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7년 신욱수(辛郁首)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 고문서-명문문기류-토지매매명문 경제-매매/교역-토지매매명문 光緖三年丁丑 畓主 幼學 辛郁首 光緖三年丁丑 辛郁首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印]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77년(고종 14) 3월 신욱수(辛郁首)가 논을 매도하면서 작성한 토지매매문서 1877년(고종 14) 3월 신욱수(辛郁首)가 논을 매도하면서 작성한 매매문서이다. 신욱수가 팔고자 한 것은 정지제(定只堤) 남쪽 아래에 있는 임자(臨字) 답(畓)과 또 다른 임자(臨字) 답 4두락 등 2군데였다. 매매 가격은 200량. 결코 적은 논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신옥수는 이번 거래를 진행하면서, 본 톤과 관련하여 이전에 작성했던 문서들은 주지 못하였다. 그것은 그 문서들이 다른 전답의 문서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인데, 문서 마지막에 "구문기 타답병부 고미위출급인(舊文記 他畓並付 故未爲出給印)"라고 적힌 부분이 바로 그 내용이다. 한편 신욱수는 양반 신분에 속한 자였다. 이는 자기 스스로를 유학(幼學)이라고 칭한 점을 알 수가 있다. 유학이란 관직이나 품계를 같지 못한 양반의 자제들이 사용하던 용어였는데, 사실 양반이 논이나 밭의 거래에 직접 참여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 으레는 자신이 부리고 있는 노복을 대리인으로 내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양반이 돈과 관련한 일에 관여한다는 것을 좋지 않게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관행은 갑오경장 이후가 되어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는데, 신욱수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대리인으로 내세울만한 노복이 없어서였는지 혹은 이제는 신분이라는 것이 무색한 것이 되어 비린 시절이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이 문서는 거래된 전답의 위치와 크기로 미루어 볼 때 "1904년 전준기(田凖淇)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의 구문기로 추정된다. 그리고 관련문서들이 모두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집안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