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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初六日 오늘 정사에서 옥새를 찍었다. 주동(注洞) 자승(子昇)이 이른 아침에 와서 말하기를, "노복과 말이 올라왔다고 들었습니다. 아직 완전히 회복되기도 전인데 하향(下鄕)을 서두르다가 조섭(調攝)을 잘못할까 염려스럽다면서 가형(家兄)이 저더러 가서 만나보고 이 말을 전하라기에 찾아뵌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李)와 공(孔) 두 사람 모두 찾아와 만났는데, 내일 고향으로 출발하려 한다고 하니, 쓸쓸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이날 아침을 먹기 전부터 오한(惡寒)의 기운이 있더니 이어 두통(頭痛)과 신열(身熱)이 일어나고, 또 종일토록 심하게 앓았다. 저녁에 김 주부(金主簿)가 찾아와서 보고는 삼소음(參蘇飮) 2첩(帖)을 복용하게 하였으므로 즉시 지어 먹었다. 밤이 깊은 뒤에야 조금 나아졌다. 今日政安寶。 注洞 子昇, 早朝來言 "聞奴馬上來云, 未及蘇完之前, 急於下鄕, □有失攝之患, 故家兄使吾往見, 爲言此說, 故來見"云矣。 李、孔兩人皆來見, 將以明日發向鄕路云, 不無落漠之懷也。 是日自朝前有惡寒之氣, 因發頭痛身熱, 又作終日大痛。 夕間金主簿來見, 使服參蘇飮二帖, 故卽製服之。 夜深後小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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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初一日 창동(倉洞)에 가서 박 감사(朴監司)를 만나고, 이어 독송정(獨松亭)에 가서 문중 어른의 상(喪)을 조문하였다. 다시 주동(注洞)으로 돌아갔다가 마침 군회(君會)와 주인을 만나 종일토록 이야기를 나누고 왔다. 이날 화옥(華玉)이 떠났다. 往倉洞見朴監司, 因往獨松亭, 弔門長之喪。 轉往注洞, 適逢君會與主人, 終日談話而來。 是日華玉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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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初二日 밥을 먹은 뒤에 아이들을 경모궁(景慕宮)에 보내고 나는 피곤해 누워 있었다. 낙안(樂安)의 강 서방(姜書房)이 찾아와 종일토록 이야기를 나누었고, 저녁에는 등고치(登高峙)에 올라가서 잠시 회포를 풀고 왔다. 食後送兒輩於景慕宮, 余則困臥矣。 樂安 姜書房來見, 終日相話, 而夕間登登高峙, 暫暢而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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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二十五日 아침 전에 출발하여 유성(油城) 시장 근처에서 아침을 먹었다. 비가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비가 조금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오후에 조금 갤 기미가 있어서 비를 무릅쓰고 길을 나섰다. 척치(尺峙)를 넘어 신도(新都) 마을 어귀를 지나는데, 비가 내리는 탓에 바삐 지나가느라 들어가 보지를 못하니 한탄스럽다. 개태치(開太峙)에 이르러 묵었다. 50리를 갔다. 朝前發程, 至油城市邊朝飯。 以雨勢之不止, 留待稍霽矣。 午後少有霽意, 故冒雨發程。 越尺峙, 歷新都洞口, 而以雨意之致, 忙迫過之, 而不得入觀, 可歎。 抵開太峙留宿。 行五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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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二十六日 일찍 출발하여 직산(稷山) 삼거리에서 아침을 먹고, 여산(礪山)의 삼치(三峙)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전주 삼례(參禮)의 대천(大川)에 이르러 묵었다. 110리를 갔다. 早發抵稷山三巨里朝飯, 抵礪山之三峙中火。 抵全州 參禮 大川留宿。 行百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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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二十一日 길을 나설 때에 문등(門登)의 종인(宗人)이 그 족계(族契)의 돈 10냥을 신행(贐行)1)으로 주고, 성리(城里)의 종인 사달(士達)이 돈 3전(三戔)을 신행으로 주었다. 윤일(允日)은 돈 1전(一戔)을 신행으로 주고, 망동(望洞)의 종인은 돈 2전(二戔)을 신행으로 주었으며, 김희서(金喜瑞)는 돈 1전(一戔)을 신행으로 주었다.대곡(大谷) 형님, 가아(家兒)와 길을 나서 석촌(石村)의 송계석(宋啓錫) 집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탄포(炭浦)에 이르러 곧장 종과 말을 사교(四橋)로 보내고 나는 송창(松倉)에 가서 도감(都監) 송경렬(宋敬烈)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도감이 술을 사서 주고, 또 돈 5전(五戔)을 신행으로 주었다. 저녁에 재동(齋洞)에 이르러 묵었다. 發程之際, 門登宗人以其族契錢一兩贐行, 城里宗人士達以三戔錢贐行, 允日以一戔錢贐行, 望洞宗人以二戔錢贐行, 金喜瑞以一戔錢贐行。 與大谷兄主及家兒發行, 抵石村 宋啓錫家中火。 至炭浦, 直送奴馬於四橋, 余則往松倉, 與都監 宋敬烈暫話, 沽酒以進, 又以五戔錢贐行。 暮抵齋洞留宿。 신행(贐行) 여행하는 자에게 주는 돈과 물품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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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二十二日 아침 전에 나와 사교(四橋)의 가교(柯橋) 형님 댁에서 아침을 먹은 뒤에 문중(門中)의 종친들과 유둔(油芚) 시장 근처에 갔다. 노자(路資)가 준비되지 않아서 출발을 멈추었다가 점심을 먹고 길을 나섰다. 사촌(社村)에 이르러 대곡 형님과 가아(家兒)를 돌려보냈다. 낙안(樂安) 서령(西嶺) 주막에 이르러 동향(同鄕)을 만나 동행하였는데, 안동(鴈洞)의 친구 정여환(丁汝煥)과 사교(四橋)의 족질인 필(珌) 형제, 그리고 정두화(丁斗華)이다. 함께 머물며 30리를 갔다. 해가 질 무렵에 정 진사(丁進士)도 와서 함께 머물렀다. 朝前出來, 四橋 柯橋兄主宅朝飯後, 與門中諸宗, 往油芚市邊。 以路資不備停行, 仍午飯發程。 至社村, 還送大谷兄主及家兒。 至樂安 西嶺酒幕, 逢同鄕同行, 則鴈洞 丁友 汝煥與四橋族姪珌兄弟及丁斗華也。 仍爲同留, 行三十里。 日落時, 丁進士亦來同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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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二十三日 온종일 팔선의 집에서 머물렀다. 終日留八仙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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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十一日 이른 아침에 정 진사(丁進士)의 사관(舍館)에 갔다. 박종수(朴宗壽)와 삼청동(三淸洞)에 가서 판서(判書) 이헌기(李憲綺)16)를 들어가 뵈었다. 먼저 한포재(寒圃齋)17) 선생의 서원을 건립하는 일에 대해 말을 꺼내니, "본손(本孫)이 선조(先祖)의 서원 건립을 주선하는 것은 매우 온당한 일이 아닙니다."라고 답하였다. 다음에 말한 우리 선조의 사액(賜額)을 청한 일은 대사(大事)가 속히 이루어져 갑자기 쉽지 않다고 하였으므로 이번 길에 예조에 올려 재록하려는데, 부족한 것은 대감(大監)이 예조 판서로 있을 때 일을 하는 것이 구차하지 않고, 이번에는 구차한 계책이 많이 있다 하니 답하기를, "아무 때에 재록(載錄)하는 것도 다행입니다. 이는 사액(賜額)을 청하는 계제(階梯)이니 더욱 다행한 일입니다."라고 하였다.아래 사랑(舍廊)으로 가서 그의 아우 한림(翰林) 헌위(憲緯)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는 길에 재동(齋洞)의 임실(任實) 종인(宗人) 주인집에 들러 예조에 소장 올리는 일을 논의하였는데, "소장을 써 줄 사람이 없어서 애초에 성사가 안됐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급히 묘동(廟洞)의 귀환(龜煥) 주인집에 가서 상의하였는데 또한 걱정스럽다고 하면서, "아무쪼록 상의하기로 약속하였으니 반드시 소장을 얻어야 일이 성사될 수 있을 것입니다. 부디 흘려 듣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온 힘을 다해 이 석사에게 주선하는 방도에 대해 누누이 부탁하려고 하였으나, 이 석사가 출타하여 만나지 못하였다.저물녘에 경주인(京主人) 집에 가서 경주인과 상의해 보니 '어찌할 방법이 없다. 오늘 내일 사이에 곧장 강문명(姜文明)을 찾아가 2백여 냥의 돈을 받아 올라오는 길에 그 중 50냥을 떼어 쓰는 것이 좋겠다.' 하고, '나머지 액수는 경주인의 이름으로 보증하여 일을 처리하겠다.' 하였다. 이에 급히 재동(齋洞)으로 가서 여해(汝海)와 상의하였더니 그러면 안 된다고 하였으므로 저녁에 경주인 집으로 돌아왔다. 일이 급박하게 되었는데 끝내 변통할 방도가 없으니, 이를 장차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동행과 그대로 주인집에 머물렀다. 早朝往丁進士舍館。 與朴宗壽, 往三淸洞, 入謁李判書 憲綺。 先言寒圃齋先生建院事, 則答曰: "以本孫其先祖建院, 周旋極未安。 " 次言生之先祖請額事, 則大事速成, 猝難不易云, 故今行呈禮曹載錄, 而所欠者, 大監 禮判時做事, 則不爲苟且, 今番多有苟且之計, 則答曰: "某時載錄, 亦可幸矣, 此則請額之陛梯也, 幸幸。"云矣。 往下舍廊, 其弟翰林 憲緯暫敍。 來路入齋洞 任實宗人主人家, 論其呈禮曹事, 無入手之地, 則初不成事云, 故急往廟洞 龜煥主人家相議, 亦爲悶慮云, "約以某條相議, 必得狀後事可成, 幸勿泛聽。" 與李碩士, 極力周旋之道, 累累言托, 李碩士出他不見。 乘暮來京主人家, 與京主人相議, 則亦無奈何, 而今明間, 直訪姜文明, 持二百餘兩錢, 上來之道, 厥錢中五十兩, 推用爲可云云, 餘數則以京主人名爲證處事云云。 故急往齋洞, 與汝海相議, 則不然云, 故乘暮還京主人家。 事成急迫, 而終無變通之道, 此將奈何? 與同行仍留主人家。 이헌기(李憲綺) 1774~1824.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822년 대사헌, 예조판서·수원부유수·우참찬·장례원제조를 지냈다. 한포재(寒圃齋) 이건명(李健命, 1663~1722)의 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강(仲剛)이다. 좌의정을 지냈으며, 1721(경종1)에 왕세제 책봉을 주청하여 실현하였으나, 신임사화 때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노론사대신(老論四大臣)의 한 사람이다. 저서로 시문과 소차(疏箚)를 모은 《한포재집(寒圃齋集)》 10권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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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初七日 오늘 아침밥도 주인댁에서 준비해 주었다. 장석이 말씀하시기를, "이 고을의 수령이 자녀 상(喪)을 당하였으니 가서 만나보고 위로를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그 기별은 듣지 못하였지만 마땅히 들어가 뵙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밥을 먹은 뒤에 읍내로 들어갔으나, 혼금(閽禁)59) 때문에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저녁을 먹고 사랑에 들어갔더니 문자를 내보이시면서 내게 읽어 보라고 하셨다. 이에 한차례 읽고 나자 장석의 아들 지(枝)와 흠성(欽成)에게도 읽어 보게 하셨다. 또한 한차례 읽으니 그대로 내주어서 행랑채로 가지고 왔다. 60여 일 끝에 글을 받들고 나왔으니 그 기쁨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가 있겠는가? 이날 전주(全州)의 최수일(崔洙一)도 요청한 글을 개정(改正)하기 위하여 도착하였다. 朝飯亦自主人宅備給。 丈席曰: "本倅遭其子女喪, 未可往見而致慰耶?" 余對曰: "此奇則未聞, 而當入見矣。" 食後入去邑內矣, 以閽禁之致, 不得見而爲出來。 夕飯入去舍廊, 則以文字出示, 而使余讀之爲敎, 故一次讀下, 則又使其子枝·欽成讀之, 亦以一次讀下, 則仍爲出給, 故持來廊底。 六旬之餘, 奉出文字, 其喜何可言? 是日全州 崔洙一, 亦以請文改正次來到。 혼금(閽禁) 관청에서 잡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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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二十日 일찍 밥을 먹고 과역(過驛)을 지나니 아들 석년(錫年)이 노복과 말을 거느리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또 천평의 질객(姪客)이 석촌(石村)에서 배회하고 있다는 기별을 듣고 노복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게 하였다. 오래지 않아 남촌의 형님이 질객(姪客)을 데리고 왔으므로 요기를 한 뒤에 즉시 집으로 돌아왔다. 早飯至過驛, 年兒率奴馬來待矣。 又聞泉坪姪客徘徊於石村之奇, 送奴要之矣。 非久南村兄主, 率姪客來到, 故療飢後, 卽爲還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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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初二日 가아(家兒)와 이웃에 사는 벗 유하영(柳夏榮)을 데리고 서울을 향하여1) 길을 떠났다. 과역에 이르러 말에게 꼴을 먹이고 상중(喪中)에 있는 와평(瓦坪) 이씨(李氏) 집에서 머물렀다. 率家兒及隣友柳夏榮, 作西笑之行。 至過驛秣馬, 留瓦坪 李哀家。 서울을 향하여 원문의 '서소(西笑)'는 원래 서울 또는 천자가 있는 곳을 그리워한다는 말인데, 여기서는 서울을 향해 간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한(漢)나라 환담(桓譚)이 지은 《신론(新論)》 〈거폐(祛弊)〉에 "사람들이 장안(長安)의 음악을 들으면 문을 나가 서쪽으로 장안을 향해 웃고, 고기가 맛이 좋으면 푸줏간 문을 마주 보며 씹는다.[人聞長安樂, 則出門向西而笑, 肉味美, 對屠門而嚼.]"라는 구절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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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初十日 일찍 출발하여 현치(玄峙)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용산(龍山登) 주막에서 점심을 먹고, 진촌(陳村)을 채 못 가서 김 대비(金大妃)35)의 부음(訃音)을 들었다. 진촌(陳村)에 도착하여 묵었다. 100리를 갔다. 죽산(竹山, 경기도 안성지역 옛 지명) 땅이다. 早發至玄峙朝飯, 抵龍山登酒幕中火, 未及陳村, 聞金大妃喪訃音, 抵陳村留宿。 行百里, 竹山地也。 김 대비(金大妃) 정조의 비(妃)인 효의왕후(孝懿王后, 1753~1821)를 말한다. 1762년(영조38) 10세 때 세손빈(世孫嬪)에 책봉되고,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천성이 온후하고 청렴하여 일생을 검소하게 보냈으며, 생전에 여러 차례 존호(尊號)를 올렸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821년 3 월 9일에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예경자수효의왕후(睿敬慈粹孝懿王后)이고, 능호는 건릉(健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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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初二日 아침을 먹기 전에 경유(景猷)가 사람을 보내서 오라기에 가서 세찬(歲饌)을 먹고 왔다. 종일 한기(寒氣)가 들어 이불을 덮고 누워 있으니, 답답하다. 朝前景猷送人要之, 故往喫歲饌而來。 終日寒粟擁衾而臥, 悶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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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初三日 종일 많은 눈이 내리고 몹시 추웠다. 終日大雪極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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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初四日 날씨가 조금 맑아져 다행이지만 조사(朝士, 조정의 관리)가 사망했다는 기별이 하루에 네다섯 명 아래로 내려가지 않으니 두려움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저녁 무렵 다시 쌀쌀해지면서 비가 내렸다. 日氣稍淸和, 可幸, 但朝士死亡之奇, 日不下四五人, 懍懍不可言。 夕間復爲陰冷而雨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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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四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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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初三日 경모궁(景慕宮)에 가서 이종형님을 만났는데 과거를 본 뒤였다. 오는 길에 금호문(金虎門) 밖으로 들어가 송계순(宋啓舜)과 숙질을 보고 왔다. 往景慕宮見姨兄主, 觀科之後。 來路入金虎門外, 見宋啓舜叔侄而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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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初四日 아침을 먹은 뒤에 과거의 방(榜)이 발표되었는데, 이종형님의 과거에 대한 일이 낙막하니 한스럽다. 이날 주인이 도승지가 되었다. 朝食後榜出, 而姨兄主科事, 落漠可恨。 是日主人, 爲都承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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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十四日 장선(長善)에 머물렀다. 사헌(士憲)의 집 아이, 인서(仁瑞)와 옥계동(玉溪洞)17)에 들어가 수석점(水石店)을 두루 살펴보고 우암(尤菴)의 〈옥계동(玉溪洞)〉 시에 차운하였다.바람과 안개 모두 비단 주머니에 거두었는데(風烟都括錦囊收)맑은 시내는 바위 돌에 굽이쳐 흘러가누나(只有淸溪噴石流)흘러가는 것이야 멈추게 할 수 없나니(逝者縱然留不得)오직 원천18)에 내맡길 뿐이라오(惟能管領發源頭)또 읊었다.빽빽한 나무숲에 기이한 바위 적으나(樹密奇巖小)깊은 산속에 괴이한 새들 많구나(山深怪鳥多)쏟아지는 폭포소리 참으로 장쾌하니(最宜懸瀑響)원망하는 듯 노래하는 듯하구나(如怨又如歌)이어 한 고개를 넘어 안심사(安心寺)19)에 들어가니, '적설루(積雪樓)'라는 세 글자가 있는데, 이는 우옹(尤翁)이 쓴 것이다. 벽에는 점필재(佔畢齋), 율곡(栗谷), 중봉(重峯) 세 선생의 사운(四韻) 시가 있었지만 어수선해서 미처 화답할 수가 없었다. 저녁 무렵에 내려와서 사헌의 집에서 머물렀다. 留長善, 與士憲家兒及仁瑞, 入玉溪洞, 周觀水石店, 次尤菴 玉溪洞韻, "風烟都括錦囊收, 只有淸溪噴石流。 逝者縱然留不得, 惟能管領發源頭。" 又吟, "樹密奇巖小, 山深怪鳥多。 最宜懸瀑響, 如怨又如歌。" 因踰一嶺, 入安心寺, 額有積雪樓三字, 而是尤翁筆。 壁有佔畢齋、栗谷、重峯三先生公字四韻, 而擾未及奉和。 夕時下來, 留士憲家。 옥계동(玉溪洞) 전라북도 완주군 옥계동으로, 운주면 산북리 대둔산과 천등산 두 산 사이 협곡에 있었다. 원천 주자의 시 〈관서유감(觀書有感)〉에 "조그맣고 모난 연못에 한 거울이 열리어, 하늘빛 구름 그림자가 함께 배회하네. 묻노니 어찌하면 저처럼 맑을까, 원천에서 콸콸 쏟아져 내려서라네.[半畝方塘一鑑開, 天光雲影共徘徊. 問渠那得淸如許, 爲有源頭活水來. ]"라고 하여, 학문을 통해 심성을 수양하는 즐거움을 읊었다. 안심사(安心寺)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대둔산(大芚山)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안심사(安心寺) 경내(境內)에 '적설루(積雪樓)'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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