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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1일(경인) 初一日 庚寅 -상장섭제(上章攝提)-. 갬. 황혼 무렵 늙은 아내40)의 부음(訃音)이 갑자기 이르렀기에 밤을 타고 분상(奔喪)41)하여 집에 도착했다. 【上章攝提】。晴。黃昏老妻訃音忽到。 乘夜奔喪至家。 늙은 아내 단양인 허징(許澄)의 딸로, 1857년 11월 24일에 태어나서 1928년 3월 1일에 사망한 것이다. 아들 1명과 딸 2명을 두었다. 분상(奔喪) 먼 곳에서 친상(親喪)의 소식을 듣고 급히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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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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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2일(신묘) 初二日 辛卯 -중광단알(重光單閼)-. 맑음. 나씨(羅氏)42)에게 시집간 딸이 급히 달려와서 소렴(小斂)43) 할 때 도착했다. 【重光單閼】。陽。羅氏女奔到小斂。 나씨(羅氏) 금성인 나기주(羅碁柱)에게 시집간 둘째 딸을 말함. 소렴(小斂) 시체에 옷을 입혀 이불로 싸는 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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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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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3일(임진) 初三日 壬辰 -현익집서(玄黓執徐)-. 이씨(李氏)44)에게 시집간 딸이 급히 와 대렴(大斂)45)할 때 도착했다. 이날 후원(後園)에 장사지냈다. 【玄黓執徐】。陽。李氏女奔到大斂。是日葬于後園。 이씨(李氏) 함평인 이대수(李大洙)에게 시집간 첫째딸을 말함. 대렴(大斂) 소렴이 끝난 다음 날 이불로 싸서 베로 묶는 일, 또는 그 의식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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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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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백석헌유집(柏石軒遺集) 2권 1책 柏石軒遺集(全) 柏石軒遺集 고서-집부-별집류 교육/문화-문학/저술-문집 문집 표점영인 柏石軒遺集 一九七八年戊午二月十五日印刷 一九七八年戊午二月十五日印刷 奇陽衍 大東印刷所:全南長城郡長城邑梅花洞 1061 石版本 1 有界 11行24字 한자 內向二葉花紋魚尾 미상 국립중앙도서관 1978년에 간행한 조선말기의 학자 기양연(奇陽衍, 1827~1895)의 시문집. 『柏石軒遺集』 해제 1. 기양연(奇陽衍)의 생애 기양연(奇陽衍: 1827, 순조 27~1895, 고종 32)의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자민(子敏), 호는 백석(柏石)이다. 집 앞에 큰 잣나무[柏]가 있고, 그 아래 돌이 있어서 백석(柏石)이라고 자호하였다. 그의 가문이 호남지방에 정착하게 된 것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사사(賜死)된 기준(奇遵)의 형 기원(奇遠)이 사화를 피해 이곳으로 내려 온 이후이다. 그의 가문은 장성 일대에서 줄곧 세거하면서 서인(西人)과 노론(老論)으로 자처하였다. 기양연의 6대조 기정익(奇挺翼)은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고조의 휘는 종상(宗相), 증조의 휘는 태온(泰溫)이다. 호남지역에서 유종(儒宗)으로 추앙받는 기정진이 삼종숙(三從叔)이다. 아버지의 휘는 윤진(允鎭)으로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어머니는 반남박씨(潘南朴氏)로 생원 박종한(朴宗漢)의 딸이다. 1827년(순조 27)의 장성 집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67년(고종 4)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ㆍ정언ㆍ예조정랑을 지냈다. 이후 1868년 지평, 1869년 장령, 1873년 사복시정(司僕侍正)을 지냈다. 1874년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집상하였다. 1878년 다시 장령을 거쳐 부교리ㆍ부수찬을 역임하였다. 1876년 일본에 개항 이후 개화정책에 반대하여 1880년 내수외양책을 건의한 뒤 받아들여지지 않자 장성에 내려와서 농소(膿巢)를 짓고 지방에 은거하였다. 이후로도 여러 차례 조정에서 관직이 내려왔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1894년 동학군을 진압할 때 일본군을 끌어들이는 것을 탄식하였으며, 1895년 봄에 가족들을 거느리고 지리산에 들어갔으나, 얼마 되지 않아 병을 얻어 1895년 5월 20일 69세로 별세하였다. 진사(進士) 고흥유씨(高興柳氏) 동식(東植)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우승(宇承), 우춘(宇春)과 양천허씨(陽川許氏) 극(極), 동래정씨(東萊鄭氏) 상현(尙鉉), 전주유씨(全州柳氏) 영구(永龜)에게 시집간 세 딸을 두었다. 사후 80년 뒤인 1975년에 현손인 기준서(奇駿舒) 등이 기양연의 글 가운데에서 약간의 시문과 잡저, 사후 묘도문자 등을 모아 『백석헌유집(柏石軒遺集)』 2권 1책의 석인본을 간행하였다. 2. 『백석헌유집(柏石軒遺集)』 구성과 내용 『백석헌유집(柏石軒遺集)』은 기양연(奇陽衍)의 시문집으로, 1975년 현손(玄孫) 기준서(奇駿舒)에 의해 2권 1책의 석인본으로 간행되었다. 사후 70년 만에 간행되어 중간에 많이 산실된 것으로 보인다. 서문은 권용현(權龍鉉)이 썼다. 권용현은 서문에서 기양연이 기정진의 재종질로 그의 훈도를 받았으며 사환과 학문이 바른 선비라고 칭송하였다. 권말에는 안종선(安鍾宣)의 발문이 있다. 전남대학교 도서관, 전주대학교 도서관, 국회도서관, 장성 변시연(邊時淵) 댁내 등에 소장되어 있다. 권1에는 시(詩) 14수, 서(書) 55통, 잡저(雜著) 6편이 실려 있다. 시는 서울에서 지은 것과 장성 등 지역에서 지은 시로 구분할 수 있다. 서울에서 지은 시는 10여 년 동안의 객지생활을 읊은 것, 동료들과 활동한 낙사(洛社)에서 지은 것이다. 서울에서 과거시험을 준비할 때, "무엇하러 고향을 떠나 이 멀리 오시었소. 덧없는 세상 영예는 일장춘몽 같은 것을, 병이 났던 어젯밤엔 시도 잠시 접었거늘, 구름 없는 오늘밤은 달빛 더욱 휘황하오. 몇 달을 좋은 친구 자꾸자꾸 말하지만, 십 년을 지낸 하숙 살이 몸에 배었다오. 나그네 시름 흔들어 내 마음 옥죄지 마오. 장부의 마음 산해이니 감싸줌이 소중하리[서울 여관에서 만나 나눈 이야기(洛館會話)]"라는 시를 지었는데, 문과에 급제하기 전 서울생활의 고달픔을 느끼게 한다. 지역에서 지은 시는 장성에서 스승 기정진과 동문 민치완(閔致完)의 부친 회갑을 축하하는 것, 자신의 거처인 백석헌과 농소에 관한 것[「농소(農巢)」], 동문들과 교유하며 주고받은 것 등이다. 서는 부친 기윤진과 아들 우승(宇承)ㆍ우춘(宇春), 사위 허극(許極)에게 보낸 편지가 대부분이다. 특히 「상친정(上親庭)」은 1853년 4월 17일부터 1874년까지 부친에게 보낸 편지인데, 그가 서울 생활 중에 보낸 것으로 과거와 관련 일이나 정계의 동향, 이양선의 출몰, 관직생활에 대한 소식으로 이루어졌다. 아들과 사위에게 보낸 편지도 주로 서울에서 보낸 것인데, 안부를 묻거나 과거와 관련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잡저로는 1862년 삼정에 대한 대책을 적은 「삼정책(三政策)」이 중요한데, 그의 경세관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로 중앙과 지방의 기강을 바로잡고 인재를 뽑아서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하고 신분에 관계없이 군포를 징수하며, 환곡을 폐지하고 상평창으로 바꾸자는 주장을 담고 있다. 구체적으로 당시 삼정을 바로잡기 위해서 성심을 바르게 하여 다스림의 근본으로 세울 것, 기강을 떨쳐 조정을 숙정할 것, 외관을 뽑을 때 탐욕스러운 장리는 금지시킬 것, 이서들의 녹봉을 제정하여 훔치는 것을 금지시킬 것을 대책으로 내세웠다. 아울러 「효책(孝策)」에서는 각종 효행을 논하며, 학문하는 사람이라면 효도를 한 뒤에야 학문하는 도를 행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융학서언심언성책((庸學序言心言性策)」에서는 주희가 지은 『중용서』와 『대학서』에서 각각 심(心)과 성(性)을 논한 이유에 대해서 적고 있다. 「척양사론(斥洋邪論)」은 서학과 서양문물을 사특한 것으로 규정하며 정학을 높이고 서양문물을 쓰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 글로써, 스승인 기정진의 위정척사사상을 계승하였음을 보여준다. 이외 1855년 여름에 고향인 장성의 청음정에서 휴가 때 독서와 마음공부를 쉬지 말아야 한다는 「휴가시자경문(休暇時自警文)」, 1873년 2월 3일부터 5월 10일까지 시관(試官)과 사복시정(司僕寺正)으로 임명되어 시험관으로 활동한 내용과 마정을 돌본 내용을 기록한 「계유일기(癸酉日記)」 등이 있다. 권2는 서(序) 5편, 기(紀) 3편, 발(跋) 1편, 제문(祭文) 5편, 묘갈명(墓碣銘) 1편, 행장(行狀) 4편과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노사선생답문류편서(蘆沙先生答問類編序)」인데 기정진과 문인들 간의 문답 내용을 기정진의 문인들이 수년 간에 걸쳐 성리학, 결서, 예학, 역사 등으로 항목별로 편집한 「답문유편(答問類編)」의 의의와 편집 과정을 설명한 글이다. 「기씨족보서(奇氏族譜序)」는 기정진 문인집단과 장성 행주기씨 집안 내에서의 기양연의 학문적 위상을 드러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기문류에는 임진왜란 당시 열부 기씨, 서울 낙산(落山) 아래에 있는 승방(僧房) 상현암(尙玄菴), 친구 나도규(羅燾圭)가 살았던 덕암(德巖)에 대한 글이 있다. 제문은 스승인 기정진, 서울에서 관직생활을 하면서 교유하였던 홍종서(洪鍾序)와 서승보(徐承輔), 동문 중에 친하게 지냈던 조의곤(曺毅坤)을 위한 글이다. 가장(家狀)은 서울에 관직 생활을 함께 한 종친 기문현(奇文鉉)을 위해 지은 것이다. 부록에는 1868년 정월부터 1880년 7월 24일까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기사 가운데 기양연 관련 기록을 모은 「승정원일기초록(承政院日記抄錄)」, 기우만(奇宇萬)이 찬한 기양연의 행장, 안규용(安圭容)이 찬한 기양연의 묘갈명(墓碣銘), 박원재(朴元在)가 찬한 묘표(墓表), 기양연의 장례 때 쓰인 만장(輓章)과 제문(祭文), 기양연의 거처에 대해 찬한 나도규의 「백석헌기(柏石軒記)」, 기양연의 농소에 대해 기재(奇宰)가 찬한 「농소기(農巢記)」, 맨 끝에『백석헌유집』을 간행한 경과를 담은 안종선의 발문(跋文) 등이 실려 있다. 『백석헌유집』은 노사 기정진 문하에 있던 관료의 문집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으며, 삼정 문란의 시기에 이를 타개하기 위한 대책과 서양문물을 접하고 대응책을 세운 한말 지식인의 경세관과 말년의 향촌생활의 실상을 살피는 데에 도움을 준다. 아울러 조선후기 과거제의 운영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편지글이 있어 주목된다. 또한 기정진과 그 문하생이 갖고 있던 경세관과 척사위정(斥邪衛正)의 시대정신을 이해할 수 있는 의미있는 문집이라 할 수 있다. 「백석헌운(柏石軒韻)」에서, "우리 집 뜰 앞에 동백나무가 있고, 동백나무 아래에는 바위가 있다. 동백나무는 세한의 절개를 지녔고, 바위는 벽처럼 우뚝 선 기상을 지녔으니, 이것을 가지고 사랑채에 편액하여 경계할 것으로 삼는다(吾家庭前有柏, 柏下有石。柏有歲寒之節 石有壁立之像, 取以扁其軒, 以備警策)"라고 노래하였는데, 그의 담대한 기백을 잘 보여준다. 3. 세부목차 卷一 詩 : 謹次蘆沙老先生六十除夕韻(三首), 次梅塢壁上韻, 洛舘會話, 輓安進士(重燮), 洛社偶吟, 次閔都事(致完)大人回甲韻, 洛社會吟(二首), 贈人, 京友晬宴, 栢石軒, 農巢, 巢旣成四從弟弘衍遂以四律賦事相贈仍以其詩爲原韻從以和之, 次東塢亭韻, 別趙月臯(性家○五首), 書 : 上親庭(十七), 答許會源(濬○三), 答李聲震(鍾澤○三), 答禮洞友人(姓名缺○五), 答桂陽友人(姓名缺○二), 與鄭友(名缺), 與友人(姓名缺○六), 與許星甫(極○五), 寄家兒(十), 寄次兒(三), 雜著 : 三政策, 孝策, 庸學序言心言性策, 斥洋邪論, 休暇時自警文, 癸酉日記 栢石軒遺集 卷二 序 : 答問類編序, 朗州崔氏族譜序, 奇氏族譜序, 春坡遺集序, 梁松圃回甲詩軸序, 記 : 烈婦奇氏㫌閭重修記, 尙玄庵記, 德巖記, 栢石軒記, 農巢記 全南長城郡長城邑梅花洞 1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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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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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 김세풍(金世豊) 준호구(准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光緖五年月日 行縣監 幼學 金世豊 光緖五年月日 高山縣監 金世豊 전라북도 완주군 行縣監[着押] 1개(적색, 정방형), 周挾 字改印 고산 신평 경주김씨가 전주역사박물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문현주, 『조선시대 호구단자의 작성에 관한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석사학위논문, 2008. HIKS_OD_F1002-01-000001 1879년(고종 16)에 김세풍(金世豊)이 전라도(全羅道) 고산현(高山縣)에서 발급받은 준호구. 1879년(고종 16)에 전라도(全羅道) 고산현(高山縣) 현내면(縣內面) 신평(新坪)에 사는 당시 67세인 김세풍(金世豊)이 고산현에서 발급받은 준호구이다. 이때 그는 처 동래정씨(東萊鄭氏, 50세)와 과부가 된 큰며느리 전주최씨(全州崔氏, 33세), 아직 어린 작은아들 상현(商鉉, 13세), 그리고 손자 대근(大根, 14세) 등과 함께 살고 있었다. 도망간 노비가 1명이 있었다. 한편 관련된 문서에 의하면 김세풍의 초명(初名)은 김관억(金寬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관억이 28세 때 작성한 호구단자에 따르면 당시 그는 전주부 봉상면 사거리에 살고 있었으며, 다섯 살 아래의 처 만경두씨(萬頃杜氏)와 함께 살고 있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그는 전주부에서 고산현으로 이거하였으며, 아내가 사망하였거나 이혼한 뒤에 재혼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호주가 살았던 고산현 현내면 신평리는 현재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읍내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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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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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김세풍(金世豊) 준호구(准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光緖八年月日 行縣監 幼學 金世豊 光緖八年月日 高山縣監 金世豊 전라북도 완주군 行縣監[着押] 1개(적색, 정방형), 周挾 字改印 고산 신평 경주김씨가 전주역사박물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문현주, 『조선시대 호구단자의 작성에 관한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석사학위논문, 2008. HIKS_OD_F1002-01-000001 1882년(고종 19)에 김세풍(金世豊)이 전라도(全羅道) 고산현(高山縣)에서 발급받은 준호구. 1882년(고종 19)에 전라도(全羅道) 고산현(高山縣) 현내면(縣內面) 신평리(新坪里) 제2통 제3호에 사는 당시 70세인 김세풍(金世豊)이 고산현에서 발급받은 준호구이다. 이때 그는 처 동래정씨(東萊鄭氏, 53세)와 아직 어린 아들 상욱(商郁, 15세) 등과 함께 살고 있었다. 도망간 노비가 1명이 있었다. 한편 관련된 문서에 의하면 김세풍의 초명(初名)은 김관억(金寬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관억이 28세 때 작성한 호구단자에 따르면 당시 그는 전주부 봉상면 사거리에 살고 있었으며, 다섯 살 아래의 처 만경두씨(萬頃杜氏)와 함께 살고 있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그는 전주부에서 고산현으로 이거하였으며, 아내가 사망하였거나 이혼한 뒤에 재혼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호주가 살았던 고산현 현내면 신평리는 현재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읍내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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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4년 송진성(宋鎭誠) 준호구(准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甲子式 行縣監 幼學 宋鎭芳 改名 鎭誠 甲子式 [1864] 興陽縣監 宋鎭誠 전라남도 고흥군 行縣監[着押] 興陽縣印(적색, 정방형), 周挾改印 고흥 학림 여산송씨가 고흥분청문화박물관 1864년(고종 1)에 흥양현에서 송진성(宋鎭誠, 42세)에게 발급한 준호구. 1864년에 興陽縣에서 宋鎭誠(42세)에게 발급한 准戶口. *주소: 豆原面 鶴林里 *개명: 宋鎭芳 → 宋鎭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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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송윤호(宋潤浩) 준호구(准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甲午式 行縣監 幼學 宋潤浩 甲午式 [1894] 興陽縣監 宋潤浩 전라남도 고흥군 行縣監[着押] 興陽縣印(적색, 정방형), 周挾改印 고흥 학림 여산송씨가 고흥분청문화박물관 1894년(고종 31)에 흥양현에서 송윤호(宋潤浩, 50세)에서 발급한 준호구. 1894년에 興陽縣에서 宋潤浩(50세)에게 발급한 准戶口. *주소: 豆原面 鶴林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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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년 김인집(金仁集) 준호구(准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嘉慶二十四年月日 行府使 金仁集 嘉慶二十四年月日 礪山府使 金仁集 전라북도 익산시 行府使[着押] 1개(적색, 정방형), 周挾 字改印 고산 신평 경주김씨가 전주역사박물관 전북대학교 박물관, 『박물관도록 –고문서-』, 1998. 전경목 등 역, 『儒胥必知』, 사계절, 2006. 최승희, 『한국고문서연구』, 지식산업사, 2008. 문현주, 『조선시대 호구단자의 작성에 관한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석사학위논문, 2008. HIKS_OD_F1002-01-000001 1819년(순조 19)에 김인집(金仁集)이 전라도 여산부(礪山府)에서 발급받은 준호구. 1819년(순조 19)에 전라도 여산부(礪山府) 남변리(南邊里) 제33통 제5호에 사는 당시 60세인 김인집(金仁集)이 여산부(礪山府)에서 발급받은 준호구이다. 이때 그는 처 수원백씨(水源白氏, 40세)와 두 아들 치억(致億, 13세), 치덕(致德, 7세) 등 4명이 함께 살고 있었다. 여산부 남변리는 현재 전라북도 익산군 여산면 제남리에 해당하는 곳이다. 한편 관련문서에 따르면, 호주인 김인집에게는 5촌 조카가 되는 김세풍(金世豊)은 전주부에서 살다가 고산현으로 이거한 것으로 나타난다. 김세풍의 초명은 김관억(金寬億)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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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년 김광명(金光明) 준호구(准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壬子式 行縣監 幼學 金光明 壬子式 興陽縣監 金光明 전라남도 고흥군 行縣監[署押] 興陽縣監之印(적색, 정방형) / 周挾改印(흑색, 장방형) 고흥 봉동 김해김씨가 고흥분청문화박물관 HIKS_OD_F1006-01-000632-01 1852년(철종3)에 흥양현에서 김광명(金光明, 87)에게 발급한 준호구(准戶口). 1852년(철종3)에 興陽縣에서 金光明(87)에게 발급한 准戶口. *주소: 古邑面 鳳桐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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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년 김광명(金光明) 준호구(准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乙卯式 行縣監 幼學 金光明 乙卯式 興陽縣監 金光明 전라남도 고흥군 行縣監[署押] 興陽縣監之印(적색, 정방형) / 周挾改印(흑색, 장방형) 고흥 봉동 김해김씨가 고흥분청문화박물관 HIKS_OD_F1006-01-000632-01 1855년(철종 6) 흥양현에서 김광명(金光明, 90세))에게 발급한 준호구. 1855년(철종6)에 흥양현에서 金光明(90)에게 발급한 准戶口. *주소: 古邑面 鳳桐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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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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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7년 강혁조(姜赫祖) 준호구(准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丁卯四月日 行郡守 幼學 姜赫祖 丁卯四月日 靈光郡守 姜赫祖 전라남도 영광군 行郡守[着押] 靈光郡守之印(적색, 정방형), 周挾字改印(흑색, 장방형) 영광 진주강씨 강항 종가 (재)한국학호남진흥원 HIKS_OD_F1016-01-000030 1747년(영조 23) 유학(幼學) 강혁조(姜赫祖, 31세)의 준호구. 1747년 幼學 姜赫祖의 准戶口. *주소: ▣甲面 松亭里 第一統 第四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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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14일 十四日 차동에 갔다가 저녁 무렵에 내려왔다. 往車洞, 夕間下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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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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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14일 十四日 또 극도로 추웠다. 又極寒極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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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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感夢黃牛廟賦 【完營公都會魁擢監司曺判書鳳振】 牛拜像於叢隍范寄詩於茶肆若有人兮古峽謇須誰兮荒祠診予夢兮感遇像在玆而足徵旣興想於古昔所發嘅於徊徨何年事兮溯江曾有夢於牛廟搴芳杜而襲香集土木而爲骸行出門而歷覽馬胡爲乎隻耳迨夷陵之出守適余來夫黃牛峰月吐而有約峽雲曖而如待偕元珍而緩步遂漸入於佳境悄然立而有覺覿彷彿於遺形殊叢林之古圖判竹隍之神蹟伊門外兮壁上皆可記於歷歷分明夢於昔時到于今而方覺翻驚眼於此夕彼遺像兮如期顧元友而笑道感歎長於徘徊奚無知於偶塑若有故於夢現繽東顧而西眺十年跡兮今看非鎔祠之木刻豈河宅之茅結今而浚而有驗留眞跡於牛峽忽反顧而流睇夢亦不爲無助回甛鄕之偶發感眞境之親對身是初而眼重聿相合於前後嗟吾人兮若夢信有命於前定泥塑儼其不語怳解嘲於今行拚往跡而笑陳夢中人兮相逢良無由而忽到何若是其相符愀相對於永夕有眞緣於今古神亦知夫我乎夢固非其虛也登歐文而更考綴一賦而興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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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書辨疑 或問萬章曰父母使舜完廩捐階瞽瞍焚廩上稱父母而下稱瞽瞍者何也對曰完廩捐階者恐是父母俱使而俱爲之也故上稱父母焚廩者瞽瞍獨爲之也故下稱瞽瞍曰然則不曰父焚廩而曰瞽瞍焚廩者何也 曰焚廩者非父母之所可爲而乃瞽瞍之所可爲故特揭瞽瞍之名而彰其惡也曰捐階亦是父母之所可爲歟 曰焚廩惡之已形也捐階惡之未形也問孟子曰丹朱之不肖舜之子亦不肖不曰堯之子而曰丹朱不曰啇均而曰舜之子者何也曰堯之子九也泛稱堯之子則難辨丹朱之不肖舜之子一也只稱舜之子則可認啇均之不肖然而丹朱之不肖有載典謨 啇均之名號無徵文獻而然耶意者經傳中此等文字亦是聖賢之下筆成章處也歟問孟子曰詩云憂心悄悄慍于群小孔子也肆不殄厥慍亦不隕厥問文王也先孔子而後文王者何也曰文王孔子雖有年代前後而國風大雅亦無編次上下耶此等句語初無湥意不必多辨而抑有上文論士而先引孔子論多口而遂及文王之事也歟問論語子曰有德者必有言又曰仁者必有勇有德者之言仁者之勇皆可指證之歟曰閔子仲弓之以德行稱而夫子之許閔子則曰夫人不言言必有中許仲弓則曰雍之言然南敬叔之問禹稷羿奡而稱之以尙德哉若人此皆有德者之言也三仁之或去或爲奴或諫而死皆勇決之事也夷齊之求仁得仁卽遜國而逃諫伐而餓終無怨悔也謂之仁而不謂之勇可乎顔淵之三月不違仁而其言曰舜何人也予何人也有爲者亦若是此非仁者之志必勇歟問論語子不語怪力亂神而春秋之書載怪力亂者不可勝摟周易十翼多說鬼神中庸十六章極贊鬼神之德何也曰春秋紀事之筆也易庸析理之文也紀事之筆嚴析理之文微紀而不嚴則無以誅世之亂賊析而不微則無以闡道之軆用此皆吾夫子不費言語而於方策上發揮丁寧處也論語之不語云者盖夫子平居 此等乖理之事窮理之迹未嘗對人說道與春秋紀事之筆易庸析理之文便不可一轍看過讀大學古之欲明明德前註'欲其必自慊之慊字與孟子浩然章行有不慊之慊字相同而與誠意章此之謂自謙之謙字亦同讀之當作二音【孟子慊字音兼大學謙肩邑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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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游瑞石賦 【乙酉】 海陽古稱雄府兮東有山曰瑞石盤百里而鬱紆兮鎭一方而磅礡英靈怳其蜿蟺兮往往鍾夫魁奇我家昔其燀爀兮襲平章而世世謨猷贊以黼黻兮懿勳績與忠貞風範仰若山斗兮爛道德又文章喬陰菀其峻茂兮得氣多於玆邱冠簪耀於卓鄭兮門戶淸於盧李欽忠朴之訥思兮仰高家之三峰猗奇翁之理學兮又石底之忠勇敉懷齋之義烈兮緬海狂之豪逸英特有此錦南兮風至今猶靡沒嗟余生之最晩兮筆難記於羣賢何今日之冷落兮寂百年而無聞儒風邈以俗利兮變鄒魯爲全齊惟玆山之不老兮靑公麽於千古遠可攀而近可拱兮願一陟而無緣情塵染於苦海兮局雙眸於黃卷迨余齒之弱冠兮拊古人之壯游修采服兮若英兮溘吾游此岧嶢約同志之二三兮理竹笻兮芒鞵詔小奚使背囊兮藉白飯又鷄醪憩山下之古寺兮證遺蹟於長老夾雩壇之蒼松兮頫龍湫之飛瀑問主刹兮何在兮一石佛惟留跡臺名何其赫耀兮繄掌令又持平瞪舍人之矗巖兮點壯元之尖峰元庵懸以鷰巢兮赤壁泛如漁艇跨中嶺而定喘兮漸生豁於方寸躡蠛蠓而掃靉靆兮己不復如人間披草逕而誌怪兮笑一蹴兮動巖將軍一去而不復返兮窟有無兮鑄劒仰看立石之撑天兮眼欲花兮黯黯坐臨瑞石之無地兮腋捋羽兮裊裊中有萬仞之石谷兮惴六魄而難俯寒颯颯兮粟肌兮雪五月而猶在羣山拱揖兮似指尖兮大海包藏兮如眉細攀天柱之上頭兮服戰戰若難持頭流漢拏之特立兮不敢於此兮齊肩窮難搜於一日兮峰百回兮千轉何風穴之怪奇兮復廣石之平鋪山椒忽其十室兮認桃源之幽居輿誌錯以海經兮古未聞有如此笑華人之眼空兮秪欲見於金剛望如君子就如高人兮名不虛於無等山龍穆其聖明兮蒐鳳麟以羅網知不盡於淑氣兮何代無其豪英亂曰鴻濛元氣會于東方東方淑精華玆南向南向有山維石巖巖巖巖維何不怪不險非石之瑞維山爲瑞寧止一州之瑞實惟邦國無疆之瑞瑞石瑞石吾捋安從千秋芳名願與爾而長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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擬漢羣臣賀龔遂治渤海之日勸民農桑使民持刀劍者賣劒買牛賣刀買犢表 【丙戌人日 製御 題通方外】 雲從龍風從虎方仰聖主得人才之休刀買犢劒買牛聿覩賢守化民俗之盛焉用刀也彼牽牛乎欽惟皇帝陛下地節年間天臨宇內拜守相而輒親見問擢用朱邑之務寬興閭閻而已知艱難崇禮黃霸之從簡屬當北宸務稼穡之日乃有東民佩刀劒之風聖后軫勸鳸之工方懋溝洫之盡力蚩氓帶健牛之價遂致潢池之弄兵時無牧牛羊之才未見感豚之美害及達鷄犬之境奈此喁魚之嘆幸明朝擇佩虎之賢而今日盡馴雉之術盖我聖天子之神化克簡芻牧之任故此賢太守之治謨爰革帶犢之習單車敎撫循之道實見游刃之克恢十畝勉耕耨之勤復有良耟之載俶果於巡于郡之際聿見變其俗之功賣劒賣刀何爲纍纍而佩勸農勸種終也恢恢而容桑麻一都旣多牛牧之衆黍稷千廩且有狼戻之榮是可謂大小畜各存孰復有業家人不事春以耕秋以穫克致觀感之規小曰犢大曰牛遂有解佩之俗奸猾自戢寧有直千金之鋩寬猛得中擧感恢一網之治伏念臣等俱以駑質幸荷龍光斷斷無他縱乏牛刀之譽欣欣有喜庶殫鰲抃之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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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경자) 十二日 庚子 맑음. 여러 손자들이 마른 대나무로 배를 만들어서 그 위에 앉아 마당에서 끌고 다녔다. 내가 경계하여 말하기를 "〈인명〉단주(丹朱)〈/인명〉9)와 같이 오만하게 육지에서 배를 끌고 다니지 말라."라고 하였다. 陽。諸孫以藁筍爲舟。 坐其上。 盪於場。余戒曰 "無若〈인명〉丹朱〈/인명〉傲盪舟陸地。" 단주(丹朱) 요(堯) 임금의 아들인데, 행실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요 임금이 순(舜)에게 왕위를 넘겼다. 그러므로 우가 순 임금에게 고하기를 "단주처럼 오만하게 하지 마소서. 그는 태만하게 노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오만하고 포학한 행동을 일삼았습니다.[無若丹朱傲. 惟慢遊是好, 傲虐是作.]"라고 하였던 것이다.(《서경》 〈익직(益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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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신묘) 初一日 辛卯 -중광단알(重光單閼)-. 맑음. 비괘(比卦) 육삼(六三)효의 '비지비인(比之匪人, 좋지 못한 사람과 친하게 지내다)'을 얻었다. 상(象)에 이르기를 "좋지 못한 사람과 친하게 지내니 또한 해롭지 않겠는가?"라고 했는데, 그 주석에 "좋지 못한 사람과 친하게 지내니 그 잘못을 알 수 있다. 사람이 나란하게 지내면 편안함을 구하는 것이 길하다."라고 하였다. 그러니 좋지 못한 사람과 친하게 지내니 또한 해롭지 않겠는가? 【重光單閼】。陽。得比卦六三。 '比之匪人。' 象曰。 "比之匪人。 不亦傷乎? 註。 "比之匪人。 其失可知。人之相比。 求安吉也。" 比之匪人。 不亦傷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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