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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파 및 김태형 성하 와 망제봉에 올라서 同松坡及金台亨【性夏】 上望帝峯 시든 꽃 지르밟으며 푸른 산에 오르니 踏破殘花上翠微봄 빛과 시력이 함께 아른아른 하구나 春光眼力共依依하늘에 맞닿은 대륙이 어찌 끝이 있으랴만 際天大陸何涯限티끌 한 점도 날아들지 않는 땅은 없구나315) 無地纖塵一點飛두 객과 시와 술 즐기니 지금의 적벽316)이요 二客詩樽今赤壁영걸들은 바람 쐬고 목욕하며 봄옷 입었네317) 羣英風浴又曾衣기적 소리 울리고 청산은 저무는데 一聲汽笛靑山暮강북과 강남엔 지친 새들 돌아가네 江北江南倦鳥歸 踏破殘花上翠微, 春光眼力共依依.際天大陵何涯限, 無地纖塵一點飛.二客詩樽今赤壁, 羣英風浴又曾衣.一聲汽笛靑山暮, 江北江南倦鳥歸. 티끌 …… 없구나 온 땅이 오랑캐들로 오염되었다는 뜻이다. 지금의 적벽 중국의 적벽(赤壁)에서 있었던 옛 풍류를 지금 망제봉에서 즐기고 있다는 말이다. 적벽은 양자강(楊子江) 가에 있는 지명이다. 북송(北宋)의 소식(蘇軾)이 두 차례에 걸쳐 적벽 아래 강에서 객(客)들과 함께 선유(船遊)하면서 풍류를 즐기고 〈전적벽부(前赤壁賦)〉와 〈후적벽부(後赤壁賦)〉를 지었다. 바람 …… 입었네 일행이 봄옷을 입고 산수를 즐기는 모습을 말한 것이다. 원문의 '증의(曾衣)'는 증점(曾點)의 옷인데, 봄옷을 비유한 것이다. 공자(孔子)가 제자들에게 저마다 자신의 뜻을 말해보라고 하자 증점(曾點)이 "늦봄에 봄옷이 만들어지면 관을 쓴 어른 대여섯과 아이 예닐곱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며 돌아오겠습니다.[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라고 한 데서 인용한 것이다. 《論語 先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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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상322)에 상복을 벗은 뒤 감회를 쓰다 무진년(1928), 아래도 같다. 國恤除服後 感題 【戊辰下同】 승하323)하신 지 삼년이 홀연 지났으니 弓劒三霜倏忽過거친 산에서 한바탕 곡한들 어찌하리오 荒岡一哭柰如何풍천324)에선 천 년 주나라 시절 슬퍼하고 風泉千古周時咽융마325)에는 당대 두보의 한이 많았었지 戎馬當年杜恨多이슬 띤 바위의 꽃은 어리석게 조는 듯하고 帶露巖花癡似睡나른한 봄날의 들새는 권태로이 노래하네 病春野鳥倦呼歌누가 교만한 오랑캐326) 수급을 대나무에 걸고 誰歟竿揭天驕首통쾌하게 만리 강물에 병장기를 씻을 것인가 快洗兵戈萬里河 弓劒三霜倏忽過, 荒岡一哭柰如何.風泉千古周時咽, 戎馬當年杜恨多.帶露巖花癡似睡, 病春野鳥倦呼歌.誰歟竿揭天驕首, 快洗兵戈萬里河. 국상[國恤] 순종황제의 국상을 말한다. 1926년 3월 14일 5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승하 원문의 '궁검(弓劒)'은 활과 검으로 황제의 죽음을 비유한다. 옛날 황제(黃帝)가 용을 타고 승천할 때 신하들이 용의 수염을 부여잡고 매달리다가 수염이 끊어지며 떨어지고 말았는데, 이때 황제의 활과 검도 함께 떨어져 신하들이 그 활과 검을 안고 통곡한 데서 유래하였다. 《史記 卷28 封禪書》 풍천(風泉) 《시경》의 편명인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을 합칭한 것으로, 모두 주(周)나라 왕실(王室)이 쇠망한 것을 슬퍼하는 내용이다. 융마(戎馬) 전쟁을 비유한 것이다. 두보(杜甫)가 전란을 피해 떠도는 중 지은 〈등악양루(登岳陽樓)〉에 "관산의 북쪽 중원 땅엔 아직도 전쟁이라, 난간에 기대서니 눈물이 흐르네.[戎馬關山北, 憑軒涕泗流.]"라고 하였다. 교만한 오랑캐 원문의 '천교(天驕)'는 본래 세력이 강대한 오랑캐를 가리키는 말이다. 한 무제(漢武帝) 때 흉노의 선우(單于)가 글을 보내면서 "우리 호인은 하늘의 교만한 아들이다.[胡者, 天之驕子也.]"라고 자칭했다는 데에서 유래하였다. 《漢書 卷94 匈奴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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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제군에게 주다 贈崔氏諸君 산남362)의 종족이 성대했던 게 옛날 언제였나 山南盛族昔何年적선한 그대들 집안이 다시 그러기를 기대하네 積善君家期復然이미 순박한 기풍이 석씨에게 돌아갔다 읊었고363) 已誦淳風歸石氏때로 고상한 선비를 보면 진연을 베풀었네364) 時看高士下陳筵얼마나 많은 학업을 모래로 옥을 다듬듯했나 幾多學業沙磨玉게다가 지닌 강한 심장은 철을 솜에 싼듯하네 更有剛腸鐵裹綿모든 건 후생이 부지런히 잇는 데 달렸으니 總在後生勤繼述바다와 같은 복을 끝없이 드넓게 해야 하리 須令福海浩無邊 山南盛族昔何年, 積善君家期復然.已誦淳風歸石氏, 時看高士下陳筵.幾多學業沙磨玉, 更有剛腸鐵裏綿.總在後生勤繼述, 須令福海浩無邊. 산남(山南) 당(唐)나라 때 산남서도 절도사(山南西道節度使)를 지낸 최관(崔琯)을 말한다. 최관의 증조모 장손 부인(長孫夫人)이 나이가 많아 치아가 없어 밥을 먹지 못하자, 최관의 조모 당 부인(唐夫人)이 수년 동안 시어머니인 장손 부인에게 젖을 먹이는 등 효성이 지극하였다. 장손 부인은 임종에 "며느리의 은혜를 갚을 수 없으니, 며느리의 자손들이 모두 며느리처럼 효도하고 공경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된다면 최씨의 가문이 어찌 창대하지 않겠느냐."라고 하였다. 《小學 善行》 이미……읊었고 최씨 집안이 석씨처럼 순박한 기풍을 갖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인정했다는 뜻이다. '석씨(石氏)'는 한 경제(漢景帝) 때의 대부(大夫)였던 석분(石奮)을 말한다. 그와 아들 네 명이 2000석(石)의 봉록을 받았으므로 만석군으로 일컬어졌는데 "만석군의 집안은 효성과 근신함으로 군국에 알려졌는데 비록 제나라와 노나라의 유학자들도 질박한 행실에는 모두 스스로 미치지 못한다고 여겼다.[萬石君家以孝謹聞乎郡國, 雖齊魯諸儒質行, 皆自以爲不及也.]"라고 하였다. 《史記 卷103 萬石君列傳》 때로……베풀었네 빈객들을 후대했다는 뜻이다. '진연(陳筵)'은 진준(陳遵)의 잔치를 말한다. 《한서(漢書)》 권92 〈진준전(陳遵傳)〉에 "진준은 술을 좋아했다. 매번 큰 술자리를 베풀어서 빈객들이 당에 가득하면 곧 문을 잠그고 객의 수레 빗장을 우물 안에 던져버렸기에,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갈 수 없었다.[每大飮, 賓客滿堂, 輒關門, 取客車轄投井中, 雖有急, 終不得去.]"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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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연풍 군에게 주다 贈張君然豊 나는 장씨의 아들을 사랑하노니 我愛張氏子순박한 자질이 곤륜산 박옥330) 같지 純質璞在崑기만하지 않음은 군실의 성실이요331) 不欺君實誠부지런히 독서함은 사행의 근면이네332) 劇讀士行勤응당 관문을 뚫는 날을 기다린다면 應待透關日곧 그 근원을 만남333)을 깨달으리 方覺逢其源비유하면 저 다듬고 난 뒤의 옥처럼 譬彼經琢玉휘황한 빛이 정히 찬란하리라 光輝正燦斕얼마나 많던가 가볍고 약싹빠른 무리들 幾多便儇輩월나라 간다면서 왜 북으로 수레 모나334) 適越笑335)北轅단지 원하는 건 경지를 넓히는 것이니 但願拓地步주역에선 관대히 거하라336) 가르쳤다네 大易訓居寬태산337)은 푸름을 변치 않나니 台山靑不改오늘의 말을 저버리지 말게나 莫負此日言 我愛張氏子, 純質璞在崑.不欺君實誠, 劇讀士行勤.應待透關日, 方覺逢其源.譬彼經琢玉, 光輝正燦斕.幾多便儇輩, 適越笑1)北轅.但願拓地步, 大易訓居寬.台山靑不改, 莫負此日言. 곤륜산 박옥 곤륜산(崑崙山)은 옥이 아주 많이 생산되는 곳이고 박옥(璞玉)은 가공하기 전의 순수한 옥이다. 한(漢)나라 환관(桓寬)의 《염철론(鹽鐵論)》에 "중국에 희귀한 것을 외국에서는 천히 여긴다. 그러므로 남월에서는 공작의 깃털을 문호에 치장하고, 곤륜산 주위에서는 옥박을 까치에게 던지기도 한다.[中國所鮮, 外國賤之. 故南越以孔雀珥門戶, 崑山之旁, 以玉璞抵鳥鵲.]"라고 하였다. 기만하지 …… 성실이요 장연풍이 매우 성실하다는 뜻이다. '군실(君實)'은 송(宋)나라 사마광(司馬光)의 자이다. 유안세(劉安世)가 스승인 사마광에게 마음을 다하고 몸을 닦는 요체로서 죽을 때까지 행할 만한 것이 무엇인지 묻자, 사마광이 대답하기를 "그것은 성일 것이다.[其誠乎.]"라고 하였다. 《小學 卷6 善行》 부지런히 …… 근면이네 장연풍이 매우 부지런히 공부하다는 뜻이다. '사행(士行)'은 진(晉)나라 명장 도간(陶侃)의 자이다. 항상 사람들에게 "대우는 성인인데도 촌음을 아꼈으니, 보통 사람들의 경우에는 응당 분음을 아껴야 할 것이다."라고 하는 등 근면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晉書 卷66 陶侃列傳》 그 근원을 만남[逢其原] 자득(自得)을 통해 학문의 경지가 높아지면, 모든 주변의 사물에서 도(道)의 근원을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군자가 깊이 나아가기를 도(道)로써 함은 그 자득하고자 해서이니, 자득하면 처하는 것이 편안하고, 처하는 것이 편안하면 자뢰함이 깊고, 자뢰함이 깊으면 좌우에서 취함에 그 근원을 만나게 된다.[君子深造之以道, 欲其自得之也. 自得之則居之安, 居之安則資之深, 資之深則取之左右, 逢其原.]"라고 하였다. 월나라 …… 모나 수레의 멍에를 북쪽으로 돌리고 도리어 남쪽인 월(越) 나라로 간다는 뜻으로 언행이 상반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戰國策 魏策4》 笑 원문의 '笑'는 '奚'의 잘못인 듯하다. 주역에선 관대히 거하라 관대한 자세를 유지하라는 뜻이다. 《주역》에 "군자는 배워서 취합하고 물어서 변별하며 관대하게 거하고 인후하게 행한다.[君子學以聚之, 問以辯之, 寬以居之, 仁以行之.]" 라고 하였다. 《周易 乾卦 文言》 태산(台山) 전라북도 정읍시의 천태산(天台山)을 가리키는 듯하다. 笑 '奚'의 잘못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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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봉식 군에게 주다 贈景君奉植 배움은 정밀을 추구하되 여유롭게 해야하고 學求精切更優遊활 비율339)은 먼저 과녁의 표적을 봐야하네 彀率先看的在侯칠일이면 어느 때나 우레가 땅을 울리고340) 七日何時雷動地일천 성현의 마음 한결같이 가을 달처럼 맑네 一心千聖月澄秋껍질을 벗기며 세 겹의 속까지 깊이 들어가고 剝皮深入三重內앞으로 내딛어 백척간두에서 높이 나아가야지341) 進步高趨百尺頭뛰어난 자질이 그대와 같기는 쉽지 않으니 妙質如君非易易인을 행할 뿐 다른 것을 따르지 않아야 하리342) 爲仁只可不他由 學求精切更優遊, 彀率先看的在侯.七日何時雷動地, 一心千聖月澄秋.剝皮深入三重內, 進步高趨百尺頭.妙質如君非易易, 爲仁只可不他由. 활 비율 '구율(彀率)'은 활을 당기는 한계를 말한다.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예는 활 못 쏘는 사람을 위하여 활 당기는 한계를 변경하지 않는다.[羿不爲拙射, 變其彀率.]"라고 하였다. 칠일이면 …… 울리고 7일(日)의 '일(日)'은 '월(月)'의 뜻으로 즉 7개월 만에 양효(陽爻)가 아래에서 하나 생겨나서 양이 회복됨을 말한다. 《주역》 〈복괘(復卦)〉 괘사(卦辭)에 "그 도(道)를 반복하여 7일 만에 와서 회복하니, 가는 바를 둠이 이롭다.[反復其道, 七日來復, 利有攸往.]"라고 하였다. '우레[雷]'는 《주역》 〈복괘(復卦) 상(象)〉에 "우레가 땅 가운데 있음이 복(復)이다.[雷在地中, 復]"라고 하였다. 앞으로 …… 나아가야지 일정한 경지에 올라 있더라도 더 높은 경지를 향해 부단히 노력해야 함을 뜻한다. 당나라 때의 명승인 초현대사(招賢大師)의 게송(偈頌)에 "백 척이나 되는 장대 끝에서 모름지기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어야 시방세계의 이치가 이 몸에 온전해지리라.[百尺竿頭須進步, 十方世界是全身.]"라고 하였다. 《景德傳燈錄》 인을 …… 하리 《논어》 〈안연(顔淵)〉에 "인을 하는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으니, 남에게 달려 있는 것이겠는가.[爲仁由己, 而由人乎哉?]"라고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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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오일 초강에서 노닐며 五月五日 遊楚江 오월 오일 초강에는 五月五日楚江中나부끼는 네가래 푸르고 비젖은 여뀌 붉네 風蘋靑靑雨蓼紅내 두 줄기 눈물 떨궈 삼려230)를 조문하니 我淚雙墮吊三閭머나먼 옛날 지명과 우연히도 똑같구나231) 千古偶因地名同언영232) 때의 일은 어찌 그리 잘못되었나 鄢郢時事一何錯둔마를 상양으로 여겨233) 준마를 버렸네 上襄駑駘棄駿驄간서는 구름처럼 많았으나 하늘은 멀어 諫書如雲天邈邈의담과 충간들234) 피로 가슴을 채웠도다 義膽忠肝血塡胸깨끗한 몸으로 어찌 더러움을 받으리오 皜皜安能受汶汶물고기 뱃속에 잘 묻히면 만사가 끝인 것을235) 好藏魚腹萬事終가을 하늘의 밝은 해와 광결함을 다투었고236) 秋天皎日爭光潔곤룡포의 기림이 빛나니 회옹을 만났구나237) 袞褒燁燁遇晦翁아 오늘이 무슨 날이던고 吁嗟今日是何日맥수와 서리238)의 슬픈 곡조에 오열하네 麥秀黍離咽悲風먼 뒷날에 참된 의리를 더 심히 느끼니 曠感義諦殆有甚천 길 흰 물속이라도 따를 만하다네 千丈白水可相從뻔뻔하게 구차히 사는 건 남자가 아니니 靦然苟活非男子아득히 백세토록 부끄러움 끝이 없으리 悠悠百世愧無窮한 잔 술을 붓고 나니 긴 강은 저물고 一樽酹罷長江暮백구는 푸른 산 하늘로 다 날아가구나 白鷗飛盡碧山空 五月五日楚江中, 風蘋靑靑雨蓼紅.我淚雙墮吊三閭, 千古偶因地名同.鄢郢時事一何錯, 上襄駑駘棄駿驄.諫書如雲天邈邈, 義膽忠肝血塡胸.皜皜安能受汶汶, 好藏魚腹萬事終.秋天皎日爭光潔, 袞褒燁燁遇晦翁.吁嗟今日是何日, 麥秀黍離咽悲風.曠感義諦殆有甚, 千丈白水可相從.靦然苟活非男子, 悠悠百世愧無窮.一樽酹罷長江暮, 白鷗飛盡碧山空. 삼려(三閭) 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충신으로, 조정에서 삼려대부(三閭大夫)로 있다가 모함을 받고 쫓겨난 뒤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져 죽은 굴원(屈原)을 말한다. 머나먼 …… 똑같구나 굴원(屈原)이 쫓겨나서 멱라수(汨羅水)에 빠져 죽기 직전까지 배회하던 소상강(瀟湘江) 일대를 '초택(楚澤)'이라 하니, 지금 초강(楚江)과 이름이 비슷하다는 뜻이다. 언영(鄢郢) 춘추 시대 초나라의 도읍지들인데 여기서는 초나라를 가리킨다. 초나라 문왕(文王)이 처음 영(郢) 땅에 도읍했다가 혜왕(惠王) 때 언(鄢) 땅으로 도읍을 옮겨서도 그대로 영이라 불렀다. 둔마를 상양으로 여겨 둔마를 좋은 말로 여겼다는 뜻이다. '노태(駑駘)'는 둔한 말이다. '상양(上襄)'은 가장 좋은 말이다. 《시경(詩經)》 〈대숙우전(大叔于田)〉에 "두 마리 복마는 가장 좋은 말이요 두 마리 참마는 기러기처럼 뒤따라 가도다.[兩服上襄, 兩驂鴈行.]"라고 하였는데 주희 집전에 "양(襄)은 멍에이니, 말의 상품(上品)을 상가(上駕)라 하니, 상사(上駟)라는 말과 같다.[襄, 駕也, 馬之上者爲上駕, 猶言上駟也.]"라고 하였다. 의담과 충간들 의롭고 충성스런 마음을 가진 신하들을 말한 것이다. 깨끗한 …… 것을 《초사(楚辭)》 〈어부(漁父)〉의 "차라리 소상강 강물에 뛰어들어 강 물고기의 뱃속에 장사될지언정, 어찌 희디흰 결백한 몸으로 세속의 더러운 먼지를 뒤집어쓰겠는가.[寧赴湘流, 葬於江魚之腹中, 安能以皓皓之白, 而䝉世俗之塵埃乎.]"라고 하였다. 가을 …… 다투었고 《사기(史記)》 〈굴원열전(屈原列傳)〉에 굴원(屈原)의 결백한 절조를 말하여 "그의 뜻을 미루어보면 그는 해와 달과도 빛을 다투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推此志也, 雖與日月爭光可也.]"라고 하였다. 곤룡포의 …… 만났구나 굴원(屈原)이 주희(朱熹)의 평가를 통해 영광스러운 칭찬을 받게 되었다는 말이다. '곤룡포의 기림'은 지극히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을 말한다. 진(晉)나라 범녕(范甯)의 〈춘추곡량전 서(春秋穀梁傳序)〉에 "《춘추》의 한 글자의 칭찬이 화곤을 받는 것보다도 영광스럽고, 한마디의 비판이 시장에서 맞는 회초리보다도 욕되다.[一字之褒, 寵逾華袞之贈, 一言之貶, 辱過市朝之撻.]"라는 말이 나온다. '회옹(晦翁)'은 남송(南宋)의 학자 주희(朱熹)의 호이다. 맥수(麥秀)와 서리(黍離) 나라가 망한 것을 슬퍼한 노래들이다. 〈맥수(麥秀)〉는 은(殷)나라가 망한 뒤에 기자(箕子)가 주(周)나라에 조회하러 가는 길에 은나라의 옛터를 지나가다가 궁실이 다 허물어진 모습을 보고 지었다. 《史記 宋微子世家》. 〈서리(黍離)〉는 《시경》의 편명으로, 동주(東周)의 대부가 멸망한 서주(西周)의 옛 도읍을 지나가다가 옛 궁실과 종묘가 폐허로 변한 것을 보고 지은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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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무 족숙 낙기에게 드리다 贈敬武族叔【洛基】 편안하고 고요해야 원대한 공 이루고283) 寧靜致遠功총명은 공경으로 말미암아 나온다네284) 聰明由敬出제갈량과 정자 두 현인의 말씀은 葛程二賢語천년토록 배움의 비결이라네 千秋爲學訣더구나 또 자질이 부족하니 矧復不逮資가슴에 새김을 어찌 감히 소홀히 하랴 服膺豈敢忽백리길을 양식을 싸들고 가니 百里爲裹糧부형들은 정성과 최선을 다했네 父兄誠且竭바라는 바는 귀허와 같으니285) 所望如歸虛직분에도 빠뜨림이 없어야 하네 分職能無闕성문286)에는 두 글자가 있으니 聖門有二字분과 비287)가 바로 핵심이라네 憤悱卽機栝남들은 모두 준마의 발로 달리는데 人皆驥足展나는 왜 둔마의 걸음마저 굽히는가 我胡駘步屈먹고 숨쉬는 순간도 이 마음 보존해 食息存此心정과 경을 생활로 삼아야한다네 靜敬作計活나는 수주288)를 받들듯이 하여 吾爲奉隋珠유일무이한 물건으로 여긴다네 視爲無雙物일찍이 들으니 안면이 없었더라도 曾聞無面目인정은 오래되면 친밀해진다네 人情久親密큰 공업이 이뤄진289) 뒤에도 九仞功成後응당 오늘을 잊지 않으리라 應不忘此日 寧靜致遠功, 聰明由敬出.葛程二賢語, 千秋爲學訣.矧復不逮資, 服膺豈敢忽.百里爲裹糧, 父兄誠且竭.所望如歸虛, 分職能無闕.聖門有二字, 憤悱卽機栝.人皆驥足展, 我胡駘步屈.食息存此心, 靜敬作計活.吾爲奉隋珠, 視爲無雙物.曾聞無面目, 人情久親密.九仞功成後, 應不忘此日. 편안하고 …… 이루고 제갈량(諸葛亮)이 아들 제갈첨(諸葛瞻)을 경계한 글에 "군자의 행실은 고요함으로 몸을 닦고, 검소함으로 덕을 기르나니, 담박하지 않으면 뜻을 밝힐 수 없고, 편안하고 고요하지 않으면 원대함을 이룰 수 없다.[君子之行, 靜以修身, 儉以養德. 非澹泊, 無以明志; 非寧靜, 無以致遠.]"라는 말이 나온다. 《小學 嘉言》 총명은 …… 나온다네 정이(程頤)가 "총명예지가 모두 이 공경으로 말미암아 나오니, 이로써 하늘을 섬기고 상제에 제향하는 것이다.[聰明睿知皆由是出, 以此事天饗帝.]"라고 한 말이 있다. 《近思錄 卷4 存養》 귀허와 같으니 끝없이 노력하라는 뜻이다. 원문의 '귀허(歸虛)'는 '귀허(歸墟)'와 같은 것으로, 전설상 바다 속에 있는 밑 없는 골짜기로 모든 물이 모이는 곳이라 한다. 《열자(列子)》 〈탕문(湯問)〉에 "발해(渤海)의 동쪽 몇 억만 리가 되는지 모를 정도의 지점에 큰 골짜기가 있는데 실로 밑이 없는 골짜기이다. 그 아래에는 밑이 없으니 이름하여 '귀허(歸墟)'라 한다.[渤海之東, 知幾億萬里, 有大壑焉, 實惟無底之谷. 其下無底, 名曰歸墟.]" 하였다. 성문(聖門) 공자(孔子)의 문하로 유학을 말한다. 분과 비[憤悱] 학문을 갈구하여 분발하는 것을 가리킨다. '분(憤)'은 깨닫지 못해서 분하게 여기는 것이고, '비(悱)'는 말로 제대로 표현할 줄 몰라서 더듬거리는 것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마음속으로 알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열어주지 않으며, 말로 나타내고자 애태워하지 않으면 말해주지 않는다.[不憤不啓, 不悱不發.]" 하였다. 《論語 述而》 수주(隋珠) 수후(隋侯)가 얻은 구슬로, 매우 진귀한 보물이다. 《회남자(淮南子)》 〈남명훈(覽冥訓)〉에 "비유하자면 수후의 구슬과 화씨(和氏)의 구슬을 얻는 자는 부유해지고 잃는 자는 가난해지는 것과 같다.[如隋侯之珠ㆍ和氏之璧, 得之者富, 失之者貧.]"라고 하였는데, 고유(高誘)의 주(注)에 "수후는 한(漢)나라 동쪽에 있는 나라의 희성(姬姓)을 가진 제후이다. 수후가 배가 갈라진 큰 뱀을 보고 약을 발라 치료해 주었는데, 후일에 그 뱀이 강 속에서 큰 구슬을 물고 나와 보답하였다. 그래서 '수후의 구슬[隋侯之珠]'이라고 하였다." 하였다. 큰 공업이 이뤄진 '구인(九仞)'은 아홉 길 높이로 매우 높은 것을 말한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여 목표를 이룬다는 말이다. 《서경(書經)》 〈여오(旅獒)〉에 "밤낮으로 부지런하지 못한 점이 혹시라도 있지 않게 해야 한다. 자그마한 행동이라도 신중히 하지 않으면 끝내는 큰 덕에 누를 끼칠 것이니, 이는 마치 아홉 길의 산을 만들 적에 한 삼태기의 흙이 부족하여 그 공이 허물어지는 것과 같다.[夙夜罔或不勤, 不矜細行, 終累大德, 爲山九仞, 功虧一簣.]"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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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 변죽남 규원 이 방문했기에 함께 짓다 4수 竹南邊友【圭源】見訪共賦 【四首】 백리 멀리서 그리워했던 적이 몇 번이었나 百里相思問幾回창가의 매화는 작년보다 배는 더 피었구나 牕梅添發去年培이곳에서 마음 통하는343) 눈을 반갑게 들고 靑擡此地通犀眼당년에 의마의 재주344)로 문예를 겨뤘지345) 白戰當年倚馬才풍진세상 바둑처럼 뒤집힌다346) 다투어 말하나 爭道風塵飜似奕뜻과 기개를 재처럼 식게 하기는 어렵다네347) 難敎志氣死如灰마음을 다 말을 못해 도리어 이별도 잊으니 話心未了還忘別강가 정자에서 늙은 버들 꺾어주지 못하네348) 不向江亭老柳摧오객349)의 시통은 갑절이나 늘어났으니 鰲客詩筒一倍增부끄럽게도 대적하기 어려운 게 남증350) 같네 愧難爲敵似南曾뱁새의 거처 우스워라 작은 가지 빌렸는데351) 鷦居堪笑微柯借붕새의 뜻은 만리를 오르고도 남으리352) 鵬志應餘萬里騰밝은 달은 어느 밤이나 강물을 비출까 明月何宵江上照한가한 구름은 종일 산마루에 엉겨있네 閒雲盡日嶺頭凝우리 돌아가 머물 곳353) 어디인지 알지만 吾人歸宿知攸在쉽게 할 수 있는 때가 정작 하기 어렵네 可易能時正未能세상 길에 쓸쓸히 갈 길 몰라 헤매다 塵途落落困迷津훌쩍 세월 흘러 홀연 오십이 되었구나 輥到光陰忽五旬거나한 술자리에서 만난 영해의 객은 酒半相逢瀛海客눈 속에 함께 섰던 계화도 문인이네354) 雪中俱立華門人비둔은 원래 비쩍 야윌 일이 없는데355) 肥遯元非生太瘦가짜 굴원이 진짜 난초 차는 걸 누가 허락하랴 僞原孰許佩蘭眞애써 남은 생애에 함께 손을 잡고 勉將餘日同携手오대356)의 만고의 봄을 한 번 보세나 請看鰲台萬古春돌아가는 죽남의 두 발걸음 가벼우니 竹南歸屐一雙輕삼일이나 무슨 일로 부성에 머물렀나 三日緣何滯阜城예로부터 구름산에서 이별 읊기 어려운데 從古雲山難賦別지금 양춘백설가357)를 누가 높이 읊는가 至今春雪孰高聲하늘이 머물려 두려는 듯 종일 비가 내리고 雨連盡日天留意범이 횡행하듯 거친 길에 먼지가 자욱하네 塵黑荒程虎恣行다시 석초358)가 와서 셋이 앉았는데 更有石蕉來鼎坐농사철 뻐꾸기가 울어댈까 걱정이네359) 却恐農節穀鳩鳴 百里相思問幾回, 牕梅添發去年培.靑擡此地通犀眼, 白戰當年倚馬才.爭道風塵飜似奕, 難敎志氣死如灰.話心未了還忘別, 不向江亭老柳摧.鰲客詩筒一倍增, 愧難爲敵似南曾.鷦居堪笑微柯借, 鵬志應餘萬里騰.明月何宵江上照, 閒雲盡日嶺頭凝.吾人歸宿知攸在, 可易能時正未能.塵途落落困迷津, 輥到光陰忽五旬.酒半相逢瀛海客, 雪中俱立華門人.肥遯元非生太瘦, 僞原孰許佩蘭眞.勉將餘日同携手, 請看鰲台萬古春.竹南歸屐一雙輕, 三日緣何滯阜城.從古雲山難賦別, 至今春雪孰高聲.雨連盡日天留意, 塵黑荒程虎恣行.更有石蕉來鼎坐, 却恐農節穀鳩鳴. 마음 통하는 원문의 '통서(通犀)'는 영험이 있는 무소의 뿔을 말하는데, 백색의 무늬가 양쪽 끝으로 통해 있는 것은 그 감응이 아주 빠르다고 한다. 이상은(李商隱)의 〈무제(無題)〉 시에, "몸에는 쌍으로 나는 채봉의 두 날개가 없으나, 마음에는 서로 통하는 한 가닥 영서가 있네.[身無彩鳳雙飛翼, 心有靈犀一點通.]" 하였다. 의마의 재주[倚馬才] 말에 기대어 글을 짓는 재주로, 민천합 문재(文才)를 말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 〈문학(文學)〉에 "환 선무(桓宣武)가 북벌할 때 원호(袁虎)가 종군하다 문책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마침 포고문이 필요하여 원호를 불러 말 앞에 기대어 글을 짓게 하니, 원호는 손에 든 붓을 쉬지 않고 놀려 잠깐 사이에 7장을 썼는데, 매우 볼 만하였다.[桓宣武北征, 袁虎時從, 被責免官. 會須露布文, 喚袁倚馬前令作, 手不輟筆, 俄得七紙, 殊可觀.]"라고 하였다. 문예를 겨뤘지 원문의 '백전(白戰)'는 본래 특정한 어휘를 쓰지 않고 시를 지어 솜씨를 겨루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송나라 구양수(歐陽脩)가 취성당(聚星堂)에서 빈객들과 눈[雪]에 대한 시를 지으면서, 눈과 관련된 글자들을 쓰지 못하게 했는데, 그 뒤 소식이 빈객들과 함께 시를 지을 때에 구양수가 정했던 규칙을 지키며 〈취성당설(聚星堂雪)〉이라는 시를 지었다. 그 시의 끝 구절에 "당시의 규칙을 그대들은 따를지니, 맨손으로 싸워야지 무기를 잡으면 아니되네.[當時號令君聽取, 白戰不許持寸鐵.]"라고 하였다. 바둑처럼 뒤집힌다 변화무쌍한 것을 말한다. 뜻과 …… 어렵다네 죽남의 뜻과 기개는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늙은 …… 못하네 원문의 '유최(柳摧)'는 '절류(折柳)'의 고사를 말한다. 버들은 꺾어주는 것은 이별을 뜻하는 말이다. 한(漢)나라 때 장안(長安) 사람들이 나그네를 송별할 때 장안 동쪽에 있던 파교(灞橋)까지 가서 다리 가의 버들가지를 꺾어 준[折柳] 고사가 있다. 《三輔黃圖 橋》 오객(鰲客) 장성의 옛이름이 '오산(鰲山)'으로 장성에서 온 죽남을 가리킨다. 남증(南曾)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호가 남풍(南豐)인 송나라 정치가이자 학자 증공(曾鞏)을 가리킨다. 죽남을 비유한 것이다. 뱁새의 …… 빌렸는데 '뱁새'는 자신을 비유한 것이다. 《장자(莊子)》 〈소요유(消遙遊)〉에 "뱁새가 깊은 숲속에 둥지를 틀 때 나뭇가지 하나에 지나지 않고, 두더지는 황하의 물을 마셔도 제 배를 채우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鷦鷯巢於深林, 不過一枝, 偃鼠飮河, 不過滿腹.]"라고 하였다. 붕새의 …… 남으리 '붕새'는 죽남을 비유한 것이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붕새가 남쪽 바다로 날아갈 때는 물결을 3천 리나 박차고 회오리바람을 타고 9만 리나 날아올라가 6달을 가서야 쉰다.[鵬之徙於南冥也, 水擊三千里, 搏扶搖而上者九萬里, 去以六月息者也.]"라고 하였다. 돌아가 머물 곳 성현(聖賢)의 도를 말한다. 눈 …… 문인이네 눈 속에 함께 섰다는 것은 '정문입설(程門立雪)'에서 유래하여 스승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는 뜻이다. 《宋史 道學列傳 楊時》. '계화도(繼華島)'는 본래 전라북도 부안군에 있는 계화도(界火島)인데, 간재(艮齋) 전우(田愚)가 이곳에 정착하여 제자를 양성하며 중화(中華)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계화도(繼華島)라고 고쳐 불렀다. 비둔은 …… 없는데 편안히 은둔함으로 야위지 않는 것이다. 원문의 '비둔(肥遯)'은 여유 있는 마음으로 은둔하는 것을 말한다. 《주역(周易)》 〈돈괘(遯卦) 상구(上九)〉에 "상구는 여유 있는 은둔이니, 이롭지 않음이 없다.[上九肥遯, 無不利.]"라고 하였다. 오대(鼇台) 오대(鰲臺)를 말하는데 전설상의 신선이 사는 곳을 말한다. 《열자(列子)》 〈탕문(湯問)〉에 "발해의 동쪽에 깊이를 알 수 없는 큰 골짜기가 있는데 가운데에 다섯 개의 산이 있다. 언제나 조류에 따라 위아래로 표류하므로 천제(天帝)가 다섯 개의 산이 서쪽으로 흘러가 신선이 사는 곳을 잃을까 걱정하여 15마리의 자라[鰲]를 시켜 번갈아 가며 머리로 떠받치고 있도록 하여 마침내 다섯 개의 산이 안정되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양춘백설가(陽春白雪歌) 매우 뛰어난 시를 뜻한다. 송옥(宋玉)의 대초왕문(對楚王問)이란 글에 나오는 고사이다. 어떤 사람이 영중(郢中)에서 처음에 〈하리파인(下里巴人)〉이란 노래를 부르자 그 소리를 알아듣고 화답하는 사람이 수천 명이었고, 〈양아해로(陽阿薤露)〉를 부르자 화답하는 사람이 수백 명으로 줄었으며, 〈양춘백설가(陽春百雪歌)〉를 부르자 화답하는 사람이 수십 명으로 줄었다. 이렇듯 곡조가 더욱 높을수록 그에 화답하는 사람이 더욱 적었다고 한다. 《文選 권45》 석초(石蕉) 호인 듯하나 미상이다. 농사철 …… 걱정이네 농사철이 바빠져서 변규원이 떠나 돌아갈까 걱정이라는 뜻이다. 포곡(布穀)은 뻐꾸기인데, 그 울음소리가 '곡식을 뿌리라[布穀]'는 말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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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논하여 죽남에게 주다 論詩 贈竹南 시 삼백 편360)은 인정에 근본한 것이니 詩三百是本人情청탁361)이 수시로 사물에 느껴서 생기네 淸濁隨時感物生주소는 바르고 아름다우나362) 이제 볼 수 없고 周召正葩今不見제량363)은 스쳐가는 새라 누가 이름을 알랴 齊梁過鳥孰知名탁마를 하면서 공연히 꾸미는 데로 돌아가고 琢磨徒爾歸雕飾답습하였으나 도리어 평담을 숭상하지 않네 蹈襲還非尙淡平천연을 가장 중시하여 참으로 흥취 얻으면 最貴天然眞得趣구구하게 어찌 새로운 곡조를 배우겠는가 區區何用學新聲 詩三百是本人情, 淸濁隨時感物生.周召正葩今不見, 齊梁過鳥孰知名.琢磨徒爾歸雕飾, 蹈襲還非尙淡平.最貴天然眞得趣, 區區何用學新聲. 시 삼백 편 《시경(詩經)》의 별칭이다. 3000여 편의 시를 공자(孔子)가 311편으로 정리했는데, 그중 제목만 있고 내용은 없는 6편을 제외하면 실제로 305편이므로, 이를 줄여서 삼백편이라고 한 것이다. 《史記 卷47 孔子世家》 청탁 맑았다가 탁해졌다가 하는 사람의 정서를 가리킨다. 주소는 바르고 아름다우나 원문의 '주소(周召)'는 《시경》의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의 두 편명을 말한 것이다. 《논어》 〈양화(陽貨)〉에서 공자가 아들 백어(伯魚)에게 "사람으로서 〈주남〉과 〈소남〉을 배우지 않으면 바로 담장을 마주하고 선 것과 같다.[人而不爲周南召南, 其猶正牆面而立也與.]"라고 하였다. '정파(正葩)'는 한유(韓愈)의 〈진학해(進學解)〉에 "시경의 시는 바르면서도 아름답다.[詩正而葩.]"라는 말에서 유래하여 《시경(詩經)》의 시를 가리킨다. 제량(齊梁) 남북조 시대의 제(齊)와 양(梁) 두 나라에서 유행했던 시체(詩體)인 제량체(齊梁體)를 말한다. 이 시기의 시풍은 성정(性情)의 표현보다는 성조(聲調)와 수사학(修辭學)적인 기교를 더욱 강조하여 알맹이 없이 화려하게 꾸민 문체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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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진에게 답함 병자년(1936) 與鄭國振 丙子 지난번 선장(仙庄 상대의 집)에 나아가 달을 감상하고 시를 읊었는데, 어느덧 시간이 흘러 벌써 얼음이 얼고 눈이 내리는 섣달이 되어 거의 일 년이 다 되었습니다. 풍조(風潮)가 더욱 심해져서 성학(聖學)이 장차 끊어지고, 인심이 더욱 변하여 대의(大義)를 밝히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와 그대들이 비록 밤낮으로 머리를 맞대고서 덕을 세우고 학문을 전하며 윤리를 바루고 의리를 돕는 방도를 강구해 밝히더라도 오히려 공을 이루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만나고 편지를 보내는 것도 모두 막혀 걸핏하면 한 해를 넘기니, 어떻게 우뚝한 지혜를 세우고 확연한 논리를 세워 조금이라도 쓰러져가는 풍속을 구하겠습니까? 바라보아도 다가갈 수 없어서 진실로 한심스러울 뿐입니다. 노형은 고명한 견해와 강직한 기운을 하늘로부터 타고나서 일반사람보다 뛰어납니다. 덕과 학문을 닦고 세상에 법도를 맑게 하는데 마땅히 스스로 이룸이 있어서 다른 사람을 기다릴 것도 없습니다. 다만 이치는 반드시 궁구한 이후에 더욱 밝아지고 기운은 반드시 함양한 이후에 더욱 굳세게 됩니다. 이치가 더욱 밝아져서 지극한 밝음에 이르고 기운이 더욱 굳세져서 지극한 굳셈에 이른 이후에 그쳐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고자 하는 자는 강학(講學)이 아니면 할 수가 없고, 강학을 하고자 한다면 붕우와 서로 도움을 주지 않으면 할 수가 없습니다. 삼가 살펴보건대, 형은 방술이 갈래가 많고 응대하는 것이 매우 번잡합니다. 도는 비록 여기에서도 볼만한 것이 있으나 만약 이같이 한다면 혼란스럽게 세월만 보내며 그칠 때가 없으면, 아마도 이치를 궁구하고 기운을 함양하는 공부에 정밀함을 다하여 지극히 밝고 지극히 굳센 경지에 도달할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바라건대 형은 이 점에 유의하여 응대는 조금 줄이고 강학은 조금 늘려서 이것을 중시하고 저것을 경시하며 이것을 주인으로 삼고 저것을 손님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되면 정치하게 이치를 궁구하고 기운을 함양하는 방도에 있어서 이미 절반은 이루게 될 것입니다. 현광(玄狂)은 지난 섣달에 선장에서 함께 사람 중의 한 명이었는데, 어찌 갑자기 죽으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의 높은 재주와 바른 의론을 다시 어디에서 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오당(吾黨)의 불행이고 음당(陰黨)의 기뻐할 바이니, 옛사람의 이른바 "하늘도 이 무리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준다."라는 경우란 말입니까. 아! 슬픕니다. 曩造仙庄,賞月賦詩,居諸幾何,窮臘冰雪,恰滿一周矣.風潮益甚,聖學將絕; 人心益渝,大義難明.當此時也,吾儕若爾人,雖日夕聚首,講明立德傳學正倫扶義之方,猶懼不克奏功.乃者面書俱阻,動輒經歲,其何以立卓然之知,立確然之論,而少救靡然之俗乎? 瞻望靡及,良可於邑如.老兄者,高明之見,剛直之氣,得之天資,超乎凡輩.其於修德學而淑世程也,宜有以自成而不須乎人.但理必窮而後愈明,氣必養而後愈剛,愈明而至於至明,愈剛而至於至剛而後已.欲如此者,非講學不能; 欲講學,非朋友麗澤不能也.竊覸兄方術多門,酬應甚煩,道雖於此,亦有可觀,然若如此紛汨度日,無有已時,則吾恐其無以致精於窮理養氣之功而至至明至剛之域也.願兄加意於此,就酬應而減却分數,就講學而添却分數,要使此爲重而彼爲輕,此爲主而彼爲賓,則其於致精窮養之道,思過半矣.玄狂是客臘仙庄鼎坐中一人,豈意其遽爾觀化? 其高才正論,更於何而得見? 此吾黨之不幸而陰黨之所喜也,古人所謂天亦爲此曹報仇者耶? 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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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後滄先生文集 後滄集 後滄先生文集 고서-집부-별집류 문집 국역 後滄先生文集 乙未 金澤述 乙未 金澤述 석판본 15 반곽 유계 12행30자 註雙行 상하2엽화문어미 정읍 이평 부안김씨가 한국학호남진흥원 1955년 발행한 근대유학자 김택술(金澤述, 1884~1954)의 문집 1. 개요 김택술(金澤述, 1884~1954)은 일제강점기 항일(抗日) 운동가이자, 유학자, 문장가, 교육자로서 당대를 풍미했던 인물이다. 특히 당대 저명했던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의 고제자(高弟子)로서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이 빼어났다는 칭송을 받았다.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 "하늘에서 준 재능이 높고 밝으며, 재주와 성실함은 남들보다 뛰어났다. 간재 전우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학문이 정밀하고 깊으며, 문장은 일찍이 완성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시묘를 3년 동안 하였다. 글을 짓고 후학을 길렀으니 한 시대 스승의 표상이 되었다. 일찍이 최익현을 따라 목숨을 지켜 도를 잘 실천하는 의를 강설하였다. 공은 경술년 합방 이후 왜적이 공의 효행을 듣고 금잔을 하사하여 포상할 적에, 이를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이에 왜적으로부터 온갖 위협을 받았으나 현명하게 대처하고 행동했다. 왜적의 칙령에 죽음을 맹세하고 따르지 않음은 물론 배급한 식량마저도 물리쳐 먹지 않았다. 태산(정읍 이평면 산명) 위 황량한 산등성이 위에 흙집을 짓고 솔잎을 먹으면서 '금화곡수양아(金華哭首陽餓- 금화를 통곡하며 수양산에서 은거하던 백이처럼 굶어 죽겠다.)'라는 여섯 글자를 부절로 삼아 정절로써 삶을 마쳤다." 라고 하였다. 이로써 보면, 김택술은 누구보다도 문학적 재능이 남달랐고 학문적 깊이도 있었으며, 효심도 지극했고 의로움을 지녀 항일운동에도 동참했으며, 지조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편고동문검공(徧告同門僉公)〉에서 "절의(節義)는 도학(道學)의 울타리이고, 도학은 절의의 집과 방이다. 도학을 하지 않고 절의가 있는 사람은 있지만, 도학을 하면서 절의가 없는 사람은 없다."라고 말한 바 있으니, 그의 가치관이 도학과 절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64년, 문인과 유림들은 김택술의 도덕을 기념하기 위해 출생지인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창동리에 창동서원(滄東書院)을 건립해 향사(享祀)하였다. 이 서원은 1975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78호로 지정되었다. 2. 행력 김택술의 본관은 전라북도 부안(扶安)이다. 조고(祖考)는 김석규(金錫圭)이고, 선고(先考)는 벽봉(碧峰) 김낙진(金洛進)이며, 선비(先妣)는 전주 최씨(全州崔氏)이다. 1884년(고종 21년) 6월 6일 정읍군(井邑郡) 이평면(梨坪面) 창동(滄東)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종현(鍾賢)이고, 호(號)는 후창(後滄)이다. '후창'이란, 간재선생이 지어준 것이다. 중봉(重峯) 조헌(趙憲, 1544~1592)이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의 일을 계승한다는 의미로써 호를 '후율(後栗)'이라고 지었는데, 이를 모방하여 남송(南宋) 주자(朱子, 1130~1200)의 뒤를 잇겠다는 의미로 후창이라 한 것이다. 곧 주자의 고향이 창주(滄洲)이므로 창주병수(滄洲病叟)의 호와, 창주정사(滄洲精舍)가 있었으니 주자의 뒤를 잇겠다는 의미로 지은 것이다. 1988년(고종 34) 14세에는 감시(監試)에 응하고, 남은 노잣돈으로 『문선(文選)』, 『사문유취(事文類聚)』, 벼루 등을 구매하여 귀가하는 일도 있었다. 이로 보면, 그의 학문적 관심을 엿볼 수 있다. 이듬해, 15세가 되던 해에는 성주 이씨(星州李氏)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1900년(고종 37) 17세, 천안(天安) 금곡(金谷)에 가서 간재 전우를 스승으로 모시는 예를 행하였다. 『후창선생속집(後滄先生續集)』의 〈선고벽봉군가장(先考碧峰君家狀)〉에 따르면, "경자년 가을, 전선생께서 변산에 있는 월명암에 머물러 계셨으니, 부친이 나에게 명하여 선생을 가서 알현하라고 하였다. 선생께서 나를 아껴 몸소 부친을 방문하였다. 사람들이 나에게 간재선생을 스승으로 모실 것을 청하라고 권하였는데, 부친께서는 집에서 스승을 청하는 것은 성의가 없고 또 예가 아니라고 하였다. 이에 날을 가려 폐백을 갖추고 사백여 리를 넘어 천안 산중에 있는 간재선생을 배알하고 연분을 청하도록 하였다."라고 하였다. 실제 몇 달 후, 김택술은 천안에 찾아가 간재선생을 스승으로 모셨다. 1906년(고종 43) 23세, 정읍(井邑) 태인(泰仁)에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의 의병진중(義兵陣中)을 방문하여 창의군(倡義軍)을 위로하고 간재선생의 서신(書信)을 전달하였다. 이듬해에는 스승의 언행을 마음에 간직하여 본받기 위해 〈서신록(書紳錄)〉을 기록하였다. 1908년(순종 2) 25세, 일제의 지배 아래 있는 육지를 떠나 섬으로 들어가겠다는 신념으로 왕등도(王登島)에 들어가 거처할 섬을 찾다가 8, 9월 계화도(界火島) 장자동(壯子洞)에 머물렀다. 김택술 또한 계화도를 방문하여 간재선생의 문고(文藁) 편집과 교정에 참여하였다. 1912년에는 일제의 검열이 덜 미치는 북간도(北間島)를 두고'유학자들이 참으로 살만한 땅'이라고 하며, 부모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북간도로 가는 일이 쉽지 않음을 안타까워하였다. 1915년 32세, 일제가 은사금(恩賜金)을 보낸 것을 물리쳤다. 이듬해, 부친 벽봉선생의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侍墓)를 하였다. 1918년 35세에 『노화동이고(蘆華同異攷)』를 지었다. 이는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과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의 학문이 자연스럽게 부합한다는 주장을 전집(全集) 내용을 비교하고 서로 다른 점을 추출해서 비판하기도 했는데, 이에 간재 선생은 김택술의 이 저술이 세교(世敎)에 보탬이 된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1922년, 39세에는 호남 유림으로 추대되어 대표로 충청북도 청주(淸州)의 화양동(華陽洞, 현 충북 괴산)을 방문하여 〈화양동유록(華陽洞遊錄)〉을 지었다. 화양동에는 만동묘(萬東廟)뿐만 아니라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묘가 있어 기호(畿湖) 유림들의 성지였기에 유학자 김택술이 가지는 의미는 컸다. 유학의 맥을 이어야 한다는 간재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1925년 정읍 만종재(萬宗齋)에서 강학을 시작하였다.〈강규(講規)〉, 〈교과규칙(敎課規則)〉, 〈시고규칙(試考規則)〉 등을 지어 교육과정과 운영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특히 〈교과규칙〉을 살펴보면 반(班)을 학업의 정도에 따라 갑·을·병·정으로 분반하였으며, 반마다 과목과 교재를 규정하였다. 1924년 41세, 동문수학하던 석농(石農) 오진영(吳震泳, 1868~1944)이 간재선생의 유훈(遺訓)을 어기고 총독부(總督府)의 승인 아래 문집 『간재사고(艮齋私稿)』을 추진한 일이 발생하자, 현동묘하(玄洞墓下)에서 동지 59명과 함께 그를 성토하였다. 일찍이 간재선생은 문집 간행에 대하여 "왜놈들이 이 땅에 있는 한 문집을 내지 말라."고 하였기에 문집 간행을 보류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진영을 둘러싼 영남(嶺南)의 학자들은 왜인 관청의 출판 인가를 받아서라도 출간을 늦출 수 없으며 이 또한 선사 말년에 받은 유명(遺命)이라고 하였다. 이에 반하여 김택술을 비롯한 호남(湖南)의 학자들은 왜적에게 출판 인가를 받아 출간을 하는 것은 스승의 높은 학덕과 의리를 욕보이는 일이며, 인가를 받아 출간해도 괜찮다는 유명을 받았다는 것은 거짓말로, 이는 선생을 속이는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김택술은 이 때문에 배일당(排日黨)으로 지목되어 전주 검사국에 여러 번 호출을 당하였고, 일차 피랍되어 무수한 고문을 당했다. 이후 그는 간재선생의 유고를 편찬하고 교정하여, 스승이 직접 확인한 원본 『화도수정본(華島手定本)』이 세상에 나오게 된다. 1926년 43세, 오진영을 주축으로 한 영남지방 문인들이 간재선생의 문집을 재편집하여 스승의 유지를 무시하고 경남 사천 용산정(龍山亭)에서 납활자(鈉活字)를 이용하여 간재선생 진주본(晉州本)을 발간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듬해 김택술은 〈간재사고진주본고변록(艮齋私稿晉州本考辨錄)〉을 지어 수정본(手定本)과 진주본(晉州本)을 정밀하게 대조하여 진주본이 간재의 본뜻과 의리에 어긋나는 것을 비판하였다. 1934년 51세 때, 아버지의 제삿날을 맞아 자신과 자손들을 향해"제사란 자손의 정성을 모아 조상의 신령을 모시는 것으로, 자손이 항상 조상에게서 명령을 듣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예법에 따라 항상 제사 때는 주부(主婦)가 남편 다음에 아헌례(亞獻禮)를 올려야 함을 강조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혼인의 중요성, 사위나 며느리의 성품과 행실, 그 집안의 가법을 살펴야 하지 문벌을 따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1954년 71세 2월 18일,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완주군 소양면 명덕리(明德理) 산수동(山水洞)에 장사를 지냈다. 이에 동생인 척재(拓齋) 김억술(金億述, 1899~1959)은 "아, 형님의 풍채는 난새가 우뚝 서 있는 듯, 학이 고고하게 서 있는 듯. 가슴속의 도량은 맑은 가을물인 듯, 개인 날의 달빛 같았습니다. (중략) 슬프고 외로운 발걸음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쓸쓸하고 외로운 이 몸은 물가로 산속으로 헤매며 길이 끝나 돌아갈 곳 없는 듯하고 소경이 안내자를 잃은 것과 같습니다."라고 슬픔을 표출하였다. 3. 작품 김택술의 학문적 연원은 선고인 김낙진에 있다. 15세가 되기도 전에 사서삼경(四書三經), 『예기(禮記)』, 『좌전(左傳)』, 『논어(論語)』, 『시경(詩經)』 등을 모두 외우게 했으니, 어릴 적 가학(家學)이 매우 깊고 단단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보다 깊은 학문 연원은 간재선생에게 있다. 17세에 친자(親炙)하기 시작하여 수년 동안 배울 수 있었기에, 그의 학문은 간재의 영향이 매우 큰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실제 문집의 1/3은 간재선생과 주고받은 편지이다. 삼가 제가 오늘날의 형세를 살펴보니, 서리를 밟아 이르는 얼음이 이미 단단해졌고, 새가 기미를 보고 날아오를 때는 이제 못 잡게 되어버렸습니다. 치발(薙髮)은 뒷날에 닥쳐올 일이지만 치의(緇衣)는 이미 눈앞에 와 있습니다. 저는 이 두 가지 일이 보통 사람의 눈에는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춘추(春秋)』의 의리에 있어 실로 경중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시경』〈치의〉를 인용하여 의리에는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을 더러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만약 옛사람의 일을 근거로 말을 한다면, 치의는 오래되었는지라 굳이 말할 것이 없거니와, 머리를 자르는 일로 말하자면 성탕이 비 내리기를 기도하고, 태백이 나라를 양보한 일 같은 경우는 역시 혹 부득이한 상황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치의를 입는 까닭은 우리가 옛사람을 따르고자 해서가 아니라 저들이 조약을 따르도록 협박한 데서 나왔으니 어찌 이 고사들을 끌어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두 마디 말로 이런 상황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공자께서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일을 가지고 머리를 풀어헤치는 일과 함께 말씀하셨으니, 치의와 치발이 경중의 차이가 없다는 것은 이미 굳이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맹자가 오십 보를 도망간 자와 백 보를 도망간 자가 다를 바가 없다고 하셨으니, 비록 둥근 소매 옷에 큰 띠를 두르는 우리 복장에 검은 저고리 하나만 착용한다고 하더라도 오랑캐를 따르는 것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선생께서 답서에서 "치의를 입는 것과 치발을 하는 것이 오랑캐의 제도인 것은 똑같다. 어떤 이들이 이 둘을 놓고 경중과 시비를 나누지만, 그대가 그렇지 않다고 여긴 견해가 맞다. 근래에 내가 지은 〈종중시중변(從衆時中辨)〉한 편이 바로 이와 같은 주장을 비판하여 깨뜨린 것인데, 지금 겨를이 없어 적어 보내지 못한다."라고 했다. 을사년(1905) 10월, 간재선생에게 올린 편지이다. 이를 통해 일제강점기 한 시대상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우선 조선 조정에서 대신들에게 서양의 양복-치의-을 입을 것을 권고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단발령-치발-의 시행이다. 물론 이 단발령은 1896년 2월 친일내각이 물러나자 고종이 "머리를 깎는 것은 각자 편한 대로 할 것이다."라는 조서를 내려 단발령을 강조하지는 않았고, 이후 1897년 단발령은 정식으로 폐지된다. 그러나 1905년 고종은 일본인의 위협에 각 군의 군수와 주사에게 단발할 것을 명령하였다. 위에서 "치발은 뒷날에 닥쳐올 일이지만 치의는 이미 눈앞에 와 있다."라고 한 것은 모두 이러한 상황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경중과 시비를 논하고 있으나 모두 오랑캐의 법도라는 것이고, 스승과 제자 모두 이에 동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듯 김택술은 자신의 의견을 스승에게 전하는 글도 있고, 의혹이 생겨 질문하는 글도 있으며, 어려움, 슬픔, 기쁨 등 그 마음을 허심탄회하게 스승과 글을 통해 교감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잡저(雜著)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바로 성리설이다. 이미 400년 전에 공리공론(空理空論)으로까지 치부되었던 성리론이 20세기에 들어 다시 고개를 들고 더욱 진중하게 논의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무릇 정학(正學)은 주리(主理)이다. 이학(異學)은 주기(主氣)이지만 주리(主理)는 일찍이 기(氣)를 버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자로부터 송나라 유학에 이르기까지 모두 심(心)으로써 기(氣)에 속한다고 했고, 또 마음이 주재한다는 의논이 있었다. 기(氣)를 주장하는 사람이 일찍이 이(理)를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불씨는 여래(如來)가 바로 성(性)이라고 하였고, 고자(告子)는 생(生)을 성(性)이라고 말했고, 식색(食色)이 성이라고 하였고, 육상산(陸象山)은 이(理)가 이미 드러났다는 설을 두었고, 왕양명(王陽明)은 심(心)의 본체가 곧 천리(天理)라는 설을 두었다. 그들이 한 말을 가지고 살펴보면, 주리자는 반대로 주기를 주장한 것 같고, 주기자는 반대로 주리를 주장한 것 같다. 그러나 그 실상을 궁구해보면, 공명(空明) 영각(靈覺)은 불씨의 이른바 성(性)이고, 지각(知覺) 운동(運動)은 고자의 이른바 성이고, 육상산의 이른바 차리(此理)는 마음의 맑음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 왕양명의 이른바 천리(天理)는 마음의 양지(良知)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이 사가(四家)가 인식한 이(理)와 성(性)은 우리 유가의 이른바 기(氣)이고 심(心)이다. 그러므로 우리 유가가 그들을 주기(主氣)라고 여기는 것이다. 1903년, 김택술의 나이 40에 지은 것으로 그의 성리설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작품〈주리주기대(主理主氣對)〉이다. 요컨대, 성리설에 있어서 김택술은 정학이 바로 주리(主理)임을 밝히고, 불교, 고자, 육상산, 왕양명에서의 성(性)이나 이(理)가 주기론(主氣論)임을 밝히고 있다. 위의 작품 외에도 〈기질성문답(氣質性問答)〉에서는 본연성을 밝고 뜨거운 태양에 비유하고, 기질성을 구름이나 기류에 따라 어둡거나 추운 것에 비유하여, 기상이 태양의 본체를 손상시킬 수 없듯이 본연성이 기질성에 불변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두 작품은 모두 기호학파(畿湖學派)가 지니고 있는 핵심 사상이며, 이를 훗날에 더욱 일목요연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한편, 잡저 가운데 〈관조선사(觀朝鮮史)〉는 주목할 만하다. 1936년 편찬된 김경중(金暻中, 1863~1945)이 저술한 『조선사(朝鮮史)』를 김택술이 읽고 자신의 견해를 225조항으로 역사를 비평하였다. 그는 『조선사』의 명칭에 관한 문제를 시작으로,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인물들과 절의에 대해 논평하고, 명(明)나라 조정의 조선에 대한 정책, 조선 군주의 처신, 위정자의 실정 및 불교, 사치풍조 등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산문 외에, 김택술의 작품 가운데 한시 또한 주목된다. 그 방대한 양은 물론이고, 작품성 역시 뛰어난 시가 많기 때문이다. 본서에 1.336수, 속집에 169수 도합 1,505수가 수록되어 있다. 조선후기에 천여 수가 넘는 문인들이 많지 않으니, 시인으로서도 전혀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해 대나무 하나 구하여 나무를 작은 밭 주변에 심었지 식구들은 밭을 잘 가꾸려다 실수로 쳐서 온전한 나무 없구나 올해 죽순이 다시 나와 커다랗게 의연히 서 있다네 아 대나무의 사물됨을 초췌하여 때를 만나지 못함을 뜻 있는 선비의 가련함으로 김택술의 감정의 결이 잘 드러나 있는 〈죽(竹)〉이라는 제목의 한시이다. 대나무를 매개로 하여 현인(賢人)과 지사(志士)의 불우함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 주제이다. 그가 주로 창작한 영물시가 죽(竹), 송(松), 매(梅) 등이 많은데, 이는 그의 절의를 투사함에 다름 아니다. 흥미로운 것은 한시라는 장르로서 리듬을 잘 갖추고 있으면서도, 산문의 이야기하듯 심회를 말하고 있고, 또한 송풍(宋風)의 화려한 전거(典據)라든지, 험벽(險僻)한 글자 등이 보이지 않는 데 있다. 바로 시언지(詩言志)의 품격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라 하겠다. 산문 중에 〈겨울 국화를 보고 느낀 바 있어 기록하다 [見冬菊識感]〉라는 작품에서는, '겨울'을 일제강점기를 빗대었고, '국화'를 선비의 절개를 비유하였다. 곧'가을'은 숙살(肅殺)을 의미하는데, 오히려 시들지 않는 서리를 맞은 국화의 고귀함을 말하고 또 서리를 넘은 눈 속의 국화를 말하고 있으니, 곧 오상고절(傲霜孤節)을 넘어선 비장함이 엿보이며 선비의 지절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위의 작품과도 잘 조응한다. 속집에서는 『사백록(俟百錄)』과 『중동국통정변유무년표(中東國統正變有無年表)』이 주목된다. 서명의'사백(俟百)'은 『중용』제29장의 "백세 이후의 성인을 기다려서 물어봐도 의혹이 없다.[百世以俟聖人而不惑]"라는 의미이다. 내용은 동문 오진영이 문중 사림에게 끼친 화(禍), 의발 전수에 대한 허위, 진주 간행본의 오류 등에 대한 논의이다. 또 『중동국통정변유무년표』는 정도(正道)로 입각한 국가를 '정통(正統)', 정도를 따르지 않은 국가는 '변통(變統)'이라 하여 정통성을 고찰한 책이다. 예컨대, 하(夏)나라는 정통 439년, 주(周)나라는 정통 867년, 명(明)나라 정통 278년 등이며, 진(秦)나라는 변통 15년, 진(晉)나라는 변통 37년 원(元)나라는 변통 88년 등 국가의 정통 여부를 통해 그 정체성을 고찰한 것이다. 4. 문집 『후창집(後滄集)』은 본집 31권 15책, 속집 11권 5책, 합 42권 20책의 석판본이다. 1955년 아들 김형관(金炯觀)과 문인들이 간행하였다. 연구자 박술철은 『후창집』의 판본을 다음과 같이 분류하였으니 소중한 자료가 된다. ① 『후창집(後滄集)』 총15책, 김택술, 창동서원발행추정(전주대학교 고서실 소장), 간사자미상(刊寫者未詳), 목판본(木版本) 31권(卷)15책(冊). ② 『후창집』 총14권, 김택술, 심천서실장본(心泉書室藏本-전북대학교 고서실 소장), 간사자미상, 석판본 29권 14책, 총 15책 중 제 10권 1책 유실. ③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총4권, 김택술, 목판본, 본집 31권 15책. ④ 『후창집』 총1권, 김택술, 여강출판사(驪江出版社), 영인본(影印本), 1988. ⑤ 『후창선생속집(後滄先生續集)』총 4권, 김택술, 1997, 순창인쇄소(전주소재) ⑥ 기타 저서로는 『중동국통정변유무연표(中東國統正變有無年表)』1권과 『사백록(俟百錄)』1권이 있다. 본집(本集)은 권두(卷頭)에 총목(總目)이 있고, 권별마다 목록이 따로 있다. 크게는 편지, 잡저, 운문과 묘도문자 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권1부터 권12까지는 서(書) 536편이 있다. 권1과 권2는 네 편을 제외하면, 모두 간재선생과 주고받은 편지이다. 주로 경학, 성리학, 예학 등에 관한 학문적 논설이다. 이 외의 편지는 석농 오진영과 간재 선생의 문집에 관련하여 논쟁한 부분이 많다. 권13부터 권19에 이르기까지 잡저(雜著) 101편이 있다. 김택술의 사상, 학문, 학규(學規) 등이 수록되어 있다. 〈남산재유제군(南山齋喩諸君)〉, 〈덕천서사규약(德川書社規約)〉 등은 근대 서사(書舍)의 학제(學制)와 수학 과정 및 운영 등에 대해 광범위하게 논하고 있다. 〈오진영의여서병갑서변(吳震泳擬與徐柄甲書辨)〉은 오진영의 서신을 조목조목 논변한 것이다. 〈간재선생사고습유편집범례(艮齋先生私稿拾遺編輯凡例)〉와〈간재선생년보편집범례(艮齋先生年譜編輯凡例)〉 등은 오진영이 진주에서 간행한 문집과 별도로 편집한 간재선생문집의 편집 범례이다. 권20에는 서(序) 42편이 있다. 권21에는 기(記) 32편, 제발(題跋) 20편, 명(銘) 15편, 잠(箴) 8편, 찬(贊) 4편, 혼서(昏書) 5편, 자사(字辭) 24편, 애사(哀辭) 1편이 있다. 권22에는 제문(祭文) 37편, 고축(告祝) 16편, 상량문(上梁文) 8편, 비문(碑文) 5편이 있다. 권23과 권24는 묘갈명(墓碣銘) 30편, 묘지명(墓誌銘) 3편, 묘표(墓表) 28편이 있다. 권25는 행장(行狀) 19편, 가장(家狀) 4편, 전(傳) 11편이 있다. 권26부터 권31에 이르기까지 시(詩)가 1,336수, 부(賦)가 2편, 사(辭) 1편이 수록되어 있다. 운문은 오언절구(五言絶句), 칠언절구(七言絶句), 오언율시(五言律詩), 칠언율시(七言律詩), 장편고체(長篇古體) 등 다양하게 수록되어 있다. 시상(詩想)은 도학을 지향하는 유학자로서 사문(師門)의 옹호와 국난기를 거치면서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진실과 양심을 묘사한 작품이 대다수이다. 속집(續集)의 권두에는 김준영(金駿榮)이 1903년 4월에 김택술에게 써 주었던 〈증김종현서(贈金鍾賢序)〉를 서문으로 대신하였고, 아들 김형관(金炯觀)이 발문을 붙였으며 별도로 『사백록』과 『중동국통정변유무년표』를 편집하였다. 속집 역시 크게 편지, 잡저 및 기타, 운문과 연표 등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권1부터 권3까지 서(書) 98편이 있다. 권4는 잡저(雜著) 23편, 권5는 서(序) 6편, 기(記) 12편, 제발(題跋) 8편, 명(銘) 2편, 잠(箴) 1편, 찬(贊) 1편, 혼서(昏書) 1편, 고축문(告祝文) 3편, 제문(祭文) 3편, 상량문(上梁文) 2편, 묘갈명(墓碣銘) 4편, 묘지명(墓誌銘) 1편, 묘표(墓表) 7편, 유사(遺事) 1편, 전(傳) 2편 등이 있다. 권6은 시(詩) 169수, 권7과 권8은 연보(年譜)가 부록(附錄)으로 수록되어 있다. 5. 맺으며 본서는 조선말과 일제강점기 그리고 광복에 이르기까지 다사다난했던 시기를 살았던 근현대 유학자 김택술의 문집 『후창집』을 번역하고 주석을 낸 책이다. 어쩌면 현대의 우리들과 시대적 간극이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지만, 문학적 형상화라든지, 역사관이라든지, 자연관, 처세관 등은 그 간극이 더욱 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라의 멸망, 국권 수탈, 광복, 6.25동란 등 격변의 시간 속에서, 김택술은 수많은 글을 남겼다. 조선 중기에나 치열하게 논쟁이 거듭될 만한 성리설을 비롯하여, 국가의 정통이냐 변통이냐의 정통성에 대한 사관, 사회적 문화 현상에 대한 관점, 유가적 수양론과 절의, 근대의 서당교육사, 근대 유학자의 장례문화 등 적은 시간 속에 많은 문화를 담아내고 있는 책이 바로 『후창집』이다. 이러한 소중한 자료를 번역하고 주석을 내어 준 한국학호남진흥원에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올린다. 앞으로 본서가 근현대 문화사를 연구하고 밝히는 데 많은 보탬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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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보 제중에게 보냄 정축년(1925) 與文聖甫濟衆 ○丁丑 좌하가 연전에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선사가 '《오현수언(五賢粹言)》의 간행을 인가받는 것은 후일에 원고의 간행을 인가받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했으니, 이것은 선사에게 인의(認意)가 있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작년 가을에 저와 사견(士狷)에게 말하기를 "'불언지교(不言之教)'는 석농(石農)이 쓰지 않아야 되었는데 썼다.'라고 하였는데, '본래 없었다.'라고 하지 않고 '쓰지 않아야 되었다.'고 했으니, 이는 선사가 인교(認敎)가 있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저는 이전 편지 후면(後面)에 이를 변론했으나 들어주질 않은지라, 일찍이 좌하가 선사의 뜻을 모르고서 사람들에게 속임을 당한 것을 민망히 여기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금년 봄에 만났을 때 제가 좌하에게 "지금도 과연 선사가 인의와 인교가 있었다고 생각합니까?"라 물었더니, 좌하가 대뜸 대답하기를 "선사가 이미 '문고를 50년 뒤에 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어찌 인의와 인교를 말씀을 이치가 있었는가?."라고 하였고, 제가 말하기를 "분명히 이와 같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윽고 서로 헤어지게 되어 친구 이경좌(李敬佐)와 함께 사천(沙川)에 이르러 이별할 때에 제가 다시 질문하여 말하기를 "아까 말씀하신 인의와 인교가 없었다는 것에 대해 이미 분명이 이와 같다고 하였으니, 뒤에 반드시 다시 변동함이 없어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좌하는 기쁘게 듣고 다른 말씀은 없었고,. 저 또한 좌하가 끝내 선사의 마음에 어둡지 않고 선사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아, 이전의 걱정과 이후의 다행함이 어찌 나의 견해와 같거나 같지 않아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대개 모두 좌하에게는 스승과 제자로서의 큰 관건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침 선사 휘일(諱日)이기에 이것이 생각나서 한 번 편지로 말씀드려 본 것입니다. 만일 편지가 사실과 어긋나면 일일이 분변하여 보여주셔도 무방합니다. 座下年前對人言: "先師言《五粹》認印開後日認稿之路." 是謂先師有認意矣.昨秋對僕與士狷言: "不言之教,石農不當書而書之." 不云本無而云不當書,則是謂先師有認教矣.僕前書後面以辨而不見聽,則未嘗不憫座下不知先師而見欺於人矣.今春之遇,僕問座下: "至今果認先師有認意、認教乎?" 則座下遽答曰: "先師旣有文稿五十年後爲之之命,則豈有認意、認教之理?" 僕曰: "分明如是." 旣而爲之相送,同李友敬佐至沙川而別,僕又質曰: "俄者所說無認意認教, 旣云分明如是,則後必不復變動矣." 座下喜聽而無他說,僕又以幸座下終不昧師心負師恩矣.噫! 前之憫後之幸,豈爲與我同不同而然哉? 蓋皆爲座下師生之大關也.適茲先師諱辰,念及於此,爲一告之,如書不以實,不妨一一辨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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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율 노용에게 답함 을묘년(1915) 答宋景栗鲁容 ○乙卯 상중(喪中)에 경복(輕服)을 벗을 때 착용하는 복장은, 저의 생각에는 포건(布巾)과 직령(直領) 이외에는 아마 다른 방법이 없을 듯합니다. 형도 이미 그렇게 여겼으면서 또한 어찌하여 상중에 선조를 제사지내는 복장으로만 국한하여 의심하는 것입니까? 선조를 제사 지낼 때에는 최질(衰絰)을 착용할 수 없기 때문에 포건과 직령을 착용하는 것이니, 경복을 벗을 때 잠시 최질을 벗을 수 있다면 포건과 직령 차림이 어찌 통용하는데 편치 않은 점이 있겠습니까? 확대하여 말하면, 출행(出行)을 할 때에 최질을 착용하면 속인을 놀라게 할 수 있기 때문에 포건과 직령을 착용하는데, 이것 또한 선조를 제사지내는 복장에 국한하고 또한 그 때가 아니라 하여 의심할 수가 있겠습니까?【다만 선조를 제사지낼 때에는 포건 위에 평량자(平涼子)를 가하고, 출행할 때에는 포건 위에 방립(方笠)을 씁니다.】 길복(吉服)에는 옥색(玉色)을 쓴다는 등의 설은 비록 근거가 있다 하더라도 따르기는 어려울 듯합니다.《중용》 16장의 '성(誠)' 자는 '이(理)'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듯합니다.77) 그런데 선사가 《혹문(或問)》의 주자가 후씨(矦氏)의 설을 변론한 것78)을 인용하여 이(理)를 직접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의심하셨으니, 감히 질언(質言)하지 못하겠습니다. 喪中除輕服時所著服,弟意布巾直領外,恐無他道.兄旣然之,又何以喪中祭先之服局定而疑之耶? 祭先時,不可著衰絰, 故布巾直領; 除輕服時,可暫脫衰絰,則布巾直領, 有何不安於通用耶? 廣而言之,則出行時,衰絰駭俗, 故布巾直領,此亦可局定於祭先之服而亦非其時疑之耶?【但祭先,則布巾上加平涼子; 出行,則布巾上加方笠.】吉服玉色等說,雖云有據,恐難從也.《中庸》十六章"誠"字,似當以"理"看.而先師引《或問》辨矦氏說而疑非直指爲理, 未敢質言. 중용……듯합니다 《중용(中庸)》 16장의 "성은 진실하고 망령됨이 없음을 이른다. 음양의 합하고 흩어짐이 진실 아님이 없다. 그러므로 그 발현되어 가릴 수 없음이 이와 같다.[誠者, 眞實無妄之謂. 陰陽合散無非實者, 故其發見之不可揜如此]"라고 한 구절의 '성' 자를 가리킨다. 주자가……것 《중용혹문(中庸或問)》을 참조하면, 후씨는 "귀신은 형이하자이니 성이 아니다. 귀신의 덕은 성이다.[鬼神形以下者, 非誠也; 鬼神之德則誠也]"라고 하였는데, 주자는 이에 대해 "귀신의 덕이 성대한 까닭은 그 성 때문이고, 성이 스스로 하나의 물이 되고 별도로 귀신의 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 후씨는 귀신과 그 덕을 나누어 두 개의 물로 만들고 형이상과 형이하로 말하고 있다.[鬼神誌德所以盛者, 蓋以其誠耳, 非以誠自爲一物而別爲鬼神之德也. 今侯氏乃析鬼神與其其德爲二物, 而以形以上下言之]"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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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 기유년(1909) 上艮齋先生 己酉 상(喪)을 당하여 선산(先山)에 합장한 경우, 매번 최질(衰絰)24)을 하고 새로 쓴 무덤을 살피는데, 선조(先祖)의 묘에 대해 절을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고, 또 흉복(凶服)25)을 입고 선조에게 절할 수 없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분묘와 사당은 똑같지 않으니, 잠시 최질을 하고 선영(先塋)을 살피는 것도 일의 형편상 어쩔 수 없는 것이다."효대(絞帶)에 대하여 경호(鏡湖 이의조(李宜朝))는 두 겹으로 꼬은 두 가닥으로 하는 것을 옳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례(家禮)》에는 이미 마승(麻繩) 한 가닥을 쓰고 중간을 굽혀서 합친다는 문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례편람(家禮便覽)》에서 말한 네 가닥을 서로 겹치도록 하는 제도에 따라 행하면 어떠할지 모르겠습니다.○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효대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점에 관해서는) 이후에 자세히 강론하도록 한다."순목(順目)과 역목(逆目)을 어떻게 구별해야 합니까? 제 생각으로는 순목은 네 가닥이 한곳으로 함께 모이는 것이고, 역목은 네 가닥이 여러 곳으로 나뉘어 향하는 것 같은데, 이렇게 보아도 되겠습니까?○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맞다."최복(衰服)이 해어져서 입을 수 없다면 비록 연제(練祭)26) 이전이라도 다시 만들어도 됩니까? 노나라 소공(昭公)은 한 해에 세 번 최복을 바꾸어 입었는데, 이를 두고 군자가 비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비록 훼손되고 해어졌다 하더라도 단지 한 벌만 입고서 해를 마쳐야 합니까?○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보내온 편지에서 말한 것이 맞다." 遭喪祔葬先山者, 每以衰絰展省新墓, 而先墓則不拜未安, 又不可以凶服拜先祖, 如何則可乎?○ 先生答書曰: "墓與廟不同, 暫用衰絰, 展省先塋, 亦事勢之不得已也."絞帶, 鏡湖雖以二重兩股爲是, 然《家禮》旣有用麻繩一條, 中屈合之之文. 故依《便覧》四股相重之制行之, 未知如何?○ 先生答書曰: "絞帶, 未知當如何. 俟後熟講."順目逆目, 何以辨之? 竊意順目是四股同歸一處, 逆目是四股分歸各處, 如此看是否?○ 先生答書曰: "是."衰服弊, 不可服, 則雖練前, 亦可再製乎? 魯昭公一歲三易衰, 君子譏之. 然則雖毀弊, 只服一件以終歲可乎?○ 先生答書曰: "來示得之." 최질(衰絰) '최(衰)'는 상중에 입는 삼베옷으로 참최복(斬衰服)과 자최복(齊衰服)이 있다. 상복을 입을 때 머리에 두르는 수질(首絰)과 허리에 두르는 요질(腰絰)이 있다. 흉복(凶服) 상장(喪葬)의 의례에서 입는 복장을 말한다. 일반적인 옷과는 그 모양이 조금 이상하고 괴상하다. 연제(練祭) 소상(小祥)을 뜻한다. 삼년상에서 1년째에 지내는 제사이다. 소상 때에는 연관(練冠)과 연의(練衣)를 착용하고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연제'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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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선생에게 올림 갑인년(1914) 上艮齋先生 甲寅 한희녕(韓希甯 한유(韓愉))은 혼백(魂魄)과 정신(精神)은 기질(氣質)에 속한다고 했는데【《우산집(尤山集)》7권 13판〈조사흠(趙士欽)에게 답한 편지〉에 보임】, 이것은 정세(精細)함이 결여된 부분입니다. 삼가 저는 혼백과 정신은 사람의 혈기(血氣)가 응집된 것이고, 기질은 사람의 자성(資性)이 품부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혼백과 정신의 병은 약물(藥物)이 아니면 치료할 수 없고, 기질의 병은 의리가 아니면 치료할 수 없는 것이니, 이 둘을 섞어서 말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기질과 정신, 혼백에 관해서는 보내준 편지에서 논변한 것이 맞다. 다만 희녕은 이 편지에서 허령(虛靈)이 혼백, 정신, 기질과 한 종류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려고 하였으므로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이것은 융통성 있게 봐야 한다. 만약 그대의 설을 들어 비판한다면 희녕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머리를 끄덕일 것이다."《논어》에서 "대체로 임금의 물음[君問]에 모두 '공자대왈(孔子對曰)'이라고 일컬은 것은 임금을 높인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주자(朱子)의 집주(集註)의 말입니다. 그런데 계강자(季康子)의 물음에도 '공자대왈(孔子對曰)'이라고 일컬은 것은 어째서입니까? 어쩌면 혹시 기록한 자가 우연히 그렇게 한 것입니까? 아니면 계강자의 권세와 지위 때문에 본래 어쩔 수 없어서입니까? 권세와 지위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한다면 공자 문인의 절조로는 반드시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고, 기록한 자가 우연히 그렇게 했다고 한다면 이러한 군신의 대절을 어찌 서로 살피지 못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논어》에서 계강자가 묻고 '공자대왈'이라고 일컬은 것은 아마도 계씨의 가신이 기록한 것이고, '자왈(子曰)'이라고 일컬은 것은 다른 사람이 기록한 것인 듯하다." 韓希甯謂魂魄精神, 屬乎氣質【見《尤山集》七卷十三板〈答趙士欽書〉】, 此欠却精細處也. 竊疑魂魄精神是人之血氣所凝也, 氣質是人之資性所禀也. 故魂魄精神之病, 非藥石不可醫, 氣質之病, 非義理不可治, 恐不可混說也.○ 先生答書曰: "氣質與精神魂魄, 來書所辨是矣. 但希甯此書, 是欲言虛靈與魂魄精神氣質之非一類故云爾. 此宜活看. 若擧盛說以詰之, 希甯又不待詞畢而點頭矣."《論語》'凡君問, 皆稱孔子對曰者, 尊君也', 此朱子《集註》也. 季康子問, 亦稱孔子對曰者, 何也? 豈或記者之偶爾? 抑以季氏之勢位, 而自不得已歟? 謂勢位而然, 則以孔門人之所操, 必不至如此, 謂記者之偶爾, 則似此君臣大節, 豈有不相照管之理乎?○ 先生答書曰: "《論語》康子問而稱孔子對曰, 疑是季氏家臣所記. 其稱子曰者, 它人所記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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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경 한규에게 답함 정축년(1937) 答趙受卿瀚奎 ○丁丑 근래에 일이 있어서 형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 세 차례입니다. 《예기(禮記)》에서는 "예(禮)는 왕래하는 것을 숭상하니, 오기만 하고 가지 않으면 비례이고 가기만 하고 오지 않는 것 또한 비례이다"79)고 했습니다. 선사가 만년에 사방에서 편지로 질문하니 걸핏하면 글상자가 넘쳐서 뚜껑을 덮기도 어려웠습니다. 답장편지를 보낼 때면 크게 한숨을 쉬었지만 오히려 힘써서 대략 빠르게 답장하니 젊은 사람들도 고마워했습니다. 제가 형에게 세 번이나 편지를 보냈는데도 한 번도 답장을 받지 못했습니다. 생각건대 영남에서는 일반적인 학규(學規)가 다른 것이 있습니까? 선성(先聖)이 '예는 왕래를 숭상하고' 선사도 질문을 하면 반드시 답장했었던 도를 다시 바라지는 못하겠네요.올여름 초에 어쩌다 온 답장은 때가 지난 이후에 희망이 끊어진 나머지에서 나온 것이니, 그 놀라고 감격스러움은 옴에 따라 답장하는 일반적인 예에 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전에 있었던80) 치변(薙變)81)으로 인하여 몸을 숨기고 교제를 멈추어서 답장이 지체됨을 알았으니, 지난번 줄곧 망령되게 잘못 헤아려서 불공하게 생각한 것이 매우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런 변란에 대처하는 것이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멀리 옛사람을 예로 들 것도 없이 단지 요즘 세상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본디 수립한 것이 있어서 편안히 앉아서 초연히 면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우리 동문 같은 경우에 최경존(崔敬存)은 참으로 최상이었으니, 난리에 임하여 굽히지 않고 목숨을 버려 의를 취했고,82) 담양의 이복일(李復一)【이름은 광우(廣雨)이다. 내가 이절사전(李節士傳)을 썼다】과 진천(鎭川)의 정덕여(鄭德汝)【이름은 승원(升源)이다. 음성의 오진영이 정절사전(鄭節士傳)을 썼다. 내가 그 후론(後論) 중의 '말에 의를 해치는 것이 있다'고 논하여 음성 오진영에게 절의를 배척한 것이라 지목 당하였다】는 또한 씩씩했으니, 목을 찔러 거의 죽음으로서, 저들이 두려워하며 복종하게 하였습니다. 우리 고향의 안윤성(安允成)【이름은 재욱(在旭)이다. 내가 안의사시(安義士詩)를 썼다】은 더욱 기특합니다. 그간 숨어서 피하는 한 가지 일은 다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며 지나치게 염려하여 거의 여러 해 동안 편지도 끊고 왕래도 않고야 마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선사가 절애고도에 숨는 것보다 깊숙한 것은 없으나, 어찌 일찍이 이와 같이 하였겠습니까? 이설(異說)이 시끄럽게 날뛰는 것을 염려하고, 유학이 쇠락하는 것을 한탄함에 이르러 또한 홀로 선을 지키는 것83) 외에 세도를 근심한 것이 심원했음을 알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인자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제가 식견이 밝고 행실이 고망84)한 형을 위하여 깊이 생각하여 묘한 생각으로 구할 만한 것이 있다면, 다른 사람을 헤아림에 도리에 어긋나는 실수를 하지 말고, 또한 즐겁지 않을까 두려워 화를 내지 않으며, 잘 안다고 하면서 말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또 두세 번 한두 개 문구의 타당치 못한 점을 개정하라는 것에 대하여 말단의 일이라 여기는데 실망했다고 하시니 제가 들은 것과는 다릅니다. 치평(治平)의 근본은 성의(誠意)에 있고, 성의의 방법은 스스로 부족한 것을 구하는데 있습니다. 작은 한 생각과 작은 한 이치와 용렬한 한마디 말에 대해서도 오히려 스스로 부족한 점을 구하는데, 하물며 문장이란 마음을 드러내고 이치를 나타내며 말의 정밀한 것이어서 더욱 구차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임에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천하에 심리(心理), 언문(言文), 자수(自修)의 공에 대해 실수가 있으면서도 세도(世道)를 붙잡은 자는 없습니다. 형께서 깊이 헤아려 비록 그 사람이 아니라 하고, 타당하지 않은 문장을 바르게 고치는 것을 말단의 일이라 여기며 그것을 실망했다고 말한다면, 또한 어찌 이치에 맞는 말이 되겠습니까? 형은 이 점에 대하여 만약 타당함과 타당하지 못함의 시비, 고침과 고치지 않음의 맞음과 그릇됨을 논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강론의 한 실마리가 되리니, 저는 마땅히 마음을 비우고 덮어놓고 따를지 어길지를 깊이 생각하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근본을 고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겠습니다. 또 이미 대략적으로 판단하여 말하기를, "이때를 당하여 어찌 한가롭게 평상의 문구를 논함에 그치리오?" 라고 하였습니다. 논문은 제가 지난번 보낸 편지이고 제 평생의 뜻은 아닙니다. 오호라! '심상(尋常)'이라는 두 글자를 추론하여 말한다면 그 폐단은 이루다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선비가 의리를 엄하게 밝히고,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교훈을 긴요하게 여겨도, '심상'이란 문구로 간주하여 수용한 것이 없음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눈앞에서 천지가 뒤집어지고, 부모와 스승을 적으로 여기는 문자에 이르러서도 또한 심상한 문구로 간주하여 변란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오늘의 나쁜 습관으로 이른바 유술을 떨쳐 일으키고 동문을 보합85)하려 한다면 결단코 이루어질 이치는 없을 것입니다. 비유컨대 종기를 치료함에 있어서 피고름과 썩은 살을 씻어버린 후에야 살이 생겨나서 피부가 온전히 붙을 수 있습니다. 만약 심상한 일로 보아서 다 제거하지 않고 간혹 나의 피와 살이라 여겨 감싸고 안타까워한다면, 살이 돋고 피부가 완전히 붙는 날도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도 거의 드물 것입니다. 형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頃因有事,致書于兄者,凡三度矣.禮曰: "禮尚往來,來而不往,非禮,往而不來,亦非禮." 先師晚年,四方書問,動輒溢篋,以艱於覆 答有時發書太息,猶必力疾略 謝及於少輩,而弟於兄三施,而一不見報,則意嶠之南 自有一般學規,有異乎? 先聖禮尚往來,先師有問,必答之道者,不復有望矣.今夏之初,何來巍覆,出於過時之後,斷望之餘,則其爲驚感,已非隨往隨復恒例之可比.又以知間緣薙變,隱身息交,以致稽報,則深悚夫向來妄揣繆度之爲不恭也.然吾儕之處此變也,何至如是? 不待遠據古人,只以并世言之,素有樹立,安坐超免.若吾同門之崔敬存,則固太上也,臨難不屈舍生取義,若潭陽之李復一【廣雨 ○弟爲作李節士傳】,鎮川之鄭德汝【升源.○陰作鄭節士傳.弟論其後論中,語有害義者,被排節一之目於陰.】亦可壯也,刺頸幾殊,使彼畏服,若鄙鄉之安允成【在旭○弟爲作安義士詩】,更可奇也.其間隱避一事,又可爲也.然不宜惴惴過慮,幾多年斷書闕禮而後已也.夫隱莫深於先師之絕島,而何嘗如是乎? 至於慮異說之喧騰,歎儒學之衰獘,則又以見自守獨善之外,爲世道憂者深遠,此正仁者之心也.然而以弟爲識明行高望,其有深慮妙算之可救者,則非惟爲擬人不倫之失,亦恐有不恱者之移怒,而不得爲智者之言也.但又以再三改正於一二文句之未穩,爲末事,而謂之失望,則異乎吾所聞.夫治平之本,在於誠意,誠意之方,在求自慊,一念之微,一理之細,一言之庸,猶求自慊.而況文者心之著,理之顯,言之精,而尤不可茍焉者乎.天下未有失於心理言文自修之功,而能扶世道者,則高明深妙,雖非其人,其以改正未穩之文爲末事,而謂之失望者,亦豈爲理到之言? 兄於此,若論穩與未穩之是非,改與不改之當否,則是固爲講論之一端,弟當虛心愼思以覆從違今也.不然,旣以改本爲善,而又槪斷之曰: "當此之時,何暇論尋常文句而止哉?" 論文固弟向日之書,而非弟平生之志也.鳴呼! '尋常'二字若推而言之,其獘有不可勝言者.今之士子,於嚴明義理,喫緊愛人之訓,旣不免看做尋常文句,而無所受用.至於目下有翻天地,賊父師之文字,亦且看做尋常文句,而不以爲變,由今之弊習,以求所謂振起儒術保合同門,則決無有成之理.譬如治瘇然,膿血朽肉消洗棄之,然後肌可生起,皮可完合.若視爲尋常,而不盡去,或認爲吾血肉,而護惜之,則不惟生起完合之無日,其不傷人也者 幾希矣,兄以爲如何? 예(禮)……비례이다 《예기(禮記)》 〈곡례상(曲禮上)〉편의 기록이다. 간연(間緣) 불교철학에서 사람과 사물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연(緣)이라 하여, 인연(因緣), 등무간연(等無間緣), 소연연(所緣緣), 증상연(增上緣)으로 분류하였다. 등무간연은 직전의 원인으로, 불교의 찰나생멸(刹那生滅) 법칙에 의하면, 앞선 순간의 심적 활동은 그 다음 순간의 심적 활동이 일어나는 원인이 된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편지에 답장하기 이전의 상황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치변(薙變) 1895년 을미년에 시행된 단발령을 말한다. 난리에 임하여 목숨을 버려 의를 취했고 1917년 왜정(倭政)이 전주에 잠업소(蠶業所)를 설치한다는 명목으로 대대로 전수해 온 대지를 매도하라고 요청했으나, 일제에 토지를 내줄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하자, 일제는 토지 수용령을 발동시켜 가옥을 모두 소각하였다. 최병심은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결사적인 단식 투쟁으로 이겨냈다. 만동묘(萬東廟) 철폐로 인한 정향(丁享) 문제로 항거하다가 왜경들에 의해 괴산경찰서에 10여 일 간 구속되기도 하였다. 한말 독립투사들의 비사(秘史)를 엮은 조희제(趙熙濟)의 《염재야록(念齋野錄)》에 춘추대의적(春秋大義的)인 민족자존의 의지를 밝힌 서문을 쓴 일로 조희제와 함께 임실경찰서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독선(獨善) 《맹자(孟子)》 〈진심 상(盡心上)〉에 "곤궁해지면 자기의 몸 하나만이라도 선하게 하고, 뜻을 펴게 되면 온 천하 사람들과 그 선을 함께 나눈다.[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 하였다. 고망(高望) 위고망중(位高望重)의 줄임말, 지위가 높고 명망이 크다는 뜻이다. 보합(保合) 《주역(周易)》 건괘(乾卦) 단사(彖辭)의 "하늘의 도가 변화함에 각각 성명을 바르게 하여 큰 화기를 보전케 해 준다.[乾道變化, 各正性命, 保合大和]"라는 말을 압축하여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는 동문의 성명을 바르게 하여 크게 화합하게 됨을 이르는 말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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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무 장열에게 보냄 병오년(1906) 與崔性武長烈 ○丙午 경초(勁草)88)와 한송(寒松)89)은 예로부터 만나기 드뭅니다. 오늘날 글을 읽는 선비들은 모욕하고 공갈하는 풍조에 쓰러지고, 포승과 총칼에 넘어짐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간혹 이미 유문(儒門)에 종사하고서 숨기고 꺼리면서 다시 움직이지 않거나 떨고 두려워하면서 후회하는 자가 있으며, 유문에 종사하고 싶지만 주저하면서 감히 나오지 못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고명(高明)은 이런 상황에서 비록 머리 위에 철륜(鐵輪)90)이 내리친다고 하더라도 장차 떨치고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전진하여 나아갈 수 있습니까?이천 선생(伊川先生)이 조정에서 사학(邪學)으로 공격을 받았을 때 마신(馬伸)이 정문(程門)에 의탁하여 배우고자 하였습니다. 이천이 말하기를 "시론이 바야흐로 달려져 그대에게 누를 끼칠까 두렵다."라고 하니, 마신이 대답하기를 "제가 도를 들을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91) 그 뜻이 얼마나 정성스럽고 돈독합니까.제가 고명(高明)이 마신의 뜻으로 뜻을 삼고 전적으로 간옹(艮翁)의 문하에 의탁하여 배우길 바라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공자가 말하기를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는 정직함이니, 정직하지 않으면서 생존하는 것은 요행으로 죽음을 면하는 것일 뿐이다."92)라고 하였습니다. 윤리를 말미암고 공맹의 가르침을 따라는 것이 정직함이고,. 오륜을 폐하고 공맹을 배반하는 것이 정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정직하지 않으면서 사는 것은 비록 산다고 해도 오히려 죽은 것이며, 정직한 삶을 살다가 죽는 것은 비록 죽는다 하더라도 오히려 산 것입니다. 이것으로 나아갈 바를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정직하게 산다고 해서 반드시 죽는 것이 아니며 정직하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사는 것이 아니니 더욱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ㄸ한 한 번 다스려지는 운수가 돌아와서 도가 밝혀지고 교화가 행해져서 한 세상의 태평이 유자(儒者)의 손에서 나와서 저 패도(悖道)와 이유(異教)가 모두 갑자기 사라지지 않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고명께서는 천만 속히 도모하기 바랍니다. 勁草寒松,邃古罕覯.今讀書之士類,未免侮嚇恐喝之風所偃,縲絏刀銃之威所推,或有已從儒門而隱諱不復動者,惴惧以爲悔者,欲從儒門而趑趄不敢進者.不識高明於此,雖轉鐡輪於頂上,將奮不顧慮,而直前做去也否? 伊川先生被朝廷之攻以邪學也,馬公伸欲依程門學,伊川曰: "時論方異,恐貽子累." 對曰: "使伸得聞道死無憾." 此其志何等誠篤!鄙欲令高明以馬公之志爲志,專依艮翁之門而學焉,夫何故? 吾夫子曰: "人之生也直,罔之生也,幸而免." 倫常之道,鄒魯之教,是直也; 倫常是斁,鄒魯是背,是不直也.不直而生,雖生猶死; 爲直而死,雖死猶生.此可以知所往矣, 況爲直而未必死,不直而未必生乎? 不惟是也, 又安知不一治運回,道明教行,一世昇平出於儒者之手,而彼悖道異教, 皆條爾消滅也耶? 惟高明千萬亟圖之. 경초(勁草) 당 태종(唐太宗)이 소우(蕭瑀)를 칭찬하면서 하사한 시에 "질풍 속에서 굳게 버티는 초목을 알고, 난리 속에서 충성스러운 신하를 안다.[疾風知勁草 板蕩識誠臣]"라고 하였다. 《구당서(舊唐書)》권63〈소우열전(蕭瑀列傳)〉 한송(寒松) 사혼은 그의 조카 사영운(謝靈運)과 이름을 나란히 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사혼의 풍운은 하늘의 해를 바라보는 해바라기 같고, 엄숙함은 차가운 바람을 맞서는 소나무를 같다.[混風韻爲高日望葵, 蕭如寒風振松]"라고 하였다. 《예문유취(藝文類聚)》권88 철륜(鐵輪) 쇠로 만든 수레바퀴로, 불교에서 지옥의 악귀(惡鬼)를 제압하는 무서운 형구(形具)이다. 또는 철륜발(鐵輪拔)의 준말로 수미(首尾)에 칼날이 달린 병기로 말 위에서 적을 쳐 죽이는 데 쓰인다. 이천선생(伊川先生)이……하였습니다 정자(程子)의 학파가 위학당(僞學黨)으로 몰려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을 때에 마신은 자신과 연루될까 염려한 정이천(程伊川)과 정명도(程明道)의 고사(固辭)에도 불구하고 십여 차례 반복하여 가르침을 받기를 청하면서 "저가 도를 듣게 된다면 죽은들 무슨 유감이 있겠습니까. 하물며 죽음에 이르지 않는 경우이겠습니까." 하였다. 《송명신언행록宋名臣言行錄》 권9 사람이……뿐이다 《논어(論語)》 〈옹야(雍也)〉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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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무에게 답함 무신년(1908) 答崔性武 戊申 고명(高明)이 유학(儒學)에 뜻을 두었으나 질병에 얽매어 각고하게 실행해 나가지 못하니 애석할 뿐입니다. 그러나 병중에도 또한 공부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 나금계(羅錦溪)의 문인에 아픈 사람이 있었는데, 금계가 묻기를 "병중에 공부가 어떠하냐?"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매우 어렵습니다."라고 하자, 말하기를 "다만 아프지 않을 때와 같이 하는 것이 바로 공부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병으로 인하여 조급하고 우려하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됨을 말한 것입니다. 대개 조급하고 우려하는 마음이 있으면 결단코 병이 나아질 가망이 없고 갈수록 더욱더 심해집니다. 소설(小說)의 각병법(却病法)93)에 "늘 나보다 못한 자를 생각하며 스스로 너그러운 마음을 갖도록 노력한다."라고 했고, "조물주가 생활로 나를 수고롭게 하였는데, 병을 만나 조금 한가하게 되었으니 도리어 다행스럽게 생각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두 방법은 매우 묘합니다. 만약 마음에 일단의 번뇌가 생겨나서 쫓아 보내지 못한다면 다만 바람 쐬고 시를 읊조리며 몸을 살피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장자(張子)는 "빈궁과 걱정 속에 처하게 함은 너를 옥(玉)으로 이루어 주려 함이다."94)라고 하였습니다. 진실로 병에 이르지 않았다면 이를 살필 수 없었을 것이니, 병이 어찌 마음을 다스리고 본성을 기르는 것에 해가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평소 병을 달고 살면서도 크게 성취하는데 해가 되지 않았던 고인(古人)이 있었으니, 명나라의 석계도(席啟圖)와 우리나라의 성우계(成牛溪 성혼(成渾))가 이들입니다.고명은 병 때문에 조금도 기운이 꺾이지 말고 점점 동심인성(動心忍性)95)하는데 힘을 기울여 분수에 따라 공부를 해서 순조롭게 배우길 좋아하여 병을 잊는다면 덕이 진보하여 얼굴이 맑아지고 몸이 윤택해지는 날에, 저 두 아이[二豎子]96)가 어찌 그 재주를 멋대로 부릴 수 있겠습니까? 편지에 타고난 명이 허약함을 탄식하는 말이 있었는데 우울한 뜻이 있는 것 같기에 대략 이리 언급한 것이니 또한 깊이 헤아려 주길 바랍니다. 高明有志此學,而爲疾病所嬰,不能刻意做去,爲之慨惜.然病中亦未嘗無工夫.昔羅錦溪門人有病者,錦溪問: "病中工夫何如?" 對曰: "甚難." 曰: "只如不病時,便是工夫." 此謂不可因病而有煩躁憂慮之心也.蓋有煩躁憂慮之心,則決無痊差之望,愈往而愈甚.小說却病法曰: "常將不如我者,巧自寬鮮." 又曰: "造物勞我以生,遇病稍間,反生慶幸." 此二法甚妙.如遇心下一段煩惱,排遣不去,儘好風咏軆察也.張子有曰: "貧賤憂戚,庸玉汝成." 茍不至於病,不能省事,此何足爲治心養性之害乎? 故昔人有平生善病而不害大就者,明之席啟圖、我國之成牛溪是也.高明勿因病而少挫其氣,漸加動忍之力,而隨分施功,馴致嗜學而忘病,則德進睟面潤身之日,彼二竪子者,安能恣其伎倆耶? 來書有咏嘆賦命脆薄之語,似不免有悶鬱之意, 故聊此奉及,應亦深諒也. 각병법(却病法) 《지봉유설(芝峯類說)》 〈질병조〉를 참조하면, 병을 물리치는 8가지 방법[却病八法]을 말하고 있는데, 위에서 제시한 방법은 세 번째와 네 번째 방법이다. 빈궁과……함이다 장재(張載)의 〈서명(西銘)〉에 보인다. 동심인성(動心忍性) 《맹자(孟子)》 〈고자 하(告子下)〉에 "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큰 사명을 내리려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과 뜻을 고통스럽게 하고, 그의 힘줄과 뼈를 수고롭게 하고, 그의 육체를 굶주리게 하고, 그의 몸을 궁핍하게 하여, 그가 행하는 일마다 어긋나서 이루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그의 마음을 격동시키고 그의 성질을 굳게 참고 버티도록 하여, 그가 잘하지 못했던 일을 더욱 잘할 수 있게 해 주기 위함이다.[天將降大任於是人也, 必先苦其心志, 勞其筋骨, 餓其體膚, 空乏其身, 行拂亂其所爲, 所以動心忍性, 增益其所不能]"라고 하였다. 두 아이[二豎子] 두 아이는 곧 병마(病魔)의 뜻이다. 춘추 시대 진 경공(晉景公)이 병들었을 때, 두 아이가 고황(膏肓 : 심장과 격막의 사이)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는데, 그 후 의원을 데려왔으나 의원은 병이 고황에 들어 고칠 수 없다고 하였다. 《좌전(左傳)》 成公 10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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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익부 사익에게 보냄 을유년(1945) 與吳翼夫士益 乙酉 밝은 하늘이 재앙을 내린 것을 후회하여 조국이 광복을 맞았으니, 만백성이 똑같이 경하하는 마음을 어찌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큰 경사를 함께 하는 것은 피차간에 현재 상황이니, 길함과 흉함, 고통과 즐거움은 물을 것도 못 됩니다. 국가의 정책은 본디 책임자가 있으니, 산림의 서생은 다만 좋게 시작하고 좋게 끝마쳐서 태평시대가 길이 지속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사문(斯文)과 관련된 일로서 여러 가지 계책도 이때에 미쳐서 시원하게 시행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문하에서는 선사의 문함을 완전히 변론하지 못하였으니, 수고(手稿)를 간행하는 일과 난본(亂本)을 거두어 없애는 일을 마땅히 차례로 해야 할 것인데, 뜻을 같이 할 사람이 몇 사람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이 일을 우러러 물을 수 있는 자는 형배(兄輩) 가 아니면 누구이겠습니까?아, 저 음성(陰城 오진영)은 내리 비춰주던 일월(日月)이 깨져 떨어졌으니, 장차 어디에 의지하고 우러르겠습니까? 진실로 가련합니다. 그가 무함한 말 가운데 이른바 '세상이 어찌 될지 알 수가 없으니 헤아려 하라.'는 것은 어찌 가장 핵심적인 대목으로서 통탄할 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 원수 오랑캐가 탐하고 포학하여 약소국을 삼키고 교만하고 패려궂어 강대국을 침략하는 것을 보고서는 비록 아녀자와 어린애라도 모두 반드시 망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선사의 명철함으로 일찍이 망할 것을 알지 못하고 "세상의 앞날을 알 수 없다."고 했겠습니까? 선사가 일찍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왜가 망한다면 내일 죽더라도 절대 유한이 없으리라.[倭亡明日死,萬萬無所恨]"라고 하였고, 또 육검남(陸劔南)113)의 "왕의 군대가 북쪽으로 중원을 평정하는 날에, 가제(家祭)를 지낼 적에 아버지께 고할 것을 잊지 말아라.[王師北定中原日,家祭無忘告乃翁]"는 시를 외우며 말하기를 "이는 먼저 내 마음을 안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왜가 반드시 망할 것을 아시고 기다린 것이 어찌 분명하지 않겠습니까?대개 "오늘 이후에 세상이 어찌 될 수 알 수가 없다."고 한 것은 더욱더 그가 무함한 것임을 드러내어 분별할 것도 없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이고 다행입니까. 우리들은 이미 만백성과 함께 경축하는 것 외에도 별도로 경축할 것이 있게 되었으니, 어찌 선사의 무함이 절로 명쾌하게 설욕되지 않겠습니까? 두 형의 고명한 견해는 어떠합니까? 회신하여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皓天悔禍,祖國興復,萬姓普慶,何可形喻? 大慶所同,彼此現境,休咎苦樂,不足問也.國家政策,自有任者,林下書生,但願善始克終,永奏太平而已.惟是事關斯文種種猷爲, 及此可以霈然行去,而在吾門,則辨誣之未盡,手稿之刊行,亂本之收洗,當次第有事,而未知同志者幾人.今日可以仰問此事者,非兄輩而誰也?噫! 彼陰照臨之日月破落矣, 將於何而依仰? 誠可哀也.蓋彼誣中所謂"世不可知,料量爲之",豈非最爲眼目而可痛者乎? 觀夫讐夷之貪虐而吞弱小、 驕悖而侵強大,則雖婦孺皆知其必亡,以先師之明,曾不知其亡,而曰"世不可知"也乎? 先師嘗有詩曰: "倭亡明日死,萬萬無所恨." 又誦陸劔南"王師北定中原日,家祭無忘告乃翁"之詩曰: "此先獲我心." 其知倭之必亡而待之者,豈不較然乎?蓋"當今日而後,世不可知"之云,益見其爲誣而無待乎辨矣,何幸何幸! 吾輩旣與萬姓同慶之外,別有可慶者,豈非師誣之自底快雪乎? 未知二兄雅見以爲如何? 幸回教之也. 육검남(陸劔南) 검남은 육유(陸游)의 호이다. 검남은 지금의 사천성(四川省) 일대로 검각(劒閣)의 남쪽 지역인데, 육유는 이곳에서 벼슬하면서 많은 시를 지었다. 후에 자신의 시집을《검남시고(劍南詩稿)》라고 이름하였다. 시는 육유가 임종 때 남긴 〈시아(示兒)〉로 《검남시고》권85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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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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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간재선생에게 올림 을묘년(1915) 上艮齋先生 乙卯 어떤 사람의 장자(長子)가 벙어리 병을 앓고 상처(喪妻)하고 자식도 없는데, 형편상 아내를 다시 얻을 수 없어 그 부친이 차자(次子)의 자식으로 장자의 후사(後嗣)를 세우고자 하여 물어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례증해(家禮增解)》 〈종법(宗法)〉조에 기재된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가 말한 '장자가 폐질(廢疾)을 앓고 있더라도 차자에게 전중(傳重)해서는 안 된다'는 설【권1 22판에 보임】에 근거하여 후사를 세우라는 뜻으로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 부친이 지자(支子)52)여서 전중할 것이 없다면 장자를 위해 후사를 세우는 것은 합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또 생각해보니, 그 부친이 비록 지자라 하더라도 그의 장자된 자가 다른 죄악이 없고 질병으로 인해 부친의 뒤를 이어 부친의 제사를 받들 수 없게 된다면, 이것이 어찌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편안한 일이겠습니까? 이것은 집안의 대사와 관계된 것이니 자세히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선생께서 답서에서 말씀하셨다. "장자가 폐질(廢疾)에 걸려 전중할 수 없을 때는 본래 가씨(賈氏 가공언(賈公彦))의 학설이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장자는 비록 벙어리이지만 이미 인도(人道)가 있어 아내를 맞아 아들을 낳을 수 있는데 아들이 없는 것은 운명이니 어찌 후사를 세울 수 없는 경우이겠는가? 매옹(梅翁 성직(成稷))은 장자가 폐질(廢疾)에 걸려 아내를 맞았는데도 아들 없이 죽는다면 마땅히 그를 위해 후사를 이어주어야 한다고 논하였고, 또 신독재의 설을 인용하여 이는 바꿀 수 없는 의론이라고 하였다. 그대가 의심한 바 그 부친이 지자라서 장자를 위해 후사를 세우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의론의 경우, 이는 고례(古禮)로 살펴보면, 대종(大宗)의 후사는 되어도 소종(小宗)의 후사는 되지 않는 경우가 있으니 이것이 예(禮)의 큰 강령이다. 후세에는 비록 방계(傍系)나 서계(庶系)이더라도 모두 그를 위해 후사를 세우는데 진실로 바른 예(禮)가 아니다. 그러나 지금 이 폐질에 걸린 자는 장차 부친을 잇는 종자(宗子)가 될 것이니 그 끊기는 대를 잇는 것을 막기는 어려울 듯하다." 有人長子有瘖瘂之疾, 而喪妻無子, 勢不能再娶, 其父欲以次子之子立後而來問. 故小子據《家禮增》解宗法條所載, 愼獨齋長子病廢, 不可傳重於次子之說【見卷一卄二板】, 以立後之意答之. 而更思其父支子, 無重可傳, 不當爲之立後歟? 又思其父雖支子, 爲其長子者, 無他罪惡, 而以有疾不得繼後, 以奉其父之祀, 是豈天理人情之所安乎? 此係人家大事, 伏乞詳示.○ 先生答書曰: "長子廢疾不傳重, 固有賈氏說. 然今此子雖瘖瘂, 而旣有人道娶妻, 可以生子而無子, 命也, 惡可不立後者? 梅翁論長子廢疾, 娶婦無子死, 當爲之繼後, 又引愼齋說, 以爲不易之論矣. 所疑其父是支子, 不當爲長子立後之論, 此以古禮則有後大宗而不爲小宗後, 是爲禮之大經也. 後世則雖支庶, 皆爲之立後, 誠非禮之正者. 然今此廢疾者, 將爲繼禰之宗, 恐難禁其繼絶也." 지자(支子) 적자(嫡子)를 제외한 자식들과 첩에서 난 자식들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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