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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남 김형관265) 혼서 【신미년(1931)】 三子炯觀昏書 【辛未】 같은 기운은 서로 찾고, 같은 소리는 서로 응하는데, 혼탁한 말세에는 한 마음의 짝 찾기 어렵습니다. 남자가 아내를 얻고, 여자가 집을 가짐은 부모의 소원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전해온 옛 전례에 따른 폐백 올리며, 감히 품었던 생각 곧게 말씀드립니다.생각건대 귀 댁 네째 따님은 유덕한 가문에 태어나 자라서, 타고난 용모와 자질이 본래 단아하고 화순(和順)한데다 의례의 가르침을 받아 규범을 따름이 조신하고 엄정합니다. 저의 삼남 김형관(金炯觀)은 부질없이 헛되이 이름만 날렸을 뿐 백규(白圭)의 노래 반복하는 군자266)로는 실로 부끄럽습니다. 품격이 고상하지 못하여 범상한 새[鳳]267)에 그칠 뿐입니다.그런데 뜻밖에도 선비들이 도끼 이야기268)를 하여 주었고, 넓으신 아량으로 천금 같은 허락을 하여 주시었습니다. 이제 이지러지고 버려진 육례(六禮)를 모두 갖추어 중인의 눈길을 놀래켜 깨우고, 집안 경제의 형편은 묻지 말아서 관습을 넘어서고자 합니다. 용을 타는 기쁨을 갑자기 존하께 드릴 수는 없겠사오나, 빈한한 가문에 기린 같은 자손을 깊이 경축하는 노래를 기대합니다. 지극히 감사하고 기쁜 마음 이루 다 적지 못 합니다. 氣相求, 聲相應, 難得叔季之同心, 男有室, 女有家, 豈非父母之所願? 玆因皮幣之遺典, 敢告肺肝之直辭。 伏惟令季女生長德門, 旣賦容質之端順, 承受義敎, 亦循規範之謹嚴。 澤述第三子炯觀聲聞虛馳, 實有慙乎圭復, 品格凡下, 奈不免於鳳題。 何圖多士之發斧言, 乃蒙雅量之賜金諾。 悉擧廢缺之六禮, 聳動衆瞻, 不問豊約於兩家, 超出本俗。 豈乘龍之遽擬於尊座, 庶咏麟之深祝於寒門。 其爲感欣, 罔極輸罄。 김형관 1915년 출생, 자는 극부(克孚), 호는 건암(健菴)ㆍ기산(麒山)이며, 기린정사(麒麟精舍)를 세우고 남고(南皐)서원ㆍ동죽(東竹)서원ㆍ고부문묘(古阜文廟)의 장의(掌議)를 하였다. 부인 전주최씨의 생몰년은 1917~1968년이고, 그 부친은 경재 최병찬(敬齋崔秉瓚), 조부는 성암 최익홍(誠菴崔益洪)이다. 백규……군자 공자의 조카사위가 된 신실한 남궁괄의 이야기를 인용하였다. 앞 〈장남 김형복 혼서〉의 주석 참조. 범상한 새 봉(鳳)자를 범(凡)과 조(鳥)로 파자하여 해석한 것이다. 위진(魏晉)시대의 여안(呂安)이 마음의 벗 혜강(嵇康)을 찾아왔다가 출타하여 못 보고 돌아가면서 문에 봉(鳳)자를 써 문자의 유희를 하였다한다. 《世說新語.簡傲》 도끼 이야기 혼담을 말한다. 앞 〈장남 김형복 혼서〉의 주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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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자설 【1940년】 辨字說 【庚辰】 〈열명(說命)〉에서 처음으로 지(知)와 행(行)을 상대하여 거론하자119), 사람들은 모두 "성인의 학문은 지와 행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대성인(大聖人)이니,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辨), 독행(篤行)120)은 학문의 큰 조목이다. 대성(大聖 공자)이 학문의 큰 조목을 세우는데 지와 행 두 글자를 상대시키지 않고, 바로 학문사변(學問思辨)121) 네 글자를 행(行 독행) 한 글자에 상대시켰지만, 학문사(學問思)122) 세 글자는 또한 모두 명변을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변(辨)'자는 바로 '지(知)'자를 대신하는 말로, '행(行)'자의 적확한 상대가 되니, 변이 바로 지이고 지가 바로 변이기에 또한 성문의 학문은 변과 행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중용》의 명변(明辨)이 바로 《대학》의 치지(致知)이다."라고 말하겠다. 행은 한 조목일 뿐인데 변이 네 조목을 합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행은 오직 일심(一心)의 추기(樞機)123)와 관계되지만, 변은 대부분 온갖 이치의 두서(頭緖)를 일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치지의 방법을 논하면 천하의 물리를 궁구하지 않음이 없고, 성의(誠意)의 요점을 말하면 '스스로 속이지 마라[毋自欺]'는 세 글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배우는 자들이 평생 하는 독서(讀書), 강의(講義), 잠심(潛心), 연기(硏幾 기미를 궁구함), 종사(從師), 문학(問學), 자우(資友 벗에 의지함), 광문(廣聞), 입론(立論), 진견(陳見 견해를 말함), 기의(記疑)124), 대오(待悟) 등 허다한 일들이 '변'자 공부가 아님이 없다. 행에 이르러서는 이것을 들어 조처하는 것으로, 다만 심력(心力)을 전일하게 하면 가능할 뿐이다. 그러므로 성덕(成德)에 대해서 언급할 때에 '행도(行道)'라고 하지 않고 '지도(知道)'라고 하니, 《주역》의 〈문언(文言)〉에서 말한 군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知)' 한 글자로 덮었다. 무릇 세상에서 성인에 대해 말하는 자들은 반드시 '무슨 일이든지 두루 통하여 모르는 것이 없다.'라고 말하고, 《중용》에서는 순임금을 '대지(大知)'라고 일컬었으니125), 그 의사의 귀추를 알 수 있다.예로부터 성현이 스스로 행했던 사업에 이르러서는, 공자는 《춘추(春秋)》를 지어 향원(鄕原)126)을 미워했고, 맹자는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물리치고127) 제동(齊東)128)을 배척하였으며, 주자는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편찬하여 육구연(陸九淵)129)과 진량(陳亮)130)을 논하였으며, 우리 선사 간옹이 심종(心宗)을 논박하고131) 김평묵(金平默)132)의 뇌문(誄文 제문(祭文))을 물리치는데 이르러서는133), 한 번도 '변'자로 뜻을 주로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대개 이러한 분들은 평소 마음속으로 생각할 때에 성위(誠僞)의 기미와 사정(邪正)의 구분을 자세히 헤아려서 조금의 사특함이 혹시라도 잠복해 있지 않게 하였고, 목전에서 응접할 때에 득실(得失)과 당부(當否)의 관계를 정밀히 살펴서 혹시라도 과실이 남아 있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또한 사람의 선악, 덕의 진가(眞假), 학문의 정이(正異), 말의 허실(虛實)에 스스로 지나쳐 버려 자기 시비의 본심을 어둡게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으니, 이를 두고 내외가 서로 합하고 심사(心事)가 일치한다고 이르는 것이다. 군부(君父)와 성현과 사우(師友)와 관계된 것과 같은 것은 일이 또 특별하여 더욱 그만둘 수 없다. 괴이하다! 지금의 학자들은 옛날 현성(賢聖)이 행한 것을 스스로 힘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사람들이 부사(父師)의 무고(誣告)를 분변하는 것에 대해서 다투는 마음과 이기려는 기개로 돌려서 이를 경시하니, 어쩌면 이러한 사람들은 평소에 마음의 숙특(淑慝 선악)과 일의 가부(可否)를 분변한 적이 없기에 또한 이러한 것에 대해서 스스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맹자가 말하기를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마음은 지의 단서이다.134)"라고 하고, 또 "시비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135)"라고 하였으니, 사람으로서 시비를 가리는 마음이 없으면 어찌 그 지를 다할 수 있겠으며, 또한 어찌 알지 못하고서 행할 수 있는 자가 있겠는가. 이러한 사람에게는 오히려 평상시에 말하는 지와 행에 대해서도 말하기 어렵거늘, 하물며 성문(聖門)의 학문은 변과 행일 뿐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듣는 사람과 이를 함께 말할 수 있겠는가. 슬프구나! 自〈說命〉始以知行對擧, 人皆曰: "聖門之學, 知與行而已.". 然而孔子大聖人也, 博學, 審問, 愼思, 明辨, 篤行, 學之大目也. 以大聖立學之大目, 不以知與行二字相對, 乃以學問思辨四字對一行字, 而學問思三字, 又皆所以爲明辨地也. 然則辨字卽知字之代辭, 乃行字之的對, 辨卽知, 知卽辨, 而亦可曰聖門之學辨與行而已. 吾故曰: "《中庸》之明辨卽《大學》之致知也.". 行只一目, 辨合四目者, 何也? 行單係於一心之樞機, 辨多事於萬理之頭緖. 故論致知之方, 則天下物理無不窮之, 語誠意之要, 則不過毋自欺三字. 是故學者一生, 讀書, 講義, 潛心, 硏幾, 從師, 問學, 資友, 廣聞, 立論, 陳見, 記疑, 待悟許多事, 無非辨字工夫. 至於行則擧此而措之, 只得心力專一則斯可已. 故及其成德也, 不曰行道者, 而曰知道, 《易》之〈文言〉語君子, 則以知之一字冒始終. 凡世之語聖人者, 必曰無不通知, 《中庸》稱舜爲大知, 其意思歸趣可知矣. 至於從古以來聖賢所自爲之事業, 則孔子之修《春秋》, 惡鄕原, 孟子之闢楊墨, 斥齊東, 朱子之編《綱目》, 論陸陳, 以至我先師艮翁之駁心宗, 逐金誄, 無一非辨字主義. 蓋其平日心上意念, 誠僞之幾, 邪正之分, 細勘之, 不使纖慝之或藏, 目前應接, 得失之係, 當否之關, 精察之, 不欲過錯之或留. 故亦於人之善惡, 德之眞假, 學之正異, 言之虛實, 自不容放過以昧我是非之本心, 此之謂內外相合, 心事一致也. 若其關於君父聖賢師友者, 則事又自別而尤不容己也. 異哉! 今之學者, 非惟不以古昔賢聖所爲自勉, 更於人之辨父師誣也, 歸之爭心勝氣而鄙夷之, 豈此輩人不曾辨心之淑慝, 事之可否於平日, 故亦於此, 自不能不爾歟. 孟子曰: "是非之心, 智之端.", 又曰: "無是非之心, 非人.", 人而無是非, 安能以致其知? 亦安有不知而能行者乎? 於此人乎, 尙難以語恒言之知與行, 況可與言聖門之學辨與行而已之創聞者乎? 噫! 〈열명(說命)〉에서 …… 거론하자 《서경》 〈열명〉에서 부열(傅說)이 말하기를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 어렵다.[非知之艱, 行之惟艱.]"라고 하였다. 박학(博學) …… 독행(篤行) 《중용장구(中庸章句)》 20장에 "이를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물으며, 신중히 생각하고, 밝게 분변하며, 독실히 행해야 한다.[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라고 하였다. 학문사변(學問思辨) 박학, 심문, 신사, 명변이다. 학문사(學問思) 박학, 심문, 신사이다. 추기(樞機) 사물의 관건이나 핵심, 근본을 뜻하는 말로,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언행은 군자의 추기이다.[言行君子之樞機.]"라고 하였다. 기의(記疑) 의심나는 곳을 기록하는 것이다. 《중용》에서는 …… 일컬으니 《중용장구(中庸章句)》 제6장에서 공자가 말하기를 "순임금은 매우 지혜로운 분이시다.[舜其大知也與!]"라고 하였다. 향원(鄕原) 《논어》 〈양화(陽貨)〉에서 공자가 "향원은 덕의 적이다.[鄕原德之賊也.]"라고 하였다. 양주(楊朱)와 …… 물리치고 《맹자》 〈등문공 하(滕文公下)〉에서 맹자가 말하기를 "내가 이 때문에 두려워하여 선성의 도를 보호하여 양주와 묵적을 물리치고, 부정한 말을 추방하여 삿된 학설이 나오지 못하게 한다.[吾爲此懼, 閑先聖之道, 距楊墨, 放淫辭, 邪說者不得作.]"라고 하였다. 제동(齊東) 《맹자》 〈만장 상(萬章上)〉에서 맹자가 "이것은 군자의 말이 아니고, 제나라 동쪽 야인들의 말이다.[此非君子之言, 齊東野人之語也.]"라고 말한 데서 나온 말로, 이는 제나라 동쪽에 사는 야인들이 길에서 퍼뜨리는 근거 없는 말을 뜻한다. 육구연(陸九淵) 1139~1193. 자는 자정(子靜)이고, 호는 상산(象山) 또는 존재(存齋)이다. '마음이 곧 이(理)이다.[心卽理]'라는 설을 주장하였다. 유교의 고전인 육경(六經)도 '내 마음의 주각(註脚)'이라 하여 주자와 대립하였다. 진량(陳亮) 1143~1194. 송대(宋代)의 사상가이다. 원래 이름은 여능(汝能)인데 뒤에 량(亮)으로 개명하였다. 자(字)는 동보(同甫)이고 학자들이 용천 선생(龍川先生)이라고 불렀다. 주희(朱熹)가 진량에게 편지를 보내서 '의리쌍행(義利䨇行), 왕패병용(王霸並用)' 8글자에 대해 경계했다는 내용이 《회암집(晦庵集)》 권36 〈여진동보(與陳同甫)〉에 나온다. 심종(心宗)을 논박하고 간재는 성사심제(性師心弟)를 기본 강령으로 하여, 심을 이(理)와 스승로 보는 심종을 자신의 저서 여러 곳에서 반박하고 있다. 김평묵(金平默) 1819~1891. 호는 중암(重菴)이고, 자는 치장(穉章)이다.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이다. 김평묵(金平默)의 …… 이르러서는 김평묵이 임헌회(任憲晦)의 제문을 지었는데, 여기에 기롱하는 뜻이 있었다. 이에 간재와 임헌회의 아들 임진재(任震宰)가 편지를 보내 절교를 선언하고 제문을 돌려보낸 일을 말한다. 《간재집 전편(艮齋集前篇)》 권2 〈답유치정(答柳穉程)〉. 시비지심은 …… 단서이다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서 맹자가 말하기를 "측은지심은 인의 단서요, 수오지심은 의의 단서요, 사양지심은 예의 단서요, 시비지심은 지의 단서이다.[惻隱之心, 仁之端也, 羞惡之心, 義之端也, 辭讓之心, 禮之端也, 是非之心, 智之端也.]"라고 하였다. 시비지심이 …… 아니다 《맹자》 〈공손추 상〉에서 맹자가 말하기를 "측은한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부끄럽거나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無惻隱之心, 非人也, 無羞惡之心, 非人也, 無辭讓之心, 非人也, 無是非之心, 非人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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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에 대한 설 【1939년】 蝙蝠說 【己卯】 나의 새로 지은 초가집이 소나무 숲속에 있는데, 학동(學童)이 담벼락 사이에서 동물 한 마리를 잡았다. 이를 우족(羽族)144)이라고 이르자니 깃이 없으나 능히 날 수 있고, 모족(毛族)145)이라고 이르자니 발이 없으나 능히 달릴 수 있었다. 몸 양쪽 곁에 손바닥 만한 크기의 얇은 살이 있는데 그 사이가 단단한 근육으로 되어 있어, 펼치면 두 날개가 되어 날 수 있고 거두어들이면 네 발이 되어 달릴 수 있으니, 기이하고 이상하다. 그러니 우족인지 모족인지, 난다고 해야 할지 달린다고 해야 할지 결정할 수 없다.내가 일찍이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옛날에 곤륜산(崑崙山)에서 우족과 모족 사이에 큰 전쟁을 일어나 서로 살상을 하였고, 이 때문에 원수 사이가 되어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에 어떤 한 곤충이 있었으니 달릴 수도, 날 수도 있지만, 우족과 모족에게 한 번도 싸움에 도와준 적 없이 오직 자신만의 보존을 도모하였다.어느 날 모충(毛蟲)이 그 곤충이 잘 날아다닌다는 말을 듣고 가서 따져 묻기를 "너는 나의 원수가 아니냐."라고 하니, 그 곤충은 두 날개를 접고 네 발을 나누어 만들고는 날쌔게 달리면서 말하기를 "내가 어찌 우족이겠는가. 나는 너희들과 똑같다."라고 하였다. 또 어느 날 우충(羽蟲)이 그 곤충이 잘 달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가서 따져 물으니, 그 곤충은 곧 두 날개를 펼쳐 훨훨 날면서 말하기를 "누가 나더러 모족이라 하느냐. 너희들과 무슨 원수이겠는냐."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우족과 모족에게 모두 싫어하는 틈이 없었으니, 그 이름을 '박쥐[蝙蝠]'라 한다. 네가 바로 이와 같은가? 네가 진실로 이와 같다. 아! 오늘날 시비의 논쟁에 지조 없이 오락가락하는 선비들이 또 너에게서 처세술을 본받았나 보다. 余之新築茅堂在松林中, 書童於墻壁間, 獲一動物, 謂之羽族則無羽然而能飛, 謂之毛族則無足然而能走. 蓋身之兩傍, 有薄肉掌廣, 而間以勁筋, 張則爲兩翅而飛, 斂則爲四足而走, 奇乎異哉! 族之羽毛, 名之飛走, 不可得而定矣. 余嘗聞昔者崑崙之山, 羽毛二族大起戰爭, 互有殺傷, 因成仇隙, 久而不解. 有一蟲焉, 雖能走能飛乎, 於羽於毛, 一無助戰, 惟自保身是謀. 一日, 毛蟲聞其能飛, 往詰之曰: "爾非吾仇乎?", 則斂其兩翅, 分作四足, 銳然而走曰: "吾豈是羽族? 吾與爾一也.". 又一日, 羽蟲聞其能走, 亦往詰之, 則張其兩翅, 奮然而飛曰: "孰謂吾毛族, 與爾何仇?". 是以於羽於毛, 俱無嫌隙, 其名曰蝙蝠. 爾則是耶? 爾眞是也. 嗚呼! 今之士之依違於是非爭論者, 其亦取法於爾歟? 우족(羽族) 날아다니는 짐승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모족(毛族) 털을 가진 네발짐승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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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설 제2 【1919년】 自欺說第二 【己未】 내가 이미 앞에서 설을 지었는데 나에게 힐난하는 자가 말하기를 "그대가 자기(自欺)라고 여기는 것은 지(知)의 과실이 아니니, 지가 뜻을 성실하게 하는데 조금도 간섭함이 없는 것 같다."라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아! 무슨 말인가? 천하에 어찌 지가 지극하지 않은 성의(誠意)가 있겠는가. 또 어찌 내가 전에 뜻이 성실하지 않은 것이 지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했던가. 대체로 고금의 학자 중에 지가 지극하지 못하여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하지 못하는 자가 있고, 또 지가 비록 지극할지라도 실제로 그 힘을 쓰지 않는 자가 있다. 지가 지극하지 못하여 정성스럽지 못한 자로 말하면 정성스럽지 못한 것은 정성스럽지 못한 것이지만 자기는 아니니, 무엇 때문인가? 그 견해가 도달하지 못하여 실제로 속인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가 비록 지극하다 할지라도 실제로 그 힘을 쓰지 않는 자에 이르러서는 바로 자기이니, 무엇 때문인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행하지 않아서 본심(本心)의 밝음을 속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자기(自欺)는 지의 과실이 아니라 바로 뜻의 사사로움이다.'라고 한다.만약 자기가 지의 지극하지 못함 때문이라고 한다면 지가 지극한 자는 저절로 마땅히 자기가 없을 것이다. 자기가 없는 것이 어찌 뜻이 이미 성실한 자가 아니겠는가? 이와 같다면 《대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 한 장으로 이미 족할 것이다. 무엇 때문에 다시 성의와 정심(正心) 이하의 허다한 공부를 하겠는가? 그러므로 주 선생(朱先生 주자)이 진실로 '지가 이미 지극해지면 뜻이 성실해질 수 있다.108)'라고 하였고, 일찍이 '지가 이미 지극하면 뜻이 저절로 성실해진다.'라고 말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余旣爲前說, 有難余者曰: "子以爲自欺, 非知之過, 恐知之於誠意, 了沒干涉.", 曰: "惡! 何言? 天下焉有知不至之誠意? 余又何嘗道意未誠, 非知之過? 蓋古今學者, 有知之不至而不能誠其意者, 亦有知之雖至, 而不實用其力者. 知不至而不誠者, 不誠則不誠矣, 而自欺則非也, 何也? 以其見之未到而實無所欺也. 至於知雖至而不實用力者, 乃自欺也, 何也? 以其已知而不爲, 爲欺其本心之明也. 吾故曰: '自欺者非知之過, 乃意之私也'. 苟謂自欺是知不至之故, 則知之至者, 自當無自欺矣, 無自欺者, 豈非意已誠者乎? 如此則《大學》格致一章已足矣, 何復用誠正以下許多工夫乎? 朱先生固曰; '知旣盡則意可得而實矣.', 不曾曰: '知旣盡則意自誠矣.'". 지가 …… 있다 《대학장구》 경(經) 1장에서 주자가 "지가 이미 지극해지면 뜻이 성실해질 수 있고, 뜻이 이미 성실해지면 마음이 바르게 될 수 있다.[知旣盡則意可得而實矣, 意旣實則心可得而正矣.]"라고 주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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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변복삼 규원에게 보냄 을축년(1925) 與邊復三圭源 ○乙丑 제가 힘을 헤아리지 않고 스승을 무함한 적을 성토하는데 참여했다가 큰 재앙을 만나 생사를 예측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형이 쇠한 몸을 이끌고 먼 길을 두 번이나 찾아와 돌보아주셨으니, 뜻과 의리가 오늘날 서로 같지 않았다면 어찌 이처럼 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호라! 십시(十侍)4)와 백마(白馬)5)의 화(禍)는 포악하긴 포악하였지만 환관은 조신(朝臣)과 다른 부류이고, 유자광(柳子光)과 이극돈(李克墩)6), 남곤(南袞)과 심정(沈貞)7)의 해독은 참혹하긴 참혹하였지만 오히려 본조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고금 천하에 어찌 오진영(吳震泳)과 같이 바깥 오랑캐 왜인의 손을 빌려 동문을 죽인 경우가 있었겠습니까. 이번에 저는 또한 무사하였으나 통문에 참가한 여러 사람들은 형세 상 여러 번 왜경에게 불려가 심문을 당한 뒤에나 그칠 것이니, 형 또한 어찌 반드시 홀로 면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면할 수 없다면 장황하게 얘기하지 마시고, "나는 오진영이 선사를 무함하고 가르침을 어긴 것을 성토하였다. 사문의 난적이라 한 것은 오진영을 가리킨 것이지 강태걸(姜泰杰)을 가리킨 것이 아니니 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는다. 또 우리 선사의 유서에 인가를 받아 간행하는 것을 금한 원고는 처음부터 다른 사람에 의해 경영될 물건이 아니었으니 업무방해에 해당하지 않는다."라고 강력하게 말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일이 사실에 부합하고 의리가 꺾이지 않을 것입니다. 弟不自量力,參討誣師之賊,遭罹大禍,死生莫測.乃兄遠程曳衰,再度見顧,非志義今日之同,烏能如此? 鳴呼! 十侍、白馬之禍,烈則烈矣,閹宦之於朝士異類也; 光、墩、袞、貞之毒,慘則慘矣,猶爲起事於本朝也.古今天下,安有假手外夷戕殺同門如震賊者乎? 今番弟行,亦且無事.然參通諸人,勢將累呼究問而後已,兄亦安能必其獨免? 如不得免,則除却支辭蔓語,但力言"吾討吳震泳誣師違訓.師門悖賊.是指吳非指姜,名譽損害非所當.且吾先師遺書禁認之稿,初不當爲人營業物,則業務妨害,亦不當也"云,則事得實而義不屈矣. 십시(十侍) 십상시(十常侍)의 약어이다. 후한 영제(後漢靈帝) 때 권세를 부리며 부귀영화를 누렸던 장양(張讓)ㆍ조충(趙忠) 등 12인의 환관을 말하는데, 그 명단과 실상이 《후한서(後漢書)》 권78 〈환자열전(宦者列傳) 장양(張讓)〉에 자세히 나온다. 백마(白馬) 당(唐)나라 천우 2년(905), 마지막 황제인 소선제(昭宣帝) 때 권신(權臣) 주온(朱溫)이 배추(裵樞) 등 조정의 선비 30여 명을 백마역에 모아서 하루 저녁에 다 죽이고 그 시체를 황하(黃河)에 던져 넣은 사건을 말한다.《당서(唐書)》권240〈배추열전(裵樞列傳)〉단, 문맥으로 볼 때 이는 백마역 사건이 아니고, 동한(東漢) 말 당고지화(黨錮之禍)를 가리킨 듯한데, 우선 원문대로 번역했음을 밝혀둔다. 참고로 당고지화는 환제(桓帝), 영제(靈帝) 때 환관들이 정권을 장악하여 국사를 마음대로 하자 사대부인 이응(李膺), 진번(陳蕃) 등이 태학생들과 연대하여 환관들을 맹렬히 탄핵하였는데, 이로 인해 환관들이 도리어 이들을 종신 금고(禁錮)에 처하여 벼슬길을 막아 버린 사건이다. 《후한서(後漢書)》 권67 〈당고열전(黨錮列傳)〉 유자광(柳子光)과 이극돈(李克墩) 연산군(燕山君) 때의 훈구파 수장들이다. 신진 사림파와 반목하여 김일손(金馹孫) 등을 탄핵해서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켰다. 남곤(南袞)과 심정(沈貞) 이들은 중종(中宗) 때의 훈구 재상(勳舊宰相)으로 신진 사류(新進士類)인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등을 일망타진한 장본인들로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주동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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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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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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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최백 순준에게 보냄 갑술년(1934) 與崔伯舜 濬 ○甲戌 봄 사이 왕림하여 안부를 물어주신 것은 참으로 저를 멀리하지 않는 성대한 뜻에서 나왔으니 감격스러워 무어라 말씀드려야 할 지를 몰랐습니다. 다만 길이 바빠서 차분히 토론하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작별을 고하게 되었는데, 지금도 한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렇지만 도가 만약 같으면 천 년 전의 사람도 오히려 벗을 삼아 서로 멀다 여기지 않는 반면, 도가 진실로 같지 않으면 아침저녁으로 만난다 하더라도 서로 도모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마땅히 진실한 마음으로 서로 더불어서 도의 같음을 구하는데 급급해야지 이합과 원근에 구질구질할 필요가 없음이 분명합니다. 도의 같음을 구하려면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분변함의 사이에서 강론하여 연마하여 서로 진보시켜야 함이 분명합니다. 우러러 청하건대 그대는 최근에 무슨 책을 읽으며 무슨 의리를 강구하십니까? 널리 묻고 정밀히 살피며 신중히 생각하고 분명히 밝혀서 이른바 도를 구하는 것에 있어서 그만두지 않는 공부와 밝아지고 굳세지는 효과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8) 제가 흠송한 나머지 또 감히 얕고 비루한 소견으로 받들어 묻고 가르침을 청하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최근에 선사의 유고를 읽다가 그 해와 별처럼 밝은 논리와 못을 끊고 쇠를 자를 것 같은 굳건한 의리를 보았는데, 어찌 이리도 분명하면서도 엄격하단 말입니까. 저 김평묵(金平黙)이 제문에 전옹(全翁 임헌회(任憲晦))을 비난하고 폄하하자 선사가 홀로 맞부딪쳐서 그 문장을 배척하고 그 무함함을 변론하셨는데,9) 송골매가 떨치고 일어나서 참새를 쫓듯이 하였고 운무를 헤치고 하늘의 해를 바라듯이 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독 괴이한 것은 당시에 전옹 문하의 여러 제자 중에서 두세 명만을 제외하고는 그를 도와 힘을 보태는 자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내 또 불만을 갖고서 말하는 자도 있었으며 심한 자는 기꺼이 저쪽의 앞잡이가 되어 오히려 이쪽을 헐뜯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겉으로는 스승을 따라 도를 배운다고 하지만 의리에 얻음이 없기 때문에 사사로운 마음이 틈을 타고 일어나, 작게는 혐의를 피하고 크게는 권세를 두려워하여 자기도 모르게 스승을 잊고 적을 도운 것입니다. 그때 만약 선사께서 일만 번 죽을힘을 내어서 물리치지 않았다면 전옹의 도가 어찌 오늘에 전해질 수 있었겠습니까? 적이 이것을 가지고 오늘날 우리 문하의 일을 미루어 살펴보면 이른바 "은나라의 거울이 멀리 있지 않다"10)라는 것입니다.아, 자신의 원고를 인가받아 간행토록 했다는 것의 의리가 없음은 본성을 감추고 세상에 아첨하는 것보다 심하니, '힘을 헤아려 하라.'고 했다거나 '불언지교(不言之敎'라고 한 것은 암암리에 기롱하고 폄하한 것만이 아닙니다.11) 스승을 무함한 죄는 또한 벗을 무함한 죄보다 더욱 중합니다. 그렇다면 오진영의 스승을 무함한 흉악함은 김평묵이 지은 제문의 변고보다도 큰일이고, 또 1500명은 전옹을 따르던 자들보다 많으니, 마땅히 그 죄를 명확하게 정하여 한 명의 적을 일제히 성토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세도가 더욱 낮아지고 의리가 더욱 어두워져, 앞잡이가 되어 도리어 헐뜯는 이씨와 정씨 같은 자가 줄지어 나오고, 마음을 같이하여 서로 돕는 윤씨와 서씨 같은 자는 거의 없으며, 그 일을 주관하는 자도 도학의 명망과 지위가 있는 자가 아니니, 어찌 하겠습니까. 선사께서 당일에 도적을 소탕하고 사문을 안정시킨 일 같음도 진실로 기필할 수 없었거니와 그 패망하여 사멸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 하겠습니다.그런데 이러한 때에 그를 위해서 말을 하는 자가 "그가 비록 죄가 있지만 참으로 스승을 존중하여 한 것이니 용서해야 마땅하고 성토하는 것은 지나치다."라고 하니, 한 사람이 제창함에 백 사람이 화답하여 스스로 공론이라 자처하며 거리낌 없이 저쪽의 세력을 돕고 이쪽의 힘을 어렵게 하니, 아, 너무도 잔인한 마음입니다. 이는 곧 주자가 '도적도 용서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바로 도적 편의 사람이다.'12)라고 한 격이니, 위에서 말한 불만을 갖고서 말을 하는 자에 비할 뿐만이 아닙니다. 이쪽도 저쪽도 아니고 가함도 없고 불가함도 없는 이와 같은 사람들은 또 무엇을 하는 자들입니까? 만약 그가 무함한 것임을 알지 못했다면 이는 밝지 못한 것이고, 그가 무함한 것임을 알았는데도 오히려 침묵했다면 이는 어질지 못한 것입니다. 밝지 못한 잘못은 작으니, 이는 오히려 그가 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니 그래도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어질지 못한 죄는 크니, 이는 오히려 그가 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잡지 않은 것이니 더욱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밝지 못한 자와 어질지 못한 자는 모두 위에서 말한 힘을 내어 돕지 않은 경우이지만, 저 어질지 못한 자는 또한 도적 쪽의 사람일 뿐입니다.대저 전옹 문하에서 이미 그랬던 행적으로 우리 문하에서 의리를 지키는 모습을 헤아려 보면 그 시비와 득실이 어찌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선사께서는 비록 한때에 혐노(嫌怒)를 실컷 받았지만 끝내 대의(大義)를 영원히 펴서 그 광화(光華)가 차서 넘치고 사방에서 전송하고 있습니다. 반면 저 침묵하고 배반하여 스승을 잊고 적을 도운 자들은 비록 한때에 편안함을 차지했지만 더러운 행적이 환히 알려져 영원히 바꿀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먼 훗날에 오늘을 살펴본다면 그 영광과 욕됨이 또한 오늘날에 옛날을 살피는 것과 같을 것임은 더욱 명백하니,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가만히 살펴보니 그대는 성품과 도량이 뛰어나서 진실로 사악한 마음을 가지고 적을 보고도 붙잡지 않는 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문식 또한 뛰어나니 이치를 보는 것이 분명하지 못하여 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자는 아니니, 마땅히 밝게 분변하고 엄하게 성토하여 지금과 후세에 할 말이 있어야 하는데, 아직까지도 조용하여 들리는 말이 없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저 의리가 더욱더 어두워져서 더불어 말할 자가 없기 때문에 저계야(褚季野)의 피리(皮裏)13)를 본받으려 하는 것입니까? 아마도 할 말이 있을 것인데 그 화변이 더욱 심해질 것이라고 하여 할 말을 숨겨서 이전 사람이 했던 것처럼 후세 사람을 기다리는 것입니까? 이 두 가지에 대해서는 모두 할 말이 있습니다. 만약 보통의 시비일 뿐이라면 모두 안 될 것이 없지만 지극히 큰일과 관계되어 죽은 스승을 무함하고 잔약한 명맥을 끊어 끊어버린 것이니, 마땅히 맹자가 말한 불공대천의 원수로 간주하여 끝까지 성토하여 남김 없게 해야 하고 다른 것은 고려할 것도 없습니다.그대는 진실로 선사의 밝은 이치를 강론할 수 있고 선사의 굳건한 의리를 지녀서, 오진영의 무함을 분별하여 물리치기를 선사가 김평묵의 뇌문(誄文)을 배척한 것처럼 할 수 있다면, 그와 같은 평소의 밝은 안목과 뛰어난 학식으로 반드시 조마경(照魔鏡)이 번개처럼 빛나고 파음부(破陰斧)가 우레처럼 울리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선사의 해처럼 찬란하고 옥처럼 고결함이 온전히 드러나고, 우리 군대의 의로운 명성과 올바른 기상이 배로 신장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널리 배우고 자세히 묻고 신중히 생각하고 밝게 분변하여 이른바 도가 같은 자를 구하는 것에 있어서 어찌 가장 크고도 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대는 이를 도모하시기 바랍니다.선사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눈으로 부친과 스승이 무함을 당한 것을 보고도 분변하여 성토할 줄 모르는 자는 칼로 손가락을 잘라도 고통을 알지 못하는 자이다."라고 했고, 또 말씀하시기를 "문인제자로서 다른 사람과 친화를 잃게 되는 작은 혐의를 피하려 하다가 스승을 위해 무함을 변론하는 대의를 잊는다면 스승과 제자의 윤리가 폐해질 것이고, 스승과 제자의 윤리가 폐해지면 삼강(三綱)과 구법(九法)14)이 또한 의지하여 설 곳이 없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교훈을 세 번씩 반복할 때마다 심목(心目)이 송연해지는데 저 스승을 무함하고 스승을 잊은 무리들은 또한 무슨 마음이란 말입니까. 내가 비록 보잘 것 없는 사람이지만 그대의 현명함은 실로 능히 면할 수 있음을 잘 압니다. 모두 헤아려 주시길 바랍니다. 春間枉存,寔出不遐之盛,其爲感荷無容云喻.而行李恖恖,未克穩討,旋卽賦別,至今以爲悵.雖然道若相同,千載尚友未爲遠; 道茍不同,雖朝暮遇不相爲謀矣.然則吾人只當實心相與,汲汲求道之所同,不必屑屑於離合遠近之間明矣.欲求道之所同,不可不講磨相長於學問思辨之間也亦明矣.仰請執事近日所讀者何書、所究者何義? 其於博審愼明以求所謂道者,想有不措之功、明強之效矣.區區欽誦之餘,亦敢以淺陋之見奉質而請教,幸垂察焉.近讀先師遺稿,見其日昭星晳之理、釘斬鐵截之義,何若是明且嚴也! 方嘉金祭文之譏貶全翁也,先師獨當其衝,斥其文而辨其誣,若奮鷹鸇而逐鳥雀,披雲霧而睹天日矣.獨怪夫當時全門諸人,除二三子外,不惟不助之出力,乃復不滿而有言,甚者甘作彼倀而反噬之也.夫如此者何也? 名爲從師學道,而無得於義理,故私邪闖發,小則避嫌 大則畏勢,自不覺忘師而助賊矣.向使先師不出萬死之力以排闢之,全翁之道豈得傳至于今耶? 竊嘗以此推觀於今日吾門之事,所謂殷鑑不遠者也.噫! 認刊己稿之無義,甚於儉德媚世,料量爲之、不言之教之云,非暗譏隱貶,誣師之罪,又重於誣友.然則震誣之凶大於金誄之變,且千五百人多於全翁之從,宜其明定其罪,齊討一賊,易易如也.奈之何世級愈降,義理愈晦,作倀反噬之李、鄭,比肩而接踵,同心協力之尹、徐,絕無而僅有,而主其事者又非有道學名位.如先師當日掃盪寇盜,奠安斯文,固未可必,而其免敗亡滅死者,亦云幸矣.乃於此時,有爲之說者曰: "彼雖有罪,實因尊師而作,宜在所恕,聲討則過." 一唱百和,自居公論,不憚助彼之勢而艱此之力,鳴乎! 其忍心甚矣.此卽朱子所謂"道賊可恕,便是賊邊人",不啻向者所謂不滿有言者比也.若乃不彼不此,無可無否,這一般人又何爲者也?如不知其爲誣也,則是不明也; 知其爲誣,猶且含黙,則是不仁也.不明之過小,是猶不知其爲賊,猶可說也.不仁之罪大,是猶知其爲賊而故不捉也,更不可說.不明不仁,俱是向者所謂不助之出力者,而其不仁者則是亦賊邊已矣.蓋以全門已然之跡,揆吾門之處義,其是非得失,豈不較然明著乎? 先師雖則飽受嫌怒於一時,終伸大義於百世,光華盈溢,四方傳誦.彼諸人之噤黙違反忘師助賊者,雖則自占便宜於一時,穢辱彰聞,百世莫改.由後視今,其可榮可辱,亦當如今之視昔也更明矣,可不畏哉?竊觀執事性度傑然,固非挾私邪而見賊不捉者,文識亦優,又非見理不明而不知其爲賊者,宜有明辨嚴討 有辭於今與後者,而尚寥寥無聞何也? 以其義理愈晦無可與語者,故欲效褚季野之皮裏歟? 蓋有之矣,而以其禍變益奇 祕之以待後世如前人之爲歟? 此二者俱有說焉.如尋常是非而已,則皆無不可者,關係至大,䧟死師剝殘脉者,則當如孟子不共戴天之讐,討之不遺餘力,其他非所恤也.執事誠能講先師昭晳之理,持先師斬截之義,辨斥震誣,若先師之於金誄,則以若平日之明眼巨擘,必見照魔之鏡燁然如電,破陰之斧轟然如雷,先師之日光玉潔,全軆呈露,吾軍之義聲直氣一倍用張矣.此於吾人愽審眞明以求所謂道之所同者,豈非最大且急者乎? 惟執事圖之.先師嘗有言曰: "目見父師被誣而不知辨討者,刀截而不知痛者." 又曰: "門人弟子避與人失和之小嫌,而忘爲師辨誣之大義,則師生之倫廢矣; 師生之倫廢,則三網九法亦無所頼而立矣." 每三復此訓,竦然心目,彼䧟師忘師者流,亦何心哉? 吾雖無似,自謂知足以知執事之賢果能免矣.統希究裁. 널리……생각합니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0장에 "널리 배우며, 자세히 물으며, 신중히 생각하며, 밝게 분변하며, 독실히 행하여야 한다. 배우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배울진댄 능하지 못하거든 놓지 말며, 묻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물을진댄 알지 못하거든 놓지 말며, 생각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생각할진댄 알지 못하거든 놓지 말며, 분변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분변할진댄 분명하지 못하거든 놓지 말며, 행하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행할진댄 독실하지 못하거든 놓지 말아야 한다. …… 과연 이 도에 능하면 비록 어리석으나 반드시 밝아지며, 비록 유약하나 반드시 강해진다.[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有弗學, 學之, 弗能弗措也; 有弗問, 問之, 弗知弗措也; 有弗思, 思之, 弗得弗措也, 有弗辨, 辨之, 弗明弗措也; 有弗行, 行之, 弗篤弗措也.…… 果能此道矣, 雖愚必明, 雖柔必强.]"라고 하였다. 저 김평묵(金平黙)이……변론하셨는데 김평묵이 임헌회의 제문을 지었는데, 임헌회를 호안국(胡安國)과 사마광(司馬光)에게 비유했다 해서 전우와 임헌회의 아들 임진재(任震宰)가 편지를 보내어 절교를 선언하고 제문을 돌려보낸 일을 말한다. 《간재집(艮齋集)前篇》권2〈답유치정(答柳穉程)〉 은나라의……않다 《시경(詩經)》 〈탕(湯)〉에 "은나라의 거울이 멀리 있지 않으니, 하후의 세대에 있다.[殷鑑不遠 在夏后之世]"라고 하였는데, 이는 문왕(文王)이 은나라 주(紂)의 실정을 경계한 말로, 은 왕조의 운명은 하(夏) 왕조를 멸망시킨 걸(桀)에서 교훈을 삼을 수 있다는 뜻이다. 자신의……아닙니다 전우가 오진영을 불러서 '문집 인간(印刊)의 일은 자네가 알아서 행하라'라고 했다는 것을 말하는데, 평소 간재 전우가 이런 말을 했을 리가 없다는 뜻이다. 도적도……사람이다 주자가 이르기를 "어떤 사람이 도적을 보고도 잡지 않는다면 그는 곧 도적의 무리이니, 도적은 사람들의 마음에 마땅히 싫어하는 것이다. 만약 '도적을 잡아 주벌해야 마땅하다'고 한다면 이는 주인 편의 사람이고, 만약 '도적은 잡을 수도 있고 용서할 수도 있다'고 한다면 이는 도적 편의 사람이다.[有人見了自不與捉, 這便喚做是賊之黨, 賊是人情之所當惡. 若說道賊當捉當誅, 這便是主人邊人, 若說道賊也可捉可恕, 這只喚做賊邊人.]"라고 하였다. 《주자어류(朱子語類)》 권55 〈맹자孟子55조〉 저계야(褚季野)의 피리(皮裏) 진(晉) 나라 환이(桓彛)가 저계야(褚季野)를 평하기를, "계야는 껍질 속에 춘추(春秋)가 있어 비록 말하지 않아도 사시(四時)의 기운이 갖추어 있다." 하였다. 그것은 겉으로 말을 잘하지 않으면서도 속에는 시비가 분명하다는 뜻이다. 구법(九法) 《주례(周禮)》 하관(夏官) 대사마(大司馬)에, "방국(邦國)에 구법(九法)을 세워 왕을 보좌하고 나라를 편안하게 하였으니, 경기(京畿)를 제정하고 나라를 봉하여 방국을 바로잡으며, 의례(儀禮)의 직위(職位)를 설정하여 나라의 등급을 정하며, 현인(賢人)을 올리고 공을 이루어 나라를 건설하고, 감(監), 목(牧)을 세워서 나라의 벼리를 정하고 군제(軍制)와 금고(禁錮)를 만들어 나라를 바로잡고, 공물(貢物)을 베풀고 직분을 나누어 나라 일에 임하고, 향민(鄕民)을 뽑아 나라 일에 쓰고, 고루 법을 지키어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작은 나라로 큰 나라를 섬겨 나라를 평화롭게 한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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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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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경 채환에게 보냄 계묘년(1903) 與朴受卿彩煥 ○癸卯 배우는 자가 스승에게 전수받아 용처로 삼는 것은 많은 것에 있지 않고 다만 스스로 떠맡아서 한두 글자를 얻어 자신의 밑천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이 때문에 원성(元城 유안세((劉安世))은 온공(溫恭 사마광(司馬光))에게 '성(誠)' 한 글자를 받아서 종신토록 행하였고15), 중거(仲車 서적(徐積))는 안정(安定 호원(胡瑗))에게 '직(直)' 한 글자를 받아서 평생토록 사용하였습니다.16) 아우는 형이 간옹에게 전수받은 '용(勇)' 자도 이와 같다고 여깁니다.대저 더디고 유약한 것은 배우는 자의 병통이니, 다만 '용(勇)' 한 글자야말로 귀신이 전수한 한 알의 영단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용(勇)과 불용(不勇)은 이 학문의 성패를 가를 기틀입니다. "스스로 힘써서 쉬지 않는다."17)는 것도 다만 용이며, "죽은 이후에 그친다."18)도 다만 용입니다. 그리고 안자(顔子)가 "순(舜)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19)라고 하고, 자로(子路)가 "듣고서 행하지 못함이 있으면 다시 들을 것을 두려워했다."20)라고 한 것도 모두 능히 용을 실천하여 성인도 되고 현인도 된 것입니다. "한 삼태기가 부족하여 산을 이루지 못하고 그치었다."21)는 것과 "싹은 났으나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꽃은 피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한 경우도 있다."22)는 것은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염구(冉求)의 자획(自畫)23)과 재여(宰予)의 주침(晝寢)24)도 결국에는 또한 용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에 불과합니다. 간옹이 형에게 '용'을 말씀해 주신 것은 그 뜻이 어찌 얕은 것이겠습니까. 천만 스스로 힘을 써서 종신토록 수용하여 쓴다면 또한 원성(元城)과 중거(仲車)와 같게 될 것입니다. 형이 스스로 용기가 없다고 말씀한 것은 비록 겸양에서 나온 것이지만 제가 보기에 한 가지 일에 근사한 점이 있는 것 같아서 외람되게 번거로이 떠들었습니다. 형은 유념해 주기 바랍니다.대저 사람이 상지(上知)가 아니면 스승의 가르침을 기다리지 않고 이룬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만법의 근원입니다. 천하에 지극히 귀한 것은 도이며 지극히 높은 것은 덕인데, 스승의 강수(講授)로 말미암아 귀하고도 높은 것을 얻으니 은혜와 의리가 깊고도 무거움은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옛날부터 성현마다 이 일을 조기에 정하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안자(顔子)가 공자를 따라 배운 것도 그 나이가 14세였고, 자하(子夏)가 진(陳)나라와 채(蔡)나라 사이에서 공자를 따른 것도 그 나이가 18세였으며, 이천(伊川)은 15세에 염계(濂溪)에게 배웠고, 회옹(晦翁)은 24세에 연평(延平)을 뵈었습니다. 이제 형이 간옹을 뵌 것은 이상의 여러 성현과 비교해 볼 때 조금 늦다고 말할 수 있는데도, 오히려 굳은 마음으로 스승과 제자의 분수를 정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용기가 없는 것과 근사한 점이 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근래에 제가 스승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박모(朴某)는 순실하여 함께 할만하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말은 참으로 듣기가 쉽지 않고 그 뜻 또한 의미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현의 시대와 멀고 인물도 없어서 학술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습니다. 사장(詞章)을 추구하는 속학(俗學)의 무리야 진실로 물을 것이 없으나, 도학(道學)을 한다 말하면서 서로 전수한 종지를 위반하고 별도로 자신의 법문을 세워서 의관의 제도를 무너뜨리고 심성의 나뉨을 혼란시키는 자들이 또한 많으니, 온 나라를 둘러보아도 어디에 발길을 두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길이 한번 어긋나면 비록 허다한 심력을 모두 쏟고 수많은 말로 꾸민다 하더라도, 끝내는 성학의 참뜻과는 향기로운 풀과 누린내 풀처럼 서로 반대됩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마땅히 신중히 살펴서 추향을 결정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받들어 언급하였습니다. 잘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學者之所受於師而爲用者,不在於多,只在自家擔夯,得一兩字做家計.是以元城受一誠字於溫公,爲終身之行; 仲車受一直字於安定,作一生之用.弟竊以爲兄之所受於艮翁之勇字,亦猶是也.夫遲回懦弱,學者之通病,而只是一箇勇字,可謂神傳鬼授之一粒靈丹也.故勇與不勇,此學成敗之機."自強不息",亦只是勇; "死而後已",亦只是勇.至於顏子之"舜何人,余何人",子路之"有聞未行,唯恐有聞",亦皆能其勇而爲聖爲賢也.若乃"未成一簣而止"者與"苗而不秀,秀而不實"者,勇不足故也.冉求之"自畫",宰予之"畫寢",究亦不過無勇之致.艮翁之語兄以勇,其意豈淺淺也哉? 千萬自力,做畢生受用之需,亦如元城、仲車也.兄自謂無勇,雖出於撝謙,然以弟觀之,似有一事近似者,猥此煩聒,願兄留心焉.夫人非上知,未有不待師教而成者.故師生者,萬法之源也.天下至貴者道,至尊者德,乃由其講授,得其貴且尊者有之,其恩義深重,顧何如哉? 故從古聖賢,未有不早定此事者.顏子之從孔子學也,時年十四; 子夏之從孔子於陳、蔡也,時年十八; 伊川十五而學濂溪; 晦翁二十四而見延平.今兄之見艮翁,視以上諸聖賢,可謂差晚,而猶不決意以定師生之分.故曰有一事近似於無勇也.頃承師教云: '朴某醇實,可與有爲.' 誠不易得此,其志亦有在也.世遠人亡,學術多岐.俗學詞章之輩,固無足問,號爲道學,而繆戾相傳宗旨,別立自家法門,顚倒衣冠之儀,乖亂心性之分者亦多,顧瞻宇內,罔知投蹤.路陌一差,雖費盡得許多心力,粧撰得許多辭說,終與聖學眞趣,若薫蕕之相反矣.此吾儕所當審愼而趨向者,故奉及焉,幸有以諒之. 원성(元城)은……행하였고 유안세가 사마광에게 '마음을 다하고 몸을 닦는 요체로서 죽을 때까지 행할 만한 것'이 무엇인지 묻자, 사마광이 대답하기를 "그것은 성(誠)일 것이다." 하였다. 이에 다시 유안세가 "그것을 행하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합니까?"라고 물으니, 사마광이 대답하기를,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하였다. 《소학집주(小學集註) 권6 〈선행(善行)〉 유안세는 강직한 성품으로 직간을 하여, 전상호(殿上虎)라는 별명을 얻었다. 중거(仲車)는……사용하셨습니다 서적이 스승인 호원(胡瑗)을 뵙고 나올 때에 머리의 모양이 조금 기울었는데, 호원이 갑자기 큰소리로 "머리를 곧게 세워라.[頭容直]"라고 하였다. 서적은 이 말을 듣고 머리를 곧게 세워야 할 뿐만이 아니라 마음도 곧아야 한다고 스스로 깨닫고, 이후로 부정한 마음을 갖지 않았다고 한다. 《소학집주(小學集註) 권6 〈선행(善行)〉 스스로……않는다 《주역》 건괘(乾卦) 상전(象傳)에 "하늘의 운행이 강건하니 군자가 이를 보고서 스스로 힘쓰며 쉬지 않는다.[天行健 君子以 自彊不息]"라고 하였다. 죽은……그친다 《논어(論語)》 〈태백(泰伯)〉에 보이는데,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선비는 도량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되니 책임이 무겁고 길이 멀기 때문이다. 인(仁)으로 자기의 책임을 삼으니 또한 막중하지 않은가. 죽은 뒤에야 끝나는 것이니 또한 멀지 않은가.[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仁以爲己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라고 하였다. 순(舜)은……사람인가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보이는데, 안연(顔淵)이 말하기를 "순 임금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순 임금이 되려고 노력하는 자는 또한 순 임금같이 될 것이다.(舜何人也 予何人也 有爲者亦若是)"라고 하였다. 자로(子路)는……두려워했다 이 구절은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에 보인다. 본래는 "자로는 가르침을 듣고 그 가르침을 미처 실천하지 못했으면 유독 다른 가르침을 듣기 두려워했다.[子路有聞, 未之能行, 唯恐有聞]"이다. 한 삼태기가……그치었다 《논어(論語)》 〈자한(子罕)〉에 보이는데, "비유하면 산을 만드는 데에 한 삼태기를 더하지 않고서 그치는 것도 내가 그치는 것과 같으며, 비유하면 평지에 한 삼태기를 붓더라도 나아감은 내가 나아가는 것과 같다.[譬如爲山, 未成一簣, 止, 吾止也; 譬如平地, 雖覆一簣, 進, 吾往也]"라고 하였다. 싹은……있다 《논어(論語)》 〈자한(子罕)〉에 보이는데, "싹이 났으나 꽃을 피우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꽃은 피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苗而不秀者, 有矣夫; 秀而不實者, 有矣夫.]"라고 하였다. 이는 원래 학문을 하면서 완성에 이르지 못함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의미를 전용하여 사용하였다. 염구(冉求)의 자획(自畫) 《논어(論語)》 〈옹야장(雍也)〉에 보인다. 염구가 "선생님의 도를 좋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힘이 부족합니다.[非不悅子之道, 力不足也.]"라고 하자, 공자가 말하기를 "힘이 부족한 자는 중도에 그만둔다. 지금 너는 스스로 한계를 그은 것이다.[力不足者, 中道而廢, 今女畫]"라고 하였다. 재여(宰予)의 주침(晝寢)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에 보인다. 재여가 낮잠을 자자, 공자가 말하기를 '썩은 나무는 아로새길 수 없고 분토의 담장은 손질할 수 없다.[朽木不可雕也, 糞土之墻不可杇也.]"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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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자정에게 답함 기유년(1909) 答趙子貞 己酉 문왕은 24세에 백읍고(伯邑考)를 낳고 공자는 19세에 백어(伯魚)를 낳았습니다. 이를 가지고 살펴보면 비록 옛 성현이라도 30세가 되어서 부인을 맞이한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애공(哀公)이 "남자가 30세에 부인을 두는 것이 어찌 늦지 않겠습니까?"하고 물으니, 공자가 말하기를 "대체는 예는 그 극단의 경우를 말한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48) 비록 30세에 미치지 못하여 부인을 두더라도 그것에 대해 극단의 경우에 이르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옳지만 굳이 예를 잃었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가례》에 정한 "남자는 16세에서 30세에 이르기까지 결혼을 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영원히 폐단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부인이 관(冠)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내칙(內則)〉의 '빗질하고, 머리를 싸매고, 동곳을 꽂고, 상투를 싼다."라고 한 문장이 그러할 뿐만 아니라, 〈사상례(士喪禮)〉 소(疏)에도 "비녀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머리를 안정되게 하는 비녀는 남자와 부인이 모두 있고, 관에 사용하는 비녀는 오직 남자만 있고 부인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주자는 "부인은 관을 쓰지 않으니, 이른바 비녀는 곧 상투를 고정시키기에 사용하는 것으로 피변(皮弁)과 작변(爵弁)의 비녀와는 같지 않다."라고 하고, 보주(補註)에 또 "부인은 관을 쓰지 않으니, 비녀로 상투를 고정시킬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여러 설을 근거해 보면 더욱 분명하여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명나라 제도에 처음으로 봉관(鳳冠)을 사용하여 명부(命婦)의 복장으로 삼았는데, 속칭 화관(華冠)이 이것입니다. 오늘날 풍습에서 사용하는 족두리(簇道里)는 또한 화관의 잘못된 제도입니다. 원삼(圓杉)은 또한 우리나라 풍속의 제도인데, 이것에 대해서는 도암(陶菴 이재(李縡))의 《사례편람(四禮便覽)》에 이미 논한 것이 있습니다.다발머리[髦]는 부모의 생육에 대한 은혜를 표시하기 위한 것이니, 부모가 살아있으면 머리에 붙이고 돌아가시면 제거합니다. 비록 남자가 양자로 가서 그 후사를 잇고 여자가 이미 시집을 갔더라도 낳아주신 부모가 살아계시면 다발머리를 제거할 이치는 없을 듯합니다. 文王二十四生伯邑考,孔子十九歲生伯魚.以此觀之,雖古聖賢,鮮有三十而有室者矣.哀公問: "男子三十而有室,豈不晚哉?" 孔子曰: "夫禮言其極." 蓋雖不及三十而有室,謂之未至於極則可矣,而不必謂之失禮也.《家禮》所定"男子年十六至三十,乃可成昏"者,可萬世無獘也.婦人無冠,非惟《內則》"櫛縰笄總"之文爲然,《士喪禮》疏曰: "笄有二種,安髪之笄,男子婦人俱有,冠笄惟男子有,而婦人無也." 朱子曰: "婦人不冠,所謂笄即爲固髻之用,非如二弁之簪." 補註亦云: "婦人不冠,以簪固髻而已." 據此諸說,則尤曉然無疑矣.明制始用鳳冠爲命婦服,俗稱華冠是也.今俗所用簇道里者,又是華冠之誤制也.圓杉亦我國之俗制,此則陶菴《便覽》已有所論耳.髦所以表生育之恩,父母生則戴之,死則去之,雖男出後女已嫁者,其所生之父母存,則恐無去髦之理. 애공(哀公)이……하였습니다 《공자가어(孔子家語)》 〈본명해(本命解)〉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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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간재 선생의 시에 차운하여 양계초80)를 논함 4수 敬次艮齋先生詩論梁啓超【四首】 애석하다 양씨 집안에 한 후손이여 可惜梁家有一孫좋은 재능과 기량을 지녀 무리에서 우뚝 서 好將才器出倫身사수81)에서는 본래 밝은 학문 열었으나 泗洙自有開明學서구 학풍에 취해 경도되어 도리어 신명 잃었으니 醉倒歐風却失神석씨 육상산 왕양명 예수 네 분 후손은 釋陸王穌四氏孫마치 순보가 후세에 다시 온 것으로 여기리 恰如純甫後來身공자께서도 함께 목욕했다고82) 귀결하지 마라 莫將宣聖歸同浴공자께서는 오히려 귀신을 노하게 했다 하리라 宣聖猶應怒鬼神순보는 금나라 시대의 문장가로서 노자, 석가, 공자, 맹자, 장자 등을 존숭하여 다섯 성인이라 하고, 송나라 시대 여러 현인은 그의 책망과 질책을 입는 것에서 한 명도 벗어날 자가 없었다. 또한 전쟁을 논하며 세상을 경영하는 것을 잘했다. 지금 양계초도 석씨, 왕양명, 육상산, 예수를 아울러 존숭하면서, 늘 공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자기의 구원으로 삼았기 때문에 간재 선생께서 일찍이 계초가 순보의 후신이라고 말했던 것이다.군신과 부부 등은 조상이 후손에게 전한 것이라 君臣夫婦祖傳孫모두 삼강으로 질서 있는 체제이거늘 俱是三綱有秩身어인 일로 도리어 평등의 설을 가지고 何事却將平等說건곤을 뒤집고 인간과 귀신을 뒤섞는가 乾坤飜覆雜人神유가의 죄악은 진시황을 우두머리로 치니 儒門罪惡魁秦皇선비를 묻고 경서를 태워 미친 사람 되었네 坑士焚經自作狂양생이 무슨 생각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不識梁生何意思두 번째 공신이라 감히 칭찬하며 말했는지 功臣第二敢稱揚 可惜梁家有一孫,好將才器出倫身.泗洙自有開明學,醉倒歐風却失神.釋陸王穌四氏孫,恰如純甫後來身.莫將宣聖歸同浴,宣聖猶應怒鬼神.【純甫金代文章,幷尊老釋孔孟莊爲五聖人,宋朝諸賢,被其詬斥無一得免者,亦能談兵經世.今啓超幷尊釋氏王陽明陸象山耶.穌每引孔子之言爲己援,故艮齋先生,嘗謂啓超是純甫後身.】君臣夫婦祖傳孫,俱是三綱有秩身.何事却將平等說?乾坤飜覆雜人神.儒門罪惡魁秦皇,坑士焚經自作狂.不識梁生何意思?功臣第二敢稱揚. 양계초 양계초(1873~1929)는 중국의 사상가, 정치가, 학자이다. 사수 산동성의 두 강 사수(泗水)와 수수(洙水)로 공자가 그곳에서 제자를 가르쳤다. 함께 목욕했다고 원문 '동욕(同浴)'은 한유(韓愈)의 〈답장적서(答張籍書)〉에 "그대가 비난하는 것은, 마치 함께 목욕하면서 발가벗었다고 욕을 하는 것과 같다.〔吾子譏之 似同浴而譏裸裎也〕"라는 표현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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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가을 영주정사에 이르러 창암과 중당 박수 두 어른과 함께 연일 수창함 4수 早秋到瀛洲精舍同蒼巖中堂【朴銖】二丈連日唱酬 【四首】 명승지에 노닐며 수심을 없애고자 하는데 勝地遨遊欲擺愁어찌 되려 세상 길 걱정하는가 如何却把世程憂십 년 동안 좀을 잡으며 오직 책 붙들고서 十年打蠹惟黃卷온 나무에서 매미소리 들리더니 다시 가을이네 萬樹聞蟬又素秋풀이 뜨락에 가득하여 제거하기 어렵고 蓁塞門庭難掃闢비가 지게문에 들이치니 누가 미리 막을까83) 雨侵牖戶孰綢繆초가을 칠월 칠일 좋은 시절 제외하면 除非七七良辰節출렁이는 술동이의 막걸리에 또 쉬지 못하리 蕩漾樽醪且未休낮잠 홀연히 깨니 가을 기운 새롭고 午夢忽醒秋氣新강가 성의 만물 빛깔 시인의 감정 일으키네 江城物色感詩人푸른 나무에 바람이 부니 그늘이 점차 사라지고 臨風碧樹陰將薄초여름 매미 더위에 지쳐 지저귐 거의 없네 病暑初蟬語未頻조금 취해 한낮에 누워도 뭔 상관이랴 微醉何妨傾晝日멋진 인연이라 앞 봄을 이을 만한데 勝緣且可續前春저녁 되어 조용히 회옹의 가르침 바라봤더니 晩來靜看晦翁訓가슴 속 깨끗해져 세속에서 멀리 벗어나네 脫灑胸衿逈出塵멀리 바라보니 뭇 신선 한 곳에 있고 遙望羣仙在一方십주84)의 진경이라 푸르고 아득하구나 十洲眞境正蒼茫마음이 밝은 달 따라 천고와 함께 하고 心隨明月同千古몸은 긴 바람을 타고 팔황을 달리네 身駕長風騖八荒세상길 험난한 일 많음을 본래 알았는데 世路從知多嶮巇인생은 무슨 일로 괴로이 미쳐 날뛰나 人生何事苦顚狂남쪽으로 와서 영주산 아래 다시 들어가 南來轉入瀛山下밤에 높은 누각에 올라 다시 향을 피운다 夜向高樓却炷香푸른 하늘 이슬 방울지고 달그림자 옮겨가니 露滴淸空月影移또 나그네에게 산골 마을에 머물 꿈 꾸게 하네 重敎旅夢寄山扉높은 누각에 가벼운 안개 서탑에서 생겨나고 樓高輕靄生書榻이른 가을에 추위 적어도 갈옷을 위협하는구나 秋早微凉劫葛衣가슴속 큰 뜻은 서까래만 한 붓에 떨어지고 肚裏壯心椽筆落술 안에 호탕한 기운 담아 술잔에 날린다 酒中豪氣羽觴飛함께 멋진 풍경 들어와 기쁨 끝없으니 同來眞境歡難極봉래산에 오신 님들 돌아가지 마시오 蓬島遊人且莫歸 勝地遨遊欲擺愁,如何却把世程憂?十年打蠹惟黃卷,萬樹聞蟬又素秋.蓁塞門庭難掃闢,雨侵牖戶孰綢繆.除非七七良辰節,蕩漾樽醪且未休.午夢忽醒秋氣新,江城物色感詩人.臨風碧樹陰將薄,病暑初蟬語未頻.微醉何妨傾晝日?勝緣且可續前春.晩來靜看晦翁訓,脫灑胸衿逈出塵.遙望羣仙在一方,十洲眞境正蒼茫.心隨明月同千古,身駕長風騖八荒.世路從知多嶮巇,人生何事苦顚狂?南來轉入瀛山下,夜向高樓却炷香.露滴淸空月影移,重敎旅夢寄山扉.樓高輕靄生書榻,秋早微凉劫葛衣.肚裏壯心椽筆落,酒中豪氣羽觴飛.同來眞境歡難極,蓬島遊人且莫歸. 비가……막을까 《시경(詩經)》 〈빈풍(豳風) 치효(鴟鴞)〉 에 치효새는 비가 오기 전에 뽕나무 뿌리를 물어다가 얽어서 새둥우리의 빈틈을 막는다고 한 내용을 전용한 것으로 미리 걱정거리를 막는다는 뜻이다. 십주 신선이 산다는 바다 가운데에 있는 열 곳의 섬, 곧 조주(祖洲)ㆍ영주(瀛洲)ㆍ현주(玄洲)ㆍ염주(炎洲)ㆍ장주(長洲)ㆍ원주(元洲)ㆍ유주(流洲)ㆍ생주(生洲)ㆍ봉린주(鳳麟洲)ㆍ취굴주(聚窟洲) 등을 말한다. 《海內十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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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 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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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생찬233) 【병자년(1936, 대한민국18)】 穆生贊 【丙子】 남쪽으로 떠나시는 목생 先生去楚,강남 가는 기러기 같으시니, 有若鴻擧.모르는 사람은 감주의 일로 알고 不知者醴,아는 이는 예법 때문인 줄을 알았네. 知者爲禮.목생이 이와 같이 乃若先生,도(道)를 위해 떠나가심은, 爲道而行.수사(洙泗) 성인의 선례 있으니 有同洙泗,사직의 제육(祭肉) 오지 않음에 以膰不至.기미를 본 밝은 철인(哲人) 見幾明哲,하루를 다 기다리지 않았네.234) 不俟終日.초연히 치욕을 비켜나니 超然免辱,세상 탁한 먼지 옥을 못 더럽히네. 塵不染玉.만류하던 저 신공(申公)과 백생(白生) 彼哉申白,얼마나 심한 치욕 당하였던가! 其恥何極.고원(高遠)한 목생과 견줘보면 視先生高,전혀 다른 부류였네. 殊類異曹.아아, 현철하신 목생 보며 嗟先生賢,천년 뒷 사람이 청렴한 뜻 세우네. 廉立來千.구천에서 선생 일어나 오신다면 如作九原,원컨대 내가 말 채찍 잡아드리리. 我願執鞭. 先生去楚, 有若鴻擧, 不知者醴, 知者爲禮。 乃若先生, 爲道而行, 有同洙泗, 以膰不至。 見幾明哲, 不俟終日, 超然免辱, 塵不染玉。 彼哉申白, 其恥何極, 視先生高, 殊類異曹。 嗟先生賢, 廉立來千, 如作九原, 我願執鞭。 목생찬 술 안 마신 목생(穆生)에 대한 찬송이다. 목생은 전한(前漢) 초 원왕(楚元王)의 현신이었는데, 원왕이 주연을 베풀 때는 목생이 술을 안 좋아하는 것을 알고 따로 감주[醴]를 내놓았다. 그런데 원왕의 손자가 왕이 되어 주연을 베풀면서 깜박 잊고 감주를 내놓지 않자, 목생은 "이제 떠나 가야겠다. 감주가 안 나온 것은 왕의 뜻이 태만해진 것이다." 하고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남쪽으로 떠나갔다. 그를 만류하던 동료 신공(申公)과 백생(白生)은 결국 죄수가 되어 심한 치욕을 당하였다. 《漢書 卷36 楚元王傳》 수사……않았네 수사(洙泗)는 중국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를 지나는 두 강물 이름인데, 공자가 고향과 가까운 이 지역에서 제자들을 가르친 것을 들어 공자와 유가(儒家)를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공자가 노(魯)나라의 사구(司寇)를 하던 중 교제(郊祭)에 참여하였으나 조정에서 제사에 쓴 고기[膰]를 보내오지 않자, 즉시 벼슬을 버리고 노나라를 떠났다는 이야기를 말한다.《孟子.告子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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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재 소휘식235) 공을 위한 찬 【을해년(1935, 대한민국17)】 晩齋蘇公【輝植】贊 【乙亥】 스스로 닦아 기룬 것은 修諸己者,진실한 효도와 우애이고, 孝友之實;하늘에서 받은 것은 得乎天者,특별한 자질이네. 姿質之異.희현당(希顯堂)236)ㆍ성균관에 이름이 높아 名敭於希顯、成均,사장(詞章) 짓기에 대적할 짝이 없었고, 無敵者詞章;인산(仁山)237)ㆍ간재(艮齋)와 벗을 맺어 交結於仁山、艮齋도(道)와 의(義)에 성실한 믿음 있었네. 有孚者道義.외로운 충정으로 나라를 걱정하며 憂國孤忠,비풍(匪風)과 하천(下泉)238) 슬피 노래하고, 發風泉之悲歌;세상의 도의를 부축하고자 고심하며 扶世苦心,서양 오랑캐의 신학(新學)을 배척하였네. 斥洋夷之新學.우뚝한 주장으로 옛 사람을 흠모하고 嘐嘐乎其古人之慕,간절한 정성으로 후진을 깨우쳤네. 惓惓乎其後進之覺.입으로 말하는데 그치지 않고 何啻口出,기쁜 마음으로 선(善)을 따라 닦았고, 休休焉好善之切;나이들어 늙는 줄도 모르고 不知老至,부지런히 도학 공부에 노력하였네. 孜孜焉求道之勤.물려받은 가르침을 해석하고 貽謨傳析,선대의 학업을 이어 책을 쓰니 荷世業著書,사문(斯文)의 큰 우익이 되었네. 垂羽翼斯文.이 모두가 기초한 바는 是蓋基礎,충(忠)과 신(信)의 강령이고 忠信綱領,성(誠)과 경(敬)의 아언(雅言)이니, 誠敬雅言,주자의 글과 율곡의 문집 朱書栗集,우리의 스승 여기 계시네. 吾師在此.이러한 까닭에 此其所以학문에 근원이 있고 學有自而덕이 훌륭하였음이리라! 德之盛也歟! 修諸己者, 孝友之實; 得乎天者, 姿質之異。 名敭於希顯ㆍ成均, 無敵者詞章; 交結於仁山ㆍ艮齋, 有孚者道義。 憂國孤忠, 發風泉之悲歌, 扶世苦心, 斥洋夷之新學。 嘐嘐乎其古人之慕, 惓惓乎其後進之覺, 何啻口出。 休休焉好善之切, 不知老至; 孜孜焉求道之勤, 貽謨傳析。 荷世業著書, 垂羽翼斯文, 是蓋基礎忠信綱領, 誠敬雅言, 朱書栗集, 吾師在此。 此其所以學有自而德之盛也歟! 소휘식 1837∼1910,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치수(致秀), 호는 만재(晩齋)이며, 완주군 용진면 출신이다. 1879년에 진사로 장원급제했으나 당시의 어지러운 정치를 개탄하며 세상에 나아가지 않았다. 희현당(希顯堂) 전라감사 김시걸(金時傑, 1653~1701)이 1699년(숙종25)에 전주(全州)에 세운 학당 이름이다. 인산(仁山) 익산 사람 소휘면(蘇輝冕)의 호이다. 1814~1889,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순여(純汝)이다. 어려서 문장으로 이름이 났으며, 홍직필(洪直弼)을 사사하였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과 전설시별제(典設寺別提)의 벼슬을 받았다. 비풍(匪風)과 하천(下泉) 《시경》의 편명으로, 둘 다 나라의 쇠망을 걱정하며 슬퍼하는 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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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 김형구270) 혼서 【임술년(1922)】 從子炯龜昏書 【壬戌】 마음을 주어 지란(芝蘭)의 벗을 맺고, 대를 이은 교분을 이루었던지라, 중매의 의논을 기다리지 않고, 만나서 얼굴 보고 송라(松蘿)의 혼인을 얽었습니다. 양가의 덕과 지위가 비슷하니, 어찌 온후한 말씀과 정성스런 폐백을 갖추지 않겠습니까?생각건대 존하의 차남 소생의 손녀는 덕스런 용모와 훌륭한 언사를 함께 갖추어, 구름 위 난새와 오동 숲의 봉황 같은 탁월한 자질을 지녔습니다. 제 중제(仲弟) 김봉술(金鳳述)의 아들 형구(炯龜)는 시서(詩書)와 예악(禮樂)의 경전 다 못 배워서 산야의 노루 사슴과 가깝습니다. 재주와 품성이 부족함을 혜량하시고, 부끄럽게 그에게 짝을 정해 주셨습니다. 예물의 풍부함과 검약함을 묻지 말아서 용문(龍門) 사람의 오랑캐 계칙271)을 잘 준수하고, 소박한 예물에 온 정을 다 담아서 번거로운 예법을 생략한 순후하고 예스러운 풍도를 완연히 보고자 합니다.딸이 제 집에 나아가고 아들이 아내를 맞이함을 완연히 보며 부모의 마음은 또 간절할 것이니, 양(陽)이 강(剛)으로 피우고 음(陰)이 유(柔)로 받음에, 복록의 샘물이 멀리 흐르리니, 두 가문의 경사가 여기에 있고, 만 대의 시초가 여기서 말미암을 것입니다. 우러러 낮은 정성을 아뢰오니 높으신 눈으로 굽어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心許而結芝蘭之契, 夙講世交, 面約而成松蘿之親, 不俟媒議。 旣德齊而地醜, 盍辭腆而幣誠? 伏惟令第二房孫女, 德容言功兼全, 卓矣雲鸞梧鳳之質。 澤述仲弟鳳述之子炯龜, 詩書禮樂幷闕, 幾乎山鹿野麋之儔, 諒才性之不侔, 愧配偶之是定。 豊約不問, 龍門夷虜之戒宜遵, 檏素盡情, 皮禮淳古之風宛覩。 女歸家, 男授室, 父母之心亦勤。 陽倡剛, 陰承柔, 福祿之源孔遠, 兩家之慶在是, 萬世之始從玆。 仰陳卑誠, 俯賜尊鑑。 김형구 1907~1978, 자는 극범(克範), 호는 농헌(農軒)이며, 김택술의 중제(仲弟) 김봉술(金鳳述)의 아들이다. 부인 전주최씨는 1906년 출생이고, 그 부친은 최장렬(崔長烈), 조부는 최병우(崔秉宇)이다. 용문……계칙 《소학》〈가언(嘉言)〉편에 왕통(王通)이 '혼인 할 때 재물을 논하는 것은 오랑캐의 짓이다. [婚娶而論財, 夷虜之道也。]'라고 하였다. 왕통(王通)은 수나라의 용문(龍門) 출신의 대학자로 시호 문중자(文仲子)로 통칭되며, 당나라의 현신 위징(魏徵)과 방현령(房玄齡)의 스승이고, 시인 왕발(王勃)의 조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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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집 서구272)의 자사 【갑신년(1944)】 黃舜輯【瑞九】字辭 【甲申】 순(舜)이 천자가 되니 舜爲天子,다섯 서옥(瑞玉)이 다 모였네273) 五瑞畢輯,어떻게 그것을 이루었을까 何以致之,제 몸에 성스런 덕을 지녀서네. 身有聖德.높고도 높은 그 덕 維德巍巍,그 발자취 누가 능히 뒤밟을까? 孰能追跡,안씨(顔氏) 집에 한 아들 있어 有顔氏子,순(舜)에 닿을 만 했다 하고, 謂舜可及.또 저 추나라의 맹씨(孟氏)는 亦粤鄒孟,순(舜)처럼 구휼하라 하였네.274) 如舜是恤,내 벗 황서구(黃瑞九)가 黃友瑞九,순집(舜輯)이라 자를 붙이니 舜輯字曰,그 자질이 아름다운데다 旣美者質,공부에도 부지런한데 亦勤于學,마음에 그리는 바를 보건데 觀厥所慕,안자 맹자가 갔던 길과 같네. 顔孟同轍.그런데 근본의 궁구가 없이 然不究本,한갓 사모함만으로는 얻지 못하니 徒慕無得,그 근본은 무엇인가? 其本伊何,정일(精一)을 이루어 惟精惟一,준철ㆍ문명ㆍ온공ㆍ윤색하고 哲明恭塞,시중(時中)을 잡으라. 時中之執.정일(精一)은 무엇인가 精一伊何,진리를 알고 실지를 밟음이네 知眞踐實,어떻게 그것을 배울까 我何以學,성의(誠意)하고 격물(格物)하라 誠意格物,성(誠)과 격(格) 이루고 나면 旣格旣誠,그것을 일러 상달(上達)이라 하니 是謂上達,안자의 바램과 맹자의 근심이 顔願孟憂,얻어지고 풀릴 날이 멀지 않으리라. 酬解有日.이로써 순(舜)처럼 집(輯 모음)하는 玆爲舜輯,미묘한 비결을 봉정하니 奉呈要訣,일념으로 두루 돌아보며 一念周旋,하나의 소홀함도 없어야 하리라. 宜無敢忽. 舜爲天子, 五瑞畢輯, 何以致之, 身有聖德。 維德巍巍, 孰能追跡, 有顔氏子, 謂舜可及。 亦粤鄒孟, 如舜是恤, 黃友瑞九, 舜輯字曰。 旣美者質, 亦勤于學, 觀厥所慕, 顔孟同轍。 然不究本, 徒慕無得, 其本伊何, 惟精惟一。 哲明恭塞, 時中之執, 精一伊何, 知眞踐實。 我何以學, 誠意格物, 旣格旣誠, 是謂上達。 顔願孟憂, 酬解有日, 玆爲舜輯, 奉呈要訣。 一念周旋, 宜無敢忽。 황순집 서구 1896~1966,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순집(舜輯)이다. 구대조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의 《이재속고(頤齋續藁)》와 팔대조 만은(晩隱) 황전(黃㙻, ?~1771)의 《만은유고(晩隱遺稿)》를 간행하였으며, 고창군 흥덕현에서 독립운동 자금조달과 민족 교육을 위한 흥동장학회(興東獎學會)의 활동에 참여하였다. 다섯 서옥……모였네 다섯 서옥[五瑞]은 천자가 공(公)ㆍ후(侯)ㆍ백(伯)ㆍ자(子)ㆍ남(男)의 다섯 등급의 제후에게 반사(頒賜)한 신분표시의 옥패이다. 여기서는 전국 각 지역을 다스리는 크고 작은 부족장들이 모두 와 복종하며 신하가 되었다는 말이다. 안씨(顔氏) 집……구휼하라 하네 《맹자》〈등문공(滕文公)〉편에서 안연(顔淵)은 "순임금은 어떤 사람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고 말하고, 〈이루(離婁)〉편에서 맹자(孟子)는 "순임금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다.……순임금과 같이 하면 그만이다."라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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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지으며 은거한 것에 대한 설 【1947년】 耕隱說 【丁亥】 내가 부풍(扶風)의 부곡(富谷)을 지나다가, 벗 정덕중(鄭德重)이 거처하는 곳에 편액을 했는데 '경은(耕隱)'으로 한 것을 보고 묻기를 "함께 짝이 되어 밭을 갈았던 장저(長沮)와 걸익(桀溺)150)은 옛날에 은거할 때에 중도에 지나치고 정도를 잃은 자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이들을 사모하는가."라고 하니, 주인이 놀라서 말하기를 "내가 창평(昌平)에서 와서 이 땅에서 농사지은 지가 이미 30년이 되었으니, 다만 사실을 기록한 것은 모두 우연한 뜻이 아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장저와 걸익에 혐의가 있다면, 빨리 이를 없애겠다."라고 하였다.이에 내가 말하기를 "상심하지 말라. 본래 일에는 이름은 같지만 실상이 다른 경우가 있으니, 동일한 학문이지만 위기(爲己)와 위인(爲人)151)의 구분이 있고, 동일한 인정(仁政)이지만 행동으로 하고 거짓으로 하는 다름이 있다. 그러니 저들이 은거하여 농사지으며 조수(鳥獸)와 함께 무리지어 산 것이 그대가 은거하여 농사지으면서 부모를 섬기고 자녀를 기르는데 책임을 다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겠는가.게다가 지금 자네는 피로하여 이제 막 야전(野田)의 농사를 그만두고, 연전(硯田 문필)의 농사에 전념하여 문청공(文淸公)152)의 가학(家學)을 이엇다. 그리고 마침 나라가 새롭게 되었으니, 마음과 힘이 쇠하지 않고 평소의 뜻을 굳세게 실천하여 포부를 펼칠 날이 있다면, 어찌 일찍이 공부한 예학(禮學)으로써 상하를 분별하여 백성의 마음을 안정시키는153) 대종백(大宗伯 예조 판서)의 다스림을 도와서 이루지 못할 줄을 알겠는가. 만일 이와 같이 된다면 비록 오랫동안 경(耕)에 은거하고 싶어도 그렇게 될 수 없으니, 그대로 써두고 기다려라."라고 하였다. 余過扶風之富谷, 見鄭友德重扁居而以耕隱, 問之曰: "耦耕沮溺, 古隱之過中失正者, 子何慕焉?", 主人瞿然曰: "吾自昌平來, 耕玆土已三十年, 只以記實, 幷非偶意. 然如其嫌於沮溺也, 請亟去之.". 余曰: "毋傷也. 事固有名同而實異者, 同一學問而有爲己爲人之分, 同一仁政而有以行以假之殊, 彼之隱耕而鳥獸同群, 何與於吾之隱耕而事育盡責乎? 且子今亦倦矣, 方舍野田之耕, 而專硯田之耕, 用紹文淸家學, 適玆邦國維新, 心力不衰, 壯行素志, 展步有日, 安知不以所嘗用功於禮學者, 助成大宗伯辨上下定民志之治也乎? 苟如是也, 雖欲久隱於耕, 亦不可得矣, 請書而俟之." 장저(長沮)와 걸익(桀溺) 춘추 시대 초나라 은자(隱者)이다. 이들에 관한 내용이 《논어》 〈미자(微子)〉에 나온다. 위기(爲己)와 위인(爲人) : 《논어》 〈헌문〉에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을 위한 공부를 하였는데, 지금의 학자들은 남을 위한 공부를 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 문청공(文淸公) 정철(鄭澈, 1536~1593)의 시호이다.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이다. 우의정, 좌의정, 전라도체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부친은 돈녕부판관 정유침(鄭惟沈)이다. 상하를 …… 안정시키는 《주역》 〈이괘(履卦) 대상전(大象傳)〉에 "위의 하늘과 아래의 못이 이(履)이니, 군자가 이를 보고 상하를 분별하여 백성의 마음을 안정시킨다.[上天下澤履, 君子以, 辨上下, 定民志.]"라고 한 데서 나온 말로, 상하존비(上下尊卑)의 위계질서를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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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경에게 답함 기미년(1909) 答朴受卿 己酉 오늘 아침은 새해의 첫 번째 길일입니다. 하늘에는 삼양(三陽)이 회태하여25) 만물이 새롭게 바뀌는 때이고, 나라에는 인정(仁政)을 베풀어 그 명을 새롭게 하는 때이니, 인사에 있어서도 어찌 과실을 뉘우치고 반성하여 그 덕을 스스로 새롭게 하는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형은 평소에 감백(甘白)의 자질로 화채(和采)의 수식을 더하여26) 문학과 행실을 겸비하고 명성과 실지가 모두 융성하여 사우(士友)의 기대가 참으로 작지 않습니다. 이번에 실수한 바는 평소의 말하고 행동하는 것과 매우 달랐으니, 이에 연성(連城)의 백옥27)에 하나의 하자가 있게 되었습니다. 완전한 덕을 갖춘 사람이 아니면 실수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재아(宰我)는 공자 문하의 십철(十哲)이면서도 오히려 상기(喪期)를 단축하고 취렴(聚斂)하는 실수가 있었으니,28) 하물며 나머지 사람들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들의 스스로 수행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이것에 핑계를 대고서 해될 것이 없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통렬히 옛 과실을 징계하여 새로운 덕으로 옮겨가도록 해야 합니다.형의 편지를 보니, 후회하는 말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왔으니 스스로 반성하는 도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상심하고 기운이 꺾인 뜻이 많고, 힘써 닦아서 옮겨서 나아가려는 기운이 적으니, 이것은 타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또한 형의 실수는 형의 연고로 그런 것이 아니고 부친의 명을 감히 어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도로써 부친을 깨우칠 수 없어서 부친의 명령을 따르는 효도를 면치 못하였으니, 이것이 실수를 한 까닭입니다. 그런데 장차 이것에 얽매어 부끄러워하고 한탄만 하다가 마침내 나아가지 못하고 그칠 뿐이겠습니까? 아니면 장차 더욱 다리 힘을 씩씩하게 하여 무거운 짐을 지고 멀리 간 뒤에 그치겠습니까. 원컨대 형은 하늘의 해에 맹세하고 백배로 힘을 써서 스스로 그 덕을 새롭게 하여 옛날의 허물을 능히 고친다면, 동우(東隅)에서 잃은 것을 장차 상유(桑楡)에서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29) 힘쓰고 힘쓰기 바랍니다. 今朝新年第一吉日也.在天則爲三陽回泰,萬物賁新之時; 在邦國則爲發政施仁,維新其命之會; 其在人事,豈不爲悔過修省自新厥德之機耶? 兄素以甘白之質,加以和采之飾,文行兼備,名實俱隆,士友之期待,實非淺淺地也.今此所失,殊異乎平日之云爲,於是乎連城之璧,有一點之瑕矣.人非成德,不能無失.故宰我以孔門之十哲,尚有短喪聚斂之失,况餘人乎? 然在吾人自修之道,則不可諉之於此而以爲無傷,只當痛懲舊過,以遷新德可也.竊觀兄書 怨艾之辭,出於肺肝,可謂得自修之道矣.但隕廓沮喪之意多,淬礪遷進之氣少,此不當然也.且兄之所失,非兄之故,出於親命之不敢違也.不能喻父於道,而未免從親令之孝,此其所以爲失也.其將坐此而羞愧憂歡,遂止不進而已乎? 其將益壯脚力,任重致遠而後已乎? 願兄指天誓日,百倍用功,使自新之德,能改舊愆,則東隅之失,將復有桑榆之收矣.勉旃勉旃. 삼양(三陽)이 회태(回泰)하여 신년(新年)을 축하하는 말이다. 10월의 순음(純陰)에서 한 달이 지날 때마다 양효(陽爻)가 하나씩 살아나서, 1월이 되면 양효가 셋이 생겨 태괘(泰卦)가 되는데, 이는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며 음(陰)이 소멸하고 양(陽)이 신장(伸長)하여, 길형(吉亨)의 상(象)이 있다. 그러므로 신년을 축하하는 말로 쓰인다. 감백(甘白)의……더하여 충신(忠信)한 자질로 예의를 익혔음을 말한다. 《예기(禮記)》 〈예기(禮器)〉에 "단맛은 모든 맛의 근본이라서 백미(百味)를 조화시키고, 흰색은 모든 색의 근본이라서 어떤 채색이나 받아들인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직 충신한 사람이라야 예를 배울 수 있는 것이다.[甘受和, 白受采, 忠信之人, 可以學禮]"라고 하였다. 연성(連城)의 백옥 값이 성(城) 몇 개와 대등한 옥이란 말이다. 전국 시대에 조(趙) 나라 혜문왕(惠文王)이 화씨벽(和氏璧)을 구하여 얻었는데, 진(秦) 나라 소왕(昭王)이 듣고서 조왕(趙王)에게 사람을 보내어 열다섯 성과 바꾸기를 청했었다. 《사기(史記)》 〈염파인상여열전(廉頗閵相如列傳)〉에 내용이 보인다. 재아(宰我)는……있었으니 《논어(論語)》 〈양화(陽貨)〉에, 재아가 어버이의 복을 1년만 입기를 청하자 공자가 책망하며 "자식이 태어나서 3년이 지난 뒤에야 부모의 품을 벗어나게 된다. 삼년상은 온천하의 공통된 상이다.(子生三年然後, 免於父母之懷, 夫三年之喪, 天下之通喪也.)"라고 하였다. 《논어(論語)》 〈선진(先進)〉 "계씨가 주공보다 부유하였는데도 염구가 그를 위해 세금을 많이 거두어 재산을 늘려 주었다.[季氏富於周公, 而求也爲之聚斂而附益之]"라고 하였다. 동우(東隅)에서……것입니다 《후한서(後漢書)》 〈풍이열전(馮異列傳)〉에 "동우에서 잃었으나 상유에서 수습한다.(失之東隅, 收之桑楡.)"라고 하였다. 동우(東隅)는 동쪽 해가 뜨는 곳이니 젊은 시절을 말하고, 상유(桑楡)는 서방 해가 지는 곳으로 만년(晩年)을 비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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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에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 것에 대한 변론 【1940년】 不得罪於巨室論 【庚辰】 맹자가 말하기를 "거실(巨室 대신의 집안)에 원망을 사지 말아야 한다.258)"라고 하였는데, 주자는 이를 해석하여 "원망을 산다는 것은 몸이 바르지 못하여 원망과 노여움을 사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등퇴암(鄧退菴 등림(鄧林))은 이를 해석하여 "원망을 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아 원망을 사지 않는 것을 이르고, 법을 왜곡하여 받드는 것이 아니다.259)"라고 하였다.그런데 지금 선비들은 그렇지 않으니, 사문(斯文)의 시비(是非)에 대해 이미 마음속으로 그 곡직(曲直)을 알고 있지만 또 다시 때로 말과 얼굴빛에 나타내면서 곧바로 번번이 핑계를 대며 말하기를 "맹자가 거실에 원망을 사지 말라고 이르지 않았던가. 가령 저들이 바르지 않고 잘못되었을지라도 나이가 많고 박식하며 패거리가 많으니, 또한 사림(士林) 가운데 거실이다. 내가 어떻게 저들에게 원망을 사겠는가."라고 한다.아! '거실', '거실'이 어찌 아버지와 스승보다 높기에 아버지와 스승은 버릴 수 있고 거실은 버려서는 안 되겠는가. 이는 바로 그 자신을 바르게 하지 않으면서 원망과 노여움을 피하고, 정리(正理)를 버리면서 원망을 사지 않으며, 법을 왜곡하면서 거실을 받드는 것이니, 이러한 것이 어찌 맹자의 뜻이겠는가. 성인의 가르침을 가지고 이를 아름답게 포장하여 자기의 사사로움을 이룬다면, 그 죄가 어찌 다만 성인을 업신여기는 것일 뿐이겠는가. 또 어찌 이러한 사람에 대해서 선비답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孟子有言: "不得罪於巨室.", 朱子釋之曰: "得罪, 謂身不正而取怨怒也.", 鄧退菴解之曰: "不得罪, 謂合理而不致怨, 非曲法以奉之也.". 今之士子則不然, 於斯文是非者, 旣心知其曲直矣, 亦復時見於辭色, 而旋輒諉之曰: "孟子不云乎! 不得罪於巨室. 雖使彼曲且非焉, 年長也, 識博也, 黨衆也, 則亦士林中巨室, 我何以得罪於彼也?". 嗚呼! 巨室巨室, 豈其尊於父師者, 而父師可棄, 巨室不可貳乎? 此乃不正其身而避怨怒, 舍正理而不致怨, 曲法而奉之也, 是豈孟子之意哉? 將聖訓而美之以濟己私, 其罪豈但爲侮聖乎? 於斯人也, 又何足責以士子? 맹자가……한다:《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나온다. 등퇴암(鄧退菴 등림(鄧林))은……아니다:이는 등림의 말이 아니고, 주희에게 수학한 진식(陳埴, ? ~ ?)의 《목종집(木鐘集)》 권2 〈맹자〉에 나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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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규 【1944년】 家規 【甲申】 제사(祭祀)는 자손의 정성을 모아 조상의 신령을 이르게 하는 것이니, 자손의 행위는 항상 조상에게 명을 듣는 것처럼 해야 한다. 이는 바로 인륜의 궁극(窮極)이고 가정의 대관(大關 매우 중요함)이기 때문에 정성껏 제사 지내면 자손이 번창하고, 정성 없이 제사 지내면 자손이 쇠퇴하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사당(祠堂)은 제사 지내는 장소이니, 정성껏 제사 지내지 않을 수 없다면 사당을 세우지 않아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군자가 장차 궁실(宮室)을 지으려고 할 때 먼저 사당을 세우니, 매우 가난할지라도 기필코 힘을 다해 세워야 하고, 거실 한쪽 구석의 벽장에 사판(祀版 신주(神主))을 구차하게 안치해서는 안 된다.제사는 시제(時祭)보다 중요한 것이 없으니 비록 가난할지라도 시제를 지내야 하지만, 전혀 어쩔 수 없는 경우라면 봄과 가을에 두 번 행하는 것도 괜찮다. 사당의 삭망참(朔望參)260)은 만일 가난이 심하면 옛날에 '사는 월반전(月半奠)이 없다.261)'라고 하는 예에 따라 삭참만 행해도 괜찮다.사당의 신주를 받드는 사람은 새벽마다 일찍 일어나 배알(拜謁)하는 예를 행한 뒤에 집안사람들에게 각자 자기의 일을 행할 것을 명한다.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살펴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 인사를 올리는 것은 자손이 부조(父祖)를 섬기는 간소한 예절로 본래 큰일이 아니었는데, 근대 이후에 윤리가 땅에 떨어져 이를 행하는 자도 매우 적으니 매우 한심하다. 이러한 것도 행하지 않으면 어찌 자손이라 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경계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이를 행하되 새벽에 주인이 사당에 배알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한다.《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제사는 반드시 부부가 친히 지내야 한다.262)"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풍속은 상중에 제사 지낼 때 이외에는 주부(主婦)가 아헌례(亞獻禮)를 행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이는 본받아서는 안 되니 더욱 반드시 예에 따라 행해야 한다.상중에 예를 행하지 않으면 어떻게 사람의 자식이라고 이를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반드시 '너무 가난하여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예를 행할 수 없다.'라고 하는데, 이는 말이 되지 않는다. 사농공상(士農工商)에게는 각자 자신의 업(業)이 있으니, 선비 이외에 어떻게 최질(衰絰)263)을 하고 흙덩이처럼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 다만 마음으로 슬퍼하면서 스스로 예법을 범하지 않으면 이는 괜찮다. 음악을 듣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에 이르러서는 인류가 아니라고 이르더라도 괜찮다. 사마온공(司馬溫公)이 "나라에서 바로잡는 법이 있다.264)"라고 말하였으니, 이는 다시 논하지 않겠다.관혼상제(冠婚喪祭)는 모두 대사(大事)인데 속어에서 다만 혼인만을 대사라고 일컫는 것은 진실로 이치가 있으니,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구혼(求婚)의 방법은 온공(溫公)이 논한바 '사위나 며느리의 성품과 행실 및 가법(家法)이 어떠한가를 먼저 살펴야 하고, 그 부귀만을 사모해서는 안 된다.265)'라는 것과 같은 등의 설은 더할 것이 없으니, 이는 마땅히 따라서 행해야 한다. 그리고 선대의 문벌과 덕행이 없고 한갓 부귀한 자에 이르러서는, 당장에 소소한 칭찬이 있을지라도 절대로 함께 혼인하지 않는 것이 지극히 옳다.사람들은 반드시 혼인할 때 생기(生氣)를 보아야 하고 그 선대를 묻지 말아야 한다고 하니, 이른바 생기라는 것은 자손이 번성하고 식도(食道)가 넉넉한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아! 일반적인 집안과 한미한 집안은 생기에만 전념하는데 사대부 집안은 사기(死氣)를 모으는구나.나는 부부란 두 성(姓)의 합이라고 들었고 같은 성의 합이라고는 듣지 못했다. 우리나라가 신라와 고려 이후부터 지금까지도 동성끼리 혼인하여 오랑캐의 풍속을 바꾸지 못한 것은 진실로 통한스러운 일이다. 나라에 이미 금한 것이 있는데 선배들은 또 무엇 때문에 함부로 행하였단 말인가. 내가 혼인을 주관한 이후 절대 행하지 않아 이미 가법이 되었으니, 만일 뒷날 자손들이 준수하지 않으면 이는 그 부조(父祖)의 죽음을 다행스럽게 여기면서 스스로 오랑캐로 돌아가는 것을 달게 여기는 것이다.장지(葬地)는 무덤을 파내어 팔아넘기는 산을 매입하지 말고【일찍이 이미 파간 것은 논할 것도 없다.】, 절대로 다른 사람의 선산이나 금한 땅에 투장(偸葬)하지 말며, 평장(平葬)하는 것은 시신을 버리는 것과 같으니 이를 '적자(賊子)'라고 한다.선대의 지장(誌狀)266)을 남에게 함부로 맡기지 말라는 것은 선사(先師 간재)의 가규(家規) 중의 말인데, 진실로 이치가 있는 말이기 때문에 이를 표출하였다.종손(宗孫)은 조상의 사당을 받드는 자이니, 종손을 공경하는 것은 조상을 존중하는 것이다. 무릇 생전의 봉양과 사후의 장례에 관계된 것은 모두 마땅히 종손을 먼저 하고 지자(支子)267)와 서자를 뒤에 해야 하며, 언어와 배읍(拜揖)하는 것도 한 층 더 공경해야 한다.서자와 서손도 똑같이 내 부조(父祖)의 혈기를 받았으니, 마땅히 천시하고 소원하게 해서는 안 된다. 명분(名分)은 하늘이 정한 것이고 사람의 사사로움을 쓴 것이 아니다. 따라서 대우하는 예절도 너무 헤아림이 없어서는 안 되니, 만일 그들에게 예법을 범하게 하면 결국 적자를 능멸하게 될 것이다.빈궁(貧窮)함을 핑계하여 자식에게 문자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그 자식을 해치고 스스로 아버지로서의 도리를 끊는 것이니, 어찌 그 자식이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행하여 그 아버지를 해치지 않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종족의 남녀가 내외를 통하는 한계는 삼종(三從 8촌) 숙질(叔姪)의 처에 이르고, 사종(四從 10촌) 수숙(嫂叔)268)에서부터는 서로 보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지금 세속에서 출가한 고모, 손위 누이, 손아래 누이, 딸이 죽은 뒤 그 남편이 재취(再娶)한 처에 대해 '아고(芽姑)', '아자(芽姊)', '아매(芽妹)', '아녀(芽女)'라 이르고 서로 보면서 왕래가 빈번하며, 그들이 또 그 남편의 전처(前妻)의 친척들을 부르는데도 부형(父兄)과 제질(弟姪)로써 하여 부끄러움이 없다. 심한 경우 친정으로 보면서 해마다 빠짐없이 찾아가 문안 인사를 하는 자도 있어서, 그 망령되고 도리에 어긋나며 추하고 무람없음이 더할 수 없이 심하니 절대로 경계해야 한다.붕우(朋友)는 10년 이상이 많으면 자(字)를 불러서는 안 되지만 나이가 뒤이면 한 번 절해도 괜찮다. 《예기(禮記)》에 "10년 이상이면 형처럼 섬겨라.269)"고 하지 않았는가.갚을 수 없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남들이 보지 않은 곳에서 예를 삼가라. 이는 음덕과 지극히 착한 행실이 되어 하늘이 반드시 도와줄 것이니,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祭祀者萃子孫之誠, 致祖考之神靈, 而子孫所爲, 常若聽命於祖考然. 乃人倫之究竟, 有家之大關, 故祭祀誠則子孫昌, 祭祀無誠則子孫衰替, 可不愼哉?祠堂者祭祀之所也, 祭祀不可不誠, 則祠堂不可不建. 故君子將營宮室, 先立祠堂, 雖甚貧, 期於極力營建, 不可苟安祀版於居室一隅之壁龕也.祭莫重於時祭, 雖貧, 當行時祭, 萬不得已, 而只行春秋二次爲可. 祠堂朔望參, 若貧甚則依古者士無月半奠之禮, 只行朔參亦可.奉祠堂之主人, 每晨早起, 行拜謁禮, 然後命家衆各執其業.昏定晨省, 子孫事父祖之疏節, 本不足爲大事, 而近世以來, 倫理墜地, 行此者亦絶少, 甚可寒心. 此猶不行, 安得爲子孫? 必須惕念行之, 而當先於主人晨謁之前.《禮》云: "祭也者必夫婦親之.", 今俗於喪中祭以外, 主婦行亞獻禮者甚鮮. 此不可效, 尤必須依禮行之.喪不執禮, 何可謂人子? 人必稱貧窮服役, 不能執禮, 此不成說. 士農工商, 各有其業, 士以外, 安得衰絰塊坐? 但心有哀戚, 而自不犯禮防則斯可矣. 至於聽樂嫁娶者, 雖謂之非人類可也, 司馬溫公固曰: "國有正法.", 此不復論.冠婚喪祭, 俱是大事, 而俗語獨稱婚姻爲大事者, 良亦有理, 其不可以盡心乎? 求婚之方, 如溫公所論察壻婦性行及家法何如, 勿苟慕其富貴等說, 蔑以加矣 此當遵行, 至於無先世閥德而徒然富溫者, 目下雖有小小稱譽, 切勿與婚, 至可.人必稱婚姻, 當觀生氣, 不問其先世, 所謂生氣者, 指子孫繁衍, 食道豊裕而言也. 噫! 常微之家, 獨專生氣, 而士夫之家, 獨萃死氣乎!吾聞夫婦二姓之合, 未聞同姓之合也. 東方之自羅麗以降至今, 猶有同姓之婚, 而未變夷狄之俗者, 實所痛恨. 國旣有禁, 先輩亦胡爲而冒行也? 吾自主婚以來, 截然不行, 已成家法, 後日子孫, 若不遵守, 是幸其父祖之死而自甘夷狄之歸也.葬地勿買掘塚賣渡之山【曾已掘去者勿論.】, 切勿偸葬於他人先山當禁之地, 至於平葬者, 與棄尸同, 名之曰賊子.先世誌狀, 毋得妄託於人, 此是先師家規中語, 而實爲理到者, 故表而出之.宗孫是奉祖廟者, 敬宗孫, 所以尊祖也. 凡干生養死送, 皆當先宗孫而後支庶, 至於言語拜揖, 亦當一層加敬.庶子庶孫亦同受吾父祖血氣, 不當賤而疎之, 乃其名分, 天之所定, 非人之容私也. 待遇之節亦不可太沒斟量, 使之越防犯閑, 竟至凌嫡也.托於貧窮而不敎子以文字者, 是賊其子, 而自絶於父道也, 安可望其子之行子道, 不賊其父乎?宗族男女通內外之限, 當至於三從叔姪之妻, 自四從嫂叔不許相見.今俗於出嫁姑姊妹女死後, 其夫再娶之妻謂之芽姑芽姊芽妹芽女, 相見而往來頻煩, 彼又呼其夫前室之黨, 而父兄弟姪而無愧, 甚則視爲親庭, 而課歲覲寧者有之, 其爲妄悖醜褻莫甚矣, 切宜戒之.朋友十年以上, 不可呼字, 而歲後一拜可也. 《禮》不云: "十年以上, 則兄事之."乎?施惠於人所不報之地, 謹禮於人所不見之處. 是爲陰德至行, 天必佑之, 可不勉哉? 삭망참(朔望參) 삭망참례(朔望參禮)로, 초하루와 보름에 올리는 간단한 제사이다. 사는 …… 없다 "사는 보름에 은전을 올리지 않는다.[士月半不殷奠]"라는 말이 《의례(儀禮)》 〈사상례(士喪禮)〉에 나온다. 제사는 …… 한다 《예기》 〈제통(祭統)〉에 나온다 최질(衰絰) 상중에 입는 삼베옷을 말한다. 나라에서 …… 있다 사마온공이 말하기를 "상중에 있으면서 음악을 듣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자는 나라에서 바로잡는 법이 있다."라고 하였다. 《소학》 〈가언(嘉言)〉 사위나 …… 된다 사마온공이 《소학》 〈가언〉에서 "무릇 혼인을 논의할 때에는 마땅히 그 사위나 며느리의 성품과 행실 및 가법(家法)이 어떠한가를 먼저 살펴야 하고, 그 부귀만을 사모해서는 안 된다.[凡議婚姻, 當先察其婿與婦之性行及家法何如, 勿苟慕其富貴.]"라고 하였다. 지장(誌狀) 지문(誌文)과 행장(行狀)을 말한다. 지자(支子) 맏아들 이외의 아들이다. 수숙(嫂叔) 형제의 아내와 남편의 형제를 이른다. 예에 …… 섬기라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나이가 배가 더 많으면 아버지처럼 섬기고, 10년이 더 많으면 형처럼 섬기며, 5년이 많으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되 조금 뒤처져서 따라간다."라고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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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선조의 자취에 대해 생각하고 물음 先蹟思問 고려의 제도에서 군사(郡事)270)는 군수(郡守)와 같은 것이 아니라 10여 개, 혹은 7, 8개의 군을 도맡아 다스린다. 군에는 본래 수령이 있으니, 호남의 경우 익산 군사(益山郡事), 영광 군사(靈光郡事 ), 고부 군사(古阜郡事) 등이 있고, 관직은 본조(本朝)의 관찰사(觀察使)와 같아 중임(重任)인데, 《명은집(明隱集)》271)에서 관직이 낮다고 한 것은 고증을 잘못한 것이다.임오년(1882) 족보272)에 "첨지공(僉知公)273)은 세종조(世宗朝)에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이시애(李施愛)의 난274) 때에 재능으로 선발되어 다시 무과에 합격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시애의 난은 세조조(世祖朝)에 있었으니 임오년의 족보에서 세종이라 이른 것은 오류이고, 정미년(1907) 족보에서 이를 답습했으니 잘 살피지 못한 잘못이 있다.임오년 족보에 "매죽당공(梅竹堂公)275)은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이에 성종(成宗)이 말하기를 '이와 같은 사람은 만일 그 고결함을 드러내주지 않으면 일세의 유풍(儒風)이 장차 사라질 것이다.'고 하고, 매(梅)와 죽(竹)을 그리고 옥배(玉杯)를 가져다가 그 모양을 새겨서 하사하며 '우리나라에 군자는 오직 김종뿐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계사년(1833) 족보에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계사년 족보가 나오기 130년 전에 공과의 시간적 거리가 매우 멀지 않은 쌍백당(雙柏堂) 이공(李公)276)이 지은 묘갈명에도 보이는 것이 없다. 이러한 내용이 만일 사실이라면 어찌 묘문(墓文)에 실리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그래서 내가 정미년 족보를 편찬할 때에 문중의 장로들께 아뢰고 삭제하였다.매죽당공의 배위(配位)는 채씨(蔡氏)이고 외조부는 교리 남평인 조휘(曹彙)277)인데, 계사와 임오 두 족보에서 대제학 박중림(朴仲林)278)으로 기록하였고, 주부공(主簿公)은 배위가 조씨(趙氏)이고 외조부는 생원 남원인 양균(楊均)인데, 영응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279)으로 기록하였다. 그래서 채씨와 조씨의 두 족보를 조사해보았는데, 박공 중림은 채씨의 부친인 채석경(蔡碩卿)280)의 외조부이고, 영응대군은 조씨의 부친인 조숙기(趙淑琦)의 외조부였으니, 이는 진실로 살피지 않고 잘못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드시 위로 일세(一世)를 건너 취록(取錄)했는데 두 곳이 모두 똑같았으니, 어쩌면 그리도 묘한가. 이는 혹여 명위(名位)가 드러난 사람을 잠깐 보고 자기도 모르게 흠모하여 상하의 세계(世系)를 살피지 못한 것일 것이다. 박공은 정미년 족보에서 이미 개정(改正)했는데, 영응대군은 아직 미치지 못했다.참봉공(參奉公)281)의 배위는 청주 김씨이고, 부친은 진사 김경일(金敬一)282)이다. 일찍이 함평 이씨(咸平李氏)의 세계(世系)를 보니, 죽음 만영(竹陰萬榮)283)과 죽곡 장영(竹谷長榮)284)의 부친 이석(李碩)에게 사위 김경일이 있었는데 연대가 어느 정도 맞았다. 그래서 정미년의 족보를 편수하는 날에 김씨의 외조를 함평 이석으로 기록하였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이씨의 세계에서 김경일의 본관을 청주로 기록하지 않았으니, 반드시 그러한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그래서 뒤에 다시 집에 보관하고 있는 족보에서 산정(刪正)하였을 뿐이다. 그러다가 고창군 조산리(造山里)에 사는 김자순(金子順)이 청주 김씨라는 것을 듣고 오직 이 일만을 위하여 가서 그 족보를 보았는데, 이는 파보(派譜)이고 대동보(大同譜)가 아니었기에 고증할 수 없었으니 한탄할 만하다.직절공(直節公)285)의 부친 휘 장(鏘)은, 임오년 족보에서 '남대(南臺)에 선발되었다.'고 하였는데 정미년 족보에서 이를 답습하였으니, 이 4글자[被選南臺]는 무엇을 이른 것인가. '대(臺)'라는 것은 사헌부(司憲府)이니, 남대는 문과로 출신(出身)하지 않고 은일(隱逸)과 남행(南行 음직(蔭職))으로 사헌부의 관직을 삼는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는 남대를 매우 중시하였으니, 인가(人家)에 드물게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대관(臺官)이라면 장령(掌令), 지평(持平), 집의(執義), 감찰(監察) 같은 것에 대해 어째서 명칭을 근거하여 바로 쓰지 않고, 다만 '선발되었다.[被選]'고만하여 사람들이 속으로 깊이 생각하게 하는가. 어쩌면 단지 선망(選望)에만 들고 실직(實職)을 얻지 못한 것인가.직절공의 아들 휘 찬(瓚)의 '영백(嶺伯 경상도 관찰사)'과 '호참(戶參)'이 또한 임오년 족보에 처음 나오는데, 정미년 족보에서 이를 답습했다. 이전 족보에 있는 벼슬을 나중의 족보에 기록할 때에는 반드시 그것이 근거한 문자를 분명히 쓰고 난 뒤에야 후대 사람들의 의심이 없을 것인데, 지금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서계공(西溪公)286)의 손자 좌망공(坐忘公)287) 휘 현(灦)은 자가 호호(浩浩)인데, 임오년 족보에 사계(沙溪) 김 선생(金先生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이는 반드시 《우암집(尤菴集)》에 정선 군수(旌善郡守)를 대신하여 김현(金灦)이 사계(沙溪) 선생의 제문을 지었다는 제목이 있는 것을 보고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는 족보의 기록에 '선생의 장례에 글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나 역시 젊었을 때 《우암집》을 보고 임오년 족보의 기록을 믿어 죽계(竹溪)288) 선조의 묘갈(墓碣)을 참판 김학수(金鶴洙)289) 공에게 부탁하던 날, 좌망공이 사계를 사사한 일을 글에 실기에 이르렀고, 죽계공의 여운(餘韻)이 미친 바와 두 집안의 세의(世誼)를 두루 말하였다. 그 뒤에 다시 널리 조사해보았는데, 우암이 대신해서 제문을 지었다는 김공은 바로 관향이 광산(光山)이고, 자는 지언(止彦)으로 우암과 친척 형제가 되는 자이니, 만일 《우암집》에 근거하여 좌망공을 사계의 문인으로 안다면 잘못이다. 게다가 사계는 명종 무신년(1548)에 태어났고 좌망공은 선조 계사년(1593)에 태어났으니, 좌망공이 사계보다 45세가 적은데 스승과 제자의 나이에 해당될 수 있겠는가. 또 (좌망공이) 문장에 능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경사(京師)에서 벼슬살이할 때 혹여 사계의 문하에 출입했는지도 알 수 없으니, 세상에는 진실로 성과 이름이 같으면서 동문(同門)이 된 자가 있다.매당공(梅堂公)290) 가장(家狀)에 이르기를 "모재 김공(慕齋金公)291)이 준 시에 '매당을 보지 못한 지가 오래되니[不見梅堂久], 마음속에 비린한 생각이 생기네.[胸中鄙吝生]292) 척심정(滌心亭) 아래의 물은[滌心亭下水] 고금에 한결같이 맑네.[一樣古今淸]'."라고 하였는데, 《모재집》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일찍이 모재의 후손 병암(炳庵) 김준영(金駿榮)293) 어른을 찾아뵙고 이를 외우자, 병암이 《모재속집(慕齋續集)》 초건(草件)294)에 수록하였다.그 뒤에 매번 '모재는 선배이고 매당은 후배이니, 고금에 한결같이 맑다는 시는 매당이 죽은 뒤에 지어진 것 같다.'라는 사람들의 질문을 받았으니, 이는 무엇 때문인가? 내가 이러한 질문은 인하여 살펴보고 생각해보았는데, 매당의 생년은 알 수 없으나 그는 4형제 중 셋째이니295), 막내 동생 운강공(雲江公)296)보다 많아봐야 5, 6세 연장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운강공은 가정(嘉靖)297) 무자년(1528)에 태어났고, 모재는 성화(成化)298) 무술년(1478)에 태어났으니, 운강공이 모재보다 50세가 적고 매당은 44, 45세쯤 적을 것이다.나이가 이미 한참 많고 지위도 크게 차이가 나는데, 어떻게 친구 사이에 하는 것처럼 시를 줄 수 있겠는가. 게다가 하물며 가장(家狀)에서 '만년에 척심정을 지었다.'라고 하였는데, 이때 모재가 어찌 생존했겠는가. 또 나아가 '고금에 맑네.[古今淸]'라는 시는 죽은 뒤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진실로 사람들의 질문과 같다면 어찌 더욱 부당하지 않겠는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시는 다른 사람이 지은 것인데, 모재의 시라고 잘못 안 것이다. 전에 동상(東湘)299) 허공(許公) 진동(震童)의 문집에 매당에게 준 시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상련(上聯)은 이른바 모재의 시와 완전히 똑같으니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하련(下聯)에서는 '오늘 밤 서로 대화하니[今宵相對話], 마음이 활연(豁然)300)히 맑네.[心肺豁然淸]'라고 하였다. 무릇 매당과 모재는 연대의 선후가 서로 이와 같은데, 세마(洗馬) 이공(李公) 도중(度中)301)이 살피지 않고 묘갈명과 행장에 시어(詩語)를 실었고, 병암은 모재의 본손으로서 또한 그렇게 하였다. 두 공은 모두 박식하고 단아한 선비로 일컬어지는데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나처럼 소홀하고 거칠면서 또 젊은 경우에 있어서이겠는가.농암공(礱巖公)302)이 병자호란 때에 부친 참봉공(參奉公 김곡(金穀))을 따라서 왕등도(旺登島)로 들어갔다고 대대로 전해 내려왔다. 그래서 본손(本孫)이 들은 것을 기록한 말 중에 이미 이러한 말을 실었고, 우리 선사 간옹(艮翁 간재)도 〈관농암김공유허기(觀礱巖金公遺墟記)〉303)를 짓게 되었다. 그러나 김공(金公) 성갑(聖甲)이 지은 행장(行狀)을 조사해보면, 공은 만력(萬曆)304) 기미년(1619)에 태어나 17세에 부친상을 당했다고 하였으니, 17세면 바로 병자년(1636) 전년인 을해년(1635)이다. 그렇다면 병자년에 부친을 따라 섬으로 들어갔다고 하는 것이 어찌 절로 근거 없는 말로 귀결되지 않겠는가. 대개 세상의 소문을 믿을 수 없는 것에 이와 같은 것이 있다. 麗制郡事, 非與郡守同, 乃統知十餘郡, 或七八郡. 郡則自有其守, 在湖南則有益山郡事, 靈光郡事, 古阜郡事等, 官如本朝觀察使, 乃重任也, 《明隱集》謂官微, 此失考也.壬午譜云: "僉知公世宗朝登文科, 李施愛亂, 以簡才更占武科.". 施愛之亂, 在世祖朝, 壬譜世宗之云誤矣. 丁譜仍之, 失於不察也.壬午譜云: "梅竹堂公隱德不仕. 成宗曰: '如是之人, 若不揚其高潔, 一世儒風將滅.', 畵其梅竹, 取其玉杯, 雕其象劍以賜之曰: '我國君子, 惟金宗而已.'.". 此非惟不見於癸巳譜, 在癸譜百三十年前, 去公時不甚遠之雙柏堂李公所撰墓碣, 亦無見焉. 此若實事, 豈有不載墓文之理? 故澤述於丁譜日, 稟門長老而刪之矣.梅竹堂公配蔡氏, 外祖校理南平曹彙也, 而癸壬兩譜, 書以大提學朴仲林, 主簿公配趙氏, 外祖生員南原楊均也, 而書以永膺大君琰. 考蔡趙兩譜, 則朴公仲林, 蔡氏父碩卿之外祖, 永膺大君, 趙氏父淑琦之外祖, 此固不察誤書之故, 而其必上越一世而取錄者, 兩處皆同, 何其妙也? 其或乍見名位著顯之人, 不覺欽慕, 而未及致察於上下世系歟. 朴公則丁譜已改正, 永膺則未及耳.參奉公配淸州金氏, 父進士敬一. 嘗見咸平李氏世系, 竹陰萬榮, 竹谷長榮之父碩, 有女壻金敬一, 而年代相當. 故丁譜日, 金氏外祖, 書以咸平李碩矣. 更思李系, 不書淸州之貫於金敬一, 則安知其必然耶? 故後復刪正於家藏譜耳. 聞高敞郡造山里金子順爲淸州之金, 專往而見其譜, 則是爲派譜而非大同者, 故無考焉, 可嘆.直節公之父諱鏘, 壬譜云被選南臺, 丁譜仍之, 此四字何謂也? 臺者司憲府也, 南臺者不以文科出身, 以隱逸南行爲司憲府官職也. 我國甚重南臺, 人家所罕有也. 旣臺官則若掌令持平執義監察, 何不據名直書, 只云被選, 使人沈吟也? 抑以只入選望而未得實職歟?直節公子諱瓚之嶺伯戶參, 亦始出壬譜, 而丁譜仍之者. 舊譜之官, 錄於後譜, 必明書其所據文字, 然後乃可無後人之疑, 今不能者何也.西溪公之孫坐忘公諱灦, 字浩浩, 壬譜錄以沙溪金先生門人, 此必見《尤菴集》有代旌善郡守, 金灦祭沙溪先生文題目而然也. 觀於譜錄所云先生之葬, 爲文祭之者, 可知矣. 余亦少時見《尤集》, 而信壬譜之錄, 請竹溪先祖墓碣於參判金公鶴洙之日, 至載坐忘公師沙溪事於文中, 備說竹溪公餘韻所及及兩家世誼矣. 後復廣考, 則尤菴所代作文之金公, 乃貫光山, 字止彦, 而與尤菴爲戚兄弟者, 若據《尤集》, 而認坐忘公之爲沙溪門人則誤矣. 抑沙溪明宗戊申生, 坐忘宣祖癸巳生, 坐忘之於沙溪, 少四十五歲, 可當師生之年? 且能文章, 登巍科, 遊宦京師, 其或出入溪門, 亦未可知也, 世固有同姓名而爲同門者矣.梅堂公家狀中有云: "慕齋金公贈詩曰: '不見梅堂久, 胸中鄙吝生. 滌心亭下水, 一樣古今淸.'.", 而不見於《慕齋集》. 故余嘗見慕齋後孫炳菴丈駿榮而誦之, 則炳菴收錄於《慕齋續集》草件中矣. 後每遇人問慕齋先進, 梅堂後進, 一樣古今淸之詩, 似有梅堂身後作之意, 是何故耶? 余因此問而考思之, 則梅堂生年, 雖不可知, 然其於四兄弟序居三, 想於季弟雲江公, 多不過長五六歲, 而雲江嘉靖戊子生, 慕齋成化戊戌生, 雲江少慕齋五十歲, 而梅堂則少四十四五歲矣. 年旣踰等, 位亦懸殊, 何得贈詩, 若朋儕間之爲? 且況家狀云晩年築滌心亭, 則是時慕齋, 豈得生存乎? 且況古今淸之詩, 意可以身後看, 誠如人問, 豈不尤無當乎? 竊意是詩他人所作, 而誤認爲慕齋詩也. 嘗見東湘許公震童集有贈梅堂詩, 上聯與所謂慕齋詩者純同, 亦未知其何故也. 下聯則云今宵相對話, 心肺豁然淸矣. 夫梅堂之於慕齋, 年代相後先如是, 而洗馬李公度中不察, 而載詩語於銘狀, 炳菴以慕齋本孫而亦然, 二公皆以博雅稱猶如此, 況如余之鹵莽而又在少時乎?世傳礱巖公丙子亂, 隨父參奉公, 入旺登島. 故本孫記聞說中, 旣載此語, 又至有我先師艮翁〈觀礱巖金公遺墟記〉之作. 然以金公聖甲所撰行狀考之, 公萬曆己未生, 十七丁外艱, 十七卽丙子前年乙亥也, 丙子隨父入島之云, 豈不自歸浮說乎? 蓋世間傳聞之不足信, 有如此者矣. 군사(郡事) 고려와 조선 초기에 지방 행정 구역의 하나인 군(郡)의 장관(長官)이다. 판군사(判郡事), 지군사(知郡事)를 두루 이르는 말이다. 《명은집(明隱集)》 김수민(金壽民, 1734~1811)의 저서이다. 임오년(1882) 족보 《후창집(後滄集)》 권20 〈가승서(家乘序)〉에 "부령(부안) 김씨는 처음에 만력(萬曆) 갑신년(1584)년에 대보(大譜)가 있었고, 그 후 각파에서 여러 족보를 만들었다. 우리 직장공파는 인릉(仁陵 순조(純祖)) 계사년(1833), 홍릉(洪陵 고종(高宗))) 임오년(1882)과 정미년(1907)에 편찬한 세 개의 족보가 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첨지공(僉知公) 김보칠(金甫漆, ?~?)이다. 직장공(直長公) 김취(金玉+就)의 차남이다. 이시애(李施愛)의 난 세조의 중앙집권 정책으로 함길도의 특혜가 없어지자 불만과 위기감이 누적된 토호층이 난을 일으킨다. 세조 13년인 1467년 5월에 이시애의 선동으로 일어난 이 반란은 조선 초기 최대의 반란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반란군 2만여 명은 정부의 토벌군 5만여 명을 상대로 저항하다가 그해 8월 진압되었다. 매죽당공(梅竹堂公) 김종(金宗, 1471~1538)이다. 매죽당은 그의 호이고, 자는 사앙(士仰)이다. 1519년(중종 14)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당대의 명사들이 대거 화를 당하자 과거를 포기하고 향리인 부안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쌍백당(雙柏堂) 이공(李公) 이세화(李世華, 1630~1701)이다. 쌍백당은 그의 호이다. 시호는 충숙(忠肅)이고, 자는 군실(君實)이다. 조정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후창집(後滄集)》 권12 〈분재 문중에 보냄[與粉齋門中]〉에서 후창은 "매죽당공의 묘갈은 외손인 명현 쌍백당의 손에서 나왔다.[梅竹堂公墓碣, 出於外孫名賢有如雙柏堂之手者.]"라고 말하였다. 조휘(曹彙) ?~? 관직은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이고, 남평(南平)인 이다. 박중림(朴仲林) ?~1456. 본관은 순천(順天)이고, 호는 한석당(閑碩堂)이다. 이염(李琰) 1434~1467. 세종의 여덟째 아들이고, 이름은 이염(李琰)이다.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이다. 1441년(세종 23) 영흥대군(永興大君)에 봉해지고, 1443년에 역양대군(歷陽大君), 1447년에 영응대군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시호는 경효(敬孝)이다. 채석경(蔡碩卿) 1438~1498. 본관은 평강(平康)이다. 성종(成宗) 1년(1470) 경인(庚寅) 별시(別試) 을과(乙科) 2위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관직은 부사(府使)이다. 외조부는 박중림이고 장인은 조휘이다. 참봉공(參奉公) 김영무(金英武, ?~1592)이다. 자는 문중(文仲)이다. 김경일(金敬一) 1556~? 자는 덕부(德孚)이고, 거주지는 고부(古阜)이다. 죽음 만영(竹陰萬榮) 이만영(李萬榮, 1510~1547)이고, 죽음은 그의 호이다. 죽곡 장영(竹谷長榮) 이장영(李長榮, 1521~1589)이고, 죽곡은 그의 호이다. 직절공(直節公) 김치원(金致遠, 1572∼?)이다. 매죽당공의 증손으로, 자는 사의(士毅)이고 호는 탁계(濯溪)이다. 서계공(西溪公) 김협(金鋏, 1546~?)이고, 서계는 그의 호이다. 좌망공(坐忘公) 김현(金灦, 1593~1653)의 호이다. 죽계(竹溪) 김횡(金鋐, 1541~1590)의 호이다. 김학수(金鶴洙) 1849~?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경기도 여주 출신이다. 매당공(梅堂公) 김점(金坫, ?~1560)이고, 매당은 그의 호이다. 모재 김공(慕齋金公)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이고, 모재는 그의 호이다. 마음속에 …… 생기네 후한(後漢) 때에 황헌(黃憲)의 인품이 매우 훌륭하여 그와 동군(同郡) 사람인 진번(陳蕃)과 주거(周擧)가 항상 서로 말하기를 "잠시라도 황생을 보지 못하면 마음속에 비린한 생각이 싹튼다.[時月之間, 不見黃生, 則鄙吝之萌復存乎心. ]"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어진 사람과 멀리 떨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후한서(後漢書)》 권83 〈황헌전(黃憲傳)〉 김준영(金駿榮) 1842~1907. 본관은 의성(義城)이고, 자는 덕경(德卿)이며, 호는 병암(炳菴)이다. 초건(草件) 시문 등의 초벌로 쓴 원고이다. 그는 …… 셋째이니 매당공의 부친 김석옥(金錫沃)의 묘갈명에 "자녀는 아들이 4명이니, 김희(金喜), 김선(金善), 김점(金坫), 김계(金啓)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고봉집(高峯集)》 권3 〈증 호조참판 김공 묘갈명(贈戶曹參判金公墓碣銘)〉 운강공(雲江公) 김계(金啓, 1528~1574)이고, 운강은 그의 호이다. 가정(嘉靖) 명나라 세종(世宗)의 연호(1522~1566)이다. 성화(成化) 명(明)나라 헌종(憲宗)의 연호(1465~1487)이다. 동상(東湘) 허진동(許震童, 1525~1610)의 호이다. 자는 백기(伯起)이다. 활연(豁然) 시원하게 터진 모양이다. 이공(李公) 도중(度中) 매당공(梅堂公)의 행장(行狀)과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농암공(礱巖公) 김택삼(金宅三, 1619~1703)의 호이다. 자는 계용(季用)이다. 〈관농암김공유허기(觀礱巖金公遺墟記)〉 《간재집전편속(艮齋集前編續)》 권5에 실려 있다. 만력(萬曆) 명(明)나라 신종(神宗)의 연호(年號, 1573~162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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