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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20일 二十日 추웠다. 예조에 가서 낙안(樂安)의 예사문서(禮斜文書)를 찾아오는 길에 주동(注洞)에 들어가 일 처리가 부실한 이유를 크게 꾸짖고 왔다. 寒。 往禮曹, 推尋樂安禮斜文書, 而來路入注洞, 大責處事不實之由而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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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21일 二十一日 주동(注洞)에 가서 참판 조윤형(曺允亨)2)에게 재동서원(齋洞書院)3)의 편액을 받아 왔다. 往注洞, 受來齋洞院額於曺參判允亨。 조윤형(曺允亨) 1725~1799.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치행(穉行), 호는 송하옹(松下翁)이다. 그림과 글씨에 능하였는데, 풀·대나무 등의 묵화를 잘 그렸다. 글씨는 초서·예서를 잘 써서 일찍이 서사관(書寫官)을 역임하였으며, 위로는 대신들로부터 아래로 조례(皁隷)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그의 글을 얻으려 하였다. 재동서원(齋洞書院) 여산 송씨 충강공 송간(宋侃)을 주벽으로 송대립(宋大立), 송심(宋諶), 송순례(宋純禮), 송희립(宋希立), 송건(宋建)과 김시습(金時習) 등 15위를 향사하는 곳이다. 1785년(정조9) 최초 건립 당시 여산 송씨 송간(宋侃), 송대립(宋大立), 송심(宋諶)과 고흥 유씨 유탁(柳濯), 영광 정씨 정연희 등을 봉안하기 위해 두원면 운곡리에 운곡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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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23일~27일 二十三日四日五日六日七日 그믐날까지 연일 혹 주동(注洞)으로 가고, 혹 청파(靑坡)에 가서 보책(譜冊)을 추심(推尋)하여 부쳐 보낼 계획을 세웠는데, 장황(粧䌙)4)하는 것이 쉽지 않아 고민스럽다. 至晦日連日, 或往注洞, 或往靑坡, 以爲推尋譜冊付送之計, 而粧䌙未易, 悶悶。 장황(粧䌙) 장황(裝潢)이라고도 하며, 비단이나 두꺼운 종이를 발라서 책이나 화첩(畫帖), 족자 따위를 만드는 것, 혹은 만든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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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5일 初五日 ○아침 전에 출발하여 묘치(猫峙)7) 객점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곡성 읍내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 중주원(中周院)을 넘어 나루터 객점에서 점심을 먹고 출발하였다. 도중에 절구 한 수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이제 가서 배를 기다리지 않기를 어찌 바라겠는가(幸何今行不待舟)뱃사공이 나를 강 가운데로 떨어뜨려 놓았네(梢工敎我阻中流)순강8)을 건너 다급하게 객점을 빌렸으니(蓴江利涉蒼店借)제날짜에 동학서원 모임에 참여할 수 있겠지(趁日可參學院遊)이찬이 차운하여 다음과 같이 읊었다.가는 길 재촉하여 작은 배에 올랐으니(促我征鞭登小舟)남쪽 회수(淮水) 한 줄기 동방으로 흐르네(南淮一帶大東流)용성 북쪽에는 계룡산이 우뚝 서 있으니(鷄山屹立龍城北)제현과 함께 단란하게 모여 유람하길 기약하네(期與諸賢欒會遊)운경이 차운하여 다음과 같이 읊었다.빛나는 모래섬으로 달려가 배를 타고 건너(馳入光渚利涉舟)한낮에 순강에서 중류로 내려갔네(蓴江日午下中流)우리 선조의 일을 꼭 이루리라는 뜻을 가지면(有志必成吾先事)호서로 나선 오늘 행차가 헛된 유람이 아니리라(西出今行非浪遊)창화(昌華)에 이르러 길에서 유둔(油屯)9) 시장 변두리 사는 오재권(吳在權)이 전주에서 내려오는 편에 만났다. 길 가는 도중인 관계로 집에 편지를 부칠 수가 없어서 다만 말로 소식을 전하였다. 저물녘에 운교(雲橋)10) 객점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60리를 갔다. 밤에 빈대[蝎]가 많을까 걱정되어 잠을 이룰 수 없어 몹시 짜증이 났다. ○朝前發程, 抵猫峙店朝飯。 抵谷城邑內暫憩。 越中周院, 中火于津頭酒店發程。 路中吟一絶曰: "幸何今行不待舟, 梢工敎我阻中流。 蓴江利涉蒼店借, 趁日可參學院遊。" 而贊次曰: "促我征鞭登小舟, 南淮一帶大東流。 鷄山屹立龍城北, 期與諸賢欒會遊。" 允卿次曰: "馳入光渚利涉舟, 蓴江日午下中流。 有志必成吾先事, 西出今行非浪遊。" 抵昌華, 路上逢油屯市邊吳在權之自全州下來便, 以路中之致, 不得付書于家中, 只傳口傳消息。 暮抵雲橋店留宿。 行六十里。 夜多蝎患, 不能秪枕, 憤憤。 묘치(猫峙) 전라남도 곡성군 삼기면에서 곡성읍으로 가는 고개로 '괘재'라고도 부른다. 순강(蓴江) 전라남도 곡성 일대를 흐르는 섬진강의 옛 이름으로 순자강(鶉子江)을 말한다. 저자는 '순강(蓴江)' 혹은 '순자강(蓴子江)'으로 썼다. 유둔(油屯) 전라남도 고흥군 동강면 유둔리이다. 옛날 동강 장터가 있던 마을로 벌교에서 고흥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운교(雲橋) 전라남도 곡성군 겸면 운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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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十三日 ○아침 전에 율지가 주점(酒店)에 나갔다. 나는 아침을 먹고 나서 하서와 함께 주점(酒店)으로 나갔는데, 하서도 또한 《둔곡문적(遯壑文蹟)》을 부탁하였다. 그대로 작별하고 말치[斗峙]를 넘어 오원(烏院)에 이르러 요기하였다. 또 절구 한 수를 읊었다.녹음이 짙은 사월이라 꽃들은 시들어 가고(花老繁陰四月時)길을 겁내 지팡이 끌고 가는 걸음 더디구나(携笻㥘路步遲遲)언덕 숲에는 유난히도 바쁜 소리가 있으니(岸林別有忙勞響)온종일 꾀꼬리 가지를 오르내리며 노래하네(盡日鶯歌上下枝)율지(聿之)가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먼 길 떠난 나그네 여정 한가할 틈이 없으니(遠程行色無閒時)늘 한스러운 건 밤은 짧고 땡볕은 더디 지는 것(每恨夜短夏日遲)그대들 나에게 술 한잔 하길 권하기에(諸君勸我盃中物)술값을 계산하려면 꽃가지를 꺾어야겠네6)(欲計酒價折花枝)여옥(汝玉)이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행장이 점차 무거워져 쉬는 횟수는 늘어가고(行裝漸重息多時)도로가 메말라 갈수록 걸음은 더디기만 하네(道路方乾去益遲)억지로 바삐 술잔만 자주 잡으니(强欲忙勞頻把酒)어느 곳에서 꽃가지 꺾어 술잔을 세랴(觥籌何處折花枝)자윤(子允)이 다음과 같이 차운하였다.지금 우리가 온 이곳 옛날 왔던 곳이건만(今我來斯昔到時)내딛는 걸음 더디고 해마저 더디 지는구나(步徐方覺方陽遲)호걸스런 정은 멋진 산을 보려는 것이 아니나(豪情不是看山好)두견과 꾀꼬리 노래 가락 길가 버들가지에 울리네(鵑曲鶯歌路柳枝)쌍정자(雙亭子)에 이르러 묵었다. 60리를 갔다. ○朝前聿之出去酒店, 余卽仍朝飯, 與夏瑞偕出酒店, 而夏瑞亦以《遯壑文蹟》付託矣。 仍爲作別, 越斗峙, 抵烏院療飢。 又吟一絶, "花老繁陰四月時, 携笻㥘路步遲遲。 岸林別有忙勞響, 盡日鶯歌上下枝。" 聿之次曰: "遠程行色無閒時, 每恨夜短夏日遲。 諸君勸我盃中物, 欲計酒價折花枝。" 汝玉次曰: "行裝漸重息多時, 道路方乾去益遲。 强欲忙勞頻把酒, 觥籌何處折花枝。" 子允次曰: "今我來斯昔到時, 步徐方覺方陽遲。 豪情不是看山好, 鵑曲鶯歌路柳枝。" 抵雙亭子留宿。 行六十里。 꽃가지를 꺾어야겠네 백거이(白居易)의 〈동이십일취억원구(同李十一醉憶元九)〉 시에 "꽃 필 무렵 함께 술 취해 봄 시름 달래었으니, 취하면 꽃가지 꺾어 술잔 세는 산가지 삼았지.[花時同醉破春愁, 醉折花枝當酒籌.]"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白氏長慶集 卷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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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산일기 香山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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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十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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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二十一日 이날은 바로 영감(令監)의 생신이다. 술상을 차려 민 영장(閔營將)과 유 고성(柳固城) 등 여러 사람과 함께 배불리 먹고 파하였다. 是日卽令監晬日也。 有盃盤, 與閔營將、柳固城諸人, 同爲飽喫而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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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10월 十月 장차 묘향산에 들어가려 하면서 절구 한 수를 지었다.우리 동방 곳곳의 명승지 중에(東國名區某某處)약산의 풍경이 서관의 으뜸이라(藥山風景最西關)약산동대1)의 장관이야 따질 것 없어라(壯觀不足東臺與)멀리 보이는 묘향산 백설로 단장하였네(望蜀香岑白雪間)나는 어렸을 적에 풍악산(楓岳山, 금강산)을 유람하였고, 중년에는 두류산(頭流山, 지리산)을 구경하였다. 우리나라의 산 중에 다만 두 산수의 사이를 살펴보았다. 비록 통취(通趣)는 없으나 식견이 있는 자들이 말하기를, "금강산은 천하제일의 명산이요, 두류산은 그 다음인데 묘향산과는 어금지금하다."라고 하였으므로 매번 묘향산을 한번 보고 싶었다. 그런데 남북은 아득히 떨어져 있고 길[道里]은 매우 멀어 거의 2천여 리에 가까우니, 이 산을 구경하는 남쪽 사람은 천백 중에 한둘도 안 될 것이다.임자년 가을, 나는 선조(先祖)의 시호를 청하는 일로 경성(京城)에 와서 머물렀다. 그때 차동(車洞)의 민 영공(閔令公)이 영변의 수령으로 있었는데, 영변은 향산읍(香山邑)이다. 나에게 한번 구경 오라기에 마침내 10월의 날에 서쪽으로 길을 나섰다.대개 우리나라 평안도의 승경은 묘향산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구경할 만한 곳이 많다. 송경(松京, 개성)은 옛 도읍으로 경물이 처량하고 평양은 웅부(雄府)로 풍경이 아름다운데, 만월대(滿月臺)2)와 취적교(吹笛橋)3)는 송경의 명승지이고, 연광정(練光亭)과 부벽루(浮碧樓)는 평양의 승경지이다. 그 나머지 황주(黃州)의 월파루(月波樓)와 안주(安州)의 백상루(百祥樓)도 경치가 빼어난 곳인데, 모두 묘향산 지나가는 길에 있으니 승경을 유람하는 일행들이 다 볼 수 있다. 약산의 동·서대나 철옹성 같은 곳도 모두 우리나라의 유명한 곳이다. 이 때문에 천 리 먼 길을 바람과 눈보라를 무릅쓰고 10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철옹성에 들어갔다. 곧바로 대아(大衙)로 갔더니 손님과 주인 간에 손을 맞잡고 매우 기뻐하였다. 다음날 운 좋게도 성안에서 군사훈련을 하였다.밥을 먹은 뒤에 3천 병마를 거느리고 원수대(元帥臺)4)에서 조련하고, 이어서 약산 서장대(西將臺)에 오르더니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며 곧바로 약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로 올랐다. 장졸들이 모두 벼랑을 타고 나무를 휘어잡으며 어관진(魚貫陣)을 이루고 산성으로 들어가 호령하였다. 이날은 눈바람이 몰아쳐서 몹시 추웠다. 성 위에서 열을 지어 진세(陣勢)를 펼치고 비로소 군령을 내려 호궤(犒饋)5)한 뒤 이어 등(燈)을 달게 하였다. 10리의 성 위에 일시에 횃불이 올라 불빛이 환하게 비추었는데, 흰 눈으로 뒤덮인 산에 불빛이 일제히 길을 밝혀 참으로 장관이었다.해가 저물어 파진하자 일제히 하산하였는데, 나는 술기운이 오른데다가 유람한 곳은 관서에서도 가장 칭송받는 곳임에랴! 청천(晴川)의 큰 강은 빙 둘러있어 성 오른쪽에서 내려다보면 한 줄기 얼음 가닥 같고, 묘향(妙香)의 높은 산은 구불구불 뻗어 있어 성 왼쪽에서 멀리 바라보면 일천 송이 부용(芙蓉)과 같으니, 참으로 금성탕지(金城湯池)의 요충지라 이를만 하였다. 마침내 두세 사람과 서운사(捿雲寺)로 가서 묵었다.다음날 동대(東臺)로 올라가니 평안도의 40여 개 주(州)가 눈앞에 펼쳐진 것이 마치 태산(泰山)의 개밋둑과 같았다. 북쪽 땅 천만여 리가 하늘 끝에 아득하여 눈으로는 다 볼 수 없어서 비록 상세히 알 수는 없지만, 그 통쾌한 승경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그 뒤로도 여러 날을 묘향산에 갔다. 將入香山一絶, "東國名區某某處, 藥山風景最西關。 壯觀不足東臺興, 望蜀香岑白雪間。" 余小也遊楓岳, 中歲看頭流。 吾東四山之中, 第觀其二山水之間。 雖無通趣, 而有識者稱, "金剛則天下第一, 頭流則次之, 香山則伯仲"云, 故每有一見香山之願, 而南北夐絶, 道里絶遠, 將近二千餘里, 則南人之看此山者, 則千百人無一二焉。 壬子秋, 余以先祖請諡事, 來留京城矣。 其時車洞 閔令公宰寧邊, 寧邊則香山邑也。 要余一觀, 故遂以十月之日, 登程西征。 盖我國西關之勝, 除非香岳外, 亦有可觀處多。 松京舊都, 景物悲凉, 平壤雄府, 風景佳麗, 滿月臺、吹笛橋, 松京之名區也, 練光亭、浮碧樓, 平壤之勝槩也。 其餘黃州之月波樓, 安州之百祥樓, 亦皆名勝之處, 而皆在於香山路次, 則其遊玩之勝, 一行可盡。 至若藥山之東、西臺及鉄瓮城, 俱是吾東之有名處也。 是故千里長程, 觸冒風雪, 首尾十日, 始入鉄瓮城。 直入大衙, 則賓主之歡欣可掬, 而翌日幸城操也。 食後率三千兵馬, 組練於元帥臺, 因上藥山 西將臺, 鳴囉擊鼓, 直上藥山之最上峯, 將士皆緣崖攀木, 便成魚貫陣, 入山城號令, 是日風雪極寒。 列成陣勢於城頭, 始以軍令犒饋, 因使懸燈。 十里城頭, 一時擧火, 火光照曜, 而白雪滿山之中, 火色齊明, 眞壯觀也。 日昏破陣, 一齊下山, 而余則爲酒力所困, 而且其遊玩之處, 爲關西最稱! 晴川大江周回, 於城右俯視, 若一帶氷條, 妙香高山逶迤, 於城左遠望, 如千朶芙蓉, 眞所謂金湯之地也。 遂與二三人, 向捿雲寺留宿。 翌日上東臺, 則西關四十餘州, 羅列於眼下, 若泰山之丘垤。 北地千萬餘里, 㟽杳於天外, 眼力所窮, 雖不得盡詳, 而其通爽之勝, 不可言矣。 其後數日入香山。 동대 약산의 제일봉에 있는 큰 바위로, 구룡강과 대령강, 멀리 묘향산 등을 조망하는 풍광이 아름다워서 이유태, 김소월을 비롯한 많은 문인들이 시의 소재로 삼았다. 만월대(滿月臺) 고려의 정궁으로, 919년 태조가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창궐한 이래 1361년 소실될 때까지 고려왕의 주된 거처였다. 본래 특정한 명칭은 없었으나 고려 멸망 이후 조선시대부터 만월대라 불리기 시작했다. 2007년부터 2018년까지 남북 공동발굴 사업이 8차례 진행되었다. 취적교(吹笛橋) 개성시 덕암리에 있었던 고려 시대의 돌다리이다. 천마산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곱돌천과 개성시 용흥동에서 흘러내리는 마미천이 합쳐져 사천강으로 흘러드는 합수목으로, 개경 이남 지역에서 개경으로 들어가는 간선도로에 세워져 있었다. 2007년 개성에서 주춧돌 및 지지돌 등이 발굴되었다. 원수대(元帥臺) 함경북도(咸鏡北道) 경성군(鏡城郡)에 있있다. 호궤(犒饋) 군사(軍士)들에게 음식을 주어 위로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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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20일 二十日 창고에 이르러 묵었다. 至於倉留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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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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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22일 二十二日 눈이 올 듯한 기미가 있어 아침을 먹은 뒤에 급히 가마에 올라 안심사(安心寺)에 이르렀다. 안심사는 바로 보현사의 본찰(本刹)로, 고금(古今) 대사(大師)들의 부도가 모두 이 절의 뒤에 있었다. 부도는 상중하 3줄로 늘어서 있는데, 한 줄에 10여 개의 부도를 세워 놓기도 하였다. 가장 이름이 알려진 사람의 부도에는 반드시 석비(石碑)가 있었다. 상원암 뒤편을 올려다보니 일천 봉우리가 하늘에 솟아 있고 석벽이 줄지어 서 있어 제법 중향성(衆香城)7)과 흡사하였다,눈이 이미 내리기 시작하였으므로 급히 가마에 올랐다. 비탈길 잔교(棧橋)의 가장 위험한 곳에서는 가마를 멈추고 걸어서 갔다. 10여 리를 가니 길은 끊어지고 가파른 절벽인데 위에 쇠줄이 있어 아래로 6~7장 드리워져 있었다. 이에 승도들에게 먼저 올라가게 하고 나는 맨 나중에 줄을 잡고 올라갔다. 몇 걸음도 못 가서 다시 쇠줄이 있고 아래로 10여 장 드리워져 있으니 그 위태로운 상황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간신히 위로 올라가니 석대(石臺)가 늠름하게 우뚝 솟아 있었다. 이름은 '인호대(引虎臺)'라고 하는데, 이곳에 앉아 있으니 상원암(上院庵)8)의 용연폭포(龍淵瀑布)9), 대야폭포(大也瀑布), 용각석(龍角石)과 암자 뒤의 늘어선 석각(石角)을 하나하나 상세히 알 수 있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두루 살펴보았는데, 아래를 내려다보니 땅이 보이지 않고 좌우로 깎아놓은 듯한 모습이 마치 풍악의 백운대(白雲臺)와 비슷하였다. 그러나 그 크고 작은 차이와 기이한 자취가 백중의 형세라 말할 수 없다. 기 대사(機大師)10)의 시에 차운하였다.서쪽 변방의 산천 별안간에 지나가니(西塞山川瞥眼過)묘향산의 진경 찾으려는 숙원 오래 되었네(尋眞宿債妙香多)구름이 걷히니 형악이 선경을 드러내고(雲開衡岳探仙境)눈이 개니 용문이 기녀의 노래 들려주네(雪霽龍門聽妓歌)쇠줄에 바람 울어 아슬아슬하나 어찌할 수 없고(鉄索風鳴危莫奈)잔교에 빙판이 미끄러워 위태로우나 어찌하랴(石棧氷滑險如何)돌아와 한밤중에 등잔불 피우고 앉았는데(歸來夜半挑燈坐)다행히 고승이 있어 졸구로 화답하네(幸有高僧拙句和)이어 인호대 위에서 수십 보를 걸어 깎아지른 벼랑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는데, 그 깎아지른 벼랑은 비탈지듯 산에 의지하여 한 갈래 돌길이 있었다.마침내 상원암(上院庵)으로 들어가 풍경(風景)을 두루 살펴보니, 사방의 석벽(石壁)과 계단 아래 폭포(輻布)는 명승지라 할만 했다. 다만 바위 빛깔이 그다지 깨끗하지 않고 폭포의 흐름도 웅장하지 않으니 이것이 흠이었다. 왼쪽에 있는 용각(龍角)은 대개 그 거석(巨石)이 10여 장(丈)이나 우뚝 서 있었는데, 위에는 두개 돌이 똑바로 서 있어 그 형상이 마치 용의 뿔과 같았기 때문에 그렇게 일컫는 것이다. 이때 쌓인 눈이 녹지 않은데다가 또 한창 눈이 내리고 있어 곧바로 내원암(內院庵)으로 갈 수 없었다. 또 낙엽이 길을 뒤덮고 그 위로 눈이 쌓이니, 만약 한 발짝이라도 헛디디면 위태로움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고 하였으므로 도로 내려왔다. 삼연(三淵)의 시에 차운하였다.세 갈래 폭포는 온종일 쏟아져 내리는데(三道飛泉盡日舂)불국의 첩첩산중에11) 들어와 앉았네(坐來佛國亂山中)만겁의 석대 신령한 범이 꿇어앉은 듯(臺留萬劫蹲靈虎)천 길 폭포수 성난 용이 일어난 듯하네(瀑落千尋起怒龍)층층바위는 신군12)의 자취 굳게 닫고(層巖牢鎖神君跡)쌓인 눈은 속객의 자취 깊이 봉하였네(積雪深封俗客蹤)웃으며 묻노니 연하는 어느 누가 관장하는가(笑問烟霞誰管領)노승은 말없이 종을 울릴 뿐이라(老僧無語自鳴鍾)곧바로 향로전(香爐殿)으로 들어가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옥시(玉匙),13) 갈건(葛巾), 장삼(長衫)을 두루 보다가 관음전(觀音殿)으로 돌아와 앉아 요기하였다. 또 바로 견여(肩輿)를 타고 내원암(內院庵)으로 올라가 향산운사(香山雲舍)를 보았는데, 이는 곧 퇴계(退溪)의 친필(親筆)이다. 또 사암(思庵)의 시율(詩律)이 있었다. 마침내 절구 한 수를 읊었다.사암이 시와 퇴계가 직접 쓴 글씨(思庵之律退溪筆)고요함 속에 어찌 이처럼 보배를 얻을 수 있으랴(靜也何能得此珍)당시의 충의가 오래토록 나무처럼 서 있고(忠義當年多樹立)성조에서 인재를 배양함 또한 산인이네(聖朝培養亦山人)묘향산의 경치로는 상원암(上院庵)과 이 암자가 가장 빼어났다. 암자 위에는 금강굴(金剛窟)이라는 석굴(石窟)과 서산(西山)이 수도(修道)하던 두어 칸의 초당이 있다. 인하여 벽에 쓰인 시에 차운하였다.오래되고 기이한 바위 굴에(古奇巖竇屋)신명의 가호로 대사가 거처하였다네(神護大師居)이두석14)에게 말을 건네 보고 싶으나(欲語螭頭石)패엽서15)에 이끼의 흔적만 남아 있네(苔痕貝葉書)확 트인 그윽한 경치가 상원암에 못지않은데, 이 암자가 바로 서산(西山)이 오래 머물렀던 곳이다. 서산의 시에도 차운하였다.적막하여 산이 졸고 있는 듯한데(寂寞山如睡)도도나무16) 위에 새벽닭 소리 들려오네(桃都廳曉鷄)서산대사 참 선정에 들어가니17)(西山眞入定)명성과 절조 법왕18)과 나란하네(名節法王齊)임진년의 거의(擧義)19)도 이 암자에서 있었으니 이는 비단 지역이 좋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충의도 여기에 완연히 드러난 듯하였다. 그러나 천석(泉石)은 상원(上院)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 밖의 단군굴(檀君窟)과 단군대(檀君臺)20)는 특별히 기이한 모습은 없었지만, 다만 우적암(牛跡巖) 위에 소의 흔적이 완연한데다가 송아지의 자취도 있으니 참으로 괴이하였다. 대개 그 산이 비록 기이한 풍경은 없었지만, 겹겹이 포개진 병풍과 같이 무수히 둘러싸여 있어 몇 리도 확 트인 곳이 없었고, 입석(立石)도 그다지 흥미로운 것이 없었다. 풍악(楓岳)으로 말하자면, 두류산(頭流山)과 백중(伯仲)의 형세라고 말할 수 없으니, 조금 낫더라도 새로 흥미로울 것이 없었다. 쌍계(雙溪)와 천석(泉石)의 아름다움은 다만 서북쪽 변방에 자리하여 우리나라의 보장의 형세가 되었으며, 또 남쪽으로 수백 리를 뻗어 평양 천 년의 도읍이 되었으니, 그 기세의 웅건하고 광대함은 극에 달하였다고 할 만하다.장차 묘향산을 나가며 절구 한 수를 읊었다.눈이 가득 덮인 때 향악의 진경 찾으니(香岳尋眞雪滿時)강산은 온통 옥빛으로 들쭉날쭉하여라(江山一色玉參差)이천 리 밖 호남에서 온 나그네(二千里外湖南客)이곳에 다시 올 날 기약할 수 없구나(此地重來未可期)안심사, 다야폭, 인호대, 상원암, 산주폭, 용연폭, 천신폭, 용각석, 불영대, 조원암, 내보현, 보발암, 단군굴, 단군대, 만폭동, 우족대, 강선대, 금강굴, 사리각, 내원암, 무릉폭, 견불암, 불지암, 천주석, 국진굴, 극락전, 영산전, 대장전, 대웅전, 만세루, 금화봉, 설령. 有雨雪之意, 食後遂急上輿, 至安心寺。 安心卽此寺本刹, 而古今大師之浮屠, 皆在此寺之後。 列上中下三行, 而一行或立十餘浮屠, 而最所知名者, 則必有石碑矣。 仰觀上院之後, 千峯揷天, 石壁列立, 頗似衆香城矣。 雪已作之, 遂急上輿。 其磴路棧橋之最危處, 息輿徒步。 行十餘里, 路絶壁立, 上有鉄索, 下垂六七丈。 於是使僧徒先上, 余卽最後緣索而上。 不及數步, 更有鉄索, 下垂十餘丈, 其危凜不可言。 艱辛緣上, 則有石臺赳起, 名曰引號臺, 坐此則上院庵、龍淵瀑、大也瀑、龍角石及庵後列立之石角, 一一可詳矣。 徘徊周觀, 則下瞰無地, 左右如削, 彷彿若楓岳之白雲臺, 而其大小之殊, 奇異之跡, 不可謂伯仲矣。 次機大師韻, "西塞山川瞥眼過, 尋眞宿債妙香多。 雲開衡岳探仙境, 雪霽龍門聽妓歌。 鉄索風鳴危莫奈, 石棧氷滑險如何。 歸來夜半挑燈坐, 幸有高僧拙句和。" 因自臺上行數十步, 從削崖而前, 盖其削壁依山如坂, 有一條磴路。 遂入上院庵, 周觀風景, 則其四面石壁, 及階下瀑布, 可謂名區, 而但其石色不甚潔白, 瀑流亦不雄壯, 是可欠也。 左有龍角, 盖其巨石屹立十餘丈, 上有兩石直立, 狀如龍角故云爾。 是時積雪未消, 且時方雪來, 萬無直向內院之路。 且落葉塞路, 上覆積雪, 若失一足, 則危不可言云, 故還爲下來。 次三淵韻, "三道飛泉盡日舂, 坐來佛國亂山中。 臺留萬劫蹲靈虎, 瀑落千尋起怒龍。 層巖牢鎖神君跡, 積雪深封俗客蹤。 笑問烟霞誰管領, 老僧無語自鳴鍾。" 直入香爐殿, 遍觀西山大師玉匙及袈葛巾長衫, 還坐觀音殿療飢。 又卽肩輿上內院, 見香山雲舍, 是卽退溪親筆。 又有思庵詩律。 遂吟一絶, "思庵之律退溪筆, 靜也何能得此珍。 忠義當年多樹立, 聖朝培養亦山人。" 此山之景, 上院及此庵, 最爲名勝。 上有石窟, 名謂金剛窟, 數間菴, 卽西山修道之處也。 仍次壁上韻曰, "古奇巖竇屋, 神護大師居。 欲語螭頭石, 苔痕貝葉書。" 通爽幽夐, 不下於上院, 而此菴卽西山久留之所。 又次西山韻曰, "寂寞山如睡, 桃都廳曉鷄。 西山眞入定, 名節法王齊。" 且壬辰擧義, 亦於此菴, 非特地之爲好, 其人之忠義, 如宛見於此矣。 然而泉石不及於上院, 而其他檀君窟、檀君臺, 別無奇異之景, 但牛跡巖上有牛跡宛然, 且犢牛之跡, 是可怪也。 盖其爲山, 雖無奇景怪態, 而恰似屛幛之疊重, 回抱無數, 無數里通爽之處, 且立石甚無興味。 若論於楓岳, 則不可謂伯仲於頭流, 則稍勝而無新興。 雙溪泉石之美, 但居西北極邊, 爲吾東保障之勢。 且南走數百里, 爲平壤千年之都, 其氣勢之雄健磅礴, 可謂極矣。 將出香山吟一絶曰, "香岳尋眞雪滿時, 江山一色玉參差。 二千里外湖南客, 此地重來未可期。"安心寺, 多也瀑, 引虎臺, 上院菴, 散珠瀑, 龍淵瀑, 天神瀑, 龍角石, 佛影臺, 祖院菴, 內普賢, 賓鉢菴, 檀君窟, 檀君臺, 滿瀑洞, 牛足臺, 降仙臺, 金剛窟, 舍利閣, 內院菴, 舞凌瀑, 見佛菴, 佛智菴, 天柱石, 國陣窟, 極樂殿, 靈山殿, 大莊殿, 大雄殿, 萬歲樓, 禁火峯, 雪嶺。 중향성(衆香城) 금강산의 내금강 마하연(摩訶衍) 뒤를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는 하얀 바위 봉우리들을 일컫는 명칭이다. 상원암(上院庵) 평안북도 향산군 향암리 묘향산(妙香山)에 있는 절로, 고려 시대에 창건됐다고 한다. 상원암 상량문에 의하면 1580년(선조13) 중창했다고 하며, 상원암 불량비(佛糧碑)에 의하면 1794년(정조18) 대대적으로 보수했다고 한다. 용연폭포(龍淵瀑布) 묘향산 상원동 등산길 산주폭포의 왼쪽에 있는 폭포로, 길이가 105m로서 북한에서 가장 긴 누운폭포이다. 묘향산의 법왕봉(法王峰, 1,391m)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직경 3m, 깊이 1.5m 되는 용소에 찼다가 넘치는 모습이 용의 비늘 모양을 닮았다. 사람들은 이것을 신비화하여 용소에서 용이 올라가면서 물이 넘친다는 의미로 용연폭포라고 하였다. 기 대사(機大師) 언기 대사(彦機大師, 1581~1644)로, 속성(俗姓)은 장씨(張氏), 본관은 죽주(竹州), 호는 편양당(鞭羊堂), 법랍(法臘)은 53세였다. 서산 대사(西山大師)의 법사(法嗣)로 금강산과 묘향산 등에 주로 거주하였다. 《白洲集 卷18 鞭羊堂彥機大師碑》 한편 신익성(申翊聖)의 《낙전당집(樂全堂集)》 권7 〈유금강소기(遊金剛小記)〉에는 "기공이 천덕암에 거주한다.[機公居天德菴]"라고 하였다. 11세에 출가하여 휴정(休靜)의 제자인 현빈(玄賓)에게 계(戒)를 받은 뒤, 금강산에서 교학과 함께 참선을 했다. 임진왜란이 끝날 무렵, 묘향산 휴정의 밑에서 선 수행을 했고, 이후 휴정의 법(法)을 이어받았다. 그 뒤 남쪽으로 돌아다니면서 고승들에게 깨달음을 점검받았으며, 금강산 천덕사(天德寺), 구룡산 대승사(大乘寺), 묘향산 천수암(天授庵) 등에서 선과 교를 함께 가르쳐 명성을 떨쳤다 첩첩산중에 원문의 '난산(亂山)'은 높낮이가 가지런하지 않게 여기저기 어지러이 솟은 산봉우리를 말한다. 신군 신군(神君)은 도가(道家)의 신(神)을 말한다. 《史記 封禪書》 옥시(玉匙) 옥시금약(玉匙金鑰)의 준말이다. 《황정경(黃庭經)》에, "옥시와 금약이 저대로 완고하다.[玉匙蘥身完堅.]"라 했고, 그 주에, "옥시는 이[齒]요 금약은 혀라. "라고 하였다. 이두석 원문은 '이두(螭頭)'는 종이나 솥, 궁궐의 섬돌, 비석 머리 등에 장식하는 뿔 없는 용의 형상으로, 벽사와 수호의 의미가 있다. 패엽서 패엽서(貝葉書)는 불서(佛書) 또는 불경(佛經)을 이른다. 고대 인도에서 패다라(貝多羅) 나무의 잎에 불경을 쓴 데서 유래하였다. 도도나무 원문의 '도도(桃都)'는 전설에 나오는 나무 이름이다. 《현중기(玄中記)》에 의하면 "동남쪽에 도도산이 있고 그 위에 큰 나무가 있어 도도라 이름하는데, 가지끼리 서로의 거리가 삼천 리나 되고, 그 위에는 하늘 닭 한 마리가 있다. 아침 해가 떠올라 햇살이 이 나무를 비추면 하늘 닭이 울고 뭇 닭이 일제히 따라 운다.[東南有桃都山, 上有大樹, 名曰桃都, 枝相去三千里, 上有一天鷄, 日初出, 光照此木 天鷄則鳴, 群鷄皆隨之鳴.]"라고 하였다. 《太平御覽 卷918》 선정에 들어가니 원문의 '입정(入定)'은 불교 용어이다. 중이 고요히 앉아 마음을 수렴하여 잡념을 일으키지 않고 마음을 한 곳에 고정시키는 것을 입정이라고 한다. 법왕 법왕(法王)은 부처님은 법문의 주인이며, 중생을 교화함에 자유자재하다는 뜻으로 본래는 부처님을 지칭한 말이었으나 진리를 깨달은 높은 스님에게도 쓴다. 임진년의 거의(擧義) 1592년(선조25)에 왜적이 침입하자 절에 있던 73세의 서산대사(西山大師)는 전국에 격문을 보내 의승(義僧)이 일어나도록 독려하였다. 자신도 묘향산을 중심으로 의승을 모아 평양전투에 직접 참가하였다. 단군굴(檀君窟)과 단군대(檀君臺) 단군굴은 묘향산 향로봉 남쪽에 위치한 아란봉 아래에 있는데, 세상에서는 단군이 나라를 다스리며 머문 곳이라고 한다. 단군대는 두타봉 서쪽에 위치하며 단군굴에서 산정상으로 1리 정도 떨어져 있다. 주변의 높고 험한 봉우리가 단군대를 호위하듯 에워싸고 있어서 세상에서는 단군의 강림처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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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二十三日 아침을 먹은 뒤에 승려들과 만세루(萬歲樓)에 다시 올라가서 제도를 두루 살펴보았다. 천왕문(天王門)에서 나와서 하행정(下杏亭) 주막 앞에 도착하니, 송(宋)씨 성을 가진 추봉(秋奉)이라는 자가 와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그 아들에게 머물러 기다리라 하고 자기는 집으로 돌아갔다. 말에서 내려 그 아들과 주막으로 들어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에 이른바 송 풍헌(宋風憲)이란 자가 찾아왔는데, 그는 복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구워 온 산꿩 1마리와 소주 1병을 즉시 앞에 내놓았다. 그저께 산에 올라갔을 때, 송(宋)씨 성을 가진 사람이 근처에 산다는 말을 듣고 따라간 하인에게 보고 싶다고 하였는데, 송씨가 이를 듣고 와서 기다렸던 것이다. 말이 분명치는 않지만 그의 족파(族派)는 강계(江界)21)에서 3대 전부터 이곳에 와 살면서 지금은 관인(關人)이 되었다고 한다. 이른바 관인(關人)이라는 것은 역리(驛吏)22)의 직무이다. 잠깐 이야기를 나눈 뒤에 바로 헤어지고 신창(新倉)에 이르러 묵었다. 食後與諸僧, 更上萬歲樓, 周觀制度。 遂自天王門出行, 到下杏亭酒幕之前, 則有宋姓人秋奉者, 來待已久, 而使其子留待, 渠則還入其家矣。 遂下馬入幕, 暫時談話之際, 所謂宋風憲者來見, 見其爲人, 乃完福人也。 預炙生雉一首, 燒酒一壺, 卽爲前進。 盖再昨上山時, 聞宋姓人近住之由, 有欲見之意於隨去下人矣, 宋也聞此, 而來待故也。 聞其族派, 則語不分明, 而云自江界三世前來接此土, 方爲關人云, 所謂關人, 是驛吏役也。 小語後, 卽爲告別, 至新倉留宿。 강계(江界) 강계는 오늘날 북한 자강도에 속하지만, 1800년대에는 평안북도에 속하였다. 그 이전에 강계는 북방의 군사요충지로 1413년 강계도호부가 되었다. 지금도 강계는 자강도의 도 소재지이다. 역리(驛吏) 역(驛)에 소속되어 신역(身役)의 하나인 역의 제반 업무를 담당하던 아전(衙前)·이서(吏胥)이다. 역리의 직역(職役)은 군사 정보나 왕명을 전달하거나 사신 왕래에 따른 영송(迎送)과 접대가 중요한 업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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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十一日 이조에서 숙직하던 중에 급보(急報)하기를, "2일은 또한 국기일(國忌日, 군주나 왕후의 제삿날)이므로 감히 입계(入啓, 계장을 왕에게 올림)할 수 없으니 급히 고쳐 택일하라."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4일로 다시 택하여 들여보냈더니 또 와서 "이날도 또 국기일이다."라고 하므로 다시 택일할 예정이다. 自吏曹直中急報 "初二日亦國忌, 不敢入啓, 急急改擇"云, 故以初四日, 改擇入送, 則又來云 "又是國忌", 故更擇爲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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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十二日 날씨가 매우 사나워서 떠날 수가 없었다. 또 이조 낭청이 하번(下番, 당직)한다고 들었지만 가서 전혀 만날 길이 없으니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정오 무렵에 색구(色驅)가 또 급히 와서 내달 1일도 국기일(國忌日)이므로 입계할 수 없다고 하기에 부득이 전에 정한 29일로 정하여 해질녘에 이조에 써서 보냈다. 급히 약고개[藥峴]로 가서 윤 좌랑(尹佐郞)을 만나 병으로 만나 보지 못한 뜻을 말하고는 이어 청배(靑排)에 가서 묵었다. 風日極惡, 不得發行, 又聞吏郞之下番, 而萬無往見之道, 奈何奈何? 午間色驅, 又急來初一日, 又是國忌, 不可入啓云, 不得已以前定卄九日, 乘昏書送於吏曹。 急往藥峴見尹郞, 以謝病未相見之意, 因向靑排留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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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十九日 새벽녘에 군휘(君徽)와 작별하고, 노구암(老狗巖)에 이르러 아침을 먹고 말에게 꼴을 먹였다. 오수(獒樹)에 이르러 또 말에게 꼴을 먹이고 전석치(磚石峙)에 이르러 묵었다. 이날 110리를 갔다. 曉頭與君徽作別, 至老狗巖, 朝飯秣馬。 至獒樹又秣馬, 至磚石峙留宿。 是日行百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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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初五日 맑다. 광청(廣淸)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용계(龍溪)에서 묵었다. 晴。 至廣淸中火, 宿龍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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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初六日 비가 오다. 불우치(不憂峙)에 이르자 비가 내렸다. 이에 점심을 먹고 곡성 읍내에서 묵었다. 雨。 至不憂峙雨作, 因爲中火, 宿谷城邑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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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初七日 증산(甑山)에서 점심을 먹고 오수(獒樹)에서 묵었다. 中火甑山, 宿獒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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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二十日 대곡(大谷)의 형님과 증아(曾兒)가 동행하여 용전(龍田) 무안(茂安) 댁에 이르러 묵었다. 30리를 갔다. 大谷兄主及曾兒同行, 抵龍田 茂安宅留宿。 行三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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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二十三日 새벽에 출발하여 광천(廣川)에서 아침을 먹었다. 용계(龍溪)에 이르러 점심을 먹은 다음 곡성(谷城) 읍내에 이르러 묵었다. 70리를 갔다. 曉發抵廣川朝飯。 抵龍溪中火, 抵谷城邑內留宿。 行七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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