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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29일(정해) 二十九日 丁亥 -강어대연헌(疆圍大淵獻)-. 맑음. 두보(杜甫)의 시(詩)를 보았다.나의 본성은 방탄하여,(我生性放誕)평소 절로 그렇게 되는 대로 맡겼네.(雅欲逃自然)- 자연(自然)은 도(道)이다. 석씨(釋氏)는 선(禪)으로 도피함을 말하고, 유자(儒者)는 자연으로 도피함을 말한다. - 【疆圍大淵獻】。陽。看杜詩。我生性放誕。雅欲逃自然.【自然은 道也ㅣ라 釋氏 謂逃禪이오 儒者 謂逃自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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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4일(갑오) 初四日 甲午 -알봉돈장(閼逢敦牂)-. 맑음. 본읍의 월산(月山) 손부 집에 오면서 읍내를 지나 강의관(姜議官)을 방문하고서 월산에 이르렀다. 다음날 동오재(東吾齋)7)에 들어갔다. 【閼逢敦牂】。陽。來本邑月山孫婦家。 歷邑內。 訪姜議官。 而到月山。翌日入東吾齋。 동오재(東吾齋) 담양군 월산면 월산리에 있었던 서당을 일컫는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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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계묘) 十五日 癸卯 맑다가 흐리고 흐리다가 바람이 불었다. 점을 쳐서 〈귀매(歸妹)〉괘 구이(九二)효를 만났다. 구이(九二)에 "애꾸눈으로 보는 격이니, 은둔자의 곧음이 이롭다.[眇能視, 利幽人之貞]"라고 하였다. (정자의) 〈전(傳)〉에서는 "이(二)는 강하고 바른 덕이 있어서 유정한 사람이다.[二有剛正之德, 幽靜之人也]"라고 하였다. (주자의)〈본의(本義)〉에는 "유인 또한 도를 품고 바름을 지키지만 때를 만나지 못한 자이다.[幽人亦抱道守正, 而不偶者也]"라고 하였다.집사람 또한 〈귀매〉괘를 얻었고, 효 또한 오효(五爻)를 얻었다. 육오(六五)에 "은나라 왕 〈인명〉제을(帝乙)〈/인명〉이 누이동생을 시집보낼 때, 그 정실의 옷차림이 측실의 옷차림만 못하다. 달이 거의 찰 때 길하다.[〈인명〉帝乙〈/인명〉歸妹, 其君之袂, 不如其娣之袂良, 月幾望, 吉]"라고 하였다. 〈전〉에 "기망은 아직 가득 차지 않은 것이다[幾望, 未至於盈]"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겸손하고 낮추어서 예를 따른다.[謙降從禮]"라고 하였다. 〈본의〉에 "덕을 숭상하고 꾸밈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尙德而不貴飾]"라고 하였다. 陽而陰。 陰而風。占遇〈歸妹〉九二爻。九二 "眇能視。 利幽人之貞。" 〈傳〉"二有剛正之德。 幽靜之人也。" 〈本義〉"幽人亦抱道守正而不偶者也。" 室人亦〈歸妹〉。 爻則亦五矣。六五。 "〈인명〉帝乙〈/인명〉歸妹。 其君之袂。 不如其娣之袂良。 月幾望。 吉。"〈傳〉"幾望未至於盈。" 又曰。 "謙降從禮"。 〈本義〉"尙德而不貴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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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박량진(朴亮鎭) 호적표(戶籍表)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적표 光武六年一月日 郡守 李範喬 朴亮鎭 光武六年一月日 興陽郡守 朴亮鎭 전라남도 고흥군 興陽郡印(적색, 정방형, 4.5×4.5), 興陽郡守之章(적색, 정방형, 2.5×2.5), 고흥 학림 여산송씨가 고흥분청문화박물관 1902년(광무 6)에 박량진(朴亮鎭, 28세)이 흥양군(興陽郡)에서 발급받은 호적표(戶籍表). 1902년에 朴亮鎭(28세)이 興陽郡에서 발급받은 戶籍表. *주소: 全羅南道 興陽郡 豆原面 鶴林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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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김수의(金守毅) 준호구(准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庚午式 行縣監 幼學 金守毅 庚午式 [1870] 興陽縣監 金守毅 전라남도 고흥군 行縣監[署押] 興陽縣監之印(5.5x5.5, 적색, 정방형) / 周挾改印(흑색, 장방형) 고흥 화장 김해김씨가 고흥분청문화박물관 HIKS_OD_F1009-01-000718 1870년(고종 7)에 흥양현에서 김수의(金守毅, 96세)에게 발급한 준호구. 1870년(고종7)에 興陽縣에서 金守毅(96)에게 발급한 准戶口. *주소: 大西面 禾場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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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년 김수의(金守毅) 준호구(准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乙卯式 行縣監 幼學 金守毅 乙卯式 [1855] 興陽縣監 金守毅 전라남도 고흥군 行縣監[署押] 興陽縣監之印(6x6, 적색, 정방형) / 周挾改印(흑색, 장방형) 고흥 화장 김해김씨가 고흥분청문화박물관 HIKS_OD_F1009-01-000718 1855년(철종 6) 흥양현에서 김수의(金守毅, 80세)에게 발급한 준호구. 1855년(철종6)에 興陽縣에서 金守毅(80)에게 발급한 准戶口. *주소: 大西面 禾場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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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김수의(金守毅) 준호구(准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甲子式 行縣監 幼學 金守毅 甲子式 [1864] 興陽縣監 金守毅 전라남도 고흥군 行縣監[署押] 興陽縣監之印(6.5x6.5, 적색, 정방형) / 周挾改印(흑색, 장방형) 고흥 화장 김해김씨가 고흥분청문화박물관 HIKS_OD_F1009-01-000718 1864년(고종 1)에 흥양현에서 김수의(金守毅, 90세)에게 발급한 준호구. 1864년(고종1)에 興陽縣에서 金守毅(90)에게 발급한 准戶口. *주소: 大西面 禾場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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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 김진성(金振聲) 준호구(准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行縣監 幼學 金振聲 [1879] 興陽縣監 金振聲 전라남도 고흥군 行縣監[署押] 興陽縣監之印(6.5x6.5, 적색, 정방형) / 周挾改印(흑색, 장방형) 고흥 화장 김해김씨가 고흥분청문화박물관 HIKS_OD_F1009-01-000718 1879년(고종 16)에 흥양현에서 김진성(金振聲, 58세)에게 발급한 준호구. 1879년(고종16)에 興陽縣에서 金振聲(1822년생?, 58)에게 발급한 准戶口. *주소: 大西面 禾場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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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년 류철호(柳徹浩) 준호구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乙卯 幼學 柳徹浩 乙卯 興陽縣監 柳徹浩 行縣監[押] ▣…▣ 1顆, 周挾改印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55년 幼學 柳徹浩 준호구. 1855년(철종 6)에 전라도 興陽縣 邑內面 虎山東邊里에 거주하는 幼學 柳徹浩의 준호구이다. 柳徹浩의 본관은 高興이고, 나이는 63세로 계축(1793)생이다. 四祖사항에 대해서 살펴보면 부친은 學生 柳日榮이고, 조부는 學生 柳坰이고, 증조부는 學生 柳希綻이며, 외조부는 學生 宋昌懿로 본관은 礪山이다. 가족구성원으로 처 礪山宋氏, 아들 柳永蒔, 며느리 靈光丁氏가 기재되어 있다. 처 여산송씨는 61세로 을묘(1795)생이고, 아들 류영시는 23세로 계사(1833)생이며, 며느리 영광정씨는 24세로 임진(1832)생이다. 처 송씨의 부친은 學生 宋禹臣이고, 조부는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生 宋晊이고, 증조부는 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 ▣…▣摠管 宋東錫, 외조부는 學生 羅文杓로 본관은 羅州이다. 소유하고 있는 노비는 모두 3口로 남자종 1구(27세), 여자종 2구인데 그 중 여자종 1구는 이미 사망하였다. 당시 류철호의 거주지인 전라도 흥양현 읍내면 호산동변리는 현재 전라남도 고흥군 고흥읍 호동리이다. 문서를 보면 호에 실제 거주하는 인원이 기재된 행의 첫 머리에 朱墨을 찍었다. 또 문서 오른쪽 하단에 朱墨으로 '准'자가 추기되어 있다. 이는 류철호가 작성하여 제출한 호구단자를 관에서 이전의 호구와 대조하고 확인하였다는 표시이다. 문서 좌측에 行縣監이 기재되고 그 아래 署押, 오른쪽 하단에 周挾改印과 관인이 겹쳐서 찍혀 있다. 호구단자는 국가에서 戶口臺帳을 3년마다 改修하기 위하여 各戶에서 호구상황을 적어 3년에 한차례 제출하는 것을 말한다. 주요 기재사항은 각호의 주소, 戶首의 직업·성명·생년·본관·四祖, 그 처의 성명·생년·본관·四祖, 率居子女의 성명·생년, 노비와 雇工의 성명·생년 등이다. 戶主가 호구단자 2부를 작성하여 올리면 里任․面任의 검사를 거쳐 州郡에 보내지고, 주군에서는 구 대장 또는 관계서류를 대조하여 誤錯여부를 확인한다. 이후 1부는 단자를 제출한 호주에게 환부하여 각 집안에 보관케 하고, 1부는 장적을 개수하는데 자료로 이용한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2부를 작성하여 제출하던 호구단자를 1부만 작성하고 거기에 곧바로 준호구에 찍던 周挾改字印을 찍어 돌려주게 된다. 이는 이전에 제출용 호구단자와 증명용 준호구가 공존하던 것이 이제는 호구단자만으로 준호구의 역할을 포괄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문서 하단 여백에 대조ㆍ확인을 했다는 '准'을 쓰고 관인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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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년 류영시(柳永蒔) 준호구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戊午 幼學 柳永蒔 戊午 興陽縣監 柳永蒔 行縣監[押] ▣…▣ 1顆, 周挾改印 고흥 고흥류씨 류탁 후손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1858년 幼學 柳永蒔 준호구. 1858년(철종 9)에 전라도 興陽縣 邑內面 虎山東邊里에 거주하는 幼學 柳永蒔의 준호구. 柳永蒔의 당시 아버지 柳徹浩이 죽음으로 인해 호주가 되었으며 나이는 26세이다. 四祖사항에 대해서 살펴보면 부친은 學生 柳徹浩이고, 조부는 學生 柳日榮이고, 증조부는 學生 柳坰이며, 외조부는 學生 宋禹臣로 본관은 礪山이다. 가족구성원으로는 돌아가신 어머니 宋氏와 처 靈光丁氏가 기재되어 있다. 처 영광정씨는 27세로 임진(1832)생이다. 처 丁氏의 부친은 學生 丁斗亨, 조부는 學生 丁式祚, 증조부는 學生 丁孝彬, 외조부는 學生 宋壽龜로 본관은 礪山이다. 소유하고 있는 노비는 모두 2口로 남자종 1구(30세)와 여자종 1구(61세)가 있다. 당시 류영시의 거주지인 전라도 흥양현 읍내면 호산동변리는 현재 전라남도 고흥군 고흥읍 호동리이다. 문서를 보면 호에 실제 거주하는 인원이 기재된 행의 첫 머리에 朱墨을 찍고, 亡者의 경우 아래에 길게 줄을 그어 표시하였다. 또 문서 오른쪽 하단에 朱墨으로 '准', 黑墨으로 '書'가 추기되어 있다. 이는 류영시가 작성하여 제출한 호구단자를 관에서 이전의 호구와 대조하고 확인하였다는 표시이다. 문서 좌측에 行縣監이 기재되고 그 아래 署押, 오른쪽 하단에 周挾改印과 관인이 겹쳐서 찍혀있다. 호구단자는 국가에서 戶口臺帳을 3년마다 改修하기 위하여 各戶에서 호구상황을 적어 3년에 한차례 제출하는 것을 말한다. 주요 기재사항은 각호의 주소, 戶首의 직업·성명·생년·본관·四祖, 그 처의 성명·생년·본관·四祖, 率居子女의 성명·생년, 노비와 雇工의 성명·생년 등이다. 戶主가 호구단자 2부를 작성하여 올리면 里任․面任의 검사를 거쳐 州郡에 보내지고, 주군에서는 구 대장 또는 관계서류를 대조하여 誤錯여부를 확인한다. 이후 1부는 단자를 제출한 호주에게 환부하여 각 집안에 보관케 하고, 1부는 장적을 개수하는데 자료로 이용한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2부를 작성하여 제출하던 호구단자를 1부만 작성하고 거기에 곧바로 준호구에 찍던 周挾改字印을 찍어 돌려주게 된다. 이는 이전에 제출용 호구단자와 증명용 준호구가 공존하던 것이 이제는 호구단자만으로 준호구의 역할을 포괄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문서 하단 여백에 대조ㆍ확인을 했다는 '准'을 쓰고 관인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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讀書內元庵記 【丁亥】 丁亥春二月余與本鄕宗人琦衡平極甫秋城宗人源公進甫約日伴讀於秋城之內元庵從弟濟休與村秀才兩李童亦從余庵之爲庵懸在千仞岡上不過是一撮土地而中有數三屋子十餘衲子不甚孤寂但山上石徑崎嶇碻硧殆非人跡所到而前後書人之不相棄者有所取於幽闃淸絶而然耶山之名不知何許而以其尖如笠冒故庵之僧强名曰笠冒峰峰之西峽有笠店村村有賣酒之壚峰之東峽有淨元庵庵是治遊之園前後書人之稱以不草草者亦有取於斯歟余一日笑語於庵之僧致玉曰吾儕之淹留於此庵者非徒爲習業而止實欲爲榮顯之基鞏他日以靑衫玉篴殷勤扣訪則爲此庵之主人者不亦榮乎致玉愕然不怡曰 靑衫玉篴大君子所大欲而殷勤扣訪者非小僧之所願也此庵素甚淸寒計朝暮而畵饘粥課日月而治楮麻恒懼朽落不全何况一經貴客則擔舁也餽餉也贐行也難可周匝而如或蹉跌則騶徒之詬罵鞭搖輒隨而至嗟乎如大君子者寧有此乎扣訪前跡雖出於相愛之情而一迎送之間恐致有不相稱矣此等句語敢請束閣何如如不得已而有相愛不相捨之情則爲一小記揭于今日壁上者反不榮於靑衫玉篴之後日相訪也哉余乃愀然良久曰誠然乎哉誠然乎哉因爲之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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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政必自經界始賦 【戊子二月二十七日鎭安東堂入格京試官李校理憲兢】 夏后則以三壤周人徹其百畝恒産均於野民穀祿平於君子仁必自於正界始一字爲元符推均施之至化指迺疆之先務原仁君之發政必有自於井地畝九百而民業稅十一而王制仁風降而戰塗噫無人於修擧迨畢戰之問井攬仁政而將行欽嘉制於上世講至治於偏壤先王政而欲擧子之君兮仁哉斯養民之至道果何法以爲始於薄歛而不論在班祿而姑舍惟經界之一正最所繫於井區均野業猶以彼制田祿亦由此雖有瘠而有肥庶無小而無大畦町平而永頼科條燦而捋修治庶民如脈田始不均則無秋逌迺理之得定耆大化之咸被疆遠近而可平地濶狹而宜均治人在於養人羌不可以或慢遵溝洫之井井致疆域之翼翼今天下而是政子其勉哉潤澤由均界而化行以正經而仁敷顧王道之易易在定域之如何分九區而克平囿萬姓而咸溱登遺經而鏡考仰鄒聖之徽謨懷做世之至意語治井之大槩仁其推而政行遐不始乎疆理斯可觀於聖制有如自於田疇台千載而景仰綴蕪辭而遐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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落魄荊圍之後留心桑楡之西自四月念間住齋洞洪監察耆燮【字壽卿號蒼軒】家與其胤碩士在龍【字景見號石虎】同業做讀遷延時月家信渺茫兼得耳聾之病數四朔矇矓度了鬱鬱欲狂兼以秋風蕭颯旅雁酸嘶中夜獨坐展轉思鄕拈得一朝字續成三首律令人寓矚可想捧腹【三首】 夕枕無端歎暮朝初來心事摠虛料功名欲拾身先拙談笑如愚世共嘲祗似羈禽遙夢越幾多賢駿幸逢堯衷腸九曲終難瀉强引狂歌響碧霄夜枕書空計暮朝如今自愧臆生料霜林雁呌頃驚夢露草蛩吟怳解嘲容易世華經冷煥汗漫工業讀羲堯秋風忽又添愁思淅瀝寒聲撼玉霄曉枕憮然惜暮朝莫如歸去更何料仰瞻皇矣聊無語臥誦簡兮空自嘲蔑學還思趨孔鯉不才堪愧値唐堯夢中猶作南柯事好把雲梯上九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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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元夜約石南睡翁會飮具斯文景五家趙屛巖【石南父親】李魯直兩老人亦在坐因各賦詩一闋 旅館更深伴燭光一天星斗冷如霜文園雅會風猶在酒國奇緣月未忘二十芳齡前夜惜兩三淸話此時長少年聲價高千尺席上詩交盡老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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冬十月沈友舜五名煥奎將營牙山聘家之行離期不遠逢場不常遂構四闋慨然奉贐【四首】 問君南去幾時還莽蒼歸期二晦間帆外茫茫流漢水鞭頭落落栱雲山別懷谷北風聲洌望眼天東月影彎最有中筵惜別客慨然執勺歌陽關久矣他鄕獨樹花爲君更折老楊斜萬山蕭颯圍平壄一雁蒼茫踏暮沙北地風霜吾可笑東床華燭子應誇送人此日深深恨强把彤毫皷頰牙靄靄雲煙壓石橋游人何事咏逍遙山應惜別千峰暗天亦留行一雨蕭離恨堪憐風葉散歸期莫待雪花消滔滔愁浪終難破强把樽醪上面潮紅錦浪萬千廻靑門柳數三枚山南春盡鸎朋去洛北霜寒雁客來牙嶽東頭雲起漢江裏西風催曩爾讙諧者今何別離哉招不徠望不見戱寫 狂吟付一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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翌日與睡翁更咏前夜景拈少陵韻 一春佳節上元廻冷煖椒樽此夜開聽漏齊圍鍾閣立放歌撗穿石橋來飯傳舊俗紅盈鉢月最新光素滿臺幾處禾竿爭禱慶琴簫消盡去年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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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張豊巖瀷【字翼汝】雪中相酬洪石虎亦和 漠漠春天白雪浮淸譚賸得客風流此時奇會成三益近日詩思減一愁酒後不除豪放氣塵間難學淺深謀請君莫惜峨洋曲冷暖人情我已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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夜宿琶山家詠木覓雪景琶山雲湖亦和 茆舍亭亭結數間雪中南嶽露眞顔畵師模格仍成拙遊子工吟却忘還醉對遙如廻剡棹平看便作擁藍關百年地僻多高趣子獨淹留養得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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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신묘) 三日 辛卯 흐리고 비.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병자년에 흥양(興陽)에서 소가 머리가 둘 달린 송아지를 낳아서 사방에서 보러오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때문에 주인이 그 머리를 베어, 그 고을 태수(太守)인 김홍집(金弘集)에게 헌납하여 보였다. 이후로 주인은 온 집안사람이 몰사하였고, 홍집은 후에 재상(宰相)이 되었다. "라고 하였다. 陰雨。有人言。 "丙子年。 興陽牛生兩頭犢。 四方來觀者衆多。 故主人斬其頭。 其州太守金弘集納觀。自後主人渾家沒死。 弘集后爲宰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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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계사) 五日 癸巳 -소양대황락(昭陽大荒落)-. 오늘은 천중절(天中節, 단오)이며, 또 하지(夏至)이다. 동계선생(洞溪先生)은 갑인년(1614) 2월에 봉사(封事)를 올려 정항(鄭沆)을 참수하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위호(位號)를 추복(追復)할 것을 청하였다. 양사(兩司)가 죄를 의논하자고 일제히 발론하자, 선생이 동대문 밖에서 대명(待命)하였다. 합사가 안율(按律)하기를 청하였다. 3월 3일에 옥사에 나아갔다. 6월 임오일에 국청(鞫廳)을 대하였다. 7월 신해일에 다시 공초하였다. 광해군이 특별히 대정현(大靜縣)64)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라고 명하였다. 〈우연히 짓다〉성역이 고원하지 않아 한 갈래 길이 통하니,(聖域非高一經通)성성하게 경을 잡아 지키는 것이 요체일세.(惺惺持敬是要功)천만 가지 사악함과 욕심 모두 대적할 만하니,(千邪萬欲皆堪敵)천리의 유행은 절로 다함이 없는 법이라오.(天理流行自不窮)구중설(求中說)65)을 짓다. 대개 이천(伊川)의 '이미 구함이 있으면 중(中)이 아니다'는 설과, 연평(延平, 이동(李侗))의 '고요히 앉아서 중(中)을 구한다'는 설을 합하여 논해보고 그 다른점을 변별해 보니 하나로 귀결된다. 【昭陽大荒落】。是日天中節。 又逢夏至也。洞溪先生。 甲寅二月上封事。 請斬鄭沆。 追復永昌大君位號。兩司齊發議罪。 先生待命東門外。合司請按律。三月三日就獄。六月壬午對鞫廳。七月辛亥再供。光海特命大靜安置圍籬所。偶成聖域非高一經通。惺惺持敬是要功.千邪萬欲皆堪敵。天理流行自不窮.作求中說。蓋以伊川'旣求非中'。 延平'靜坐求中'之說。 合而論之。 卞其異同。 而一其歸也。 대정현(大靜縣)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에 있던 조선시대의 지명이다. 구중설(求中說) 미발시(未發時)에 중(中)을 구하는 것에 대한 논쟁이다. 정자, 주자의 의견과 나흠순(羅欽順), 여조겸(呂祖謙) 등의 의견이 같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나라 학자들 간에도 논쟁거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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