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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3년 남원(南原) 유학(幼學) 최준(崔濬)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국왕/왕실-보고-상서 癸未八月 南原幼學崔濬梁復軫等 巡相 癸未八月 전북 남원시 [署押] 1개, [官印] 3개 8.0*8.0(정방형) 적색 3개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1823년(순조 23) 8월에 남원(南原)에 사는 유학(幼學) 최준(崔濬) 등 27명이 순상(巡相)에게 올린 상서(上書). 1823년(순조 23) 8월에 남원(南原)에 사는 유학(幼學) 최준(崔濬) 등 27명이 남원 기지방(機池坊)에 사는 동몽(童蒙) 박인필(朴仁弼)의 효행을 조정에 알려 정려(旌閭)의 특전을 받게 해달라면서순상(巡相)에게 올린 상서(上書)이다. 밀양박씨(密陽朴氏) 강수공(江叟公)의 9대손인 박인필은 충효(忠孝)의 가문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효심이 깊었다. 부친이 알 수 없는 병으로 수년 동안 병석에 있었으나 증세가 악화되어 온몸이 부풀어 오르고 사지가 마비되었는가 하면 가래와 기침으로 목구멍이 막혀 꼼짝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박인필은 백방으로 약을 구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급기야 부친이 사경을 헤매게 되자 박인필은 밤낮으로 하늘에 기도를 올리며 자기를 대신 데려가라고 빌었다. 급기야는 자신의 넓적다리를 베어 불에 구은 다음에 부친에게는 참새구이라고 속여서 드시게 하였다. 그러자 사경에 이르렀던 그의 부친이 점차 회복하게 되었다. 박인필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모두가 하늘이 그의 효성에 감동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 지난 해 여름에는 모친이 괴질에 걸려 갑자기 사경을 헤매었는데, 박인필은 백방으로 약을 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모친에게 마시게 하여 마침내 소생케 하였다. 남원의 유생들은 이러한 박인필의 행적을 조정에 알려 정려의 특전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순상은 이에 대해 참으로 가상하다고 하였으나 제사 부분이 훼손되어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박인필의 효행과 관련한 상서는 이 문서 외에도 몇 건이 더 전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박인필은 박정환(朴正煥)의 소자(小字)이다. 또 박인필 뿐만 아니라 그의 처 청풍김씨(淸風金氏)도 효열(孝烈)로 이름이 높아 여러 차례 지방 유림들이 포양(褒揚)을 청하는 상서를 관에 올리기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남원의 밀양박씨 문중에는 박인필이 작성했던 시권(試券)이 3장 전하고 있다. 문과에 급제하지 못했고, 생원 진사시에 합격한 기록도 찾아볼 수 없지만, 박인필이 효자일 뿐만 아니라 학문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던 인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원의 유생들은 이 상서 외에도 박인필의 효행과 관련하여 여러 차례 남원부사와 암행어사 등에게 상서를 올렸었다. 한편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를 계미년으로만 적고 있는데, 문서의 소장처인 남원의 밀양박씨 문중에서는 이를 1883년으로 추정하여 문서에 연필로 그렇게 써놓았다. 이뿐만이 아니라, 위 박인필(朴仁弼)의 효행과 관련하여 작성된 상서들이 모두 이 시기를 전후하여 작성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위 계미년은 1883년이 아니라 1823년으로 추정되며, 효행 관련 문서들도 대부분 이 시기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위 박인필(朴仁弼)이 부친의 친산(親山)을 쓰기 위하여 1824년에 산지를 매입하였고("1824년 박인필(朴仁弼) 산지매매명문(山地賣買明文)" 참조), 효행 관련 통문이나 상서들이 17세 동몽(童蒙) 박인필을 언급하고 있다. 즉 부친이 죽기 직전의 박인필이 동몽으로 어린 나이였고, 그 시기를 명문에서는 도광 4년으로 명기하고 있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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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2년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 삼리(三里) 화민(化民) 지경룡(池景龍)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국왕/왕실-보고-상서 壬午四月 機池三里化民池景龍黃相宇等 城主 壬午四月 전북 남원시 [署押] 1개, [官印] 3개 7.0*7.0(정방형) 적색 3개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1822년(순조 22) 4월에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 삼리(三里)의 화민(化民) 지경룡(池景龍) 등 12명이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올린 상서(上書). 1822년(순조 22) 4월에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 삼리(三里)의 화민(化民) 지경룡(池景龍) 등 12명이 같은 마을에 사는 동몽(童蒙) 박인필(朴仁弼)의 효행에 대하여 포양(褒揚)의 특전을 내려달라면서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올린 상서(上書)이다. 밀양박씨(密陽朴氏) 강수공(江叟公)의 9대손인 박인필은 충효(忠孝)의 가문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효심이 깊었다. 부친이 알 수 없는 병으로 수년 동안 병석에 있었으나 증세가 악화되어 온몸이 부풀어 오르고 사지가 마비되었는가 하면 가래와 기침으로 목구멍이 막혀 꼼짝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박인필은 백방으로 약을 구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급기야 지난 해 12월에 부친이 사경을 헤매게 되자 박인필은 밤낮으로 하늘에 기도를 올리며 자기를 대신 데려가라고 빌었다. 급기야는 자신의 넓적다리를 베어 불에 구은 다음에 부친에게는 참새구이라고 속여서 드시게 하였다. 그러자 사경에 이르렀던 그의 부친이 점차 회복하게 되었다. 박인필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모두가 하늘이 그의 효성에 감동한 것이라고 하였다. 남원의 유생들은 이러한 박인필의 행적이 없어지지 않도록 포양의 특전을 내려달라고 부사에게 간청하였다. 부사는 이에 대해 참으로 가상하다면서도 널리 공의(公議)를 모으는게 마땅하다는 제사(題辭)를 내렸다. 박인필의 효행과 관련한 상서는 이 문서 외에도 몇 건이 더 전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박인필은 박정환(朴正煥)의 소자(小字)이다. 또 박인필 뿐만 아니라 그의 처 청풍김씨(淸風金氏)도 효열(孝烈)로 이름이 높아 여러 차례 지방 유림들이 포양(褒揚)을 청하는 상서를 관에 올리기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남원의 밀양박씨 문중에는 박인필이 작성했던 시권(試券)이 3장 전하고 있다. 문과에 급제하지 못했고, 생원 진사시에 합격한 기록도 찾아볼 수 없지만, 박인필이 효자일 뿐만 아니라 학문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던 인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원의 유생들은 이 상서 외에도 박인필의 효행과 관련하여 여러 차례 남원부사와 순상, 그리고 암행어사 등에게 상서를 올렸었다. 한편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를 임오년으로만 적고 있는데, 문서의 소장처인 남원의 밀양박씨 문중에서는 이를 1882년으로 추정하여 문서에 연필로 그렇게 써놓았다. 이뿐만이 아니라, 위 박인필(朴仁弼)의 효행과 관련하여 작성된 상서들이 모두 이 시기를 전후하여 작성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위 임오년은 1882년이 아니라 1822년으로 추정되며, 효행 관련 문서들도 대부분 이 시기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위 박인필(朴仁弼)이 부친의 친산(親山)을 쓰기 위하여 1824년에 산지를 매입하였고("1824년 박인필(朴仁弼) 산지매매명문(山地賣買明文)" 참조), 효행 관련 통문이나 상서들이 17세 동몽(童蒙) 박인필을 언급하고 있다. 즉 부친이 죽기 직전의 박인필이 동몽으로 어린 나이였고, 그 시기를 명문에서는 도광 4년으로 명기하고 있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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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 노광규(盧光奎)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戊申二月念九日 盧光奎 戊申二月念九日 盧光奎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48년(헌종 14) 2월 29일 사돈 노광규(盧光奎)가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 1848년(헌종 14) 2월 29일 사돈 노광규(盧光奎)가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이다. 상대방의 안부와 며느리는 무고한지 물었다. 지시한 대로 아들을 보낸다며 지체하여 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게 해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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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3년 종형(從兄) 박진호(朴震祜)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癸未臘月初十日 從兄 震祜 癸未臘月初十日 朴震祜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23년(순조 23) 12월 10일 종형(從兄) 박진호(朴震祜)가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 1823년(순조 23) 12월 10일 종형(從兄) 박진호(朴震祜)가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이다. 못본 지 여러 해라며 객지에 있는 상대방의 안부를 물었다. 자신의 아들은 예산 조씨(趙氏) 가문과 혼인을 정하였고, 선조의 문집 등 두어 가지 일은 종의(宗議)를 물어서 해야 하며 능행(陵幸) 때 힘써 보려 하는데 거둥 날짜를 정확히 모르니 통지하여 달라고 하였다. 자신의 아들은 복과(覆科)에서 장원을 하였다고 하였다. 박용호가 외임에 제수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마음이 쓸쓸하다고 하였다. 박진호의 아들은 박규서(朴奎瑞)로 1825년 식년시 문과에 합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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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년(某年) 능한객(凌寒客)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朴文川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모년(某年)에 능한객(凌寒客)이라고 자칭한 사람이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 모년(某年)에 자신을 능한객(凌寒客)이라고 자칭한 사람이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이다. 편지를 받고 무사히 서울에 갔음을 알았다며 연로(沿路)에서 낭패를 보았을 거라고 하였다. 자신은 상중의 슬픔이 덜어지지 않는다며 환향(還鄕)이 조금 늦어진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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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년 김굉(金鍠)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庚人臘月望六日 金鍠 庚人臘月望六日 金鍠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30년(순조 30) 12월 16일 김굉(金鍠)이 보낸 서간(書簡). 1830년(순조 30) 12월 16일 김굉(金鍠)이 보낸 서간(書簡)이다. 상사(祥事)를 겪으며 무너지는 심정을 위로하며 안부를 물었다. 남쪽 지방에서 벼슬살이하는 자신은 풍토가 맞지 않고 환곡 포흠을 해결하지 못해 녹봉을 덜어 보태야 할 지경이라고 하였다. 김굉은 1829년 12월에 경상도 황산 찰방(黃山察訪)에 제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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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0년 족종(族從) 박기영(朴夔泳)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庚辰仲春初吉 族從 朴夔泳 文川政閣 庚辰仲春初吉 朴夔泳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20년(순조 20) 2월 1일 족종(族從) 박기영(朴夔泳)이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 1820년(순조 20) 2월 1일 족종(族從) 박기영(朴夔泳)이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이다. 남원에서 이별한 뒤 어느덧 해가 바뀌고 2월이 되었다며 안부를 묻고 자신은 일전에 입성(入城)하였다고 하였다. 족보에 관한 일은 지난 가을과 같다며 마침 강곤(康梱, 강진의 병사(兵使))이 부임하는 편에 몇 자 적어보낸다고 하였다. 정시(庭試) 때에 인편이 있으면 장동(長洞) 강승지(姜承旨)의 집으로 편지하여 달라고 하였다. 종씨 영(永)은 편안한지, 내수(乃叟)는 서울에 있는지, 족보 유사(有司)는 아직도 올라오지 않았는지 등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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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4년 이원익(李遠翊)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甲申 臘月 十七日 遠翊 甲申 臘月 十七日 李遠翊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24년(순조 24) 12월 17일 이원익(李遠翊)이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 1824년(순조 24) 12월 17일 이원익(李遠翊)이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이다. 자신은 뜻밖에 지방관이 되어 부모 봉양을 하게 되었다며 오늘 어렵게 상대방이 있는 지역에 왔으나 종일 바람이 불어 만나러 가지 못하였으니 내일 찾아가겠다고 하였다. 이원익은 이때 함경도 홍원현감(洪原縣監)이 되어 부임하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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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7년 장한조(張漢朝)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丁亥臘月初旬 張漢朝 虎谷 朴生員 丁亥臘月初旬 張漢朝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27년(순조 27) 12월 초순에 장한조(張漢朝)가 호곡(虎谷) 박생원(朴生員)에게 보낸 서간(書簡). 1827년(순조 27) 12월 초순에 장한조(張漢朝)가 호곡(虎谷) 박생원(朴生員)에게 보낸 서간(書簡)이다. 수상한 날씨에 잘 갔는지 묻고 상대방의 아들이 간다고 하니 다시 슬퍼진다고 하였다. 새해를 맞아 복 많이 받으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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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4년 윤치겸(尹致謙)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甲申九月卄六日 致謙 文州政閣 甲申九月卄六日 尹致謙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24년(순조 24) 9월 26일 윤치겸(尹致謙)이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 1824년(순조 24) 9월 26일 윤치겸(尹致謙)이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이다. 편지를 받고 만난 듯하였다며 벼슬살이 하는 상대방의 안부를 묻고 자신은 부모님 모시고 여전하다고 하였다. 낙폭지(落幅紙)를 보내주어 감사하다고 하였다. 낙폭지는 과거에 떨어진 사람의 답안지로, 대개 서울과 지방의 시소(試所)에서 비변사(備邊司)로 보내면, 비변사에서 분배하여 변병(邊兵)의 지의(紙衣)나 군문(軍門)의 화전(火箭) 따위를 만드는 데 사용하였다. 윤치겸은 당시 안변부사(安邊府使)였으며 피봉에 자신을 학성리(鶴城吏)라고 적었는데 학성(鶴城)은 안변(安邊)의 옛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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