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恐鑑伏以戶布減給事昨年分已爲仰籲而當減未減則五百年朝家恩典民獨未被也不勝寃抑玆更仰籲 題下於戶色發令於坊長俾爲蒙減之地無任千萬恳祝之至城主處分丙午正月 日官[署押](題辭)前官傳令自在依勅施行事十七日坊長戶布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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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남원(南原) 전주이씨(全州李氏) 모인(某人) 소지(所志)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丙午正月 日 城主 丙午正月 日 南原 全州李氏 族人 南原郡守 전북 남원시 4.0*4.0 2개(적색, 정방형), 2.5*2.5 1개(적색, 정방형)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06년 1월에 남원(南原)에 사는 전주이씨(全州李氏) 문중의 모인(某人)이 남원군수(南原郡守)에게 올린 소지(所志). 1906년 1월에 남원(南原)에 사는 전주이씨(全州李氏) 문중의 모인(某人)이 남원군수(南原郡守)에게 올린 소지(所志)이다. 호포(戶布)를 줄여 달라고 작년에 이미 호소하였으나 마땅히 줄여주어야 하는 데도 줄여주지 않으니 자신만 조정의 은전(恩典)을 입지 못한 것이라며 억울한 마음에 다시 호소하니, 호색(戶色)에게 제사(題辭)를 내리고 방장(坊長)에게 명령을 내려 줄여 달라고 하였다. 이에 1월 17일 남원군수(南原郡守)는 호포색리와 방장에게 '이전 관(官)의 전령이 있으니 신칙하여 시행하라'고 제사(題辭)를 내렸다. 문서에 작성연대가 병오년으로만 나오지만, 남원의 수령이 현감이 아니라 군수로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1906년으로 추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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機池坊居罪人朴沙郞右謹陳所無據段草郞坊居立馬有司金道仁立馬錢分給於渠矣村各人等處而年年收納矣中間收錢有司傳授於矣身外四寸金光德數年收納是如可金光德身死後用錢諸民昭然生存於渠矣村是去乙稱以光德之族越坊分錄於矣身不當之民則豈不寃哉緣由仰訴爲白去乎參商敎是後 嚴題前有司金道仁處立馬錢各人等處收納之地爲白只爲行下向敎是事使道處分丙子八月後用錢各人等鄭大江 鄭山德 鄭兩州 林石必 金興喆 金興連 金喆重 金光德又名達年 金道仁子致玉 金西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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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이용기(李容器)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乙巳小春之念 李容器 乙巳小春之念 李容器 전북 남원시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05년 10월 20일 이용기(李容器)가 보낸 서간(書簡). 1905년 10월 20일 이용기(李容器)가 보낸 서간(書簡)이다. 8월에 상대방이 보낸 편지에 답장을 못한 게으름을 용서하라고 하였다. 청대(淸臺)의 서거(逝去)와 고당(顧堂)의 흉보(凶報)에 통탄스럽다며 자신은 신산(辛酸)할 뿐이며 불원간 한번 찾아가겠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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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두섭(安斗燮) 만사(輓詞)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安斗燮 安斗燮 전북 남원시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죽계(竹溪) 안두섭(安斗燮)이 지은 만사(輓詞) 죽계(竹溪) 안두섭(安斗燮)이 지은 만사(輓詞)이다.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향리(鄕里)에서 오복(五福)을 누린 인물로 칭송을 받은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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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事荒涼辛未盡哭公兄第是何辰哀孫重脹承於祖孝子誠心盡矣親小長皆設三尊老鄕里咸稱五福人從今淸標無由得秖作短詞淚滿巾弟竹溪安斗燮再拜哭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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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인년(甲寅年) 민홍식(閔洪植)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甲寅流火月初旬日 閔洪植 甲寅流火月初旬日 閔洪植 전북 남원시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갑인년(甲寅年) 6월 초순에 사하생(査下生) 민홍식(閔洪植)이 보낸 서간(書簡). 갑인년 6월 초순에 사하생(査下生) 민홍식(閔洪植)이 보낸 서간(書簡)이다. 여름이 다 가고 가을이 다가왔는데 소식이 묘연(墓然)하니 그리움이 더욱 간절하다며 늦더위에 벼슬살이하는 상대방의 안부를 물었다. 자신은 그런대로 지낸다며 여름철에도 공부는 진전이 있겠지만 서늘한 기운이 생기면 하고 한번 명하여 보내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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夏盡秋屆音間渺然而懷之彌切無容喩伏未審晩炎仕體候靜養万甯梱內納禧倂伏溸區區無任遠忱査生省眷依遣伏奉何喩就伏托卽之夏間做課伏想有進就之望而第俟凉生一次命送伏望耳餘伏探安候不備伏惟上候狀甲寅流火月初旬日査下生閔洪植再拜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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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년(甲子年) 양인성(梁寅誠)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甲子 梁寅誠 甲子 梁寅誠 전북 남원시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갑자년(甲子年)에 양인성(梁寅誠)이 보낸 서간(書簡) 갑자년(甲子年)에 양인성(梁寅誠)이 보낸 서간(書簡)이다. 여기서의 갑자년은 1924년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누구 앞으로 보낸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내용은 어떤 처방에 대한 약재를 보내 달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편지를 받는 사람은 한약재를 취급하는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처방 내용은 편지 끝 부분에 별도로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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再拜上候書伏不審期德回進賜氣體候一向萬安伏溯區區且禱之至生姑依侍幸就告向日亦種藥今便送上考捧而又有緊急?侍告依左記惠送之地伏望伏望耳慮固座擾未得晉拜耳餘不備伏上候書甲子七月十七日生梁寅誠 再拜上三稜 一兩蓬朮 一兩赤?? 一兩丹木 一兩?? 一兩靑皮 一兩當歸 一兩官桂 各一兩紅花 三戔?? 一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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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3년 용호사회소(龍湖祠會所)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사회-조직/운영-통문 癸未 幼學 崔漸翼 機池上有司 癸未 1823 崔漸翼 전북 남원시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1823년(순조 23) 11월 초6일에 용호사회소(龍湖祠會所)의 유학(幼學) 최점익(崔漸翼) 등 13인이 기지방(機池坊) 유사(有司) 앞으로 보낸 통문(通文) 1823년(순조 23) 11월 초6일에 용호사회소(龍湖祠會所)의 유학(幼學) 최점익(崔漸翼) 등 13인이 기지방(機池坊) 유사(有司) 앞으로 보낸 통문(通文)이다. 기지방은 전라북도 남원군에 속한 48방(坊) 가운데 하나요, 용호사는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칠서면(漆西面)에 있는 사당(祠堂)으로, 여평군(驪平君) 수재(修齋) 진극일(陳克一)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1818년(순조 18)에 지은 것이다. 그리고 통문은 민간의 모임이나 개인이 기관이나 혹은 관련 있는 인사에게 공동의 관심사를 알리기 위해 발송하는 형태의 문서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함안에 있는 용호사에서 남원 기지방의 유사에게 본 통문을 보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기지방에 사는 박동정(朴東禎)의 조카 박인석(朴仁碩)이 처한 억울한 처지 때문이었다. 본 통문에 기재된 내용에 따르면 박동정은 밀성군(密城君)의 후예(後裔)요, 공효공(恭孝公)의 11대손이요, 눌재공(訥齋公)의 9대손이요, 강파선생(江波先生)의 8대손이요, 기와선생(棄窩先生)의 4대손이었다. 그들 집안이 기지방에 들어온 것은 위 기와선생 때였는데, 기지방에서 살기 시작한 이래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서의 모습을 잃치 않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갑을년(甲乙年)에 불어 닥친 대흉년(大凶年)의 영향으로 황구첨정(黃口簽丁)과 백골징포(白骨徵布)가 횡행(橫行)하던 시기에 박동정도 그 속으로 편입되는 일이 있었다. 갑을년이란 간지에 갑(甲)과 을(乙)이 들어간 해를 말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느 해를 말하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본 통문이 발송된 해가 1823년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1814년(순조 14)과 1815년을 가리키는 듯한데, 아무튼 양반의 후예로서 횡침되는 모습을 그대로 놔둘 수가 없었다. 이에 용호사 유림들이 앞장 서 박동정이 더 이상 횡침되는 일이 없도록 해 달라는 취지로 본 통문을 발송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궁금한 점이 있다. 함안군의 사람들이 어떻게 남원 기지방에 사는 박동정의 처지를 알고 위와 같은 통문을 보냈을까 하는 대목이다.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없어 자세한 바는 알 수 없으나 함안군 사람들이 기지방에 사는 사람의 사정을 스스로 알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기지방 사람들로부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박동정의 처지를 잘 아는 사람으로부터 박동정의 처지를 전해 들었고 이와 함께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여론의 형성을 위해 통문을 보내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것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할 듯싶다. 한편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를 계미년으로만 적고 있는데, 문서의 소장처인 남원의 밀양박씨 문중에서는 이를 1883년으로 추정하여 문서에 연필로 그렇게 써놓았다. 이뿐만이 아니라, 위 박동정의 아들 박인필(朴仁弼)의 효행과 관련하여 작성된 상서들이 모두 이 시기를 전후하여 작성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위 계미년은 1883년이 아니라 1823년으로 추정되며, 효행 관련 문서들도 대부분 이 시기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위 박동정의 아들 박인필(朴仁弼)이 부친의 친산(親山)을 쓰기 위하여 1824년에 산지를 매입하였고("1824년 박인필(朴仁弼) 산지매매명문(山地賣買明文)" 참조), 박인석과는 사촌간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 통문은 1883년이 아닌 1823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효행 관련 통문이나 상서들이 17세 동몽(童蒙) 박인필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밀양박씨 소장문서 가운데 박인필에 관련된 문서의 작성연대는 1880년대보다 훨씬 앞서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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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축년(乙丑年) 남정석(南廷晳)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乙丑 弟南廷晳 乙丑 南廷晳 전북 남원시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을축년(乙丑年)에 남정석(南廷晳)이 보낸 서간(書簡) 을축년(乙丑年)에 남정석(南廷晳)이 보낸 서간(書簡)이다. 을축년은 1925년으로 추정된다. 국한문혼용(國漢文混用)으로 쓰여 있다. 수신인은 알 수 없다. 본 편지를 보낼 당시 남정석은 집을 떠나 있는 상태였는데, 편지에서 남정석은 최근 자신의 상황을 알린 후, 시계(時計) 등 상대방이 부탁하였던 일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울러 본 편지를 받는 즉시 회답도 부탁한다는 점과 함께, 더 자세한 이야기는 5월 초에 서로 만날 때 하자는 이야기도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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省禮言謹詢請和重侍哀體度萬支大小各宅均泰否仰溸區區至祝弟客味如作爲幸之耳就向日相別時所託時計與他事件은其間多少間運動則以此海諒如何不再多言云고書到卽時回示切仰之耳餘在五初相逢面敍之意不備䟽禮乙丑四月念九日 弟南廷晳 拜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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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이동기(李東器) 추천장(推薦狀)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昭和十六年 李正根 昭和十六年 전북 남원시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1941년 4월에 이정근(李正根) 등이 작성한 이동기(李東器) 추천장(推薦狀) 1941년 4월에 이정근(李正根) 등이 작성한 이동기(李東器) 추천장(推薦狀)이다. 추천인은 다수였는데, 이를 보면 국정풍(國定豊), 대금현석(大金鉉奭), 송촌두남(松村斗南) 등이었다. 국정풍은 이정근이 창씨개명(創氏改名)한 이름으로 보인다. 그리고 대금현석은 김현석(金鉉奭)이 창씨개명한 이름이고. 송촌두남은 이두용(李斗用)이 창씨개명한 이름이다. 본 추천장의 내용은 남원군(南原郡) 사매면(巳梅面) 관풍리(官豊里) 95번지(番地)에 살고 있는 매촌동기(梅村東器)를 도의회(道議會) 의원 후보로 추천한다는 것이었다. 매촌동기는 이동기의 창씨개명 이후의 이름이다. 이동기가 명문성족(名門盛族)의 출신으로 덕행(德行)이 뛰어나고, 일찍이 서울의 보성중학교(普成中學校)를 졸업한 후 고향 남원으로 돌아와 농산촌구제사업과 사회복지사업에 지대한 공을 세운 인물로서, 두뇌가 명석하고 인품도 매우 훌륭함으로 남원의 발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인물임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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推薦狀南原郡巳梅面官豊里九五番地立候補者 梅村東器(舊名 李東器)來五月十日에 道會議員總改選이 施行됨은 旣히 熟知하시는 바로 밋습니다.時局은 正히 興亞建設事業遂行途上에 在하야 國民總力을 切實히 要求하는이때 我等代言者로 上意下傳하고 下意상達하야 明朗道政을 翼贊할 有爲人物을 道議壇上에 보낼 것은 我等有權者의重大한 責務로 生覺합니다. 萬一巧言令色과 淺見小技로 釣名取譽에 汲汲하고 其實에 드러 無爲無能한 人士로 登場케한다면 道政百年之計에 一大汚点일지니我等有權者로 엇지 羞愧함이 아니리오자에 本道와 本郡의 實情에 빗취어 深思熟考컨대 梅村東器(李東器)君은元來 名門盛族으로 其德行이 崇高하고일즉이 京城에 負笈하여 普成中學을 卒業後 鄕土에 歸하야 修身齊家의 本分을다하며 農山村救濟事業을 爲始하야 社會敎育事業에 盡瘁한 功勞至大하며 人物이 溫厚質素하고 禮讓謙遜하며 頭腦明快하고 言正心淳한 時代的 人物로서 實로 아南原十二萬 郡民을 代表하야 道政에 參與케할 분은 此人을 捨하고 누구를 求하리요是以로 敢히 君을 公薦하는 바이니 公明正大하신 有權者 諸位는 千金一票를 同君에 投하시여 鄕土의 名譽를 振興케 하고 道政의 隆昌을 圖하도록 千萬仰望하나이다.昭和十六年 四月 日推薦者代表 李正根 國定豊 大金鉉奭(金鉉奭) 松村斗南(李斗用)敬白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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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文右通諭事橘有渡淮之欲而終知其爲橘花有落溷之髮是知其爲花今花何爲泥橘何爲柚哉然則可以人而不如淮之橘溷之花乎盖貴坊士人朴東禎仁碩叔侄粤自密城君後裔本以淸州木果洞人也簪纓世族詩禮古家論其世德則恭孝公其十一代祖也訥齋公其九代祖也江波先生之八代孫也棄窩先生之四代孫也棄窩公隱德不仕棄世於本府本坊者取不才明主棄之意而退世於山林中勝探者也不幸此家興替有數科?間寂班名世守者鄕中表族俱是姻婚之家道內美閥亦是戚紀之地則愚夫蠢童咸知其班脉之昭然常人庸士亦誦其來歷之閥閱而去甲乙大無哀我生靈黃口簽丁白骨徵布之餘士人東禎混入虛名故盖有齊顙之呈此終見頉給之題矣傳聞今又其侄仁碩不幸橫侵云然則仁碩之家便是常人樣卽亦不無齒寒之歎然尊卑有等上下有分則極守班名者必無是理而況我鄕知名之族有此橫侵之獘者豈不寒心而若使其淸州鄕人聞知則必有一正論於本府矣玆敢齋參通告窃願上有司與益尊特出齊憤之義一以明同濟之有等一以杜任掌之橫侵無至玉石之俱樊千萬幸甚右敬通于機池上有司癸未十一月初六日龍湖祠會所友通 幼學崔漸翼 李亨來 金星德 房基亨 盧學文 趙重伯 丁孝達 安錫宗 楊大壽 金星燁 房海相 李觀淵 朴鼎權 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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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2년 장의(掌議) 김수갑(金壽甲) 등 회문(回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사회-조직/운영-통문 壬午 掌議 金壽甲 壬午 1822 전북 남원시 [着名]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1822년(순조 22) 4월 23일에 장의(掌議) 김수갑(金壽甲) 등이 작성한 회문(回文) 1822년(순조 22) 4월 23일에 장의(掌議) 김수갑(金壽甲)과 색장(色掌) 한경열(韓敬烈) 등이 작성한 회문(回文)이다. 회문이란 여러 사람들이 돌려 보도록 쓴 글을 의미한다. 장의는 향교(鄕校)의 임원 가운데 으뜸 자리를, 색장은 유생들의 자치기구인 재회(齋會)의 간부 가운데 하나를 지칭한다. 따라서 본 회문은 향교의 임원들이 쓴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김수갑 등이 본 회문을 돌린 이유는 삼리(三里)에 거주하는 유학(幼學) 박인필(朴仁弼)의 효행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다. 삼리는 세 개의 거리가 만나는 삼거리를 말할 텐데, 여기서는 남원군 기지방에 속한 삼리였다. 본 회문에 따르면 박인필은, 당시 17세에 불과한 아이였지만 품성(稟性)부터 진정한 효자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였다. 그의 아버지 박동정은 어떤 약으로도 치료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병으로 수 년 동안 고생하고 있었는데, 특히 지난 신사년(辛巳年) 12월 경에는 병세(病勢)가 위중하고 몸에 피가 흐르지 못할 정도로 위기에 처하였다. 그러자 박인필은 자기 엉덩이 살을 떼어 내어 아버지께 드시게 함으로써 아버지를 돌아가실 위기로부터 구해 냈다. 그로 인해 아버지의 건강이 다시 회복되었는데, 이러한 박인필의 효행을 감히 드러내지 않을 수 없어 본 회문을 작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수갑 등이 박인필의 위와 같은 효행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알 수 없지만, 박인필의 효행은 그만큼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도 남을 정도로 대단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박인필의 집안은 박인필만이 아니라 박인필의 아버지 박동정(朴東禎) 또한 이름난 효자였는데, 박동정의 효행에 관한 이야기는 같은 해 작성된 기지풍헌서목(機池風憲書目)을 통하여 알 수가 있다. 어찌 보면 효자를 기리기 위해 통문이나 회문을 발송하는 일이 그리 중하게 여겨지지 않던 시대가 아니었겠느냐 하는 생각도 가질 법한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전통과 효자에 대한 생각은 조선 후기라도 조선 초기나 조선 중기와 마찬가지로 그대로 변함없이 유지되었다고 보아도 좋다. 그리고 그러한 전통은 조선이 멸망하고 일제의 침략을 받았던 그 암물한 시기에도 또는 해방이 이루어지고 우리의 전통이 이제는 완전히 과거의 것이 되어 버린 1950년도 혹은 1960년대라도 지속되는 모습을 보였다. 그만큼 전통의 유습(遺習)은 질겼던 것이다. 한편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를 임오년으로만 적고 있는데, 박인필(朴仁弼)이 부친의 친산(親山)을 쓰기 위하여 1824년에 산지를 매입하였던 점("1824년 박인필(朴仁弼) 산지매매명문(山地賣買明文)" 참조)을 고려하여 이를 1822년으로 추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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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5년 박치우(朴致愚)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乙酉三月初六日 朴致愚 朴佐郞 乙酉三月初六日 朴致愚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남원 수지 죽산박씨가 1825년(순조 25) 3월 6일에 박치우(朴致愚)가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 1825년(순조 25) 3월 6일에 박치우(朴致愚)가 박용호(朴龍祜)에게 보낸 서간(書簡)이다. 상대방의 편지를 받고 객지에서 무고함을 알게 되니 위로가 되었다며 복제(服制)를 만났는데 아직 남쪽 고향에 가지 못하였는지 물었다. 쇄마가(刷馬價) 감삭(減削)은 아전의 의송(議送) 때문인데 감영의 제사(題辭)도 몽롱하다며 도와주지 못하는 이유를 말하였다. 당시 박용호는 서울에 있었고, 박치우는 자신을 문천(文川) 구민(舊民)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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