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回文 處菴公契右回喩事惟吾處菴公派契日字來月十日完定故玆以發文于各處契員與用錢之人一齊來會于席洞齋閣修契無至一員不知之蔽幸甚甲寅十月二十三日發文元齋中 錢一百五十兩八戔六卜△七十九兩六戔三卜杏山 宋良皓 租一石一斗一升五合△十斗六升行下里 宋熙文 〃三石十三斗五升△一石十六斗七升五合鳳頭山 金興万 〃十一石十二斗九升七合五夕△五石十六斗四升五合麻谷 崔孝明 錢三十三兩七戔五卜△十六兩八戔八卜九也里 張殊玉 〃二十二兩五戔△十一兩二戔五卜元齋中 〃十六兩八戔八卜△八兩四戔五卜〃〃〃 租十三石十斗△六石十五斗愚西里 崔京長 租三石七斗五刀△一石十三斗七刀五合母加山 金億万 租十一石十五斗三刀△五石十七斗六刀五合杏山 崔仁甫 〃五斗六刀二合△二斗八刀一合麻谷 崔孝明 六十九石十一斗八刀七合 己酉年 六石 至甲人年鳳頭山 金興万 二石△一石上里 金栢万 △賭租二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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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년 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참봉공파계(叅奉公派契) 회문(回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사회-조직/운영-통문 甲午十月 日 各處用錢之人 甲午十月 日 發文有司 各處用錢之人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갑오년 10월에 부안의 전주최씨 참봉공파계에서 각처의 계원들과 계의 자금을 이용한 사람들에게 계일을 통보하면서 보낸 회문. 갑오년(甲午年) 10월에 부안(扶安)의 참봉공파계(叅奉公派契)에서 각처의 계원들과 계의 자금을 이용한 사람들에게 계일(契日)이 다음 달 초10일로 확정되었다고 통보하면서 보낸 회문(回文)이다. 본전과 이자를 지참하고 석동재각(石洞齋閣)에 참석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회문의 끝 부분에는 돈을 빌려간 사람들의 성명과 금액(본전)과 아직 갚지 못한 잔금 등이 차례로 적혀 있다. 예컨대 석포(石浦)의 최봉득(崔奉得)은 계에서 6냥 2전 6복을 빌렸는데, 현재 3냥 1전 3복을 갚지 못한 상태이다. 돈을 빌린 사람들은 모두 12명으로, 그 거주지는 석포 외에 부곡, 신광, 성암, 산정, 행산, 만촌, 행산, 백석리 등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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回文右回諭事惟我叅奉公派契日字完定于來月初十日爲去乎各處用錢▣▣▣▣(之人倂本)利持是遣齋會于石洞齋以修契事千萬幸甚甲午十月 日發文後蓮洞 崔乃順 十八兩 △九兩富谷 崔鳳眞 五兩五戔(二兩五戔五卜) △二兩七戔七卜(一兩二戔七卜)石浦 崔奉得 六兩二戔六卜 △三兩一戔三卜新光 崔達元 十三兩八戔九卜 △六兩八戔五卜星岩 崔文汝 五兩 △二兩五戔山亭 車齊鍾 十兩 △五兩杏山 金理仲 五兩 △二兩五戔葛村 崔公一 十兩 △五兩內四兩入新蓮洞 崔士賢 二十五兩 △十二兩五戔杏山 金贊敬 三十兩 △十五兩白石里 崔柒甫 三兩 △一兩五戔杏山 金致明 五十兩 △二十五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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右通喩事天下之事有善有惡有正有邪善與正理所當爲者也惡與邪理所當袪者也理之當爲者人心所同應而惟恐其事之不成其心之未白理之不當爲者人人得而誅之而惟恐其事之或成其心之或隱是理也不以親疏而或間不以强?而少衰雖曰親焉而所爲事出於邪與惡則親者踈矣雖曰踈焉而所爲事出於善與正則踈者親此則天地自然之理而不以人爲雜乎其間也噫雖素所疏遠之人無所關涉於我而其所動作或乖理致固已悶然哀之哀之不已况所謂親近者返欲以非理侮人祖先奪人先基則其所哀之惡之尤當如何哉然人非堯舜安得每事盡善又安得每事盡察徒以外面行蹟之可惡遷疑其心之亦然在我失明察容人之道在人有含怨未白之端矣此則今日鄙等之不得不致誥於尊門而欲俟 尊門之明敎噫天神在上人鬼在傍誰敢以非理謾天欺人以待誅殛之嚴以取無狀之憝耶此則鄙等與 尊門不得不汲汲講明以不爲先祖之悖孫可也夫甕井祠八賢妥享之遺址也己巳以後雖爲 朝令所禁而不敢伸其私情然猶或慮其疏遠而視若路人故作契講義以無替祖宗之誼乃者自 貴門敢生不遵之心以爲祠宇遺基獨崔門所有何其不思之甚也崔氏旣如此立心則爲三姓者以至當之大義豈忍泯黙以退耶請以陳其可不可當時立祠之時非有東西之祔則享祀之賢四姓氏各爲封上明矣自己巳以後作契殖利以厚風敎以同其利非崔氏之所獨有明矣畓土之分四姓氏均焉壇直家建設與被災之費四姓氏各自負擔則又非崔氏之所獨有明矣ㅡ地主以 貴門炳郁爲保管而註其下曰四姓氏買得其非崔門之所獨有明矣此則以證據之鑿鑿者而言雖無證據就境內解事者而問之其必曰四姓氏所有此則以人心之所同然而言事旣有據理旣明白何人不憤何往不伸然今此之擧有大家痛心者有之當初立祠之意雖是尊賢慕先而亦是子孫世世講義者也今以土地之故其終必至世讎矣寧不痛心乎僉座下試思之踈之讎之在 貴門乎在鄙等乎其在同祠子孫之誼恐有輕擧之道故玆以仰告更加 思量來叅于壇直家幸甚右 敬 通 于崔 氏 門 中庚申十月 日發文人孫浩豊 金慶述蔡義永 金蘭述金洛新 蔡東沃孫浩源 孫信錫蔡之永 蔡東河蔡東勳 金洛冕金洛奎 孫忠源孫承源 金圭植金洛琪 蔡恭黙孫孝源 孫珵淵 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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回文右回諭事惟我興學稧日子定于今月初十日爲去乎各處契員與用錢人並本利持是遣齊會于席洞齋閣以修稧事幸甚乙巳十一月一日發文後楓作洞 崔景善 一兩五戔 △一戔五卜崔成道 一兩五戔 △七戔五卜五亭里 崔應斗 一兩五戔 △七戔五卜杏山里 崔仁甫 一兩五戔 △七戔五卜再山 崔子化 一兩五戔 △七戔五卜富谷 崔明中 一兩五戔 △七戔五卜內葛村 崔光彦 一兩五戔 △七戔五卜新月里 崔鳳洪 一兩五戔 △五戔新石堤 崔成昭 一兩五戔 △七戔五卜金億万 錢三十兩 △十五兩奉事公派 錢一兩五戔 △七戔五卜〃 崔仁甫 錢五戔 △二戔五卜大爲谷 崔衡在 一兩五戔 △七戔五卜長田里 崔成琡 一兩五戔 △七戔五卜富谷 崔長汝 一兩五戔 △七戔五卜五丁里 應斗氏 錢二兩二戔五卜入于稧中明年講信時推去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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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년 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참봉공파계(參奉公派稧) 회문(回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사회-조직/운영-통문 乙未十月 各處用錢之人與族人 乙未十月 發文有司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을미년 10월에 부안의 전주최씨 참봉공파계에서 각처의 족인들과 계의 자금을 이용한 사람들에게 계일을 통보하면서 보낸 회문. 을미년(乙未年) 10월에 부안(扶安)의 전주최씨(全州崔氏) 참봉공파계(叅奉公派契)에서 각처의 족인(族人)들과 계의 자금을 이용한 사람들에게 계일(契日)이 다음달 초10일로 확정되었다고 통보하면서 보낸 회문(回文)이다. 석동재각(席洞齋閣)의 모임에 꼭 참석해달라고 당부하고 있다. 회문의 끝 부분에는 돈을 빌려간 사람들의 성명과 금액(본전)과 이자, 그리고 아직 갚지 못한 금액 등이 차례로 적혀 있다. 예컨대 풍동(楓洞)의 최의정(崔義正)은 15냥을 빌렸는데, 이자가 7냥 5전이며 그 중 10냥을 갚았다고 하였다. 한편 원암의 최봉득은 9냥 3전 9복을 빌렸는데, 현재 4냥 7전을 납부하지 못한 상태이다. 돈을 빌린 사람들은 모두 14명으로, 그 거주지는 풍동 외에 연동, 부곡, 원암, 신광, 성암, 산직리, 행산리, 산정리, 갈촌리, 신연동 등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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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년 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사문강신(私門講信) 회문(回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사회-조직/운영-통문 戊申十月初六日 扶安 居住 全州崔氏 門中 有司 戊申十月初六日 1848 有司 全州崔氏一族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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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년 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회문(回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사회-조직/운영-통문 庚子閏六月十一日 崔東漢 등 3인 庚子閏六月十一日 1840 崔東漢 全州崔氏一族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840년(헌종 6) 윤 6월 11일에 부안에 거주하는 전주최씨 문중에서 종원들에게 보낸 회문 1840년(헌종 6) 윤(閏) 6월 11일 부안(扶安)에 거주하는 전주최씨(全州崔氏) 문중에서 종원들에게 보낸 회문이다. 종원의 모임 일자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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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최병현(崔秉炫) 서간(書簡)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戊子七月八日 秉炫 戊子七月八日 1948 崔秉炫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48년 최병현이 보낸 서간 1948년 7월 8일 족생(族生) 최병현(崔秉炫)이 보낸 서간(書簡)이다. 지리한 더위와 장마에 문중의 여러 사람이 안부를 묻고, 자신은 건강치 않은 상태인데다 자신의 동생 병주(秉珠)가 5월 초부터 뱃속병이 점차 위중해졌다며 나중에 찾아뵙겠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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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부안군수(扶安郡守) 조용하(趙庸夏)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丙申八月日 本郡守趙 丙申八月日 扶安郡守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896년(고종 33) 부안군수 조용하의 통문 1896년(고종 33) 8월 부안군수 조용하(趙庸夏)의 통문(通文)이다. 서림정을 중건하면서 서림정계원들의 명단을 걷어 들이라는 통문이다. 부안군수를 역임한 삼암공(三巖公) 조연명(趙然明)은 조용하의 종숙인데 부안군수 시절 작은 정자를 짓고 서림정(西林亭)이라고 하였고, 문인(文人)과 재사(才士)가 여가에 서림정에서 소요하면서 계첩(稧帖)을 만들었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 정자는 무너지고 비(碑)만 남아 있어 중건(重建)을 시작하게 되었다. 정자가 있으면 계(稧)가 없을 수 없고 계를 한다면 재산이 없어서는 안 되므로, 구첩(舊帖) 중에 살아 있는 사람이나 그 자손들의 수단을 걷고 재량껏 재물을 축적하여 중춘(仲春)과 중추(仲秋)에 정자에 일제히 모여 술잔을 들고 시를 지을 자료로 삼고자 한다. 이에 통문을 돌리니 수단을 8월 그믐 안에 거둬들이라고 하였다. 조용하는 1896년(고종 33) 4월에서 1897년(고종 34) 8월까지 부안군수를 역임하였다. 1848년(헌종 14)에 당시 부안현감 삼암(三巖) 조연명(趙然明)이 서림에 많은 나무를 심고 정자를 지어 이름을 서림정(西林亭)이라 칭했으며 이후 유지들 33인과 함께 삼십삼수계(三十三修稧)를 조직해 봄‧가을로 나무를 많이 심어 가꾸고 시회(詩會)도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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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종중(扶安宗中) 서간(書簡) 피봉(皮封)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개인-생활-서간 古阜 歸旅 扶安宗中 古阜 歸旅 扶安宗中 전라북도 고부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고부에서 부안의 전주최씨 종중 앞으로 보낸 간찰의 피봉. 고부(古阜)에서 여행 중에 부안의 전주최씨 종중 앞으로 보낸 간찰의 피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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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文右文爲通諭事先祖作室子孫肯搆肯堂善繼善述聖王之遺訓也完東宗垈卽惟我 先祖之所遺址而宗中先長老刱設宗垈者曾已屢百年之久矣近爲風雨所磨上棟下宇東頹西圯幾至傾敗則豈不寒心哉各邑宗族以繼述之意公議爛商卽欲收錢當此窮節難以收合不獲已今五月良得債於完府設役重修三朔工已告訖凡所用費數至壹千五百餘金則待秋成幷本利將過貳千餘百也爲 先之錢趂期備報乃已故玆通告于各邑 僉宗氏不有後期通到之日依後錄一一收納宗中以竣宗事之地千萬幸甚右敬通于 此亦中收錢有司路需自 貴各邑宗中 派宗中計其程道以備厚給事癸卯六月 日扶安 古阜 秉泰 成來全州 南原 秉哲 式烈靈巖 報恩 鴻坰 宇洪羅州 順天 鳳錫 正洪咸悅 舒川 光成 秉吉〃 〃 寬洪 彦圭完東宗垈修理所發文 鳳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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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소윤공종중(少尹公宗中)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사회-조직/운영-통문 癸丑 月 日 少尹公宗孫 崔圭哲 等 13人 扶安門中 癸丑 月 日 崔圭哲 扶安門中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13년에 전주최씨 소윤공 종손들이 제수답의 소유권과 관련하여 부안문중에게 보낸 통문. 1913년에 전주최씨(全州崔氏) 소윤(少尹)공 종손(宗孫)들이 제수답(祭需畓)의 소유권과 관련하여 부안문중(扶安門中)에게 보낸 통문이다. 전주최씨 소윤공종손들에게는 고부(古阜)에 거주하였던 선조(先祖) 3대 즉, 동복현감(同福縣監)을 지낸 최자목(崔自睦), 상장군(上將軍) 최분(崔汾), 그리고 선천군사(宣川郡事) 최명손(崔命孫)의 묘소가 부안군 분토동(粉土洞)에 있었다. 한편 군사(郡事)공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큰 아들이 진사공(進士公) 최희윤(崔希潤)이고, 작은아들이 판관(判官)공 최희정(崔希汀)이다. 이 중 진사공의 증손(曾孫)으로 모암공(慕庵公) 최안(崔安)이 있는데 이 최안이 대종손(大宗孫)으로 당시에 천석부자였다. 그런 이유로 3대 조상의 묘토로 24두락(斗落)을 바쳐 그 가운데 13두락은 제향수(祭享需)로 사용하게 하고 나머지 11두락은 산직이가 경작하여 먹고 살면서 묘소를 보호하도록 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판관공 자손 3대의 선영이 있게 되었다. 이후 선영 때문에 자손들의 갈등이 일어나자 문중에 호소하여 옳고 그름을 밝혀달라고 요청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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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인년 부안 전주최씨(全州崔氏) 봉사공파계(奉事公派契) 회문(回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사회-조직/운영-통문 甲寅十月二十三日 各處用錢人與契員 甲寅十月二十三日 發文有司 各處用錢人與契員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갑인년 10월 23일에 부안의 전주최씨 봉사공파계에서 각처의 계원들과 계의 자금을 이용한 사람들에게 계일을 통보하면서 보낸 회문. 갑인년(甲寅年) 10월 23일에 부안(扶安)의 전주최씨(全州崔氏) 봉사공파계(奉事公派契)에서 각처의 계원들과 계의 자금을 이용한 사람들에게 계일(契日)이 다음 달 10일로 확정되었다고 통보하면서 보낸 회문(回文)이다. 한 사람도 빠짐 없이 본전과 이자를 지참하고 석동재각(席洞齋閣)에 참석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회문의 끝 부분에는 돈을 빌려간 사람들의 성명과 금액(본전)과 아직 갚지 못한 잔금 등이 차례로 적혀 있다. 예컨대 신리(新里)의 장명중(張明中)은 202냥 5전을 빌렸는데, 현재 101냥 2전 5복을 갚지 못한 상태이다.(원문에는 二百과 二兩五戔 사이에 △ 표시가 있는데, 이는 오기(誤記)로 추정된다.) 이 문서에는 장명중 외에 목하리의 이도춘, 신흥리의 서상용 등 세 사람만 적혀 있지만, 훼손된 문서의 뒷 부분에 더 많은 계원들의 명단이 적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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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최봉수(崔鳳洙) 등 통문(通文)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사회-조직/운영-통문 壬寅 正月 日 各邑宗中 壬寅 正月 日 崔鳳洙 各邑宗中 전라북도 전주시 부안 석동 전주최씨 류절재 부안 연곡리 유절재 1902년 정월에 최봉수 등 66명의 전주최씨 종원들이 각 지역의 종중에 보낸 통문. 1902년 정월에 최봉수(崔鳳洙) 등 66명의 전주최씨(全州崔氏) 종원(宗員)들이 고부(古阜), 전주(全州), 남원(南原), 영암(靈巖), 보은(報恩) 등 각 지역의 종중에 보낸 통문(通文)이다. 이들은 제학(提學)공(公) 최덕지(崔德之)의 묘역에서 일어난 갑작스런 변고로 인하여 '궐향(闕享)'에까지 이르게 된 저간의 사정을 통탄하면서, 또다시 제학공의 제사를 지내지 못하면 안된다고 호소하고 있다. 사건은 최성흠(崔聖欽)이라는 족인이 작년 봄에 제학공의 묘역 단청룡(單靑龍)에서 멀지 않은 곳에 무덤을 쓴 데서 시작되었다. 제학공은 월당(月塘) 최담(崔霮, 1346~1434)의 장자이자 소윤(少尹)공(公) 최득지(崔得之)와 연촌공(烟村公) 최덕지(崔德之)의 형이 되는 큰 어른이다. 그런데 낯선 무덤이 또아리를 틀고 서로 마주하면서 제학공의 묘소와 석계공(石溪公) 최명룡(崔命龍) 모자(母子)의 묘역을 위에서 압박하는 형세를 취하게 된 것이다. 이제까지 400여 년 동안 지켜온 선산으로 다른 잡인의 무덤 하나 없었는데, 저 성흠이란 자가 투총을 하여 선조를 추모하는 이곳을 크게 모욕하였다고 종원들은 통탄해 하고 있다. 변고를 처음 당했을 때는 관을 통하여 일을 순조롭게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일문이 모두 들고 일어나서 바깥의 모욕을 사는 일도 또한 하기 어려운 일이어서 사람의 의리를 들어 성흠을 꾸짖기도 하였다. 그러나 두 세 번을 거듭하여도 끝내 무덤을 굴거하지 않았다. 급기야 3월의 묘사(墓祀) 때에는 설령 선영에 음식을 차려놓는다 한들 조상의 혼령이 마음 편히 흠향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여 투총을 파간 뒤에 제사를 지내기로 하였다. 요컨대 월당공 4부자의 묘역이 같은 국내(局內)에 있어서 매년 함께 제사를 지내왔는데, 제학공만 궐향할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로부터 다시 1년이 되어가는 시점에 이르러 또다시 제사를 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최봉수 등의 종중원들은 생각하였다. 이에 각 지역의 종원들에게 통문을 보내 결코 궐향을 해서는 안된다고 호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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