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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2년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 유학(幼學) 원복철(元復哲) 등 상서(上書) 3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국왕/왕실-보고-상서 壬午六月 南原機池幼學元復哲黃錠等남원 기지방 유학 원복철 황정 등 57인 繡衣使道 壬午六月 전북 남원시 [署押] 1개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1822년(순조 12) 6월에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에 사는 유학(幼學) 원복철(元復哲) 등 57명이 암행어사(暗行御史)에게 올린 상서(上書). 1822년(순조 12) 6월에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에 사는 유학(幼學) 원복철(元復哲) 등 57명이 기지방 삼리(三里)에 사는 동몽(童蒙) 박인필(朴仁弼)의 효행을 조정에 알려 정려(旌閭)의 특전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면서 암행어사(暗行御史)에게 올린 상서(上書)이다. 밀양박씨(密陽朴氏) 강수공(江叟公)의 9대손인 박인필은 충효(忠孝)의 가문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효심이 깊었다. 부친이 알 수 없는 병으로 수년 동안 병석에 있었으나 증세가 악화되어 온몸이 부풀어 오르고 사지가 마비되었는가 하면 가래와 기침으로 목구멍이 막혀 꼼짝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박인필은 백방으로 약을 구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급기야 부친이 사경을 헤매게 되자 박인필은 밤낮으로 하늘에 기도를 올리며 자기를 대신 데려가라고 빌었다. 급기야는 자신의 넓적다리를 베어 불에 구은 다음에 부친에게는 참새구이라고 속여서 드시게 하였다. 그러자 사경에 이르렀던 그의 부친이 점차 회복하게 되었다. 박인필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모두가 하늘이 그의 효성에 감동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 그 달 모친이 괴질에 걸려 갑자기 사경을 헤매었는데, 박인필은 백방으로 약을 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모친에게 마시게 하여 마침내 소생케 하였다.(원문에는 부친이 괴질에 걸렸다고 하였는데, 관련문서를 참고해 보면, 이것은 부친이 아니라 모친을 잘못 기재한 것이 분명하다.) 남원의 유생들은 어린 박인필의 효행이 세상에서 사라져서는 안되기에 공의(公議)를 모아 어사에게 상서를 올리니, 이러한 박인필의 행적을 조정 알려 정려의 특전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어사는 이에 대해 참으로 가상하다면서도 다시 자세히 살펴 보겠다는 제사(題辭)를 내렸다. 박인필의 효행과 관련한 상서는 이 문서 외에도 몇 건이 더 전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박인필은 박정환(朴正煥)의 소자(小字)이다. 또 박인필 뿐만 아니라 그의 처 청풍김씨(淸風金氏)도 효열(孝烈)로 이름이 높아 여러 차례 지방 유림들이 포양(褒揚)을 청하는 상서를 관에 올리기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남원의 밀양박씨 문중에는 박인필이 작성했던 시권(試券)이 3장 전하고 있다. 문과에 급제하지 못했고, 생원 진사시에 합격한 기록도 찾아볼 수 없지만, 박인필이 효자일 뿐만 아니라 학문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던 인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원 기지방의 유생들은 같은 해 5월과 9월에도 거의 같은 내용의 상서를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올렸다. "1822년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 유학(幼學) 원복철(元復哲) 등 상서(上書) 1"과 "1822년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 유학(幼學) 원복철(元復哲) 등 상서(上書) 2"가 바로 그것이다. 한편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를 임오년으로만 적고 있는데, 문서의 소장처인 남원의 밀양박씨 문중에서는 이를 1882년으로 추정하여 문서에 연필로 그렇게 써놓았다. 이뿐만이 아니라, 위 박인필(朴仁弼)의 효행과 관련하여 작성된 상서들이 모두 이 시기를 전후하여 작성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위 임오년은 1882년이 아니라 1822년으로 추정되며, 효행 관련 문서들도 대부분 이 시기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위 박인필(朴仁弼)이 부친의 친산(親山)을 쓰기 위하여 1824년에 산지를 매입하였고("1824년 박인필(朴仁弼) 산지매매명문(山地賣買明文)" 참조), 효행 관련 통문이나 상서들이 17세 동몽(童蒙) 박인필을 언급하고 있다. 즉 부친이 죽기 직전의 박인필이 동몽으로 어린 나이였고, 그 시기를 명문에서는 도광 4년으로 명기하고 있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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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년 진사(進士) 노석승(盧錫升)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국왕/왕실-보고-상서 壬子四月 進士盧錫升朴正烈幼學高時雍等 巡相 壬子四月 전북 남원시 [署押] 1개, [官印] 3개 8.0*8.0(정방형) 적색 3개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1852년(철종 3) 4월에 전라도(全羅道) 진사(進士) 노석승(盧錫升)을 비롯한 32명의 도내(道內) 유생들이 순상(巡相)에게 올린 상서이다. 1852년(철종 3) 4월에 전라도(全羅道) 진사(進士) 노석승(盧錫升)을 비롯한 32명의 도내(道內) 유생들이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에 사는 효자(孝子) 박정환(朴正煥)과 그의 처 청풍김씨(淸風金氏)의 효열(孝烈)을 조정에 알려 포양(褒揚)의 특전을 내리게 해달라면서 순상(巡相)에게 올린 상서이다. 밀양박씨(密陽朴氏) 강수공(江叟公)의 9대손인 박정환은 충효(忠孝)의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가법(家法)을 준수하면서 부모의 뜻을 어기지 않았기 때문에 박효자(朴孝子)로 칭송을 받았다. 그의 부친이 학질에 걸려 여러 해 동안 병석에 앓아 눕게 되자 어린 나이임에도 밤낮으로 시탕(侍湯)을 하며 정성껏 병간을 하였다. 병이 위독해지자 자신의 오른쪽 넓적다리를 베어 불에 구어 잘게 나누어 부친에게 먹여 마침내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마을사람들이 모두 그의 효행에 하늘이 감동한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뒤에 모친이 괴질에 걸려 숨이 끊어질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는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마시게 하여 소생케 하였다. 그의 부모가 모두 아들의 효행에 힘입어 천수(天壽)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그의 효행으로 여러번 지방유림들로부터 포양(褒揚)의 천거를 받았다. 박정환의 처 청풍김씨(淸風金氏)는 좌리공신(佐理功臣)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지낸 월천군(月川君) 문평공(文平公) 김길통(金吉通)의 14세손으로, 부덕(婦德)이 뛰어난 여인이었다. 박씨가문에 시집와서는 병석에 계신 시부모를 정성껏 봉양하였으며, 남편 박정환이 갑자기 고황(膏肓)으로 여러 해 병석에 누어 있을 때 지극정성으로 남편을 병간하였다. 이에 전라도 각 지역의 유생들이 공의(公議)를 모아 이들 두 부부의 효열(孝烈)을 조정에 널리 알려 포양(褒揚)의 특전을 받게 해달라면서 순상(巡相)에게 상서를 올렸다. 순상은 이에 대하여 그 행적이 참으로 가상하기는 한 일이지만, 조정에 포향을 상신하는 일은 중요한 일이니 서둘러 처리할 수 없다는 제음(題音)을 내렸다. 박정환은 소자(小字) 박인필(朴仁弼)로도 불리웠는데, 이 문서가 소장된 남원의 밀양박씨 문중에는 박인필이 작성했던 시권(試券)이 3장 전하고 있다. 문과에 급제하지 못했고, 생원 진사시에 합격한 기록도 찾아볼 수 없지만, 박인필이 효자일 뿐만 아니라 학문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던 인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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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년 유학(幼學) 김종댁(金從宅)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국왕/왕실-보고-상서 壬子正月 幼學金從宅韓鋈等 城主 壬子正月 전북 남원시 [署押] 1개, [官印] 3개 6.5*6.5(정방형) 적색 3개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1852년(철종 3) 정월에 전라도(全羅道) 유학(幼學) 김종댁(金從宅)을 비롯한 37명의 도내(道內) 유생들이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올린 상서이다. 1852년(철종 3) 정월에 전라도(全羅道) 유학(幼學) 김종댁(金從宅)을 비롯한 37명의 도내(道內) 유생들이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에 사는 효자(孝子) 박정환(朴正煥)의 처 청풍김씨(淸風金氏)의 효열(孝烈)을 감영(監營)에 알려 포양(褒揚)의 특전을 내리게 해달라면서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올린 상서이다. 청풍김씨는 좌리공신(佐理功臣)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지낸 월천군(月川君) 문평공(文平公) 김길통(金吉通)의 14세손으로, 일찍부터 부모를 잘 섬겼다. 부모가 하고자 하는 바를 미리 알아서 정성껏 받들어 모셔서 마을에서 그녀의 효행을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밀양박씨(密陽朴氏) 강수공(江叟公)의 9대손인 박정환에게 시집을 와서는 병든 시부모를 정성껏 봉양하였다. 남편 박정환이 갑자기 역병에 걸려 고생하다가 결국에는 고질병이 되어 3년 동안 병석에 누어 있을 때에는 지극정성으로 남편을 병간하였다. 백방으로 구한 약들이 효과가 없자, 밤낮으로 하늘에 기도를 올리며 자기를 대신 데려가라고 빌었다. 급기야는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흐르는 피를 남편에게 마시게 하자, 죽을 지경에 놓였던 남편에게 소생의 기운이 돌았다. 그러자 김씨는 자신의 넓적다리를 베어 며칠을 계속 달여 남편에게 드렸다. 그러자 남편이 점차 회생하게 되었다. 이에 전라도 각 지역의 유생들이 공의(公議)를 모아 손가락을 베어 남편에게 드리는 한 가지 일도 드문 일인데 연거푸 넓적다리를 베어 남편을 살리는 일은 세상에 보기 드문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칭찬하면서, 이와 같은 김씨의 효열(孝烈)을 포양하고자 하는 유생들의 공의(公議)를 수령이 잘 살피시고, 이같은 사실을 감영(監營)을 통해 조정에 알려 포양(褒揚)의 특전을 받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대하여 부사는 기왕에 이미 제사(題辭)를 내렸으니 중론(衆論)을 기다리는게 마땅하다고 하였다. 청풍김씨의 남편 박정환은 소자(小字) 박인필(朴仁弼)로도 불리웠는데, 그 역시 효행으로 여러번 지방유림들로부터 포양(褒揚)의 천거를 받을만큼 뛰어난 효자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남원의 밀양박씨 문중에는 박인필이 작성했던 시권(試券)이 3장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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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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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차계장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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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1년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 유학(幼學) 원세효(元世孝)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국왕/왕실-보고-상서 辛亥七月 日 機池幼學元世孝房煥守등 27인 城主 辛亥七月 日 전북 남원시 [署押] 1개, [官印] 3개 6.0*6.0(정방형) 적색 3개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1851년(철종 2) 7월에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의 유학(幼學) 원세효(元世孝) 등 27명이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올린 상서(上書) 1851년(철종 2) 7월에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의 유학(幼學) 원세효(元世孝) 등 27명이 기지방(機池坊)에 사는 사인(士人) 박정환(朴正煥)의 처 청풍김씨(淸風金氏)의 열행(烈行)과 박정환의 효행(孝行)을 영읍(營邑)에 알려 포양(褒揚)의 특전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며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올린 상서(上書)이다. 박정환은 관련문서에는 박인필(朴仁弼)로도 나오는데, 이는 박정환의 소자(小字)로, 같은 인물이다. 관련문서를 함께 참고하여 먼저 청풍김씨의 행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청풍김씨는 좌리공신(佐理功臣)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지낸 월천군(月川君) 문평공(文平公) 김길통(金吉通)의 14세손으로, 일찍부터 부모를 잘 섬겼다. 부모가 하고자 하는 바를 미리 알아서 정성껏 받들어 모셔서 마을에서 그녀의 효행을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밀양박씨(密陽朴氏) 강수공(江叟公)의 9대손인 박정환에게 시집을 와서는 병든 시부모를 정성껏 봉양하였다. 남편 박정환이 갑자기 역병에 걸려 고생하다가 결국에는 고질병이 되어 3년 동안 병석에 누어 있을 때에는 지극정성으로 남편을 병간하였다. 백방으로 구한 약들이 효과가 없자, 밤낮으로 하늘에 기도를 올리며 자기를 대신 데려가라고 빌었다. 급기야는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흐르는 피를 남편에게 마시게 하자, 죽을 지경에 놓였던 남편에게 소생의 기운이 돌았다. 그러자 김씨는 자신의 넓적다리를 베어 며칠을 계속 달여 남편에게 드렸다. 그러자 남편이 점차 회생하게 되었다. 한편 박정환은 밀양박씨(密陽朴氏) 강수공(江叟公)의 9대손으로 충효(忠孝)의 가문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효심이 깊었다. 부친이 알 수 없는 병으로 수년 동안 병석에 있었으나 증세가 악화되어 온몸이 부풀어 오르고 사지가 마비되었는가 하면 가래와 기침으로 목구멍이 막혀 꼼짝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박정환은 백방으로 약을 구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급기야 부친이 사경을 헤매게 되자 박인필은 밤낮으로 하늘에 기도를 올리며 자기를 대신 데려가라고 빌었다. 급기야는 자신의 넓적다리를 베어 불에 구은 다음에 부친에게는 참새구이라고 속여서 드시게 하였다. 그러자 사경에 이르렀던 그의 부친이 점차 회복하게 되었다. 박정환의 나이 불과 17세 때의 일이었다. 모두가 하늘이 그의 효성에 감동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 그 달 모친이 괴질에 걸려 갑자기 사경을 헤매었는데, 박인필은 백방으로 약을 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모친에게 마시게 하여 마침내 소생케 하였다. 이와 같은 박정환의 효행에 감동한 전라도 각 지역의 유생들이 여러 차례 공의(公議)를 모아 남원부사와 암행어사 등에게 상서를 올렸었다. 이같은 기지방 유생들의 상서를 접한 남원부사는 부부의 효열이 참으로 탁이(卓異)하여 매우 가상하다고 말하고, 감영에 보고하는 일은 좀더 공의(公議)를 기다리는데 마땅하다는 제사(題辭)를 내렸다. 이 문서가 소장된 남원의 밀양박씨 문중에는 박정환이 박인필이라는 이름으로 작성했던 시권(試券)이 3장 전하고 있다. 문과에 급제하지 못했고, 생원 진사시에 합격한 기록도 찾아볼 수 없지만, 박정환이 효자일 뿐만 아니라 학문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던 인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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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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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9년 남원(南原) 유학(幼學) 최준(崔濬)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국왕/왕실-보고-상서 己丑九月 幼學崔濬梁復軫等 繡衣閤下 己丑九月 전북 남원시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1829년(순조 29) 9월에 남원(南原)에 사는 유학(幼學) 최준(崔濬) 등 27명이 암행어사(暗行御史)에게 올린 상서(上書). 1829년(순조 29) 9월에 남원(南原)에 사는 유학(幼學) 최준(崔濬) 등 27명이 남원의 동몽(童蒙) 박인필(朴仁弼)의 효행을 조정에 알려 포양(褒揚)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면서 암행어사(暗行御史)에게 올린 상서(上書)이다. 문서의 하단에 제사(題辭)가 실려 있지 않아서 실제로 이 문서가 어사에게 올라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밀양박씨(密陽朴氏) 강수공(江叟公)의 9대손인 박인필은 충효(忠孝)의 가문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효심이 깊었다. 부친이 알 수 없는 병으로 수년 동안 병석에 있었으나 증세가 악화되어 온몸이 부풀어 오르고 사지가 마비되어 꼼짝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박인필은 백방으로 약을 구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급기야 부친이 사경을 헤매게 되자 박인필은 밤낮으로 하늘에 기도를 올리며 자기를 대신 데려가라고 빌었다. 급기야는 자신의 넓적다리를 베어 불에 구은 다음에 부친에게는 참새구이라고 속여서 드시게 하였다. 그러자 사경에 이르렀던 그의 부친이 점차 회복하게 되었다. 모두가 하늘이 그의 효성에 감동한 것이라고 하였다. 지난 여름에는 그의 모친이 괴질에 걸려 죽음 직전에 이르렀는데, 박인필은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흐르는 피를 어머니에게 마시게 하여 마침내 건강을 되찾게 되었다. 남원의 유생들은 이 모두가 하늘이 어린 박인필의 효행에 감동한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이 뛰어난 행적이 세상에서 사라져서는 안되기에 유생들이 공의(公議)를 모아 어사또에게 상서를 올리니 이러한 박인필의 행적을 조정에 알려 포양의 특전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박인필의 효행과 관련한 상서는 이 문서 외에도 몇 건이 더 전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박인필은 박정환(朴正煥)의 소자(小字)로, 남원 기지방(機池坊)에서 살았다. 또 박인필 뿐만 아니라 그의 처 청풍김씨(淸風金氏)도 효열(孝烈)로 이름이 높아 여러 차례 지방 유림들이 포양(褒揚)을 청하는 상서를 관에 올리기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남원의 밀양박씨 문중에는 박인필이 작성했던 시권(試券)이 3장 전하고 있다. 문과에 급제하지 못했고, 생원 진사시에 합격한 기록도 찾아볼 수 없지만, 박인필이 효자일 뿐만 아니라 학문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던 인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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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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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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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2년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 유학(幼學) 원복철(元復哲) 등 상서(上書) 1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국왕/왕실-보고-상서 壬午五月 機池坊化民元復哲金壽甲等 城主 壬午五月 전북 남원시 [署押] 1개, [官印] 1개 7.0*7.0(정방형) 적색 1개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1822년(순조 22) 5월에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에 사는 유학(幼學) 원복철(元復哲) 등 56명이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올린 상서(上書). 1822년(순조 22) 5월에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에 사는 유학(幼學) 원복철(元復哲) 등 56명이 기지방 삼리(三里)에 사는 동몽(童蒙) 박인필(朴仁弼)의 효행을 윗 관사에 알려 포양(褒揚)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면서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올린 상서(上書)이다. 밀양박씨(密陽朴氏) 강수공(江叟公)의 9대손인 박인필은 충효(忠孝)의 가문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효심이 깊었다. 부친이 알 수 없는 병으로 수년 동안 병석에 있었으나 증세가 악화되어 온몸이 부풀어 오르고 사지가 마비되었는가 하면 가래와 기침으로 목구멍이 막혀 꼼짝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박인필은 백방으로 약을 구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급기야 부친이 사경을 헤매게 되자 박인필은 밤낮으로 하늘에 기도를 올리며 자기를 대신 데려가라고 빌었다. 급기야는 자신의 넓적다리를 베어 불에 구은 다음에 부친에게는 참새구이라고 속여서 드시게 하였다. 그러자 사경에 이르렀던 그의 부친이 점차 회복하게 되었다. 박인필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모두가 하늘이 그의 효성에 감동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 이 달 초에는 단독증(丹毒症)으로 온몸이 부풀어 올라 사람들이 모두 체념하고 있었는데, 박인필은 변함없이 모친의 병간을 지극 정성으로 하여 마침내 차도가 있게 되었다. 남원의 유생들은 어린 박인필의 효행이 세상에서 사라져서는 안되기에 공의(公議)를 모아 성주에게 상서를 올리니, 이러한 박인필의 행적을 위에 알려 포양의 특전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남원부사는 이에 대해 참으로 가상하다면서 널리 의견을 모아달라는 제사(題辭)를 내렸다. 박인필의 효행과 관련한 상서는 이 문서 외에도 몇 건이 더 전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박인필은 박정환(朴正煥)의 소자(小字)이다. 또 박인필 뿐만 아니라 그의 처 청풍김씨(淸風金氏)도 효열(孝烈)로 이름이 높아 여러 차례 지방 유림들이 포양(褒揚)을 청하는 상서를 관에 올리기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남원의 밀양박씨 문중에는 박인필이 작성했던 시권(試券)이 3장 전하고 있다. 문과에 급제하지 못했고, 생원 진사시에 합격한 기록도 찾아볼 수 없지만, 박인필이 효자일 뿐만 아니라 학문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던 인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원 기지방의 유생들은 같은 해 9월에도 거의 같은 내용의 상서를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올렸다. "1822년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 유학(幼學) 원복철(元復哲) 등 상서(上書) 2"가 바로 그것이다. 한편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를 임오년으로만 적고 있는데, 문서의 소장처인 남원의 밀양박씨 문중에서는 이를 1882년으로 추정하여 문서에 연필로 그렇게 써놓았다. 이뿐만이 아니라, 위 박인필(朴仁弼)의 효행과 관련하여 작성된 상서들이 모두 이 시기를 전후하여 작성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위 임오년은 1882년이 아니라 1822년으로 추정되며, 효행 관련 문서들도 대부분 이 시기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위 박인필(朴仁弼)이 부친의 친산(親山)을 쓰기 위하여 1824년에 산지를 매입하였고("1824년 박인필(朴仁弼) 산지매매명문(山地賣買明文)" 참조), 효행 관련 통문이나 상서들이 17세 동몽(童蒙) 박인필을 언급하고 있다. 즉 부친이 죽기 직전의 박인필이 동몽으로 어린 나이였고, 그 시기를 명문에서는 도광 4년으로 명기하고 있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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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2년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 유학(幼學) 원복철(元復哲) 등 상서(上書) 2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국왕/왕실-보고-상서 壬午九月 機池化民元復哲元復興等 城主 壬午九月 전북 남원시 [署押] 1개, [官印] 3개 7.0*7.0(정방형) 적색 3개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1822년(순조 22) 9월에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에 사는 유학(幼學) 원복철(元復哲) 등 57명이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올린 상서(上書). 1822년(순조 22) 9월에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에 사는 유학(幼學) 원복철(元復哲) 등 57명이 같은 고을에 사는 동몽(童蒙) 박인필(朴仁弼)의 효행을 조정에 알려 포양(褒揚)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면서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올린 상서(上書)이다. 밀양박씨(密陽朴氏) 강수공(江叟公)의 9대손인 박인필은 충효(忠孝)의 가문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효심이 깊었다. 부친이 알 수 없는 병으로 수년 동안 병석에 있었으나 증세가 악화되어 온몸이 부풀어 오르고 사지가 마비되었는가 하면 가래와 기침으로 목구멍이 막혀 꼼짝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박인필은 백방으로 약을 구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급기야 부친이 사경을 헤매게 되자 박인필은 밤낮으로 하늘에 기도를 올리며 자기를 대신 데려가라고 빌었다. 급기야는 자신의 넓적다리를 베어 불에 구은 다음에 부친에게는 참새구이라고 속여서 드시게 하였다. 그러자 사경에 이르렀던 그의 부친이 점차 회복하게 되었다. 박인필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모두가 하늘이 그의 효성에 감동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 5월에는 모친이 단독증(丹毒症)으로 온몸이 부풀어 올라 사람들이 모두 체념하고 있었는데, 박인필은 변함없이 모친의 병간을 지극 정성으로 하여 마침내 차도가 있게 되었다. 남원의 유생들은 어린 박인필의 효행이 세상에서 사라져서는 안되기에 공의(公議)를 모아 성주에게 상서를 올리니, 이러한 박인필의 행적을 위에 알려 포양의 특전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남원부사는 이에 대해 참으로 가상하다면서 포양지전이 있어야 마땅하다는 제사(題辭)를 내렸다. 박인필의 효행과 관련한 상서는 이 문서 외에도 몇 건이 더 전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박인필은 박정환(朴正煥)의 소자(小字)이다. 또 박인필 뿐만 아니라 그의 처 청풍김씨(淸風金氏)도 효열(孝烈)로 이름이 높아 여러 차례 지방 유림들이 포양(褒揚)을 청하는 상서를 관에 올리기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남원의 밀양박씨 문중에는 박인필이 작성했던 시권(試券)이 3장 전하고 있다. 문과에 급제하지 못했고, 생원 진사시에 합격한 기록도 찾아볼 수 없지만, 박인필이 효자일 뿐만 아니라 학문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던 인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원 기지방의 유생들은 같은 해 5월에도 거의 같은 내용의 상서를 남원부사에게 올렸었다. "1822년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 유학(幼學) 원복철(元復哲) 등 상서(上書) 1"이 바로 그것이다. 한편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를 임오년으로만 적고 있는데, 문서의 소장처인 남원의 밀양박씨 문중에서는 이를 1882년으로 추정하여 문서에 연필로 그렇게 써놓았다. 이뿐만이 아니라, 위 박인필(朴仁弼)의 효행과 관련하여 작성된 상서들이 모두 이 시기를 전후하여 작성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위 임오년은 1882년이 아니라 1822년으로 추정되며, 효행 관련 문서들도 대부분 이 시기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위 박인필(朴仁弼)이 부친의 친산(親山)을 쓰기 위하여 1824년에 산지를 매입하였고("1824년 박인필(朴仁弼) 산지매매명문(山地賣買明文)" 참조), 효행 관련 통문이나 상서들이 17세 동몽(童蒙) 박인필을 언급하고 있다. 즉 부친이 죽기 직전의 박인필이 동몽으로 어린 나이였고, 그 시기를 명문에서는 도광 4년으로 명기하고 있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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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년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 삼리(三里) 유학(幼學) 방환수(房煥守)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국왕/왕실-보고-상서 庚戌九月 日 幼學房煥守安瑞等 城主 庚戌九月 日 전북 남원시 [署押] 1개, [官印] 1개 6.5*6.5(정방형) 적색 1개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1850년(철종 1) 9월에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 삼리(三里)의 유학(幼學) 방환수(房煥守) 등 7명이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올린 상서(上書) 1850년(철종 1) 9월에 남원(南原) 기지방(機池坊) 삼리(三里)의 유학(幼學) 방환수(房煥守) 등 7명이 같은 고을에 사는 사인(士人) 박정환(朴正煥)의 처 청풍김씨(淸風金氏)의 열행(烈行)과 박정환의 효행(孝行)을 영읍(營邑)을 통해 조정에 알려 포양(褒揚)의 특전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며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올린 상서(上書)이다. 박정환은 관련문서에는 박인필(朴仁弼)로도 나오는데, 이는 박정환의 소자(小字)로, 같은 인물이다. 관련문서를 함께 참고하여 먼저 청풍김씨의 행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청풍김씨는 좌리공신(佐理功臣)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지낸 월천군(月川君) 문평공(文平公) 김길통(金吉通)의 14세손으로, 일찍부터 부모를 잘 섬겼다. 부모가 하고자 하는 바를 미리 알아서 정성껏 받들어 모셔서 마을에서 그녀의 효행을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밀양박씨(密陽朴氏) 강수공(江叟公)의 9대손인 박정환에게 시집을 와서는 병든 시부모를 정성껏 봉양하였다. 남편 박정환이 갑자기 역병에 걸려 고생하다가 결국에는 고질병이 되어 3년 동안 병석에 누어 있을 때에는 지극정성으로 남편을 병간하였다. 백방으로 구한 약들이 효과가 없자, 밤낮으로 하늘에 기도를 올리며 자기를 대신 데려가라고 빌었다. 급기야는 자신의 손가락을 베어 흐르는 피를 남편에게 마시게 하자, 죽을 지경에 놓였던 남편에게 소생의 기운이 돌았다. 그러자 김씨는 자신의 넓적다리를 베어 며칠을 계속 달여 남편에게 드렸다. 그러자 남편이 점차 회생하게 되었다. 한편 박정환은 밀양박씨(密陽朴氏) 강수공(江叟公)의 9대손으로 충효(忠孝)의 가문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효심이 깊었다. 부친이 알 수 없는 병으로 수년 동안 병석에 있었으나 증세가 악화되어 온몸이 부풀어 오르고 사지가 마비되었는가 하면 가래와 기침으로 목구멍이 막혀 꼼짝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박정환은 백방으로 약을 구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급기야 부친이 사경을 헤매게 되자 박인필은 밤낮으로 하늘에 기도를 올리며 자기를 대신 데려가라고 빌었다. 급기야는 자신의 넓적다리를 베어 불에 구은 다음에 부친에게는 참새구이라고 속여서 드시게 하였다. 그러자 사경에 이르렀던 그의 부친이 점차 회복하게 되었다. 박정환의 나이 불과 17세 때의 일이었다. 모두가 하늘이 그의 효성에 감동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 그 달 모친이 괴질에 걸려 갑자기 사경을 헤매었는데, 박인필은 백방으로 약을 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모친에게 마시게 하여 마침내 소생케 하였다. 이와 같은 박정환과 그의 처의 효열에 감동한 전라도 각 지역의 유생들이 여러 차례 공의(公議)를 모아 남원부사와 암행어사 등에게 상서를 올렸었다. 이같은 기지방 유생들의 상서를 접한 남원부사는 부부의 효열이 참으로 가상하다는 제사(題辭)를 내렸다. 이 문서가 소장된 남원의 밀양박씨 문중에는 박정환이 박인필이라는 이름으로 작성했던 시권(試券)이 3장 전하고 있다. 문과에 급제하지 못했고, 생원 진사시에 합격한 기록도 찾아볼 수 없지만, 박정환이 효자일 뿐만 아니라 학문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던 인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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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이낙선(李洛善)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庚子五月 李洛善 城主 庚子五月 李洛善 전북 부안군 [署押] 3개, 서명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00년에 부안군(扶安郡)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사는 이낙선(李洛善)이 성주(城主)에게 올린 소지(所志). 1900년에 부안군(扶安郡)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사는 이낙선(李洛善)이 성주(城主)에게 올린 소지(所志)이다. 문서에는 작성연대가 경자년(庚子年)으로만 기재되어 있지만, 문서의 지질이나 문서 작성형태로 보아 1900년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 소지에 등장하는 '안성집(安成集)'이 전답을 거래하는 과정에서 작성했던 "1894년 안성집(安成集)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과 "1888년 안성집(安成集) 수표(手標)"을 통해서도 문서의 작성연대를 1900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동도 선은동은 전라북도(全羅北道) 부안군(扶安郡)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을 말한다. 따라서 성주는 1900년 당시의 부안군수(扶安郡守)를 가리킨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의하면 당시의 부안군수는 유기중(兪起濬)이었다. 그가 부안군수로 부임한 때는 1899년 12월 6일이었다. 한편 이낙선은 본 소지에서 자신을 죄민(罪民)이라고 칭하고 있는데 그것은 본 소지를 올릴 당시, 이낙선이 부모님의 상(喪)을 당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에는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경우, 자식은 스스로 죄를 지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자신이 효를 다하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낙선이 이번에 당한 상이 어머니상인지 혹은 아버지상인지는 알 수가 없다. 이낙선이 본 소지를 올린 이유는 이도(二道) 매산리(梅山里)에 사는 안성집이라는 자의 만행을 알리고, 안성집의 죄를 처벌해 달라고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이도는 부안군 이도면(二道面)을 말한다. 이낙선의 주장에 따르면, 이낙선은 지난 무자년(戊子年)에 안성집으로부터 12두락지(斗落只)의 논을 산 적이 있었다. 이 논은 물론 안성집의 소유였다. 그리고 무자년은 1888년이다. 그러니까 논을 구입한 지 12년 만에 본 소지를 올린 것이다. 안성집으로부터 논을 산 후 이낙선은, 안성집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이 논을 누군가에게 소작을 주고 매년 소작료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올해, 그러니까 1900년에 와서 안성집은 자신이 판 논이 균전(均田)에 포함되었다고 하면서 본 토지로부터 도조(賭租)를 받으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균전은 1870년대 이후 개간한 진전(陳田)을 말한다. 그러니까 쓸모없게 된 논을 경작할 수 있게 한 논이었는데, 당시 이 균전은 왕실의 사유지처럼 인식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애초에는 세금을 부과하지 않기로 했는데 나중에는 모두 부과의 대상이 되고 만다. 따라서 진전 경작자의 처지에서 보면 이는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채 세금을 내는 경우가 되었다. 따라서 안성집의 주장대로라면 이낙선이 매입한 토지는 그 소유권이 자신이 아니라 왕실이 되는 셈이었다. 이낙선으로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에 이낙선은 안성집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하여 자신이 직접 균전의 양안(量案)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안성집의 농간을 알아차리게 된다. 안성집이 자신에게 판 토지 외에 또 다른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그 토지의 9두락지가 균전에 편입되었는데 안성집이 그 9두락을 자신에게 판 토지로 둔갑하고 세금을 거두어 가려고 했다. 사정이 이러자 이낙선이 부안군수에게 소지를 올려 안성집의 그와 같은 못된 태도를 바로 잡음과 동시에 안성집의 죄를 물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낙선의 요청에 대해 부안군수는 안성집의 주장은 근거가 없으며, 안성집이 이낙선에게 판 토지의 소유권은 분명 이낙선에게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서류를 발급해 주도록 하였다. 부안군수의 제사에 나오는 "입지성급(立旨成給)"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런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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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道仙隱洞罪民李洛善右謹言挽近人心雖云不淑未有如二道梅山里安成集之尤甚也去戊子年渠之畓土十二斗落買得而時作仍舊主每年收賭矣忽於今者噫彼安成集做出不當之臆說同畓入於均田謂有均賭欲爲侵徵於民大抵均田量案詳細考準則渠畓九斗落在於量案者欲爲推托於已賣之土也用心奸譎胡至此極乎緣由仰訴 特垂明査之澤安民幻畓推托之習別般嚴懲立旨成給俾杜日後橫侵之地千萬伏祝伏祝行下向敎是事城主處分庚子五月日(題辭)觀此所訴安民所爲萬萬無據第爲立旨成給是在果日後復有更閙之獘以此憑後宜當事卄十日(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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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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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2년 남원(南原) 유학(幼學) 최준(崔濬) 등 상서(上書)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국왕/왕실-보고-상서 壬午十月 境內化民幼學崔濬梁復軫等 城主 壬午十月 전북 남원시 [署押] 1개, [官印] 3개 7.0*7.0(정방형) 적색 3개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1822년(순조 22) 10월에 남원(南原)에 사는 유학(幼學) 최준(崔濬) 등 28명이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올린 상서(上書). 1822년(순조 22) 10월에 남원(南原)에 사는 유학(幼學) 최준(崔濬) 등 28명이 남원 기지방(機池坊)에 사는 동몽(童蒙) 박인필(朴仁弼)의 효행을 조정에 알려 그의 아름다운 행적이 없어지지 않고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해달라면서 남원부사(南原府使)에게 올린 상서(上書)이다. 밀양박씨(密陽朴氏) 강수공(江叟公)의 9대손인 박인필은 충효(忠孝)의 가문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효심이 깊었다. 부친이 알 수 없는 병으로 수년 동안 병석에 있었으나 증세가 악화되어 온몸이 부풀어 오르고 사지가 마비되었는가 하면 가래와 기침으로 목구멍이 막혀 꼼짝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박인필은 백방으로 약을 구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급기야 부친이 사경을 헤매게 되자 박인필은 밤낮으로 하늘에 기도를 올리며 자기를 대신 데려가라고 빌었다. 급기야는 자신의 넓적다리를 베어 불에 구은 다음에 부친에게는 참새구이라고 속여서 드시게 하였다. 그러자 사경에 이르렀던 그의 부친이 점차 회복하게 되었다. 박인필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모두가 하늘이 그의 효성에 감동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 이 해 여름에는 모친이 괴질에 걸려 갑자기 사경을 헤매었는데, 박인필은 백방으로 약을 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모친에게 마시게 하여 마침내 소생케 하였다. 남원의 유생들은 어린 박인필의 효행이 세상에서 사라져서는 안되기에 공의(公議)를 모아 성주에게 상서를 올리니, 이러한 박인필의 행적을 위에 알려 포양의 특전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남원부사는 이에 대해 참으로 가상하다면서 포양지전이 있어야 마땅하다는 제사(題辭)를 내렸다. 박인필의 효행과 관련한 상서는 이 문서 외에도 몇 건이 더 전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박인필은 박정환(朴正煥)의 소자(小字)이다. 또 박인필뿐만 아니라 그의 처 청풍김씨(淸風金氏)도 효열(孝烈)로 이름이 높아 여러 차례 지방 유림들이 포양(褒揚)을 청하는 상서를 관에 올리기도 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남원의 밀양박씨 문중에는 박인필이 작성했던 시권(試券)이 3장 전하고 있다. 문과에 급제하지 못했고, 생원 진사시에 합격한 기록도 찾아볼 수 없지만, 박인필이 효자일 뿐만 아니라 학문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던 인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원의 유생들은 이 상서 외에도 박인필의 효행과 관련하여 여러 차례 남원부사와 순상(巡相), 그리고 암행어사 등에게 상서를 올렸었다. 한편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를 임오년으로만 적고 있는데, 문서의 소장처인 남원의 밀양박씨 문중에서는 이를 1882년으로 추정하여 문서에 연필로 그렇게 써놓았다. 이뿐만이 아니라, 위 박인필(朴仁弼)의 효행과 관련하여 작성된 상서들이 모두 이 시기를 전후하여 작성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위 임오년은 1882년이 아니라 1822년으로 추정되며, 효행 관련 문서들도 대부분 이 시기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위 박인필(朴仁弼)이 부친의 친산(親山)을 쓰기 위하여 1824년에 산지를 매입하였고("1824년 박인필(朴仁弼) 산지매매명문(山地賣買明文)" 참조), 효행 관련 통문이나 상서들이 17세 동몽(童蒙) 박인필을 언급하고 있다. 즉 부친이 죽기 직전의 박인필이 동몽으로 어린 나이였고, 그 시기를 명문에서는 도광 4년으로 명기하고 있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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