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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17일 十七日 아침을 먹고 태평동(太平洞)으로 가서 진사(進士)와 작별하였다. 이어 경성동(京成洞)의 이 임천(李林川) 집으로 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에 회동(晦洞)으로 가서 익형(翼亨)씨 형제에게 작별 인사를 하였다. 차동(車洞) 민 석사(閔碩士)의 집으로 갔으나 주인이 부재중이어서 작별하지 못하였다. 이어 민치명(閔致明)의 집에 들렀더니 정성스레 맞이하고는 술을 사와서 권하였다.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눈 뒤에 서소문(西小門) 밖의 이 참봉(李參奉) 집으로 갔는데, 이 참봉은 정묘년에 작고하였고, 그 동생도 작고하였으니 상전벽해(桑田碧海)와 같은 세상43)이라 말할 수 있겠다. 참봉의 아들 희()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주인도 그 부친의 풍도가 있고, 자못 은근한 뜻이 있었다. 또한 술을 사서 올리니 기쁘고도 슬펐다. 이어 작별한 뒤에 약고개[藥峴]44)의 박 영암(朴靈岩) 집에 가서 오위장(五衛將) 송인서(宋璘瑞)의 소식을 물었다. 신문(新門) 밖으로 이주하여 폐문동(閉門洞)의 심 도사(沈都事) 집에 살고 있다고 하였으나 날이 저문 탓에 찾아가지 못하고 주인집으로 돌아왔다. 朝飯往太平洞, 與進士作別。 仍往京成洞 李林川家, 敍話後, 往晦洞, 拜辭于翼亨氏兄弟。 出來車洞 閔碩士家, 則主人不在, 故不得作別。 仍入閔致明家則款接, 仍爲沽酒以勸。 移時敍話後, 仍往西小門外李參奉家, 則參奉丁卯年作故, 其弟氏亦爲作故, 可謂滄桑世界。 只與參奉之子暫敍, 則主人亦有乃父之風, 頗有慇懃之意, 亦以沽酒以進, 可喜可悲。 仍爲作別後, 往藥峴朴靈岩家, 問宋五衛將 璘瑞消息, 則移居于新門外, 居閉門洞 沈都事家云, 而以日暮之致, 不得往尋, 出來主人家。 상전벽해(桑田碧海)와 같은 세상 원문의 '창상(滄桑)'은 창상지변(滄桑之變)으로, 큰 바다가 변하여 뽕나무밭이 되고, 뽕나무밭이 변하여 큰 바다가 된다는 말이다. 흔히 세상의 변화가 매우 심함을 비유하는데,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과 같다. 약고개[藥峴] 지금의 서울시 중구 중림동(中林洞)에 위치한, 만리동(萬里洞) 입구에서 충정로(忠正路) 3가로 넘어가는 고개의 이름으로, 서대문 밖에 있었다. 이곳에 약초를 재배하는 밭이 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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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二十三日 아침을 먹고 늦게 길을 떠나 광암(廣岩) 주막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자생(者省) 도산(道山)45)에 들어갈 때 김이준(金履俊) 부자와 김계한(金啓漢)이 뒤쫓아 와서 만났는데, 이들은 말이 병이 나서 여산(礪山) 땅에서 뒤처졌던 사람들이었다. 적막한 가운데 이렇게 동향(同鄕) 사람을 만났으니 그 기쁘고 다행스러운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이어 그의 말에 옷 보따리를 맡기고 곡성(谷城) 읍내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도산(道山)의 족질(族姪)인 필흥(弼興)의 집에 들렀으나, 필흥(弼興)이 마침 부재중이라 아이를 보내서 불러 오게 했다. 먼저 책자가 왔는가를 물었더니, 즉시 왔다고 하니 다행스러웠다. 책자는 올라갈 때 이 집안에 전달해 달라고 주주막(周酒幕)에 부탁한 것이다. 전달되지 않았으리라46) 생각했는데, 마침 왔다고 하니 몇 마디 말을 한 뒤에 곧바로 출발하여 중진원(中津院)47)을 건넜다. 저녁에 곡성 읍내에 도착해서 동행을 만나 함께 묵었다. 70리를 갔다. 仍朝飯晩後發程, 抵廣岩酒幕午飯。 入者省 道山之際, 金履俊父子及金啓漢追來相逢, 此則馬病落後於礪山地者也。 寂寥之中, 逢此同鄕之人, 其喜幸可斗。 仍付衣褓於其馬, 約以谷城邑內相逢。 入道山族姪弼興家, 則弼興適不在, 送兒請來。 先問冊子來云, 則卽來云幸幸。 冊子上去時, 以此家傳致之意, 付託於周酒幕也。 意謂浮沈矣, 果來云, 數語後, 卽發渡中津院。 暮抵谷城邑內, 逢同行同留宿。 行七十里。 자생(者省) 도산(道山) 자생과 도산은 전라북도 남원시 주생면 근처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전달되지 않았으리라 원문의 '부침(浮沈)'은 인편으로 보내 편지가 전해지지 않은 것을 말한다. 진(晉)나라 은선(殷羨)이 예장군(豫章郡)의 태수로 있다가 임기를 마치고 떠날 즈음에 사람들이 1백여 통의 편지를 주면서 경성에 전달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석두(石頭)까지 와서 모조리 물속에 던져 놓고는 "가라앉을 놈은 가라앉고 떠오를 놈은 떠올라라. 은홍교가 우편배달부 노릇을 할 수는 없다.[沈者自沈, 浮者自浮, 殷洪喬不能作致書郵.]"라고 말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世說新語 任誕》 중진원(中津院) 중진(中津)은 순자진(鶉子津)으로, 곡성군 북쪽으로 10리 되는 남원(南原) 경계의 대로(大路)에 있었고, 순자원(鶉子院)은 순자진(鶉子津) 언덕 위에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섬진강을 건널 수 있게 설치된 중진원교(中津院橋)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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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二十一日 감영에 소장을 내는 일 때문에 아침 전에 동행과 작별하였다. 남문 밖 주막에 가서 여해와 상의하니, 순찰사[巡相]가 공무를 보는 중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장초(狀草)와 들어갈 돈 한 냥을 들여보냈는데, 아침을 먹은 뒤까지도 오지 않아서 매우 걱정스러웠다. 오후에 유석하(柳錫夏)가 제출한 것을 가지고 왔다. 제음(題音)40)은 뜻대로 되어 다행이지만, 재록하는 일은 영리(營吏)가, 《사원록(祠院錄)》이 선화당(宣化堂)41)에 들어 있다고 하므로 다만 써 달라 부탁만 하고 재록을 못하였다. 훗날을 기다려 다시 오겠다고 말하니 매우 걱정스러웠다. 이어 유석하에게 벗을 하자며 그 자(字)를 물으니 영원(永元)이고, 전주(全州)에 출입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이어서 여해와 임실(任實)의 곽재(郭載) 남평중(南平仲)과 길동무를 하게 되어 조금은 다행스러웠지만, 같은 고향 사람들이 모두 내려갔기 때문에 다른 지역 사람과 동행하는 것이 흠이었다. 애치(艾峙)에 이르러 묵었다. 30리를 갔다. 朝前與同行作別者, 以呈營故也。 往南門外酒幕, 與汝海相議, 則巡相公事云, 故入送狀草及所入錢一兩矣。 至食後不來, 可悶可悶。 午後柳錫夏, 呈出持來, 題音如意幸幸, 而載錄之事, 營吏云《祠院錄》入宣化堂, 只托錄以給, 而不得載錄, 待後日更來爲言, 可悶可悶。 仍與柳也許友, 問其字, 則永元也, 全州出入之人也。 仍與汝海及任實 郭載 南平仲, 作伴稍幸, 而同鄕之人, 盡爲下去, 故與他官之人, 同行欠事, 而抵艾峙留宿。 行三十里。 제음(題音) 백성들이 관청에 올린 요청에 대하여 그 결과를 적어 아래로 회보하는 형식의 짧은 글을 말한다. 이두(吏讀)로 음을 '제김'이라고 한다. 선화당(宣化堂) 관찰사가 정무를 보던 정청(政廳)으로, 고을의 동헌(東軒)에 해당한다. 정면 중앙에 '선화당(宣化堂)'이라는 편액(扁額)을 달았는데, 이는 '임금의 덕을 선양하고 백성을 교화하는[宣上德而化下民] 건물'임을 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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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二十一日 일찍 예조(禮曹)에 가서 안일득(安一得)을 만나서는 백현(栢峴)의 예사(禮斜) 문서를 주었다. 오는 길에 민 선전(閔宣傳)의 집에 들어가 조문하고 왔다. 早往禮曹 見安一得, 因給栢峴禮斜文書。 來路入閔宣傳家, 吊喪而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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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十六日 추웠다. 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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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二十六日 ○아침 전 북문 밖 송약수(宋若洙) 집으로 가니 형제가 모두 없어서 도로 주인집으로 왔다. 아침을 먹기 전에 읍인 박광옥(朴光玉)이 관원을 데리고 부중(府中)으로 찾아왔다. 아들이 보낸 편지를 열어보니 집안은 별고 없고 14일에 손자를 낳았다고 하였다. 우리 집안의 경사로 아주 큰 행운이었다. 예전에 서울에 있을 때 꾼 꿈과 점괘가 실로 헛되지 않았다. 밥을 먹은 뒤 율지와 함께 영주인(營主人)129) 집으로 가서 흥양 하인을 만났다. 돌아서 남문 밖으로 가서 류석하(柳錫夏)를 찾았는데 마침 출타하고 없었다. 그길로 동문으로 들어가 북문으로 나왔다. 마침 종인(宗人, 먼 일가) 상준(相俊)을 만나 송약수 씨 형제가 들어왔는지를 상세히 물으니, 오늘은 들어오지 않는다고 하여 주인집으로 돌아왔다. 노자가 부족해서 김제의 이 상인(李喪人)에게 1냥을 꾸었다. 그길로 출발하여 동문(東門)을 나와 법사산(法司山)의 노원(魯源) 집으로 가서 유숙하였다. 회동의 일가 송 장성의 서간을 전하고 여산의 석회 채굴을 금하는 일에 대해 상의하였는데, 11월 시사(時祀) 때 각처의 일가와 상의하여 소장을 올리겠다고 하였다. ○朝前, 往北門外宋若洙家, 則兄弟皆不在, 還來主人家。 朝飯前, 邑人朴光玉陪官行來, 府中來訪。 傳家兒書披覽, 則家中無故, 十四日得男孫云。 吾家之慶, 極爲大幸。 向日在京時, 夢中與占理, 實不虛矣。 食後, 與聿之往營主人家, 見興陽下人, 轉向南門外, 訪柳錫夏, 適出他 仍入東門出北門。 適相俊宗人, 詳問5)若洙氏兄弟入來與否, 則今日不入云, 故還來主人家。 以路貰之不足。 推一兩錢於金堤李喪人。 仍爲發程, 出東門, 往法司山魯源家留。 傳晦洞長城宗氏書簡, 相議於礪山禁灰事, 則至月時祀時, 與各處宗人相議入呈云。 영주인(營主人) '영저리(營邸吏)'라고도 하며, 감영(監營)과 각 고을의 연락을 맡아보는 아전을 말한다. 問 저본에는 '聞'으로 되어있으나 문맥상 수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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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十七日 추웠다. 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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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十七日 ○아침 전에 비가 내렸다. 느즈막이 길을 떠나 고개를 넘어 장수동(長水洞)에 이르렀다. 안 서방(安書房) 내외와 어린아이 모두 병이 없으니 매우 다행이었다. 그대로 머물렀다. ○朝前雨。 晩後發程, 越嶺抵長壽洞。 安書房內外與幼兒, 皆無病幸幸。 仍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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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8년(무자) 1828年(戊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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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戊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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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四月 무자년(1828, 순조28) 4월 일, 명현록(名賢錄)을 개간하는 일 때문에 가서 보라고 문중(門中)에서 나에게 위임했다. 戊子四月日, 以名賢錄開刊事, 往見之意, 門中屬余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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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初七日 ○밥을 먹은 뒤 10냥을 개간소에 냈다. 저녁 무렵 관정동으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은 뒤 정동으로 가 이혜길 집에서 묵었다. ○食後, 持十兩錢納刊所。 夕時還冠井洞。 夕飯後, 往貞洞留李惠吉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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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初五日 ○바람이 매우 찬 날씨일 뿐만 아니라 주인이 극구 만류하여 또 범오리에서 머물렀다. ○非但風日之極寒, 以主人之堅挽, 又留凡五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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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9년(기해), 영행일기 1839年(己亥), 嶺行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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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三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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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十五日 ○일찍 출발하여 수달치(水㺚峙)3)를 넘어 돈탁(敦托)4) 나루를 건너 영남 하동(河東)의 선교(船橋) 저자 주변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아침 전에 30리를 갔다. 저자 안을 두루 둘러보았는데 곳곳에서 마주친 사람이 모두 생소하였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한 사람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마륜(馬輪)의 일가 곡성(谷城)을 만났다. 전혀 생각지 못하게 이 일가를 만나 한없이 기뻤다. 그래서 절구 1수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타향 사람이 무수히 많은 속에서(他鄕人海裏)갑자기 우리 종친을 만났다네(忽逢我宗親)처음 만났을 때 마음이 절로 기뻤는데(逢初心自喜)이별한 뒤 마음은 오히려 새롭구나(別後意猶新)그길로 작별하여 하동 진암(陣巖)5)의 성 부자(成富者) 우열(偶烈) 집에 이르렀다. 우열은 마침 병이 나서 만나지 못하고 다만 그 아들 필우(弼宇)를 만났다. 거기서 요기를 하였다. 주인이 객을 대접하는 것이 아주 소홀하였다. 출발하여 세곡(細谷)6)의 김 부자(金富者) 종이(宗頤) 집에 이르렀다. 김종이는 흥양의 점암(占岩)에서 이 읍으로 이거하였는데 학윤(學允)의 고모부이다. 본래 동향 사람인 데다 또 외가(外家)의 정의(情誼) 때문에 노소와 내외가 그지없이 환대하며 대접해 주어 아주 고마웠다. 아침을 먹은 뒤에 10리를 가서 유숙하였다. ○早發, 越水1)㺚峙, 越敦托津, 抵嶺南河東船橋市邊朝飯。 朝前行三十里。 周觀市中, 處處逢人, 皆生面目, 四顧無一人知者矣。 適逢馬輪谷城宗人。 千萬意外逢此宗人, 其喜可斗。 因吟一絶曰: "他鄕人海裏, 忽逢我宗親。 逢初心自喜, 別後意猶新。" 仍爲作別, 抵河東陣巖成富者偶烈家。 偶烈則適病不見, 只見其子弼宇。 仍爲療飢。 主人對客之, 甚爲疏忽。 移發, 抵細谷金富者宗頤家。 金卽興陽占岩移居于此邑, 而爲學允之姑母夫也。 本是同鄕之人, 又爲外家之誼, 老少內外, 歡接不已, 可感可感。 朝飯後, 行十里, 仍留宿。 수달치(水㺚峙) 광양 옥곡면에서 진상면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현재 광양에서 하동으로 가는 지방도가 있다. 돈탁(敦托) 전라남도 광양시 진월면 오사리 돈탁 마을이다. 진암(陣巖)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운암리 진암 마을이다. 세곡(細谷) 경상남도 하동군 양보면 박달리 세곡 마을이다. 水 저본에는 '小'로 되어있으나 광양 지역의 지명 용례에 의거하여 '水'로 수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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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十九日 ○밥을 먹기 전 재복(齋服, 재계할 때 입는 옷)을 입고, 서원 마당으로 들어갔다. 먼저 참배를 한 뒤에 들어가서 봉심(奉審)을 하니 위패는 -결락- 가장 높고 컸다. 하얗게 칠한 면에 "유명수군 -결락- 조선국 삼도통제사 증 영의정 -결락- 이 -결락- 공 신위(有明水軍【缺】 朝鮮國三道統制使贈領議政【缺】 李【缺】 公神位)"라고 쓰여있었다. 사우에는 '충렬사'라고 편액이 걸려 있었다. 참배한 뒤에 묘정비(廟庭碑)를 구경하였다. 묘각은 -결락- 문 안에 있었다. 묘문은 우암(송시열(宋時烈)) 선생이 짓고, 동춘당(송준길(宋浚吉)) 선생이 글씨를 썼다. 이 비문에는 마땅히 우리 방계 6대조 수사공(水使公)7)의 사적이 들어가야 하는데, 수사공의 사적이 오롯이 빠진 것은 필시 글을 청한 사람이 수사공의 사적을 몰라서 글을 부탁할 적에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실로 우리 송씨에게는 크게 흠이 되는 일이다. 승방으로 나와 아침을 먹은 뒤에 《심원록(審院錄)》에 이름을 적고, 사적 책과 홀기(笏記)를 찾으니, 책은, 승려 말로는 "서원에 있는 서책은 모두 함 안에 보관되어 있는데 승려가 열쇠를 가지고 출타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자세히 보지 못하였으니, 흠사(欠事)이고 흠사이다.그길로 강당 문루에 이르니 '청해루(淸海樓)'라는 현판이 있었고 또 중수기문(重修記文)이 걸려 있었다. 또 여러 사람이 읊은 시문이 많았으나, 갈 길이 바쁠 뿐만 아니라 눈이 어두운 관계로 상세히 볼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었다. 서원 터를 두루 돌아보니 지형이 녹도(鹿島)의 쌍충사(雙忠祠) 터와 흡사하였다. 주산(主山)과 안산(案山)에는 소나무가 울창하고 집들이 즐비하였는데 모두 서원의 소유물이었다. 참으로 명승지라고 이를 만하였다. 앞바다에는 세곡(稅穀)을 실은 조군선(漕軍船)이 많이 정박해 있었는데 차례차례 들어와 그 수가 20여 척에 달하였다. 이 또한 장관이었다.서원 옆에 또 하나의 비각이 있어서 들어가서 보니, 앞면에 큰 글자로 "자암 김 선생8) 적려 유허비(自菴金先生謫廬遺墟碑)"라고 쓰여 있었다. 뒷면에도 비음이 새겨져 있었으나 상세히 볼 수 없었다. 서원 아래는 또 남해와 하동 두 읍과 영남 좌도(左道)와 우도(右道)의 조운선(漕運船)이 이곳에 모여 실어간다고 하였다. 이렇게 빼어난 경치를 일찍 보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 거기서 잠시 쉬었다가 처음에는 이곳에서 방향을 바꿔 진주로 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노자가 부족할 뿐 아니라 내기와 학윤이 도로 내려가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함께 갔다. 나루 앞에 이르러 김종이(金宗頤), 학윤과 헤어졌다. 돈탁(敦托) 나룻가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내기와 함께 조진(助津) 나룻가로 들어갔다. 노량에 있을 때 다음과 같이 시 1수를 읊었다.지팡이 나란히 짚은 서너 길손이(聯笻三四客)오롯이 노량의 사당에 도착하였네(專到露梁祠)층계 사이 자리에서 공경히 참배하고(敬拜階間席)탁상 위의 신위(神位)에 봉심하였네(奉審卓上位)충심으로 임금을 지탱하였고(忠心撑北極)씩씩한 기상은 남쪽 지역을 덮었네(壯氣盖南陲)당시의 일을 추모하자니(追慕當時事)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네(不覺涕泗洟) ○食前着齋服, 而入院庭。 先爲瞻拜後, 入奉審, 則位牌【缺】 取爲高大。 粉以塗面, 書之以有明水軍【缺】 朝鮮國三道統制使贈領議政【缺】 李缺公神位。 祠宇扁以忠烈祠。 參謁後, 玩廟庭碑。 碑閣在【缺】 門內。 而碑文則尤菴先生撰, 同春先生書之。 此碑文當入我傍六代祖水使公事蹟, 而專沒水使公事蹟者, 必請文之人不知水使公之事蹟, 不告於請文時故也。 實如我宋之大欠事也。 出來僧房朝飯後, 書名《審院錄》, 推尋事蹟冊與笏記。 冊則僧曰: "院中所在書冊盡藏櫃中, 而開金僧將佩去出他云。" 故不得詳玩, 欠事欠事。 仍上講堂門樓, 則扁以淸海樓, 又揭重修記文。 又多諸人題咏, 而非但行忙, 以眼昏之致, 不得詳玩, 可歎耳。 周觀院基址, 則地形洽似鹿島雙忠祠基地矣。 主山與案山, 松楸鬱密, 村家櫛比, 而皆院中所有物。 眞可謂名勝之地。 前洋多泊載稅漕軍船, 次次入來, 其數至於二十餘隻。 此亦壯觀也。 院傍, 又有一碑閣, 故入玩, 則前面大字書自菴金先生謫廬遺墟碑。 後面, 又刻碑陰, 而不能詳玩。 院下, 又有南海、河東兩邑及嶺南左右道漕船, 來會此處, 載去云爾。 如此勝景, 恨未早見也。 仍爲暫憩, 初意, 則自此轉向晋州計矣。 非但路資之不足, 乃記與學允還爲下去爲言, 故不得已同行。 到津前, 與金宗頤及學允分袂。 而相會于敦托津頭爲約, 與乃記入助津頭。 當在露梁時, 吟一首曰: "聯笻三四客, 專到露梁祠。 敬拜階間席, 奉審卓上位。 忠心撑北極, 壯氣盖南陲。 追慕當時事, 不覺涕泗洟。" 수사공(水使公) 송희립(宋希立, 1553년~1623)이다. 송간(宋侃)의 6대손으로, 자는 신중(信仲)이고, 호는 삼규당(三規堂)이며,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전남 고흥군 동강면 마륜리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녹도(鹿島) 만호 정운(鄭運)의 군관으로서 영남지역에 원병파견을 주장하였다. 지도(智島) 만호가 되어 형 송대립(宋大立)과 함께 이순신의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남해 관음포 앞바다에서 명나라 진린 제독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송희립은 중상을 당하고 이순신은 전사했다. 자암 김 선생 김구(金絿, 1488~1534)이다. 자는 대유(大柔), 호는 자암(自庵)ㆍ삼일재(三一齋), 시호는 문의(文懿),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1511년에 별시 문과에서 을과로 급제한 뒤 좌승지ㆍ홍문관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개령(開寧)에 유배되었다가 수개월 뒤에 남해로 이배되었다. 남해에 이배된 지 13년 만에 임피(臨陂)로 다시 옮겼다가, 2년 뒤에 풀려나와 고향인 예산으로 돌아왔다. 저서로 《자암집(自庵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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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二十三日 ○비가 와서 그대로 머물렀다. ○雨, 仍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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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8일 初八日 천노(千奴)를 시켜 150냥과 송 첨지(宋僉知)의 책값 5냥을 주동(注洞)에 지워 보냈다. 며칠 전부터 계속 오한과 미약한 통증이 있었다. 오늘도 비록 통증이 줄지는 않았지만 시험해 보려는 생각에 오후에 남평(南平) 댁에 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에 다시 아랫집에 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왔다. 저녁 무렵에는 약고개[藥峴]에 갔으나, 윤랑(尹郞)이 부재중이니 섭섭한 마음을 어찌 말로 다 하겠는가. 찬 공기를 쐬고 돌아왔더니 몸의 통증이 매우 심하여 정신이 가물가물하고 혼미해졌다. 김 주부(金主簿)가 안신환(安神丸)17)을 가지고 왔는데, 감기가 들었다며 출입이 적절치 않다고 하였다. 밤 3경 초에야 두통과 신열(身熱)이 그치며 정신이 조금 맑아졌는데, 아마도 학질의 기운인 것 같으니 매우 괴이하다. 使千奴負送一百五十兩及宋僉知冊價錢五兩於注洞。 自數前連日, 有惡寒微痛之症矣。 是日則痛勢雖不減, 欲爲試驗之計, 午後往南平宅, 暫話後, 轉往下家, 小話而來。 夕間往藥峴, 則尹郞不在, 悵恨何言。 觸寒歸後, 身痛大發, 昏昏以度矣。 金主簿持安神丸而來, 謂發感氣, 不緊出入云。 夜三更初, 頭痛及身熱卽止, 神氣小快, 必是瘧氣也, 可怪可怪。 안신환(安神丸) 감초(甘草), 마아초(馬牙硝), 맥문동(麥門冬), 백복령(白茯苓), 산약(山藥), 용뇌(龍腦), 주사(朱砂), 한수석(寒水石)으로 구성된 것으로, 심신이 허하여 가슴이 두근거리고 놀라는 증상을 치료하는 처방이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1일 初一日 강을 건너는 것이 지체되었기 때문에 동틀 무렵 출발하여 대동루(大同樓) 앞에 이르러 요기하고 강을 건너 중화(中和)까지 50리를 가서 묵었다. 以越江之遲滯, 平明發行, 至大同樓前, 療飢渡江, 至中和五十里留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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