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기관별 검색

검색 범위 지정 후 검색어를 넣지 않고 검색버튼을 클릭하면 분류 내 전체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전체 으로 검색된 결과 84193건입니다.

정렬갯수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기축년(己丑年) 한위고시(漢魏古詩) 고문서-시문류-시 교육/문화-문학/저술-시 1889 南原 全州李氏家 전북 남원시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南原)에 거주하는 전주이씨가(全州李氏家)의 어느 누군가가 기축년(己丑年)에 필사(筆寫)한 한위고시(漢魏古詩) 남원(南原)에 거주하는 전주이씨가(全州李氏家)의 어느 누군가가 기축년(己丑年)에 필사(筆寫)한 한위고시(漢魏古詩)이다. 한위고시란 중국 한(漢)나라와 위(魏)나라 시절에 지어졌던 고시를 말한다. 한나라는 물론 기원전 206년에 유방(劉邦)이 세운 고대국가로서,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랜 통치 기간인 426년을 존속하였다. 다만 중간에 왕망(王莽)이 건국한 신(新)나라가 잠깐 들어선 적이 있었다. 이 신을 계기로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으로 나뉜다. 위나라는, 중국 역사상 여러 왕조가 있었는데, 여기서는 한나라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조조(曹操)가 기잔을 닦고 조비(曹丕)가 세운 위를 가리킨다고 판단된다. 조선시대에는 이 한위고시처럼 중국의 시를 옮겨 적은 책들이 무수히 많았는데, 위나라의 시를 모은 예는 흔치 않은 듯하다. 그런데 사실을 정확히 말한다면 본 서는 당초 한나라의 시만을 모은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원래의 제목도 "한시 오언(漢詩 五言)"이었다. 하지만 훗날 누군가 한위고시라는 글자를 써 넣음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착각을 일으켰다고 생각된다. 실제로도 위나라의 시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한편 표지를 보면 "기축삼월상간수장(己丑三月上幹修裝)"이라는 문구가 보인다. "기축년 삼월 상한에 표지를 만들었다."는 의미인데, 여기서의 기축년은 책의 상태로 보아 1889년(고종 26)으로 추정된다. 분량은 표지를 제외하고 32장 64면이다. 내용을 보면 처음에는 서문에 해당되는 글이 세 개 나온다. 첫 번째 글을 제목이 없지만, 마지막에 "을사삼월초길우생회계하시서(乙巳三月初吉友生會稽夏時序)"라는 필사기가 나온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선시보주서(選詩補注序)"라는 제목의 글이 보인다. 선시보주라면 원래 유이(劉履)가 문선(文選)과 도연명(陶淵明)의 시집 등에서 뽑은 시를 모은 책을 말하는데 본 서문은 이 책의 서문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본 한위고시의 본문에 수록된 시도 이 선시보주에 수록된 시를 옮겨 적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도연명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나라 때의 인물이 아니었다. 동진(東晋)과 유송(劉宋)시대의 인물이었다. 따라서 이 도연명의 시를 수록한 책에 한위고시라는 제목을 붙일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정확한 제목은 한위고시가 아니라 한시라고 보아야 한다. 아마도 본 한위고시는 보주선시에서 한나라 때에 지어진 시만을 옮긴 것이 아닐까 한다. "선시보주서"를 뒤이어 나오는 서문은 "풍아익서(風雅翼序)"이다. 풍아익이란 "시경(詩經)의 보조라는 뜻인데, 이는 선시보주를 달리 부르는 말이었다. 선시보주가 인간의 성정(性情) 도야(陶冶)에 있어 시경의 보조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였다. 이상의 설명을 참고한다면 남원의 전주이씨가에 소장된 한위고시는 보주선시에서 일부를 옮겨 적은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러한 점은 목록을 보아서도 알 수가 있다. 이를 보면 우선 선시보주목록(選詩補註目錄)이라 하고 다음으로 한시(漢詩)라는 목차가 보이기 때문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杏花 哀哉惟公生於世八十有八而顔赧聞乎一域者果不仁能如是耶仁者壽之說亦不 證矣况家亦不貧而隣里敦睦孰能不稱擧哉然而春回爲吉一枝零 橋一花春暮貧餘寬綿綿如隴雲不絶可聲此生楓樹哀暮以 一章誄說遠慶幽谷公眞釋靈還鄕矣 慶州后人 金必熙 謹再拜輓哭 楓樹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松 仁賦乎天德以根太平國一蘭村身全袵髮耕於野世守家聲士也 門生來世無恙擬仙佛老去齊閑聽子孫每歲射亭盃酒席從今 契事與誰論 同契 少弟 江陵金龍起 再拜謹輓 竹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梅 鄕之領袖士之綱謹餙平生勉自疆晩歲又兼苽葛好所居常有蕙芝香誨敎 後裔罔非道紹述先人亦有光使我難忘姻婭誼當年只祝壽而康二絶一朝蘭報使人 驚白首難禁此日情耆舊吾鄕今有幾大溢風浪不平嗚 江城后人 査下生 崔萬吉 謹再拜 哭輓 蘭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김인진(金麟振)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金麟振 李殷弼 金麟振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김인진(金麟振)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김인진(金麟振)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고시체의 장문시이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인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김인진은 유학자로, 임영(臨瀛)의 후인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雲 夢耶不忍送君情念舊長嘆處淚生細說同時期更 着胡爲今日永離成故園四首浮在歸路關心積雪晴 流水凄凉山寂寞千年幽宅厥居平 延安后人 車仁宲 謹拜 哭輓 鶴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古家詩禮槿瀛州成憶樂生洵美休蘭芽準擬三珠檮竹韻聯 成五鳳樓海上神仙應自許淤西風月共將悠病勢恨之無臨壙訣精 靈鑑此勿次尤 少弟 臨瀛 崔燉泰 謹拜哭輓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花 一壽人間八二年飄然去化白雲仙宗高姿勢甑山立暗淡精神鏡水 涓宿草然風嘶鬣馬碧蘿殊雨泣花鵑儀容彷彿歸何處曉色丹旌葉 魄月懸 溟州后人金鳳卿謹拜哭挽 葉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山 東日收光西日天黃山晦魄下玄玄五年以上肩隨誼七從之中最後縁桑海三田成 草夢{艹+韱}朝數曲挩花箋而今歸去歸來否更向春風向杜鵑二絶我昔貴門爲客時 與兄諸從好相隨今來只餘二三在以慰前人惹此悲 溟州后人金晉卿謹拜哭挽 水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김정국(金正國)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김정국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김정국(金正國)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김정국(金正國)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김정국은 계림(鷄林), 곧 경주김씨의 후손이었다. 자신을 시생(侍生)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망자보다 나이 어린 사람이었을 알 수 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梅楚漢英雄何處去八年風塵虛用軍當時若破閻羅國豈使人間有此行盆城后人金尙洙謹再拜哭輓竹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松 孝悌元來是性眞享年八十二今辰夜從譖闥六珈樂 春向芳蘭三朶新學生無愧閻羅府令德應聞上帝隣 東風殘雪靑山路薤露歌中哭萬人 花山后人權炳國 再拜 哭輓 竹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雲 天命誰知只自然一生一死不何人蘭庭諸子難 忘際瑤月孤魂入夢頻殘菊丹旌當日淚白雲 古嶂四吋隣親朋多有先代小上帝招公望八年 全州后人 誼從弟 李明主 謹再拜 哭輓 霞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松 昌山華閥大瀛東詩禮䋲䋲述世風勤儉規模承泩 古桂蓮猷徽出衆中天心難測舟移壑人事靡常夢 若空執彿春山鵑泣血緬懷前躅淚盈瞳 侍下生 完山后人 李經魯 謹再拜 哭輓 竹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星 遠自昌山華閥來江湖勝地別庄開蕙蘭古宅芬千載 松栢佳城土一盃滿世苦辛渾若夢根天仁善擧難收 誄詞未了重重緖殘雪斜陽不耐哀 侍生安東權五利 謹再拜 哭輓 雲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한시(漢詩) 장방향(腸芳香) 고문서-시문류-시 교육/문화-문학/저술-시 전북 남원시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남원 보절 전주이씨가 시회(詩會)에 참여한 사람들이 지은 시들을 옮겨 적은 것을 두루마리 형태로 엮은 시축(詩軸) 시회(詩會)에 참여한 사람들이 지은 시들을 옮겨 적은 것을 두루마리 형태로 엮은 시축(詩軸)이다. 하지만 언제 어디에서 어떤 이유로 열린 시회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본 시축이 남원에 거주하는 전주이씨가(全州李氏家)에서 나온 점을 감안하면 시회가 열린 장소는 남원이었다는 점은 짐작할 수가 있다. 시축의 처음을 보면 장(腸), 방(芳), 향(香), 황(黃), 경(卿)이라는 다섯 글자가 적혀 있다. 이는 시회에서 제시된 운(韻)이다. 그러니까 이 다섯 글자의 운을 가지고 시를 지으라는 것이었는데, 수록된 시는 모두가 56자인 7언 율시(律詩)이다. 시를 지은 사람은 이름이 없이 호(號)만 나오는데, 이를 보면 한주(漢栦), 국천(菊泉), 송호(松湖), 수정(水亭), 월곡(月谷), 농은(農隱), 명선(鳴善), 금허(錦虛) 등이다. 수록된 시는 한 사람 당 두 작품인 경우가 많은데, 운자를 달리한 경우가 있다. 다시 말해서 앞서 제시된 운자 말고 다른 운자를 이용하여 시를 짓도록 했다는 의미인데, 하루에 그렇게 했다는 말인지 아니면 서로 다른 날 그렇게 시를 짓도록 한 후 이를 하나의 시축에 모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시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작품까지 옮겨 적은 방식이었는데, 운자가 다르면 그 운자를 이용하여 지은 시를 적은 글씨도 달랐다. 한편 본 시축의 마지막을 보면 일부 탈락 부분이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가 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김영억(金榮億)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김영억 李殷弼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김영억(金榮億)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김영억(金榮億)이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사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사를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들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에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들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사를 지은 김영억은 익성(益城)김씨의 후손이었다. 자신을 인제(姻弟)라고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망자와는 인척간으로 동생뻘이었음을 알 수 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문서
유형분류 :
시문류

서상로(徐相魯) 만사(輓詞) 고문서-시문류-만사 종교/풍속-관혼상제-만사 徐相魯 李殷弼 徐相魯 김제 만경 전주이씨가 전북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서상로(徐相魯)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 서상로(徐相魯)가 이은필(李殷弼)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만사(輓詞)이다. 만사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공덕(公德)을 기리고, 그를 좋은 곳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장에서의 '만(輓)'은 끈다는 의미인데, 이는 망자의 상여(喪輿)가 장지(葬地)로 나갈 때 만장을 앞세워 인도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만사는 어떤 정형화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언절구(五言絶句)와 오언율시(五言律詩) 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간혹 고시체(古詩體)를 본떠서 장문(長文)의 시(詩)의 짓거나 혹은 4자체(字體)로 쓰는 예도 있다. 이 만사는 글자의 수로 보아 칠언율시이다. 위에서 만사의 대상자를 이은필이라고 밝혔지만, 사실 이를 알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만사가 그러하듯, 이 만사에서도 만사의 주인공 이름을 직접 거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만사와 함께 묶어져 있던 115건의 만사의 그 어디에서도 이은필의 이름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만사 등 중에서, 만사 작성자 스스로가 이은필의 친척이라고 적은 것을 모은 후,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토대로 이은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은필(李殷弼)은 본관이 전주(全州)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실시한 신묘식년시(辛卯式年試)의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17세였다. 이후 문과(文科)에는 급제하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관원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영릉참봉(寧陵參奉), 영희전참봉(永禧殿參奉), 의릉참봉(懿陵參奉), 원구단사제서참봉(圜丘壇祠祭署參奉), 목릉참봉(穆陵參奉), 경릉참봉(景陵參奉) 등을 지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은필의 거주지와 관련하여 궁금한 점이 있다. 신묘식년시 사마방목(司馬榜目)에 의하면 그의 거주지는 서울이었다. 그러나 조사과정에서 확인한 이은필의 거주지는 서울이 아니라 충청북도 제천(堤川)이었다. 그렇다면 이은필은, 소과 합격 당시에는 서울에 살았지만, 나중에 충청도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아니면 소과 합격 당시의 실제 거주지도 제천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그것이 문과든, 무과든, 소과든 관계없이 본향(本鄕)만이 아니라 삼향(三鄕), 즉 본향, 처향(妻鄕), 외향(外鄕)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시권(試券)이나 방목에도 역시 시험을 치른 곳을 적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은필에게 서울은 처향이나 외향이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궁금한 점은 또 있다. 이 만사를 접한 장소는 충청도가 아니라 전라북도 김제였다. 그러니까 만사들이 원래는 충청도에 있다가 김제로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은필의 후손 누군가 김제로 이주하면서 본 만사들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할 뿐이다. 이은필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에 능참봉을 지냈을 뿐이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 각지의 유림이 다투어 만시(輓詩)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학자(儒學者)로서 상당한 명망을 누린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광복 이후 어느 땐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만장을 지은 서상로는 유학자로, 본관은 이천(利川)이다. 그는 자신을 후인(后人)이라고 적고 있는데, 후인이란 상대방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 자신을 낮추어 이르는 말이다.

상세정보
84193건입니다.
/4210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