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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20일 二十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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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부

25일 二十五日 ○일찍 출발하여 석성읍 앞 콩죽 객점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부여읍 앞에 이르러 김호일이 사는 마을을 물으니 규암(窺岩)90) 마을에 산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규암 나루를 건너 김 생원 집을 찾아갔는데, 사랑채가 마침 비어있었다. 사랑 앞에서 서성거리니 소동(小童)이 안에서 나왔다. 그래서 김 생원의 거취를 자세히 물으니 주막에 갔다고 대답하였다. 소동과 주막집으로 가다가 길에서 김 생원을 만났다. 안부를 묻기도 전에 하는 말이, 수백 리 밖에서 누추한 곳을 찾아준 것이 실로 뜻밖이라고 하였다. 이에 사랑에 들어가 안부를 물으니, 그간에 그 동생 김호선(金浩善)이 부인상을 당했다고 하였다.안채에서 삶은 밤 한 그릇을 대접해 주었다.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모두 나룻가 객점으로 나와 술을 사서 마셨다. 수북정(水北亭)91)에 올라 잠시 구경하였는데 정자는 규암 절벽 위에 있었다. 난간 앞에는 백강(白江)92)이 흐르고, 정자 뒤에는 푸른 벼랑이었다. 곳곳이 높은 봉우리고 사방은 강모래로 정취가 가득하지 않은 곳이 없으니, 눈에 담긴 풍경은 흥양(興陽)의 쌍충사(雙忠祠)93)보다 더 아름다웠다. 정자의 사방 벽에 고인의 제영(題詠)이 많이 있었으나 바빠서 기록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작은 나루를 건너 백강서원(白江書院)94)에 가서 참배하고 봉심하였다. 신독재(愼獨齋)95) 김 선생과 백강(白江)96) 이 선생이 배향되어 있었다. 《심원록(審院錄)》에 이름을 적었다. 그길로 백강 나루를 건너 김 진사 집으로 들어가 잠시 쉬고 나서 뱃사공을 불러 배를 타고 낙화암(落花巖)97)을 지나 고란사(皐蘭寺)98) 앞에 이르러 육지에 내렸다. 고란사에 오르니 암자는 큰 강가 절벽 아래 있었고, 낙화암은 그 왼쪽에 있고, 조룡대(釣龍臺)99)는 그 오른쪽에 있었다.사방에 펼쳐진 강과 산은 모두 정감에 젖게 하였고, 굽이굽이 흐르는 모래와 강물은 모두 아름답고 수려하였다. 절에는 책을 보는 관동(冠童) 몇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과 함께 유숙하였다. 30리를 갔다. 모래는 밝고 물은 푸르며 산은 수려하였지만, 평생 보아온 것이기도 하고 내가 갈 길이 바쁜 관계로, 여러 날 동안 머무를 수가 없어 참으로 안타까웠다. ○早發, 抵石城邑前豆粥店朝飯。 抵扶餘邑前, 問金浩一所居村, 則居在窺岩村云。 故越窺岩津, 訪金生員家, 則舍廊適空。 廊前徘徊之際, 有小童自內而出, 故詳問金生員去就, 則答以往于酒家。 偕小童往酒家, 路上逢金生員。 則寒暄前所言, 數百里之外, 委訪陋巷, 實是意外。 仍入舍廊, 得問伊間, 遭其弟浩善之妻喪云矣。 自內間待之以一器熟栗矣。 移時談話後, 皆出津頭店, 沽酒以飮。 上水北亭暫玩, 則亭在窺岩絶壁上。 檻前百江, 亭後蒼崖。 處處峯巒而面面江沙, 無非多情, 滿目景處, 勝於興陽 雙忠祠矣。 亭之四壁。 多有古人題詠。 而忙未記之可歎。 越一小津, 往白江書院, 瞻拜奉審, 則愼獨齋金先生、白江李先生腏享矣。 書名《審院錄》。 仍越白江津, 入金進士家, 暫憩後, 招津夫乘船, 過落花岩, 抵皐蘭寺前下陸。 上皐蘭寺, 庵在大江上絶壁下, 落花岩在其左, 釣龍臺在其右。 面面江山, 皆是多情;曲曲沙流, 盡爲佳麗。 寺有讀書冠童數人, 與之同留宿。 行三十里。 沙明水碧, 秀麗群山, 平生所見, 以吾行忙之致, 不得數日留連, 可歎可歎。 규암(窺岩)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이다. 수북정(水北亭) 충청남도 부여군 백마강 절벽 위에 있는 누각으로, 광해군 때에 양주 목사로 있던 김흥국(金興國)이 여생을 보내기 위하여 지었다. 백강(白江) 충청남도 부여의 북부를 흐르는 강이다. 쌍충사(雙忠祠)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에 있는 사당으로, 조선 전기 무신 이대원(李大源, 1566~1587)과 정운(鄭運, 1543~1592)을 배향하였다. 백강서원(白江書院) 부산서원(浮山書院)을 말한다. 1719년(숙종 45)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김집(金集)과 이경여(李敬輿)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다. 같은 해에 '부산(浮山)'이라고 사액되어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다. 그 뒤 군수 정연달(鄭然達)을 중심으로 한 지방 유림에 의해 1980년에 복원되었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1574~1656)이다. 자는 사강(士剛)이고, 호는 신독재(愼獨齋)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아버지 김장생(金長生)과 함께 예학의 기본적 체계를 완비하였으며, 송시열(宋時烈)에게 학문을 전하여 기호학파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 1585~1657)이다. 자는 직부(直夫), 호는 백강(白江)ㆍ봉암(鳳巖)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세종의 7대손이며, 할아버지는 첨정(僉正) 이극강(李克綱)이다. 저서로는 『백강집(白江集)』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낙화암(落花巖)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부소산에 있는 바위로, 삼국시대 백제의 의자왕과 관련이 있다고 전해진다. 고란사(皐蘭寺) 충청남도 부여군 부소산에 있는 백제 말기에 창건된 절이다. 앞에는 백마강이 흐르고, 그 뒤 벼랑에 희귀한 고란초가 자생하기 때문에 '고란사'라 불리게 되었다. 조룡대(釣龍臺) 충청남도 부여군 백마강 가에 있는 바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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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十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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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初三日 ○아침을 먹은 뒤 관정동에 가서 우 참봉(禹參奉)과 박상현을 만났다. 그 자리에 모르는 손님 서너 명이 있었다. 그래서 그 사는 곳을 물으니 고부(古阜)에 산다고 하였다. 그 성명을 물으니 두 사람은 김씨 성이고, 한 사람은 배씨 성이였다. 내가 정축년(1637, 인조 15) 호란(胡亂) 당시, 덕원 부사(德原府使)로 안변(安邊)에서 전사한 배공(裵公)113)이 누구인지 물이니, 그의 8대 조부라고 답하였다. 그 또한 우리 선조 승지공(承旨公)114)이 누구냐고 묻기에, 나는 나로서 5대조 되신다고 하였다. 모두 같은 날 전사한 분의 후손으로, 뜻하지 않게 만나 대대로 이어온 정의를 푸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나중에 서로 찾아볼 생각으로 그가 머무는 데를 물으니 창동 객점이라고 하였다.그길로 정동의 석사 이혜길(李惠吉) 집으로 갔다. 안부 인사를 나눈 후 그 조카 선(善)의 천연두가 어떤지 물으니, 낭패를 당해 참담하다고 하였다. 그길로 그 아우 집으로 가서 상을 당한 곡절을 위로하며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채에서 몇 가지 음식을 내와서 몹시 고마웠다. 그길로 묘동(廟洞)으로 가서 공서와 잠시 얘기를 나눈 뒤에 용동의 참봉 이경화(李景燁) 집으로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곳이 곧 《성원현록(姓苑賢錄)》의 개간소였다. 돌아오는 길에 관정동(冠井洞)에 들러 공서와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유숙하였다. ○朝食後, 往冠井洞, 見禹參奉及朴祥顯。 座上有不知客數三人。 故問其所居, 則居在古阜云。 故問其姓名, 則兩人以金爲姓, 一人以裵爲姓。 余問丁丑胡亂時, 德原府使戰亡於安邊裵公爲誰, 則答以渠八世祖。 而渠亦問吾祖承旨公爲誰, 故余以吾爲五世祖。 俱是同日戰亡人後裔, 意外相逢, 敍其世誼, 其喜可掬。 日後尋訪之意, 問其所住處, 則蒼洞旅店云矣。 仍向貞洞李碩士惠吉家。 敍暄後, 問其姪兒善痘與否, 則見敗云慘矣。 仍往其弟氏家, 慰其見慽之由暫話。 自內間出送數器饌以饋, 可感可感。 仍向廟洞, 與公瑞暫話後, 來龍洞李參奉景燁家談話。 此卽《姓苑賢錄》開刊所也。 來路入冠井洞, 與公瑞談話, 同留宿。 배공(裵公) 배명순(裵命純, 1597~1637)이다. 자는 수초(遂初)이고, 본관은 성산(星山)이다. 병자호란 때 퇴각하는 후금(後金) 군사의 뒤를 추격하여 안변 남산역(南山驛)까지 이르러 강행군을 하던 중, 복병의 기습을 받고 전사하였다. 무덤은 성주군 조곡에 있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승지공(承旨公) 송심(宋諶, 1590~1637)이다. 자는 사윤(士允)이고,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1614년(광해군 6)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북변수비에 종사하고 돌아온 뒤에는 노모를 봉양하며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전라도 병마우후(兵馬虞侯), 홍원 현감(洪原縣監)을 거쳐 1636년 병자호란 때 함북 병마절도사 이항(李沆) 휘하에서 척후장(斥候將)으로 있다가 화의가 성립되자 횡포를 부리며 철수하는 후금군사를 추격하여, 안변 남산역(安邊南山驛)에서 전 ㆍ후 영장(前後營將)과 함께 분전 끝에 전사했다. 좌승지(左承旨)로 추증되고, 고흥 서동사(西洞祠)에 제향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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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十六日 영감(令監)이 들어왔다. 令監入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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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十七日 눈이 내렸다. 주동(鑄洞)에 다녀왔다. 사수(士洙)와 귀남(龜南) 종인(宗人)이 와서 보고 갔다. 雪。 往鑄洞而來。 士洙及龜南宗人, 來見而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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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十九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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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初五日 날씨가 조금 나아졌다. 日氣差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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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初七日 아침을 먹기 전에 남평(南平) 댁에 가서 문병하고 왔다. 이는 병이 든 뒤에 처음으로 나갔다 들어온 것이다. 오후에 비가 온종일 내렸다. 朝前往南平宅, 問病而來, 此是病後, 初出入也。 午後雨作終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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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初九日 날씨가 매우 싸늘하더니 저녁 이후부터 바람이 불고 눈이 내렸다. 日氣甚陰冷, 自夕後風雪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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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년(신미) 1811年(辛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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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춘 仲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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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춘 仲春 아! 이는 선고(先考) 절와부군(節窩府君)1)께서 우리 집안의 보첩(譜牒)과 선조 충강공(忠剛公)의 시호(諡號)를 청하는 일로 서행(西行)한 것을 기록한 일기(日記)이다.아! 선조가 아름다운 행적을 남겼는데도 자손이 그것을 기술하지 않는다면 이는 자기 선조를 잊어버린 것이요, 선조가 아름다운 행적이 없는데도 자손이 거짓말을 꾸며서 치켜세운다면 이는 자기 선조를 기만한 것이다. 잊어버린 것과 기만한 것이 비록 성격은 다르다 할지라도 불의(不義)의 나락에 떨어지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그러므로 문인(文人)이나 학사(學士)들이 그 선조의 덕을 스스로 기술한 것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은 스스로 그 세가(世家)의 실보(實譜)를 기술하여 선열(先烈)을 잊지 않았으며, 주자(朱子) 또한 위옹(韋翁)2)의 행록(行錄)을 기술하되 선조의 뜻을 기만하지 않았으니 후세 사람들이 이를 훌륭하게 여겼다. 불초가 비록 옛사람의 만분의 일이라도 감히 바랄 수는 없지만 어찌 감히 거짓말로 꾸며 선조의 덕을 기만하겠는가.아! 우리 선고(先考)께서는 충효 집안의 명성을 잘 따라 선업을 빛내고 후손을 위하는 것으로 자신의 책무를 삼아 10여 년 동안 서울을 오르내리는 것이 거의 수십 차례였는데, 시호를 내려 주는 은전(恩典)이 특별히 내려 백대(百代)의 보첩(譜牒)이 능히 완성되었다.아! 진실로 우리 선조의 순수한 충성과 아름다운 절의가 대범하고 특출한 것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조정의 은전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또한 우리 선고(先考)의 선조를 위한 성의(誠毅)가 지극한 것이 아니었다면 또한 어찌 그 일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다만 선인(先人)이 뜻을 두었으나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이 남아 있다. 이는 근대(近代) 양세(兩世)에 시호(諡號)를 청하는 일로 여러 차례 상언(上言)을 올렸는데 끝내 은전을 받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통탄스럽기 그지없지만, 깊이 생각해보건대 한 집안의 대사가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것이 일의 형편상 끝내 쉽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혹 시운이 돌아오지 않아서 그러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아! 일의 전말이 여기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니, 불초(不肖)가 감히 덧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위의 기록은 햇수에 따라 기록되어 있어 혹은 물에 잠겨 자획(字畵)을 판별하기도 어렵고 혹은 먼지 속에 파묻혀 문리(文理)를 이해하기도 어려워 세월이 오래되면 장차 유실(遺失)되고 훼손되는 결과를 면치 못할 것 같았다. 그러므로 감히 이를 수집하고 베껴 써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우리 집안의 유물3)로 만들고, 장차 우리 선고(先考)의 자손 된 자들로 하여금 그 일을 생각하여 척연(惕然)히 계술(繼述, 선대의 사업을 계승)하게 하고 이 책을 열람하여 출연(怵然)히 느끼고 사모하여 백세(百世)토록 실추되지 않게 한다면 또한 어찌 선조를 계승하고 후손에게 복록을 물려주는 도리가 아니겠는가. 이에 감히 외람됨을 잊고 대강의 전말을 서술하였다.숭정기원 후 네 번째 신미년(1811, 순조11) 중춘에 불초고(不肖孤) 석년(錫年)이 피눈물을 흘리며 삼가 쓰다.서행록(西行錄) ③ - 송석년(宋錫年) 嗚呼! 此先考節窩府君, 爲吾家譜牒與先祖忠剛公請諡事, 西行錄日記也。 噫!, 先祖有美實, 而子孫不述焉, 則是忘其先也; 先祖無美實, 而子孫飾虛辭稱道之, 則是誣其先也。 忘與誣雖殊, 其陷於不義則一也。 是故文人學士, 自述其先德者, 不可殫記。 太史遷自述其世家實譜, 而不忘其先烈, 朱夫子亦述其韋翁行錄, 而不誣其先志, 後世韙之。 不肖雖不敢望古人之萬一, 而安敢飾虛辭誣先德也? 嗚呼! 吾先考克遵忠孝家聲, 以光先裕後爲己責, 十餘年間, 上下京洛將至數十度, 而贈諡之恩典特蒙, 百代之譜牒克成。 噫! 苟非吾先祖精忠姱節磊落偉卓, 安能蒙朝家之全? 亦非吾先考爲先誠毅之極, 亦安能就其事乎? 但先人之有志, 未就者存焉。 近代兩世請諡事, 累呈上言, 終未蒙恩典。 庸是爲痛遺恨, 盖深竊想一家之大事, 同時幷成, 事勢之終未易而然歟? 抑或運會之不迴而然歟? 嗚呼! 事之顚末, 詳記於是錄, 則非不肖所敢贅者, 而竊恐右錄隨年隨記, 或水沈而字畵難辨, 或塵埋而文理難曉, 歲久年深, 將未免遺失而毁傷, 故敢此收集謄, 合爲一卷, 以爲吾家之靑氊, 將使爲吾先考之子孫者, 想其事而惕然繼述, 覽是編而怵然感慕, 以至百世而不墜, 則亦豈非承先貽後之道也耶? 玆敢忘猥, 略敍顚末。崇禎紀元後, 四辛未之仲春, 不肖孤 錫年, 泣血謹書。 절와부군(節窩府君) 송지행(宋志行)을 가리킨다. 부군(府君)은 죽은 아버지나 남자 조상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 위옹(韋翁) 주자의 부친인 위재(韋齋) 주송(朱松, 1097~1143)으로, 남송 고종 때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위재는 호이고 자는 교년(喬年), 시호는 헌정(獻靖)이다. 남송 고종 때 이부랑(吏部郞)의 벼슬을 지냈으나 간신 진회(秦檜)가 주도하는 금나라와의 화의에 반대하다가 폄적되었다. 저서로 《위재집(韋齋集)》 등이 있다. 청전(靑氈) 대대로 전승된 가업(家業)이나 한 유물을 가리킨다. 진(晉)나라 왕헌지(王獻之)가 누워 있는 방에 도둑이 들어와서 물건을 모조리 훔쳐 가려 할 적에, 그가 "도둑이여, 그 푸른 모포는 우리 집안의 유물이니, 그것만은 두고 가는 것이 좋겠다.[偸兒! 靑氈我家舊物, 可特置之.]"라고 하자, 도둑이 질겁하고 도망쳤다는 고사가 있다. 《晉書 卷80 王羲之列傳 王獻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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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1년(신사) 1821年(辛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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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三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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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三月 지난 경신년(1820, 순조20) 3월, 나는 아버님을 모시고 상경하여 서울에서 몇 달을 머물다가 왔다. 금년 신사년(1821, 순조21)에 서재(西齋)1) 선조의 행록(行錄)을 개간하기로 해서 오촌(鰲村) 장석(丈席)2)의 서문을 받아 오도록 문중(門中)에서 나와 이찬(而贊)에게 위임하였다. 그래서 지금 호행(湖行)에 필요한 행장을 꾸려서 경성(京城)으로 갈 계획이다. 去庚申三月, 余陪親上洛, 留京數月而來矣。 今年辛巳, 西齋先祖行錄, 將欲開刊, 而受弁卷之文於鰲村丈席之意, 門中屬余及而贊, 故今將治發湖行, 仍向京城計矣。 서재(西齋) 선조 송간(宋侃, 1405~1480)으로, 본관은 여산(礪山), 호는 서재(西齋)이다. 세종·문종·단종의 3조를 섬겨 벼슬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1455년 왕명으로 남방을 순시하고 돌아오다가 단종이 영월로 쫓겨 갔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영월에 가서 복명하고, 고향 여산으로 돌아가 두문불출하였다. 단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깊은 산속에 들어가 삼년상을 마치고, 흥양(興陽) 마륜촌(馬輪村) 산정(山亭)에 숨어 지냈다. 10여 년 뒤에 가족이 찾아냈으나 항상 술에 만취하여 산천을 돌아다니며 대성통곡하므로 모두들 미쳤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생애를 마쳤는데, 지금도 그곳을 서재동(西齋洞)이라 한다. 《일성록》 정조 17년 계축(1793) 12월 21일에 충강(忠剛)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오촌(鰲村) 장석(丈席) 송치규(宋穉圭, 1759~1838)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기옥(奇玉), 호는 강재(剛齋)이며, 송시열(宋時烈)의 6대손이다. 순조 때 이조참판까지 올랐으나 모두 사퇴하였고, 현종 때 정헌 대부에 올랐다. 천성이 온순하고 의리에 투철하여 그가 죽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으며, 문인 100여 명이 상복을 입고 상여를 따랐다. 이이, 김장생의 학문을 계승하여 '이기일원론'을 주장하였으며,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송치규의 온순한 성정에 스승인 김정묵이 호를 강재라 지어 주었다고 하는데, 51세 때 회덕의 오촌으로 이사를 가고 난 다음에는 오촌을 자신의 호로 사용한 듯하다. 저서로 《강재집(剛齋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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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二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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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十三日 차동(車洞)의 민 판서(閔判書) 집에 가서 주인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후근의 집으로 돌아와 묵었다. 往車洞 閔判書宅, 與主人暫敍, 還來厚根家留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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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二十二日 여러 날을 머물러 있으면서 청한 문자를 받아가려는 생각에 동행 윤익(允益)을 오후에 행장을 꾸려 내려 보냈다. 객지에서 서로 헤어지니 서글픈 마음을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欲爲多日留連, 奉請文字受去之意, 同行允益, 午後治發下送。 客裡相分, 悵懷不可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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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十六日 태평동(太平洞)의 송 진사(宋進士) 집에 가서 《장릉지(莊陵誌)》42)를 보고 싶다고 누누이 부탁하였더니, 다른 곳에서 구해 오겠다고 하기에 오후에 다시 오기로 약속하였다. 삼청동(三淸洞)의 승지 이헌기(李憲綺) 집으로 갔으나 승지가 궐내로 들어가 만나지 못하고, 그 아우인 주서(奏書) 헌위(憲緯)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호동(壺洞)의 남상(南相) 집에 갔으나 남상(南相)도 입궐하여 만나지 못했다. 돌아오는 도중에 길에서 공서(公瑞)를 만나 잠깐 이야기하다가 오후에 나오겠다고 하기에 좋다고 답하였는데, 종각에 와서 기다려도 끝내 오지 않았다. 오는 길에 태평동에 들렀더니 진사가 《장릉지》를 얻어 오라고 종씨(從氏)의 집에 노복을 보냈는데, 잃어버려서 없다고 답하였다니 한탄스럽다. 곧바로 나와 주인집으로 갔는데, 공서(公瑞)가 찾아왔다가 우리들이 없어서 도로 들어갔다고 하니, 한탄스럽다. 往太平洞 宋進士家, 以《莊陵誌》得見之意, 累累言托, 卽求得他處云, 故以午後更來爲約。 往三淸洞 李承旨 憲綺家, 則承旨入闕內, 不得相面, 與其弟奏書憲緯暫敍。 往壺洞 南相家, 則南相亦入闕, 不得相面, 而來路逢公瑞於路上, 暫話以午後出來爲言, 故答以好矣, 而來待鍾閣, 終不來, 故來路入太平洞, 則進士以《莊陵誌》得來之意, 專爲送奴於其從氏家矣。 答以見失不在云, 可歎, 而卽爲出來主人家, 則公瑞出來, 以吾輩之不在, 還爲入去云, 可歎。 장릉지(莊陵誌)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강원도 영월로 추방되어 죽기까지의 사실과 숙종 때 복위된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1711년에 박경여(朴慶餘)와 권화(權和)에 의해 목판본 4권 2책으로 처음 간행되었다. 이 책은 1711년(숙종37) 당시 영월부사 윤순거(尹舜擧)가 편찬한 《노릉지(魯陵誌)》 2권을 구지(舊誌)라 하고, 그 뒤 박팽년(朴彭年)의 9세손 경여가 권화와 함께 속지(續誌) 2권을 증보해 《장릉지》라고 개제하였다. 구지인 《노릉지》는 노산군(魯山君)의 능호(陵號)에 따른 것이고, 구지와 속지를 합편, 개제한 《장릉지》는 노산군이 숙종 때 단종으로 복위된 뒤의 능호인 장릉(莊陵)에 따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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