, 일차 피랍되어 무수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스스로…말 오진영이 김낙두(金洛斗)에게 답한 편지에 "금년 봄 3월에 선사께서 홀로 은행나무 아래 대나무 평상에 앉아 계실 때에 나에게 명하시기를, '세상은 알 수 없으니, 문고(文稿)는 그대가 스스로 헤아려서 하라.' 하셨다."라고 하였고, 이병은(李炳殷)에게 보낸 편지에 "인쇄를 업으로 하는 자가 스스로 인허를 받았으면 글을 저술한 사람은 무관하다고 들었다. 이와 같다면 깊이 구애받을 필요가 없을 듯하다.' 하셨다."라고 한 내용을 가리킨다. 청원하여……편지 《간재선생문집 후편속(艮齋先生文集後編續)》 권5 〈고제자손겸시제군(告諸子孫兼示諸君)〉에 "훗날 사변이 조금 안정되기 전에 만약 저들에게 청원하여 간행·반포할 계획을 한다면 결단코 이는 자신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여러 사람이 혹 강권하더라도 너희들은 맹세코 부조의 마지막 명을 지켜 부디 마지못해 따르지 말라. 이 종이를 따로 보관하여 훗날 증빙할 때를 기다려라.[異時時變稍定之前, 若請願於彼, 以爲刊布之計, 決是自辱. 諸人雖或强之, 汝等誓守父祖末命, 愼勿勉從也. 此紙別藏, 以俟後憑.]"라고 한 내용을 가리킨다. 검사국(檢事局) 일제 강점기에 검사(檢事)가 일을 보던 곳을 가리킨다. 기러기…여기고 태산과 같이 더없이 귀중한 목숨을 사물 가운데 가장 가볍다는 기러기 털처럼 여겨 미련 없이 버렸다는 말이다. 사마천(司馬遷)의 〈보임안서(報任安書)〉에 "사람이라면 모두 한 번은 죽게 마련인데, 어떤 사람의 죽음은 태산보다도 무거운 반면에, 어떤 사람의 죽음은 기러기 털보다도 가볍다.[人固有一死 或重于泰山 或輕于鴻毛]"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웅장(熊掌)을 취하여 목숨보다 의리가 중요하다는 비유적 표현이다. 《맹자(孟子)》 〈고자 상(告子上)〉에 "물고기도 내가 좋아하고 웅장도 내가 좋아한다. 하지만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없을 경우에는 물고기를 버리고 웅장을 취하겠다. 사는 것도 내가 좋아하고 의리도 내가 좋아한다. 그러나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질 수 없을 경우에는 삶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겠다.[魚我所欲也, 熊掌亦我所欲也. 二者, 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生亦我所欲也, 義亦我所欲也. 二者, 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한결같이 섬기며 원문의 '사일(事一)'은 생삼사일(生三事一)의 준말로,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의 의리와도 통한다. 이는 자신을 낳아 준 아버지와 글을 가르쳐 준 스승과 밥을 먹게 하여 준 임금을 한결같이 섬겨야 한다는 뜻이다. 진(晉)나라 대부 난공자(欒共子)가 말하기를 "백성은 부모, 스승, 임금의 셋에서 사는지라. 섬기기를 한결같이 한다.[民生於三, 事之如一.]"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國語 晉語》 《小學集註 明倫》 계술(繼述) 효자가 선세(先世)의 업적을 잘 계승하는 것을 말한다. 《중용장구(中庸章句)》 19장에 "무릇 효란 선인의 뜻을 잘 계승하며, 선인의 일을 잘 전술하는 것이다.[夫孝者, 善繼人之志, 善述人之事者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조상의……것 원문의 '래허(來許)'은 《시경》 〈하무(下武)〉에 "앞으로 올 날 밝히어, 조상의 발자취를 이으면, 아, 만년이 되도록 하늘의 복 받으시리라.[昭茲來許, 繩其祖武, 於萬斯年, 受天之祜.]"라고 한 데서 온 말로, 후손이 조상의 업적을 잇는 것을 의미한다. 우암(尤庵)……글 《송자대전( 宋子大全)》 권151의 〈고황고수옹선생황비정경부인곽씨묘문(告皇考睡翁先生皇妣貞敬夫人郭氏墓文)〉을 가리킨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선고의 묘에 고하는 글 告先考墓文 유세차(維歲次) 갑신년(1944) 6월 을유삭(乙酉朔) 6일 경인일(庚寅日)에 효자(孝子) 택술(澤述)은 삼가 맑은 술을 차려놓고 감히 현고(顯考) 벽봉거사(碧峯居士) 부군(府君)의 묘소에 다음과 같이 밝게 고합니다.오호라 우리 집안은 嗚呼吾家누대에 걸쳐 단명하였습니다 累世短壽부군께서 임종(臨終)할 때에 府君臨終불초한 저의 손을 잡고는 執不肖手우리 할아버지는 나이가 曰吾祖年삼십 이세로 세상을 마쳤고 三十二畢아버지는 사십 삼세였으며 父四十三이제 나는 오십 일세이니 今吾五一매 대마다 십 년의 수명이 더해진 것이다 每世加十너는 마땅히 회갑까지는 살 것이요 汝當回甲너의 자식은 칠순까지는 살 것이니 汝子七旬그 이치가 기필할 만하다고 하셨는데 其理可必이 말이 너무나도 슬퍼 此言絶悲듣자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聞之心折불초한 저의 올해 나이가 不肖今年과연 하신 말씀에 부합되는지라 果符所言부군의 그날의 원통함에 庶慰府君위로가 되었을 것이니 當日之寃신명과 사람의 사이에 神人之際또한 경사스러운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亦云可慶그런데 마침 이 세상의 화란을 당하여 屬玆世禍죽음의 운명이 가까이 다가오니235) 近止大命마음 썩히고 머리 아파하며 腐心疾首근심과 울분이 함께 생겨납니다 憂憤相幷늙은이들이야 괜찮지만 哿矣老者자성236)들이 애달픕니다 哀哉子姓살아생전 매우 아끼시던 마음이 平日至愛유명 간에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何間幽明후손들을 보전해 주시기를 바라노니 庶保後昆우러러 존령(尊靈)을 믿습니다 仰恃尊靈부디 흠향하소서 尙饗 維歲次甲申六月乙酉朔六日庚寅, 孝子澤述, 謹以淸酌之奠, 敢昭告于顯考碧峯居士府君之墓.嗚呼吾家, 累世短壽.府君臨終, 執不肖手曰 : "吾祖年, 三十二畢.父四十三, 今吾五一.每世加十, 汝當回甲.汝子七旬, 其理可必." 此言絶悲, 聞之心折.不肖今年, 果符所言, 庶慰府君當日之寃.神人之際, 亦云可慶.屬玆世禍, 近止大命.腐心疾首, 憂憤相幷.哿矣老者, 哀哉子姓.平日至愛, 何間幽明.庶保後昆, 仰恃尊靈.尙饗. 마침……다가오니 원문의 '근지대명(近止大明)'은 대명근지(大命近止), 즉 기근이 들거나 왜적이 침입하여 전란에 휩싸인 것 등으로 인해 나라의 운명이 위급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시경》 〈대아(大雅) 운한(雲漢)〉에 "죽음이 가까운지라, 우러러볼 곳이 없으며 돌아볼 곳이 없노라.[大命近止, 靡瞻靡顧.]"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일을 가리킨다. 자성(子姓) 자손을 의미하는데, 특히 손자(孫子)와 손녀(孫女)의 항렬을 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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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선고의 묘에 고하는 글 告先考墓文 유세차 을유년(1945) 2월 임오삭(壬午朔) 24일 을유일(乙酉日)에 효자 택술은 감히 현고 벽봉거사 부군의 묘소에 다음과 같이 밝게 고합니다.삼가 생각하건대 伏以옛날 문정공237) 昔文貞公우리 현조께서는 惟我顯祖도학 이외에도 道學以外문장으로 세상에 유명하였으니 名世文章동벽238)의 정밀함을 품부 받고 稟東壁精서경239)의 솜씨를 독차지하였습니다 擅西京手시와 표문에 가장 뛰어나 最長詩表고려와 조선에 으뜸이었으니 冠維麗韓식견이 있는 이들의 숭상하는 논의는 有識尙論모두 같아서 이론이 없었습니다. 一辭無異이십이 대를 지나 歷世廾二부군이 이으셨는데 府君繼之뛰어난 자질을 지녀 卓然之資이미 그 닮은 모습을 보이니 旣見其肖오직 시와 표문에 뛰어나 惟詩若表잘하는 것 역시 똑같았습니다 長處亦同젊은 시절의 예봉은 少日銳鋒어느 누구도 감히 대적하지 못하였고 人莫敢敵늘그막에는 더욱 순숙해져서 晩更純熟석장들이 감탄하고 칭송하였으나 碩匠賞稱마침내 그 마음을 쓰는 것은 乃其用心여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則不在此자신에게 돌이켜 실천하며 反己實踐약례240)하고 구인241)하였으니 約禮求仁어디서나 한결같이 一彼一玆경중을 분별하였습니다 輕重是判평생 동안의 문장은 生平文字다만 약간 편뿐이었는데 止若干篇오직 그 많지 않기 때문에 惟其不多현명함을 더욱 볼 수 있으니 尢見可賢소자들이 공경히 보전하여 小子敬保옥을 잡은 듯 물 가득찬 그릇을 받들 듯242)하였습니다 執玉奉盈이 상전이 벽해되는 세상의 변화243)를 만나 値此滄桑예상치 못한 일을 어찌 대비나 하였겠습니까 不虞曷備이에 판각할 것을 도모하여 爰謀剞劂힘을 합친 자손들이 同力子孫날짜를 지정해두고 일을 끝마쳐서 指日竣功거의 사라지지 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庶幾不泯존경께서 묵묵히 도와주신 덕이니 尊靈默佑그 얼마나 다행입니까 何其幸歟거듭 우리 집안을 생각해 보건대 重念吾家고려 말 이후로 麗季以降칠백 년 세월 지나는 동안 閱年七百어질고 덕스러운 인물들이 서로 이어 賢德相承어떤 이는 향사에 배향되고 或享鄕祠어떤 이는 재상이 되기도 하였으니 或作朝宰어찌 논저하여 豈無論著후세244)에 전할 만한 이가 없겠습니까 來許可傳그러나 아무것도 없으니245) 然無有乎매번 남몰래 통탄스러워하였습니다 每竊痛歎아마도 그 처음에 無乃其始편차와 인쇄에 소략함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마는 編梓有踈비록 주밀하고 상세하게 하였더라도 抑雖周詳끝내 그 망실하였기 때문입니다. 終致其失문정의 문집 이후로는 文貞集後오직 부군의 문장뿐이니 惟府君文서로 아득히 마주하고 있는 것은 相對遙遙또한 우연이 아닙니다 亦不偶爾우리 집안의 일이 吾家有事무엇이 이보다 크겠습니까 孰大於玆고금을 생각해 보니 俯仰古今슬픔과 경사가 매우 교차합니다 交切悲慶삼가 그 사실을 아뢰오니 謹告其實굽어 살펴 주시기를 바랍니다 冀垂鑑臨 維歲次乙酉二月壬午朔二十四日乙巳, 孝子澤述, 敢昭告于顯考碧峰居士府君之墓.伏以昔文貞公, 惟我顯祖.道學以外, 名世文章.稟東壁精, 擅西京手.最長詩表, 冠維麗韓.有識尙論, 一辭無異.歷世廾二, 府君繼之.卓然之資, 旣見其肖.惟詩若表, 長處亦同.少日銳鋒, 人莫敢敵.晩更純熟, 碩匠賞稱.乃其用心, 則不在此.反己實踐, 約禮求仁.一彼一玆, 輕重是判.生平文字, 止若干篇.惟其不多, 尢見可賢.小子敬保, 執玉奉盈.値此滄桑, 不虞曷備.爰謀剞劂, 同力子孫.指日竣功, 庶幾不泯.尊靈默佑, 何其幸歟.重念吾家, 麗季以降.閱年七百, 賢德相承.或享鄕祠, 或作朝宰.豈無論著, 來許可傳.然無有乎, 每竊痛歎.無乃其始, 編梓有踈.抑雖周詳, 終致其失.文貞集後, 惟府君文.相對遙遙, 亦不偶爾.吾家有事, 孰大於玆.俯仰古今, 交切悲慶.謹告其實, 冀垂鑑臨. 문정공(文貞公) 김구(金坵, 1211~1278)로, 문정(文貞)은 그의 시호이다. 본관은 부안(扶安)이고, 자는 차산(次山)이며, 호는 지포(止浦)이다. 어려서부터 시문에 능하였고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원부 사록(定遠府司錄), 제주 판관(濟州判官) 등을 역임하였다. 예종 때 유경(柳璥)이 천거하여 예부 시랑이 되어 원나라에 관한 문서를 담당했으며,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원나라에서 귀국하여 〈북정록(北征錄)〉을 저술하였다. 그 뒤로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지첨의 부사(知僉議府事) 등을 거쳤다. 궁내의 연소자들에게 한어(漢語)를 배우도록 권장하였고, 원종 때 유경과 함께 신종, 희종, 강종 3대의 시록을 수찬하였고, 충렬왕 때 고종실록(高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문집에 《지포집(止浦集)》이 있다. 동벽(東壁) 문장을 주관하는 별 이름으로, 여기서는 김택술이 문장에 재능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 《진서(晉書)》 권11 〈천문지 상(天文志上)〉에 "동쪽 벽에 두 별이 있어 문장을 주관하니, 천하의 도서를 갈무리한 비밀 창고이다.[東壁二星, 主文章, 天下圖書之祕府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서경(西京) 서한(西漢 전한(前漢)) 시대의 수도인 장안(長安)으로, 이곳을 중심으로 문장이 크게 흥성하였으므로 이른 말이다. 참고로, 이때 당시의 대표적인 문인으로는 가의(賈誼), 사마상여(司馬相如), 동방삭(東方朔) 등이 있다. 약례(約禮) 예로써 요약한다는 말로, 예를 통해 몸을 검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논어》 〈옹야(雍也)〉에 "군자가 문에 대하여 널리 배우고 예로써 요약한다면 또한 도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君子博學於文, 約之以禮, 亦可以弗畔矣夫.]"라고 하였고, 또 《논어》 〈자한(子罕)〉 안연(顔淵)이 공자에 대해 "선생님께서 질서 있게 사람을 잘 지도하시되, 글로써 나를 넓혀 주시고 예로써 나를 요약하셨다.[夫子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구인(求仁) 인(仁)을 구한다는 뜻으로, 공자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평가하여 말하기를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무엇을 원망하겠는가.[求仁而得仁, 又何怨?]"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述而》 옷을……듯 공경히 보전하는 모습을 형용한 말이다. 《예기(禮記)》 〈제의(祭義)〉에 "효자로서 부모를 깊이 사랑하는 자는 반드시 온화한 기운이 있고, 온화한 기운이 있는 자는 반드시 기쁜 낯빛이 있고, 기쁜 낯빛이 있는 자는 반드시 온순한 태도가 있는 법이니, 효자는 마치 옥기(玉器)를 잡은 듯, 가득 찬 것을 받들 듯 지극히 공손한 모습으로 온 마음을 다하여 감당하지 못할 것처럼 하고 놓치기라도 할 것처럼 한다.[孝子之有深愛者, 必有和氣, 有和氣者, 必有愉色, 有愉色者, 必有婉容. 孝子, 如執玉, 如奉盈, 洞洞屬屬然, 如弗勝, 如將失之.]"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참고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주희(朱熹)의 〈존덕성재명(尊德性齋銘)〉에도 보인다. "컴컴한 방안에도 밝게 임하니 옥을 잡고 가득한 물그릇 들 듯이 조심하여 다급할 때나 잠깐 사이라도 떠나서는 안 된다.[有幽其室, 有赫其臨, 執玉奉盈, 須臾顚沛.]"라고 하였다. 《心經附註 卷4》 상전(桑田)이……변화 창상지변(滄桑之變)의 준말이다. 큰 바다가 변하여 뽕나무밭이 되고, 뽕나무밭이 변하여 큰 바다가 된다는 말로, 흔히 세상의 변화가 매우 심함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창해상전(滄海桑田), 상전벽해(桑田碧海)라고도 한다. 후세 원문은 '래허(來許)'인데, 이는 후세를 의미한다. 《시경》 〈대아(大雅) 하무(下武)〉에 "밝도다. 후세에서 그 선조의 발자취를 계승한다면 아, 만년토록 하늘의 복을 받으리라.[昭玆來許, 繩其祖武, 於萬斯年, 受天之祜.]"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아무도 없으니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문왕부터 공자까지 500여 년이니, 태공망과 산의생은 직접 보고서 문왕의 도를 알았고, 공자는 들어서 알았다. 공자 이래로 지금에 이르기까지가 100여 년이니, 성인의 세대와 이처럼 멀지 않고 성인이 거주하던 곳과 이처럼 매우 가까운데도 아무도 들은 이가 없으니, 그렇다면 또한 아무도 없겠구나.[由文王至於孔子, 五百有餘歲, 若太公望散宜生則見而知之, 若孔子則聞而知之. 由孔子而來, 至於今, 百有餘歲, 去聖人之世, 若此其未遠也, 近聖人之居, 若此其甚也, 然而無有乎爾, 則亦無有乎爾.]"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선사의 묘에 고하는 글 告先師墓文 유세차 을축년 7월 을해가 초하루인 2월 병자일에 문인 김택술은 다가오는 두 번째 휘신(諱辰)246)에 감회가 이는데 끝이 없는 재앙의 변고를 당하여 삼가 글을 짓고 제수를 갖춰 간재 선생의 묘소에 고합니다."옛날 공자는 주나라가 쇠퇴함을 당하여 《춘추(春秋)》를 지었고, 주자는 송나라 말기에 태어나 《강목(綱目)》을 지었으니, 모두 임금과 신하, 중화와 오랑캐의 큰 경계를 엄격히 한 것입니다. 오호라! 우리 선생께서 도체의 근원에 통철하고 성(性)을 높이는 학문을 밝혀서 영원히 후대에 가르침을 드리운 것은 천지의 대경(大經)과 사람의 대륜(大倫)이 아님이 없는데, 맞닥뜨린 때가 주나라나 송나라의 말세보다 심하니, 임금과 신하, 중화와 오랑캐의 엄격한 경계는 선사(先師)의 거질의 원고 가운데 더욱 제일가는 의리입니다. 선사께서는 머나먼 바다 외로운 섬에서 서공(徐公)처럼 머리카락을 부여잡고247) 노중련(魯仲連)처럼 치욕을 품고 있었는데,248) 임금의 나라가 패망함에 이르자 피눈물을 흘리며 흰 상복을 입고서 생애를 마쳤으니, 또한 만년(晩年)에 대의를 드러낸 것입니다. 선생의 도의와 행한 업적은 한말의 공자와 주자로, 백 대가 지나도 의심할 수 없는 것입니다.249)어찌하여 천하는 오랫동안 사문(斯文)에 곤궁과 재액을 낳아서 불행하게도 패륜의 도적 오진영(吳震泳)250)이 문하에서 배출되어 선생의 의로운 경계를 파괴하여 무너뜨리고 선생의 뜻과 절개를 어둡게 덮어버립니까. 이윽고 또 다시 담장 안에서 창과 방패를 정비하고서 끝내는 오랑캐에서 손을 빌려 죽은 사람의 몸에 피를 흘리듯 하였으니, 오호라! 어찌 차마 말하겠습니까. 대개 그는 사려(邪戾)한 기를 모으고 교활한 본성을 품부 받은 자로 성질이 원래부터 스스로 일반적인 것에 어긋났었지만, 그러나 죄악이 커서 극에 달하기 전에는 누가 먼저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는 약삭빠르고 방자하며 말을 잘하고 안색을 잘 꾸미며 온갖 양상으로 속여 제멋대로 술수를 부리고 사람을 현혹시키기 일을 즐겨하는 등의 폐단이 이르지 않은 데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생께서 바로잡아주시고 채찍질 해주신 약석(藥石)을 또한 지극하게 베푸셨는데, 이른바 '이견(而見)251)은 사공(事功)을 중하게 여겨서 도의를 따지지 않는다.' '어떻게 선비 된 자가 아무개 궁과 통하여 아무개 사람을 섬길 수 있는가.' '사공(事功)으로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받았다.' '식견이 저열한 어떤 사람이 나252)에게 다공(茶公)253)이 머리를 깎은 복철(覆轍)254)을 실천하라고 했다.' 등의 말에 이르러서는 앞서 엄한 배척을 당한 것이었다고 할 밖에 무엇이겠습니까.그러나 지식과 이해가 뛰어나고 문사와 변론이 능숙하니 명리(名理)255)를 밝히고 외부의 모욕을 막는 것에 도움을 준 자들이 또 때때로 더욱 사랑하고 아껴주었으며, 식견이 발휘될 것이라고 기대하며 권장하기까지 하였으니, 참으로 이른바 서리와 눈, 비와 이슬이 모두 가르침이 아님이 없다는 것에 해당합니다. 마땅히 그 배척함을 두려워하여 악을 제거하고 그 권장함을 기뻐하여 더욱 노력하여서 나 자신을 성취하고 사문의 후사(後事)에 힘을 바쳐야 합니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나쁜 습관은 제거하기 어려워서 본래 성질이 드러나 사공을 중시하고 도를 가볍게 여기는 마음으로 선사에게 인가를 받았으니 원고를 간행하는 의논을 앞서서 외쳤습니다. 남을 이기기 좋아하고 자신 마음대로 하는 사사로움으로 호남 사림을 배체한 체 거리낌 없이 행동하여 서울에서의 문집 인가를 도모하고 거질의 원고를 받들어 원수 놈의 관청에 바치며 책을 판매하는 도적놈들에게 주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선사에게 대단히 누를 끼친 것입니다.게다가 자신의 죄를 벗어 스승에게 전가하는 사악한 생각으로 공공연하게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선사께서 일찍이 (출판에 대해) 인가할 뜻이 있었다.'라고 하며, 연이어 편지로 써서 말하기를 '선사께서는 업자가 스스로 인가를 받으면 저자는 관련이 없으니 깊이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고 일찍이 지시하셨다.'라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선사께서 홀로 은행나무 아래 대나무 상에 앉아 계시다가 진영에게 「세상의 앞날은 알 수가 없으니, 문고는 그대가 모름지기 잘 헤아려서 하라.」라 명하셨다.'고 합니다. 오호라! 사람을 속이는 죄도 나쁜데 더구나 스승을 속이는 죄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스승을 속이는 것은 큰 죄인데, 더구나 공자와 주자를 이어 《춘추》의 경계를 엄하게 지키는 큰 스승을, 대의를 파괴하는 일로서 속인다면 그 죄는 또한 어찌하겠습니까. 문하의 제자의 입장해서 해야 할 도리는 마땅히 매가 참새를 쫓듯이 조금의 여유도 주지 말고 담장에서 내쫓고 제자의 문적에서 삭제하여야 합니다.선사께서 평소에 동문들이 화목하게 지내기를256) 진심으로 바라며 선비들의 싸움을 마음 아파한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으니, 마땅히 대처하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일부러 수많은 편지에서 언급하고 수많은 사람을 만나 깨우쳐서 그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을 믿게 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여 위로 고하고 아래로 사죄하게끔 하는 것을 부지런히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시기하여 음험하다고 저를 지목하고 대중을 홀려서 미치게 만든다고 매도하면서, 오만하게도 자신은 옳다고 하여 일찍이 그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놈에 청원하여 문집을 간행, 배포하는 것은 결코 스스로 욕되게 하는 것이니 삼가 절대로 따르지 말라.'257)고 한 편지가 나오자, 스승을 속인 죄를 어떻게 해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이에 강경하게 서서 '죽음에 이르러도 말을 바꾸지 않을 것이니, 「헤아려서 하라」,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 는 등의 말은 확실하다고 맹세한다.'고 합니다. 이에 오진영의 무리들이 다투어 말하기를 '아무개 공은 우리 선사께서 의발을 전하였으니,258) 어찌 속이는 말을 하겠는가. 「홀로 있을 때 명하신 것」은 증자가 일이관지(一以貫之)에 대해 알겠다고 답한 것259)에 해당하다.'라고 합니다. 이에 남기신 편지는 저 한 때의 일이고 홀로 있을 때 명한 것은 이 한 때의 일이라고 여기는 자가 있으며, 남기신 편지와 홀로 있을 때 명한 것이 나란히 행해져도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고 여기는 자도 있으며, 남기신 편지가 위조라고 여기는 자도 있게 되었습니다.그 밖의 사람들은 이에 '오 아무개 옹은 고제(高祭)라. 스승의 마음을 깊이 아는 자인데 그 말이 어찌 속이는 데 이르겠는가. 아마도 아무개 옹260)께서 이런 의도를 지니고 이런 지시를 하셨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와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을 앉아서 비웃고 서서 팔뚝을 휘두르며 작게는 기롱하고 크게는 욕을 합니다. '이런 스승이 있으니 이런 제자가 있도다.'라고 말하는 자들도 있으니, 귀로 차마 듣지 못하고 입으로 차마 말할 수 없습니다. 아! '오진영이 의발을 전수받았다.'고 이르는 자들은 참으로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첨하고 편당을 지어 아부하며 나쁜 놈끼리 서로 도와 함께 나쁜 짓을 하는 사사로움에서 나왔으며, 선사께서 평소 오진영을 배척하는 엄한 가르침과 제자들이 편벽되고 잡박하여 의발을 전할 자를 고르지 못하겠다는 정론에 대단히 배치됩니다.그러나 선사께서 사랑하고 아끼며 기대했던 뜻으로 헤아려보면 '오진영이 본래 고족(高足)의 반열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또한 편벽된 주장입니다. 다만 그가 고족이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의심을 불러들임이 더욱 심한데, 우암이 생각한 고제(高弟)로써 증명한다면,261) 끝내 그 일에 대해 분명할 수 없다는 것에 불행하게도 가까울 것입니다. 죄가 이런 지경에 이르러 이미 가득 찰대로 찼는데,262) 또 다시 감히 거질의 원고에 나아가 자신이 직접 나눠서 편집하였으니, 이른바 정선(精選)한 한 부를 마침내 그 무리인 강태걸(姜泰杰)263)을 시켜 인허를 구걸하여 받고 인쇄하여 판매하였으니, 앞에서 말한 말로 속이는 것이 지금 일로서 증명되었으며 앞에서 붓과 혀로 가르침을 깨뜨린 것을 지금 몸으로 직접 부숴버린 것이니, 이 얼마나 잔혹합니까.허가를 받아 인쇄한 견본에 보태고 빼는 것과 고치고 자리를 바꾸는 것을 자신이 하고 싶은 데로 하였습니다. 시의(時義)에 관련된 모든 것은 구절마다 삭제한 것은 오진영이며, 저작자라고 크게 쓰인 이름은 강태걸입니다. 이와 같으니 오진영의 문집, 강태걸의 문집이라고 해도 옳을 것인데 오히려 억지로 명명하여 《간옹고》라고 하였으니, 참람하게 분수와 의리를 범하며 이름과 실제가 서로 어긋난 것이 이것보다 심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어찌 '선생의 썩은 뼈는 아는 것이 없지만 조금이라도 두려워할 줄 안다.'고 하겠습니까.대개 오진영이 건드린 선생의 순정한 도와 광명한 의리는 곳곳이 깨지고 어두워졌는데, 의리가 어두워지고 도가 깨졌으니 선생은 이제 선생이 될 수 없습니다. 선생이 선생이 되지 못한다면 공자와 주자 이후로 《춘추》의 의리를 이어나갈 사람이 없게 되어 천지는 온통 암흑이 되어 오랫동안 어둡게 될 것입니다. 스승을 속인 것이 끝이 없어서 이미 너무나도 원통한데, 세상 재앙의 참혹함은 또한 마음을 쓰리게 합니다. 윤리가 사라지고 도리가 땅에 떨어진 변고를 보고도 편안하게 아무런 일도 없다고 여기고 있으니, 이는 문하에 사람이 없으며 세상에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삼가 생각건대, 소자가 선생의 문하에 드나든 지 23년이 됩니다. 자질이 얄팍하고 재주가 적어서 비록 가르침의 만 분의 일도 받들어 새기지 못하지만 그러나 기대를 받은 것은 깊지 않다고 말할 수 없으며 은혜를 받은 것이 두텁지 않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저 자신을 헤아리지 못하고 성(性)을 스승으로 높여 도를 지키려는 뜻에 감히 붙따라 변석하고 토론하는 자리를 뒤따랐기에 왜놈의 인허를 받아 판매하는 책을 구매하여 읽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하지만 저 강하여 대적하기 어려운 기세를 헤아려보면 외로운 군인이 깨끗이 쓸어버릴 수 없습니다. 다만 다행이도 사라지지 않는 것은 떳떳한 본성이요 막을 수 없는 것은 공론이니, 남기신 편지가 널리 퍼져서 선생의 뜻을 해와 별처럼 모두 볼 수 있게 되었으며, 성토하는 문장이 답지하여 오진영의 죄에 대해 도끼를 함께 휘두르니, 스승의 은혜에 보답함이 어찌 감히 그렇게 하겠습니까.264)능히 말을 잘하는 무리들이 이런 지경이 되면 만일 조금이라도 사람의 마음을 지녔다면 마땅히 스스로 새로워지고 이후로는 행동을 개선하는 방법을 생각하여 자신의 속임을 자복하고 선사의 묘소에 고하며 흉악한 붓을 거둬서 불속에 내던져서 빠른 시일 내에 인가를 받아 판매하는 일을 그만두고서 숨을 죽이고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서 세상의 처분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하여 벌이 침을 쏘아대거나 뱀이 독을 내뱉듯이 시간이 갈수록 더욱 더 사나워져서 허가를 받아 판매하지 못한 것을 사람이 방해하였다고 힘써 무고하여 강태걸(姜泰杰)로 하여금 이미 진천 경찰서에 고소하게 하였고 또 다시 전주 검사국에 고소하여 명예훼손과 업무방해 두 가지 법률 조항에 걸어 일망타진하려는 계책으로 삼는 것입니까.소자는 통문을 지었다는 까닭으로 더욱 저들이 이를 가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지난번 검사국에서 신문을 받을 때 '오진영은 선사의 명예를 훼손한 자이니, 명예를 훼손한 법은 오진영에게 해당한다. 인가를 받아 판매를 금지하려 한 것은 내가 우리 선사를 위해 그 무고를 분별하고 가르침을 지킨 것인데, 세상에서 선생의 책을 영업하는 것은 대단히 많거늘 어찌 반드시 선사께서 인가를 금지한 원고를 영업하는 물건으로 만들려고 하는가. 영업을 방해한 법률은 해당되지 않으니 죽기를 맹세코 복종하지 않겠다.'고 하였는데, 무사하게 아무런 일 없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예봉은 더욱 날카로워지며 때때로 적용되는 법률은 헤아리기 어려우니 앞날의 재앙을 어찌 끝까지 면할 수 있겠습니까.일찍이 들으니, 스승을 섬기는 도리는 임금, 부친과 같아서 다만 그들이 계신 곳에 목숨을 바친다265)고 하였습니다. 공자께서 7척의 몸으로 곤란을 당하자 안자는 오히려 목숨을 바치려 하면서 뒤따랐는데,266) 더구나 사문 만 대의 도리가 손상됨을 입었는데 소자가 어찌 감히 한번 죽는 것을 아껴서 그 무함을 밝히지 않겠습니까. 한문공(韓文公)이 말한 '도가 나로 말미암아 전해진다면 비록 죽음을 당하더라도 조금도 여한이 없다.'267)고 한 것은 바로 저의 마음을 대변한 것입니다. 다만 지금은 여인(閭人)268)이 집권하여 법을 적용함이 이치에 어긋나고 기이하니 저 자신이 미처 죽지 않았습니다만 머리를 깎이는 곤욕이 먼저 이르게 되었습니다. '선비는 죽일 수 있을지언정 욕을 보일 수 없다.'269)고 성인께서 분명하게 가르치셨는데, 신체를 훼손당하여 죽는다는 것은 죽음을 당하였어도 또한 모욕을 당한 것으로 선생께서 이에 대해 정론(定論)을 두었으니, 어찌 감히 소홀하겠습니까.옛 사람이 이르기를 '스승이란 인재를 양성하는 모범(틀)이다.'270)라고 하였으며, 또한 '감히 자신을 믿지 않고 스승을 믿었다.'271)라고 하였습니다. 옛날 선생께서 줄포 경찰서의 묘적(墓籍)에 이름을 올리는 것을 물리치기도 하였고 오진영이 거짓으로 서명한 화(禍)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항상 자진(自盡)할 도구를 몸에 지니고 계시면서 '모욕을 받아 죽는다면 차라리 조용히 먼저 자결하는 것이 낫겠다.'라고 하셨으니, 소자가 현재 죽고 사는 갈림길에 선다면 선생을 본받지 않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삼가 생각해보면, 선생께서는 나의 충심을 헤아려서 머리를 끄덕일 것입니다. 오호라! 이전에 천 년 하고도 천 년의 시간이 있었고 이후로 만 대 하고도 만 대가 있을 것인데, 공자와 주자가 엄정하게 세운 《춘추》와 《강목》의 의리가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면 선생의 마음과 진영의 죄와 소자의 죽음을 귀신이 분명하게 살필 것이며 후대의 수많은 성인이 잘 알 것이니, 소자가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삼가 고합니다." 維歲次乙丑七月乙亥朔二日丙子, 門人金澤述感諱辰之載邇, 遭禍變之罔極, 謹構文具奠而告于艮齋先生之墓.曰 : "昔孔子當周衰而作《春秋》 ; 朱子生宋末而修《綱目》, 皆所以嚴君臣華夷之大防也.嗚呼! 我先生洞道體之源, 明尊性之學, 以垂敎於永世者, 無非天地之大經, 人生之大倫, 而所値之時, 有甚於周、宋之末, 則君臣華夷之嚴防, 尢爲大稿中第一義也.絶海孤島, 握徐公之髮, 抱魯連之恥, 至乎君國之破亡, 血涕縞素而終其身, 則又大義之見乎晩節者也.先生之道義行業, 殆韓末之孔、朱者, 百世而可俟也.夫何天下久生斯文窮厄, 不幸有悖賊吳震泳者, 出於門下, 先生之義防焉, 破壤之 ; 先生之志節焉, 晦昧之.旣又修戈戟于門墻, 終至於假手閭夷而伏尸流血, 嗚呼! 尙忍言哉.蓋其鍾邪戾之氣, 稟慓猾之性者, 生質元自乖常, 然罪大惡極之前, 孰得以先斷.惟是便儇挑達, 巧言令色 ; 欺詐變幻, 挾數任術, 喜事惑人之弊, 無所不至.故先生之箝錘藥石, 亦畢施備至, 至如'所謂而見, 以事功爲重, 而不計道義.' '焉有士子而可以通某宮做事某人.' '以事功見笑於人.' '識見低矮某人, 勸余復蹈茶削覆轍.'等訓, 則其斥之嚴見之先, 顧何如也.然其識解之穎悟 ; 文辯之捷給, 有可資以發名理禦外侮者, 則又時加愛重, 至以見識發揮期獎之, 眞所謂霜雪雨露, 無非敎也.宜乎懼其斥而去惡 ; 喜其獎而加勉, 有以成身, 而賴及師門之後事也.而無柰惡習難除, 本質彰露, 以重功輕道之心, 倡出認刋稿之議, 以好勝自用之私, 含7)湖無拘而圖京認, 奉大稿而納讐府, 輪8)販賊, 此已累師之大者.而又以脫罪嫁師之惡念, 公然告諸人曰 : '先師曾有認意.' 繼而筆之書曰 : '先師嘗敎業者自認, 著者無關, 不必深拘.' 又曰 : '先師獨坐杏下竹床, 命震泳曰 : 「世不可知, 文稿須自料量爲之.」' 嗚呼! 誣人罪也, 而况乎誣師乎.誣師, 大罪也, 而况乎繼孔、朱而嚴《春秋》之防之大宗師, 誣之以破敗大義之事, 則其罪又何如也.在門弟子道, 宜其揮墻割籍, 若鷹鸇逐雀之不暇也.念先師平日血願同門之塤篪, 心痛士類之矢石, 宜亦有所處之道.故篇篇累牘, 面面衆喩, 使之自信自服而上告下謝者, 非不勤且誠矣.彼乃目之以猜險 ; 罵之以衆狂, 傲然自是, 曾不動念.及其'請願刋布決是自辱愼勿勉從'之遺書, 出也, 知其無奈乎誣罪之莫逃, 則乃悍然立'臨死不易辭之, 誓以確「料量」、「不拘」等說.' 於是震之徒, 爭曰 : '某公, 吾師傳鉢, 豈其誣言.有以「獨命」當曾子一貫之唯者.' 有以遺書爲彼一時而獨命爲此一時者 ; 有以遺書獨命爲幷行而不悖者 ; 有指遺書爲僞造者.外之人乃曰 : '吳某某翁, 高弟.深知其師之心者, 其言豈至誣也.容有某翁之有是意是敎也.' 坐嗤立排, 小譏大罵.至有言'有是師有是弟.' 耳不忍聞 ; 口不忍道.噫! 謂'震傳鉢'者, 固出於其徒阿好黨附同惡相濟之私, 而絶背先師平日斥震之嚴訓及晩年諸子偏駁未有擬望之定論矣.然揆以先師愛重期獎之意, 則謂'震本非高足之列'者, 亦偏論也.惟其爲高足也, 故致外疑之滋甚, 而尢菴所慮以高弟而證之, 則終不可辨明者, 不幸而近之矣.罪至於此, 已極貫盈, 而又敢就大稿, 而手分之編輯, 所謂精選者一部, 竟使其徒姜泰杰, 乞出認許而印販之, 向以言誣者, 今焉實之以事矣 ; 向以筆舌破訓者, 今焉身親碎之矣, 何其酷也.至其認印見本, 則添刪改動, 恣其所欲.凡係時義, 句句拔去者, 震也, 大書其著作者氏名, 則杰也.如是則震集杰集, 斯可矣, 猶復强名之曰, 《艮翁稿》, 僭犯分義, 乖錯名實, 莫此爲甚, 豈可謂'少能知懼於先生朽骨無知之戒'者乎.蓋震泳之所觸先生純正之道光明之義, 在在破晦, 義晦而道破, 先生不得爲先生.先生不得爲先生, 則孔、朱以降, 春秋之義, 無人接續, 而天地窣窣, 其長黑矣.師誣罔極, 旣切痛寃, 世禍之酷, 亦可寒心.見此倫亡經墜之變, 而恬然視爲無事, 則是門下無人 ; 世界無人.伏念小子之出入先生之門, 爲二十有三年.質薄材短, 雖未能承服萬一之誨, 然見期則不可謂不深 ; 受恩則不可謂不厚矣.竊不自量, 敢附於尊師衛道之義, 從辨討之列, 而幷禁認販本之購讀, 料彼强亢難敵之勢, 非孤軍之所能廓然.惟幸不泯者秉彛 ; 莫遏者公論, 遺書之布 ; 先生之義, 共覩日星, 討文之到, 震泳之罪, 同揮鈇鋮, 報佛之恩, 豈敢云然.能言之徒, 其或在斯, 苟有毫分人心者, 宜思自新善後之道, 服其誣而告諸墓 ; 收凶筆而付之火, 亟罷認販之役, 屛息潛伏, 以俟幷世之裁處, 胡乃蜂螫蛇毒, 愈往愈烈, 乃以認販之未售, 爲辨9)誣人沮害, 令姜泰杰旣訴鎭川警察署, 再訴全州檢事局, 請加以名譽損害業務妨害二律, 爲綱打之計.而小子則以製通之故, 尢爲彼之所甘心.頃被檢局訊質, 答謂'震是損害先師名譽者, 損名之律, 震可以當之.禁止認販, 吾爲吾師辨誣守訓, 世間營業, 不勝其多, 而豈必以先師禁認之稿爲營業物乎.妨業之律, 非所當也, 誓死不服.' 無事而出.然彼鋒益銛, 時律難測, 前頭之禍, 安得以終免.竊嘗聞事師之道, 同於君父, 惟其所在, 則致死焉.師門七尺之軀之遇難, 顔子猶必捐生而赴之, 而况師門萬世之道之被喪, 小子豈敢惜一死而不明之.韓文公所謂'使道由某而傳, 雖滅死萬萬無恨'者, 正吾心也.但今閭人執命, 用法乖異, 身未及死, 而髡役之辱先至.'士可殺不可辱.' 聖有明訓, 變形而死, 死且有辱, 先生曾有定論, 豈敢忽諸.古人云, '師者, 人之模範.' 又曰 : '不敢信己而信其師.' 昔先生之斥茁署勒籍, 處震泳冒書之禍也.恒以自盡之具隨身曰 : '與其見辱而死, 無寧從容先裁.' 小子今於死生之際, 不法先生而何以哉.伏想先生鑑我衷而首肯也.嗚呼! 前有千千年, 後有萬萬世, 孔、朱所嚴《春秋》、《綱目》之義, 終不可得以泯焉, 則先生之心, 震泳之罪, 小子之死, 神祗昭昭, 後聖林林, 小子尙復何言.謹告." 휘신 기일(忌日)과 같다. 《능엄경(楞嚴經)》에서 나온 말인데 본래는 재일(齋日)이란 뜻이다. 서공처럼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서공(徐公)'은 서부원(徐浮遠)으로, 호는 동해(東海), 명나라 말기에 활약한 인물이다. 《간재척독》 〈답박노원(答朴魯原)〉에서 "서동해 -부원- 는 항상 머리카락을 잡고서 통곡하며 고황제를 부르면서 '외로운 신하는 머리카락으로 절개를 삼고 시와 예로 벗을 삼아 조용히 죽음을 기다렸다가 구천에서 폐하를 섬기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만에서 14년을 거처한 뒤에 조주의 산속으로 들어가 끝까지 머리카락을 지키다가 생을 마쳤습니다."라고 하였다. 노중련처럼 치욕을 품고 살았는데 '노련(魯連)'은 제나라 선비 노중련(魯仲連)을 가리킨다. 노중련이 조(趙)나라에 가 있을 때 진(秦)나라 군대가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邯鄲)을 포위하였는데, 이때 위(魏)나라가 장군 신원연(新垣衍)을 보내 진나라 임금을 황제로 섬기면 포위를 풀 것이라고 회유하였다. 이에 노중련이 "진나라가 방자하게 황제를 칭한다면 나는 동해(東海)에 빠져 죽겠다."라고 하니, 진나라 장군이 이 말을 듣고 군사를 50리 뒤로 물렸다고 한다. 《史記 卷83 魯仲連列傳》 백 대가……것입니다 '百世而可俟'는 '百世以俟聖人而不惑'의 준말이다. 《중용》 29장에서 ""통치자의 도는 자신이 지닌 덕을 근본으로 하여 일반 백성에게 징험을 하는 것이요, 삼왕에게 상고해도 오류가 없는 것이요, 천지에 세워 놓아도 어긋나지 않는 것이요, 귀신에게 물어보아도 의심이 없는 것이요, 백세토록 성인을 기다려도 의혹되는 일이 없는 것이다.〔君子之道 本諸身 徵諸庶民 考諸三王而不謬 建諸天地而不悖 質諸鬼神而無疑 百世以俟聖人而不惑〕"라고 하였다. 오진영(吳震泳, 1868~1944) 충청북도 진천(鎭川) 출신으로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이견(而見), 호는 석농(石農)이다. 1886년(고종 23) 전우(田愚)를 처음 만난 후 수업을 받았고, 1897년 스승으로 섬기기 시작하여 호서 지역의 대표적인 전우 문인이 되었으며, 전우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계승하였다. 스승의 문집인 『간재사고(艮齋私稿)』의 간행을 추진하다가 문인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전우의 행장(行狀)을 짓는 등, 스승을 높이고 학통을 수립하는 데 진력하였다. 1944년 음성(陰城) 망화재(望華齋)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오진영의 문인들이 안성(安城) 경앙사(景仰祠)에 배향하였다. 문집으로 《석농집(石農集)》이 있다. 이견(而見) 오진영의 자이다. 식견이……나 여기서는 '어떤 사람'은 충고해주는 오진영을 가리키며, '나'는 간재 자신을 가리킨다. 다공 미상. 《간재집》을 보면 왜에게 머리를 깎인 것으로 보인다. 권2 〈답남중칙(答南仲則)〉, 권3 〈답서병갑(答徐柄甲)〉 등에 그러한 내용이 보인다. 복철 원래 수레가 줄줄이 뒤집힌다는 뜻이다. 《한시외전(韓詩外傳)》에 "앞에 가는 수레가 엎어졌는데도 뒤에 가는 수레가 경계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뒤에 다시 엎어지는 것이다.〔前車覆而後車不誡 是以後覆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명리 원래 명리는 명(名)은 명칭(名稱)을 말하고, 이(理)는 도리(道理)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명분(名分)의 의미로 보인다. 화목하게 지내기를 《시경》 〈하인사(何人斯)〉에 "형은 질 나발을 불고 아우는 젓대를 분다.[伯氏吹壎, 仲氏吹篪.]"라고 하여 매우 좋은 형제애를 표현하였는데, 여기서는 동문 간에 화목하게 지내는 것을 말한다. 왜놈에……따르지 마라 《간재집후편속집》 권5 〈고제자손겸시제군(告諸子孫兼示諸君)〉에 보이는 말이다. 의발을 전하였으므로 '전발(傳鉢)'은 의발(衣鉢)을 전한다는 뜻이다. 의발은 본디 불교(佛敎)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전법(傳法)의 표신으로 주는 가사(袈裟)와 발우(鉢盂)를 말한 것으로, 전하여 특히 학문 전수(學問傳授) 등의 경우에 쓰인다. 증자가……답한 것 《논어》 〈이인(里仁)〉에서 공자가 이르기를 "삼아, 우리의 도는 하나로 관통한다.[參乎, 吾道一以貫之.]"라고 하니, 증자(曾子)가 '예' 하고 대답하였다. 아무개 옹 스승 간재를 가리킨다. 우암이……증명한다면 이이(李珥)의 낙발(落髮)에 대해 그의 고제인 김장생이 증언하였다면 그 설은 끝내 변명할 수 없다는 말로 간재의 고제라고 일컬어지는 오진영이 스승이 하지 않은 말을 햇다고 무함했으니 이 사실은 끝내 변명할 수가 없게 된다는 말이다. 권8의 〈여오사익, 기축(與吳士益, 己丑〉에서 자세히 논하고 있다. 죄가……찼는데 '죄악관영(罪惡貫盈)'이란 말이 있는데, 이것은 죄악이 찰대로 가득 차서 마치 돈이 꿰미의 마지막까지 가득 찬 것에 비유한 것이다. 구양수의 〈논여이간차자(論呂夷簡劄子)〉에서 " 이간의 죄악은 가득차서 사적이 환하게 드러납니다.[夷簡罪惡滿盈 事跡彰著]"라고 하였다. 강태걸(姜泰杰) 자는 자흥(子興), 충북 음성군 삼성면 덕정리 거주하였다. 스승의……하겠습니까 주희(朱熹)가 "불자의 말에 '이 몸과 마음으로 진찰(塵刹, 삼라만상)을 받든다면, 이것이 바로 부처의 은혜에 보답하는 거라 하겠네.[將此⾝⼼奉塵刹 是則名爲報佛恩]' 하였다."라고 하였다. 《朱⼦⼤全》 卷36 〈答陳同甫〉 《능엄경(楞嚴經)》주석에는 "성과(聖果)를 얻고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불은(佛恩)을 갚는 것과는 상관이 없지만 이것으로써 보답하지 못하는 은혜에 보답하는 것을 삼는다.[以此爲報不報之恩也]"라고 하였다. 뒤 구절의 말은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는데 어찌 책을 인간하는 행위를 하느냐는 의미이다. 스승을…바친다 《국어(國語)》 〈진어(晉語)〉에 보이는 말로 "사람은 세 분의 은혜로 살게 마련이니, 그분들을 똑같이 섬겨야 한다고 나는 들었다. 어버이는 나를 낳아 주셨고, 스승님은 나를 가르쳐 주셨고, 임금님은 나를 먹여 주셨다. 어버이가 안 계셨으면 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고, 임금님이 길러 주지 않았으면 먹고살지 못했을 것이고, 스승님의 가르침이 없었으면 깨우치지 못했을 것이니, 이분들은 나를 살아가게 해 주신 점에서 똑같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하나같이 섬겨야 할 것이니, 오직 이분들 중 어느 분과 있든 간에 목숨을 바쳐야 마땅하다.〔民生於三 事之如一 父生之 師教之 君食之 非父不生 非食不長 非敎不知 生之族也 故壹事之 唯其所在 則致死焉〕"라 하였다. 공자께서……뒤따랐는데 《논어》 〈선진(先進)〉에서 "공자가 광(匡)에서 곤액을 당했을 때 안연이 뒤쳐졌다가 따라왔다. 공자가 말했다. '나는 네가 죽은 줄 알았다.' 안연이 말했다. '선생님이 계시는데, 회(回)야가 어찌 감히 죽겠습니까?'〔子畏於匡 顔淵後 子曰 吾以女爲死矣 曰子在 回何敢死〕"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주자는 "'만약 공자가 해를 입었으면 안자(顔子)가 반드시 죽음으로써 구했을 것이다.'라고 주자가 말하자, 혹자가 '안로(顔路 안연의 아버지)가 있는데 안연이 남을 위해 죽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라고 물었다. 주자가 말했다. '일이 우연히 그렇게 되면 단지 죽을 뿐이다. 이것과 붕우에게 목숨을 허락하지 않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난을 당하기 이전에는 붕우에게 목숨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으나, 이미 어려움을 당한 상황에서는 그 말대로 할 수 없다.[事偶至此 只得死 此與不許友以死之意別 不許以死在未䖏難以前 乃可如此 䖏已遇難 却如此說不得]"라고 하였다. 《朱子語類 卷38 子畏於匡章》 한문공이……없다 한문공은 한유(韓愈)를 가리키며, 이 문장은 〈여맹상서서(與孟尙書書)〉에 보인다. 여인(閭人) 미상. 아마도 무식한 왜놈이란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선비는……없다 《예기》 〈유행(儒行)〉편에 보이는 말이다. 스승이란……모범이다 양웅(揚雄)의 《법언(法言)》 〈학행(學行)〉에 나오는 말이다. 감히……믿었다 《근사록》 〈치지(致知)〉에서 이천 선생이 문인들에게 답하는 말에 "공맹의 문인이 어찌 모두 현철한 자만 있었겠는가. 진실로 중인들도 많았으니, 중인으로서 성인을 보면 알지 못하는 것이 많았겠지만 오직 감히 자신의 소견을 믿지 않고 스승을 믿었다. 이 때문에 구한 뒤에 얻었는데, 지금 제군들은 나의 말에 대하여 조금만 자신의 뜻에 합하지 않으면 버려두고 다시는 생각해보지 않으니, 이 때문에 끝내 다르게 되는 것이다."라 하였다. 含은 오자로 보인다. 輪은 輸의 오자로 보인다. 辨은 辦의 오자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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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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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화도강당 제정축문【스승의 명을 받들어 지음. 을묘년(1915)】 華島講堂祭井祝文【奉師命作 乙卯】 드높고 드높은 산악이 維嶽巍巍이 땅의 진산285)이 되고 作鎭玆土그 빛나고 빛나는 신령이 厥靈赫赫뭇 생령들에게 은택을 내리는지라 惠澤羣生아무개 등이 某等이 곳에 온 뒤로 入此以來모두 신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咸蒙神賜다만 이 옛 우물만이 惟此舊井혹 그 물줄기가 짧아지므로 或短其流모두 우려스럽다고들 하니 僉曰可憂어찌 깊이 팔 것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盍思深鑿가래질하기도 하고 삽질을 하기도 하여 載鍬載鍤그 근원을 파내자 用濬厥源콸콸 마침내 흘러나와 混混乃來아무리 마셔도 다하지 않는지라 飮之不竭관리들286)에겐 기쁨이 넘치고 喜動冠珮숲 골짝엔 광채가 더해졌습니다 光增林壑오직 신명의 은총이니 維神之恩어찌 감히 잊고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其敢忘忽마침내 길한 날짜를 정하여 肆卜吉日정결한 술밥을 이에 베푸노니 精饎斯陳신께서는 밝게 강림하시어 神其昭臨부디 흠향하고 돌아보아 庶幾歆顧상서를 불러오고 환란은 막아서 致祥弛患무궁히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惠我無疆 維嶽巍巍, 作鎭玆土.厥靈赫赫, 惠澤羣生.某等, 入此以來, 咸蒙神賜, 惟此舊井.或短其流, 僉曰可憂, 盍思深鑿.載鍬載鍤, 用濬厥源, 混混乃來, 飮之不竭.喜動冠珮, 光增林壑.維神之恩, 其敢忘忽.肆卜吉日, 精饎斯陳.神其昭臨, 庶幾歆顧, 致祥弛患, 惠我無疆. 진산(鎭山) 마을이나 고을을 진호(鎭護)하는 주산(主山)을 말하는데, 주로 고을의 뒤쪽에 위치한다. 관리들 원문의 관패(冠佩)는 관리들이 모자와 몸에 차는 장신구로, 보통 관리들의 복장을 이른다. 여기서는 관리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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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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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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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의 초상에 고하는 글 告先師遺像文 유세차 11월 계사삭 15일 정미에 문인 김택술, 최태일(崔泰鎰) 등은 손자 일중(鎰中)이 보름날 아침 첨배(瞻拜)하는 것을 말미암아 선사 간재 선생의 유상(遺像)에 고합니다."삼가 아룁니다. 사문(斯文)의 발전과 침체는 비록 기화(氣化)의 흥성과 쇠퇴에 말미암지만 또한 인사(人事)의 옳고 그름에 기인합니다. 이 때문에 맹자는 세상이 한번 다스려지고 한번 어지러운 것이 참으로 일정한 햇수가 있다고 하면서 그 장의 마지막에서 편벽된 행동을 막고 성인을 보호함에 스스로 힘쓴다272)고 하였는데, 지금도 그 방비책에 힘입고 있습니다. 옛날 전재(全齋) 선생의 상(喪)에 가릉(嘉陵)273) 김평묵(金平黙)이 제문을 올렸는데, 겉으로는 칭송하는 듯하였지만 속으로 기롱하는 것을 간파한 이가 적었습니다. 문인 가운데 세력을 두려워하고 아첨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앞 다투어 무마시키려고 하였고 간혹 간파한 자들은 도리어 선생께서 그 제문을 내친 것을 지나치게 행동하여 사단을 만들어낸다고 하였습니다. 다만 선생께서는 시종 단단하여 흔들리지 않으니 스승과 제자274)의 논의가 붙들어 설 수 있게 되었으며, 오래 지나 안정되었습니다. 이전에 만약 선생이 계시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사문(斯文)이 어찌 그러한 은택을 받았겠습니까. 이 또한 선생께서 스스로 힘쓰신 효과이며 또한 뒤에 죽을 저희들에게 바라는 것입니다.지난번 선생이 돌아가신 뒤로275) 문인 오진영(吳震泳)이란 자가 선사께서 일찍이 문집 간행에 대해 인가하신 뜻을 두시고서 '은행나무 아래에서 홀로 앉아 계시다가 「일을 헤아려서 처리하라.」라 명하였다'고 속였습니다. 사방에서 책망이 이르는 것에 대해 변론할 때면 또한 백방으로 말을 교묘하게 하여 겉으로는 기피하면서 뒤로는 몰래 증거를 댑니다. 그러나 오진영이 서병갑(徐柄甲)276)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사실은 선사께서 말씀하지 않으신 가르침을 따랐다.'는 문장이 나왔으니, '인가하신 가르침'이란 말이 거짓임을 스스로 남김없이 자백한 꼴이었습니다. 그런대 사람들은 오히려 그 죄를 성토하는 것을 지나친 행동이라고 여겨서 강한 자는 말로 드러내고 부드러운 자는 낯빛으로 드러내며 휩쓸려 따라가 제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개 옛날의 근심거리는 밖에 있어서 그 근심이 적었는데, 지금의 걱정거리는 안에 있어서 그 걱정이 더욱 큽니다. 자손과 문인이 바야흐로 그 후의 일을 잘 대응할 수 없어서 동동거리며 편안하지 못합니다.또한 김용승(金容承)277)이란 자가 있는데, 그는 이러한 때에 사특한 말을 널리 퍼트리며 그 틈을 탔으니, 오호라! 불인(不仁)함이 대단히 심하였습니다. 평소에 '선사에게 끝도 없는 은혜를 받았다'고 스스로 말하고서는 영혼에 고하는 문장278)은 너무나 패악스러우니, 문장을 구성하여 여닫는 수단은 가릉의 김평묵에 비하면 앞뒤로 똑같다고 할 수 있으며, 겉으로는 기피하고 뒤로는 증거를 대는 심술은 음성(陰城)의 오진영에 비하면 또한 피차간에 서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문장에 '사우(師友)가 사우가 되는 것은 춘추 의리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언뜻 보면 병통이 없는 말인 듯하지만 이는 실로 '전날 선생을 스승과 벗의 중간 정도로 대하였다.'는 말에서 나온 것이니, 그가 선생을 스승과 벗의 중간 정도로 대했다는 것은 바로 그의 문장에서 이른바 '저자 호랑이의 의심을 면치 못하여 그렇게 명목을 세운 것이다.'279)라고 한 부분에 해당합니다. 당시 오진영의 무함이 바야흐로 펼쳐지고 아직 선생의 유서280)가 나오지 않았을 때는 의심하는 것이 큰 죄가 되지는 않는데, 유서가 이윽고 나와 오진영의 속임이 분명하게 드러났어도 오히려 다시 의심스럽다고 그렇게 말하였으니, 그 마음 씀씀이가 아름답지 못한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대개 살아 있을 때는 전적으로 스승으로 섬기다가 타계한 이후에 스승과 벗의 중간 정도로 대하며, 무함을 알기 전에는 전적으로 스승으로 섬기다가 무함을 안 뒤에는 스승과 벗의 중간 정도로 대한 것은 비록 스승을 배반함을 속이고자 한들 그럴 수 있겠습니까.그러나 버티면서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사람들의 이목을 속이며 사사로이 가학을 전수한다는 둥 자신을 변호하는 방법을 나열하였습니다. 오호라! 한번 다스려지고 한번 어지러워지는 운수는 참으로 면하기 어려운 바인데, 어지러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기이해지며 상황은 갈수록 더욱 나빠지니,281) '하늘이 그 사이에 음으로 이르게 한 것 같다.'라 한 것은 과연 무슨 말입니까. 오진영이 속인 것은 그 행동이 뜻밖이어서 사람들도 또한 괴이하게 여겼기에 그 말을 들을 때 곧이곧대로 여기지 않았는데, 김용승이 선사를 모독한 것은 그 일을 뒤따라 일어나서 사람들이 바야흐로 왁자지껄하게 이야기하여 그 말의 그릇됨을 알아서 그를 인정하지 않고 비로소 성토하게 되었으니, 오진영은 끝내 스승을 배반한 사람의 핑계거리가 되어 그의 거짓을 이뤄주었습니다. 그러나 김용승은 음성의 오진영과 가릉의 김평묵이 다만 스스로 외치고 스스로 화답한 것에 비하면 어떤 자이겠습니까.옛날 선생의 역량으로도 오히려 한 때에 벌어진 것도 급히 안정시키기 어려웠는데, 현재 저희들의 연약함으로 어찌 오랜 기간 벌어진 일을 진정시킬 수 있겠으며, 한 가지 일도 오히려 어려웠는데, 더구나 두 가지 일이겠습니까. 세상을 굽어보고 우러러보며 참담하고 아픈 마음을 천지도 포용하지 못하니, 참으로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스스로 힘쓸 수 있는 한 가지 일이 있기는 하니, 다만 그 사람을 멀리하고 그 문장을 따져서 편벽된 행동을 막고 성인을 보호한다는 뜻을 삼가 부치면서, 과연 그 사람을 막을 수 있는 자가 나오기를 기다려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어 선생의 햇빛처럼 밝고 옥처럼 깨끗한 지조와 인으로 덮어주고 의로서 길러주는 덕이 다시 세상에 밝아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소자들의 현재의 책임입니다.삼가 생각하건대, 저승과 이승이 비록 다르지만 신리(神理)는 절로 통할 것이니, 외롭고 약한 저희들을 불쌍하게 여기어 때때로 강림하여 은밀하게 도와주심을 마땅히 멈추지 말아주십시오. 일이 만약 그르다면 비록 사람들의 한 때 비난에서 도망할 수는 있지만 훗날 신령이 처벌은 면키 어려울 것이니, 오히려 어찌 감히 어리석게 김용승의 번거로운 글에서 그의 허물을 본받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높으신 영령께서는 이 말씀을 들으시고 이에 이르소서." 維歲次十一月癸巳朔十五日丁未, 門人金澤述、崔泰鎰等, 孫鎰中因望朝瞻拜, 敢昭告于先師艮齋先生遺像.曰 : "伏以斯文隆替, 雖由氣化之盛衰, 而亦因人事之得失.是以孟子論一治一亂, 固有常數, 而卒自勉以距詖閑聖, 至今賴其彌縫矣.昔者, 全翁之喪, 嘉金之文, 鮮有識破其外贊內譏.門人之畏勢樂謟者, 爭相扳去, 其或識破者, 反以先生之斥逐爲過擧生事.惟先生始終堅確, 師生之論, 得有所扶, 久而乃定.向者若無先生, 今日之斯文, 寧有影響乎.此亦先生自勉之效, 而又以望於後死者也.越自山頹, 門人有吳震泳者, 誣先師以曾有認意, 謂'杏下獨命, 「料量爲之.」' 至其辨責四至, 則又百方巧辭, 陽諱而陰證之.及震與徐柄甲書, '其實原從先師不言之敎'之文, 出而認敎之說, 自白無餘.人猶有以聲討厥罪爲過擧, 强者發於言, 柔者顯於色, 靡然不可止矣.蓋昔之患在外, 其患小, 今之憂在內, 其憂大.子孫門人, 方無以善其後, 憧憧不自安.又有金容承者, 乃以此時鼓其邪說而乘之, 嗚呼! 不仁甚矣.平日自謂'受罔極之恩.' 而告文絶悖, 而其縱橫捭闔之手段, 視嘉金, 可謂前後一揆 ; 陽諱陰證之心術, 視陰吳, 亦可謂彼此同轍.其文有曰 : '師友之爲師友, 以其有春秋也.' 以外面觀之, 似乎無病之言, 而此實從其前日待先生以師友間之說而來, 其所以待先生以師友間者, 卽其文中所謂'不免市虎之疑而立'者也.當吳誣方張, 遺書未出, 疑之不爲大罪, 及夫遺書已出, 吳誣快明, 而猶復云爾者, 其用心之不美, 大可見矣.蓋其生前純師之, 沒後師友間之, 認誣前純師之, 認誣後師友間之者, 雖欲諱倍師之實, 得乎.然且抵賴, 欺人耳目, 私自傳授, 護法羅列, 嗚呼! 治亂之數, 固所難免, 而亂之愈往愈奇, 每下愈况, '天於其間若有以陰致之者.' 果有何說也? 震泳之誣, 創自意外, 人亦有怪, 其聽聞之, 不雅馴者.容承之瀆, 躡其事後, 人方藉稱, 認說之非, 虛金初討.吳終至畔師人之藉之, 有以成之.其視陰吳與嘉金之只屬自唱而自和者, 爲何如也.以在昔以先生之力量, 猶難遽定於一時者, 以當今以小子等之綿薄, 何能鎭定於餘日乎, 而一之猶難, 况其二者乎.俯仰慙痛, 天地莫容, 誠不自知其所以爲喩也.惟有一事, 可以自勉者, 只得揮其人辨其文, 而竊附距閑之義, 以待夫果能彌縫其人者, 得有所藉手, 而先生日光玉潔之操, 仁覆義育之德, 復明於世, 此小子等今日之責也.竊伏惟念, 幽明雖殊, 神理自通, 致悶孤弱, 時降陰隲, 當亦莫已之應也.事如其非, 縱逃人誅於一時, 不免神殛於來日, 尙何敢冒昧效尢於容承之瀆告乎.伏惟尊靈, 是聽是格." 맹자는……힘쓴다 《맹자》 〈등문공하(滕文公下)〉에 보이는 내용으로, 오백 년을 주기로 한번 다스려지고 한번 어지러워진다고 하였다. 이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맹자는 "나는 또한 인심을 바로잡아 부정한 말을 그치게 하고, 편벽된 행동을 막으며, 방탕한 말을 내쳐서 세 성인을 계승하고자 하노니, 어찌 변론하기를 좋아하겠는가. 내가 마지못해서이다. 능히 양주, 묵적의 도를 막을 것을 말하는 자는 성인의 무리이다.〔我亦欲正人心, 息邪說, 距詖行, 放淫辭, 以承三聖者, 豈好辯哉? 予不得已也. 能言距楊、墨者, 聖人之徒也.〕"라고 하였다. 가릉(嘉陵) 가평의 옛 지명이다. 중암 김평묵은 지도(智島) 귀양에서 풀려난 뒤 가평읍과 가평 설악에서 강학을 하였다. 스승과 제자 여기서 스승은 전재 임헌회와 그 문도들을 가리킨다. 스승이 돌아가신 뒤로 '산퇴(山頹)'는 훌륭한 스승이 죽은 것을 의미한다. 옛날 공자(孔子)가 아침 일찍 일어나 뒷짐을 지고 지팡이를 끌고 문 앞에 한가로이 노닐며 노래하기를 "태산이 무너지고 대들보가 꺾이고 철인(哲人)이 죽겠구나.[奉山其頹乎 梁木其摧乎 哲人其萎乎]" 하였는데, 그 후 곧 별세하였다. 여기에서 연유하여 스승의 죽음을 산퇴양최(山頹梁摧)라고 한다. 《禮記 檀弓上》 서병갑(徐柄甲) 자는 두익(斗益)이고, 본관은 대구이다. 구계(龜谿) 서침(徐沈)의 후손이다. 보은에 거주하였다. 김용승(金容承) 자는 성선(聖先)이고, 본관은 광산이다. 문원공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후손이며, 여주에 거주하였다. 간재선생을 배신했다고 한다. 영혼에 고하는 문장 김용승의 〈망고현천문(望告玄阡文)〉을 가리킨다. 저자 호랑이의……세운 것이다 김용승의 〈귀혜가(歸兮歌)〉에서 한 말이다. 김용승에 관하여 후창이 변론한 내용은 권15 〈김용승망고현천문변(金容承望告玄阡文辨)〉에 자세히 나온다. 선생의 유서 《간재집후편속집》 권5 〈고제자손겸시제군(告諸子孫兼示諸君)〉에 보이는 말이다. 앞의 〈고선사유문(告先師墓文)〉에 이에 대한 내용이 보인다. 상황은……나빠지니 원래 '매하유황(每下愈况)'이란 말은 《장자》 〈지북유(知北遊)〉에서 나온 말이다. 즉 "돼지 잡는 정확(正獲)이 시장 관리인에게 물을 때 돼지의 넓적다리를 밟아보는 것은 아래쪽으로 내려갈수록 살찐 것을 알기가 쉽기 때문이다."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상황이 갈수록 나빠진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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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의 초상에 고하는 글 告先師遺像文 유세차 을유년(1945) 8월 무인삭(戊寅朔) 15일 임진일(壬辰日)에 문인(門人) 김택술과 조제원(趙濟元)은 삼가 선사 간재선생(艮齋先生)의 초상에 다음과 같이 아룁니다.선생의 학문은 先生之學인을 체득하고 의를 따르는 것이었으니 體仁用義오직 그 의를 다하는 것이 惟其義盡인을 이르게 하는 방법입니다282) 所以仁至의를 어디에 다하여야 하겠습니까 盡義于何만 가지 모든 일에 하여야 하니 有萬其事화이와 군신에 대한 것이 華夷君臣바로 그 중 큰 것입니다 是其大致재앙 낀 시운을 만나 時値劫運섬의 왜인이 유리한 상황을 틈타서 島倭乘利우리나라의 땅을 빼앗고 奪我疆土우리 종묘의 기물을 부수었습니다 毁我宗器화가 군상에까지 미쳐 禍及君上전후로 원통하고 분한지라 前後寃懥함께 한 하늘을 일 수 없겠기에 頭不共天마침내 피란길을 떠났습니다 身乃避地십여 년이 지나도록 積十餘年눈물만 흘리고 있으나 有泫其淚인의의 바른 학문은 仁義正學변함없이 공론에 남아있습니다 公議無異오호라 嗚呼왜놈들이 없어진다면 그 즉시 죽더라도 倭亡卽死전혀 슬프지 않을 것이라며 萬萬無悲감개가 격렬하여 感慨激烈선생께서 시를 지으셨지요 先生有詩또한 검남의 시인 亦誦劒南〈시아〉의 노래의 示兒之詞중원을 평정하던 날 定中原日네 아버지께 고하라는 가사를 외우시고는283) 告乃翁祠고인의 말씀이 云古人言나보다 먼저 터득하였다 하셨는데 先我獲之그 말씀 여전히 귓가에 맴돌아 言猶在耳마치 어제 들었던 듯합니다 如昨日時다행이 이제 幸玆호천이 비로소 돌아와284) 皓天始返나라의 명운이 다시 새로워지자 邦命重新지사들은 지혜를 내고 志士運智열강은 군대를 도와주어 列强助軍저 왜놈들 쓸어버리기를 掃去彼倭등에나 모기를 내쫓듯이 하고 如逐蝱蚊그 소굴까지도 幷其巢穴쳐부수고 불살랐습니다 載擣載焚우리 청구를 수복하여 復我靑邱강산에 아무런 탈이 없게 되니 無恙河山만백성이 모두 경사스럽고 萬姓普慶온 나라가 함께 기뻐합니다 八方同歡선생의 言念先生그날의 유언을 생각해보니 當日遺言이 쾌한 일을 보고서 見此快事어찌 나 몰라라 하겠습니까 豈容昧然그 곧장 지체가 없어야 하겠기에 宜卽無緩삼가 이에 거듭 아룁니다 謹玆告申바라건대 존령께서는 伏惟尊靈상청에서 기뻐하시고 喜動上淸구원에서 한을 푸시며 恨消九原때에 따라 조화를 타고서 因時乘機상제의 대궐을 출입하시어 周旋帝閽묵묵히 치도를 돕고 默相治道우리 백성들에게 은택을 내리며 惠我生民가만히 유학을 보우하고 冥佑儒學우리 사대부들을 빛나게 해 주소서 輝我冠紳삼가 아룁니다 謹告 維歲次乙酉八月戊寅朔十五日壬辰, 門人金澤述、趙濟元, 謹告于先師艮齋先生遺像曰 : "先生之學, 體仁用義.惟其義盡, 所以仁至.盡義于何, 有萬其事.華夷君臣, 是其大致.時値劫運, 島倭乘利.奪我疆土, 毁我宗器.禍及 君上, 前後寃懥.頭不共天, 身乃避地.積十餘年, 有泫其淚.仁義正學, 公議無異.嗚呼! 倭亡卽死, 萬萬無悲.感慨激烈, 先生有詩.亦誦劒南, 〈示兒〉之詞.'定中原日, 告乃翁'祠.云 : "古人言, 先我獲之." 言猶在耳, 如昨日時.幸玆皓天始返, 邦命重新.志士運智, 列强助軍.掃去彼倭, 如逐蝱蚊.幷其巢穴, 載擣載焚.復我靑邱, 無恙河山.萬姓普慶, 八方同歡.言念先生, 當日遺言.見此快事, 豈容昧然.宜卽無緩, 謹玆告申.伏惟尊靈, 喜動上淸, 恨消九原.因時乘機, 周旋帝閽.默相治道, 惠我生民.冥佑儒學, 輝我冠紳.謹告." 인을……방법입니다 남송(南宋)의 정치가인 문천상(文天祥)이 사형을 당하기 직전에 쓴 자찬시(自贊詩)에, "공자는 인을 이룬다 하고 맹자는 의를 취한다 하였으니, 그 의를 다하는 것이 인을 이르게 하는 방법이라네. 성현의 글을 읽었으니 배운 것이 과연 무엇이겠나. 지금에 와서야 부끄러움이 없게 되었도다.[孔曰成仁, 孟曰取義, 惟其義盡, 所以仁至. 讀聖賢書, 所學何事? 而今而後, 庶幾無愧.]"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검남(劒南)의……시인 검남은 남송(南宋)의 시인 육유(陸游)의 호이다. 육유는 자는 무관(務觀), 또 다른 호로는 위남(渭南), 노학암(老學菴), 구곡노초(九曲老樵) 등이 있다. 검남은 지금의 사천성(四川省) 일대로 검각(劒閣)의 남쪽 지역인데, 육유는 이곳에서 벼슬하면서 많은 시를 지었고 뒤에 자신의 시집을 《검남시고(劍南詩稿)》라고 이름한 데서 유래하였다. 그는 진사시에 실패하고 지방관과 말직을 전전하는 등 불우한 일생을 보냈으며, 일생 동안 1만 수(首)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시를 남겼다. 특히 금(金)나라에 대한 항전(抗戰)을 통한 실지(失地)의 회복을 바라는 애국적인 시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시아(示兒)〉는 육유가 임종 때 남긴 시이다. 그 시에, "죽으면 온갖 일이 헛됨 원래 알고 있지만, 다만 구주 통일을 보지 못함 슬프구나. 황제의 군사가 북쪽으로 중원을 평정하는 날, 제사 올릴 때 네 아비에게 알리는 일 잊지 말라.[死去原知萬事空, 但愁不見九州同. 王師北定中原日, 家祭無忘告乃翁.]"라고 하였다. 《劍南詩稿 卷85》 호천(皓天)이 비로소 돌아와 호천은 밝은 천도(天道)를 이른다. 《순자(荀子)》 권18 〈부(賦)〉에 "호천이 돌아오지 않으니 근심이 끝이 없노라. 천추에 반드시 돌아옴은 옛날의 떳떳한 도이니, 제자가 학문에 힘쓰면 하늘이 잊지 않으리라.[皓天不復, 憂無疆也. 千歲必反, 古之常也. 弟子勉學, 天不忘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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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양사에 춘우정 김공287)을 봉안할 때의 축문【을유년(1945)】 泌陽祠春雨亭金公奉安祝文【乙酉】 빛나고 빛나는 매옹288)은 赫赫梅翁사문의 맹종이요 斯文盟宗빼어난 인산289)은 仁山有卓고족290) 가운데에 나열되었다오 列高足中누가 인의 단서를 이었는가 孰繼仁緖춘우정이 있으니 春雨有亭순수하고 바름은 전수받은 것이요 純正淵源온화하고 돈후함은 품부 받은 것이라네 和厚稟生의방291)은 연원이 있으니 義方有自현인인 성은292)으로부터였고 城隱其賢세덕을 미루어 거슬러 올라가 보면 推溯世德월봉293)과 명천294)이 있다네 月峯鳴川학문은 충신을 주장하고 學主忠信마음은 성경을 오로지하여 心專誠敬정성스레 지키고 拳拳其守부지런히 공부하였네 孜孜其程하늘이 보이는 곳에서는 눕지 않았으니 見天不臥홀로 있을 때를 삼감이 지극하였고 至哉謹獨도둑을 불쌍히 여겨 사다리를 구해다 놓으니 矜盜覓梯인이 충족되었도다 仁用充足실행하지 못했으면 다른 말을 들을까 두려워하였으니 未行恐聞계로가 이와 같은 뜻을 지녔고295) 季路同志아무리 무식하여도 또한 가르쳐주었으니 空空亦敎공자도 이미 하신 일이라네296) 宣尼已事지금의 학문을 끊고 하지 않으며 絶今不爲오직 옛 도와 똑같이 하려 하였네 惟古是同존왕양이297)를 엄하게 하니 尊攘其嚴춘추대의가 높아졌다네 春秋義隆평생의 학문이 蓋生平學인의에 있었으니 在乎仁義평상시이거나 변고가 생겼을 때이거나 于常于變어찌 혹시라도 떠났겠는가 豈其或離사직에 지붕이 설치되었을 때298)에 逮夫屋社충분이 들끓어 올랐으니 忠憤炳炳도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 몸을 깨끗이 하여 歸潔有道한결같은 마음으로 자신의 뜻을 바쳤네299) 一心獻靖어찌 저 원수 같은 금나라는 夫何讐金온갖 방법으로 으르고 더럽혀서 脅汙百端물리치고 물에 던지더니 牢却投水마침내는 뭇 산들을 무너뜨리는가 竟隕群山의대에 찬을 남겨 衣帶有贊문문산과 궤적을 함께하였으니 同轍文文그 인을 이루고 의를 취한 것이 其所成取고인에 부끄럽지 않도다300) 不愧古人풍성이 이르는 곳마다 風聲攸曁사림들에게 광채가 더해지니 光增士林그 의열을 사모하는 것은301) 羹墻義烈삼십년 지난 지금도 여전한다네 卅載餘今마침내 하늘이 뉘우침에 屬玆天悔큰 원수를 몰아내었으니 驅逐鉅讐오랑캐302)들이 깨끗이 腥塵掃淸나라 안 여러 고을에서 사라졌도다 環海列州태산이 있는 고을이라 泰山之鄕선생을 제사지낼 만하니 先生可祭학문으로 보나 절의로 보나 以學以節누가 다시 이견을 세우겠는가 孰復立異사우가 완성되자 祠宇旣成오르내리며 퍼져 숙연하게 하는지라303) 陟降悽焄제기들을 문서로써 바루느라304) 籩豆簿正유자305)들은 재빠르게 달려 다니네 章縫駿奔무성의 이웃이요 武城之隣비수의 북쪽이로다 泌水之陽정일의 제사에 어그러짐이 없으니 丁禋莫愆영원토록 향기로우리라 永世芬芳 赫赫梅翁, 斯文盟宗, 仁山有卓, 列高足中.孰繼仁緖, 春雨有亭, 純正淵源, 和厚稟生.義方有自, 城隱其賢, 推溯世德, 月峯、嗚川.學主忠信, 心專誠敬, 拳拳其守, 孜孜其程.見天不臥, 至哉謹獨, 矜盜覓梯, 仁用充足.未行恐聞, 季路同志, 空空亦敎.宣尼己事.絶今不爲, 惟古是同, 尊攘其嚴, 春秋義隆.蓋生平學, 在乎仁義, 于常于變, 豈其或離.逮夫屋 社, 忠憤炳炳, 歸潔有道, 一心獻靖.夫何讐金, 脅汙百端, 牢却投水, 竟隕群山.衣帶有贊, 同轍文文, 其所成取, 不愧古人.風聲攸曁, 光增士林, 羹墻義烈, 卅載餘今.屬玆天悔, 驅逐鉅讐, 腥塵掃淸, 環海列州.泰山之鄕, 先生可祭, 以學以節, 孰復立異.祠宇旣成, 陟降悽焄, 籩豆簿正, 章縫駿奔.武城之隣, 泌水之陽, 丁禋莫愆, 永世芬芳. 춘우정(春雨亭) 김공(金公) 김영상(金永相, 1836~1911.)로, 춘우정은 그의 호이다. 자는 승여(昇如), 초명은 김영조(金永朝), 본관은 도강(道康)으로, 일제 강점기의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매옹(梅翁)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을 가리킨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백응(伯應)ㆍ백림(伯臨),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 《매산집(梅山集)》이 있다. 인산(仁山) 소휘면(蘇輝冕, 1814~1889)으로, 인산은 그의 호이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순여(純汝), 시호는 문양(文良)이다. 나이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엄한 훈육과 할아버지인 수구(洙榘)에게 학업을 닦았으며, 20세 이전에 문명을 떨쳤다. 뒤에 홍직필(洪直弼)을 사사하였다. 1858년(철종9) 도백(道伯)에 의해 학행으로 천거되었고 1881년(고종18) 선공감 가감역, 전설시 별제(典設寺別提)에 제수되었다. 그 뒤 전라도사로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아니하고 1882년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취임하지 않고 오직 후배들을 교육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데에 온 힘을 기울였다. 저서로는 《인산집(仁山集)》 17권이 있다. 고족(高足) 품행(品行)과 학식이 우수한 문인(門人)이나 제자를 의미한다. 의방(義方) 올바른 도리로 자식을 가르치는 것으로, 가정교육을 의미하기도 한다. 춘추 시대 위(衛)나라 장공(莊公)의 아들 주우(州吁)가 오만 방자하게 굴자, 석작(石碏)이 장공에게 충간(忠諫)한 말 가운데 "아들을 사랑한다면 그에게 올바른 도리로 가도록 가르쳐서 잘못된 곳으로 빠져 들지 않게 해야 한다.[愛子, 敎之以義方, 弗納於邪.]"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春秋左氏傳 隱公3年》 성은(城隱) 춘우당의 아버지인 김경흠(金景欽, 1815~1880)으로, 성은(城隱)은 그의 호이다. 자는 덕현(德玄)이다. 무성서원(武城書院)에 배향되었다. 월봉(月峯) 춘우당의 9대조 김대립(金大立, 1550~미상)으로, 월봉(月峯)은 그의 호이다. 자는 신부(信夫)이다. 명천(鳴川) 춘우당의 8대조 김관(金灌, 1575~1635)으로, 명천(鳴川)은 그의 호이다. 자는 옥이(沃而)이다. 실행하지……지녔고 계로(季路)는 자로의 자이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에 "자로는 좋은 말을 듣고 아직 그것을 실행하지 못했으면 행여 다른 말을 들을까 두려워하였다.[子路有聞, 未之能行, 唯恐有聞.]"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아무리……일이라네 《논어》 〈자한〉에 공자가 "내가 아는 것이 있는가? 나는 아는 것이 없지만 비루한 사람이 나에게 묻되 그가 아무리 무식하다 하더라도 나는 그 양단을 들어서 다 말해주노라.[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존왕양이(尊王攘夷) 왕실(王室)을 높이고 이적(夷狄)을 물리친다는 뜻이다. 공자가 《춘추(春秋)》를 저술할 때 이 원칙에 입각하였으므로, 이를 춘추대의(春秋大義)라고 한다. 사직에……때 패망한 나라의 사직(社稷)에 지붕[屋]을 설치하여 천지의 기운이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禮記)》 〈교특생(郊特牲)〉에 "천자의 대사(大社)에 지붕을 덮지 않아 서리ㆍ이슬ㆍ바람ㆍ비를 직접 맞게 하는 것은 천지의 기운이 서로 통달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 때문에 망한 나라의 사직에는 지붕을 만들어 하늘의 양기를 받지 못하게 한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자신의 뜻을 바쳤네 원문의 '헌정(獻靖)'은 《서경》 〈상서(商書) 미자(微子)〉에, 은(殷)나라 태사(太師)인 기자(箕子)가 주(紂)의 서형(庶兄)인 미자에게 "스스로 분의에 편안하여 각자 스스로 그 뜻이 선왕에게 전달되면 됩니다. 저는 떠나가 은둔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겠다.[自靖, 人自獻于先王, 我不顧行遯.]"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신하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을 이른다. 의대(衣帶)에……않도다 문문산(文文山)은 송(宋) 나라의 문천상(文天祥)으로, 문산(文山)은 그의 호이다. 문천상이 47세의 나이로 형벌을 받아 죽게 되었을 때에 띠에 찬(贊)을 남겼는데, 그 찬에 "공자께서는 인(仁)을 이루라고 하였고, 맹자께서는 의(義)를 취하라고 하였네. 생각건대 의를 다하면 인은 이르는 것이다. 성현들의 글을 읽고 배운 바가 무슨 일인가. 지금에나 이후에나 거의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孔曰成仁, 孟曰取義. 惟其義盡, 所以仁至. 讀聖賢書, 所學何事. 而今而後, 庶幾無愧.]"라고 하였다. 《宋史 卷418 文天祥列傳》 사모하는 것은 원문은 '갱장(羹墻)'인데, 이는 국과 담장을 보기만 하여도 사모하는 마음이 든다는 말로 돌아가신 선왕이나 현인을 경모(敬慕)하고 추념(追念)함을 의미한다. 《후한서(後漢書)》 권63 〈이고열전(李固列傳)〉에 "옛적에 요 임금이 돌아가신 뒤에 순 임금이 3년 동안 우러러 그리워하여 앉으면 담장에서 요 임금을 보았고, 밥을 먹으면 국에서 요 임금을 보았습니다.[昔堯殂之後, 舜仰慕三年, 坐則見堯於墻, 食則睹堯於羹.]"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오랑캐 원문의 '성진(腥塵)'은 누린내 나고 더럽다는 말로 청나라 오랑캐를 가리킨 것이다. 오르내리며……하는지라 귀신의 기(氣)를 형용한 것이다. 《예기(禮記)》 〈제의(祭義)〉에 "그 기운이 발산하여 위로 날아 올라가서, 소명하고 훈호하고 처창함이 된다.[其氣發揚于上, 爲昭明焄蒿悽愴.]"라고 하였는데, 주희(朱熹)의 해설에 "귀신이 밝게 드러나는 것이 소명이고, 그 기운이 위로 퍼져 올라가는 것이 훈호이고, 사람의 정신을 오싹하게 하는 것이 처창이다.[鬼神之露光處是昭明, 其氣蒸上處是焄蒿, 使人精神竦動處是悽愴.]"라고 하였다. 제기들을 문서로써 바루느라 《맹자》 〈만장 하(萬章下)〉에 "공자께서 먼저 문서상으로 제기에 올릴 제수를 분명히 정하여 바로잡음으로써, 공급하기 어려운 사방의 귀중한 물품들을 문서상으로 분명히 정하여 바로잡은 제기에 올리지 못하게 하셨다.[孔子先簿正祭器, 不以四方之食, 供簿正.]"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유자들 원문의 '장봉(章縫)'은 장보봉액(章甫縫掖)'의 줄임말로, 유자(儒者)로서의 지위, 곧 유자를 이른다. 《예기》 〈유행(儒行)〉에 "저는 어려서 노나라에 살 때에는 봉액의 옷을 입었고, 장성하여 송나라에 살 때에는 장보의 관을 썼습니다.[丘少居魯, 衣縫掖之衣, 長居宋, 冠章甫之冠.]"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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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한 자를 성토하고 배신자를 배척한 일을 벗 정경산 기성 이 도와준 것에 감사하며 2수 謝敬山鄭友【基聲】贊討誣斥倍 【二首】 스승 위해 몸이 꺾이는 것도 생각할 겨를 없어 爲師不暇念身摧외로운 군대 힘껏 이끌어 적의 수괴 성토했네 勖率孤軍討賊魁도를 밝히는데 공이 있다면 지나친 말이나 明道有功雖過語음이 다하면 혹여 한 양이 열리는 걸 보리라 窮陰或見一陽開-진영(震泳)241)-여문242)의 죄안을 스스로 펼쳐 열었으니 驪文罪案自陳開시호243)처럼 의심스런 마음이 그 근원 되었네 市虎疑情作厥胎죄상을 아는 데 어찌 꼭 맑은 거울 비춰보랴 知狀何須淸鑑照이제 배반하지 않았다 하니 마음244)도 어둡네 謂玆不叛昧靈臺-용승(容承)245)- 爲師不暇念身摧, 勖率孤軍討賊魁.明道有功雖過語, 窮陰或見一陽開.【震洙】驪文罪案自陳開, 市虎疑情作厥胎.知狀何須淸鑑照, 謂玆不叛昧靈臺.【容承】 진영(震泳) 오진영(吳震泳)을 말한다. 김택술은 오진영이 스승 간재의 뜻을 어기고 일제의 허가를 받아 문집을 간행했다고 비판하였다. 여문(驪文) 여주(驪州)에 사는 김용승(金容承)의 글을 가리킨 것이다. 시호(市虎) 있지도 않은 것도 계속 반복하면 사실처럼 믿게 되는 유언비어를 말한다. 시장에는 호랑이가 없는 것이 분명한데도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한두 사람이 말할 때에는 믿지 않다가 세 사람이 말하게 되면 결국 믿게 된다는 고사가 있다. 《韓非子 內儲說上》 마음 원문의 '영대(靈臺)'로 《장자(莊子)》 〈경상초(庚桑楚)〉에 "영대를 침입하지 못한다.[不可內於靈臺.]"라고 하였는데, 곽상(郭象)의 주(注)에 "영대는 마음이다.[靈臺者, 心也.]"라고 하였다. 용승(容承) 김용승(金容承)을 말하는 것으로, 후창이 쓴 〈관김용승백천재기언(觀金容承百千齋記言)〉을 보면 "그 스승을 배반한 것이 이보다 더할 수 없다.[其爲倍師也, 蔑以加矣.]" 등의 내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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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진영에게 고소를 당한 뒤 막내 동생 여안264)의 시에 차운하다 6월 被震訴後 次舍季汝安韻 【六月】 약관에 사도265)를 추구하여 弱冠求斯道벌써 흰 머리가 빛나구나 鬂霜已生光부친과 스승의 평생 가르침은 父師生平敎음을 배척하고 양을 부양함이라 斥陰與扶陽일음의 우레266)를 차마 보랴 忍見一陰震육양의 담장267)을 부수는구나 打破六陽墻스승을 속이고 선비들을 해치니 誣師復禍士그는 하늘도 두려워 않는구나 其不畏上蒼세도의 근심거리 생각하나니 言念世道憂굽이굽이 애간장이 끊어지구나 曲曲斷寸腸글 지어 현동 묘소에 고하는데 綴文告玄阡봉분268)엔 가을풀만 무성하네 秋草蔭斧堂한 번 죽음 뭐 그리 애석하랴 一死何足惜단지 도가 망하지 않길 원하네 但願道不亡원컨대 함께 부친과 스승 따르고 願同遵父師생사간에 상도를 바꾸지 않으리 死生無易常서풍을 맞으며 한 번 맹세하고 一誓臨西風돌아가는 기러기 떼 슬피 보네 悵看歸鴈行 弱冠求斯道, 鬂霜己生光.父師生平敎, 斥陰與扶陽.忍見一陰震, 打破六陽墻.誣師復禍士, 其不畏上蒼.言念世道憂, 曲曲斷寸腸.綴文告玄阡, 秋草蔭斧堂.一死何足惜, 但願道不亡.願同遵父師, 死生無易常.一誓臨西風, 悵看歸鴈行. 여안(汝安) 김택술의 막내아우인 김억술(金億述, 1899~1959)의 자(字)이다. 사도(斯道) 유교(儒敎)의 도(道)를 말한다. 일음의 우레[一陰震] 음진(陰震)은 음성(陰城)에서 살고 있던 오진영(吳震泳)을 가리킨다. 육양의 담장[六陽墻] 간재(艮齋)의 높은 도를 비유한 것이다. 《논어》 〈자장(子張)〉에 자복경백(子服景伯)이 숙손무숙(叔孫武叔)의 말을 빌려 자공이 공자보다 낫다는 말을 전하자 자공이 "선생님의 담장은 몇 길이라 문을 통해 들어가 보지 않으면 종묘의 아름다움과 백관의 성대함을 알 수가 없다.[夫子之牆數仞, 不得其門而入, 不見宗廟之美百官之富.]"라고 하였다. 봉분 원문의 '부당(斧堂)'으로, 《예기(禮記)》 〈단궁(檀弓)〉에 "봉분이 당같은 것도 보았고 …… 도끼같은 것도 보았다.[見封之若堂者矣, …… 見若斧者矣.]"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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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심이 있어서 有憂 현동 묘소의 봄 풀은 몇 번이나 푸르렀나 玄阡春草幾回靑재앙이 사문에서 나오니 배반자271)가 있네 禍出門墻有不庭음설272)이 장황하니 사람들이 모두 취하고 陰說張皇人盡醉여문273)이 현란하니 누가 능히 깨어나리오 驪文眩爍孰能醒한 세상에 거친 주먹질한 추성274)이 없고 麤拳一世無鄒聖당대에 큰 붓 휘두른 고정275)을 생각하네 大筆當年憶考亭잔약한 제자와 후손이 비록 힘을 다한들 弱弟孱孫縱盡力세운 공 어찌 충분히 알려질 수 있을까 建功那得足聞聽 玄阡春草幾回靑, 禍出門墻有不庭.陰說張皇人盡醉, 驪文眩爍孰能醒.麤拳一世無鄒聖, 大筆當年憶考亭.弱弟孱孫縱盡力, 建功那得足聞聽. 배반자 원문의 '부정(不庭)'은 왕실에 내조(來朝)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 곧 배반을 뜻한다. 《시경》 〈한혁(韓奕)〉에 "내조하지 않는 나라를 바로잡아 너의 임금을 보좌하라.[榦不庭方, 以佐戎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음설(陰說) 음성(陰城)에서 사는 오진영(吳震泳)의 말을 가리킨 것이다. 여문(驪文) 여주(驪州)에 사는 김용승(金容承)의 글을 가리킨 것이다. 거친 주먹질한 추성 이단(異端) 배척에 힘쓴 맹자를 말한다. 주희(朱熹)가 진량(陳亮)에게 준 편지에 "공자가 어찌 지극히 공정하고 지극히 정성스러운 분이 아니며, 맹자가 어찌 거칠게 주먹을 휘두르고 크게 발길질한 분이 아니겠는가.[孔子豈不是至公至誠, 孟子豈不是麤拳大踢.]"라고 하였다. 《晦庵集 卷28 答陳同夫書》 고정(考亭) 주희(朱熹)를 지칭한다. 고정은 주희가 만년에 거처하던 곳으로, 1192년 이곳에 고정서원(考亭書院)을 짓고 학문을 강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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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증스러움 可憎 봄이 오면 또 반드시 가을 겨울이 있으니 春生亦必有秋冬잡초 없애고 새싹 살피면 독실한 농사 보리라 去莠存苗見篤農의리를 철석처럼 지킴에는 진퇴가 없어야 하니 義理鐵閑無進退시비를 조금만 잘못해도 배신과 순종에 어둡네 是非毫失昧違從원래 한나라와 역적은 나란히 설 수 없으니276) 元來漢賊不幷立이우277)가 오로지 서로 치는 것과 어찌 같으랴 豈似李牛專互攻성벽위에서 수없이 초나라 싸움을 방관하고서278) 壁上幾多觀楚戰스스로 중도를 지켰다고 자랑하니 가증스럽네 可憎自詑執中儂 春生亦必有秋冬, 去莠存苖見篤農.義理鐵閑無進退, 是非毫失昧違從.元來漢賊不幷立, 豈似李牛專互攻.壁上幾多觀楚戰, 可憎自詑執中儂. 한나라와 …… 없으니 어느 한쪽이 없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한(漢)'은 촉한(蜀漢)의 유비(劉備)를 가리키고 '적(賊)'은 위(魏)나라 조조(曹操)를 가리킨다. 제갈량(諸葛亮)의 〈후출사표(後出師表)〉에 '선제(先帝)는 한나라와 역적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先帝慮漢賊不兩立.]'라고 하였다. 이우(李牛) 흔히 '우이(牛李)'로 일컬어지는데, 대립했던 우승유(牛僧孺)와 이덕유(李德裕)의 당파를 가리킨다. 당(唐)나라 목종(穆宗)에서 무종(武宗)까지 우승유와 이덕유가 서로 뜻이 맞지 않아 알력이 심했는데, 그로 인해 결국 우승유와 이종민(李宗閔)을 우두머리로 하는 당과 이길보(李吉甫)와 이덕유 부자(父子)를 우두머리로 하는 당으로 갈라져서 40년간 대립하였다. 당시 이를 일러 '우이의 당[牛李之黨]'이라 하였다. 《新唐書 卷180 李德裕列傳》 성벽위에서 …… 방관하고서 남의 일처럼 방관하는 태도를 말한 것이다. '초나라 전쟁'은 간재의 유고를 발간하는 문제를 놓고 벌어진 제자들간의 다툼을 비유한 것이다. 《사기(史記)》 권7 〈항우본기(項羽本紀)〉에 "거록성을 구원하러 온 제후들의 군사가 10여 성에서 진을 치고 있으면서도 감히 군사를 내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급기야 초나라가 진나라를 공격하자 모두 성벽 위에 서서 바라보니, 초나라의 전사들은 모두 일당십의 전사들이었으며, 부르짖는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이에 바라보던 자들이 모두 두려워서 덜덜 떨었다.[諸侯軍救鉅鹿下者十餘壁, 莫敢縱兵, 及楚擊秦, 諸將皆從壁上觀. 楚戰士無不一以當十, 楚兵呼聲動天, 諸侯軍無不人人惴恐.]"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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