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기관별 검색

검색 범위 지정 후 검색어를 넣지 않고 검색버튼을 클릭하면 분류 내 전체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전체 으로 검색된 결과 84193건입니다.

정렬갯수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833년 임백경(任百經)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癸巳十月初七 宗末 百經 癸巳十月初七 1833 任百經 任氏家 나주 풍천임씨 명고(임전)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A021_01_A00154_001 1833년 10월 7일에 任百經이 任氏家에 안부와 부탁한 과거시험 등에 관한 전한 내용의 간찰. 수령직으로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나 아버님이 건강하여 다행이라는 내용, 부탁한 당신의 아들의 과거시험은 도울만한 계기가 되면 돕겠다는 내용 등이 실림. *상태: 8점의 간찰이 실린 簡牘帖 중 다섯 번째. *원문: 向者高駕枉屈下吏未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기타

淵谷書院講會記 昔我老峯先生謫居于長興邑之士尊而師之及歿俎豆享之吾祖屯村先生以其兄竝祀焉淵谷書院是已今小子余參宰是邦維桑梓是敬況吏民而況於多士乎顧公事棘下車先問蓋未之遑也居之半載値重九日始卽院而會耆老令子弟隨之凡二百餘人酒半乃中座而言曰諸君之在前世而及 先生門者與夫慕先生風者孰非先誼我今去先生百有餘年其剩芬遺韻猶有所未艾者余渺渺之裔記名民士之長得興諸君相會于此寧不欣然有愓然興感乎夫此邦之尊先生非其有位也蓋曰講學而牖後人也今吾與子修世好而徒以酣暢嬉笑爲相樂則重有愧於斯堂命取小學書進諸生以次講誦講已携與升高騁眺張樂亦足以酬往辰因顧語諸生曰爲學之方莫先於知本是院也本乎先生之所以本存乎講院而不講是罔其本罔其本是有院而無院也可不勉哉可不懼哉從今以往春秋以會相興誦劘不忘今日之規不獨有光於我先祖名德抑亦體聖朝興學校一道也系之詩曰此身元自任行違二月之官淵谷士夢中絃誦尙依依戊寅仲春五代孫 致成 謹識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기타

淵谷書院藏板閣建立記 府之東有院曰淵谷卽我老峯屯村兩先生俎豆之所也先生以道德勳業一世杖屨所過人無不觀感而景慕玆邑之有院也以此遺集之刻于板者亦藏之院中以待後學之模印將以廣其傳也自辛未撤院之後多士無所依歸而遺集之板亦爲人取去私藏于家者有年矣及後孫泳稷之守淳昌也與外裔宋侯綺老謀建閣于院之遺址還其板而藏之又以崇禎皇帝御書非禮不動四字摸搨而敬奉焉爲具老峯先生燕槎時得來者而有 英廟御題故也嗚呼兩先生盛德嵬勳載之國乘紀諸太常氏家聞而戶知何有於一閣哉然而後人之所仰慕而不能忘也於藏修之地尤深焉而斯文之得免斷亦在此況燦然雲章尙有皇明之型典使百世之下有以知先生尊周大義又小補也哉是役也邑儒白君樂興實董之系以詩曰俎豆遺墟曠感情藏書小閣巋然成儒風百里溪山麗寶墨千秋日月明可使篇章傳久遠惟將絃誦答昇平至今草木昭光被佇立階前悵晩生戊子九月下澣 旁孫 致駿 謹記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34년 박해룡(朴海龍)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甲戌七月晦日 宗弟 海龍 甲戌七月晦日 朴海龍 朴炯得 고흥 밀양박씨 하구정 한국학호남진흥원 1934년에 박해룡(朴海龍)이 종형(宗兄) 박형득(朴炯得)에게 보낸 간찰(簡札).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34년 박해룡(朴海龍)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甲戌八月念五日 宗弟 海龍 甲戌八月念五日 朴海龍 朴炯得 고흥 밀양박씨 하구정 한국학호남진흥원 1934년에 순천읍 여관에 머물고 있는 종제 박해용(朴海龍)이 박형득(朴炯得)에게 보낸 간찰(簡札).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삼가 말씀을 올립니다. 굴전(掘前) 김 도령에게 전합니다.요즈음 체후가 매우 편안하십니까? 위로되고 궁금한 심정이 듭니다.저는 며칠을 도보로 움직였다가 도중에 모친이 몹시 편찮았습니다. 전날에 자녀가 없다고 말하였다가 벼락같이 만나고 작별하는 바람에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며칠 지나지 않아 귀댁으로 길을 떠났는데, 제각각 다른 마음을 가졌고 여비도 충분치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10전의 약값 한 봉을 5~6전으로 취대(取貸)하였는데, 또한 응낙하지 않고 순천약(順天藥)을 기왕에 복약하였다고 답하였습니다. 그때의 신세를 절로 한탄하니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본래 그곳은 순천 은천약국(順天恩泉藥局)인데, 의주대 약방에서 10년간 진력하여 성공하였고, 의사를 졸업하고 나서는 세계에서 저명해졌습니다. 한 차례 신규 진찰을 받기 위해 며칠간 머물렀습니다. 과연 이전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뜻밖에 함께 가자고 강권했다가 헛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스스로 한탄한들 어찌하겠습니까. 형과 저의 사이에 어찌 전날에 숙식한 정이 있겠습니까.많은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저를 생각하면 버려진 한 물건에 불과합니다. 무슨 면목으로 은천약국(恩泉藥局)과 대면하겠습니까. 한 번의 행실이 백 년의 일을 그르칠 수 있으니, 이 무슨 도리입니까. 약대(藥代) 105원씩 작정하기로 제한하고, 피차간에 계약이 성립되었다고 말하였는데, 이 일에 관해서는 또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식이 있든 없든 간에 저에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러나 형의 사촌 환자로 볼 때도 자부할 권한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이 진찰받으라고 말하였는데, 부자 관계가 되어서도 방금 다른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형은 우애롭고 아우는 공손하다는 것이 존재하지 않은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는 또한 천명이고, 인력으로 해낼 수 없는 일이니, 빈손으로 갔다가 빈손으로 온 것은 모두 저의 불찰이라고 하고, 고개를 돌려 강을 건넜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모두 돈을 사랑한 것이고 덕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붕우라는 글자는 오륜(五倫)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손을 빌려서 질병의 상태를 구제하고자 하였는데, 세상 사람들은 다만 자기를 사사롭게 여기고 인재를 취하는 일만을 생각할 줄 아니, 이는 또한 통탄하고 분통할 일입니다.지금 7월 초에 우연히 순천읍 은천약국(恩泉藥局) 임남수(林南洙) 쪽에 갔다가 나에게 사주와 유년 시절의 평을 요청하여, 여가를 틈타 일생에서 운수를 놓치는 단서가 여수(麗水)에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곁에 있던 정자민(丁自玟)이 "무슨 일로 운수를 놓친단 말입니까. 지난달 우연히 여수읍 돌산면 장군도의 김철수(金鐵洙) 쪽에 갔는데, 어떤 환자 한 명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를 육사증(肉死?)이라 불렀고 사람들 가운데서 치료된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죽을병에 걸린 측은한 자신을 스스로 가련하게 여기고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며 '영암군 시종면(始終面) 옥야리(沃野里)에 박갑자약국(朴甲子藥局)에서 육사증을 주된 약으로 이름을 내걸고 약재 하나당 10원씩으로 판매하는 것이 명백한데, 온 세상 사람이 모두 아는 것입니다.'라고 단언하였습니다. 제가 '이 약은 7월 초에 환대금(換代金)에 따라 약정하였는데 지금까지 기한을 넘겼습니다. 그러므로 실수하였던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후로 아무 말이 없고 스스로 웃을 뿐이었습니다. 지금 정자민의 일은 모두 알지 못하니, 저의 처분을 깊이 양해해 주십시오. 나머지는 예식을 갖추지 않습니다.정축년(1936) 7월 18일에 박정대가 謹啓言 掘前金道令의게傳하오日間氣候大安否 慰溸願聞之地 生徒步數日路中母太甚不平中耳 第言前日無子女예對하야雷逢電別之餘라 猶卽所未安之心 故로不日發程于貴过 則各自爲心 而路費亦困難之中예拾円藥代一封을五六円으로取貸로대 亦不應諾 曰順天藥을已往服藥로爲對하니 其時身勢自嘆耳 誰怨誰咎哉 本是順天恩泉藥局也 則義州大藥方예十年間思心成功하고 醫師卒業으로 世界上有名也 則一次新診次累日連留之地예果然有曾驗之事 故意外強勸同行 而至於虛境 自嘆奈何 兄我間豈有前日宿食之情乎不在多言하고 我思我則不過一棄物也 何以顔目相對恩泉藥局乎 一介之行能誤百年之心事하니是何道理哉 藥代百五円式作定爲限 彼此間契約成立爲言 則是亦不聽하니 無子有子예於我何關고兄之四寸病人으로對하야도自恃之權이有之 故諸人診察爲言 則有父有子 方今出他爲言하니 世上不有兄友弟恭之事耶 莫說하고 是亦天命也오 非人力所致也니 空往空來은都是我之不察也라하고 回頭渡江예 豈不寒心哉 都是憐錢不憐德也라 朋友字五倫之一也 故借一人之手하야 欲濟疾病之境러니 世人但知私己取才之事로思之하니是亦痛忿也로다今七月初예偶到順天邑恩泉藥局林南洙方 而請我四柱流年評 而乖其餘暇예 一生失數之端在於麗水也云 則在傍丁自玟言內何事失數乎인가 去月今예偶到麗水邑突山面將軍島金鐵洙方예有病人一介 而人稱肉死? 人無致效者 故로自憐死病之惻隱 而自發跡斷言曰靈岩郡始終面沃野里朴甲子藥局 則但主肉死?之藥으로發名 而一劑㭘〖拾〗圓式으로判明 而擧世所共知也로다 本人言예此藥은七月初예因換代金으로爲約 而至今過限 故失手也로다 其後無言 而自㗛而已矣 方今丁自玟之事都不知也니 本人處令으로深諒焉 餘不備礼丁丑七月十八日 朴正大[朴正大信][皮封](前面) 麗水郡突山面將軍島金鐵洙 氏大至急 親殿(背面) 恩泉藥局留朴正大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38년 김영순(金永淳)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戊寅閏七月十三日 金永淳 戊寅閏七月十三日 金永淳 朴炯得 고흥 밀양박씨 하구정 한국학호남진흥원 1938년에 김영순(金永淳)이 박형득(朴炯得)에게 보낸 간찰(簡札).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937년 박정대(朴正大)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丁丑七月十八日 朴正大 丁丑七月十八日 朴正大 金鐵洙 고흥 밀양박씨 하구정 한국학호남진흥원 1937년에 박정대(朴正大)가 김철수(金鐵洙)에게 보낸 간찰(簡札).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소차계장류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소차계장류

을축년 임성원(任聖元)등 등장(等狀)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乙丑六月日 幼學任聖元 등 37人 巡相 乙丑六月日 幼學任聖元 巡察使 兼使[着押] 印 3顆(정방형, 적색) 나주 풍천임씨 명고(임전)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경국대전(經國大典)』 『豐川任氏世譜』 中編 一, 五 『한국지명총람』 14 –전남편-, 한글학회, 1984. 을축년에 임성원(任聖元) 등이 순찰사(巡察使)에게 올린 문서 을축년 6월에 유학(幼學) 임성원(任聖元) 등 37명이 순찰사(巡察使)에게 올린 등장(等狀)이다. 족자 형태로 남아 있다. 등장의 내용은 나주 동창(東倉)에 사는 조채룡(趙彩龍)이 안산(案山) 백보(百步) 가까운 땅에 투장(偸葬)하였으니 파가게 해달라는 것이다. 이에 순찰사는 초 2일에 제음을 내렸는데 '조채룡을 잡아서 보냈으니 남평에서의 일은 끝났고, 나주의 관(關)에서 행할 것'이라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소차계장류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병술년 수표(手標) 고문서-증빙류-수표 경제-회계/금융-수표 丙戌四月十三日 面會席 丙戌四月十三日 面會席 [着押] 1顆 나주 풍천임씨 명고(임전)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병술년 4월 13일에 면회(面會) 자리에서 출급한 표(票) 병술년 4월 13일에 면회(面會) 자리에서 역(役)을 다시 침어하지 마라는 뜻으로 출급한 표(票)이다. 이 표에서 서당동(書堂洞)의 역(役)을 다시 침어(侵漁)하지 말라는 뜻으로 면중(面中)에서 표를 발급한다고 하였으며, 이어서 이 경우에 결배(結排)는 여기에서 배정한 것이 없으므로 어찌 다시 침어(侵漁)하지 말라는 뜻이냐고 하면서, 공전(公錢) 36량은 거두어들이라고 하였다. 이 문서는 '욱곡(郁谷)'이라고 쓰인 도장인 찍힌 것으로 볼 때 남평현(南平縣) 욱곡면(郁谷面으)에서 발행한 것으로 보인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698년 분재기(分財記) 고문서-명문문기류-분재기 경제-상속/증여-분재기 康熙三十七年戊寅十二月二十四日 康熙三十七年戊寅十二月二十四日 나주 풍천임씨 명고(임전)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증보판 한국고문서연구』, 최승희, 지식산업사, 2003 HIKS_A021_01_A00073_001 1698년 12월 24일에 재산을 나누고 작성한 화회명문(和會明文) 1698년(숙종 24) 12월 24일에 재산을 나누고 작성한 화회명문(和會明文)이다. 문서 맨 앞 하단의 기록을 통해 이 문서는 큰 아들 집에 소장되어 있던 화회문기임을 알 수 있다. 화회(和會)시 노비와 전답을 평균 분급함을 원칙으로 하고, 오사조(五祀条)를 따로 기재하였다. 이어서 주사조(主祀条), 장자(長子) 몫, 장녀(長女) 몫 등이 기재되어 있다. 장자 몫에는 망백부제위(亡伯父祭位)와 중부제위(仲父祭位)가 들어 있다. 문서 결락이 심해 자세한 내용 파악이 불가하다. 화회문기(和會文記)란 부모가 노비 ·토지 등의 재산을 자식들에게 미처 나누어주지 못하고 죽을 경우 재산을 나눌 때 부모의 유언이나 유서에 의해서 재산을 분배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형제자매간이 서로 합의하여 재산을 나누게 되는데, 그 때 작성하는 문서가 바로 화회문기이다. 이러한 화회문기는 부모가 죽은 후 삼년상을 마친 뒤에 형제와 증인들이 모여 작성하게 된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836년 임성모(任性模) 시권비봉(試券秘封) 고문서-증빙류-시권 정치/행정-과거-시권 任性模 任性模 印 1顆(정방형, 적색) 나주 풍천임씨 명고(임전)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증보판 한국고문서연구』, 최승희, 지식산업사, 2003 『豐川任氏世譜』 中編 一, 五 『한국의 과거제도』 , 이성무, 한국학술정보(주), 2004 『조선시대 시권 연구』 , 김동석,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3 HIKS_A021_01_A00054_001 1836년(헌종2)에 임성모(任性模)가 제출한 과거답안지(科擧答案紙)의 비봉(祕封) 1836년(헌종2)에 임성모(任性模)가 작성하여 제출한 과거답안지(科擧答案紙), 즉 시권(試券)의 비봉(祕封)이다. 피봉부(皮封部)라고도 한다. 시권 우측에 응시자의 성명, 나이, 본관, 거주지, 사조(四祖)의 직역, 성명을 적어 답안지를 제출할 때 이 부분을 잘라서 따로 보관한다. 이는 채점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피봉부와 본체부(답안지) 사이에 자호(字號)를 쓴다. 채점 후에 이 비봉을 답안지와 묶어서 작성자에게 돌려준다. 이를 통해 임성모의 인적사항을 알 수 있다. 임성모가 이 시권을 작성한 나이는 31세이다. 그의 본관은 풍천(豐川)이고 거주지는 남평(南平)이다. 그의 4조(祖)를 살펴보면, 아버지는 생원(生員) 임태규(任泰奎), 할아버지는 학생(學生) 임상욱(任相郁), 증조(曾祖)는 학생(學生) 임은(任溵), 외조(外祖)는 학생(學生) 김두진(金斗鎭)이다. 임성모의 자(字)는 성빈(聖彬), 호(號)는 신묵헌(愼黙軒)이고 본관은 풍천(豐川)으로, 임태규(任泰奎)의 아들이다. 임성모의 부인은 해미곽씨(海美郭氏)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780년 임▣(任▣) 노비매매명문(奴婢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乾隆四十五年戊戌月日 婢主 自筆 族弟 任泓 族兄 任▣ 乾隆四十五年戊戌月日 任泓 任▣ 任泓[着名] , 徐宗伯[着名], 任元白[着名] 나주 풍천임씨 명고(임전)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증보판 한국고문서연구』, 최승희, 지식산업사, 2003 1780년(정조 4)에 임홍(任泓)이 족형 임아무개(任某)에게 노비를 방매하면서 작성한 노비매매명문. 1780년(정조 4)에 임홍(任泓)이 족형 임아무개(任某)에게 노비를 방매하면서 작성한 매매명문이다. 임홍(任泓)은 가난으로 인하여 먹고 살길이 없고, 장사를 지낼 길이 없어서 부득이 선비(先妣) 김씨(金氏) 가마 앞에 비(婢) 금매(今每) 소생 비(婢) 두양(豆陽)과 두양 소생 노(奴) 오월금(五月金)과 후생을 모두 10냥에 판다는 매매 내용이다. 사람을 매매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이 계약서를 남겨서 나중에 다른 말을 하게 되면 이 계약서를 관에 올려 판단의 근거로 삼겠다는 일반적인 계약서 형식을 갖추고 있다. 노비 수취인의 부분이 박락되어 누구인지 알 수 없으며, 연호는 건륭(乾隆) 45년으로, 간지는 무술(戊戌)로 되어 있어 연호와 간지가 맞지 않는다. 우선 연호를 따른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1837년 민태용(閔泰鏞)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丁酉四月三日 閔泰鏞 丁酉四月三日 1837 閔泰鏞 任氏家 나주 풍천임씨 명고(임전)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A021_01_A00154_001 1837년에 4월 3일에 閔泰鏞이 任氏家에 보낸 간찰. 과거시험에 낙방한 임씨가 아들을 위로하고 본인의 안부를 전한 내용. *상태: 8점의 간찰이 실린 簡牘帖 중 여섯 번째. '任進士宅回納'이라고 적힌 피봉 조각이 함께 부착.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명문문기류

1811년 이매일(李賣日)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배지 경제-매매/교역-배지 嘉慶拾陸年壬申五月初五日 畓主 庫直 金爵別 村禊有司 李賣日 嘉慶拾陸年壬申五月初五日 金爵別 李賣日 金爵別[着名] 나주 풍천임씨 명고(임전)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12년(순조12) 5월 5일에 김작별이 우야평(牛也坪)의 등자답(騰字畓) 3두락을 전문 6냥을 받고서 신촌계(新村禊) 유사(有司) 이매일(李賣日)에게 방매한다는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12년(순조12) 5월 5일에 김작별이 우야평(牛也坪)의 등자답(騰字畓) 3두락을 돈 6량을 받고서 신촌계(新村禊) 유사(有司) 이매일(李賣日)에게 방매한다는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김작별은 호동계(虎洞禊) 중 패자(牌字)에 있는 우야평에 있는 등자답 3두락, 부수(負數) 7복 3속을 전문 6냥을 받고서 신촌계 유사 이매일에게 방매하며, 이로써 이후에 증거로 삼으라는 내용이다. 또 토지의 본문기는 다른 전답이 표기되어 있어 이에 출급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답주(畓主)는 고지기〔庫直〕 김작별, 필집(筆執)은 거상(居喪) 중인 이정인(李廷寅)이 쓴 것이다. 이 명문이 작성된 가경(嘉慶) 16년은 신미(辛未)년으로 1811년인데, 명문에는 임신(壬申)년으로 기록되어 있어 착오가 발견된다. 임신년은 가경 17년으로 1812년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서간통고류

병자년 이호성(李鎬成) 간찰(簡札)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丙子臘月念八日 侍生 李鎬成 丙子臘月念八日 李鎬成 나주 풍천임씨 명고(임전)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병자년 12월 28일 侍生 李鎬成이 보낸 편지 *禮席陪誨心幷吾實多伏幸……

상세정보
84193건입니다.
/4210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