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중에 통고하는 글 【1937년】 通告宗中文 【丁丑】 삼가 생각건대 사람의 태어남은 반드시 조상에 근본하니, 근본이 있는 곳을 어찌 감히 오래되고 멀다고 하여 혹 이를 잊고 보답하지 않겠습니까. 이 때문에 삼려(三閭)는 고양(高陽)의 후손임을 서술하였고313), 주(周)나라 사람들은 제곡(帝嚳)의 체(禘) 제사의 일을 거행하였으니314), 후대 사람들이 이러한 것에 대해서 어찌 본받을 것을 생각하지 않겠습니까.옛날 신라 말에 경순왕(敬順王)315)이 나라를 고려에 넘기려 하자 태자(太子)316)가 간하여 말하기를 "마땅히 충신, 의사와 함께 죽음으로써 스스로 지키다가 힘이 다한 뒤에야 그만두어야 하는데, 어찌하여 천년의 종묘사직과 수천 리 강토를 하루아침에 남에게 주려고 하십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왕이 들어주지 않자, 통곡하고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 베옷과 초식(草食)으로 여생을 마쳤다는 것이 신라 역사에 실려 있으니317), 개골산은 바로 지금의 금강산(金剛山)입니다.그의 빛나는 충정과 늠름한 기상은 일월과 빛을 다투고 천지에 걸쳐있어 천고가 지나도록 짝이 없고, 오직 후한(後漢)의 북지왕(北地王)318)과 나란히 견줄만합니다. 이 때문에 '동경의 의열[東京義烈]이요 북지의 영풍319)[北地英風]'이라는 말이 매월당(梅月堂) 김공(金公)320)이 손으로 새긴 데서 나왔고, '늠름한 한 왕자여[凜凜一王子], 아름다운 이름이 천추에 홀로 남았네.[令名獨千春]'라는 말이 사가(四佳) 서공(徐公)321)의 시구(詩句)에서 나와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모든 사람의 공론이 되었습니다.우리 부령(扶寧 부안) 김씨는 그의 후손으로, 가첩(家牒)에 실려 있는 것은 이미 세상에 전해졌고, 게다가 나라 안의 많은 문헌에 명백한 증거가 있으니, 오래되고 멀어 자세히 알기 어렵다고 여겨서 이를 근본하지 않으면 안 됨이 분명합니다. 무릇 가르치고 기름에 전수 받을 바가 있기 때문에 맹자는 '사람들은 어진 부형이 있는 것을 즐거워한다.322)'라고 하였으니, 의열이 매우 뛰어난 조상이 위에 있고 자손의 본보기가 유래한 바가 있다면 또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삼가 생각건대 우리 김씨의 정학(正學), 직도(直道), 순충(純忠), 탁절(卓節)에 훌륭한 사람이 대를 이어 끊어지지 않은 것은 본래 이 조상에서부터 왔음을 또한 속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난으로 망한 때에 일이 대부분 겨를이 없고, 도망하여 피한 뒤에 사손(嗣孫)이 멀리 살게 되었는데, 개골산은 천하의 궁벽한 곳입니다. 비로봉(毘盧峯)의 북쪽323)과 관음봉(觀音峯)의 서쪽은 개골산의 궁벽한 곳으로 능묘가 있는 곳인데, 의물(儀物)이 갖춰지지 않고 오랫동안 제사를 지내지 못한 것이 거의 숙량흘(叔梁紇)의 장지(葬地)를 알기 어렵고324), 신릉군(信陵君)의 무덤이 사라지기 쉬운 것 같이325) 된 것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그러나 충의(忠義)를 사모하고 영이(靈異 혼령)에 감응하여 사찰의 승려와 산골의 백성이 앞다투어 풀을 베고 청소하여 공경하고 보호하기를 〈소남(召南)〉의 당(棠)326)과 현산(峴山)의 비(碑)327)처럼 할 뿐만 아닌 지가 천여 년이 되었습니다. 근래에 와서 금강산의 명승(名勝)이 더욱 만국(萬國)에 알려져 기차와 전차가 다니므로 즐기고 구경하는 사람들이 폭주하자, 산수(山水)의 기이한 절경 이외에 옛 명인(名人)의 유적을 더욱 앞다퉈 보는 것을 유쾌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명산(名山)에 있어서는 금강산을 보고, 명인에 있어서는 태자의 유적을 보아야 한다.'라고 말하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이에 한 언덕의 깊숙한 곳과 만년토록 숨겨져 온 무덤이 세상에 알려지고 사람들의 이목에 가득 차 넘쳤으니, 공자의 집 벽에서 나온 서적328)과 주나라 임금이 동쪽으로 왔다는 것 같은 것은 모두 듣는 사람을 놀라게 하여 보고 싶게 만드는데, 하물며 후손인 우리 김씨에게 있어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번갈아 달려가 앞다투어 성묘하니 무덤에 탈이 없고 정백(精魄 넋)이 영원히 편안하여, 마치 당일의 충간(忠諫)과 통곡하는 소리를 듣는 것 같고, 천 리나 떨어져 있는 계림(鷄林)의 월성(月城)이 이곳에 있는 듯합니다. 무릇 대량(大梁)을 지나는 자가 혹 이문(夷門)에 멈춰 서서 생각하고329), 구원(九原)에서 노는 자도 진회(隨會)와 배회합니다.330) 저 현자들은 아주 특별히 가깝지 않고 족류(族類)도 아닌데 오히려 그 지역을 인하여 느끼고 생각하거늘, 하물며 일기(一氣)가 서로 전해지고 고풍(高風)331)이 세상에 가득한 현조(顯祖)332)에 대해 그 산소를 찾아가 돌보는 우리들이 어찌 슬퍼하고 추모하면서 공경히 받들 것을 도모하지 않겠습니까.이보다 십수 년 전에 근처에 사는 경주 후손 김영필(金永弼)과 김영일(金永日)이 각각 돈을 내어 간략히 제사 지내는 것을 해마다 상례로 삼고 말하기를 "이분은 조상이니, 차마 직계(直系)와 방계(傍系)로써 달리 보지 못하겠다."라고 하였고, 또 고성 현감(高城縣監)이 도와준 것을 을 인하여 계를 만들고 이자를 받아 표석(表石)을 세웠으니, 그 마음이 매우 어짊니다. 또 근래에 양호(兩湖)의 인사(人士)가 장차 큰 비석을 세우려는 것을 의논하고 말하기를 "이 산에 들어와서 이러한 일을 기념하지 않으면 이는 공연히 온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뜻이 또한 높습니다. 무릇 덕을 좋아하는 마음은 사람들이 똑같아 친소(親疏)에 차이가 없으니, 저 어질고 의로운 자들의 이러한 거동은 본래 아름다운 일입니다.그러나 본손(本孫)의 경우 조상을 받들고 효를 생각하는 도리에 있어 똑같이 덕을 좋아할 뿐만이 아닌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의물(儀物)을 갖추어 제사를 지내는 일에 정성을 다하지 않아 방손(傍孫)과 타성(他姓)보다 못하면 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해서는 안 되는 일로서 또한 장차 부끄러워하면서 스스로 죽고 싶어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회암(晦菴) 주 선생(朱先生 주자)은 제치 부군(制置府君)의 무덤을 잘 지키지 못한 것을 괴로워했는데, 이를 관리에게 하소연하여 흙을 쌓아 봉분을 높였고333), 우재(尤齋) 송 선생(宋先生 송시열)은 진사(進士)의 무덤이 실전(失傳)된 것을 한스럽게 여겨 단을 쌓아 제사를 지냈으니334), 옛 철인들이 조상의 일에 대해서 마음과 힘을 다하지 않음이 없음이 대개 이와 같습니다.지금 우리의 경우에는 원래 묘가 있고 또 송사할만한 것이 없으니 주자와 우재의 때와 비교하면 일의 완급과 형세의 난이에 있어 일은 적게 해도 공은 배가 될 것을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에 저희들이 사정을 살피고 예를 헤아리며 널리 묻고 충분히 의견을 나누어, 전답을 두고 비석 세우는 것을 세사(歲事)의 원계(遠計)로 삼을 뜻을 종친들에게 공경히 고합니다. 오직 바란건대 여러분들께서 먼 조상을 추모하여 근본에 보답하는[追遠報本] 도를 중시하고, 충열을 사모하고 덕을 생각하는 의를 떨쳐, 기꺼이 성금을 내어 큰일을 잘 마칠 수 있게 해주신다면 더없이 다행이겠습니다. 竊以夫人之生, 必本於祖, 本之所在, 豈敢以久遠而或忘之而不報之也? 是故三閭敍高陽之苗裔, 周人擧帝嚳之禘事, 後人於此, 寧不思所以法之乎? 昔夫新羅之末, 敬順王以國讓麗, 太子諫曰: "當與忠臣義士, 以死自守, 力盡而後已. 柰何以一千年宗祊, 數千里疆土, 一朝與人乎?". 及其不聽也, 則痛哭入皆骨山, 麻衣草食, 以終餘年者, 載在羅史, 皆骨卽今之金剛山也. 其炳然之忠, 凜然之氣, 光日月, 亘天地, 曠千古而無儔, 惟後漢之北地王, 可比幷焉. 所以東京義烈, 北地英風, 出於梅月堂金公之手刻, 凜凜一王子, 令名獨千春, 出於四佳徐公之詩句, 而爲百世之不刊, 萬口之公論也. 我扶寧之金, 爲其裔孫, 家牒所載, 旣是世傳, 加以國中文獻之多有明徵, 其不可以爲久遠難詳而不本之也審矣. 夫以敎養之有所受, 孟子謂人樂有賢父兄, 則義烈特絶之祖在上, 而子孫儀刑之有所自, 則又當如何? 竊意吾金正學直道純忠卓節之賢, 連世不絶者, 本自是祖而來, 亦不可誣矣. 惟是亂亡之際, 事多未遑, 逃竄之餘, 嗣承遠居, 而皆骨之山, 天下之僻處, 毗盧之北, 觀音之西, 皆骨之僻處, 陵墓所在, 儀物不備, 苾芬久闕, 幾乎叔梁之葬難知, 信陵之墟易泯, 無足怪者. 然忠義所慕, 靈異所感, 寺僧峽氓爭先芟掃, 以敬以護, 不啻若〈召南〉之棠, 峴山之碑者, 爲千餘年矣. 至于近日, 金剛名勝益聞萬國, 汽電通車, 探賞輻湊, 流峙奇絶之外, 古名人遺跡, 尤競先覩之爲快, 則莫不曰於名山見金剛, 於名人見太子遺跡. 於是一邱之閟, 萬年之藏, 聲聞于世, 盈人之耳目, 若孔書之出壁, 周袞之來東, 皆驚聽而願見, 矧在吾金之爲裔孫者乎? 迭相駿奔, 後先展省, 則斧堂無恙, 精魄永安, 當日之忠諫痛哭, 如聞其聲, 千里之鷄林月城, 若在此地. 夫過大梁者或佇想於夷門, 遊九原者亦徊徨於隨會, 彼賢非絶特親, 非族類, 尙因其地而起感想, 矧在吾一氣相傳, 高風滿世之顯祖, 而省其墓者, 豈不惻怛追慕, 謀所以虔奉哉? 前此十數年, 近居慶州後人金永弼金永日, 醵金略祀, 歲以爲常曰: "是祖也, 不忍以直傍而異視.", 又因高城倅寄助, 而立契取息以立表石, 其心孔仁矣. 近又有兩湖人士, 將議豊碑之樹曰: "入此山而不記念此事, 是不免虛到.", 其義亦高矣. 夫好德之心, 人之同然, 而無間於親疏, 彼仁義者之爲此擧, 自是美事. 然在本孫奉先思孝之道, 非但有好德之同然而已者如何? 不盡誠於儀物苾芬之方, 而讓於傍孫與他姓, 則是不可使聞於人, 亦將羞愧而自死也. 昔者晦菴朱先生痛制置塋之失守, 訟之於官而崇土, 尤齋宋先生恨進士墳之無傳, 築之以壇而行祀, 曩哲之於先事, 靡不用極蓋如是. 今此元自有墓, 而又無可訟者, 視朱宋之日, 事之緩急, 勢之難易, 有相倍半而不待言矣. 迺者鄙等諒情度禮, 博詢爛議, 以置田立碣爲歲事遠計之意, 敬告于僉宗. 惟願諸位, 重追遠報本之道, 奮慕烈念德之義, 樂出誠金, 克竣大事之地, 千萬幸甚. 삼려(三閭)는 …… 서술하였고 삼려는 초(楚)나라의 삼려대부(三閭大夫)를 지낸 굴원(屈原)을, 고양은 전욱(顓頊)을 일컫는 말이다. 굴원은 《이소경(離騷經)》에서 "(굴원은) 고양제의 후예이며, 내 아버지는 백용이라 한다."라고 하여 고양의 후예임을 서술하고 있다. 주(周)나라 …… 거행하였으니 《예기》 〈제법(祭法)〉에 "주(周)나라 사람은 제곡에게 체제사를 지내고 후직에게 교제사를 지내며, 문왕을 조로 삼고 무왕을 종으로 삼았다."라고 하였고, 《예기》 〈대전(大傳)〉에 "왕이 아니면 체제사를 지내지 못하니, 왕자는 그 시조를 출생시킨 제왕에게 체제사를 지내고 그 시조로서 배향한다."라고 하였다. 경순왕(敬順王) ?~979 :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서 나라를 고려 태조에게 바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태자(太子)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첫째 아들 마의태자(麻衣太子) 김일(金鎰, ?~?)이다. 옛날 …… 있으니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기이 제이(紀異第二) 김부대왕(金傅大王)〉에 나온다. 후한(後漢)의 북지왕(北地王) 후한은 촉한(蜀漢)이고 북지왕은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후주(後主) 유선(劉禪)의 아들 유심(劉諶)이다. 촉이 위(魏)나라의 침공을 받고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유선은 항복할 것을 결심했으나 유심은 항복하지 말고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했다. 유심은 자신의 말이 수용되지 않자 나라가 망한 것을 슬퍼하고 먼저 처자를 죽인 다음 스스로 자살했다. 《삼국지(三國志)》 권33 〈촉서 삼(蜀書三) 후주전(後主傳)〉 동경의 …… 영풍 동경은 신라의 수도 경주를 뜻하고, 북지의 영풍은 마의태자의 꿋꿋하고 의연한 태도를 칭송한 표현이다. 매월당(梅月堂) 김공(金公)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다. 사가(四佳) 서공(徐公)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다. 사람들은 …… 즐거워한다 《맹자》 〈이루 하〉에서 맹자가 "도에 맞게 행하는 자가 도에 맞게 행하지 못하는 자를 길러 주고, 재주 있는 자가 재주 없는 자를 길러 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어진 부형이 있는 것을 즐거워한다.[中也養不中, 才也養不才. 故人樂有賢父兄也.]"라고 한 말에서 나왔다. 비로봉(毘盧峯)의 북쪽 비로봉에서 북쪽 능선을 따라 1.4km 정도 내려가면 길 서남쪽 비탈진 언덕에 마의태자릉(麻衣太子陵)이 있다. 숙량흘(叔梁紇)의 …… 어렵고 《예기》 〈단궁 상(檀弓上)〉에, "공자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기에 아버지의 묘를 알지 못했다.[孔子少孤, 不知其墓.]"라고 하였다. 신릉군(信陵君)의 …… 같이 이백(李白)의 〈양원음(梁園吟)〉이란 시에 "옛날 신릉군은 호걸이요 귀인이었지만 지금 신릉군의 무덤엔 사람들이 농사짓고 있네.[昔人豪貴信陵君, 今人耕種信陵墳.]"라고 하였다. 〈소남(召南)〉의 당(棠) 《시경집전(詩經集傳)》 〈소남 감당(甘棠)〉에 "소백(召伯)이 문왕의 정사를 펼 때 혹 감당나무 아래서 머물렀는데, 뒤에 백성들이 그의 덕을 그리워하였다. 그래서 그 나무를 아껴 차마 손상하지 못한 것이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현산(峴山)의 비(碑) 진(晉)나라의 양호(羊祜)가 양양(襄陽) 태수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그가 떠난 뒤에 그 지방 백성들이 그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현산에 양호가 평소 노닐며 쉬었던 곳에 비석을 세우고 사당을 세워 세시마다 제를 올렸다. 그 비석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기에 두예(杜預)가 이를 타루비(墮淚碑)라 이름하였다. 《진서(晉書)》 권34 〈양호전(羊祜傳)〉 공자의 …… 서적 한(漢)나라 무제(武帝) 말에 노 공왕(魯恭王)이 공자의 구택(舊宅)을 헐어서 궁(宮)을 넓히려고 하다가 그 벽(壁) 속에서 얻은 《고문상서(古文尙書)》, 《예기》, 《논어》, 《효경(孝經)》 등을 가리킨다. 《한서(漢書)》 권30 〈예문지 권십(藝文志第十)〉 대량(大梁)을 …… 생각하고 《육신주문선(六臣註文選)》 권36에 "《사기(史記)》에 위(魏)나라에 후영(侯嬴)이라는 은사(隱士)가 있는데, 나이 70세에 집이 가난하여 대량의 이문 문지기가 되었다고 하였다.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이 지나다가 대량의 옛터를 보고 이른바 이문이란 것을 찾아 물어보니, 이문은 성의 동쪽 문이었다"라고 하였다. 후영은 위나라 신릉군(信陵君)의 빈객이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사기(史記)》 권77 〈위공자열전(魏公子列傳)〉에 보인다. 구원(九原)에서 …… 배회합니다 《예기》 〈단궁 하(檀弓下)〉에 "조문자(趙文子)가 숙예(叔譽)와 함께 구원의 무덤을 바라보며 말하기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면 나는 누구를 따를까? 나는 수무자를 따를 것이다. 그는 임금을 이롭게 하면서도 자기 몸을 잊지 않고, 자기 몸을 생각하면서도 그 벗을 저버리지 않았다.'라고 하였다."라고 한 말이 나온다. 수회는 춘추 시대 진(晉)나라의 대부(大夫)로 이름은 사회(士會)이며, 수무자(隨武子), 범무자(范武子)라고도 부른다. 고풍(高風) 고상한 풍채(風采)나 품격(品格)을 말한다. 현조(顯祖) 이름이 세상에 높이 드러난 조상을 말한다. 회암(晦菴) …… 높였고 주자가 원조(逺祖) 21공(公) 및 제치 부군과 조비(祖妣) 두씨 부인(杜氏夫人)의 묘에 고하는 글에 '선조 무덤을 공경히 잘 지키지 못해 일찍이 타인의 소유가 되어 떨리고 두려웠는데, 유사에게 하소연하여 옛 모습을 회복하여 흙을 쌓아 봉분을 높이고 석물을 세웠다.'라고 한 말이 《회암집(晦庵集)》 권86 〈축문(祝文) 제고원조묘문(祭告逺祖墓文)〉에 나온다. 우재(尤齋) …… 지냈으니 진사는 우암의 9대조 송극기(宋克己)인데, 우암이 묘의 소재를 알지 못하여 신단을 설치해서 나란히 제향하는 장소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송자대전(宋子大全)》 권145 〈구대조진사부군신단비기(九代祖進士府君神壇碑記)〉에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