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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오남집(吾南集) 13卷 7冊 吾南集 吾南先生文集 고서-집부-별집류 교육/문화-문학/저술-문집 문집 표점영인 吾南先生文集 金漢燮 木活字本 7 有界 10行22字 한자 內向2葉花紋魚尾 미상 국립중앙도서관 김한섭(金漢燮, 1838~1894)의 시문집. ■ 형태서지 권수제 吾南先生文集 판심제 吾南先生文集 간종 목활자본(木活字本) 간행년 미상 권책 13권 7책 행자 10행 22자 어미 內向2葉花紋魚尾 소장처 국립중앙도서관 선간집수 ■ 저자 성명 김한섭(金漢燮) 생년 1838년(헌종 4) 몰년 1894년(고종 31) 자 치용(致容) 호 오남(吾南) 본관 영광(靈光) 특기사항 동학농민운동 때 강진에서 관군과 수성하다 사망함. ■ 가계도 金台用(시조) 工曺典書 金㻫 吏曹參判 金光遠(13대조) 吏文習讀官 高祖 金夢龍 曾祖 金常衡 祖 金瑗 父 金魯鉉 海南尹氏 尹商說의 女 金漢燮 金仁植 金鳳植 金鶴植 女 李斗林 濟州梁氏 梁相淑의 女 ■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헌종 4 1838 戊戌 道光 18 1 장흥 부산면에서 태어났다. 철종 13 1862 壬戌 同治 1 25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다. 고종 14 1877 丁丑 光緖 3 40 강진 月角山 大明洞에서 寒泉精舍를 지었다. 고종 16 1879 己卯 光緖 5 42 봄 秋陽契의 일로 영암 道岬寺에서 講會를 열었다. 고종 19 1882 壬午 光緖 8 45 차남 鳳植을 智島의 金平默에게 보내 수학하게 하였다. 고종 20 1883 癸未 光緖 9 46 스승 任憲晦의 문집 간행일로 인해 高敞에서 지냈다. 고종 21 1884 甲申 光緖 10 47 「衣制辨」을 짓고 洋夷가 세상에 날뛰는 것을 한탄했다. 고종 22 1885 乙酉 光緖 11 48 차남 鳳植이 사망했다. 고종 31 1894 甲午 光緖 20 57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관군과 함께 강진을 戍城하다 사망했다. ◎ 강진군 朱雀山에 장사지내고, 장흥 興龍洞에 設壇하여 중암과 함께 제향했다. 1910 庚戌 철향되었다. 1912 壬子 金永根이 비명을 써서 묘소에 비석을 세웠다. ■ 생애 『오남선생문집(五南先生文集)』은 김한섭(金漢燮 : 1838-1894)의 시문집이다. 13권 7책 목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김한섭의 자는 치용(致容)이고, 호는 오남(吾南), 본관은 영광(靈光)이다. 선계(先系)는 신라에서 나왔고, 시조는 고려 현종 때 평장사(平章事) 등을 역임한 김심언(金審言)의 후손으로서 고려 때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낸 김태용(金台用)이다.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냈던 휘 필(㻫)의 손자로 이문습독관(吏文習讀官)을 지냈으며, 정암(精菴) 조광조(趙光祖)의 문하로 기묘사화 때 안처겸(安處謙)의 옥사에 연루되어 해남에 유배되었던 김광원(金光遠)이 13대조이다. 고조의 휘는 몽룡(夢龍), 증조의 휘는 상형(常衡), 조부의 휘는 원(瑗)이다. 아버지의 휘는 노현(魯鉉)으로 심재(心齋) 송환기(宋煥箕)의 문인이고, 어머니는 해남윤씨(海南尹氏) 윤상열(尹商說)의 딸이다. 김한섭은 1838년(헌종 4년) 5월 23일 장흥 부산(夫山, 현 장흥군 부산면)에서 출생하였다. 타고난 자품이 순수하고 뛰어나 11세에 글을 짓기 시작했고, 18세에 주석가들의 득실을 논평한 「중용차의(中庸箚疑)」를 지으니 어른들이 너무 이르다고 금지하였다. 『상서(尙書)』를 배울 때 일 년의 날 수를 말한 「요전(堯典)」의 "기삼백육순유육일(朞三百六旬有六日)"을 배울 때 글방 선생이 모른다고 하자, 스스로 연구해 풀이하여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에게 나아가 배웠으나 이미 화서가 병중인 상태여서 물러나 그 문인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과 성재(星齋) 유중교(柳重敎)와 더불어 도의교(道義交)를 맺었다. 두 번째로 화서에게 찾아갔으나 갑자기 작고하여 그 유문(遺文)을 기록하여 돌아왔다. 이 후부터는 과거 공부를 버리고 오로지 도학에만 힘쓰면서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1862년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는데, 천성이 효성스러워서 삼년상을 치루는 동안 아침마다 반드시 묘소에 가서 곡을 하고 당시 상례를 치루는 예법이 크게 무너짐을 탄식하면서 "중문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예의 큰 예법이니, 이를 삼가지 않으면 다른 것은 볼 것도 없다[不入中門禮之大防也 此而不謹無足觀之]"고 하며 옛 예법을 지킬 것을 중요시하였다. 1877년 금릉 월각산 (月角山, 현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아래 대명동(大明洞)에 한천정사(寒泉精舍)를 짓고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1879년 봄에는 추양계(秋陽契)의 일로 영암 도갑사(道岬寺)에서 관내의 사우들과 모여 강회(講會)를 열었다. 1882년 봄에는 둘째 아들인 봉식(鳳植)을 지도(智島, 현 신안군 지도읍)의 김평묵에게 보내어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게 하였다. 1883년에는 스승인 임헌회의 문집을 간행하는 일로 인하여 고창 봉산(蜂山, 현 고창군 고수면 봉산리)에서 오랜 시간 보내게 되었다. 1884년 의복의 제도가 크게 변하자 심의(深衣)를 입고 지내면서 「의제변(衣制辨)을 짓고 양이(洋夷)가 세상에 날뛰는 것을 한탄했고 "근세벽양(近世闢洋)" 문자를 지어 학자들에게 "천지간에 이런 문자들이 없어서는 안된다[天地間 不可無此等文字]"고 했다. 후학들을 지도할 때에도 과거 공부를 배우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허락하지 않고 "과거 공부의 해로움이 사학(邪學)과 다를 것이 없으니, 온 세상이 긴 밤중이 된 것이 이것 때문이다.[科學之害 與邪學無別 擧世長夜職以此也]"라고 하였다. 1885년에는 둘째 아들 봉식이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진실로 통탄하며 "탁류속의 지주석이요, 어두운 거리에 촛불이라 어찌 평생 자부했던 마음을 저버리리오[濁流底柱昏衢燭 肯負平生自待心]"라고 시를 짓고, 또 「경시적도문(警示賊徒文)」을 지어 "너희 무리들은 하늘에 죄를 얻어 도망갈 곳이 없다. 내가 사는 데가 곧 수양산이니 죽어서 백이숙제(伯夷叔齊)를 따르게 되면 족하다.[爾徒獲罪於天 無所逃也 我之所居則首陽山也 死得從夷齊遊足矣]"고 썼다. 그 해에 동학무리들을 막기 위해 강진의 관군과 함께 수성(戍城)하다 사망하였다. 1894년 12월 7일 주작산(朱雀山, 현 강진군 신전면 수양리 주작산)에 장사지냈다. 그리고 같은 해에 오남의 옛 집인 장흥 흥룡동(興龍洞, 현 장흥군 부산면 내안리)에 설단(設壇)하여 중암과 함께 제향하였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 때 철향되니, 장례를 모신지 19년 만에 문인인 경회(景晦) 김영근(金永根)에 의해 명을 지어 묘소에 비석을 세웠다. 부인은 제주양씨(濟州梁氏) 양상숙(梁相淑)의 딸로 3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인식(麟植), 봉식(鳳植), 학식(學植)이고 딸은 이두림(李斗林)에게 출가했다. ■ 구성과 내용 『오남선생문집(吾南先生文集)』은 서(序)와 발(跋)이 없어 자세한 간행시기와 간행인 간행경위 등을 알 수 없다. 국립중앙도서관, 전남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있다. 13권 7책 목활자본이다. 1권에는 시(詩) 119편이 실려 있고, 2권에는 상량문(上樑文) 3편, 명(銘) 6편, 잠(箴) 3편 기(記) 5편이 실려 있고, 3권에는 서(序) 5편, 발(跋) 5편, 행장(行狀) 7편, 묘갈명(墓碣銘) 1편이 수록되어 있고, 4권에는 전(傳) 3편, 찬(贊) 2편, 제문(祭文) 15편, 5권부터 7권까지는 서(書) 98편, 8권에는 서증(書贈), 9편, 잡저 8편이 실려 있고, 9권부터 13권까지는 잡저(雜著) 37편이 수록되어있다. 1권은 시집인데 부(賦)가 5편이고 금조(琴操) 1편, 고시(古詩) 8편, 오언고시(五言古詩) 8편, 칠언고시(七言古詩) 7편, 오언절구(五言絶句) 32편, 칠언절구(七言絶句) 21편, 오언율시(五言律詩) 12편, 칠언율시(七言律詩) 25편이 수록되어있다. 부 중에는 주희의 「감춘부(感春賦)」에 차운한 「근차주자감춘부(謹次朱子感春賦)」, 성리학의 중요 명제중 하나인 이일분수론(理一分殊論)을 주제로 한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이일분수부(理一分殊賦)」를 차운한 「근차율곡선생이일분수부(謹次栗谷先生理一分殊賦)」 등이 있다. 시는 대체로 「총국(叢菊)」 , 「설중송(雪中松)」, 「영원중잡훼(詠園中雜卉)」, 「옥매화(玉梅花)」, 「산거(山居)」, 「춘우(春雨)」, 「산중즉사(山中卽事)」 와 같은 산수영물을 노래한 시들이 다수이며, 「근차중암김장무안야교운(謹次重菴金丈務安野橋韻)」, 「증김익경(贈金翼卿)」 등과 같은 동문이나 후학들에게 주거나 차운한 시들도 많다. 이외에도 「등월출산(登月出山)」, 「등무등산(登無等山)」, 「여대언등주작산(與大彦登朱雀山)」과 같은 주변의 명산을 기행한 기행시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 나주와 강진이 동학군을 막아냈던 것을 쓴 고시 「금릉의사(金陵義事)」와 「금성행(錦城行)」도 있다. 또한 왜구와 양적이 인근 연해에 자주 출몰하며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것을 걱정하는 우국의 감정이 담긴 「근문양적거흥양삼도인왕래연해 이심형세도박우강진남포 기의소재 효연가지 오인불행 당차조석 험화불가무정 견성인소위독신호학수사선도 차성제일의체 인송선사고산선생병인팔월 서시오당절구설 여서사제생경보기운 (近聞洋賊據興陽三島因往來沿海 以審形勢到泊于康津南浦 其意所在 曉然可知 吾人不幸 當此朝夕 險禍不可無定 見聖人所謂篤信好學守死善道 此誠第一義諦 因誦先師鼓山先生丙寅八月 書示吾黨絶句說 與書社諸生敬步其韻)」, 「문왜양추유력람연해제읍(聞倭洋醜類歷覽沿海諸邑)」 등도 있다. 2권에는 상량문(上樑文) 2편, 명(銘) 6편, 잠(箴) 3편 기(記) 5편이 실려 있다. 상량문은 「대명동사당상량문(大明洞祠堂上樑文)」, 「봉양정사상량문(鳳陽精舍上樑文)」으로 모두 1877년 이후 강진 대명동에서 우거하며 후학들을 길렀던 공간에 지었던 건물들의 상량문이다. 잠은 「주일재잠(主一齋箴)」, 「지척잠(紙尺箴)」, 「독서잠(讀書箴)」 3편이며 기는 총 5편으로 대체로 대명동에서 후학들을 길렀던 한천정사에 대한 기문인 「한천정사기(寒泉精舍記)」, 문인인 경회 김영근의 서실에 쓴 기문인 「경회당기(景晦堂記)」 등이 있다. 3권에는 서(序) 5편, 발(跋) 5편, 행장(行狀) 7편, 묘지명(墓誌銘) 1편이 수록되어 있다. 서는 「존양신론서(尊攘新論序)」, 「강릉유씨종회안서(江陵劉氏宗會案序)」, 「백우후육심이연행향음례서(白虞候六十宴行鄕飮禮序)」 등 5편, 행장은 선고(先考) 휘 원(瑗)의 행장인 「선고삼산부군가장(先考三山府君家狀)」과 둘째 아들 봉식(鳳植)의 행장인 「차자봉식행록(次子鳳植行錄)」, 「차자봉식정종언행(次子鳳植正終言行)」을 비롯해 7편이 있다. 묘갈명은 괴은(槐蔭) 문사구(文思九)의 묘지명인 「괴은문공묘지명(槐蔭文公墓誌銘)」 1편이 있다. 4권은 전(傳) 3편, 찬(贊) 2편, 제문(祭文) 15편이 수록되어 있다. 전인 「효자안공전(孝子安公傳)」, 「열부유인이씨전(烈婦孺人李氏傳)」, 「김경독재전(金耕讀齋傳)」 3편은 모두 효자와 열부에 대한 것이다. 찬은 화서 이항로 선생 화상(畫像) 대한 찬인 「선사화서이선생화상찬(先師華西李先生畫像贊)」과 제갈공명, 황패(黃霸), 육수부(陸秀夫), 윤곡(尹穀) 4명의 일화에 대한 찬인 「사현찬(四賢贊)」 2편이다. 제문은 스승 화서의 제문인 「제화서선생문(祭華西先生文)」, 「재제화서선생문(再祭華西先生文)」, 역시 스승인 고산의 제문인 「제고산선생문(祭鼓山先生文)」, 「재제고산선생문(再祭鼓山先生文)」, 스승 노사의 제문인 「제노사기선생문(祭蘆沙奇先生文)」, 동문인 중암의 제문인「제중암선생문(祭重菴先生文)」을 비롯하여 총 15편이 있다. 5권부터 7권까지는 서(書) 98편이 있다. 5권에는 스승인 화서, 고산, 노사에게 올린 서간인 「상화서선생(上華西先生)」「상고산선생(上鼓山先生)」, 「상노사선생(上蘆沙先生)」과 동문인 중암에게 보낸 서간인 「상중암(上重菴)」 4편이 있고, 6권에는 사우 및 동문들에게 보낸 서간이 29편이 있으며, 7권에도 역시 사우와 족제 등에게 보낸 서간이 14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 「답이복여(答李服汝)」에서는 성과 의(意), 정(情)과의 관계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성(性)은 심(心) 중에 갖추어진 이(理)이자 아직 발현하지 않은 것이고, 정은 성(性)의 발현이요 심(心)의 쓰임이다. 의(意)는 정(情)에 묶여 계교상량(計校商量)하는 것이다[性者心中所具之理而未發者 情者性之發而心之用也 意者緣情計校商量者也]"라고 하여 서로의 관계를 정립하여 설명하고 있고, 간재 전우에게 보낸 「여전자명(與田子明)」에서는 간재의 성위심재설(性爲心宰說)을 반박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외의 서간에서도 경학이나 성리학적인 내용이 많아서 오남의 철학적인 견해를 엿볼 수 있다. 8권에는 「지지설서증한천재제생(知止說書贈寒泉齋諸生)」, 「서증문충렬(書贈文忠烈)」 등 서증(書贈) 9편, 잡저 8편이 실려 있다. 잡저는 이후 9권부터 13권까지 29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9권에는 「경리관견(經理管見)」1편, 10권에는 「삼극도설(三極圖說)」, 「형이상하도변설(形而上下圖辨說)」 등 14편, 11권에는 「일감문답(一鑑問答)」 1편, 12권에는 「산중촉화(山中燭話)」, 「심자신지소주설(心者身之所主說)」 등 7편, 13권에는 「벽사설(闢邪說)」, 「통화변답(通貨辨答)」, 「농정신서서주변(農政新書序條辨)」 등 6편이 수록되어 있다. 대체로 후학의 교육에 관련된 내용이나 태극설(太極說)이나 성리설(性理說)과 같은 성리학적 견해를 논설한 것들이 많다. 또 「벽사설(闢邪說)」, 「통화변답(通貨辨答)」, 「농정신서서조변(農政新書序條辨)」처럼 정책적 견해를 논설한 것도 있다. 세부목차 卷 1 賦 : 謹次朱子感春賦, 謹次栗谷先生理一分殊賦, 述懷賦, 肅艾賦, 菊花賦 琴操 : 明洞琴操 古詩 : 民之初生十四章, 大田三章, 南山四章, 採薇七章, 淸湖三章, 小兒歌習, 經業要辭, 金陵義辭 五言古詩 : 續遠遊, 甲申三月十九日, 次紫極官韻, 新元吟贈小學諸童子, 偶吟示齋中諸生, 李兄白受(錫采)挽, 憶亡友文亮叔(基潁), 贈別崔秀才采佑 七言古詩 : 次李无悶(喜冕)大明洞行, 大明紅, 題義僧靈圭碑, 題丁兄舜和(炫)鳳岡千洙堂, 自警吟, 落齒嘆, 錦城行 五言絶句 : 山居(四首), 春日偶吟, 遣懷, 花樹亭次諸生韻, 叢菊, 雪中松, 遊修仁山謹次族祖放湖公(喜祖)韻, 除草(二首), 玉梅花, 登月出山(二首), 省坡州先墓, 明悶蒼碧亭謹次鼓山任先生韻(二首), 用韋蘇州韻詠夜, 聞書院毁薇之報, 詠園中雜卉, 大明洞山泉精舍雜詠(十二首), 大明洞林卉雜詠(二十六首), 明洞會事, 贈新谷主人(金璣烈), 山中卽事(二首), 春雨, 題張慶先畵卷, 謹次重菴金丈務安野橋韻, 謹次重菴丈惠贈大明洞韻(二首), 白虞侯(基虎)挽(十首), 上天吟(五首), 寒泉齋與諸生和吟(三首), 過長水洞悼亡友宣敬集(翼欽), 偶吟, 立春雨後偶吟(二首), 無題, 送金德文(永奎)兼寄韓守奉官敬熙(昌壽) 七言絶句 : 錄先考三山府君家狀志感, 石實道中作, 過麻貴坪, 仲秋月夜聞長兒麟植誦濂洛風雅, 和族弟新齋(漢驥), 見童子雙廊喜感而吟, 智海別重庵文丈, 姜處士(禹永)挽(四首), 贈別黃萄鍾五, 壁上揭日月二字, 近聞洋賊據興陽三島因往來沿海以審形勢到泊于康津南浦其意所在曉然可知吾人不幸富此朝夕險禍不可無定見聖人所謂篤信好學守死善道此誠第一義諦因誦先師鼓山先生丙寅八月書示吾黨絶句說與書社諸生敬步其韻(二首), 書社諸生俱讀孟子喜成一絶(時殷景乃範子見聖則文五同處), 草堂卽事, 鳳陽精舍雜詠(五首), 姑堊鳥(二首), 送大彦(魏琫植)乃晦(金永根)之雲潭, 贈任萄吾東(二首), 次重菴遺塚韻贈羅聖敎(有英三首), 題鳳岡精舍, 山家獨作, 和河巳千(正秀)之字韻 五言律詩 : 偶吟, 書示諸生, 己丑立春感吟, 壬辰立春翌日吟, 贈心漁堂主人(金道淳), 贈魏大彦, 贈丁文玉(璨壽), 贈金翼卿(世輔), 庚寅陽月哉生明入處鳳陽精舍, 中元憶重菴先生, 仲秋上弦大彦來言所懷, 剝月望朝書示吳禮中(時榮)丁瑩汝(玟壽)金直卿(在植)李祥元(思圈) 七言律詩 : 己卯暮春興省內諸賢會講道岬寺到大明洞和吟, 集古人詩句示諸生, 癸未至月謹次朱子寞灘韻, 謹次重翁贈別正三(金台漢)益進(韓學淵)韻, 到笛坪謹次南坡李丈(僖錫)書示韻, 奉和无悶李兄用其韻, 步錦坡李兄(秉燮)寄示韻, 遊舍人亭敬次原韻, 花樹亭次諸丈韻, 靜潭齋次主翁聞倭洋魏類歷覽沿海諸邑, 林德洪(炳鏞)來訪, 致圖(馬鍾河)讀心經汝仁(金世鉉)讀近思錄文萄忠烈讀論(高彦在)韻, 次崔氏(奎文)龍湖亭韻, 寄題心漁堂, 寄吳大集(成模), 登無等山, 贈別姨弟羅賢守, 語及諸隣兒讀小學作此志喜, 新元逢朗西諸友, 病中强吟, 輿大彦登朱雀山, 知足翁嘉顯(尹樂浩)誦退溪呈尹安東詩因命和之謹忘拙構呈 卷 2 上樑文 : 大明洞祠堂上樑文, 鳳陽精舍上樑文 銘 : 約軒銘, 隧齋銘, 止一齋銘, 持敬齋銘, 母贊室銘, 復軒銘 箴 : 主一齋箴, 紙尺箴, 讀書箴 記 : 寒泉精舍實記, 首陽精舍記, 敬齋箴板重刊實記, 弘毅齋記, 景晦堂記 卷 3 序 : 尊攘新編序, 送陳子平(禹錫)歸皇朝村序, 江陵劉氏宗會案序, 寶巖坊約序, 白虞侯六十一宴行鄕飮禮序 跋 : 敬題 永曆大統曆後, 敬題朱子五倫筆帖後, 敬畏箴跋, 書晩悔集後, 題河君巳千自敍賦後 行狀 : 先考三山府君家狀, 再從叔仁山公(德鉉)行狀, 刑曹參議金公(相勉)行狀, 學生金公(鯨錫)行狀, 次子鳳植狀錄, 次子鳳植正終言行, 十一代祖月峯府君謚狀本草 墓誌銘 : 槐蔭文公(思九)墓誌銘(幷序). 卷 4 傳 : 孝子安公(世龍)傳, 烈婦孺人李氏傳, 金耕讀齋(日淳)傳 贊 : 先師華西李先生畵像贊, 四賢贊 祭文 : 祭華西先生文, 再祭華西先生文, 祭鼓山先生文, 再祭鼓山先生文, 祭蘆沙奇先生文祭重菴先生文, 祭族大父同知公(瑾)文, 祭齋鄭公(在弼)文, 祭茶欄魏兄(榮馥)文, 祭梧軒丁公(炫)文, 祭族弟新齋文, 祭剛軒丁君(炳序)文, 祭亡次子鳳植文, 祭亡長子婦丁氏文, 祭族孫鍾煥文 卷 5 書 : 上華西先生, 上鼓山先生(三), 上蘆沙先生, 上重菴(十三) 卷 6 書 : 上李黃溪(璞), 上李朗海(烋二), 與柳穉程(重敎四), 與崔參判(益鉉與二答一), 與宋祭酒(秉璿二), 答鄭國彦(在弼), 與魏芳瑞(榮馥), 答金子元(勳), 與洪汝章(大憲與一答一), 答李服汝(喜冕五), 答李敬述(孝植), 與田子明, 與洪思伯(任龜與一答二), 答柳聖存(基一), 與奇會一(宇萬三), 與宋燦五(鍾雲), 答朴應瑞(在麟), 與李致道(秉龜), 答族弟民受(永澤), 答宋致承(鎭鳳答一與一), 答金景三(在珪), 答崔德汝(潤燦), 答李進夏(三遠), 答金亨善(泰瑀), 答丁采文(炳序), 答尹士奎(柱璨), 答金贊炯(水), 答玄士明(在昇二), 答朴子善(熙元) 卷 7 書 : 答族弟台漢, 答魏衡良(三), 答郭洪翊趙宗九, 答魏琫植, 答族弟漢文(三), 答金永根(三), 答吳成模, 答崔根完(二), 答金世輔, 答白永昇(答一與一), 答金世鉉, 答黃明奎, 與天台山講會諸生, 寄長兒麟植 卷 8 書贈 : 知止說書贈寒泉齋諸生, 書贈郭昌欽, 讀禮說書贈朴秉洙, 書贈吳成模, 學顔說書贈韓學淵, 陽復說書贈黃明奎, 讀論語說書贈崔采佑, 書贈羅有英, 書贈文忠烈 雜著 : 論天台講說, 寒泉齋夜講略辨, 寒泉齋約規, 寒泉精舍學規, 小學箚疑, 處巳常則, 寶巖坊契約, 小齋志喜 卷 9 雜著 : 經理管見 卷 10 雜著 : 三極圖說, 形而上下圖辨說, 朞圖解說, 日月會朔圖辨說, 土圭地中圖辨說, 律呂相生圖辨說, 卦變改正圖說, 心統性情圖辨說, 人物性同異圖辨說, 費隱圖辨說, 明德圖辨說, 大學全圖後說, 聖賢闢邪圖說, 聖賢傳敬圖說 卷 11 雜著 : 一鑑問答 卷 12 雜著 : 山中燭話, 心說集解上, 心說集解下, 心者身之所主說, 儒釋心學不同辨, 衣制辨答, 衣制辨說 卷 13 雜著 : 寅字說, 闢邪說, 通貨辨答, 異端總辨, 農政新書序條辨, 警示賊徒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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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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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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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부

大明紅 癸未仲秋。余往公山。見盧斯文碩鉉家有異卉。曰大明紅。得種子數十枚而歸。翌年春。播植於大明洞庭畔。日夕漑根。憐愛不已者。以其名爲中華舊物也。欲爲詩見情。而然思拙未果。丁亥維夏。族弟正三與韓君益進。往坡山雲潭柯亭蓬坪而歸。謄示重翁所詠大明梅。引余長吟數遍。鳴咽淚下。詩之感人。固如是矣。因用其韻效其體。爲詠余家大明紅。語雖未成。其情則亦戚矣。後之覽者。庶有以知余屋烏草蛛之心緖否。汕南聞有大明梅。又玆大明紅何處來。粤在太歲涒灘春。壽皇殉社五甲回大明遺民求遺種。大明洞裏勤播栽。但道風霜搖落日。與爾朝暮共徘徊。大明山高四圍虛。中有大明遺民數間屋架。尊閣古人書。大明洞石澗。淙淙瀉急湍。傍有大明遺民半畝田地。高築飮禮壇。又有紫陽夫子影堂一間枕東岡。敬齋箴眞本刊板藏。噫吁嚱神州。沈陸忍何言。大老貂裘思對揚。如何中道哭弓劍。萬東流水轉感傷。伊今我生將安適。海外妖氛晻東國。矢將餘日臥林樊。一步不欲出。大明村寒泉混混可樂飢。石塢重重鎖洞門。頭之所戴大明冠。身之所衣大明服。手之所閱大明曆。讀書來者大明客。草木猶帶大明香。日月常臨大明光。此生生爲大明人。死亦盍爲大明神。一部麟經咿吾地。縱有西物敢何售。大明紅大明紅。世間那無相似臭。比聞重菴子。白雲深處誅茅始。大明梅調來盈耳。日夕謳吟且慰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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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二十八日 새벽에 출발하여 보성 대곡(大谷)의 이 석사(李碩士), 율촌(栗村)의 종인(宗人)과 동행하여 왈천(曰川)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부내(府內)의 서문(西門) 밖 전성철(全聖哲) 집에 이르자 진사 정여흠(丁汝欠)이 먼저 와서 이 집에 머물고 있었다. 두어 시간 이야기를 나누다가 정여흠이 먼저 떠났다. 나는 공서와 북문 밖의 종인(宗人) 송민수(宋民洙) 집을 찾아가 제각통문(祭閣通文)을 전하고 유숙한 것은 영문(營門)의 《사원록(祠院錄)》에 재록하기 위해서였다. 서재(書齋)에서 묵고 있는데, 주인 송약수(宋若洙)의 백씨(伯氏)가 백대(百代)의 정의(情誼)로 반기며 우리 두 사람과 함께 술집에 직접 가서 술을 사 마시다가 주객이 모두 취해서 돌아왔으니 그 마음이 매우 살뜰하였다. 曉發與寶城 大谷 李碩士及栗村宗人同行, 抵曰川朝飯。 至府內 西門外全聖哲家, 丁進士 汝欠先來, 而留在此家, 而數時談話, 汝欠則發行, 而余則與公瑞, 訪于北門外宗人民洙家, 傳祭閣通文留宿, 欲爲營門《祠院錄》中載錄之意也。 留宿書齋, 而主人若洙之伯氏, 而忻然有百代之誼, 偕吾二人親往酒家, 沽酒相飮, 主客醉而歸, 其意最爲慰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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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晦日 새벽에 출발하여 소로(小路)로 들어가자 임실(任室) 방동(房洞)의 동종(同宗)인 송염(宋濂) 집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길을 나서려고 하니 주인이 한사코 만류하였다. 하늘에서도 가랑비가 내려 그 집에 그대로 머물렀는데, 통문 1건을 베껴서 맡겨 두고 차차로 전해 달라는 부탁의 말을 하였다. ]曉發入小路, 抵任實 房洞同宗濂家朝飯。 欲爲發程, 則主人固挽。 天又細雨, 仍留其家, 而通文一件謄出留置, 次次飛傳之意言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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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二十二日 ○여독(旅毒) 때문에 일찍 출발하지 못했다. 오후에 차동(車洞) 민 석사(閔碩士)에게 갔으나 날이 밝을 무렵 마침 고향으로 떠나서 그 아들만 잠시 만나 보았다. 아래 사랑 주인(舍廊主人)인 치항(致恒)이 마침 있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에 서소문(西小門)으로 들어갔다. 정동(貞洞)의 석사 이희(李) 집에 갔으나 주인이 부재중이어서 만나지 못하고, 찾아온 율지와 확교(確橋)14)에 들어가 진사 유영도(柳榮度)의 집에 방문하였더니, 어서각동(御書閣洞)으로 이사하였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의 집으로 찾아가 달부(達夫)씨의 서간(書簡)을 전달하고 주인집으로 돌아왔다. ○以路憊不得早發。 午後往車洞 閔碩士, 被明適作鄕行, 只有其子暫見。 往下舍廊主人致恒果在, 暫話後。 入西小門。 往貞洞 李碩士 家, 主人不在故不見, 而來訪與聿之入確橋, 訪柳進士 榮度家, 則移居于御書閣洞云, 故尋往其家, 傳達夫氏書簡, 還來主人家。 확교(確橋) 서울시 중구 서소문동과 신창동(새창골) 북쪽에 있던 다리이다. 1966년 발간된 《한국지명총람》에 의하면 이 고을에 학다리가 있어 마을 이름이 학교동(鶴橋洞)이 되었다고 하며, 일명 확교(確橋)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조선 시대에는 이 일대를 학다리골이라 하였는데, 성리학자 퇴계 이황이 살았던 곳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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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二十三日 ○아침을 먹은 뒤에 동행과 서소문(西小門)으로 들어가 확교(確橋)에 갔다. 나는 송 판서(宋判書)의 집에 들러 판서(判書) 부자(父子)를 만나고 종각 쪽으로 돌아오니 동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어 대묘동(大廟洞)으로 가서 보성(寶城)의 종인(宗人) 귀환(龜煥)을 방문하였으나 마침 부재중이어서 통지하고, 지난해에 머물렀던 파정동(波井洞)의 기보(基甫) 집에 오니 주인은 일단 무고하였다. 한참 있으니 귀환이 마침 나와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올라온 연유를 이야기하였다. 그 먼저 서울에 도착하여 일의 기미를 살펴보았는데, 서울의 여론이 혹은 가하고 혹은 불가하다는 논의가 있으니 끝에 가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길로 술집으로 나와 술을 사 마시다가 나는 남동(南洞)에 가서 잠시 마전(麻田) 김민계(金民桂)를 만나고 주인집으로 왔다. ○食後與同行入西小門往礭橋。 余則入宋判書家, 見判書父子, 還來于鍾閣邊, 則同行留待矣。 仍往大廟洞, 訪寶城宗人龜煥, 適不在故通奇, 而來于前年所住波井洞 基甫家, 主人姑無故矣。 移時龜煥果爲出來, 與之相話, 仍說上來之由, 則渠則先到京中, 探知事機, 則京中物議, 或可或不可之論, 未知末稍之如何云。 仍爲出來酒家, 沽酒相飲, 余則往南洞, 暫見金麻田 民桂, 而來主人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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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十八日 ○출발하여 주릿재11)를 넘어 추동점(楸洞店)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저녁에 사교(四橋)에 이르러 묵었다. ○發程越周老峙, 抵楸洞店中火。 暮抵四橋留宿。 주릿재 한자로 '주로치(周老峙)'라고도 한다. 벌교읍 추동리 대판이 마을 서쪽에서 존제산(尊帝山)을 넘어 율어면 유신리에 이어지는 고개이다. 긴 밧줄을 풀어놓은 것처럼 구불구불한 모양새라고 하여 주릿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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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初十日 ○아침 전 관정동으로 왔다. 아침을 먹고 용동으로 갔다. 그길로 북치로 가서 정 생원 병문안을 하고, 도로 개간소로 왔다. 오전에 사헌(士憲)과 신성칙(申聖則)이 들어왔다. 그길로 함께 영대 집으로 와서 머물렀다. 그길로 낙동으로 가 참판 이광문을 만나, 그의 사촌 이광헌(李光憲)의 상을 조문하고,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아우 이광정이 있는지를 물으니 마침 출타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상갓집으로 내려와 곧바로 궤연(几筵)116)에 들어가 곡을 하고 절을 하고 나서 사랑에 올라가 상인(喪人)에게 조의를 표하고 왔다. ○朝前, 來冠井洞。 朝飯往龍洞。 仍往北峙, 問丁生員病, 還來刊所。 午前士憲及申聖則入來。 仍爲偕來永大家留。 仍往洛洞, 見李參判光文, 吊其從氏光憲喪, 移時談話。 問其弟氏光貞有無, 則適出他云。 故下來喪家, 直入几筵哭拜後, 入上舍廊, 與喪人致吊而來。 궤연(几筵) 죽은 사람의 영궤(靈几)와 주(神主)를 모셔두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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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十五日 아침을 먹기 전에 남계(南溪) 정내성(丁乃成)이 와서 만났는데, 성에 들어온 뒤로 처음 보게 되니 매우 기뻤다. 이어 같이 아침을 먹고 나서 정내성(丁乃成), 명생(明生, 명두엽(明斗燁))과 전의(典衣) 방동(房洞) 정내성의 주인과 함께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대묘동(大廟洞)의 공서(公瑞)가 머물고 있는 사관(舍館)에 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공서와 예조 직방(直房)에 같이 가자고 약속하였는데, 공서가 사랑(舍廊)에 들어갔다가 끝내 나오지 않았다. 한참을 몹시 기다리다가 홀로 직방(直房)에 가서 《사원록》을 꺼내어 보고 이어 베껴 썼다. 또 정장(呈狀, 관청에 내는 소장))하는 일을 논하였더니, 들어가는 것이 없지 않으니 미리 준비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으므로 나와서 오는 길에 정초지(正草紙)70)를 사가지고 왔다. 食前南溪 丁乃成來見, 入城後初見, 忻喜忻喜。 仍與朝飯, 與乃成及明生同典衣房洞 乃成主人暫話。 往大廟洞 公瑞舍館暫話, 與公瑞同往禮曹 直房之意相約, 而公瑞入舍廊, 終不出來。 苦待不已, 獨往直房, 出見《祠院錄》, 仍爲謄書。 又論呈狀事, 則不無所入, 預備爲好云, 故出來, 來路買正草而來。 정초지(正草紙) 과거 시험에 사용하던 시지(試紙), 즉 과지(科紙)를 말한다. 알성시ㆍ정시 등 친림시 시지로 사용되었는데, 도련지보다는 지질이 떨어지는 초주지(草注紙)를 사용하였다. 응시자들은 시험보기 이틀 전에 응시자로 등록하는 녹명(錄名)의 절차를 밟았는데, 미리 준비한 시지와 사조(四祖)의 신원을 기록한 녹명단자를 함께 제출하면 녹명을 담당한 관원은 인적 사항을 확인하고 녹명책에 이름을 올린 후 시지의 봉함부분에 확인 도장을 찍어 주면 이 시지를 들고 시험장에 들어가야 정식 응시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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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十六日 아침을 먹은 뒤에 명생(明生)과 과장에 들어가기 위하여 서소문(西小門) 밖 이희(李) 집으로 들어가 주인에게 정초지(正草紙)에 타인(打印)하게 하였다. 이어 대묘동(大廟洞) 보성 접주인(接主人, 주접(住接)하던 집의 주인) 집으로 갔다. 오후 비가 내리는 바람에 반촌(泮村)에 들어가지 못하고 보성 접주인 집에서 그대로 머물렀다. 食後與明生入場次, 入去西小門外李家, 使主人正草打印。 仍往大廟洞 寶城接主人家。 午後雨所戱, 不得入泮村, 仍留寶城接主人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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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十六日 ○새벽에 출발하여 원동(院洞)의 이중규(李重奎) 집에 들어가니, 이우(李友)가 마침 다른 곳으로 나가고, 그의 부친 상엽(象燁) 씨가 있어서 아침을 먹었다. 곧바로 출발하여 사미정(四美亭)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장수동(長壽洞)으로 가려고 귀암(龜岩) 마을 어귀에 이르러 소로(小路)에 들어갔다. 갈용치(渴龍峙) 강이백(姜利伯)의 집에 들렀더니, 강생(姜生)이 마침 출타하였는데 날도 저물어 어쩔 수 없이 머물렀다. 밤에 비가 내렸다. ○曉發入院洞 李重奎家, 則李友適出他, 其大人象燁氏在, 仍爲朝飯。 卽發抵四美亭中火, 欲向長壽洞, 至龜岩村前入小路。 入渴龍峙 姜利伯家, 則姜生適出他, 而日力且暮, 不得已留。 夜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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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十五日 ○심형의 병이 차도가 없었다. 나는 오서 객과 같이 약방으로 가서 병을 말하고 약을 지어 보냈다. 나는 무열 씨와 함께 대묘동(大廟洞)43)의 공서(公瑞)와 이지문(李志文)이 머무는 곳에 가서 물으니 지난달에 모두 내려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저물녘을 틈타 주인집으로 돌아오니 심형이 약을 복용하고, 그대로 누워서 끙끙 앓고 있어 몹시 걱정이었다. ○心泂之病不差。 余與烏栖客往藥房, 論病製藥以送。 余與武說氏往大廟洞公瑞及李志文所住處問之, 則去月皆下去云。 故乘暮還來主人家, 則心泂服藥, 仍臥吟病, 悶悶。 대묘동(大廟洞) 서울 종로구 훈정동ㆍ묘동ㆍ봉익동ㆍ종로3가ㆍ종로4가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대묘인 종묘가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대묫골ㆍ대뭇골ㆍ대묘동ㆍ묘동'이라고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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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十七日 ○무열 씨와 함께 야현(冶峴)의 족보 간행소로 가니 만재(晩載)와 지극(持棘)과 나이 어린 일가들이 모두 있었다. 흥양 종파의 단자(單子, 명단)가 이제 겨우 올라왔다고 크게 책망하였다.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나와 주인집으로 오니, 심형의 병이 점차 차도가 있어 무척 다행이었다. ○與武說氏往冶峴譜所, 則晩載及持棘與年少諸宗皆在。 以興陽派單子, 今才上來之意, 大端致責。 而移時談話出來主人家, 則心泂之病漸差, 可幸可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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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十六日 ○내기가 당두(唐頭)의 김모(金某) 집으로 갔다. 바로 그의 처가였다. 내일 여기서 만나기로 하고 갔다. 여러 날 타관에서 고생한 나머지 비록 하룻밤 떨어져 있는데도 서운하고 허전한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乃記往唐頭金某家。 卽其妻家也。 明日來會此處而去矣。 數日勞苦他官之餘, 雖爲一夜之離, 悵缺難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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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十七日 ○내기가 당두에서 내려왔다. 노량(露梁)의 충렬사(忠烈祠)를 보려고 주인 김종순(金宗順)과 동행하여 출발하였다. 선교(船橋)를 지나 세진(細津) 앞에 이르러, 내기가 그 처남 김방영(金邦營)을 만나려고 세진으로 들어갔다. 일행은 마을 앞 주막에서 조금 기다렸다가 곧바로 나왔다. 김방영이 광양(光陽) 땅에 간 바람에 만나지 못하고 왔다며 그길로 출발하였다. 저물녘 노량 나룻가 객점에 이르렀다. 40리를 갔다. ○乃記自唐頭下來。 欲見露梁忠烈祠, 與主人金宗順同行發程。 歷船橋, 抵細津前, 乃記欲見其妻男金邦營, 入去細津。 同行則稍待於村前酒幕矣, 卽出來。 而邦營出去光陽地, 不見而來, 仍爲登程。 暮抵露梁津頭店留宿。 行四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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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十二日 ○몹시 추웠다. 재회(齋會)에 많은 선비가 차례로 들어왔다. 윤경과 이찬이 도포를 입고 서원 마당에서 배알하고, 그길로 들어가 봉심하였다. 곧 목은(牧隱, 이색(李穡))을 수위(首位)에 두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ㆍ야은(冶隱, 길재(吉再))ㆍ황보 선생(황보인(皇甫仁))ㆍ김 선생(김종서(金宗瑞))ㆍ정 선생(정분(鄭苯))ㆍ성 선생(성삼문(成三問))ㆍ박 선생(박팽년(朴彭年))ㆍ하 선생(하위지(河緯地))ㆍ이 선생(이개(李塏))ㆍ유 선생(유성원(柳誠源))ㆍ유 선생(유응부(兪應孚))ㆍ계림 백(鷄林伯) 박 선생(朴先生)23)이 배향되어 있었다. 사우(祠宇)는 5량 5칸으로 새로 지어서 단청이 선명하였다. 강당은 4칸만 겨우 세워지고 아직 기와를 올리지 않았다. 동재와 서재가 모두 정갈하였다. 많은 선비가 해가 질 때까지 많이 모여들었다. ○極寒。 齋4)會多士次次入來矣。 與允卿及而贊着道袍, 參謁院庭, 仍入奉審。 則以牧隱首位, 圃隱、冶隱、皇甫先生、金先生、鄭先生、成先生、朴先生、河先生、李先生、柳先生、兪先生、鷄林伯朴先生則曲配。 而祠宇, 則五樑五間新造, 丹靑鮮明。 講堂, 則四間纔立, 而尙未盖瓦。 東、西齋, 皆精灑矣。 多士限日暮多會。 박 선생(朴先生) 신라 제19대 눌지왕 때의 충신 박제상(朴堤上)이다.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으로 눌지왕의 동생을 왜와 고구려에서 구하였다. 齋 저본에는 '齊'로 되어있으나 문맥에 따라 '齋'로 수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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題義僧靈圭碑 皇矣上帝降民彝。非賤而嗇貴而豊。日用當行無非道。厥綱大者孝與忠。若使大綱一或墜。國不爲國人不人。處常談論人皆善。當於變亂見僞眞。我朝定社五百年。變亂無如壬辰秋。島倭匪茹讎大邦。曉霧東洋萬艘浮。南樓太守首仗義。紫虹千丈上亘天。湖嶺重鎭俱畏伏。一無出力蹙鋒前。重峯先生文烈公。當時退耕沃川野。忠義激衆人爭赴。百方猜沮彼何者。僧將靈圭眞忠勇。同合義旅赴錦山。錦山兇賊多鏖殺。功業庶期濟艱難。官軍不繼天亦昏。矢盡弓折勢無何。可憐七百義士塚。悽雨寒風夜正多。僧將中丸到板峙。豈欲區區愛軀命。他日正爲再圖擧。快雪前羞誅梟獍。後追正急力斃死。萬古遺恨有誰知。人生到此慷慨多。立祠遺墟又題碑。碑面大字光烈烈。靈若有知聽我言。當時君若不變形。早從師門勤學論。不幸當此艱虞日。芳名豈在重峯後。雖然變形無足責。忠義出天眞不負。嗚呼江上十萬師。望風潛逃欲何爲。鼎鑊斧鉅猶不用。王章廢施正堪悲。人生常事是忠義。人生難處亦忠義。寒山一片堪可語。摩挲墨本我長喟。悠悠往事思如夢。斜陽沽酒唱短歌。悲來矣乎悲來矣。靈偃蹇兮白雲阿。鷄山之石立巖巖。錦江之水流湯湯。巖巖之石湯湯水。英風不滅吹無方。屋桶頹傾生秋草。無人擧觴酹靈魂。當年壯志久成灰。空留明月到黃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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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未至月。謹次朱子涒灘韻。 澗水鳴詠考槃。寤言永矢碩人寬。古經掃滅同髦弁。擧世昏濛倒屨冠。堪憂豺虎終貽害。忍說鷦鷯暫得安。明洞遺民嗚咽淚。明年太歲又涒灘。【毅皇帝殉社甲申。距今癸未二百四十年矣。凡爲大明遺民者。追念往昔。寧不痛泣。神州陸沈以來。腥穢彰聞。而見今西洋醜類。肆其淫邪。思有以易天下。惟吾誦法孔朱之人。誓不與此賊。俱生於覆載之間可也。晝宵所祈望漢祚中天而。掃氛翳逐鬼魅。俾此衣裳之族。永爲聖人之氓而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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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卯暮春。與省內諸賢。會講於道岬寺。到大明洞和吟。 一洞寬深日月明。憑誰說與自家情。人心恐入詖淫域。世事忍言翻覆枰。晨理田園擔利耟。夕餐蘭菊掇芳英。伊今賴有諸賢到。爲誦風泉慨我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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集古人詩句。示諸生。 天地中間有二人。仲尼元氣紫陽眞。斯文一脈千斤重。我輩三綱五典身。莫把空言來誤世。要將明德去新民。男兒欲了乾坤事。請看鄒軻答景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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