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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조백운(趙白雲)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戊戌九月二十七日 趙白雲 戊戌九月二十七日 趙白雲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98년 9월 27일에 조백운(趙白雲)이 부안군(扶安郡) 연동(蓮洞)에 있는 모시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98년 9월 27일에 조백운(趙白雲)이 부안군(扶安郡) 연동(蓮洞) 전평(前坪)에 있는 만자저전(滿字苧田) 3두락지를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그는 부수(負數)로 4부가 되는 이 모시밭을 자신이 매득하여 여러 해 동안 세를 받으며 살았지만,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기 위하여 이 밭을 팔았다. 거래가격은 220냥이었다. 거래시 구문기 3장을 함께 건네주었으며, 차후에 문제가 생기면, 이 문기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증인으로 양득수(梁得壽)가 거래에 참여하여 방매자 조백운과 함께 서명하였다. 모시밭이 있었던 연동리는 오늘날의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가 "戊戌"로만 나오지만, 같은 모시밭이 거래되었던 이 문기의 구문기와 신문기를 확인할 수 있게 되어 무술년을 1898년으로 추정하였다. 해당 문서들은 "1862년 조육손(趙六孫)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과 "1904년 염석수(廉錫洙)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이에 따르면, 연동의 이 모시밭은 1862년에는 50냥에 거래되었다가, 1898년에는 220냥으로, 1904년에는 270냥으로 각각 거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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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황찬성(黃贊成)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十二年丙戌十一月十七日 黃贊成 光緖十二年丙戌十一月十七日 전북 부안군 [着名]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86년(고종 23) 11월 17일에 황찬성(黃贊成)이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노곡리(老谷里)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86년(고종 23) 11월 17일에 황찬성(黃贊成)이 부안현(扶安縣) 하서면(下西面) 노곡리(老谷里)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밭의 주인 황찬성은 긴히 돈이 필요한 데가 있어서 물려받은 논을 팔게 되었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대개 요용소치(要用所致)나 절유용처(切有用處) 등으로 간략히 기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하서면 노곡리 전평(前坪) 2두락지(斗落只) 밭이며 부수(負數)로는 4부(負) 1속(束)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17냥이다. 노곡리는 오늘날의 부안군 하서면 청호리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황찬성은 구문기(舊文記)가 다른 전답(田畓) 문서와 함께 붙어 있어서 내어 줄 수 없음을 밝히고 새로 작성한 문서 1장(丈)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밭의 주인 황찬성은 상중(喪中)이어서 서명을 하지 못하였고 증인(證人)으로는 유학(幼學) 조백현(曺伯賢)이 참여하였다. 조백현은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추가로 이 문기에서는 매매 대상이 논인지 밭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본문에 기재된 '傳來畓'을 통해 보면 논이 분명하지만, 마지막 부분 '田主 黃贊成'을 통해 보면 본 문기의 매매 대상은 밭이 된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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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모인(某人)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二年丙子十二月初六日 光緖二年丙子十二月初六日 전북 부안군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6년(고종 13) 12월에 누군가가 부안현(扶安縣) 입하면(立下面)에 있는 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76년(고종 13) 12월에 누군가가 부안현(扶安縣) 입하면(立下面)에 있는 콩밭과 모시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문서의 왼쪽이 대각선으로 잘렸기 때문에 방매자와 매입자의 성명은 물론 거래의 자세한 내용을 알기 어렵다. 추정컨대 문서에 적혀 있는 밭의 일부만을 팔기 때문에 구문기를 반으로 잘라서 매입자에게 준 것으로 보인다. 이 문서에 거래된 것으로 적혀 있는 밭은, 하자(荷字) 모시밭 2두 5승락과 직자(職字) 콩밭 4두락이다. 아마 이 중에서 콩밭만을 팔면서 이 문기를 반으로 나누어 매입자에게 주었을 것이다. 밭이 위치한 부안현 입하면은 오늘날의 부안군 보안면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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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緖二年丙子十二月初六日 前明文右明文事段自己買得累年▣…食以多可不得已伏在立下面▣…[荷字苧田二斗五升落]職字太種田四斗落果苧▣…所耕六負九束㐣果▣…十同㐣価折錢文▣…捧乙以遣以新文▣…之放賣爲去▣…說卽以此▣…田主▣…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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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緖元年乙亥二月二十三日 右前明文右明文事切有緊用處黃盖山定只堤下臨字畓四斗落只所耕十一負㐣価折錢文玖拾兩依數捧上是遣右人前旧文記一張新文一張永永放賣爲去乎日所若有異說以此文記告 官卞正事畓主 廉錫龜[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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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년 박수회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同治八年己巳四月十七日 朴受繪 同治八年己巳四月十七日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69년(고종 6) 4월 17일 박수회(朴受繪)가 황개산(黃盖山) 정지제(定只堤) 아래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69년(고종 6) 4월 17일 박수회(朴受繪)가 황개산(黃盖山) 정지제(定只堤) 아래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논의 주인 박수회는 긴히 돈을 쓸데가 있어서 경작해 왔던 논을 팔게 되었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대개 요용소치(要用所致)나 절유용처(切有用處) 등으로 간략히 기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황개산 정지제 아래에 있는 임자묘답(臨字墓畓) 4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11부(負)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87냥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박수회는 새로 작성한 문서 1장(丈)을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문중(門中)에서 이의를 제기한다면 이 문서를 가지고 관(官)에 신고하여 바름을 가릴 일이다'라고 표기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유학(幼學) 박수회와 증필(證筆) 유학 염재우(廉在祐)가 참여하였다. 그들은 각각 이름을 쓰고 서명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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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治六年丁卯正月初二日崔永心前明文右明事段傳來畓數年耕食是多可勢不得已伏在弓月里西坪乃字畓九斗落所耕宮結二十九負二束㐣價折錢文㱏百貳拾兩依數捧上是遣旧文記他畓倂付故不得出給以新文一張右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異談則以此文記告 官卞正事畓主 辛寬玉[着名]證筆 金致化[着名](背面)弓月里竹薪後下星西九畓文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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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이주봉(李周鳳) 방매(放賣) 가대매매명문(家垈賣買明文) 2 고문서-명문문기류-가사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가사매매명문 光緖十六年庚寅閏二月十四日 李周鳳 光緖十六年庚寅閏二月十四日 李周鳳 전북 부안군 喪不着 1개,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90년(고종 27) 윤2월 14일에 동몽(童蒙) 이주봉(李周鳳)이 부안현(扶安縣) 상서면(上西面) 거석리(擧石里)에 있는 가대(家垈)를 팔면서 작성한 가대매매명문(家垈賣買明文). 1890년(고종 27) 윤2월 14일에 동몽(童蒙) 이주봉(李周鳳)이 부안현(扶安縣) 상서면(上西面) 거석리(擧石里)에 있는 가대(家垈)를 팔면서 작성한 가대매매명문(家垈賣買明文)이다. 이주봉은 빚을 갚을 길이 없어서 자기 몫으로 물려받은 가대(家垈)인 상서면 거석리(擧石里)에 있는 어자(於字) 초가 3칸과 모시밭 7 대락(隊落), 콩밭 1석 등을 90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신·구문기 2장을 건네주며 나중에 만약 다른 말이 있거든 이 문서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추기로 시중의 이자(利子) 예에 따라 7월 그믐 안에 빚을 갚을 시 집과 토지를 도로 물릴 수 있다고 하였으며 93냥 6전 속에 3냥 6전에는 이자가 없다고 하였다. 결국 이 문서는 매매명문의 형식을 지니고 있지만, 사실상 가대와 밭을 전당 잡히고 돈을 빌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거래 당시 가대 주인 이주봉은 상을 당하여 거래에 서명하지 못하였고, 증인(證人)으로 유학 강영기(姜永氣)와 김기종(金基鐘)이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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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緖三年丁丑三月二十八日前明文右明文事要用所致伏在擧石里村前於字畓二斗落庫乙價折錢文三十五兩依數捧上是遣右人前以新舊文二章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爻像是去等持此文記告官卞定事畓主 幼學 金道賢[着名]證筆 童蒙 崔元白[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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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治十一年壬申九月十八日 明文右明文事急有要用處買得伏在上東上里前坪珠字畓五斗落所耕九負五束庫果幷禾穀二石價折錢文壹百捌拾兩依數捧上是遣幷舊文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爻象以此文券卞正事畓主 幼學 辛玉年[喪不着]證人 幼學 ▣聖孝[着名](背面)上里金明汝畓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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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6년 서치록(徐致錄)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道光陸年丙戌十一月二十九日 徐致錄 道光陸年丙戌十一月二十九日 徐致錄 전북 부안군 [着名] 3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26년(순조 26) 11월 29일에 서치록(徐致錄)이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26년(순조 26) 11월 29일에 서치록(徐致錄)이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서치록은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자신이 매득하여 오랫동안 농사지으며 먹고 살던 동도면 선은동 전평(前坪)의 일작(一作) 현자답(玄字畓) 4마지기, 부수(負數)로는 10복이 되는 곳을 46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본문기는 다른 전답의 문서에 함께 붙어 있어서 주지 못하고 신문기 1장을 매입자에게 건네주며 나중에 자손 중 여러 말이 있으면 이 신문기를 관에 고하여 바로잡으라고 하였다. 당시 논 주인 서치록과 증인(證人)으로 박호재(朴好才) 필집(筆執)으로 조종학(趙宗學) 등 3인이 참여하여 함께 서명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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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光十六年丙申十二月十六日辛奴春伊前明文右明文事段矣宅緊有急用處自己買得畓伏在扶東一作玄字丁肆斗落只所耕拾負庫乙折價參拾五兩依數捧上爲遣右人前永永放賣爲乎矣旧文記一丈果牌子一丈並爲成文記爲去乎日後如有相左之端持此憑考事畓主 李生員宅奴分同[着名]證筆 趙亨益[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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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한참봉댁노(韓參奉宅奴) 년봉(年奉)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武七年癸卯七月二日 韓參奉宅奴 年奉 光武七年癸卯七月二日 韓參奉宅奴 年奉 전북 부안군 [左寸] 1개 4.5*4.5 3개(적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3년 7월 2일에 한참봉댁노(韓參奉宅奴) 년봉(年奉)이 상전(上典)을 대신하여 부안군(扶安郡) 청호(晴湖)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903년 7월 2일에 한참봉댁노(韓參奉宅奴) 년봉(年奉)이 상전(上典)을 대신하여 부안군(扶安郡) 청호(晴湖)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한참봉댁에서 급하게 돈을 쓸 일이 있어서 청호 계위평(鷄爲坪)에 있는 수세답(收稅畓) 5석(石) 18마지기를 백동(白銅) 화폐로 1만냥에 팔았다. 매매 당시 신·구문기 11장 건네주며 나중에 서로 다른 말이 있으면 이 문서로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 당시 논 주인 한참봉댁노 년봉 혼자만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문서의 맨 끝에는 돈을 받은 뒤에 구문기를 출급하겠다고 적혀 있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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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光十八年己亥十二月初九日 侄趙弼良 前明文右明文事段移徙次伏在一道之飛里前坪樓字畓拾斗落所耕二十三負四束㐣折価錢壹百二十兩依數捧上爲遣右侄前永永放賣而本文記段他文書並付故不得出給爲去乎日後若有異說是去等持此文記告官憑考事畓主 叔母 金氏[着名]訂爭 幼學 金聖云[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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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4년 최석두(崔石斗)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咸豊四年甲寅正月二十六日 崔石斗 咸豊四年甲寅正月二十六日 최석두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54년(철종 5) 1월 26일에 최석두(崔石斗)가 부안현(扶安縣) 상서면(上西面) 목포(木浦)마을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54년(철종 5) 1월 26일에 최석두(崔石斗)가 부안현(扶安縣) 상서면(上西面) 목포(木浦)마을에 있는 논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논의 주인 최석두는 돈이 필요한 데가 있어서 자신이 매득하여 경작해 왔던 논을 팔게 되었다. 보통 명문(明文)에서는 땅을 파는 이유를 가계가 어렵거나, 장례비용이 없거나, 흉년이 들거나, 다른 땅이나 집을 사려는 등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기재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대개 요용소치(要用所致)나 절유용처(切有用處) 등으로 간략히 기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부안현 상서면 목포마을 전평(前坪) 호자답(号字畓) 5두락지(斗落只)이며 부수(負數)로는 10부(負) 5속(束)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15냥이다. 조선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기할 때 수확량, 파종량, 경작시간 등을 기준으로 산출하여 기재하였다.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결(結), 부(負,卜) 속(束) 등의 단위를 사용하였고, 파종량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두락지(斗落只), 승낙지(升落只) 등을 사용했다. 또한, 경작시간을 기준으로 한 면적 단위는 기일경(幾日耕) 등이 있다. 이 문서에는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준으로 면적을 표기하였다. 매도인(賣渡人) 최석두는 새로 작성한 문서를 매수인(買受人)에게 넘겨주었다. 신문기(新文記)에 '영영방매(永永放賣)'라고 적어 영구히 소유권을 넘겨준다는 점을 밝히고 있으며, 차후에 시비가 생기면 이 문서를 가지고 증빙하라고 하였다. 거래참여자에 대한 사항은 문서의 맨 마지막에 기록하였다. 이 거래에는 논의 주인 유학(幼學) 최석두와 증필(證茟)으로는 유학 임세(林世)가 거래에 참여하여 서명하였다. 이 문기에 토지소재지로 명기된 부안현 상서면 목포마을은 오늘날 부안군 상서면 고잔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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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년 전명여(田明汝)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同治十三年甲戌 田明汝 同治十三年甲戌 田明汝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4년(고종 11) 3월 26일 전명여(田明汝)가 대전(坮田)을 팔면서 작성한 매매명문. 1874년(고종 11) 3월 26일, 전명여(田明汝)가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있는 대전(坮田) 1두락(斗落)을 매도하면서 작성한 매매명문(賣買明文)이다. 전명여가 이 논을 팔게 된 이유는 급히 돈이 필요해서였기 때문이다. 매매가는 25냥이었다. 전명여는 분 매매문서를 작성하면서 위 논과 관련하여 이전에 작성된 문서를 내 주어야 했으나 그렇지 못하였다. 그것은 그 옛 문서가 다른 전답 문서들과 합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문서에 보이는 "구문기 타전답병부 고부득출급(舊文記他田畓並府故不得出給)"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 내용이었다. 한편 전명여의 신분은 양반이었다. 양반이 어떤 거래에 직접 나서는 일은 거의 없었다. 대개는 자기 집에서 부리고 있는 노복을 대리인으로 내세웠는데, 전명여는 그렇지 않고 있다. 노복이 없었기 때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본 문서는 양반 신분에 있는 자가 직접 매매현장에 참여하였다는 점에서 특이한 예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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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강주환(姜周煥)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咸豐三年癸丑三月十二日 李永壽 姜周煥 咸豐三年癸丑三月十二日 李永壽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喪人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53년(철종 4) 3월 12일에 이영수(李永壽)가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 전평(前坪)에 있는 현자전(玄字田) 5두락지를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1853년(철종 4) 3월 12일에 이영수(李永壽)가 부안현(扶安縣)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 전평(前坪)에 있는 현자전(玄字田) 5두락지를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이다. 그런데 거래 당시 전주 이영수는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그의 족인(族人) 이시용(李時容)이 전주를 대신하여 거래에 나섰다. 이영수는 동생의 선인(船人) 염가(塩價) 문제에다 왕세(王稅) 납부를 거부한 죄목으로 옥에 갇혀 있었다. 관에서는 가장(家庄)과 전지(田地)를 방매하여 추급(推給)하라는 제사(題辭)를 내렸기 때문에 이영수로서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수기(手記)를 작성하여 전지를 파는데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시용이 이영수를 대신하여 거래에 나서 문서에 서명하였다. 한편 증인으로 면임(面任) 김석원(金碩元)이, 필집(筆執)으로 동임(洞任) 조종규(趙宗奎)가 거래에 입회한 것도 이 거래가 세금을 추징하기 위한 공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거래의 매입자는 이영수가 작성한 수기와 관제(官題)를 신문기와 함께 넘겨받았다. 만일 뒤에 이 거래를 두고 논란이 생기면 이 문서를 관에 고하여 바로잡으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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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豐三年癸丑三月十二日姜周煥前明文右明文事李永壽以其弟之船人塩価事與 王稅拒納事卽當滯囚而李時容自 官捉治推給行分付至嚴而家庄田地乙放賣題下故依 官分付仙隱洞前坪玄字田五斗落所耕八卜八束庫乙幷禾穀価折文肆拾伍兩依數捧上是遣李永壽手記與官題幷以右人前永永放賣爲乎矣只以新文一丈成給日後若有紛紜之弊則持此文記告 官卞正事田主 李永壽 滯囚捧標放賣族人李時容[着名]證面任 金碩元[着名]筆洞任 趙宗奎 喪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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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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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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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전준기(田凖淇)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武八年甲辰 畓主 田準淇 光武八年甲辰 田準淇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4년(고종 41) 2월 7일 전준기田準淇)가 논을 매도하면서 작성해 준 매매명문 1904년(고종 41) 2월 7일에 전준기(田準淇)가 논을 매도하면서 작성해 주었던 매도 문서이다. 전준기가 팔기로 한 논은 일도면(一道面) 정지리(定只里) 제방 아래에 있는 임자(臨字) 답(畓) 4두락(斗落)이었다. 매매 대금은 4백 50냥이었는데, 논의 크기를 감안할 때 매매 금액이 조금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논이 매우 기름진, 이른 바 옥답(沃畓)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매도자인 전준기가 매수자에게 줄 돈이 450냥이었는데, 매도자에게 남은 재산이 오직 이 임자 답 4두락뿐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논의 값이 450냥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매도자로부터 더 이상 받아낼 방법이 없으니 이 논을 받는 것으로 그 돈을 다 상환한 셈으로 쳤을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한편 전준기는 본 문서를 작성하면서, 위 임자답과 관련하여 이전에 작성되었던 문기, 즉 구문기(舊文) 한 장도 추가로 주었다. 그것은 매수자의 소유권을 보다 분명히 해 주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이 문서는 거래된 전답의 위치와 크기로 미루어 볼 때 "1877년 신욱수(辛郁首)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의 신문기로 추정된다. 전주이씨가에서 뒷날 해당 전답을 매입하면서 그 이전의 관련 문서들을 모두 건네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련문서들이 모두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집안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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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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歲在戊戌九月二十七日 前明文右明文事自己買得數年收食是多可移居次不得已伏在蓮洞前坪滿字苧田參斗落只所耕四負㐣価折錢文二百貳拾兩依數捧用是遣倂旧文記三章右人前永永放賣爲去乎日後若有爻像則以此文記憑考事此亦中苧田主 趙白雲[着名]證人 梁得壽[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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