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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二十一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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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二十二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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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二十日 날이 밝아 올 무렵에 길을 나서 남원(南原) 읍내(邑內)에 이르러 요기하였다. 방천등(防川登)에 이르러 말에게 꼴을 먹이고 점심을 먹었다. 채찍을 재촉하여 석곡원(石谷院)에 이르자 날이 이미 저물어 천평(泉坪)에 들어가지 못하고 왔다. 그때 괴치(怪峙)에서 들으니 연아(年兒, 아들 석년(錫年))가 천평(泉坪)에 와서 기다리다가 다시 돌아갔다고 하였다. 이날 100리를 갔다. 質明登程, 至南原邑內療飢。 至防川登, 秣馬中火。 促鞭至石谷院, 日已暮矣, 不得入去泉坪而來。 時怪峙聞年兒來待泉坪矣, 還爲入去云耳。 是日行百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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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二十一日 동이 틀 무렵 길을 나서 무동정(茂東亭)에 이르러 말에게 꼴을 먹이고 점심을 먹었다. 벌원(伐院)에 이르러 잠시 요기를 하고 대강(大江)의 용전(龍田)에 이르니 이미 초경(初更)이었다. 즉시 도청(都廳)22)에게 기별을 보냈더니 모두 도착하였다. 밤에 비가 내렸다. 이날 100리 갔다. 平明登程, 至茂東亭, 秣馬中火。 至伐院暫爲療飢, 至大江龍田, 已初更矣。 卽爲通奇於都廳, 則俱爲來到矣。 夜雨。 是日行百里。 도청(都廳) 나라에 큰 예(禮)나 역사(役事)가 있을 때 도감(都監)을 설치하는데, 도감에 딸린 벼슬의 하나로 낭관(郞官)의 우두머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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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初六日 아침을 먹은 뒤에 청파(靑坡)에 가서 상원(尙源)을 만나 내일 출발하여 그의 집에서 유숙할 것이라는 생각을 자세히 전달하고 왔다. 저녁 무렵에 반촌(泮村)에서 사람을 보내 내일 직접 오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다시 머물렀는데, 내간(內間)에서 술과 안주를 성대하게 준비하여 전송해 주었다. 경욱(景旭) 또한 사적으로 술과 안주를 마련해 주었으므로 밤새도록 먹고 마셨다. 早飯後, 往靑坡見尙源, 備傳明日發行, 留宿渠家之意而來。 夕間自泮中送人, 明日直來爲言故更留, 而自內間盛備酒肴以餞。 景旭亦私備酒肴, 達夜飮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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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二十一日 아침 전에 이찬(而贊)이 오촌(鰲村)에게 부칠 서간(書簡)을 가지고 왔다. 형님들과 증아(曾兒)와 함께 유둔(油芚) 시장 근처로 가서 행장을 꾸리고 문중의 제종(諸宗)들과 작별한 다음 길을 나섰다. 낙안(樂安)의 평촌(平村) 주점에 이르러 묵었다. 20리를 갔다. 朝前而贊來付鰲村書簡。 與諸兄主及曾兒, 往油芚市邊治行, 與門中諸宗, 作別發程。 抵樂安平村酒店留宿。 行二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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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二十二日 새벽부터 아침까지 내리는 비 때문에 일찍 출발하지 못하였다가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섰다. 추동(楸洞) 주점 어귀에서 올라가는 한 행인을 만났는데, 어디로 가는지 물었더니, "전주(全州)로 갑니다."라고 답하였다. 이에 동행하여 무동정(舞童亭)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저녁에 낙수(洛水)에 이르러 묵었다. 동행한 사람은 장흥(長興) 벽사(碧沙)에 살고, 성명(姓名)은 김방업(金房業)인데, 용모가 단아하고 말은 신중하였으니 여행 중 고초를 겪는 상황에 충분히 위로가 되었다. 50리를 갔다. 自曉至朝, 爲雨所戱, 不得早發, 仍朝飯發程。 至楸洞酒店前, 逢一行人上去者, 問向何處, 則答曰: "向全州"云, 故仍爲同行, 抵舞童亭中火。 暮抵洛水留宿。 同行之人, 在於長興 碧沙, 而姓名金房業也。 容貌端雅, 言語愼重, 足慰行中苦楚之狀矣。 行五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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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初三日 일찍 출발하여 직산(稷山) 삼거리 주막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소사(素沙) 주막9)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말에게 꼴을 먹였다. 주막에 들어갈 때 보성(寶城)의 정영각(鄭永殼)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주막으로 들어갔는데, 점심을 먹고 길을 나섰을 때 도중에 다시 만났다. 그길로 동행하여 수원(水原) 오산(烏山) 시장 근처에 이르러서 묵었다. 100리를 갔다. 어제 신은(新恩) 주막에 머물고 있을 때, 말을 탄 두 명의 길손과 함께 위아래 방에 머물렀는데, 오늘도 동행하여 위아래 방에 머물렀다. 早發至稷山三街酒幕朝飯。 抵素沙酒幕, 中火秣馬。 入幕之際, 逢寶城 鄭永殼, 暫話入幕, 中火後發程, 中路更逢。 仍爲同行, 抵水原 烏山市邊留宿。 行百里。 昨日留新恩酒幕時, 與馬上二客, 留上下房, 亦爲同行, 留上下房。 소사(素沙) 주막 경기도 평택시 소사동 소사마을에 있었던 객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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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初七日 아침 전에 박종수(朴宗洙)가 와서 만나고 갔다. 오위장(五衛將)과 가교(柯橋)의 장우한(張羽漢)이 찾아왔기에 두 벗과 함께 아침을 먹었다. 장우한은 무과(武科) 초시(初試)에 참여하였으나 회시(會試)를 보러 갈 방도가 없어서 나를 보고 말을 청하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말을 내어 주었다. 아침을 먹은 뒤에 낙안(樂安)의 형님과 서소문(西小門)의 이 석사(李碩士) 집에 갔다가 잠시 쉬고 있는데, 안채에서 전하는 말에, 옛날을 생각해 보노라니 슬픈 마음을 견딜 수 없다고 하였다. 주인과 서소문(西小門) 안의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시고 정 진사(丁進士)의 사관(舍館)에 가서 잠시 쉬었다가 오후에 주인집에 돌아왔다. 朝前朴宗洙來見而去。 五衛將與柯橋 張羽漢來見, 兩友仍朝飯。 張也參武科初試, 而見會試之道無路, 故見我請馬匹, 故不得已許給。 食後與樂安兄主, 往西小門 李碩士家暫憩, 自內間有傳語, 推念疇昔, 不勝悲懷。 與主人入西小門內酒家, 沽酒以飮, 往丁進士舍館暫憩, 午後出來主人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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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初四日 백건(伯健), 연로(蓮老)와 함께 동행하여 걸어가다가 창동(倉洞)에 이르러 헤어졌다. 나는 곧바로 명례동(明禮洞)으로 향하여 이상주(李商州)와 상중(喪中)인 도사(都事) 광헌(光憲)을 조문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돌아오는 길에 고동(雇洞)에 들어가 이 승지(李承旨)의 아들 선달(先達)을 조문하고 왔다. 與伯健、蓮老, 作伴步行, 至倉洞分張。 余則直向明禮洞, 吊李商州與其哀都事 光憲相話。 回路入雇洞, 吊李承旨之子先達而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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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一日 충청도 공주(公州)의 계룡산(鷄龍山) 동학서원(東學書院)1)은 포은(圃隱) 정 선생(鄭先生,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 선생(李先生, 이색(李穡)), 야은(冶隱) 길 선생(吉先生, 길재(吉再)) 및 단종조 삼상(三相)2)과 육신(六臣)3)의 영령이 모셔진 곳이다. 우리 선조 충강공(忠剛公)4)을 이 서원에 배향할 생각으로 화양서원(華陽書院)과 돈암서원(遯巖書院) 두 서원에서 동학서원에 통문을 보냈고, 동학서원도 흥양 향교(興陽鄕校) 에 통문을 보냈다. 그러므로 향교에서 지난번 통문에 답을 하였고, 우리 문중 또한 일이 되어가는 상황을 가서 알아보라는 뜻으로 나와 윤경(允卿), 이찬(而贊)을 보냈다. 그러므로 10월 1일에 두 사람이 출발하여 낙안의 고읍(古邑)5) 마을 앞에 이르러 윤경과 이찬은 고읍으로 들어가고, 나는 혼자 죽판(竹坂)의 김 곡성(金谷城) 집으로 왔다. 곡성은 정등문(旌門登)에서 이곳으로 와서 우거한 사람이다. 내외가 그지없이 정성껏 대접해 주었다. 이것은 실로 오랜 이웃의 정의이니 참으로 고마웠다. 밤에 절구 1수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이번 일로 초겨울에 먼 노정에 올랐으니(這事初冬啓遠程)선조를 위한 깊은 뜻 이 행차에 달려있네(爲先深意在斯行)우리 선조의 높은 충정과 참된 행실이 아니면(若非吾祖危忠實)어떻게 호남의 유현이 예악을 이루었겠는가(胡奈湖儒樂禮成) 忠淸道公州鷄龍山東學書院, 卽圃隱鄭先生、牧隱李先生、冶隱吉先生曁端廟朝三相、六臣妥靈之所也。 以吾先祖忠剛公配享是院之意, 華陽、遯菴兩院發通于學院, 學院, 亦以發通于興陽鄕校。 故校中頃以答通, 吾門中, 亦以余及允卿、而贊, 往探事機之意起送。 故十月之初吉, 仍與兩人發程, 抵樂安古邑村前, 允卿與而贊入于古邑, 余則獨來竹坂金谷城家。 谷城卽自旌門登來寓此土者。 而內外款待不已。 此實舊隣之誼也, 可感可感。 夜吟一絶曰: "這事初冬啓遠程, 爲先深意在斯行。 若非吾祖危忠實, 胡奈湖儒樂禮成。 " 동학서원(東學書院) 본래 동학사(東鶴寺)였다. 신라 때 창건되어, 고려 초에 도선(道詵) 국사가 중창하였다. 고려의 건국 공신 유차달(柳車疸)이 박혁거세의 사당을 봉안하고 동학사라고 하였다. 1457년(세조 3) 김시습(金時習) 등이 초혼각(招魂閣)을 세워 단종(端宗)에 대한 제사를 봉행하였다. 1814년(순조 14)에는 주지 월인(月印)이 왕실의 지원을 받아 전각을 중수하고 세조의 초혼기를 봉안하기 위해 혼록봉장각(魂錄奉藏閣)을 새로 지었다. 왕실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었으므로 유자(儒者)들이 강제적으로 절의 간판을 내리고 동학서원(東學書院)으로 바꿨다. 1836년(효종 2) 서원을 관리하던 유생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자 서원을 몰수하여 다시 사찰로 환원시켰다. 삼상(三相) 계유정난 때 죽은 정승 삼상신(三相臣)으로 황보인(皇甫仁)ㆍ김종서(金宗瑞)ㆍ정분(鄭苯)을 가리킨다. 육신(六臣) 병자년(1456, 세조2) 단종 복위 사건으로 죽은 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問)ㆍ하위지(河緯地)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를 말한다. 충강공(忠剛公) 송간(宋侃, 1405~1480)이다. 호는 서재(西齋)이며,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세종ㆍ문종ㆍ단종의 3조를 섬겨 벼슬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단종이 영월로 쫓겨갔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 두문불출하다가 단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깊은 산 속에 들어가 3년상을 마치고, 전라남도 고흥군 동강면 마륜리에서 은거하였다. 고읍(古邑)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고읍리이다. 옛날에는 낙안 현에 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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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十一日 ○일찍 출발하여 석곡에 이르러 요기하였다. 또 절구 한 수를 읊었는데 율지(聿之)가 먼저 읊었다.우리 일행 무작정 놀러 온 것이 아니니(我行不是耽遨遊)매번 해 뜨기 전에 행장 꾸려 길을 재촉하네(每促行裝日未浮)용성1) 길에 접어들어 차례로 바라보노라면(路入龍城次第見)넘실대는 맑은 물 굽이굽이 돌아 흘러가네(洋洋淳水曲幾周)내가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몇 발짝도 나가기 어려워 지팡이 짚고 나와(寸步難前杖出遊)고단한 걸음 얼마나 걸어야 한강에 배 띄우려나(間關幾日漢艭浮)집을 떠나 비로소 용성 땅에 도착하니(離家始到龍城地)맑은 물 이르자마자 다시 돌아 흘러가네(纔到淳江又浦周)여옥(汝玉)이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천릿길 떠난 우리 일행 멋진 유람도 하는데(千里吾行亦勝遊)초심을 망각한 이 인생 허망하기만 하여라(初心忘却此生浮)어이 늘그막에 길을 나서 어이 그리 고생하나(路何老也尖何苦)매번 부러운 건 길 가득 덮은 짙은 그늘 뿐(每羨繁陰滿道周)자윤(子允)이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선조 은혜에 이미 배부른데 멋진 유람에 들떠(已飽先恩志勝遊)어느 날에나 서울에 닿아 회포를 풀거나(懷卷何日漢城浮)우리 여행 길 경계하여 앞길만 보고 찾아가니(戒吾行李訪前路)사방에 두루 펼쳐진 산 경치 다 두고 왔네(行盡山光面面周)저녁에 남원 읍내에 도착하여 그 안에서 묵었다. 남문(南門) 밖 송만득(宋萬得)의 집에서 밥을 먹었다.-밥값으로 돈 1냥을 냈다.- 송씨 성(姓)이라 하기에 그의 성관(姓貫))을 물었더니, 여산이 관향이라 하였다. 본래 이름이 석규(碩奎)인데, 영남 고령(高靈)에서 조금 살았다고 했다. 이날 70리를 갔다. 도중에 또 절구 한 수를 읊었다.석양빛 두른 사람의 그림자 동쪽에 머무는데(人帶斜陽影在東)죽장 끌고 바삐 오니 성 안은 해가 저물었네(忙携竹杖暮城中)누각 앞에 기이한 경관이 있는 듯하니(樓前若有奇觀處)물에 스치는 수양버들 늦바람에 살랑이네(拂水垂楊引晩風)율지(聿之)가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해지는 석양에 달은 또 동쪽에서 떠오르고(日暮斜陽月復東)지팡이2) 짚고 바삐 재촉하여 성안에 이르렀네(鳩笻忙促到城中)우리 선조의 훌륭한 교화 몇 년 전의 일이던고(吾先治化問幾年)향리가 순후하여 옛 풍도가 있구나(鄕厚吏淳有古風)여옥(汝玉)이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웅장한 해동에 용으로 이름난 성3)(龍以名城壯海東)그 가운데에 모두 옹기종기 인가가 즐비하네(閭閻撲地盡其中)남쪽에서 걸어온 우리들 석양에 걸음을 재촉하니(夕陽促我南來步)눈 가득 보이는 경광 옛 나라의 풍경이로다(滿眼景光舊國風)자윤(子允)이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순자강4) 이북 산성의 동쪽(淳江以北山城東)앞에는 연하가 그 가운데에 자욱하네(前有烟霞這箇中)우리 가는 지름길을 어디 한번 물어보세(借問吾行徑捷路)내일 아침 한강 누대에서 바람을 쐬고 싶네(明朝欲及漢樓風) ○早發抵石谷療飢。 又吟一絶, 聿之先曰: "我行不是耽遨遊, 每促行裝日未浮。 路入龍城次第見, 洋洋淳水曲幾周。" 余次曰: "寸步難前杖出遊, 間關幾日漢艭浮。 離家始到龍城地, 纔到淳江又浦周。" 汝玉次曰: "千里吾行亦勝遊, 初心忘却此生浮。 路何老也光何苦, 每羨繁陰滿道周。" 子允次曰: "已飽先恩志勝遊, 懷卷何日漢城浮。 戒吾行李訪前路, 行盡山光面面周。" 暮抵南原邑內宿, 南門外宋萬得家飯【錢一兩出】, 以宋爲姓, 故問其姓貫, 則以礪爲貫矣。 其本碩奎, 而才居嶺南 高靈云。 是日行七十里。 路中又吟一絶曰: "人帶斜陽影在東, 忙携竹杖暮城中。 樓前若有奇觀處, 拂水垂楊引晩風。" 聿之次曰: "日暮斜陽月復東, 鳩笻忙促到城中。 吾先治化問幾年, 鄕厚吏淳有古風。" 汝玉次曰: "龍以名城壯海東, 閭閻撲地盡其中。 夕陽促我南來步, 滿眼景光舊國風。" 子允次曰: "淳江以北山城東, 前有烟霞這箇中。 借問吾行徑捷路, 明朝欲及漢樓風。" 용성 용성(龍城)은 전라북도 남원시의 옛 이름이다. 지팡이 원문의 '구공(鳩笻)'은 손잡이 부분을 비둘기 모양으로 조각한 지팡이로, 예전에 임금이 나이 많은 신하에게 비둘기처럼 소화를 잘 시키라는 의미에서 내려 주었다. '구장(鳩杖)'이라고도 한다.《後漢書 志5 禮儀中》 《呂氏春秋 仲秋記》 용으로 이름난 성 남원의 교룡산성을 말한다. 순자강 순강(淳江)은 순자강(鶉子江)을 말한다. 위의 각주 54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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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十三日 ○아침을 먹은 뒤 재실에 회의석을 마련하였다. 모두 자리에 모여 논의를 낼 적에 먼저 회의 안건의 조목을 적었다. 매월당(梅月堂) 김 선생(김시습(金時習))과 서재(西齋) 송 선생(송간(宋侃)), 망월암(望越菴) 이 선생(李先生) 축(蓄)24)을 추배할 생각으로 당장(堂長) 3명, 공사원(公事員) 1명, 색장(色掌) 1명을 정하였다. 이에 논의를 만들기 위해 공사원이 먼저 의견을 내니, 당장 이하 모두가 말하기를 "여러분의 의견과 서로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오촌(鰲村) 장석(丈席)25)에게 정품(呈禀)하고, 감영에 정서(呈書)하고, 원장에게 정품할 뜻으로 충분히 의견을 주고받으며 상의를 하였다. 자리를 파한 뒤에 어떤 사람은 가고 어떤 사람은 남았다.오후에 일행과 광정(廣亭)의 김계원(金啓源)과 동학사(東鶴寺)로 갔다. 초혼각(招魂閣)을 둘러보았는데 전각 안의 단종이 쓴 어휘(御諱)와 궤(櫃) 안에서 나온 《초혼록(招魂錄)》을 다 보고 나서, 그길로 절 안에 들어가 월인(月仁) 스님을 불러서 만났다. 스님은 이 절을 중창한 스님으로 당시 나이가 83세였는데, 아주 많은 고적을 전해 주었다. 조금 쉬고 나서 서원 밑으로 내려와 유숙하였다. ○朝飯後, 設齋會席。 濟濟會座, 發論之際, 先書會議事節目。 而梅月堂金先生、西齋宋先生、望越菴李先生蓄追配之意, 定堂長三人, 公事員一人, 色掌一人。 仍爲成議, 而公事員先爲發論, 則堂長以下皆曰: "僉議詢同。" 呈禀于鰲村丈席, 呈書于營門, 呈禀于院長之意, 爛熳商議, 而罷坐後, 或去或留。 午後與同行及廣亭金啓源, 往東鶴寺。 玩招魂閣, 則閣內書端宗御諱, 自櫃中出《招魂錄》, 皆玩後, 仍入寺中招見月仁僧。 僧卽此寺重創之僧, 而時年八十三, 頗傳古蹟。 小憩後, 下來院底留宿。 이 선생(李先生) 축(蓄) 1402~1473. 자는 윤보(潤甫)이며,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이색(李穡)의 증손이다. 장석(丈席) 송치규(宋穉圭, 1759~1838)이다. 자는 기옥(奇玉)이고, 호는 강재(剛齋)이며, 본관은 은진이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송시열의 6대손으로 김정묵의 문인이다. 당시 오촌에 살아 '오촌 선생(鰲村先生)'이라고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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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初六日 장석(長席)의 병이 심해서 서문(序文)은 나중에 짓기로 약속하였다. 그래서 막 상경하려는데, 비가 오는 바람에 그대로 머물렀다. 丈席以呻吟之致, 序文以後爲約, 故方欲上京, 而爲雨所關, 仍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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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初八日 오촌(鰲村)에서 경성까지 삼백여 리라고 하는데, 이번 동행한 이들이 화양동(華陽洞)을 보고 싶다고 하니 백여 리 길을 돌아가야 했다. 일찍 출발하여 십치(十峙)를 넘어 청천(淸川) 장터에서 아침을 먹었다. 화양동(華陽洞)에 도착하여 경천벽(擎天壁)16)을 먼저 보고 다음은 운영담(雲影潭)17)을 보았다. 진덕문(進德門)으로 올라가 곧바로 환장암(煥章菴)18)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도포(道袍)를 입고 내려와서 서원(書院)의 유사방(有司房)19)인 소양실(昭陽室) 주인을 만난 뒤에 《심원록(審院錄)》에 서명하였다. 곧바로 만동묘 전직(萬東廟殿直, 만동묘를 지키는 사람)과 서원 창고지기를 불러 서원 문을 열고 자리를 깔아 공경히 알현한 뒤에 노선생(老先生) 영정(影幀)을 봉심하였다.다음은 만동묘(萬東廟)에 나아가 봉심하였는데, 묘우(廟宇)는 3칸으로 첫째 칸 후벽에는 해와 달을 그려 놓았고, 그 아래에 신종황제(神宗皇帝)의 허위(虛位)를 세워 놓았다. 둘째 칸에는 해와 달 그림 아래에 의종황제(懿宗皇帝)의 허위를 세워 놓았다. 교의(交椅, 신주를 모시는 의자) 아래에 긴 함[櫃子] 하나가 있기에 전직에게 물어보니, 축판(祝板)과 지방(紙榜)의 패문(牌文)이라고 하였다. 이에 하나하나 살펴본 뒤에 중문(中門)으로 나왔다.담장 아래의 왼편에 비각(碑閣)이 있기에 들어가 둘러보았다. 청옥석(靑玉石) 사면(四面)에 전후의 사적(事蹟)을 새겨 놓았는데, 글은 도암 선생(陶菴先生)20)이 지은 것이며 전서(篆書)는 유 상국(兪相國)21)이 쓴 것이었다. 한차례 읽어보니 아, 이 만동묘에 들어와 이 글을 보는 사람치고 누구인들 감회가 일지 않겠는가.두루 완상한 뒤에 세 번째로 금사담(金沙潭)22)을 보았다. 금사담 위에 한 칸짜리 정사(精舍)가 있었는데, 바로 노선생(老先生)이 그 때에 거처했던 암서재(巖栖齋)23)이다. 네 번째로 읍궁암(泣弓巖)24)을 보았다. 이 바위는 노선생이 효종대왕(孝宗大王)의 기일이 되면 눈물을 흘리던 곳이다. 읍궁암 위에 세워진 작은 돌비석에 선생의 절구 한 수가 새겨져 있었다.이날이 무슨 날이던고(此日知何日)외로운 충정 상제께서 내려다보시리(孤衷上帝臨)새벽에 일어나 통곡하고 나서(晨起痛哭後)무릎 안고 다시 길게 시 읊었노라(抱膝更長吟)시구는 윤헌주(尹憲柱)25)의 글씨로 쓰여 있다.환장암(煥章菴)에 올라가 승통(僧統)26)을 불러 운한각(雲漢閣)27) 어필(御筆)을 봉심하였다. 동쪽 벽에 '비례부동(不禮不動)' 네 글자 큰 글씨가 걸려 있고, 서쪽 벽에 '사무사(思無邪)' 세 글자 큰 글씨가 걸려 있었다. 판자 아래에는 8석(石)이 있는데 그것을 두드리면 각각의 소리가 난다 하여서 '팔음석(八音石)'이라고 하였다.두루 살펴본 뒤에 나와 어필함(御筆函)을 내어와 열어 살펴보니, 바로 만력 숭정(萬曆崇禎)의 어필(御筆) 3권, 정축년 대통력(大統曆) 1권, 어필 1자루가 있었다. 두루 완상한 뒤에 다섯 번째로 능운대(凌雲臺)28)를 보고, 여섯 번째로 망성대(望星臺)29)를 보았는데, 망성대의 오른쪽 벽에 '비례부동(不禮不動)'이 새겨져 있었다. 일곱 번째로 와룡암(臥龍巖)30)을 보고, 여덟 번째로 학상대'(鶴裳臺)'31)를 보았으며, 아홉 번째는 파곶(巴串)32)을 보았다. 그 가운데 기이한 절경은 파곶·학상대·망성대·운영담이었다.대저 화양동(華陽洞)의 수석(水石)들은 우리나라 제일 명승지 중 세 장관에 해당된다. 온갖 승경 등을 앉아서 들었기 때문에 나의 졸필(拙筆)로 그 만분의 일도 형용할 수가 없지만, 환장암 벽 위에 선생의 시가 있기에 부족한 솜씨나마 삼가 차운하였다.낙양산33)에 펼쳐진 화양 골짜기(華陽洞闢洛陽山)엄숙하신 황제 영혼 여기에 의탁했구나(穆穆皇靈寄此間)우암과 수암34)이 전후로 뜻을 두어(尤老遂翁前後意)여러 암벽들 별천지를 이루었도다(取諸岩壁別人寰)이찬(而贊)이 차운하였다.해동의 빼어난 절경 뽐내는 화양산(海東絶勝華陽山)중국 천지가 이 사이에 있었구나(中國乾坤在此間)만고강상 뜻을 붙잡아 세워(萬古綱常扶植意)선생의 높은 의리 속세를 벗어났네(先生高義出塵寰)윤익(允益)이 차운하였다.별천지가 낙양산에 빙 둘러 있고(別區環立洛陽山)대명의 일월이 그 사이를 비추네(大明日月照此間)이웃을 돌아보고 구하는 맘 끝이 없어(顧隣捄傍不朽思)두 황제의 영혼 속세를 벗어났도다(二帝靈魂出塵寰)환장암(煥章菴)에서 묵었다. 自鰲村抵京城三百餘里云, 而以此作行者, 欲見華陽洞之意, 逶迤百餘里。 早發越十峙, 抵淸川市邊朝飯, 得達華陽洞門。 初見擎天壁, 再見雲影潭。 上進德門, 直抵煥章菴中火。 着道袍下來, 院有司房昭陽室見主人後, 書名《審院錄》, 卽招萬東廟殿直及書院庫子, 開門設席。 祗謁後, 奉審于老先生影幀。 次詣萬東廟奉審, 則廟宇三間, 而第一間後壁畵日月, 其下設神宗皇帝虛位, 第二間日月之下, 設懿宗皇帝虛位, 交椅下有一長櫃子, 故問于殿直, 則盛以祝板與紙榜牌云, 故箇箇奉玩後, 出來中門。 墻下左邊, 有碑閣入玩, 則靑玉石四面刻前後事蹟, 而文則陶菴先生所製, 篆則兪相國筆, 一次讀下, 噫! 入此廟, 觀此書者, 孰不無興感之懷哉? 周玩後, 三見金沙潭, 上有一間精舍, 老先生居此時巖栖齋也。 四見泣弓巖, 巖卽老先生, 位孝宗大王諱日, 揮泣之處也。 巖上立小石碑, 刻先生詩一絶曰: "此日知何日, 孤衷上帝臨。 晨起痛哭後, 抱膝更長吟。" 之句而尹憲柱筆也。 上煥章菴, 招僧統, 奉審雲漢閣御筆, 則東壁掛非禮不動四大字, 西壁掛思無邪三大字。 板下有八石而扣之, 則各聲音云, 故謂之八音石。 遍觀後出來, 奉出御筆函, 開金審則卽萬曆崇禎御筆三卷, 丁丑大統曆一卷, 御筆一柄。 周玩後, 五見凌雲臺, 六見望星臺, 臺之右壁, 刻非禮不動。 七見臥龍岩, 八見鶴裳臺, 九見巴串, 其中奇絶者, 巴串、鶴裳臺、望星臺、雲影潭也。 大抵華陽之水石, 我東之第一勝處三壯觀, 百勝等坐聞, 故以吾拙筆, 不能摸寫其萬一耳。 煥章菴壁上有老先生韻, 故忘拙謹次曰: "華陽洞闢洛陽山, 穆穆皇靈寄此間。 尤老 遂翁前後意, 取諸岩壁別人寰。" 而贊次曰 "海東絶勝華陽山, 中國乾坤在此間。 萬古綱常扶植意, 先生高義出塵寰。" 允益次曰 "別區環立洛陽山, 大明日月照此間。 顧隣捄傍不枋思, 二帝靈魂出塵寰。" 宿煥章菴。 경천벽(擎天壁) 화양구곡의 제1곡인 경천벽은 화양동 계곡 어귀에 있으며 절묘하게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마치 하늘을 떠받들며 우뚝 솟아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경천벽'이란 "하늘을 떠받치는 벽이다"는 의미로, "나라를 지탱하는 것은 곧 의리"라는 숨은 뜻이 담겨 있다. 운영담(雲影潭) 화양구곡의 제2곡인 운영담은 경천벽에서 400m 정도 위에 있는 계곡이다. 맑은 물이 모여 소(沼)를 이루고 있으며, 하늘의 구름 그림자가 계곡 물속에 맑게 비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환장암(煥章菴) 충청북도 속리산 화양계곡에 있던 암자 이름인데, 1907년경에 일본군에 의해 소실되었고, 그 자리에 채운암(彩雲菴)이란 사찰이 들어서 있다. 《송자대전》 부록 제7권 연보의 〈숭정 47년(1674) 갑인, 선생 68세〉에 의하면, "노봉(老峯) 민공 정중(閔公鼎重)이 연경(燕京)에 가서 의종황제(毅宗皇帝)의 '비례부동(非禮不動)' 4자(字)를 쓴 수필(手筆)을 얻어 와서 선생에게 주었다. 선생이 드디어 시냇가 절벽에 모각하고 그 곁에 암자(庵子)를 세워 승려들에게 지키게 하고, 환장암(煥章庵)이라 이름하여 그 진본을 암자 속에 간직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유사방(有司房) 회계 및 기록, 제수 마련 및 점검, 제사 절차 협의, 회의 주관 등을 담당하는 유사들이 거처하는 방이다. 도암 선생(陶菴先生) 이재(李縡, 1678~1746)로,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이다. 1702년(숙종28)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대제학을 거쳐 의정부 좌참찬에 이르렀다. 신임사화에 숙부 이만성(李晩成)이 처형되자, 벼슬을 버리고 강원도 인제의 설악에 들어가 성리학을 닦는 데 힘썼다. 1725년(영조1), 여러 차례 소명(召命)을 받자 소를 올려 소론 세력을 몰아낼 것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용인으로 퇴거하여 후진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저서로 《도암집》 등이 있다. 유 상국(兪相國) 유척기(兪拓基, 1691~1767)로,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전보, 호는 지수재(知守齋)이다. 신임사화 때 소론의 언관 이거원(李巨源)의 탄핵을 받고 동래(東萊)에 안치(安置)되었다가 1725년(영조1) 노론의 집권으로 풀려났다. 1739년 우의정에 오르자, 신임사화 때 세자 책봉 문제로 연좌되어 죽은 김창집(金昌集)ㆍ이이명(李頤命) 두 대신의 복관(復官)을 건의해 신원(伸寃)시켰다. 금사담(金沙潭) 화양구곡 중 제4곡이다. 맑은 물속에 보이는 모래가 금싸라기 같다 하여 '금사담'이라고 한다. 암서재(巖棲齋) 1666년 송시열(宋時烈)이 제4곡인 금사담(金砂潭) 절벽 위에 정면 세 칸 규모의 작은 서재를 짓고 북재(北齋) 또는 암재(巖齋)라고 불렀는데, 훗날 우암의 수제자인 권상하(權尙夏, 1641~1721)에 의해 암서재(巖棲齋)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곳은 우암이 말년을 보내면서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었으며, 우암 사후 우암의 제자들에게 강학 장소로 활용되었다. 읍궁암(泣弓巖) 화양계곡 제3곡에 있다. 《송자대전부록(宋子大全附錄)》 〈기술잡록(記述雜錄)〉 '채지홍(蔡之洪)'조에, "우암이 해마다 효종의 휘신(諱辰)인 5월 4일이면 반드시 이 바위에 올라 서쪽을 바라보고 곡을 하였기 때문에 '읍궁(泣弓)'이라 이름하였다.[先生每年五月四日諱辰, 必西望哭, 臨於此巖, 故名以'泣弓'.]"라고 하였다. 윤헌주(尹憲柱) 1661~1729. 자는 길보(吉甫), 호는 이지당(二知堂)이다. 음보(蔭補)로 참봉(參奉)·봉사(奉事)를 지내고, 1698년(숙종24) 알성 문과에 장원하여 전적(典籍)정언(正言)·헌납(獻納)을 거쳐 도승지·형조 판서·호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북도 안무사(北道按撫使)로 나가 무신난을 토평한 공으로 1748년(영조24) 분무 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에 추록되고, 영의정을 추증받았다. 승통(僧統) 교단과 승려를 통솔하는 승려의 관직을 말한다. 운한각(雲漢閣) 송시열(宋時烈)은 의종(毅宗)의 친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을 민정중에게 받아 1674년(현종15)에 화양리에 있는 절벽에 새기고 그 원본은 환장암(煥章庵) 옆에 운한각(雲漢閣)을 지어 보관하고, 그곳 승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능운대(凌雲臺) 화양구곡 중 제6곡이다. 큰 바위가 시냇가에 우뚝 솟아 그 높이가 구름을 찌를 듯하여 능운대라 한다. 망성대(望星臺) 제5곡 첨성대로, 우뚝 치솟은 높이가 수십 미터인데, 그 아래 "비례부동"이란 의종의 어필이 새겨져 있으니 이름하여 첨성대라 했다. 또한 평평한 큰 바위가 첩첩이 겹치어 있고 그 위에서 성진을 관측할 수 있다 하여 첨성대라 한다. 와룡암(臥龍巖) 제7곡인 와룡암은 긴 바위의 모습이 꼭 용이 드러누워 있는 듯한 모양새를 가졌다 하여 와룡암이라 부른다. 와룡암은 능운대에서 10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해 있다. 학소대(鶴巢臺) 저본의 '학상대(鶴裳臺)'는 화양 제8곡 '학소대(鶴巢臺)'의 오기로 보고 수정하여 번역하였다. 학소대는 청학 바위 위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았다 하여 학소대라 명명하였는데, 와룡암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다. 파곶(巴串) 화양계곡의 마지막 절경인 제9곡으로, 계곡 전체에 희고 넓은 바위가 펼쳐져 있으며, 그 위로 흐르는 물이 마치 용의 비늘을 꿰어 놓은 것처럼 보여 파천이라고도 부른다. 낙양산 충북 괴산군 화양리에 있는 산이다. 화양동은 속리산 서쪽 기슭 낙양산(洛陽山) 아래에 있다. 수암 원문의 '수옹(遂翁)'은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1641~1721)로, 본관은 안동, 자는 치도(致道), 호는 수암(遂菴)·한수재(寒水齋)이다. 송시열과 송준길의 문인이다.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화양동에 만동묘와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명나라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제향하였다. 저서에 《한수재집(寒水齋集)》, 《삼서집의(三書輯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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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二十五日 관아에서 머물렀다. 留衙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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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初十日 동틀 무렵 함께 고생한 사람들과 작별하고 행장을 꾸려 길을 나섰다. 신탄(新灘) 시장 근처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밤에 내린 눈으로 몹시 추워 고민스러운데, 유성(油城) 시장 근처에 채 못 가서 눈보라가 세차게 몰아쳤다. 간신히 유성(油城)에 도착하여 떡을 사 요기하고 눈을 맞으며 길을 나섰다. 눈발이 날려 눈앞을 막고 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어 실로 견디기 어려웠다. 산정령(散亭嶺) 진치(盡峙)를 넘고 선창(船倉) 주막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이 주막은 신도(新都)에 가까운 곳이다. 이번 길에는 신도(新都)에 들어가 두루 구경하려고 마음먹었으나 산과 들이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자세히 구경할 수 없었다. 이에 들어가 보지 못하고 또한 멀리 바라만 보고 지나가니 매우 안타까웠다. 개태령(開泰嶺)을 넘어 간신히 연산(連山) 읍내에 이르러 묵었다. 80리를 갔다. 平明與同苦諸人作別, 治行發程。 抵新灘市邊朝飯。 夜雪極寒悶悶, 未及油城市邊, 風雪大作。 艱到油城, 買餠療飢, 冒雪登程。 飛雪滿目, 寒氣逼骨, 實爲難堪。 越散亭嶺 盡峙, 抵船倉酒幕中火, 此幕卽新都近地也。 大擬今行入新都周玩矣, 雪滿山野, 不能詳玩, 故不得入見, 亦爲望見而過, 大是欠事欠事。 越開泰嶺, 艱抵連山邑內留宿。 行八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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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27일 二十六日七日 관아에서 머물렀다. 留衙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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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二十九日 사람과 말이 너무 많은데다가 관짐[官卜]이 너무 무거워 초참(初站)까지 빨리 달려갈 수 없었다. 이에 아침을 먹고 동이 틀 무렵에 출발하여 숙천(肅川) 읍내까지 60리를 가서 묵었다. 人馬衆多, 且官卜頗重, 不得初站疾驅, 因爲朝飯, 平明發行, 至肅川邑內六十里留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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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十一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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