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기록문화
통합검색플랫폼

기관별 검색

검색 범위 지정 후 검색어를 넣지 않고 검색버튼을 클릭하면 분류 내 전체 자료를 볼 수 있습니다

전체 으로 검색된 결과 56403건입니다.

정렬갯수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23일 二十三日 추웠다. 종일토록 몹시 아팠다. 또 설사 증세가 매우 심각하니 몹시 염려스럽다. 寒。 終日大痛。 又得泄瀉症甚危重, 極可悶慮。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24일 二十四日 추웠다. 寒。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16일 十六日 ○심형의 병이 여전히 차도가 없어서 연달아 탕약을 복용하여, 오후에는 조금 나아지는 듯하였다. 이날 종루에 갔다가 돌아왔다. ○心泂之病, 仍爲不差, 連用湯製, 午後如有微。 是日往鍾樓而還。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20일 二十日 ○몹시 추웠다. 종일 고준(考準)하였다. 점심 무렵 음식을 마련하여 주인과 객이 함께 먹고 그대로 유숙하였다. ○極寒。 終日考準。 而午間備飮食, 主客飮啖, 仍留。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7일 初七日 이른 아침에 이조(吏曹)의 서리(書吏)와 방직사령(房直使令)13)들이 어보를 찍은 관고(官誥)를 받들고 와서는 예채(例債)14)를 요구하니, 각각의 요구에 수응하여 통례원(通禮院)15)으로 보냈다. 서원(書員)16)이 왔기에 거행규례(擧行規例)를 상세히 물어 조목조목 열거하여 써오게 하여 흥양(興陽)으로 전송(傳送)하도록 하였다. 해영(海營)의 서간(書簡)이 도착하였고 돈도 올라왔다. 이 선달(李先達)에게서 돈이 또한 도착하였는데, 바라던 바와 크게 어긋나니 탄식할 만하다. 早朝吏曹書吏及房直使令輩, 奉監官誥安寶, 因索例債, 各各酬應, 以送通禮院。 書員來見, 故詳問擧行規例, 使之條列書來, 以爲傳送興陽之地。 海營書簡來到, 而錢亦上來。 李先達處錢亦來到, 大違所望, 可歎。 방직 사령(房直使令) 방직은 관아의 심부름꾼의 하나인 방지기이며, 사령은 여러 관사(官司)에서 잡무를 보는 하급 관원 혹은 심부름꾼을 말한다. 예채(例債) 전례(前例)에 따라 바치는 돈이나 물품으로, 의례적으로 요구하는 수고비를 말한다. 통례원(通禮院) 국가의 의례(儀禮)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관아를 말한다. 서원(書員) 조선 시대에 각 관청에서 사환잡역(使喚雜役) 및 문서, 회계, 공사전달(公事傳達) 등을 맡았던 향리(鄕吏)를 가리킨다. 주로 서리(書吏)가 없는 관청에 배속된 아전의 하나로서 서리(胥吏)보다 격이 낮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23일 二十三日 ○일행과 출발하였다. 청파의 영대 집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행장을 꾸려 길가로 나오니 임실의 일행은 먼저 출발하였다. 노량(露梁, 서울 노량진)으로 가니 내년 동가(動駕)45) 때 쓸 배다리[舟橋]46)를 만들기 위해 모든 배가 다 와서 강 가운데 정박해 있어, 가히 장관이라 이를 만하였다. 그길로 강을 건너기 위해 강기슭 육신묘(六臣墓)47) 앞에 이르러 육신묘비(六臣墓碑)48)를 봤다. 산소를 둘러보고, 망배(望拜)하고 싶었지만, 눈이 쌓여 묘정(墓庭)을 막아 성묘를 할 수 없었다. 가다가 시흥(始興) 읍내에 이르러 콩죽을 사서 요기를 하였다. 군포천(軍布川) 주막에 이르러 임실 일행을 만나 함께 유숙하였다. 이날 밤에 큰 눈이 왔다. ○朝前, 與同行發程。 抵靑坡永大家, 仍朝飯。 治發行裝, 出來路邊, 則任實同行先去矣。 行去露梁, 則以明年動駕時舟橋次, 船隻盡爲來泊於江中, 可謂壯觀矣。 仍爲越江, 抵江岸六臣墓前, 見六臣墓碑。 周觀山所欲爲望拜, 而以雪塞墓庭, 不得省拜。 行至始興邑內。 買太粥療飢 抵軍布川酒幕, 逢任實同行, 仍爲同留。 是夜大雪。 동가(動駕) 임금이 탄 수레가 대궐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말한다. 배다리[舟橋] 작은 배를 잇달아 띄워 놓고 그 위에 널판을 건너질러 깐 다리이다. 육신묘(六臣墓) 서울 노량진에 있는 단종 복위 사건으로 죽은 박팽년(朴彭年)ㆍ성삼문(成三問)ㆍ하위지(河緯地)ㆍ이개(李塏)ㆍ유성원(柳誠源)ㆍ유응부(兪應孚)의 묘이다. 육신묘비(六臣墓碑) 서울 노량진 남쪽 기슭에 있는 사육신(死六臣)의 묘비로 1782년에 세워졌으며, 조관빈(趙觀彬, 1691~1757)이 찬(撰)하고 이휘지(李徽之, 1715~1785)가 글씨를 썼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28일 二十八日 ○새벽에 출발하여 경천(擎天)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초포(草浦)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올항(兀項)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曉發, 抵擎天朝飯。 抵草浦午飯。 抵兀項留宿。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11월 十一月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14일 十四日 밤사이 편안히 잠을 이루고, 또 별다른 증세가 일어나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해가 뜨자 길을 나서 화성(華城)에 이르러 요기를 한 다음, 오산(烏山)까지 50리를 가서 말에게 꼴을 먹이고 점심을 먹었다. 소사(素沙)까지 40리를 가서 묵었다. 夜間安寢, 又無別症之作, 可幸。 日出登程, 至華城療飢, 至烏山五十里, 秣馬中火。 至素沙四十里留宿。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3일 初三日 밥을 먹은 뒤에 박 상사(朴上舍)가 와서 말을 샀다고 하였으므로 7일에 길을 떠나기로 약속하였다. 食後朴上舍來言買馬云, 故約以七日發程。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5일 初五日 아침을 먹기 전에 근동(芹洞)에 가서 한참을 서로 이야기하고 왔다. 저녁에 김 참봉(金參奉)의 집에 가서 머물며 이야기를 나눈 뒤에 작별하고 왔다. 朝前往芹洞, 移時相話而來。 夕往金參奉家留話, 作別而來。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11일 十一日 저교(楮橋)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능측(陵側)에서 묵었다. 至楮橋中火, 留宿於陵側。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15일 十五日 차동(車洞)에 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에 주인집 겸동(傔童, 어린 하인)을 거느리고 근동(芹洞)40)의 이 참봉(李參奉) 집에 갔으나 주인이 부재중이라서 얼굴을 보지 못하고 서소문(西小門)으로 왔다. 동행과 태평동(太平洞)41)의 진사 송영재(宋永載) 집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주인이 정성껏 대접해 주어 기쁘고 다행스러운 중에도 서글픈 심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회포를 푼 뒤에 창동(倉洞)에 가서 승지 이광헌(李光憲)의 집을 찾아갔더니 낙동(絡洞)으로 이주하였다고 하기에 찾아갔으나 이 승지는 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 나갔다고 하므로 만나지 못했다.이광문(李光文)의 집에 찾아 갔더니, 주인은 지난해에 부친 상(喪)을 당하여 현재 상중(喪中)이었는데, 광문(光文)은 출타하여 얼굴을 보지 못하고, 다만 그 아우에게 조문하였다.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에 회동(晦洞)의 송 장성(宋長城) 집에 찾아가 장성(長城)의 부친 익형(翼亨)씨 형제를 만났다. 두 노인이 정성스레 대접해 주었으나 서글픈 감회를 억제할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회포를 풀고 돌아오는 길에 필동(筆洞)의 본관(本官) 집에 들어가 본관(本官)의 대인부친을 만나고 곧바로 나왔다. 往車洞暫話後, 率主家傔童, 往芹洞 李參奉家, 以主人之不在, 不得相面, 來西小門。 與同行往太平洞 宋進士 永載家敍話, 主人款接喜幸中, 悲懷不可禁。 移時祗敍後, 往倉洞尋李承旨 光憲家, 則移居于絡洞云, 故尋往則李承旨以慶州 府尹出去云, 故不得相面。 尋往李光文家, 則主人年前, 遭其大人喪, 方在喪中, 而光文則出他不得相面, 只與其弟吊慰。 暫話後, 尋往晦洞 宋長城家, 見長城大人翼亨氏兄弟, 則兩老人款接, 不勝悲感之心矣。 移時秪敍, 來路入筆洞本官家, 見本官之大人, 卽爲出來。 근동(芹洞)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5가에 있던 마을로서, 미나리를 재배하는 논이 넓게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을 미나릿골로 불렀으며, 이를 한자명으로 표기한 데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태평동(太平洞)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4가・북창동・서소문동・태평로2가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서소문동에 조선시대에 중국 사신을 머물게 하고 접대하던 태평관이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하였다. 태평관골이라고도 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9일 初九日 일찍 출발하여 괴산읍(槐山邑)에 이르러서 점심을 먹고, 음성(陰城)의 당동(棠洞) 주막에 이르러 묵었다. 90리를 갔다. 早發至槐山邑, 乃中火, 抵陰城 棠洞酒幕留宿。 行九十里。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25일 二十五日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14일 十四日 아침을 먹기 전에 신정(新亭)의 복금(卜金)을 데리고 묘동(廟洞)으로 갔다. 돈 한 냥을 가지고 한용(韓溶), 야당(野塘)의 종인(宗人) 연영(延英)과 장방(長房)에 들어가 재록(載錄)하려는데, 《전라도원록(全羅道院錄)》은 규장각(奎章閣)에 들어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육현(六賢)의 사적(事蹟)을 기록해 두었다가 후일 착실하게 써서 들이라는 뜻으로 누누이 부탁의 말을 하였으나 마음이 매우 편치 않았다.주인집으로 나와서 약간의 물품과 실기(實記)를 가지고 주인과 예조에 가서 안 동지(安同知)의 아들 인성(寅成)을 방문하였다. 그는 이제 막 예조의 서리가 되었다. 약간의 물건을 주고서 강성주(姜聖周)에게 예사문(禮斜文)22)을 써 달라 부탁했었다고 녹사(錄事)23)에게 말하자, "들어온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나중에 배광옥(裵光玉)과 정성들여 써서 들여 달라고 하니, 말씀하신 대로 처리할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다.급히 묘동(廟洞)으로 가서 공서(公瑞)와 이 석사(李碩士)에게 내일 내려가겠다고 작별인사를 하였다. 저녁에 경주인 집에 이르니 김계한(金啓漢)이 동행들과 오후에 먼저 출발하였다고 하니, 한탄스럽다. 해가 진 뒤에 남대문(南大門) 강지문(姜之文)이 머물고 있는 곳에 가서 내일 동행하기로 약속하였다. 서소문(西小門)으로 나가 차동(車洞) 민 판서(閔判書)의 집으로 가서 주인 치항(致恒)과 함께 묵었다. 食前率新亭 卜金往廟洞, 持百兩錢, 與韓溶 野塘宗人延英, 入長房載錄, 則《全羅道院錄》入奎章閣云。 故記草六賢事蹟, 使後日着實書入之意, 累累言托, 而心甚不安也。 出來主人家, 與主人持略干物及實記, 往禮曹, 訪安同知子寅成, 則卽見今才禮曹 書吏也。 給若干物, 托姜聖周禮斜文云言錄事, 則答曰: "不無所入云矣。" 日後與裵光玉, 着實書入爲言, 則如敎爲計, 勿慮云云矣。 急往廟洞, 與公瑞及李碩士, 明日下去之意作別。 暮抵京主人家, 則金啓漢同行午後先發程云, 可歎耳。 日落後, 往南大門 姜之文所住處, 約以明日同行。 出西小門, 入車洞 閔判書家, 與主人致恒同宿。 예사(禮斜) 예조에서 양자(養子)의 청원을 허가해 주던 제도 또는 그 공문이다. 녹사(錄事) 조선 시대 중앙 관서의 상급 서리직이다. 의정부와 중추부에 나뉘어 소속되었으며, 문반의 관부에는 의정부에서 무반의 관부에는 중추부에서 나누어 파견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2품 이상의 실권이 있고 업무가 많은 관부나 대신들에게 배정되어 문서의 취급과 기록, 연락 업무, 공문서의 전달, 기타 잡무를 담당하였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15일 十五日 아침을 먹기 전에 회동(晦洞)에 가서 송영재(宋永載) 궤연(几筵)24)에 조문하였다. 상제(喪制) 지순(持淳)을 위로하고 실기(實記) 한 권을 주었다. 위채 사랑에 올라가 장성(長城) 숙부 송익형(宋翼亨) 씨를 만나니, 나를 보고 반갑게 맞이해 주어 매우 고마웠다. 실기(實記) 한 권을 주고, 여산제각(礪山祭閣)을 영건하는 일에 대해 말하자 가을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추수한 뒤에 올라와 함께 논의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이어 하직 인사하고 돌아오는 길에 난동(蘭洞)25)의 이 참의(李參議)에게 들렀다. 마침 낙동(洛洞)의 승지 이광헌(李光憲)과 종제(從弟)인 참판 이광문(李光文)이 와 있어서 한 자리에서 만났다. 실기(實記)를 주었더니, 이광문도 책자를 청하였기 때문에 다음 인편을 기다렸다가 가지고 오겠다고 하였다. 이어서 사액(賜額)을 청하는 일은 영읍(營邑)에 일을 고하는 날에 반드시 영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더니 답하시기를,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인데 그 사이에 내가 뭘 어찌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어 말씀하시기를, "한포재 서원 건립에 관한 일은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대사(大事)는 반드시 때가 있을 것이니, 후일을 기다려 상의하세나."라고 하였다.오는 길에 송유재(宋儒載)에게 실기(實記) 한 권을 주었더니, 각처에 지급할 것을 전달하겠다고 하기에 여섯 권을 부탁하였다. 오는 길에 학교동(學橋洞)26) 강화(江華) 송면재(宋冕載)의 집에 들러 그의 아들 지학(持學)을 만나 실기 한 권을 주었다. 이어 서소문(西小門) 밖 이희(李)의 집으로 나와 작별하였다. 차동(車洞)의 민치항(閔致恒) 집으로 내려와 작별한 다음, 아래채 사랑으로 가서 치명(致明)과도 작별하였다. 약현(藥峴)으로 가서 오위장(五衛將, 송인서(宋璘瑞)를 말함)과 작별하고 청파(靑坡)27)의 주인집으로 돌아왔다.강지명(姜之明) 부자, 강휘길(姜彙吉), 송순(宋淳)과 동행하여 오후에 길을 떠났다. 한강에 이르러 즉시 나루를 건너고 과천(果川) 읍내에 이르러 묵었다. 30리를 갔다. 食前往晦洞, 吊宋永載几筵, 與喪人持淳致慰, 給實記一卷。 上上舍廊, 見宋長城叔翼亨氏, 則見我忻待, 可感可感。 給實記一卷, 仍說礪山祭閣營建事, 則待秋爲計, 秋成後上來同議爲可云矣。 仍辭來路入蘭洞 李參議, 則洛洞 李承旨 光憲及其從弟參判 光文適來會。 仍見一座上, 仍給實記, 則光文, 亦自請冊子, 故待後便持來爲言。 仍說請額事, 所營事之日, 必賴諸令監之力, 答曰: "力不及處, 則何其於間乎。" 仍說"寒圃齋建院事, 則何可易也。 大事必有時矣, 待後相議。 "云矣。 來路見宋儒載, 給實記一卷, 則各處所給, 以傳致爲言, 故囑六卷。 來路入學橋洞 宋江華 冕載家, 見其子持學, 給實記一卷。 仍出西小門外李家作別。 下來車洞 閔致恒家作別, 往下舍廊, 致明作別。 往藥峴, 與五衛將作別, 下來靑坡主人家。 與姜之明父子及姜彙吉、宋淳同行, 午後發程。 到漢江, 卽爲越津, 抵果川邑內留宿。 行三十里。 궤연(几筵) 궤연은 영좌를 말한다. 영좌는 영상(靈床)과 함께 살아계실 때와 똑같이 모시기 위하여 초종(初終)에 설치하는 것이다. 즉 아침이 되면 영상에서 영좌로 혼백을 모셔 놓고, 밤이 되면 다시 영좌에서 영상으로 혼백을 모신다. 다시 말해 영좌는 혼백이 거처하는 곳이고 영상은 혼백이 취침하는 곳이다. 난동(蘭洞)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2가에 있던 마을로서, 조선 선조 때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이 이곳에 살면서 일가와 더불어 풍류를 즐기고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모인 난정계연(蘭亭禊宴)을 자주 열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한자명으로 난정이문동(蘭亭里門洞)·난정동(蘭亭洞)이라 하고 줄여서 난동(蘭洞)이라 하였다. 학교동(學橋洞) 송면재(宋冕載)의 집을 방문하고 이어 이동하는 동선으로 볼 때 '학교동(學橋洞)'은 서울특별시 중구 서소문동에 있던 마을인 '학교동(鶴橋洞)'의 오기인 듯하다. 청파(靑坡) 서울 용산구의 청파동이다. 청파(靑坡)라는 이름은 '푸른 언덕'이라는 뜻인데, 청파동이 연화봉(蓮花峰)이라는 푸른 야산에 위치한 데에서 유래하였다는 설과, 조선 세종 때 명인인 청파 기건이 거주하였던 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16일 十六日 새벽에 출발하여 사근천(肆覲川, 현 의왕시 왕림마을)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대황교(大皇橋)28) 근처에 이르러 동행과 용주사(龍珠寺)29)에 들어가 승려 정현(貞賢)을 찾아보았다. 정현은 바로 흥양 탑승(興陽塔僧)이었는데, 지금은 이 절에 있다. 천보루(天保樓)30)에 누워서 낮잠을 자고 나니 정현이 점심을 내왔다. 밥을 먹은 뒤에 육당(陸堂)의 부처를 완상하니 다른 것과 별다른 것이 없었는데, 불좌(佛座)31) 좌우에 쌍대 유리등(雙臺琉璃燈)이 있었다. 정현이 말하기를, "이 등은 바로 선왕(先王, 정조를 말함) 때 어전의 물건으로, 이 절에 하사하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동쪽 편에 큰 목궤(木櫃)가 있어 열어 보니 또한 어전 책상(御前冊床)이었다. 이 세 가지 물건들은 평생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어 건릉(健陵)32) 아래로 가서 멀지 않은 곳에 능소(陵所)의 석물(石物)을 바라보니 또한 평생의 장대한 구경이었다. 길을 재촉하여 오산(烏山)33)에 이르러 묵었다. 80리를 갔다. 曉發抵肆覲川朝飯。 抵大皇橋邊, 與同行入龍珠寺, 訪貞賢僧, 僧乃興陽塔僧, 方在此寺者也。 臥天保樓就寢後, 賢也進午飯。 飯後玩陸堂佛, 則與他無別, 而佛座左右, 有雙臺琉璃燈, 而賢僧曰: "此燈卽先王以御前之物, 賜此寺者也。" 東邊有大木櫃, 而開示則亦御前冊床也。 此三物平生初見也。 仍往健陵下, 不遠之地, 瞻望陵所石物, 亦平生壯觀也。 促行抵烏山留宿。 行八十里。 대황교(大皇橋) 대황교의 본래 위치는 수원시 대황교동과 화성시 황계동의 경계에 있었는데, 수원시 권선구 대황교동 138번지 부근의 황구지천이다. 《대동지지》를 보면 대황교가 남쪽으로 15리, 건릉(建陵)의 영내에 있다고 하였다. 용주사(龍珠寺) 경기도 화성시 화산(花山)에 있는 조선후기 현륭원의 능사로 창건된 사찰이다. 천보루(天保樓) 용주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로, 1983년 9월 19일 경기도의 문화재자료 제36호로 지정되었다. 1790년(정조14) 정조가 장헌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용주사를 세우고, 이때 대웅보전(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5호)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문루로 함께 세워진 것이 천보루이다. 불좌(佛座) 부처가 앉거나 서 있는 대좌를 말한다. 건릉(健陵) 정조(正祖)의 능이다. 지금은 1821년(순조21)에 승하한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金氏)와의 합장릉(合葬陵)을 지칭한다. 오산(烏山) 경기도 남서쪽에 있다. 옛날에는 서해에서 오산에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배가 드나들었다고 하여 오산(鰲山)이라 불렸다고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조선 중기에는 오미장(梧美場)으로 불리거나 다른 지방보다 까마귀가 유난히 많다고 하여 오산(烏山)으로 불렸다고 한다.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9월 九月

상세정보
저자 :
(편저자)
유형 :
고전적
유형분류 :
사부

24일 二十四日 ○영윤과 같이 자면서 실로 뜻이 맞아, 절구 한 수를 다음과 같이 읊어서 주었다.우연히 서로 만난 것이 기약해서 만난 것보다 나으니(偶與相逢勝有期)산은 온통 붉은 단풍 들판은 황금빛으로 물든 시절이라(山多紅葉野黃時)하룻밤 나란히 누워 자니 오히려 서글픈 마음만 남기에(一宵聯枕猶餘悵)은근한 마음으로 이별을 아쉬워하는 시를 지어서 주네(贈以慇懃惜別詩)영윤이 차운하여 다음과 같이 읊었다.벗이 먼 곳으로부터 와서 기약도 없이 만났으니(朋自遠方會不期)단풍 물들고 노란 국화 피는 마침 좋은 계절이라(丹楓黃菊正佳時)가슴에 쌓인 회포 다하지 못했건만 도로 이별하니(襟懷未盡還爲別)은근한 마음에 같이 술을 마시며 다시 시를 논하네(慇懃同酌更論詩)율지가 차운하여 다음과 같이 읊었다.세 늙은이 옷깃 나란히 하여 기약이 있는 듯하니(三老聯襟若有期)마침 북쪽 기러기가 남쪽으로 가는 계절이로구나(正當北雁向南時)새벽 창가에 새벽달 희미해질 때 서로 헤어지니(曉窓殘月相分手)아쉬운 작별의 회한이 남아 시를 지어서 드리네(惜別餘懷贈以詩)그길로 헤어져 출발하였다. 여산(礪山)85) 읍 앞 객점에 이르러 밥을 먹기로 하고 황산(黃山)86)과 부여(扶餘)로 가는 노정(路程)을 물었다. 그곳에 들리는 것은 황산의 죽림서원(竹林書院)87)에 참배하고, 그길로 부여로 가서 생원 김호일(金浩一)을 찾아가는 일 때문이었다. 황산에 못미처서 중도에 길을 잃은 것이 수차례여서 간신히 찾아가 황산의 서원 밑에 이르렀다. 먼저 장암(場岩)에서 이 마을로 이거한 송문언(宋文彦)을 찾아갔다. 안부 인사를 나누고 나서 서원을 참배하려는 뜻을 말하고, 이에 모두 원우(院宇)로 갔다. 수복(首僕)을 불러 분부하니, 수복이 재복(齋服, 재계할 때 입는 옷) 2벌을 가지고 왔다. 그러므로 재복을 입고 서원 마당에서 참배하고 신실(神室)로 들어가 봉심(奉審, 사당을 살핌)하니, 정암(靜庵), 퇴계(退溪), 율곡(栗谷), 우계(牛溪), 사계(沙溪), 우암(尤菴) 여섯 분의 선생이 배향되어 있었다. 신실(神室)의 처마 사이에는 '죽림서원'이라고 걸려 있었다, 강당 앞에는 작은 석비가 세워져 있었는데, 앞면에 팔분체(八分體)로 '황산서원비(黃山書院碑)'라고 적혀있었다. 서원 터와 원우(院宇)가 아주 넓고 훤했다.참배하고 나서 《심원록(審院錄)》에 이름을 적고, 송문언을 따라 황산 봉우리에 오르니 송림이 깊고 그윽한 곳에 정자 하나가 있었다. 처마에 '팔괘정(八卦亭)'88)이라는 편액이 있었다. 방안 사방 벽에는 팔괘가 그려져 있었는데 바로 노 선생(송시열)이 그 당시 독서를 하던 당이었다. 지금도 독서하는 두서너 관동(冠童)이 있었다. 당 뒤의 수풀 사이 석벽에는 "청초안(靑草岸), 몽괘벽(夢掛壁), 일감당(一鑑塘), 삼계리(三桂里), 평주도(平疇島)"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는데 모두 노 선생의 필적이었다. 앞에는 큰 바다(금강(錦江)을 말함)가 있고 뒤에는 강경(江鏡)이 있어 매우 아름다운 곳이었으나, 갈 길이 바쁜 관계로 상세히 보지는 못하고 그길로 내려와 술을 사서 서로 마시고 작별하였다. 송문언은 영윤이 알려준 사람이었다. 날이 이미 저물어 급히 강경 마을 앞 나루를 건너 5리를 갔다. 또 굴암(屈岩) 나루를 건너 출발하였다. 석성(石城)89)의 마치(麻峙) 객점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60리를 갔다. 강경은 여염집이 즐비하고, 선박이 왕래하여 원산(元山)보다 못하지 않았다. ○與令倫同聯枕, 實是意同, 吟一絶以贈。 "偶與相逢勝有期, 山多紅葉野黃時。 一宵聯枕猶餘悵, 贈以慇懃惜別詩。" 令倫次曰: "朋自遠方會不期, 丹楓黃菊正佳時。 襟懷未盡還爲別, 慇懃同酌更論詩。" 聿之次曰: "三老聯襟若有期, 正當北雁向南時。 曉窓殘月相分手, 惜別餘懷贈以詩。" 仍爲分袂而登程。 抵礪山邑前店期飯, 問黃山扶餘路程。 仍入者, 欲爲審拜於黃山竹林書院, 仍向扶餘, 訪金生員浩一故也。 未及黃山, 中路失路者數次, 艱尋抵黃山院底。 先訪自場岩移寓於此村宋文彦。 敍寒暄後, 因言瞻拜書院之意, 則仍爲偕往院宇。 招首僕分付, 則首僕持來齋服二領。 故着齋服, 瞻拜院庭, 入神室奉審, 則靜菴、退溪、栗谷、牛溪、沙溪、尤菴六先生配享。 而神室楣間, 揭以"竹林書院"。 講堂前立小石碑, 前面以八分書"黃山書院碑"。 基址與院宇甚宏闊。瞻拜後, 書名《審院錄》, 隨宋文彦上黃山山峯, 則松林深邃之地, 有一間亭閣。 楣間扁以"八卦亭"。 房內四壁畵八卦, 卽老先生當日讀書之堂也。 而至今有數三冠童讀書矣。 堂後林間石壁, 刻"靑草岸、夢掛2)壁、一鑑塘、三桂里、平3)疇島" 皆是老先生筆。 前有大洋, 後有江鏡, 甚佳麗之地, 以行忙之致, 不能詳玩, 仍爲下來, 沽酒相飮而爲作別。 宋則令倫指示之人也。 日已夕矣, 急渡江鏡村前津, 行五里。 又渡屈岩津發。 抵石城麻峙店留宿。 行六十里。 江鏡閭閻之櫛比, 船隻之往來, 不下於元山矣。 여산(礪山) 전라북도 익산의 옛 지명이다. 황산(黃山)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이다. 죽림서원(竹林書院)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에 있는 서원으로 1626년(인조 4)에 세워졌다. 1663년(현종 4)에 중건하였으며, 2년 뒤 1665년 사액되었다. 본래 창건 때에는 지명을 따서 '황산 서원(黃山書院)'이라 하였다. 서원에 제향된 조광조, 이황, 이이, 성혼, 김장생, 송시열의 6인이 모두 문묘(文廟)에 배향된 유현(儒賢)이라 하여 '육현 서원(六賢書院)'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팔괘정(八卦亭)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에 있는 누정으로, 1663년(현종 4)에 송시열이 건립하였다. 석성(石城) 충청남도 부여군 석성면이다. 掛 저본의 '桂'는 송병선(宋秉璿)의 《연재집(淵齋集)》 〈유황산급제명승기(遊黃山及諸名勝記)〉에 의거하여 '掛'로 수정하였다. 平 저본에는 없는 글자인데 송병선(宋秉璿)의 《연재집(淵齋集)》 〈유황산급제명승기(遊黃山及諸名勝記)〉에 의거하여 추가하였다.

상세정보
56403건입니다.
/2821
상단이동 버튼 하단이동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