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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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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

1912년 이낙선(李樂善) 토지매매계약서(土地賣買契約書) 고문서-명문문기류-계약서 경제-매매/교역-계약서 明治四十五年二月 李正壽 李樂善 明治四十五年二月 李正壽 전북 부안군 [印] 4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912년 2월에 이정수(李正壽)가 이낙선(李樂善)에게 모시밭과 콩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계약서(土地賣買契約書). 1912년 2월에 이정수(李正壽)가 이낙선(李樂善)에게 모시밭과 콩밭을 팔면서 작성한 토지매매계약서(土地賣買契約書)이다. 매매의 대상이 된 토지는 전라북도(全羅北道) 부안군(扶安郡) 입하면(立下面) 우동리(尤東里)에 있는 밭 세 곳이다. 첫 번째는 밭의 지번호(地番号)는 3432이고 하자저전(荷字苧田) 2두락지(斗落只)이며 결수(結數)로는 4부(負) 5속(束)인 곳이다. 방매(放賣) 가격은 30원이다. 두 번째 밭의 지번호는 3438로 하자태전(荷字太田) 1두(斗) 5승락지(升落只), 결수로는 3부 1속인 곳이다. 매매 가격은 12원이다. 세 번째 밭의 지번호는 3438로 하자저전 2두 5승락지로 결수로는 4부 1속인 곳이다. 매매 가격은 44원이다. 첫 번째와 세 번째 밭은 저전(苧田) 즉, 모시밭이고 두 번째 밭은 태전(太田)으로 콩밭이다. 매매 대상이 된 토지의 총면적은 6두락지이고 방매(放賣) 가격은 모두 86원이다. 이 거래에는 부안군 입하면 우동리에 사는 밭의 주인 이정수와 부안군 동도면(東道面) 선은동(仙隱洞)에 사는 매수인(買受人) 이낙선이 참여하였고 이정수와 같은 동네에 사는 김낙도(金洛都)가 보증인(保證人)으로 참여하였다. 매도인, 매수인, 보증인은 매매계약서에 서명, 날인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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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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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

土地賣買契約書一土地은別紙의表示와 如홈一賣買代金捌拾陸円也一明治四十五年二月 日一賣主上前記賣買代金을거準領하右土地所有權을買受人의계轉渡홈으로契約홈一保證人은契約의確的한事實을保證으로右예署名捺印홈賣渡人全北道扶安郡立下面尤東里 李正壽[印]買受人 仝道 仝郡東道面仙隱洞 李樂善[印]保證人 仝道 仝郡立下面尤東里里長金洛都[印]土地表示一土地所有地名은全北扶安郡入下面尤東坪二地番号荷字三四三二苧田二斗落結肆負參束價文參拾円仝字三四三八四太田一斗五升落結參負貳束價文拾貳円仝字三四八四苧田二斗五升落結肆負壹束價文肆拾肆円三 四標荷字苧田二斗落 東仝人苧田 南路 西路 北路 仝字太田 東村路 南金京必苧田 西仝人苧田 北崔台史字 仝字苧田 東渠 南路 西仝人田 北仝人田四種目 苧田 太種田五面積陸斗落六價折捌拾陸兩七賣主人 全北扶安郡立下面尤東里李正壽[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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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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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문천공 시문집(文川公詩文集) 文川公詩文集 文川公詩文集 고서-집부-별집류 교육/문화-문학/저술-문집 고서 원문 文川公詩文集 성책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서울시 송파구 박용호 후손가 문천공(文川公) 박용호(朴龍祜)의 시문집(詩文集). 문천공(文川公) 박용호(朴龍祜)의 시문집(詩文集)이다. 박용호는 1778년(정조 2)생으로, 본관은 죽산(竹山)이며 자(字)는 문여(文汝)로, 남원(南原) 출신이다. 1810년(순조 10)에 33세의 나이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뒤에 관에 들어가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 휘릉(徽陵) 별검(別檢),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통훈대부(通訓大夫) 행문천군수(行文川郡守) 겸춘추관기사관(兼春秋館記事官) 등을 지냈다. 현재 그의 후손가에 전하는 그의 고신(告身) 가운데 연대가 가장 뒤늦은 것은 1824년(순조 24) 7월 20일에 국왕이 박용호(朴龍祜)를 통훈대부(通訓大夫) 행문천군수(行文川郡守) 겸춘추관기사관(兼春秋館記事官)에 임명하면서 발급한 교지(敎旨)이다. 이때가 47살이었기 때문에 관직 생활을 충분히 더 하였을 법도 한데 관련 문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이 시문집에는 정해년 3월 23일에 진행된 삼일제(三日製)의 진행상황을 기록한 글이 있다. 정해년은 1827년(순조 27)으로 그의 나이 49세 때이다. 아마 이 무렵에도 관직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다. 이 시문집에는 수십 편의 시문이 실려 있는데, 주로 관직생활을 하면서 동료 또는 선배 관원들과 주고 받은 차운시(次韻詩)가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 중 일부 제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次騎郞柳榮河 贈朴判書燕行 入直時追次泮中諸益花柳韻 次尙州宋監察奎弼 客中除夕 送別同色黃李兩友 癸未冬至 上元 次湖中鄭進士來留屯德崔雅家除夕韻 燈夕戱吟 天官直房階前種柳 與諸益賞花 次沁樓甲維翰韻 次肅宗大王傅子韻 送別金相稷注書 春虛 次李正言東迪 한편 시문집의 끝 부분에는 두 글자로 된 한자어(漢字語) 1천여 개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달아놓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물건의 이름이나 성격, 의성어 등이 많은데, 그 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모모(嫫毋) : 추녀(醜女) 배우(俳優) : 희롱하는 일(戱也) 주유(侏儒) : 키가 작은 사람, 난장이(短人) 원탈(晼脫) : 해가 지는 것(日落) 아나(婀娜) : 아름다운 모양(美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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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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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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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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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빙류

機池三里戶籍單子第二十統四戶幼學朴政煥 前名麟煥年五十九庚申本密陽父學生 東乘祖學生 相源曾祖學生 春城外祖學生 金五弼本盆城妻金氏年五十九庚申籍淸風父學生 守澤祖學生 光魯曾祖學生 聖海外祖學生李國柱本全州賤口婢唜丹年戊子乙卯 相準印丁巳八月 日風憲金[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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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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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6년 박동승(朴東乘) 예조계후입안(禮曹繼後立案) 고문서-증빙류-입안 법제-소송/판결/공증-입안 咸豊六年正月上四日 行判書 李 朴進浩 咸豊六年正月上四日 行判書 李 서울 종로구 [官印] 15개 8.0*8.0(정방형) 적색 15개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1856년(철종 7) 정월 4일에 박태호(朴泰浩)의 후사(後嗣)로 박동승(朴東乘)을 삼는 일에 대하여 예조(禮曹)에서 국왕의 재결을 받아 발급해 준 계후입안(繼後立案)이다. 1856년(철종 7) 정월 4일에 예조(禮曹)에서 발급한 계후입안(繼後立案)이다. 행용인현감(行龍仁縣監) 박태호(朴泰浩)는 적처(嫡妻)와 첩(妾)에게서 후사 없이 죽었다. 그 뒤 광주(廣州)에 거주하는 진사(進士) 박진호(朴進浩)가 예조에 소지(所志)를 올려 박태호의 8촌 동생으로 남원(南原)에 거주하는 박상원(朴相源)의 아들 박동승(朴東乘)을 박태호의 후사로 삼아 대를 잇게 허락해 달라고 청원하였다. 양가(兩家)에서는 족친들이 서로 모여 상의를 한 끝에 박동승을 후사로 삼기로 정하였으나, 마침 양가의 부모가 모두 죽었기 때문에 관례대로 예사(禮斜)를 발급받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이에 문장(門長) 박진호가 예조에 소지를 올려 입안(立案)을 받고자 하였다. 예조에서는 사리를 따져 초기(草記)하고 임금에게서 재가를 받아, 이를 허가하는 입안을 발급하였다. 입안은 개인이 청원한 사실에 대하여 관(官)에서 이를 확인하여 공증해 주는 문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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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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嘉慶六年五月 日楊州戶口考辛酉成籍戶口帳內住 北面 西山里 第五通三戶 通訓大夫行龍仁縣監 朴泰浩 年丙子本密陽父通政大夫行黃州牧使基正祖正憲大夫行平安道觀察使兼巡察使按察使慶承 曾祖資憲大夫行吏曹判書兼 經筵春秋館事弘文館大提學成億外祖嘉善大夫行吏曺參判趙㫜本豐壤 妻金氏齡四十五丁丑籍安東父通政大夫行安州牧使 履修祖正憲大夫行吏曺判書兼 經筵春秋館事弘文館大提學方行曾祖大匡輔國崇祿大夫行議政府領議政時傑外祖正憲大夫行黃海道觀察使兼巡察使李若海本廣州奴德才年五十六丙寅婢德心年四十六丙子一所生奴昌緯年二十五丁酉二所生奴連得年二十二庚子三所生婢昌禮年十八甲辰奴貴才年五十二己巳奴貴▣年五十一癸酉婢貴心年四十三己卯一所生奴▣▣年十三▣▣▣二所生婢干月年十八甲辰奴乭伊年五十五丁卯等戊午戶口相凖行牧使[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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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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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년 박태호(朴泰浩) 준호구(準戶口)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嘉慶六年五月 楊州牧 朴泰浩 嘉慶六年五月 楊州牧 전북 남원시 [着名] 1개 6.5*6.5(정방형) 적색 1개43.3*4.4(장방형) 흑색 1개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1801년(순조 1) 양주목(楊州牧)에서 박태호(朴泰浩)에게 발급해 준 준호구(凖戶口). 1801년(순조 1) 양주목(楊州牧)에서 박태호(朴泰浩)에게 발급해 준 준호구(準戶口)이다. 문서에 따르면 이 준호구는 신유년(辛酉年), 즉 1801년에 성적한 호적대장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다.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용인현감(行龍仁縣監) 박태호의 나이는 46세로 병자생, 즉 1756년에 태어났으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거주지는 양주목 북면(北面) 서산리(西山里)이다. 박태호의 아버지는 통정대부(通政大夫) 행황주목사(行黃州牧使) 박기정(朴基正)이다. 할아버지는 정헌대부(正憲大夫) 행평안도관찰사겸순찰사안찰사(行平安道觀察使兼巡察使按察使) 박경승(朴慶承)이다. 증조부(曾祖父)는 자헌대부(資憲大夫) 행이조판서겸경연춘추관사홍문관대제학(行吏曹判書兼經筵春秋館事弘文館大提學) 박성억(朴成億)이다. 외조부(外祖父)는 가선대부(嘉善大夫) 행이조판서(行吏曺參判) 조단(趙㫜)으로 본관(本貫)은 풍양(豐壤)이다. 아내는 안동(安東) 김씨(金氏)로 45세이며 정축년(丁丑年), 즉 1757년에 태어났다. 처부(妻父)는 통정대부(通政大夫) 행안동목사(行安州牧使) 김이수(金履修)이다. 처의 조부(祖父)는 정헌대부(正憲大夫) 행이조판서겸경연춘추관사홍문관대제학(行吏曺判書兼經筵春秋館事弘文館大提學) 김방행(金方行)이다. 처의 증조부는 대광보국숭녹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행의정부영의정(行議政府領議政) 김시걸(金時傑)이다. 처의 외조부는 정헌대부(正憲大夫) 행황해도관찰사겸순찰사(行黃海道觀察使兼巡察使) 이약해(李若海)이며 본관은 황주(廣州)이다. 소유한 노비는 모두 11구(口)로 남자종이 7구, 여자종이 4구가 있다. 56세 노(奴) 덕재(德才)는 병인생(丙寅生)이다. 46세 비(婢) 덕심(德心)은 병자생(丙子生)이다. 덕심에게는 일소생(一所生)으로 25세 노(奴) 창위(昌緯)가 있고 창위는 정유생(丁酉生)이다. 덕심의 이소생(二所生)은 23세 노(奴) 연득(連得)으로 경자생(庚子生)이다. 덕심의 삼소생(三所生)은 18세 비(婢) 창례(昌禮)는 갑진생(甲辰生)이다. 52세 노(奴) 귀재(貴才)는 기사생(己巳生)이고 51세 노(奴) 귀▣는 계유생(癸酉生)이다. 43세 비(婢) 귀심(貴心)이는 기묘생(己卯生)이다. 귀심이의 일소생(一所生)은 노(奴) ▣▣이고 이소생(二所生)은 18세 간월(干月)이로 갑진생(甲辰生)이다. 마지막으로 55세 노(奴) 돌이(乭伊)는 정묘생(丁卯生)이다. 문서의 말미에는 무오(戊午)호구상준(戶口相準)이라 기재하여 무오년(戊午年) 즉, 1798년에 작성한 호구 문서와 비교하여 확인하였음을 밝혔다. 문서의 좌측 상단에는 행목사(行牧使)의 착명(着名)이 있다. 남원부(南原府) 기지방(機池坊)에 살고 있는 밀양박씨(密陽朴氏) 가문의 소장 문서 가운데 양주목에 살았던 밀양박씨의 준호구(凖戶口)와 교지(敎旨)들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양주목에 살았던 밀양박씨의 일부가 뒤에 남원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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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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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년(癸酉年) 김원숙(金元淑) 수표(手標) 고문서-증빙류-수표 경제-회계/금융-수표 癸酉十二月二十九日 幼學 金元淑 癸酉十二月二十九日 幼學 金元淑 전북 부안군 [署押]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계유년(癸酉年) 12월 29일에 김원숙(金元淑)이 빚을 갚기로 약속하면서 작성한 수표(手標). 계유년(癸酉年) 12월 29일에 김원숙(金元淑)이 빚을 갚기로 약속하면서 작성한 수표(手標)이다. 그는 긴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상대방으로부터 매시(每市) 1분례(分例)로 30냥을 빌렸다. 그리고 다음달 10월말까지는 돈을 갚겠다고 약속하면서 이 표를 작성하여 상대방에게 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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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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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김명철(金明轍) 수기(手記) 고문서-증빙류-수기 경제-회계/금융-수기 甲申四月初五日 金明轍 甲申四月初五日 金明轍 전북 부안군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84년 4월에 김명철(金明轍)이 부안(扶安)에 있는 저전(苧田)을 팔면서 작성한 수기(手記). 1884년 4월에 김명철(金明轍)이 부안(扶安)에 있는 저전(苧田)을 팔면서 작성한 수기(手記)이다. 김명철은 급히 돈을 쓸 데가 있어서 천자(天字) 모시밭(苧田) 2마지기를 전당 잡히고 6냥을 빌렸다. 수기의 내용은 매시(每市) 2푼(分)의 이자를 지급한다고 하였으며, 4월 그믐 안에 본전과 이자를 모두 갚겠다고 약속하였다. 이 문서가 소장된 부안의 선은동 전주이씨가에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작성되었던 명문 5백여 점이 전하고 있어서 이 가문이 당시에 경제적으로 상당한 기반을 축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명문 뿐만 아니라 산송(山訟) 관련 소지(所志)도 다수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이 가문의 것으로 추정되는 호적문서 31건이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의 고문서DB로 구축되어 있어서 작성연대가 간지로만 적혀 있는 명문과 소지의 정확한 작성연대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호적문서는 1801년부터 1888년까지 부안 동도면 선은동에서 계속 작성되었는데, 여기에 기재된 호주들의 이름은 이양호(李養灝), 이양락(李養洛), 이양순(李養淳), 이양식(李養湜), 이익용(李翼容), 이겸용(李謙容), 이규함(李圭咸), 이규정(李奎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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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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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안성집(安成集) 수표(手標) 고문서-증빙류-수표 경제-회계/금융-수표 光緖十四年戊子二月二日 安成集 光緖十四年戊子二月二日 安成集 전북 부안군 [着名] 1개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부안 동도 전주이씨가 1888년 (고종 25) 2월 2일 안성집(安成集)이 30냥을 빌리면서 작성한 수표(手標). 1888년 (고종 25) 2월 2일 안성집(安成集)이 30냥을 빌리면서 작성한 수표(手標)이다. 안성집은 급히 돈을 쓸데가 있어서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매산리(梅山里) 전평(前坪)의 방자답(傍字畓) 12두락지(斗落只)를 전당(典當) 잡혔다. 이 방자답은 부수(負數)로 20복(卜) 8속(束)인 곳이다. 안성집은 논 문서 1장(丈)을 전당 잡히고 30냥을 얻어 썼다. 매달 5부 이자를 내기로 약속하였다. 전당기한은 9월 말일로 하고 이때까지 원금과 이자를 함께 갚기로 약속하는 문서를 작성해 주었다. 안성집은 부안의 전주이씨 소장문서 가운데 "1894년 안성집(安成集) 방매(放賣) 토지매매명문(土地賣買明文)"에서는 부안현(扶安縣) 일도면(一道面) 매산리(梅山리)에 있는 논의 매도자로, "1900년 이낙선(李洛善) 소지(所志)"에서는 분쟁 관계에서 이낙선으로부터 고발을 당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수표는 매매, 임대, 전당(典當), 차용(借用) 등을 할 때 서로 간에 맺은 계약이나 약속을 기록한 문서로 본 문기에는 이자율과 빌린 돈을 갚기로 한 날짜가 기록되어 있다. 추가로 본문에 일장(一張)은 일장(一丈)으로 써야 바른 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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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酉十二月二十九日 前手標右標事切有緊用處故右人前錢文三十兩以每市一分例得用是乎所限于來十月晦內備報之意如是成標事標主幼學 金元淑[署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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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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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申四月初五日 手記右手記事卽有緊用處故天字苧田二斗落右人前典堂是遣以錢文六兩以每市二分例得用而限則四月晦內並本利備報之意如是成標事標主 金明轍[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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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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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緖十四年戊子二月二日 手標右標事急有緊用處梅山前坪黃梁矣畓傍字十二斗落所耕二十卜八束果文卷一張爲人前典當是遣錢文參拾兩以每朔五分例得用而限九月晦內並本利備報之意如是成標爲去乎若過限則永永得捧事標主 安成集[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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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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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년(丁巳年) 박정환(朴政煥) 호구단자(戶口單子) 고문서-증빙류-호적 사회-인구/호적-호구단자/준호구 丁巳八月 朴政煥 南原府 丁巳八月 朴政煥 전북 남원시 [着名] 1개 7.0*7.0 (정방형) 적색 1개15.3*4.2(장방형) 흑색 1개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정사년(丁巳年)에 남원부(南原府) 기지방(機池坊)에 사는 박정환(朴政煥)이 작성하여 제출한 호구단자(戶口單子). 정사년(丁巳年)에 남원부(南原府) 기지방(機池坊)에 사는 박정환(朴政煥)이 작성하여 제출한 호구단자(戶口單子)이다. 이 문서에는 호(戶)의 주소와 박정환, 박정환의 4조(四祖), 처(妻), 처의 4조, 노비(奴婢)에 대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기지삼리(機池三里) 제24통 4호에 사는 유학(幼學) 박정환은 올해 59세로 경신년(庚申年)생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박정환은 개명(改名)을 했으며 이전의 이름은 박인환(朴麟煥)이었다. 박정환의 4조를 살펴보면 부친(父親)은 학생(學生) 박동승(朴東乘), 조부(祖父)는 학생 박상원(朴相源), 증조부(曾祖父)는 학생 박춘성(朴春城), 외조부(外祖父)는 학생 김오필(金五弼)이다. 외조부의 본관(本貫)은 분성(盆城)이다. 박정환의 처(妻)는 청풍김씨(淸風金氏)이며 나이는 59세로 경신년(庚申年)생이다. 처의 4조를 살펴보면 처부(妻父)는 학생 김수택(金守澤), 조부는 학생 김광노(金光魯), 증조부는 학생 김성해(金聖海), 외조부는 학생 이국주(李國柱)이다. 외조부의 본관(本貫)은 전주(全州)이다. 계집 종 1구(口)가 기재되어 있는데 이름은 말단(唜丹)이고, 무자년(戊子年)생이다. 노비를 기재한 행 마지막에는 '乙卯 相準印'이라고 적혀있어 이 문서는 3년 전인 을묘년(乙卯年)에 작성된 호구 문서와 대조하여 발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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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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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조용락(趙鏞洛)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趙鏞洛 李殷弼 趙鏞洛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조용락(趙鏞洛)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조용락(趙鏞洛)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고시체의 장문의 시였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인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조용락은 유학자로, 다정한 벗이면서 함안(咸安)의 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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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上有高峰下甑山分明靈地此中間左蘭右蕙芬芳宅北海東湖水繞環杜宇緣何啼血淚庭柯爲孰尙怡顔人間無有長生術斯日斯程復不還 侍生 臨瀛朴曾松謹再拜哭輓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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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응성(南應盛)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南應盛 李殷弼 南應盛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남응성(南應盛)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남응성(南應盛)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장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장을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예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칠언율시이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 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북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북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장을 지은 남응성은 유학자로, 본관은 영양(英陽)이다. 그는 자신을 계제(契弟)라고 적고 있는데, 계제란 함께 맺은 계(契)의 계원(契員) 중 나이가 어린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계의 명칭이나 그 계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남응성은 망자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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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而樂也死而憐生則謂人死後仙春草蘇來新快活王孫忽去正茫然招魂敀魄如何事白旗丹㫌別有天執彿下玄今寂寞拜詞却憶淚涓涓 契弟英陽南應盛 再拜 哭 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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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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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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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류

박증송(朴曾松)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朴曾松 李殷弼 朴曾松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박증송(朴曾松)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박증송(朴曾松)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장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장을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예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칠언율시이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 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북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북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장을 지은 박증송은 유학자로, 본관은 강릉(江陵)이다. 만장에 임영(臨瀛)라 썼는데 여기서 '임영'은 강릉의 옛 지명이다. 그는 자신을 시생(侍生)이라고 적고 있는데, 시생이란 웃어른을 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가리키는 말을 의미한다. 따라서 박증송은 망자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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