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2년 기지풍헌(機池風憲) 서목(書目) 고문서-첩관통보류-서목 정치/행정-보고-서목 壬午 日風憲金 壬午 1822 전북 남원시 [着名], [署押] 7.0*7.0(정방형) 적색 1개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남원 금지 밀양박씨가 1822년(순조 22) 윤3월에 기지방(機池坊) 풍헌(風憲) 김씨(金氏)가 남원군수(南原都護府使)에게 올린 서목(書目) 1822년(순조 22) 윤3월에 남원도호부의 기지방(機池坊) 풍헌(風憲)인 김씨(金氏)가 남원군수(南原都護府使) 앞으로 올린 서목(書目)이다. 기지방은 남원 48방 가운데 하나요, 풍헌은 향청(鄕廳)의 우두머리인 좌수(座首) 아래 있던 자로서, 면(面)에서 기강(紀綱)을 담당한 자였다. 풍헌 김씨가 본 서목을 올린 이유는 기지방에 사는 박인필(朴仁弼)의 효행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위 서목에 따르면 기지방의 삼리(三里)에 사는 박인필은 본관이 밀성(密城)이었으며, 강수공(江叟公) 박훈(朴薰)의 9대손(代孫)이요, 유학(幼學) 박동정(朴東禎)의 아들이었다. 박동정은 수 년 동안 그 어떤 약에도 치료가 되지 못할 정도의 중병으로 기력도 없고, 피부가 수척해지고 또 식음도 전폐하여 혼자서는 도저히 몸을 지탱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다가 지난 해에는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데, 당시 17세에 불과한 박인필이 자신의 허벅지 살을 떼어 내어 아버지 박동정으로 하여금 드시게 함으로써 박동정의 목숨을 부지함을 물론이요, 박동정의 건강까지 되찾게 해 드렸다. 이에 기지방 풍헌은 하늘을 감동시킬 정도인 박인필의 효행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못할 것을 걱정하는 한편 박인필의 효행을 널리 알려야 하겠다는 생각에 본 서목을 올리게 된 것이다. 한편 이 문서에는 작성연대를 임오년으로만 적고 있는데, 박인필(朴仁弼)이 부친의 친산(親山)을 쓰기 위하여 1824년에 산지를 매입하였던 점("1824년 박인필(朴仁弼) 산지매매명문(山地賣買明文)" 참조)을 고려하여 이를 1822년으로 추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