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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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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오사익에게 보냄 무인년(1938) 與吳士益 戊寅 얼마 전에 여막에 가서 형과 40여 년간 오랜 사귄 친구로서 의례적으로 조문하고 위로를 했지만 심정을 다하지 못한 점이 있었으니, 졸곡(卒哭) 후에 한 번 방문하는 것은 그리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저는 금년부터 온갖 병이 교대로 들어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작년에 편지를 주고받으며 마치지 못했던 안건을 미처 하나로 귀결하지 못하고 죽는다면 진실로 천추의 한이 될 것입니다. 열 번의 편지가 한번 만나는 것만 못하고, 형도 여막을 삼년 동안 지키면서 또한 "긴 세월에 아우가 직접 찾아오지 않으면 어찌 대면하여 규명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때문에 병든 몸을 이끌고 더위를 무릅쓰며 어렵게 걸어가서 하루 밤낮을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혀가 닳고 입이 마르도록 이야기하여 "선사를 무함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했던 정견(定見)을 회복하기를 바랄 수 있었습니다. 영재종(令再從) 오익부(吳翼夫)가 곁에 있으며 또한 말하기를 "만일 간옹(艮翁)이 인교(認敎)가 있었다고 말한다면 크게 절의가 손상시키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형은 끝내 시원하게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돌아올 때에는 가까운 시일 내에 편지로 뜻을 보여주기를 청하였습니다. 또 형이 과연 속히 도모할지는 모르겠지만 빠른 세월은 사람을 위해 머물지 않으니 병든 몸으로 창가에 홀로 앉아서 마음을 다스릴 길이 없으므로 이에 편지로 질문함을 면치 못합니다. 스스로 조급한 것이 남에게 증오스럽다는 것을 알지만 제가 죽은 뒤에는 또한 형을 위하여 저처럼 구제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작년에 형이 마지막 편지에 "이미 '선사를 무함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10년 전에 의론도 아니고, 또 '증거가 명백하여 꾸며서 지어낸 것도 아니다.'라는 저번 편지 중에 말한 것도 아니다. 저쪽을 따른 것도 아니고 또한 이쪽을 따른 것도 아니며 별도로 하나의 의론을 만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선사를 무함한 의론이 아니라면 이는 선사가 '인교'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고, 증거가 명백하여 꾸며서 지어낸 설이 아니라면 이는 꾸며서 지어낸 것을 증명할 것도 없고 '인교'도 없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교가 있다는 것은 선사를 무함한 것이며, 인교가 없다는 것은 선사를 무함한 것이 아닙니다. 인교가 있다는 것과 인교가 없다는 것, 선사를 무함했다고 것과 선사를 무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 사이에 하나의 터럭도 용납할 수 없습니다. 무릇 천하의 시비는, 이것을 따르면 저것을 위배하게 되고 저것을 따르면 이것을 위배하게 됩니다. 이제 "저쪽을 따른 것도 아니고 또한 이쪽을 따른 것도 아니며 별도로 하나의 의론을 만든 것이었다."고 하였으니, 선사를 무함한 것도 아니고 선사를 무함하지 않은 것도 아니니,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사이에 무슨 하나의 별도의 의론이 있다는 것입니까? 만일 있다고 말한다면 기발할 것이니, 한번 들어보고 싶습니다. 그 때 고상한 의론을 듣지를 못했고 먼저 변론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의(盛意)가 과연 여기에 있는지를 일전에 서로 만났을 때 형도 분명하게 말하지 않아서 마음이 심히 답답했습니다. 요컨대, 이 별도의 의론을 듣고서 서로 함께 설파(說破)해야만 비로소 일이 끝날 것입니다. 어찌하여 명백하게 보여주지 않고 다만 "천하의 의리가 무궁하다"는 말로 활시위만 당겨놓고 쏘지는 않는단 말입니까? 만약 형도 인교에 대해 분명하게 입장을 표명하여 오진영이 형에게 답한 편지의 말이 화반탁출(和盤托出)57)한 것과 같다면, 저 또한 마땅히 함구하고 붓을 놓아 다시는 이 문제로 형에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어찌 반드시 이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시간과 편지 글을 낭비하며 완료하지 못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의리(義利)의 구분을 정밀하게 규명하고 선사의 마음을 깊이 인식하여 충고하는 뜻을 잘 헤아려 분명하게 회답하여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 선사를 무함하는 것은 큰 죄이고 사람을 무함하는 것도 죄입니다. 저는 형이 머뭇거리다가 똑같이 선사를 무함한 것으로 귀결될까 염려합니다. 형은 제가 너무 심하여 혹여 다른 사람을 무함하는 것으로 귀결될까 염려합니다. 둘이 서로 염려하는 것이 모두 다 생각이 있는 것이니, 깊은 교분이 아니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형은 갑자년(1924)에 화도(華島)에서 "유서(遺書)가 나왔으니 음성의 죄가 더욱 무겁게 되었다.[遺書出而陰罪益重]"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정묘년(1927)에는 '불언지교(不言之敎)'를 가지고 저에게 편지를 보내어 "옹서를 보고 더욱 분명하게 깨달았다.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선사를 무함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視甕書,更覺分明,到此地頭,不可不謂之誣師]"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익중(益重)'의 '익(益)' 자와 '갱각(更覺)'의 '갱(更)' 자를 보면 유서 및 불언지교를 보기 전에 이미 그가 선사를 무함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형이 오진영이 선사를 무함했다고 말한 정견(定見)이 단지 10년 전 정묘년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변고가 출현한 시초인 계해년(1923)에 있었다는 것이 됩니다. 이때에는 제가 진실로 형을 위해 염려할 필요가 없었고 형 또한 너무 심하다고 저를 염려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병자년(1936) 겨울에 오진영이 증거로 삼은 선사가 묘적(墓籍)을 허락했다는 것과 이유흥(李裕興)의 편지를 얻고서, "증거가 분명하여 꾸며서 지은 것이 아니다."고 말하고 14년 동안 지켜왔던 정견과 제가 묘적과 원고는 똑같은 사례가 아니라고 한 것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유흥의 편지에는 인가를 받으라는 뜻이 전혀 없었고, 이때에는 또 인가를 받아 인쇄하도록 한 적이 없었다는 의론이 많아서 끝내 이치에 맞는 말에 어쩔 수 없이 복종할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또 "증거가 명백하여 꾸며서 지은 것이 아니다."는 설을 버리고 마침내 "10년 전의 의론이 아니며 또 이전 편지 중의 설도 아니다. 저쪽을 따르지도 않고 이쪽을 따르지도 않고 별도로 하나의 의론을 만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별도로 하나의 의론을 만들었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론인지 모르겠습니다. 우암 선생(尤庵先生)은 일찍이 "양쪽의 사이에서 이랬다저랬다 하는 자는 끝내 반드시 음(陰)과 이(利)와 흑(黑)으로 들어간다.'58)라고 훈계하였습니다. 제가 형을 염려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고, 형이 저를 염려하는 것도 의와 이, 음과 양, 흑과 백을 구별하는 것이 너무 심한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두 다 말하는 가운데에 또한 다른 것이 있습니다. 대저 형이 이처럼 하는 것에 대해 그 마음의 소재를 저는 실로 알지 못합니다. 이전의 견해는 거친 것이 있었지만 만년에는 더욱 정밀해졌다고 말한다면, 형은 젊었을 때에 고명함으로 세상에서 칭송하였으니 사람들이 믿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전에는 분명한 증거가 없었는데 이후에 이를 보았다고 한다면, 제가 변론한 것과 형이 승복한 것이 또한 이와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오히려 시원하게 정견을 회복하지 못하고 스스로 "본디 별도의 의론이 있다."라고 하니, 그 마음의 소재를 저는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비록 그렇지만 40년의 오랜 교분으로도 그 마음을 알지 못한다면 인륜의 변고이니 내가 어찌 감히 형을 의심하겠습니까. 다만 사실에 근거하고 자취를 따르다보니 의혹이 불어남을 면하지 못한 점은 있으니, 나의 밝지 못함을 스스로 한탄할 뿐입니다. 아, 나의 덕이 믿음을 주지 못하여 사람들의 구설이 아직도 여전합니다. 매번 의리와 관계된 것으로 친밀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고하면 말은 믿음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노여움을 사서 끝내 해를 당하니, 근래에 현암(玄岩)의 일 같은 것이 또한 한 가지 사례입니다. 이른바 "임금이 덕을 닦지 않으면 배안의 사람들이 모두 다 적국의 사람이 된다."59)라는 것이 이런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바야흐로 또한 후회하고 함구하여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러나 끝내 측은과 수오의 마음을 천성적으로 타고 난 것을 어찌 할 수가 없어서 다른 사람이 함정에 빠지는 것을 보고 차마 구하지 않을 수 없고 다른 사람의 패악과 망령됨을 보면 미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침에 그러한 행동을 후회했다가 저녁이면 또다시 그러하다."60)라고 경계한 율옹(栗翁)의 말에는 비록 부끄럽지만, "허물을 보면 그 사람의 인(仁)을 알 수 있다."61)라고 한 공자(孔子)의 가르침은 또한 생각해볼 만합니다. 또 형은 본바탕이 자애롭고 어질며 마음 씀씀이가 공평하고 용서를 잘합니다. 말을 하면 믿음을 받는 것은 비록 기필할 수는 없을지라도 노여움을 당하고 해를 받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이 점이 바로 형이 내 마음을 알아주는 벗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감히 마음을 놓고 말하는 것입니다.선사의 원고를 고치는 것은 또한 어떠한 대죄입니까. 다만 인가받았다고 무함함으로써 선사의 전체를 무너뜨리는 죄는 더욱 큰 것이기 때문에 항상 뒤가 되었을 뿐입니다. 일전에 형이 진주본(晉州本)이 수정본(手定本)을 고쳐서 선사의 예의(禮意)와 사실(事實)을 어지럽힌 것을 눈으로 보고 비로소 그 원고를 고친 죄를 알았습니다. 이미 그 죄를 알았다면 성토하고 변론해야 했고, 변론하고 성토할 수 없으면 또한 그만두어야 했는데, 마침내 한 장의 종이에 별도로 쓰기를 "장차 권순명(權純命)에게 묻겠다."라고 하였습니다. 권순명과 오진영이 만약 "이리 고쳐야만 완벽하다."고 한다면 형도 장차 그렇게 여기겠습니까? 저는 형의 마음 씀이 이와 같은 부분에 대해 심히 복종하지 못하겠습니다. 또 만약 본문을 완벽하다고 여긴다면 선사의 문장을 고칠 이치가 천하에 어디 있겠습니까? 원래 이런 이치가 없기 때문에 일전에 형과 제가 선장(先丈)의 시고(詩稿)를 받들어 읽고 그 온당하지 못한 글자가 있더라도 끝내 감히 손을 대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오진영이가 선사의 원고를 고친 것에 대해 변론하고 성토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고 그에게 물어서 그 설을 듣고자 하니, 이것은 진실로 무슨 뜻입니까? 형이 제가 오진영을 변론하는데 힘쓰는 것과 관련하여 다른 사람에게 "이런 정력을 공부에 옮겨 쓴다면 어찌 좋지 않겠는가?"라고 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있었다면 형은 우선 말씀해 주기 바랍니다. 시비(是非)를 밝히고 사정(邪正)을 분별하여 격물치지를 기르는 것과 사문(師門)의 도리를 보호하고 제자(弟子)의 직분을 닦아서 윤리를 다하는 것이 공부가 아니겠습니까? 만약 이것 외에 공부로서 학문을 하는데 해롭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한번 듣고 싶습니다.오진영이 지산(志山)을 대한 것에 대해서는 내가 꼭 말할 필요가 없고, 다만 갑자기 관계를 끊었다가 갑자기 달라붙기도 하면서 이를 통해 혹은 사람을 빠뜨리는 함정을 만들기도 하고 혹은 사람을 유혹하려는 계제로 만들기도 하였는데, 이것이 가증스러울 뿐입니다. 심술(心術)의 교활하고 험악함이 이와 같고 보면, 그가 인설(認說)에 대해 이미 불가하다고 여겨 자기 죄에서 빠져나갔다가 곧이어 가르침을 따른 것이라고 하면서 선사에게 죄를 씌운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대체로 근본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언행이 있었던 것입니다.근래 북도(北道)의 동문 천하운(千河運)이 나를 찾아왔습니다. 나와 천하운이 말을 나누다가 오진영의 편지에 인가를 받는 것은 진실로 불가하다고 하였다가 또 "원래 선사의 불언지교를 따랐다."고 운운한 대목에 이르자, 천하운이 말하기를 "이런 이유로 나 또한 자기 발등을 찍는 일이라고 비판을 하였다."고 운운하였습니다. 그가 '자기 발등을 찍는 일이다.'고 한 것은 바로 내가 "그의 말로 인해서 그의 죄를 정하였다.'고 말한 뜻입니다. 저 먼 고장에서도 오히려 이와 같은 공론이 있었습니다. 형은 호남에 살면서 이 중의 의리를 익히 들었고 그의 정상을 깊이 알고 있는데도 오히려 저의 변론이 비정하다고 하니, 진실로 무슨 소견인지 모르겠습니다.사문(斯文) 이기완(李起完)은 자(字)가 원호(元浩)이고 임실군(任實郡)의 명망있는 선비입니다.【지금 재종제(再從弟) 오해준(吳海準)의 처종형(妻從兄)이다.】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남원(南原) 월곡(月谷)의 정모(丁某)는 나의 종질(從姪)의 사위입니다. 정모가 '오석농(吳石農)이 나를 보고 〈선사가 원래 원고를 인가받으려는 뜻이 있었다.〉 하였다.'고 운운하였습니다. 내가 듣고서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정모에게 말하기를 '나도 일찍이 간옹을 모시며 덕을 보고 말씀을 들어서 그 마음을 알고 있었다. 간옹이 어찌 이런 말을 했겠는가.'라고 운운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기완은 문인이 아닌데도 오히려 간옹의 마음을 알아서 분함을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형은 문인으로서 음성의 무함을 미워할 줄도 모릅니다. 아, 사람의 견해가 같지 않음이 이와 같단 말입니까?작년에 오진영이 송병진(宋秉眞)에게 "선사가 평소에도 원고를 인가받으려는 뜻이 있었다."고 하면서 아무개의 말과 모종의 일을 인용하여 증명을 하자, 송병진이 말하기를 "만약 이와 같다면 간옹도 파쇄당할 것이다."라고 하니, 오진영이 감히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는 성산(惺山) 임종두(林鍾斗)가 송병진에게 듣고 변문(辨文)에 올린 내용입니다. 오진영의 무리는 "송병진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라고 하면서 가리고 숨겼습니다. 지금 그가 정모와 나누었던 말을 들으니, 이는 그가 다반사처럼 말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송병진에게 한 말도 숨길 수 없었으니, 만약 성토하는 군인을 지금 풀어 놓는다면 정모와 나눈 말도 감히 드러내지 못하고 숨기려 들 것입니다. 변론하고 성토하는 공로가 이와 같은 자가 있는데도 알고 있는 자가 매우 적으니, 진실로 개탄스럽습니다.형은 매번 '강태걸(姜泰杰)이 기소한 일은 어찌 음성(陰城)이 시켜서 한 것이겠는가. 자취를 살펴보고 실상에 의거해보면 아무래도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형의 말씀과 같다면, 정재장(靜齋丈)이 오진영에게 보낸 편지가 어찌 검국(檢局)에 들어가서 강태걸을 증명하는 편지가 되었겠습니까? 오진영과 가장 친밀하다는 권순명(權純命)은 어찌 검국(檢局)에 들어가서 강태걸(杰)을 증명하는 사람이 되었겠습니까? 하물며 강태걸은 오진영의 문인으로서 "오진영의 명을 받들어 인쇄한다."고 했던 말이 강태걸의 광고문(廣告文) 중에 있으니 더욱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형은 늘 이와 같은 곳에서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하고 의도적으로 공평하게 하려고 힘을 씁니다. 이것이 저가 따를 수 없는 곳입니다."선장(先丈)의 문자 일은 앞뒤의 의론이 서로 다름을 면치 못한 것은 혹 효사(孝思)에 유감이 될까 해서 편지 서두에 '송(悚)' 자를 썼던 것입니다. 보내온 편지에 …… 소견을 고치고 이치를 따르는데 조금도 인색하지 않는 것에 모두 탄식하고 우러르니, 매우 성대하고 매우 성대합니다." 이는 연전에 오진영이 저에게 답장한 편지 내용입니다. 내가 만약 전표(傳表)를 희롱하여 그에게 수정을 당한 것이 지금 그가 이 편지 중에 "앞뒤의 의론이 서로 다름이 송구하다."라고 말한 것처럼 한다면 어떻게 처리하겠습니까? 내가 만약 전표의 혐의 때문에 의리를 빌려서 보복하기를 지금 그가 이 편지 중에 "많은 사람들이 모두 탄식하고 우러른다."라고 말한 것처럼 한다면 또한 그가 무어라 말하겠습니까? 이는 또한 마땅히 그의 앞선 편지 중의 말로 지금 사람을 무함한 죄를 다스려야 할 뿐입니다. 日者造廬,以哀兄四十年舊交,隨例吊慰,情有未盡,卒哭後一問,在所不已.亦以弟自今年,百病交侵,死亡無日,昨歲往復未了之案,不及歸一而逝,則誠爲千古之恨.十書不如一面,而哀兄守廬三霜,亦云"長歲月,非弟親造,何以面究?" 所以扶病冒熟,顚倒間關,得以一晝夜盡心輸誠,弊舌渴口,冀復"不可不謂誣師"之定見.令再從翼夫在傍,亦言"若言艮翁有認敎,則大損節義",而兄終不快答.歸時,請從近以書見意.又未知兄果能亟圖,而遽遽歲月,不爲人留,病牕獨坐,懷不知裁,玆不免以書質之.自知躁急,爲人可憎,然我死之後,亦無爲兄救拔如我者矣.昨年,兄之最後書云: "旣非十年前不可不謂誣師之論,又非前書中證據明非白撰之說.旣不從彼,又不從此,而別爲一論." 蓋非誣師之論,則是謂師有認敎也; 非證據明非白撰之說,則是謂無證白撰而無認敎也.有認敎者,誣師也; 無認敎者,非誣師也.有認敎無認敎,誣師非誣師之間,間不容髮.凡天下是非,從此則違彼,從彼則違此.今曰"旣不從彼,又不從此,而別爲一論",則未知非誣師,非非誣師,非此非彼之間,有何別般一論耶? 如曰有之,厥亦可奇,願一聞之.那時未及聞高論,而先有所辨.然未知盛意果在於此,日者相晤,兄亦不明言,心甚爲菀.要之聞此別論而相與說破,然後始得了事矣.何不明白示及,而但以"天下義理無窮"之語引而不發乎? 若兄亦明言認敎,如震答兄書中語之和盤托出,則弟當緘口閣筆,不復以此爲兄告矣.何必如此支離,費得時日書詞而莫之了耶? 惟願精究義利之分,深識先師之心,善諒忠告之意,明以回示也.嗚呼,誣師大罪也,誣人亦罪也.吾則慮兄之依違而同歸於誣師.兄則慮弟之已甚,而或歸於誣人.兩相爲慮,俱皆有思,非深交,烏能至此? 然兄於甲子華島,不曰"遺書出而陰罪益重"乎? 丁卯,以"不言之敎"與弟書,不曰"視甕書,更覺分明,到此地頭,不可不謂之誣師"乎? 觀"益重"之"益"字,"更覺"之"更"字,則見遺書及"不言之敎"前,已知其爲誣師矣.是則哀兄謂震誣師之定見,非但在十年前丁卯而己,在變出之初癸亥矣.是時,吾固不須爲兄慮,而兄亦不以已甚慮弟矣.乃於丙子冬,得震所證先師墓籍之許及李裕興書,謂"證據明非白撰",而棄十四年所守之見及其被弟墓與稿之非一例.李書之絶無認意,是時亦多無認印之辨,而終無柰難不服於理到之言,則又棄"證據明非白撰"之說,而乃曰"旣非十年前論,又非前書中說,旣不從彼又不從此,而別爲一論".吾未知"別爲一論"者,究竟何論,而尢庵先生嘗有"依違兩間者,終必入於陰與利與黑"之訓.我之慮兄,正在於此,兄之慮我,亦在於別白義利、陰陽、黑白之已甚.然則俱皆有辭之中亦有可異者存焉.大抵兄之所以如此者,其心所在,我實不知.謂前見粗在而晩覺更精也,則兄之早年高明,世所稱道,使人見信難矣; 謂前無明證,而後乃見之也,則弟之所辨,兄之所服,又如此矣.而猶不快復定見,而云"自有別論",其心所在,我實不知.雖然,以四十年舊交,而不知其心,則人倫之變,吾豈敢疑兄? 但據實因跡而不免滋惑則有之,自恨吾之不明而己.嗟呼,吾德未孚,人口舌是尙,每以義理之關,告於親密之地,則言不見信,反見其怒,而終之受害,如近日玄岩事亦一也.所謂"君不修德,舟中之人,皆敵國者",非此耶? 方且噬臍咋舌,誓不復然.然終無柰惻隱羞惡得之於天,見人陷溺而不忍不救,見人悖妄而不能不惡."朝悔其行,暮己復然",栗翁之言,雖可慙; "觀過 斯知仁",孔子之訓,亦可思.且若哀兄者,慈諒成質,平恕爲心,言之見信,雖不能必,見怒受害,決無有是此.則自信爲兄知心之友,故敢放心言之耳.改師稿,亦何等大罪? 特以認誣壞却先師全體之罪,有尢大者,故常爲後焉耳.日前兄目見晉本之改手本而變亂先師禮意事實者,始知其改稿之罪.旣知其罪則討之辨之,不能辨討則亦己焉矣,乃別錄于一紙曰: "將以問諸權純命." 權、吳若曰"以此改之然後盡善"云,則兄將以爲然乎? 吾於兄之用心如此等處,深所不服.且若果盡善於本文,則天下有可改師文之理乎? 惟其元無此理,故日前兄與弟奉閱先丈詩稿,其有未稳字,終不敢犯手者,此爾.今於震之改師稿也,非惟不辨之討之,乃欲問諸彼而聞其說,此誠何意? 如聞哀兄以弟之力於辨震語人曰: "以此精力移用於工夫,則豈不善乎?" 有諸? 有之,兄且道! 明是非、分邪正以長格致,閑師道、修弟職以盡倫理,非工夫乎? 如有外此而可謂工夫不害爲學問者, 願一聞之.震之所以處志山者,吾不必言,特以其乍絶乍附,或以爲陷人之穽,或以作誘人之機者,爲可惡耳.心術之巧險如此,則其於認說,旣以爲不可而脫己罪,旋以爲從敎而加先師者,益以明矣.蓋有是本源,故有是言行也.近見北道同門千河運來訪.余與千語及震書旣以認爲誠有不可,又曰"原從先師不言之敎"云云.千曰: "所以吾此亦有自斧自削之評云云." 其云"自斧自削"者,卽吾所謂"因渠言定渠罪"之意也.逖矣此方尙有公論如此,兄居湖南習聞此中義理,深知彼之情狀,而猶以吾辨爲非情,誠不知何所見也.李斯文起完,字元浩,任實郡望士也,【今再從弟海準妻從兄】對弟言: "南原月谷丁某,吾之從姪女壻.丁言: '吳石農見我言先師原有認稿之意云云.' 吾聞之,不勝憤氣,謂丁曰: '吾亦嘗侍艮翁,觀德聽言而知其心矣.艮翁而豈有是耶云云." 李非門人,猶知艮翁之心而不勝憤氣.兄乃以門人而不知惡於陰誣,嗟呼! 人見之不同乃如是乎?震昔年對宋氏秉眞言"先師平日有認稿之意",引某言某事證之.宋曰: "若如此則艮齋破碎矣." 震不敢復言.此惺山林丈【鍾斗】聞於宋而登諸辨文者也.震徒云"宋不知何許人"而掩諱之矣.今聞其所與丁某言者,則可知是渠茶飯語.而對宋之言掩諱不得,如使聲討之軍,至今用張,則與丁之言亦不敢露出矣.辨討之功有如此者,而識者甚少,良可歎也.哀兄每言: "杰之起訴,豈陰所使然? 因跡據實,終有不然者." 若如兄言,靜丈與震書,胡爲入檢局而作杰證書乎? 震所最親密之權純命,胡爲入檢局而作杰證人乎? 而况杰是震之門人而"承吳先生命而印之"之語在杰廣告文中乎? 兄每於此等去處,不能物各付物,而費力於有意爲公,此吾所不服處."先丈文字事,未免前後貳論,或得致憾孝思,書首所以下得悚字.來書云云衆咸歎仰於不少吝於改見從理,甚盛甚盛." 此年前震之答弟書也.我若幻弄傳表,被渠釐正,如今渠說此書中"前後貳論爲悚"之云,何以區處? 我若爲傳表之嫌,而假義報復,如今渠說此書中"衆咸歎仰,甚盛甚盛"之云,又何以出於渠口也? 此亦當以渠前書中語治今誣人之罪己矣. 화반탁출(和盤托出) 음식물을 소반에 차려서 들고 나온다는 뜻으로, 일체 남기지 않고 드러냄을 이른다. 양쪽의……들어간다 우암 송시열은 " 대개 인정이 이를 편안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음과 양이 있고, 일에는 의와 이가 있으며, 물건에는 백과 흑 이 있는데, 이는 일상생활 속에 늘 서로 접하는 것이니, 너희들은 경계하라."라고 하였다. 《송자대전(宋子大全)》 권134 〈시제자손질손등(示諸子孫姪孫等)〉 임금이……된다 전국 시대 위(魏)나라 무후(武侯)가 배를 타고 서하(西河)의 중류(中流)를 내려가다가 오기(吳起)를 돌아보고는 산천이 험고한 것이야말로 위나라의 보배라고 자랑하자, 오기가 "사람의 덕에 달려 있지, 산천의 험고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통치자가 덕을 닦지 않으면 이 배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적국의 사람이 될 것이다.[在德不在險, 若君不修德, 舟中之人盡爲敵國也]"라고 대답한 고사가 전한다. 《사기(史記)》 권65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 아침에……그러하다 《격몽요결(擊蒙要訣)》 〈혁구습장(革舊習章)〉에 보인다. 허물을……있다 공자는 "사람의 허물은 각각 그 무리에서 나오는 것이니, 허물을 보면 인을 알 수 있느니라.[人之過也, 各於其黨, 觀過, 斯知仁矣]"라고 하였다. 《논어(論語)》 〈이인(里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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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오사익에게 답함 무인년(1938) 答吳士益 戊寅 이달 초에 고창(高敞), 무장(茂長) 등지로 조문을 갔다가 10여 일 만에 돌아왔더니, 보내주신 편지가 먼지가 덮인 책상에 놓여 있었습니다. 손을 바삐 놀려 열어서 읽어 보니, 바로 3년 동안 끝나지 않은 안건이 하루아침에 정해지고, 여러 차례의 편지로도 해결되지 않았던 의혹이 한 마디로 결정되었습니다. 일이 중대하여 그대로 그만둘 수 없던 것이 오늘 이후로는 같은 의견으로 귀결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이고 얼마나 기쁩니까. 아, 이 기쁨은 공적인 것이기도 하고 사적이기도 한 만큼 이러한 때의 이러한 기쁨은 선사의 영령께서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또 형을 알기 전이었기 때문에 마음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어서 감히 억지로 따르지 못한 것이지 애초에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의심이 풀려 형을 따르게 되었으니 형을 아는 것이 틀림없이 더욱 견고해져서 10년 전에 논정했을 때와 같을 뿐만이 아닙니다. 가부를 살피지 않고도 한결같이 견해가 같은 것을 보게 된 만큼 그 기쁨이 오히려 다시 더해졌습니다. 이것은 대개 형의 본 바탕이 매우 높아서 범공(范公)의 이른바 "그 중하게 여긴 것이 여기에 있다."라는 것62)과 퇴계(退溪)의 이른바 "뜻이 도를 밝히는 데 있어 사사로운 뜻이 없다."63)라고 한 것과 같은 태도를 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잘것없는 제가 그 사이에서 힘을 쓴 것은 아니고 바로 벗 사이에 강마(講磨)한 힘은 속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보잘 것 없는 편지를 보냈는데 훌륭한 편지로 답장해주신64) 성대한 은혜를 감히 감당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있었는데 너그럽고 부드럽게 잡아주시면서 연연해 한 바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병에 따라 약을 주신 것이라서 마음속으로 감격하고 있으니 어찌 입으로만 감사드릴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제가 선사의 무함을 변론하는데 힘을 쓴 것에 대해 "그의 공격에 보복하고 자신을 위해 도모하는 마음에서 나왔다."고 하고, 마침내 "한 번 주먹으로 치고 한 번 발로 차다가 죽게 되더라도 저버리지 않겠다는 마음은 절대 사군자의 도는 아니다."라고 경계하였습니다. 아! 저의 병통을 깊이 아시는 안목으로 오히려 저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우옹(尤翁)이 박화숙(朴和叔)에 대해서, 선사가 신앙여(申仰汝)에 대해서 매번 '스스로 편의(便宜)를 차지하고 사설(邪說)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책망했습니다. 내가 만약 자신을 위해 도모하는 마음에서 나왔다면 어찌 일찍 박화숙과 신앙여가 스스로 편의를 차지한 태도를 배우지 않고 애써 이렇게 하면서 생사를 돌아보지 않았겠습니까. 다만 스승이 있다는 것만 알고 내 몸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선사와 직접 관계되지 않고 내 몸과 관계된 것은 일체 일삼지 않았습니다. 비록 차마 똑바로 볼 수 없었던 김세기(金世基)의 흉악한 무함에 대해서도 저는 함재장(涵齋丈)이 사람을 시켜 통문을 돌려 대변(對辨)하도록 한 가르침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형이 근래에 알고 있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제가 주먹질하고 발길질하며 저버리지 않으려 한다고 하십니까? 月初出吊於高、茂等地,凡旬有餘日而返,則惠疎留在塵案.忙手開讀,乃三年未了之案,一朝而定; 累書未解之惑,一言而決.事係重大而不容但己者,今焉而後同歸一轍,何幸如之! 何喜如之! 噫,此喜者爲公乎? 爲私乎? 此時此喜,先師之靈亦應喜之.抑以知兄之前,有所疑於心,而不敢强焉而從之,初非有他意也,則今之疑鮮而見從也,知之必益堅固,不但如十年前論定時而己.視不相可否而一例同見者,其喜反復勝焉.此蓋兄本質懇高,范公所謂"所重在此"、退溪所謂"志在明道而無私意"之致.然非區區有力於其間,乃謂朋友講磨之力不可誣也. 旣是愧不敢當承得瓜報琚之盛惠,見規以寬裕和平,無所係緣,此眞對病之藥石,中心感之,何用口謝? 但以弟之力於辨誣,爲報彼之攻擊而出於爲身謀之心,卒戒以一拳一踢抵死不負之心,殊非士君子之道.噫! 以兄深知弟病之眼,尙淺知弟心者,何也? 尢翁之於朴和叔,先師之於申仰汝,每以"自占便宜不攻邪說"見責.我若出於爲身謀之心,何不早學朴、申之自占便宜,苦苦爲此而不顧死生耶? 惟其但知有師而不知有身,故凡不直係先師而關於吾身者,一切無事.雖以世基凶誣不忍正視者,不從涵丈令人發通對辨之喩.此兄近日所知,何以謂拳踢不負也? 범공(范公)의……것 범공(范公)은 범조우(范祖禹)를 가리킨다. 주희가 범조우에 대해 논한 내용 가운데 "일이 일어난 당시에 판별하지 못하고 몇 해 뒤에야 밝혔으니, 이는 강단이 부족하여 정이(程頤)와 소동파(蘇東坡) 양쪽 모두를 따르려는 사심을 면치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중하게 여긴 것이 여기에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의리의 공변됨을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不能辨之於當時, 而發之於數年之後, 此則剛强不足, 不免乎兩徇之私者. 而其所重在此, 故卒不能其義理之公也]"라고 한 내용이 있는데 이것을 인용한 것이다. 《朱子大全(주자대전)》 권35 〈답여백공(答呂伯恭)〉 뜻이……없다 이황의 〈답기명언(答奇明彦)〉에 "뜻이 도를 밝히는 데 있어 피차에 사사로운 의도가 없다면 반드시 하나로 일치할 날이 있는 것이니(志在明道, 而兩無私意者, 必有同歸之日.)"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 부분을 원용한 것으로 보인다. 《퇴계집(退溪集)》 〈답기명언(答奇明彦)〉 보잘 것……답장해주신 원문은 '得瓜報琚'이다. 《시경(詩經)》 〈목과(木瓜)〉에 "나에게 목과를 주거늘 경거로써 갚는다.[投我以木瓜 報之以瓊琚]"는 내용이 있는데, 여기에서 '경거(瓊琚)'는 상대방의 시문을 뜻하고 '목과(木瓜)'는 자신의 시문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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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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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오사익에게 답함 무인년(1938) 答吳士益 戊寅 지난번에 사원(祠院)에서 제사 때에 생것을 올리는 것과 익힌 것을 올리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합당하냐고 물었습니다. 일찍이 〈교특생(郊特牲)〉을 상고해 보니, "교제(郊祭)에는 피[血]를 올리고 대향(大饗)에는 생고기[腥]를 올리고 삼헌(三獻)의 제사에는 데친 고기[爓]를 올리고 일헌(一獻)의 제사에는 익은 고기[熟]를 올린다. 지극히 경건한 제사는 진미를 올리지 않고 기취(氣臭)를 귀하게 여긴다."65)라고 하였습니다. 그 주(註)에, 장락 진씨(長樂陳氏)는 "예에서는 완전히 천연적인 것이 가장 후중하고, 천연에 가까운 것이 다음으로 후중하며, 인위에 가까운 것이 약간 박하고. 완전히 인위적인 것은 가장 박하다. 피는 완전히 천연적인 것이고, 생고기는 천연에 가까운 것이며, 데친 고기는 인위에 가까운 것이고, 익힌 고기는 완전히 인위적인 것이다. 교제와 대향은 항상 삼헌의 의례보다 중시되는데, 어찌 '지극히 경건한 제사에는 진미를 올리지 않고 냄새를 귀하게 여긴다.'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고, 엄릉 방씨(嚴陵方氏)는 "일헌의 제사에 익힌 고기를 올리는 것은 진미를 올리는 것이다. 진미 자체가 공경스럽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피·생고기·데친고기의 지극함만은 못할 따름이다. 경문에 '피, 생고기, 데친 고기를 올리는 제사는 그 기운을 사용한다.'고 하였다. 냄새는 기운에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기취(氣臭)'라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악기(樂記)〉에는 "희생을 익히고 삶아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두루 통하는 예가 아니다"66)고 하였습니다. 그 주에 "희생을 익히고 삶아서 바치는 것은 고대에 피와 생고기로 제사하는 것이 예의 본래 취지를 얻은 것만 못하기 때문에 '두루 통하는 예가 아니다.'라고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에 대부분 피와 생고기를 사용하는 것은 대체로 그것의 생기(生氣)를 빌리고자 해서이다."고 하였고, 또 "귀신에게 생물을 사용하여 제사하는 것은 모두 이 생기를 빌려서 영험함을 삼은 것이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여러 설들을 참고해서 헤아려 보면 그 유래를 알 수 있습니다. 대개 〈악기〉에 대한 주자의 설은 제사의 대·중·소를 나누지 않고 말한 것이니, 이는 자손이 부조(父祖)를 제사 지낼 때에도 생고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특생〉에서는 교제, 대향, 삼헌, 일헌을 나누고 그것에 대해 피, 생고기, 데친 고기, 익힌 고기로 올리는 것을 정하여 각각 그 용도가 있게 한 다음, "지극히 경건한 제사에는 진미를 올리지 않고 기취를 귀중하게 여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대제(大祭)와 중제(中祭)에 있어서도 더욱 피와 생고기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릇 사원의 제사는 성묘(聖廟)의 다음이니, 제사 중에서도 지극히 경건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악기〉에 대한 주자의 설에 의거하여 정리와 경건을 아울러 표하는 조상의 제사에도 오히려 생고기를 쓸 수 있습니다. 하물며 전적으로 경건을 위주로 하는 선현의 제사에는 〈교특생〉과 주설(註說)의 뜻을 의거하여 생고기를 쓸 수 없겠습니까? 혈기가 대대로 전해지는 조상의 제사에서도 오히려 다른 혈육의 기운을 빌려 영험을 삼는다고 말할 수 있는데, 하물며 외신(外神)의 제사에 혈육의 기운을 쓰지 않고서 영험을 불러올 수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예로부터 사원의 제사에 생고기를 올리는 것은 이러한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금 이미 사우를 건립하였으니, 제물을 올릴 때에는 마땅히 생고기를 올려야 하고 익힌 고기를 올려서는 안 됩니다.음성 사람의 일은, 형의 편지에 "'선사를 무함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예전 견해를 도로 지키겠다."고 하였으니, 이미 죄명을 완전히 정한 것입니다. 저는 이로부터 그를 대처하는 것이 일체 이를 준거로 삼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가만히 살펴보면, 오히려 겉으로는 끊어졌으나 안으로는 이어진 뜻이 있으며 못을 부러뜨리고 쇠를 자르는 것처럼 철저하게 단절하는 기상은 부족합니다. 언행일치의 뜻으로 볼 때에 어떠합니까? 후인들의 비평이 있지 않겠습니까?그가 선사의 원고를 고친 것에 대해 형은 처음에는 깊이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올 여름에 제가 용동본(龍洞本)과 진주본(晉州本) 두 본을 대조해 보인 뒤에 깊이 믿고서 그에게 질문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동짓날에는 또 그가 선사의 원고에 많이 손을 댄 것에 대해 새벽에 일어나서 서로 말을 나눌 때 깊이 개탄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변론하여 배척하는 하나의 글도 없습니다. 가령 이 일이 동문 중의 다른 사람에게 있었다면 형 또한 계속 침묵하였겠습니까?제 자식 형태(炯泰)가 전주(全州)에서 돌아와 고하기를, "전일순(田鎰純)에게 들었는데, '문정공(文貞公 김육(金堉)) 유허비(遺墟碑)의 전면을 다시 새겨야 한다고 대인(大人)께서 주장했다는 설이 고동시(高東是)의 입에서 나왔고 권순명(權純命)의 말이 있었다.'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듣고서 "이제 또 하나의 죄안(罪案)이 생겼지만 놔두고 다시 말하지 않겠다. 다만 헛소문이 크게 일어나 어찌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저는 음성의 무함을 실컷 받았고 김세기(金世基)의 글에 이르러서는 극에 달하였습니다. 오늘의 일도 알 만하니, 단지 조용히 받아들일 뿐입니다. 다만 형이 제가 당한 곤욕을 알았으면 하기 때문에 유허비와 일과 관련된 저의 글과 김윤삼(金允三)이 고동시(高東是)에게 보낸 편지를 보내 드리니, 한 번 보시길 바랍니다.김윤삼 속식(金允三 鋉植)이 고동시(高東是)에게 보낸 편지 무인년(1938) 10월운운. 다만 한 마디 우러러 묻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선조 문정공의 유허비에 대해 전면을 갈고 다시 새기자는 말이 저의 친족 종현(鍾賢 김택술)에게서 나왔다고 무함하는 설이 사방으로 전파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이에 그 소문의 출처를 물었더니, 내가 그대에게 전했고 그대가 사우(士友)에게 전했다고 하였습니다. 저가 그대와 만난 것이 작년 4월이었고 이후 서로 얼굴도 보지 않았으며, 더구나 일도 사실이 아니니 더욱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당초 전면을 갈아서 다시 새기자는 의론이 한편에서 나왔으나, 저의 친족 종현이 불가함을 힘껏 주장하여 심지어 조상을 폄하하고 스승을 높인다는 배척을 받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이 생긴 뒤에 또 복구하는 한 가지 일로 종중(宗中)에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사실이 위와 같음은 우리 친족 전부가 모두 알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그대에게 말하지 않은 것을 그대가 나에게 들었다고 하면 사람을 무함한 죄가 어느 곳에 떨어지겠습니까? 시비가 달린 일이라 입을 다물 수 없어서 이에 편지를 보내니 즉시 회답해 주시길 바랍니다. 向詢祠院之享生薦、熟薦之孰爲得當.竊嘗考之《郊特牲》曰: "郊血,大饗腥,三獻爓,一獻熟,至敬不饗味而貴氣臭也." 注,長樂陳氏曰: "禮以全於天者爲尢厚,近於天者爲次厚,近於人者爲差薄,全於人者爲尢薄.血者全於天者也,腥者近於天者也,爓者近於人者也,熟者全於人者也.郊與大饗,常重於三獻之禮,豈非'至敬不饗味而貴氣臭'哉?" 嚴陵方氏曰: "一獻熟則饗味矣.味非不敬也,特不若血腥爓之至爾.經曰: '血腥爓祭, 用氣也.' 以臭生於氣,故此曰'氣臭'."《樂記》曰: "熟烹而祀,非達禮也." 注,"熟烹而薦,不如古者血腥之祭爲得禮意,故云'非達禮也'." 朱子曰: "祭神多用血肉者,蓋要得籍他之生氣." 又曰: "大抵鬼神用生物祭者,皆是假此生氣爲靈." 以此諸說,參互商度,則可以知所從矣.蓋《樂記》朱子說,則不分祭之大、中、小而言,是子孫之祭父祖者,亦可用生腥矣.《郊特牲》則分郊、大饗、三獻、一獻,而定血、腥、爓、熟,各有其用,而"至敬不饗味而貴氣臭".是凡於大、中之祭,尢不可不用血、腥也.夫祠院之享,是聖廟之次,而非祭之當至敬者乎? 據《樂記》朱子說,而祖先之享兼用情敬者,猶可用生腥.况於先賢之祭專於主敬者,可不據《郊特牲》及註說之意而用生腥乎? 於祖先血氣世傳之祭,猶可謂籍他血肉之氣爲靈,况於外神之祭,可不尙血肉之氣而致其靈乎? 竊意從昔院享之用生薦,出於此義也.今旣立祠,則其薦當以生而不以熟矣陰人事,兄書謂"還守'不可不謂誣師'之舊見",則旣完定罪名矣.吾知其從此所以處彼者,當一切準此.但竊覸猶有藕斷絲連之意,欠斬釘截鉄之象,其於言行一致之義何如也? 莫無有後人之評議否?彼之改稿,兄初不深信.及至今夏,弟爲之將龍、晉二本對照,然後深信之,有質彼之書去.南至日又以彼於師稿多所犯手,深致慨歎於晨起相語之時矣.然而尙無一文之辨斥,未知假使此事在同門中他人,兄亦一向含嘿否?家兒炯泰自全州歸告曰: "聞於田鎰純,則文貞公遺墟碑前面改刻,大人主張之說,出於高東是之口而有權純命之言云云." 吾聞之曰: "今又生一罪案,置不復言.然訛言孔將,胡至於此!" 蓋吾飽受陰誣,至有世基文而極焉.今日之事,亦可知矣,只得靜而受之.然但欲兄知我所遭,故鄙文之關於碑事者及金允三與高東是書呈去,幸一覽也.金允三鋉植與高東是書附 戊寅十一月云云.第有一言仰質者.卽聞鄙先祖文貞公遺墟碑,磨面改刻,出於鄙族鍾賢之誣說,傳播四方.問其言根,則鄙傳於貴,貴傳於士友云.鄙與貴相見,己在去年四月,此後未曾相面,况事非其實者乎? 當初磨面改刻之議,出自一邊,而鄙族鍾賢力主不可,至被貶祖尊師之斥.事出之後,又以復舊一事致書宗中.事實如右,鄙全族之所共知者.鄙所不言於貴者,貴聞於鄙云,則誣人之罪落在何處? 事係是非,不容含默,故玆專書,仰卽賜回音. 교제(郊祭)에는……여긴다 《예기(禮記)》 〈교특생(郊特牲)〉에, "대로에는 번과 영이 1취이고, 선로에는 3취이며, 차로에는 5취이다. 교제에는 희생의 피(血]를 바치고, 대향에는 생고기(腥]를 바치며, 삼헌(三獻)의 제사에는 데친 고기(爓]를 바치고, 일헌(一獻)의 제상는 익힌 고기(孰]를 바친다. 지극히 공경한 제사에는 진미를 올리지 않고 냄새를 귀하게 여긴다.[大路繁纓一就, 先路三就, 次路五就. 郊血, 大饗腥, 三獻爓, 一獻孰, 至敬不饗味而貴氣臭也]"라고 하였다. 희생을……아니다 《예기(禮記)》 〈악기(樂記)〉에 "왕자가 공덕을 이루면 음악을 만들고, 다스림이 안정되면 예를 제정한다.……방패나 도끼를 들고 추는 춤은 제대로 갖춰진 이 아니며, 희생을 익히고 삻아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두루 통하는 예가 아니다.[王者功成作樂, 治定制禮 ……干戚之舞, 非備樂也; 孰亨而祀, 非達禮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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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익에게 답함 기묘년(1939) 答吳士益 己卯 편지에 형과 저가 음성 오진영을 대처하는 방법이 같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다만 인성(人性)의 강유(剛柔)와 완급(緩急)이 서로 달라서 한 판에 찍어낸 것과 같을 수 없다고만 말했다면 혹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선사를 무함한 행위가 "무심한 데에서 나왔고 선사를 해하려는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 부분에 이르러서는 또한 장차 저로 하여금 형에 대해 알 수 없다는 탄식을 자아내게 할 것입니다. 그가 만약 무심한 데에서 나왔고 선사를 해할 의도가 없었다면 배척을 당한 날에 마땅히 즉시 태도를 바꿔 사과할 겨를도 없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비록 죽더라도 말을 바꾸지 않겠다."라고 하였고, 작년에 형에게 보낸 편지에 또 "선사가 참으로 천지가 청명한 날에 간행할 뜻이 있었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명확하게 인의(認意)가 있었다고 말한 것이니, 이에 형은 비록 그를 보호하고자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오진영이 고치고 삭제한 것을 변명한 선사의 원고 가운데 신혁균(申赫均)에게 보낸 편지를 적어서 보여주었는데, 완전히 이치에 맞지 않고 다만 그의 심술이 증오할 만하다는 것을 볼 뿐이었습니다. 선사가 일찍이 국상(國喪)를 당했을 때에는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의 전례에 의거하여 성복(成服)하고 수최(受衰)67)하였지만, 순명비(純明妃 순종(純宗)의 비(妃) 민씨(閔氏))의 상(喪)에 이르러서는 수최하지 않고 다만 백의(白衣)에 백립(白笠)으로 성복했던 것은 예(禮)에는 원래 복(服)이 없고 임금이 명하였기 때문입니다. 복을 입으면 예에 어긋나는 것이고 복을 입지 않았다면 명을 어기는 것이므로, 이에 예와 명의 사이에 참작하여 이와 같이 행하였던 것이니 그 의리는 정밀하고 그 뜻은 깊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변례(變禮)에 처하여 합당하게 처신한 것인데, 그의 말처럼 스스로 사민(士民)과 똑같이 하기 위하여 그런 것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신혁균에게 답한 편지에 말하기를 "지금은 복이 없는데 복이 있게 된 경우로 대상(大喪)과 내상(內喪)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성복하는 날 단지 백의와 백립만 착용했을 따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뜻은 "지금 만약 복이 있어서 마땅히 복을 입어야 한다면 성복하는 날 나는 마땅히 전날의 국상처럼 수최해야 한다. 그러나 복이 없는데 복이 있게 되었기 때문에 단지 백의와 백립을 착용할 따름이다."고 한 것과 같습니다. 본문 가운데 이미 "스스로 사민과 똑같이 한다."는 말이 한 글자도 없고, 아울러 "스스로 사민과 함께 한다."는 뜻도 한 점이 없는데, 감히 말하기를 "전에는 관인(官人)으로 자처하여 수최하였고, 뒤에는 스스로 사민과 똑같이 여겨 수최하지 않았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또한 어찌 선사를 무함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상여(相與)'의 '여(與)' 자 옆에 '흠(欠)' 자를 붙여서 어조사인 '여(歟)' 자를 만들고, '백의립(白衣笠)' 운운한 부분을 삭제하여 수최를 행한 문장으로 만들었으니, 이것이 어찌 원고를 고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그는 곳곳마다 선사를 무함하였으니 어느 곳인들 그리하지 않았겠습니까? 예전 갑진년(1094)을 생각해 보면, 선사의 춘추가 64세로 근력이 강건하여 호남 수 백리 밖에까지 출행하였습니다. 명헌황후(明憲皇后 헌종의 계비)의 상(喪)에 받은 최복은 상자에 담아서 도중이라도 매달 삭망(朔望)에는 복을 입고 망곡(望哭)을 했습니다. 이는 천암(天巖)과 예천(禮川)에 갔던 날에 형과 나 그리고 여러 인사가 모두 똑같이 보았는데, 순명비의 상이 바로 그 해에 있었습니다. 그의 이른바 "선사가 '지금은 나이와 병이 모두 지극해서 비록 부모상일지라도 최복을 가지고 다닐 수 없다,'고 하였다."라고 한 것은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비슷하겠습니까? 옛날에 '조자룡(趙子龍)은 일신이 모두 담(膽)이다.'68)라고 하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 보니 오영진은 일신이 모두 무함입니다. 이럼에도 형은 오히려 그사 선사를 무함한 것이 무심한 데에서 나왔다고 보증할 수 있겠습니까? 示喩兄我所以處陰震之不同.只言人性剛柔緩急之異而不能如印一板,容或可也,至謂彼誣出無心非害師,則又將使我發不可知之歎於兄也.渠若出於無心而不欲害師,則被斥之日,宜卽改謝之不暇,顧乃不然而曰: "雖臨死而不易辭." 昨年與兄書又謂: "先師果爲天地淸明之日刊行之意耶?" 則是分明言有認意也,於是乎兄雖欲保渠,而不可得矣.錄示震所分疏改刪師稿中申赫均之書,全不成理,只見心術之可惡也.先師曾當國喪,依渼湖已例成服受衰,至於純明妃喪,不受衰而只用白衣笠成服者,以於禮原來無服,而君上令之.故服之則違禮,不服則違令,於是參酌於禮令之間,而行之如此,其義精矣,其意深矣.正處變而得當者,豈爲自同於士民而然如渠說乎? 故答申書曰: "今則無服而爲有服,與大喪內喪有間,故成服日只用白衣白笠而己矣." 其意若曰: "今若有服而當服,則成服日,我當受衰如前日國喪.惟其無服而爲有服,故只用白衣笠也." 本文中旣無一字"自同士民"之語,幷無一點"自同士民"之意,而乃敢曰: "前則自處以官人而受衰,後則自同於士民而不受衰." 此亦豈非誣師乎? 於"相與"之"與"字傍加"欠"字,作語助之"歟"字,而刪却"白衣笠"云云,使成受衰之文,此豈非改稿乎? 噫! 彼觸處誣師,何所不至? 念昔甲辰之歲,先師春秋六十有四,筋力康健,出行湖南數百里外.明憲皇后喪,所受衰服藏之,行中每朔望,服而望哭.於天巖、禮川之日,兄我及衆人士之所共目覩者,而純明妃喪,卽是歲也.渠所謂"先師曰今年病俱極,雖父母喪,莫能持衰"者,是豈毫髮近似者乎? 昔聞子龍一身都是膽也,今見震泳一身都是誣也.兄尙能保彼之誣師出於無心也乎? 수최(受衰) 상례(喪禮)에서,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슬픔을 줄여 나가는 절차에 따라 상복을 거친 것에서 점차 고운 것으로 바꾸는데, 옷을 바꾸어 새로 지어 입는 것을 '수최'라 하며, 수최는 '수복(受服)'이라고도 한다. 조자룡은……담이다 자룡은 삼국 시대 촉한(蜀漢)의 용장인 조운(趙雲)의 자이다. 조운이 담대한 작전으로 조조(曹操)의 대군을 물리치자 유비(劉備)가 "자룡의 일신은 모두가 담이다.[子龍一身都是膽]"라고 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 권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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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익에게 답함 기묘년(1939) 答吳士益 己卯 저는 나이가 60세에 가깝고 질병이 날로 침범해서 수명이 다 되었으니, 설령 올해 속히 죽더라도 진실로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죽기 전에 이치에 닿지 않는 것을 하나라도 잘못 보거나 의리가 아닌 일을 하나라도 잘못 행한다면 끝내 지하에서도 한이 될까 두려울 뿐입니다. 제 자신의 뜻이 이와 같기 때문에 동인(同人)의 착오(錯誤)를 보면 차마 남의 일 보듯이 할 수 없는 것이 이전에 비하여 더욱 간절하여 그만둘 수 없습니다. 대체로 친구 간에 서로 도와주는 도리를 말씀드리면, 붕우 간에 강습하여 서로 이익을 주는 것69)은 《주역》에 드러나 있고, 친구 간에 충심으로 말해주고 인덕으로 돕는 것70)은 것은 《논어》에 보이며, 덕업을 서로 권하고 과실은 서로 경계하는 것71)은 《여씨향약》에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상의 배우는 사람을 보면, 충심으로 고해주고 과실을 바로잡아주는 한 가지 일에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는 말세에 붕우의 도리가 사라졌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남과 나 사이에도 끝내 피차의 구분이 있어서 모두를 똑같이 보는 인(仁)이 행해지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에 또 증자(曾子)의 삼성(三省)72)을 생각해보면, 첫째는 '남을 위해 도모함에 충성스럽지 못한 것[謀人不忠]'이고, 둘째는 '벗과 사귐에 신실하지 못한 것[交友不信]'입니다. 대부분 한결같이 다른 사람과 함께 한다는 뜻이지만 다른 사람을 자신을 보듯 하는 것은 보통의 인장으로는 행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스스로를 반성한다고 하였지만 또한 후학을 면려하고자 한 것인 듯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논해보면, 친구에게 허물이 있는 것을 보고 남일 보듯 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생긴다면, 이는 불충(不忠)이고 불신(不信)입니다. 제가 근일에 실로 이런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타인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형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으며, 다른 일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선사에 관계된 일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형은 음성 오진영의 일에 대해 이미 "선사를 무함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정견(定見)을 도로 지키게 되었으니, 저는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이미 그렇게 여겼는데, 또 "무심한 데에서 나왔고 선사를 해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라고 하니, 이는 무슨 말입니까? 제가 생각하기에, 이미 무함이라고 말했다면 무심한 데에서 나왔고 선사를 해하려는 것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없으며, 무심한 데에서 나왔고 선사를 해하려는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무함이라고 말할 수 없으니, 이 두 가지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만약 무심한 데에서 나왔고 선사를 해하려는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의당 그것을 고칠 겨를도 없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고치지 않은 것으로 살펴보면, 마음을 먹고 선사를 해치려 한 것임을 알 수 있으니, 이는 한 마디 말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제가 우연히 옛날 상자를 열었다가 형이 병인년(1926) 겨울에 보낸 편지를 찾았는데, "그의 초심이 비록 이론을 그치게 하여 선사의 원고를 간행하려는 데에서 나왔지만 선사를 해치려는 마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옛날을 끌어다가 지금을 증명함에 자신이 말한 것이 성립되지 않음을 두려워하여 심지어 '선사가 꺼리지 않고 공개적으로 말씀하였다.'73)라고 말하는 극도의 지경에 이르고서야 그쳤다. 그렇다면 처음에는 비록 선사를 해하려는 마음이 없었더라도 끝내는 바뀌어 선사를 해치게 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당시 이 의론은 또한 자못 바름에 가까웠는데, 지금은 이미 정견을 도로 지키면서 유독 이 의론을 버렸으니, 괴상할 따름입니다. 이미 금산(錦山)의 오(吳)가 '성사심제(性師心弟)'를 비판한 것에 대해, 제가 변론한 것을 보고 뒤따라 즉시 변론하여 한 편의 글을 지었으니 선사를 보호함에 새매가 참새를 쫓듯이 하는 뜻74)이 있었음을 우러러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부의 적이 일으키는 환란은 외부의 적이 일으키는 환란보다 크고, 선사의 뜻과 절개를 무함하는 것은 의론의 다툼보다 중대하니, 어찌 금산의 오를 변론한 것을 가지고 음성의 오진영을 먼저 변론하지 않는 것입니까? 혹 살아서 친근한 자에게 어려움이 있지만 죽어서 소원한 자는 쉽기 때문에 형의 현명함으로도 또한 세태에 빠진 것입니까? 아, '성사심제(性師心弟)'는 본디 성인의 가르침으로부터 나와 의심할 것이 없는 것임에도 사람들은 오히려 사설(邪說)이 바른 것을 해친다는 죄목을 억지로 씌웠습니다. 하물며 제자의 입에서 나와 믿을 만한 것 같은 인의(認意), 인교(認敎)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비판하고 욕하는 것이 또한 어떠하겠으며, 〈전간재전(田艮齋傳)〉을 짓는 자가 어찌 이승욱(李承旭) 한 사람뿐이겠습니까? 저는 덕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일어나서 위원리(魏元履)가 팔뚝을 걷어붙이고 분개하는 날75)과 같이 되면 음성을 비호한 제공(諸公)의 죄는 사양할 수 없을 것이고 구구한 저의 오늘날 변론도 [죄를 묻는데] 혹 보탬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형의 생각에 알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저의 앞선 편지에 갑진년(1904)에 선사가 순명비(純明妃)의 복제(服制)에 대처한 것을 가지고 운운한 바가 있었는데, 오진영의 편지에 "나이와 병이 모두 지극해서 비록 부모상일지라도 최복(衰服)을 가지고 다닐 수 없다."고 한 말이 선사를 무함한 것임을 주로 말하였고, 아울러 형과 내가 함께 보았던 선사가 그 해의 명헌황후(明憲皇后)의 상에는 최복을 입고 망곡(望哭)했던 일을 가져와서 증명하였습니다. 또 오진영이 [선사가] 신혁균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여(與)' 자를 '여(歟)' 자로 고치고 그 이하 18자를 삭제하여 수최(受衰)를 행한 문장으로 만든 것76)이 선사의 원고를 고친 것임을 말하고, 사실(事實)을 변란하고 예의(禮意)를 어둡게 했다고 배척하였습니다. 그런데 형은 곧 선사를 무함하고 원고를 고친 사실을 빠뜨리고 답을 하지 않고서 다만 '수최하지 않고 다만 백의와 백립을 착용을 따름이다.'는 설을 들어서 "성론(盛論)이니, 진실로 그러하고 진실로 그러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제 견해도 또한 이와 같았기 때문에 편지로 힐문하였는데, "의심스러운 점이 많으니 이는 진실로 개탄스럽다. ……"라고 하여, 마치 오늘날 예설(禮說)을 뒤미처 강론하는 것과 같은 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과연 무슨 뜻입니까? 선사를 무함하여 60세에 부모의 상에도 최복을 가지고 다닐 수 없다고 망언을 하고, 선사의 원고를 고쳐서 예(禮)와 명(命)을 참작하여 중도의 맞게 한 의리를 명료하지 않는 것으로 돌린 자에 대해 감히 배척할 만하고 증오할 만하다고 말하지 않고 다만 의심스럽다고 말하였습니다. 의심스럽다는 것은 과연 무슨 뜻입니까? 비록 그렇지만 형의 명철함으로 어찌 여기에 제대로 살피지 못하겠습니까? 다만 성의장(誠意章)과 호변장(好辯章)77) 두 장에 공부가 지극하지 못해서이니, 여기에 더욱 유의하기를 바랍니다. 근래에 주자가 여백공(呂伯恭)에게 보낸 편지를 읽었는데, "세상이 쇠퇴하고 도가 미약해져서 부정한 학설이 번갈아 일어나고 그 외의 분분한 것은 진실로 우선 논할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백공과 같이 현명한 사람도 오히려 익숙히 보고 들은 것에 안주하여, 사람들이 경전을 왜곡하고 성인을 무함하여 제멋대로 이설(異說)을 일삼는 것을 보고도 그다지 잘못된 것이라고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 같은 사람은 또한 무슨 마음으로 자기 한 몸을 위하는데 안주하여 격렬하게 말하고 엄하게 논함으로써 한 세상의 혼미함을 깨우치는 일에 주력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세상에 이 책임을 맡은 사람이 있다면 제가 어찌 이처럼 고생스럽게 언성을 높이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바로 나의 마음을 정확히 표현한 말입니다. 이와 같은 날을 당하여 우리 사익(士益)과 같이 현명한 사람도 문인들이 선사를 무함하고 원고를 고쳐서 제멋대로 간사하고 패악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도 깊이 잘못이라고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 같은 자는 진실로 또한 무슨 마음으로 스스로 편의에 안주하여 격렬하게 말하고 엄하게 논함으로써 변명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동문 군자 가운데 이 책임을 맡은 자가 있다면 저도 또한 이처럼 고생스럽게 언성을 높이겠습니까? 또 저가 유독 형에게만 언성을 높이면서 그만두지 않는 것은 또한 이유가 있습니다. 보내주신 편지를 살펴보면 듣기를 싫어하는 뜻이 있는 것 같았으니, 형의 잘못입니다. 젊었을 때에 산재(山齋)에서 서로 선생과 제자 역할을 하면서 장기간 공부했던 일과 30년 동안 영계(瀛契)에서 서로 손님과 주인 역할을 하면서 우호를 다졌던 일을 어찌 생각지 않습니까? 비록 교묘한 자가 사이를 벌리려고 해도 벌릴 틈이 없고, 불화를 만들려고 해도 붙잡을 자취가 없으니, 그 친함이 어찌 다만 동문과 옛 친구이기 때문일 뿐이겠습니까? 저는 늘 망령되게 고인의 '성패와 영욕을 모두 내가 책임진다.'는 생각78)을 또한 정이 중한 벗에게 미루어 쓸 수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문(師門)에 변고가 있기 전부터 일찍이 이미 일이 있을 때마다 곧장 경계하였고 형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또한 오늘날의 마음이 도움을 청하고 당을 도우려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만약 형의 사람됨이 일종의 자기 견해만 옳다 하거나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른 무리와 같다고 한다면 또한 이미 오래 전에 세상에서 서로 잊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마음은 공정하고자 하고, 견해는 정밀하고자 하며, 의론은 반복해서 중정(中正)하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호남과 음성 사이에서 상세히 살펴서 가부가 없고자 하다가 제가 '불언지교(不言之敎)'로 질문하자 "선사를 무함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오진영이 〈정절사전(鄭節士傳)〉을 지은 뒤에 의론에 해가 없고 저의 변론이 옳지 않다고 말했다가 제가 누차 말씀드린 것으로 인하여 견해를 고쳤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오진영이 어떤 사람에게 보낸 의서(擬書)에 말을 바꾼 것을 보고 무함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나 몇 통의 편지를 주고받은 끝에 마침내 또한 선사를 무함했다는 옛 견해를 도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대체로 투약하고 효과를 보아서 나의 마음을 위로한 자로는 형과 같은 이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잘못을 보고 기꺼이 말씀을 드렸던 까닭입니다. 그러나 세 번 생각한데 따른 의혹79)과 재차 헤아린 데 따른 잘못80)이 없을 수 없어서 또 "무심한 데에서 나왔고 선사를 해하려는 것이 아니었다."는 설을 만들어 "처음에는 비록 무심하였으나 끝내는 선사를 해치게 되었다."는 이전의 의론을 버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니 자주 번복하고 자주 잘못되어 나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나의 말을 길게 하는 것은 또한 형과 같은 이가 없었습니다. 비록 그렇지만 지난날로 인하여 앞날을 헤아려보면 또한 형이 멀리가지 않고 돌아올 날이 있음을 알고 있으니, 비록 언성을 높이고자 하지 않더라도 그만둘 수가 있겠습니까? 아, 형과 우리는 모두 늘그막이 되었으니 허물을 고치고 덕을 진취하는 것이 하루가 급한데, 저의 남은 날이 많지 않음은 또한 편지 머리에 말씀드린 것과 같습니다. 이런 간곡한 말로 바라건대 친구가 장차 죽으려 하면서 좋은 말을 남긴 것이라고 보아서 기쁘게 들어줌이 어떻겠습니까? 비록 말은 다하지 못하고 글로 모두 표현하지 못했으나 기력이 이미 피로하고 붓도 닳아졌으니 어찌하겠습니까? 이에 그칠 뿐입니다.형의 편지에 "유서(遺書)와 면명(面命)은 그 형세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선사를 무함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 것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궁구하여 말해보면 선사를 얕게 알았다고 하겠습니다. 오진영의 이른바 '면명'이란 것이 무함임을 어찌 유서의 출현을 기다릴 것이 있겠습니까. 저는 일찍이 유서가 아직 나오기도 전에 윤고문(輪告文) 초안을 작성했는데,【갑자년(1924) 7월의 통문은 제가 작성한 윤고문 초안을 따라서 모두가 논하여 가감한 것이다.】 선사의 평소 자정(自靖)한 의리로 인의(認意)가 없었음을 밝히고, 선사의 원고 가운데 "오늘날 선비들이 왜에게 청원하여 교궁(校宮 향교)을 보존하고서 성현을 높힌 공로로 자처하는 것은 너무나 염치가 없는 짓이라고 말할 수 있다."81)라고 한 일절의 말로 증명을 하였습니다. 형은 여기에 대해 선사를 깊이 안 것으로 허여하겠습니까, 허여하지 않겠습니까?. 弟年近六旬,疾病日侵,大限將近,矧此年荒促之死,固不足惜,惟恐未死前,錯見一非理,誤行一非義,永爲地下之恨.惟其自志之如此,故見同人之錯誤,不忍越視之意,比前益切而不己.蓋朋友相與之道: 麗澤講習,著於《易‧象》; 忠告輔仁,見於《論語》; 德勸過規,列於《呂約》.竊觀今世學人,於忠告、規過一事,未有聞焉.此非但以末季友道之喪,人己之間,終有彼此之分,故一體之仁,有所難行故也.於是又以意曾子之三省,一則曰謀人不忠,二則曰交友不信, 而多一與人之意.以視人猶己,常情所難,故雖曰自省,而亦欲以勉後學歟? 由是而論,見友有過,才生越視之心,是不忠不信.弟於近日實有是懼,他人猶然,况於兄乎? 他事猶然,况乎關先師乎? 兄於陰震事,旣還守"不可不謂誣師"之定見,則吾不須多言.但旣然而又曰"出無心非害師",此何說也? 弟以爲旣謂之誣,則不可謂出無心非害師; 出無心非害師,則不可謂誣,二者不能兩立.如出無心非害師,則宜其改之之不暇,以其不改觀之,知其有心而害師,此一言而可決也.遇閱舊篋,得兄丙寅冬書,有曰: "彼之初心,雖出於息異論印師稿,而非有害師底心.然而援古證今,惟恐己言之不立,至謂'先師不諱公言'之極而乃己.然則初雖無害師底心,而終易至於害師." 此時此論,亦頗近正,今旣還守定見而獨棄此論,可怪也已.錦吳"性師心弟"之譏,見弟辨而隨卽辨之,著成一篇,可仰有鷹鸇之志於衛師矣.然內宄之禍大於外敵之患,志節之誣重於議論之爭,胡不以辨錦吳者先辨陰吳也? 其或以生而親近者有難,而死而疎遠者可易,故雖兄之賢,亦涉世態歟? 鳴呼! "性師心弟"之本自聖訓而無可疑者,人猶勒加以邪說害正之目,而况於認意、認敎之出自弟子而若可信者,諸家之譏罵又當如何,而作《田艮齋傳》者,豈獨李承旭一人乎? 吾恐不知德者作,元履扼腕之日,諸公護陰之罪,有不得辭,而區區今日之辨,或與有力也.且兄之意有不可知者.弟之前書,以甲辰歲先師所處純明妃服制,有所云云,主言震書所稱"年病俱極,雖親喪莫能持衰"之說之爲誣師,而引先師是歲明憲皇后喪服衰望哭兄我共見事而證之.又言震之就申赫均書,改"與"以"歟",刪其下十八字,使受衰之文之爲改稿,而以變亂事實、䵝昧禮意斥之也.兄乃掉了誣改之實而不之答,但擧不受衰只用白衣笠之說而曰: "盛論,誠然誠然." 鄙見亦如此,故以書詰問,而答語"多可疑,是則誠可歎也"云云,有若今日追講禮說者.然是果何意? 誣師而使有六十而未持親喪之妄言,改稿而使參酌禮令得中之義歸於不明者,不敢曰可斥可惡,而但曰可疑.可疑者,是果何意? 雖然,以兄之明豈有失照於此也? 特於誠意、好辯兩章,功有所未至,願於此加之意焉.近讀朱子與呂伯恭書,有曰: "世衰道微,邪詖交作,其他紛紛,固所不論.而賢如吾伯恭者,亦尙安於習熟見聞之地,見人之詭經誣聖,肆爲異說,而不甚以爲非.則如某者誠亦何心安於獨善,而不爲極言覈論以曉一世之昏昏也? 使世有任其責者,某何苦譊譊若是耶?" 此正道得吾之心事也.當此之日,賢如吾士益者,見門人之誣師改稿,肆爲奸悖,而不深以爲非,則如澤述者,誠亦何心自占便宜,而不爲之極言覈論以辨明也? 使同門君子有任其責者,澤述亦何苦而譊譊若是耶? 且吾之譊譊,獨於哀兄而不置者,亦有說焉.竊觀來書,似有厭聞之意,兄其過矣. 盍思夫山齋長課互作師生於小少之日,瀛契講信迭爲賓主於三紀之年? 雖有巧者欲行間而無隙可乘,構釁而無跡可因,其親也豈但同門舊要而己哉? 每嘗妄謂古人成敗榮辱俱我任之之意 亦可推用於情重之友.故自吾門有變之前,早己因事直規而得兄之感謝,則亦可知今日之心非出於請援助黨也.且若兄之爲人,如一種自是己見者及朝漢暮楚輩,則此亦相忘於江湖久矣.乃不然而心欲其公,見欲其精,論欲其反覆而歸於中正.是以始之欲詳審於湖陰而無所可否,見弟質之以不言之敎,而曰"不可不謂誣師".次之謂震作《鄭傳》後,論無害義,以弟辨爲不然,被弟累告而改見.三之見震擬與人書變說爲不誣,而有多少往復,竟亦還守謂誣之舊見.蓋投藥見效而慰我心者,莫兄若也.此弟所以見過而樂告者也.然而不能無三思之惑、再數之失,又作"出無心非害師"之說,而欲棄初雖無心終至害師之前論.頻復頻失,苦我心而長我說者,亦莫如兄也.雖然因往推來,又以知兄不遠復之有日也,則雖欲不譊譊,不已得乎? 嗟乎! 哀兄吾儕俱屬晩境,改過就德,日急一日,而弟之餘日無多,又有如書首所陳者.凡此縷縷,幸視爲故人將死善言而喜聞之,如何如何? 雖音未盡而辭不窮,柰力旣疲而筆亦秃何? 只得之此而已.兄書謂: "遺書、面命,勢不兩立,故不可不謂誣師,非曰不然." 若究言之,則可謂淺知先師也.震所謂面命之爲誣,何待遺書之出? 弟則早草輪告文於遺書未出之前,【甲子七月通文,是因弟輪告本草而僉議加减者.】 而以先師平日獻靖之義明其無認意,引大稿中"今之士請願於彼, 得存校宮,自居以尊聖之功,可謂無恥之甚"者一節語而證之矣.未知兄於此不以深知先師許之也否? 붕우……것 《주역(周易)》 태괘(兌卦) 상전(象傳)에 "붙어 있는 못이 태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붕우들과 강습한다.[麗澤, 兌, 君子以, 朋友講習]"라고 하였다. 친구……것 《논어(論語)》 〈안연(顔淵〉에 "벗들끼리는 충심으로 말해 주어 좋은 방향으로 인도해야 한다.[忠告而善道之]"는 공자의 말과 "군자는 학문을 통해서 벗을 모으고, 벗을 통해서 자신의 인덕을 보강한다.[君子 以文會友 以友輔仁]"는 증자(曾子)의 말이 보인다. 덕업을……것 여씨향약(呂氏鄕約)은 송나라 때 남전(藍田)에 살던 여대충(呂大忠), 여대방(呂大防), 여대균(呂大鈞), 여대림(呂大臨) 등 형제 네 사람이 그 고을 사람들과 서로 지키기로 약속한 자치 규범이다. 덕과 업을 서로 권하고[德業相勸], 허물과 그른 일을 서로 경계하고[過失相規], 예의 바른 풍속으로 서로 사귀고[禮俗相交], 근심스럽고 어려울 때 서로 구한다[患難相恤)]는 네 조목인데, 후세 향약의 기준이 되었다. 《소학(小學)》 권6 〈선행(善行)〉 삼성(三省) 《논어(論語)》 〈학이(學而)〉에, 증자는 "나는 날마다 세 가지로 내 몸을 반성하노니, 남을 위하여 도모해 줌에 충성스럽지 못하였는지, 친구와 더불어 사귐에 신실하지 못하였는지, 스승에게서 전수받고 익히지 못하였는지 하는 것이다.[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라고 하였다. 선사가……말씀하였다 후창이 갑자년(1924)에 김윤승에게 답한 편지를 참조하면, 오진영은 오사익에게 보낸 편지에 "선사가 《오현수언(五賢粹言)》을 인가한 설은 천지가 만물을 낳고 성인이 표준을 세우는 마음이기 때문에 꺼리지 않고 공개적으로 말씀하였다."라고 하였다. 《後滄集》 권7 〈답김윤승(答金允升)〉 새매가……뜻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공(文公) 18년 기사에 "자기 임금에게 무례한 자를 보면 새매가 참새를 모는 것처럼 가차 없이 처벌해야 한다.[見無禮於其君者, 誅之如鷹鸇之逐鳥雀也]"라고 하였다. 위원리(魏元履)가……날 향인(鄕人)이 호문정(胡文定)의 사당을 세우려고 하자 진준경(陳俊卿)과 진양한(陳良翰)이 작은 절개를 꼬집어 의심하니 위원리가 팔뚝을 걷어붙이고 분노하였다고 한다. 《송자대전수차(宋子大全隨箚)》 권10 오진영이……것 전우가 신혁균에게 보낸 편지에 "今則無服而爲有服,與大喪內喪有間,故成服日只用白衣白笠而己矣"라고 하였는데, 오진영은 이를 "今則無服而爲有服歟"로 고쳤다는 것이다. 성의장(誠意章)과 호변장(好辯章) 성의장은 《대학장구(大學章句)》 전 6장을 가리키고, 호변장은 《맹자(孟子)》 〈등문공하〉의 호변장을 말한다. 고인의……생각 전우가 김동훈에게 보낸 편지에 "고인이 말하기를 '저가 하루라도 나를 스승으로 섬겼다면 그 평생의 성패와 영욕을 모두 내가 책임진다.'고 하였다.[古人言彼一師我. 其平生成敗榮辱, 俱我任之]"라는 말을 인용하고 있다. 《간재집(艮齋集)前編》 권4 〈시김동훈(示金東勳)〉 세 번……의혹 노(魯)나라 계문자(季文子)가 어떤 일이든 "세 번 생각한 뒤에 행한다.[三思而後行]"라고 하자, 공자가 "두 번이면 된다.[再斯可矣]"라고 하였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 재차……잘못 사람이 처음에는 올바른 생각을 갖고 있었으나 공연한 의심을 하면 자꾸만 틀리게 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정명도(程明道)가 일찍이 창고 안에 있으면서 늘어서 있는 긴 행랑의 기둥이 몇 개나 되는지 속으로 세어 보았다. 그러고는 혹시 잘못 세지 않았는지 의심하여 다시 세어 보니, 세어 볼 때마다 숫자가 틀렸다. 이에 사람을 시켜 기둥 하나하나를 두드리며 세어 보게 하니, 처음에 세어 본 것과 부합하였다 한다. 《近思錄》 卷4 〈存養〉 오늘날……있다 《간재집(艮齋集)後編)》 권17 〈화도만록(華島漫錄)〉에 보인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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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오사익에게 답함【직접 마주한 날에 또 견해를 고칠 것을 말하였기에 편지를 썼지만 보내지 않았다.】 기묘년(1939) 10월 答吳士益 지난번 편지에 제가 죽기 전에 완전히 똑같은 뜻을 갖기를 바랐던 것은 깊은 충고라고 할 만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답장를 받드니, 끝내 실망하게 할 뿐뿐만 아니라, 선사에게 인의(認意)가 있었다고 증명한 것은 음성 오진영보다 심하였으니, 이 무슨 변고입니까? 크게 놀랄 일입니다. 오진영의 이른바 면명(面命)은 오히려 '힘을 헤아려 하라.'는 것으로 말을 하였는데, 형이 이른바 면명은 곧장 '대신 인가받는 것도 구차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대신 인가받는 것은 스스로 욕되게 하지 않는 것에 보탬이 없고 반드시 선사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작년 편지에 이미 다하여 거듭 부언할 필요가 없습니다. 형은 또한 이미 스스로 말하기를 "대신 인가받으라는 명이 있었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오진영이 선사를 무함한 자라는 것이 과연 말이 되는가?"라고 하였으니, 누가 다시 그 말을 믿겠습니까? 형은 4, 5년 이래 이랬다저랬다 하면서 자주 번복하고 자주 잘못하여 그 실마리를 헤아릴 수 없었는데, 지금은 일체 남김없이 다 드러냈다고 할 수 있으니, 이제부터 저는 일을 줄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형이 그 동안에 많은 말을 하면서 양쪽으로 미봉했던 것은 단지 마음만 수고했을 뿐이었습니다. 심지어 "[선사는] 나이와 병이 모두 지극하여 부모님 상에도 최복을 가지고 다니지 못한다."라고 한 말에 대해서도 오히려 능히 무함으로 배척하지 못하고 단지 "말이 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형이 진심으로 오진영을 보호하여 오직 해가 있을까 두려워하는 뜻이 더욱 가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본령이 이와 같은데, 내가 어찌 마음을 함께하여 선사를 지키기를 바라겠습니까? 멍한 채로 남쪽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릅니다.[오진영이] 자기의 죄를 벗어 선사에게 전가한 것은 결단코 옳지 못합니다. 형이 비록 이것에 대해 스스로 공정한 마음과 밝은 안목이라고 여기지만, 저는 형의 사사로운 뜻과 몽매한 견해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의식적으로 공정하게 하는 사심에 가려져서 분명한 이치를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선사의 원고를 인가받고자 한 자가 그인데 사람들의 말을 두려워하게 되어서는 마침내 "진실로 불가함이 있기 때문에 제가 바다를 건너고자 하였다."는 것은 자신은 죄를 벗어나고자 함이 아니겠습니까? 또 말하기를 "사실은 원래 선사의 불언지교(不言之敎)를 따랐다."는 것은 선사에게 죄를 전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일삼는 바가 없이 행하는 것은(일하는 것이 없는 것처럼 행하는 것은) 물을 다스리는 도이며, 말을 듣고서 법에 따라 처분하는 것은 옥사를 판결하는 법입니다. 어찌하여 괴롭게 일을 많이 하면서 이 평탄하고 명백한 방도를 버리고 어둡고 그늘진 곳에서 사외(辭外)의 법을 별도로 찾는단 말입니까? 이것만도 이미 괴이한데, 또 스스로 믿는 것이 지나쳐서 남을 각박하다고 이르니, 내가 다시 어찌하겠습니까? 【面見日又言改見,故書成而不送】 ○己卯十月頃書欲其迨弟未死前,爛漫純同之意者,可謂到底忠告.今承所覆,非惟竟失所望,其證成師有認意者,深於陰震,此何變也? 大可駭也.震所謂面命,猶以料量爲之,兄所謂面命,直以代認不拘,代認之無益於不自辱,而必非先師說.昨年書已盡,不須疉陳.兄且道旣自云"有代認之命",而又謂"震爲誣師者,果成何說",誰復信之? 兄之四五年來,乍左乍右,頻復頻失,而莫測其端者,今則可謂和盤托出,開口見咽,自此此漢可以省事矣.兄於其間積費辭說,兩下彌縫者,只見其心勞也.至於"年病俱極親喪莫能持衰"之說,猶不能斥之以誣,但曰"不成說",則兄之實心護震,惟恐有傷之意,益不可掩.本領如是,吾何望其同心衛師? 南望惘然,不覺淚淫.脫罪嫁師,決然不然.兄雖以此自認爲公心明眼,弟則以爲兄之私意昏見,正在於此,謂其蔽於有意爲公之私而見不得顯然之理也.認稿者渠也,而畏人之言,則乃曰"誠有不可,故鄙欲越海"者,非脫罪乎? 又曰"其實原從先師不言之敎"者,非嫁師乎? 行其所無事,治水之道也; 聽辭而正刑,拆獄之法也.何苦多事而舍此坦明之道,別尋辭外之法於幽陰去處也? 已是可怪,而又自信太過,謂人苛刻,吾復柰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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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익에게 보냄 경진년(1940) 與吳士益 庚辰 저는 기가 약해지고 살이 빠져서 영락없는 귀신 몰골입니다. 게다가 금년은 술사(術士)가 악운(惡運)이라고 부르는 해인데 아직 곧장 죽지 않고 있으니, 결국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인하여 생각건대, 인생의 큰일은 임금과 부모와 스승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찍이 벼슬하지 않았고 지금 또 나라가 없어졌으니 임금을 섬기는 것은 그만이었고, 어려서 부모를 여의었고 또 마음에 흡족하게 죽은 뒤의 일을 처리할 재물도 없으니 부모를 섬기는 것 또한 그만이었습니다. 오직 분수를 따라 선사를 무함을 변론하는 것에 진력하여 선사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혹 그런대로 수행하였습니다. 근래에 선사의 무함을 변론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제반 문자를 수습하여 수정하여 책을 만들어82) 다음의 사람들을 기다리면서 삼가 선사가 임종하기 수일 전에도 오히려 논을 지어 전옹(全翁 임헌회)의 무함을 변론한 의리83)에 붙였습니다. 다만 저승사자가 이르기 전에 능히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하겠습니다. 또 생각건대, 형은 선사를 무함함을 변론하는 일에 처음에는 양쪽의 사이에서 가부를 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원래 선사의 불언지교(不言之敎)를 따랐다."는 오진영의 편지를 얻어 보여준 뒤에 "〈답옹서(答甕書)〉를 보고서 더욱 분명해졌으니 선사를 무함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병인년(1926) 섣달의 편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10년 뒤에 오진영의 의서(擬書)를 보고서는 또 의론이 달라짐을 면치 못하여 무함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제가 반복해서 충고하자 지금 이후에는 중간의 옮겨 다니는 견해를 버리고 전일의 명백한 의론을 도로 지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 외에 더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어렴풋하고 근사하여 확실히 근거로 삼을 수 없는 편지의 말을 믿기 보다는 어찌(차리리) 명백하고 준엄하며 정직하여 백세를 기다릴 수 있는 유서(遺書)를 지키는 것과(것이 나은 것과) 같겠습니까? 대의(大義)가 같게 되어 결국에 하나의 길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미욱한 견해가 앞뒤로 차이가 있었던 것은 진실로 부끄럽습니다만, 붕우 간에 강마(講磨)가 도움이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너무도 다행이고 얼마나 시원합니까."라고 한 무인년(1938) 7월의 편지는 의론이 여기에 이르러 또한 이미 바른 것에 가까웠으니 저 또한 변론을 그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함이 매우 두텁기 때문에 의견이 완전히 똑같게 되기를 더욱 바라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성품의 강유(剛柔)와 의론의 준완(峻緩)은 한 판에 찍은 것처럼 같을 수 없다."는 형의 말도 불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끝내 어쩌지 못하고 제가 또한 그대로 두려고 하지 않자, 더욱 확대되어 대인(代認)과 면명(面命)에 대한 기묘년(1939) 8월의 편지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형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른바 임술년(1922) 3월의 면명에 대해서는 오진영도 오히려 "단지 지속을 논하였을 뿐이고 인가 여부를 미처 말하지 못하였다."라는 말로 회피하였는데, 형은 곧장 "대인도 구차하지 않다."는 것으로 면명을 해당시키고, 이미 "대인의 명이 있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더욱 그의 무함을 증명하여 완성해준 것이었습니다. 형은 어찌 갑자기 병인년과 무인년84)의 두 편지에 없는 힐난거리를 세우고, 또 어찌 몇 해 전의 제 편지의 "대인은 원래 말이 되지 않으니 결코 선산의 가르침이 아니다."고 했던 말을 조금도 생각지 않는단 말입니까? 이에 저는 혼자 가만히 탄식하여, '내가 만약 무인년 7월 이후에 다시 한 마디 말이 없었다면 이 친구로 하여금 이렇게 하지 않게 하였을 것인데, 지금 마침내 완전히 똑같게 하려고 했던 것이 도리어 크게 어긋나게 만들었다.'라고 여기었습니다. 이 때문에 비록 이미 답장을 작성했으나 말이 자못 준엄하였고 또한 갑자기 보낼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금년 봄 서로 만난 날에 지금 편지의 내용으로 대략 들어서 말씀드렸더니, 형이 곧바로 기쁘게 듣고서 말하기를 "그렇다면 내가 어찌 견해를 고치는데 인색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아. 견해를 고쳤으니 이것으로 충분하고, 형은 예전 그대로 무인년 7월의 오두남(吳斗南)입니다. 얼마나 다행입니까. 다만 말이 이미 문자에 드러났으니, 또 문자로 견해를 고친 실상을 기록하여 보는 자로 하여금 의혹이 없게 하는 것도 방애되지 않기 때문에 조만간 한 통의 편지를 보내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친구 간에는 10년 동안 의론이 같지 않은 것은 해될 것이 없고 하루라도 마음이 서로 떨어지는 것을 가장 꺼려한다.'고 항상 말합니다. 지금 변론의 문장을 책으로 엮으면서 문득 형도 지난날의 일들을 써서 피차의 마음을 통했으면 하는 생각이 우연히 들었습니다. 일이 많다고 웃지 마시고 은혜롭게 한 마디 말씀을 답해주지 않겠습니까?또 "선사가 만약 인교(認敎)가 없었다면 하나의 절개만 있는 선비에 불과할 뿐이다. 어찌 고단하게 선사로 하여금 전체가 모두 온전한(전적으로 완전한) 군자가 될 수가 없게 하는가."라고 하는 일종의 설이 있는데, 나올수록 더욱 기이한 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설이 행해지면, 선사가 선사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장차 의리가 꽉 막히게 되고 천지가 뒤집어진 뒤에 그치게 될 것입니다. 너무도 통탄스러우니 어찌해야겠습니까?형의 편지에 "10여 년 동안 오직 음성(陰城) 하나가 뱃속에 가로질러 있어서 그 언어와 문자에 조금만 다른 것을 보면 문득 입을 열어 말하고 붓을 잡아 썼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정절사전(鄭節士傳)〉을 논한 것을 가지고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형은 제 마음에 대해 얕게 알았을 뿐만 아니라 전혀 알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대개 이는 선사와 관련된 것이 아니었으니 논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만, 다만 중화[華]와 오랑캐[夷]를 구분하여 막는 것과 관련되었기 때문에 언급했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형도 저의 의론을 따르지 않았습니까? 사원(祠院)의 제사에 생고기를 올리는 것도 큰 쟁론이었지만 저는 생고기를 올린다는 오진영의 의론을 옳다고 하였으니, 여기서 제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무릇 사람을 논하고 문장을 논함에는 오직 이치를 볼 뿐입니다. 사람들이 제가 생고기를 올리는 것을 옳게 여긴 것으로 오진영에게 아첨하여 화를 늦추고자 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어찌 장담하겠습니까? 아, 진실로 그 마음을 의심하여 죄를 덮어씌우려고 한다면 어찌 할 말이 없을 것을 걱정하겠습니까.85) 弟氣弱肉削,便同鬼狀,且今年術士所稱惡運,而姑不卽殊,不知竟如何也.仍念人生大事,事君、父、師.而曾不立朝,今且無國,事君已矣; 少而孤露,又無財可以恔心後事,事親亦已矣; 惟有隨分盡力於辨誣,以之事師,則或庶幾焉.近方收拾諸般文字可助於辨誣者,修整成編以俟來百,竊附先師屬纊前數日,猶著論以辨全翁誣之義.然未知符到前能就緖否也.且念兄於此事,初不可否於兩間,及得示以"原從先師不言之敎"之震書,然後有"視答甕書,尢爲分曉, 不可不謂之誣師"之丙寅臘月書.後十年,見震擬書,又不免貳論爲不誣,而得弟反復忠告,有今而後,不可不棄却中間遊移之見,還守前日直截之論.而此外更無他道, 與其信依俙近似不可確據之書言,豈若守明白峻正百歲可俟之遺書哉? 大義所同,終歸一轍.迷見之前後參差,誠可慙; 朋友之講磨有力,不可誣."何幸如之, 何快如之"之戊寅七月書,論至於此,亦已近正,吾亦可止矣.惟其相愛之甚厚,故愈欲同歸之純如,則"性之剛柔,論之峻緩,不能如印一板"之兄言,亦未爲不可.終無柰弟又不肯放過,則輾轉出來代認、面命之己卯八月書矣.兄試思之.所謂壬戌(1922)三月之面命,震猶以"單論遲速不及認否"諱之,兄則直以"代認不拘"當面命, 旣云有認命,則是益成其誣矣.不知兄何忽立此丙戊二書所無之詰頭,亦胡少不念年前鄙書"代認元不成說, 決非師敎"之言乎? 於是私竊嗟歎, 以爲我若戊寅七月以後,更無一言,則不使此友有此,而今乃欲其純同者,反致大乖也.以是雖己裁答書,辭頻峻節,又不能遽發.乃於今春面晤日,略擧告之, 如今書中意,則兄卽喜聞曰: "然則吾何吝改見." 噫! 改見則斯已矣,而依舊是戊寅七月書之吳斗南也,何幸何幸! 但言旣形於文字, 則不妨又以文字記其改見之實,使觀者無惑, 故意其有早晩一書之賜耳.弟常言凡在親友無傷十年議論不同,最忌一日心肝相隔.今於編成辨文之日,忽偶念兄且寫過境之事,要通彼此之心.未知不以多事笑之,而幸惠一言之覆否?又有一種說,謂先師若無認敎,不過爲一節之士,何苦使先師不得爲全體君子也云者,可謂愈出愈奇.此說之行,非惟先師不得爲先師,將見義理晦塞、天地翻覆而後己.痛歎痛歎, 柰何柰何?兄書云: "十數年間,惟一陰城橫著肚裡,見其言論文字少異,則輒啟口抽筆." 此以論《鄭傳》事而云然.然兄於弟心,非惟淺知,可謂全未.蓋此非關於先師者,則不論亦可也,而特以係華夷之防,故言者耳.故兄亦不從鄙論乎? 院亨之生熟薦,亦大爭論也,而弟是吳論之生薦,此可以知吾心也.凡論人論文,惟理之是視耳,安知人之又不以弟是生薦爲媚吳而緩禍也乎? 噫! 苟疑其心而加之罪,何患無辭? 책을 만들어 김택술이 《간재집(艮齋集)》 출판에 따른 오진영의 스승 간재에 대한 무고와 이에 따른 여러 가지 일에 대하여 정리한 《사백록》을 가리킨다. 선사가……의리 김평묵(金平默)이 임헌회(任憲晦)의 제문을 지었는데, 임헌회를 호안국(胡安國)과 사마광(司馬光)에게 비유했다 해서 전우와 임헌회의 아들 임진재(任震宰)가 편지를 보내어 절교를 선언하고 제문을 돌려보낸 일을 말한다. 《간재집(艮齋集)前篇》 권2 〈답유치정(答柳穉程)〉 병인년과 무인년 원문은 '丙戌'로 되어 있는데, 문맥을 살펴 '戌'을 '戊'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죄를……걱정하겠습니까 처벌할 작정만 한다면 트집 잡을 핑곗거리는 많을 것이라는 말이다. 춘추 시대 진(晉)나라 혜공(惠公)이 자신의 즉위를 도와준 이극(里克)을 죽이려 하자, 이극이 "나에게 죄를 덮어씌우려고 한다면, 어찌 할 말이 없는 것을 걱정하겠습니까.[欲加之罪 其無辭乎]"라고 말하고는 자결했던 고사가 있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애공 십년(僖公10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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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변론 【1938년】 再辨 【戊寅】 오진영은 이 편지에서 선사께서 묘적(墓籍)의 등록을 허락하셨던 일을 끌어와서 문고의 인허에 대한 말없는 가르침의 분명한 증거로 미루어 삼으면서 말하기를, "참고 견디라는 요결을 주희와 송시열은 가죽과 비단[皮幣]23)로 말씀하셨고, 선사는 묘적(墓籍)으로 말씀하셨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차마 선조의 묘를 차마 지키지 않을 수 없어 묘적을 등록했다면 차마 선사의 원고를 전하지 않을 수 없어 인허를 받는 것이 또한 무슨 죄가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묘적의 등록과 문고의 인허는 바로 연나라와 월나라처럼 서로 맞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묘적을 등록하지 않았을 때의 재앙에 대해 선사께서 "저들이 묘를 무너뜨리거나 파서 옮기는 등 예측할 수 없는 변고를 행하는 것은 부조(父祖)가 죽임을 당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셨으니, 이것이 참고 견디는 요결을 어쩔 수 없이 사용하신 이유이다. 문고를 간행하지 않는 경우에는 비록 널리 배포하지는 못 한다 하더라도 탈 없이 보관이 되어 저들이 찢어 파괴하거나 불에 태우는 등 예측할 수 없는 변고를 행하지 못하여 애초에 부조가 죽임을 당하는 것과 같은 일은 없을 것이니, "참고 견디는 요결을 사용하여 어쩔 수 없이 인허를 받았다."라고 말하는 것이 어찌 온당한 말이겠는가. 나는 그래서 "묘적의 등록과 문고의 인허는 바로 연나라와 월나라처럼 서로 맞지 않는 일이다."라고 말한 것이다.그런데도 그는 도리어 묘적의 등록을 문고의 인허에 대한 가르침으로 미루어 삼으면서 또 말하기를, "주희와 송시열도 꺼리지 않은 것을 선사께서 꺼리겠는가. 꺼리는 것이 진실로 의리라면 주희와 송시열이 먼저 꺼렸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인허에 대한 가르침을 선사께서 전수 받은 바가 주자와 송시열 이래로 꺼리지 않고 공공연하게 말할 수 있는 하나의 의리로 삼은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서(徐)씨가 이 편지를 드러낸 것을 깊이 미워하면서 선사를 위해 꺼리고자 한 것인가? 또 '어찌하여 간행을 주창하고 인허를 주관한 것을 자신이 만약 스스로 끌어안으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선사를 위해 꺼리고자 한 것인가?꺼리고자 하는 것과 꺼리지 않는 것 사이에 일이 있음을 알겠다. 대체로 그는 꺼리지 않고 말하기를, "선사께서는 일찍이 인허를 받으려는 생각이 있으셨다." 하였고,【정재(靜齋)에게 대답한 말】 꺼리고자 하면서 말하기를, "여러 공들은 내가 입으로 말한 것을 듣지 못했고, 내 손으로 쓴 편지를 보지 못했다." 하였다.【〈호남의 여러분에게 답한 편지〉】 꺼리지 않고 말하기를, "선사께서 홀로 계실 때에 헤아려서 하라고 명하셨다." 하였고,【〈김함재(金涵齋)에게 답한 편지〉】 꺼리고자 하면서 "인허를 받을지 여부는 언급하지 않았으며 말에 구별이 부족했다." 하였다.【〈호남의 여러분에게 답한 편지〉】 꺼리지 않고 말하기를, "선사께서 일찍이 깊이 구애될 것이 없다고 분부하셨다." 하였고,【이자승(李子乘)에게 답한 편지〉】 꺼리고자 하면서 "다른 글을 범범하게 말한 것이지 대고(大稿)를 가리킨 것은 아니다." 하였다.【김세기(金世基)의 〈읍고문(泣告文)〉】 이것은 진실로 잠시 이랬다 잠시 저랬다 하면서 간계를 부려 거짓말을 하는 그의 장기(長技)인데, 지금 또 한 글 내에서 주희와 송시열 이래로 하나의 의리라고 꺼리지 않다가 편지가 드러난 것을 깊이 미워하면서 자신이 끌어안으면 아무런 일이 없다고 꺼리고자 하였다. 한번은 이랬다 한번은 저랬다 하면서 간계를 부려 거짓말을 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이것이 무엇 때문인가?처음에는 꺼리지 않았다가 스승을 무함했다는 죄명을 듣는 것이 싫어지자 잠시 입장을 바꾸어 꺼리고자 하였고, 중간에 꺼리고자 하였다가 진장(眞贓 범행의 증거)의 잡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자 또 끝에 가서는 차라리 얼굴을 드러낼지언정 꺼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의 정상이 결국 어떻겠는가? 어찌 그가 서씨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를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편지에 문집을 간행하는 일은 세 가지가 불가하니, 그 첫 번째가 진실로 그러한 점이 있습니다."라고 하였으니, 그도 또한 인허를 내는 것이 불가함을 알고 있었다. 또 그 편지에 "제가 바다를 건너가고자 했으나 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으니, 그도 또한 인허를 낼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끝에 가서 말하기를, "사실은 선사의 말없는 가르침을 살펴 따른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그도 또한 그것이 불가함을 알았으면서 선사께서는 그것이 불가함을 모르셨다고 하고, 그도 또한 그럴 마음이 없었으면서 선사께서는 그럴 마음이 있으셨다고 하면서 "말없는 가르침을 살펴 따랐다."라고 하는 것이 과연 말이 되겠는가.그가 이미 그것의 불가함을 알고 있었으니, 마땅히 선사께서는 더욱 그것의 불가함을 아시고 계셨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이미 그럴 마음이 없었으니, 마땅히 선사께서는 더욱 그럴 마음이 없으셨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이렇게 한 것은 명명백백하게 선사를 끌어와 사람을 막고, 죄를 벗어 선사에게 덮어씌우려는 계책이다. 그가 인허를 내는 것에 대해 진실로 불가함이 있다는 것으로 제목을 세웠다면 무릇 이 편지 속의 "대신 인허를 받으셨다."거나 "묘적을 등록하셨다.", "참고 견디는 요결을 주희와 송시열이 말씀하셨다." 등의 많은 말들은 모두 논제에서 벗어난 허황된 말일 것이다. 이와 같음을 모르는 것이 아닌데도 오히려 그것들을 말한 것은 명명백백하게 보고 듣는 것을 현혹하고 어지럽혀서 세상 사람을 속여 넘기려는 계책이다. 이것이 선사를 무함한 죄가 되는 이유이다. 그러나 사람들 중에는 오히려 무함이 아니라 사실을 설명한 것이라고 말하는 자가 있다. 이런 사람은 현혹하여 속이는 계책에 정확하게 걸려든 것이니, 내가 진실로 안타깝게 여긴다. 만약 "명철함이 옳고 그름을 알 수 있었음에도 오히려 그렇게 했다."라고 한다면 내가 또 어찌할 수 없을 따름이다. 震之此書, 引先師許籍墓事, 推作認稿不言之敎之的證而曰: "含認之訣, 朱宋言之皮幣, 先師言之墓籍.", 又曰: "不忍先墓之不守而籍之, 則不忍師稿之不傳而認之, 亦何罪?". 然吾則以爲籍墓之於認稿, 正燕越之不相値也. 墓不籍之禍, 先師謂"彼加陵夷掘移罔測之變. 與父祖被殺同", 此所以含忍之訣不得已用之. 稿不刊, 則雖未廣布, 無恙藏在, 彼未嘗加以裂破焚燒罔測之變, 初無與父祖被殺同者, 則其云"用含忍之訣而不得已認之"者, 何所當乎? 吾故曰: "籍墓之於認稿, 正燕越之不相値也." 渠乃旣以籍墓推作認稿之敎而又曰: "朱宋之之不諱, 先師諱之乎? 諱之苟義也, 朱宋先已諱之矣." 此直以認敎爲先師所受朱宋以來一副義理可不諱而公言者矣. 然則何以深疾徐氏之發此書, 而欲爲先師諱之也? 又何以云"倡刊主認, 鄙若自引, 便都無事", 而欲爲先師諱之也? 於欲諱不諱之間, 知有事在. 蓋渠不諱而言: "先師曾有認意."【對靜齋言】 欲諱而言: "諸公不聞吾口語, 不見吾手筆."【〈答湖南書〉】 不諱而言: "先師獨命料量爲之."【〈答金涵齋書〉】 欲諱而言: "不及認否. 語欠區別."【〈答湖南僉座書〉】 不諱而言: "先師嘗敎不必深拘."【〈答李子乘書〉】 欲諱而言: "泛論他書非指大稿."【金世基〈泣告文〉】 此固乍此乍彼閃奸打僞之長技, 而今又一文之內, 朱宋以來一副義理之不諱, 深疾發書自引無事之欲諱. 一彼一此之閃打者如此, 此何以故? 始之不諱而惡聞誣師之罪名也, 則暫轉身而欲諱, 中之欲諱而莫脫眞贓之被捉也, 則又終之寧露面而不諱. 然則渠之情狀, 竟如何也? 盍觀渠與徐氏初書乎? 其曰: "刊集事, 三不可, 其第一則誠有然者." 則渠亦知出認之不可矣. 其曰: "鄙欲越海而不得." 則渠又無出認之心矣. 而終之曰: "其實原從先師不言之敎也." 渠亦知其不可者, 謂先師不知其不可, 渠亦無其心者, 謂先師有其心, 而曰"原從不言之敎"者, 果成說乎? 渠旣知其不可, 則宜知先師之尤知其不可矣. 渠旣無其心, 則宜知先師之尤無其心矣. 然猶且爲此者, 明明是援師禦人脫罪加師之計. 渠旣於出認, 以誠有不可立箇題目, 則凡此書中代認籍墓含忍之訣朱宋言之等許多云云, 皆題外之荒說. 非不知其如此, 而猶且爲之者, 明明是眩亂視聽瞞過世人之計. 此其所以爲誣師之賊也. 然人猶有謂之非誣而爲之分疏者. 此等人正中眩瞞之計. 吾誠爲之憫然. 若曰: "其明足以知是非而猶然." 則吾又末如之何也已. 가죽과 비단 옛적 국가 간의 외교에 사용하는 예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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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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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진영이 오사익에게 답한 편지에 대한 변론 【1939년】 吳震泳答吳士益書辨 【己卯】 순명비(純明妃)39)의 복제(服制)에 대해 운운하셨는데, 선사께서 병환이 없는 날에 제가 질 문을 드리기를, "상복(喪服)을 입을 만하면 상복을 입고, 상복을 입지 않을 만하면 상복을 입지 않는 것이 바로 정당할 것입니다. 전에는40) 관인(官人)으로 자처하여 상복을 입으셨 고, 후에는41) 스스로 사민(士民)과 같게 여겨 상복을 입지 않으시고 단지 백의관(白衣冠)만 착용하셨는데, 전후가 대문 안의 뜰과 대문 밖의 길처럼 너무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닌지요?" 하였습니다.순명비는 예법에 원래 신하와 백성은 상복이 없는 것인데 상께서 조령으로 상복을 입도록 했기 때문에 선사께서 예법과 조령 사이를 참작하여 비록 백의립(白衣笠)의 복제를 이루긴 했으나 상복은 입지 않으셨다. 예법에 상복이 없기 때문에 상복을 입지 않으신 것이고, 상께서 조령으로 상복을 입도록 하셨기 때문에 백의립을 착용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변례(變禮)에 대처하면서도 정도를 얻었다는 것이다. 전에 상복을 입으신 것은 상복이 있었기에 상복을 입는 것이 온당했기 때문이고, 후에 상복을 입지 않고 단지 백의립만 착용하신 것은 상복이 없는데 상복이 있는 것처럼 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몸으로 때에 따라 변례에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관인과 사민의 신분으로서 전후를 다르게 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맹자가 말한 "모두 옳다.42)"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전에는 관인으로 자처하고 후에는 사민으로 자처한 것이 대문 안의 뜰과 대문 밖의 길처럼 너무 차이가 나서 정당하지 않다는 것으로 논박하니, 식견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매우 공손하지 못한 것이다.선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너의 말이 옳은 듯하다. 다만 지금은 나이가 많고 병이 심하니, 비 록 부모의 상이라 하더라도 상복을 입을 수 없다." 하셨습니다.순명비는 초상이 고종(高宗) 갑진년(1904)에 있지 않았는가. 이 당시 선사께서는 나이가 64세였고 몸은 여전히 강건하여 호남 수백 리 밖까지 나가셨다. 홍대비(洪大妃)43)의 상중이었을 때에는 초하루와 보름에 상복을 입으시고 천암(天巖)과 예천(禮川)의 사이에서 망곡(望哭)44)하신 것은 뭇사람이 함께 보았다. 그러나 순명비의 상에는 상복을 입지 않으셨으니, 어찌 정밀한 의리와 깊은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는 도리어 "선사께서 '지금은 나이가 많고 병이 심하여 비록 부모상(父母喪)이라 하더라도 상복을 입을 수 없다'라는 말씀이 있으셨다."라고 하니, 나이와 사실에 근거해보면 이미 그것이 무함임을 알 수 있다. 또 성인(聖人)께서 예법을 제정하여 비록 70세라 하더라도 몸에 최마복을 입었다.45) 평소에 예를 삼가신 선사와 같은 분으로서 도리어 70세 전이었고 몸에 질병도 없었던 때에 "나이가 많고 병이 심하여 부모의 상에 상복을 입을 수 없다"는 말씀이 있으셨다는 것은 전혀 이치에 가깝지 않으니, 더욱 그것이 무함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너의 말이 옳은 듯하다."라고 말한 것도 또한 알 수 있다. 이것이 선사를 무함한 정도가 또한 어찌 "인허를 받으려는 생각이 있으셨다."와 "인허를 받도록 분부하셨다."라는 것보다 낮겠는가. 아, 선사를 무함하는 그의 습관이 본성이 될 정도로 익숙해져서 부딪치는 곳마다 모두 그렇기에 변박하자니 이루 다 변박할 수 없고, 주벌하자니 이루 다 주벌할 수 없다.제가 또 여쭙기를, "그렇다면 단지 백의관만을 착용한 것은 논설을 세워 그렇게 한 이유를 밝힐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하니, 선사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그런 것 같다." 하셨습니 다.당연히 해야 할 바를 알려준 다음에 또 그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밝혀주는 것이 선사께서 평소에 사람을 가르쳐왔던 성법(成法)인데, 하물며 변례에 대처하여 정밀한 의리를 얻은 것에 있어서야 더욱 어찌 성법을 버려 분명하게 후세의 사람을 가르치지 않았을 리가 있겠는가. 여기에서 또 "그런 것 같다[似然]"라는 두 글자는 선사의 말씀이 아님을 알 수 있다.후대의 사람들이 전후의 일이 대문 안의 뜰과 대문 밖의 길처럼 너무 차이가 나는 것이 반 상락하(半上落下)46)라고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선사의 이 일은 예법과 조령, 상례와 변례의 사이를 참작하여 그 중도와 정도를 얻은 것이니, 백 대 뒤의 성인을 기다려 물어보아도 의혹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를 만하다. 다만 그는 스스로 그것을 의심하여 후대의 사람도 자기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또 후대에 현인과 성인이 없을 것이라고 무함한 것이다.마침내 "단지 백의관만을 사용했다.……"를 삭제한 것입니다. 이는 삭제한 것이고 고친 것 이 아닌데도 고명(高明)께서는 도리어 고쳤다고 단죄하셨습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구구 한 저의 마음은 진실로 선사를 위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 선사를 무함하려는 것은 아니었 습니다. 이것은 알기에 어렵지 않는 정당한 예의(禮意)인 것 같은데도 또한 이놈의 죄안(罪 案)으로 삼으시니, 다른 것이야 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무릇 글이란 비록 삭제하고 고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삭제한 곳이 긍계(肯綮)와 안목(眼目)47)이 된다면 곧바로 다른 뜻을 이루어 고친 것보다 더 심함이 있게 된다. 지금 그가 "백의립" 운운의 열여덟 글자를 삭제했으니, 읽는 사람은 단지 현재 남아 있는 "제가 상복을 입은 것은 예전부터 미호(渼湖)48)의 전례를 따라 행한 것입니다."라는 말만 보게 될 것이니, 어찌 지금의 상에도 또한 상복을 입었다는 말로 보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설사 진실로 그의 말처럼 삭제한 것이고 고치게 한 것이 아니라 하다라도 이미 곧바로 다른 뜻을 성립시키는 것이 고친 것보다 더 심해졌다. 더욱이 '상여(相與)'의 '여(與)' 자를 어조사의 '여(歟)' 자로 고쳐서 결안(結案)의 말을 이루고 중단(中斷)의 자취를 감추었으니, 그의 이른바 "삭제한 것이지 고친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 누구를 속이려는 것인가? 하늘을 속이려는 것인가? 하늘과 사람은 끝내 속일 수 없을 것이니, 스스로 무함과 패악을 쏟아 낸 것일 뿐이다. 어찌 애잔하지 않는가. 그런데 오히려 진실로 선사를 위한 것으로 자처하니, 이런 심정이 추악하다. 이와 같은 것이 정당한 죄안인데, 그는 스스로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으니, 다른 것이야 더 무슨 말을 하겠는가. 純明妃服云云, 先師無恙日, 震奉質曰: "受服則受服, 不受服則不受服, 乃爲正當. 前則自處以 官人而受衰, 後則自同於士民而不受衰, 只用白衣冠, 無乃前後徑庭乎?"純明妃, 在禮原來臣民無服, 而自上令服之, 故先師參酌於禮令之間, 雖成白衣笠之服, 而不受衰. 禮無服, 故不受衰. 上令服. 故白衣笠. 此正處變而得其正者. 前之受衰, 以有服而當服故也, 後之不受衰而只用白衣笠, 以無服而爲有服故也, 非以一人之身隨時處變, 以官人士民而前後異之也. 此正孟子所謂"皆是"者也. 彼乃以前處官人後處士民之徑庭不正當駁之, 非惟無識, 亦甚不恭矣.先師曰: "爾言似然. 但今年病俱極, 雖父母喪, 莫能持衰."純明妃, 喪非在高宗甲辰乎? 是時, 先師以年則六十四, 以身則尙康强而出行湖南數百里外矣. 方在洪大妃喪中, 朔望服衰望哭於天巖禮川之間者, 衆目共覩. 然而不受衰於純明妃喪者, 豈非有精義深意者存乎? 彼乃云先師有"今年病俱極, 雖父母喪, 莫能持衰"之言, 據之年條事實, 已知其爲誣矣. 且聖人制禮, 雖七十者, 亦衰麻在身矣. 以若先師平日之謹禮, 乃於七十前身無疾病之時, 有"年病俱極, 莫持親喪衰"之說者, 萬不近理, 尤知其爲誣矣. 然則其曰"爾言似然"者, 亦可知已. 此之爲誣師, 亦何下於認意認敎? 噫, 彼誣師之習慣熟成性, 觸處皆然, 辨不勝辨, 誅不勝誅矣.震又稟曰: "然則只用白衣冠, 恐不須立說以明其所以然也." 先師又曰: "似然矣."旣告其所當然, 又明其所以然, 先師平日敎人成法, 況於處變禮而得精義也, 尤豈有舍成法而不明敎後人之理乎? 此又可知"似然"二字, 非先師言矣.後人得無疑其前後徑庭, 半上落下乎?先師此事, 旣參酌禮令常變之間而得其中正者, 則可謂百世以俟聖人而不惑矣. 特彼自疑之, 而意後人之亦與己同. 此又誣後世以無賢聖也.遂刪"只用白衣冠云云". 此刪而非改也, 高明乃罪之以改之. 雖然, 其區區之心, 眞出於爲師, 而非誣師也. 似此不難知之正當禮意, 亦爲此漢之罪案, 他尙何說?大凡文字, 雖刪而不改, 所刪者爲肯綮眼目, 則便成別意, 而有甚於改之. 今彼刪出"白衣笠"云云十八字, 則讀者但見見在"鄙人受衰, 從前依渼湖已例行之之語, 豈不看作今喪亦爲受衰之說乎? 然則雖使刪而非改眞如彼言, 已是便成別意甚於改之者, 而況改相與之與字, 作語助之歟字, 成結案之辭而掩中斷之跡, 則彼所謂刪而非改者, 將誰欺? 欺天乎? 天人竟不可欺, 則自寫誣悖而已, 豈不哀哉? 而尙自居以眞爲師, 是情可惡也. 如此正當罪案, 彼不自以爲罪, 則他尙何說? 순명비(純明妃) 순종(純宗)의 비(妃)인 순명효황후 민씨(純明孝皇后閔氏, 1872~1904)를 가리킨다. 전에는 홍 대비(洪大妃), 즉 헌종(憲宗)의 계비(繼妃)인 효정왕후 홍씨(孝定王后洪氏, 1831~1903)의 상을 가리킨다. 후에는 순명비(純明妃)의 상을 가리킨다. 모두 옳다 《맹자(孟子)》 〈공손추하(公孫丑下)〉에 진진(陳臻)이 맹자에게 제(齊) 나라에서 준 돈은 받지 않고 송(宋)과 설(薛) 나라에서 준 돈은 받은 것에 대해 지난번에 받지 않은 것이 옳다면 나중에 받은 것은 잘못이며, 나중에 받은 것이 옳다면 지난번에 받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고 묻자, 맹자가 "모두 옳다. 송 나라에 있을 때는 내가 장차 먼길을 떠날 일이 있었다. 길을 떠나는 자에게는 반드시 노자를 주는 법인데, 임금께서 '노자로 드립니다.' 하면서 주었다. 내 어찌 받지 않는단 말인가. 설 나라에 있을 때는 내가 경계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임금이 '경계할 일이 있으시다 들었기에 호위병을 두는 데에 쓰시라고 드립니다.' 하면서 주었다. 내 어찌 받지 않는단 말인가. 제 나라의 경우는 해당되는 명목이 없었다. 해당되는 명목이 없는데 주는 것은 재물로 매수하는 것이다. 어찌 군자로서 재물에 매수될 수 있겠는가.〔皆是也. 當在宋也, 予將有遠行. 行者必以贐, 辭曰:'餽贐.' 予何爲不受? 當在薛也, 予有戒心. 辭曰:'聞戒, 故爲兵餽之.' 予何爲不受? 若於齊, 則未有處也. 無處而餽之, 是貨之也. 焉有君子而可以貨取乎?〕"라고 답한 구절에서 인용한 말이다. 홍대비(洪大妃) 헌종(憲宗)의 계비(繼妃)인 효정왕후 홍씨(孝定王后洪氏, 1831~1903)를 가리킨다. 망곡(望哭) 곡을 할 장소에 가지 못할 경우 다른 곳에서 그 쪽을 향해 애곡(哀哭)하는 일을 말한다. 성인(聖人)이 …… 하였다 《예기(禮記)》〈곡례 상(曲禮上)〉에 "거상(居喪)의 예법(禮法)에 대해 말하면 …… 60세가 되면 몸을 훼손하지 말아야 하며, 70세가 되면 최마복을 입을 뿐,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며 집안에서 거처한다.〔居喪之禮, …… 六十不毁, 七十唯衰麻在身, 飮酒食肉, 處於內.〕"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말이다. 반상락하(半上洛下) 처음 절반은 위에 있다가 나중에는 아래로 떨어졌다는 뜻으로 처음에는 잘하다가 나중에는 잘못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긍계(肯綮)와 안목(眼目) 긍계는 뼈와 살이 접한 곳을 말하고, 안목은 사람의 감각 기관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곳이다. 전하여 사물의 핵심이나 요점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 1702~1772)의 호이다.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백춘(伯春)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김창협(金昌協)의 손자로, 모친의 배소(配所)에서 공부하였으며, 1725년(영조1)에 부조(父祖)가 신원(伸寃)된 뒤에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힘썼다. 저서로 《미호집(渼湖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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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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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권순명이 이원재에게 보낸 편지에 대한 변론 【1927년】 權純命與李遠齋書辨 【丁卯】 옹정(甕井)의 편지가 간행을 어지럽혔습니다.선사의 대고(大稿)는 도의(道義)가 실려 있는 것이니, 감삭(勘削)하여 인허를 받아 간행하는 것은 도의(道義)를 무너뜨리고 손상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김함재(金涵齋) 어르신께서 인허를 금할 것을 이미 계화도의 논의에서 밝히시고 청도(淸道)의 간행소(刊行所)49)에 회답[復書]하신 것은 바로 대고의 일을 완전하게 하고자 하신 것인데, 어찌하여 간행을 어지럽혔다고 하는가? 나는 선사의 도의가 그의 무리들에 의해 어지럽혀지고 파괴되는 것은 보았어도 함재 어른신이 간행을 어지럽힌 것은 보지 못했다.상제(祥祭)를 지낼 때에 호남 사람들이 석농(石農 오진영)을 선사를 무함했다는 것으로 꾸며 서 쫓아냈습니다.'꾸미다[構]'라는 것은 '없는 일을 꾸미는 것[構虛]'을 말한다. 오진영이 직접 "선사께서 홀로 계실 때 세상은 알 수가 없으니 문고를 스스로 헤아려서 하라고 명하셨다." 및 "저자(著者)는 상관이 없다." "깊이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 등의 말을 쓴 것이 과연 인허를 받으려는 뜻이 있었다고 선사를 무함한 실안(實案)이 아닌가? 【오진영이 서병갑(徐柄甲)에게 답한 편지에서 또 인허를 내서 문고를 간행하는 것을 사실 선사의 말없는 가르침을 살펴 따른 것이라고 운운한 것으로 여겼다는 내용은 당시에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쫓겨났다[逐]'라는 것은 '쫓김을 당한 것[被黜]'을 말한다. 그의 무리들은 매번 오진영이 쫓김을 당한 것에 대해 논변하여 말하기를, "김용승(金容承)과는 반열을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에 따로 망곡(望哭)50)을 행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갑자기 자신들의 입으로 '쫓겨났다'라는 글자를 불러내니, 이는 감추고자 했으나 감출 수 없었던 것인가?호남 사람들이 강(姜)의 고소에 대항할 때에 어르신께서 돈을 거두는 글의 초안을 지어서 격려하셨으니, 그렇다면 어르신은 호남의 근심이 아니라고 이를 것입니다.고소는 비록 강의 이름으로 했지만 사실은 오진영과 권순명이 한 것이다. 고소가 나온 뒤에 정재(靜齋)가 재앙을 두려워하여 오진영에게 편지를 보내 강에게 《절요(節要)》를 허락하자, 오진영이 그 편지를 검국(檢局)에 넣어서 증빙 서류로 삼았다. 서우일(徐禹一)【석환(錫煥)】이 통문에 참여했을 때에 권순명이 그것을 따지며 말하기를, "소장(訴場)에서 대적해 항변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고, 지금 또 〈급난록(急難錄)〉에 이름을 적은 것으로 원재를 힐난하니, 이것이 적확한 증거이다. 그의 무리들은 매번 "강의 고소는 나와 상관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이 편지로 보건대 어찌 이른바 "마음에 진실한 것은 밖으로 드러난다."라는 것이 아니며, 또 속담에 이른바 "봄 꿩은 스스로 운다."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호남 사람이 고소에 대항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우리는 우리의 의리를 지킨 것이고, 그는 스스로 일어났다가 스스로 소멸한 것이니, 이는 안팎의 나라 사람들이 함께 아는 것이다.인허(認許)든 묵허(默許)든 똑같이 허락을 받는 것인데 청도는 성토하고 현동은 새로 설치했 으며, 완주(完州)의 인허는 죄가 없고 서울의 인허는 죄가 있습니다.이 말은 완전히 사실을 무함한 것이고, 완전히 의리에 어긋난 것이다. 오진영이 옹정에게 답한 편지에서 말하기를, "장애에서 벗어날 방도가 있다고 들은 듯합니다. 그래서 이미 김경보(金敬父)에게 완산을 한번 다녀오도록 했습니다."라고 하였고, 서병갑(徐柄甲)에게 답한 편지에서 말하기를, "선사의 성대한 덕을 사람들이 진실로 함께 존숭하기 때문에 장사를 지낼 때 장애가 없었던 것처럼 지금 굴레에서 벗어날 계기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성기운(成璣運)51)은 누차 문고를 받들고 현동으로만 가겠다는 편지를 썼었다. 만약 현동과 청도가 인허를 받는 것이 동일하다면 이른바 "굴레에서 벗어난다."와 "장애가 없다."라는 것은 과연 무슨 일을 가리키는 것인가? 청도를 버리고 현동으로 간다는 이유도 또한 무엇 때문인가? 그가 비록 붓과 혀를 어지럽고 방자하게 놀려서 잠시 사람들을 현혹시킬 계책을 행하고자 한들 어찌 그렇게 될 수 있겠는가. 甕札撓刊先師大稿, 道義所載. 勘削認刊, 敗傷道義. 故涵齋金丈之禁認, 已發於華議, 復書於淸刊, 正欲完全稿事 何謂撓刊? 吾見先師道義, 被渠輩撓破, 未見涵丈之撓刊也.及夫祥時, 湖之構逐石農以誣師構者, 構虛之謂也. 震泳親筆先師獨命世不可知文稿自量爲之及著者無關不必深拘等說, 果非誣師認意之實案乎?【震泳答徐柄甲書, 又以出認刊稿爲其實原從先師不言之敎云云, 當時未及發見.】 逐者, 被黜之謂. 渠輩每辨震之被黜曰: "不可與金容承同列, 故別行望哭." 今忽自口招出逐字. 此欲掩不得者乎?湖之對姜訴也, 丈丈草其收錢文而勖之. 然則謂丈丈非湖難也.訴雖姜名, 其實則吳權之爲也. 訴出後, 靜齋畏禍, 遣書于吳, 許姜以《節要》. 吳以其書入檢局作證類. 徐禹一【錫煥】之參通也. 權質之曰: "能對卞于訴場乎?" 今又詰遠齋以題名〈急難錄〉, 此其的據也. 渠輩每言"姜訴於我不關". 今以此書觀之, 豈非所謂誠中形外者? 又非諺所謂春雉自鳴者? 湖之對訴, 是何說也? 吾守吾義. 彼自起自消. 此內外國人之所共知也.認許默許同一許, 而淸則討之, 玄則新設, 完認則無罪, 京認則有罪.此全誣事實, 全乖義理. 震泳答甕井書曰: "似聞有脫累之道, 故已令金敬父完山一行." 答徐柄甲書曰: "先師之盛德, 人固共尊. 故今似有脫絆之機, 如葬時無累." 成璣運累有奉稿專進之書. 若玄與淸同一認許則其所云脫絆無累者, 果指何事? 其所以舍淸進玄者, 亦爲何故? 彼雖亂肆筆舌欲爲暫時眩人之計, 豈可得乎? 청도(淸道)의 간행소(刊行所) 청도는 경북(慶北) 청도군(淸道郡)을 말한다. 간재의 아들인 전화구(田華九)와 오진영(吳震泳) 등이 이곳에 간행소(刊行所)를 설치하고 간재집을 간행하고자 하였다. 망곡(望哭) 곡을 할 장소에 가지 못할 경우 다른 곳에서 그 쪽을 향해 애곡(哀哭)하는 일을 말한다. 성기운(成璣運) 1877∼1956.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청도군 출신의 유학자로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자는 순재(舜在)이며 호는 덕천(悳泉)이다.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으로 1917년 5월 24일 호적령(戶籍令)에 반대하여 호적을 거부하였다. 저서로 《덕천선생문집(悳泉先生文集)》이 있다. 《한국 향토문화 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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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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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오진영이 사림에 화를 끼쳤을 때의 완행일기 震泳禍士日完行日記 을축년(1925) 6월 2일에 박창암(朴蒼巖) 어른과 친척 동생 사의(士毅)와 함께 검국(檢局)의 조사를 받았다.검사가 나에게 말했다."간재(艮齋)를 섬긴 지 몇 년이나 되었는가?""23년이다."또 물었다."오진영을 아는가?""안다.""강태걸(姜泰杰)을 아는가?""모른다."검사가 또 물었다."강태걸이 간재 사고(私稿)의 《정선(精選)》을 간행하는 것을 아는가?""그가 《절요(節要)》를 간행한다는 것을 들었다."검사가 바로 인허장(認許狀)을 내보이며 말했다."《절요》가 아니라 《정선》이다."또 통문(通文)을 나에게 보여주며 말했다."이 글을 지었는가?""그렇다.""최병심(崔秉心)이 정정(訂正)한 것이 맞는가?""내가 지었으면 나의 글인데, 어찌 정정한 사람을 묻는 것인가?"검사가 선사의 신해년(1911)과 계축년(1923)의 유서(遺書) 두 통을 꺼내서 보여주며 물었다."이것은 누가 쓴 것인가?""선사께서 쓰셨다.""두 종이의 글자의 필체가 같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비록 같지 않은 것 같지만 똑같이 선사께서 쓰셨다.""어찌하여 통문을 발송해 강태걸의 인쇄를 금지시켰는가?""선사의 유훈(遺訓)을 지키기 위해서다.""선사의 가르침 중에 옳지 못한 것이 있어도 또한 따르는가?"스승은 의리로 사람을 가르치니, 원래부터 옳지 못한 가르침은 없다.""이른바 '유훈을 지킨다.[守訓]'는 것은 무엇인가?""선사께서는 유서에서 '간행ㆍ배포를 청원하는 것은 결단코 자신을 욕되게 하는 것이니, 맹세코 말명(末命 유언(遺言))을 지키고 부디 억지로 남의 말을 따르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오진영이 '인허를 받으려는 의향이 있으셨다'거나 '인허를 받도록 분부하셨다'는 것으로 선사를 무함했고, 또 그의 제자인 강태걸로 하여금 간행ㆍ배포를 청원하도록 했다. 이는 선사의 유훈을 어기는 것이고 선산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다. 만약 죄를 성토하고 간행을 금지시키지 못한다면 선사의 도의(道義)는 영원히 어둡게 되어 자손과 문인이 한 사람도 없게 될 것이다."검사가 말하기를 "선생의 유서는 한 때의 감정에서 나온 것이고, 강태걸이 인허를 받아 간행하는 것은 문자(文字)를 백세토록 전하는 것이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하니, 내가 말했다. "선사의 문자가 중요한 이유는 도의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유훈을 어긋나게 하고 마음을 몰라서 도의가 밝혀지지 않게 한다면 문고가 비록 전해지더라도 어찌 선사에게 도움이 되겠는가. 또한 글이 원본에 의지하지 않고 삭제해 빼거나 고쳐 지은 것이 많다. 또 책에 표시하기를, '저작자(著作者) 강태걸'이라 한다면 이는 강태걸의 문고이지, 어찌 간옹(艮翁 간재)의 문고라 하겠는가." 검사가 말하기를 "총독부(總督府)의 인허장이 이와 같은데 '패적(悖賊)'이라 하고, '절대로 사서 읽지 말라.'고 하였으니, 하나는 명예손해(名譽損害)이고, 하나는 업무방해(業務妨害)이다." 하니, 내가 말했다. "패적은 오진영을 가리키는 것이고, 강태걸이 아니다. 강태걸이 판매의 인허를 받고 널리 알려 말하기를, '오진영에게 알리니, 오진영이 허락했다.'라고 하였고, 인허를 금지한 통문에서 '오진영이 자신의 무리인 강태걸에게 시켰다.'라고 하였다. 사실이 이와 같고 문맥이 이와 같으니, 오진영이 주인이고 강태걸은 종이다. 무릇 일이란 주인이 그 공과 죄를 책임지는데, 종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또 오진영은 선사의 명예를 손상시키고 해친 자이니, 명예를 손상시킨 데 대한 법률은 오진영에게 해당시킬 수 있다. 업무방해도 또한 옳지 않다. 세상에 경영할 만한 업무가 매우 많은데 굳이 선사께서 유훈으로 인허를 받지 말라는 문고를 영업의 물건으로 삼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내가 금지시킨 것은 선사의 유훈을 지키는 것이니, 영업을 방해했다고 말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검사가 말하기를 "도덕상으로 말하면 선사의 유훈을 지키는 것이 진실로 아름답지만, 법률상으로 말하면 죄에 저촉되는 것이다." 하니, 내가 말했다. "법률은 도덕으로 인해 세워지는 것이니, 도덕과 법률이 어찌 둘이 될 수 있겠는가." 검사가 말하기를 "작용하는 곳은 둘이 된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충고의 말을 하는데, 마음을 돌리고 견해를 고쳐라. 그렇지 않으면 끝내 법률에 저 촉되어 몸은 고초를 받고, 집안은 기울어져 파산하게 될 것이다. 뒤늦게 뉘우친다 한들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하니, 내가 말했다. "선사의 무함을 변론하며 선사의 유훈을 지키고 죽는다면 죽는다 한들 또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검사가 내 앞에 종이와 붓을 놓으며 말하기를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어라."라고 하자, 내가 말했다. "무슨 일인가?" 검사가 말하기를 "피차가 똑같이 답한 말을 이 종이에 써서 증명하려는 것이다." 하니, 내가 말했다. "나는 통문을 지은 사람이고, 나의 말은 모두 통문 안에 있다. 다시 무슨 글로 증명할 것이 있겠는가." 검사가 할 말이 없게 되어서야 내가 나오게 되었다. 사의(士毅)는 대략 질문이 나와 같되 통문을 인쇄해 배포한 일에 대해 더 자세하였고, 창암(蒼巖) 어른은 또 사의보다 간략하였는데, 모두 도장을 찍지 않고 나왔으나 앞으로의 일은 예측할 수 없다.아, 오진영 적도들의 재앙이 여기에 이르렀단 말인가.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단지 이치에 순응할 뿐, 또한 다시 어찌하겠는가.검사가 먼저 오진영을 아느냐고 묻고, 다음에 강태걸을 아느냐고 물은 이것을 보면 검사는 이 고소에 대해 이미 오진영이 주체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곳의 여러 사람이 조사를 받을 때에 모두 "어찌하여 고소의 주체인 오진영을 불러 힐문하지 않고, 유독 우리들에게만 묻는 것인가?"라고 말하자, 검사는 "비록 오진영이 주관했다 하더라도 고소장에 열거된 사 람은 그의 이름이 아니기 때문에 부르지 않은 것이다. 만약 이곳 사람 중에서 반대로 오진 영을 고소했다면 당연히 불러서 물을 것이다. 이것이 법률의 상례이다."라고 하면서 운운하 였다. 대체로 검사도 또한 분명하게 "고소의 주체가 오진영이다."라고 하였는데, 음성(陰城 오진영)을 비호하는 자들은 억지로 "강태걸이지 오진영이 아니다."라고 하니, 이것이 어찌 말이 되겠는가. 이 해 섣달 그믐날에 추가하여 기록하였다. 乙丑六月初二日, 與蒼巖朴丈族弟士毅同被檢局調査. 檢問余曰; "事艮齋幾年?" 曰: "二十三年." 又問: "知吳震泳乎?" "知之." "知姜泰杰乎?" "不知." 檢又問: "知姜泰杰營刊艮齋私稿精選乎?" 曰: "聞其營刊節要矣." 檢乃出示認許狀曰: "非節要, 乃精選也." 又以通文示余曰: "作此文乎?" 曰; "然." 檢曰: "崔秉心訂正然乎" 曰: "旣吾作則吾文, 何問訂正?" 檢出先師辛亥癸丑遺書二度示之曰: "此誰筆也?" 曰: "先師筆." 曰: "二紙字體不同何也?" 曰: "雖似不同, 同是先師筆." 曰: "胡爲發通禁姜印?" 曰: "爲守先師遺訓也." 曰: "先師之敎有不是者, 亦可從歟?"曰: "師者以義理敎人, 元無不是之敎也." 曰: "所謂'守訓'者何也?" 曰: "先師遺書曰: '請願刊布, 決是自辱, 誓守末命, 愼勿勉從.' 吳震泳旣誣先師以認意認敎, 又使其徒弟姜泰杰請願而刊布, 是違先師訓, 昧先師心. 若不討罪禁刊, 先師之道義永昧而無子孫門人一人也." 檢曰: "先生遺書出於一時之感情, 姜泰杰認刊, 傳文字於百世也. 豈非好事乎?" 余曰: "先師文字所以爲重者, 以其有道義也. 若悖訓昧心, 使道義不明, 則文稿雖傳, 何益於先師? 且文不依本, 多所刪拔改竄. 又標書曰'著作者姜泰杰', 則是姜稿也, 何以云艮翁稿?" 檢曰: "總督府認許狀如此, 而曰'悖賊', 曰'切勿購讀', 一則名譽損害, 一則業務妨害." 余曰: "悖賊是指吳震泳, 非姜泰杰. 泰杰認販廣告曰: '告吳震泳, 震泳諾之.' 禁認通文曰: '吳震泳使其徒姜泰杰.' 事實如此, 文理如此, 吳, 主也, 姜, 僕也. 凡事主任其功罪, 僕何與焉? 且震泳是損害先師名譽者, 損名之律, 震泳可以當之. 業務妨害亦不然. 世間可營之業甚多, 而其必以先師遺訓勿認之稿作營業物者何也? 吾之禁止, 守師訓也. 不當謂害業也." 檢曰: "以道德上言之, 守師訓, 固美矣, 以法律上言之, 爲抵罪." 余曰: "法律因道德而立者, 道德法律豈有二乎?" 檢曰: "用處二也." 又曰: "吾爲忠告之言, 請回心改見. 不然, 終至抵律, 身受苦楚, 傾家破産, 後悔莫及." 余曰: "辨師誣守師訓而死, 死亦何恨?" 檢置紙筆於前曰: "請置名捺章." 余曰: "何事?" 檢曰: "將書彼此同答之辭于此紙以證之." 余曰: "吾製通者也. 吾之言皆在通文中, 復何書證之?" 爲檢無言, 余乃出. 士毅則略問如吾, 而於通文印布事加詳, 蒼丈則又略於士毅, 而皆不捺章而出. 然前頭之事不可測. 嗚呼! 震賊之禍, 乃至此乎? 事已至此, 但當順理而已, 亦復何哉?觀此檢之先問知吳震泳, 次問知姜泰杰, 則檢於此訴, 已認做吳爲主矣. 故此中諸人之被査時, 皆言"胡不呼詰訴主吳震泳, 而獨問我輩爲." 檢謂"雖則吳主, 擧狀者, 非其名, 故不呼. 若自此 中反訴吳, 則當呼問. 此爲法律常例"云云. 蓋檢亦明言: "訴主是吳也." 而護陰者强謂"姜也, 非吳也." 是豈成說乎? 是歲除日, 追識.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집부

또 又 내가 선사를 위해 무함을 변론하는 일로 오진영의 혈수(血讐)가 되자, 오진영은 자신의 문도(門徒)인 강태걸로 하여금 고소를 일으키게 하였다. 올해 여름과 가을 사이에 이미 전주(全州) 검사국(檢査局)에 세 차례 불려가 문답(問答)을 하였다. 원통하고 분하며 부끄럽고 미운 마음을 어찌 이루다 말할 수 있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나의 일은 의(義)이고, 죄가 아니며, 당시의 법도 또한 이른바 '법'이다. 거의 끝났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생각지 않게 오진영의 칼날은 더욱 날카로웠고 당시의 법은 측량하기 어려웠다. 그러다 11월 27일에 또 검사의 호출이 있자 반드시 일이 있게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같은 기한에 호출을 당한 사람은 족숙(族叔) 창(鬯)ㆍ함(涵) 두 어른과 족제(族弟) 사의(士毅)ㆍ 소상(蘇庠) 어른과 금재(欽齋) 형제였다. 기한이 되었을 때에 금재의 동생인 경집(敬執)【병철(秉哲)】과 사의만이 먼저 갔다가 돌아와서 말하기를 "검사가 말하기를, '만약 강태걸과 원만하게 화해하지 않으면 반드시 법을 사용할 것이다.'라고 하며 물러가서 협의하게 하였습니다. 이른바 '원만하게 화해하라.'는 것은 통문을 고쳐 짓는 것과 '절대로 사서 읽지 말라[切勿購讀]'라는 네 글자를 취소하는 것입니다." 하였다.나는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이와 같다면 이른바 '무함을 변론하고 유훈을 지킨다.'는 것이 도리어 유훈을 저버리고 무함을 사실로 만드는 것이 되니, 차라리 죽을지언정 허락할 수 없다." 하였다. 이에 한 통의 작은 글을 지어서 어려움을 함께한 여러 공들에게 돌려가며 다음과 같이 고하였다. "들으니 검사가 즉시 강태걸과 화해하지 않으면 반드시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바로 우리들이 죽음을 바칠 때입니다. 죽음을 바치면 선사가 있게 될 것이고 화해를 허락하면 선사가 없게 될 것입니다. 선사가 있는 것과 선사가 없는 것 사이에서 사람과 짐승으로 나뉘게 되었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이에 12월 4일부터 때때로 현재 본군(本郡) 덕천면(德川面)52)에 있는 만종서재(萬宗書齋)53)에 머물렀는데, 10일 닭이 처음 울 때쯤에 이르러서 두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내가 한창 학도(學徒) 20여 인과 함께 깊이 잠을 자고 있다가 놀라 깨고서 일어나 묻기를 "이런 칠흑 같은 밤에 뭐하는 사람인데 방문하셨소?" 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이평면(梨坪面)54) 주재소(駐在所)의 일본과 한국 순사(巡査)이다. 전주(全州)의 검사국(檢事局)에서 잡아들이라는 통지(通知)가 있었기 때문에 왔다." 하였다. 나는 이것이 오진영과 강태걸이 만든 재앙일 것이라 생각하였다. 검사의 명령이 이처럼 화급(火急)하니, 지금 가면 반드시 큰 치욕을 당할 것이고, 이 치욕을 내가 맹세코 받지 않으려면 단지 죽음만이 있을 것이다. 선사를 위해 죽는다면 죽는다 한들 다시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다만 한스럽게 여기는 것은 세상의 도가 망극할 뿐이다. 이에 내가 순사에게 말하기를 "하늘이 어둡고 눈이 쌓여서 피차가 모두 길을 떠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니, 하늘이 밝아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소?" 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그렇게 하는 것이 참으로 좋겠지만 검사가 오전까지 도달하도록 명령했다. 이를 어기면 나를 단죄할 것이니, 부디 양해하여 늦추지 말라."하였다.내가 또 이미 그들과 일행이 되었는데 어찌 굳이 너희들에게 죄를 짓게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마침내 길에 올랐다. 길을 나서 영달현(永達峴)을 지나 포자동(匏子洞)에 이르자 순사에게 말하기를 "선대의 묘가 여기 가까운 곳에 있으니, 내가 성묘하고 오겠소." 하니, 순사가 허락하고 공손히 묘 옆에 선 채 서로 지점을 가리켜며 말을 나누었다. 내가 그제서야 8대조비(代祖妣)ㆍ6대조고(代祖考) 및 조고비(祖考妣)의 묘에 나아가 절을 올리고, 끝으로 선고비(先考妣)의 묘에 이르러선 절을 마치자마자 나도 모르게 목이 메도록 통곡하였다. 선인(先人)께서는 불초한 나를 가르치다 학업을 마치는 것도 보지 못하셨고, 불초한 나는 학문을 이루기도 전에 먼저 선사의 일을 위해 죽을 것을 생각하니, 두산(斗山)55)은 얼굴을 찡그리고 달천(達川)은 흐느껴 울고자 하는 듯하였다.성묘를 마치고서 또 앞서 걸어갔다. 길은 험하고 날은 컴컴했으며, 눈에 발이 빠지고 바람에 귀가 떨어져 나갈 듯하였다. 열 번 구르고 아홉 번 넘어지면서 천신만고 끝에 이평면(梨坪面) 주재소(駐在所)에 도착하니 동녘은 아직도 밝지 않았다.주재소의 방이 쇠처럼 차가워 길을 따라왔던 최민렬(崔敏烈) 이하 20인과 둘째 아이 형태(炯泰)가 모두 추위에 벌벌 떨며 소름이 일자 순사가 사람을 시켜 온돌에 숯을 태우게 했다. 나는 그제서야 붓과 벼루를 가져오게 하여 옷의 띠에다 "오늘의 일은 단지 무함을 변론하고 유훈을 지켜서 지하로 돌아가 선사를 뵙는 것만이 있을 뿐, 다른 것은 말할 것이 없다."라고 크게 써서 검사에게 답할 말을 준비했다. 또 글을 써서 세 아우와 세 아들에게 분부하고, 또 나를 따라 배운 제자들과 희숙(希淑)ㆍ자유(子由)에게도 글을 써서 고하였다. 대체로 자신의 분수에 따라 반드시 죽을 뿐이다라는 내용이었다. 날이 이내 밝아졌다. 여호(汝昊)ㆍ여직(汝直)ㆍ형복(炯復) 및 재종숙(再從叔) 치현(致賢)ㆍ삼종형(三從兄) 경빈(京賓)ㆍ조자정(趙子貞) 아우가 와서 보았다.순사가 또 길을 재촉하기에 앞장서 나아갔다. 신태인역(新泰仁驛)에 이르러 전송하던 가족들은 돌려보내고, 최민렬(崔敏烈)ㆍ김상락(金常洛)ㆍ김용락(金庸洛)ㆍ나인상(羅仁相)ㆍ최정주(崔丁柱)ㆍ이병기(李炳基) 및 자정ㆍ형복만이 나를 따라 기차를 탔다. 한낮이 지나서야 전주(全州)에 도착했다. 검사국에 들어가니 검사가 말하기를 "만약 강태걸과 더불어 양조(兩造 원고와 피고)가 서로 화해하여 원만하게 해결한다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법률대로 할 것이다." 하였다. 나는 화해의 말에 대해서는 마치 듣지 못한 척 하고서 단지 말하기를 "이른바 '법률'이란 것이 무슨 법률이오?" 하니, 검사가 말하기를 "영업을 방해한 데 따른 법률이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간재 선생께서 유서로 인허를 금한 것이 의리이다. 비록 친한 문인 자손(子孫)이라 하더라도 의리를 파괴하고 문고를 간행해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강태걸이 문인의 문인으로서 자기의 이익만을 꾀하여 유훈을 어기고 문고를 간행함으로써 간재 선생의 의리를 파괴하는 것이 어찌 온당한 일이겠는가. 선생께서 인허를 금지하면서 의리를 지키신 문고는 원래 강태걸이 이익을 꾀하는 영업의 물건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문고가 영업의 물건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상, 방해의 유무(有無)를 묻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이 법률을 침범한 것인지 모르겠다." 하니, 검사가 말하기를 "피고의 생각은 그럴 듯하지만, 법률가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말을 만들어 선사를 무함하고 유훈을 어겨 문고를 간행한 자는 오진영이다. 이 때문에 통문을 보내 오진영을 성토한 것이다. 오진영이 선사의 명예를 손상시킨 사람이니, 명예를 손상시킨 데 따른 법률은 오진영이 해당될 것이다." 하니, 검사가 말하기를 "도덕상으로 말하면 선사의 유훈을 지키는 것을 어느 누가 훌륭하지 않다고 말하겠는가. 법률상으로 말하면 법률을 침범한 것이 된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천하에 어찌 도덕과 어긋나는 법률이 있겠는가." 하니, 검사가 말하기를 "작용하는 곳에는 다름이 있다." 하고서 마지막으로 검사가 말하기를 "만약 화해하지 않는다면 필연코 법률대로 할 것이다. 피고의 생각이 어떠한지 하나를 말하라. 피고는 통문을 지어 주모한 사람이기 때문에 특별히 불러 물은 것이다. 오늘이 바로 법률로 판결하는 날이니, 두 가지 사이에서 빨리 하나를 말하라." 하자, 내가 얼굴빛을 바로하고 천천히 말하기를 "나는 단지 무함을 변론하고 유훈을 지키는 것만을 알 뿐이다." 하고서 옷의 띠에 써 놓았던 것을 보여주며 말하기를 "나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이것을 보라." 하고 그것을 한 번 읽으니, 검사와 서기(書記)가 서로 돌아보며 말이 없었다.처음에는 조서를 받고, 다음에는 종이와 붓을 늘어놓았으나 끝까지 한 마디 말도 기록하지 않자 나가게 하였다. 오늘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은 실로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어쩌면 더 큰 치욕을 주려고 우선 느슨하게 하는 것인가?저녁 식사를 마친 뒤에 여안(汝安)이 허둥대며 넘어질 듯이 달려와 도착한 것을 보니, 그가 애를 태웠음을 알 수 있었다. 또 송기창(宋基滄) 아이가 뒤따라 도착하여 나를 놀라게 하고 감동시켰다. 이 아이는 올 해 나이가 15세인데 어제 가벼운 병세가 있어 밤에 서재에 오지 못했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비로소 내 일을 듣고는 밥상을 대하고서도 먹지 않은 채 목이 메도록 통곡을 하며 말하기를 "우리 스승의 지조(志操)는 내가 이미 내심 알고 있다. 오늘 행차에 만약 치욕을 당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필연코 목숨을 버리실 것이니, 우리 스승께서는 아마도 이미 저세상으로 떠나셨을 것이다." 하였다. 결국에는 소매가 넓은 옷과 진흙 묻은 신발을 신고서 홀로 길에 오르며 말하기를 "나는 우리 스승과 진퇴를 함께할 것이다." 하고서는 험난한 백 리 길을 걸어 칠흑 같은 밤에 이곳에 도착했다. 병든 몸을 이끌고 추위를 무릅써가며 두 끼니를 먹지도 못한 채 슬픔과 근심으로 수척해진 그의 모습에 사람들이 모두 떠들썩하게 찬탄하면서 말하기를 "기이하구나. 이 아이는 나이가 어린데도 스승을 존경하는 정성이 어쩌면 그렇게도 도타운 것인가." 하면서 아울러 나에게 축하하며 말하기를 "어떤 가르침을 폈기에 이렇듯 감동해서 따르게 하였습니까?" 하니, 이에 대해선 부끄럽기만 하다.11일. 따라 왔던 제군 및 자정ㆍ형복이 모두 떠났다. 나는 어제 풍한(風寒)이 빌미가 되어 거의 떨쳐 일어나 움직이기 어려웠다. 이로 인해 민열ㆍ기창과 함께 여관에서 몸을 조리하였다. 친족 사람 명익(明益)ㆍ문경(文卿)ㆍ명중(明中)ㆍ김군 백온(金君伯溫)이 모두 앞뒤로 보러 왔는데, 대체로 내가 구속과 치욕을 당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12일. 내가 집으로 돌아왔다. 정암(貞庵)ㆍ함재(涵齋)ㆍ견암(堅庵)ㆍ나재(懶齋)ㆍ신헌(愼軒) 및 상제 최여중(崔汝重)이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나를 보았다. 희숙(希淑) 및 임정노(林貞老)도 또한 완주에 도착해서 나를 위로하려고 했는데, 서로 길이 어긋나 보지 못했다. 【추후에 들으니 검사가 사람들에게 내가 옷 띠에 쓴 일을 이야기하면서 "도는 본래 광대한데, 김모는 이처럼 좁으니, 내가 어찌할 수 없었다."하였다고 한다.】아, 고금 천하에 어찌 오늘날의 문고와 같은 일이 있단 말인가. 옛날 사림의 화는 이단의 부류에 있었는데 오늘날 사림의 화는 동문에 있다. 옛날 사림의 화는 자기 나라에 있었는데 오늘날 사람의 화는 외국의 힘을 빌려 일어난다. 옛날 사람의 화는 단지 도거(刀鋸)로 몸을 상하게 하거나 귀양 보내는 형벌이 있었는데 오늘날 사림의 화는 머리를 깎거나 몸을 노역하는 형벌이 있다. 옛날 사림의 화는 그래도 말할 수 있었는데 오늘날 사람의 화는 말할 수 없다. 옛날에 의리를 취함은 그래도 쉬웠는데 오늘날에 의리를 취함은 더욱 어렵다.아, 무함을 변론하고 유훈을 지키는 것은 본래 제자의 직분인데, 공교롭게도 이렇듯 매우 험악한 오진영ㆍ강태걸과 원수인 오랑캐가 권력을 잡은 때를 만나 온갖 모욕과 분노, 억울함을 실컷 받았으니, 무슨 사람의 일이 이렇단 말인가. 비록 그렇지만 오히려 권면할 만한 일이 두 가지가 있으니, 위로는 선사를 저버리지도 않았고, 아래로는 내 몸을 잃지도 않았다. "화해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과 "머리가 깎이는 치욕을 받지 않았다."는 것, 이 두 가지 중에 하나라도 혹 잃었다면 짐승이요,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니, 어찌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몽매한 선비의 스승에 지나지 않는데, 송기창은 일개 아이임에도 오히려 나의 마음을 알아주었다. 간옹은 도학의 종장(宗匠)인데, 오진영은 학문에 노숙한 사람인데도 꺼리지 않고 간옹을 무함하고 배반하였다. 아, 사람의 선악이 이처럼 서로 동떨어질 수 있단 말인가? 余以爲師辨誣事, 爲吳震泳血讐. 使其門徒姜泰杰, 擧行告訴. 今年夏秋間, 已被全州檢査局三呼問答, 痛憤羞惡, 何可勝言? 雖然, 吾之事, 義也, 非罪也. 時之律, 亦所謂'法'也. 意謂汔可已矣. 不料震鋒益銛, 時律叵測. 乃於十一月二十七日, 又有檢呼, 可知其必有事在. 同期被呼者, 族叔鬯涵兩丈及族弟士毅蘇庠丈及欽齋兄弟. 及期惟欽齋弟敬執【秉哲】與士毅先往而還曰: "檢曰: '若不與姜泰杰圓滿和解, 必有律.' 使之退去協議. 所謂'圓滿和解'者, 改作通文及取消'切勿購讀'四字云." 余聞之, 曰: "如此則所謂'辨誣守訓'者反爲背訓實誣, 寧死, 不可許也." 乃作一小文, 輪告同難諸公曰: "聞檢言不卽和杰, 必有事在. 此正吾人致死之秋也. 致死有師, 許和無師, 有師無師之間, 人獸判矣, 可不畏哉?" 乃十二月初四日也, 而時見住本郡德川面萬宗書齋. 至初十日鷄初鳴, 有二人訪余. 余方與學徒二十餘人幷熟寢, 驚寤起問曰: "如此黑夜, 何人來訪?" 彼曰: "吾等梨坪面駐在所日韓巡査, 自全州檢事局有拿引通知, 故來." 余思此震杰之禍也. 檢令火急若此, 今行必遭大辱. 此辱我誓不受, 則只得有死而已. 爲師而死, 死復何恨? 但所恨者, 世道之罔極也. 乃謂巡査曰: "天黑雪積, 彼此俱不堪行, 待天明如何?" 彼曰: "此固好矣. 但檢令午前到達, 違此罪我, 幸見諒勿緩." 余又思旣爲一行, 何必爲若屬罪也? 遂登道. 行過永達峴, 至匏子洞, 謂巡査曰: "先墓在此近, 吾拜省而來." 巡査許之. 拱立墓傍, 相與指點有言. 余乃進拜八代祖妣六代祖考及祖考妣, 終至先考妣墓, 則拜訖而不覺痛哭失聲, 念先人之敎育不肖而未見卒業, 不肖之學未及成而先死師事, 斗山爲嚬, 達川欲咽. 省畢又前行, 路險天黑, 雪沒足, 風割耳, 十顚九倒, 千辛萬苦, 到棃駐, 東方未明. 駐房如鉄, 從行崔敏烈以下二十人及次兒炯泰, 皆寒戰生粟. 巡査使人溫突熾炭. 余乃令進筆硯, 大書衣帶曰: "今日之事, 只有辨誣守訓, 歸拜先師於地下而己, 他無可言者", 以備答檢之辭, 又作書分付三弟三子, 又書告從學諸子及希淑子由. 蓋以自分其必死也已. 而天乃曙. 汝昊汝直炯復及再從叔致賢三從兄京賓趙弟子貞來見. 巡査又促行前進, 至新泰仁驛, 送家族歸之. 惟崔敏烈金常洛金庸洛羅仁相崔丁柱李炳基及子貞炯復隨余上車. 日過午, 到全州. 入檢事局. 檢曰: "若與姜泰杰兩造相和, 圓滿解決則已, 不然有律." 余於和解之說, 若不聞也者, 但曰: "所謂'律'者, 何律也?" 檢曰: "營業妨害律也." 余曰: "艮齋先生之遺書禁認義也. 雖親門人子孫, 不可壞義而刊稿. 況姜泰杰以門人之門人, 爲自己之牟利, 違訓刊稿, 而破艮齋先生之義, 何所當乎? 先生禁認守義之稿, 元不當爲姜泰杰牟利之營業物也. 稿旣不當爲營業物, 則妨害有無, 不當問也. 故吾則不知其爲律也." 檢曰: "被告思想則似然矣, 法律家思想則不然也." 余曰: "造言誣師, 違訓刊稿者, 吳震泳也. 所以發通討吳也. 吳是損害先師名譽者也, 損害名譽之律, 吳可以當之也." 檢曰: "以道德上言, 則守師訓, 孰不曰'不善'? 以法律上言, 則爲犯律." 余曰: "天下安有乖道德之法律乎?" 檢曰: "用處則有異也." 最後檢曰: "若不和解, 必然有律. 被告之意如何, 請一言之. 被告是製通而主謀者. 故特呼問之. 今日乃法律判決之日, 二者之間, 斯速一言." 余乃正色徐言曰: "吾則但知辨誣守訓而已." 以衣帶所書者示之曰: "欲知我意, 請視此也." 爲之一讀, 檢與書記相顧無言. 初以受調, 次設紙筆, 終不錄一言, 使之出去. 蓋今日之無事, 實意慮不到也. 豈以將加大辱, 故姑緩之歟? 夕飯後, 汝安倉皇顚倒而到. 其焦心可想. 又宋童基滄隨到, 令人驚感. 此童今年十五昨有微恙, 夜不到齋, 至朝始聞吾事, 對案不食, 失聲痛哭曰: "吾師志操, 吾已竊覸矣. 今行若不免遭辱, 必然舍生. 吾師殆已逝矣." 遂以廣袖泥鞋, 隻行登道曰: "吾當與吾師同進退." 間關百里, 黑夜抵此. 其扶病觸寒, 二頓不食, 悲憂瘦瘠之狀, 人皆嘖嘖嘆賞曰: "異哉. 此子幼齡, 尊師之誠, 何其篤也?" 幷賀於余曰: "行何敎術而致此感服?" 是則可愧也. 十一日. 從行諸君及子貞炯復皆去. 余爲昨日風寒所祟, 殆難振作, 因與敏烈基滄調理于旅館. 族人明益文卿明中金君伯溫皆先後來見, 蓋意我之遭拘辱也. 十二日, 余歸家. 貞庵涵齋堅庵懶齋愼軒及崔哀汝重來待見余. 希淑及林貞老, 亦到完慰我, 而交違未見. 【追聞檢向人道余帶書事曰"道本廣大, 金某如此狹隘, 吾無如何"云】 嗚呼! 古今天下, 寗有今日之稿耶? 古之士禍在異類, 今之士禍在同門, 古之士禍在本國, 今之士禍借外國, 古之士禍, 只有刀鋸竄謫, 今之士禍, 乃有髠首役身, 古之士禍, 猶可說也, 今之士禍, 不可說也, 古之取義, 尙可易也, 今之取義, 更可難也. 噫, 辨誣守訓, 固弟子職分, 巧爲逢此至險之震杰讐夷之執命, 飽受萬端侮辱憤忿抑鬱, 此何人事? 雖然, 尙有二事可勉, 上不負先師, 下不失吾身, 曰"不許和解"也, "不受髠辱"也, 于此二者, 一或失焉, 獸而非人, 可不念哉? ○吾不過蒙士師也. 宋基滄一童行也, 尙能知吾之心. 艮翁乃道學宗匠. 震泳老於學者, 而不憚誣倍艮翁. 噫, 人生善惡相懸, 乃如此乎? 덕천면(德川面) 현 전라북도 정읍시 중서부에 있는 면이다. 만종서재(萬宗書齋) 현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우덕리에 위치해 있다. 이평면(梨坪面) 현 전라북도 정읍시 서북부에 있는 면이다. 두산(斗山)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덕천면·소성면에 걸쳐 있는 두승산(斗升山)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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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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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오진영이 오사익에게 답한 편지에 대한 변론 【1938년】 吳震泳答吳士益書辨 【戊寅】 제가 서(徐)에게 답한 편지에서 맨 앞에 했던 말은 그가 살심(殺心)을 가지고서 온 나라에서 미친 듯이 부르짖고 어지럽게 떠들어대기에 공연히 선사를 무함한 난적(亂賊)이라는 오명을 받기보다는 사실대로 바르게 말하여 중요한 것을 끌어다가 억눌러 가라앉히는 것이 낫겠다 고 내심 생각하여 마침내 말을 했던 것입니다.그가 살심을 가지고서 온 나라에 미친 듯이 부르짖고 어지럽게 떠들어댔다는 것은 무슨 일을 가리켜 말한 것인가? 만약 갑자년(1924) 가을에 통문을 보내 성토한 것을 가리킨다면 오진영이 서에게 답한 편지에서 "선사의 말없는 가르침을 살펴 따른 것이다."며 운운한 것이 임술년(1922) 겨울에 있었으니, 이 당시에 어느 누가 선사를 무함한 난적이라고 그를 성토했었던가. 단지 인허를 받는 것을 금지하는 함재(涵齋)의 한 통의 편지만이 있었을 뿐이다.대체로 "일찍이 인허를 받으려는 의향이 있으셨다."와 "스스로 헤아려서 해라.", "굳이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 "말없는 가르침" 등의 말은 아직 듣지 못했으니, 당시에 어찌 선사를 무함한 난적으로 그를 단죄할 리가 있겠는가. 평소에 사실을 환술을 부리듯 바꾸고 문자를 춤을 추듯 희롱하는 그의 습성이 언제나 이와 같으니, 이것은 아마도 태아 때부터 타고난 병으로 고치기 어려운 것이다.그가 비록 '의(義)'를 빌리긴 했으나 어찌 일찍이 꿈에서라도 '의'라는 글자의 진면목 비슷한 것을 보았겠습니까. 스스로 무함과 패악을 써서 스스로 선사에게 누를 끼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그가 미친 듯이 부르짖고 어지럽게 떠들어댄 일이 없었다면 어느 누가 인 허를 받는 것을 죄로 여기겠습니까. 사계(沙溪)와 우암(尤菴) 등 여러 선생의 문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간행ㆍ배포를 청원하는 것은 결단코 자신을 욕보이는 것"이라는 선사의 유서(遺書)가 의가 아니겠는가. 선사의 유서를 베껴서 무함을 변론하는 것이 의가 아니겠는가. 유서를 베껴서 무함을 변론하는 것을 스스로 무함과 패악을 쓴 것이라고 한다면 말이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어찌 사슴만 쫓고 태산은 보지 못한 격이 아니겠는가.신해년(1911) 유서는 반드시 생전에 문고를 간행할 것을 요청받음으로 인해 나왔을 것입니 다. 그래서 제가 감히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임술년(1922) 3월 16일에 어찌 하여 유서로 가르침을 보이지 않으시고 도리어 "스스로 헤아려서 하라."고 말씀하셨겠습니 까."간행ㆍ배포를 청원하는 것은 자신을 욕보이는 것"이라는 것은 스스로 당신께서 살아계실 때의 일을 논한 것이고,【전기진(田璣鎭)에게 들으니 왕도(旺島)에서 직접 모실 때에 문고를 간행할 것을 청하자 이런 가르침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업자(業者)가 대신 인허를 받는 다면 구애될 것이 없다."는 것은 병암(炳庵)께서 돌아가신 뒤의 일을 논한 것입니다.【이 가 르침은 저와 두세 사람이 함께 직접 들은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무함이라면 하늘이 반드시 저를 죽일 것입니다.】 병암이 만약 살아 계셨다면 반드시 이런 논의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 다. 병암께서 돌아가신 뒤였기 때문에 이런 가르침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사께서 돌아가신 뒤에도 또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없는 가르침입니다. 이미 말 씀하시지 않으셨다고 한다면 후세 사람의 말인데, 어찌 당신의 큰 절개에 손상이 되겠습니 까.오진영과 그의 무리들은 처음 신해년의 유서가 나왔을 적에 혹 "이와 같은 유서는 우리 주머니 속에 많이 있다."라고 말하기도 하였고, 혹 "하늘에서 떨어진 것인가? 땅에서 솟은 것인가? 대단히 의심스럽다."라고 말하기도 하였으며, 혹 "정재가 지닌 유서는 감히 그것을 가리켜 간직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라고 말하기도 하였고, 혹 "여자 종이 석개(石介)의 편지를 연습한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였으며, 혹 "선사의 문하에는 선사의 필법을 모방하는 것에 일등선수가 많이 있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는데, 이 말들은 총괄하면 위조(僞造)로 여기는 것이 아니겠는가.얼마 뒤에 성토에 함께하지 않았던 원재(遠齋) 이희진(李喜璡)과 오진영을 위해 지지하고 보호했던 춘계(春溪) 송의섭(宋毅燮)58)이 소장하고 있던 것들이 계속해서 나오자 스스로 흉악한 입이 망령되고, 간악한 꾀가 드러나서 죄를 피할 곳이 없게 되었음을 안 것이다. 그래서 지금 갑자기 말을 바꾸어 신해년의 유서는 살아 계실 때에 문고를 인쇄하자는 요청으로 인해 나온 것이라 하고, 또 전기진(田璣鎭)에게 들은 것을 끌어와 일컬으며 그것의 증거로 삼았다.그러나 유서 중에 "훗날"이나 "마지막 유언", "훗날의 증빙"이란 말들은 끝내 살아 계실 때의 말로 간주할 수 없는 것들인데, 어찌할 것인가? 만약 전기진의 인쇄 요청을 방비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라면 유서 속에 "전기진에게 문고를 지키도록 하라."는 말은 들어있어도 바로 전기진의 인쇄 요청을 방비한다는 내용은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은 어찌할 것인가? 이 말이 믿을 만한 것인가?그는 이에 계책이 곤궁해졌음에도 오히려 다시 말하기를, "그렇지 않으면 임술년 3월 16일에 어찌하여 유서로 가르침을 보이지 않으시고, 도리어 '스스로 헤아려서 하라.'고 말씀하셨는가?"하였다. 그렇다면 훗날의 증빙으로 이보다 중대한 것이 없는 유서는 쓸모가 없고, 임시방편으로 없는 것을 날조한 "홀로 계실 때의 명령"은 힘이 있으니, 매우 통탄스럽다.그러나 '홀로 계실 때의 명령'이 '유서'와 반대가 됨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이에 그가 숨기며 꺼려했던 "스스로 헤아려서 하라."와 "인허를 받을지 여부는 언급하지 않았다."라는 말은 또 곤궁해졌고, "업자가 대신 인허를 받으면 구애될 것이 없다."와 "병암이 돌아가신 뒤의 일을 논한 것이다."라는 말은 계책이 막힌 나머지 또 다른 한 계책을 낸 것이다.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대신 인허를 받았다."라는 설은 몇 해 전에, 그의 무리들이 "책을 인쇄하는 것에 대해 범범히 논의한 것"이라 하였고, "병정 연간에 대강 《시경》ㆍ《서경》ㆍ《논어》ㆍ《맹자》를 지금 세상에서 간행한다 하더라도 옛 성인에게는 허물이 되지 않음을 범범히 논의한 것"이라 하였으며, 그는 "책장수가 스스로 인허를 받아 책을 인쇄하는 것"이라 하였지만 모두 《병암집(炳庵集)》에 대한 말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말을 바꾸어 "병암께서 돌아가신 뒤의 일을 논의한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지난날에 범범히 논의했던 것이 오늘날 병암의 일이 될 수 없고, 지난날의 《시경》ㆍ《서경》ㆍ《논어》ㆍ《맹자》가 오늘날의 《병암집》이 될 수 없는데, 어느 누가 믿겠는가.그러나 지난날에 "범범히 논의했다."라는 것은 당신의 대고(大稿)를 꺼린 것이니, 그래도 꺼리는 점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병암께서 돌아가신 뒤의 일"이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병암께서 돌아가신 뒤이기 때문에 이런 가르침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선사께서 돌아가신 뒤에도 또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말 없는 가르침이다." 하였다. 그가 또 곧바로 이런 논변을 대고에 대한 '말이 있는 가르침'으로 삼아 '말없는 가르침'으로 삼을 뿐만이 아닌 것은 무엇 때문이겠는가? 선사와 병암은 같은 시대의 사람이니, 이른바 "《병암집》을 허락하셨다."는 것은 곧 "당신의 문고를 허락함"을 말한 것이 된다. 이렇게 해서 그의 이른바 "인허를 받도록 분부하셨다."라는 계책을 억지로 성사시켰으니, 또한 기이하다고 이를 만하다.그러나 유서 중에 "훗날[異時]"과 "마지막 유언[末命]", "훗날의 증빙[後憑]" 등의 말은 원래 살아 계실 때의 말로 간주할 수 없음은 끝내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면 "자신을 욕보이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바로 죽은 뒤의 일을 말한 것이고, 이러한 글을 이런 때에 청원하는 것은 자신을 욕보이는 것이 됨을 말한 것이니, 처음부터 본인이 인허를 받는 것과 대신 남이 인허를 받는 것을 구분하지 않으신 것이다.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59)"는 것은 학문의 큰 절목이다. 선사께서는 "결단코 자신을 욕보이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심법을 전한 뛰어난 제자에게 결코 베풀지 않으셨을 것이니, 단지 그의 계책이 끝내 곤궁함을 드러낼 뿐이었다.선사께서 직접 당시에 금기시하는 문자를 선별하여 별집(別集) 한 책을 만드신 것은 과연 백 대 천 대 뒤 천지가 맑고 밝아진 날에 간행하려는 뜻이겠습니까? 이 또한 말 없는 가르 침이라 이를 만합니다. 의는 진실로 어진 사람을 위해 꺼림이 있지만, 이 일은 꺼릴 필요 가 없으니, 주희(朱熹)와 송시열(宋時烈)의 말과 행동을 근거하면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입니 다.간행할 것인지 간행하지 않을 것인지는 논변할 것이 없고, 당시에 금기시하는 문자가 사람의 눈과 귀에 장애가 되어 우연히 일을 만들까 염려하셨으니, 이 때문에 별집 한 책을 만드신 것이다. 이는 선사께서 우환을 염려하신 뜻인데, 그는 도리어 그것을 "인허를 받아 간행할 생각이셨다."와 "말없는 가르침"으로 삼았으니, 또 《병암집》을 빌려 논할 필요도 없이 곧바로 당신의 문고 일을 말한 것이 화반탁출(和盤托出)60)하듯 다시는 조금의 숨김도 없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다소의 일을 줄일 수 있게 하였다.어찌하여 일찍부터 이와 같이 하지 않고 《오현수언(五賢粹言》ㆍ《예설(禮說)》ㆍ《병암집》을 미루어 이용하고 묘적(墓籍)으로 방증(旁證)하며 유서를 살아 계실 때의 일로 보는 등 허다한 궁색한 계책과 회피하는 말에 마음을 수고롭게 한 것인가? 어찌하여 일찍부터 이와 같이 하지 않고 "말에 구별이 부족했다."거나 "인허를 받을 것인지 여부는 언급하지 않았다.", "당신의 대고를 가리킨 것은 아니다.", "내 입으로 말한 것을 듣지도 못했고, 내가 직접 쓴 글씨를 보지도 못했다."는 등의 허다한 꺼림과 숨김에 힘을 낭비한 것인가? 여기에 이르러 일제히 드러났으니, 무슨 이치에 맞는 말이 있겠는가.아, 유서의 "간행ㆍ배포를 청원하는 것은 결단코 자신을 욕보이는 것이다."라는 의리는 진실로 천지에 세워도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이런 말로 선사를 무함하여 해친 죄는 죽음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고, 그 동안 사람과 하늘을 속인 죄도 또한 주벌해야 할 것이다.주희와 송시열이 어찌 일찍이 금나라와 청나라에 청원하는 말과 행위가 있었던가. 그런데도 그는 감히 "이 일은 주자와 송시열의 말과 행위를 근거하면 미루어 알 수 있다."고 하였다. 만약 그가 논한 "가죽과 비단[皮幣]61)"으로 말한다면 주희와 송시열의 가죽과 비단은 진실로 금나라와 청나라에 복수와 설욕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다. 그의 이른바 "인허를 받으려는 생각"" 또한 일본에 복수와 설욕을 도모하기 위한 것인가? 유례(類例)가 같지 않으니 천부당만부당한 것이다. 선사를 무함하는데 그치지 않고 위로 주희와 송시열까지 언급한 죄 또한 어찌 용서할 수 있겠는가.저는 지산(志山)62)에 대해 단지 양류(陽類 군자)라 일컬으며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겼을 뿐, 일찍이 그의 대문으로 기어가서 모모가 했던 것처럼 아양을 떨며 글을 구걸하지는 않았 습니다. 그러니 어찌 선사를 저버리고 연원을 배반한 것으로 모모를 배척하지 않을 수 있겠 습니까.제가 김성장(金聖章)63)에게 답한 편지에서 비록 홍성(洪城)의 김복한을 양류라 일컬으며 그 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긴 했지만, 여러 선생에게 예의가 없고 공손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또한 일찍이 아울러 말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가 예의가 없고 공손하지 않은 점이 있었기 때문에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어 변론하고 배척한 것입니다. 선사께서도 또한 김복한 에게 답장을 보내어 변론하고 책망하셨으며, 변론과 책망 속에 소원함과 절교의 뜻을 붙였 지만, 또한 그 부자(父子)에게 절교를 통고한 적은 없었습니다. 비록 우리 문하에 범한 것이 있지만 모모의 무리들이 사문과 연원에 죄를 지은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가 어지 러운 세상에서 의를 잡고 절개를 지켰으니, 또 어찌 양류라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우선 지산이 양류인지 아닌지, 무례하고 공손치 못한 점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논하지 않겠다. 다만 그가 김성장에게 답한 편지에 의거하건대, 이미 지산에 대해 우리 연원(淵源)과 선현(先賢)을 헐뜯고 배척했다고 말했다면 마땅히 절교해야 하는 것이 분명한데, 그는 생존하신 동안에는 절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스스로 헤아려보건대 평소에 절교를 당할 정도의 죄에 이르지 않은 것 같은데, 성구(聖九)가 참소하는 말을 가벼이 믿고 상을 당했을 때 부고하지 않았으니, 사람을 부당하게 끊는 것이 이처럼 터무니없다."라고 하면서 구구하게 돌아가신 뒤에 스스로 붙기를 바라였다. 만약 성구의 부고를 받았다면 그가 어찌 기어가서 지산의 영전에 곡하지 않았겠는가.우리 문하의 사람들이 지산이 생존하신 동안에 방문하고 돌아가신 뒤에 조문한 것은 지산이 편지로 스스로를 변명한 것에 대해 선사께서 답한 편지에서 양해를 허락하신 뒤였기 때문에 그가 연원과 선현을 비방하고 배척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의 경우에는 이미 연원과 선현을 헐뜯고 배척했다는 이유로 지산을 배척했으면서도 오히려 생존하신 동안에는 절교하지 않았고, 돌아가신 뒤에는 스스로 아부했다. 도리어 연원과 선현을 헐뜯고 배척하지 않았음을 알고서 찾아가 만난 최경존(崔敬存)64)을, 선사를 저버리고 연원을 배척한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의 문인 정윤영(鄭胤永)65)과 한 쌍이 된다는 것으로 단죄까지 하였으니, 그의 마음이 더욱 험악하다 하겠다. 아양을 떨며 글을 구걸했다는 것은 누구를 가리키는지 모르겠지만, 스승을 저버리고 연원을 배반했다고 배척한 것은 전에 최경존을 단죄한 것과 말이 같으니, 또한 최경존을 가리키는 듯하다. 또 "아무개와 아무개"라고 하였는데, 나머지 한 사람이 누구인가? 그가 김에게 답한 편지에서 "최병심(崔秉心)과 김택술(金澤述)이 사람을 끌어들여 함께 원수로 여겼다."라고 했는데, 그 한 사람이 혹 나를 가리키는 것인가?대체로 제문(祭文)으로 전옹(全翁 임헌회)를 무함하여 제문이 내쳐지고 절교를 당한 가평(嘉平)의 김평묵(金平默)66)에게 정윤영(鄭胤永)67)이 글을 구걸한 것은 진실로 죄가 되지만, 선사께서 양해를 허락하신 지산에게 글을 받은 우리 문하의 여러 사람들은 무슨 죄가 있겠는가. 만약 양해를 허락하시기 전이었다면 온당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종중의 일로 글을 받은 것은 김세기(金世基) 의 〈산수화록(山水話錄)〉이 있기 일 년 전인 신유년(1921) 봄에 있었고, 조문하러 간 것은 소상(小祥)68)을 지내고 다섯 달이 지난 뒤인 을축년(1925) 가을에 있었다.무릇 이 일은 지산이 연원과 선현을 헐뜯고 배척했는지 여부와 절교가 온당한 것인가 온당하지 않는 것인가를 보고서 결단해야 한다. 그가 이미 연원과 선현을 비방하고 배척했다는 이유로 배척했으면서도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절교하지 않고 죽은 뒤에는 스스로 아부한 것에 대해서는 공론에서 스승을 저버리고 연원을 배척했다는 죄를 받지 않고, 선사께서 양해를 허락하신 것으로 인해 연원과 선현을 헐뜯고 배척하지 않았음을 알고서 서로 종유한 것에 대해서는 스승을 저버리고 연원을 배반했다는 죄를 그에게 받는 것이 옳은 것인가. 진실로 여러 말로 논변할 것이 못 된다.그리고 "홍성의 김복한이 비록 우리 문하를 범했다 하더라도 아무개와 아무개의 무리들이 사문과 연원에 죄를 얻은 것과는 차이가 있다."라고 한 것도 또한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그가 아무개와 아무개를 미워한 것이 어찌 이른바 "우리 문하를 범했다."는 사람과 서로 종유한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해친 사람은 놓아주고 그와 종유한 사람을 잡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러나 그의 이른바 "연원을 헐뜯고 배척했다."는 것은 이미 선사께서 양해를 허락하신 것과 서로 반대가 되니, 또한 여러 말로 논변할 것이 못 된다. 鄙答徐書頭辭, 因彼之有殺心而狂叫亂嚾於一國, 竊意其空然受了誣師亂賊之名, 不若據實直 言, 爲引重鎭壓, 遂有說話.彼有殺心狂叫亂嚾於一國, 指何事而言? 若指甲子秋發通聲討也, 則震答徐書"原從先師不言之敎"云云, 在壬戌冬, 是時孰有以誣師賊討之者乎? 只有涵齋禁認之一書矣. 蓋未聞"曾有認意""自量爲之""不必深拘""不言之敎"等說, 時豈有以誣師賊罪之之理乎? 渠之平生變幻事實舞弄文字之習, 每每如此, 此其胎疾之難醫者也.彼雖假義, 何嘗夢見義字面目之近似者? 不過自寫誣悖, 自累先師者也.【若無彼狂叫亂嚾, 則孰 有以認爲罪者? 觀沙尤諸先生集, 可知也.】先師"請願刊布, 決是自辱"之遺書, 非義乎? 寫先師遺書而辨誣者, 非義乎? 謂寫遺書而辨誣者 爲自寫誣悖, 則語歸於何地? 豈非逐鹿而不見泰山者耶?辛亥遺書, 必因生前請印稿者發. 故鄙敢以爲然也. 不然則壬戌三月十六日, 何不以遺書見敎, 而乃曰"自量爲之"乎?"請願刊布自辱", 自論當身生前事也.【聞諸田璣鎭, 親侍於旺島日, 有刊稿之請而有此訓也.】 "業者代認不拘", 爲論炳庵身後事也.【此敎鄙與二三子同爲親聽. 如其誣也, 天必殛之.】 炳庵 若生在, 則亦必不爲此論矣. 惟其炳庵身後也. 故有此敎. 則先師身後, 亦可然也. 此爲不言之 敎也. 旣云不言, 則後人之言也, 何損於當身大節也?震及其黨, 始於辛亥遺書出也, 或謂之"如此遺書, 吾囊中多有", 或謂之"從天降耶? 從地出耶? 可疑之大者", 或謂之"靜齋遺書, 不敢指以爲有", 或謂之"女奴石書習", 或謂之"先師門下, 摹倣先師筆法者, 一等善手多有", 則此非總之爲僞造乎? 旣而有不同聲討之李遠齋喜璡爲震扶護之宋春溪毅燮所藏者之繼出, 則自知凶吻之妄奸謀之綻, 而罪無所逃, 故今忽變舌, 謂辛亥遺書, 因生前請印稿而發, 又引稱聞田璣鎭者證之. 然其於遺書中曰"異時"曰"末命"曰"後憑"之云, 終不可以生前看者何? 且若爲防田之請印而發, 則遺書中至有"田璣鎭令看文稿"之語, 而不及正爲所防田之請印者, 何也? 是其可信者乎? 渠於是計窮矣, 而猶復曰: "不然, 壬戌三月十六日, 何不以遺書見敎, 而乃曰: '自量爲之'乎?" 則莫重後憑之遺書無用, 臨時捏無之獨命有力, 甚可痛也. 然獨命之反對遺書, 則卽此而可見. 於是渠所掩諱"自量爲之""不及認否"之說又窮矣, "業者代認不拘""爲論炳庵身後事"之云, 計窮之餘, 又生一計矣. 雖然, "代認"之說, 年前渠黨之謂"泛論印書", 謂"丙丁年間, 泛論《詩》·《書》·《語》·《孟》, 今世刊行, 而古聖人不爲累", 渠之謂"冊商自認印書", 而幷皆無《炳庵集》說者. 今忽變舌, 謂"爲論炳庵身後事", 則前日之泛論, 不得爲今日之炳事, 前日之《詩》·《書》·《語》·《孟》, 不得爲今日之《炳集》, 而人誰信之? 然前日之謂泛論者, 諱當身大稿, 則猶有所忌憚也. 今日之謂炳庵後事而曰: "惟其炳庵身後也, 故有此敎. 則先師身後, 亦可然也. 此爲不言之敎也者." 渠又直以此論爲大稿有言之敎, 而不啻不言之敎也, 何也? 先師炳庵同時人, 其所云"許《炳庵集》"者, 卽云"許當身稿"也. 於是乎曲成渠所謂"認敎"之計者, 亦可謂奇矣. 然終無柰遺書中"異時""末命""後憑"之云, 元不可以生前看. 如上所論, 則其云"自辱"者, 正以身後言, 而謂以此文以此時而請願則爲自辱, 初不分本家認代人認也. "己所不欲, 勿施於人", 學問大節也. 先師決不以"決是自辱"之己所不欲者, 施於傳心之高弟. 則多見其計之終窮也已.先師親選時諱文字爲別集一冊者, 是果爲百千世後天地淸明之日刊行之意耶? 是亦可謂不言之 敎也. 義固有爲賢之諱, 此事則不必諱, 據朱宋之言行, 可推而知矣.未論刊與不刊. 恐時諱文字之碍人耳目, 邂逅生事, 所以爲別集一冊. 此先師慮患之意也. 渠乃以之作"認刊之意""不言之敎", 則又不待《炳集》之借論而直言當身稿事者, 和盤托出, 更無餘隱, 而令人省得多少事矣. 何不早自如此, 而勞心於《粹言》《禮說》《炳集》推用墓籍旁證遺書看以生前之許多窮計遁辭也? 何不早自如此, 費力於"語欠區別""不及認否""非指當身大稿""不聞吾口語, 不見吾手筆"之許多掩諱逃閃也? 到此而一齊綻露, 有何理說? 噫! 遺書"請願刊布, 決是自辱"之義, 固建天地而不悖, 則渠之以此等說誣賊先師之罪, 不容誅, 而其間欺人欺天之罪, 亦可誅也. 朱宋何曾有請願於金淸之言與行? 而渠敢謂"此事, 據朱宋言行, 可推而知也." 若以所論皮幣言, 則朱宋之皮幣, 固所以圖復雪於金淸. 渠所謂"認意", 亦所以圖復雪於日本乎? 類例不同, 千不是萬不當. 誣師不已, 上及朱宋之罪, 又如何可赦?鄙於志山, 只云陽類而惜其死, 未嘗匍匐其門, 納媚乞文, 如某某之爲也, 則安得不以負先師背 淵源斥某某乎?鄙答金聖章書, 雖謂洪金爲陽類而惜其死, 然無禮不恭於諸先生, 則亦未嘗不幷言之. 惟其有無 禮不恭. 故承師訓而辨斥之. 先師亦答金而辨責之, 辨責之中, 寓以疏絶之意, 亦未嘗告絶於其 父子矣. 雖有犯於吾門, 與某某輩之得罪於師門與淵源有間也. 其秉義守節於亂世, 又何可不謂 之陽類?姑無論志山之陽類與否, 無禮不恭之有無. 但據渠答金聖章書, 旣謂志山以詆斥我淵源先賢矣, 則其爲當絶明矣, 而渠不惟不絶於其生前, 乃謂"自諒平日, 似不至爲見絶之罪. 聖九輕信讒言, 遭喪不訃. 絶人不當, 若是無據", 反欲區區自附其身後. 若得聖九之致訃, 渠豈不匍匐而哭志山之靈乎? 若吾門諸人之生訪死弔於志山者, 以先師答書許解於志山以書自辨之後, 故知其不詆斥淵源先賢矣. 渠則旣斥之以詆斥淵源先賢, 而猶生不絶死自附, 反罪知其不詆斥淵源先賢而往見之崔敬存以負先師背淵源全門之鄭胤永一對, 其心尤險矣. 納媚乞文, 未知指誰, 而負師背源之斥, 與前日罪崔語同, 恐亦指崔也. 又云"某某", 則其一人誰也? 渠於答金書謂"崔秉心金澤述援人同仇", 其一人者, 或指余歟? 蓋鄭胤永之乞文於祭文以誣全翁而當逐文齊絶之嘉金, 固是罪也. 吾門諸人之受文於先師所許解之志山者, 有何罪焉? 如在許解前則未安矣. 余之以宗事受文, 則在金世基山水話錄前一朞辛酉春, 往弔則在其小祥後五朔乙丑秋耳. 大抵此事, 當看志山之詆斥淵源先賢與否當絶不當絶而決之. 渠之旣斥以詆斥淵源先賢, 而生不絶死自附者, 不得負師背源之罪於公論, 而因先師許解, 知其不詆斥淵源先賢而相從者, 得負師背源之罪於渠可乎? 誠不足多辨. 至於"洪金雖犯吾門, 與某某輩之得罪師門與淵源有間"之云, 又全不成說. 渠之所惡於某某者, 豈非以相從於所謂"犯吾門"者乎? 然則舍其犯之者而操其相從者可乎? 然渠所謂"詆斥淵源"之云, 旣與先師許解之事相反, 則又不足多辨. 춘계(春溪) 송의섭(宋毅燮)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으로, 본관은 여산(礪山)이며, 춘계는 그의 호이다. 저서로는 《시문잡저(詩文雜著)》 10여권과 《동국강감(東國綱鑑)》 20여권이 있다. 《한국 향토문화 전자대전》 자기가……것 《논어》 〈안연(顔淵)〉에 중궁이 인(仁)에 대하여 묻자 공자께서 "문을 나갈 때는 큰손님을 뵙는 듯하고, 백성에게 일을 시킬 때는 큰 제사를 받들 듯하며, 자신이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 베풀지 말아야 하니, 이렇게 하면 나라에 있어서도 원망함이 없으며 집안에 있어서도 원망함이 없을 것이다.〔出門如見大賓, 使民如承大祭, 己所不欲, 勿施於人. 在邦無怨, 在家無怨.〕"라고 답한 구절에서 인용한 말이다. 화반탁출(和盤托出) 음식물을 쟁반째로 내놓는다는 뜻으로, 숨김없이 모든 것을 드러내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가죽과 비단 국가 간의 외교 때에 사용하는 예물을 통칭하는 말이다. 지산(志山) 김복한(金福漢, 1860~1924)의 호이다. 충청남도 홍주 출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원오(元五)이다. 189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홍문관교리ㆍ사서(司書)ㆍ성균관대사성ㆍ형조참의 등을 거쳐 승정원승지에 제수되었으나 갑오경장이 시작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성장(金聖章) 김복한의 아들이다. 최경존(崔敬存) 전우(田愚)의 문인 최병심(崔秉心)을 가리키는 것으로, 경존은 그의 자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호는 금재(欽齋)이다. 저서로 《금재문집(欽齋文集)》이 있다. 선사를 …… 정윤영(鄭胤永) 정윤영이 윤봉래(尹鳳來)에게 비밀리에 보낸 편지에서 전우를 조조(曹操)와 사마의(司馬懿)에 비유하면서 그와 절교하지 않으면 순욱(荀彧)이나 가충(賈充) 같은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신계(申桂)와 이승욱(李承旭)의 말을 가져와 전우를 욕하고 꾸짖었는데, 윤봉래가 편지의 내용이 대의와 관계된 것으로 여겨 전우에게 이 사실을 알리자, 전우가 어쩔 수 없이 동문들에게 알리고 여러 사람들과 연명으로 절교를 통고하는 세 편의 편지를 써서 정윤영과 신계, 이승욱에게 보냈다. 《艮齋先生文集後編續 卷2 答李活俊兼示北省諸賢》 제문(祭文) …… 김평묵(金平默) 김평묵(1819~1891)은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이다. 간재의 연보에 "1877(고종14) 정축(37세) 11월, 임헌회에게 올린 제문에 기롱(譏弄)하는 뜻이 있음을 알고서 제문을 김평묵에게 돌려보내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정윤영(鄭胤永) 1833~1898. 본관이 초계(草溪)이고, 자는 군조(君祚)이며, 호는 석화(石華)ㆍ후산(后山)이다. 임헌회(任憲晦)의 문인으로 김평묵ㆍ유중교ㆍ유시수ㆍ홍대심과도 교유하였다. 소상(小祥) ; 사람이 죽은 지 1년 만에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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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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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김세기69)의 흉악한 글을 보고나서 【1937년】 觀世基凶文 【丁丑】 사람을 보고서 그 큰 것을 논하면 그 나머지 자잘한 행위들은 유추할 수 있으니 비록 논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괜찮다. 나는 글을 보고서 글을 논하는 것도 또한 그렇다고 생각한다.김세기는 이 글의 벽두에서 나라를 망치게 했다고 낙학(洛學)70)을 꾸짖고, 거짓된 학문을 했다고 매옹(梅翁)71)을 배척했으며, 선사를 단죄하고 남의 부자(父子) 사이를 어지럽힌 김승지(金承旨)72)를 종처럼 섬기며 상전으로 모셨다는 것으로 나의 첫 번째 대죄(大罪)를 삼았다. 그는 또 일찍이 지은 〈우기(偶記)〉에서 말하기를, "선사께서 홍성(洪城)의 김복한(金福漢)과 절교하신 것에 여섯 가지 증거가 있다. 전(田)ㆍ최(崔)ㆍ송(宋)이 이미 편지로 양해하셨다고 말하면서 온갖 수단으로 그를 돕고 보호한 것은 비록 스승을 무함하고 가르침을 배반한 죄명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이지만 그렇게 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그의 이 안(案)은 철판과 같은 판정이라 이를 만한 것으로, 오진영이 일찍이 크게 쓰기도 하고 특별하게 쓰기도 하면서 한번만 쓰지 않고 자주 써서 그에게 전해 주었던 것이다. 예컨대 홍성을 갔던 금재(欽齋 최병심(崔秉心))를 단죄하면서 "선사를 배반하고 연원(淵源)을 저버린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의 문인 정윤영(鄭胤永)과 한 쌍이 된다."라고 한 것이 그 하나이다.그러나 오진영은 훗날 김성장(金聖章)73)에게 답한 편지 한 통이 있었는데, "나는 지산 영감과 선대의 정의가 있고, 게다가 시대의 의리에 있어 큰 절개를 지니신 분이기에 일찍이 거센 물결 속의 하나의 지주(砥柱)로 바라보면서 흠모했었네.…… 내가 스스로 헤아려보건대 평소에 절교를 당할 만큼의 죄에 이르지 않은 듯하네. 그래서 지산 영감의 상을 듣고 여러 차례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이 세상에 양류가 없게 된 것이 비통하고, 우리들이 더욱 외롭게 된 것이 가슴 아프네.'라고 하였고, 또 때때로 사람들에게 '김성구(金聖九)74)가 가벼이 참소하는 말을 믿고 상을 당했을 때에 부고하지 않았으니, 사람을 부당하게 끊는 것이 이처럼 터무니없네.'……"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즉시 정운한(鄭雲翰)으로 하여금 특별히 김성구에게 전해주도록 하였으니, 자신이 가서 양해를 구한 것과 다름이 없다. 만약 김성구의 양해를 얻어 부고를 보내고 절교하지 않았다면 오진영도 또한 지산의 영전에 가서 절하였음이 틀림없었을 것이다.지금은 우선 지산과 절교해야 하는지 절교해서는 안 되는지와 선사께서 이미 양해하셨는지 하지 않으셨는지는 논하지 않고, 바로 오진영과 김세기의 말로 도리어 오진영의 죄를 다스리면 나라를 망치게 했다고 낙학을 꾸짖고, 거짓된 학문을 했다고 매옹을 배척했으며, 선사를 단죄하고 남의 부자 사이를 어지럽힌 김승지를 종처럼 섬기며 상전으로 모신 자는 오진영이고, 홍성의 김복한을 돕고 보호함으로써 선사를 무함하고 유훈을 배반한 죄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는 오진영이며, 선사를 배반하고 연원을 저버린 것이 전재의 문인 정윤영과 한 쌍이 되는 자는 오진영이다. 김세기는 이에 대해 어찌하여 오진영을 단죄하고 성토함으로써 온 나라에 널리 알리지 않는 것인가? 연원을 높이고 선사를 지키는 부분에도 또한 친함과 사사로움이 용인될 수 있는 것인가? 만약 "그가 한창 오진영을 스승으로 여겨서 방몽(逄蒙)의 혐의75)가 없지 않기 때문에 감히 그렇게 말하지 못할 뿐이다."라고 말한다면 어찌하여 다시는 문하에 이르지 않기를 그의 〈우기) 중에서 논한 "사생(師生)간에는 변례로 대처한다."는 것처럼 하지 않는 것인가? 오진영의 경우에는 감추어서 드러내지 않고 나의 경우에는 죄안(罪案)을 억지로 씌워서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믿어주기를 바란들 될 수 있겠는가.이것이 이 글 속의 큰 절박(節拍)76)인데 믿을 수가 없으니, 이와 같음이 있다면 그 나머지 허다하게 사람을 무함하는 말은 유추하여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의 부상(父喪)과 모상(母喪)의 선후를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 사람이 예법이 있는지 예법이 없는지를 알 수 있겠는가. 다른 것들도 모두 이와 유사하다.】 나의 이른바 "글을 보는 것은 사람을 보는 것과 같아서 먼저 그 큰 것을 논하면 나머지는 논하지 않더라도 괜찮다."는 것이 이것이다.전재 선생의 대비(大碑)는 선사께서 글을 새겨 넣을 때에 여러 문하 사람들과 여러 날 상의하고 교정하여 직접 고친 다음에 열 자 되는 반듯한 빗돌에 크게 써서 큰 길 옆에 우뚝하게 세운 것임을 어느 누가 모르겠으며, 어느 누가 보지 않았겠는가. 그런데도 그는 도리어 "내가 〈진본고변록(晉本考辨錄)〉77) 중에서 전재의 비문을 고친 죄를 오진영에게 덮어씌웠다."라고 하면서 눈을 멀게 하고, 입을 도려내며, 팔을 절단해야 한다는 독한 말을 더하였다. 나의 〈진본고변록〉은 내 손으로 완성하여 내 집에 보관해둔 채 아직 인쇄해 배포하지 않았다. 그는 일찍이 본적도 없으면서 이렇게 운운하였으니, 나는 세상의 군자들이 〈진본고변록〉을 고찰하고 이 글을 보지 않은 날에 그가 도리어 눈이 멀고, 입이 도려지며, 팔이 절단되는 형벌을 받게 되더라도 바칠 말이 없을 것임을 알겠다.〈분언(㤓言)〉78) 중의 운운에 대해서 말하면 선사께서는 원래 "친아들이 있음에도 족질(族姪)을 세워 후사로 삼는 것은 벼슬아치 집안에서 마음을 모질게 먹고 도리를 헤치는 관습이다."라고 짓고서, "친자는 서자를 가리킨다.[親子指庶子]"는 다섯 글자의 소주(小註)를 두셨던 것이다. "서자"라 하지 않고 반드시 "친자"라 한 다음에 따로 소주를 달아 놓으신 것은 자신의 아들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아들을 세우는 것이 도리에 해가 됨을 분명히 말하기 위해서이니, 그 의리가 정밀하고, 그 뜻이 깊다 하겠다. 그런데 지금 어찌 감히 다시 다른 설을 받아들여 굳이 오진영이 "친(親)" 자를 "서(庶)" 자로 고치고 소주를 삭제한 것을 옳게 여기고 그의 죄를 숨겨주면서 선사의 정밀한 의리와 깊은 뜻에는 어둡단 말인가? 그의 무리들이 문고를 고치지 않았다고 조목조목 나누어 해명하는 것이 대개 이와 같음에 지나지 않으니, 이것도 또한 그 나머지를 유추할 수 있겠다.김세기의 글에서 또 "내가 만약 권세를 얻게 된다면 사대부 집안을 반드시 멸하겠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오진영이 이미 진천(鎭川)ㆍ전주(全州)ㆍ진주(晉州)의 경찰서 검사국에서 행하여 선비들을 일망타진하고 선사의 손자까지 묶어 가둔 것이다. 그가 지금 스스로 자신들의 못된 짓을 베끼고 있으니, 어찌 이른바 "자연히 바꿀 수 없는 공론"이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觀人先論其大者, 則其餘細行, 可以類推, 雖不論可也. 余謂觀文論文亦然. 世基此文劈頭, 以奴事爲上典於詬洛學亡國斥梅翁僞學罪先師亂人父子之金承旨, 爲余第一大罪. 渠又嘗於所作〈偶記〉, 謂: "先師絶洪金, 厥有六證, 田崔宋之謂已書解而萬端扶護者, 雖欲免誣師背訓之名得乎?" 渠之此案, 可謂鐵板之定, 而震泳所嘗大書特書不一書而傳授於渠者也. 如罪欽齋之往洪城而曰 "背先師負淵源全門之鄭胤永一對也"者, 其一也. 然而震泳後來有答金聖章書一度, 而曰: "震於志令有先世之誼, 重以時義大節, 嘗視爲洪流一柱而傾向之云云. 若震則自諒平日, 似不至爲見絶之罪, 故聞志令之喪, 屢與人書曰: '痛斯世之無陽, 傷吾輩之益孤.' 時與人語曰: '聖九輕信讒言, 遭喪不赴, 絶人不當, 若是無據.'云云." 卽使鄭雲翰特致於聖九, 無異自達而求其相諒. 若得聖九諒解, 而致赴不絶, 則震也往拜志山之靈必矣. 今姑無論志山之可絶不可絶, 先師之已解與未解, 卽以震世之言, 還治震泳之罪, 則奴事爲上典於詬洛學亡國斥梅翁僞學罪先師亂人父子之金承旨者, 震泳也, 扶護洪金而不得免誣師背訓之名者, 震泳也, 背先師負淵源爲全門鄭胤永之一對者, 震泳也. 世基於此, 何不以罪震而討之, 布告國中也? 尊淵源護先師之地, 亦有親私之可容乎? 若曰: "渠方師震, 不無逄蒙之嫌, 故不敢云爾." 則何不不復踵門, 如渠〈偶記〉中所論"師生處變"者乎? 在震則掩之不彰, 在余則勒加罪案, 而欲人之信渠言, 其可得乎? 此爲此文中大節拍. 而不可信也, 有如此則其餘許多誣人之說, 可類推而知之. 【旣不知其人父喪母喪之先後者, 何以知其人之有禮無禮乎? 他皆類此.】 余所謂"觀文若觀人, 先論其大者, 則餘可不論"者此也. 全齋先生大碑, 先師於入刻時, 與衆門人累日商訂而親改之, 大書十尺之貞珉, 屹立周道之傍, 有誰不知, 有誰不見. 渠乃謂"余〈晉本考辨錄〉中, 勒震以改全碑之罪", 加以目可矐口可抉腕可斷之毒口. 吾之〈考辨〉, 成吾手, 藏吾家, 而不及印布. 渠未嘗見而有此云云. 吾知其世之君子, 考〈考辨〉而無見此書之日, 渠反受矐目抉口斷腕之刑, 而無辭可供也. 至於〈㤓言〉中云云, 先師元作"有親子而立族姪爲嗣者, 是仕官家忍心害理之習." 有小註"親子指庶子"五字. 不曰"庶子", 必曰"親子", 而另懸小註, 所以明言舍己子立他子之爲害理也, 其義精矣, 其意深矣. 今何敢復容他說, 必以震之改"親"爲"庶"刪小註爲是, 而掩蔽其罪, 昧却先師精深之義意乎? 渠輩之分疏不改稿者, 蓋不過如此, 此亦可以類推其餘矣.世文又謂"余若使得勢, 則衣冠之族必赤矣." 此震泳之已行於鎭川全州晉州之警署檢局, 而網打士類, 縛囚師孫者. 渠今自寫渠輩之凶悖, 豈非所謂"自然不易之公論"歟? 김세기(金世基) 오진영의 문인이다. 낙학(洛學) 《간재선생문집 후편속(艮齋先生文集後編續)》 권6 〈논인수무분(論人獸無分)〉의 내용에 근거하면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낙론(洛論)을 지지했던 학자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 논쟁은 권상하(權尙夏)의 문인 한원진(韓元震)과 이간(李柬) 사이에서 시작되었는데, 이간의 인물성구동론(人物性俱同論)에 동조하는 학자들이 대부분 낙하(落下), 즉 서울 출신이었기 때문에 낙론 또는 낙학이라 부르고, 한원진의 인물성상이론(人物性相異論)에 동조하는 학자들은 대부분 호서(湖西) 출신이었기 때문에 호론(湖論) 또는 호학(湖學)이라 불렀다. 매옹(梅翁)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1776~1852)을 가리키는 듯하다. 김승지(金承旨) 김복한(金福漢, 1860~1924)을 가리킨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자는 원오(元五)이며, 호는 지산(志山)이다. 충청남도 홍주 출신이다. 189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홍문관교리ㆍ사서(司書)를 거쳐 성균관대사성ㆍ형조참의를 역임하였으며 1894년에 승정원승지에 제수되었으나 갑오경장이 시작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리자, 이설(李偰)ㆍ안병찬(安炳瓚) 등과 함께 항일의병을 일으켰고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이듬해에 홍주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영남의 곽종석(郭鍾錫)과 함께 호서 유림을 대표해 전국 유림 137명의 서명을 받아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인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발송하기도 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성장(金聖章) 김복한의 장자(長子)이다. 김성구(金聖九) 김복한의 차자(次子)인 김노동(金魯東)이다. 방몽(逄蒙)의 혐의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하(夏)나라 사람인 방몽이 예(羿)에게 활 쏘는 법을 배운 뒤에 천하에 자기보다 나은 자는 오직 스승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스승인 예를 쏘아 죽였다는 고사가 보인다. 이 고사로 인해 제자가 스승을 헤치는 혐의를 비유하는 말로 사용된다. 절박(節拍) 음악 내에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절주와 박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문장의 규칙적 진행 과정을 비유한 말이다. 진본고변록(晉本考辨錄)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15권에 있다. 간재(艮齋) 전우(田愚)가 계화도에서 직접 편정한 화도본(華島本)과 오진영(吳震泳)이 진주에서 간행한 진주본(晉州本)를 대조하여 진주본의 부당함을 변론한 기록한 것이다. 분언(㤓言) 간재가 66세(1906) 되던 해 11월 무성산(武城山)에서 지낼 때 완성한 글로, 심성(心性)ㆍ이기(理氣)ㆍ출처(出處)ㆍ예의(禮義) 등에 대한 단상(斷想)을 여러 해에 걸쳐 기록한 것이다. 《간재선생문집 전편(艮齋先生文集前編)》 권12~권13에 실려 있고, 별편(別編)에도 1조가 수록되어 있다. 《한국문집총간 간재집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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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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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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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오진영이 김성장에게 답한 편지를 보고나서 【1938년】 觀吳震泳答金聖章書 【戊寅】 주자가 말하기를, "군자가 사람을 다스릴 때에 그 사람의 도로 그 사람 몸을 다스린다."라고 하였으니, 내가 이 글에서 바로 오진영의 말로 오진영의 죄를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이 편지의 주된 뜻은 그가 본래 지산 부자(志山父子)에게 절교를 당할 만큼의 죄가 없는데 최 아무개와 김 아무개가 원수로 여겨 참언(讒言)을 했기 때문에 김성구가 자신과 절교하여 부고하지 않게 된 것임을 밝힘으로써 다시 김성구가 의심을 풀기를 바라고 그의 대문으로 달려가 아부하고자 한 것이다.지금은 우선 아무개와 아무개가 원수로 여겨 참언을 했는지 여부는 논하지 않겠다. 그는 이 편지의 맨 처음에서 우리의 연원을 비방하고 배척했다는 것으로 지산의 죄목을 확정했고, 또 다른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선사를 저버리고 연원을 배반한 전재(全齋 임헌회)의 문인 정윤영(鄭胤永)과 한 쌍이 된다는 것으로 지산을 만난 최경존(崔敬存)을 단죄하였다. 지산의 죄가 이와 같다면 비록 지산이 절교하지 않고자 하더라도 그가 절교하는 것이 마땅한데 도리어 지산 부자가 그와 절교한 것에 대해 원통하다고 말하며 구구하게 스스로 아부하고자 하였으니, 이것이 무엇 때문인가?지산은 유림(儒林)의 대가(大家)이기에 스승을 무함했다는 성토를 두려워할 것이다. 그렇기에 선사께서 양해를 허락하셨음을 생각하지 않고 연원과 선현을 헐뜯고 배척했다는 것으로 그를 단죄한 것이다. 김성구는 나이가 어려서 회유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렇기에 그 부친의 절의를 성대하게 말하면서 스스로 아부한 것이다. 이것은 간살맞고 속 좁은 사람들의 이랬다저랬다 하는 일상적 행태이니 또한 괴이하게 여길 것도 없다. 군자는 다만 당연히 지산이 연원과 선현을 비방하고 배척했다는 그의 말로 그 스스로 지산에게 아부하고자 한 죄를 다스릴 뿐이다.그는 또 아무개와 아무개가 참언을 했다는 설을 선사를 무함했다는 성토에 연결시켜 "호남의 두세 사람의 혀끝과 붓끝 외에는 물증을 잡을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선사께서 일찍이 인허를 받으려는 생각이 있으셨다."와 "구애 받을 필요가 없다.", "스스로 헤아려서 하라.", "말없는 가르침" 등의 말은 원래 그의 혀끝과 붓끝에서 나온 것이니, 호남의 두세 사람의 혀끝과 붓끝의 변론과 성토를 기다릴 것도 없이 바로 그의 혀와 붓에서 나온 말로 그의 선사를 무함한 죄를 다스릴 뿐이다. 朱子曰: "君子之治人也, 卽以其人之道, 治其人之身." 余於此書, 卽以震泳之言, 治震泳之罪, 可乎. 此書主意, 發明渠本無見絶之罪於志山父子, 而因崔某金某作仇行讒, 以致聖九絶渠不訃, 更望聖九之釋疑, 而欲趨附其門也. 今姑未論某某之仇讒與否. 渠於此書劈頭, 旣以詆斥我淵源, 定志山罪目, 又於與人書, 罪崔之見志以負先師背淵源全門之鄭胤永一對. 志山之罪如此, 雖志欲不絶, 渠當絶之, 乃反稱寃於志山父子之絶渠, 而欲區區自附, 此何以故? 志山儒林大家, 懼其誣師之討也. 則不念先師之許解, 而罪之以詆斥淵源先賢. 意聖九之年少而可誘也. 則盛道其父之節義而自附. 此奸宵反覆之常態, 亦無足怪. 君子但當以渠謂志山詆斥淵源先賢之言, 治渠自附志山之罪已矣. 渠又以某某行讒之說, 連及於誣師之討, 而謂"湖南二三人舌尖筆尖外, 無可捉贓者." 然"先師曾有認意""不必深拘""自量爲之""不言之敎"等說, 元是出於渠之舌尖筆尖者, 則不待湖南人舌尖筆尖之辨討, 而卽以渠舌筆之言, 治渠誣師之罪已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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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 선생 사고 습유 편집 범례 【1940년】 艮齋先生私稿拾遺編輯凡例 【庚辰】 하나. 선사(先師) 간재(艮齋) 선생의 문고(文稿)는 화도수정본(華島手定本)169)에 전편(前編)ㆍ후편(後編)ㆍ재후편(再後編)이 있는데, 이 세 편에 들어가지 않은 것들을 지금 거두어서 습유(拾遺)를 만든 것은 대체로 비록 세 편의 밖에 있다 하더라도 또한 정밀하고 상세하며 절실하여 세상의 교화에 보탬이 될 만한 글들이 많은데, 끝내 사라져버리는 것을 매우 슬프고 안타깝게 여긴 때문이다.하나. 이편에 실린 글들은 처음에 문고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들이 많고, 또한 들어갔다가 삭제된 것들도 있다. 애초에 문고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은 대체로 선생께서 한 때에 응대한 것이 스스로 겸양하여 그다지 중요한 것이 없다고 여겨 굳이 문고에 넣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러나 간혹 당시에 어수선하고 바빠서 훗날에 필사해 넣으려고 했다가 끝내 그만두게 된 것들이 있다. 이미 들어갔다가 삭제된 것은 대체로 똑같은 하나의 의리인데 말이 각기 중첩되어 나왔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러나 간혹 일가(一家) 글이 과다하게 들어간 까닭에 남겨두고 빼는 것을 알맞게 헤아려서 권질(卷帙) 너무 커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것이지 모두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 누구의 글이든 막론하고 본래의 사실이 잘못되거나 실제의 행적과 어긋나서 바로 찢어버리고 다시 거두었던 것들을 제외하고는 감히 버려서 취하지 않은 것이 없다.하나. 선생의 글이 나라 안에 가득한데 다만 귀와 눈이 치우쳐 있고 족적(足跡)이 좁아서 단지 듣거나 보는 것만 기재하고 얻는 대로 수록하기를 기다려서 마침내 전본(全本)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감히 지금 편집한 것만으로도 오히려 책을 완성하기에 충분하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다.하나. 이편을 모을 때에 혹 글을 보관하고 있는 집에 직접 찾아가서 원본의 초고(草稿)를 옮겨 베끼기도 하고, 혹은 오래 사문(師門)의 사람을 기다린 끝에 얻기도 하였다. 그러나 반드시 그 사의(詞義)와 문법(文法), 필적(筆跡)을 살펴서 참으로 선사께서 지으신 것임을 안 뒤에만 넣어 기재하였고, 감히 세속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온 나라에 널리 알려 우편으로 부치게 해서 쉽게 진짜와 가짜가 뒤섞이도록 하지 않았다.하나. 선생께서는 평소 문인이나 친구, 절개를 바꾼 사람에게는 직접 '모에게 답하다[答某]'ㆍ '모에게 보이다[示某]'ㆍ'사람에게 답하다[答人]'ㆍ'사람에게 보이다[示人]' 등으로 쓰고 성명은 드러내지 않으셨다. 이편에 기재된 '모(某)'ㆍ'사람[人]'의 부류는 반드시 모두 절개를 바꾼 것은 아니지만 아울러 이와 같이 한 것은 글은 있지만 답하거나 보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열람하는 사람은 이 점을 자세히 살펴서 의아해하거나 의혹하지 않도록 하라.하나. 매편 제목 아래의 연조(年條)는, 상세히 알 수 있는 것은 모년(某年)으로 기록하고, 대략 알 수 있는 것은 모년 이전ㆍ이후로 기록했으며, 상세히 알 수 없는 것은 쓰지 않았다. 一. 先師艮齋先生文稿, 華島手定本有前編後編再後編, 凡不入於三編者, 今收之爲拾遺, 蓋雖在三編之外, 亦多精詳切實, 可補世敎者, 終致泯沒, 深爲慨惜故也.一. 此編所載, 多初不入稿者, 亦有旣入而見刪者. 初不入稿者, 槪以先生自謙以一時酬應, 無甚關重, 不必入稿而然, 而或有以當日紛悤, 待後寫入, 而終於已之者. 旣入而見刪者, 槪以同是一義, 辭語各出重疊而然, 而或有以一家文字所入夥多, 故量宜存刪, 不欲卷帙浩大者, 幷非有他意也. 故今勿論某文, 其在失本事爽實蹟而旋扯還收者外, 不敢棄之不取.一. 先生之文, 彌滿國中, 顧耳目偏足跡狹, 只載聞見所及, 而容俟隨得隨錄, 竟成全本, 非敢謂今之所編, 尙足爲成書也.一. 是編之輯也, 或親至藏文之家, 移謄本草, 或得於久侍師門之人, 而必審其詞義文法筆蹟, 信知爲先師作, 然後入載, 不敢廣告通國, 俾寄郵便, 易致眞假相混, 如世俗人之爲.一. 先生平日於門人知舊變節者, 親書以答某示某答人示人, 而不露姓名矣. 此編所載某人之類, 未必皆變節, 而幷如此者, 以其文則有之, 而不知所答所示之爲何人而然. 覽者詳之, 勿致訝惑焉.一. 每編題目下年條, 可詳者, 書以某年, 槪詳者, 書以某年以前以後; 不可詳者, 不書. 화도수정본(華島手定本) 1924년에 간재의 문인 김택술(金澤述)과 최병심(崔秉心) 등이 《간재집(艮齋集)》을 필사(筆寫)한 것을 말한다. 《한국문집총간 간재집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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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 선생 연보 편집 범례 【1951년】 艮齋先生年譜編輯凡例 【辛卯】 하나, 갑술년(1934) 겨울에 선사 간재(艮齋) 선생의 둘째 아들인 정재공(靜齋公)【화구(華九)】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선인(先人)의 연보 초고(年譜草稿)는 신축년(1901)에 봉서사(鳳棲寺)에 가신 때 이후는 그대가 자세히 알고 있어 이어 완성할 수 있을 것이기에 연보 초고를 그대에게 보내는 것이 마땅하네." 하였다. 내가 내심 생각하기에 비록 적합한 사람은 아니지만 일이 사문에 관련되어 또한 감히 끝까지 사양할 수 없었다. 이런 뜻으로 답장을 보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정재공이 세상을 떠나고 연보 초고는 전전하다 다른 곳으로 가게 되었다. 오늘날 오진영ㆍ유영선(柳永善)170)이 편집한 간본(刊本)은 이것을 저본으로 하여 지어진 것이다. 선생의 초중년(初中年)은 일이 이미 저본으로 삼을 것이 있기 때문에 마땅히 오류가 없어야 함에도 간혹 오류를 면치 못했는데, 하물며 모두 저본으로 삼을 것이 없는 만년(晩年)의 일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또한 기록하는 것이 마땅한데 기록하지 않거나 기록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는데 기록한 것들이 있었으니, 이 바르지 못한 것이 선생에게 누가 될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에 정재공의 평소 부탁을 따라 간재 선생의 연보를 짓는다.하나. 이미 연보라고 했다면 그 체재(體裁)는 마땅히 사가(史家)의 연표(年表)와 같아야하기에 대부분 일과 행적을 주로 하고, 의론(議論)을 주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 연월일(年月日) 아래에 간단하게 일과 행적을 기록하는 것 이외에 모인(某人)에게 답한 편지와 모(某)의 일을 기록한 것, 모변(某辨)ㆍ모논(論)을 지은 것과 같은 부류는, 의론한 바가 있는 것은 전고(前稿) 혹은 후고(後稿) 혹은 재후고(再後稿)에 보인다고 기록하였고, 문고(文稿)에 보이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그 주된 뜻을 간략하게 나타냈다.하나. 길을 나설 때에 따라 갔던 문인과 평소에 찾아오거나 찾아갔던 사람의 성명, 아무개 집에 가서 관례에 계빈(戒賓)한 것 따위는 관련하여 고찰할 만한 것이 있는 것을 제외하고 일체 간략함을 따라 기록하지 않았다.하나. 선생께서 종유하셨던 장덕(長德)171) 이외의 친구나 문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 제문(祭文)ㆍ만사(挽辭)ㆍ지(誌)ㆍ장(狀)ㆍ명(銘)ㆍ서(序)가 있는 것은 그 글을 보면 자연히 그 인품(人品)을 알 수 있으니, 감히 망령되게 찬평(贊評)을 더하지 않았고, 글이 없는 것도 또한 부고를 들었다는 것을 기록하지 않았다.하나. 선생께서 돌아가신 뒤에 각처에서 사당을 세워 향사(享祀)하였는데, 삼가 선생께서 성기운(成璣運)에게 답한 편지를 보면 조령(朝令)으로 철폐된 서원의 단(壇)에서 지내는 제사를 온당하지 않게 여기셨다. 단에서 지내는 제사도 오히려 온당하지 않게 여기셨는데, 하물며 새로 설립한 것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래서 모두 기록하지 않았다. 一. 甲戌冬, 先師艮齋先生仲子靜齋公【華九】, 貽書澤述曰: "先人年譜草. 至辛丑歲, 往鳳棲寺時以後, 則君所詳知, 可續成也. 當以譜草送之." 余竊惟雖非其人, 事係師門, 亦不敢終辭. 以是答之, 未幾靜公沒, 譜草轉而至於他所. 今吳震泳柳永善編刊本, 本是而作者. 先生初中年, 事旣有所本, 宜其無誤, 而或不免, 況於晩年事之幷無所本者乎? 亦有當書而不書, 不當書而書者. 此不正之恐累先生. 故遵靜公平日之託, 作艮齋先生年譜.一. 旣云年譜, 則其體裁, 宜同史家年表, 多主事行, 不主議論. 故年月日下, 單錄事行者外, 如與答某人書記某事作某辨某論之類, 有所議論者, 則錄云見前稿或後稿或再後稿, 其不見於稿者, 則不得不略著其主意.一. 出行時從行門人及平日來訪所訪人姓名及赴某家冠禮戒賓之類, 有關可考者外, 一切從簡不錄.一. 先生從遊長德以外知舊門人之沒也, 其有祭文挽辭誌狀銘序者, 觀其文, 自當知其人品, 不敢妄加贊評, 若無文字者, 亦不錄其聞訃.一. 先生沒後, 各處立祠享祀. 竊見先生答成璣運書, 以朝令撤院之壇享爲未安. 壇享猶未安, 況新設乎? 故一幷不錄. 유영선(柳永善) 1893~1961. 자는 희경(禧卿)이고, 호는 현곡(玄谷)이며, 본관은 고흥(高興)이다. 전북 고창(高敞) 출신으로 전우(田愚)의 문인이다. 1905년에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전우를 따라 서해(西海) 고군산 외딴섬 왕등도(暀嶝島)ㆍ계화도(繼華島) 등지에서 근 20년간 갖은 고초를 극복하면서 유학에 전념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장덕(長德) 나이가 많고 덕행이 뛰어난 사람을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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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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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준선165) 씨의 유고 중에 어떤 사람에게 답한 편지를 보고나서 【1940년】 觀吳氏駿善稿中答人書 【庚辰】 모인(某人)의 '성은 스승이고 심은 제자이다[性師心弟]'와 '기를 밝힌다[明氣]'는 의논이 혹 제 귀에 들어오긴 했지만 더불어 논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논변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삿된 학설이 정도를 해치는 것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 심(心)ㆍ성(性)ㆍ정(情)의 구 분은 매우 명백한데, 지금 "성은 높고 심은 낮다.[性尊而心卑]"고 말하여 둘로 나눈다면 심 에는 '미발(未發)'과 '이발(已發)'이 있어 성과 정이 이미 구분되는 것과 '심이 성과 정을 통 솔한다[心統性情]'는 말을 어떻게 구분하여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기를 밝힌다"는 학설은 형의 의논이 명백합니다. 다만 저 사람이 애써 전대의 사람을 뛰어넘고자 하여 새로운 학설 을 만들어 내는 것이 본래의 재주인데, 그와 쟁변(爭辨)하는 것이 또한 수고롭지 않겠습니 까.대체로 도리(道理)는 보기 어려운 까닭에 의론이 같지 않으니, 예로부터 그러했다. 그러나 그 극처(極處)가 존재하니, 진실로 마음을 공정하게 하여 찾는다면 절로 의론이 하나로 정해질 날이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퇴계(退溪) 선생이 말하기를, "뜻이 도를 밝히는 데 있어 사사로운 생각이 없는 자라면 반드시 하나로 일치할 날이 있을 것이고, 그 마음이 이기는 것을 추구하고 도를 헤아리지 않는 자라면 끝내 합치할 리가 없을 것이다.166)" 하였다. 지금 이 글을 보니 그의 마음과 뜻을 알 수 있다. '성이 스승이고 마음은 제자이다.'와 '기를 밝힌다.'는 설은 우리 선사께서 창조해서 논한 것이 아니라, 선성현(先聖賢)께서 이미 가르침이 있었던 것이니, 내가 우선 간략하게 그것을 말해 보겠다.맹자가 말하기를, "돌아가서 찾는다면 남은 스승이 있을 것이다.167)" 하였는데, 주자(朱子)가 이 말을 해석하기를, "성분(性分) 안에 만 가지 이치가 모두 갖추어져 있으니 스승으로 삼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돌아가서 스승으로 삼는 것이 마음이라면 이는 성이 스승이고 마음이 제자가 아니겠는가.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는 도를 배우니, 도는 성이다." 하였으니, 그것을 배우는 것이 마음이라면 이는 성이 스승이고 마음이 제자가 아니겠는가. 공자가 말하기를, "명덕을 밝힌다.[明明德]168)" 하였는데, 주자가 이 말을 해석하기를, "명(明)은 밝힘이요, 명덕은 허령(虛靈)하고 어둡지 않아서 이치를 갖추고 있고 만사에 응하는 것이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허령이 기의 밝은 곳이다." 하였으니, 이는 기를 밝힌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맹자가 논한 "아침녘의 기[平朝之氣]"를 주자는 '기가 청명한 때에 양심(良心)이 발현한다.'는 것으로 해석했으니, 이는 기를 밝힌다는 것이 아니겠는가.성현께서 이미 말씀하신 이 모든 것들이 태양과 별처럼 분명하니 눈만 있으면 모두 보았을 것이고, 선사의 학설도 또한 어찌 깊이 헤아려 봄을 기다린 뒤에 그것이 이치의 극처를 본 정론(定論)임을 알겠는가. 그러나 이 글은 조금도 헤아려보거나 신중하게 여기지 않고 대번에 삿된 학설이 정도를 해친다는 것으로 배척하고, 다시 새로운 학설을 창조하는 것이 본래의 재주라고 결말을 지으니, 공자ㆍ맹자ㆍ주자 세 성현의 가르침에 대해 어떻게 구분해 처리할지 모르겠다. 이는 비단 이김을 추구하는 사심이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사람을 배제시키려는 생각이 있음을 면치 못했기 때문에 먼저 객기(客氣)에 혼란하여 눈이 있어도 성현의 가르침을 보지 못한 것이니, 이른바 "사슴만 쫓고 태산은 보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애석하구나, 그가 일생동안 학문을 하고도 기를 밝히고 성을 스승으로 삼아, 도리를 보아 정론에 함께 돌아갈 수 없음이여. 某人性師心弟與明氣之論, 或入於賤者之耳, 而非惟不與辯, 亦不必辨也. 邪說害正, 何時無 之? 而心性情界分, 則甚昭昭, 今曰"性尊而心卑", 判焉爲兩件, 則心之有未發已發而性情已分 與夫心統性情之語, 何以區處? 明氣之說, 兄論之明矣. 但彼人務欲突過前人, 創爲新說, 自是 本來伎倆. 與之爭辨, 不亦勞乎?夫道理難見, 故議論不同, 從古而然. 然其極處有在, 苟公其心而求之, 則自有論定之日矣. 是故退溪先生曰: "志在明道而無私意者, 必有同歸之日, 其心求勝而不揆諸道者, 終無可合之理." 今觀此文, 其心志可知已. '性師心弟''明氣'之說, 非吾先師之所創論, 先聖賢已有訓, 我且略言之. 孟子曰: "歸而求之, 有餘師" 朱子釋之曰: "性分之內, 萬理皆備, 無不可師." 求而師之者是心也, 則此非性師心弟乎? 孔子曰: "君子學道, 道是性也." 學之者是心也, 則此非性師心弟乎? 孔子曰: "明明德" 朱子釋之曰: "明, 明之也. 明德, 虛靈不昧, 具理應事者." 又曰: "虛靈是氣之明處." 此非明氣乎? 孟子所論"平朝之氣", 朱子釋之以"其氣淸明之際, 良心發見", 此非明氣乎? 凡此聖賢之所已言, 昭如日星, 有目皆覩. 先師之說, 亦何待深加揣度而後, 知其爲見理極處之定論哉? 然而此文略不商量難愼, 遽以邪說害正斥之, 復以創爲新說本來伎倆結之. 未知於孔孟朱三聖賢之訓, 將何以區處? 此非但有求勝之私, 實不免有擠人之念. 故先被客氣之所昏亂, 而眼不見聖賢之訓也. 所謂"逐鹿而不見泰山"者非耶? 惜乎, 其爲學一生, 不能明其氣師其性, 見得道理而同歸於定論也. 오준선 1851~1931. 자는 덕행(德行)이고, 호는 후석(後石)이며,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광주 광산(光山) 출신으로,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며, 저서로는 《후석유고(後石遺稿)》가 있다. 뜻이 …… 것이다 《퇴계선생문집(退溪先生文集)》 권16 〈답기명언(答奇明彦)〉에 보인다. 돌아가서 …… 것이다 《맹자》 〈고자 하(告子下)〉에 "도(道)는 대로(大路)와 같으니, 어찌 알기 어렵겠는가. 사람들이 구하지 않는 것이 병통일 뿐이니, 그대가 돌아가서 찾는다면 남은 스승이 있을 것이다.〔道若大路然, 豈難知哉? 人病不求耳. 子歸而求之, 有餘師.〕"라는 구절에서 나오는 말이다. 명덕(明德)을 밝힌다 《대학장구》 경 1장에 "《대학》의 도는 명덕을 밝힘에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함에 있으며, 지선에 그침에 있다.〔大學之道, 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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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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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재의 문집172)을 보고나서 【1924년】 觀鄭薇齋集 【丙子】 미재(薇齋) 정공(鄭公)에 대해 선사의 문집 중 《성전집촉록(星田執燭錄)》에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 선생이 임종하실 때에 보고 싶어 했던 정국언(鄭國彦)"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그의 어짊을 알 수 있다. 지금 그의 문집을 보니 〈사기감부(師忌感賦)〉에서아, 사람의 식견이 각기 다름이여 嗟人見之各異兮일 년이 되기도 전에 말이 어긋나네 未及朞而言違문호가 나뉘어 따로 존립함이여 分門戶而別立兮저쪽에 반이 있고 이쪽에 반이 있구나 半于彼而半此모두 내가 스승을 위한다고 말함이여 具曰余於爲師兮과연 누가 그르고 누가 옳은가 果誰非而誰是사람의 마음을 좋지 않게 함이여 令人意而不佳兮마침내 만 가지 일이 와해되었네 遂萬事之瓦解서로 거짓말을 지어 내고 비방함이여 相興訛而造訕兮바깥의 모욕을 받음이 적지 않네 受外侮之不少모두 창랑 물 맑고 흐림을 스스로 취함이여173) 都滄浪之自取兮나의 마음 근심스럽네 而我心之悁悁만약 존령께서 지각이 있다면 如尊靈之有知兮반드시 이 일을 즐거워하시지 않을 것이네 必不樂於此擧라고 하였다. 이는 우리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사께서 김평묵의 제문을 물리치고 정(鄭)ㆍ이(李)를 배척한 일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선사께서 지으신 이 문집의 서문에서 이른바 "국언이 병으로 죽지 않고 지금까지 세상에 살아 있었다면 학문은 더욱 깊어지고 도는 더욱 높아졌을 것이고, 나와의 사귐도 또한 더욱 깊어졌을 것인데, 그러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하신 것은 이 때문이다.김평묵이 제문으로 전옹을 은밀히 기롱한 것은 더 이상 여지가 없는 사실이고, 정ㆍ이는 스승을 잊어버리고 원수와 가까이 지냈으니, 그 죄는 용서하기 어렵다. 진실로 문리에 통달하지 못하고 의성(義性)을 잃은 사람이 아니라면 모두 그 제문을 물리쳐야하고, 그 사람들을 배척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 의심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정공과 같은 분은 사문(師門)의 어진 사람으로서 간옹(艮翁 간재)께서 편벽된 행동을 막고 사악한 말을 물리치며, 도의에 근거하여 죄를 성토한 일에 대해 누가 옳은지 모르겠고 만 가지 일이 와해되었으며, 모욕을 받음이 적지 않고 창랑의 물결을 스스로 취하였으며, 선사의 신령이 즐거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르렀다.어진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도의를 밝히고 인륜을 정하기 때문인데, 만약 정공의 식견과 같다면 도리어 도의에 어둡고 인륜을 잃어버리지 않을 사람이 거의 드물 것이니, 어디에 귀하게 여기는 바가 있겠는가. 정공의 이 의론은 당시의 입장에서 보면 비록 혼후(渾厚)하고 측은한 말인 것 같지만 오늘날에는 애석하게 여길 만하니 도리어 어떠한가. 이것이 유가(儒家)가 비록 덕선(德善)을 숭상하기는 하지만 식견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이유이다. 이것으로 인해 근래 우리 문하를 생각하면 음성의 오진영이 선사를 무함하고 해친 변고에 대해 혼후하다고 일컬으면서 그의 죄를 성토한 것을 지나친 행동이고 일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거나 양 쪽 다 그르고 서로 잘못한 것이라는 말을 하는 자들이 있는데, 어쩌면 그렇게도 한결같이 정공이 당시의 일을 논한 것과 같은 것인가. 훗날에 붓을 잡는 자가 나온다면 어찌 우리 문하의 혼후한 자들을 애석하게 여기는 것이 또한 오늘날에 정공을 애석하게 여기는 것과 같지 않을 줄 알겠는가. 아! 薇齋鄭公, 先師集中《星田執燭錄》所記"全齋先生臨終時所願見之鄭國彦也, 其賢可知已. 今觀其集, 〈師忌感賦〉有曰"嗟人見之各異兮, 未及朞而言違. 分門戶而別立兮, 半于彼而半此. 具曰余於爲師兮, 果誰非而誰是. 令人意而不佳兮, 遂萬事之瓦解. 相興訛而造訕師門兮, 受外侮之不少. 都滄浪之自取兮, 而我心之悁悁. 如尊靈之有知兮, 必不樂於此擧." 此指我艮齋先師却金文斥鄭李事而言者, 而先師所作是集序所謂"國彦不病沒, 而至今在世, 則學益邃, 道益尊, 而與余相知, 亦益深矣, 惜乎其未也"云者, 以是也. 蓋金文之暗譏全翁, 無復餘地, 鄭李之忘師親讐, 厥罪難容, 苟非不通文理失却義性者, 皆知其文之當却, 其人之當斥, 而無疑矣. 乃若鄭公, 以師門之賢者, 至謂艮翁距詖閑邪, 據義討罪之擧, 爲未知誰是, 萬事瓦解, 受侮不少, 滄浪自取, 師靈不樂. 夫所貴乎賢者, 爲其明義而定倫也. 若如鄭公之見, 則其不反爲昧義而喪倫者幾希矣. 烏在其所貴乎哉? 鄭公此論, 自當日觀之, 雖若爲渾厚仁惻之言, 然在今日, 其爲可惜, 顧何如也? 此所以儒家雖尙德善而最貴識見也. 因思近日吾門, 陰吳誣賊先師之變, 有以渾厚稱, 而謂聲討厥罪爲過擧生事及爲雙非胥失之說者, 一何似鄭公之論當日事也? 後有秉筆者作, 安知不惜吾門渾厚者, 亦如今之惜鄭公也耶? 噫! 정미재의 문집 정미재는 정재필(鄭在弼)로, 미재(薇齋)는 호이고, 자는 국언(國彦)이며,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문집은 《미재집(薇齋集)》을 말하는 것으로, 1902년 아들 방현(邦絃)이 편집ㆍ간행하였으며, 권두에 전우(田愚)의 서문이 있다. 《호남기록문화유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모두 …… 취함이여 창랑은 물 이름으로, 스스로 허물을 자초했다는 의미이다. 춘추 시대에 한 동자가 노래하기를 "창랑의 물이 맑거든 나의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나의 발을 씻으리라.〔滄浪之水淸兮, 可以濯我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我足.〕" 하자, 공자(孔子)가 그 노래를 듣고 "소자들아, 들어 보거라. 맑으면 이에 갓끈을 씻고, 흐리면 이에 발을 씻게 되는 것이니, 스스로 취하는 것이다.〔小子聽之. 淸斯濯纓 ,濁斯濯足, 自取之也.〕"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맹자(孟子) 이루상(離婁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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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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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오진영이 찬술한 〈정절사174)전〉의 뒷부분 의논에 대하여 논하다 【1935년】 論吳震泳所撰〈鄭節士傳〉後論 【乙亥】 초야의 선비는 간언의 책임과 관직의 지킴이 없으니, 나라가 망할 때에 죽지 않는다 하더라 도 책망할 것이 없지만 몸을 지켜 깨끗한 데로 귀결하는 의리는 오랑캐와 중화의 엄중한 경 계와 관계되어 천하가 우러러보는 사람이 된다. 만약 천하 사람이 오랑캐가 된다 하더 라도 선비가 오랑캐가 되지 않으면 오히려 천하는 중화의 천하가 되고, 천하 사람이 중화 사람이 된다 하더라도 선비가 중화 사람이 되지 못하면 천하는 오랑캐 천하가 되니, 그 중 함은 단지 간언의 책임과 관직의 지킴의 정도일 뿐만이 아니다. 그래서 옛사람은 "선비가 절개를 지키는 것이 하늘을 꺾는 것이 된다."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선비가 죽음을 두려워 하고 절개를 잃어 중화를 망하게 하는 것은 죄가 간언의 책임과 관직의 지킴이 있는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절개를 잃어서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보다 더 심한 점이 있으니, 얼마나 엄중한가. 절사(節士)께서는 아마도 이러한 의리를 들었나보다. 아, 위대하고 장열하다.무릇 말이란 효험을 우선시해야 하니, 말이 있으면 반드시 이런 효험이 있게 되어 자신에게 있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있고, 오늘날에 있지 않으면 훗날에 있게 된다. 말이 있고서 효험이 없는 경우는 아직 있지 않았다. 장자(張子 장횡거(張橫渠))가 "말에 잘못이 없는 뒤에야 일을 결단함에 실수가 없다.175)"라고 한 것은 대개 이 때문이다. 그래서 군자는 반드시 입언(立言)할 적에 조심하고 신중하였다.내가 보건대 오진영이 〈정절사전〉에서 말하기를, "만약 천하 사람이 오랑캐가 된다 하더라도 선비가 오랑캐가 되지 않으면 오히려 천하는 중화의 천하가 된다." 하였는데, 이러한 논리는 가능하다. 이어서 말하기를, "천하 사람이 중화 사람이 된다 하더라도 선비가 중화 사람이 되지 못하면 천하는 곧 오랑캐 천하가 된다." 하였는데, 이것은 선비가 중화 사람도 될 수 있고 오랑캐도 될 수 있으며, 중화 사람이 선비도 될 수 있고 오랑캐도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중화 사람이나 오랑캐가 선비가 될 수도 있고, 선비나 오랑캐가 중화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뒤섞어버리면 선비와 중화 사람의 본래 진면목이 모두 어디에 있겠는가. 이름을 따라 실제를 구한다면 선비가 구덩이에 묻히고 중화가 어지럽게 되는 것을 기다릴 것도 없이 망하고 없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을 것이다.겸애(兼愛)는 묵자(墨子)의 한마디 말이었지만 끝내 부모와 군주가 없게 되는 지경에 이르고176), 사람의 본성이 버드나무와 같다는 것은 고자(告子)의 한마디 말이었지만 끝내 천하 사람을 이끌어 인의(仁義)에 화를 끼치는 지경에 이르는 것177)이 세도(世道)에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을 성현(聖賢)이 이미 말했다. 이것으로 그의 말을 헤아려보면 그의 한마디 말의 매서운 화가 어찌 이미 효험으로 드러났던 묵자와 고자 두 사람의 말보다 덜하겠는가. 그래서 내가 특별히 붓을 떨쳐 논한다. 野儒無言責官守, 國亡不死無責. 然其守身歸潔之義, 關華夷防重而爲天下之望. 使天下夷, 而 儒能不夷, 則天下猶華也, 天下華, 而儒不能華, 則天下卽夷也, 其重不特言責官守. 故古人謂" 儒者守節爲拗天." 然則儒者畏死失節而亡華, 罪有甚於言責官守畏死失節而亡國, 其嚴乎. 節 士其有聞於此義者歟. 嗚呼! 偉哉烈哉.夫辭者, 效之先也, 有其辭, 則必有是效, 不於身則於人, 不於今則於後, 未有有其辭而無其效者也. 張子曰: "命辭無差, 然後斷事無失." 蓋爲此也. 故君子必於立言而謹愼焉. 余觀吳震泳〈鄭節士傳〉有曰: "使天下夷, 而儒能不夷, 則天下猶華也." 此則可也, 而繼之曰: "天下華, 而儒不能華, 則天下卽夷也." 則此以儒爲可華可夷者, 以華爲可儒可夷者之說也. 混華夷爲儒, 儒夷爲華, 儒華之本面, 皆安在也? 徇名求實, 則儒華之不待坑猾而亡滅者, 業已久矣. 兼愛, 墨子之一言也, 終至於無父無君矣, 性猶杞柳, 告子之一言也, 終至於率天下而禍仁義者. 世道之卽事, 聖人之已言也. 以此準彼, 彼其一言之禍烈, 豈減於墨告二子之言之已效者耶? 故余特奮筆論之. 정절사 정승원(鄭升源, 1868~1934)를 가리키는 것으로, 자는 덕여(德汝)이고,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일제가 강제로 머리를 자르려고 하자 1934년(67세) 10월에 "이 백의(白衣)와 백발(白髮)을 보존하여 지하로 돌아가 부모를 뵐 것이다.〔存此白衣白髮, 歸見父母地下.〕"라는 말과 절명시(絶命詩), 절명사(絶命詞)를 남기고 목을 매어 순절하였다고 한다. 《石農集 卷31 鄭節士傳》 말에 …… 없다 《근사록집해(近思錄集解)》 권14 〈관성현(觀聖賢)〉에 나오는 말이다. 장자(張子)가 일찍이 문인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학문이 마음에 얻어지면 말을 닦아야 한다. 말에 잘못이 없는 뒤에야 일을 결단하고, 일을 결단함에 실수가 없어야 내가 비로소 패연(沛然)하게 되니, 의리를 정밀하게 하여 신묘한 경지에 들어가는 것은 미리 대비할 뿐이다.〔吾學旣得於心, 則修其辭, 命辭無差, 然後斷事, 斷事無失, 吾乃沛然, 精義入神者, 豫而已矣.〕" 하였다. 겸애(兼愛)는 …… 이르고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사랑한다는 묵적(墨翟)의 겸애주의와 자신만을 위한다는 양주(楊朱)의 개인주의의 유폐(流弊)를 지적한 맹자의 말로,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 "양주는 자신만을 위하니, 이것은 군주를 없이 여기는 것이다. 묵적은 모두 사랑 하니, 이것은 부모를 없이 여기는 것이다. 부모와 군주가 없다면 이것은 금수와 다를 바가 없다.〔楊氏爲我, 是無君也, 墨氏兼愛, 是無父也. 無父無君, 是禽獸也.〕"라는 구절이 보인다. 사람의 …… 것 고자(告子)가 "사람의 본성은 버드나무와 같고, 의는 버드나무로 만든 그릇과 같으니, 사람의 본성으로 인이나 의를 하게 하는 것은 마치 버드나무를 구부려서 버들 그릇을 만드는 것과 같다.〔性猶杞柳也, 義猶桮棬也, 以人性爲仁義, 猶以杞柳爲桮棬.〕"라고 하자, 맹자가 "만약 버드나무를 상하게 하면서 그릇을 만든다면 또한 장차 사람을 상하게 하면서 인의를 행하도록 하겠다는 것인가. 천하 사람을 몰아 인의를 해치게 하는 것은 반드시 그대의 이 말일 것이다.〔如將戕賊杞柳而以爲桮棬, 則亦將戕賊人以爲仁義歟? 率天下之人而禍仁義者, 必子之言.〕"라고 하여 그 유폐(流弊)를 지적하였다. 《孟子 告子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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