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기관별 검색

검색 범위 지정 후 검색어를 넣지 않고 검색버튼을 클릭하면 분류 내 전체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전체 으로 검색된 결과 84193건입니다.

정렬갯수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747년 백창윤(白昌潤) 호구단자(戶口單子)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乾隆十二年丁卯二月日 白昌潤 行郡守 乾隆十二年丁卯二月日 白昌潤 전남 영암군 [署押] 1개, [官印] 1개 6.5*6.5(정방형) 적색 1개 영암 곤이시 수원백씨가 영암 곤이시 수원백씨가 1747년(영조 23)에 유학(幼學) 백창윤(白昌潤)이 작성하여 영암군에 제출한 호구단자(戶口單子) 1747년(영조 23)에 영암군(靈巖郡) 곤이시면(昆二始面) 장전리(長田里) 4호(四戶)에 거주하는 유학(幼學) 백창윤(白昌潤)이 작성하여 영암군에 제출한 호구단자(戶口單子)이다. 장전리는 오늘날의 영암군 장전면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작성 당시 호주(戶主) 백창윤은 27세로, 처(妻) 김씨(金氏)(27)와 함께 살고 있었다. 백경옥의 본관은 수원(水原)이며, 김씨의 본관은 김해(金海)였다. 백창윤의 부(父)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백민징(白敏徵)이다. 수원백씨 가문에는 백민징이 가선대부에 임명되면서 받은 교지(敎旨)가 보관되어 있다. 가선대부는 조선시대의 종2품 품계로 초기에는 문무산계(文武散階)로 사용하였으나 후기에는 종친(宗親)과 의빈(儀賓)의 품계로도 사용하였다. 이때 백민징은 82세의 고령이어서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를 받았다. 조부는 백신헌(白信憲), 증조부는 백상원(白尙源), 외조부는 김시호(金時豪)로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호주 백창윤의 처 김씨의 부는 수용(壽龍), 조부는 린(璘), 증조부는 귀찬(貴㜺), 외조부는 장(壵)으로 인동(仁同)이 본관이다. 문서의 끝 부분에 이 집안이 거느리고 있는 노비의 명단이 실려 있는데, 28살 먹은 계집종 신량이 있었지만 지난 병인년에 도망가고 없었다. 조선시대의 호적에는 이처럼 도망을 간 노비들의 이름도 반드시 기입하였는데, 이는 나중에 있을 지도 모르는 노비의 소유권 분쟁과 관련이 있었다. 호구단자의 맨 끝에는 "甲子戶口相凖"이라고 적고 있는데, 이는 이때 작성된 호구단자를 갑자년, 즉 1744년의 호적과 대조하였다는 의미이다. 수원백씨 가문에 전하는 호구단자를 보면, 백창윤의 부 백민징과 아들 백경옥, 손자 백사형의 것들도 전하고 있어서 백민징 – 백창윤 – 백경옥 – 백사형 등 4대에 이르는 가계도를 그릴 수 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在上東中里後坪太田一斗五升落所耕三束㐣典執於右人前錢文捌兩以每朔五分例得用而限十月晦內幷本利備報之意如是成票爲去乎若至限則右㐣永永次持爲乎乙事票主 金聖彦[着名]舊文記㱏張易置印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792년 백경옥(白慶玉) 호구단자(戶口單子)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乾隆五十七壬子正月日 白慶玉 行郡守 乾隆五十七壬子正月日 白慶玉 전남 영암군 [署押] 1개, [官印] 1개 6.5*6.5(정방형) 적색 1개 영암 곤이시 수원백씨가 영암 곤이시 수원백씨가 1792년(정조 16) 정월에 영암군(靈巖郡) 곤이시면(昆二始面) 장전리(長田里) 1통 4호에 거주하는 백경옥이 작성하여 관에 제출한 호구단자 1792년(정조 16)에 영암군(靈巖郡) 곤이시면(昆二始面) 장전리(長田里) 1통 4호에 거주하는 유학(幼學) 백경옥(白慶玉)이 작성하여 관에 제출한 호구단자(戶口單子)이다. 작성 당시 호주(戶主) 백경옥은 49세로, 어머니 김씨(金氏)(74), 처(妻) 장씨(張氏)(43)와 함께 살고 있었다. 백경옥의 본관은 수원(水原)이며, 김씨의 본관은 광산(光山), 장씨의 본관은 인동(仁同)이었다. 백경옥의 부(父)는 백창윤(白昌潤), 조(祖)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백민징(白敏徵)이다. 수원백씨 가문에는 백민징이 가선대부에 임명되면서 받은 교지(敎旨)가 보관되어 있다. 가선대부는 조선시대의 종2품 품계로 초기에는 문무산계(文武散階)로 사용하였으나 후기에는 종친(宗親)과 의빈(儀賓)의 품계로도 사용하였다. 이때 백민징은 82세의 고령이어서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를 받았다. 증조부는 백신헌(白信憲), 외조부는 김수용(金壽龍)으로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호주 백경옥의 처 장씨(張氏)의 부는 천익(天翼), 조부는 한우(漢佑), 증조부는 선장(善長), 외조부는 박사덕(朴師德)으로 밀양(密陽)이 본관이다. 문서의 끝 부분에 이 집안이 거느리고 있는 노비의 명단이 실려 있는데, 47살 먹은 계집종 신량이 있었지만 지난 병인년에 도망가고 없었다. 조선시대의 호적에는 이처럼 도망을 간 노비들의 이름도 반드시 기입하였는데, 이는 나중에 있을 지도 모르는 노비의 소유권 분쟁과 관련이 있었다. 호구단자의 맨 끝에는 "己酉戶口相凖"이라고 적고 있는데, 이는 이때 작성된 호구단자를 기유년, 즉 1789년의 호적과 대조하였다는 의미이다. 수원백씨 가문에 전하는 백경옥의 호구단자를 보면, 1786년, 1792년, 1798년, 1801년, 1804년, 1807년, 1810년, 1813년 등 8건이 전하고 있다. 그는 영암군 곤이시면 장전리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하지 않고 내내 살았는데, 오늘날의 영암군 장전면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백경옥은 처음에는 어머니 김씨(金氏)를 봉양하였으나 김씨가 죽은 뒤에는 부부가 단둘이 살았다. 그와 처 장씨의 거주 형태는 나이 70세가 되는 1813년, 즉 이 호구단자가 작성되는 시점에 와서 아들 백사형(白思亨)이 며느리와 함께 들어와 2대가 거주하는 형태로 바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816년에는 그 아들 백사형이 독립된 호주로서 강진(康津)에서 호구단자를 작성하고 있으며, 더 이상 백경옥의 호구단자는 작성되지 않고 있다. 아마 그 사이 사망했거나 호구단자가 전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수원백씨 가문의 호구단자는 백경옥과 아들 백사형의 것말고도 백경옥의 조부 백민징(白敏徵), 부 백창윤(白昌潤)의 것들도 전하고 있어서 백민징 – 백창윤 – 백경옥 – 백사형 등 4대에 이르는 가계도를 그릴 수 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嘉慶九年甲子正月 日靈巖郡昆二始面長田里戶籍單子第一統統首裵呟新第四戶幼學白慶玉年六十一甲子本水原父學生 昌潤祖嘉善大夫僉知中樞府事 敏徵曾祖學生 信憲外祖學生 金壽龍 本光山妻張氏年五十五庚午籍仁同父學生 天翼祖學生 漢佑曾祖學生 善長外祖學生 朴師德本密陽婢{又+叱}尙年二十二外居婢申良逃亡辛酉戶口相準者行郡守[署押] [周挾 字改印]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唵川面盖山里戶籍單子戶幼學白思亨年三十三甲辰 本水原父學生 慶玉祖學生 昌潤曾祖學生 敏徵外祖學生張天翼 本仁同妻徐氏齡二十二乙卯 籍利川父學生 達孝祖學生 命伯曾祖學生 泰胤外祖學生 金履玉 本光山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乾隆五十七壬子正月日靈巖郡昆二始面長田里戶籍第一統統首吳甲運第四戶幼學白慶王年四十九甲子本水原父學生 昌潤祖嘉善大夫中樞府事 敏徵曾祖學生 信憲外祖學生 金壽龍 本光山奉母金氏齡七十四己亥妻張氏年四十三庚午籍仁同父學生 天翼祖學生 漢佑曾學生 善長外祖學生 朴師德 本密陽賤口秩婢信良年四十七丙寅逃亡己酉戶口相準行郡守[署押] [周挾 字改印]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을사년(乙巳年) 김원겸(金元謙) 수기(手記) 고문서-증빙류-수기 경제-회계/금융-수기 乙巳十二月晦日 金元謙 乙巳十二月晦日 金元謙 전북 부안군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을사년(乙巳年) 12월 그믐날에 김원겸(金元謙)이 작성한 수기(手記). 을사년(乙巳年) 12월 그믐날에 김원겸(金元謙)이 상덕전평(上德前坪) 궐자답(闕字畓) 8두락을 차후에는 답주(畓主)의 허락 없이는 경작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서 작성하여 답주에게 건네준 수기(手記)이다. 궐자답은 부수(負數)로는 9부 5속이 되는 곳인데, 어느 곳에 있는 논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乙巳十二月晦日無他上德前坪闕字畓八斗落所耕九負五束㐣是日後若有冒耕侵漁之端則以擔當而?畓主家間爲遣追意如是成記事記主金元謙[着名]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이종원(李宗愿) 실기(實記) 고문서-증빙류-행장 정치/행정-조직/운영-행장 李宗愿 李宗愿 전북 부안군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현(扶安縣)에 살았던 이종원(李宗愿)의 실기(實記). 부안현(扶安縣)에 살았던 이종원(李宗愿)의 실기(實記)이다. 그 대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종원의 자(字)는 사근(士謹)이며, 1712년(숙종 38년)에 태어나 1792년(정조 16년) 80세에 세상을 떠나 부안현 자미동(慈尾洞)에 묻혔다. 부인은 담양전씨(潭陽田氏)이다. 그는 겨우 10여 세 나이에 집안의 조부모와 부모를 2년에 걸쳐 연이어 돌아가시게 되는 아주 혹독하고 큰 화를 당하여 한 가문의 애도가 끊어지지 않았다. 그가 어린아이 나이로써 화를 피하러 혹은 남원 외숙에게 가서 의지하거나 혹은 서울 일가들에게 가서 머물거나 하면서 시일을 보낸 지 10여 년 후에는 부안에 사는 이종사촌 성만통(成萬統)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33세에 비로소 혼인을 하고 돌아와 부안에 의탁하며 살게 되었다. 그는 자제(子弟)들을 가르치는데 애써 시문을 짓거나 그림을 그리는 기예를 부흥시켜 종가(宗家)를 위하고 별도로 조상의 제사를 위하는 터전을 두어서 이미 무너진 문벌(門閥)이 다시 창립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그의 효성과 우애에 하늘이 감동하였다고 하였다. 그가 아주 순진한 어렸을 때이지만 일찍이 돌아가신 부모를 봉양하지 못하였던 것이 평생토록 고통이 되어 매번 돌아가신 임계(壬癸)년을 말하게 되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부모의 기일이 되면 문과 뜰 안팎으로 물을 뿌리고 쓸어내고 청소하며 일체 외부인이 왕래하는 것을 금지하고 제사에 쓰는 음식은 반드시 넉넉하게 하고 또한 지극히 정결스럽게 하였다. 저녁에는 엄숙하게 의관을 정돈하고 바르게 앉아 저녁부터 새벽에 이르도록 잠깐이라도 곁에 의지하지 않고 있다가 제사 때에 이르면 슬피 부르짖으며 절도의 한계를 넘었다. 그의 나이 80에 가까이 되자 병에 걸렸을 때를 제외하고는 제사에 빠진 일이 없었다. 그리고는 옛날 부모의 상(喪) 때 연이은 상으로 가산을 탕진하여 실패하였기 때문에 초종(初終) 제사에 한치의 비단도 사용하지 못하였는데 내 어찌 차마 오늘날 비단으로 짠 옷을 입고 스스로 편안하다고 말할 수 있느냐면서 평생 비단옷을 입지 않았다. 그에게는 둘째와 셋째 동생이 함양(咸陽)에 살고 있었는데, 둘째 동생은 가난하며 자식이 없었고 셋째 동생은 일찍 사망하였고 3명의 자식은 모두 어렸다. 그가 중년에 모두를 데리고 와서 집과 밭을 사서 나누어 주고 그들과 더불어 같이 살면서 우애가 융성하고 돈독하였다. 고을 사람들을 어루만져 위로하며 물질로써 은혜를 베풀고 모자람이 없이 지극하여 인근 마을에서 보고 듣는 사람들이 기뻐하며 흠모하였다. 그가 일찍이 바쁘게 피해 다닐 때 학문에 마음을 쏟지 못한 게 한이 되어 이제 그 어려운 때를 벗어나 많은 순수한 서책을 가지고 두문불출하고 정좌하며 깊이 빠져 반복하여 읽으면서 먹고 자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문장의 뜻이 막히면 그 뜻이 해석될 때까지 깊은 곳에 숨어서 나타나지 않고 반드시 깊이 연구하여 해득하였다. 음양술수(陰陽術數)에 관한 서적도 또한 모두 통달하였는데, 특히 역서(易書)를 좋아하게 되었고 이에 ?험역방(驗易方)?이라는 책 2권을 후세에 남겼다. 그 사이에 또한 필적에 뜻을 두고 한 자 한 획을 반듯하게 써서 해정(楷正)의 주동자가 되었고 초서(草書)도 또한 이와같이 베껴 쓴 서편(書篇)이 매우 많아 후세 사람들의 모본(摹本)이 되었다. 그의 성품은 밖으로는 엄격하고 안으로는 관대하여 보통 사람이 처음 가까이할 때도 늠름하지만 무시하지 않았다. 그의 학문은 온화하여 춘풍에 따스한 기운이 도달하고 있어 사람들이 처음에는 두렵게 여기지만 나중에는 기뻐하였다. 그의 가정과 일의 성취에 대하여 말한다면 어려운 형편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고 할 수 있으며, 그의 학문에 대하여 말한다면 은덕(隱德)의 군자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882년 권병택(權秉澤) 수표(手標) 고문서-증빙류-수표 경제-회계/금융-수표 壬午十月卄二日 權秉澤 李丈 壬午十月卄二日 1882 權秉澤 전북 부안군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82년(고종 19) 10월 22일에 권병택(權秉澤)이 이장(李丈)에게 작성하여 준 수표(手標). 1882년(고종 19) 10월 22일에 권병택(權秉澤)이 이장(李丈)에게 작성하여 준 수표(手標)이다. 권병택은 자신의 친산(親山)이 이씨가의 선산에서 불과 100여보 밖에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묘를 파가라는 요구를 이씨가로부터 계속 받았다. 그러나 권병택은 산지가 매우 귀한 데다가 갑자기 이장(移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씨가에 통사정을 했다. 권병택은 다행히도 이씨가에서는 산을 구한 뒤에 이장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이에 권병택은 이장하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이 수기를 작성하여 이씨측에 주었다. 이 문서에 기재된 이장(李丈)은 곧 부안의 선은동에서 세거하였던 전주이씨문중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가 임오년으로만 되어 있지만 관련문서를 통해 임오년을 1882년으로 추정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手標右手標事段生之親山入於李丈先山百餘步之地耳李丈今此遠來雖爲督掘山地極貴猝難移葬故萬萬哀乞則李丈特垂慈悲之澤以求山後移緬之意許諾故可勝咸服玆成手標以納事手標主 權秉澤[着名]壬午十月卄二日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戊申至月十七日票右票事切有緊用處故伏在上東中里後坪太田一斗五升落所耕三負六束庫乙典執於右人前是遣錢文捌兩以每朔五分例得用而限則十月晦內竝本利備報之意如是成票爲去乎若過限則右㐣永永差持爲乎事票主 金成彦[着名]舊文記一張留置印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무술년(戊戌年) 신사현(辛士賢) 표(標) 고문서-증빙류-수표 경제-회계/금융-수표 戊戌 埋標主 辛士賢 戊戌 辛士賢 전북 부안군 [着名] 2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무술년(戊戌年) 12월 15일에 신사현(辛士賢)이 작성하여 준 약속문서 무술년(戊戌年) 12월 15일에 신사현(辛士賢)이 작성하여 준 약속문서이다. 일도면(一道面) 봉황리(鳳凰里) 후록(后麓)에 있는 행취산(行翠山)의 일부분을 50냥을 받고 매도하기로 하였으며, 앞으로 다른 말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이다. 본 거래의 증인(證人)은 김치도(金致道)였다. 한편 위 행취산에는 신사현의 종중 선산(先山)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戊戌十二月十五日右標事一道鳳凰里后麓行翠山所在埋標處折價錢文五拾兩許賣爲去乎以此然后俾無爻象爲乎乙事埋標主 辛士賢[着名]證人 金致道[着名]丙午四節田艮壬坑龍甲卯一節㣟咽起頭壬入首子哇午向乙得戊破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乾隆十二年丁卯二月日靈巖郡昆二始面長田里戶籍單子苐三統 統首 朴再泰苐四戶幼學白昌潤年二十七辛丑 本水原父幼學 敏徵祖學生 信憲曾祖學生 尙源外祖學生 金時豪 本義城妻金氏年二十九己亥 籍金海父幼學 壽龍祖學生 璘曾祖學生 貴㜺外祖學生張 壵 本仁同賤口秩婢信良年二十八庚子丙寅逃亡木甲子戶口相準印行郡守[署押] [周挾 字改印]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1807년 백경옥(白慶玉) 호구단자(戶口單子)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嘉慶十二年丁卯正月 日 白慶玉 行郡守 嘉慶十二年丁卯正月 日 白慶玉 전남 영암군 [署押] 1개, [官印] 1개 6.5*6.5(정방형) 적색 1개 영암 곤이시 수원백씨가 영암 곤이시 수원백씨가 1807년(순조 7) 영암군(靈巖郡) 곤이시면(昆二始面) 장전리(長田里) 1통 3호에 거주하는 유학(幼學) 백경옥(白慶玉)이 작성하여 관에 제출한 호구단자(戶口單子) 1807년(순조 7)에 영암군(靈巖郡) 곤이시면(昆二始面) 장전리(長田里) 1통 3호에 거주하는 유학(幼學) 백경옥(白慶玉)이 작성하여 관에 제출한 호구단자(戶口單子)이다. 작성 당시 호주(戶主) 백경옥은 64세로, 처(妻) 장씨(張氏)(58)와 함께 살고 있었다. 백경옥의 본관은 수원(水原)이며, 김씨의 본관은 광산(光山), 장씨의 본관은 인동(仁同)이었다. 백경옥의 부(父)는 백창윤(白昌潤), 조(祖)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백민징(白敏徵)이다. 수원백씨 가문에는 백민징이 가선대부에 임명되면서 받은 교지(敎旨)가 보관되어 있다. 가선대부는 조선시대의 종2품 품계로 초기에는 문무산계(文武散階)로 사용하였으나 후기에는 종친(宗親)과 의빈(儀賓)의 품계로도 사용하였다. 이때 백민징은 82세의 고령이어서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를 받았다. 증조부는 백신헌(白信憲), 외조부는 김수용(金壽龍)으로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호주 백경옥의 처 장씨(張氏)의 부는 천익(天翼), 조부는 한우(漢佑), 증조부는 선장(善長), 외조부는 박사덕(朴師德)으로 밀양(密陽)이 본관이다. 호주 백경옥의 처 장씨의 부는 천익(天翼), 조부는 한우(漢佑), 증조부는 선장(善長), 외조부는 박사덕(朴師德)으로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문서의 끝 부분에 이 집안이 거느리고 있는 노비의 명단이 실려 있는데, 25살 먹은 계집종이 하나 있었으며, 외거비 신량(申良)이 하나 있었지만 도망가고 없었다. 조선시대의 호적에는 이처럼 도망을 간 노비들의 이름도 반드시 기입하였는데, 이는 나중에 있을 지도 모르는 노비의 소유권 분쟁과 관련이 있었다. 호구단자의 맨 끝에는 "甲子戶口相凖"이라고 적고 있는데, 이는 이때 작성된 호구단자를 갑자년, 즉 1804년의 호적과 대조하였다는 의미이다. 수원백씨 가문에 전하는 백경옥의 호구단자를 보면, 1786년, 1792년, 1798년, 1801년, 1804년, 1807년, 1810년, 1813년 등 8건이 전하고 있다. 그는 영암군 곤이시면 장전리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하지 않고 내내 살았는데, 오늘날의 영암군 장전면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백경옥은 처음에는 어머니 김씨(金氏)를 봉양하였으나 김씨가 죽은 뒤에는 부부가 단둘이 살았다. 그와 처 장씨의 거주 형태는 나이 70세가 되는 1813년, 즉 이 호구단자가 작성되는 시점에 와서 아들 백사형(白思亨)이 며느리와 함께 들어와 2대가 거주하는 형태로 바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816년에는 그 아들 백사형이 독립된 호주로서 강진(康津)에서 호구단자를 작성하고 있으며, 더 이상 백경옥의 호구단자는 작성되지 않고 있다. 아마 그 사이 사망했거나 호구단자가 전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수원백씨 가문의 호구단자는 백경옥과 아들 백사형의 것말고도 백경옥의 조부 백민징(白敏徵), 부 백창윤(白昌潤)의 것들도 전하고 있어서 백민징 – 백창윤 – 백경옥 – 백사형 등 4대에 이르는 가계도를 그릴 수 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무신년(戊申年) 사음(舍音) 신옥현(辛玉鉉) 표(票) 고문서-증빙류-수표 경제-회계/금융-수표 戊申三月初十日 舍音票主辛玉鉉 韓文淑 張守山 李文兼 戊申三月初十日 舍音票主辛玉鉉 전북 부안군 [着名] 1개, [印]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무신년(戊申年) 3월 초10일에 사음(舍音) 신옥현(辛玉鉉)이 작성한 표(票). 무신년(戊申年) 3월 초10일에 이의관(李議官)댁(宅)의 사음(舍音) 신옥현(辛玉鉉)이 작성하여 소작인들에게 건네준 표(票)다. 한문숙(韓文淑), 장수산(張守山), 이문겸(李文兼) 등 소작인들은 부안현 궁신리(弓新里) 전평(前坪)에 있는 이의관댁의 전답을 각기 경작하였는데, 결부로 따지면 모두 44복 9속이 되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곳이 모두 진포질(陳浦秩), 즉 묵은 갯밭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의관댁에서는 이를 거론하지 않는 조건으로 95냥을 작정하여 추봉(推捧)하기로 하였다. 신옥현은 만일 이번 가을에 도세(賭稅)나 결세(結稅)가 환출(還出)될 경우, 위 95냥에 대하여 월 5분례(分例)의 이자로 하여 갚겠다고 약속하면서 이 표를 작성하여 소작인들에게 건네주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戊申三月初十日弓新里前坪仙洞李議官宅畓土韓文淑所納結十八卜一束張守山所納結十五卜四束李文兼所納結十一卜四束合肆拾肆卜玖束庫叱入於陳浦秩永勿擧論次錢文玖拾伍兩酌定推捧爲去乎目今秋如有賭稅與結稅間還出之端右錢以每朔伍分例備報之意如是成票事舍音票主辛玉鉉[印]證人 韓辰碩[着名]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무술년(戊戌年) 이취오(李聚五) 표(標) 고문서-증빙류-수표 경제-회계/금융-수표 戊戌二月卄七日 李聚五 戊戌二月卄七日 李聚五 전북 부안군 [着名] 1개 2.0*2.0 3개(흑색, 원형)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무술년(戊戌年) 2월 27일에 이취오(李聚五)가 작성한 표(票). 무술년(戊戌年) 2월 27일에 이취오(李聚五)가 작성한 표(票)이다. 정지제(定只堤) 아래에 있는 논 값 7천냥 중 4천냥에서 3천냥을 받아 보관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작성한 표로 추정된다. 그러나 어떤 사정으로 누구에게 이 표를 작성하여 발급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증빙류

戊戌二月卄七日定只堤下畓價柒仟兩內肆仟兩上參仟兩捧留印票主 李聚五[着名]此亦中新舊文推尋

상세정보
84193건입니다.
/4210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