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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족제 명익 병재에게 답함 무진년(1928) 答族弟明益 柄梓 戊辰 일전에 보내신 기문은 감사히 잘 받았습니다. 그러나 기대가 너무 커서 불초한 제가 감당할 게 아니었습니다. 후생으로서 창주(滄洲)11)를 배우는 것은 바로 선사(先師)께서 편액을 명명한 본뜻을 얻은 것이니,12) 비록 매우 두려웠지만 감히 끝내 사양하지 못하였습니다. 후사자(後死者)13)로 사문의 책무를 맡긴 데 이르렀고, 또 "오(吳)·강(姜)14)은 어쩔 수 없습니다."라는 말은 그 말이 내력이 있긴 하지만 그 빗대어 논의한 것이 조리를 잃었으니, "한마디 말로 지혜롭지 못하게 된다."15)는 게 곧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겠지요. 이 때문에 받은 기문을 감히 벽에 걸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오·강의 화로 거의 사문이 남아나질 않게 되었다."는 당신의 의견은 옳습니다.지난번 당신 마을 제군들이 《당화역(唐畵易)》16)을 취하여 제 운명을 보았는데 "사십에 음인(陰人)에게 화를 당한다."는 글귀가 있었습니다. 곧 인생의 화복은 저절로 하늘이 정함이 있습니다. 또 이로써 저들이 음인이라는 것이 지명(地名)에 드러날 뿐만 아니라 또한 먼저 천문(天文)에 갖추어져 있었음을 믿게 되었습니다.대개 그 호종(怙終)의 악17)을 어찌 다만 광(匡) 땅 사람이 우연히 범한 잘못18)에 견주어 논하겠습니까. 이러한 일은 또 피해를 입은 사람의 인품 고하를 보고서 그 화심(禍心)을 저울질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前惠記文, 拜領多感.而屬望太重, 有非無似者所堪.後生而學滄洲, 正得先師命額本意, 雖甚兢兢, 而不敢終讓.至於責之以後死者斯文之任, 而謂"吳、姜之無奈何.", 則語有來歷, 擬議失倫, "一言不知.", 其謂此歟! 所以來記不敢揭壁, 但"吳、姜之禍, 幾乎斯文無遺.", 則高見是矣.向者貴里諸君, 取唐畵易觀賤命, 有"四十被陰人禍"之文.乃人生禍福, 自有天定.又以信彼爲陰人, 非惟著之地名, 亦先具於天文也.蓋其怙終之惡, 豈但比論於匡人偶誤之犯而已哉? 此又不可視所被者之人品高下, 而輕重其禍心也.未知如何? 창주(滄洲) 주자를 말한다. 주희가 무이산(武夷山)에 창주정사(滄洲精舍)를 짓고 강학하였다. 송나라 이종(理宗)이 고정서원(考亭書院)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자신의 호인 후창(後滄)에 대한 설명이다. 선사께서……것이니 김택술의 ?연보?에 따르면 1903년 20세에 스승 간재 전우가 "後滄居士 滄東處士"의 8글자를 써서 사호(賜號)하였다. 후사자(後死者) 공자가 광(匡) 땅에서 위협을 받을 때 도통을 자임하여 "하늘이 장차 사문을 없애려 하신다면 후사자가 사문에 참여할 수 없겠지만 하늘이 사문을 없애지 않으시니 광 사람이 나를 어찌하리요.[天之將喪斯文也, 後死者不得與於斯文也, 天之未喪斯文也, 匡人其如予何?]" 하였다. 《論語 子罕》 오(吳)·강(姜) 오진영(吳震泳)과 강신윤(姜信倫)을 말한다. 둘 다 전우(田愚)의 제자로 ?간재집? 진주본(晉州本) 간행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한마디……된다 《논어》 〈자장〉에 "군자는 한 마디 말로 지혜롭게 되기도 하고, 한 마디 말로 지혜롭지 못하게 되기도 하므로 말은 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君子一言以爲知, 一言以爲不知, 言不可不愼也.]"라고 하였다. 당화역(唐畵易) 당나라 사람이 그림을 그려 역을 풀이한 책. 호종(怙終) 배경을 믿고 의도적으로 죄를 짓는 자를 말한다. 호종적형(怙終賊刑)의 줄임 말로, 《서경》 〈순전(舜典)〉에 "무의식적인 실수나 불운해서 지은 죄는 용서하여 풀어 주었지만, 믿는 데가 있어서 끝끝내 범하는 죄인은 사형에 처하였다.[眚災肆赦, 怙終賊刑.]"라는 말이 나온다. 광(匡) 땅……잘못 노(魯) 나라 양호(陽虎)가 광(匡) 땅 사람을 폭행한 일이 있었는데 공자(孔子)가 그곳을 지나자 광인(匡人)은 공자의 얼굴이 양호와 같다 하여 무기를 들고 5일 동안을 포위하니, 공자가 "하늘이 사문(斯文)을 아주 없애려 하지 않는다면 광인이 나를 어찌하겠느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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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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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족제 명익에게 답함 계유년(1933) 答族弟明益 癸酉 제 동생이 와서 말하기를 요사이 종중에서 대동보에 대한 논의가 나왔는데 현좌(賢座)19) 또한 같은 마음이라 하였습니다. 이윽고 또 현좌가 나에게 가부를 묻는 뜻을 전하였습니다. 제 무슨 견해가 현좌보다 높아 가부를 물을 게 있겠습니까. 또 여러 어른들이 미리 정해놓은 계획이 있는데 비록 조금 다른 견해가 있다한들 어찌 감히 제가 망령되이 의견을 내놓겠습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대동보에 관한 논의는 문중을 위하는 일이므로 현좌와 제 동생이 지위가 낮고 견해가 일천하다고 하여, 끝내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 없는 점이 있을 겁니다. 감히 이에 진언하니 부디 살펴 주십시오.대저 족보는 족친을 화합시키는 것이니 작게 화합하는 것보다 크게 화합하는 것이 나을 겁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나라 각 성씨들이 대동보를 많이 만들지만 유독 우리 김씨 문중만 없습니다. 이제 이 논의에 있어 누군들 기쁘게 듣고 즐거이 이루려 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적절한 시기가 아니고 형세가 불가한 면이 있습니다. 역사서를 만드는 어려움은 예나 지금이나 그렇다고들 말하는데 족보의 어려움은 그보다 더 심합니다. 역사의 실책은 오직 사실과 어긋나는 데 있지만, 족보의 실책은 곧 윤리와 명분에 죄를 얻는 데 이릅니다. 이는 평안한 시대의 파보로 이야기해도 오히려 이 같은 점이 있거늘 하물며 오늘날 세상에선 어떠하겠습니까.천지가 뒤집히고 윤리와 예법이 무너지며, 사설(邪說)이 횡행하여 정론이 사라진 지 오랩니다. 오늘날같이 세도와 인심이 강상(綱常)과 어긋나고 흩어져 사는 곳이 다수이기에 이목과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데, 어떻게 대단히 밝은 안목과 대단히 씩씩하고 굳센 힘이 있어서 종손(宗孫)과 지손(支孫)의 다툼, 처첩의 무분별, 서족(庶族)의 분수에 넘치는 생각, 남의 족보에 무릅쓰고 들러붙는 미혹과 패륜, 관첩(官帖)의 진위, 행적(行蹟)의 허실을 거울로 비추고 쇠를 끊듯이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할 수 있다."고 하면 나는 실로 믿지 못하겠고, 만약 "할 수 없다."고 하면 그 죄를 어찌 면하겠습니까. 만약 "오늘날 세상은 각 성씨마다 모두 그렇게 하는데 어찌 우리만 유독 죄가 되겠습니까?"라고 하는 것은 비단 여러 종중과 현좌에게 바라는 바가 아닐 뿐만 아니라, 우리 김문(金門)의 대대로 전할 족보법의 엄정함을 헤아려보면 제종(諸宗)과 현좌 또한 결단코 이에 이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시기와 형세를 헤아려 불가하다고 하는 것입니다.비록 지혜가 있어도 형세를 타는 것만 못하고, 비록 농기구가 있더라도 시기를 기다리는 것만 못한 법인데, 어찌하여 조금도 기다리지 않습니까. 또 세상이 변한 이후로 모든 일에 있어 시대의 구애를 받는 것은 일체 제쳐두었다가 언젠가 결말이 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실로 우리 마음속 자연스런 본연일 테고, 또한 입으로 평소 익숙하게 강론하였던 것입니다. 이 대동보는 400년 동안 만들지 못하였지만 우리 김문(金門)에 허물이 되지 않았고, 족친이 화합하는 데 문제가 없었는데, 어찌하여 이것을 부득이 하다고 보고 급급하며 그만두지 못하는지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바라건대, 현좌가 다시 생각해보고 말해주십시오. 이 편지를 현좌의 백부님과 춘부장 어른, 두 숙부님께 보여드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다른 사람 눈에 번거롭게 돌려서 구설에 오르면 안 될 겁니다. 곡진히 생각해 주십시오. 家弟來言, 近自宗中發大同譜議, 賢座亦與同情.旣而又傳賢座轉質可否於鄙人之意.鄙人有何見高於賢座而可質可否? 且諸長老定算有在, 縱些有見, 安敢自下妄議? 雖然在譜議爲宗事, 在賢座若親弟, 終有不可以位下見淺而噤嘿者.敢玆布悉, 幸有以察焉.夫譜所以合族, 小合孰與大合.是以我東各姓, 多譜大同, 而獨吾金無焉.今於此議, 孰不喜聞而樂成? 但時非其時, 勢有不可.作史之難, 古今云然, 而譜之難爲尤焉.史之失, 惟在於事實差爽;譜之失, 乃至得罪於倫理名分.此以平世派譜言之, 尙有若此者.而況今之世何如也!天飜地覆, 綱淪法斁, 邪說熾而正論熄者久矣.以若今日世道人心之乖常, 散處多數, 耳目意念之不及, 何許大明眼大壯力, 有能照鏡截鐵於宗支之常爭、妻妾之無分、庶族之濫想、冒附之迷悖、官帖之眞贗、行蹟之虛實者乎? 如曰"能之.", 吾實不信.如曰"不能.", 厥罪奚免.如曰:"今之世, 各姓皆然, 而我獨何罪?", 非惟非所望於諸宗與賢座, 揆以吾金世傳譜法之嚴正, 諸宗與賢座, 亦斷不至此也.此所以云量時度勢而不可焉者.雖有智慧, 不如乘勢;雖有鎡器, 不如待時, 盍少俟之? 且自世變以後, 凡事涉時拘者, 一切遷就以待究竟出場, 實吾人心中自然之天, 亦口頭平日之熟講.胡爲於此大譜四百年未遑, 而不失爲吾金, 無傷於合族者, 視以爲不得已, 而汲汲然不置也, 竊所未曉.惟賢座再思而見敎.因將此書, 獻覽于尊伯父春府兩叔主, 如何? 他眼不宜轉煩以致多口.想在曲念. 현좌(賢座) 서간문에서 사용하는 표현으로 관직이 있는 사람에게는 합하(閤下)라 하였고, 연장자에게는 헌하(軒下)라고 하였으며, 평교간에는 좌하(座下), 자기보다 낮은 사람에게는 현좌(賢座)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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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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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족제 명익에게 보냄 신사년(1941) 與族弟明益 辛巳 지난번 성재(星齋)20)의 인일(人日)21) 종회에서 제가 의견을 내어 말하기를 "석동(席洞) 원재(元齋)의 종중 돈은 원래 군사공(郡事公), 대호군공(大護軍公), 직장공(直長公), 시직공(侍直公), 통례공(通禮公) 다섯 분22) ⇣군사공(郡事公) 김광서(金光敍)↓┏━━━┳━━━┓직장공(直長公) 김취(金玉▼就) 대호군공(大護軍公) 김당(金璫)↓ ↓┏━━━━┓ ┏━━━┳━━━┓첨지공(僉知公) 김보칠(金甫漆) 통례공(通禮公) 김회충(金懷充) 시직공(侍直公) 김회신(金懷愼)의 제사를 지낼 때 쓰는 것입니다. 다섯 분의 묘소 석물 중 오직 직장공 배위(配位) 숙인(淑人) 이씨 석상(石床)만 품질이 좋지 않아 세월이 오래되어 떨어져나갔습니다. 다 같은 선조인데 좋고 나쁨이 있는 게 편치 않을 뿐만 아니라, 시제를 지내며 음식을 진설할 적에도 이리 저리 옮기고 서로 바꿔도 가지런하지 않고, 행렬이 밀집되어 합해져 있으니 어찌 모양새가 나겠습니까. 결코 신령을 섬기고 공경을 다하는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현재 다행히 종중의 재물이 조금 여유가 있니, 마땅히 즉시 새로 마련하여 신령과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했으면 하는데, 여러분 뜻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니, 모든 사람이 별다른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약속하기를, 2월 5일 종회에서 제관(祭官)을 나누어 정한 뒤 비용을 계획하고 석공을 불러 맡기기로 하였습니다.이윽고 얼핏 들으니 통례공파 중 어떤 사람이 사사로이 말하기를 "원재의 재정은 통례공파가 맡고 있습니다. 필시 돈을 내어 기금을 조성할 때 우리가 출력(出力)을 많이 했기 때문에 직장공과 사직공 두 종파는 종전부터 권리가 적습니다. 이제 이렇게 석상을 다시 마련하는 것은 원래 본손(本孫)의 일이니 원재에서 마련하여 지출하는 것은 부당합니다."라고 하였다더군요. 내가 이르기를 "이 말은 또 중간에 수많은 세월이 흘렀는데 강한 것을 믿고 약한 것을 업신여기는 너무나 불공평한 구시대 말투입니다."라고 하고, 다만 비루함을 비웃고 못 들은 척 하였습니다.도천(道川)의 낙환(洛環) 씨가 "본파가 원재(元齋)의 기금을 전담합니다."라는 말을 대중 앞에서 하였습니다. 이에 어떤 사람의 사사로운 말이 곧 통례공파 다수 의견이고, 낙환 씨 입이 그 심부름꾼 역할을 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말이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에 시행되지 않아 저절로 무안하게 되었습니다. 끝내 제가 의견을 낼 때 아무 이견이 없었던 안(案)대로 결정되었습니다. 일이 이미 바르게 귀결되었으니 뒤늦게 거론할 필요는 없지만, 다만 이로 인하여 일전에 당신이 한 말이 생각났습니다. 점점 과도한 우려가 생기는가 싶은 의심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그런지요? 그렇지 않은지요?그대는 원재(元齋)에서 석상을 바꾼다는 일을 듣고서 "이는 좋은 일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좋은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비록 좋은 말이지만, 당연하다는 말만 못합니다. 당연하다는 것은 그 재물로 그 일을 하는 것을 말하고, 좋은 일이라는 것은 내 재물로 남의 일을 이루도록 돕는다는 뜻입니다. 우당이 또한 약간의 어떤 생각이 있어서, 위에서 말한 다수(多數)와 의견과 같지만 단지 돈독한 은혜를 베풀어야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인지요? 나머지 사람은 우선 놔두고 우당도 이런 의견을 갖는 것은 결코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내가 우선 분명히 말하겠는데 석동산(席洞山)23)은 군사공 묘지가 아닙니까. 대호군공과 직장공은 군사공의 두 아들이 아닙니까. 이렇게 커다란 산판(山坂)과 소나무와 삼나무가 자라기 좋은 땅에서 해마다 재물이 나와 군사공의 후사(後事 제사)를 받드니 어찌 충분히 여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재물이 넉넉히 쌓여 오늘날에 이르러 부유한 문중이라고 일컫습니다. 똑같은 자식인데 그 아버지 산판에서 나온 재물로 누구는 허여하고 누구는 허여하지 않는 게 말이 되겠습니까?만일 이르기를 "군사공의 묘사가 친진(親盡 제사 지내는 대수가 다 됨)하여 재실(齋室)을 따로 세우는 날, 용도(用度)가 넉넉하지 못하니 부득이 기금을 거둬 본전을 마련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하면, 이때는 양가 자손 수의 많고 적음이나 빈부의 형세가 서로 차이가 많지 않은데 어찌 돈을 내는 데 많고 적은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성재의 종중 재산은 원래 대호군과 직장공 두 파의 공동 재물이니 마땅히 나누어 관장하여 고르게 써야합니다. 무릇 선조를 봉양하는 데 있어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만 직장공의 아들 첨지공(僉知公)은 같은 선산에 있지 않아서 다섯 분의 제삿날 함께 제향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양가의 종중 재물이 많고 적은 차이가 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비록 형세가 이미 불공정한데다 이제 다시 바로 직장공 부인이요, 군사공의 며느리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이러쿵저러쿵 말이 있으니, 어찌 생각이 깊지 못하고 이치를 크게 해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주장하는 설에 대해 또 어찌 족히 말할 게 있겠습니까.우리 일파(직장공파)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곳곳마다 모든 집안이 전몰되고, 남은 집안 또한 번성하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날에 이르러 그 수는 통례공파의 삼분의 일도 안 됩니다. 많은 무리는 강하고 적은 무리는 약하기 마련입니다. 강자가 주장하면 약자는 어쩔 수 없는 것이 말세에 늘 있는 일이긴 하지만, 어찌 그렇다고 으스대며 그 기금을 세울 때의 공을 독차지하려고만 하고 근본 이치를 생각하지 않습니까. 아, 우당(藕堂)이여! 우당이라면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털끝만큼이라도 어떤 생각이 있다면 이는 족히 천지간의 조화로운 기운을 손상시킬 것입니다. 시원하게 쓸어내어 남겨두지 말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한 종족 간에 이런 마음이 있는 자에게 소상히 알려 훗날 사단이 될 만일의 염려를 없애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向於星齋人日宗會, 澤述發論曰: "席洞元齋宗金, 原係郡事公、大護軍公、直長公、侍直公、通禮公五位有事時取用者.今五位墓石儀中, 惟直長公配位淑人李氏石床, 品本薄劣, 歲久剝落.不惟均是祖先有厚薄之爲未安, 歲祀陳饌之際, 儹那互易不整, 行列挨拶合幷, 豈復成樣? 甚非事神致敬之道.現幸宗財少裕, 宜卽改備以安神人之情, 未知僉意何如?", 則衆皆無異辭.而約以二月五日衆會, 分定祭官後, 計劃費用, 招任石工矣.旣而乍聞, 通禮公派中, 有人私相語曰:"元齋財政, 通禮公派主張.則必是植金立本時, 多出力之故, 所以直長公侍直公兩派, 從前少權利者.今此改備石床, 自是本孫事, 不當自元齋辦出." 余謂"此又是中間許多年, 恃强凌弱, 大不公底舊時口氣.", 但笑其陋如不聞也者.及道川洛環氏, 發"本派專擔元齋寄助"之說於衆中.則乃知有人私語者, 是通禮公派多數意見, 而洛環氏之口爲其所使矣.言不中理故, 不見施行, 自歸無顔.竟定以發論時無異辭者.事已歸正, 不必追提, 但因此而念及日前盛敎.不免轉生過慮之疑.其然其不然.座下聞自元齋改備石床之事, 不曰"此好事"乎. 好事云者, 雖好辭, 然不若云當然之辭.當然者, 以其財成其事之謂也.好事者, 助以我財成人事之意也.未知藕堂亦有些什麽意思, 如上所謂多數者之見, 而特以施敦睦之惠, 故云爾歟! 餘人且舍, 以藕堂而有此, 甚非所望也.我且明言之, 席洞山非郡事公墓地乎? 大護軍公、直長公, 非郡事公二子乎? 以若許大山坂, 松杉宜土, 年年出財奉郡事公後事, 豈不綽綽有餘? 所以羨餘居積以至于今, 稱爲富門矣.均是子也, 而其父山坂餘財, 或得與焉, 或不得與焉云者, 可成說乎? 如曰:"逮郡事公親盡墓祀, 營立齋舍之日, 用度未給, 不免收金植本.", 則是時兩家子孫衆寡之數, 貧富之勢, 不相上下, 豈有出力多少之異乎? 然則星齋宗財, 元是大護軍、直長公兩派公共之物, 所當分掌均用.凡於奉先, 不可有偏全.但以直長子僉知公葬不同岡, 未得同享於五位祀日.故宗財延及有兩家長短之異.此雖勢也已是不公, 今復直於直長公配位爲郡事公子婦之事, 有所云云, 豈非不思之甚而害理之大者乎? 至於主張之說, 又何足道? 鄙派則壬丁之亂, 往往闔家全沒, 餘存之家, 又不繁衍.至于今, 數不及通禮公派三分之一.衆者强, 寡者弱.强者主張, 弱者不能, 是叔季常事, 豈可以此自多, 至欲認其植本之擅功, 而不念夫原初之事理乎? 嗟呼, 藕堂! 藕堂而豈有是也? 然如有毫末什麽意思, 則此足以減傷天地間和氣.切願廓然掃去而勿留, 亦望詳喩於宗族間有是心者, 俾絶後日事端萬一之慮, 如何如何? 성재(星齋) 취성재(聚星齋)이다.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연곡리에 있는 김광서(金光敍)묘의 재실이다. 군사공(君事公) 김광서는 문정공(文貞公) 김구(金坵, 호는 止浦)의 후예로 고려 말에 고부군수를 지냈다. 취성재라는 이름은 임억령(林億齡)이 부안 김씨가 살고 있는 옹정리를 찾아서 "옹정에는 군자가 많은데 김문(金門)에는 덕성(德星)이 모였다."라고 칭찬한 글의 '취덕성(聚德星)'에서 유래한 것이다. 1819년(순조 19)에 세워진 것이 화재로 소실되고 1826년에 중건하여 지금에 이른다. 인일(人日) 1월 7일을 말한다. 1일에서 6일까지는 가축의 길흉을 점치고, 7일에는 인사(人事)를 점치며, 8일에는 곡식을 점치는 풍속에서 유래한 것이다. 점치는 날이 모두 청명하고 온화하면 1년 동안 길(吉)하고, 음습하거나 추운 날씨가 계속되면 흉한 조짐으로 받아들였다. 《荊楚歲時記》 《事物紀原 天生地植 人日》 다섯 분 문정공(文貞公) 김구(金坵) 석동산(席洞山) 전북 부안읍 연곡리에 있는 산으로 이곳에 부안 김씨 일가의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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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질 상집 형돈에게 보냄 신사년(1941) 與族姪庠集 炯敦 辛巳 예전부터 서로 그리워하며 여러 해 동안 만나고 싶었던 게 단지 백대를 내려온 한 집안의 정의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피차 같은 심정이라 많은 말이 필요 없겠지요. 다만 이번 일은 어찌 그리 서로 감응한 게 오묘하고 서로 어긋난 게 기이하단 말입니까. 천리 길을 한 번 가기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닌데 번갈아 찾아가 끝내 만나지 못하였으니 마치 숨바꼭질 같습니다. 아마도 또 하늘이 우리 두 사람을 가지고 한 때의 희롱거리로 삼았나 봅니다. 참으로 서글프고 망연자실하여 이 심정을 어찌할지 모르겠습니다.비록 그렇다고는 해도 우리가 이미 함께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또 각각 멀리 방문하는 정성을 다하였으니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만나지 못한들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 설령 서로 만나서 온종일 함께 있어도 칠 척의 몸과 네 치의 구이(口耳)24)는 남들과 같은 데 지나지 않고,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어도 새롭고 기이한 것은 없어 두 사람 마음이 함께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또 무슨 슬픔이 있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제가 당신 집으로 행차했을 때 당신 아들의 정성과 물색이 모두 극진하여 평소에 곧은 의리로 가르쳤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대가 저희 집에 왔을 때는 집안 조카가 예로 대접한 게 없어서 가르침이 온전하지 못한 것이 몹시 부끄러웠습니다.듣건대 지난 여행에 계룡산과 금강산을 둘러보고 돌아간다 하셨는데 과연 하늘에 잇닿은 비로봉(毗盧峯) 정상에 올라 장가(長歌)를 부르며 애통해하고, 다시 망월대(望越臺)에서 상심하며 사육신의 충혼을 위로하며, 마의태자(麻衣太子)의 능에 성묘하고, 선조의 높은 절개를 사모하며, 표연히 금강(錦江)과 동해의 바람을 쐬며 가슴속에 많은 쾌활함을 느끼셨는지요?제가 갔을 때도 선향(仙鄕) 삼동(三洞)25)의 승경을 두루 돌아보고 선현의 유적을 다 방문하여 가슴가득 우울한 기분을 삭이려 하였으나, 그대를 만나지 못해 전혀 감흥이 일지 않아 겨우 화림동(花林洞)만 보고 돌아왔습니다. 저 심진동(尋眞洞)과 원학동(猿鶴洞)26)에서 안문(雁門)의 불우함27)을 보상받을 수 있는 날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때 당신 집으로 다시 갈 수 있겠지요. 동쪽을 아련히 바라보며 읍에서 바람을 쐬고 있습니다. 夙昔相慕, 積年願見, 非但以百世一室之誼, 彼此同情, 不須多言.惟是今番之事, 何其相感之妙, 而相戾之奇耶! 千里一行, 良非易事, 而互換踵門, 竟失識面, 有若迷藏者然.豈亦天公故將吾兩人作一時戱耶.悵焉惘焉, 不知爲懷.雖然, 吾輩旣有所同存之心, 又各盡遠訪之誠, 則斯亦足矣.不見何害? 使其相見而竟晷不離, 不過七尺之修四寸之具, 與人同者;達宵談討, 亦無新奇, 而不過兩心之所同存者爾.又何悵惘之有? 但念塵裝之於仙庄, 令子之情物俱摯, 可見義方之有素.而高躅之於弊齋, 家姪之禮數埋沒,甚慙敎導之全未也.竊聞曩行將歷覽鷄龍金剛而歸, 果能陟連天毘盧之頂, 放長歌之痛, 而復傷心於望越之臺, 弔六臣之忠魂, 拜省於麻衣之陵, 慕先祖之大節, 飄然溯錦江東海之風, 覺胸中多少快豁否? 鄙行亦欲徧觀仙鄕三洞之勝, 畢訪先賢之遺跡, 盡銷滿腔之鬱氣, 以未遇貴座, 殊沒意況, 僅見花林而歸.未知彼尋眞園1)鶴, 如得補鴈門之踦者有日.則那時可能重詣衡門也歟! 東望杳然臨風於邑. 칠 척의……구이(口耳) 마음속에 깊이 체인(體認)하지 않고 그저 귀로 들은 것을 입으로 말하는 소인의 학문을 가리킨다. 《순자(荀子)》 〈권학편(勸學篇)〉의 "소인의 학문은 귀로 들어와 입으로 나간다. 입과 귀의 사이는 네 치밖에 안 되니, 어떻게 칠 척의 몸을 아름답게 할 수 있겠는가.[小人之學也, 入乎耳, 出乎口.口耳之間則四寸耳, 曷足以美七尺之軀哉?]"라는 구절에서 연유하였다. 삼동(三洞) 안의삼동(安義三洞) 즉 화림(花林), 원학(猿鶴), 심진(尋眞)을 이른다. 원학동(猿鶴洞) 원문에는 "원학(園鶴)"으로 되어 있으나 오류다. 원 지명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안문(雁門)의 불우함 《한서(漢書)》 권70 〈단회종전(段會宗傳)〉에 의하면, 단회종은 대절(大節)을 좋아하고 공명(功名)을 자랑하는 인물로, 안문 태수(雁門太守)에서 면직되었다가 다시 서역(西域)의 도호(都護)에 제수되었는데, 부임할 때에, 그와 친하게 지내던 곡영(谷永)이 그가 늙은 나이에 변방으로 나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증언(贈言)을 지어 이르기를 "그대는 옛 제도를 따르고, 특별한 공로를 세우려 들지 말라. 마치고 다시 속히 돌아오기만 해도 안문의 불우함을 보상(補償)하기에 충분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여기서는 뒷날 더 좋은 만남을 기약하자는 것이다. 園 원문 "園"은 '猿'의 오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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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숙 경원 낙상에게 보냄 병인년(1926) 與族叔景元 洛相 丙寅 지난번에 부풍관(扶風館)28) 상량문이 선조 화곡공(火谷公)29)이 지은 것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제 집안 동생이 필사해 와서 보게 되었습니다. 부안(扶安) 사람들은 다만 공께서 성묘(聖廟)에 관한 문장만 지은 줄 알았는데 시대가 지나고 세상이 변하니 이 글이 또 나왔습니다. 이것은 노(魯) 나라 공자(孔子)의 집이 무너지자 공경(孔經)이 세상에 나온 것30)과 같고, 범명우(范明友)의 노복(奴僕) 무덤이 발굴되자 곽광(霍光)의 일이 밝혀진 것31)과 같으니, 예와 지금이 어찌 다르겠습니까. 받들어 백 번 읽고 나니 느낀 바가 매우 많아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봉황이 일어나고 교룡이 승천하듯 운기(韻氣)가 죽지 않고, 신령이 아끼고 귀신이 보호하여 그 손때가 아직도 새로워 완연히 선조의 얼굴을 뵙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 기쁨을 아시겠지요. 선조에게 이런 귀중한 글이 있었는데도 능히 전하지 못한데다가 아울러 그 사정도 몰랐으니 그 부끄러움이 어떻겠습니까.부안은 예로부터 문학의 연수(淵藪)로 일컬어졌습니다. 목릉성세(穆陵盛世) 때 공관(公館)과 성묘(聖廟)를 막중히 경영하여, 그 일을 송축하고 발원한 문장이 유독 공의 손에 의해 애써 이루어졌으니, 그 아름다운 문장은 고을의 으뜸이 되고 그 후손의 빛이 됨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랑캐가 제멋대로 우리나라를 빼앗고 이것까지 아울러 훼철하니, 공이 문장으로 국가에 송축(頌祝)을 바친 정성과 충성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총괄해보면 공사(公私)의 애통함이 지극하니 또한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문장을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싣는 것은 후인의 책임에 맡기더라도, 우선 인쇄를 위해 유고(遺稿)를 엮는 것은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頃聞扶風館六偉文, 是先祖火谷公所撰, 而再昨家弟鈔來, 始得見之矣.扶之人, 但知公聖廟之有文, 而時移世變, 此文又出.魯宅壞而孔經行, 范塚發而霍事明, 古今何殊.奉讀百回, 所感萬端, 不知何以爲心也.鳳起蛟騰, 韻氣不死, 神慳鬼護, 手澤尙新, 宛然如承祖顔.其喜可知.先祖有此等重大文字, 非惟不能傳, 幷不知其事, 其愧又何如? 扶風古稱文學淵藪.而當穆陵晟際, 莫重公館聖廟經始, 頌願之文, 獨賢乎公手, 則想見黼黻之文, 爲鄕冠冕, 而足爲後裔光華矣.然讐夷得志, 旣奪我國幷此而毁掃, 使公助文公役獻頌國家之誠忠, 一朝歸於烏有.總之爲公私之痛極焉, 亦復何言! 文之載入《輿覽》後人責, 先將印出, 編之遺稿, 似不可已.未知如何? 부풍관(扶風館) 부안(扶安) 향교(鄕校) 객사이다. 화곡공(火谷公) 김명(金銘)이 정유재란(丁酉再亂) 중에 불탄 부안 향교를 1600년(선조 33)에 중건할 때 상량문(上樑文)을 지었으며, 객사 부풍관(扶風館)의 상량문도 지었다. 화곡공(火谷公) 김명(金銘, 1545-1619). 자는 여신(汝新), 호는 화곡, 본관은 부안(扶安)이며 문정공(文貞公) 구(坵)의 후예이다. 주부(主簿) 경정(景貞)의 아들로 죽계(竹溪) 횡(鈜)의 아우이며 부안에서 살았다. 저술은 2권 1책의 《화곡선생유고(火谷先生遺稿)》가 있는데, 1915년에 간행되었다. 그 서문은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지었고, 발문은 후손인 병술(炳述)과 수철(水喆)이 지었다. 노(魯) 나라……나온 것 진시황제가 유교 책을 불태우라고 명령하자, 공자의 고향 노(魯) 지역에 사는 '문통군(文通君)'이라는 사람이 유교 책을 과거 공자가 살았던 집 담장에 몰래 숨기고 산으로 도망쳤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370년이 지나, 노(魯) 지방정부의 공왕(恭王)이 공자가 살았던 집을 정리하다가 담장에서 유교 책을 발견하였다. 이때 발견된 책이 《논어》 《효경》 《상서》 등이다. 범명우(范明友)의……밝혀진 것 한(漢) 나라 말기에 곽광(霍光)의 사위 범명우(范明友)의 종 무덤을 발굴하였더니, 그 종이 다시 살아나서 곽광의 집안일 및 곽광이 창읍왕(昌邑王)을 폐하고 선제(宣帝)를 세울 무렵에 한 사실을 빠짐없이 이야기하였는데 그것이 《한서(漢書)》의 말과 서로 맞는 점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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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질 응봉 형일에게 답함 계유년(1933) 答族姪應鳳 炯日 癸酉 대개 학문은 추향(趨向)이 우선이지만 스스로 믿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대가 이미 이단에 유혹되지 않는다고 자신하니, 대본(大本)이 서고나면 도(道)는 저절로 생길 것입니다. 더 이상 무슨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바라 나에게 한마디를 구합니까. 또 지금 백가(百家)가 떠들썩하게 각각 문호를 세운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컨대 각각 그들의 해로움은 쉽게 알 수 있고, 그들의 논설은 쉽게 변파(辨破)할 수 있습니다. 묵자(墨子)가 인(仁)과 유사하고, 양씨(楊氏)가 의(義)와 유사하며, 노장(老壯)과 불교가 이치에 가까워서 옳은 것 같으나 그른 경우와는 다르니, 그대의 현명함으로 그 꼬임에 넘어가지 않기는 마땅히 쉬울 것입니다. 그대 스스로 믿을 뿐만 아니라 남들도 또한 믿습니다. 그러나 정도(正道)와 이단(異端)의 구분은 동시대의 학계에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하기를 "학계의 이단에 유혹되지 않기는 쉽지만 심중(心中)의 이단에 유혹되지 않기는 어렵다."고들 말합니다.성인의 도가 아니면서 따로 한 단서를 만드는 것은 학계의 이단이고, 본심의 덕이 아닌데도 따라서 한 단서를 일으키는 것은 심중의 이단이 아니겠습니까. 곧 사사롭고 거짓된 마음이 이것입니다. 대개 인심(人心)은 위태롭고 도심(道心)은 은미합니다. 은미하기 때문에 공정하고 참됨을 보기 어렵고, 위태롭기 때문에 사사롭고 망령된 데로 빠지기 쉬우니 이것이 천고의 공통된 병폐입니다. 그대가 비록 명철하더라도 아마 초연히 홀로 벗어나지는 못할 겁니다. 그러니 청컨대 이 점을 미루어 나의 한마디 말을 들어줄 수 있겠는지요.대저 스스로 믿는 것은 정조(精粗)와 심천(深淺)의 다름이 있습니다. 《대학》의 팔조목(八條目)은 '치지(致知)'가 요체가 됩니다. '치(致)'라는 것은 최대한 정심(精深)하는 것을 이릅니다. 그 지혜를 극진히 하고서 자신을 돈독히 하지 않는 자는 없습니다.이단은 알기 쉬운 것과 분변하기 어려운 것으로 나뉩니다. 비단 학문에 있어서 노불(老佛)ㆍ양묵(楊墨) 같이 옳은 것 같으나 그른 것도 있을 뿐만 아니라, 마음에 있어서도 공정하고 참된 것 같아도 실은 사사롭고 망령된 것도 있으니, 실로 이런 것이 분변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대저 능히 그 앎을 극진히 한다면 그 어려운 것도 족히 걱정할 것이 없고, 유혹되지 않을 것을 더욱 자신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또 한 단계 더 진보할 수 있는 논지입니다.대저 도(道)는 반드시 지극한 것을 주로 해야지 제이등(第二等)이 되겠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32) 그대가 듣고 싶어 하는 것이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치지' 두 글자는 마땅히 그대가 오늘날 힘써야 할 일입니다. 그 방법은 모두 주자가 논한 《대학혹문》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주된 공부는 '독서(讀書)' 두 글자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독서 방법도 《소학》 〈가언(嘉言)〉편 끝에 있습니다. 서책도 헛되이 읽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동시대 선비 가운데 연원(淵源)이 단정하고 지행(知行)이 명확한 자를 쫓아서 의심나고 모르는 부분을 묻고 답하며, 아울러 그 마음과 입으로 전한 것까지 얻어야 비로소 조예가 정밀해지고 실천이 중정(中正)할 것입니다. 부디 그대가 여기에 뜻을 두기를 바랍니다. 夫學趨向爲先, 自信爲難.賢者旣以不爲異端誘去自信, 則是大本已立, 道將自生.更何待別人指敎而要賤子一言乎? 且今百家喙喙各立門戶者, 不可勝數.然要皆其害易知, 其說易破, 非如墨子疑仁, 楊氏疑義, 老佛近理之爲似是而非者, 則以賢者之明, 不爲其所誘, 宜其易易.不惟賢者自信, 人亦信之也.但正道異端之分, 不獨在於幷世學界, 亦在於吾人心中.吾故曰:"不爲學界異端所誘易, 不爲心中異端所誘難."非聖人之道, 而別爲一端者, 爲學界異端, 則非本心之德而別生一端者, 非心中異端乎! 卽私妄之念是已.蓋人心惟危, 道心惟微.微也故因微而見公眞難, 危也故自危而陷私妄易, 此千古之通患.賢者雖明, 恐亦未能超然獨免.則請推此而容有一言可告者乎.夫自信有精粗深淺之異.在《大學》八條, 致知爲要.致者十分精深之謂.未有能致其知而不篤於自信者也.異端有易知難辨之分, 不惟在學而有老佛楊墨似是而非者, 在心亦有似公眞而實私妄者, 是爲難辨.夫有能致其知乎 則其難者不足憂, 而益信其不誘矣.此又更進一格之論也.夫道必以至者爲主, 不要且做第二等.賢者之所欲聞, 不在此乎.然則致知二字, 當爲賢者今日要務.其方具在朱子所論《大學章句或問》.然若其主功, 則不出乎讀書二字.讀書之方, 又具於《小學》〈嘉言〉篇末.而書又不可徒讀, 必從幷世儒士中, 淵源端的知行明確者, 講質疑晦, 幷與其心口所傳而得之, 始乃造詣精而踐履中矣.幸賢者於此加意焉. 도는……됩니다 정호(程顥)가 "제일등은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자기는 제이등이나 되겠다고 말하지 말라. 이렇게 말한다면 이는 곧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 된다. 비록 인에 거하지 않고 의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자와는 그 차이가 같지 않다 할지라도, 자기 자신을 작게 여기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학문으로 말한다면 곧 도에 뜻을 두어야 할 것이요, 사람으로 말한다면 곧 성인에 뜻을 두어야 할 것이다.[莫說道將第一等, 讓與別人, 且做第二等.才如此說, 便是自棄.雖與不能居仁由義者, 差等不同, 其自小一也.言學, 便以道爲志 : 言人, 便以聖爲志.]"라고 한 이야기를 가리키는데, 《근사록(近思錄)》 권2 〈위학류(爲學類)〉에 소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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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 종중에 올림 무오년(1918) 上星齋宗中 戊午 제가 일찍이 듣건대, 정부자(程夫子)가 훈계하여 말하기를 "인자는 천지 만물로 일체를 삼는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공정하게 하는 도리를 사람이 자기 몸으로 체득하면 인(仁)이 된다."33)고 하였습니다. 만물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뿌리가 같은 친족이면서 저와 나의 구분을 두는 것은 인자(仁者)가 하지 않는 바입니다. 일을 처리하면서 지극히 공정한 도로써 하지 않는 것은 인자가 편치 않은 바입니다.제가 생각해보건대, 석동산(席洞山)이 우리 김씨의 선산이 된 것은 군사공(郡事公)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대호군공(大護軍公)과 직장공(直長公) 두 분 이하 선영이 차례로 이어져있습니다. 두 분 자손이 힘을 합하고 재물을 모아 재실을 함께 세우고 제수음식을 함께 올린 지 지금까지 400백년입니다. 다만 대호군공과 직장공 외에 원재(元齋)의 제수음식은 유독 대호군공의 아들 시직공(侍直公)과 통례공(通禮公)에게만 미치고, 직장공의 아들 첨지공(僉知公)에게는 미치지 않으니 이것은 좋지 않습니다. 마땅히 이제까지 겨를이 없어 행하지 못한 예를 뒤늦게라도 거행하여, 제위(諸位)의 제사 의전으로 하여금 동일한 전례(典例)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지금은 그렇게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원재(元齋) 가운데 통례공의 아들 세 분의 제수를 내면서 같은 항렬의 여러 종형제의 지위에 있는 시직공과 첨지공의 아들은 일찍이 묻지도 않으니, 과연 이렇게 한다면 이른바 '지극히 공정하고 일체(一體)로 여기는 인(仁)'이란 것이 진실로 어떤 것입니까.엎드려 바라건대, 첨존께서는 위로는 선조 당시에 제종들이 화락한 정을 체인(體認)하시고, 아래로는 종족이 백세토록 돈독하고 화목한 우의를 생각하시어 시직공, 통례공, 첨지공 이하 제위의 제사 의전을 통틀어 원재의 재물로 함께 합향(合享)할 수 있도록 해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竊嘗聞程夫子之訓曰:"仁者以天地萬物爲一體." 又曰:"公而以人體之則爲仁." 萬物且猶然, 況乎同根之親, 而視有物我, 仁者之所不爲也.處事而不以至公之道, 仁者之所不安也.竊惟席洞山之爲吾金世阡, 自郡事公始.而大護軍公、直長公兩位以下兆塋, 秩然相繼.兩位子孫, 協力鳩財, 齋宇焉共建, 苾芬焉同薦者, 四百年于玆矣.但大護軍公、直長公之外, 元齋之粢牲, 獨延及於大護軍公之子侍直公、通禮公, 而不及於直長公之子僉知公, 此爲未善也.宜追擧未遑之禮, 使諸位祀典, 同出一例, 可也.今則非惟不以爲然, 又於元齋之中, 出通禮公之子三位享需, 而其在同行諸從之位, 侍直公、僉知公之子, 未嘗問焉, 果如是已, 則於所謂至公一體之仁者, 誠何如也.伏願僉尊上體祖先當日諸從湛樂之情, 下念宗族百世敦睦之誼, 侍直公、通禮公、僉知公以下諸位祀典, 統以元齋之物, 共爲合享之地, 千萬懇望. 공정하면서……된다 정이(程頤)가 공정함과 인(仁)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인의 도를 요약하면 하나의 '공' 자로 말할 수도 있겠지만, 공은 인의 도리인 만큼 공을 바로 인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공정하게 하는 도리를 사람이 자기 몸으로 체득할 때, 비로소 인이 되는 것이다.[仁之道要之, 只消道一公字, 公只是仁之理, 不可將公便喚做仁.公而以人體之, 故爲仁.]"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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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 종중에 보냄 무인년(1938) 與星齋宗中 戊寅 제가 듣건대, 지난번 선은동유허비(仙隱洞遺墟碑)34) 일로, 일이 분란이 많아 비석의 글자를 깎아내는 변고까지 있었다하여 몹시 놀랐습니다. 그리고 변고가 우리 종파 사람에게서 나왔다니 마음이 몹시 편치 않음이 또 어떻겠습니까. 곧 당사자가 사죄하고 또 종중에서 처벌하였다하니 그 일은 이미 잘 처리 된 것으로 압니다. 요사이 또 듣건대, 한 쪽 의론만으로 뒷면의 음기(陰記)를 갈아 없애려고 한다던데 과연 이런 말이 있었는지요? 만약 그렇다면 저는 문중 일의 분란이 그칠 날이 없을까 두렵습니다.제가 일전에 여러 번 비문(碑文)의 일로 여러 종친들과 변론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글은 칭찬과 선양이 온당함을 얻는 것이 귀하지 비단 칭호(稱號)에만 있을 뿐만이 아니니, 이 글의 칭양(稱揚)은 더할 나위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글을 받을 때 '선생'이라 불러주길 청하여, 받았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지 못하여 이미 새겨서 세웠으니 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비록 글을 사양하고 쓰지 않으려 해도, 그 글을 지은 이가 세상을 떠났으니 일이 심히 의미가 없고, 글 또한 보낼만한 데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등의 부류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조상을 폄훼하고 선사를 높인다는 배척을 받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아, 조상을 폄훼하는 것은 큰 악행입니다. 천하에 어찌 조상을 폄훼하는 악행을 하고서 능히 그 선사를 높이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제가 조상을 폄훼했다고 하는 것도 원래 그 실정이 아니며, 제가 선사를 높였다고 하는 것 또한 사실이 아닙니다. 단지 종중의 조치가 마땅치 않아서 사람들의 비난을 초래하였고, 위로 선조에 누를 끼칠까 두려워서 그런 것이니 실지로는 선조를 높인 일이지 선사를 높인 일이 아닙니다.만약 이 문장이 연재(淵齋)35)나 면암(勉菴)36), 송사(松沙)37), 약재(約齋)38) 같은 제현의 손에서 나왔을지라도 또한 마땅히 이와 같이 의론을 세울 것입니다. 어찌 구구하게 저의 선사께서 지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좋구나, 고인(古人)의 말이여! 그 말에 이르기를 "천하는 본래 일이 없는데 용렬한 사람이 스스로 어지럽힌다."39)고 하였습니다. 지난번에 앞면을 다시 새긴 것도 이미 옳지 않은데, 지금 또 사리를 궁구하지도, 사람들의 비난을 헤아려 보지도 않고 뒷면을 갈아 없애는 것은 또한 안 될 일입니다. 어찌 모두 아무 일이 없는데 스스로 어지럽혀서 분란을 초래한 것이 아니겠습니까.제가 오늘 첨존께 아뢰는 것은 전날 여러 종친들과 변론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개 지켜온 견해가 전후로 한결같이 이와 같아 단연코 다른 뜻이 없습니다. 종중 일에 대한 걱정을 스스로 그만둘 수 없어 이렇게 정성을 다해 말씀 드리니, 실정이 아닌 배척과 외부의 비방은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엎드려 바라건대, 첨존(僉尊)께서는 천리의 자연스런 이치를 따라서 한 쪽의 부당한 논의를 무마하시어, 크게 그릇된 일을 하여40) 외부의 모멸을 받는 데 이르지 않도록 해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竊聞向以仙隱洞遺墟碑事, 事多紛紜, 至有鑿碑之變, 萬萬可駭.而變出鄙派中人, 心切不安, 又如何哉? 旋聞當人謝罪, 而自宗中處罰, 則知其事已得當矣.近又聞一邊議論, 欲磨去後面陰記云, 未知果有此說否? 若爾則竊恐宗事之紛紜, 無有已時也.區區前此累以碑事與諸宗辨者.有曰:"文貴稱揚得當.不徒在稱號之間.而此文之稱揚, 則蔑以加矣.", 有曰:"受文時, 請稱先生而得之則善矣.念不及此, 旣已刻立, 則無辭可說矣.", 有曰:"雖欲退文不用, 旣不及作文家在世, 則事甚無謂, 文亦無可送處矣."之類, 不勝其多, 而至被貶祖尊師之斥矣.嗚呼! 貶祖大惡也.天下安有有貶祖之惡而能尊其師之理乎? 謂我爲貶祖者, 元非其情, 謂我爲尊師者, 亦非其實.特以恐宗中之擧措無當, 致人譏議, 上累祖先而然, 則實亦尊祖非尊師也.假使此文出於淵齋、勉菴、松沙、約齋諸賢之手, 亦當如是立論.豈區區爲鄙先師所作而然哉? 善乎, 古人之言! 曰:"天下本無事, 庸人自撓之." 向之改刻前面, 已是不可, 今又不究事理, 不恤人譏, 而爲磨去後面之尤不可者.則豈非皆無事自撓以致紛紜者乎? 澤述今日爲僉尊仰告者, 不過前日之與諸宗辨者.蓋所執之見, 前後一直如是, 斷無他意矣.宗事之憂, 不能自已, 有此瀝誠之言, 非情之斥.外來之謗, 有不可顧者.伏願僉尊循天理自在之理, 鎭一邊未當之論, 無至鑄大錯受外侮之地, 千萬幸甚. 선은동유허비(仙隱洞遺墟碑) 문정공(文貞公) 김구(金坵, 1211~1278)의 유허비이다. ?간재집(艮齋集)? 권18에 「지포김문정공유허비음기(止浦金文貞公遺墟碑陰記)」로 실려있다. 간재가 이 비문을 지을 당시 '선생'이라는 글자를 넣지 않고 지은 것이 간재가 세상을 떠난 후 문제가 된 것으로 보인다.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1836~1905). 자는 화옥(華玉), 호는 연재(淵齋), 본관은 은진(恩津)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학행(學行)으로 천거를 받아 성균관 좨주(祭酒)에 기용된 뒤 대사헌에까지 올랐다. 1905년(광무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고종황제를 알현하고 상소 10조를 바치며 진언하였다가, 다음날 일본 헌병대에 의해 고향 대전 회덕으로 이송당하자,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음독 자결하였다. 저서로는 《무계만집(武溪謾輯)》이 있고, 문집으로 《연재집(淵齋集)》이 간행되었다.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 문신이며 학자이자 의병장으로, 자는 찬겸(贊謙)이고, 호는 면암(勉菴)이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이다. 1855년(철종 6)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일본과의 통상 조약을 체결하려 하자 격렬한 척사소(斥邪疏)를 올렸으며, 단발령에 반대하였다. 경기도 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향리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리고 항일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74세의 고령으로 태인(泰仁)과 순창(淳昌)에서 의병을 이끌고 관군 및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전한 후, 체포되어 대마도(對馬島)에 유배 생활하던 중에 유소(遺疏)를 구술(口述)하고,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문집에 《면암집(勉菴集)》이 있다.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이다. 참봉을 지내 기 참봉으로 불렸으며, 호남의 거유(巨儒) 기정진(奇正鎭)의 손자로 그 학업을 이어받아 문유(文儒)로 추앙받았다. 약재(約齋) 송병화(宋炳華, 1852~1916). 자는 회경(晦卿)‧영중(英仲), 호는 난곡(蘭谷)‧약재(約齋),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흠모하여, 19살 때부터는 회덕(懷德) 남쪽, 우암이 기거했던 소재동에 자주 방문하였다. 저술로 《난곡집(蘭谷集)》이 있다. 천하는……어지럽힌다 당 나라 육상(陸象)이 한 말이다. 크게……하여 당 소종(唐昭宗) 연간에 위박 절도사(魏博節度使) 나소위(羅紹威)가 주전충(朱全忠)과 연합하여, 자신을 핍박하는 위부(魏府)의 아군(牙軍) 8천 인을 소탕하는 숙원을 풀었으나, 그 과정에서 주전충을 대접하느라 엄청난 재물을 탕진한 나머지 자신의 세력이 쇠잔해지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므로, 이를 후회하여 "6주 43현의 무쇠를 모아 줄칼 하나도 주조하지 못했다.[合六州四十三縣鐵, 不能爲此錯也.]"라고 말한 주성대착(鑄成大錯)의 고사가 전한다. 《資治通鑑 唐昭宗天祐3年》 《北夢瑣言 卷14》 여기에서 착(錯)은 곧 옥석(玉石)을 다루는 도구인 줄칼[鑢]이라는 뜻과 함께 착오(錯誤)의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으므로, 나소위가 스스로 큰 착오를 빚었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그래서 이 주착(鑄錯)의 고사가 만회할 수 없는 중대한 실수라는 뜻으로 쓰이곤 한다. 참고로 소식(蘇軾)의 〈증전도인(贈錢道人)〉 시에 이 고사를 인용하여 "당시에는 한번 뜻이 쾌했어도, 일이 지난 뒤엔 부끄러움이 남는 법. 모르겠네 몇 주의 무쇠를 모아, 이 하나의 착오를 빚어냈는지.[當時一快意, 事過有餘怍, 不知幾州鐵, 鑄此一大錯.]"라고 표현한 말이 나온다. 《蘇東坡詩集 卷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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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재 문중에 올림 기미년(1919) 上粉齋門中 己未 지난 가을 판곡(板谷) 유허비41) 일로 일의 단서를 여쭈었습니다만 그 말씀을 다 듣지 못하였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대개 이 땅은 죽계(竹溪 김굉(金鋐)) 선조께서 당시 학문에 전념하시고 명석(名碩)들이 서로 종유하던 곳일 뿐만 아니라, 누세토록 노래하고 곡하고 종족이 모이던 곳42)이니, 곧 우리 김씨 일파가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고향 마을입니다. 문정공이 선학(仙鶴)43)에 처음 거처하고 화곡공(火谷公)44)이 개박(介朴)에 난을 피한 곳과 견줄 게 아닙니다. 똑같은 선인(先人)의 자취이고 똑같이 자손이 있는 곳인데 어떤 데는 빗돌이 찬란하여 사람의 이목을 통쾌하게 하고, 어떤 데는 모두 풀만 무성하여 지나는 사람의 탄식을 자아내니 진실로 어떻게 된 것입니까. 참으로 한숨만 나옵니다.지난 일은 탓할 수 없지만 앞으로 올 일은 가히 추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만약 아무 일도 아닌 것으로 여겨 지난 자취와 옛일을 빗돌에 근거를 남겨 말하지 않는다면, 세대가 지나고 세월이 흘러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탄식하는 사람조차도 없을 것입니다. 나중에 비록 현명하고 효성스런 자손이 나와서 오늘 미처 하지 못한 일을 하고자 해도 어떻게 시행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청하건대, 깊이 생각하고 멀리 헤아려 서둘러 대사(大事)를 도모하십시오. 昨秋, 以板谷遺墟碑事, 微稟其端, 未究其說.不審再入思議否? 蓋此地, 非惟竹溪先祖當日藏修名碩相從之所, 乃累世歌哭聚族之處, 則吾金一派桑梓故里.有非文貞公仙鶴初居, 火谷公介朴避亂之比也.同是先跡, 均有子孫之地, 或貞珉煥然快人耳目, 或鞠爲茂草行路齎咨, 是誠何以? 良可一吁.往旣勿諫, 來者可追.今若視爲無事, 不使往蹟故事, 憑諸片石之堪語, 則世經年移, 幷與其指點咨嗟者而無矣.後雖有賢孝子孫者出, 欲擧今日之未遑, 奚從而施之哉! 伏乞深思永慮, 亟圖大事焉. 판곡(板谷) 유허비 죽계(竹溪) 김횡(金鋐)의 유허비로 김복한(金福漢, 1860~1924)이 지었다. 판곡(板谷)은 전북 부안군 보안면 부안 김씨 직장공파의 세거지이다. 노래하고……곳 진(晉) 나라 헌문자(憲文子)가 저택을 신축하여 준공하자 대부들이 가서 축하하였는데, 이때 장로(張老)가 말하기를, "규모가 크고 화려하여 아름답도다. 제사 때에는 여기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상사(喪事) 때에는 여기에서 곡읍을 하고, 연회 때에는 여기에서 국빈(國賓)과 종족을 모아 즐길 것이로다.[美哉輪焉! 美哉奐焉! 歌於斯, 哭於斯, 聚國族於斯.]"라고 하니, 헌문자가 장로의 말을 되풀이하며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면서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자, 군자들이 축사와 답사를 모두 잘했다고 칭찬한 고사가 전한다. 《禮記 檀弓下》 선학(仙鶴) 선은(仙隱)의 옛 지명이다. 화곡공(火谷公) 김명(金銘)이다. 직장공파 매죽공(梅竹公) 김종(金宗)의 손자로 죽계공(竹溪公) 김굉(金鋐)의 중형(仲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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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제 여안 억술에게 답함 병진년(1916) 答季弟汝安 億述 丙辰 비가 계속 내리는 좁은 여막에서 우두커니 홀로 앉아있으니 부모님을 잃은 아픔45)과 형제를 그리는 마음46)으로 정히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는데 이러한 때에 네 편지를 받으니 비할 데 없이 위로가 되는구나. 같은 가족끼리 잘못을 뉘우친다하니 내 마음이 슬픔에 복받치는구나. 무릇 이렇게 서로 질책하는 것은 모두 곤궁한 처지를 구제하는 계책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모두 내가 어리석고 못나 사업을 그르쳐서 너에게 걱정을 안겨주었으니 참으로 부끄럽구나.대저 집안의 흥망은 비록 말하기를 "인사(人事)의 선악에 달려있다."고 하더라도 그 근본을 궁구하면 운기(運氣)의 통색(通塞)에 관계되어 있으니 더 이상 누구를 원망하고 탓하겠느냐. 비록 그렇지만 또 삼가 부지런히 하여 후일의 만전을 기하지 않을 수 없으니, 하늘이 화를 내린 것을 후회하기를 바란다. 고인이 이르기를 "곤궁해도 의를 잃지 말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곤궁해도 또 더욱 굳건히 하라."고 하였으니, 원컨대 가난 때문에 뜻을 버리지 말고 늘 스스로 격려하여 기량(器量)과 덕업(德業)을 이루고 가문의 명성을 잇기를 바란다.아, 옛날의 선비 된 자는 영화를 이루었지만 오늘날의 선비 된 자는 치욕을 부른다. 옛날의 독서한 이는 천 종(鍾)의 녹이 있었지만 오늘날의 독서한 이는 종신토록 굶주린다. 우선 농사일에 부지런히 힘써서 선조를 받들고 아래로 자식을 기르는 것이 낫다. 부디 피차(彼此)가 수고로움과 편안함이 공평하지 못하다고 성내지 말고 고생을 참아내며 한결같이 실천해나가, 내가 철수하고 돌아갈 날을 기다리길 바란다.나 또한 장차 쟁기를 잡고 호미를 메고, 몸을 땀으로 적시고 발에 흙을 묻히면서 옛사람이 자신의 힘이 아니면 먹지 않는다는 의리를 따를 것이다. 그러나 단지 구복(口腹)을 채우기에만 힘쓰고 의로써 몸을 바르게 하고 예로써 집안일을 처리할 줄 모른다면, 이것이 사람과 짐승이 구분되는 것이다. 짐승을 면하고 사람이 되길 구하고자 하면 또한 독서가 아니면 이를 수가 없다. 그렇다면 독서를 어찌 그만 둘 수 있겠느냐! 농사에 밝은 것은 시급한 것을 구하는 것이고, 독서에 힘쓰는 것은 평생의 대사임을 알겠다.친지들이 이곳을 들러 두 분의 묘소를 보고 모두 재해가 있을까를 우려하니, 안타깝고 근심스런 마음이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구나. 저들이 묘금(墓禁)47)을 내리기 전에 이장하여 오늘날 합장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구나. 그러나 거센 바람과 폭우도 아침나절 내내 지속되는 경우는 없으니 저들의 금령이 비록 엄혹할지라도 어찌 오래갈 수 있겠느냐. 다만 한스러운 것은 맨손이라는 것이다. 모름지기 이 한 가지 일에 있어 계속 생각을 여기에 두어야 한다.너는 스무 살이 안 되어, 비록 장대하다고는 해도 기혈의 충만함이나 근골의 견고함은 여전히 나에게 미치지 못한다. 상(喪)을 이기지 못한 것은 불효를 면치 못하는 것48)이다. 그러니 먹고 마실 적에 역량에 맞춰 행하도록 하여라. 積雨隘廬, 累然塊坐, 蓼莪之痛, 鶺鴒之懷, 定無淚乾之時, 際得手滋, 慰沃可敵.同堂悔過之云, 吾心惻惻有動.凡此相責, 皆爲救窮失策.而總由吾迂拙敗業, 以致汝憂, 是可愧也.大抵家之興敗, 雖曰:"在於人事臧否.", 究其本, 則實係運氣通塞, 復何怨尤.雖然, 又不容不謹勤善後, 以冀上天之悔禍也.古人云:"窮不失義.", 又曰:"窮且益堅.", 願勿因貧窮而墮志, 常自激昻, 成器業而繼家聲也.噫, 古之爲士者, 致榮;今之爲士者, 招辱.古之讀書也, 有千鍾祿;今之讀書也, 有終身飢.不若且就畎畝中勤力, 奉先俯育之爲愈也.幸勿以彼此勞逸之不均爲慍, 忍辛耐苦, 一意做去, 待吾之撤歸也.吾亦將操耒荷鋤, 沾體塗足, 追古人非力不食之義也.然徒務口腹之充, 而不知以義飭躬以禮處家, 則是人獸之所分.欲求獸之免而人之爲, 又非讀書, 無以致之也.然則讀書豈可以已乎! 是知明農者, 救時之急務;讀書者, 終身之大事也.親知過此, 見兩位墓所, 皆慮有災害, 憫憂之心, 如坐針氈.恨未及彼人墓禁前移窆, 而得今日合祔也.然疾風暴雨, 無崇朝之遲, 彼禁雖嚴, 豈能久乎! 但所恨者手赤耳.須於此一著, 念念在玆也.汝是弱冠前, 雖曰"壯大", 氣血之充, 筋骨之固, 尙不及我.不勝喪, 不免爲不孝.此則飮食之時, 量力而行之也. 부모님을 잃은 아픔 《시경》〈소아(小雅) 육아(蓼莪)〉에 "슬프고 슬프도다 부모님 생각, 낳고 길러 주시느라 얼마나 고생하셨던가.[哀哀父母, 生我劬勞.]"라고 하였다. 형제를 그리는 마음 원문 영원(鴒原)은 《시경》〈소아(小雅) 상체(常棣)〉의 "저 할미새 들판에서 호들갑 떨 듯, 급할 때는 형제들이 서로 돕는 법이라오. 항상 좋은 벗이 있다고 해도, 그저 길게 탄식만을 늘어놓을 뿐이라오.[鶺鴒在原, 兄弟急難.每有良朋, 況也永歎.]"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묘금(墓禁) 1912년 조선총독부에서 강제로 개인묘지를 일절 금지시키고 공동묘지만을 허용하며 화장을 적극 장려하는 칙령을 내렸다. 상(喪)을……것 어버이의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병이 났는데도 음식이나 약물로 병을 치료하지 않는 것은 나를 낳아 주신 부모에 대해서는 불효이고 자손에 대해서는 자애롭지 못함이 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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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제 여안에게 보냄 정사년(1917) 與季弟汝安 丁巳 형복(炯復)이가 돌아와 근래 네가 아주 부지런히 글을 읽다 문득 한밤중이 되곤 한다는 것을 알게 되니 내 마음이 크게 위로 되는구나. 우리 집안이 이 지역에 살아온 지 또한 8대가 되었는데 가문이 한미하고 가난하여 남에게 드러낼 게 없었다. 다만 대대로 문행(文行)이 이어졌고, 돌아가신 부친 또한 효와 공경, 절제된 행실, 시와 예로 집안을 부지하여 당세의 대군자(大君子)에게 중망을 받았다. 이는 떳떳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내가 그것을 이어서 열심히 공부하여 몸을 이루어 위로 선친의 뜻을 천명하고 아래로 후손에게 모범이 되어야 하는데, 기질이 이미 순수하지 못하고 행실에도 힘을 쏟지 않아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구나. 어느새 불혹의 나이에 가까워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신을 탓하며 슬픔에 잠겨 즐겁지 않구나. 우리 여안이가 독려하지 않아도 이 일에 뜻을 두고서 의리에 잠심하고 법도에 몸을 두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아마 선친(先親)의 영령이 지하에서 인도하여 입신(立身)하고 덕을 이루게 하여 가문의 명성을 빛나게 하려는가보다. 나 역시 깨우치고 분발한 것이 깊고 도움을 얻은 것이 크구나. 그러나 사람의 정력은 한계가 있어 계속하기가 어렵고 기운에는 성쇠가 있어, 뜻이 따라서 견고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한다.만약 그 마음을 과하게 써서 효과를 얻지 못하면 정력이 이미 소진되어서 의지는 해이해진다. 이것이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고, 나아감이 예리하면 물러남이 빠른 근심'이 있게 되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입지(立志)는 마땅히 어떻게 해야겠느냐. 인(仁)을 자기의 임무로 삼아 죽은 후에야 그치는 것이 이것이다. 용공(用功)은 마땅히 어떻게 해야겠느냐. 반드시 어떤 일이 있어도 잊지 말고 조장(助長)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이것이다. 復兒回, 知近頗劇讀, 輒到夜分, 大慰我懷.吾家居玆土, 且八世, 族寒而貧, 無以炫耀於人者.但世以文行相承, 先君又以孝敬制行詩禮持家, 見重於幷世大君子.此可以有辭矣.不肖繼之, 宜其奮學成身, 上以闡先志, 下以範後昆, 質旣未純, 行又不力, 兀兀無成.遽近不惑之年, 撫躬自咎, 愀然不樂.何幸吾汝安, 不待督勸, 而有志斯事, 潛心於義理, 置身於繩墨.意者, 先人之靈, 有以冥誘, 使之立身成德, 用光家聲也.吾亦警發深, 而得助大矣.然人之精力, 有限而難繼, 氣之盛衰, 志隨而堅脆.若過用其心, 而求效不獲, 則精力旣竭, 而志意瓓珊.此所以有"有始鮮終、進銳退速"之患也.然則, 立志也, 當如何? 仁以爲己任, 死而後已, 是也.用功也, 當如何? 必有事焉, 勿忘勿助, 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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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계당실기 발문【임신년(1932)】 善繼堂實紀跋 【壬申】 누구의 집에 가 머무는가와 누구를 자기 집에 들이는가를 봄, 이것이 사람 보는 법이다. 남을 주인 삼고 남에게 주인이 되어주는 것이 만약 적절하다면, 일도 이에 따라 곧 현부(賢否)가 판별될 것이다. 만약 같은 조정에 벼슬하던 사람들이 시국의 변고를 만나서 그 진퇴와 등락이 똑같은 결과로 귀착되었다면 그것이 정(正)에 의한 것이었든 사(邪)에 의한 것이었든 한 몸인 사람들이 아닐 수 있겠는가?숙종이 즉위한 초기에 권흉(權凶)들이 집권하였다가, 경신년(1680, 숙종6)에 이르러서 왕께서 교화의 틀을 바꾸셨는데153) 이것은 바로 송우암(宋尤庵) 선생이 일진일퇴를 하던 때였다. 선계당(善繼堂) 김 공 같은 분은 그 때 같이 물러나 배척되다가 다시 같이 등용되어 처음으로 병부낭관(兵部郎官)에 발탁되었다. 사물은 끼리끼리 모이고 무리지어 나눠진다 하였으니 기질과 취향이 통하는 자들끼리는 함께하지 않을 수 없으며, 신분의 높고 낮음이나 학업의 크고 작음 때문에 한 몸이 될 수 없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여기서 공에게 근본을 수립한 바가 있었음을 볼 수 있다.공은 집에서는 효도하고 우애했으며, 조정에 들어서는 충직하였고, 고을을 다스림에는 청백리로 칭송이 자자하였다. 문사(文辭)는 한가한 여벌의 일로 여겨서 산실된 끝에 겨우 한두 편이 남아있는데, 그것으로도 그의 전체의 아름다움을 보기에 충분하니 어찌 많기를 바라겠는가.여러 현자들이 지은 행장(行狀), 뇌사(誄辭), 서문(序文), 간독(簡牘) 등의 류를 모으고 연보를 덧붙여 실기(實記) 한 권으로 완성해 내는 것은 후손들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책무이다. 생각건대 삿되고 바름, 어질고 어리석음은 사람의 중대한 구분점이며, 당시의 우암 같은 큰 군자와 더불어 현달과 퇴출을 함께 한 것은 또한 공의 평생에 크게 빛나는 절조(節操)였다. 이제 김인기(金仁基)와 김동기(金東基) 군이 글을 청하는데, 책 말미의 글에 세밀한 서술을 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다만 공의 큰 부분만 이와 같이 써, 공이 이미 어질고 바른 군자로 인정받았으며, 사람은 그 부류를 미루어 보면 그 내면에 온축(蘊蓄)된 덕행을 알 수 있음을 밝힌다. 以其所主與所爲主, 觀人法也。 主人、主於人若可謂適然, 事猶卽此而賢否是判。 若乃仕同朝, 而値時局之變, 進退顯晦一致而同歸, 則以正以邪, 庸詎非一體人歟? 我○肅廟初服之權凶當路, 及夫庚申之○聖化更張, 此實尤菴宋先生一進一退之時也。 時則有呵, 若善繼堂金公同其退而擯不見用, 同其進而首擢兵部郞。 方以類聚、物以群分, 聲氣之應、燥濕之就, 自有不得而不同者, 不可以名位有高下, 學業有大小, 謂之不一體也, 明矣。 于以見公所立之有本也。 宜其居家孝悌, 立朝忠直, 治縣淸白之藉藉稱述也。 至於文辭, 屬公餘事, 存一二於散亡之餘者, 猶足以知全體之美, 亦何待乎多哉! 惟其裒稡諸賢所述狀誄序牘之類, 附以年譜, 而合成實紀一卷, 則後孫不容已之責也。 竊惟邪正賢否, 人之大分, 與當時大君子同其顯晦, 又其生平大節也。 今於仁基、東基君之請文也, 難以細述於卷尾之題, 但書公之大者如此, 以明公旣得爲賢正君子, 人則可推類而識其德行之蘊云爾。 숙종이……바꾸셨는데 1674년(현종15) 갑인예송(甲寅禮訟)에서 1680년(숙종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庚申換局)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갑인예송에서는 인선왕후(현종 모친)의 복제 쟁론에 의해 남인 허적 등이 정권을 잡고 서인 김수흥(金壽興) 등이 축출되었다. 경신대출척에서는 역모 고변에 의해 송시열 등의 서인이 정권을 회복하고 남인 허적(許積)ㆍ윤휴(尹鑴) 등이 축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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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제 여안에게 보냄 정사년(1917) 與季弟汝安 丁巳 이번 행차에 너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으니, 혹시라도 내가 스승께 힘써 말하지 않았다고 여겨 마음에 겸연쩍은 것이 있는가? 진실로 이런 마음이 없다면 그만이지만 만약 이런 마음이 있다면 여기에는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맹자께서 말하기를, "돌아가 구하면 여러 스승이 있다." 하였고,50) ?예기?에 말하기를, "삼왕(三王)51)과 사대(四代)52)는 오직 스승에 말미암았다." 하였다.53) 무릇 성사(性師)와 경사(經師)가 스승 아닌 것이 없다. 그러나 고금의 사람들이 반드시 인사(人師)를 찾아 배우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진실로 성(性)과 리(理)는 은미하여 보기 어렵고 성인의 말은 오묘하여 알기 어려워, 자연히 나면서부터 알아 마음으로 깨닫고 몸소 터득한 자가 아니면, 반드시 귀를 잡고 입으로 전수해 주는 것을 기다린 뒤에야 전해진 묘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사(人師)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은 분명하다. 이미 인사(人師)가 없어서는 안 됨을 알았다면, 그 속수(束脩)의 예를 행하여 명단에 들고[入案], 호칭을 세워 사제의 관계를 맺는 것 또한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그렇지만 스승이 가르치는 바와 제자가 배우는 바는 곧 도(道)와 의(義)에 있지 호칭에 있지 않으니, 그 안과 바깥, 이름과 실제[文實]의 완급을 또한 알 수 있다. 무릇 70명의 제자 무리 중에 안자(顏子)와 증자(曾子)가 가장 어렸고, 그들이 공자를 스승이라 부른 것은 의당 자로(子路)와 자공(子貢)보다 늦었지만 유독 그 종지(宗旨)를 얻었다. 자사(子思)의 문하에서 맹자는 친히 학업을 전수 받지 않았지만 끝내 그 도를 전해 받았고, 유원성(劉元城)54)은 온공(溫公)55)에게 5일 동안 가르침을 받았지만 종신토록 쓰임이 되었다. 이를 통해서 살펴보건대, 도의 전수를 얻음은 공력을 들이는 기민함과 독실함에 관계된 것이지, 스승이라 일컬음이 빠른 지 늦은 지와 관계가 없는 것 또한 이미 분명하다.나의 이 말은 비록 어폐가 있는 것 같지만, 그 실지 수업을 받지 않으면서 외람되이 아무개의 문인이라고 일컫는 자를 경계하기에는 또한 매우 적절하지 않겠는가? 이번 행차가 당초 계획과 어긋난 것은 목전에 놓인 시의(時義)에 스스로 헤아리는 바가 있어 그런 것이지, 오로지 이를 징계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의 이치가 실로 이와 같은 점이 있다. 이제 네가 간옹(艮翁)에 대하여 비록 예물을 드리고 사제 관계를 맺는 데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맹자의 몸소 가르침을 받지 않음과 원성(元城)의 5일의 가르침에 견주면, '넉넉히 남음이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원컨대 삼석(三席)56)에서 들은 것을 가지고 정밀하게 궁구하고 힘써 행하되 얻지 못하더라도 그만두지 말고, 평상시 말과 행동은 들은 바 뜻에 부합되게 하여라. 그러면 설령 당시 스승이라 부르지 못하였더라도 후세에 도를 전해 받은 제자가 되는 데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예물을 바치고 사제 관계를 맺기를 다음번을 기다려 반드시 실행하기로 한 자임에랴? 만약 이번 행차가 헛되이 돌아왔다고 하여 스스로 조금이라도 그만두고 물러나려는 생각이 있다면, 결코 도를 구하고 실제에 힘쓰는 본뜻이 아니다. 혹시라도 남에게 내보이려고 명성 있는 분을 가까이하려는 사사로운 뜻이 개입된다면 하늘이 반드시 싫어할 것이다. 今行, 未遂汝願而歸, 豈或意吾不力言於函席, 而有歉然于中者乎? 苟無是心則已, 如不免有此, 此有不然者存也.孟子曰:"歸而求之, 有餘師." 記曰:"三王四代, 惟其師." 夫性師、經師, 罔非師也.而古今人之必求人師而學之者, 何也? 誠以性理微而難見, 聖言奧而難知, 自非生知之心悟而體得者, 必待耳提口授而後, 得相傳之妙.然則其不可無人師也, 審矣.旣知人師之不可無, 則其行脩入案、立號定倫, 又不容已也.然師之所以敎、弟子之所以學, 乃在於道義而不在稱號, 則其內外文實之緩急, 又可知已.夫七十之列, 顔、曾最少, 其稱師, 宜由、賜之後, 而獨得其宗.子思之門, 孟子不親受業, 而卒傳其道, 劉元城得溫公五日敎, 而爲終身用.由此觀之, 得道之傳, 係乎用功之敏篤, 無係乎稱師之早晩也, 亦已審矣.吾之此言, 雖若有弊, 其爲無實業而猥稱某門人者之戒, 則不亦切乎? 若乃今行之違初料, 以目下時義, 自有商度者而然, 非爲專懲乎此戒也.然事理實有如此者.今汝於艮翁, 雖未及納贄定倫, 視孟子之不親炙、元城之五日敎, 則可謂優餘矣.願將所聞於三席者, 精究力行, 不得不措, 要使日用云爲, 符合所聞之旨, 則假使未得稱師於當日, 不害爲後世傳道之弟子.況納贄定倫, 容俟後回而必行者乎? 若因今行之虛歸, 有自小隳退之念, 則決非求道務實之本旨, 或涉爲人近名之私意, 天必厭之. 맹자께서……하였고 《맹자》 〈고자 하〉에 보인다. 전국 시대 조군(曹君)의 아우인 조교(曹交)가 일찍이 맹자의 문하에 들어가서 요순(堯舜)의 도를 배우겠다고 청한 데 대하여, 맹자가 이르기를 "대저 도는 큰길과 같은 것이니, 어찌 알기가 어렵겠는가. 사람들이 구하지 않은 게 병통일 뿐이니, 그대가 집에 돌아가서 구한다면 배울 만한 스승이 많을 것이다.[夫道若大路然, 豈難知哉? 人病不求耳. 子歸而求之, 有餘師.]"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이에 대해서 주희는, "배울 만한 스승이 많다는 것은 곧 집에 돌아가 어버이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는 등의 일에서 구한다면 자기 본성의 분한 내에 오만 이치가 다 갖추어져서 처하는 곳마다 발현하여 이 모두가 스승으로 삼을 만하여 머물러서 학업을 전수받을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라고 하였다. 《孟子集註大全》 삼왕(三王) 중국 고대(古代)의 세 임금. 즉 하 우왕(夏禹王), 은 탕왕(殷湯王), 주 문왕(周文王) 또는 무왕(武王)을 일컫는 말임. 사대(四代) 우(虞)와 하(夏)ㆍ상(商)ㆍ주(周)의 삼대(三代)를 합친 말이다. 옛……하였다 《예기》 〈학기〉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보인다. "군자는 배움에 이르기 어려움과 쉬움을 알고 그 자질의 아름다움과 나쁨을 안 뒤에 널리 가르칠 수 있으며, 널리 가르칠 수 있은 뒤에 스승이 될 수 있고, 스승이 될 수 있은 뒤에 장(長)이 될 수 있고, 장이 될 수 있은 뒤에 군주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스승은 그를 통해 군주가 되는 도리를 배우는 것이다. 이 때문에 스승을 선발하기를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옛 기록에 '삼왕(三王)과 사대(四代)가 오직 스승에 말미암았다.' 하였으니, 이것을 말함일 것이다.[君子知至學之難易而知其美惡, 然後能博喩, 能博喩然後能爲師, 能爲師然後能爲長, 能爲長然後能爲君.故師也者, 所以學爲君也.是故擇師不可不愼也.《記》曰"三王四代唯其師", 其此之謂乎!]" 유원성(劉元城) 북송의 명신인 유안세(劉安世, 1048~1125)로, 그가 원성 사람이므로 이렇게 칭한 것이다. 사마광(司馬光)의 문인인데, 철종(哲宗) 즉위 후에 사마광이 집권하자 그의 천거로 관직에 나갔으나 간신인 장돈(章惇)에 의해 광동(廣東)과 광서(廣西) 등 멀고 험악한 곳으로 일곱 번이나 유배 가면서도 의지를 굽히지 않으니, 소식(蘇軾)은 그를 '철한(鐵漢)'이라 일컬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宋史 卷345 劉安世列傳》 온공(溫公) 송나라의 명재상 사마광(司馬光, 1019~1086)으로, 자는 군실(君實), 호는 우수(迂叟), 시호는 문정(文正)이며, 속수선생(涑水先生)으로 불린다. 사후 온국공(溫國公)에 봉해졌으므로 사마온공으로 부른다. 저서로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이 있다. 삼석(三席) 임금이나 신하, 스승과 제자 사이의 매우 가까운 거리를 말한다. 《禮記 文王世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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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실기 발문 【병인년(1926)】 新齋實紀跋 【丙寅】 군자의 언행은 세상의 법칙이 될 수 있다. 그런즉 세상 사람들이 군자의 실기(實紀)를 만들고 그것을 가져다가 한 나라 한 고을의 법칙으로 삼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저 신재(新齋) 채(蔡)공의 어짐과 효성은 능히 하늘을 감동시켜 어머니의 먼 눈을 뜨게 하였고, 그것을 남들이 배워 따라했고 마을에 전해져 칭송을 받았다. 그리하여 사관이 기록하고 방백이 추천하여, 정려와 증직의 포상이 조정에서 내리고 사림이 제향하며 존숭하였다. 그 훌륭한 자취와 아름다운 명성은 이제 고을의 법이 되었다. 그런데 채동필(蔡東必) 군이 실기의 자료를 편집하는 것은 선조를 위하는 훌륭한 일이긴 하지만 너무 지나친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 요순(堯舜) 같은 성인도 우사(虞史) 두 책154)이 있은 다음에야 요(堯)임금의 공경하고 밝으며 공평하고 문채로움, 그리고 순(舜)임금의 깊고 지혜로우며 신중하고 아름다움과 같은 허다한 덕업(德業)이 오래도록 잘 드러났다. 이 두 책은 바로 요와 순의 실기이다. 무릇 실기가 비록 군자의 덕을 실제 그대로 싣지 못하더라도, 그 다행스러운 바는 후세 사람이 기리며 사모하는 것이다. 동필 군이 흩어진 원고와 스승님의 가르침 그리고 제가의 칭송의 글을 모아 《신재실기(新齋實紀)》를 만든 것은 장래 선조의 유업을 본받으려는 후손들로 하여금 더욱 밝히 알고 더욱 기리도록 할 것이니 이를 어찌 그칠 수 있겠는가.공이 진리를 깨달은 나머지 얻은 바의 주옥같은 말씀들이 전해지지 않고, 행실과 업적을 살펴보기 어려운 것은 애석하다. 비록 그러하나 공이 농암(礱巖)155)을 사사하고 도암(陶菴)156)과 교분을 맺어 학문의 바른 연원과 도의의 큰 보탬을 얻었다. 그리고 공경(恭敬)을 주로 하여 이치를 궁구하는 것은 바로 유학의 근원인데, 이를 또 농암에게 배우셨다.대체로 옛 현자들은 일이관지(一以貫之) 및 성(性)ㆍ천도(天道)에 관한 말157)을 듣고서 증자(曾子)와 자공(子貢)의 학문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대의 고금과 지위의 고하에 차이가 있지만, 바로 이 경(敬)과 지(知)의 전수에 의해서 다른 말 필요 없이 공의 학문을 알 수 있으니, 이것을 여기에 쓴다. 君子言行可以爲天下法則, 則天下人爲其實紀, 降此而法則乎一國一鄕者亦然。 若新齋蔡公之賢孝能感天而致母瞖之明, 學及乎人而有傳里之稱。 故史氏錄之, 方伯薦之○旌贈褒朝家, 祠祝崇士林, 懿蹟徽韻至今爲鄕邦法。 東必君之捃摭實紀爲爲先能事。 不已勤乎? 未然也。 夫以堯舜之聖, 猶待虞史二典之述, 然後欽明平章、濬哲愼徽, 許多德業著詳乎萬世。 玆二典者, 卽堯舜之實紀。 蓋紀雖無與君子實德, 所幸在後人誦慕。 君之裒稡逸稿、師訓及諸家贊述, 合成新齋實紀, 俾來許箕裘模範者, 得以愈詳愈慕, 烏可已哉! 惟其粹言得於契悟之餘者無傳, 難以考行業之有自惜哉! 雖然公師事礱巖, 託契陶菴, 旣得淵源之正, 道義之益。 至若主敬窮理, 乃斯學源頭, 而又與聞於礱翁。 蓋昔賢以一貫、性、道之聞謂見曾貢之學, 則雖世有古今, 地殊高下, 卽此敬知之傳授, 有不待言而知公之學者, 是可以書。 우사(虞史) 두 책 우(虞)는 순(舜)임금의 나라를 말하며, 두 책은 《서경》의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을 가리킨다. 농암(礱巖) 농암은 김택삼(金宅三 1649~1703)의 호이며, 김택술의 방계 육대조이다. 송시열의 문인으로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실제로 나아간 적은 없다. 숙종 때 세워진 부안의 '유천서원' 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는 『농암유고』가 있다. 도암(陶菴) 이재(李縡, 1680-1746)의 호이다. 이재는 본관이 우봉(牛峰).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陶菴)·한천(寒泉). 이유겸(李有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숙(李䎘)이다. 아버지는 진사 이만창(李晩昌)이며, 어머니는 민유중(閔維重)의 딸이다.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이다. 일이관지(一以貫之)……관한 말 공자가 "증삼(曾參)아 나의 도(道)는 일이관지(一以貫之)이다." 하자 증삼이 "예(알겠습니다)!" 하고[子曰: 參乎! 吾道一以貫之。《論語.里仁》], 또 자공(子貢)의 물음에도 일이관지라고 대답한 것[予, 一以貫之。《論語.衛靈公》], 그리고 자공(子貢)이 "선생님께서 성(性)과 천도(天道)를 말씀하시는 것은 들어보지 못하였다.[夫子之言性與天道, 不可得而聞也。]"라고 한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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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집 발문 【을축년(1925)】 白水集跋 【乙丑】 내가 일찌기 옛사람을 평가하는 사람에게 들은 적이 있는데, 백수 양응수(白水楊應秀)158) 선생이 산중에서 고고하게 사는 고을의 어진 선비라고 하였다. 그가 남긴 글을 얻어 읽어보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고 있었는데, 신유년(1921) 가을 양병회(楊秉晦)군이 선생의 유고 일부를 가지고 와 내게 보여주며 말했다. "선조의 문집을 서둘러 간행하지 못하여 지금까지 일곱 세대가 지나갔습니다. 문장 교정의 일을 구산선생(田愚)께 찾아가 부탁하였더니, 다시 어르신께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잘 생각해 주십시오." 나는 학식이 보잘 것 없어 진실로 이 일에 참여할 수 없었지만, 구산선생님의 무거운 명이 있었고 또 그 글을 보게 된 것이 기뻤다. 그래서 허락을 해놓고는 시험 삼아 손대며 끝마치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 을축년(1925) 봄 양군이 다시 와 독촉했고, 나는 이에 삼가는 마음으로 매우 힘써 진행하였다. 그리고 교정의 일을 마친 후 양군(楊君)의 요청에 따라, 외람되이 책 말미의 발문(跋文) 한 말씀을 덧붙인다.옛날에 호걸인 선비가 자신을 위한[爲己] 학문을 하였다 했는데, 나는 선생에게서 그것을 보았다. 널리 배우고 상세히 설명하는 것은 되돌아 요약하고자 함이요, 도학에 깊이 나아가는 것은 스스로 터득하기 위함이니, 이것은 맹자의 가르침이 아닌가?세상의 학문 높은 명문가를 보면 어떤 이는 지식과 정보가 풍부하고 표현이 휘황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눈이 부시고 귀가 울리게 하는데, 그것이 마치 페르시아의 보석이 눈을 즐겁게 하는 것과 같아, 실제의 쓸모를 찾아보면 보이지 않는다. 또 어떤 이는 남이 한 말만 믿고 진부한 옛 것을 답습하면서 자신은 옛 사람의 가르침을 성실히 지킨다고 하는데, 자신의 마음에 돌이켜 증험할 줄은 전혀 모르고 거의 앵무새처럼 남의 말을 전하기만 하기도 한다.선생의 학문은 이와 달랐다. 경전, 제자백가와 역사서를 두루 섭렵하며 그 예악과 명칭과 사물을 분명하게 파악했고, 그 요체로서는 마음의 성품과 신묘한 이치를 깊이 탐구하였다. 그래서 많이 기억하고 글을 꾸미는 것까지는 미칠 겨를이 없었다. 선생이 궁구한 것은 하늘과 사람의 궁극의 도리였는데, 반드시 마음으로 깨달아 신묘하게 이해하기를 기약하였다. 따라서 만약 의심을 아직 털어내지 못한 경우에는, 그것이 옛 성현의 말씀이라는 이유로 억지로 추종하지는 않았다. 맹자가 말한바, 돌이켜 요약하며 스스로 터득하려 한다는 것이 이것이 아니겠는가. 글과 말을 숭상하는 풍조에 얽매이지 않는 것은 호걸이 아니면 할 수 있을까? 되돌아 요약하고 스스로 터득하고자 하면 이것 또한 자기를 위함[爲己]이 아니겠는가. 그 속에 지닌 바가 이와 같았다. 그래서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 행실은 법도에 충실하고 덕은 원근 모두에게 두터웠으며, 마침내는 언덕의 학소리가 하늘에까지 들렸으니, 아아, 탁월하도다!나의 어리석고 비루함으로는 선생이 돌이켜 요약하고 스스로 터득한 바의 미묘한 결론은 실로 헤아릴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대재 유언집(大齋兪彦鏶)159)이 지은 상덕문(狀德文 行狀)을 후세의 사람으로서 당연히 가져다 참고하였다. 따라서 오늘의 내 일은, 함부로 첨삭은 않고 중복된 것만 빼내고 오자를 바로잡는 등으로써 양군의 성의에 부응한 것 뿐이다. 오호라! 이 일은 구산(臼山) 선생님이 명하신 바인데 어느새 여러 해가 흘렀다. 멀리 계화도(繼華島)를 바라보지만, 산은 이미 무너지고 말았다.160) 일은 비록 마쳤으나 나아가 질정(質正)을 받을 분은 안 계시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으랴. 양군이 가는 돌아가는 편에 크게 한숨 쉬며 이렇게 써 드린다. 竊嘗聞於尙論之家, 知白水楊先生之爲泉上高足、域中賢儒, 而恨未得其遺文而讀之也。 辛酉秋, 楊君秉晦以先生遺稿一部示余曰: 先集之未遑印布, 七世于玆, 校讐之任往請于臼山先生。 先生命託之吾子, 吾子其念之。 余惟學淺識莽, 固不敢與此者, 但重違師命, 且喜得見其書也。 旣諾之, 而試手未了者, 久矣。 乙丑春, 楊君復來促之。 余乃是勤是務之惟謹, 業旣卒, 以楊君請, 竊附一言于卷末曰: 古有豪傑之士爲己之學, 吾於先生見之矣。 夫博學詳說, 將以反約, 深造以道, 欲其自得, 非孟氏之訓乎? 觀夫世之學問名家者, 或博記聞富, 文辭張皇, 震耀於人, 如波斯之物, 無非悅目之珍, 而求其實用則無有也。 或憑口藉耳, 蹈故襲陳, 自謂謹守前言, 而全昧乎反驗身心, 幾乎鸚鵡之傳語者有之矣。 惟先生之學異乎是, 循環乎經傳子史, 講明乎禮樂名物, 而求其要則心性神理之奧, 故强記麗文之不暇及也。 所窮者, 天人之極致, 而必期心契而神解, 故苟其疑之未祛, 有不以前賢而强從者。 孟氏所謂反之約而欲自得者, 非此乎? 不囿乎崇文尙口之風, 非豪傑而能之乎? 欲其反約而自得, 斯不亦爲己乎? 其存乎內者如此, 故著乎外者, 行敦乎規矩, 德孚乎遠近, 竟至皐鶴之聞天, 猗歟卓哉! 顧余昧陋, 其於反約自得微妙去處, 實不得以揣測, 則大齋兪公所撰狀德文, 在後之人自當就而考焉。 故今日之役不容妄有所存刪, 但去其重複, 正其帝虎, 以副楊君之勤意爾。 嗚呼! 是役也, 臼翁所命, 而倏忽之間日月幾何? 粤瞻華山, 山旣頹矣。 役雖訖而就質無所, 寧不慨傷! 於楊君行也, 太息書此而歸之。 양응수(楊應秀) 1700(숙종26)~1767(영조43),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계달(季達), 호는 백수(白水)이며, 순창 출신이다. 유언집(兪彦鏶) 1714~1783,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사정(士精), 호는 대재(大齋)이다. 세자시강원자의(世子侍講院諮議), 경연관과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등을 하였다. 계화도(繼華島)……무너졌다 김택술의 스승인 전우(田愚: 호 臼山, 艮齋)는 1912년에 부안 계화도에 들어가 강학하다가 1922년에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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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전서139) 발문 【간재선생을 대신하여 지음. 경신년(1920)】 沙溪全書跋 【代艮齋先生作 庚申】 우리나라에 도학이 밝은 것은 그 공로가 성현을 잇고 후학을 연 현인들에게 있는데, 그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이어서 나타났다. 그리하여 위로 석담(石潭 율곡)을 이어 받아 아래로 화양(華陽 송시열)을 열며 스승이 짓고 제자가 서술하였는데, 도가 크고 근심이 없었던 이는 오직 사계 김장생(金長生)140) 선생이다.겸손하고 돈후하며 바르고 실다운 자품(資品), 만물을 살리는 봄과 만물을 싣는 대지의 덕, 전례와 정학의 가르침 등은 참으로 백세가 지나고 만대를 기다려도 덮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 주장[立言]과 가르침[垂訓]을 적은 원고 외에도 또 책을 이룬 것이 무릇 아홉 종류인데 세상에 유행한 지 오래되었다. 그 사이 후손 김 아무개가 이 아홉을 하나로 합해 전부를 중간(重刊)하였다. 이는 대개 판본이 닳아 읽기 어려운 것을 마음 아파하여, 학자들이 통틀어 열람하기에 편하게 한 것이다. 책이 이루어지자 이름을 전서(全書)라 하고 내게 발문을 지어 달라고 하였다.내가 이 책을 보니 경설(經說)이 4분의 1을 차지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예론(禮論)이다. 삼가 생각해보면, 예는 사람 몸의 바탕이고 나라를 지탱하는 동량이니, 뼈대가 꺾어지면 죽고, 기둥이 부러지면 무너지는 것은 필연의 이치다. 이것이 선생께서 특히 예교를 중하게 여기신 까닭이다. 일찍이 우리나라의 상하가 오직 선생의 예교를 강구(講究)하고 실천했더라면, 오늘날 같은 풍천(風泉)의141) 눈물을 흘리고 금수(禽獸)를 개탄할 일이 있었겠는가? 아아, 슬프도다! 이러한 때를 만나 선생의 책이 중간되니 이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바라는 바는, 박(剝)이 극에 이르면 다시 복(復)이 되고142) 어지러움[亂]이 극에 달하면 다시 다스려지니[治], 장차 선생의 가르침이 세상에 다시 밝혀져서 인륜의 기강이 서고 국가의 천명이 다시 이어지는 것을 보는 것이다. 또 나아가 그 덕과 그 학문을 지니고 선생을 계승할 사람이 나타나 사도(斯道)의 명맥 한 줄기가 길이 땅에 안 떨어지게 해주는 것이다.나는 김씨의 이번 일로써 천운 회복의 개시를 짐작하며 세도(世道)를 위해 참으로 깊이 기뻐한다. 출간하는 일을 돕는 것은 무거운 책임인데 내가 어찌 감히 담당하겠는가! 다만 느끼는 바가 있어 참람됨을 깨닫지 못하고 이와 같이 글을 썼다. 我東之明道學, 功存繼開之賢, 固前後繼作也。 而承石潭下而啓華陽, 師作弟述, 道大而無憂者, 其惟沙溪金先生乎! 謙厚正實之資, 春生地負之德, 典禮正學之敎, 洵百世以俟萬代無弊也。 其立言垂訓原稿外, 又有成書凡九種而見行者久矣。 閒者, 後孫某某乃合九爲一成, 全部而重刊之。 蓋病其板刓難讀, 且便學者通覽也。 書成, 名之以全書, 徵跋於余。 余觀是書, 經說居四之一外皆禮論。 竊惟禮者人身之質, 幹國家之棟樑, 幹摧則亡, 棟折則覆, 理之必然。 此, 先生所以尤重禮敎者也。 早使我邦上下, 惟先生禮敎之是講是踐, 豈有今日之泣風泉而慨翔走也乎? 吁其悲夫! 于時而乃得先生書之重刊, 夫豈偶然哉! 意者剝極而復, 亂極而治, 將見先生之敎復明於世, 人紀以立, 邦命復續, 又進以有之德之學, 繼先生而作者, 俾斯道一脈永不墜地也歟! 吾以金氏此擧卜天返之權輿, 而爲世道幸者深矣。 相役重任也, 余何敢? 特有所感者存, 不覺僭越, 而爲之書如此云爾。 사계전서 사계 김장생(沙溪金長生)의 문집은 3종이 있다. 1687년의 정묘운각본(丁卯芸閣本) 14권 6책, 1792년의 임자개각본(壬子改刻本) 13권 5책, 1922년 임술신간본(壬戌新刊本,) 51권 24책이다. 이 발문은 사계전서를 간행하기 위한 글로서 1920년에 지어졌다. 김장생(金長生) 1548~1631,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이며, 서울 출신이다. 김집(金集)의 아버지이고, 송익필(宋翼弼)의 제자이며, 그의 문인으로는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윤순거(尹舜擧)·최명길(崔鳴吉) 등 당대 명사들이 많았다. 풍천(風泉) 《시경》 회풍(檜風)의 〈비풍(匪風)〉과 조풍(曹風)의 〈하천(下泉)〉의 편명을 줄여서 지칭하는 말이다. 모두 주나라 왕실이 점점 쇠약해져 망하는 것에 대해 개탄하는 내용이다. 여기서는 조선이 망하게 된 것을 슬퍼한다는 말이다. 박(剝)……복(復)이 되고 박(剝)은 음도(陰道)가 극성한 때로서 '침삭(侵削), 상해(傷害), 탈락(脫落), 소진(消盡)'을 말하고, 복(復)은 양(陽) 하나가 다시 생겨나는 때로서 '회복(回復)'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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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암실기 발문 【병술년(1946)】 墨巖實紀跋 【丙戌】 묵암 이문평(墨巖李文平)143)선생은 정릉(靖陵 중종) 때의 명신이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 제자로서 무오사화에 걸려들었는데 그 유배된 곳에서 풍도와 절조가 숭앙을 받았고, 정암(靜菴 조광조)과 제현들이 기묘사화 때 무너지는 것을 보고는 공정한 마음으로 신원(伸寃)을 위해 애썼다. 그리하여 상공 청음(淸陰 김상헌)은 그를 '원우(元祐) 시대의 온전한 사람'144)이라고 칭송했고, 큰 어르신 우암(尤庵 송시열)께서는 '도량 크고 넓어 포용을 잘하고, 정성을 다하여 사기(士氣)를 세웠다.'고 찬양했으며, 유현(儒賢) 전재(全齋 任憲晦)는 '공평한 군자'라고 인정했으니, 모두 다 적확한 논의들이다.후학이 이에 대해 무엇을 쓸데없이 더 보태랴. 다만 여러 차례 전쟁을 겪은 탓에 저술들이 흩어지고 없어져 그 갖가지 아름답고 풍부한 모습을 볼 수가 없어 매우 한스럽다. 하지만 그 세상에 드러난 위대한 업적과 조정에 가득 전하는 공정한 창언(昌言), 이 모두가 선생의 아름다움이 빛을 발하는 것이니, 또 마음 아파할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해지고 잘려나간 글들이나마 전해진 것이 그런대로 날개깃 하나로 온전한 봉새를 알아보기에 충분한 것과 같다. 비석과 묘지(墓誌)에 새겨진 찬사, 국사와 야사에서 논급하고 찬탄한 도의와 풍격들을 크고 작음과 시작 종말을 가림 없이 모두 다 수집하였다. 이렇게 전래되고 수집된 것을 모아 편집하였으니 이른바 한 부의 실기(實紀)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실기의 작성은 선생의 후손 이봉상(李鳳祥)이 시작하였고, 이창식(李昌植)의 증수(增修)를 거쳤는데, 오랫동안 간행되지 못했다. 이제 14세손 이교환(李敎煥)이 혼자 수고한 끝에 비로소 판각하고 널리 배포하려 하면서, 그 족인 이희준(李熙俊)을 시켜 내게 말 한 마디를 청하였다. 나는 선생의 풍도를 들은 것이 적었는데 이제 다행히도 그 덕을 상세하게 알았고, 또 말세에 보기 드문 이교환의 선조를 사모하는 마음을 아름답게 여겨, 기꺼이 글을 써 책 끝에 붙인다. 墨巖李文平先生, 靖陵名臣也。 罹畢齋師門戊午之禍, 而風節高於竄謫, 見靜菴諸賢己卯之敗, 而心事公於伸救, 是以淸陰相公稱之以元祐完人。 尤菴大老, 贊之以休休容物, 懇懇扶陽。 全齋儒賢許之以公平君子, 皆確論也。 後學於此又何贅焉? 惟是累經兵燹, 著述蕩逸, 無以見宗廟百官之美富。 雖若可恨, 然偉業著世, 昌言滿朝者, 莫非文章之發見, 亦何傷也? 而又爛簡斷篇之所傳, 猶足以見一羽而識全鳳。 顯刻幽銘之所揄揚, 國乘野史之所論贊行誼風旨, 鉅細始終無不畢擧, 輯此所傳所徵而合編, 則所謂實紀一部者, 是也。 實紀之成, 始於先生□世孫鳳祥, 增修於□世孫昌植, 而久未刊行。 今十四世孫敎煥獨自賢勞, 始付剞劂而廣布, 屬其族熙俊, 請余一言。 余少聞先生之風, 而今幸知德之詳, 重嘉敎煥慕先之罕覯於叔季也, 樂爲之書卷尾。 이계맹(李繼孟) 1458-1523. 자는 희순(希醇). 호는 묵곡(墨谷)ㆍ묵암(墨巖). 시호 문평(文平)이다. 무오사화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라는 죄목으로 영광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519년 기묘사화 후에 찬성(贊成)의 자리에 올랐으나 사류(士類)들에 대한 처리가 지나치자, 논의에 맞지 않다고 여겨 김제(金堤)에 있는 농막으로 물러났다. 《中宗實錄 18年 2月 28日》 《燃藜室記述 卷8 乙卯黨籍》 원우(元祐)……사람 심한 당쟁 속에서도 해를 입지 않은 사람을 말한다. 원우는 송나라 철종(哲宗)의 연호인데, 이 때 사마광(司馬光)ㆍ소식(蘇軾) 등의 구법당(舊法黨)과 왕안석(王安石)ㆍ채경(蔡京) 등의 신법당(新法黨)이 심하게 대립하여 많은 사람들이 화를 입었다. 여기서는 조광조(趙光祖) 등의 신진사류(新進士類)와 남곤(南袞) 등의 훈구파(勳舊派)의 대립으로 발생한 사화들을 말하고 있는데, 김상헌은 이계맹 신도비명에 '여러 차례 변고를 겪으면서도 평소의 지조를 굳게 지키어 끝내 아름다운 이름을 잃지 않았다. 공은 바로 원우(元祐) 시대의 온전한 사람이다.[累更變, 堅持素,終不失令, 公豈非元祐之完人也。]'라고 썼다.《淸陰先生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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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동실기의 뒤에 쓰다 【임술년(1922)】 題茂東實紀後 【壬戌】 충장공(忠壯公) 정분(鄭苯)145)을 조상으로 삼으면서 후손됨이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있으니, 무동 정천경(茂東鄭天卿)146)이 바로 그 사람이다. 아, 광양(光陽)의 화147)와 금성(錦城)의 의리148)는 그 충성이 하나다. 애일당(愛日堂)의 편액과 양지(養志)의 정성은 그 효가 하나다. 삼공(三公)의 공훈과 두 현의 치적은149) 그 정사가 하나다. 조상이 되어 후손을 이끌고 후손이 되어 조상을 계승하여, 한 사당에서 같이 제사받으며 그 광휘가 고금에 빛난다. 아아, 아름답구나!후손 정헌태(鄭憲泰)가 〈무동실기(茂東實紀)〉를 보여주면서 내게 한 마디 말을 요청했다. 내가 말하기를, "공이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기리고 아름다운 행적을 현양하는 것들은 참으로 미치기 어려울 만큼 뛰어난데, 끝내는 윤상(倫常 인륜의 상도)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지금 그대는 성인의 학문에 종사하는데, 성인의 학문은 인륜을 다하는 것일 뿐이다. 이제 윤상이 다 무너져버린 때를 만났으니, 그대는 의당 크고 작은 일에 응수(應酬)하고, 평상과 변괴를 대처(對處)하면서 오직 윤상을 본무로 삼아 급급히 진력하여서 자신의 입지를 마련하고 세상에 보탬을 주어야 할 것이다. 선조가 남긴 글을 주워 모으는데 온 힘을 다하는 것을 선조를 현창(顯彰)하는 능사로 삼지는 말아야 한다. 그러면 앞에서는 무동이 충장공을 계승하였고, 뒤에서는 그대가 두 조상을 이어받아서, 대대로 아름다운 일을 이루어 선열을 빛나게 함이 될 것이니, 이 어찌 위대하지 않으랴! 《시경》에 이르기를, '네 조상을 생각지 않느냐? 그 덕을 닦을 지어다.'150)라고 했고, 또 '효자의 효 다함이 없으니, 길이 너희에게 복이 내리리라.'151)라고 했다. 그대는 힘쓸지어다. 祖忠壯公而不愧爲肖孫者, 茂東鄭公諱天卿, 其人也。 噫! 光陽之禍、錦城之義, 其忠, 一也。 愛日之扁、養志之誠, 其孝, 一也。 三公之業、二縣之績, 其政, 一也。 祖而裕孫, 孫而繼祖, 一祠同享, 輝光今古。 猗歟, 休哉! 後孫憲泰示以茂東實紀, 要余一言。 余謂公之繩祖武而著懿蹟者, 固卓乎難及, 然究不出倫常之外矣。 今吾子從事乎聖人之學, 聖人之學盡人倫是已。 迨此倫常壞盡之日, 吾子宜於應細酬大、居常處變, 汲汲然惟倫常之是務是盡, 有以立身而裨世, 勿以極力於攟摭遺集, 爲揚先之能事也。 是則茂東繼忠壯於前, 吾子紹二祖於後, 世濟其美, 有光先烈, 豈不偉哉! 詩云: 無念爾祖, 聿修厥德。 又云: 孝子不匱, 永錫爾類, 吾子勖哉。 정분(鄭苯) 1382~1454, 본관은 진주, 자는 자유(子), 호는 애일당(愛日堂)이고, 시호가 충장(忠莊)이다. 단종 2년의 계유정난 때 우의정이었던 그는 황보인ㆍ김종서 등과 함께 죽임을 당했고, 1838년(헌종4)에 그를 배향한 진주 도동서원(道洞書院)이 건립되었다. 정천경(鄭天卿) 1547~1600, 본관은 진주, 자는 국좌(國佐), 호는 무동(茂東)이다. 임진왜란 때 동생 정원경(鄭元卿)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어가를 호종하였다. 광양(光陽)의 화 단종 2년의 계유정난 때 우의정 정분이 광양에서 죽임을 당했다. 금성(錦城)의 의리 임진왜란 때 정천경이 동생 정원경과 의병을 일으킨 일을 말하는 듯하다. 두 현 정천경은 정산(定山)과 전의(全義)의 현감을 하였다. 네 조상……닦을 지어다 조상의 덕을 이어받아 잘 닦으라는 의미로서, 《시경》〈문왕(文王)〉편의 구절을 인용하였다.[無念爾祖, 聿修厥德, 永言配命, 自求多福。] 효자의……내리리라 《시경》〈기취(旣醉)〉의 구절을 인용하였다.[孝子不匱, 永錫爾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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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유고 발문 【본손을 대신하여 지음. 신해년(1911)】 礱巖遺稿跋 【代本孫作 辛亥】 옛날 조선 중기에 정치가 훌륭하고 교육이 밝아 여러 어진이가 나왔으니 당시 우암(尤庵) 송선생의 도덕이 유림의 종장이었고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 둔촌(屯村 민유중(閔維重)), 일휴(逸休 이숙(李䎘)) 같은 분들이 도학이나 덕망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우리 6대조 농암(礱巖)152)선생께서도 그 시대에 태어나 우암에게 사사하셨는데, 매우 사랑과 인정을 받아 《주서차의(朱書劄疑)》 교정을 맡을 정도에 이르렀다. 또 문곡 같은 분들과 도덕과 의리로 사귀며 매우 자주 왕래하여서, 서로 토론하고 고쳐주며 함께 성장하는 도움을 얻었다. 이처럼 선생은 학문이 바르고 덕행이 뛰어났으니, 평론하는 후세 사람들은 그 나무를 보고 그 산을 알게 될 것이다.그런데 후손이 쇠잔해서 그의 평생의 저술이 거의 다 산실되어, 그 정채롭고 미묘한 내용을 조금이라도 보지 못하니, 이것이 후학과 후손의 한이자 아픔이었다. 집안 아우 김일상(金一相)이 집안의 옛 첩문(牒文)들을 정리하고 선현의 문집을 참고하여 한권으로 모은 다음 출판에 올려 오래도록 전하려 한다. 비록 유고의 분량이 간략하여 선생이 지녔던 바의 전체를 보기는 어려우나, 종전에 흩어져 볼 수 없었던 것에 비하면 터럭하나 만큼의 무늬나 고기 한 점의 맛은 될 터이니 후학과 후손의 한과 아픔을 조금이나마 위로할 만하다.또 대개 사람들이 선현을 존경하여 추모하는 것은 저서의 많고 적음에 관계되지 않고 오직 그 자신이 품은 덕의 실다움과 남에게 하는 감화의 깊이에 달려 있다. 이 때문에 공자 문하의 안연(顔淵)이나 민자건(閔子騫)은 쓴 책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는데도 철인 열 명의 첫머리가 되기에 문제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 유고가 어찌 터럭하나나 고기 한 점에 그치고 말겠는가? 온전한 표범가죽의 아름다움이나 온전한 정(鼎)의 진미도 이것을 넘지 않을 것이다. 이 유고를 읽는 이들은 선생의 글이 다행히 민멸되지 않은 것을 마음에 위로로 삼는 데 그치지 말고, 바로 이 유고로써 선생의 도학의 전체(全體)와 대용(大用)을 찾아 몸에 체득하고 마음에 터득하기를 바란다. 이에 유고 책의 말미에 삼가 써서 배움에 뜻을 둔 후예와 후학들에게 알린다. 在昔○國朝中葉, 治敎休明, 群賢輩作時, 則有若尤菴宋先生之道德蔚爲儒宗, 而又有文谷、老峯、屯村、逸休諸公, 或以道學懸名, 或以德望著世。 我六世祖礱巖先生生于斯時, 事師尤翁, 亟被愛重奬與, 至有《朱書劄疑》校正之託。 又與文谷諸賢道義相交, 往復甚勤, 有講訂相長之益, 則其學問之正, 德行之卓, 尙論先生者可以見木而知其山矣。 但嗣承零替, 平日所著散逸殆盡, 精微之蘊不少槩見, 是爲後學之恨而遺裔之痛, 復如何哉! 家弟一相掇拾於家藏古牒, 參考於先賢遺集, 裒成一卷, 添入附錄, 登諸剞劂, 爲壽傳之擧。 雖其篇帙簡略, 難以見先生所存之全體, 然視向之散逸不見, 則猶足爲一毛之斑、一臠之味, 而後學之恨、遺裔之痛可以少慰矣。 且夫人之尊慕先賢不係於著書之多寡, 惟在其德之存己者實, 而感人者深。 是故, 孔門之顔、閔未聞有成書, 而不害爲十哲之首。 然則是編也, 奚啻爲一毛一臠而止也? 雖全豹之美、全鼎之珍亦不過此矣。 讀是集者, 毋但以先生之書幸而不泯, 慰之於心, 亦將卽此而求先生道學之全體大用, 體之於身而得之於心也。 玆敢謹書卷末, 以吿遺裔與後生之志學者。 농암(礱巖) 농암은 김택삼(金宅三 1649~1703)의 호이며, 김택술의 방계 육대조이다. 송시열의 문인으로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실제로 나아간 적은 없다. 숙종 때 세워진 부안의 '유천서원' 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는 『농암유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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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곡유고 발문 【경오년(1930)】 琴谷遺稿跋 【庚午】 금곡 이문록(琴谷李文錄)161)공의 유고는 시와 문장 몇 편을 묶은 것인데 시가 8할을 차지한다. 세상 사람들은 선비의 우열을 저술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평가한다. 또 어떤 이는 산문을 중시하고 시가를 경시하는 자가 있어, 툭하면 "시가 많다 해도 무에 볼 게 있는가?" 라고 한다. 둘 다 모르고서 하는 말이다. 안연(顔淵)이 쓴 책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나, 그 덕은 맹자가 미칠 수 없고, 공자가 육경(六經)을 손보았으나 시를 취하지 않고 버린 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것을 알 수 있다.공의 효성은 하늘에서 타고났고 예의는 세속의 모범이었으니, 그 조행이 진실로 탁월하였다. 그는 진사에 뽑혔는데 하찮은 명리를 구하지 않고, 반대로 높은 지향과 구차하지 않은 성신(誠愼)을 얻었다. 세상에는 쌓인 저서가 자기 키 만큼 되지만 어긋난 행실로 더러운 이름을 가진 자들도 있는데, 공의 어짐을 보고는 부끄러워 죽고 싶었을 것이다.공의 시구들 중에서, "곧은 대와 연한 풀은 무엇이 다른가, 이제 두고 보소 된서리 견뎌내는 모습을[貞篁軟卉誰能辨, 待他將看耐勁霜]"은 굳세고 변함없는 지조이다. "문을 열면 여뀌 붉은데 밀물 차오르고, 발 걷으니 푸른 오동 위로 달 떠오르네.[門開紅蓼潮登後, 簾捲靑梧月上初]"는 화창하고 상쾌한 기상이다. 나아가 지조를 언술한 〈수세음(守歲吟)〉과 정치를 풍자한 〈우핵(雨核)〉에서는 공의 분수를 편안히 지키는 공부와 세상을 경륜할 도량을 볼 수 있다.저 거창하고 난만한 작품들은 그 화려한 빛으로 사람들의 눈을 현혹하지만 한 마디도 귀에 담을 것이 없다. 그런데 이 글들을 보면 과연 어떠한가! 나는 평언을 바라는 본 댁의 청에 따라 이와 같이 소견을 논하며, 세상 사람들이 우열과 경중을 잘못 아는 미혹을 풀고자 한다. 琴谷李公遺稿, 總詩文若干篇, 而詩居十之八。 世之人論士優劣以著述多寡, 又有重文而輕詩者, 輒曰: 詩稿雖多, 奚以觀? 皆惑也。 顔淵未聞有成書, 而其德非孟氏之所及。 孔子之修六經也, 未嘗棄詩而不取, 此可以知也。 公誠孝根天, 禮義範俗, 則行固卓爾也。 其選上庠, 非屑屑名利, 而得者則志尙又不苟矣。 世有著書等身而虧行汙名者, 視公之賢, 可知愧死焉。 其詩如'貞篁軟卉誰能辨, 待他將看耐勁霜, ' 剛堅不渝之操也。 '門開紅蓼潮登後, 簾捲靑梧月上初, ' 和暢灑落之象也。 至於守歲吟之言志, 雨核詩之諷政, 又足以見安分之學、經世之器也。 彼鉅章漫篇, 炳烺眩人, 而無一言足聽者, 觀此又何如也? 故余於本家相言之請, 論其所見如此, 以開夫世人優劣輕重之惑者。 이문록(李文錄) 1779~1843, 본관은 고부, 자는 학중(學中), 호는 금곡(琴谷)이다. 부안출생의 효자로 유명했고 35세에 사마시에 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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