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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숙부 태암 공께 올리는 제문 祭從叔台庵公文 유세차 신유년(1921) 7월 기해삭(己亥朔) 22일 경신일은 나의 종숙부 태암(台庵)59) 공의 소상입니다. 종질 김택술(金澤述)은 하루 전날에 비로소 부족한 제물을 갖춰 영전에 밝게 아룁니다.오호! 저는 아버지의 형제가 적어서 공을 백부나 숙부처럼 모셨습니다. 공께서도 저를 친 조카처럼 대해주셨습니다. 이는 남들의 종숙질 사이에 견줄 바가 아니었습니다. 전에 제 아버지께서는 일찍 친상을 당하여 할아버지께서 어렵게 이루신 가업이 손상될 우려가 있었지만 애써 노력하여 유업을 잇고 옛 자산을 온전히 보존하셨는데, 이것은 실은 공의 공로였습니다. 이런 일은 공께는 일상의 보통 일이셨겠지만 그 후인으로서는 어찌 감히 잊을 수 있겠습니까? 또 생각건대,제가 처음 스승을 모시고 공부하기 시작하였을 때에 공께서는 진심으로 그것을 좋아하며 안으로는 두터이 격려하고 밖으로는 칭찬하고 자랑하며, 제가 학문을 이루고 가문의 명예를 빛내기를 기대하셨습니다. 맨 나중에는 공께서도 흔연히 공부에 뜻을 두어 높은 관과 넓은 소매의 옛 복장을 엄연히 갖추고 《석담요결(石潭要訣)》60) 전부를 마치 당신의 말씀처럼 외우셨습니다. 때로는 의심되는 문제를 저에게 하문하며 허심탄회하고 거리낌 없으심이 마치 친구 사이 같았습니다. 아! 이것은 참으로 남의 선을 취하여 나를 깊이 사랑함입니다. 오늘날 어디서 이런 분을 다시 보겠습니까?오호! 저는 기유년(1909, 융희3, 26세) 이후로는 예전의 가업이 나날이 위축되어 더 견뎌 나갈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공께서는 이를 깊이 걱정하며 마치 당신의 일인 것처럼 하셨습니다. 이것은 비록 형기(形氣 유형의 물자)에 관한 근심이었지만 그 역시 저를 깊이 걱정하시는 마음의 발현이었습니다. 몇년 전 내가 월호(月湖)에 살게 되었을 때 공께서는 눈물로 작별하며 말씀하시기를, "바닷가의 바람과 장기(瘴氣)를 어찌 견디며 살겠느냐?"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우거(寓居)에 찾아와 위로하시며, "사정이 이미 여기에 이르렀으니 옛 집을 마음에 두지 말거라." 하였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서 저는 마음이 슬프고 한스러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제가 우거에서 벗어나 옛 마을로 되돌아 왔사오니, 공께서 아시면 기뻐하기 마지 않으실 터인데 어이하여 기다리지 않고 가셨단 말입니까? 계시던 옛 집에는 처량한 바람 불고 쓰시던 서안에는 먼지만 쌓여있습니다.오호! 해가 두 번 바뀌어 이제 살아계신 듯 모시던 궤연을 물리게 되었습니다. 공의 얼굴과 목소리는 날마다 멀어져 가고, 가문의 형편은 점점 쇠락해 가는 것이 슬프기만 합니다. 옛날을 우러러보고 지금을 굽어보며 감개와 서글픔에 점점 더 아립니다. 오호 슬프도다! 부디 흠향하소서! 維歲次辛酉七月己亥朔二十二日庚申, 我從叔台庵公之祥事也。 前一日, 從姪澤述始具薄奠, 昭告于靈前, 曰: 嗚呼! 姪以先君終鮮之故, 視公猶伯叔父。 公之於我, 亦親姪之視焉, 是豈他人從叔姪之比哉! 昔先君之夙遘憫凶也, 我王考艱致之業, 豈無耗損之虞, 而幹蠱惟勤, 俾完舊物, 公實有功。 此在於公, 雖曰常事, 其在後人, 安敢忘也? 又念姪初從事于學, 公實心好之, 旣敦勉于內, 或稱揚於外, 冀其有成而昌家聲也。 最晩, 公亦欣然而有意, 峨冠濶袖, 古貌儼然, 一部潭訣, 若誦己言。 時將疑難, 下問于姪, 虛懷亹亹, 有若朋儕。 噫! 此眞取人之善, 而愛我之深也。 今日何處復得見此? 嗚呼! 姪自己酉之後, 舊業日蹙, 殆不可爲, 公深以爲憂, 若己遭也。 此雖涉形氣之憂, 憂我之深亦惟見。 公曩年月湖之寓也, 公釀淚而別, 曰: 海曲風瘴何以奠居? 復枉寓所而慰之, 曰: 事已到此, 勿念舊居。 此言悲悵, 心肝欲碎。 旣而余不安寓, 復返故里, 公宜歡喜之不暇, 胡爲乎不待而逝? 但見空堂風凄, 舊案塵堆。 嗚呼! 星霜再易, 象生將撤, 痛音容之日遠, 慨門戶之零替, 俛仰今昔, 感愴冞切。 嗚呼哀哉! 尙饗! 태암(台庵) 김낙준(金洛俊)을 말한다. 1849(헌종15, 기유)~1921(신유), 자는 덕화(德和), 호는 태암이다. 부안김씨 직장공파 28세손이며, 아버지는 김의순(金義淳, 1830~1896), 어머니는 여산송씨(1828~1887)이고, 부인은 남양홍씨(1847~1920)이다. 석담요결(石潭要訣) 《격몽요결(擊蒙要訣)》의 저자인 율곡 이이(栗谷李珥, 1536~1584)의 별호가 석담(石潭)인 것을 따라 붙인 이름이다. 간재 전우가 《석담요결》을 중히 여겨 가르친 것은 신철균(申鐵均)ㆍ유일준(俞日濬) 등의 문하생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볼 수 있다. 《간재집》(권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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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숙 노가암 공께 올리는 제문 祭族叔老可菴公文 유세차 경신년(1920) 4월 병자삭(丙子朔) 20일 을미날은 노가암(老可菴)61) 거사 김공의 소상입니다. 그 하루 전 갑오날에 족질 김택술은 삼가 향촉과 굴비ㆍ대추를 갖추어 궤연에 제물 올리고 곡하며 아룁니다.오호! 올곧은 도리로 맑은 지조를 지키며 악을 미워하여 가차함이 없는 것이 마치 매가 참새를 모는 듯 하는 이가 공이 아니었습니까? 성대한 풍도와 위의가 여유롭고 아름다운 것이 마치 난새와 학이 우뚝히 서있는 듯 하는 이가 공이 아니었습니까? 다채로운 문심과 훌륭한 문장은 눈부신 빛을 발하지만 은은한 채 뽐내지 않는 이가 공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이런 말로는 공의 실체를 다 말하기에는 부족합니다.백발의 노년에도 스승을 모시면서62)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 하는 학구(學究)의 의지가 확고하였고, 잘못된 구습을 일시에 바꿔 어제의 잘못과 오늘의 바름을 결연히 가르는 용단이 있으셨습니다. 이것들은 대체로 옛날의 위무공(衛武公)63)과 거백옥(蘧伯玉)64) 등의 일인데 공께서는 이를 능히 하셨습니다. 참으로 백 사람 중에서 하나도 찾기 어려운, 뒷 사람의 존경을 받을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장수를 누리며 지닌 뜻을 다 채웠더라면 도학을 제창하여 세상을 도왔을 터인데 어찌하여 갑자기 구천으로 떠나 사우(士友)와 종친들을 슬프게 하셨습니까?오호! 봉산(蓬山)65)의 구름과 영주(瀛洲)66)의 바람을 쫓아 동쪽으로 서쪽으로 떠돌아 다니느라, 앓으실 때 약 들고 문병하지도 못했고, 장례 때 상여줄도 잡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지난 여름 창졸간에 한번 곡하고 진즉에 지어둔 애도의 글을 묘소에 풀 우거진 이제야 뒤늦게 고하여 유명(幽明)을 넘은 정을 전하오니 얼굴이 후끈거려 부끄럽습니다. 자리 펼친 산 위에 달 오래 비추고, 분단장 한 뜰에 꽃 만발하였는데, 밝은 혼령 이곳에 내리고 오르시며 천년토록 가시지 말기를 바라오니. 부디 환히 오시어 저의 맑은 술잔을 흠향하소서. 維歲次庚申四月丙子朔二十日乙未, 老可菴居士金公之常事也。 前一日甲午, 族姪澤述謹具香燭鯗棗, 哭奠于象生之設, 而告之曰: 嗚呼! 直道淸操, 疾惡不貸, 若鷹鸇之逐鳥雀者, 非公邪? 棣棣風儀, 閑習可則, 若鸞停而鶴立者, 非公耶? 藻思翰力, 炳乎其耀, 人而闇然不伐者, 非公耶? 然此何足以槩公之實也? 皓首從師, 確乎其朝聞夕可之志; 一變舊染, 截乎其昨非今是之勇。 是蓋古衛武伯玉之流, 而公則能之。 洵不亦百中難一, 而足爲後人之敬重乎? 如享遐齡而充厥志, 有以倡道而裨世, 胡爲乎一疾九原, 齎士友宗黨之悲耶? 嗚呼! 蓬雲瀛風, 西漂東泊, 病不問藥, 葬未執紼。 去夏一哭, 亦云倉猝, 哀文已構, 晩此草宿, 情徹幽明, 厚顔是恧。 席山月長在, 粉圃花重發, 惟赫靈之陟降, 歷千年而不滅。 庶幾昭格, 歆我泂酌。 노가암(老可菴) 김낙필(金洛弼 1850.10.9.~1919.4.20.)의 호이다. 본관은 부령(扶寧), 자는 여량(汝良)이며, 부안 명당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릴 때 백홍진(白弘鎭)에게 배우고, 만년에 간재 전우 문하에 나아가 배웠다. 백발……모시면서 간재 전우(艮齋田愚)가 부안의 계화도에 은둔하여 강학할 때, 칠순의 나이인 김낙필은 아홉 살 연하인 간재에게 제자의 예를 갖춰 모셨다. 위무공(衛武公) 춘추 시대 위나라 무공(武公)으로, 95세의 나이에도 신하들에게 자신을 일깨워 달라 당부하며 반성에 노력하였다는 칭송이 전한다.《詩經ㆍ抑》 거백옥(蘧伯玉) 춘추 시대 위(衛) 나라의 현대부(賢大夫)로서, 공자가 위나라에 갔을 때 그의 집에 머물렀다. 나이 오십에 지난 사십구 년의 잘못을 반성하고, 나이 육십까지 육십 번을 고쳤다는 칭송이 전한다. 《淮南子ㆍ原道訓》《莊子ㆍ則陽》 봉산(蓬山)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의 봉래산(蓬萊山)을 말한다. 김택술은 봉산에서 처음 간재선생께 집지(執贄)하였다. 《후창집》〈告先考先妣墓文〉 영주(瀛州)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의 옛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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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재 황공께 올리는 제문 祭小心齋黃公文 유세차 병자년(1936) 윤3월 10일 임오날에 동문 김택술은 멀리서 과일과 포 등 제수를 보내 소심재 황공의 영령에게 곡하며 고합니다.아, 공은 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통해 그 사실을 알 수 있겠습니까. 어질지 못한 사람을 미워하신 점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인한 마음과 불인(不仁)한 마음을 함께 가질 수 없는 것은 한 번에 몸을 두 가지 용도로 움직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걸핏하면 "인을 좋아하면 충분하지 어찌 반드시 불인(不仁)을 미워해야 하는가?"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만일 이 말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매우 미워하는데 그 미워하는 정도가 불인한 사람을 미워하는 것보다도 심합니다. 그러니 저는 그들이 과연 인을 좋아하는 실제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풍조가 지금 세차게 일어나고 있습니다.대개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뒤로 두세 명의 흉도들이 후환을 고려하지 않은 채 못된 짓을 끊임없이 하는 것은 사실상 그들 스스로 인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불인한 것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말에 반대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사람이 도와서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공께서는 그러한 까닭을 잘 알았기 때문에 힘껏 변별하여 그런 사람들을 통렬하게 논척하였으니 아마도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한 분이실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비록 옛날에 살았다 하더라도 오히려 숭상하였을 것인데, 하물며 같은 세상에 사는 사람이고, 게다가 동문의 사이이며, 더군다나 환난의 시기를 함께했으니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매번 목을 길게 빼고 북쪽을 바라보며 노성(老成)한 공께서 건강하기만을 바랐건만 하루아침에 갑자기 부음을 듣게 될 줄 어찌 짐작이나 했겠습니까.생각건대 공은 덕성(德性)이 훌륭하고 정밀한 학술까지 갖추셨습니다. 비록 하루에 천 리를 내달리는 기개는 없었지만 1촌이나 1자씩 점점 발전해나가는 모습을 지니셨습니다. 그리하여 만년에 성취한 것은 말로 다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사문(斯文)이 불행하여 이런 분이 운명하셨으니 흉악한 짓을 하는 무리와 조장하는 사람들은 더욱 설쳐대며 거리낌이 없을 것입니다.저는 못난 사람인데 외람되게 공이 알아주셨으니 남들보다 부족하지 않은 정성으로 공의 뒤를 따르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부정하고 옳지 못한 학설을 막는 데 목숨을 바쳐 '부처님 은혜에 보답'67)하고자 하였습니다. 아, 그런데 지금 더욱 외로운 신세가 되었으니 나는 장차 누구를 의지한단 말입니까.비록 그렇지만 공은 이미 한 일이 있기 때문에 돌아가 하늘에 계신 선생님의 영령을 뵙더라도 부끄러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또 저를 살피셔서 때때로 오르내리신다면 제가 감격하여 도와주는 것이 있음을 알 것이니 어찌 소홀히 하거나 중단하여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모두 아는 이치를 저버리겠습니까.또 공의 자손과 문생들 가운데 도를 함께하여 서로 도움을 주는 이가 있으니 이것은 제 평생의 다행한 일입니다. 대개 이 일은 본래 만세까지 기약해야 할 일이지 하루아침에 서두를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양주와 묵적은 맹자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나 맹자는 그런 이유 때문에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맹자를 본받지 않는다면 누구를 본받겠습니까. 다만 사문의 변고가 갈수록 예측할 수 없게 되었는데, 다시 공의 거친 주먹과 힘찬 발길질68)을 볼 수 없어 서글프니 이것이 어찌 사사로운 감정이겠습니까. 아, 슬픕니다! 부디 흠향하시기 바랍니다. 維歲次丙子閏三月初十日壬午, 同門生金澤述遠寄果脯之奠, 哭告于小心齋黃公之靈曰: 嗚呼! 公可謂好仁者也。 於何而見得好仁? 由其有惡不仁也。 心之不可兩存, 如身之不可二用。 今之人輒曰好仁, 足矣。 何必惡不仁? 如有拂此言者, 便致深惡。 惡之甚於不仁, 吾未知其果有好仁之實與否。 而此風於今爲烈, 蓋自山頹, 二三凶徒之敢行不顧餘患, 末有涯泝者, 實由自謂好仁之徒, 不惡不仁, 而反惡拂言者而助成之也。 公能深達其故, 力辨而痛斥之。 蓋千百人中一人而已。 如此人者, 雖使在古猶當尙之。 况在幷世, 况在同門, 况在同患之日乎! 每引領而北望, 庶老成之無恙, 孰謂一朝遽承訃音? 念公德性之厚, 輔以學術之精, 雖無一日千里之槩, 而自有寸得尺進之像。 其晩暮所成有難以盡形者。 斯文不幸, 斯人云亡, 凶行之徒、助成之類益以鴟張而無忌。 顧余孱劣, 猥蒙相知, 誠不後人, 願從下風, 距詖邪遁死生, 以之共報佛恩。 嗚呼! 今焉益孤, 吾將疇依? 雖然, 公旣有藉手歸見先師在天之靈, 而無所愧矣。 又有俯息相吹, 時降陰騭, 則使余知所歆動而庇蔭者猶自在也。 豈敢怠忽間斷, 有負幽明相知之理也乎? 且公之子孫門生亦有可與同道而相益, 此爲平生之幸也。 蓋此事, 本以萬世而爲期, 非以一朝而急功者。 故楊墨亦未怕孟子, 然孟子未嘗以此自沮。 吾輩不法孟子, 其將誰法矣乎? 但以師門事變去益叵測, 而不復見公麤拳大踢, 而爲之傷悲, 豈爲私耶哉! 嗚呼哀哉! 尙饗! 부처님 은혜에 보답[報佛恩] '몸과 마음을 다하여 끝없는 은혜를 갚는다'는 말이다. 주희가 진량(陳亮)에게 보낸 편지의 말 "불자들은 '이 몸과 마음을 온 우주의 진진찰찰에 바치오리니, 이를 일러 부처님 은혜에 보답함이라 하네.' 라고 한다.[佛者之言曰: 將此身心奉塵刹, 是則名為報佛恩。]"에 보인다. 거친 주먹과 힘찬 발길질 사문에 해를 끼치는 사람을 물리칠 힘을 말한다. 주희(朱熹)가 진량(陳亮)에게 준 편지에, "공자가 어찌 지극히 공정하고 지극히 정성스럽지 않았으며, 맹자가 어찌 거친 주먹을 휘두르고 크게 발길질하지 않았겠는가.[孔子豈不是至公至誠, 孟子豈不是麤拳大踢。]"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晦庵集 卷28 答陳同夫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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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자정에게 답함 무인년(1938) 答趙子貞 戊寅 어떤 사람이 시(詩)는 반드시 괴롭게 생각한 연후에 아름다운 시구를 얻을 수 있다고 하고, 황모(黃某)의 옷을 깨물며 스스로 뼈를 녹이는 일을 인용하여 말을 하는 자가 있었는데 매우 우스운 일입니다. 무릇 시란 뜻을 말하는 것으로 밖에서 구하여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뜻이 바르면 시 또한 바르고, 뜻이 사특하면 시 또한 사특합니다. 옛날의 삼백편(三百篇) 《시경》은 훌륭합니다. 후세에는 비록 시법(詩法)을 진술하였지만 사특함과 바름을 폐하고 논하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만 이미 드러난 볼 만한 것을 가지고 말해보겠습니다. 두공부(杜工部 두보(杜甫))의 충의를 숭상하는 뜻이 있어야만 가을빛과 높음을 다투는 시가 있을 수 있으며, 이청련(李靑蓮 이백(李白))의 활달한 뜻이 있어야만 문을 열면 산을 보게 되는 시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뜻이 없는데 시가 있는 자를 나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억지로 힘써 찾으며 괴롭게 옷을 깨물고 뼈를 녹임에 이르러야 아름다운 시구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가? 또 시는 음악과 가까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칙(內則)》에는 음악을 배우고 시를 읊조리는 것으로 한 때의 일로 삼았고,62) 공자는 시에서 흥기하고 음악에서 완성하는 것으로 시작과 끝을 삼았습니다.63) 음악은 화락을 위주로 합니다. 그렇다면 시 또한 그 심기가 평화로워 곧바로 자기의 뜻을 표현한 뒤에야 혼연히 저절로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시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아무개의 말처럼 반드시 괴롭게 생각하여 옷이 물어뜯기고 뼈가 녹듯이 해야만 한다면 이는 성인이 시교(詩教)를 베푼 것이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을 수고롭게 하여 생명을 해치게 하는 것이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그 말은 이치가 없는 것으로 우스울 뿐만 아니라 이치를 해치는 것으로 배척해야 하는 것입니다. 某人之謂詩必苦思然後乃得佳句,而引黃某齧衣自家銷骨事以爲說者,甚可笑也.夫詩言志,而非外求而得者也, 故志正則詩亦正,志邪則詩亦邪.古之三百篇尚矣,後世雖陳詩法, 廢邪正不論.然但以已著之可見者言之,有杜工部忠義之志然後有秋色爭高之詩,有李青蓮豁達之志然後有開門見山之句,無其志而有其詩者,吾未之見也.豈強探力索之苦至於齧衣銷骨而可得佳句乎哉? 且詩近於樂者, 故《內則》以學樂誦詩爲一時事, 孔子以興詩成樂爲始終事.樂是以和爲主者,則詩亦可知其心平氣和,直寫已志而後, 可以得渾然天成之佳句也審矣.如必苦思衣齧骨銷而得之,若某人之言,則是聖人之設詩教也,乃所以使人勞心而戕生也,豈有是理哉? 其言也,非直無理之可笑,亦爲害理之可斥者也. 내칙(內則)에는……삼았고 《예기(禮記)》 〈내칙(內則)〉에 "13세가 되면 음악을 배우고 시가를 읊으며 작무를 배운다.[十有三年, 學樂誦詩舞勺]"라고 하였다. 공자는……삼았습니다 《논어(論語)》 〈태백(泰伯)〉에 "시에서 흥기하고, 예에서 세우고, 음악에서 완성한다.[興於詩, 立於禮, 成於樂]"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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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자정에게 답함 기묘년(1939) 與趙子貞 己卯 지금 보내준 《우암연보(尤菴年譜)》 한 편을 보니, 당시에 한쪽의 각립(角立)한 자를 제외하고 의론하는 사이와 향배를 정하는 즈음에 제대로 수립할 수 없었던 자들도 의당 모두 문행(文行)과 아망(雅望)이 있는 일세의 명사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어떠합니까? 대체로 이와 같이 된 까닭은 시비가 분명하지 못하여 화복(禍福)에 흔들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심지어 초려(草廬)65)와 현석(玄石)66)과 같은 명현(明賢)도 오히려 얼마간 면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오늘날 호남과 음성 사이에서 이랬다저랬다 반복하는 모모(某某) 같은 자들이야 어찌 괴이하게 여길 것이 있겠습니까? 아, 우옹(尤翁)은 오직 의리만 알았지 화복은 알지 못하고 시종 하나의 절개를 유지하여 죽은 이후에야 그쳤으니, 참으로 우리의 스승입니다. 어찌 감히 감회를 일으켜 우러르며 배우기를 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현제(賢弟)와 함께 힘쓰고자 합니다.사람들이 매번 고인(古人)의 잘잘못을 논할 때에는 분명하지 않음이 없지만 금인(今人)의 잘잘못을 논함에 이르러서는 어두운데. 이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고인에 대해서는 애증(愛憎)의 관계가 없지만 금인에 대해서는 사적인 친소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현제는 특히 회니시비(懷尼是非)67)의 논변에 있어서 현석이 이랬다저랬다 한 것68)에 대해 매우 그릇되었다고 하였는데,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유독 호남과 음성 간에 대해서는 모인(某人)69)이 이전의 의론을 변경한 것을 그릇되었다고 하지 않으니, 어찌 그리도 어두운 것입니까? 만약 눈앞의 '사(私)' 한 글자를 완전히 쓸어버리고 호남과 음성 사이의 쟁론을 옛날 책이나 고문으로 간주하여 살펴본다면, 또한 모인을 논하기를 반드시 회니시비에 있어 현석을 논한 것처럼 할 것입니다. 今觀所惠《尤菴年譜》一遍,在當時除一邊角立者外,其不能樹立於議論之間、向背之際者,宜亦皆文行雅望,一世之名士.然以今觀之,何如也? 蓋其所以如此者,不明於是非而有動乎禍福故也.至以草廬、玄石之名賢,猶些不免,而況今日某某之依違反覆於湖陰之間者,何足怪哉? 嗟呼! 尤翁惟知義理,不知禍福,終始一節, 死而後已,眞吾師也.安敢不興感仰止而願學也? 欲與賢弟共勉焉.人每於論古人之得失非不明也, 至於論今人之得失則暗焉.此曷故焉? 於古則無愛憎之關,而於今則有親疎之私也.賢尤於懷尼之論,深以玄石之依違爲非, 可謂明矣.獨於湖陰之間,不以某人之變改前論爲非,何其暗也? 若能一切掃去目下私之一字,以湖陰之爭,作陳編古文看,則亦當論某人,如懷尼時之論玄石也必矣. 초려(草廬) 초려는 이유태(李惟泰)의 호이다. 자는 태지(泰之),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예학(禮學)에 뛰어났으며, 호서(湖西)의 산림 오현(山林五賢)으로 꼽혔다. 저서로는 《초려집(草廬集)》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현석(玄石) 현석은 박세채(朴世采)의 호이다.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ㆍ남계(南溪)이다. 김상헌(金尙憲)과 김집(金集)의 문인이며, 송시열과도 교유하였다. 소론의 영수로서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문집인《남계집(南溪集)》을 비롯하여 《범학전편(範學全編)》, 《시경요의(詩經要義)》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회니시비(懷尼是非) 서인(西人)이 송시열을 두둔하는 노론(老論)과 윤증(尹拯)을 두둔하는 소론(少論)으로 분열되어 싸우게 된 일을 가리킨다. '회(懷)'와 '니(尼)'는 각각 송시열의 거주지인 회덕군(懷德郡)과 윤증의 거주지인 이성군(尼城郡)을 가리키며, 노소(老少) 분당에 관련된 두 사람의 글을 모아 엮은 책으로 《회니본말(懷尼本末)》 등이 있다. 현석이……것 1684년(숙종10) 회니(懷尼)의 분쟁을 계기로 노론과 소론의 대립과정에서 박세채는 〈황극탕평론(皇極蕩平論)〉을 발표하여 양편의 파당적 대립을 막으려 한 것을 가리키는데, 끝내는 소론의 편에 서고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모인(某人) 김평묵(金平黙)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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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자정에게 답함 경진년(1940) 與趙子貞 庚辰 일전에 보여준 선사 어록(語錄) 3책에서 현제(賢弟)가 당일에 선사를 믿고 학문에 힘쓴 뜻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만약에 잘 윤색하여 후세에 전한다면 또한 배우는 자들에게 공이 있을 것입니다. 다만 선사의 말씀을 귀로 들은 지가 오래 되었으니 추후에 윤색을 하다보면 본래의 뜻을 잃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하물며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릴 수가 있겠습니까? 요컨대 담당하는 사람이 스스로 해야 하고, 문자를 고칠 즈음에는 반드시 당일의 어순과 문맥을 신중히 생각하여 털끝만큼도 틀리지 않게 해야만 될 것입니다. 무릇 강학(講學)과 아언(雅言)에 관계된 것도 오히려 그렇게 해야 하는데, 하물며 인사의 득실과 실제를 논한 것이야 더욱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예컨대 어록 중에 음성의 오진영이 파리장서(巴里長書)를 염치없이 받든 일을 논한 것 같은 것은, 본문에는 "장서가 전달되지 않아서 다행히 큰 화가 없었다.[書之未傳,幸無大禍]"로 되어 있는데, 지금 모인(某人)은 '미전(未傳)'을 '미발(未發)'로 고쳤으니, 이것은 글자 한 자의 차이로 천 리나 어긋나게 된 것입니다. '미전'이란 글이 비록 발송됐다 하더라도 아직 전달되지는 않았다는 것이고, '미발'이란 글이 비록 완성되었지만 미처 발송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곳은 관계된 바가 가볍지 않으니, 더욱 다른 사람이 그 사이에 손을 쓰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본문에 의거하여 '미전'으로 해야만 지극히 옳고 지극히 옳습니다.군주를 시해하는 것은 최상의 큰 죄악입니다. 곽광(霍光)의 처가 허후(許后)를 독살하였는데,70) 곽광이 그 죄를 숨기고 발설하지 않았으니, 곽광의 죄도 또한 컸습니다. 그러나 《한서(漢書)》를 지은 자는 이것 때문에 곽광의 전(傳)을 세우지 않은 것은 아니었고, 사람들은 그가 국가에 크게 공이 있다고 일컫게 되어서는 또한 이윤(伊尹)과 병칭71)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어떤 사람이 일컬을만한 일이 있음에도 처의 죄에 연좌되어 전을 세우지 않는 것이 되겠습니까? 더구나 부인이 죄가 있는지 없는지 본디 애매하여 외부 사람들이 자세히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남편도 알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더욱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의당 처로 인하여 그 사람을 배척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처의 죄와 아울러서 풍문으로 전하는 말을 깊이 믿어서는 안 됩니다.김성구(金聖九)가 평상시 선사를 지극히 존경하고 사모하였는데, 둥글게 상투를 틀고 치포관을 쓰며 항상 넓은 소매의 옷을 입어 한결같이 선사의 법도를 따랐습니다. 또한 성리(性理)의 근원에 대해서 가정(家庭)의 호론(湖論)을 지키지 않고 선사의 낙론(洛論)을 따랐으니, 비록 친문인(親門人)이라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습니까. 이미 가마(加麻)72)의 복(服)을 행하고 하관(下棺)하는 자리에도 참여했으니 문인과 똑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후에 또 나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근래에 문인의 예로써 유림동(流林洞)에 있는 간옹의 사당을 배알하였는데, 특별히 음성 사람이 간옹을 무함한 것을 배척했다는 이유로 그에게 미움을 받아서 내침을 당했습니다."고 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비록 현제가 친하게 지내는 아무개 같은 자도 한쪽의 말을 익숙히 듣고서 의심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현동(玄洞)의 선사 묘소에 전배(展拜)할 때에 샘솟듯 눈물을 흘리고 실성할 정도로 곡을 하였으니, 참으로 이와 같은 경우처럼 사람이 따르는 바를 신중히 하고 그 보는 것을 공평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대가 또 말하기를 "친문인 가운데 3년 후에 샘솟듯 눈물을 흘리고 실성을 하는 자가 또한 몇 사람이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김성구는 인의의 성품을 발휘하는 것이 다른 사람보다 배나 되므로 비록 친문인은 아니더라도 능히 이와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 선사의 고도대절(高道大節)로도 천고에 없던 무함을 받았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김성구가 현인을 사랑하는 어짊과 무함을 통분한 의리에서 발로되어 샘솟듯 눈물을 흘리고 실성을 한 까닭입니다. 그대가 생각해봐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日前所示先師語錄三冊,可見賢弟當日信師勉學之意,若善加修潤而傳後,亦可有功於學者.但聽言日遠,追後潤色,恐失本旨,況可借他人乎? 要之當人自爲,而改竄之際,須愼思當日語脈,不爽毫髪, 然後乃可耳.凡係講學雅言猶然,況其論人事得失實際者乎? 如錄中所論陰震巴里冒銜之事,本文以"書之未傳,幸無大禍", 今某人改"未傳"爲"未發",則是一字之異,千里之繆."未傳"者, 書雖發而未及傳逹也; "未發"者, 書雖成而未及發送也.如此等處,所係不輕,尤不容他人之容手於其間也.自當依本文爲"未傳",至可至可.弒君, 無上大惡也.霍光之妻,毒弒許后, 光匿其罪而不發, 光罪亦大矣.然而作《漢書》者,不以此不立霍光傳,而人稱大有功於國家,則又不與伊尹并稱乎? 然則今有人有可稱之事,而連坐妻罪,不爲之立傳,可乎? 況婦人之有罪無罪,自屬曖昧,而非惟外人之所不可詳,亦有其夫之所不可知者乎? 然則非惟不當因妻而斥其人,并與其妻罪,而不當深信於風說也.金聖九平日於先師極其尊慕,而其圓髻緇撮,常著廣袖,旣一遵先師規模, 又於性理源頭,不守家庭之湖論,而從先師之洛論,雖親門人,何以加此? 旣行加麻之服而參會下,同於門人矣.後又抵余書云: "近日一門人禮,往謁艮翁祠廟於流林洞,而特以排斥陰人誣之, 故爲其所惡而外之." 是故雖以賢弟所親如某也,亦不免習聞一邊說而至疑.其展拜玄阡日, 淚湧如泉, 哭之失聲.信矣哉! 人之不可不愼其所從而公其所見,有如是也.賢弟且道: "親門人之淚泉失聲於三年後者,還有幾人?" 惟聖九發得仁義之性,有加於人, 故雖非親門人,能如是矣.鳴呼! 以先師高道大節,蒙誣千古,豈不悲哉? 此聖九之哭之淚泉失聲,所以出於愛賢之仁、痛誣之義者也.賢弟思之,不其然否? 곽광(霍光)의……독살하였는데 곽광(霍光)은 한(漢)나라 무제(武帝)·소제(昭帝)·선제(宣帝) 때 사람으로 자는 자맹(子孟), 시호는 선성(宣成)이다. 무제(武帝)의 유조(遺詔)를 받아 소제(昭帝)를 보필하였고, 또 소제가 죽은 뒤에 창읍왕(昌邑王)을 영립(迎立)하였다가 폐위시키고 선제(宣帝)를 영립하여 국권을 장악하였다. 그의 아내는 곽현(霍顯)이다. 그녀는 자기 딸을 귀인(貴人)으로 만들기 위하여 허후(許后)가 출산할 때, 유의(乳醫)를 시켜 독살하였다. 《한서(漢書)》 권68 〈곽광김일제전(霍光金日磾傳)〉 이윤(伊尹)과 병칭 '이곽(伊霍)'으로 일컬어지는 것을 가리킨다. 이윤(伊尹)은 은(殷)나라의 재상으로서 태갑(太甲)을 동궁(桐宮)에 내쳐 악행을 바로잡은 일화가 있고, 곽광은 창읍왕(昌邑王)을 폐하고 선제(宣帝)를 세웠는데, 이 둘은 무도한 임금을 내친 대표적인 인물로 칭송되었다. 이미 가마(加麻)의 복(服)을 행하고 문인(門人)이 스승의 상(喪)에 심상(心喪)을 입는 표시로 겉옷에 삼베 조각을 붙이는 것이다. 《국역 농암집》 제36권 〈부록(附錄) 연보 하(年譜下)〉에 "〈김창협의〉부음이 전해지자 조정과 초야에서 모두들 서로 조상(弔喪)하였고, 원근의 선비들이 달려와 슬픔을 다해 곡하였으며, 문인들 중에 가마(加麻)하는 이가 6, 7십 명이나 되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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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선생 차운시 附 先生次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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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년(1915) 재야에 간재 선생을 모시고 계초재에서 수세하는데, 그해 학문이 황폐해져 옛날을 애도하고 지금을 슬퍼해서 시를 지어 뜻을 말함 乙卯除夜 陪艮齋先生 守歲于繼草齋 年邁學荒 悼舊悵今 因拈韻言志 지난 신해년135)엔 粤在歲重光봉산 글방에서 열심히 공부했지 攻苦鳳山房추운 날 전주136)로 돌아가니 天寒歸豊沛나그네 마음 어찌 끝이 없나 客子感何長멀리 대인의 명을 받들고 遠承大人命가까운 자리137)에서 수세하였는데 守歲三席傍잠깐 사이에 지난 자취가 되어 俛仰成陳跡어느덧 십오 년이나 되었네 忽忽十五霜도중에 부모님 돌아가신 후 中間風樹後배움이 황량하기도 했었지 所學就荒凉반백 머리로 해가 또 다해 二毛歲且盡조용히 화산당에 앉았네 黙坐華山堂문득 신구의 한을 느끼니 飜覺新舊恨온갖 내 애간장 태우는 것이 모였네 叢集煎我腸이때 이르러 전철을 돌아보고 及此回前轍계속 전진하여 큰길로 나아가리 進進趨康莊우뚝하다 저 수수와 사수여138) 屹彼洙泗上공자의 담장은 몇 길인가139) 數仞夫子墻아 게으름 피우지 마라140) 嗟爾母泄沓흘러가는 시간이 아깝구나 惜此流年光부모님 스승님 바람을 벗어나게 한다면 免敎父師望끝내 실패를 맛보리라141) 究竟歸亡羊 粤在歲重光,攻苦鳳山房.天寒歸豊沛,客子感何長?遠承大人命,守歲三席傍.俛仰成陳跡,忽忽十五霜.中間風樹後,所學就荒凉.二毛歲且盡,黙坐華山堂.飜覺新舊恨,叢集煎我腸.及此回前轍,進進趨康莊.屹彼洙泗上,數仞夫子墻.嗟爾母泄沓,惜此流年光.免敎父師望,究竟歸亡羊. 신해년 원문 '중광(重光)'은 고갑자(古甲子)로 신(辛)에 해당된다. 따라서 을묘년인 1915년보다 4년 전인 신해년(1911)을 가리킨다. 전주 원문 '풍패(豐沛)'는 중국 한나라 유방(劉邦)의 고향인 패현(沛縣) 풍읍(豐邑)을 가리키는 말로, 제향의 고향을 말하는데, 조선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전주 이씨이므로 전주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가까운 자리 원문 '삼석(三席)'은 임금이나 신하, 스승과 제자 사이의 매우 가까운 자리를 말한다. 《禮記 文王世子》 수수와 사수여 두 강 사이에서 공자(孔子)가 제자들을 데리고 학문을 강론했기 때문에 후세에 수사(洙泗)를 유가(儒家)의 대칭으로 일컬었다. "내가 그대들과 수사의 사이에서 선생님을 섬겼다."라고 한 말도 있다. 《禮記 檀弓 上》 공자의……길인가 공자의 학문이 매우 심오함을 표현한 말이다. "궁장(宮墻)에 비유하자면, 사(賜)의 담장은 어깨 높이라 집 안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지만, 스승님의 담장은 몇 길 높이라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아름다운 종묘와 수많은 백관을 볼 수 없다.〔譬之宮牆 賜之牆也及肩 窺見室家之好 夫子之牆數仞 不得其門而入 不見宗廟之美百官之富〕" 《論語 子張》 게으름……마라 맹자는 임금을 섬김에 의가 없고 진퇴에 예가 없으며 말만 하면 선왕의 도를 비방하는 사람이 '예예답답(泄泄沓沓)'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孟子 離婁上》 실패를 맛보리라 이 세상에서 잘 되든 못 되든 결과적으로는 모두 똑같이 실패하게 된다는 말이다. 《장자(莊子)》 변무(騈拇)에 "장(臧)은 책을 읽다 양을 잃어버리고, 곡(穀)은 노름을 하다가 양을 잃어버렸으나, 양을 잃어버린 것은〔亡羊〕 모두 똑같다."라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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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회재 근호의 자사 【정묘년(1927)】 朴晦哉【根浩】字辭 【丁卯】 나무는 뿌리에 감추고 木晦於根,사람은 제 몸에 감춘다. 人晦於身.유병산(劉屛山)284)이 주자에게 준 有劉祝朱,천년에 향기뿜는 자사(字辭)이네 永辭千春.박근호(朴根浩) 군은 朴君根浩,반짝이는 문채 몸에 지녀 有文有斕,이제 회재(晦哉)라 자를 붙여주니 爰字晦哉,내가 전수받은 깊은 뜻 있네. 我有受焉.그 뜻 푼 자사(字辭) 지어서 演之作辭,첫 번째 축사(祝辭)를 때우려 하네. 庶補前言.해는 밤에 빛을 감추었다가 日晦于夜,아침 되면 밝고 곱게 솟아오르고 朝旭方鮮.달은 검은 백(魄)285) 뒤에 숨었다가 月晦于魄,마침내는 둥그런 바퀴를 그리네 終見圖輪,불은 꺼져 재 속에 숨어 있다가 火晦于灰,타오르면 빛과 불꽃이 하늘을 나네. 光熖騰天.이것은 사람도 똑 같으니 其在乎人,누가 유독 그렇지 않으랴. 奚獨不然,어두운 데서 조용히 숨쉬며 嚮晦宴息,그침 없이 애써 스스로 강해지고 自强乾乾,보이지 않는 속에 스스로 닦아 闇然自修,자신의 문채 날로 아름답게 가꿀지라. 日章其文.어둠 속에 잠겨 우환을 면함 沈晦免患,그 지혜 속류를 초월하니 智乃出倫,힘쓸지어다 회재여 懋哉晦也,그 어둠의 덕 돈후하네. 厥德斯敦.이름을 돌아보며 그 뜻을 생각하라 顧名思義,옛 현인이 일찌기 하신 말씀이니, 曾聞古賢,이름이 실제에 부합하지 못하면 名不副實,부끄러움에 얼굴 붉어지리. 是爲騂顔.회재(晦哉)여 노력하소 晦哉勖哉,이를 기억하여 허물에 빠지지 말소. 念玆罔諐.순(舜)은 누구고 나는 누구인가 舜何予何,옛 사람 이런 말 한 적 있으니286) 古亦有云,전날의 회재와 오늘의 회재 昔晦今晦,이 두 사람 또한 어찌 다르랴! 豈其別人.회재여 힘써 감출지니 勖哉晦哉,한결 같으면 어려움 없으리라. 毋貳毋難. 木晦於根, 人晦於身, 有劉祝朱, 永辭千春。 朴君根浩, 有文有斕, 爰字晦哉, 我有受焉。 演之作辭, 庶補前言, 日晦于夜, 朝旭方鮮。 月晦于魄, 終見圖輪, 火晦于灰, 光熖騰天。 其在乎人, 奚獨不然, 嚮晦宴息, 自强乾乾, 闇然自修, 日章其文。 沈晦免患, 智乃出倫, 懋哉晦也, 厥德斯敦。 顧名思義, 曾聞古賢, 名不副實, 是爲騂顔。 晦哉勖哉, 念玆罔諐。 舜何予何, 古亦有云, 昔晦今晦, 豈其別人。 勖哉晦哉, 毋貳毋難。 유병산(劉屛山) 남송의 학자 유자휘(劉子翬, 1101~1147)를 말한다. 자는 언충(彦沖)이고, 호는 병옹(病翁)이다. 무이산(武夷山)에 은거한 주자의 스승이자, 아버지인 주송(朱松)의 친구이다. 《주역(周易)》에 대해 밝았고, 복괘(復卦)를 특히 중시하였다.《宋史.劉子翬列傳》 백(魄) 밤하늘의 달이 지구에 가려 어두운 부분을 가리킨다. 보름달이 지나면 생겨나기 시작하여 그믐에는 달을 온전히 가린다. 순(舜)은……있으니 공자의 제자 안연(顔淵)이 "순 임금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무슨 일을 하려면 역시 이래야 할 것이다.[舜何人也, 予何人也? 有爲者亦若是。]"라고 한 말을 인용하였다. 《孟子.滕文公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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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진의 자에 대한 설 【1929년】 李士進字說 【己巳】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70세에 법도에 넘지 않았다.179)'는 것은 비록 성인이 자신을 낮추고 남을 가르친 말이다. 그러나 주자는 이를 '반드시 홀로 그 나아감을 깨달았으나, 다른 사람은 미처 알지 못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180)'라고 판단하였으니, 이는 아마도 '나이가 높을수록 덕도 더욱 높아진다.181)'라고 말한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비록 성인의 학문이 나이를 따라 진보한다고 하더라도 지나치지 않거늘, 하물며 보통사람에게 있어서이겠는가.옛날에 20세가 되면 관례(冠禮)를 행하고, 관례를 행한 뒤에 비로소 성인(成人)으로서의 책임을 요구한 것은 그의 학문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점 진보하기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이씨의 아들 강년(康年)이 나이 14세에 관례를 하고 그 스승 가석(可石) 박공이 사진(士進)으로 자(字)를 지어주었는데, 나에게 그 의미를 대신 기술하게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사진은 진실로 훤칠하게 빼어나면서 조숙한 자이다. 다만 널리 배우며 효제(孝悌)의 도리를 힘써 행하는 것이 옛사람의 약관(弱冠) 때와 같은지 모르겠다.대체로 나이가 들수록 학문이 함께 진보하는 자는 천지가 부여한 이기(理氣)를 잃지 않고, 부모가 생성해준 은애(恩愛)를 저버리지 않아서 둥근 얼굴에 네모난 발로 우뚝 똑바로 서서, 아래를 굽어보고 위를 우러러보아도 부끄러움이 없는 자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도 학문이 진보하지 않은 자는 좋은 옷과 맛난 음식을 많이 허비하여, 다함이 없는 양식을 먹으면서도 남을 이롭게 하는 품행과 재능이 없고, 오랫동안 해와 달의 광명을 보고 풍정(風霆)의 고동(鼓動)을 듣고도 사물의 이치에는 견문이 어두워 천지와 부모가 생성해주고 가르쳐 길러준 은혜를 저버리고, 신묘한 마음과 선한 본성으로서 온갖 이치를 갖춘 천품을 스스로 버린 채 다만 조교(曹交)처럼 장자를 대우하고182) 원양(原壤)처럼 늙음183)으로써 오만하게 스스로 높이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이다.사람이 스스로 처할 곳을 택하는 자는 장차 어디에 처해야 하겠는가. 지금 사진은 나이가 비록 적지만 오히려 성인이 학문에 뜻을 두었던 때에 이르렀고, 비록 기품(氣稟)이 가지런하지 않아서 차례를 따라 정진할 수 없지만, 한결같이 성인이 마음과 본성을 돌아본 것처럼 한다면 성인과 똑같이 될 것이다. 만일 어려서부터 장성할 때까지, 장성해서부터 늙을 때까지 차근차근 부지런히 자신의 재능을 다하여 기질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비록 중도에 맞지는 않을지라도 그것에서 멀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스승 가석이 자를 지은 뜻이 어찌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사진은 힘써 노력하라! 十五而志學, 七十而不踰矩, 雖爲聖人, 謙己誨人之言. 然朱子斷之以必有獨覺其進而人不及知者, 此蓋云年彌高則德彌邵也. 然則雖謂聖人之學, 亦隨年而進, 不爲過矣, 而況平常人乎? 古者二十而冠, 冠而後始責成人者, 待其學隨年而稍進也. 李氏子康年, 年十四而冠, 其師可石朴公字之以士進, 俾余替述其意. 余惟士進固頎然秀而夙成者, 但未知博學惇孝悌, 亦如古人弱冠時乎? 夫年進而學與進者, 不失天地賊與之理氣, 不負父母生成之恩愛, 圓顱方趾, 挺然直立, 俯仰無愧者也. 年進而學不進者, 積費麻絲, 梁肉, 喫著無盡之養, 而無行能之益人, 久視日月之光明, 聽風霆之鼓動, 而昧見聞乎物理, 靠負天地父母生成敎養之恩, 自棄靈心善性萬理皆備之稟, 徒以曹交之長, 原壤之老, 偃然自尊而不知恥者也. 人之擇所以自處者, 將奚居焉? 今士進年雖少, 尙及聖人志學之時, 雖氣稟之不齊, 未能循次精進, 一如聖人之爲顧心與性, 則與聖人一也. 苟能自少而壯, 自壯而老, 循循孜孜, 竭吾才而變吾質焉, 則雖不中, 不遠矣. 石師所以命字之意, 豈不在斯歟? 士進勖哉! 15세에 …… 않았다 《논어》 〈위정〉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나는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 70세에 마음에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도 법도에 넘지 않았다.[吾十有五而志于學 ......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라고 하였다. 반드시 …… 것이다 《논어집주》 〈위정〉에서 주자가 말하기를 "이는 일상생활하는 가운데 반드시 홀로 그 나아감을 깨달았으나, 다른 사람은 미처 알지 못하는 것이 있었을 것이다.[是其日用之間, 必有獨覺其進而人不及知者.]"라고 하였다. 나이가 …… 높아진다 한(漢)나라 양웅(揚雄)의 《법언(法言)》 〈효지(孝至)〉에 "나는 그것을 전에서 들었으니, 늙으면 경계함이 얻음에 있고, 나이가 높을수록 덕도 더욱 높아져야 공자의 무리일 것이다.[吾聞諸傳, 老則戒之在得, 年彌高而德彌卲者, 是孔子之徒與.]"라는 말이 나온다. 조교(曹交)처럼 …… 대우하고 《맹자집주》 〈고자 하(告子下)〉에서 주자가 말하기를 "조교는 어른을 섬기는 예가 이미 지극하지 못했고, 도를 구하는 마음이 또 독실하지 못했다.[曹交事長之禮旣不至, 求道之心又不篤.]"라고 하였다. 원양(原壤)처럼 늙음 《논어》 〈헌문〉에 "어려서는 공손하지 못하고, 장성해서는 칭찬할 만한 일이 없고, 늙어서도 죽지 않는 것은 바로 세상에 해를 끼치는 사람이다.[幼而不孫弟, 長而無述焉, 老而不死, 是爲賊.]"라고 하면서 친구 원양을 꾸짖은 공자의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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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질 극범의 자에 대한 설 【1922년】 龜姪克範字說 【壬戌】 거북아! 너는 사령(四靈)184) 가운데 하나가 아니냐. 낙서(洛書)185)는 큰 이치인데 하늘이 반드시 너에게 이를 드러내고, 우(禹)임금과 기자(箕子) 같은 성인이 이를 취하여 〈홍범(洪範)〉186)을 부연(敷衍)하였으니, 기이하도다.형귀(炯龜)야! 너는 만물 가운데 가장 신령스러운 자가 아니냐. 인도(人道)가 〈홍범〉에 크게 갖춰져 있는 만큼 반드시 이를 능히 다한 뒤에 가장 신령스러운 자가 되는 데에 부끄럽지 않을 것이니, 쉽겠는가. 그러므로 형귀의 이름에 '극범(克範)'으로 자(字)를 지었으니, 이 〈홍범〉을 능히 잘하여 많은 사람들보다 걸출하기를 영귀(靈龜)가 (모든) 곤충 중에 빼어난 것과 같게 하라. 〈홍범〉의 도가 광대하여 요령으로는 어렵다. 절실하고 가까운 일에 착수하되 마땅히 이오사(二五事)187)로부터 시작해야 하니, 이는 또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아! 거북이는 장수하는 동물이고, 수(壽)는 〈홍범〉의 오복(五福)188) 가운데 으뜸이니, 거북이처럼 (장수하고) 〈홍범〉에 능하면 이른바 '길이 천명에 합하는 것이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는 길이다.189)'라고 하는 것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에 이 설을 지어 이로써 장수와 복의 축원을 대신한다. 龜乎! 爾非四靈之一乎? 洛書理之大者也, 天必於爾焉著之, 禹箕之聖, 取以衍〈洪範〉, 異哉! 炯龜乎! 爾非萬物中最靈者乎! 人之道大備於〈洪範〉, 而必能盡乎此然後, 不愧爲最靈, 易乎哉? 故於炯龜之名, 字之以克範乎爾, 其克乎此範, 出拔於人衆, 如靈龜之於昆蟲也. 範之道廣大, 難以要領, 切近下手, 當自二五事始, 是又不可不知也. 噫! 龜者壽物也, 壽爲〈洪範〉五福之首, 龜而克範, 所謂永言配命, 自求多福, 其在斯歟. 於是乎作此說, 用替眉壽宜嘏之祝. 사령(四靈) 네 가지 신령한 동물로, 용(龍), 봉황(鳳凰), 기린(麒麟), 거북을 말한다. 낙서(洛書) 하(夏)나라 우(禹)임금이 홍수(洪水)를 다스릴 때 낙수(洛水)에서 나온 신귀(神龜)의 등에 쓰여 있었다는 글이다. 〈홍범(洪範)〉 낙서를 기본으로 하여 만들어진 《서경》 〈주서(周書)〉의 편명이다. 이오사(二五事) 《서경》 〈홍범〉에서 홍범구주(洪範九疇)의 한 조목으로, 모(貌), 언(言), 시(視), 청(聽), 사(思)를 말한다. 오복(五福)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으로, 수가 첫 번째이다. 길이 …… 길이다 《시경》 〈대아(大雅) 문왕(文王)〉에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느냐, 그 덕을 닦을지어다. 길이 천명에 합하는 것이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는 길이니라.[無念爾祖, 聿修厥德. 永言配命, 自求多福.]"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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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론 상 【1944년】 正統論上 【甲申】 정(正)은 천하를 정도로써 얻은 것이고, 통(統)은 천하를 통일하는 것이니, 비록 통일했지만 정도로써 얻지 않았다면 정통(正統)이 될 수 없고, 비록 정도로써 얻었지만 통일하지 못했다면 정통이 될 수 없다. 한번 많은 사람에게 물어보아 이러한 말이 이치에 맞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삼대(三代 하은주(夏殷周)) 이외에 정통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漢)나라와 명(明)나라뿐이다. 예를 들면 당(唐)나라가 정치를 밝히고 송(宋)나라가 관인(寬仁)을 숭상하여 국운을 장구하게 누렸지만 그들이 정도로써 얻지 않은 것은 동일하니 또한 정통에 들어갈 수 없다.묻기를 "그렇다면 그대는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의 범례(凡例)에 어긋나는 것이니190), 어찌하겠는가."라고 하여, (내가) 말하기를 "의리(義理)는 천하의 공정한 것이기 때문에 의리를 잘 살펴보는 자는 오직 옳은 것만을 좇고, 그 말이 어떤 사람에게서 나왔는지는 묻지 않는다. 《자치통감강목》에서 이미 진(秦)나라, 진(晉)나라, 수(隋)나라가 정도로써 얻지 않은 것에 대해서 이들 나라가 능히 통일했기 때문에 정통으로 인정한 것은191) 이러한 예를 미룬 것이다. 만일 신(新)을 세운 왕망(王莽)192)이 처형되지 않고 나라를 자손에게 전해주었다면193) 또한 장차 정통으로 인정하겠는가. 이 때문에 나는 《자치통감강목》을 미완성의 책이라고 본다. 주자도 진실로 수정(修正)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을 것이다. 무릇 《시경》 중에서 정(正)이 될 수 없는 것은 변풍(變風)과 변아(變雅)194)가 되니, 진(秦)나라, 진(晉)나라, 수(隋)나라, 당(唐)나라, 송(宋)나라를 변통(變統)이라 이르면 진실로 옳을 것이다.사군자가 입론(立論)할 때에는 마땅히 충분히 지당(至當)한 것으로 귀결시켜 선에 권장하는 바를 두고 악에 징계하는 바를 두게 하면, 저 사지(私智)와 강한 힘으로 못하는 짓이 없이 천하를 취하는 자일지라도 오히려 후세의 사책(史策)에서 비난하고 주벌하는 것을 꺼릴 것이다. 예를 들면 조조(曹操)가 한나라 제위(帝位) 곁을 배회하면서도 감히 바로 취하지 못한 것과 같다.195) 그러니 선비 가운데 붓을 잡은 자가 다만 정(正)과 부정(不正)을 궁구하지 않고 그 이룬 것만 보고 정통으로 인정한다면 무엇을 권장하고 경계할 것인가. 만일 《자치통감강목》을 편찬하는 날에 이러한 말로써 명백히 아뢰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면, 주자가 빙그레 웃으면서 이를 따르지 않았을 줄을 어찌 알겠는가."라고 하였다.묻기를 "그대의 말과 같다면 후세에 다시는 정통이 없이 몇천 년의 변통 가운데 지나가 버릴 것이니, 어찌 이러한 이치가 있겠는가."라고 하여, 내가 말하기를 "90일간의 봄에 맑은 날이 항상 적고 예로부터 어지러운 날이 항상 많으니, 세상에 변이 많고 정이 적은 것도 이러한 이치이다. 우선 변통이라고 말하지 말라. 비록 무통(無統)196)이라도 어찌하겠는가. 육조(六朝)197), 오계(五季)198)와 지금의 천하는 다만 무통일 뿐이다. 그러나 한나라가 망한 때부터 명나라가 일어날 때까지 천여 년에 비로소 정통이 있게 되었으니, 또한 어찌 후대에 결국 정통이 없는 것을 근심하겠는가. 만일 지금 세상에 정도로써 천하를 얻어 왕노릇 하는 자가 있다면, 어찌 정통이 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묻기를 "이러한 것은 옳다. 또 주자가 천하를 통일시키지 못하면 또한 정통이 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자치통감강목》에서 촉한(蜀漢)의 정통에 대해서 다른 말이 없으니199) 무엇 때문인가."라고 하여, (내가) 말하기를 "비록 천하를 잃고 겨우 한쪽 모퉁이를 보존하였지만 그 선대의 전통이 그래도 남아 있어 진실로 없어지지 않았다면 이를 빼앗을 수 없으니, 내가 어떻게 비방하겠는가. 다만 《자치통감강목》에서 동주(東周)의 임금200)이 정통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매우 의심스럽다."라고 하였다.묻기를 "동진(東晉)과 남송(南宋)은 어떠한가."라고 하여, (내가) 말하기를 "이는 또한 마땅히 서진(西晉)과 북송(北宋)을 계승한 변통으로 인정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正者得天下以正也, 統者統一天下也, 雖統一, 而得不以正 則不得爲正統, 雖得之以正, 而不能統一則不得爲正統矣. 試質千人萬人, 此言不當乎理則已, 不然, 三代以外, 可得爲正統者, 惟漢明而已. 如唐之明政治, 宋之尙寬仁, 而享國長久, 其得不以正則均矣, 亦不可與於正統也. 曰: "然則子違乎《綱目》之例, 柰何?". 曰: "義理者天下之公, 故善觀理者惟是是從, 不問其言之出自何人. 《綱目》旣於秦晉隋之得不以正者, 以其能統一, 與以正統, 推是例也.". "若使新莽身不受誅, 而傳之子孫, 亦將與以正統耶?". 吾故曰: "《綱目》未成之書, 朱子固以未修正爲恨矣. 夫詩之不得爲正者, 爲變風變雅, 秦晉隋唐宋謂之變統則固可矣. 夫士君子立論, 當以十分至當者爲歸, 使善有所勸, 惡有所懲, 彼以私智强力, 無所不至而取天下者, 猶憚後世史策之譏誅, 如曹操者徘徊漢鼎之傍, 而不敢直取, 士之秉筆者, 顧不究正與不正, 但視其所成與以正統, 則何所勸戒乎? 如使編《綱目》之日, 有人以此說明白稟質, 則安知朱子不莞爾而從之也耶?". 曰: "如子之言, 後世更無正統, 而幾千年變統中過了矣, 豈有是理?". 余曰: "九十之春, 晴景常少, 從古以來, 亂日常多, 世之多變少正亦是理也. 且莫說變統. 雖無統, 柰何? 若六朝五季與今之天下直無統耳. 然自漢亡至明興, 千有餘年, 始有正統, 亦何憂後世之終無正統乎? 使今世有以正得天下而王者, 豈不爲正統乎?". 曰: "此則然矣. 朱子又以不能一天下, 亦不得爲正統, 而《綱目》蜀漢之正統, 無異辭, 何也?". 曰: "雖失區宇而僅保一隅, 其先世之正統猶在, 苟不至於亡, 則不可得而奪之也, 吾何間焉? 但於《綱目》, 東周君之不與正統, 深疑之也.". "東晉南宋, 如之何?". 曰: "此亦當與其繼西晉北宋之變統矣.".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의 …… 것이니 《자치통감강목》의 범례에서는 당나라를 정통으로 분류하였다. 《자치통감강목》에서 …… 것은 주자는 《자치통감강목》의 범례에서 "무릇 정통은 주(周)나라, 진(秦)나라, 한(漢)나라, 진(晉)나라, 수(隋)나라, 당(唐)나라를 이른다.[凡正統, 謂周秦漢晉隋唐.]"라고 하였다. 왕망(王莽) B.C.145~A.D.23. 전한의 정치가이다. 자는 거군(巨君)이다. 자신이 옹립한 평제(平帝)를 독살하고 제위를 빼앗아 국호를 신(新)으로 명명하였다. 한(漢)나라 유수(劉秀)에게 피살되었다. 재위 기간은 8~23년이다. 신(新)을 …… 전해주었다면 《자치통감강목》의 범례에서는 왕망을 '찬적(簒賊)'으로 분류했는데, 이는 "정통에게서 찬위(簒位)했지만 자손에게 전하지 못한 것을 이른다.[謂簒位于統, 而不及傳世者.]"라고 하였다. 변풍(變風)과 변아(變雅) 《모시(毛詩)》 〈대서(大序)〉에 "왕도가 쇠퇴하여 예의가 폐해지고 정교가 잘못되니 나라마다 정치가 다르고 집집마다 풍속이 달라져서 변풍과 변아가 지어졌다.[至于王道衰, 禮儀廢, 政敎失, 國異政, 家殊俗, 而變風變雅作矣.]"라고 하였다. 《시경》에서 변풍(變風)은 〈패풍(邶風)〉부터 〈빈풍(豳風)〉까지 13개국의 작품을 가리키며, 변아(變雅)는 〈소아(小雅) 유월(六月)〉 이후의 작품을 이르는 변소아(變小雅)와 〈대아(大雅) 민로(民勞)〉 이후의 작품을 이르는 변대아(變大雅)를 합하여 말한 것이다. 조조(曹操)가 …… 같다 조조는 중국(中國) 후한(後漢) 말기(末期)의 무장(武將)으로서 제위를 차지하고 싶어하면서도 명분과 의리를 두려워하여 찬탈하지는 않았는데, 뒤에 그의 아들 조비(曹丕)가 찬탈하였다. 무통(無統) 《자치통감강목》의 범례에서 무통(無統)은 주(周)와 진(秦) 사이 24년, 진(秦)과 한(漢) 사이 4년, 한(漢)과 진(晉) 사이 16년, 진(晉)과 수(隋) 사이 170년, 수(唐)와 당(隋) 사이 5년, 오대(五代) 53년을 이른다. 육조(六朝) 양자강 남쪽의 건강(建康)에 도읍을 정한 오(吳)와 동진(東晉), 그리고 남조(南朝)의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을 가리킨다. 오계(五季) 오대(五代)이다. 당말(唐末)의 후량(後梁), 후당(後唐), 후진(後晉), 후한(後漢), 후주(後周)를 가리킨다. 촉한(蜀漢)의 …… 없으니 사마광은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한 헌제(漢獻帝)가 폐위된 건안(建安) 25년부터 위(魏)를 정통으로 삼았는데, 주자는 《자치통감강목》에서 위의 기년(紀年)을 버리고 유비(劉備)가 세운 촉한을 정통으로 삼았다. 동주(東周)의 임금 평왕(平王)이 견융(犬戎)을 피해 동쪽 낙읍(洛邑)으로 수도를 옮겼는데, 이후를 '동주(東周)' 혹은 '성주(成周)'라고 한다. 이때부터 주 왕실의 힘은 약해졌고 정권은 제후에 의해 유지되어 제후들이 서로 패권을 다투는 춘추시대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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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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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재 황공께 두 번째 올리는 제문 再祭小心齋黃公文 유세차 정축년(1937) 봄, 소심재 황공이 돌아가신 지 3년이 지나 영연을 장차 치우려고 합니다. 공은 사문의 큰 시비(是非) 문제에 있어서 이치를 분명하게 보았고 이론을 바르게 세웠으며 의리를 엄격하게 지키셨으니 사실상 모든 문인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분이었습니다. 동문인 저 김택술은 공의 이런 모습에 감복(感服)하는 심정이 다른 사람과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컸습니다. 그러나 가난과 질병으로 인해 뜻대로 할 수가 없고 길마저 막혔으니 직접 공의 영연에 나아가 곡하지 못하여 초심을 저버리게 될까 대단히 두려웠습니다. 이에 마음을 단단히 먹고 길을 나서서 어렵사리 400리 떨어진 곳까지 가서 영전에 애통한 마음을 한 번 고하였습니다.돌아와서 공의 논저를 읽고 여론을 들은 뒤에는 제가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을 더욱 알게 되었고, 조정의 모든 관리들이 볼만한 글이라고 생각하였으니, 앞서 지어 보낸 제문이 대단히 거칠어 부끄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대상(大祥)을 이틀 앞둔 2월 20일 무신날에 삼가 한 편의 글을 지어 다음과 같이 고합니다.아, 공은 타고난 자질이 훌륭하고 재지가 특출하시어 이른 나이에 대현(大賢)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셨습니다. 그때 선생께서는 '소심(小心)'이라는 이름을 집에 붙여주셔서 공의 뛰어난 기질을 절제하게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문로(門路)의 바름과 조행(操行)의 성실함이 여기에서 순수해지게 되었습니다. 성(誠)과 진(眞)을 근본으로 하고 공허한 예와 가식적인 의식에 가치를 두지 않는 것을 학문의 기준으로 삼았고, 지식과 견문을 위주로 할 뿐 높은 문장 실력과 눈에 띄는 행적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을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로 삼았습니다. 전제(田制)와 병술(兵術)에 대해서도 모두 자세히 강구하였으니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하려는 뜻이 간절하셨습니다. 이단의 말과 잘못된 학설을 모두 변별하여 물리쳤으니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의리가 우뚝하셨습니다.대개 공은 지행(志行)이 높고 조예가 깊어 훌륭한 자질을 지니고 있었는데, 거기다가 선생님께 배워 안 것이 또 이와 같았습니다. 따라서 시비(是非)를 가리는 문제 앞에서 이치를 분명하게 알고 의론을 바르게 내세우고 의리가 엄정했던 것은 진실로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러니 어찌 이런 것만을 가지고 공이 훌륭한 인물이라 평가하겠습니까.비록 그렇지만 지금의 공론(公論)은 지극히 공정하게 결정되었습니다. 저들69)은 호남 사람들이 거짓 의리로 한풀이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공은 거처가 그들과 가까워서 친하게 지낸 것입니다. 호남 사람들과는 함께 계획을 세우지도 않았고 일에 관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비방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또 공은 40년의 오랜 세월 동안 선생님의 문하에서 배출된 문도들 가운데 나이와 덕(德)으로 볼 때 1,500명의 문도 중 가장 높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공의 한 마디 말씀은 정려(鼎呂)70)보다도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저들이 죄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과 호남 사람들의 의리가 참인 줄을 압니다. 대개 이 의리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는다면 선사(先師, 돌아가신 스승)는 선사가 될 수 없고 《춘추》의 의리도 어두워지게 됩니다. 그런데 공께서 저들의 무함을 확실히 물리치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공께서 하신 일 가운데 이보다 더 큰 일이 없다고 하는 것이니, 이 말이 어찌 옳지 않겠습니까.아, 저는 공과 살아서는 의리를 함께 하고 죽어서는 같은 전기에 오르자71)는 결의를 맺었습니다. 그러나 현동(玄洞)72)에서 한 번 뵌 뒤로 10여 년이 지나도록 찾아 뵙고 가르침을 받은 적이 전혀 없었는데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권면하고 독려해 주셨습니다. 마음속을 돌이켜 생각해 볼 때 이것이 어찌 인간의 도리를 다한 것이라 하겠습니까.지금 공의 고택에 와 보니 초목은 곱게 자라고 책에는 공의 손때가 남아있습니다. 맑은 운치와 뛰어난 아취(雅趣)가 공을 처음 뵙던 날과 다를 바 없습니다. 슬픔에 젖은 상주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 효성과 우애에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니, 세 아들의 전형(典型)이 공과 매우 닮았습니다. 그들의 뜻과 식견을 살펴보니 집안의 전통을 이어가고자 합니다.73) 이것으로 지난날 공의 집에 한번도 가지 못했던 한이 충분히 위로가 되었습니다. 서로 바로잡아 주고 서로 보살피며 덕(德)을 발전시켜 나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것도 이들에게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영령께서는 가만히 도우셔서 저희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평생에 의로 바로잡으신 가르침과 인을 배양하신 덕을 저버리지 않게 하십시오. 아, 슬픕니다! 維歲丁丑之春, 小心齋黃公沒已三霜, 而靈將撤矣。 同門生金澤述以公於斯文大是非, 見理明、立論正、持義嚴, 實全門一人, 感服之心, 非餘人比也。 而貧病掣之, 道路梗焉, 大懼不克躬哭象生, 有負初心, 乃銳意登程, 間關行四百里, 一慟于靈前。 退而讀夫論著, 聆諸輿論, 益知所未知, 而宗廟百官俱可得見, 則深愧夫前寄緘辭之太涉草草。 復以大祥前二日, 二月二十日戊申, 謹掇一文而告之曰: 嗚呼! 以公魁偉之資質、過人之英邁, 早就正于大賢之門, 被扁齋以小心, 而裁其英偉之氣。 門路之正、操履之實, 於是乎純如矣。 誠眞爲本而虛禮飾儀之視以無物者, 爲學之準的識見爲主而高文卓行之亦不足貴者。 論人之繩尺田制兵謀無不備究, 眷眷乎經邦濟民之志, 異言莠說幷皆辨斥, 堂堂乎衛正闢邪之義。 蓋其志行高、造詣深, 抱負大禀之資, 而得之師者旣如是, 則當是非而理明論正義嚴, 乃固其所也。 豈可專以此大公也哉! 雖然, 今日之公論則至公而定矣。 彼方謂湖爲假義逞憾, 然若公則於彼居近而親也。 於湖則謀不同事不涉也, 而所誅褒者如此。 且於師門爲四十年舊徒, 而巋然齒德居千五百之首, 則一言之重有加於鼎呂者。 以是, 人皆知彼罪之莫逃, 湖義之是眞, 蓋此義不明則先師非先師而春秋晦矣。 而公辭闢彼誣之廓如也, 由此。 而謂公大事無有加焉者, 豈不可乎? 噫! 余於公猥託生同義死同傳之契, 而玄洞一拜歲, 經十餘未一造門, 而穩承提命俾卒累書勉責之惠。 反顧于中, 此何人斯! 今來故宅, 卉木有彩, 緗帙留澤, 淸韻逸趣有如當日。 僉哀欒欒, 孝友可敬, 而三哥之典型酷似乎公。 觀其志識, 箕裘有在, 旣足以慰昔未造門之恨。 互規胥觀, 用資進德之益者, 亦在乎是。 何幸何幸! 伏惟尊靈冥佑陰隲, 使之相長, 有以不負平日義方之敎, 仁輔之德也。 嗚呼哀哉! 저들 오진영(吳震泳)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유림을 가리킨다. 정려(鼎呂) 구정(九鼎: 왕국을 상징하는 아홉 개의 솥)과 대려(大呂: 종묘의 큰 종)를 합쳐 말한 것으로, 국가의 큰 정치 및 이를 담당하는 공경을 말한다. 죽어서는 같은 전기에 오르자 사마광(司馬光)이 범진(范鎭)과 의기투합하여 "나와 너는 살아서는 뜻을 같이하고 죽어서는 전기를 함께할 것이다.[吾與子生同志死當同傳]"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宋名臣言行錄 後集 卷5》 현동(玄洞) 익산시 삼기면 기산리의 마을이다. 집안의……합니다 소심재의 아들들이 학문에 힘써서 가업을 계승하려고 한다는 말이다. 기구(箕裘)는 키와 가죽옷으로, 가업(家業)을 의미한다. 《예기》〈학기(學記)〉에 "좋은 대장장이 아들은 반드시 가죽옷 꿰매는 것을 익히고, 뛰어난 궁사의 아들은 키 만드는 일을 익힌다.[良冶之子, 必學爲裘, 良弓之子, 必學爲箕。]"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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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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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재74) 소공께 올리는 제문 【기축년(1949)】 祭悅齋蘇公文【己丑】 아, 소공의 집안은 嗚呼惟公,대대로 문장이 뛰어났는데 家世文章,400년에 걸쳐서 閱四百年,곤암과 양곡75) 양곡(陽谷)은 소세양(蘇世讓 1486~1562)으로 자는 언겸(彦謙)이며, 중종 때 문과급제 하고 홍문관직제학ㆍ이조판서ㆍ좌찬성 등을 하였다.의 가업을 이어오고 繼述困陽,공의 부자에 이르러 至公父子,옛 가업이 다시 창성하여 舊業再昌,아버지는 갑과에 공은 을과에 올라76) 父甲子乙,전후하여 성균관에 들어가고 後先上庠,명성과 인망이 성대해져서 蔚然聲望,남쪽 지방의 대가(大家)가 되었습니다. 南服大方.문장을 통하여 도에 나아가며 因文入道,저문 빛의 노년에 이르렀는데 公年暮光,누구에게 나아가 질정을 받았는가 于何就正,공은 구산(臼山)의 당에 올라 升臼山堂,성(誠)과 경(敬)을 기틀로 삼고 樞紐誠敬,간략함과 자세함을 겸비하여 輪翼約詳.사림의 빼어난 인재가 되고 翹楚士林,사문의 높은 제자가 되었습니다. 高第門墻,그런데 선생께서 돌아가시자 夫何山頹,밝은 해가 구름에 가려질듯 하였는데 日爲雲障.공께서 한 번 붓을 들자 公擧一筆,사도(師道)가 다시 정상을 회복하였습니다. 師道復常,옛 사람이 순(舜)임금 공자(孔子)님 在昔舜孔이윤(伊尹)과 백리해(白里奚)를 비방하니 伊奚之謗,맹자가 변증하여 가리기를 孟聖有辨,마치 밭에 잡초 뽑듯이 하였습니다. 如苗去稂,하물며 아버지의 일에 대해서 矧父事地,어찌 감히 힘쓰지 않았겠습니까.77) 豈敢不蘉,의리를 이미 다하였고 義旣其盡,공훈 또한 세상에 드러났는데 功亦其彰,사람들은 과연 무슨 마음으로 人獨何心,지나쳤다고 한단 말입니까. 有謂過當?아, 저는 소공을 嗟余于公,높은 산처럼 우러러보았습니다. 高山其望,저의 아버지와 동갑이었고 先君同庚,친척의 정의도 오래되었습니다. 戚誼亦長.갑자 을미에 선생님을 지키다가 甲乙衛師,함께 음해(陰害)를 받았고78) 同受陰戕,생사와 영욕의 즈음에는 死生榮辱,낭패(狼狽)처럼79) 의지하기도 하였습니다. 狽之依狼.공께서 계실 때는 公之在世,동량처럼 믿었는데 恃若棟樑,공께서 떠나 가시고 나니 自公之逝,그 외롭고 쓸쓸함을 어찌한단 말입니까. 柰如踽凉,넋은 녹아 부스러지고 魂爲之銷,눈물은 퍼붓는 비처럼 흐릅니다. 淚爲之滂.그러나 공은 어진 분이라 然公仁者,하늘이 장수와 건강을 주었고, 天錫壽康,순리대로 살다가 편안하게 돌아가셨으니 存順沒寧,서운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만 其誰憾傷,선비들은 사표(師表)를 잃었고 士失師表,나라에는 어진 인재가 없어졌으니 邦無賢良,이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是爲幷世,공의 죽음을 한탄합니다. 同歎云亡.아아, 嗚呼!공께서는 일찍이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公曾謂余,"훗날 내가 죽거든 他日我喪,와서 신주를 써야 할 것이니 而來題主,먼 고을에 산다고 꺼리지 마시고 勿憚遠鄕,묘지의 명문도 함께 銘墓之文,지어 띄워 주시게." 而亦揄揚.제가 비록 적임자는 아닙니다만 顧雖匪人,어찌 감히 그 말씀을 잊었겠습니까. 亦何敢忘?그런데 뜻밖에 그 때 孰謂當日,부고를 제 때에 못 받았고 訃車未遑,몸마저 오랫동안 아파서 身亦久病,이제야 술잔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今始奠觴,사람의 일이 잘 맞기 어려운 것이 人事難協,멀리서 못 만나는 삼성과 상성80) 같으니, 有若參商,저승과 이승 간에 약속 져버린 부끄러움에 愧負幽明,이리저리 머뭇거리며 서성일 뿐입니다. 躑躅彷徨.아아, 嗚呼!글은 여기에서 마치지만 辭止於此,슬픈 마음은 끝이 없습니다. 無窮哀腸.높으신 밝은 혼령께서는 尊靈不昧,굽어 혜량하여 주십시오. 庶垂鑑量애통하고 슬픕니다. 痛哉哀哉흠향하소서! 尙饗! . 嗚呼惟公, 家世文章, 閱四百年, 繼述困陽, 至公父子, 舊業再昌, 父甲子乙, 後先上庠, 蔚然聲望, 南服大方。 因文入道, 公年暮光, 于何就正, 升臼山堂, 樞紐誠敬, 輪翼約詳。 翹楚士林, 高第門墻, 夫何山頹, 日爲雲障。 公擧一筆, 師道復常, 在昔舜孔, 伊奚之謗, 孟聖有辨, 如苗去稂, 矧父事地, 豈敢不蘉, 義旣其盡, 功亦其彰, 人獨何心有謂過當? 嗟余于公, 高山其望, 先君同庚, 戚誼亦長, 甲乙衛師, 同受陰戕, 死生榮辱, 狽之依狼。 公之在世, 恃若棟樑, 自公之逝, 柰如踽凉, 魂爲之銷, 淚爲之滂。 然公仁者, 天錫壽康, 存順沒寧, 其誰憾傷, 士失師表, 邦無賢良, 是爲幷世同歎云亡。 嗚呼! 公曾謂余, 他日我喪, 而來題主, 勿憚遠鄕, 銘墓之文, 而亦揄揚。 顧雖匪人, 亦何敢忘? 孰謂當日, 訃車未遑, 身亦久病, 今始奠觴, 人事難協, 有若參商, 愧負幽明, 躑躅彷徨。 嗚呼! 辭止於此, 無窮哀腸。 尊靈不昧, 庶垂鑑量。 痛哉哀哉! 尙饗! 열재 소학규(蘇學奎 1859~1948)의 호로서, 자는 화지(化知)이다. 만재 소휘식(晩齋蘇輝植 1837~1910)의 아들로서,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면 상운리에서 태어났다. 곤암과 양곡 곤암(困庵)은 소세량(蘇世良 1476~1528)으로 자는 원우(元佑)이며, 중종 때 문과급제 하고 홍문관직제학ㆍ동부승지ㆍ대사간 등을 하였다. 아버지……올라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부친 소휘식(蘇輝植)은 1879년 식년 진사 갑과에, 아들 소학규(蘇學奎)는 1891년 증광시 진사 병과에 합격하여, 김택술의 기록과 약간 다르다. 하물며……않았겠습니까 소학규의 《열재집(悅齋集)》행장을 보면, 공이 부친을 위해 특별히 한 일이라면 별세 후 십여 년간 산소터를 얻고자 지관과 함께 각처를 탐색한 것 뿐이라고 적고 있는데, 이를 두고 한 말인 듯하다. 갑자……받았고 1924~5년간에 간재 문하에서 일어난 분쟁을 말한다. 간재선생이 1922년(임술) 7월에 별세한 후, 선생의 문집을 일제의 허가를 받아서라도 간행하자는 쪽과 반대로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간행하지 말자는 쪽의 주장이 대립하였다, 전자의 오진영(吳震泳, 1868~1944) 등은 진주에서 활자로 문집을 간행하자, 후자의 김택술ㆍ최병심(崔秉心, 1874~1957) 등은 유림에 통문을 돌려 간행의 부당성을 말하며 불매를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오진영 등이 손해를 입었다며 전주 검사국에 고소를 하였다. 낭패(狼狽)처럼 서로 긴밀한 사이를 말한다. 낭과 패는 모두 이리의 일종인데 낭은 앞발이 길고 뒷발이 짧으며, 패는 앞발이 짧고 뒷발이 길다. 이로 인해 낭과 패는 서로 의지하여 함께 다니며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이다. 삼성(參星)과 상성(商星)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음을 말한다. 삼성(參星)은 동쪽 하늘에, 상성(商星)은 서쪽 하늘에 뜨는 이십팔수(二十八宿)의 두 별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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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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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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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족숙 함재 공께 올리는 제문 【을유년(1945)】 祭族叔涵齋公文【乙酉】 옛사람 용감히 옛 관습을 벗어나서 勇脫舊習,단번에 지극한 학문에 이르렀고 一變至學,〈치의(緇衣)〉81)는 현인 좋아하고 緇衣好賢,〈항백(巷伯)〉82)는 악인 미워했는데 巷伯惡惡,지금의 시대에 이르러는 于今之世,공에게서 그것을 보았습니다. 惟於公覿.교활한 저 섬 오랑캐들 猾彼島夷,우리 팔도강산 뒤엎고 覆我八域,세상 사람들 거기 빌붙어서 世方親附,온 나라가 희희낙락 하는데 熙熙樂國,공께서는 홀로 말하셨네 公獨有言,며칠 뒤 저들 망할 거라고. 彼亡不日.그 음성과 안색 준엄하시니 聲色俱厲,곁에서 보는 이 혀 빼 물었네. 傍觀吐舌.다만 영남에 음기가 일어 惟嶺有陰,교활한 섬 오랑캐와 같이 同島夷猾,우리 사문(師門)을 해코지하며 賊我師門,울타리를 부수고 집까지 허물었고83) 撤藩毁室.사람들 마냥 넋을 잃은 듯 衆方褫魄,거꾸로 그것을 잘한다 했는데84) 反謂之得,공은 홀로 의리에 근거하여 버티며 公獨據義,동지를 연합하여 따지며 꾸짖으셨네. 聯衆討斥.오직 이 두 가지 일을 惟此二事,평생의 뜻과 업으로 삼았으니 生平志業,자나깨나 못 잊는 한은 寤寐之恨,그 뿌리를 다 뽑아내지 못함이었지요. 未拔根窟.아, 공께서 떠나가신지 嗟公觀化,오백일이 안 되었는데 日未五百,하늘이 우리 동국 도우시어 天佑大東,지뢰의 복괘85)가 돌아왔습니다. 地雷來復.그늘을 비춰주던 해와 달이 照陰日月,홀연히 그 빛을 잃었고 忽然失色,나라의 천명 새로이 시작되고 邦命維新,스승에 대한 무함도 절로 씻겼으니 師誣自雪,먼저 멀리 떠난다 하지 마시고 莫云先逝,공의 생전 자리 물리지 않았으니 象生不撤,부디 이곳에 내리고 오르며 載陟載降,혼령이여 저희를 기쁘게 해주소서. 靈其慰悅.저 춘추의 의리는 夫春秋義,하늘과 땅의 길이고 법이니 天地經法,선비가 이를 잃으면 士而失此,나머지는 말하기에 부족한데 餘不足說,공께서는 이를 얻으시어 公旣得之,큰 뜻을 바로 세우셨으니 大者斯立,그 모든 미담과 선행이 凡厥美善,다 여기에서 비롯했습니다. 皆從此出.여든살 느른히 쇠약하신 몸 大耋癃衰,어쩌다 몸조섭하는 방도를 놓치니 攝儀或失,어지러이 뒤섞인 집안 일들 家政紛錯,어떻게 능히 두루 살피겠습니까 何能周察,공은 이 때문에 병 앓으시는데 以是病公,저는 하나도 보살펴드리지 못했습니다. 太沒諒悉.아, 이 못난 후생은 嗟余無狀,공의 애틋한 사랑을 입어 荷公愛惜,우러러 숭앙하는 의리가 景仰義氣,생과 사에 다름이 없는데 于存于沒,상제(祥祭) 한 달 전에야 前祥一朔,비로소 술잔 올리오니 始致誄酌,정의에 맞추지 못함 부끄럽고 愧不稱情,제문의 모양 너무 소략합니다. 辭儀太略.밝으신 영령 계시거든 不昧者存,부디 오시어 살펴 주소서. 庶垂鑑格. 勇脫舊習, 一變至學, 緇衣好賢, 巷伯惡惡, 于今之世, 惟於公覿。 猾彼島夷, 覆我八域, 世方親附, 熙熙樂國, 公獨有言, 彼亡不日, 聲色俱厲, 傍觀吐舌, 惟嶺有陰, 同島夷猾, 賊我師門, 撤藩毁室, 衆方褫魄, 反謂之得, 公獨據義, 聯衆討斥, 惟此二事, 生平志業, 寤寐之恨, 未拔根窟, 嗟公觀化, 日未五百, 天佑大東, 地雷來復, 照陰日月, 忽然失色, 邦命維新, 師誣自雪, 莫云先逝, 象生不撤, 載陟載降, 靈其慰悅, 夫春秋義, 天地經法, 士而失此, 餘不足說, 公旣得之, 大者斯立, 凡厥美善, 皆從此出, 大耋癃衰, 攝儀或失, 家政紛錯, 何能周察, 以是病公, 太沒諒悉, 嗟余無狀, 荷公愛惜, 景仰義氣, 于存于沒, 前祥一朔, 始致誄酌, 愧不稱情, 辭儀太略, 不昧者存, 庶垂鑑格。 치의(緇衣) 《시경》의 편명인데, 정(鄭) 나라 무공(武公)의 현인에 대한 애호를 찬미한 시이다. 《예기(禮記)》에는 "현인을 좋아하기를 치의편처럼 하고, 악인을 미워하기를 항백편처럼 하면, 벼슬을 주어 유인하지 않아도 백성들이 스스로 성실해질 것이며, 형벌을 시험하지 않아도 백성들이 모두 복종할 것이다.[好賢如緇衣, 惡惡如巷伯, 則爵不瀆而民作愿, 刑不試而民咸服。]"라는 공자의 말이 있다. 항백(巷伯) 《시경》의 편명인데, 환관이 주(周) 나라 조정의 참소하는 간신들을 미워하며 고발한 시이다. 울타리……허물었고 간재선생의 맡손자인 전일효(田鎰孝 자 田士)을 고소하여 끌고 가 구금한 일을 가리킨다. 거꾸로……했는데 간재선생의 문인 김용승(金容承) 등은 처음에는 후창과 함께 오진영을 성토하였으나 나중에는 돌아서기도 하였다. 지뢰의 복괘[地雷復卦] 《주역》 육십사괘 중 5개의 음표 밑에 하나의 양효가 있는 것으로, 땅 밑에서 우레가 움직이듯이 가득 쌓인 음기 속에서 양기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여기서는 일제가 항복하고 광복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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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형 성암86) 공께 올리는 제문 祭族兄成菴公文 유세차 을사년(1905) 7월 26일 정유날은 성암(成菴) 처사 김공의 장례 날입니다. 그 하루 전에 족제 김택술은 삼가 부족한 제물을 영연에 올려 곡하며 아룁니다.사문(斯文)이 끊기지 않으려면 대덕이 나타나 그 계통을 있고, 조상이 더욱 빛나려면 뛰어난 자손이 나타나 그 명예를 드날립니다. 오호! 공께서 세상에 오신지 46년, 사문에 있어서는 대덕을 기대하고, 조상에게는 뛰어난 자손을 일컬을 만하였습니다. 그런데 누가 알았겠습니까, 풍부한 재질에 수명이 짧아 한 삼태기 흙이 부족하여 공적을 못 완성하고, 갑자기 이렇게 떠나실 줄을! 사람은 멀리 떠나고 가르침은 흐려지어 이단의 의론이 함부로 날뛰는데, 누가 있어 그것을 엄히 방지하며, 누대(累代)의 덕 있는 가법과 빛나는 고관의 이력들은 누가 나타나 아름답게 계승하겠습니까?아아! 공께서는 일찌기 도의를 당부하고 함께 닦기를 약속하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한테 있어서 그대는, 조상이 같은 친족이고, 한 스승을 모신 동문이니, 그 정의가 매우 깊네. 선비가 세상을 살면서 가진 바 뜻이 없다면 그만이려니와, 만약 뜻을 품었다면 그것이 덕이면 반드시 높기를 바라고 사업이면 반드시 크기를 바라네. 우리 두 사람은 기왕에 이 학문에 종사하는 이상, 어찌 감히 종신토록 권면하며 높고 큰 데 목표를 두어, 가까이는 조상의 덕을 계승하고 멀리는 사문의 계통을 잇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힘껏 노력하지 않겠는가?" 저의 미천한 자질이 하류를 벗어나지 못 함을 생각하고 함께 상품에 이르도록 이끌어 주려 하신 그 마음은 바로 인(仁)이었습니다. 어찌하여 앞서는 인심(仁心)으로 저더러 나아가 크고 높은 뜻을 시작하게 하더니, 뒤에는 인심(忍心)으로 저를 차마 버리시어 도모한 뜻을 끝마치게 하지 않으십니까?오호! 지난 봄에 공의 병환 소식을 듣고 화전(花田)87)의 서실에 가 뵈었습니다. 공께서는 애써 일어나 제 손을 잡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병세가 조금 헐거워져서 위태로운 지경은 면할 것 같네." 그리고는 이어 의리(義理)를 담론하는데 저는 말씀을 듣고 놀라면서, 하늘은 선한 이에게 복을 주니 이제 곧 회복하시겠구나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서하(西河)의 애통한 소식88)에다 공의 환후가 더 중하심을 들었고, 크게 놀라 서둘러 나아가 위문드리려 하였으나 공께서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불민한 저는 이처럼 정의와 예절 모두 못 갖추었으니 참으로 유명으로 갈린 마음에 한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불어 생각건대, 제가 처음 간재 선생님을 금화(金華)89)에서 뵙고 돌아올 때 선생께서 남쪽의 교유할 만한 학자로 거명하신 이가 바로 공이었습니다. 그래서 공께서 어떤 분인가는 알고 있었으나 형세가 여의치 못해 공의 문하에 나아가 한 달이나 한 해의 가르침을 받을 틈을 내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제 마음에 맺힌 풀길 없는 한입니다.오호! 맑고 밝은 용모와 위엄있는 거동에다, 말씀은 조심스럽고 진실하였으며 의리를 지킴은 굳고 확실하셨습니다. 가정 다스림은 은애와 예절로 하여 안팎 모두가 화합하였고, 사람을 성신(誠信)으로 대하니 고집스럽고 험한 사람도 복종하였습니다. 궁리(窮理)와 격물(格物)의 공부는 천지와 인간 모두 남김없이 통달하기를 구하였고, 종합고찰하는 계산은 제반의 사업에 착오 없이 시행하셨습니다. 하늘이 만약 공께 장수를 허락하여 그 덕업을 크게 이루도록 하였더라면, 공은 우리 사림의 큰 장인이 되고 세상의 교화에 보탬이 되었을 것이며 조상의 큰 덕 역시 뒷날에 더욱 빛을 발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운수가 어긋난 것은 사람 힘으로 어쩔 수 없는 바라서, 마침내 이러한 공의 이러한 덕이 다시는 이 세상에서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어찌 깊이 아쉬워하고 길게 탄식하지 않겠습니까? 바라옵건대 높으신 혼령께서는 제 간절한 마음을 굽어 살펴주소서. 흠향하소서! 維歲次乙巳七月二十六日丁酉, 成菴處士金公襄奉之期也。 前一日, 族弟澤述謹具薄奠, 哭告于靈筵, 曰: 斯文不喪, 大德出而接夫統, 祖先益顯, 賢孫生而揚其名。 嗚呼! 公之生於世, 四十有六年。 於斯文而可期大德, 於祖先而可謂賢孫, 孰知材豊命嗇, 仞積簣虧, 而遽至於此。 人遠敎泯, 異議橫奔, 孰俟而嚴其防? 世德家法, 有斐顯秩, 孰作而趾其美? 噫! 公嘗責余以道義, 約余以共修, 其言若曰: 吾於君, 以親則同祖, 以誼則同師, 其情深矣。 士生于世, 無志則已, 如有志則德必欲其高, 業必欲其大。 吾二人旣從事此學, 曷敢不終身交勖準的乎高大, 其於近而繼祖先之德, 遠而承斯文之緖, 視以爲己任而勉力乎? 顧念卑瑣之質不離下流, 乃欲引而同歸於上品爲心, 其亦仁矣。 何前仁於我而進之, 使經其始, 後忍於我而棄之, 不使圖其終乎? 嗚呼! 公之病報始得於春間, 來謁于花田書室。 公强起握手而言曰: 今則勢稍輕歇, 庶免阽危。 因談義理, 令人竦聽, 意謂天道福善, 應臻遄復。 俄聞慟遭西河, 患添冉牖, 不勝驚愕, 亟圖進慰, 而公已不起矣。 嗟余不敏, 情禮幷虧, 誠不能無憾於幽明之間也。 仍念余初拜田先生于金華而歸, 先生擧南中可從問學之人而告之者, 乃公也。 則公之爲公可知, 而形勢爲障, 未暇穩就門屛, 以受歲月之敎, 是爲恨結於不可解者。 嗚呼! 有睟其容, 有儼其儀, 恂如其發言之謹, 確乎其守義之固。 御家以恩禮, 內外旣翕, 待人以誠信, 頑險亦服。 窮格之工, 求達乎天人而無遺, 綜覈之算, 要施諸事爲而不錯。 天若假之以永年, 俾得大就其德業, 則爲吾林之碩匠, 而世敎以之有補, 先德亦得以益顯於來許也。 無柰氣數之舛差, 非人力之致, 竟使此公此德不得復見於此世之上, 其何以不深嗟而永歎也? 伏惟尊靈, 鑑玆衷曲, 尙饗! 성암 김연술(金淵述, 1860~1905)의 호이다. 간재선생의 문인으로, 저서《성암유고(成菴遺稿)》가 있다. 화전(花田) 전북 전주시 조촌동 만경강변의 마을 이름이다. 서하(西河)……소식 자식을 잃은 비통함을 말한다.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가 서하(西河)에 살았는데, 아들을 잃게 되자 눈이 멀도록 울었다 한다. 《禮記 檀弓上》 금화(金華) 김택술은 1900년 여름에 천안의 금화산(金華山)에서 간재 전우(艮齋田愚)를 뵙고 집지(執贄)의 예를 올렸다. 〈금화집지록(金華執贄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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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당90) 박공께 올리는 제문 【기미년(1919)】 祭中堂朴公文【己未】 아아, 우리 박공은 嗚呼惟公,유림들 가운데 빼어난 분이셨습니다. 吾林翹特,악은 병처럼 미워하고 疾惡如厲,선은 마치 자신이 한 듯 좋아했으며91) 善若己出,학문이 깊고 문사에도 통달하여 學邃辭達,사문(斯文)의 우익이 되셨고 斯文羽翼,일의 실정을 잘 파악하여 綜覈事情,정술(政術)에도 뛰어나셨습니다. 可達政術,공의 덕을 살펴보고 이치를 헤아려 보면 諒德揆理.진실로 그에 합당한 복을 받아야 하는데 允膺厥福,어찌하여 한평생 云胡生平,온갖 고난을 겪으셨단 말입니까. 備經艱厄,원안(袁安)처럼 눈 속의 추위를 맛보며92) 酷寒袁雪,범중엄(范仲淹)처럼 죽 한 그릇으로 하루를 견디고93) 永日范粥,봉산(蓬山)의 바람과 영주(瀛州)의 물을 건너며 蓬風瀛水,구름과 부평초처럼 떠돌며 사셨습니다. 雲蹤萍跡.하늘의 복록이 이처럼 얇았으면 旣薄其祿,수명은 마땅히 두터웠어야 하건만 壽宜不嗇,이제 중년인 55세94)에 中身有五,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遽見折輻.푸르고 푸른 저 하늘이여 蒼蒼者天,누가 일을 주관하는 것입니까. 孰秉其軸,복록과 재앙을 잘못 내린 것이 祥殃錯降,어제 오늘이 아니었으니 匪今伊昔,원헌(原憲)은 굶주리고 양호(陽虎)는 배불렀으며, 餒憲飽虎,안연(顏淵)은 단명하고 도척(盜跖)은 장수하였습니다. 短淵修蹠.기나긴 천고의 세월 동안 悠悠千古,지사(志士)들이 눈물을 흘렸으니 志士涕落,어찌 유독 공에게만 胡獨於公,애석하다 탄식하겠습니까. 咄咄嗟惜.도리어 한 마디 말로 抑有一言,명부의 공을 위로하고자 합니다. 慰公冥漠,살진 고기 먹고 두꺼운 가죽옷 입으며, 肥豢厚貉,붉은 인끈 차고 흰머리로 장수 누린 사람은 紫綬黃髮,무성한 풀처럼 많고 많아서 職職芸芸,그 수를 셀 수도 없는데 厥麗不億,황천에 묻힌 뼈가 다 썩어 가도록 骨朽黃壤,이름도 없이 긴 밤처럼 적막합니다. 長夜寂寞.그런데 우리 박공께서는 豈若吾公,돌아가신 뒤에 명성이 혁혁하니 身後名赫,하늘이 정해준 뜻을 여기서 압니다 天定乃諶,누가 성공했고 누가 실패했는지. 孰得孰失,아, 못난 저를 嗚呼無狀,다행히 공께서는 알아봐 주시어 幸爲公識,대단히 많은 은덕을 내리셨고 蒙賜孔厚,분에 넘치게 인정해주셨습니다. 許己亦切,사람들은 공께서 거칠다 의심했지만 人疑公麤,저는 희고 곧은 분임을 믿었으며 我信白直,사람들은 공의 문식(文飾)을 좋아했지만 人悅公文,저는 공께서 꾸미지 않음을 좋아했습니다. 我喜不飾.제가 집안일에 얽매였을 때 我縶家務,공께서 자식의 직분이라 말씀해 주었고, 公曰子職,저의 주장을 사람들이 그르다고 할 때 我論人否,공께서는 때때로 수긍하고 허락해 주셨습니다. 公或肯諾,공께서 낭주(浪州, 전북 부안)에 계실 때 公在浪州,제가 서쪽의 공을 뵙고자 갈망하는 참이면 我想西渴,공께서는 이미 동쪽으로 건너와서 公旣于東,저에게 귀한 백붕(百朋)을 주셨습니다.95) 百朋我錫.공께서 서쪽으로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며 見公還西,제 마음 아쉽고 서글펐는데, 我心戚戚,제가 이제 공의 마을에 찾아오니 我來公鄕,공께서는 이미 운명하셨습니다. 公入眞宅,사람의 일은 이처럼 어긋나기 십상이니 人事參差,그것을 누가 헤아려 알겠습니까. 疇能測度.지난 해 제 아들 관례 날은 客歲兒冠,공께서 길일을 점찍어 주셨습니다. 筮公維吉,그 때 날씨가 차갑고 于時天沍,비와 눈이 오락가락하였는데, 載雨載雪,공께서는 당신 말을 믿으라며 公謂不信그냥 가자 하셨습니다.96) 若車無軏,진창길을 출발하여 泥濘戒行,칠흑 같은 밤에 고생하며 왔는데 顚倒夜黑,다음날은 날씨가 맑아지고 翌朝淸佳,술과 안주가 맛있고 깔끔하였습니다. 酒旨薦潔.관례를 마치고 돌아가실 때 禮成告歸,다시 만날 날을 손꼽았는데, 後會指日,어찌 알았겠습니까, 그때의 작별이 孰謂此別,저승과 이승으로 영원히 갈라질 줄을. 幽明永隔.이산(梨山)97)의 가을 밤에 梨山秋夜,촛불 아래 정담 나누었고, 話心剪燭,두승산(斗升山)98)에 맑은 바람 불 때 斗嶽淸風,주고받은 시가 편지에 넘쳐났습니다. 唱和溢牘.이번 생에 이러한 즐거움 此生此樂,다시 이을 날 없으니 無日再續,예와 지금을 생각하면 俯仰今昔,어찌 서글프지 않겠습니까. 寧不忉怛.뛰어난 기상은 傑然之氣,세속을 훌쩍 뛰어넘었고 邁越流俗,대범하고 씩씩한 논변은 雄辯偉論,황하를 매달고 장강을 터놓은 듯하였고 河懸江決.문장은 북두성과 같이 星斗之文,그 빛이 찬란하였으니 爛然厥色,이 세상을 다 둘러보아도 環顧斯世,어디에서 다시 만나겠습니까. 於何復覿.저는 세도(世道)를 위해서 我爲世道,슬픔이 너무나도 간절한데, 尤切傷盡,글은 말을 다 못 담아내고 文不盡辭,말은 생각을 다 못 나타냅니다. 辭不盡臆.공의 밝은 혼령이시여 公靈於昭,저의 붉은 마음 살펴주소서! 鑑我衷赤. 嗚呼惟公, 吾林翹特, 疾惡如閭5), 善若己出, 學邃辭達, 斯文羽翼, 綜覈事情, 可達政術, 諒德揆理, 允膺厥福, 云胡生平, 備經艱厄, 酷寒袁雪, 永日范粥, 蓬風瀛水, 雲蹤萍跡, 旣薄其祿, 壽宜不嗇, 中身有五, 遽見折輻, 蒼蒼者天, 孰秉其軸, 祥殃錯降, 匪今伊昔, 餒憲飽虎, 短淵修蹠, 悠悠千古, 志士涕落, 胡獨於公, 咄咄嗟惜, 抑有一言, 慰公冥漠, 肥豢厚貉, 紫綬黃髮, 職職芸芸, 厥麗不億, 骨朽黃壤, 長夜寂寞, 豈若吾公, 身後名赫, 天定乃諶, 孰得孰失, 嗚呼無狀, 幸爲公識, 蒙賜孔厚, 許己亦切, 人疑公麤, 我信白直, 人悅公文, 我喜不飾, 我縶家務, 公曰子職, 我論人否, 公或肯諾, 公在浪州, 我想西渴, 公旣于東, 百朋我錫, 見公還西, 我心戚戚, 我來公鄕, 公入眞宅, 人事參差, 疇能測度, 客歲兒冠, 筮公維吉, 于時天沍, 載雨載雪, 公謂不信, 若車無軏, 泥濘戒行, 顚倒夜黑, 翌朝淸佳, 酒旨薦潔, 禮成告歸, 後會指日, 孰謂此別, 幽明永隔, 梨山秋夜, 話心剪燭, 斗嶽淸風, 唱和溢牘, 此生此樂,無日再續, 俯仰今昔, 寧不忉怛, 傑然之氣, 邁越流俗, 雄辯偉論, 河懸江決, 星斗之文, 爛然厥色, 環顧斯世, 於何復覿, 我爲世道, 尤切傷盡, 文不盡辭, 辭不盡臆, 公靈於昭, 鑑我衷赤。 중당 박수(朴銖 1864~1918)를 말하는데,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형부(衡夫), 호는 중당(中堂)이다. 전우(田愚)의 문인으로, 문집 《중당유고(中堂遺稿)》가 있다. 악은……좋아했으며 《명심보감(明心寶鑑)》〈입교(立敎)〉에 "선을 보거든 내게서 나간 것같이 하며, 악을 보거든 내가 병든 것같이 하라.[見善如己出, 見惡如己病。]"라는 말이 있다. 이렇게 보면 '려(閭')는 '려(厲), 려(癘)'의 오사(誤寫) 가차자로 볼 수 있다. 원안(袁安)처럼……맛보며 원안은 후한(後漢)의 유명한 재상이다. 원안이 미천했을 때, 한번은 낙양(洛陽)에 큰 눈이 와서 낙양 영(洛陽令)이 민가를 순행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가서 눈을 치우고 걸식(乞食)하는데, 원안의 집만 유독 눈도 치우지 않은 채 방 안에 드러누워 있으므로, 사람을 시켜 왜 나오지 않느냐고 물었다. 원안이 말하기를 "큰 눈이 와서 사람들이 모두 굶주리는 때에 남에게 요구를 해서는 안 된다.[大雪人皆餓, 不宜干人。]"라고 하므로, 낙양 영이 그를 어질게 여겨 효렴(孝廉)으로 천거하였다. 《後漢書 卷45 袁安列傳》 범중엄(范仲淹)처럼……견디고 범중엄이 죽그릇을 만들어 가운데를 나눈 다음 죽 한 그릇을 가지고 반은 아침에 나머지 반은 저녁에 먹었다. 55세 《서경》〈무일(無逸)〉에 "문왕이 천명을 받은 것이 중년이었는데, 나라를 향유한 것이 50년이었다.[文王受命, 惟中身, 厥享國, 五十年。]" 하였다. 여기서 중신은 중년과 같은 말로 50세를 말한다. 원문에 '유오(有五)'를 55세로 풀이하였다. 백붕을……주셨습니다 《시경》〈청청자아(菁菁者莪)〉에 "무성하고 무성한 새발쑥이여, 저 언덕 가운데 있도다. 이미 군자를 만나 보니 나에게 백붕을 준 듯하여라.[菁菁者莪, 在彼中陵, 旣見君子, 錫我百朋。]"라고 하였다. 백붕(百朋)은 많은 재화를 의미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좋은 시를 지어주었다는 뜻으로 사용한 듯하다. 공께서……하셔서 원문의 '不信若車無軏'는 '믿음이 없으면 수레에 멍에막이[軏]가 없는 것과 같다(아무 일도 할 수 없다)'로 즉, '내 말을 믿으라' 한 것으로 해석된다. 《논어ㆍ위정(爲政)》에 "사람이 믿음이 없으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알 수 없다. 큰 수레에 수레채마구리가 없고 작은 수레에 멍에막이가 없으면, 어떻게 길을 갈 수 있겠는가.[人而無信, 不知其可也。 大車無輗, 小車無軏 其何以行之哉。]" 하였다. 이산(梨山) 전라북도 부안에 있는 산 이름이다. 두승산(斗升山) 전라북도 정주시 고부의 진산이다. 閭 불분명한 저본의 자형이 '려(閭)'와 유사한데, 의미관계상 질병을 뜻하는 '려(癘), 려(厲)'의 오사(誤寫) 가차자인 듯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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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은99) 조공께 올리는 제문 1 祭湖隱趙公文 유세차 신유년(1921) 5월 경자삭(庚子朔) 2일 신축날에 처조카 김택술(金澤述)은 삼가 소박한 제수를 갖추어 호은 조공의 영연에 곡하며 고합니다.아아, 우리 조공께서 嗚呼我公,어찌 이렇게 되셨단 말입니까. 胡至斯極.훤칠하고 단단했으며 碩健充完,의젓하고 말 수가 적었고, 端重淵默,관대하고 어진 자세로 세상일에 임하였고 及物寬仁,신실하고 정직하게 사람들을 대하였습니다. 與人信直,공의 덕(德)으로 볼 때나 관상으로 볼 때나 以德以相,마땅히 백세까지 장수하여야 하는데 宜享百曆,어찌 갑자기 이렇게 되어서 胡遽至斯,저를 이토록 통곡하게 하신단 말입니까. 俾我痛盡,예전에 저의 선친께서는 昔我先君,공과 매우 친밀하시어 曁公膠漆,의리로는 사돈관계이지만 誼雖姻親,마음은 형제와 같았습니다. 情均骨肉,두 분은 덕을 서로 믿어서 惟德相孚,평생을 하루처럼 변함없었습니다. 生平一日.지난 갑오년100)에는 維歲靑馬,동학의 무리가 창궐하여 東徒猖獗,삼호(三湖)로 집을 옮기며 胥宅三湖,떨어지지 말자고 약속하였는데, 誓不相失,집을 다 짓기 전에 屋完未就,동학란은 끝났지만 東亂告息,무신년(1908)에 소란이 일자101) 黃猿擾攘,공께서는 선친과 상의하여 公謀先君,잠시 호남의 집에 옮겨 지내다가 暫僑湖屋,바로 되돌아와 이웃에 살기로 하셨습니다. 遄歸接隣.그런데 제가 복이 없어서 小子福薄,갑자기 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風樹遽至,공께서 달려와 통곡하였는데 公奔痛哭,마치 동기(同氣)를 잃으신 듯하셨습니다. 若喪同氣.제가 집안일 처리에 어두워 昧我理家,선대의 가업이 무너지고 靑氈荒墜,수레바퀴 자국 속의 다급한 물고기가 되었는데 轍魚之急,공께서 물을 부어주듯 때때로 도와주셨습니다. 或捐斗水,봉산(蓬山)의 북쪽 維蓬之北,월호(月湖)의 물가에 月湖之涘,제가 옮겨와 살게 된 것은 余來棲息,공께서 인도해 준 것으로 寔公攸指,당시 공께서 직접 와서 公親命駕,집과 논밭을 구하셨습니다. 謀厥田里.강상(綱常)이 무너지고 풍속이 고약하여 綱絶俗惡,대란(大亂)이 가까워지고 있는데 大亂近止,공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와 너는 曰吾與爾,여기에서 살기로 길이 맹세하자 하더니 託玆永矢,어찌 차마 저를 버리고 떠나가며 胡忍棄余,조금도 기다려주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曾不少俟.아아, 嗚呼!세상의 모든 일은 世間萬事,하늘의 뜬 구름과 같다 太空浮雲,공께서 하신 임종의 이 말씀 臨終公言,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豈不信然.학궁(學宮) 남촌에서 은름(恩廩)을 받으며102) 南泮恩廩,얼마나 열심히 공부하셨습니까. 講誦何勤,급제하여 벼슬하기를 金紫銀靑,마치 티끌 줍는 것처럼 여기셨다니 擬拾芥塵,젊었을 때 이러했던 공의 일에 대해 少日公業,저는 충분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亦足聽聞.어머니 돌아가셔서 북당이 비게 되었으니 北堂旣虛,관직에 오른들 어찌 즐거울 수 있으셨겠습니까?103) 毛檄奚欣.고향으로 돌아오시니 歸來鄕里,집도 있고 전답도 있었고, 有廬有田,전답을 직접 가꾸시니 我田我服,수확한 곡식이 천 상자나 되었습니다.104) 我箱維千.재물이 있으면 기뻐할 수 있다고 有財爲悅,맹자께서 말씀하셨는데105) 鄒聖有言,선인의 일을 잘 마무리 못 했는데 先事未恔,세월이 기다려주지 않으니, 歲莫我延,가슴 아픈 인생사에 傷哉人事,눈물만 주룩주룩 흐른다고 하셨습니다. 有淚漣漣.아, 큰 현인을 닮으셨으니 於碩賢似,진실로 선인(善人)이십니다. 允矣善人,선대의 사업을 잘 계승하여 克繼克述,집안의 전통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舊家命新,제가 그 원인을 찾아보니 我溯其自,시례(詩禮)의 공부가 돈독한 데 있습니다. 詩禮之敦.저 어둡고 사나운 사람들은 彼昏且狂,부귀와 영화를 서로 전하려고 富榮相傳,떳떳한 윤리를 원수로 여기고 仇賊彛倫,집안에 피비린내를 내기도 하는데, 戈戟墻垣.반대로 공께서는 豈若吾公,바른길을 소중히 여기고 義方是珍,덕을 기르고 인을 쌓으며 種德累仁,집안을 번창시켜서 用昌厥門,공은 큰 성과를 이루셨으니 公得其大,영원히 기리는 말이 있을 것입니다. 有辭永年.아, 제가 은혜를 갚을 곳은 嗟余酬恩,공의 후손들에게 있습니다. 在公後承,크게는 덕업에서 鉅而德業,작게는 생계 꾸리는 데까지 細逮營生,저의 지혜가 닿는 모두에 智慮攸及,감히 정성을 다하겠사오니 敢不責誠,저 밝은 해를 우러러보며 聸彼皦日,그 밝음에 맹세합니다. 有如其明.하늘에 계신 공의 혼령 公靈在天,저의 충정을 굽어 살피소서. 俯鑑衷情.아, 애통합니다. 嗚呼哀哉!흠향하소서! 尙饗! 維歲次辛酉五月庚子朔二日辛丑, 婦姪金澤述謹供菲需, 哭奠于湖隱趙公之靈筵, 曰: 嗚呼我公, 胡至斯極, 碩健充完, 端重淵默, 及物寬仁, 與人信直, 以德以相, 宜享百曆, 胡遽至斯, 俾我痛盡, 昔我先君, 曁公膠漆, 誼雖姻親, 情均骨肉, 惟德相孚, 生平一日, 維歲靑馬, 東徒猖獗, 胥宅三湖, 誓不相失, 屋完未就, 東亂告息, 黃猿擾攘, 公謀先君, 暫僑湖屋, 遄歸接隣, 小子福薄, 風樹遽至, 公奔痛哭, 若喪同氣, 昧我理家, 靑氈荒墜, 轍魚之急, 或捐斗水, 維蓬之北, 月湖之涘, 余來棲息, 寔公攸指, 公親命駕, 謀厥田里, 綱絶俗惡, 大亂近止, 曰吾與爾, 託玆永矢, 胡忍棄余, 曾不少俟, 嗚呼! 世間萬事, 太空浮雲, 臨終公言, 豈不信然, 南泮恩廩, 講誦何勤, 金紫銀靑, 擬拾芥塵, 少日公業, 亦足聽聞, 北堂旣虛, 毛檄奚欣, 歸來鄕里, 有廬有田, 我田我服, 我箱維千, 有財爲悅, 鄒聖有言, 先事未恔, 歲莫我延, 傷哉人事, 有淚漣漣, 於碩賢似, 允矣善人, 克繼克述, 舊家命新, 我溯其自, 詩禮之敦, 彼昏且狂, 富榮相傳, 仇賊彛倫, 戈戟墻垣, 豈若吾公, 義方是珍, 種德累仁, 用昌厥門, 公得其大, 有辭永年, 嗟余酬恩, 在公後承, 鉅而德業, 細逮營生, 智慮攸及, 敢不責誠, 聸彼皦日, 有如其明, 公靈在天, 俯鑑衷情。 嗚呼哀哉! 尙饗! 호은 조기용(趙琪鏞)의 호인데, 자는 주백(周伯)이다. 전우의 제자이며, 김낙진(金洛進, 김택술의 부친)의 인척이자 벗이었다. 갑오년 원문은 '청마(靑馬)'인데 갑오년(甲午年)을 뜻한다. 갑(甲)이 오행(五行)에서 목(木)에 해당하고 목은 청색을 상징하며, 오(午)는 말을 상징한다. 무신년……일자 정미년(1907) 일제에 의한 고종의 퇴위와 군대해산 등을 계기로 무신년에 전국적 의병활동이 일어났다. 학궁(學宮)……받으며 원문 '남반은름(南泮恩廩)'에서 남반(南泮)은 성균관 남쪽의 반촌(泮村)을 말하며, 은름(恩廩)은 성균관의 재실이 부족하면 학사들이 반촌에 묵기도 하였고 그 비용을 양현고(養賢庫)에서 지급하였던 것을 말하는 듯하다. 그런데 조기용(趙琪鏞)이 성균관에 입학하였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관직에……있으셨겠습니까 부모님이 돌아가셨으므로 과거에 급제해 관직에 진출할 뜻이 없었다는 말이다. '모격(毛檄)'은 '모의(毛義)를 벼슬에 임명하는 격문'이라는 뜻이다. 모의는 후한(後漢)의 가난한 효자로 유명한데, 작은 현령 벼슬의 임명통지를 받고 매우 기뻐하더니 노친이 별세하자 곧 사직하였다 한다.《後漢書 卷39 劉平列傳》 수확한……되었습니다 소출이 많았다는 말이다. 《시경》〈보전(甫田)〉에 "천 개의 창고를 구하고 만 개의 상자를 구하노니, 기장과 피와 벼와 조가 농부의 복이라.[乃求千斯倉, 乃求萬斯箱, 黍稷稻粱, 農夫之慶。]"라고 하였다. 재물이……말씀하셨는데 《맹자》〈공손추(公孫丑)〉에 "법 제도상 할 수 없으면 마음이 기뻐할 수 없고, 재력이 없으면 마음이 기뻐할 수 없다. 할 수 있고 재력이 있으면 옛사람들이 모두 사용했으니, 내 어찌 홀로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不得, 不可以爲悅, 無財, 不可以爲悅. 得之爲有財, 古之人皆用之, 吾何爲獨不然。]"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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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은 조(趙)공께 올리는 제문 2 【간재 선생님을 대신하여 지음. 기미년(1919)】 又 【代艮齋先生作 己未】 아아, 우리 주백이여 嗚呼! 周伯,몸가짐이 단정하고 침착하였으며 持身端默,마음을 씀에는 간절하고 수수하였네. 用心謹拙,의를 중시하고 재물을 경시했으며 重義輕財,어진 이를 가까이 하고 여색을 멀리하였네. 親賢遠色,이처럼 어질고 선했으니 以若仁善,백세의 장수 누려야 하는데 百曆是獲,어찌하여 하루아침에 云胡一曙,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奄至此極?지난날 그대는 나를 좋아하였으니 昔君好我,그 세월이 얼마였던가. 幾何日月,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를 흠모하였으니 一意慕向,거짓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이었지. 匪浮伊實,바다 가운데 섬으로 그대를 보내어 送子入海,나의 집을 짓고 나니 于我樹屋,그대는 장차 가족을 데리고 와 謂將撤家,조석을 함께 하리라 하였는데106) 同我朝夕,끝내 운명에 내몰려 大化之驅,그 일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구나. 事歸冥漠.그대는 진정 한스러워 할 터인데 君固可恨,이는 실로 내가 인연이 박해서라네. 余實緣薄.옛일을 슬퍼하고 지금을 서운해하며 悼舊悵今,이 늙은이는 눈물만 주먹으로 훔치네. 老淚盈掬.하나 있는 그대 아들 학문을 익혀 一哥有學,그 독실하고 순박한 자질 가상하니, 嘉厥敦樸,그의 장래를 헤아려 보면 儀圖其來,시례(詩禮)의 학문을 부지런히 익혀서, 詩禮之勖.북풍은 매우 차고 北風其凉,눈은 펄펄 내리는데 雱雱雨雪,함께 힘써 격려하며 庶共勉勵,만절(晩節)을 지키게 할 것이네.107) 俾葆晩節,이것으로 보답하여 用此爲報,부탁한 일을 저버리지 않으려니 不負相託,그대 밝으신 영령은 靈其有赫,나의 이 마음을 살펴주오. 鑑此衷曲! 嗚呼周伯, 持身端默, 用心謹拙, 重義輕財, 親賢遠色, 以若仁善, 百曆是獲, 云胡一曙, 奄至此極? 昔君好我, 幾何日月, 一意慕向, 匪浮伊實, 送子入海, 于我樹屋, 謂將撤家, 同我朝夕, 大化之驅, 事歸冥漠, 君固可恨, 余實緣薄, 悼舊悵今, 老淚盈掬, 一哥有學, 嘉厥敦樸, 儀圖其來, 詩禮之勖, 北風其凉, 雱雱雨雪, 庶共勉勵, 俾葆晩節, 用此爲報, 不負相託, 靈其有赫, 鑑此衷曲! 바다 가운데……하였는데 전우가 섬으로 들어가 산 시기는 1908~1922년 사이로, 군산 신시도와 부안 상왕등도ㆍ계화도 등지에서 완고당(頑蠱堂)ㆍ양서실(陽書室)ㆍ계화재(繼華齋) 등을 세워 거주하며 강학하였다. 북풍은……할 것이네 나라가 망한 혼란 속에 격려하며 동행할 것임을 말한다. 《시경》〈북풍(北風)〉은 나라가 망하는 혼란 속의 정경을 읊은 시인데, "북풍은 매우 차고, 눈은 펄펄 내리는데, 내 아끼는 좋은 이와 손잡고 함께 가리라.[北風其涼, 雨雪其雱, 惠而好我, 攜手同行。]"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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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숙 정재108) 공께 올리는 제문 祭族叔精齋公文 유세차 정묘년(1927, 대한민국9) 8월 계사삭(癸巳朔) 20일 임자날에, 족질 김택술은 정재(精齋) 김공의 영전에 삼가 곡하며 아룁니다.자애와 양찰(諒察)의 자질 타고나서 慈諒稟質,언행이 성실하고 신중했으며 謹愼云爲,효성과 우애로 정법을 삼고 孝友是政,근로와 검소를 기틀로 삼으셨네 勤儉作基.누대의 가업을 다시에 일으키어 中創世業,종친의 규범을 완비하여 세우고 完立宗規,의로운 길을 가르쳐 인도하며 義方有敎,높은 스승께 귀의하게 하셨네. 俾歸宗師.온 가문이 우러러 의지하고 門有依仰,향리 사람들 모범이라 칭송하는데 鄕誦模楷,아아 우리 족숙님 嗚呼吾公,어찌 이리 급하게 가십니까? 胡遽至此?저는 가문 안의 어린이로 余在門少,여러 해 사랑을 입었으니 見愛多年.공의 아들과 조카들이 公子若姪,정의가 마치 친 형제 같아 情同親昆,때때로 한 책상 아래 절하고 時一拜床,덕음에 취하고 의론에 배불렀습니다. 醉德飽論,백년토록 장수하심을 기대하고 期公百曆,꽃나무의 긴 봄을 바랬는데 花樹長春,어찌 이리고 급히 가십니까 胡遽止斯,이제 예순하고 셋이신데. 六旬有三.제가 공께 병 문안 드린 것은 余候公疾,석류 익는 지난 6월이었는데 曩在榴炎,돌아가려는 저를 붙잡고 謂余勿歸,다시 보기는 어렵겠다 하면서 後會難諶,복과 선에는 이치가 있으니 福善有理,제가 공의 마음에 위로가 된다 하셨는데, 我慰公心.이제 이 말씀을 끝으로 已矣此言,영원히 고금으로 갈리었습니다. 永隔古今.우뚝우뚝 솟은 봉래산 蓬山嵂嵂,그리는 마음 답답하고 有懷其鬱,봉래 곁의 양양한 바다 蓬海洋洋,바라며 눈물 그치지 못하며 有淚其汪,한 잔의 술 올리고 一酌之奠,열 줄의 슬픈 말들로 十行之辭,제 속의 정 풀어 놓사오니 洩我衷情,존엄하신 혼령 강림하여 살피소서. 尊靈鑑玆.흠향하소서! 尙饗! 維歲次丁卯八月癸巳朔二十日壬子, 族姪澤述謹哭告于精齋金公之靈, 曰: 慈諒稟質, 謹愼云爲, 孝友是政, 勤儉作基, 中創世業, 完立宗規, 義方有敎, 俾歸宗師, 門有依仰, 鄕誦模楷。 嗚呼吾公胡遽至此? 余在門少, 見愛多年。 公子若姪, 情同親昆, 時一拜床, 醉德飽論, 期公百曆, 花樹長春, 胡遽止斯? 六旬有三, 余候公疾, 曩在榴炎, 謂余勿歸, 後會難諶, 福善有理, 我慰公心, 已矣此言, 永隔古今。 蓬山嵂嵂, 有懷其鬱, 蓬海洋洋, 有淚其汪, 一酌之奠, 十行之辭, 洩我衷情。 尊靈鑑玆, 尙饗! 정재 김낙영(金洛榮 1865.3.27.~1926.6.26.)의 호이며, 자는 경우(敬禹)이며 김택술의 족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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